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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북, 이번 강의는 ‘일제의 북한산 풍수침략’

    강북, 이번 강의는 ‘일제의 북한산 풍수침략’

    서울 강북구는 유튜브를 통해 북한산에 얽힌 역사 얘기를 풀어내는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구는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가 강북구 유튜브 채널에서 운영 중인 인문학 강의 29번째 강사로 나서 북한산을 주제로 강연한다고 11일 밝혔다. 김 교수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고을의 뒤에서 난리를 진압하고 보호하는 큰 산이라는 의미다. 강의는 조선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북한산의 지위를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격하시켰는지를 다뤘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산은 도읍지 전체를 아우르는 중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조선 수도 한양의 진산으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로 이뤄진 북한산이 제격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북한산이 가진 지위를 낮추려고 했다. 김 교수는 “1914년 일제가 북한산의 행정구역을 국가 도읍지인 한성에서 경기도 관할로 변경했다”며 “한양 행정구역인 한성부 지위를 사실상 박탈한 셈으로 풍수침략이 자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구는 일제강점기를 둘러싼 생생한 북한산 얘기는 유튜브 ‘역사문화관광의 도시 강북구’ 채널에서 시청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강의는 상시 게재돼 언제든 볼 수 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이번 강연은 북한산에 얽힌 숨어 있는 일제 잔재를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리라 본다”며 “북한산이 가진 본래 의의를 바로 세우고 서울의 진산으로서 역사·문화적 위상을 회복하는 날이 조속히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 1868년 조선, 궁궐 화장실은 일본보다 앞섰다?…현대식 정화조 발견

    1868년 조선, 궁궐 화장실은 일본보다 앞섰다?…현대식 정화조 발견

    조선 후기인 150여년 전에 궁궐에선 선진적 정화시설을 갖춘 공중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1868년(고종 5년)에 중건된 경복궁 동궁 남쪽 권역을 발굴 조사하다 현대식 정화조와 비슷한 대형 화장실 유적을 찾았다고 8일 발표했다. 동궁 권역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훼손됐고, 궁궐 내에서 화장실 유구(건물 자취)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은 좁고 긴 네모꼴 석조로 된 구덩이 형태로 분뇨가 밖으로 스며 나가는 것을 막았다.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 규모다. 정화시설 안에는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 2개가 있다. 북쪽 입수구 높이는 출수구보다 0.8m 낮다. 입수구로 들어온 물은 구덩이 속 분변과 섞이면서 오수를 분리해 궁궐 밖으로 배출한다. 가라앉은 분뇨는 발효되면서 악취가 줄고 독소가 빠져 비료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물이 넘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분뇨를 퍼 나르는 관리 작업은 필요하다.양숙자 강화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이런 시설의 원리는 분뇨 침적물에 물을 유입시켜 발효, 침전시킨 뒤 오수와 정화수를 분리 배출하는 현대식 정화조와 유사하다”며 “한 번에 최대 8~10명, 하루 150명이 이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왕과 왕족들은 방안에서 이동식 변기인 ‘매우틀’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화장실은 경복궁내 궁녀, 관리, 군인들이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발굴된 화장실 유적 바닥 흙에서는 기생충 알을 비롯해 오이나 가지의 잔해도 남아 있어 당시 식생활도 짐작할 수 있다. 양 실장은 “이 화장실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 만들어져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기까지 20여년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다만 입수구 쪽 유구가 훼손돼 화장실에 어떻게 물이 들어오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정화시설을 갖춘 화장실 유구는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과 고려 말 양주 회암사 유적에서도 나온 적 있다. 하지만 출수구만 있거나 입출수구가 모두 없는 등 지금과 같은 현대식 정화조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장훈 한국생활악취연구소장은 “150여년 전 당시로선 경복궁 화장실은 외국에도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유럽과 일본은 분뇨를 포함한 모든 생활 하수를 함께 처리하는 시설이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정착됐다. 다만 유럽에선 19세기 중반부터 도시 중심부에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고, 이번 경복궁 화장실은 단독 건물에 자체 정화시설을 갖춘 것으로 일부 계층만 사용할 수 있었다. 기술적 의미보다는 그동안 관심이 적었던 조선시대 궁궐 생활사 복원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위키백과 일본어판 “윤동주 시인, 일본 국적”…서경덕 교수 항의메일

    위키백과 일본어판 “윤동주 시인, 일본 국적”…서경덕 교수 항의메일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국적이 위키백과 일본어판에 ‘일본 국적’으로 표기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 8일 밝혔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홈페이지 ‘윤동주’ 항목은 “일본 국적의 시인이며 주로 조선어로 시를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 교수는 “윤동주 시인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기에 국적을 ‘일본’으로 버젓이 바꾼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이를 바로잡을 때까지 항의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햇다. 이 오류는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이 서 교수에게 제보해 알려졌다. 중국 바이두 백과사전은 앞서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민족을 ‘조선족’으로 표기한 바 있다. 서 교수는 바이두 측에도 지속해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일본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인근에 문을 연 ‘일본 올림픽 박물관’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를 일본인처럼 전시하는 것도 바로잡으라고 요청한 상태다.
  • 멍하니, 가만히… 대청에 호며들다

    멍하니, 가만히… 대청에 호며들다

    ‘언택트’와 ‘힐링’. 코로나 시대에 여행계의 유행을 주도한 단어다. 호수는 그 유행의 주무대 중 하나다. 이른바 ‘물멍’을 즐길 수 있는 곳. 초여름의 대청호를 찾았다. 충북 청주와 옥천, 대전 등에 걸쳐 있는 거대한 호수다. 성하를 앞둔 무더운 날씨에도 호숫가엔 격렬하게 햇빛에 항거하고,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뜻밖에 많았다.멀리서 소나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그러나 주변과는 또렷이 구별되는 세력으로 커진 소나기는 먼 산을 적신 뒤 이제 곧 호수를 덮칠 기세였다. 소나기가 호수 방향으로 올 것은 거의 확실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서늘해진 바람이 장판처럼 잔잔했던 호수 위로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기의 내습을 직감한 아이들은 가젤 영양처럼 ‘튀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비를 피하려는 건지, 소나기를 맞이하는 의식이라도 벌이려는 건지 불분명할 만큼 아이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고조돼 있었다. 예전엔 소나기가 들녘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모습을 드물게나마 봤던 것 같다. 일종의 경험치도 쌓여 있다. 소나기가 다가올 때마다 바람과 기온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대기 중엔 흙냄새도 옅게 묻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건 대도시에 정착한 이후다. 세상은 좀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진 거다.●비 그친 호수엔 사람도 나무도 ‘데칼코마니’ 대청호 ‘멍상정원’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공식 명칭은 ‘명상정원’인데, ‘호수 멍때리기’에 최적의 장소인 듯해 이번에 한해 별명처럼 이리 부르기로 한다. 소나기를 피할 공간이 있었다면 아마 황순원의 ‘소나기’를 생각하며 더 오래 ‘멍상정원’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사진작가 2명, 개인방송 진행자 1명 등 겨우 몇 명이서 그 너른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다. 전날 소나기가 퍼부을 때는 혼돈의 호수였지만, 이날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빙판, 장판 등 그 어떤 표현도 잔잔한 호수의 모습을 전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호수 위로 작은 섬과 나무, 사람들이 정확히 반대로 비춰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거울’이 그나마 적확할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데칼코마니라 표현한다. ‘멍상정원’이 속한 곳은 대전 마산동이다. ‘마산동 쉼터’라거나 ‘명상정원’, ‘슬픈 연가 촬영지’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세 곳 모두 한 지역을 이르는 이름이라 봐도 무방하다. 마산동 쉼터 주차장에서 ‘멍상정원’까지는 700m가 조금 넘는 거리다. 나무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조금 더 멀다. 오른쪽으로 먼저 간다. 볼거리를 고려해서다. 물론 정해진 규칙은 없다. 오른쪽 길을 따라 2층 정자를 지나면 우물이 나온다. 우물 곁엔 제멋대로 굽은 못생긴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평범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모습이다. 이른바 ‘J 호러’의 기원이 됐던 일본 영화 ‘링’의 강렬한 인상이 여태 뇌리에 남은 거다. 이 우물은 영화 ‘7년의 밤’이 촬영된 세트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스스로 몸을 던진,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고통의 블랙홀’로 작용했던, 일종의 미장센이다. 이와 비슷한 장르의 영화 ‘살인소설’, 한국형 좀비 영화 ‘창궐’ 등도 이 일대에서 촬영됐다, 고 안내판은 적고 있다. 우물에서 몇 걸음 더 옮기면 ‘물속마을 정원’이다. 크고 작은 장독들과 담장 등으로 멋을 냈다. 의아했다. 왜 갑자기 물속마을 정원이 튀어나온 걸까. 그러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의 말을 듣고는 머리에서 ‘뎅~’ 하고 종이 울리는 듯했다. 백 회장은 “수몰 전 이 마을의 모습을 꿈에서 종종 본다”고 했다. 외갓집을 찾았던 기억의 단편이 꿈에서 재현될 정도면 수몰민은 얼마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까. 백발 성성한 노인이 수구초심으로 찾아와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노인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실향민은 통일되면 고향 땅을 밟을 희망이나 품지만 수몰민은 갈 고향이 아예 없다고요. (대청호) 물을 빼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물속마을 정원은 수몰의 기억이 담긴 공간인 거다. 한데 여기서 살았을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들의 기억은 그저 눈요기용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물속마을 정원에서 오른쪽으로 난 모래톱은 드라마 ‘슬픈 연가’ 촬영지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휴대전화에 ‘인증샷’으로 저장됐을 만큼 명소다. 액자 형태의 조형물을 세워 한층 ‘폼나게’ 만들었다. 건너편은 ‘멍상정원’이다. 이름처럼 많은 이들이 다양한 자세로 ‘호수멍’을 즐기고 있다. 개미허리처럼 가는 모래톱 건너편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흔히 ‘뜬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름 그대로 평소에는 물에 떠 있다. 그러다 봄철 갈수기나 장마철을 앞두고 미리 물을 빼는 배수기엔 수면 아래 있던 모래톱이 드러나며 뭍과 연결된다. 그러니까 이맘때만 만날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인 셈이다.●수면 아래엔 日에 맞선 동학군 승전의 역사 이쯤에서 백 회장의 말을 조금 더 듣자. 기억을 더 거슬러 오르면 조선시대 당시 ‘멍상정원’ 일대는 주안장터였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4차선 국도 격인 ‘율봉도’가 지나는 길에 형성된 큰마을이었다. 목을 축이려 주막에 들른 이들, 주모와 희롱하는 장돌뱅이들, 육모방망이 흔들며 으스대던 포졸 등 수많은 인간 군상들로 시끌벅적했을 테다. 이상면(75) 서울대 명예교수가 전하는 역사도 무척 흥미롭다. 그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캐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듯하다. 현 청남대가 있는 충북 청주 문의면 등 대청호 중상류 일대는 조선시대 정치 경제의 요충지였다. 금강 수계와 ‘율봉도’가 교차하는 지점이어서, 이 일대를 장악하면 아래쪽 삼남까지 통제가 가능했다. 이는 대청호에서 15㎞ 정도 떨어진 청주에 삼남 최대 군사기지인 진남영을 설치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19세기엔 ‘호중동학군’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호중’은 다소 생소한 이름인데, 현재의 청주와 충주, 충남 공주 등의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호중동학군이 일본군과 맞붙어 승전고를 울린 곳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동학군 승전의 역사는 호수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다. 이들의 이름이 생경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서둘러 이 역사를 인양하는 게 후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엔 경부선 철길이 놓일 뻔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최단 노선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대전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유야 자명하다. 일제의 머릿속에 동학군에 당한 참패의 기억이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한없이 조용한 ‘멍상정원’이지만 수면 아래엔 이처럼 숨가쁜 역사가 잠겨 있다. 이상면 명예교수는 호중동학군의 별동대장이었던 이종만(훗날 이종찬으로 개명)의 손자다. 그는 수많은 조상들의 역사가 새겨진 이곳을 찾는 후대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역사가 부여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라”고 권했다.●좁은 틈 지나면 소원 이뤄진다는 ‘신선바위’ 인접한 비룡동엔 신선바위가 있다. 예전 제사유적지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바위 사이엔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로 좁은 틈이 나 있다. 이 틈을 지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대청호를 돌아본다는 건 사실 호반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긴다는 것과 뜻이 같다. 청주 문의면 쪽에서 내비게이션에 대청댐을 찍으면 보통 32번 국도로 안내한다. 하지만 적요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늘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문의문화재단지 옆으로 난 대청호반로가 그렇다. 국도에 비해 오가는 차량이 훨씬 적어 한결 호젓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이 도로를 따라 대청댐 쪽으로 가다 보면 현암사와 만난다. 대청호를 굽어볼 수 있는 절집이다. 계단을 통해 올라야 해 적잖이 품이 든다. 현암사 반대편 능선엔 구룡산 장승공원이 있다. 2004년에 폭설로 쓰러진 나무들을 깎아 만든 장승 500여기가 진입로부터 장승공원까지 길게 늘어서 있다. 장승들은 남근 형태가 많다. 안내판은 “여성의 기운이 강한 곳이라 남근 형태의 장승을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마산동 쉼터 아래쪽, 그러니까 대청호 남쪽의 옥천 일대에도 볼거리가 많다. 대표적인 곳은 부소담악이다. 수십m 높이의 크고 작은 절벽들이 비단강(금강)을 찢으며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모양새로는 딱 ‘비단강을 가르는 칼’이다. 출발 전 한국관광공사의 윤승환 세종충북지사장이 “하루 코스 언택트 힐링 여행지로 강추”한 곳도 아마 이쯤 어디일 것이다. 절벽의 길이는 700m에 이른다. 절벽 위로 길이 나 있다. 끝까지 갈 수도 있지만 위험하니 절벽 중간쯤의 추소정에서 발걸음을 돌리길 권한다. 부소담악은 사실 멀리서 봐야 제맛이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금강을 가르고 있는 절벽의 기세를 봐야 제대로 완상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적합한 곳은 추소리 마을 뒤 산자락이다. 이곳에 전망대 하나 세우면 단박에 명소로 발돋움할 텐데, 여태 실현되지 않아 못내 아쉽다. 방아실마을 끝자락엔 ‘수생식물학습원’이 있다. 이름으로는 생태교육시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입장료(6000원)를 받는 상업시설이다. 개신교인 다섯 가족이 모여 사는 일종의 신앙촌 같은 곳인데, 내부를 잘 꾸며 놓아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관광객들이 셀피를 많이 찍는 곳은 시설 끝에 있는 작은 교회다.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부소담악 인근의 이백리엔 이지당이 있다. 지방문화재였다가 지난해 말 보물(2107호)로 승격된 국가지정 문화재다. 이지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다 충남 금산 전투에서 순국한 조헌이 후학을 길러내던 서당이다. 조헌 생전에는 각신서당(覺新書堂)으로 불리다 훗날 우암 송시열이 이지당(二止堂)이라 고쳐 불렀다. 이지(二止)는 시전에 나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문구에서 끝 단어인 ‘지’(止)자 두 개를 딴 것이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석호리엔 청풍정이 있다. 야산 중턱 끄트머리에서 단아한 자태로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다. 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정자 곳곳에 담겨 있다. 옥천은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다. 그의 대표 시 ‘향수’에 나오던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이제 호수로 변했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던 모래사장은 대부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풍경이 그나마 온전히 남은 곳은 대청호 안터지구다. 장계관광지가 있는 장계리와 오대리, 석탄리, 연주리 등을 잇는 지역이다. 지난 5월엔 환경부가 이 일대를 ‘국가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했다. 석탄리 안터마을은 반딧불이 서식지로 유명하다. 지난 15년간 호수 주변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며 반딧불이 서식지를 보존해 왔다. 요즘 석탄리 일대 호안은 초록빛 풀들로 뒤덮였다. 이 역시 배수기 때만 볼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다. 연주리 쪽에선 둔주봉이 명소다. 등산로 입구에서 황토흙길을 800m쯤 오르면 정상 전망대가 나온다. 발아래로 반전된 한반도 지형이 펼쳐진다. ■여행수첩 →마산동 쉼터는 대청호 중간쯤에 있다. 수도권 등 외지에서 찾을 경우 청주 문의면 혹은 옥천 안남면 방면에서 출발해야 더 효율적으로 대청호를 돌아볼 수 있다. →T맵으로 신선바위를 찍으면 멀리 떨어진 황당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대전 동구 대청호수로296번길’을 찍고 간 뒤 마을 중간쯤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 20분 정도 소요된다. 신선바위까지는 외진 데다 오가는 이도 별로 없는 만큼 단독 산행보다 동반 산행을 하길 권한다. →장승공원은 승용차로도 갈 수 있지만 찾기는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마을 쪽으로 좀더 들어가야 공원 진입로가 나온다. 여기서 구룡산 정상까지는 불과 500m다. →돌팡깨 식당은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다. 두부, 청국장 등 주요리는 물론 밑반찬까지 싹싹 비울 만큼 정갈하고 맛있다. 검은 돌이 밀집된 ‘돌팡깨’ 바로 앞에 있다.
  • 부산 자성대공원 이름 바뀐다...부산진성 공원으로 변경

    일제강점기 부여된 자성대공원(子城臺) 이 부산진성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부산시는 행정 편의상 지어진 공원 명칭을 상징성·역사성 등을 반영해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 이에따라 부산 동구 자성대 공원을 부산진성공원으로 명칭을 바꾼다. 이 공원은 애초 1944년 1월 3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4호로 공원으로 결정되면서 이름이 지어졌다. 자성대라는 명칭이 일본식 성곽 표기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명칭 변경을 결정했다. 부산진구 개금공원과 사하구 다대동 근린공원도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예정이다. 시는 주민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명칭을 선정하는 절차에 돌입한다. 공원 명칭은 이달중으로 7지명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치고 이후 시, 국가 지명위원회를 심의·의결을 통해 최종 결정된다. 부산시 관계자는 “그동안 시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정체성이 모호했던 공원의 명칭을 그 성격과 특색에 맞는 친근하고 공감이 가는 이름으로 변경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시민이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 유물 2점 등 부산박물관에 기증

    시민이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 유물 2점 등 부산박물관에 기증

    부산박물관은 부산에 거주하는 이상민 씨로부터 조선 세종대왕 시대 태실 유물 2점을 비롯한 총 24점의 유물을 기증받았다고 6일 밝혔다. 기증받은 유물 중 ‘세종의 왕자 태실’ 유물 2점은 세종 대왕 열번째 아들인 왕자 의창군(義昌君)의 태지석(胎誌石)과 안태용(安胎用) 분청사기(粉靑沙器)>이다. 의창군은 1428년 세종의 열 번째 아들로 신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5년에 의창군으로 봉해졌으며 1460년에 사망했다. 태지석은 주로 사각형의 납작한 돌 표면에 생년월일, 이름, 태를 묻은 일자를 새겨 태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유물로 태실 안에 태항아리와 함께 봉안했다. 안태용은 태(胎)를 안치한다는 뜻이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 등 왕손이 태어나면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을 정해 태(胎)를 묻었던 곳이다. 특히, 왕실은 태실이 국운과 직접적 관련이 있어 더욱 소중하게 다뤘다.전국팔도의 풍수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때 조선 왕실과 백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려는 의도에서 전국팔도 명당에 있던 태실을 서울 근교로 옮겨와 서삼릉에 일괄적으로 모아놓았다. 박물관측은 이과정에서 태실의 유물이 교란되고 중요한 문화재였던 태항아리가 상당수 도굴됐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세종의 왕자 태지석 6점, 세종의 왕자 안태용 분청사기 7점의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이번 기증을 통해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세종의 왕자 태실 유물 2점을 새롭게 확인했다. 세종의 왕자 의창군 태지석의 명문 내용을 살펴보면 의창군은 1428년 10월 27일 묘시생으로 1438년 3월 11일에 태를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성주 선석산 의창군 태실 비석(아기비)의 명문 중 태를 묻은 일자가 일치한다는 것을 이번에 기증받은 유물을 통해 확인됐다. 의창군은 세종의 왕자 중 1438년 3월 10일 가장 먼저 태실을 조성한 세조에 이어 두 번째로 경북 성주 선석산에 태를 묻었다. 세조와 의창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1439년 이후에 태실을 조성했다.현재 18명의 왕자 중 4명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안태용분청사기는 꼭지가 달린 반구형 뚜껑 모양의 분청사기로, 태항아리 전체를 덮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양 구성을 4~5단으로 나누고 연꽃잎이 겹쳐진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와 문양 기법, 문양 구성을 지닌 유물은 경북 성주 선석산 세종의 왕자 태실에서만 확인된다. 특히, 연꽃잎이 겹쳐진 문양과 뚜껑 중앙 부분을 삼각집선문으로 띠처럼 표현한 기법은 기존에 확인된 11점의 세종의 왕자 안태용 분청사기의 양식 중 세조의 안태용 분청사기와 매우 유사해, 세조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이밖에 청자완, 분청국화인화문접시 등 도자기 9점, 삼국시대 토기 1점 등 22점의 다양한 유물을 기증했다. 2019년에 이어 두 번째 기증이다.송의정 부산박물관 관장은 “이번에 기증받은 유물은 도기 및 분청사기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던 15세기 조선 전기 장태문화(藏胎文化)를 알 수 있고 특히 세종의 왕자 태실에서만 확인되는 특정한 시기, 장소 및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향후 유물의 보존처리를 진행하고 기존 연구성과 검토 및 비교 연구를 거친 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3대 아지매’ 아시나요… 부산, 그들의 애환 어린 ‘삶의 터展’

    ‘3대 아지매’ 아시나요… 부산, 그들의 애환 어린 ‘삶의 터展’

    산업화 시대 터전 지켜온 여성들해양문화·‘동래야류 탈’ 등도 전시6·25 피란수도 당시 사진·영상도부산에는 ‘3대 아지매’가 있다. 자갈치아지매, 재칫국(재첩국)아지매, 깡깡이아지매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혼란, 산업화 시대의 격동 속에서 강인한 생활력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삶의 터전을 지켜 온 여성들이다.자갈치아지매는 부산의 상징인 자갈치시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 어항인 남항이 들어서자 바지런한 아지매들이 새벽마다 어선에서 싱싱한 생선을 받아 널빤지로 만든 좌대에 올려놓고 팔기 시작한 게 자갈치시장의 기원이다. 난리를 피해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던 1950년대 재첩국 행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낙동강 하구에 지천으로 널린 재첩으로 끓인 재첩국 동이를 머리에 인 재칫국아지매들은 이른 아침부터 가파른 고갯길을 누볐다. 깡깡이아지매는 부산항 인근 영도구 대평동 일대의 수리조선업 종사자들이다. 배 표면이나 저장 탱크 내부에 슨 녹을 떼어 내는 작업을 할 때 망치로 두드리면 ‘깡깡’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부산 사람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1 부산민속의 해’를 맞아 부산시와 함께 기획한 특별전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이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다각적으로 돌아보는 전시의 한 주제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부산 여성들을 조명했다. 1970~1980년대 자갈치시장 풍경, 재첩국 행상을 촬영한 사진과 당시 대기업 회사원 월급보다 2배나 많았던 깡깡이아지매의 월급명세서 등 자료들을 비롯해 재첩 캘 때 쓰는 철재 거리, 깡깡이 망치 같은 작업 도구들을 볼 수 있다. 재칫국아지매가 실제 사용하던 재첩국 판매 리어카도 눈길을 끈다. 제주를 떠나 바깥물질을 가는 출항해녀 중 일부가 영도에 정착해 부산 해녀가 됐다. 국내 최초 잠수복 제작사인 부산 보온상사의 주문서, 잠수복 제작 도구 등이 흥미롭다.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해양도시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내륙인 동래가 중심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항이 근대 개항장으로 개발되면서 해양문화가 활성화돼 기존의 농경문화와 공존하게 됐다. 농사공동체의 민속놀이인 ‘동래야류 탈’, ‘수영야류 탈’과 더불어 해양문화인 ‘좌수영어방놀이’,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동해안 별신굿’이 나란히 전승되고 있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선 조선시대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일본과 교류했던 모습,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에서 수출무역의 거점도시로 성장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 주는 사진과 영상, 유물들이 소개된다. 전시는 8월 30일까지이며, 이후 부산박물관에서 9월 14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린다.
  • 익숙한 듯 새로운 부산을 만나다…국립민속박물관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익숙한 듯 새로운 부산을 만나다…국립민속박물관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

    부산에는 ‘3대 아지매’가 있다. 자갈치아지매, 재칫국(재첩국)아지매, 깡깡이아지매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혼란, 산업화 시대의 격동 속에서 강인한 생활력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삶의 터전을 지켜 온 여성들이다. 자갈치아지매는 부산의 상징인 자갈치시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 어항인 남항이 들어서자 바지런한 아지매들이 새벽마다 어선에서 싱싱한 생선을 받아 널빤지로 만든 좌대에 올려놓고 팔기 시작한 게 자갈치시장의 기원이다. 난리를 피해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던 1950년대 재첩국 행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낙동강 하구에 지천으로 널린 재첩으로 끓인 재첩국 동이를 머리에 인 재칫국아지매들은 이른 아침부터 가파른 고갯길을 누볐다. 깡깡이아지매는 부산항 인근 영도구 대평동 일대의 수리조선업 종사자들이다. 배 표면이나 저장 탱크 내부에 슨 녹을 떼어 내는 작업을 할 때 망치로 두드리면 ‘깡깡’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부산 사람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2021 부산민속의 해’를 맞아 부산시와 함께 기획한 특별전 ‘부산, 바다와 뭍의 나들목’이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다각적으로 돌아보는 전시의 한 주제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부산 여성들을 조명했다. 1970~1980년대 자갈치시장 풍경, 재첩국 행상을 촬영한 사진과 당시 대기업 회사원 월급보다 2배나 많았던 깡깡이아지매의 월급명세서 등 자료들을 비롯해 재첩 캘 때 쓰는 철재 거리, 깡깡이 망치 같은 작업 도구들을 볼 수 있다. 재칫국아지매가 실제 사용하던 재첩국 판매 리어카도 눈길을 끈다. 제주를 떠나 바깥물질을 가는 출항해녀 중 일부가 영도에 정착해 부산 해녀가 됐다. 국내 최초 잠수복 제작사인 부산 보온상사의 주문서, 잠수복 제작 도구 등이 흥미롭다.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해양도시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내륙인 동래가 중심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항이 근대 개항장으로 개발되면서 해양문화가 활성화돼 기존의 농경문화와 공존하게 됐다. 농사공동체의 민속놀이인 ‘동래야류 탈’, ‘수영야류 탈’과 더불어 해양문화인 ‘좌수영어방놀이’,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동해안 별신굿’이 나란히 전승되고 있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선 조선시대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일본과 교류했던 모습, 최초의 근대 개항장으로서 사람과 물자가 활발히 오갔던 풍경,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에서 수출무역의 거점도시로 성장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 주는 사진과 영상, 유물들이 소개된다. 전시는 8월 30일까지이며, 이후 부산박물관에서 9월 14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린다.
  • 가야 고분서 봉황장식 금동관 첫 출토

    가야 고분서 봉황장식 금동관 첫 출토

    아라가야 최고의 지배자 묘역으로 알려진 경남 함안군 말이산고분군(사적 제515호)에서 5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봉황장식 금동관’(鳳凰裝飾 金銅冠)이 국내 최초로 출토됐다. 함안군은 2019년 발굴된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투조장식(金銅透彫裝飾)을 보존처리 및 복원한 결과 봉황장식 금동관으로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사슴·집·배 모양 토기 등 4점의 상형토기가 완전한 형태로 출토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함안군은 금동관에 표현된 두 마리 새는 모습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평북 운산 용호동1호분의 금동판 4매에 나타난 봉황과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環頭大刀)에 장식된 봉황문양 등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 봉황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함안군 관계자는 “이 같은 형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금공품(金工品) 가운데 첫 사례”라고 밝혔다.
  •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봉황장식 금동관’ 국내 첫 출토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봉황장식 금동관’ 국내 첫 출토

    아라가야 최고 지배자 묘역으로 알려진 경남 함안군 말이산고분군(사적 제515호)에서 5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봉황장식 금동관(鳳凰裝飾 金銅冠)이 국내 최초로 출토됐다.함안군은 지난 2019년 발굴조사된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투조장식(金銅透彫裝飾)을 보존처리 및 복원한 결과 봉황장식 금동관으로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사슴·집·배 모양 토기 등 4점의 상형토기가 완전한 형태로 출토돼 화제가 됐다. 이번에 확인된 말이산 45호분 금동관은 길이 16.4㎝, 높이 8.2㎝로 긴 관테인 대륜(臺輪) 위에 봉황 두 마리가 마주보는 형태의 세움장식(입식·立飾)이 올려져있는 모양이다.1매의 동판에 관테와 세움장식을 일체형으로 표현했다. 금동관은 동판 표면에 도안을 그린 뒤 여백부를 뚫어내는 투조(透彫) 기법으로 만들고 앞·뒤쪽 모두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다. 관의 전면에는 두줄로 작은 구멍을 뚫어 관에 부착하거나 추가 장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동관에 장식된 두 마리 새는 한쪽 날개부가 서로 붙어 있고, 눈은 뚫려 있으며, 부리는 아래쪽을 향해 있다. 목은 C자로 바깥쪽으로 꺾여있다. 다리에는 깃이 돌출돼 있고 곡선으로 말려 올라간 꼬리 아래쪽에 사선으로 두 갈래 깃이 표현돼 있다. 머리 장식으로는 좌측 새는 머리위에 삼산(三山) 혹은 삼엽(三葉)모양 장식이 있고 우측 새는 정수리 뒤쪽으로 봉상(棒狀)의 길쭉한 장식이 있다. 함안군은 금동관에 표현된 두 마리 새는 장식모습으로 볼때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평북 운산 용호동1호분의 금동판 4매에 나타난 봉황과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環頭大刀)에 장식된 봉황문양 등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 봉황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함안군 관계자는 말이산 45호분 금동관은 하부 관테와 상부 두 마리 새 모양 세움 장식이 마주보고 있는 대칭 구도로 이같은 형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금공품(金工品) 가운데 첫 사례라고 밝혔다. 금동관을 분석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말이산45호분 금동관은 국내에서 보고된 관 가운데 처음 확인된 형태로, 주요 제작 기법으로 볼때 아라가야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아라가야 금공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말이산45호분 조사를 담당한 (재)두류문화연구원은 무덤이 축조된 시기가 5세기 초로 보고된 것에 비춰볼때 말이산고분군 봉황장식 금동관은 지금까지 보고된 가야 관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옛날옛적 대한민국에 ‘BYC’가 있었다. 오지의 대명사였던 경북의 봉화·영양·청송을 아울러 이르는 표현이다. 이 지역의 영어 표기에서 앞글자만 따 만들었다. 옛날옛적엔 오지의 동의어가 ‘낙후’였다. 요즘엔 다르다. ‘청정’이 동의어다. 숨막히는 도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오지에도 사람은 산다. 풍경도 깃들어 있다. 그 풍경이 무척이나 오지다. ‘BYC’의 가운데 고을, 영양으로 가는 길이다. 여정의 모토는 ‘끝까지 본다’이다. 영양에서도 한발 더 들어간 오지가 목적지다.나라 안에 ‘전설적인’ 오지 이야기들이 꽤 많이 전해온다. 그 가운데 영양 수비면은 ‘오지 이야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하지 싶다. 보통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거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혹은 조선시대에 관군을 피해 숨어 살던 곳 정도로 표현한다. 영양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수비면 끝자락의 오무마을 사람 하나가 설렁설렁 장 보러 나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게 됐단다. 이전까지는 전쟁 난 것도 모르고 지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사실과 허세가 헷갈릴 지경이다. 설령 전쟁 터진 걸 알았다 해도 이 정도의 오지였다면 남의 동네 싸움박질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자작나무 숲으로 ‘핫 플레이스’가 된 죽파리가 바로 그 수비면에 속한 마을 중 하나다.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아주 넓다. 검마산의 능선 두엇이 자작나무 일색이다. 숲의 면적은 발표하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양군에서 ‘자작나무숲 권역 관광자원화 계획’에 포함시킨 면적은 약 31ha다. 산자락에 축구장 40개 크기 정도의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숲은 1993년에 조성됐다. 이 일대가 솔잎혹파리 공격을 받아 황폐화되자 대안으로 자작나무를 심었다. 그 덕에 나이(평균수령 30년)도, 크기(평균 높이 20m)도 비슷한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게 됐다. 자작나무 숲은 차분하면서도 화사하다. ‘자작자작’한 하얀 수피와 ‘초록초록’한 이파리들이 동화 속 세계를 펼쳐 놓았다. 숲에 들면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다. 그러니 오래전 한 통신사의 광고 카피처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 두셔도 좋겠”다. 자작나무 숲 하면 흔히 강원 인제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떠올린다. 모양새로만 보면 사실 둘은 매우 비슷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이 덜 개발됐고 더 불편하다는 정도다. 수도권 접근성에서는 원대리가 앞선다. 한데 죽파리엔 이를 상쇄할 강력한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들머리에서 자작나무 군락지로 이어지는 2㎞ 정도의 숲길과 계곡이다. 숲길은 가파르지 않다. 동네 뒷산을 걸어도 이보다는 더 숨이 차지 싶다. 나무들이 빼곡한 숲길엔 만지면 묻어날 듯한 초록빛이 한가득이다. 길 아래 계곡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원의 골짜기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탁족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영양군에서 앞으로 이 일대에 힐링센터, 전기차 등 친환경 시설들을 들이겠다는데, 부디 최소한에 그치길 빈다. 이곳은 ‘불편’이 더 잘 어울린다.자작나무 숲에서 수하계곡 쪽으로 가면 ‘국제밤하늘보호공원’이 나온다. 국제밤하늘협회로부터 ‘은밤’(Silver Night) 등급을 받은 곳이다. 사막처럼 특수한 환경을 제외하고, 육지에서 가장 투명한 밤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이란 의미다. 오래전 표현 방식으로는 ‘별들의 고향’쯤 되려나. 이 일대는 빛 공해가 거의 없다. 모든 조명들은 낮게 땅을 비추고 가로등의 조도도 현저히 낮다. 그 덕에 은하수, 유성 등 밤하늘에 펼쳐지는 별들의 쇼를 관측할 수 있다. 여름철은 은하수의 시간이다. 뜨는 시간이 빨라져 관측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밤하늘보호공원 가운데엔 반딧불이천문대가 있다. 우리 은하계 행성은 물론 멀리 심연의 ‘딥 스카이’까지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을 갖췄다. 장비 없이, 그저 근처 풀밭에 누워 봐도 된다. 천문대의 박찬 연구원은 “사실 별은 맨눈으로 관찰 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말했다. 한데 날씨가 변수다. 날이 흐려 별들을 볼 수 없을 때는 반딧불이를 보면 된다. ‘형설지공’의 주인공이자, ‘개똥벌레’라는 애칭으로 흔히 불리는 녀석이다. 단언컨대 반딧불이는 인공의 빛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단 ‘1’의 소리도 없이 연둣빛 불빛을 반짝이며 제 반쪽을 찾아 비행하는 녀석의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서정적이다.칠흑같이 어두운 숲에서 반딧불이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검은 하늘에 뜬 초록별이 저와 같을까. 아쉽게도 이번 여정에선 많은 반딧불이와 조우할 수 없었다. 절정의 혼인비행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낱마리라도 개똥벌레가 주는 위로의 힘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보통 초여름에 관찰되는 애반딧불이는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볼 수 있다. 한데 올해는 꽃이 그랬듯, 반딧불이 출현 시기도 당겨졌다. 혹시 애반딧불이를 못 만났다면 늦반딧불이를 기대하시길. 8월 중순∼9월 중순에 또 한번 이 일대를 초록별의 세계로 만든다.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가 널리 알려진 반딧불이 관찰 ‘포인트’다. 천문대 바로 앞에 있다.밤하늘공원 일대엔 밀밭이 많다. 장수포천 등의 물줄기를 따라 누렇게 익은 밀밭들이 주르륵 이어져 있다. 박목월의 시구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밀밭 끝엔 ‘비지미골’이 있다. 오래전에 베를 길러 길쌈을 많이 했다는 마을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저 대여섯 집 정도만 남은 상태다. 비지미골엔 투방집 ‘김대준 가옥’이 남아 있다. 안내판은 이 투방집에 대해 “200년을 훌쩍 넘긴 집”이라고 적고 있다. 한데 영양군청 누리집엔 1875년 이전에 처음 지어졌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 사이에 50년 정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수세대를 이어 온 집인 것만은 분명하다. 투방집은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집이다. 영양의 산골마을 주민들이 흔히 살던 가옥 형태다. 벽은 흙 등으로 보강했고 지붕은 짚이나 억새, 굴피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덮었다. 김대준 가옥은 ㄱ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와 헛간 등으로 이뤄졌다. 건립 당시의 원형이 잘 유지된 상태다. 이 투방집의 안주인이었던 김통분 여사에 따르면 안채의 정지(부엌) 옆은 소가 살던 외양간이었다고 한다. 정지의 온기를 함께 나눌 만큼 소와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이 집의 구조가 말해 주고 있다. ●수하계곡 끝자락 ‘오무마을’ 천문대 앞으로는 수하계곡이 흐른다. 계곡이 많은 영양에서도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계곡이다. 수하계곡 끝자락에 그 ‘오무마을’이 있다. 오무마을은 고립무원의 마을이다. 사람도 차도 이 마을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온 길을 그대로 달려가는 건 물길밖에 없다. 수하계곡 맑은 물은 산자락을 몇 굽이 돌아 울진 땅의 왕피천과 연결된다. 예전엔 4륜구동 지프로 물길을 몇 번 건너야 마을에 이를 수 있었다. 요즘은 오무마을 앞까지 도로가 나 있다. 예전 같은 불편함은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길이 끊긴 건 마찬가지다. 영양군이 울진 왕피리마을까지 이어진 옛길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환경 당국의 반대를 뚫고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무속인들이 ‘접신(接神)의 땅’이라 여기는 일월산 자락에 주실마을이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 입향조가 살던 호은종택, 지훈문학관 등 볼거리가 많다. 마을 어귀엔 주실 숲이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이 숲을 이룬 곳이다. 주실마을 숲은 ‘시인의 숲’이라고도 불린다. 조지훈의 시비가 이 숲에 있어서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연둣빛이 일품이다.영양읍에서 가까운 삼지마을은 비단조개를 닮은 독특한 형태가 일품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 3개가 있다 해서 삼지(三池)마을이다. 마을이 비단조개 모양을 하게 된 건 물길의 변화 때문이다. 옛 삼지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 등과 같은 물돌이동이었다. 한데 물길이 변경되면서 물돌이동엔 더이상 물이 돌지 않게 됐고, 습지를 거쳐 서서히 육지가 됐다. 이를 우각호라 부른다.●산자락에 꽁꽁 숨은 삼지마을 모전석탑 삼지마을에 들면 모전석탑부터 찾아야 한다. 모전석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일컫는다. 아름답기로는 산해리의 봉감모전석탑이 가장 앞설 테다. 국보로 지정됐으니 당연하다. 한데 삼지리 모전석탑도 독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현 탑저리, 탑밑못 등의 지명도 이 전탑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지리 모전석탑은 마을 산자락에 꼭꼭 숨어 있다. 이정표가 부실한 데다, 오르는 길도 경사가 급하고 비좁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전탑은 삼국통일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3층이었는데 현재는 2층만 남아 있다.전탑이 독특한 건 기단이 기반암이기 때문이다. 전탑이 선 곳은 절벽 끝자락의 햇살이 스며드는 자리다. 바위 하나가 기반암과 분리돼 있고, 전탑은 그 바위를 기단 삼아 세워졌다. 주변 풍경도 독특하다. 사방이 붉은빛 감도는 바위다. 붉은 절벽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여기서 샘이 솟는다. 이 자리가 바로 신령스런(靈) 동굴(穴)이란 뜻의 영혈이다. 신라시대엔 이 자리에 영혈사(靈穴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연대암이란 작은 암자와 관음전 등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8월이 되면 삼지마을 연못엔 법수홍련이 핀다. 가야시대부터 전해져 온 토종 연꽃이다. 3㎞ 길이의 탐방로를 따라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구한말 김도현이 사재 털어 쌓은 검산성 이제 검산성을 방문할 차례다. 구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벽산 김도현(1852~1914)이 사재를 털어 세운 성이다. 검산성은 청기면 검산(劒山) 자락을 끼고 들어섰다. 바위 절벽이 있는 동북쪽을 ‘배수의 진’으로 삼고, 나머지 삼면을 성벽으로 둘러쳤다. 읍성이나 산성처럼 오랜 기간 거주하며 농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기보다는, 여차하면 일본군과 동귀어진하려는 최후의 결전장으로 조성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성의 규모는 작다. 현재 서쪽 200m가량과 남쪽 일부만 남아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성’이라기보다 ‘성터’에 가깝다. 성벽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리 알려지지 않았고,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던 듯, 성 안은 웃자란 띠 등의 잡초와 밤꽃 향기만 무성하다. 어지간한 산성보다 더 외진 느낌이다. 번다한 곳을 피해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딱일 듯하다. 성 아래 마을에 벽산생가가 있다. 아, 검산성 가는 길에 청기면 소재지는 꼭 둘러보시길. 아주 작은 마을인데도 숭조고택, 청계정 등 볼만한 고택들이 4채에 이른다. 영양의 전통술인 초화주를 만드는 공장도 이 마을에 있다. ■여행수첩 →죽파리 자작나무 숲을 가려면 내비게이션에서 장파마을회관을 찾으면 된다. 죽파마을회관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이다. 여기서 서낭당을 끼고 돌아 1㎞쯤 오르면 바리케이드가 나온다. 차는 여기에 대고 걸어가야 한다. →영양 생태공원사업소(www.yyg.go.kr/np)에서 반딧불이천문대 부근 캠핑장과 수련원, 펜션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천문대 체험 예약도 할 수 있다. →승우여행사에서 영양과 울진 등 경북의 오지마을을 돌아보는 ‘한여름의 시원한 영양·울진 1박 2일 여행’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과 반딧불이생태공원,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십이령길) 등을 돌아본다. 봉화군 봉성리의 숯불돼지구이 등 맛집들도 일정에 포함됐다. 특히 봉성 희망정은 숯불돼지구이뿐 아니라 곁들여 내는 반찬도 정갈하고 맛있다. 7월, 8월 두 달간 1·3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각각 출발한다. 승우여행사 누리집(www.swtour.co.kr) 참조.
  •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모셔올 중장기 로드맵 짭시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모셔올 중장기 로드맵 짭시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봉환이 중단됐지만, 유해 봉환을 위한 중장기 로드맵을 점검하고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격전지와 중국 등지로 강제동원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해 봉송환 운동을 벌이는 황동준 전 행정안전부 강제동원희생자유해봉환과장은 29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외에서 어렵사리 신원이 확인된 유해마저 코로나19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며 “최근 강제징용과 위안부 관련 판결이 사회적 이슈가 된 관심만큼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 봉환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황 전 과장은 “남태평양 타라와섬에서 어렵게 찾은 최병연씨의 경우 유전자 감식을 통해 유족을 찾아 지난해 국내로 유해를 봉환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출입국이 금지돼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며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동원된 연인원 125만여명 중 20만여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위패라도 돌아온 희생자는 1만 2000여명뿐이다. 그는 “2019년 중국 하이난성 싼야시에 있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집단 매장지 ‘천인갱’을 찾았을 때 1000여구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이를 계기로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 봉환은 저의 운명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당시 천인갱에서 ‘제가 반드시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눈물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황 전 과장은 “그동안 중국 하이난성, 태평양 격전지, 일본 조세이 탄광 등지에서 유해 조사 및 발굴 시도가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다”며 “국외 사업 추진이 어려워도 국내에서 유해 발굴 및 봉환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까지 멈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올 1월 시행된 사할린동포특별법과 관련, 그는 “사할린 동포 피해구제 및 유해 발굴·봉환 등 국가의 책무를 명시했지만 현지 500여명의 1세대와 3만여명 동포들의 간절한 염원에는 못 미치고 있다”며 “사할린뿐 아니라 태평양 등지로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천인갱 유골은 지역 개발을 핑계로 언제 파헤쳐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본 사찰 등지에 흩어져 있는 수천 위의 유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사할린 강제동원 희생자의 원활한 유해 봉환을 위해 진행 중이던 한러 정부 간 협정도 진척되지 않고 있다. 황 전 과장은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유해는 훼손되지 않고 봉환돼야 한다”며 “강제동원 희생자에 대한 유해 봉환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기본 의무”라고 강조했다.
  • 공주 송산리 29호분, 왕릉급 규모 재확인

    공주 송산리 29호분, 왕릉급 규모 재확인

    일제강점기인 1933년 발굴 조사됐지만 정확한 위치와 실체 등이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 송산리 29호분의 규모가 왕릉급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공주시는 88년 만에 다시 이뤄진 송산리 29호분 발굴 조사 결과 무덤 주인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위치나 구조 면에서 왕릉급으로 추정된다고 28일 밝혔다. 백제 웅진기(475~538) 왕릉원으로 알려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는 현재 무령왕릉과 1~6호분으로 명명된 고분 등 총 7기의 무덤이 정비돼 있다. 하지만 기존 조사에 따르면 그보다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송산리 고분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 1∼4호분이 존재한다. 1∼5호분은 백제의 전형적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고, 무령왕릉과 벽화가 있는 6호분은 벽돌(전돌)을 쌓아 조성한 전실분이다. 이번에 조사한 29호분은 6호분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천장을 비롯한 상부는 모두 유실된 상태였지만 하부는 잘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방인 현실, 고분 입구에서 현실까지 이르는 길인 연도(羨道)와 묘도(墓道)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이다. 현실의 규모는 남북 길이 340~350㎝, 동서 길이 200~260㎝로 상당히 큰 편이다. 송산리 1~4호분과 유사한 규모일 뿐 아니라 전실분인 6호분보다도 큰 규모여서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무덤방의 벽체는 1∼5호분처럼 깬돌인 할석을 썼지만 바닥과 관을 두는 관대 두 점은 무령왕릉이나 6호분처럼 벽돌을 깔아 만든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연구소는 “이를 통해 송산리고분군 내 고분들의 축조 순서와 위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백제문화권 핵심유적 중장기 조사연구 계획’의 하나로 진행하는 공주 송산리고분군 학술조사의 첫 사례다. 연구소는 “29호분 발굴 조사를 시작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잊힌 고분들을 하나씩 찾아내 백제 왕릉원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덧붙였다.
  • 88년 만에 다시 드러난 공주 송산리 29호분, 백제 왕릉급 무덤 재확인

    88년 만에 다시 드러난 공주 송산리 29호분, 백제 왕릉급 무덤 재확인

    일제강점기인 1933년 발굴 조사됐지만 정확한 위치와 실체 등이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 송산리 29호분의 규모가 왕릉급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공주시는 88년 만에 다시 이뤄진 송산리 29호분 발굴 조사 결과 무덤 주인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위치나 구조 면에서 왕릉급으로 추정된다고 28일 밝혔다. 백제 웅진기(475~538) 왕릉원으로 알려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는 현재 무령왕릉과 1~6호분으로 명명된 고분 등 총 7기의 무덤이 정비돼 있다. 하지만, 기존 조사에 따르면 그보다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송산리 고분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 1∼4호분이 존재한다. 1∼5호분은 백제의 전형적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고, 무령왕릉과 벽화가 있는 6호분은 벽돌(전돌)을 쌓아 조성한 전실분이다.이번에 조사한 29호분은 6호분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천장을 비롯한 상부는 모두 유실된 상태였지만 하부는 잘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방인 현실, 고분 입구에서 현실까지 이르는 길인 연도(羨道)와 묘도(墓道)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이다. 현실의 규모는 남북 길이 340~350㎝, 동서 길이 200~260㎝로 상당히 큰 편이다. 송산리 1~4호분과 유사한 규모일 뿐 아니라 전실분인 6호분보다도 큰 규모여서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무덤방의 벽체는 1∼5호분처럼 깬돌인 할석을 썼지만, 바닥과 관을 두는 관대 두 점은 무령왕릉이나 6호분처럼 벽돌을 깔아 만든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연구소는 “이를 통해 송산리고분군 내 고분들의 축조 순서와 위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백제문화권 핵심유적 중장기 조사연구 계획’의 하나로 진행하는 공주 송산리고분군 학술조사의 첫 사례다. 연구소는 “29호분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잊힌 고분들을 하나씩 찾아내 백제 왕릉원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덧붙였다.
  •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 ‘투자왕’ 조준호/ 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 ‘투자왕’ 조준호/ 손성진 논설고문

    서울 명동에 사보이호텔이라는 1급 호텔이 있다. 작은 호텔이지만 64년의 역사를 가진 국내 최초의 민자 호텔이다. 이 호텔의 설립자는 조준호(1903~1967)라는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투자왕’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옆 광고를 보면 조준호(趙俊鎬)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준호는 구한말 관료이자 갑부였던 조중정의 맏아들로 일본 주오대를 졸업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1925년 말 경영이 어렵던 일간지 시대일보에 사재를 투자, 발행인으로 취임해 살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남미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귀국한 조준호는 1930년 조선윌사석유회사에 이어 이듬해 동아이발기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4년에는 동아증권을 창립해 주식 투자와 중개로 큰돈을 벌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전략이었다. 투매장에서 주식을 대거 사들여 회복되면 파는 식이다. 코로나 폭락장에 투자한 사람들이 큰 수익을 올린 것과 같다. 2·26사태(1936년 일본 장교들의 쿠데타)로 주가가 폭락하자 한 해에만 20만원(현재 가치 약 200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동아증권은 통신망을 잘 갖추고 일본 주식시장 시세를 빨리 전달해 일본 업체들을 물리치고 주식 거래 시장을 장악했다. 1932년 조선취인소(증권거래소)가 설립된 후 광복 때까지 전체 매매고의 10% 이상을 동아증권이 중개했다. 조준호는 인천에 기미취인점(期米取引店)을 열어 쌀 투기를 병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식과 함께 쌀도 투기 대상이어서 선물거래도 할 수 있었다. 광고에 보이는 ‘기미’(期米)는 주식 투자처럼 장기 거래를 목적으로 매매되는 곡물을 뜻한다. 조준호는 1935년 기미취인점을 차려 2년 후 인천 미두(米豆) 시장의 60%를 점령했다. 조준호가 거둬들인 총수익은 300만원(현재 가치 3000억원 이상)을 넘어섰다. 이는 당시 논 6만 마지기(약 1200만평)를 사들일 수 있는 거액이었다. 조준호는 여간첩 김수임의 연인이었고 월북해 북조선 인민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남로당 이강국의 처남으로 이강국의 영국 유학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투자 수익으로 거액을 거머쥔 조준호는 광복 후 부동산투자개발·건설회사인 ‘조선기업’을 설립하고 벽돌 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동산 업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그 돈으로 유학 시절 보았던 런던 사보이호텔에서 이름을 따 1957년 사보이호텔을 창업했다. 이 호텔은 아들 조원창 회장을 거쳐 손자인 조현식 대표가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사보이그룹은 현재 부동산개발업, 호텔·외식, 문화·콘텐츠, 교육 분야에 10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 땅 위 순교의 상처 땅 아래 스며… 그 땅에 기대어 살아가는 지금

    땅 위 순교의 상처 땅 아래 스며… 그 땅에 기대어 살아가는 지금

    특별한 장소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 장소가 지닌 역사적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88올림픽처럼 우리 역사에서 오래도록 자부심을 갖고 축하해야 할 곳에는 웅장한 상징물을 세우기도 하지만 위무해야 할 장소에는 추모비나 위령비를 세운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년 넘도록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라면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한국천주교의 성지 중 성지에 조성된 서울 서소문 역사공원에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땅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은유적으로 풀어내면서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 준다. 도심의 대로에서 살짝 비켜 간 곳에, 그것도 도심의 자그마한 공원 지하에 들어앉아 있어서 사전 정보가 없으면 지나치기 쉽지만 엄청난 공간의 아우라를 지닌 곳이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설계를 맡았던 윤승현 중앙대 건축공학과 교수와 보이드아키텍츠의 이규상 건축가를 만나 이곳의 의미를 짚어 봤다.붉은 벽돌로 된 벽이 사방을 둘러싼 이 이국적인 곳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로 꼽히지만 워낙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다. 박물관은 개관 6개월 만에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바람에 문을 닫아야 했으니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도 하다. 윤 교수는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폭력성과 시대적 편협성에 반하는 항거의 상징적 장소임에도 지끔껏 이런 역사성과 장소성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장소적 가치를 간과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면서 “숱한 애환이 서린 이 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다”고 의미를 전했다.●3인 건축가 ‘지하와 지상의 관계’에 초점 지금은 사라졌지만 돈의문과 숭례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이 있었다. 도성 축조와 함께 1396년 건립됐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소의문의 다른 이름은 서소문. 한양의 4개 소문(小門) 가운데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군과 인천군으로 통하던 관문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강의 지천인 만초천(蔓草川·욱천이라고도 함)을 따라 일찍이 상권이 형성됐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터라 조선 중기 이후 300여년 동안 국사범들의 처형장으로도 쓰였다. 처형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이 시신을 밖으로 내가는 ‘시구문’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인이 신앙과 신념을 위해 순교했다. 그 숫자가 수만 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전한다. 이 장소는 1973년 서소문 근린공원으로 지정됐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 등으로 지역과 단절된 채 외딴섬처럼 버려졌다. 1996년 공원 지하에 중구의 재활용쓰레기처리장과 900여대의 공영 주차장이 건립되면서 순교자들의 신념을 담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상징성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2011년 7월 국유지인 서소문 근린공원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박물관을 짓는 사업을 제안하면서 대역사가 시작됐다. 윤승현·이규상·우준승 팀이 현상 설계에서 당선돼 5년간의 ‘험난한 설계와 공사’ 기간을 거쳐 2019년 6월 완공됐다. “가장 공공적인 장소는 그 지역의 역사와 장소가 품은 깊이를 담아내 고유한 분위기로 펼쳐질 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서 이 장소가 전하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천주교인들뿐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가치 있는 장소로 거듭나는 유효한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규상 건축가가 말하는 설계의 방향이었다. 세 건축가는 장소의 종교적 상징성을 살리되 종교를 초월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과거와 현재, 기념성과 일상성을 대비하고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냈다. 특히 기존의 근린공원과 재활용쓰레기처리장, 지하 4개층 3만 6000㎡의 공영주차장을 재편해 역사기념공간을 건립하는 작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땅 위와 땅 아래’, 즉 지하와 지상의 관계였다. “과거의 역사는 기억에 남고 현실은 삶으로 지속된다고 하지만 이 두 가지 개념은 별개의 것일 수 없습니다. 땅 위에서 벌어진 상처와 기념은 그 땅 아래로 스며들었고, 우리는 그 땅에 기대어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윤 교수는 “지상의 역사성을 담은 공원과 그에 기반한 지하 역사박물관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그들 간의 관계가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이 땅의 위아래를 넘나드는 공간의 흐름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단초가 됐다”면서 ‘대지의 결속’을 설명했다. 그러니 이 역사적 공간의 답사는 지상의 공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서소문역사공원이라 이름 지어진 공원에는 천주교 박해 때 이곳에서 참수된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현양탑이 서 있다. 순교자 현양탑은 원래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 중 44명이 시성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이후 서울시의 각종 시설물 설치 계획에 따라 부득이 철거했다가 1999년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공원에는 과거 처형장의 망나니가 피 묻은 칼을 씻었다고 하는 ‘뚜께 우물터’, 조각가 티머시 슈왈츠의 작품 ‘노숙자 예수 2013’도 설치돼 있다.추모의 기능과 장소의 의미들을 도시의 일상적 문맥 안으로 들여놓은 공원은 사방이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녹색 띠를 이룬다. 중앙부는 잘 다듬어진 잔디광장에 지하에서 올라온 3개의 구조물이 서 있다. 붉은 벽돌과 거친 느낌의 노출 콘크리트, 내후성 강판의 물성이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구조물은 지하 공간의 존재감을 알려 주는 동시에 지상의 빛을 지하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다. 윤 교수는 “원래 이 마당에 33m 높이의 메모리얼 타워를 배치해 자연스럽게 공원의 지반과 하늘과의 관계를 만들면서 작지만 알찬 역사공원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도록 할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서남쪽 계단에 그나마 2층 높이 탑이 외부인들에게 공간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 역할을 한다. 공원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순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 있는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지하의 박물관은 종교적 공간이자 문화적 공간이다. 이 땅의 역사적 기록과 유물들을 전시하는 상설전시관과 기획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공간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무척 단순한 구조다.●주차장 격자모듈이 다층구조로 연결 윤 교수는 “기존의 주차장 일부 구조를 활용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히 주차장 공간의 효율적 측면만으로 고려해 설정된 격자모듈(가로 7.5m×세로 8m)이 공간의 기본 그리드(격자판)가 됐다”면서 “135개의 단위 입방체 격자판이 지하 2층과 3층에 다층적 구조로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증식 및 통합돼 가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각 단위 격자는 십자 기둥에 의해 독립적 공간이 된다”고 말했다.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정하상(정약용의 조카)을 추모해 만든 성 정하상 기념 경당은 방문자들이 이 장소의 본질적 의미를 체감하도록 만들어졌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한 내리막 경사를 따라 경당에 이르게 된다. 경당을 지나 순례길 같은 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어둠이 짙게 드리운 기념 전당 ‘콘솔레이션 홀’에 이른다. 땅속 14m 깊이에 2m 높이로 떠 있는 가로 25m, 세로 25m, 높이 10m의 입방체 튜브는 ‘신념을 다한 위인들’을 위한 기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 한가운데로 한 줄기 빛이 쏟아진다. 이규상 건축가는 “공원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빛은 이 장소에서 사라진 이들의 신념이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서 영원히 비치는 것을 은유하면서 이 홀 전체가 박물관의 가장 소중한 전시물이 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있다 보니 빛이 그리워진다. 만초천을 상징하는 바닥의 희미한 빛을 따라가 문을 나서면 드라마틱하게 정방형의 하늘을 품은 광장이 나타난다. 가로·세로 각 33m, 높이 18m의 무표정한 붉은 벽돌에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시선을 하늘로 유도하는 하늘 광장이다. 압도적인 스케일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윤 교수는 “과거의 아픔이 하늘과 교우함으로써 영원히 빛나게 되길 기대하는 공간적 장치”라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묵상의 공간이 될 하늘 광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의를 향한 용기와 무한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 같았다.함혜리 칼럼니스트
  • 아귀찜·복국 잡솨봐… 갯장어샤부 빼면 섭합니데이

    아귀찜·복국 잡솨봐… 갯장어샤부 빼면 섭합니데이

    [이우석의 미시 여행] <3>‘경남의 명동’서 먹거리 타운으로… 옛 마산의 기개 오롯한 창원 창동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일대, 오늘은 창원이 아니고 ‘마산’이다. 2010년 마산 창원 진해의 통합 전, 구 마산시의 원도심 지역이다. 마산에서 창동은 서울 명동보다 컸다. 명동과 종로, 무교동, 남대문시장 등을 모두 합친 개념이 창동이었다. 실제 면적이 큰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도심이라 그렇다. 1990년대 초반까지 마산에서 “시내 나가자”고 하면 창동으로 갔다. 대표적 문화시설인 극장이나 나이트클럽에 가려면 마산밖에 없었다. 창동 길을 걷다 보면 그날 외출한 사람들을 죄다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마산어시장, 부림시장, 유흥가인 오동동과 이어져 밤낮으로 소비가 이뤄지는 특구를 이뤘다.창동(倉洞)은 조선시대 대동법 시행 이후(1760년) 조창이 생겨났대서 붙은 지명이다. 인근 농산물과 건어물 등 세곡이 여기에 모였다가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이미 돈이 돌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에도 수출자유지역으로 번성했다. 경남 최대 어시장인 마산어시장에 물건을 떼러 온 상인들과 제수용 생선을 사러 멀리 산청, 함양, 진주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한일합섬 등 섬유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직장인들도 주말이면 창동에 나와 도심 나들이를 즐겼다. 당연히 술집, 식당, 찻집 등 외식산업이 발달하고 세련된 옷가게와 서점, 금은방 등이 창동 거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곳간이 차면 예술혼이 무르익는 법. 조각가 문신, 시인 김춘수, 이은상, 천상병, 정진업 등이 마산에서 자라며 감성을 키웠다. ‘경남의 시내’였던 창동은 주거지역의 이동과 대체상권 형성 등으로 인해 한때 상권을 잃어버리며 빛이 바랬다. 하지만 창원시가 십여 년 전부터 진행한 도시재생 프로젝트 덕에 과거의 영화를 되찾아가고 있다. 창동은 단지 법정동 ‘창동’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마산어시장 일대부터 복집골목, 오동동 아귀찜골목, 창동 예술촌, 부림시장을 잇는 원도심 벨트를 의미한다. 마산어시장부터 들른다. 엄청나게 크다. 아쿠아리움이 따로 없다. 요즘은 제철인 갯장어가 나온다. 갯장어는 개(犬)장어란 뜻이다. 이빨이 날카롭고 하도 잘 물어댄대서 개장어다. 갯장어는 육수를 팔팔 끓여 샤부샤부로 찰방찰방 슬쩍 익혀 먹으면 된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어시장 바닷가 쪽에 장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몰려 있다. 붕장어도 판다. 고추장 양념이나 소금구이로 구워 파는데 싱싱한 놈은 ‘부산식’(마산 사람들이 화를 낼 테지만)으로 다짐 회를 썰어 달래도 된다. 출입구가 여러 곳인데 입구 쪽엔 반드시 식당가가 있다. 들어오거나 나갈 때 뭔가를 꼭 먹게 되는 이유다. 젓갈이나 건어물 코너에는 이것저것 살 것도 많다. 딱 어시장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반나절은 족히 지나간다.길을 건너 오동동 쪽으로 오르면 복국 골목이 있다. 곳곳에 ‘복’이라 쓰인 간판 일색이다. 왠지 복 받는 느낌이다. 복매운탕이나 복맑은탕이 아니라 복국이다. 시원하게 끓여 한 뚝배기씩 내 준다. 집집마다 조금씩 메뉴가 달라 전골을 파는 집도 있다. 마산만에서는 복어가 많이 잡힌다. 일찌감치 복국이 발달한 이유다. 가장 오래된 ‘남성복집’은 양복을 파는 집이 아니다.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개업한 유서 깊은 복국집이다. 3대째 운영하고 있다. 미나리를 넣은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라 아침이나 늦은 밤 해장거리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창동 어귀에 접어들면 장을 보러 온 행인이 많이 지난다. 부림시장에서 푸성귀를 사고 어시장에서 생선을 사 저녁상을 차리려는 마산 시민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과거 경남의 대표적인 전통 재래시장답게 주전부리도 푸짐하다. 이미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날 대로 난 6·25떡볶이는 물론 명태 한 마리를 통째로 지져 주는 명태전, 참기름 냄새 고소한 꼬마김밥집 등 시장 안에는 ‘뭔가 살 일 없는’ 내가 가도 한참을 머물 수 있다. 6·25떡볶이는 시장 좌판 노점으로 시작해 어엿한 점포를 이루며 ‘전국구’ 떡볶이 맛집으로 소문났다. 1970년대까지도 좌판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모여 쭈그리고 앉아 떡볶이를 먹었다. 그 모습이 한국전쟁 당시 배급장 풍경 같대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떡볶이 그릇을 받치는 화분받침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쫀득한 떡에 진한 어묵의 풍미가 배어난다. 후루룩 허기 때우기 좋은 맹숭한 잡채도 판다.부림시장 입구 쪽에서 나오면 창동에서도 가장 중심가가 펼쳐진다. 분식점이 많다. 성지여고 학생도, 한일합섬 여공도 주말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호 웃음보를 터뜨리며 먹던 분식들이다. 우동과 메밀국수를 잘하는 만미정, 떡볶이와 팥빙수 명가 복희집, 새로 생긴 짬뽕맛집 울트라반점 등에서부터 전통의 고려당 제과 등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1970년대 초반 문을 연 창동복희집 팥빙수는 정말 예스럽다. 들들 갈아 낸 통얼음에서 쏟아진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장비의 장팔사모처럼 순식간에 혀를 베며 냉기를 집어넣는다. 직접 쑨 고소하고 달달한 통팥이 “내가 진정한 팥빙수요”라고 외치는 듯하다. 떡볶이와의 궁합도 ‘최수종·하희라 커플’처럼 딱 맞아떨어진다.1959년 개업한 마산 고려당은 오랜 세월 마산시민의 입맛을 지켜 온 노포 베이커리다. 걸핏하면 싹 갈아엎는 서울과 달리 마산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맛 좋은 ‘빠다빵’으로 소문난 고려당 빵집도 그대로 남았다.초밥 노포도 당당히 세월을 거스른 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창동 신라초밥은 신라시대보다는 ‘좀 많이 늦은’ 1977년 개업한 집이다. 서울 강남처럼 세련된 ‘오마카세’(주방장에게 맡긴다는 뜻의 일본어) 일식집은 아니다. 호주머니 사정 가볍던(지금도 뭐 별반 나아지진 않았다) 필자의 어린 시절, 창문으로 흘끔흘끔 엿보던 그 옛날식 초밥집 분위기 그대로다. 주방장이 정성껏 깔끔하게 빚어내는 초밥은 이미 일본의 ‘스시’가 아니다. 우리 입맛이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김치를 얹은 김치초밥이 이 집의 간판 메뉴다.창동에는 예술촌이 있다. 화가, 디자이너, 공예 등 예술인이 상주하며 작업을 하고 작품을 판매한다. 관광객들은 50여개 입주시설과 12개 체험공방에서 마산의 우수한 ‘예술 유전자’를 일부 수혈받고 갈 수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골목을 거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파리의 뒷골목에 온 듯하다. 곳곳이 포토존이라 인증샷 투어의 재미도 쏠쏠하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마산시민의 오랜 약속 장소인 ‘학문당 서점’과 시민극장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학문당 서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나 시민극장은 영화관 대신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모했다. 개관 100년, 문 닫은 지 20여년 만에 시민극장이란 이름으로 지난 4월 다시 문을 열었다. 물리적 공간은 좁지만 넓고 깊은 예술 세계가 담긴 창동 예술촌을 차근차근 둘러보고 문신미술관이 있는 ‘가고파 꼬부랑길’을 걸어 보면 마산의 야경과 그 안에 숨은 멋을 제대로 느껴 볼 수 있다.창동과 오동동 사잇길에는 ‘상상길’이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에게 응모를 받아 그들의 이름을 타일로 새겨 조성했다. 국내 딱 한 곳 창원 창동밖에 없다. 멀리 외국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길이 있다면, 게다가 주변에 아름다운 예술촌까지 있다면, 어찌 가 보고 싶지 않을까. 색색 타일로 수놓은 길은 창동 예술촌의 중앙을 지나 여러 테마의 골목을 연결한다. 조만간 역병이 물러가고 나면 이곳에서 ‘창원’과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먼 길을 떠나온 각국의 외국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창동에서 좁은 찻길을 건너면 바로 오동동이다. 오동동 타령의 가사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에 나오는 바로 그 유명한 동네다. 오동추야(梧桐秋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 밤을 뜻한다. 가을 밤 운치나 동동주 한 사발의 흥겨움, 기생의 장구 치는 소리, 한량들의 술놀음 등 이 모두가 오동동으로 귀결된다. 오동동은 그런 곳이다. 전국을 통틀어 이토록 술집 골목을 흥겨이 노래한 적이 있었나. 아마도 오동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유흥가일 것이다. 지금 기생집의 흔적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다만 달빛 아래 좁은 골목에서 비틀거리며 튀어나오는 나카오리(중절모) 차림 시인의 환영이 보일 듯하다. 오동동 골목 어디선가 상을 때리는 젓가락 장단이 들려올 듯도 하다.지금의 오동동은 아귀찜과 통술거리로 더욱 유명하다. 창동에서 이어진 골목엔 통술집이 줄을 섰고, 복국골목으로 내려가는 길엔 아귀찜 식당들이 가득하다. 마산 특유의 술문화인 ‘통술집’은 통영 다찌집, 진주 실비집, 전주 막걸리집과 비슷한 방식이다. 사실 통술은 예전 우리나라의 술문화였다. 안주를 따로 팔지 않고 술을 주문하면 먹을 만한 안주를 해 주는 것이다.이젠 통술집도 많이 바뀌었다. 요즘이야 예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분위기도 아니고 관광객들이 몰려와 안주만 바라니, 지금은 대부분 ‘한 상에 얼마, 몇 인 상에 얼마’ 하는 식으로 영업한다. 아무튼 제철 재료나 특별한 안주를 한상 가득 깔아 주니 물가가 턱없이 높은 서울에서 온 이들로선 눈이 휘둥그레진다.제철 안주를 찌고 볶고 삶아서, 때론 생으로 내온다. 호래기(참꼴뚜기)부터 멍게, 부침개, 냉채, 전복회, 오만둥이찜, 미더덕찜, 가오리, 오징어볶음, 소고기 장조림, 생선구이, 찌개, 회까지 줄을 이어 한 상에 연착륙한다. 어떠한 입맛에도 맞출 수 있는 구성이다. 아, 물론 집집마다 계절마다 구성은 달라진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술을 많이 주문할수록 안주는 더 나온다. 그래서 필자는 통술집에서 거의 ‘국빈급’ 환대를 받는다. 통술골목에서 거나하게 취하면 안 된다. 아직 아귀찜이 남았다. 역시 마산은 아귀찜이 가장 유명하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아귀찜집 간판에는 보통 ‘마산’을 쓴다. 흉측하게 생겨서 어부들이 죄다 버렸다던 아귀다. 자연적으로 말라비틀어진 아귀를 주워다 불려 콩나물을 얹어 찜을 했더니 그게 맛이 좋아 지금의 ‘값비싼’ 안줏거리가 된 신데렐라 생선이다. 아귀는 투실하고 시원하면서도 비린내가 없어 칼칼한 양념의 찜은 물론 수육이나 전골도 좋다. 특히 부드럽고 녹진한 간과 쫄깃한 껍질 등 버릴 것도 없다. 영화 ‘타짜’에서 나온 ‘전라도 아귀’(김윤석 분)와 조금 헷갈리지만 사실 마산에선 ‘아구’라 부른다. 아귀찜의 원조로 유명하니 아귀라 쓰고 아구라 읽는 것이다. 아귀찜 골목에는 식당마다 특색이 있다. 구수한 맛, 칼칼한 맛, 매콤한 맛 등 입맛대로 즐길 수 있다. 아귀찜뿐 아니라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의 아귀탕과 부드럽고 담백한 아귀 수육도 별미다. 생아귀와 건아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투박하지만 현지의 맛을 즐긴다면 건아귀를, 좀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을 찾는다면 생아귀찜을 주로 취급하는 집으로 가면 된다. 오동동아구할매집처럼 둘 다 취급하는 집도 있다.마산 창동은 놀고 먹기에만 좋은 곳이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마산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민중항쟁이 두 번이나 일어난 저항의 도시다. 그 중심에 창동이 있었다. 1960년 3·15 당시 마산 시내 중고교생이 창동에 모여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에 나섰다. 그중 한 명이 전북 남원 출신의 김주열 열사다. 당시 명문이었던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진학하기 위해 창동을 찾은 김 열사는 시위에 참가하다 행방불명됐고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떠올랐다.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에는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중항쟁이 펼쳐졌다. 마산 시민들의 저항정신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사건이다. 마산 사람들은 거침없는 다혈질 성향으로 인식된다. 그 혈기가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의 날을 제정하자 마산시의회(현 창원시의회)는 곧바로 대마도의 날을 만들어 맞대응했다. 전국 최초다. 날짜는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에서 출정한 날을 골랐다. 얼마 전인 19일, 창원시의회는 제17회 대마도의 날 기념식을 진행했다.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지방 여러 도시가 있지만 이토록 원도심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은 드물다. 한때 경남을 대표했던 도시 마산. 지금 그 이름은 창원특례시 안에 묻혀 있지만, 적어도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만큼은 창동의 무궁한 매력과 함께 나란히 오랫동안 기억될 듯하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마산 창동여행 체크리스트 어떻게 가나 : KTX 마산역에서 800번 좌석버스를 타면 마산어시장, 창동까지 간다. 동마산병원 앞에서 승차하고 삼성생명 맞은편 정류장이나 상호신용금고 앞에서 하차하면 된다. 무엇을 볼까 : 굿데이뮤지엄은 ‘무학소주’를 만드는 무학에서 운영하는 주류 박물관이다. 전 세계 5대륙 권역별로 주류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어디서 잘까 : 마산어시장 인근의 호텔 레이지 헤븐과 스카이뷰 호텔이 평점이 좋다. 창동 쪽엔 퍼스트클래스 호텔이 있다.
  • 관심 밖 국내 고려인, 여행으로 보듬다

    관심 밖 국내 고려인, 여행으로 보듬다

    GKL사회공헌재단은 전국에 거주하는 고려인 가운데 500여명을 선정해 ‘대한민국 여행 테라피’를 진행한다. 고려인들이 한국사회 구성원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코로나 등으로 어려운 지역 관광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다. 일제강점기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고난을 딛고 국내로 돌아온 고려인은 전국에 8만 50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여행 테라피 사업은 경기권(양평), 충청권(공주·부여·익산), 강원권(강릉·인제), 전라권(목포·나주), 경상권(경주·울산) 등 5개 권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각 권역별로 문화 역사 탐방, 농촌 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총 500여명의 고려인이 참여하는 이번 이벤트는 모두 25회 진행된다. 26일 시작되는 1차 프로그램은 경상권을 찾는다. 경북 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에서 한옥 스테이, 유생복 체험, 청사초롱, 뒤주 체험 등을 진행하고 경주의 대표적 문화재인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을 방문한다. 고려인 지원단체인 ‘너머’의 김명숙 사무국장은 “고려인 커뮤니티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GKL사회공헌재단은 그랜드코리아레저(GKL)의 출연으로 지난 2014년 설립된 관광 기반의 공익법인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독립운동가 기념 사업, 6·25 유격대원… 보훈처 32명 포상

    국가보훈처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21일 정부 포상식을 열고 모범 국가유공자와 대외유공 인사들에게 포상을 수여했다. 올해는 국가와 사회에 헌신한 모범 국가유공자 21명,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높이고자 노력한 대외유공 인사 11명 등 총 32명이 포상자로 선정됐다. 이 중 김부겸 국무총리 주재로 이날 신라호텔에서 열린 행사에는 모범 국가유공자 17명, 대외유공 인사 6명 등 총 23명이 국민훈장과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유희태(68)씨는 일제강점기 한 집안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의 후손으로, 2009년 발족한 일문구의사 선양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씨는 2000년부터 민들레홀씨 장학금을 마련해 지금까지 428명의 학생에게 전달했고 2009년부터 민들레포럼을 설립해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국무총리 표창을 받으며 최고령 수상자가 된 박기병(89)씨는 6·25전쟁 당시 유격대원으로 양구 전투 등에서 공적을 세워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958년 기자로 언론에 입문했으며 2010년 6·25 참전언론인회를 창립해 6·25 전쟁사 발굴 및 기록보존사업을 진행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강제징용 손배소에 ‘김양호 판사 각하 판결문’ 제출한 미쓰비시

    강제징용 손배소에 ‘김양호 판사 각하 판결문’ 제출한 미쓰비시

    미쓰미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판에서 최근 각하 판결이 내려진 또 다른 강제징용 손배소 사건의 판결문을 참고 자료로 제출했다. 그러면서 “해당 사건에 대한 상고심 결론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휴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4단독 박세영 판사는 양모씨가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4차 변론기일을 18일 진행했다. 이날 재판에서 미쓰비시는 지난 7일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부장 김양호)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판결문을 참고자료로 전달했다. 해당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피해자나 유족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제한되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보고 각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년 8개월 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며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과는 정반대의 판결이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미쓰비시 측 소송대리인은 “각하된 사건의 상고심 결론이 날 때까지 휴정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그러나 양씨 측 소송대리인은 “기일을 추후지정하는 것에 이견은 없으나 각하 판결에 대한 상고심 판단을 기다라는 취지의 추정이 아니라 대법원 판단이 나와야 어떤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 이견이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각하 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유족 측은 “국민의 존엄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비판하며 지난 14일 항고장을 제출한 상태다. 미쓰비시 측은 이날 일본법상 일제강점기 당시 미쓰비시와 현재 기업이 동일한 회사가 아니며 승계를 한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재판부는 “비슷한 사건들이 많지만 이 사건에서 피고가 특별히 주장해야 하는 점들에 대해 점검이 필요하다”면서 “소멸시효 부분과 (관련 사건) 대법원 판례가 여러 개 있고 아직 최종적인 입장이 나와있지 않고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어 기일을 추후지정하겠다”고 결론내렸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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