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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존폐까지 말할 건 뭐냐’ 뿔난 공수처/강병철 기자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존폐까지 말할 건 뭐냐’ 뿔난 공수처/강병철 기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지난달 30일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이었던 손준성 검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해 세 번째로 칼을 뽑아 든 것이었다. 이미 법원은 체포영장과 구속영장 청구를 한 차례씩 기각한 상황이었다. 그날 오후 법원으로 영장청구서가 날아가기 전, 몇 시간 앞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그사이 공수처의 수사 진척 상황을 보면 지난번 영장 기각 이후로 크게 진척된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공수처는 1차 구속영장 기각 이후 손 검사를 두 차례 소환하고 대검 감찰부를 압수수색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등 보강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손 검사 측의 단단한 방패에 균열을 내긴 쉽지 않았다. 3연속 영장 기각은 수사기관에 치명적이다. 수사 동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검찰 개혁’의 성과물로 탄생한 공수처로서는 수사권 남용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을 게 뻔한 터였다. 영장 재청구 소식을 들은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그래도 자신이 있으니 다시 했지, 영장 청구를 그냥 했겠나”라고 전망했다. 기자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대부분 언론은 공수처가 ‘승부수’를 던졌다고 썼다. 그리고 공수처는 그 승부에서 패했다. 승부수가 아니라 ‘무리수’였던 셈이다.공수처는 검찰 개혁을 부르짖어 온 시민사회의 숙원사업이었다. 부패수사를 전담하는 기관을 만들어 깨끗한 공직사회를 구현하고 검찰기소독점주의를 깨뜨려 검찰의 쇄신을 도모하자는 취지로 1996년 참여연대 등이 처음 도입을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책 ‘운명’에는 참여정부 민정수석을 맡았던 문 대통령이 당시 국회의 반대로 공수처 설치를 완수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잘 드러난다. 진보 진영에서는 공수처가 만들어지면 공직사회의 투명성·신뢰성이 강화되고, 검찰도 국민을 위한 수사기관으로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공수처는 실망투성이다. 공수처 설치 운동을 이끌었던 참여연대의 이재근 권력감시국장은 “지금의 공수처는 우리가 기대했던 역량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실제 기소하는 성과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손 검사에 대한 3연속 영장 기각으로 거의 모든 언론은 공수처에 대한 비판 기사를 쏟아냈다. 서울신문은 ‘위기의 공수처’ 3회 시리즈 기획 기사를 통해 공수처의 현실을 짚은 뒤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공수처의 내년 예산은 199억 9900만원으로 검찰 지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1년 가까이 인지 수사는 ‘0건’이니 비판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는 게 당연하다. 200억원에 가까운 예산 액수가 알려지자 보수 언론에서는 ‘존폐론’까지 나왔다. 공수처 쪽에서는 날 선 반응이 돌아왔다. 출범 1년도 안 돼 인프라를 구축 중인 자신들에게 ‘세금 낭비’니 ‘존폐 위기’니 하는 말은 과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관계자는 통화에서 “공수처가 수사하는 검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70년 넘게 수사 경험이 쌓였다”면서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사건 하나만으로 존폐론까지 얘기하는 게 온당한 평가냐”며 화를 냈다. 공수처는 수사력 부재뿐 아니라 정치편향, 비인권적 수사 논란까지 겪고 있다. 그럼에도 공수처를 고깝게 보는 일부 검사들을 제외하고는 존폐를 말하기는 이르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아직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보완할 방법을 우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현직 검사는 “공수처가 지금 부실하다고 해도 그 필요성은 변함이 없다. 과거 검찰의 안 좋은 면모 때문에 공수처가 필요해서 만든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공수처의 역할은 내년 3월 대선 이후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도 개선의 열쇠를 쥔 국회에서는 올 초 공수처 출범 이후 추가 논의가 미진한 상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는 공수처법 개정안 17건이 계류 중이다. 공수처에 힘을 실어 주려는 더불어민주당과 힘을 빼려는 국민의힘 사이 간극은 너무 크다. 그러니 대선 이후에도 건설적 논의가 이뤄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무작정 상경한 두 처녀, 탈농촌·도시화의 상처 껴안은 건 용서와 화해

    무작정 상경한 두 처녀, 탈농촌·도시화의 상처 껴안은 건 용서와 화해

    1950년대 농촌서 서울로 도망간 두 여성일확천금 꿈꿨지만 현실은 뒷골목 여인신부 찾아온 두 남자 ‘화해의 손’ 내밀어무작정 상경 경계·분열된 국민감정 통합 김정애 KBS 노래자랑서 눈에 띄어 데뷔경쾌한 노래로 슬픔에도 새 힘 생성시켜젊은이들이 떠나고 아기 울음소리마저 끊긴 농촌의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1953), 배호의 ‘두메산골’(1963),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1971),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1973), 그리고 배일호의 ‘신토불이’(1993)까지 농촌을 지키려는 의식이 깃든 노래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농촌 공동화에 따른 부작용을 염려하는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 같은 시골 총각은 남자도 아닌가/ 여자 여자 없소 여자 여자 없소/ 나 좀 장가들게 해 줘’. 필자가 작곡한 이용주의 ‘여자 없소’(2020)도 마찬가지다. 농촌 인구의 대대적인 도시 이동을 예견했던 노래가 있으니 바로 김정애의 ‘앵두나무 처녀’(1956)다. 중장년층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노래는 신세계를 동경하는 당대 사람들의 심리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휴먼 드라마가 담겨 있어 더욱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다.‘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업 본위의 산업 구조를 채 벗어나지 못했던 1950년대. 농촌에서는 일손 하나가 아쉽던 시절이지만, 농업에 기반한 생활은 육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어 늘 고달프기만 했다. 더구나 여성들은 살림과 출산, 육아 및 노동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마치면 일꾼들의 새참을 준비해 논밭으로 가야 했다. 일꾼들이 새참을 먹을 동안 여성들은 쉬지도 못하고 잡초나 피를 뽑거나 밭고랑의 김을 맸다. 점심을 나르고 또 새참을 나르고 저녁밥을 지어 올리고 난 후 온 식구들이 잠들어도 일거리는 산적해 있었다. 인두와 다리미로 옷과 동정에 풀을 먹여 다렸고, 물레로 실을 잣고 베틀을 놓아 실을 뽑고 옷감을 짜야 했다. 여성들의 삶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강행군의 연속이었고, 이러한 고된 생활에 진력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농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한 마을의 두 처녀가 서울로 도망을 가면서부터 동네가 발칵 뒤집히는 상황을 그리면서 ‘앵두나무 처녀’는 시작된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우물가는 빨래터와 함께 동네 아낙네들의 정보교환장이다. 아낙네들은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긷는 그 짧은 순간에 간밤에 동네에서 일어난 긴급 뉴스를 죄다 공유한다. 앵두나무가 둘러선 우물가에서 듣자 하니 ‘서울은 온 거리마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전기가 들어와 네온불이 현란하게 돌아가며 빌딩이 하늘 끝 간 데까지 맞닿은 별천지’라는 것이다. 농사일에 이골이 나 있던 이쁜이와 금순이는 그 말을 듣고 이내 단봇짐을 꾸려 서울로 내뺐다. 노랫말 중에 나오는 ‘물동이’는 살림을, ‘호미자루’는 농사일을 대표하는 환유법으로 그것들을 내던졌다는 것은 살림과 농사일을 내팽개쳤다는 뜻이다.탈농촌화는 이때부터 서서히 시작돼 1960년대 이후 도시화의 물결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서울에 가면 일확천금과 벼락출세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안고 가난했던 농촌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쁜이와 금순이를 환영할 도시는 없었으니 이게 문제였다. 도망간 신붓감을 찾으러 서울로 올라간 복돌이와 삼용이는 뒷골목에서 웃음을 파는 ‘에레나’(주점에서 일하는 여성이 사용한 가명)가 된 이쁜이와 금순이를 발견한다. 자신의 신붓감이 뒷골목 여인이 돼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선뜻 용서해 줄 아량이 있을까. 더구나 이 당시는 여성들에게 정조를 강요하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때다. 그런데 복돌이는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며 이쁜이를 달랜다.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준 복돌이의 마음에 이쁜이는 눈물을 쏟는다. 용서를 통해 이쁜이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준 복돌이의 마음에는 6·25전쟁은 물론 멀리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반목하고 분열된 국민 감정을 통합하고자 하는 시대 정신이 은근하게 녹아 있다. ‘앵두나무 처녀’는 1956년 도미도레코드에서 발표됐다. 작사가 천봉이 가사를, 작곡가 한복남이 곡을 썼다. 경쾌한 스윙 리듬에 실린 김정애의 노래는 봄볕처럼 따뜻하고 해맑다. 김정애의 가수 데뷔는 시작이 사뭇 특이했다. KBS에서 처음으로 노래자랑이 시작돼 엄청난 인기를 모으자 전국 각지에서 공개방송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때 대구에 주둔하던 공군에서 비행기를 제공하며 방송을 유치했고 대구 군부대에서 전화 교환 업무를 담당하던 김정애는 노래자랑에 나가게 된다. 김정애는 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을 불렀고 방송 관계자의 눈에 띄어 KBS 전속가수가 된다. 이후 ‘앵두나무 처녀’와 ‘닐니리 맘보’ 등을 발표하면서 스타 반열에 오른다. 30여년간 가수 활동에 전념한 그는 1987년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 한 달 전까지 무대에 올랐다. 민요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 민족은 시름겨운 일상이나 한을 노래할 때 오히려 경쾌한 리듬에 노래한다. 슬픔을 슬픔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새로운 힘을 생성시키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앵두나무 처녀’도 무작정 상경에 경종을 울리는 골계미, 에레나가 된 두 처녀의 비극미, 그리고 용서와 화해로 막을 내리는 우아미까지 다양한 미의식의 전환을 경쾌한 스윙 리듬을 통해 들려준다. 이 노래는 탈농촌과 도시화 물결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 시대의 단면도로서 유행가의 본령을 보여 준다. 또한 상처를 용서와 화해로 통합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교훈을 던진다. 작곡가·문학박사
  • 인육·구타치료… 일제강점기 ‘믿음’들

    인육·구타치료… 일제강점기 ‘믿음’들

    일제강점기에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삼신일목어라고도 불린다) 부적이 있었다. 물고기 세 마리가 하나의 눈을 공유한 채 120도 각도로 붙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미신의 연대기’ 표지 참조). 당시 사람들은 눈병이 나면 동틀 무렵에 동쪽 벽이나 천장에 일목삼신어 부적을 붙인 뒤 가운데 눈알에 바늘이나 못을 박았다. 부적엔 “네가 내 눈의 바늘을 뽑지 않으면 나도 네 눈의 바늘을 뽑지 않을 ”이란 협박의 글귀를 적었다. 세 물고기에게 하나뿐인 눈알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당대 사람들은 이처럼 물고기를 협박해서라도 눈병을 고칠 수 있는 주술적인 힘을 얻고자 했던 거다. ‘미신의 연대기’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됐던 다양한 미신들을 살핀 책이다. 일제강점기를 탐구의 대상으로 특정한 건 미신이라 불리는 믿음이 특히 자연스럽게 유통되고 소통됐기 때문이다. 수치스럽고 비통한 시기였다는 것 외에도, 일제강점기엔 우리가 모르는 괴기스러운 면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나병, 정신지체 등 치료제가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은 남녀의 생식기를 특효약으로 여겼다고 한다. 생명과 생식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고, 산 사람의 것일수록, 그리고 음양교합의 관점에서 성별을 교차해 먹을수록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환자들이 산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고, 대개는 시체를 노렸다. 섬뜩하게 여겨지겠지만 책엔 더 심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 미신인가가 아니라 어떤 현상이 왜 미신이라고 불렸는지다. 일제강점기엔 인육포식, 풍장, 구타 치료 같은 특정 현상이 유난히 자주 미신이라 비난받았다. 하지만 각각의 현상들이 지닌 속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저자는 “각종 미신 자료에서 도덕과 상식, 과학과 이성 같은 평균적 가치를 침묵시키는 당대 사람들의 공포와 절망과 슬픔을 만나야 했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 믿음을 지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탄생한 세계인지 감각해 줄 것”을 주문했다.
  • “철도 오지 30년 숙원 풀자… 홍천~용문 과감히 예타 면제해야”

    “철도 오지 30년 숙원 풀자… 홍천~용문 과감히 예타 면제해야”

    ‘철길 오지’ 강원 홍천군이 철도망 조기 건설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홍천이 국토 중부내륙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철도망이 전무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춘천권과 원주권 등 주변 도시 권역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도는 국가기간망이라 홍천군에 철도가 생기면 국토 균형발전에도 상당한 효과가 기대된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제4차 국가철도망(2021~2030년) 구축계획에 홍천~경기 용문 간(34.2㎞) 철도망 건설사업이 포함되면서 유치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비타당성 조사 등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실제 개통까지는 10~12년이 걸린다. 홍천군은 수도권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다양한 건강·힐링·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재의 도로 교통망으론 한계가 있다. 이에 주민들은 철도망 조기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주민들은 “지역의 30년 숙원사업으로 추진되는 만큼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등 정부의 과감한 정책으로 철도망 조기 건설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조기 착공 서명운동을 펼치고 용문~홍천 철도 노선 걷기 챌린지를 벌이며 조기 건설을 염원하고 있다. 8일 허필홍(57) 홍천군수를 만나 홍천~용문 간 철길 조기 건설에 대해 들었다. “홍천~용문을 잇는 철도 조기 건설을 위한 정부의 결단을 간절히 바랍니다.” 허 군수는 철도 오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천~용문 간 철도 조기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도권과 가까운 특색을 살려 건강·힐링·관광사업을 지역의 미래 먹거리로 내세웠지만 열악한 철도망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춘천권과 원주권은 수도권과 연결된 전철이 속속 개통되면서 도시가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홍천은 두 도시 사이에 놓였는데도 철도 오지에서 헤어나지 못해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철길은 홍천군의 30년 숙원사업이다. 다행히 홍천과 용문을 있는 노선이 정부가 지난 7월 5일 발표한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됐다. 8월에는 비수도권 광역철도 선도사업으로 선정됐다. 전국의 국가철도망 40여개 가운데 권역별로 1곳씩 선정되는 데 포함됐다. 이를 계기로 홍천~용문 간 철도망이 국가사업으로 본격화됐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과 1937년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에 홍천 철도의 필요성이 기록된 것을 보면 주민들이 홍천까지의 철도 개통을 소망한 지는 100년이 넘는다. 이 같은 희망이 마침내 이뤄진 셈이다. ●비수도권 광역철도 선도사업에도 선정 홍천~용문 간 철길이 조기에 놓이고, 서울 북부권인 청량리와 남부권인 수서 등과 연계되면 홍천 발전에 기폭제가 될 것으로 주민들은 확신한다. 허 군수는 “홍천~용문 간 철길 조기 착공에 명운을 걸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며 “철길사업이 빠른 시일 내에 성사되면 홍천군민의 생활권이 수도권과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홍천~용문 간 철길은 단선으로 이어지는 수도권 전철 연장의 광역철도망이다. 청량리에서 경의·중앙선을 이용해 용문을 거쳐 홍천읍까지 전철이 이어지면 40~50분대면 가능하다. 홍천읍에서 서울 중심지까지의 이동이 서울 외곽지역과 비슷해지는 셈이다. 자동차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주말에는 극히 혼잡한 구간이다. 2029년 개통될 서울 남부권 수서~광주 간(19.2㎞) 철도망이 완공되면 현재의 광주(곤지암)~용문 간(30㎞) 철길과 연계돼 홍천읍까지 40~50분대 거리에 놓이게 된다. 홍천~용문 간 34.2㎞ 철길만 놓이면 서울 중심지는 물론 서울 강남권까지 1시간 이내의 수도권 생활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홍천~용문 간 철도공사에는 약 7818억원의 사업비가 소요된다. 이번 4차 국가철도망 계획에서 원주~춘천 간 철도망도 추가 검토사업으로 포함됐다. 강원도가 춘천~철원 간 철길을 계획하고, 정부에 강하게 철도망을 요구하고 있어 통일시대까지 내다본다면 홍천~용문 간 철도를 통한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대한매일신보 1920년·1937년 “철도 필요” 김기준 홍천군 국책사업추진단 철도추진담당은 “제4차 국가철도망 계획에 포함된 만큼 홍천~용문 간 철도는 정부가 마련한 절차를 밟아 추진될 전망”이라며 “이미 지난 10월 6일 국토부에서 사전 타당성 조사 용역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1년간 사전타당성 조사를 벌여 사업성을 판단하게 된다. 경제성과 정책성, 균형발전을 분석한다. 이후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요청한다. 이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사업의 적절성이 나와야 마침내 추진이 본 궤도에 오른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타당성 조사와 기본설계, 실시설계가 순조롭게 이뤄지고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본격 착공까지 5~6년의 타당성 조사 기간이 있다. 이후 5년여간의 공사 기간을 포함하면 통상 빨라야 10~11년이 소요된다. 올해 사전타당성 조사가 시작됐으니 빨라야 2031년쯤 서울에서 홍천을 잇는 철길이 개통되는 셈이다. 홍천군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주변 도시의 발전을 보더라도 이처럼 긴 시간은 국토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석미경 홍천군 홍보팀장은 “홍천~용문 간 철도사업은 지방분권시대의 장기적인 관점으로 공공성과 동반성장, 사회적 가치 측면에서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거시적 안목에서 추진돼야 한다”며 “지역 균형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도 조기 개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홍천군민들 “지역균형발전 절실” 서명운동 홍천군민들도 철도 조기 건설을 간절하게 기원한다. 지난 9월 추석 기간에는 철도 조기 착공을 위한 집중 서명운동을 펼쳤다. 10월에는 양평군 용문역에서 홍천군청 광장까지 39.5㎞ 구간에서 용문~홍천철도 노선 걷기 챌린지도 펼쳤다. 주민들은 “홍천의 소노호텔·리조트에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주말이면 수도권에서 강원 내륙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만큼 강원 내륙의 관광 활성화는 물론 정주여건 개선, 기업 유치를 위해서라도 꼭 조기에 건설돼야 할 노선”이라고 말했다. 강원도도 홍천~용문 간 철도사업 조기 건설에 공감한다. 홍천은 강원 내륙 중심에 있어 수도권과의 연결 중심축에 놓여 있고 원주~홍천~춘천~철원을 잇는 내륙종단 철도로 ‘T’자형 철도망까지 구축되면 북방교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권은 물론 경북, 충청권까지 1시간대 생활권 형성으로 교통망의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강원 지역 관광수요 분산과 지역경제 발전의 기반 마련에도 필수 노선이 될 전망이기에 조기 건설이 절실하다. 손창환 강원도 건설교통국장은 “홍천~용문 철도사업 성사로 내륙종단 T자형 철도망 건설에도 청신호가 켜졌다”며 “특히 홍천~용문 철도사업은 반드시 조기 건설이 이뤄져 수도권과 인접한 홍천이 철도 서비스의 소외지역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천~용문 철도 조기 건설이 성사되면 기대효과도 크다. 허 군수는 “철도망이 조기 개통되면 홍천군민들의 서울 중심 1시간대의 생활권은 물론 빠르고 안전한 친환경 철길을 따라 건강·힐링·내륙관광사업에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라며 “면적의 83%가 산림지역이며 홍천강을 포함한 강이 어디를 가도 풍부해 자연자원을 활용한 산업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 손흥민·김연경 사인볼까지… 국세청 ‘스포츠와 세금’ 특별전

    손흥민·김연경 사인볼까지… 국세청 ‘스포츠와 세금’ 특별전

    국세청이 7일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국립조세박물관에서 ‘스포츠와 세금’ 특별전을 개최했다.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국세청 특별전은 내년 4월 30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와 스포츠 발전의 밑거름이 된 세금의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전시 공간은 ‘전통 스포츠 소개’, ‘근대 스포츠 시작과 세계화’, ‘마라톤과 손기정’, ‘프로 스포츠의 시작’, ‘국제 스포츠 대회’, ‘스포츠 스타와 세금’, ‘체험 코너’ 등 7개 주제로 꾸며졌다. 주요 전시물로는 전통 무예를 다룬 ‘무예도보통지’, ‘동국세시기’, 일제강점기 근대 스포츠 관련 관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과 기념메달,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선수단 탁구 라켓,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이은철 선수의 권총, 2002년 한일월드컵 기념 액자 등이 있다. 손흥민·박지성·박찬호·김연경 선수의 유니폼과 사인볼, 모자와 함께 선수들의 명언도 함께 전시됐다. 국내외 프로 스포츠 선수의 연봉, 후원금을 비롯해 국제 대회 상금에 대한 과세 설명과 성실 납세 중요성 강조 전시물도 마련됐다.
  •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 일본서 출간 화제...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삶 담겨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 일본서 출간 화제...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삶 담겨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제 전범기업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양금덕·김성주·김정주 할머니의 인생이 담긴 자사전이 일본에서 출간됐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등의 자서전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이 일본어로 출판됐다고 7일 밝혔다. 일본어 자서전은 지난 1월 출간된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양금덕), ‘마르지 않는 눈물’(김성주·김정주)이 한권으로 통합됐으며 책 제목과 사진 등 일부 내용이 수정 보완됐다. 이 자서전은 일제 말기인 1944년~1945년 10대 어린 나이에 일본인 교장·담임교사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 일본 군수업체로 동원된 과정이 담겨 있다.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는 1944년 5월 말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됐으며, 김정주 할머니는 1945년 2월 도야마에 위치한 후지코시 회사로 끌려갔다. 김성주·정주 할머니는 자매로 서로의 안부도 묻지 못하고 강제노역을 당했다. 또 해방 후 이들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온 여자 아이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적 편견으로 가정불화를 겪는 등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2012년, 2013년 한국 법원에 각각 가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는 지난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김정주 할머니 사건은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자서전에는 어린 나이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은 물론, 거듭된 좌절을 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고된 인생 역정이 담담히 풀어져 있다. 근로정신대시민모임 관계자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삶이 상세하게 기록된 책이 일본에서 출간돼 의미가 남다르다”며 “일본 내에서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과거를 반성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 [길섶에서] 산중다원/오일만 논설위원

    [길섶에서] 산중다원/오일만 논설위원

    몇 년 전인가, 발길 따라 우연히 들른 곳이 서울 진관사였다. 근처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이끌려 가다 보니 진관사 계곡의 낭랑한 소리가 좋다. 고려시대 고찰로 조선조에선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齋)가 열린 사찰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승려 백초월(白初月)의 오롯한 독립정신으로 유명한 곳이다. 비탈길을 올라서 한숨 돌리려는 지점에 찻집이 있다. 이곳의 대추차 맛은 잊기 어렵다. 분위기 덕분인지 진한 여운과 달콤한 향기가 기억에 새겨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정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글이다. 태풍과 천둥, 자연의 극한으로 단련된 대추가 내공으로 인간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 아닌가. 초봄처럼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쬔 주말. 계절을 잊은 건지, 그 속내가 궁금한 몇몇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날씨다. 만사 잊고 북한산 둘레길을 헤매다 우연히 마주친 곳이 산중다원이다. 진관사에서 맛본 대추차 향기에 발길이 끌린 듯하다. 편안한 공간이 느긋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기 안성맞춤이다. 산행의 피곤함이 대추차 한잔으로 녹아내린다.
  • 富 넘어 권력… 주소에 숨겨진 놀라운 역사

    富 넘어 권력… 주소에 숨겨진 놀라운 역사

    주소는 단순히 숫자나 이름의 나열이 아니다. ‘사는 곳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말처럼 주소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부, 인종 등을 넘어 권력의 영역까지 확대된다. ‘주소 이야기’는 주소의 기원과 역사를 탐색하고, 주소 체계나 거리 이름 등에 담긴 여러 사회적 의미를 짚은 책이다.집에 번지수가 매겨지기 시작한 건 18세기 유럽에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실질적인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숙적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이 필요했다. 1770년에 징집령을 내린 테레지아는 전투 가능한 남자들을 효율적으로 찾아내기 위해 집집마다 번호를 부여했다. 지역에 따라 번호판의 색깔을 구분하고 모든 번지의 아라비아숫자 앞에 번호를 의미하는 ‘No.’를 표기하게 했다. 유독 유대인 집에만 로마자를 표기하도록 한 게 흠이지만, 이 정책은 주효해 무려 700만명에 달하는 ‘싱싱한’ 병사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파리의 경찰이었던 자크 프랑수아 기요테는 파리 시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회전식 수납장을 고안했다. 파리를 여러 구역으로 나눈 뒤 숫자를 매기고 도로명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석판에 새겼다. 구역마다 배정된 경찰들은 시민의 정보를 수시로 ‘업로드’했다. 주소가 부여되기 전까지 국가는 자국민에 대해 까막눈과 다름없었으나, 번지가 탄생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번지의 탄생’은 조세, 부역, 반체제 인사 색출 등에만 활용되지 않았다. 저자는 “계급의 구분 없이 모든 가옥에 번호를 새기는 일은 합리성과 평등이라는 계몽사상의 원칙을 한층 증진시켰다”고 평가했다. 유권자 등록 등이 쉬워지면서 민주주의가 증진됐고 치안이나 방역 등에도 도움이 됐다.부를 증식시키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같은 부동산업자들은 ‘센트럴파크’처럼 비싸 보이는 주소를 건물에 붙여 부동산 가치를 높이려 애썼다. 뉴욕에선 1만 1000달러(2019년 기준)만 내면 현주소를 ‘매력적인 주소’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1997년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콜럼버스 서클 15번지’에 세운 건물 주소를 ‘센트럴파크 웨스트 1번지’로 바꾼 건 유명한 일화다. 아울러 책은 도로에 이름이 없고 작은 블록인 초(町)로 공간을 인식하는 일본, 일제강점기의 ‘지번’ 영향에서 벗어나 도로명주소로 변화를 꾀하는 한국, 빈민촌의 주소 부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도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주소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다. 여태 주소가 없는 나라도 많지만 지구 반대편에선 벌써 지구 위의 모든 공간에 주소를 부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왓스리워즈(what3words)는 세상 모든 주소를 3개의 고유단어로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3m×3m 정사각형의 각 면에 3개의 고유한 단어를 부여해 주소를 만든다. 예를 들어 도로명 주소가 ‘서울 중구 세종대로 124’인 서울신문 입구의 3m×3m 블록 하나의 주소는 ‘평안, 차차, 가상’이다. 바로 옆 블록은 ‘설탕, 긴급, 공상’이다. 누군가 위급 상황이 생겼을 때 이 방식으로 주소를 알렸다 치자. 순찰차가 잘못 찾아갈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영국에선 이미 이 주소 기술을 도입해 긴급 구조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책은 구글 플러스코드 등 디지털 주소의 등장으로 변해 갈 주소의 미래도 함께 내다본다.
  • 일제 때 문 열린 ‘입시 지옥’… 시험장 앞은 90년 전에도 눈물바다

    일제 때 문 열린 ‘입시 지옥’… 시험장 앞은 90년 전에도 눈물바다

    대한민국 ‘고3’. 이 땅에서 이들만큼 특이한 존재가 또 있을까. 대한민국 고3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면 전국이 멈춘다. 공무원은 수험생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출근 시간을 미루고, 경찰이 투입돼 학생들을 시험장까지 나르고, TV와 신문은 수험생과 부모님의 간절함을 시시각각 전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기이한 문화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졌을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이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영상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현 교육 체제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은 한국의 학교 서열화와 치열한 경쟁, 입시 지옥이 100년 전인 1920년 무렵 시작됐다고 짚는다. 1919년 3·1운동 직후 가장 큰 사회적 화두는 문맹 퇴치와 민족 지도자 육성이었다. 여기에 개인적 출세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들의 기대까지 더해져 교육열이 뜨거워졌고, 근대식 학교를 찾는 이들이 급증했다. 이때 일제가 도입한 게 입학 시험이다. 학생을 수용할 학교가 부족해지자 새로 학교를 설립하는 대신 지원자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경쟁’을 내세운 것이다. 특히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신문과 잡지 기사를 사료(史料)로 쓰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전인 1920~1930년대 신문 기사는 물론 조선총독부 관보, 각종 고등학교의 동창회보 등으로 생생하게 과거를 복원했다. 1935년 동아일보는 시험 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교문 앞에서는 아버지가 수험표를 가지고 오지 않은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호통쳤다. 자동차를 타고 가서 수험표를 가지고 왔지만 이미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아들과 아버지는 교문을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지난달 치러진 올해 수능이라고 해도 믿음 직하다. 당시 시험을 망친 수험생의 가출과 자살, 입시 청탁으로 몸살 앓는 교사들, 시험 문제 유출, 입시 브로커 사기 사건도 바로 어제의 일 같다. 과거의 악습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지금도 그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게 된다.
  • [글로벌 In&Out] 한국 문학에서 발견하는 인도네시아/페브리아니 엘피다 트리흐따라니 서울대 국문학과 박사 과정

    [글로벌 In&Out] 한국 문학에서 발견하는 인도네시아/페브리아니 엘피다 트리흐따라니 서울대 국문학과 박사 과정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가 11월에 개최한 ‘아시아 문화축제-인도네시아 편’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으로서 인도네시아와 한국 사회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 행사에 참여하면서 깨닫게 되고 감동을 받은 것은 인도네시아 출신인 나보다 인도네시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알고 있는 한국인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행사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정보를 얻게 돼 제 나라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스스로 공부가 된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발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으며 그중에서 흥미롭게 준비한 주제는 바로 한국 문학에 나타난 인도네시아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 문인들이 인도네시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이다. 한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작품이나 글에서 인도네시아가 거론된 것을 발견할 때 신기함을 느낀다. 인도네시아는 과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거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어 한국 문학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자주 거론되거나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인도네시아를 거론하는 문학 작품이나 비평을 접할 때 늘 눈여겨보게 된다. 그중 지난해 문학사 수업에서 공부한 이철범이라는 문학평론가의 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철범의 책 중에 ‘반체제의 논리’(1985)라는 게 있는데 제3세계와 관련한 주제에 초점을 맞춘 저서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 안에서 ‘동남아시아의 평화사상’이라는 글이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으며 ‘동남아시아’를 제목으로 정한 저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깊게 공부하고 싶어졌다. ‘동남아시아’라고 하면 먼저 인도네시아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이철범은 인도네시아와 관련한 정보를 거론했다. 이 글은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아시아 평화의 기조’ 문헌으로 시작된다. 이 문헌은 ‘신동아’에 실린 글이며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앞서 발표됐다고 한다. 한국 문인이 가지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인식은 ‘반둥회의’에 대한 거론이 출발점이 아니었나 싶다. ‘반둥회의’는 1955년 4월 8일,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렸다. 갓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에는 상당히 중요한 회의였다. 네루의 문헌을 언급하면서 이철범은 베트남 시인 단 호아이, 레바논 시인 아드니스의 시와 팔레스타인 민족시를 다루었다. 여러 나라 시의 핵심 주제가 ‘영토’와 ‘난민’으로 모아지고 특히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강조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은 동남아시아에 속하진 않지만, 이철범은 ‘반둥회의’와 ‘반둥정신’에 초점을 두면서 그 당시 아시아 국가 중에서 여전히 ‘반둥정신 10개의 원칙’을 실현하지 못한 나라를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이철범이라는 문인에게 독립과 영토, 난민을 키워드로 한 ‘반둥회의’는 한국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나 상상해 본다. 반둥에서 태어난 나에게 “1950년대부터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한국 비평 글에서도 거론됐구나”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느껴졌고, 이후 반둥회의 자료를 더 찾고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행사에 참가하면서 느낀 점은 각 나라의 문학을 비교하는 작업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설가 염상섭과 인도네시아의 작가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의 작품을 비교하고 소개하는 일이다. 설혹 두 작가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더라도 두 나라의 문학을 비교해 봄으로써 그 나라의 사회도 비교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과정들이 한국에서 유학하는 인도네시아인으로서 두 나라의 교류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12월 독립운동가 이종호·김학만·최봉준

    12월 독립운동가 이종호·김학만·최봉준

    국가보훈처가 30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이종호·김학만·최봉준 선생을 선정했다. 이들은 1911년 연해주에서 한인단체 권업회를 결성해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권업회가 발간한 기관지 권업신문은 항일 민족 언론으로서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 이종호 선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배후로 지목돼 일제에 3개월 넘게 조사받았고,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권업회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김학만 선생은 권업회 초대 총재로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거류민회장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학교 계동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최봉준 선생은 권업회 창립과 권업신문 발간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계동학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뒤엔 연해주 내 한인 자치기관 고려중앙총회 조직과 기관지 청구신보 창간에도 힘을 보탰다. 앞서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이종호(1962년)·최봉준(1977년) 선생에겐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학만 선생(2012년)에겐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 도래할 봄을 기다리며…아픈 세월 지난 경복궁 ‘고궁연화’

    도래할 봄을 기다리며…아픈 세월 지난 경복궁 ‘고궁연화’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발굴과 복원 30주년을 맞아 특별전 ‘고궁연화’를 다음 달 1일부터 내년 2월 27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 전시는 서울 도심 세 박물관이 함께 기획한 ‘광화문 600년: 세 가지 이야기’ 중 하나다. 전시 제목 중 ‘연화’는 ‘빛나는 해’(年華)와 ‘봄의 경치’(煙花)를 뜻한다. 수난을 겪은 경복궁이 발굴과 복원 작업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전시 제목이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잘 소개되지 않았던 발굴 현장 기록 일지, 발굴 실측 도면과 복원 도면 등 20여점의 원본 자료를 총망라하고 있다. 경복궁 발굴·복원사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실감 콘텐츠로 제작된 인터뷰 영상과 미디어파사드 기법이 접목된 3면 영상으로 몰입감을 높였다.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인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소실돼 폐허로 변했다. 흥선대원군이 1860년대에 중건을 추진했으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또다시 크게 훼손됐다. 정부는 1991년이 돼서야 ‘민족사 긍지 회복’을 외치며 경복궁 복원을 시작했으며, 복원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출토 유물과 설계도면 등 자료 130여 건으로 그간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는 경복궁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른다. 지난 경복궁의 복원 역사와 근현대사를 짚고,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는 2045년 새롭게 태어날 조선의 으뜸 궁궐의 모습을 보여준다.전시는 사계절에 빗대어 겨울, 가을, 여름, 봄 순으로 전시장을 꾸몄다. 도입부를 제외한 1∼4부의 부제인 ‘바람이 문에를 처도’, ‘진흙속에 묻혀눕은’, ‘오백년 거륵한 공’, ‘봄어름 처음녹고’는 잡지 ‘동광’에 실린 ‘고궁단영’(古宮短詠)에서 따 왔다. 현대 작가가 전통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부분인 적심(積心)을 주제로 제작한 도입부를 지나면 겨울과 같은 일제강점기 경복궁 모습을 만난다. 2019년 복원 공사가 사실상 끝난 흥복전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응시하면 조선총독부 정원을 접할 수 있다. 조지훈이 1940년에 발표한 시 ‘봉황수’는 스산한 경복궁을 더욱 감상적으로 느끼게 한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는 경복궁 발굴조사 성과를 보여준다. 경복궁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 기와, 철제 생활용구는 물론 발굴 일기, 유물 조사 카드 등을 감상할 수 있다.여름에 해당하는 공간에서는 높이 4m, 폭 15m인 대형 미디어월을 통해 라인 그래픽(줄선으로 형상을 그리는 것) 기법의 복원 도면을 볼 수 있다. 도면은 옛 지도와 문헌, 실측 도면 등을 종합해 만들었다. 전시 마지막 공간은 30여 년 뒤 경복궁 복원이 종료되면 도래할 봄을 영상으로 표현했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은 전시와 관련된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와 가상현실 콘텐츠도 선보인다. 내년 초에는 경복궁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 중랑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산책·힐링하며 역사 교육 명소로

    중랑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산책·힐링하며 역사 교육 명소로

    서울 중랑구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망우(忘憂)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사후 능(건원릉)을 정하고 이곳을 지나며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고 경탄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4만 7700여기의 묘가 있던 공동묘지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기, 산업화 시기까지 수많은 망자들의 안식처가 됐다.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시 1998년부터 망우리공원으로 불리다 지난 10월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최근에도 7000여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숲과 운치 있는 산책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간 인물들까지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사색의 길’을 따라 산책하며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애국지사 한용운, 유관순, 오세창, 문일평, 조봉암 등을 비롯해 근대 의학의 선구자 지석영,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김상용, 아동문학가 방정환, 극작가 함세덕 등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간 60여명의 선구자들이 한곳에 잠들어 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인 ‘사잇길’ 2개 코스를 조성하면서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됐다. ●망우리공원묘지에서 현재 역사문화공원 개칭 구는 지난해 7월 서울시로부터 망우리공원의 관리권을 이관받았다. 지난 7월에는 전담 부서인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하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기존 공원녹지과, 문화관광과 등 부서별로 분산돼 있던 망우리공원 관련 업무를 한곳으로 집중해 유기적인 사업체계를 구축했다. 전담부서는 정책팀, 시설팀, 운영팀의 3팀으로 현재 조성 중인 ‘중랑망우공간’ 운영, 묘역 및 등산(산책)로 정비, 휴식공간 조성, 탐방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운영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역사문화공원의 거점 시설인 중랑망우공간은 지난 4월 공사를 시작해 다음달 23일 준공을 앞두고 있다. 규모는 지상 2층, 전체면적 1247㎡(약 377평)이다. 카페, 화장실, 주차장 등 편의시설뿐만 아니라 전망대, 홍보·전시관, 교육실 등을 조성해 역사문화교육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신은실 중랑구 망우리공원과장은 “중랑망우공간이 조성되면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을 찾는 많은 주민들이 쾌적하고 편안하게 공원을 즐길 수 있고, 영면해 있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망우리공원과는 유관순 열사 추모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구는 지난해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 있는 유관순 열사 합장 묘역을 정비하고 추모 행사를 개최했다. 지난 9월에도 추모 음악회를 열어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클래식과 재즈를 감상하며, 치열한 시대를 살다 간 유관순 열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렸다.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된 근현대 유명인사의 묘역을 주민이 일대일로 관리하는 ‘영원한 기억봉사단’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봉사단은 모두 81개 단체, 총 446명으로 구성돼 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신조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봉사단은 공원 내 안장된 근현대 역사적 인물의 묘역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기본 지식과 역사의식을 함양한 전문 봉사단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실제로 봉사단원들은 공원에 안장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김영식 작가와 공원 일대를 탐방하며 주요 인물들의 업적 등을 함께 공부했다. 또한 주요 인물과 관련된 영화를 감상하며 그들의 삶과 정신을 배우는 인문학 특강에 참여했다. 이중섭, 오세창, 박인환, 영화감독 노필 등을 주제로 한 특별전에도 함께했다. 지난 21일 중랑구는 이들 중 12개 단체, 82명을 선정해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봉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금자(75)씨는 “지역에 역사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주민 한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고자 봉사를 시작했다”며 “손녀가 ‘할머니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해에는 세브란스의 최초 한국인 교장이었던 오긍선 선생의 묘를 관리했고, 올해는 유관순 열사 합장비 관리를 맡고 있다. ●방문객 이용 돕게 공원 버스정류소 신설 한편 구는 공원 방문객이 보다 편안히 공원을 오갈 수 있도록 지난 9월부터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버스정류소를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 과거 공원 진입로에 가까운 정류소가 없어 방문객이나 주민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정차 버스는 서울 시내버스 201번, 경기 남양주 버스 165, 166-1, 202, 65번 등 총 5개다.
  •  나고야소송지원회 금요행동 다시 활동 재개

     나고야소송지원회 금요행동 다시 활동 재개

    일제 강점기에 전범기업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일본 정부에 촉구해온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소송지원회)이 금요행동을 다시 시작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26일 코로나19 여파로 중단됐던 나고야소송지원회의 금요행동이 재개된다고 밝혔다. 이번 금요행동은 나고야에서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를 포함해 4명, 도쿄 인근 관동지역에서 5명 등 9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금요일인 26일 오전 10시~10시45분까지 도쿄 유라쿠초 역(有?町?) 츄오구치(中央口) 앞에서 1차 거리 선전활동을 한 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으로 이동해 대법원 판결 이행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는 일본정부를 규탄했다. 나고야소송지원회의 금요행동은 지난 2007년 7월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시작됐다. 매주 금요일에 시위가 펼쳐져 ‘금요행동’으로 불리며 지난해 2월28일까지 506회가 진행됐다. 그러나 세계적인 코로나19 대유행으로 3월부터 잠정 중단됐으며 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가 있는 지난해 6월26일 507회, 10월30일 508회 2차례 더 열렸지만 일본내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돼 지난해 11월부터 다시 중단됐다.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소송지원회 공동대표는 국내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가해국 시민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전범기업이 사과를 할 때 까지 금요행동을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유년/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유년/라이너 마리아 릴케

    유년/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린아이의 노는 모습을유심히 바라본다아이의 옆얼굴에 온전한 존재의 모습이밝고 화사하게 머무는 것을 시간의 종이 울리기 시작하고울려서 끝날 때까지우리는 온전히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삶에 지치고 쫓긴 사람들은눈치조차 채지 못한다어린아이가 무엇을 기다리며 꿈꾸고 있는지를광대의 옷을 입은 채붐비는 대합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끼어 앉아자신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어린아이가 무엇을 그리며 사랑하는지를 백석도 지용도 동주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좋아했지요. 일제강점기 우리 시인들에게 릴케는 혹독한 찬바람 속에 마시는 따뜻한 귀리차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자유롭고 따스하고 천진하지요. 그 속에 세계의 신비가 담겨 있지요. 어린아이의 얼굴에 깃든 온전한 존재의 모습. 삶이란 그 모습을 끝내 간직하는 것이지요. 시는 영혼의 순수함과 천진한 꿈의 무지개를 인간의 마음 안에 새기는 것이지요. 당신도 시를 쓰고 싶은 시절 있었지요. 마음 안에 별들이 반짝이던 시절,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요. 금요일 밤에 기차를 타요. 바다 가까운 도시에 내려 별을 보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듣고 아침 햇살을 만나요. 곽재구 시인
  • [장동석의 뉴스 품은 책] 걸으니 보였다, 집값에 가려진 서울의 참모습

    [장동석의 뉴스 품은 책] 걸으니 보였다, 집값에 가려진 서울의 참모습

    한 포털에서 ‘서울’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기사는 ‘집값’에 관한 것들이다. 언론은 언제는 오른다고 타박하고, 약간 주춤하면 “한 방에 1억 떨어졌다” 같은 자극적인 말로 겁을 준다. 서울 집값이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혹 있다 해도 어떤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는 아리송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서울은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서울 집값만 궁금해할 때가 많다. 이종욱 건축가의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은 집값에 가려진 서울의 맑은 얼굴을 보여 주는 책이다.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비범함을 좋아한다는 저자는 서울 이곳저곳을 걷고, 쓰고, 그렸다. 책에 담긴 모든 그림은 저자가 발품 팔아 다니면서 그린 것으로, 시간과 함께 농익은 서울의 모습을 오롯하게 보여 준다. 저자가 처음 안내하는 곳은 서소문동, 정동 일대와 서학당길이다. 정동의 옛 명칭은 ‘정릉동’으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 ‘정릉’이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왕이 되자, 세자 책봉 문제로 갈등을 빚은 계모의 무덤을 도성 밖,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이 외에도 정동은 역사적 맥락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 러시아, 프랑스공사관이 자리잡으면서 “서구 열강의 외교 타운”이 됐다. 개발 시대를 상징하는 청계천과 세운상가도 눈길이 간다. 청계천 복개는 사실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 부분적으로 시행됐다. 하지만 1961년 군사정권이 집권하며 속도가 붙었다. “국민들에게 ‘일 잘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전시행정인 셈이다. 세운상가가 그 일환이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실향민들의 판잣집과 대한민국 최대 사창가였던 ‘종삼’이 버티고 섰던 자리에 젊은 건축가들이 총동원돼 세운상가를 세웠다.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경제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공중 가로, 주변 도시 맥락과 맞지 않는 초대형 구조물, 그리고 이상(기본 설계)과 현실(실제 시공)의 괴리” 등으로 얼룩진 건축물이 바로 세운상가다. 최근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경의선숲길도 찾아간다. 지금은 도심 속 쉼터지만, 경의선은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철길이었다. 이미 1900년부터 대한제국이 경의선 공사를 위한 선로 측량을 자체 진행하고 있었지만 일본이 갈취해 공사를 서둘렀다. 경의선 철로는 “서울에서 개성, 평양 등 한반도 서북부를 종단해 대륙의 관문,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경로”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한 숨결을 품은 경의선 일대는 이제 숲길로 재탄생해 일명 ‘핫플’이 됐다. 저자는 “숲길 옆에 들어선 술집과 카페에서의 한바탕 흥겨운 시간 속에서” 공간에 담긴 역사를 되짚어보자고 은근하게 권한다. 언젠가 또 변하고 말 서울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은 이들에게 제격인 책이다. 출판도시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 [책꽂이]

    [책꽂이]

    저녁의 비행(헬렌 맥도널드 지음, 주민아 옮김, 판미동 펴냄) 영국 코스타상 수상자인 작가가 인간과 자연의 경이롭고 우연한 만남을 한 편의 에세이집에 담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부터 숲에서 야생동물을 지켜보는 기쁨 등 환경파괴에 대응해 문학과 과학의 역할을 고찰한 이 책은 지난해 타임, 워싱턴포스트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488쪽. 1만 8000원.독일의 음식문화사(우어줄라 하인첼만 지음, 김후 옮김, 니케북스 펴냄) 음식 전문 저널리스트의 시각에서 통밀빵과 소시지, 맥주 등으로 대표되는 독일 식문화의 전통을 추적한다. 저자는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독일에서는 특정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유연한 식문화를 마련했으며 음식에서 다양성과 지역성이 강하다고 전한다. 660쪽. 3만 2000원.질병의 지도(산드라 헴펠 지음, 김아림 옮김, 사람의무늬 펴냄) 영국 의학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흑사병과 매독, 에이즈에서 최근 코로나19까지 전염병에 대한 인류의 분투와 좌절 이야기를 펼친다. 질병의 숨겨진 패턴을 드러냄으로써 17세기부터 축적된 지도 기술이 어떻게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사용됐는지를 보여 준다. 224쪽. 2만 5000원.대치동(조장훈 지음, 사계절출판사 펴냄) ‘사교육 중심지’ 대치동 학원가에서 20년 경력을 쌓은 입시 전문가가 명문대 학벌을 얻으려 몰려드는 사람들과 부동산 시세차익을 꿈꾸는 사람들이 뒤엉킨 대치동 내부의 풍경을 기록했다. 세속적 욕망이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로 향하게 된 경로를 분석하고, 개인들의 불행이 증폭되는 구조를 세밀히 묘사한다. 416쪽. 1만 8000원.대동단 총재 김가진(장명국 지음, 석탑출판 펴냄) 언론인 출신 저자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가진(1846~1922) 선생의 서거 100주년에 앞서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까지 결행한 유일한 인물인 선생이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일제와 맞서 싸운 과정을 담았다. 248쪽. 2만원.우주 끝에서 만나(안지숙 지음, 문이당 펴냄) 2005년 신라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게임을 매개로 현실과 가상세계를 교차해 가며 인간 욕망의 뿌리를 탐색하고 구원에 천착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메타버스’ 공간을 배경으로 게임의 세계를 문학으로 펼쳐낸 신선한 시도로 평가된다. 292쪽. 1만 4000원.
  • 교가에 성차별적 표현…일제 잔재 여전

    교가에 성차별적 표현…일제 잔재 여전

    ‘꽃다운, 꽃송이, 학도, 역군’ 충북 초·중·고 교가의 상당수에 성차별적 표현과 ‘일제 잔재’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25일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충북지부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도내 초·중·고 교가 466개의 14%에서 성차별적 표현이 확인됐다. 17%에선 일제잔재 용어가 쓰였다. 이 단체가 지적한 성차별적 표현은 ‘꽃다운, 순결한, 여성이어라, 꽃송이, 백합, 단아한, 청순, 아름다운, 풋풋한, 싱그러운, 꽃피어라, 숙녀, 예쁜, 고운, 아담한’ 등이다. ‘학도, 민족, 의식, 근면, 성실, 협동, 역군, 건아, 조국에 바쳐, 이 목숨 다하도록’ 등은 일제잔재 표현으로 분류됐다. 의식의 경우 메이지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 용어를 번역해 만든 말이고, 협동은 일제강점기에 강조되기 시작한 훈육적 구호라는 게 참교육학부모회의 설명이다. 이런 시대착오적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된 교가는 중학교 교가로 조사됐다. 또한 여학교 교가에 성차별적 표현이, 남학교 교가에는 일제잔재 표현이 많았다. 교가 97%에서 우암산, 무심천 등 지형지물 표현이 사용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작사와 작곡이 특정인 몇몇에 집중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교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참교육학부모회 관계자는 “교가는 영구적이라는 일부 주장에 막혀 문제가 많은 교가들이 존속되고 있지만 학생들에게는 외면당하고 있다”며 “이번 연구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해 교가의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전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햇빛이 만든 소금꽃도 피었습니다

    햇빛이 만든 소금꽃도 피었습니다

    전남 신안 암태도를 떠난 배가 비금도(飛禽島) 가산선착장에 닿으면 가장 먼저 외지인을 반기는 것이 있다. 독수리와 염부(鹽夫) 조형물이다. 독수리는 섬의 상징물이다. 맹금(禽)이 날아가는(飛) 형상이라는 섬의 이름을 조각 작품으로 형상화했다(이웃섬 도초도의 상징물은 사자다).염부 조형물은 소금(鹽)을 만드는 인부(夫)를 형상화한 것이다. 고유의 작업복을 입고 수차를 돌리는 모습이다. 염부 조형물에서 보듯, 비금도와 도초도는 ‘소금의 섬’이다. 비금도 소금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당시 박삼만이란 인물이 북한 평양에서 소금밭 일구는 기술을 배워 와 신안 일대에 전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삼만은 동료와 함께 1946년 비금도에 염전을 조성했다. 호남에선 처음이고 나라 안에서는 1907년 인천 주안염전에 이어 두 번째다. 1948년에는 대동염전이 조성됐다. 비금도 주민들이 거대 자본을 거부하고 ‘힘을 모아’(大同) 만든 염전이다. 인천 등 도시 지역 염전들이 폐염된 것과 달리 여전히 소금을 생산하고 있어 2007년 신안 증도 태평염전(제360호)과 함께 등록문화재(제362호)로 지정됐다.두 섬의 소금밭은 광활하다. 산이나 평지, 어디에서 봐도 경이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동틀녘이나 해질녘 등 ‘풍경의 골든타임’에 찾는다면 더 좋다. 천일염이 생산되지 않는 계절이어서 염부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너른 소금밭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채롭다. 비금도엔 해변이 많다. 첫구지, 논드래미, 하누넘 등 순우리말 이름이 정겨운 해변이다. 하나같이 단단하면서도 고운 모래로 이뤄졌다. 명사십리해변도 있다. 섬 안에서 가장 광활한 해변이다. 방문객이 뜸한 요즘엔 그 너른 해변 위로 내 발자국만 남기며 걸을 수 있다. 명사십리 해변 뒤엔 ‘이세돌 바둑기념관’이 있다. 비금도가 고향인 이세돌(38)은 인공지능(AI) ‘알파고’와 겨뤄 1승을 거둔 프로기사다. AI의 비약적인 진화에 비춰 볼 때 그의 기록은 인류가 AI를 상대로 거둔 유일한 1승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현역 시절 이세돌은 기풍이 자유롭고 독수리처럼 매서운 공격력의 기사였다. 섬의 기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덕일 테다. 기념관 초입에 2016년 알파고와 벌인 세기의 대국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세돌의 가족사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명성에 가려졌을 뿐 형인 이상훈 9단 역시 프로기사였고, 가족 대부분이 어떤 형태로든 바둑과 연관돼 있다.비금도와 이웃한 도초도는 서남문대교를 통해 오갈 수 있다. 도초도 쪽 다리 아래 첫마을은 ‘불섬’, 화도다. 요즘처럼 섬을 드나들기 어려웠던 시절, 뭍에서 들어온 옹기장수 등이 불을 피워 오가는 배를 부른 곳이라 해서 불섬이라 불렸다고 한다. 도초도 역시 요즘 한창 관광의 섬으로 발돋움하는 중이다. 팽나무 700여 그루를 심은 ‘팽나무 십리길’, 사진 찍기 좋은 수국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요즘 가장 핫한 곳은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다. 흑산도로 유배된 ‘천주쟁이’ 정약전(설경구)이 섬 청년 창대(변요한)와 티격태격하며 ‘자산어보’를 저술하는 과정을 그렸다. 수국공원에서 멀지 않다.자산어보 촬영장은 두 채의 초가와 돌담 등으로 이뤄졌다. 바다가 한눈에 담기는 언덕에 세워져 풍광이 수려하다. 초가집 안방과 건넌방 사이는 마루다. 한데 벽면이 없이 양쪽으로 트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덕에 언덕 쪽에서는 바다가, 건너편에서는 그림산 일대가 걸개그림처럼 걸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촬영장을 찾은 방문객들은 홀린 듯 마루에 앉아 인증샷을 찍는다. ‘산멍’, ‘바다멍’을 즐기며 풍경 속에 머무는 법을 아는 거다. 두 섬의 마을은 하나같이 담장이 예쁘다. 그 가운데 내촌마을 담장은 등록문화재(제283호)다. 얼추 400년 전 형성된 마을 안 골목엔 키 낮은 돌담이 한가득이다. 이웃한 용소리는 ‘뽀빠이 마을’로 불린다. 시금치를 먹고 힘을 썼던 옛날 만화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이다. ‘섬초’라 불리는 시금치가 이 섬의 ‘대단한’ 특산물이란 걸 떠올리면 이름의 유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 아차산 봉수대에 불 지폈다… 중랑의 문화유산 힘 받았다

    아차산 봉수대에 불 지폈다… 중랑의 문화유산 힘 받았다

    지난 17일 서울 중랑구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 아차산 봉수대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중랑구가 순국선열의 날을 기념해 처음으로 봉수거화 재현 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이날 행사는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에 봉수를 활용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됐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는 충남 천안 병천 지역의 매봉산 봉수에서 만세 시위를 약속하는 봉화를 올렸다. 중랑구 봉화산 정상에 있는 아차산 봉수대 터는 서울시 기념물 제15호로 조선시대 제5대 봉수 중 제1로에 속하는 봉수다. 함경도에서 온 봉수를 최종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까지 전달하는 과정의 마지막 봉수로 북방민족의 침입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거 소실돼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했다. 이날 행사는 흥겨운 민요와 타령, 전통 무예인 택견 시범으로 문을 열었다. 거화의식은 별장과 봉군 등으로 구성된 근무조와 교대조가 이끌었다. 봉수대를 경비하는 수위의식과 봉수대 주변을 순찰하는 순라의식을 시작으로 교대의식이 이어진 뒤 봉수 신호 하나가 피어올랐다. 봉수 신호 하나는 평상시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봉수 신호체계에 따르면 1개는 평상시(하루 한 번씩 봉수 간 신호 전달), 2개는 적군 출현, 3개는 적군 국경 접근, 4개는 적군 국경 침입, 5개는 적군과의 교전을 뜻한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봉화산은 봉수대와 함께 도당굿의 역사를 간직한 뜻깊은 장소”라며 “이번 봉수 거화 재현식을 계기로 앞으로도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한 사업은 물론 문화유산 발굴 및 정비, 관리에도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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