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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다큐 줌인] ‘하우스 맥주’ 나들이

    [포토 다큐 줌인] ‘하우스 맥주’ 나들이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하얀 거품 가득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유독 그리웠던 여름도 끝물이다. 맥주의 유래는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벽화에 인류가 맥주를 만들어 마신 흔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클레오파트라가 맥주 거품으로 머리를 감았다는 등 고대부터 인류는 다양하게 맥주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는 인디아페일에일, 람비크, 헤페바이젠, 둥켈, 바이젠비어, 필스너, 슈타우트, 슈바르트, 엑스포트, 라거 등 수많은 종류의 맥주가 다양한 방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미국의 소규모 맥주 생산 업체는 2000개 정도이고,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는 중소 규모의 맥주 생산 업체가 1300곳에 이르며 제품도 1000개가 넘는다. 일본에는 지비루라 불리는 소규모 맥주 업체가 있는데 240곳 정도 된다. 우리나라 맥주는 대기업이 생산하는 라거가 대부분이다. 최근 국산 맥주와 북한의 대동강 맥주가 비교되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맥아가 67% 이상 포함돼야 맥주로 인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맥아 함량이 10% 이상이면 맥주로 인정된다. 성분비는 기업 기밀에 속해 맥주 맛에 대한 소비자의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이러한 라거 일색의 국내 맥주 시장에 내년부터 소규모 제조 업체의 맥주가 나온다. 내년부터 이들 업체도 일반음식점과 마트, 편의점에 맥주를 유통할 수 있게 돼 맥주 애호가와 소규모 생산자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맥주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경기 김포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쌀과 인삼을 원료로 만든 김포인삼쌀맥주가 이미 외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관광객을 상대로만 판매했는데 김포 지역을 시작으로 농협 유통망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망을 넓힐 계획이다. 전북 익산 벼맥류연구소에서는 보리 종자를 받아 수확하는 등 국내 농특산물을 이용해 경쟁력 있는 한국 맥주 내놓을 준비가 한창이다. 일제시대 맥주 제조 면허를 제외한다면 세븐브로이는 한국의 맥주 제조 면허 1호라 할 수 있다. 이 회사도 국내 맥주시장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인디아페일에일, 필스너, 슈타우트 등 다양한 맥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맛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전남 순창에서는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가 독일식 맥주 생산 설비를 갖추고 양산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국내 맥주들을 접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세금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대부분 알코올 도수를 기준으로 세금(주세)을 부과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맥주의 알코올 도수가 4.5도로 저도주임에도 35~40도에 이르는 양주와 같은 72%의 세금을 부과해 왔다. 막걸리의 경우 도수는 맥주보다 조금 높은데도 전통주 육성 차원에서 세율은 5%에 그치고 있다. 최근 들어 맥주에 대한 과세표준을 20% 낮췄지만 업계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주세의 면세 한도가 외국에 비해 낮아 중소업체의 원가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차보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장은 “중소기업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세금 혜택이 주어지는데 맥주는 대기업보다 3~4배 높다”면서 “세금 단계를 다양화해 소규모 맥주 제조 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은 주세가 종가세인데 반해 일본은 종량세다. 유통 구조도 한국의 중소 맥주기업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세븐브로이 김교주 이사는 “대기업에서 수입하는 외국산 맥주는 대형 마트와 소형 슈퍼마켓 등에 직접 납품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도매상을 거쳐야 한다. 유통 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만든 제도지만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 중소 업체의 맥주는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외국산 맥주의 시장 점유율은 10%에 이른다고 한다. 자유무역협정(FTA)의 영향으로 외국산 맥주 가격이 떨어진 측면도 있겠지만 국민들의 다양한 입맛에 맞추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설비와 양조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나아가 세계 유명 맥주들과 견줘 전혀 손색없는 우리나라만의 맥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운동장 대신 숲을 품은 학교… 도심 속 아이들의 ‘힐링 놀이터’

    운동장 대신 숲을 품은 학교… 도심 속 아이들의 ‘힐링 놀이터’

    막연히 나무와 꽃이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지위 높은 사람들이 학교에 순시 왔을 때 심은 ‘기념식수’가 출발점이었다. 지금은 자투리땅이 거의 남지 않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시의 허파 기능을 할 ‘마지막 희망’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학교에 조성된 숲, 학교숲 이야기다. 최근 ‘탄소지킴이 도시숲’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한 산림청은 학교숲의 온실가스 저감 효과에 대해 큰 기대를 내비쳤다. 서울시만 해도 전체 초·중·고교가 1341곳이고, 구마다 학교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 ‘녹색 환경’이 조성될 경우 전체적인 산소 배출 효과뿐 아니라 미세먼지 흡착, 소음감소 및 차단과 같은 지엽적인 효과도 기대된다는 설명이다. 산림청은 건물·운동장과 몇 그루 나무, 작은 화단이 있는 일반 학교의 평균 탄소 저장량은 9887㎏C(건조된 목재 1㎥당 탄소저장량은 250㎏C)인 데 비해, 나무와 연못 등 학교숲이 조성된 학교의 탄소 저장량은 1만 412㎏C로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산책로 등 대규모 식재를 통해 학교 공원화를 하면 저장량은 1만 651㎏C로, 학교숲과 학교공원화를 함께한다면 저장량은 1만 1176㎏C로 증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런 연구 결과에 힘입어 올해 15년째인 학교숲 조성 운동이 재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운동장 vs 학교숲’ 논쟁에서 학교숲에 대한 지지가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산림비전센터에서 열린 ‘학교숲이 미래다 포럼’에서 참석자들은 학교숲 조성 초기와 달라진 학교 분위기를 설명했다. 오창길 인천구산초 교사는 “조선시대 향교와 서원에는 대개 오래된 큰 나무가 위용을 과시하며 상징물 역할을 했지만, 일제시대 이후 학교는 건물과 운동장으로 꾸며졌다”면서 “운동장이 들어선 데에는 1895년 교과과정에 병식체조를 도입한 학교령이 공포된 것과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김인호 신구대 환경조경과 교수도 “학교숲 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은 운동장에 대한 막연한 신화(神話) 때문으로, 학교숲 조성 대신 운동장에 인조잔디와 트랙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면서 “2000년대 중반 인조잔디를 깐 학교들은 최근 낡아서 새로 시공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반면 학교숲은 환경적 효과뿐 아니라 교육적인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운동장을 대체할 실내 체육관 건립, 자투리 숲 조성기술의 발전도 학교숲 조성에 동력을 보탰지만, 인성교육뿐 아니라 교과교육에서도 유용하다는 점이 학교숲 확산을 이끌었다. 학교숲 운동을 해 온 ‘생명의 숲’은 학교숲이 1999년 700여곳에서 최근 3000여곳으로 늘었다고 집계했다. 허윤선 서울대 조경학과 박사는 “학교 안에 숲이나 텃밭을 조성하거나 담장을 숲으로 대신하는 등 여러 가지 학교숲 조성 방식이 있다”면서 “일단 학교숲이 조성되면 수업시간이나 방과 후 활동 시간에 생태체험 교실을 운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방과 후에는 주민들의 운동공간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외에서도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해 녹색학교를 만드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면서 “영국의 지속가능한 학교 프로그램은 학교를 중심으로 개인에서부터 타인과의 관계, 지역과의 네트워크 형성에 이르는 범위를 다루며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인식을 키워 준다”고 강조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야사로 엮어낸 당대의 꼬집음과 웃음 일제시대 굴절상 고스란히…

    식민지 시대 야담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냈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식민지 시기의 야담이 보여주는 다채롭고 역동적인 양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서가 한 권도 없다는 점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책이 전달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하려면 야담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만큼 야담은 이제는 잊힌 개념, 지칭할 대상을 잃어버린 사어(死語), 문학 쪽 전문가들이나 가끔 입에 올리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야담은 간단하게 말해 민간에 떠도는 야사를 바탕으로 꾸민 이야기로, 태생부터 주변성을 보이지만 일반 대중의 삶과 가깝고 당대의 굴절과 변화상을 예민하게 담고 있다. 야담은 식민지 라디오 시대의 총아였다. 라디오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이른바 요즘 말로 ‘엔터테이너’들이 나타났다. 당시 라디오라는 첨단문명을 누구보다 발빠르게 수용한 대중문화인은 윤백남이었다. 그는 제2조선어 방송의 초대 과장을 역임하면서 ‘라디오 야담’을 개척해 야담의 오락성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월간 야담’이라는 야담잡지를 조선에서 처음 발간해 다른 대중잡지들을 따돌리고 월등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이 책의 3장은 야담의 프로파간다(선전 또는 선전 도구)를 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야담이 전시 분위기를 반영하여 체제내 프로파간다로서 어떻게 재조직되었는지를 이인석의 사례와 혈서 쓰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이인석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 제도가 실시된 이후 중국 전선에서 사망한 첫번째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이다. 그가 죽은 뒤 벌어진 대대적인 추모 열기는 1932년 상해사변에서 사망한 일본의 ‘3용사’에 비견될 만했다.전쟁미담의 전성시대는 또한 혈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 수많은 혈서의 사연이 대중매체를 수놓았고 야담은 대중 선동에 나름대로 한몫을 한다. 일본의 전쟁 확대로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이 병사로 강제 차출됐고, 이에 따른 대중 계도가 불가피하게 됐다. 여기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야담이었다. 책에 실린 다양한 신문과 잡지의 기사는 독자들에게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해주기 위한 것으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현대적 표기법으로 고쳐졌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책을 읽기는 쉽지 않다. 우선 어려운 단어들이 눈에 많이 띄고, 식민지 시대가 오늘날과는 너무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밥만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가진 것을 모두 사회에 베풀고 떠나려고 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이 남지만 그래도 이북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삶이었지.”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6·25 참전 유공자가 그동안 모은 전 재산 900여만원을 사후(死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주인공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허름한 옥탑방에서 홀로 사는 최귀옥(81)옹. 최옹은 5일 옥탑방에서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 관계자와 만나 이를 상의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인천에서 일용직 건설노무자로 일하던 최옹은 군대에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듬해 입대했다. 2군단 소속으로 화천 전투에서 북한군과 싸웠다는 최옹은 당시 군대 야학에서 글을 깨우쳤고, 제대 후에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가정불화로 부인, 자식들과 헤어지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최옹은 이후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16년간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활하고 있다. 최옹이 폐지를 모아 얻는 수익은 한 달에 2만원 정도. 그나마 요즘엔 몸이 불편해 한 달 이상 일을 못 하고 있다. 6·25 참전 수당 15만원과 구청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합해도 월 30만원이 채 안 되는 빠듯한 살림이다. 최옹은 이 가운데 매월 2만원을 6·25 참전유공자회에 회비로 납부하고, 폐지를 통해 얻은 수입은 쓰지 않고 따로 모아 뒀다. 최옹은 “나 자신도 어릴 때 아버지 없이 자라서인지 수십년 전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밝혔다. 최옹의 나눔은 6·25 참전용사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옹은 정월이 되면 구청에서 지급한 쌀의 절반을 6·25 참전유공자회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참전용사에게 보낸다. 3년째 자신의 몫을 나눠 온 최옹은 “난 밥은 먹고 살지만 형편이 더 안 좋은 참전 용사도 많다”면서 “6·25 참전 수당 15만원은 생계를 잇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안개 속에서 포탄이 떨어지는데 피란민들은 보따리를 메고 갈팡질팡하고 어린 아이들은 울부짖고 난리도 아니었지. 우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열악한 총을 들고 지리산에 숨어 있는 북한군과 싸우느라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 6·25 참전용사인 이덕회(82)옹은 3일 서울 강북구 번동 자택에서 손자·손녀뻘 되는 인근 화계중학교 2학년 5반 학생 12명에게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경청하던 학생들은 때때로 “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화계중학생 754명에게 이날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단법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가 주관한 ‘6·25 참전 영웅과 함께하는 세대 공감 친구데이’ 행사를 통해 평소 보기 힘들었던 고령의 6·25 참전용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0여명씩 한 조를 이뤄 각각 서울 소재 참전용사 69명의 자택으로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고 청소와 설거지, 안마 등의 봉사 활동을 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받는 참전수당 월 19만원으로 겨우 살아간다는 이옹은 “대학생들도 6·25의 의미를 잘 모르는 요즘 중학생들이 이렇게 찾아와줘 고맙다”면서 “그때 나라를 빼앗겼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김다솔(14)군은 “집 청소를 깨끗이 해드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온다고 할아버지께서 청소를 다 해 놓으셔서 죄송스럽다”면서 “어르신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반 황건희(14)군은 “평소 집에서 어른들께 듣지 못했던 6·25 전쟁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니 신기하다”면서 “저희도 커서 군대에 가겠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진광 인추협 대표는 “나라의 소중함과 어르신에 대한 고마움을 새로 깨닫게 돼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인성교육이 될 것”이라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위기의 한국사 교육] 역사 인식 없는 청소년들

    [위기의 한국사 교육] 역사 인식 없는 청소년들

    ‘1020세대’의 빈약한 역사 인식이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최근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본 심사를 통과하면서 이념 논란이 격화하는 등 한국사 교육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경고음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서울신문은 총 4회에 걸쳐 원인과 쟁점, 대안과 해법 등을 짚어 본다. 청소년들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무관심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한국사의 처지와 맥을 같이한다. 초·중·고교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는 국·영·수 등 주요 과목에 치여 달달 외워야 하는 암기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10일 서울신문과 입시전문업체 진학사의 설문조사 결과 고교생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지만, 정작 자신은 수능에서 한국사를 택하지 않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외울 것이 많다’거나 ‘등급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69%(349명)를 기록한 반면 수능에서 한국사를 선택하겠다는 응답은 33%(169명)였다. 이 같은 이중적 태도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역사 과목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수능 사탐영역이 선택과목으로 돌아선 2005학년도부터 수능에서 한국사를 선택하는 수험생 비율은 해마다 줄었다. 같은 시기 서울대가 지원 자격으로 한국사 필수 선택을 제시하면서 중·하위권 학생들의 한국사 기피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유명 학원의 입시 설명회에서는 “서울대 안 갈 거면 한국사를 택하지 마라”와 같은 얘기가 중요한 입시 전략처럼 소개되고, 일선 교사들도 이를 그대로 따라가는 실정이다. 서울의 인문계고 3학년 담임교사 최모(32·여)씨는 “한국사를 택하는 6~7% 남짓한 인원 가운데 대부분이 상위권에 속해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확 내려간다”면서 “이런 사정을 아는데 학생들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4학년도 수능부터 사탐 최대 선택과목 수가 2과목으로 줄어드는 것도 한국사의 입지를 좁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수능까지 한국사와 근현대사를 포함해 최대 3과목이었던 선택과목이 2개로 바뀌고 한국사와 근현대사가 한국사 하나로 통합되면서 학생들의 선택 폭이 더욱 줄었다. 선택과목 수가 2과목인 상황에서 범위가 넓고 외울 것이 많은 한국사나 동아시아사를 택하는 학생들이 극히 적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학기에 배우는 과목 수를 줄여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로 2011년 도입된 집중이수제도 역사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떨어뜨린 요인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역사를 한 학기에 모두 끝내려니 배경을 이해하기도 전에 사건을 외우는 데 바쁘고, 기본 상식조차 쌓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85%(430명)의 학생들이 ‘고려’라고 답했지만, 고조선(6%·31명), 고구려(5%·25명), 조선(4%·20명)이라는 오답을 내놓는 학생들도 많았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을 고르는 질문에는 95%(481명)의 응답자가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라고 답했지만 5%(25명)는 단재 신채호 선생을 꼽았다.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올해 수능부터 사탐 선택과목이 2개로 줄어 한국사 기피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우려된다”면서 “사탐의 선택 과목화와 집중이수제 등이 학업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인문·사회학적 지식을 떨어뜨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서대문형무소는 친일과 반독재의 살아 있는 현장이죠. 하지만 예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과 민주화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에서 ‘친일인명사전 학교보내기’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수(47)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방문객 중 관심을 갖고 운동의 취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어서다. 자신을 86학번이라고 소개한 김 위원은 “시위에 나서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꼈던 우리 세대와 요즘 ‘1020세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오는 10월이면 문을 연 지 105주년을 맞는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이 형무소는 1998년 11월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관람객 수는 57만 9115명, 이 가운데 외국인도 6만 2888명으로 집계됐다. 박경목(42)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주로 부모님과 함께 체험 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과 단체 관광객이 많다”면서 “외부 강연을 나가다 보면 10·26이나 5·18은 물론 경술국치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누가 저격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휴일인 지난 9일 가족들과 함께 충북 청원군에서 상경했다는 윤종필(45)씨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직접 찾았다”면서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등한시하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서울시나 문화재청이 아닌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할한다는 점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춰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대문형무소는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 9만여명이 투옥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천안 독립기념관만큼이나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곳은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87년 10월까지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로 운영됐다. 박 관장은 “개발독재시대 정부의 역사인식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역사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체험장으로서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널리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정치의 눈으로 본 문란한 풍속이란…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열린 첫 국무회의. 이 자리에서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풍기문란에 대한 법적 통제가 잠시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정부가 과다 노출이나 구걸 행위 등에 범칙금을 부과하는 규정이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것 아니냐는 반발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가가 머리와 치마 길이를 간섭하던 1960~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을 떠올렸다. 자유권 침해, 사회적 약자의 피해 등을 우려한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경찰은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과다노출에 대한 처벌은 원래 있었다”는 해명이었다. 국가의 통치권이 시민의 일상과 풍속 처벌에까지 이르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경범죄처벌법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4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때도 비슷한 맥락의 처벌규정은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백성의 풍속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경찰범처벌규칙’(1912)을 만들었다. 이후로도 ‘선량한 풍속’을 유지하려는 사회규범은 여러 이름으로 꾸준히 등장했다. 퇴폐풍조 박멸, 풍속사범 일제 단속, 가정의례 준칙, 야간통행금지, 장발단속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대체 ‘선량함’의 기준은 누가 세운 것일까. 상위법이 법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 모호한 규정은 새로운 사안이나 국면에 따라 조변석개해 왔다. 이로 인해 다양한 행위와 언어, 문화 생산물, 취향, 산업 등은 어느 순간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역설적으로 이 책은 결코 문란하지 않다. 부제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이 말해 주듯 식민지, 전쟁, 독재체제 등으로 일그러진 한국 근현대사의 얼굴을 다룬다. 저자는 “‘풍속’이라 하면 일본에선 핑크산업을 떠올리지만 국내에선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 같은 이미지를 먼저 연상한다”고 언급했다. 일본에선 풍속 통제가 미군정 이후 일상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규제에서 성 산업으로 축소됐지만, 국내에선 분단체제 이후 풍속에 대한 국가의 관리가 더 강화됐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문란함, 음란함, 부적절함의 기준이 어떻게 문화생산과 자아의 주체 형성, 시민적 덕성과 국민 만들기에 작용했는지 고찰한다. 이면에는 정치적 음모나 배경이 자리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이를 위해 일제시대 이광수의 ‘무정’이 어떻게 풍속 통제의 담론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전시동원 체제를 조장했는지 살펴본다. 또 냉전체제에서 풍속 통제가 ‘망국병’이 되어가는 과정을 에둘러 훑어본다. ‘4·19혁명’의 실패가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서 10대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면서 ‘소년의 죽음’을 가져왔다는 해석도 내놓는다. 국민의 일상과 사생활까지 개입하는 국가의 통치구도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지는 결국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왕실이 토지와 곡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 복원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적 121호인 사직단은 올 초 문화재청에 의해 땅의 용도가 공원에서 사적지로 뒤늦게 바뀌었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원형 회복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조선의 500년 수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종묘사직’ 가운데 경복궁 동쪽의 종묘와 종묘제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지만 대칭점에 자리한 경복궁 서쪽의 사직단은 일제시대 이후 명예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사직대제는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명운과 평안을 기원하며 땅과 곡식의 신에게 지낸 제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자취를 감췄고 사직단은 빈터로만 남았다. 1922년 일제는 종묘사직의 맥을 끊으려고 사직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해 지위를 격하했고 사직단 부속시설도 철거했다. 1932년에는 대지 일부가 교육시설로 잘려 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잦은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문이 두 차례나 옮겨졌고 그 자리에 도서관과 수영장이 신축되는 몸살을 앓았다. 문화재청이 사직단 복원에 뒤늦게 뛰어든 것은 지난해 1월. 관리 주체도 종로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문화재청 산하 사직단지킴이인 재단법인 예올은 “‘사직대제’가 ‘종묘제례’ ‘석전대제’에 이은 대표 무형문화재인데도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사직대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형식적으로 복원된 이후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에 거행되고는 있으되 지금까지 악무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전혀 다른 종묘제례의 노래와 춤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게 예올 측 주장이다. 지금은 사직단의 존재와 의미를 아는 시민도 드물다. 사직단 주변 황폐화도 심각한 문제다. 사직단 사적지 안에는 여전히 파출소, 도서관, 주민센터, 창고 등 여러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때 경희궁에서 이전해 온 황학정 앞에는 2002년 국궁전수관이 건설돼 지금도 사직단 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그나마 모습을 갖춘 것은 제단과 정문, 담장 정도다. 문화재 관련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일본식 돌담은 정리됐으나 조잡한 일본식 조경도 논란거리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사직단의 역사성 회복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명 예올 이사장도 “사직단이 주말이면 인왕산 등산객들의 집합 장소쯤으로 변질돼 컨테이너 가건물이 들어서는 등 훼손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의 의지가 없고서는 복원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복원을 추진한다는 종합계획을 마련했지만 정작 예산은 한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경희궁~사직단~경복궁을 잇는 역사로 정비 방안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 또한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된다. 사직단 복원 작업은 여전히 시민단체의 몫으로 남은 게 현실이다. 예올은 분기마다 350여명의 회원들과 주변 청소 등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오는 10월에는 사직단 역사성 회복을 위한 대규모 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아빠! 어디가?(MBC 일요일 오후 4시 55분) 아빠들과 아이들은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무를 심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한편, 아빠들이 없는 낯선 시장에서 모인 아이들은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는 저녁재료 구하기에 나선다. 이에 민국은 고생하는 동생들을 위해 탕수육을 시켜놓으며 맏형다운 면모를 보인다. ■최고다 이순신(KBS2 토요일 밤 7시 55분) 순신(아이유)의 사기사건을 알게 된 준호(조정석)는 자신이 진짜 신준호임을 증명하려 순신을 변신시켜 시사회에 데려간다. 정애(고두심)는 돈 문제로 청소 일을 시작하고, 창훈(정동환)의 납골묘를 찾았다가 미령(이미숙)과 스친다. ■주말특별기획 백년의 유산(MBC 토요일 밤 9시 50분) 주리(윤아정)는 자신을 옛 연인으로 착각하고 키스를 한 세윤(이정진)에게 모욕감을 느끼고, 자취를 감춘다. 끝순(정혜선)은 효동(정보석)과 춘희(전인화)의 결혼을 승낙한 후, 두 사람의 결혼준비에 따라다니며 일일이 간섭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10분) 광주의 한 대학병원 VIP병동의 1108호. 문은 한 달째 굳게 닫혀있다. 병실을 청소하는 아줌마도, 배식을 하는 직원도 그 방은 들어가지 않는다. 가끔 의료진이 따로 보관하는 열쇠로 병실을 드나들 뿐이었다. 방문객은 물론 의료진조차 출입이 조심스럽다는 1108호에는 아주 특별한 환자가 있는데…. ■OBS 스페셜(OBS 토요일 밤 8시 15분) ‘닫힌 공간, 열린 세계’ 편은 유배의 공간성과 시간성의 확장을 보여준다.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유배는 감옥의 등장으로 사라진다. 프로그램은 생명평화운동가 황대권씨가 감옥에서 ‘야생초 편지’를 쓴 사연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화를 소개한다. ■KBS 스페셜(KBS1 일요일 밤 8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우리의 보물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을 위해 56년의 삶을 바친 철의 여인이 있다. 바로 재불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다. 프랑스의 핍박과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리의 역사, 문화를 되찾으려 했던 그 길을 따라가본다. ■도전! 1000곡(SBS 일요일 오전 8시 10분) 1992년 ‘철이와 미애’로 데뷔해 가요계를 휩쓸었던 신철이 명품보이스 가수 적우와 함께 팀을 이뤄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오프닝 무대로는 현재 SBS 라디오 DJ처리로 활동하고 있는 신철의 ‘시대별 댄스 디제잉’과 출연자들의 화려한 댄스 무대와 환상의 팀워크가 펼쳐진다.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14세에 日 강제노역 끌려가… 70년만에 초교 졸업장 품다

    14세에 日 강제노역 끌려가… 70년만에 초교 졸업장 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린 피해 할머니가 70여년 만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18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전남 화순 능주초등학교가 19일 열리는 ‘제100회 졸업식’에서 졸업생인 김재림(83) 할머니에게 졸업장을 재발급할 예정이다. 광주에 사는 김 할머니는 “돈도 벌고 공부할 수 있다”는 친척 언니의 말을 믿고 1944년 5월쯤 일본행에 나섰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군수업체 미쓰비시중공업이 운영하는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끌려가 어린 나이(14세)에 허기에 지친 몸으로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또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었느냐”는 편견 속에 남모를 정신적 고통까지 겪었다. 자신이 학교를 졸업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사연을 접한 시민모임은 지난달 11일 사실 확인차 김 할머니와 함께 모교인 능주초등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측과 시민모임 관계자들은 이날 문서고에 있는 일제시대 학적부를 뒤지다가 1944년 3월 31회 졸업생 명단에서 창씨개명된 김 할머니의 이름을 확인했다. 능주초등학교는 올해로 ‘100회’ 졸업생을 배출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이번 졸업식에서 김 할머니에게 졸업장을 줘 할머니의 고단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전하기로 했다. 졸업식에는 김희용·김선호 시민모임 공동대표를 비롯해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등도 참석한다. 졸업장을 다시 받게 된 김 할머니는 “고향 역을 지나갈 때 어머니한테 말씀도 제대로 못 드리고 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며 “오늘같이 기쁜 날이 없다. 해방 68년 만에 졸업식에 다시 선다고 하니 새 신부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렌다”고 말했다. 한편 시민모임은 일제강점기 학교 재학 중 어린 나이에 일제에 강제동원돼 학기를 마치지 못한 피해자들의 사연을 접수(전화 062-365-0815)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전남 나주초등학교도 앞서 6학년 재학 중 1944년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양금덕 할머니 등 2명의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에게 2008년 5월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시조사랑’ 70대 할머니, 박사학위 받아

    ‘시조사랑’ 70대 할머니, 박사학위 받아

    여고생 시절부터 시조를 사랑했던 70대 할머니가 ‘시조 박사’에 올랐다. 17일 청주대에 따르면 김선옥(77·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할머니가 ‘가람과 노산 시조의 비교연구’란 논문으로 오는 22일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때 시조를 통해 조선인의 혼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과 노산 이은상(1903~1982) 선생의 시조 정신을 논리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 비교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할머니는 “컴퓨터를 다루는 게 미숙하다 보니 논문을 쓰다가 내용이 모두 날아가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앞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17세이던 공주사범학교 1학년 때다. 수업시간에 시조를 배운 게 계기였다. 일찍이 작가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시조와 거리가 먼 숙명여대 약학과에 진학하면서 약사의 길을 걷게 됐다. 숙대에서 2년 수료한 뒤 충북대 약학과를 나왔다. 하지만 청주로 시집와 30여년간 약국을 운영하면서도 시조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95년 ‘어머니’란 작품을 통해 ‘창조문학’ 시조 시인상을 받았고, 그해 한국 시조시인협회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됐다. 꿈에 그리던 시조시인이 됐지만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시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야겠다며 청주대 대학원에 진학, 2000년 석사학위에 이어 박사과정 3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됐다. 그는 “그동안 쓴 시조가 100여편인데 이 시조들을 모아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씨줄날줄] 시인의 정치/임태순 논설위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문학(시)이 사람의 이성을 북돋우지 않고 감정을 조장해 도덕적으로 유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은 사람의 감정을 정화하고 조절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며 오히려 문학을 옹호했다. 시를 포함한 문학, 음악 등 예술은 시대상황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시나 소설이나 모두 현실의 부조리, 모순을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전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詩經) 에 ‘초상지풍(草尙之風) 초필언(草必偃) 수지풍중(誰之風中) 초부립(草立)’이란 구절이 나온다.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는 ‘강의’라는 책에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다시 풀이 일어선다는 것을”이라고 번역한 뒤 위정자들에게 짓밟히면서도 꿋꿋이 일어서는 민초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일어서는 풀의 착상은 1960년대 저항시인 김수영의 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풀’이란 시에서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고 해 암울함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민중을 노래했다. 일제시대 이육사나 이상화도 대표적인 참여시인이자 저항시인이다. 이육사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갈망하며,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절규하며 나라 잃은 현실에 울분을 토로했다. 시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안도현의 행보가 입길에 오르고 있다. 그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이타적 삶의 자세를 간결하게 표현한 시로 유명하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시민캠프선거대책위원장인 그가 엊그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여성후보론에 대해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는 일은 봉건사회에서나 가능하다.” “남편 수발, 자식 수발하면서 살아 오신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면 모르겠지만…”이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지난 달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 힘겨루기를 할 때만 해도 안 후보는 소멸하는 태풍이라며 사뭇 시인다운 비유를 구사했지만 정치판에 휘말리면서 입이 거칠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행보가 거듭될수록 그의 시 또한 다시 보게 된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지만 시인은 민주화를 넘어 보수, 진보로 진화한 시대에 정치하기가 더욱 어렵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요정의 도시’ 달구벌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요정의 도시’ 달구벌

    대구는 한때 ‘요정의 도시’라 불렸다. 그 중심에 종로가 있다. 종로에만 1960~70년대 50여개의 요정이 있었다. ●전성기땐 기생만 500여명… 지조도 유명 이같이 대구에 요정이 많았던 것은 일제와 관련이 있다. 경부철도가 건설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구에 몰려왔다. 그러자 이들을 겨냥한 요릿집이 대구역 인근 곳곳에 문을 열었다. 이후 1909년 4월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기생들은 생업을 위해 대구기생조합을 설립하고 요릿집에 나가 예악을 팔았다. 10여년 이후에 대구기생조합의 후신인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이 설립돼 기생들을 교육하고 알선, 관리하며 화대를 징수했다. 1942년 권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1960년대부터 요릿집과 권번의 역할을 합친 본격적인 요정시대가 열렸다. 1950년대에는 죽립헌, 칠락, 삼한관, 보현장, 계림관, 대구관 등이 대구의 일급 요정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에는 춘앵각, 청수원, 일심관 등이 대표적 요정이었다. 이 중 춘앵각이 단연 으뜸이었는데 주인이었던 나순경은 자연스레 대구 요정업계의 대모 노릇을 했다. 거쳐간 기생들만 수백 명이 넘고, 훗날 지역의 요정과 한식집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은 수제자만 해도 20여명이나 된다. 춘앵각은 2003년 말 문을 닫으며 지역 요정 시대는 저물었다. ●현재 ‘가미’가 유일하게 명맥 이어 종로에 요정이 전성기를 이룰 때 기생들만 500여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인물은 출중하지만 몸은 팔지 않는 1급기생이었다고 한다. 돈벌이 못지않게 지조도 유명했다. 일본인 손님 앞에서도 일어를 쓰는 법이 없었고, 지나치게 고고한 자세를 지키다 다툼이 일어나기가 부지기수였다. 현재는 요정 가미가 유일하게 종로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가미는 1962년 가정집을 개조해 ‘식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 ‘가미’로 이름을 변경했다. ‘가미’입구에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대구의 밤을 밝혔던 요정의 미니어처가 전시돼 있다. 윤금식 가미 대표는 “대구 종로 요정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한국 1호 서양화가 춘곡 ‘이상화 초상’ 첫 공개

    한국 1호 서양화가 춘곡 ‘이상화 초상’ 첫 공개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1886~1965)의 네 번째 유화 작품 ‘이상화 초상화’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22일 서울 원서동 16번지의 고희동 집을 국민에게 개방하는 행사 중 하나로 고 화백이 유화 물감으로 그린 시인 이상화(1901~1943)의 초상화를 오는 24일부터 내년 1월 20일까지 이곳에 전시한다고 밝혔다. 고희동의 집은 사후 소유주가 바뀌면서 2003년에는 가옥이 멸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노력으로 보존됐고, 2004년에는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김홍남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상임이사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전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고 화백은 생각했다.”며 “이러한 뜻을 모아 1918년 이도영, 김돈희 등 동료 서화가와 서화협회를 만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고 화백이 시인 이상화의 초상화를 그린 것도 비슷한 의미라고 분석했다. “춘곡 선생과 이상화는 중앙고보의 미술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인연이 있다.”며 “그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일제시대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상화의 초상화를 그려 조국을 되찾기 위해 저항한 예술가를 지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림 뒷면에는 ‘1931 Ko Hei Tong, 우(友) Ree 증(贈)’이라고 기록돼 있다. 기금과 종로구는 ‘이상화 초상’을 비롯한 고 화백의 그림 4점 등 서화작품 18점을 선보이는 특별전 ‘춘곡과 친구들’을 24일부터 연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6) 군산 창길과 해망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6) 군산 창길과 해망로

    전북 군산시 내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창길은 내륙 쪽에서 바다를 향해 남북으로 곧게 이어져 있다. 조선시대까지의 영화와 일제시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길이다. 중앙로의 군산 동산중학교 앞에서 시작해 해신동 주민센터, 119 안전센터, 군산해양경찰서를 거쳐 동서로 뻗은 해망로와 만나서 한 블록쯤 더 가면 도선장과 조우한다. ‘창고 길’이라는 이름처럼 창길과 이 일대는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쌀을 보관하던 미곡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말에도 전국 12조창 가운데 한 곳인 진성창이 이곳에서 4㎞ 남짓 떨어진 성산면 창오리 창안마을에 있었다. 창길 21에 위치한 군산해양경찰서. 이곳에는 조선 중종 7년이던 1512년 세워져 칠읍 해창 또는 군산창으로 불리던 쌀 창고가 있었다. 전북 일대 고을에서 가을에 세금으로 쌀을 거둬 군산창에 보관하다가 다음해 2~3월쯤 배로 실어 한양으로 옮겼다. 창길을 중심으로 한 군산창은 활기찬 항구 도시였다. 영조 때 편찬 된 속대전에는 “군산창에는 쌀을 실어나르는 조함이 18척, 이를 관리하던 조군이 816명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하면 최소 3000여명의 인구가 이곳에서 상주했다고 여겨진다. 가을이면 수확한 쌀을 사고팔기 위한 상인들과 일확천금을 꿈꾸던 상인들이 모여들어 주막과 객주들은 붐볐으며 놀이패들과 구경꾼들로 도시는 활기를 띠었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군산이라는 지위는 더욱 두드러졌다. 군산은 식민지 조선의 쌀과 원료를 일본으로 수탈해 가던 수송 기지였다. 일제는 군산항의 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쌀을 가져가기 위해 바닷물의 높낮이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뜬다리 부두(부잔교)를 건설했다. 뜬다리 부두 앞 내항 일대에 쌀 저장창고를 만들었다. 이 일대는 쌀을 저장하는 지역이란 뜻으로 장미동으로 불렸다. 쌀의 저장과 반출이 늘면서 일본인들의 진출과 활동이 활발해졌다. 1920년대부터 쌀가공 수출업으로 재미를 본 일본 상인들은 쌀의 집결지라는 점을 이용해 창길 부근인 영화동에 정미 및 양조 공장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퇴락해 가는 나지막한 건물들에 맛집과 술집들이 가득한 영화동과 그 주변을 따라 정종공장과 양조장들이 세워졌다. 철공소, 고무 공장, 농기구 제작소, 제염소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1934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쌀의 양이 200만석을 넘어섰다는 기록은 이 지역의 성격을 상징한다. 인구가 늘고, 일본 자본의 진출이 많아지면서 해안을 따라 동서로 뻗으며 도선장 사거리에서 창길과 엇갈리는 길이 만들어진다. 일본인들의 상업중심지가 들어서는 ‘본정통’이다. 일본인들에게 혼마치라고 불렸던 이 길이 지금의 해망로다. 도선장 사거리에서 해망로를 따라 지금은 해망로 264의 한국전력, 옛 군산세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채만식 소설비,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이 늘어서 있다. 창길은 동서로 이어지는 해망로와 중앙로 사이에 있는 셈이다. 일제 강점기 이 지역은 일본인들에게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고, 열려 있는 희망의 도시였다. 1935년 공식 인구 3만 7000여명 가운데 1만명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이 이 같은 분위기를 보여 준다. 번화한 상업거리인 본정통의 배후지인 영화동 일대는 조선시대 해군기지인 군산진과 쌀 수송 창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899년 개항 이후 조계지역을 만들면서 일제가 조선의 자취를 완전히 밀어버리고 새로 금을 그어 재개발을 했다. 조상대대로 이 지역에서 살아오던 조선인들은 내쫓겼고, 조상들의 묘까지 이장당했다. 일본인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은 산비탈 움막에 살면서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갔다. 채만식의 ‘탁류’는 고향에서 밀려나 식민지 산업의 도구로 전략한 1930년대 조선인들의 무력함과 힘겨움을 그렸다. 본정통의 조선은행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쌀 선물시장인 미두 취인소가 있었다. 채만식은 그의 소설 곳곳에서 이곳으로 밀려들어 온 조선의 지주와 양반들이 미두 취인소에서 일본 자본가들에게 농락을 당하면서 패가망신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모습들을 그려 놓았다. 옛 미두 취인소 터에는 미두장을 기념하는 비석만 덩그러니 서 있다. 군산항의 주요 기능이 외항으로 옮겨 가고, 1995년 시청 등 주요 시설들도 창길과 영화동을 감싸고 있던 중앙로의 사옥을 버리고 조촌동으로 이사하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영화를 누리던 창길과 해망로 그리고 내항 일대 등 구도심은 쇠락을 거듭해 왔다. 2.09㎢(약 63만평) 규모의 해상매립지 역시 바다를 건너 마주보고 있는 서천시 쪽의 강력한 반대로 개발이 미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군산시는 구도심의 부흥을 위해 근대문화중심 도시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군산시 한상욱 토지정보과장은 “창길과 해망로 등 구도심을 문화의 메카로 만들고, 새만금 사업의 진전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활용해 구도심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해망로를 따라 이어지는 일제시대 유산들은 지난 2009년부터 ‘근대문화벨트지역’으로 단장되고 있다. 100억원을 들여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물들을 복원하고 있다. 올해말까지 금융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고서 전시장으로 거듭난다. 해군기지이자 조운을 위한 항구였던 군산의 모습을 시대별로 재현하고 당시 유물과 유적들을 모아 놓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도 지난해 문을 열었다. 군산시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문화 유산을 활용해 근대문화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퇴락해 가는 구도심을 살리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군산 내항을 중심으로 한 근대문화벨트지역과 함께, 군산시는 옛 개항장과 조계지 외각의 문화유산들을 엮어 관광문화 자원으로 개발하는 ‘근대역사경관지역’ 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흥동 히로스 가옥 등 일본식 가옥들과 국내 유일의 일본식 불교사찰 동국사, 해망굴 등을 잇는 지역은 창길과 해망로와 함께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도 관심을 끌기 시작한 군산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글 사진 군산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27회에는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를 소개합니다.
  • 日 식민사학 반박한 정인보의 고조선 역사 고증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인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신채호는 ‘낭가사상’(家思想)을, 문일평은 ‘조선심’(朝鮮沈)을 각각 강조하며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했다. 위당 정인보(1893~?)는 같은 맥락에서 ‘민족 얼’을 강조했다. ‘얼’은 우리가 잘 아는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정인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사학자들과 1915년 펴낸 ‘조선고적도보’라는 역사책을 본후 분기탱천했다. 1913년 일제의 고적조사단이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굴하고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해당 비의 발굴은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 것들이 사실인 양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정인보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총독정책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깡그리 부숴 버리리라.”고 다짐했다. 정인보가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단군부터 조선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개괄하는 연재를 시작한 이유다. 1년 7개월 동안 282회 연재되던 중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에서 동아일보 미술기자였던 청전 이상범이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의거’를 벌이자 동아일보가 강제 정간돼 중단됐다. 정인보가 분석하고 고증했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선언했다.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에 대항한 것으로, 신화의 영역에 있던 단군을 역사의 연구영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단군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로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였다는 것이다. 둘째, 기자조선설을 부인했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는 고조선-위만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험독, 지금으로는 요령성 해성현으로 추정했다. 셋째,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거나 임금이라는 뜻이 있는 일종의 존호이며, 고조선과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넷째, 요수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 일대를 흐르는 난하지역으로 추정했는데, ‘요수난하설’은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이 보충해 개진했다. 다섯째, 한사군의 위치가 낙랑은 요동의 험독, 현토는 우북평, 임둔은 초자하, 진번은 대릉하 지역으로 모두 한반도 너머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하고, 관할 지역이 수시로 변동됐던 한사군에 대해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년이나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에 반박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도 이미 1930년대 고증해 밝힌 셈이다. 정인보의 연재물 ‘오천년간 조선의 얼’은 1946년 서울신문에서 단행본 ‘조선사연구’로 새로 태어났다가, 1983년 ‘담원 정인보 전집’ 중 제3·4권으로 출간됐고, 최근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조선사연구’(문성재 역주)로 한글판을 내놓았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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