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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기·일제시대에도 영어는 출세의 필수 수단

    개화기·일제시대에도 영어는 출세의 필수 수단

    새 정부가 ‘아륀지’소동으로 영어사교육을 부추기고 혀를 더 잘 굴리기 위해 아이들이 수술대에 내몰리는 시대. 이같은 ‘영어 쓰나미’ 현상은 초등학교에 영어교육이 도입된 1997년부터 이미 그 싹을 보였다. 그러나 ‘개화기·일제시대에도 영어가 곧 권력이자 출세의 필수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은다.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학과 교수는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펴냄) 여름호에 실린 ‘영어 신화의 어제와 오늘’이란 논문을 통해 이같은 주장을 폈다. 일제시대는 흔히 영어교육의 ‘암흑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이는 정확하지 못한 인식”이라고 단언한다.3·1운동 후 일본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고등보통학교의 필수 과목으로 정했다.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부터는 주 32시간 교육 중 외국어 교육시간이 5∼7시간을 차지하기도 했다. 개화기에는 ‘미션스쿨’이 큰 역할을 했다.1885년 배재학당,1886년 이화학당·경신학교 등이 설립되면서 영어교육기관으로 활용됐다. 특히 영어교육이 설립 동기 가운데 하나였던 배재학당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렸다. 그러나 1903년 영어 과목이 정규과목에서 제외되자 학생들이 대부분 다른 학교로 전학 가버리는 일도 발생했다. 박 교수는 “이는 예나 지금이나 영어가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의 가치를 지닌 물신’ 또는 ‘문화자본’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결국 “영어는 근대문명 수용의 도구이자 출세의 수단으로 기능했고, 한국 영어교육의 고질병인 문법 중심·번역식 영어교육도 이때부터 출발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영어 제일주의’ 풍조는 해방 후 3년간 미 군정기에서 극에 달했다. 당시 미 군정청의 ‘조선인에게 고함’이라는 태평양 미군 육군부대 사령부 포고 1호는 “군사적 관리 기간 동안에는 영어가 공식 언어다.”라고 규정했다. 공식 언어는 영어이고 영어 원문이 기준이 되며 조선어나 일본어는 참고자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의 지적대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면에 걸쳐 일제(日帝)에서 미제(美帝)로의 이동이 자연스럽게 완료된 셈”이다. 박 교수는 영어광풍을 잠재우기 위해 “미신이 되어버린 영어신화를 깨고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대학교까지 아우르는 일관성 있는 교육 정책과 과정 개발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권오균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권오균 선생 별세

    일제시대 일본에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권오균 선생이 3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83세. 권 선생은 1943년 일본 나고야 시에서 한인 노동자들과 함께 비밀결사 와룡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같은 해 7월31일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12월18일 나고야 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됐다.2004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유족은 부인 김후자씨와 아들 경출·영출·경구, 딸 한숙. 빈소는 경남 의성 공생병원. 발인 2일 오전 9시.(054)833-3072.
  • [부고]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 별세

    [부고]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 학생·청년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이 3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83세. 김 선생은 1940년 동래중학교에서 함께 수학하던 양중모·남기명·김지훈 선생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졸업한 뒤에는 조선독립당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했다.82년 대통령표창,90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됐다. 유족은 부인 박순이씨와 아들 대하·진하, 딸 희숙씨. 빈소는 경남 창원시 파티마병원. 발인 1일 오전 10시 (055)270-1942.
  • [부고]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이 16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경기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근무 중이던 1943년 3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무기 공급 책임을 맡았다. 황 선생은 이듬해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무기를 밀반출해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인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황인기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미국 LA 자택. 발인은 20일 오전 9시(현지시간).LA 글렌데일 공동묘지.
  • 신채호 선생 국적 찾는다

    정부가 무(無)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 등록부’(옛 호적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관계자는 15일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에 한하여 다른 법령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등록을 창설할 수 있다.’는 조항(제6조 4항)이 신설됐다. 이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무국적 독립운동가 200여명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돼 대한민국 국적을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이들은 지난 1912년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하자 일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거부했고 광복 후 정부는 일제시대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사실상 호적도 없는 무국적자가 됐다. 보훈처는 “일제 강점시 일본 호적 등재를 거부하거나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호적을 취득하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이 가족관계 등록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며 개정안이 마련된 배경을 설명했다. 보훈처는 이어 “가족관계 등록부는 생존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므로 옛 호적법에 따라 호적이 없는 독립유공자는 이 등록부를 만들 수 없었다.”며 “현재까지 등록부가 존재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해 명예 선양과 그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이 개정안은 관련 부처의 의견 수렴을 거쳐 이달 말 또는 다음달 중으로 예고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과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 등이 ‘일제시대에 무국적 상태에 있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사망한 사람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국적법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해를 넘겨 자동 폐기됐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건국 60주년] 갈 곳 없는 도시빈민의 역사

    도시빈민들은 지난 60년 동안 정부의 도시정책, 경제상황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주거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어디로 옮겨가든 생활환경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간답게 살아갈 공간에 대한 권리, 즉 주거권이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빈곤의 악순환은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우리 사회의 도시빈민들은 신석기시대 움집과 유사한 형태의 ‘토막집’에서 생계를 유지했다. 땅을 파고 들어가 위에 지붕만 얹은 ‘비만 피하는’ 형태의 집이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고 피란민들이 부산에 몰려들면서 가파른 산자락으로 판자촌이 형성됐다. 북한 정부수립 직후 월남민들이 서울 변두리에 얼기설기 판자집을 지어 올렸다. 일제의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판자집을 지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박정희 시대 개발제한구역이 지정되고, 도심지역에 대한 정비를 시작하면서 판자촌 빈민들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들어가 일종의 위장주거 형태인 비닐하우스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 방치상태에 놓여 있던 도시빈민에 대한 정부의 강제 수용 정책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1971년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했다. 분양지 무상불하 및 각종 세금감면을 주장했던 빈민들은 광주단지 사무소와 성남파출소를 불태우고 서울시청으로 향하다 경찰기동대에 해산됐다. 1980년대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달동네’에 대한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도시빈민들은 다른 지역의 빈민촌으로 옮겨가거나 다세대 주택의 지하나 반지하, 옥탑방 등으로 옮겼다. 당시 상황을 반영해 도시 서민의 애환을 그린 ‘서울의 달’과 같은 드라마들도 유행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수많은 노숙자를 양산했다. 그해 겨울 수십명의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동사했고, 이를 위한 대책으로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쉼터를 열고 식사지원 등의 생계지원에 나섰다. 2000년대 서울의 도시빈민들은 서울역·용산역·영등포역·청량리역 등 인구 이동이 많은 역사 주변의 쪽방, 혹은 벌집이라고 불리는 단칸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2008년 현재 서울에 있는 노숙자의 수만 3500여명이라고 정부는 공식 통계에서 밝히고 있다. 쪽방·고시원·사우나·만화방·PC방·기도원 등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주거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노숙자는 최소 2만에서 최대 4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여전히 국가의 의료·복지체계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서울의 풍경] 서울시청 본관 이사

    [서울의 풍경] 서울시청 본관 이사

    6일 오후 서울시청 본관 3층 행정1부시장실. 여러 명의 일꾼들이 집무실의 짐을 한보따리씩 들고 내려 오느라 부산히 움직였다. 시청 본관이 이사하는 날이다. 이날 짐을 뺀 사무실은 행정1·2부시장과 정무 부시장, 행정국장, 행정팀 등이다. 이사 작업을 총괄하는 총무과의 직원들도 부지런히 짐을 싸는 모습을 보니 이사가 마무리 단계인 모양이다. 이날 오후에 본관 청사에는 오세훈 시장 집무실과 비서실만 덩그러니 남았다. 7일 오 시장의 책상을 빼내는 것으로 6개월에 걸친 이사가 끝난다. 이로써 82년 동안 이어온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31 시청 본관의 시대가 마침표를 찍는다. ●을지로 별관·서울신문빌딩 등으로 시 본청에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3800여명. 이 가운데 본관에서는 12국 10개과 609명이 근무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체의 6분의1 정도만 본관에서 서소문 별관으로 옮기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청의 여러 별관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몇몇 부서는 지난해 12월 말부터 인근 서울신문빌딩과 대한상공회의소 등 민간 빌딩과 을지로 별관과 남산 별관 등으로 분산돼 이전했다. 이전으로 빈 사무실을 중심으로 유관 부서들을 한데 묶는 2차 이사가 올 1월부터 한달여간 진행됐다. 본관 직원들이 서소문 별관(옛 검찰청사)으로 이동하는 게 3차 이사다. 지난달 15일부터 부서별로 마지막 이동이 진행됐다. 한 총무과 직원은 “넣고 빼기를 반복하는 퍼즐 맞추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면서 “업무공백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마치 야반도주를 하듯 6개월 동안 3개 본부 14국 82개과가 재빨리 이동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체 105개 부서 중 82개 부서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개청 이래 최대 규모의 이사였다. ●82년 영욕이 역사 속으로 퇴장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52호이기도 한 본관 건물은 1926년 일제시대 경성부 청사로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 인민군이 5개월 동안 점령하기도 했다. 제1대 이범승 시장부터 33대 오 시장까지 33명의 시장이 이곳에서 시정을 진두지휘했다. 그 가운데는 이명박(32대 시장) 대통령과 윤보선(3대) 전 대통령 등 2명의 대통령도 있다. 또 자유당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기붕(4대)씨도 있다. 본관은 한때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일본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시는 그러나 역사성을 감안해 등록문화재로 보존하기로 했다. 신청사가 지어지면 본관은 도서관과 전시관, 역사관 등 시민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서울시는 서소문 별관을 본관으로 임시 사용한 뒤 2011년 2월 신청사로 이전할 계획이다. 신청사는 지하 5층, 지상 13층, 연면적 9만 7000㎡ 규모로, 처마 형상에 곡선미를 가미한 디자인으로 꾸며지게 된다. 대규모 이사로 옮겨진 실·국별 사무실의 위치는 다산콜센터(02-120)와 시청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류재혁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류재혁 선생이 27일 별세했다.97세. 충북 옥천 태생인 류 선생은 1939년 7월 일본에 부응하는 기사를 게재한 친일 관료 최병협 옥천군수에게 협박문을 제작해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1년5개월 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지난해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발인은 29일 오전 9시30분,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3묘역, 빈소는 대전 을지병원 (010)7522-8298.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21) 나룻배와 강 건너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21) 나룻배와 강 건너기

    김홍도의 그림 ‘나룻배와 강 건너기’를 보자. 나룻배가 두 척이다. 이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조선의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 원래 조선의 배는 바닥이 넓은 평저선이다. 일제시대 이후 평저선이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보는, 바닥이 삼각형인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다만 유원지 같은 곳에서 두세 사람이 타는 작은 배의 바닥을 보면 모두 평평하다. 안정성을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배가 과연 조선 배의 전통을 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지금도 조선 배의 전통에 따라 평저선을 뭇는 장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림에는 나룻배가 둘이다. 위쪽 나룻배에는 사람 열 둘과 소 두 마리가 타고 있다. 소까지 태웠으니, 꽤나 큰 배다.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자. 고물 쪽의 두 사람은 사공인데, 큰 배라 힘이 드는지 둘이 같이 노를 젓는다. 바로 그 앞에 더벅머리 총각 하나와 맨상투의 상한(常漢)이 앉았는데, 마주 앉아 곰방대를 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분명하다. 두 사내 앞에 아이를 동반한 아낙네 한 사람이 있다. 머리에 올린 것은 옷이다. 이런 식으로 머리에 옷을 올리는 장면은 신윤복의 그림에도 나오니, 이 당시 풍습이었던 것이다. 아낙네의 앞에 삿갓을 쓴 사내가 있는데, 아마도 상한일 것이다. 그 뒤에 갓을 쓴 양반이 있다. 양반은 뒤에 길쭉하게 포장한 것을 지고 있는데,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옆에 소 두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 있다. 등에 잔뜩 진 것은 땔나무다. 서울의 저자에 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 사이에 더벅머리 총각이 곰방대를 물고 있고, 왼쪽 소의 왼쪽에 다시 삿갓을 쓴 사람이 있다. 아마도 삿갓을 쓴 두 사내와 총각은 땔나무를 팔러가는 일행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앉아 있고, 또 그 왼쪽에는 갓을 쓴 양반이 장죽을 물고 있다. 아래의 나룻배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역시 오른쪽 끝에는 사공이 등을 돌리고 노를 젓고 있고, 그 왼쪽에는 망건 바람의 사내가, 그 오른 쪽에는 갓을 쓴 선비가 있다. 삿갓을 쓴 사내도 셋이 있고, 아이를 업은 아낙도 있다. 맨 왼쪽에는 학자풍의 양반이 점잖게 앉아 강을 보고 있다. 배의 왼편에는 빈 길마를 얹은 소가 한 마리, 말이 한 마리다. 그리고 왼쪽 소의 옆에 검은 물체가 보이는데, 역시 말로 보인다. 어린 총각이 말을 돌보고 있다. 두 척의 나룻배는 조선사회의 상하, 남녀를 모아놓고 있다. 김홍도의 다른 풍속화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26명의 인물은 표정이 없다. 무료해 보인다. 인물들이 너무 작게 그려져 그렇다고. 천만에! 화가는 작은 얼굴일지라도 표정을 드러내 보인다. 아마도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말수가 많은 사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갑자기 조용해진다. 더구나 여기는 강 한 복판이다. 탁 트인 넓은 공간, 그것도 일상에서 늘 경험하지 못한 공간에 오면 그저 강물을 바라볼 뿐이다.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 속에서 멍해지는 느낌! 이형록(1808∼?)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또 다른 그림 ‘나룻배’를 보자. 배가 두 척인데, 위쪽의 배는 햇볕을 가리는 포장이 쳐져 있고, 배에 탄 사람은 모두 갓을 쓴 양반들이다. 아래쪽의 배에 탄 사람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토록 다양한 신분의 많은 사람, 그리고 장사꾼과 소와 말까지 태워 동시에 두 척의 배가 강을 건너는 곳이라면 한강의 어느 나루에서 출발한 나룻배일 것이다. 서울의 나루터라면 어디인가. 나는 이것을 밝혀낼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말이 난 김에 한강의 나루터에 대해서 몇 마디 덧보탤까 한다. ●광나루·노량진에 별감 첫 배치 ‘태종실록’ 14년 9월 2일조에 의하면 처음으로 광진(廣津)과 노도(露渡)에 별감을 두었다고 하는데, 곧 지금의 광나루와 노량진이다. 이 기사에서 경기관찰사는 경기도 안의 임진·낙하(洛河)·한강에는 별감을 두고 기찰을 하지만, 금천·노도·광주·광진·용진(龍津)에는 기찰하지 않아 범죄자들이 태연히 드나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은 ‘낙하’를 제외하면 지금 서울 사람들이 잘 아는 곳들이다(노도는 노량진, 광진은 광나루, 용진은 용산이다.‘한강’은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말한다).‘연산군일기’ 11년 5월 9일조를 보면 한강·마포·광진·두모포 등의 나루가 보이는데, 마포와 두모포가 새로 추가된 것이다. 마포는 지금의 마포고,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 앞이다. 다시 ‘선조실록’ 26년 10월 3일조를 보면, 한강 나루 중 남쪽 길과 통하는 광진·한강·노량·양화 나루는 모두 대로(大路)지만 그 외의 삼전도·청담·동작은 폐기해도 상관없는 소소한 나루터라고 하고 있다. 나루에도 랭킹이 있었던 것이다. 한강에 이렇게 나루가 많이 생긴 것은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면서부터이다. 한양이 수도가 되니, 한강은 절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충청도와 강원도를 경유하기에 두 지방의 세금을 받아 옮기는 길이었고, 또 전라도 일대의 세금과 물자를 바닷길로 옮겨서 다시 서울로 운송하는 길이었다. 한강은 또 서울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한강은 동시에 길을 끊는 장애물이었다. 자연히 강을 건너기에 편리한 곳, 또는 꼭 건너야 할 곳에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겼다. 국가에서는 또 그런 곳에 나루를 설치해 관리하기도 하였다. 국가가 관리하는 나루터의 사공은 나라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한다. 이런 나루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나룻배를 타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효종 6년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원래 한강의 동작, 노량, 광진, 삼전도, 양화도, 공암 등 나루터에는 병자년 이전에는 모두 위전을 지급하고 나룻배를 책임지고 갖추도록 했는데, 병자호란 뒤 이 위전들을 한강 가에 사는 사대부들이 강제로 점유한 탓에 뱃사공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먹을 것도 안 생기는 일에 열심일 사공은 없다. 배는 만들지도 않고 수리도 않는다. 결과는 뻔하다. 여행객들이 강을 건널 수 없다. 효종은 다시 위전을 찾아서 주고 경기감사에게 나루터의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명령한다(‘효종실록’ 6년 10월 7일). 그 뒤로도 나루터 관리를 두고 별별 일이 다 벌어졌다. 나루터의 사공은 천민이었다. 나루를 떠날 수 없는 그 직업은 고달팠다. 한밤중에라도 강을 건너는 양반이 있으면 배를 내어야 한다. 예컨대 현종 때는 종실 몇이 궁노를 데리고 한강 너머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가 동작 나루에 와서 나룻배를 빨리 대령하지 않았다고 사공을 마구 구타했다(‘현종실록’ 5년 9월 9일)고 하니, 사공의 괴로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모든 나루터가 국가 직영인 것은 아니었다. 개인이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선(私船)도 있었다. 사선은 관선(官船)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25년 10월 11일조를 보면, 노도·삼전도·양화도의 관선은 무거워 사람과 말이 쉽게 건널 수 없고, 사선은 가볍고 빨라 쉽게 건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선을 이용하지만 사선은 삯이 비싸 백성들이 어려워 한다는 것이다. 한강 이외의 강의 나루에는 보통 근처 마을에서 배를 장만하고 사공을 따로 두었다. 사공은 봄 가을로 삯을 몰아서 받고 따로 뱃삯을 받지는 않았다. 나룻배로 넓은 한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숙종때 선비 80명 한강서 몰사 숙종 44년에 과거를 치르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비들 80명이 한강 나루를 건너다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몰사한 사건이 있었다.“배가 뒤집혀 빠졌을 때 애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강 언덕에 퍼져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숙종실록’ 44년 11월 4일). 나루라고 하면 뭔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루를 건너는 것은 먼 길을 떠나는 것이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나루’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목계 나루의 구름과 바람과 방물장수는 모두 정주하지 않는, 늘 떠나는 것들이다. 나루라, 어쩐지 서러운 말이로구나.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친일 규명은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신경림 누항 나들이] 친일 규명은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초등학교 시절 ‘사슬이 풀린 뒤’라는 논픽션을 읽고 크게 감동한 일이 있다. 저자 오기영은 당시 서울신문 기자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회주의자인 형은 항일투쟁으로 투옥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석방되지만, 끝내 병을 이겨 내지 못하고 죽는다. 그 과정에서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 것은 의사인 그의 아내인데, 그녀 역시 시숙으로부터 감염된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오기영 자신은 일제말까지 신문기자로 일했으니 어떤 기준으로 보면 분명 친일파다. 그때까지 발행이 가능했던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나 일제에 협력하는 신문 이외에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기자 일은 항일투사인 형과 그 동지들을 보호하고 그 열렬한 후원자인 아내를 돕는 데 물질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다행히 그는 월북함으로써 요즘의 친일파 논쟁에서 비켜 설 수 있었지만, 남한에 살아 남았더라면 그 역시 친일파라는 수모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과연 이 단죄를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울릉도’)하고 노래한 청마 유치환 시인은,“오늘 쌀값은 인민의 모가지를 천장에 달아매고/ 나라의 앞날은 안팎으로 어둡기만 하나니.”(‘개헌안 시비’)하고 시와 실천을 통해서 이승만 정권에 저항한 몇 안 되는 시인의 하나다. 비록 결정이 유보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시인조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행위,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증거를 들어 단죄대에 세운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의 형인 극작가 유치진의 명백한 친일행태에 연좌된 성격이 강하지만, 형제가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온 삶의 모습이다. 무용가 최승희의 경우도 그렇다. 일제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그만큼 크게 높여준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그 점에 있어 그는 손기정과 더불어 어느 독립투사 못지않게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한 사람이다. 그의 예술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당시 나라를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로서는 우리 땅을 강점하고 있는 일제당국의 협조나 양해가 필요했을 터이다. 일제에 대한 협력 없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일로 몬다는 것은 일본 선수단에 포함되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손기정 선수에 대한 모독도 된다. 물론 미당 서정주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분명한 친일작품을 남겼고, 그 질이나 양에 있어 쉽게 용납이 안 된다. 그렇지만 그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등 적극적 친일행위자와 동급으로 취급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친일행위나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고 행한 몰지각한 친일행위가 1937년에 이미 “시국은 중대하다. 일본인 조선인의 완전한 결합만이 이것을 감당할 것이다.”(최남선 ‘松漠燕雲錄’)라고 한 확신적 친일행위와 어떻게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미당의 시는 우리 시의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으며 그가 우리말에 끼친 영향도 만만치 않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그의 친일행태와 구별해서 논의되어야 한다. 친일행태를 이유로 그를 우리 시문학사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시문학사는 가난을 면치 못한다. 친일 행위를 덮어 놓고 용서하고 우물쭈물 덮자는 데 나는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일규명에는 포지티브한 자세가 필요하다. 무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생산적이고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지 부정적 자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산 선인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도 있어야 하리라.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한 것은 북쪽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 [주말탐방] 커피의 진화

    [주말탐방] 커피의 진화

    한국인의 커피 입맛이 변하고 있다. 설탕·프림·향 등으로 커피의 쓴맛을 덮어버리기보다 본연의 쓴맛도 즐기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스타벅스코리아 등 대형 브랜드의 꾸준한 성장과 함께 웰빙 바람을 타고 직접 생두를 볶아 커피를 만드는 자가배전(自家焙煎)식 전문숍이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고급화와 다양화를 화두로 국내 커피 문화가 바뀌고 있다. ●소비자의 입맛이 달라졌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 1층 ‘주빈(主賓)커피’는 커피 생콩을 매일 직접 볶아 커피를 만드는 자가배전식으로 유명하다. 자가배전식 커피집 메뉴의 경우 원두 커피가 주류다. 이 커피집 송주빈(49) 사장은 1일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맥주·와인 등 새로운 입맛에 익숙해지면서 커피 입맛도 달착지근한 일명 ‘다방 커피’에서 커피 본연의 쓴 맛을 즐기는 원두 커피로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직접 커피 생콩을 볶아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자가배전식 커피집이 지난 한 해 전년의 두 배 정도인 200여개로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현대백화점 코엑스점 등 대형 백화점에는 자가배전식 커피집이 한곳씩은 자리잡고 있다. 송 사장은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브라질과 콜롬비아 커피가 대부분이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케냐,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코스타리카 등 여러 나라의 커피가 소비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자가배전식 커피는 막 볶아낸 신선함을 추구하는 웰빙 트렌드와 소비자들의 고급화된 입맛이 만나 수요를 늘리고 있다. 송 사장은 “스타벅스 등 비싼 대형 브랜드 커피숍들이 커피 애호가의 입맛을 높여 놓으면서 보다 더 신선한 커피를 찾는 수요까지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브랜드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자가배전식이 볶은 콩을 수입해와 커피를 만드는 대형 브랜드 커피보다 우월하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며 “커피 시장이 커지면서 종류도 다양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커피문화의 뿌리는 숭늉 커피를 모르는 사람에겐 탕약처럼 쓰게 느껴지는 원두커피 시장이 커지는 것은 국내 커피 문화의 일대 반란이다. 이른바 블랙커피로 통하는 원두커피는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나서야 대중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커피에 설탕·프림을 배합해 놓은 믹스 제품이 국내 커피업계 1위인 동서식품 커피 매출의 6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동서식품 홍보팀 안경호 실장은 “우리나라 음식은 맵고 짠 맛이 강한데 그런 맛 뒤에는 단맛이 와야 궁합이 맞는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식사 후 차(茶) 대신 구수하면서도 약간은 달착지근한 숭늉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데다 쓴맛을 원래부터 싫어하는 것도 ‘다방커피’가 오랜기간 득세하게된 원인이란 설명을 곁들였다. 전통적으로 쓴맛을 싫어하는 우리 민족이 세계적으로도 드문 커피 소비국이 된 데에는 설탕과 프림이 잔뜩 들어간 단맛의 커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것은 구한말이다.1895년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처음 마셨다고 한다. 커피와 설탕이 어우러진 단맛에 고종이 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일제시대까지도 커피는 유한계급이 누리던 사치품이었으나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으로 일반 서민의 생활 속으로도 파고 들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 전국에 전기밭솥이 보급되면서 숭늉이 사라졌고, 대신 커피가 식후 짜고 매운 텁텁한 입속을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음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인스턴트 커피도 고급화 바람 커피 시장도 고급화 바람을 타고 있다. 미국에선 비싼 커피로 통하는 스타벅스의 매출이 주춤하다지만 스타벅스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23% 늘어난 1344억원을 기록했다. 순이익은 1997년 한국법인 설립 후 10년만에 처음으로 100억원을 돌파했다. 훼미리마트,GS25, 세븐일레븐 등 국내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롯데칠성의 500원짜리 캔커피인 레쓰비이지만 최근 1∼2년 사이 개당 2000원에 육박하는 고가 캔·컵커피 제품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다. 저가 인스턴트라는 인식의 일반 캔·컵커피 제품이 프리미엄이란 이름을 쓰고 고가 제품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GS25에 따르면 이 편의점에서 취급하는 일반 캔·컵커피 제품의 평균 가격은 지난 2006년 1264원,2007년 1322원,2008년 3월 현재 1437원으로 해마다 100원 정도씩 오르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의 대명사인 동서식품의 맥심 브랜드에서도 아라비카 원두를 100% 사용한 인스턴트 커피를 내놓았다. 기존 맥심모카믹스보다 18%가량 비싸지만 판매량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 집에서 쓰는 값비싼 커피 메이커 시장도 커지고 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100만∼300만원대의 전자동 커피 메이커 제품의 판매량이 올해 1·4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30%가량 늘었다. 이 중 70% 이상이 250만원대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국내 1호 바리스타 공승식 “한국 입맛과 伊 로스팅 커피는 찰떡궁합” 국내 1호 바리스타인 호텔롯데 와인바 레스토랑 공승식(45) 지배인은 1일 “맛있는 커피는 좋은 재료와 바리스타의 손 맛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때문에 바리스타(즉석에서 커피를 만들어주는 전문가)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커피는 커피나무에서 열리는 커피 열매의 씨 부분이다. 열대나 아열대기후 지역에서 잘 자란다. 생산지는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아라비아, 아시아·태평양 등 크게 3지역으로 나뉜다. 로스팅 방법(커피 볶는 방법), 그라인딩 정도(커피의 갈린 입자 정도), 추출하는 방법(자동기계, 반자동기계, 드립 등 뽑는 방법) 등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 바리스타는 커피 생콩을 직접 골라 볶는 단계부터 관여한다. 커피 맛의 전부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 지배인은 “바리스타는 좋은 원두를 고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후각과 미각이 잘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면서 “이런 감각이 잘 발달되려면 몸의 노폐물을 빼주는 게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마라톤 같은 운동을 하면 좋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코리아 1위를 수상한 국내 첫 바리스타로 하루 두 시간 이상씩 뛰는 마라톤 마니아다. 공 지배인은 “와인을 마시는 법이 있듯이 커피도 마찬가지”라며 “이를 전파하는 것도 바리스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에스프레소는 맛이 강하기 때문에 먹게 되면 침이 자꾸 나와 중간에 물을 마셔야 하고, 또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을 때는 잔 중앙이 아니라 잔 내벽을 타고 부어야 에스프레소의 크레마(에스프레소 위의 기름)가 깨지지 않아 제 맛을 즐길 수 있다. ‘커피 값이 너무 비싼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형 브랜드에서 파는 커피는 원료를 기준으로 1㎏이 3만∼4만원이고 1㎏에 130잔이 나온다.”면서 “커피는 원가가 낮아 분명 남는 장사이지만 브랜드에 줘야 하는 수수료가 높고 대부분 요지·대로변에서 위치하기 때문에 임대료까지 감안하면 비싼 것마는 아니다.”고 말했다. 진한 원두커피가 저변을 넓혀가는 등 우리나라 소비자의 커피 입맛도 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좋아하게 될 커피는 어떤 맛일까.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탈리안 로스팅 커피가 적합하다.”면서 “같은 반도(半島) 지형이면서 생선, 마늘, 매운 맛 등 비슷한 음식을 즐기고 급한 성격을 가진 것도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커피는 로스팅 강도에 따라 라이트 로스팅, 미디엄 로스팅, 다크 로스팅 등 크게 세가지로 구분된다. 이탈리안로스팅은 일명 쓴 커피로 알려진 에스프레소용으로 가장 강한 단계의 로스팅을 뜻한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알고 마시면 더 맛있다! ● 같이 먹으면 좋은 음식 커피는 쓰다. 달고 지방이 풍부한 음식과 궁합이 맞는 편이다. ▲초콜릿이 좋다. 초콜릿 케이크, 초콜릿이 들어간 비스킷이나 패스추리도 좋다. 일반 케이크도 괜찮다. ▲견과류도 좋다. 땅콩 아몬드 호두 등 견과류가 쓴맛을 없애준다. ▲우유도 추천된다. 오래 전부터 커피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 방법이 유행했다. 카페라테, 카푸치노, 카페오레 등이 대표적이다. ● 잘 고르는 법 커피는 신선한 것을 골라야 한다. 냄새를 맡아보면 알 수 있다. ▲커피를 볶을 때 기름이 빠져 나오기 때문에 오래 된 것은 퀴퀴한 냄새가 난다. 냄새로 감별하기 어렵다면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것도 좋다. ▲커피콩의 외양도 봐야 한다.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어야 하며 굵기도 있고 계란형으로 예쁘게 생긴 콩이 좋다. 원두의 포장이 쪼그라든 모습이라면 일단 오래된 것으로 봐야 한다. ▲커피 추출방식에 따라 원두를 선택해야 한다. 드립 커피는 가볍게 또는 중간 정도 볶아진 원두가 좋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안 로스팅 원두를 사용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 집에서 맛있게 즐기려면 짧은 시간 내에 소비할 수 있는 만큼만 사서 먹어야 한다. ▲커피는 봉투를 개봉해 공기에 노출되면 맛과 색이 변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산패(酸敗)가 진행돼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없다. 한 번 뜯은 커피는 냉동실에서 최장 2개월 보관된다. ▲커피는 항상 좋은 물을 사용해서 끓여야 한다. 일반 수돗물보다 생수를 쓰면 더 좋다. ▲물은 한 번 펄펄 끓인 후 95℃ 정도로 식혀서 사용한다. 커피의 향은 75℃ 내외에서 가장 잘 느껴진다. <도움말 : 바리스타 공승식씨>
  • 서울소리보존회, 새달 1일 환타지아 공연

    전통 민요, 신민요, 잡가 등을 들려주는 사단법인 서울소리보존회의 ‘환타지아’ 공연이 새달 1일 오후 5시 서울남산국악당에서 펼쳐진다. 이번 무대에서 서울소리보존회 회원들은 일제시대 소리꾼이었던 김추월 명창의 ‘포곡새’와 1950년대 소리꾼 이향림의 신민요 ‘팔도강산’ 등을 부를 예정이다. 강석연의 ‘오동나무’, 김옥심의 ‘봉이김선달’ 등 신민요도 들려준다. 무료공연.(02)353-5525.
  • [내가 바로 일등 공무원] 장종환 마포구 염리동장

    [내가 바로 일등 공무원] 장종환 마포구 염리동장

    “여기 두 칸 짜리 공동변소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20∼30m씩 줄을 섰어. 밤 늦도록 술이라도 퍼 마신 다음 날엔 바지에 똥오줌 지리는 일이 허다했지. 급할 땐 저기 학교 담벼락을 넘어가 해결하곤 했다니까.” 24일 마포구 염리동 상록아파트 입구. 전쟁통에 월남해 1954년부터 염리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김창진(87)옹이 아파트 정문과 맞은편 숭문고 담장을 가리키며 기억을 더듬었다. “화장실 앞이 아침인사 장소였네요. 어색하거나 민망하진 않았어요?” 옆에서 김옹의 이야기를 꼼꼼히 받아적던 장종환(54) 염리동장이 각진 안경알 너머로 두 눈을 반짝이며 되묻는다. 그는 요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골목길이며 우물터 등 마을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로 분주하다. 구술을 채록해 마을의 생활사로 복원하는 일은 그가 구상하는 ‘염리 창조마을’의 핵심사업이다. ‘창조마을’은 염리동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일종의 ‘마을성 회복’ 프로젝트다. 장소에 얽힌 기억을 복원해 정서적 유대의 원천으로 삼고, 활발한 문화·예술활동을 매개로 지역 사안에 대한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처음엔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일개 동(洞)이 나설 일이 아니란 얘기였다.‘어설픈 시민단체 따라하기’라는 냉소도 들려왔다. 농촌이 아닌 도시, 그것도 주민 이동이 잦기로 악명높은 ‘개발 유랑민’의 도시 서울에서 관이 주도한 ‘마을 만들기’가 성공한 전례는 드물었던 탓이다. 장 동장은 우회로를 택했다. 초기에는 동이 주도하되 ‘창조 아카데미’라는 자치학습 프로그램을 열어 주민들을 마을 만들기의 주역으로 길러낸다는 구상이다. 또 주민센터와 지역주민, 전문가로 창조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 마을 만들기의 기획과 실행을 전담시킬 계획이다. ‘창조 마을’의 콘텐츠로 활용할 지역 자원도 풍부한 편이다. 염리(鹽里)라는 지역명이 유래한 옛 소금창고와 소금전 터, 일제시대 일본인 목장의 인부들이 기거하던 마루보시 사택,1960∼70년대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달동네 골목길은 염리동만 갖고 있는 훌륭한 문화 자산이다. 욕심이 있다면 동네에 얽힌 이야기와 영상들을 수집해 지역 생활문화 사료관을 여는 것.‘소금창고’라는 이름까지 점찍어 뒀다. 정감있는 골목길을 발굴해 ‘달동네 테마코스’로 육성하는 것도 고민 중이다. 당장의 바람은 소박하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2세대들에게 ‘고향 염리동’에 대한 추억과 얘깃거리를 남겨주는 것이다. 이같은 바람은 “명절에도 갈 곳이 없다.”는 그의 하소연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지난 1월 부임한 장 동장은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장과 기획예산과장을 지낸 마포구의 터줏대감이다. 그의 고향은 염리동과 맞닿은 공덕동이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김달진 문학상] 김달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김달진 문학상] 김달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월하(月下) 김달진 시인은 생전 평생을 한결같이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며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요 한학자다. 세속의 명리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긴 시인의 삶은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사표(師表)가 되기에 충분하다. 1907년 2월 경남 창원군 웅동(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난 월하는 항일 민족 기독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했다.1926년 서울 경신중학 재학중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세계 추구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교 계광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雜詠數曲)’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인은 ‘시원’‘시인부락’‘죽순’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유점사를 찾는 길에’‘나의 뜰’‘샘물’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항일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계광보통학교가 폐교되자 민족 현실에 절망한 시인은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매진했다. 시인은 1936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불경 연구의 길을 걸었다.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시집 ‘청시(靑枾)’를 발표했다. 유점사로 돌아간 시인은 1941년 ‘불령선인’이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을 때려 눕히고 중국 용정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소설가 안수길을 만나 그가 발간하던 잡지 ‘싹’에 ‘향수’ 등 시를 게재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서울을 떠나 창원 남면중학교 교장, 해군사관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73년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에 ‘한국선시’‘법구경’‘금강삼매경론’ 등 불교서적도 번역했고 ‘장자’‘한산시’ 등 동양고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시작 활동은 뜸해져 문단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역경 작업에 몰두하던 시인은 1967년 ‘임의 모습’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재개한 이후 ‘벌레’‘속삭임’‘낙엽’‘포만’ 등을 발표했다.1983년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碩德)으로 추대된 시인은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와 장편 서사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등을 펴냈다.1989년 6월 ‘한국 한시’(전 3권)의 완간을 앞두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달진 시인은 일제시대부터 제도권 문단의 편입을 거부하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이 시 속에도 오롯이 녹아들어 그만의 순수한 시적 영토를 지켰다. 시인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에도 편벽되지 않고 자연 본연의 모습을 질박한 언어로 담아냈다.“여기 한 자연아(自然兒)가/그대로 와서/그대로 살다가/자연으로 돌아갔다./ 물은 푸르라/해는 빛나라/자연 그대로./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비명(碑銘)’) ●동양고전·한시·불교서적 번역에도 힘써 시인의 시어는 평이하다. 하지만 청아한 정신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하는 시인의 도저한 시적 상상력은 끝간 데가 없다. 시인의 작품은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리는 이 시대에 인간 본연의 순정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마력의 힘을 발휘한다. 시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관조와 종교적 초월의 경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곧 우리 시사(詩史)에 면면히 이어져온 순수 서정시와 동양적 미학을 접목,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려는 몸짓이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의 전개, 그것이 바로 월하 시의 요체다. 김달진문학상 운영위원인 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시인은 “월하의 시세계는 서구의 이미지스트적 감각과 한국의 토속적인 자연, 동양사상의 합일로 요약된다.”면서 “시인의 작품들이 은둔생활에 가까운 생활로 대부분 묻혀 있는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려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조선후기 고서 1400여종 美서 발견

    조선후기 고서 1400여종 美서 발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후기 고서 1400여종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연구팀에 의해 처음으로 정리됐다. 이번에 확인된 고서 중에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유일 필사본’이 여러 권 포함돼 있어 조선후기 고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고려대 심경호(53) 교수는 16일 연세대에서 열린 BK21 사업단 초청강연에서 ‘버클리대학의 한국 고서들’이란 주제로 발표하면서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한국 고서 1400종의 목록을 공개했다. 목록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귀(李貴)가 당시 조선을 괴롭히던 후금(청나라)에 대한 대처 방안을 기록한 ‘이충정공비어방략(李忠定公備禦方略·필사본·3권1책)’ 등 국내에는 없는 고서가 모두 255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정리된 책들은 1920년 미국의 보험회사 사장이었던 카펜티어가 UC버클리에 기부한 기부금으로 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UC버클리는 동아시아학 연구를 위해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한·중·일 고서를 세계 곳곳에서 사들였다. 심 교수는 “확인된 고서들은 인조반정 전후의 조선시대 재편과정을 연구해 볼 수 있는 국내 첫 자료이며, 조선후기 정치·문화사와 당시 출판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목판본으로 국내에서는 소장처가 알려지지 않아 더욱 의미가 있다.”면서 “일제시대 중추원 보고서 11종도 국내에서 연구가 안 된 분야이기 때문에 요긴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47)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유일본 등은 연구가치가 뛰어난 자료”라면서 “UC버클리에 한국 고서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종종 회자됐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가 있다고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4) 고누와 나무하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4) 고누와 나무하기

    김홍도의 작품 ‘풍속화’다. 그림 오른쪽에는 상투를 튼 어른이 나무에 기대어 곰방대를 물고 물끄러미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보고 있고, 그림 중앙에는 아이 둘이 웃통을 벗고 놀이에 한창이다. 그리고 그 왼쪽에 아이 둘 역시 구경을 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에는 집채만 한 나뭇짐을 얹은 지게 둘을 언덕에 기대어 놓았고, 그 왼쪽에 다시 더벅머리 아이 하나가 나뭇짐을 지고서 오고 있다. ●아무 곳에나 말판 그리고 놀이… 방식도 다양 이 그림은 고누 두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누는 흙 마당이나 종이 등 아무 곳에나 말판을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많이 잡아먹거나, 상대의 집을 차지하거나,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이기는 놀이다. 지방에 따라 꼰, 고니, 꼬니, 꼬누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그 놀이의 방식도 다양해서 우물고누, 네줄고누, 밭고누, 호박고누, 샘고누, 강고누, 줄고누, 팔자고누, 십자고누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장기와 바둑은 놀이하는 판이 정해져 있지만, 고누는 다양한 이름만큼 말판의 종류도 많고, 노는 방식도 다양하다. 또 말판이 간단하여 언제 어디서나 둘 수 있었다. 필자 역시 어릴 적에 적잖이 즐겼다. 한데 이 그림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그림의 고누판은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속에 다시 십자를 그리고 있는데 이런 고누판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사실 이 그림은 윷판으로 보인다. 윷가락이 없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둥근 원형 안에 작은 물건 넷이 보이는데, 이것이 윷일 수 있다. 윷은 꼭 나무로 길게 만든 것이 아니라도 된다. 나는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작은 고동 껍데기를 윷가락 대신 쓰는 것을 보았다. 땅에 살짝 굴려도 도 개 걸 윷 모가 나왔다. 이제 나뭇짐 쪽으로 말머리를 옮기자. 도시에서 나고 자란 50대 이하의 세대는 나무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것이다. 필자 역시 나무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 그리고 주변의 시골출신들은 나무 하러 다닌 기억을 종종 떠올린다. 나무가 없으면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없었으니, 나무는 필수적인 생존 수단이었던 것이다. 필자의 직장인 부산대학이 있는 부산 동래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때부터 있던 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일제시대에 온천장을 소개하는 사진엽서가 만들어졌는데, 사진 속의 금정산을 보면 완전히 민둥산이다. 왜냐고? 땔감 때문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산이 우거진 것은 연탄을 연료로 쓰면서부터일 것이다. 물론 적극적인 식목정책도 한몫을 했지만. 김홍도가 살던 조선시대는 나무 하기가 쉬웠던가.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환경이야 더 깨끗했겠지만, 국토가 온통 나무로 뒤덮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무를 할 만한 곳은 모두 개인의 소유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 개인 소유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었다.‘경국대전-공전’을 보면 나무하는 곳, 즉 시장(柴場)이란 곳에 대한 흥미로운 조항이 있다.‘시장’은 땔나무를 하는 곳으로 관청에는 땔나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관청마다 일정한 면적으로 땔나무 하는 곳을 분배해 준다. 예컨대 봉상시·상의원·사복시·군기시·예빈시·내수사에는 모두 사방 20리, 내자시·내섬시·사재감에는 15리, 사포서에는 5리의 ‘시장’을 지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뒷날 문제를 일으킨다. 명종 9년 12월10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의 일부를 보자. 서울 주위 30리의 꼴과 땔나무가 있는 곳은 모두 세도가가 독점하여, 베어가는 것을 금지합니다. 때문에 근방의 나무를 해서 파는 사람들이 그 위세에 눌려 손을 대지 못하고 개울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 가기 때문에 너무나 고생스럽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나무 값이 극히 비쌉니다. ●나무 할 만한 곳은 모두 권세가들이 독점 권세가가 서울 근처의 나무를 할 만한 곳을 모두 독점해 버려 나무 값이 뛰어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권세가를 한 명 밝히자면, 문정왕후의 오라비였던 윤원형이 있다. 박순(1523∼1589)의 상소에 의하면, 윤원형은 수락산 일대를 독차지하여 주민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면서 주민들을 내쫓은 뒤 시장(柴場)을 만들고는 그곳에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 일부를 세금조로 바치게 했다고 한다. 원래 수락산은 서울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나 땔나무를 하거나 꿩이나 토끼를 잡기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산이었는데, 이것을 윤원형이 독점했던 것이다. 한데 이것은 윤원형과 같은 일부 권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훨씬 전부터 시장의 독점은 있어왔고, 조선후기에도 사정은 동일하였다. 성종 연간의 인물인 서거정의 시에 나무꾼을 둘러싼 꽤나 진지한 시가 한 편 있다.‘토산(兎山)의 시골집에서 농부의 말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긴 시를 남기고 있는데, 나무꾼의 하소연을 옮겨 적은 것이다. 앞부분을 요약해 보자. 이 농부는 불암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우 살아간다. 그런데 뜬금없이 간교한 자의 토지 소유권 소송에 걸려든다. 교활한 아전들의 협잡질로 오막살이 한 채만 남기고 땅을 죄다 빼앗기고, 근근이 남아 있는 묵은 땅을 경작해 보지만, 흉년까지 든다. 세금을 낼 형편이 아니건만 아전들은 날마다 찾아와서 세금을 내 놓으라 닦달이다. 급기야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있자니, 굶주린 뱃속에 불이 붙는 듯 아리고, 얼굴빛은 날마다 까맣게 타들어간다. 그래서 나무를 해다 팔기로 한다. 이제 나무꾼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땔나무 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면 산중에 땔나무 무성하지요 집에 누런 송아지 한 마리 있지만 한 해 내내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해 나뭇짐 나를 수 없기에 한 발짝에 두 번씩 꼬꾸라지며 걸음걸음 내가 지고 이고 나르니 두 어깨살은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요 해 떨어질 녘에야 성으로 들어와서는 길에서 만난 야박한 장사치가 푼전까지 다투며 나무 값 후리치니 쌀값은 비싸고 내 품삯은 헐하기 짝이 없네요 농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한 짐 해서 나오는데, 뼈만 남은 몸이라 등에 지고 오자니 그것도 힘이 든다. 시내에 들어와 팔려하지만, 야박한 장사치가 값을 후리치니, 품삯도 안 나온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래도 집에 있는 열 명의 식구 밥 달라고 소리치는 걸 생각하면 한 되든 한 말이든 어찌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주린 창자를 달래얍지요 집에 돌아와 마누라 자식놈과 마주 앉아 차츰 죽이라도 먹게 되었지만 이렇게 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삶이 정말 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나마 나무를 해 팔아 처자식과 점차 죽이나마 먹게 되었다. 하지만 웬일인가. 사람 고생은 끝이 없다. 얼마 전부터 권세가의 힘이 나무며 돌까지 미쳐 산이란 산은 죄다 제 땔나무 밭으로 차지해 사람들 나무 하고 꼴 베는 것을 막고부터 서쪽 집은 땔나무 한 번 한 죄로 매질 마구 하여 피가 철철 흘렀고 동쪽 집은 소가 밭을 밟은 죄로 아비 아들 나란히 묶여 갔지요 아무런 이유 없이 백성의 재물 약탈해 낫과 도끼까지 모두 빼앗아 갔지요 ●땔나무 한번 잘못하면 가혹한 私刑 힘 있는 권세가의 힘이 나무와 돌에까지 미쳐 산마다 줄을 치고 자기 땔나무 밭으로 삼는다. 만약 그 독점 공간에 들어가 땔나무를 하게 되면, 찾아와서 피를 흘릴 정도로 가혹한 사형(私刑)을 가하고, 낫과 도끼까지 빼앗아 갔던 모양이다. 시를 지은 서거정은 이 비극적 사태를 보고하면서 시의 끝에서 “나는 지금 이 말을 듣고 나서/ 한밤중에 홀로 흐느끼어 우노라”라고 깊은 동정을 표했지만, 조선조 말까지 백성들의 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김홍도의 이 한 장의 그림에도 뜯어보면, 사실 조선조 백성들의 삶과 역사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조선시대 전주판관 집무실 전주부 동헌 74년만에 복원

    일제에 의해 매각됐던 조선시대 전주판관의 집무실인 전주부 동헌(東軒)이 전주로 다시 돌아온다.1일 전북 전주시에 따르면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 있는 옛 동헌의 소유주 류인수(74)씨가 이 건물을 시에 기부함에 따라 한옥마을 전주향교 인근에 이 건물을 이전, 연말까지 복원하기로 했다.전주시내에 있었던 이 건물은 일제시대인 1934년 전주 류씨에게 매각돼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진 뒤 제각으로 사용되다 74년만에 다시 전주로 돌아오게 됐다.동헌은 애초 7칸이었으나 전주 류씨 가문에서 제각으로 이축하는 과정에서 6칸으로 축소됐고 내부 공간이 제실 용도로 개조돼 아쉬움이 남는다.동헌은 전라 감영의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日요미우리 “뉴라이트 교과서, 일제 찬미”

    日요미우리 “뉴라이트 교과서, 일제 찬미”

    “한국 교과서가 일제시대를 찬미하고 있다.” 유미우리신문이 최근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출간한 역사책 ‘대안 교과서’에 대해 “일제시대를 인정하는 교과서”라고 29일 지면과 30일 영문 인터넷판을 통해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의 새로운 교과서가 일제시대를 찬미하고 있다.’(New S. Korean textbook lauds aspects of Japanese rule)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 교과서는 일제시대에 대한 반감을 선전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러나 이 새 교과서는 당시 근대화에 필요한 능력을 일본에게 배우는 시기였음을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또 신문은 대안 교과서가 일본에 의해 철도와 도로 등이 개발된 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전하면서 “일본의 지배가 한반도의 자유 시장경제를 가져왔다.”는 교과서의 내용을 인용했다. 이어 “이 교과서는 한국의 대학 교수들이 포함된 ‘뉴라이트’라는 집단에서 만든 것”이라며 지식인들이 만든 교과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끝으로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의 일부 언론이 이 대안 교과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면서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을 인용해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의 첫걸음”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요미우리 영문판 인터넷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공직자 재산공개-입법·사법부] 법조계 이색 재산

    법원과 검찰 등 법조계 고위 간부들이 공개한 재산 중에는 병풍이나 조선시대 서첩, 조각품, 저서 저작권 등 이색 재산이 눈길을 끌었다. 손용근 대구고법원장은 병풍 등 예술품 10점을 1억 4000만원으로 신고했다. 해강 김규진의 ‘묵죽도(8폭 대병·일제시대)’, 이당 김은호의 ‘화조도(8폭 중병·1960)’ 등 병풍 다섯 점과 임직순의 ‘무등산이 보이는 풍경’(40호·1960년대) 등 서양화, 창암 이삼만의 서첩, 퇴계 이황의 간찰집 등 조선시대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황한식 대구고법 부장판사도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회화 등 11점을 1억 7700만원에 신고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김태의 ‘정물(120×120㎝·1991)’, 전뢰진의 ‘가족(54×32×70㎝·1994)’ 등이었다. 김종대·목영준 헌법재판관은 각각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렬의 유화 ‘물방울(115×80㎝)’과 여운 김용진의 동양화 ‘모란(35×30㎝’을 신고했다. 부인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법조인도 있었다. 최상열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부인은 3.5캐럿짜리 에메랄드 반지(1700만원)와 1.7캐럿짜리 다이아몬드(1700만원)를 갖고 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박영수 서울고검장은 1캐럿짜리 사파이어와 진주목걸이를, 명동성 서울중앙지검장은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김수민 부산지검장은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부인 명의 재산이라고 적었다. 금도 신고대상에 포함됐다. 손용근 대구고법원장은 공로표창 부상품 등으로 받았다며 ‘24K 금 712g’을 1754만원에, 이승구 동부지검장은 ‘24K 금 656g’을 1837만원에 신고했다. 골프회원권을 소유한 법조인 25명이었다. 하철용 헌법재판관은 골프회원권 3개를 5억 3600만원으로, 최상열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골프회원권 3개를 6억 4200만원으로 신고했다. 김희옥 헌법재판관은 지난해보다 7억 5700만원 늘어난 38억 5300만원을 신고하면서 지난 86년 펴낸 ‘형사소송법연구’와 98년 저술한 ‘판례형사소송법’ 등 저서 9권에 대한 저작권도 신고내용에 넣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목욕탕·모텔 새 온천표시 금지

    온천은 물론, 목욕탕이나 숙박업소 등에서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온천표시가 24일부터 전면 교체된다. 행정안전부는 이날부터 이같은 내용의 온천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시행한다고 23일 밝혔다. 기존 온천표시는 일제시대부터 사용돼 왔으며,1981년 온천법 제정 이후 온천 허가를 받은 자에게만 사용을 제한했다. 현재 온천법에 따라 허가를 받은 온천장은 전국적으로 477곳이다. 하지만 목욕탕·모텔 등에서도 관행처럼 사용하면서 이용자들의 혼란만 커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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