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제강점기
    2025-12-15
    검색기록 지우기
  • 자율주행
    2025-12-15
    검색기록 지우기
  • 조직폭력배
    2025-12-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159
  • 평범한 인생도 역사가 됩니다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지난 30일 오후 서울 관악구청 강당에서는 특별한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평범한 지역 노인 8명이 출판 기념회의 주인공이었다. 강당 뒤쪽에는 8권의 각기 다른 자서전과 저자들의 사진, 기념품, 육필 원고 등이 놓여 있었다. 자서전 집필자 외에도 집필자의 가족, 친구 등 150여명이 모여 출판을 축하했다.구는 2011년부터 만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어르신 자서전 제작 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7년간 출판된 자서전만 58권에 이른다. 이날 출판 기념회를 연 노인들은 지난해 사업에 참여, 자전적 글쓰기 법 등을 배웠다.유종필 관악구청장은 “평범한 돌멩이 하나에 지구의 역사가 들어가 있듯 평범한 사람의 인생에도 우리 현대사의 굴곡이 담겨 있다”며 “누구라도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모두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사업의 취지를 설명했다.유 구청장은 또 “어르신들께 칠순, 팔순 잔치 때 수건 같은 기념품 대신 자서전을 선물하라고 권한다”며 “결정적 순간에 어떤 고민으로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자녀나 배우자에게 일일이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서병철(83) 할아버지는 ‘북풍은 남풍이 되어’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일제강점기에 징용을 피해 만주로 도피한 아버지를 따라 일가족이 만주로 이주한 내용,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조선족’으로 힘겹게 살아간 가족사를 엮어 냈다. ‘일곱 개의 보석’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쓴 구귀순(71) 할머니는 1971년 큰딸을 낳은 뒤 1987년까지 7명의 딸을 낳아 기르며 맏며느리로 병든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아간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구 할머니는 “내가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런 계기를 마련해 준 분들께 감사하다”며 “자식들 키워서 다 출가시키고 말년에 또 다른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8권의 자서전 저자 중 ‘은혜와 감사로 충만한 삶’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쓴 서진율 할아버지는 참석하지 못했다. 자서전 집필을 마친 뒤 갑자기 발견된 암으로 지난해 10월 별세했기 때문이다. 대신 참석한 서 할아버지의 아들은 “자서전이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유 구청장은 “아무리 평범한 인생이라도 똑같은 내용은 하나도 없다”며 “어르신들이 글을 쓰면서 본인 인생에 감동하는 기쁨을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유진모의 테마토크] ‘신과 함께’ ‘그것만이~’ ‘염력’의 신파

    [유진모의 테마토크] ‘신과 함께’ ‘그것만이~’ ‘염력’의 신파

    흥행에 성공한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감독)과 ‘그것만이 내 세상’(최성현 감독), 흥행이 유력시되는 ‘염력’(연상호 감독)의 외형은 무협 판타지를, 휴먼 코미디를, 초능력 액션 판타지를 각각 지향하지만 뼈대는 신파다. 신파란 20세기 초·중반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생겨난 통속적 연극의 사조를 받아들인 영화나 드라마가 애달픈 가족사나 애정 문제를 다룰 때 적용한다. ‘욕하면서 본다’는 TV 일일드라마가 대표적으로 고부 갈등, 결손가정의 비애, 출생의 비화 등이 단골 소재다. 가족을 중시하기는 유럽이나 미국도 마찬가지라 제작 현황은 우리나라와 별다를 바 없지만 유독 우리나라만 신파로 분류하는 배경은 침탈의 아픈 역사 속에서 다양한 피가 섞였음에도 단일민족이라는 선전에 속을 만큼 가족에 대한 애증이 강한 이유일 것이다. ‘신과 함께’는 저승사자 강림(하정우)과 군 복무 중 억울한 죽음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원귀 수홍(김동욱)의 액션이 전면에 부각된 게 흥행 포인트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에서 손에 땀을 흘리며 재미를 맛본다. 그런데 관람 후기는 ‘슬퍼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 주다. 밑밥은 강림의 무협 솜씨가 던지지만 영화에 대한 짙은 여운은 차례로 사망한 형제 자홍(차태현)과 수홍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이 완성해준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처음 만난 이부형제 조하(이병헌)와 진태(박정민)가 어쩔 수 없는 동거를 하게 되면서 물과 기름처럼 엄발나지만 어머니의 시한부 인생 판정을 계기로 서로를 보듬게 된다는 얘기다. ‘염력’은 평범한 중장년 석헌(류승룡)이 인연을 끊은 지 10년 된 외동딸 루미(심은경)로부터 아내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뒤늦게나마 딸을 챙겨주려는 부성애를 발동하면서 시작된다. 꽤 복잡한 내러티브가 얽히고설켰지만 결국 죽어서도 딸을 보살피려는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다. 부성애와 모성애가 다를 리 없다. 신파는 보는 이에 따라 유치한 클리셰일 수도, 쌀밥이 익숙하지만 그래서 입맛에 착착 감기듯 눈물과 콧물을 참을 수 없기도 하다. 상업영화일수록 익숙한 코드로 관객의 다양한 입맛을 맞추려 노력하는 이유가 ‘밥과 김치’의 친숙함과 같다. 유머와 드라마가 필수인 이유다. 아무리 그래도 흥행 영화에서 모성애가 이렇게 집중되는 건 우연의 일치이긴 한데 이유는 있다. IMF 구제 금융은 어머니에게 쏠렸던 무게 중심을 아버지에게로 옮기는 흐름을 조성했다. 오랫동안 이혼율 세계 1위를 내달리는 가운데 그 잘못과 책임이 거의 남자에게 전가됐지만 이젠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부성애에도 주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결국 어머니였다. ‘N포세대’와 1인 가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의 소중함이 간절함으로 부각됨으로써 모성애가 부성애를 역전했다. ‘염력’의 석헌은 루미를 위해 초능력을 발휘하는데 그 능력이 바로 죽은 아내의 모성애에서 비롯됐다는 감독의 노골적인 설정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일제강점기과 한국전쟁을 거친 국민 정서의 진동에 전면 배치된 가요에 대한 공감대와 다르지 않다. ‘굳세어라 금순아’나 ‘동백 아가씨’에서 보듯 가사는 가족의 비극이나 개인적 비통한 감정에 치중하고 멜로디는 단조가 많다. 21세기 트로트는 ‘칠갑산’ 같은 전통과 헤어졌고, 소모성 강한 케이팝은 ‘한의 정서’와 별개의 노선을 걸었지만 영화는 교묘하게 오월동주를 하고 있으니 영악하다. 3분과 2시간은 다르긴 하지만.
  • ‘꿈여울’ 무안·나주 휘도는 영산강 이야기

    ‘꿈여울’ 무안·나주 휘도는 영산강 이야기

    꿈의 속삭임은 왕에게 승전을 안기고… 물살이 숨죽인 자리엔 어리석은 뱃사공의 애달픔이… 아리고 아른한 몽탄강이어라 몽탄강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전남 무안 몽탄면과 나주 동강면 일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달리 부르는 이름입니다. 부여 앞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 여주 앞을 흐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몽탄(夢灘)을 우리말로 풀면 꿈여울입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됐을까요. 전설이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 몽탄강 일대를 돌아봤습니다.몽탄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건넌 여울이란 뜻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의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현지 주민들과 각종 자료 등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무안과 나주 인근의 영산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한낮에 선잠이 든 왕건에게 신령이 나타나 “바람이 잠잠해졌으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강을 건너라”라고 호통을 쳤다. 놀라 잠에서 깬 왕건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견훤은 대부분의 군사를 잃은 채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내용은 비슷하다. 장군 시절의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꿈에 신령이 나타나 “지금 여울이 낮아져 건너갈 수 있으니 어서 건너라”라고 해서 한밤중에 영산강을 건너 왜구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두 인물이 현몽을 받아 승전보를 전한 곳이 바로 몽탄강이다. 왕건과 이성계 둘 다 나라를 세운 왕들이고 보면 아무래도 승자의 입장에서 각색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 이리저리 휘돌아 만든 비경 ‘느러지’ 영산강은 담양 용추계곡에서 발원해 광주와 나주, 무안 등을 적신 뒤 목포에서 바다와 합류하는 남도의 젖줄이다. 이리저리 휘고 굽으며 흐르는 동안 곳곳에 빼어난 풍경들을 만들었다. 몽탄강 유역에서 가장 풍경이 빼어난 곳은 느러지 일대다. ‘느러지’는 물살이 느려진다는 뜻이다. 강물이 이 일대에서 크게 휘어지며 조롱박 모양의 물돌이동을 만들었다. 경북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하면 알기 쉽겠다. 여기가 바로 ‘영산강 8경’ 가운데 2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국내 하나밖에 없는 강물 위 등대 ‘몽탄진등표’ 물살이 숨을 죽인 자리엔 으레 나루가 생기기 마련이다. 몽탄강 일대에선 주룡나루와 몽탄나루 등이 그중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루는 삶의 터전이자 마을과 마을을 잇는 소통의 통로였을 것이다. 늙은 어부는 이른 아침부터 쪽배를 타고 그물질에 나섰을 테고 밤새 술추렴하느라 수세미 같은 머리를 한 뱃사공은 마을 사람들을 싣고 강 너머를 분주히 오갔을 것이다. 그 풍경은 다리가 놓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몽탄나루는 이름으로만 남았고, 주룡나루는 여름철 수상 레포츠의 메카로 변신했다. 여태 옛모습 그대로 남은 풍경도 있다. 키 작은 빨간 등대 몽탄진등표다.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세워졌다. 강물에 설치된 등대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산강이 하구둑으로 막히기 전 등대는 강물을 오르내리던 숱한 배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을 터다. 몽탄대교와 소댕이나루 중간쯤에 있다. 등대가 딛고 선 작은 바위는 멍수바위라 불린다. 이 바위에도 애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목포 쪽에 하구둑이 생기기 전 이 일대에선 굴이 많이 났다고 한다. 광양, 하동 등 섬진강 기수역에서 생산되는 ‘벚굴’과 같은 종류의 굴이다. 어느 날 한 노모가 굴을 따러 바위에 올랐다. 한데 밀물 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진작 배를 몰아갔어야 할 아들 멍수가 술을 마시느라 제때 노모를 모시러 가지 못한 것이다. 결국 노모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라졌고, 이후 날마다 강가에 나와 목놓아 울던 멍수 역시 노모 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양은 남았으되 제 소임을 잃은 등대는 이런저런 사연 탓에 더 애처로워 보인다. 몽탄진등표에서 맞는 풍경이 빼어나다. 물색은 파랗다. 하늘이 담긴 듯하다. 강변엔 부들과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누인다. 강둑엔 자전거도로가 조성돼 있다. 둑방길을 따라 자박자박 걷는 재미가 각별하다. 강 너머는 나주와 영암 땅이다. 멀리 월출산이 불쑥 솟았다. 그 기세가 장하다. 주변에 크기를 견줄 산이 없으니 돌올한 기상이 한결 도드라진다. # 수백년 살아내며 하늘 끝까지 펼쳐진 푸조나무 몽탄나루 옆엔 팔작지붕의 정자 한 채가 날아갈 듯 앉아 있다. 식영정(息營亭)이다. 담양 식영정(息影亭)과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다소 다르다. 식영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임연(1589~1648)이 무안에 터를 잡은 이후 1630년 지은 정자다. 정자 안에 들면 마루 너머로 몽탄강과 느러지 들녘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영산강 유역에서 손꼽히는 정자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팔작지붕 건물도 멋들어지지만 더 인상적인 건 주변을 둘러친 푸조나무들이다. 수백년을 살아낸 노거수들이다. 안내판은 나무들의 수령이 510년이라고 적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이 기준이다. 이후 36년이 지났으니 수령도 늘어 얼추 550년 가까이 됐다. 식영정이 지어졌을 당시에도 100년 이상 자란 거목이었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면 푸조나무는 나뭇잎을 틔워 낸다.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이 경이롭다. # 저물녘 눈부시게 타오르는 영산강 자태 정자 주변에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강변을 따라 어른 키만큼 웃자란 갈대와 부들 사이를 걷는 길이다. 산책 삼아 돌아볼 만하다. ‘동방의 마르코 폴로’로 불리는 최부(1454∼1504)의 묘와 사당도 이웃해 있다. 한반도를 닮았다는 느러지의 전경을 보려면 나주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 몽탄대교 건너 동강면에 느러지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영산강 1경은 영산석조(榮山夕照)다. 저물녘 붉게 물든 영산강의 자태는 목포와의 경계 어름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주변 상황이 많이 바뀐 데다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저물녘 풍경이라면 외려 몽탄진등표 쪽이 낫다. 무안은 해안 풍경이 고운 곳이다. 무안읍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해제반도 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은 함해만, 왼쪽은 탄도만이다. 이 길을 따라 톱머리, 홀통 등 독특한 풍경의 해변이 줄줄이 펼쳐져 있다. 조금나루도 인상적이다. 탄도만을 향해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은 반도다. 반도의 폭이라야 수십m쯤 될까. ‘반도’라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의 규모다. 현경면 쪽에도 달머리(月頭), 감풀 등 예쁜 마을들이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갯벌 습지 보존지역인 함해만이 이 일대에 펼쳐져 있다. 갯벌엔 연둣빛 감태가 한창이다. 해조류 특유의 비릿하고 상큼한 향기가 갯벌에 가득하다. 해제반도 끝자락엔 무안생태갯벌센터가 있다. 목재 데크를 따라 갯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무안 해안 따라 가다 보면 감태의 연둣빛 향기 무안 남쪽, 그러니까 목포와 경계를 이룬 지역에도 볼거리가 많다. 초의선사 유적지는 우리나라에 다도(茶道)를 정립한 초의선사의 생가터에 조성된 관광지다.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 다도관 등이 초록빛 차밭 주변에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물은 용호백로정이다. 작은 연못인 초의지를 거느린 정자다. 안내판에 따르면 서울 용산에 있었다는 추사 김정희의 정자를 복원해 조성했다. 겨울이라 다소 을씨년스런 모습이지만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되면 보다 그윽한 풍경을 선사하지 싶다. 정자의 현판은 초의선사 친필이라고 한다. 초의선사 유적지 아래는 오승우미술관이다. 오 화백의 기증 작품을 전시한 상설전시장 등 3개의 전시 공간을 갖췄다. 이달 말까지 ‘한국화를 넘어’전이 열린다. 항도 목포의 옛 모습을 그린 수묵화 등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다. 초의선사 유적지와 미술관 모두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품바발상지도 멀지 않다. 품바 타령은 향토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81년 일로면 공회당에서 초연됐다고 한다. 영산강 1경 가는 길에 들러볼 만하다. 글 사진 무안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무안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간명하다. 몽탄강 일대의 볼거리는 무안 동쪽, 탄도만 등 바닷가 풍경은 서쪽에 몰려 있다. 초의선사 탄생지, 오승우미술관 등 무안 남쪽을 먼저 돌겠다면 일로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빠르다. ▶맛집: 무안 하면 역시 낙지다. 무안읍내 터미널 뒤에 낙지거리가 조성돼 있다. 관광지 느낌이 강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무안 내에서 가장 싸고 싱싱한 낙지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혼밥족’이라면 산낙지 비빔밥을 ‘강추’한다. 산 낙지 한 마리 곁들여 먹어도 좋겠다. 요즘 세발낙지는 다소 귀해 마리당 7500~8000원 정도 받는다. 사창리 일대에는 짚불삼겹살을 내는 집들이 몇 곳 있다. 암퇘지 삼겹살과 목살, 목등심 등을 볏짚을 이용해 구워 먹는다. 삼겹살과 양파김치, 기젓(갯벌 게로 만든 젓갈)을 섞어 먹는다 해서 짚불삼겹살 삼합이라고도 불린다. 두암식당(452-3775)이 알려졌다. 몽탄면 소재지에 있다.
  • 수원시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출범

    수원시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출범

    수원이 3·1 운동의 ‘3대 항쟁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29일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병원으로 향하던 수원 기생 30여명은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수원지역 3·1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이 만세 운동으로 한 기생이 시위 주동자로 경찰에 체포돼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바로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기생 김향화(1897~?)이다. 수원시는 김향화 등 만세 운동에 참여한 기생들의 유족을 찾기 위해 제적등본 등을 뒤졌으나 당시 기생은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름을 통해 유족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김향화는 2009년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향화와 같은 수원지역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와 독립운동역사를 알리기 위한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24일 출범했다.기념사업 추진위는 이날 수원시청 중회의실에서 출범식을 열어 염태영 수원시장과 박환 수원대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100명을 추진위원으로 위촉했다. 기념사업 추진위는 출범선언문에서 “3·1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한 만세시위를 펼치고,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수원지역이었다”면서 “3·1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통일 한국을 준비하고자 수원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고자 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 추진위는 2019년까지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주제로 역사교육을 하고, 수원지역 독립운동 인물 및 3·1운동 콘텐츠를 발굴하는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또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강, 수원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항일 유적지 답사, 청소년 역사 대토론회, 3·1운동 독립운동가 거리 조성, 기념조형물 건립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염 시장은 “수원은 전국에서 가장 뜨겁게 독립 의지를 불태우며 3·1운동을 전국으로 퍼뜨리는 거점 역할을 했다”면서 “1919년 수원이 3·1 운동의 거점이 됐던 것처럼 2019년에도 3·1 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전국으로 퍼뜨리는 역할은 마땅히 수원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공동위원장도 “수원은 경기도 안성과 더불어 3.1운동의 대표적 성지”라며 “수원시민들은 조국을 위한 선열의 뜨거운 열정과 노력을 절대 잊지 말고, 수원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념사업 추진위는 오는 3월 1일 수원역에서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 기념식을 열 예정이다. 수원은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더불어 3·1 운동의 3대 항쟁지로 꼽힌다.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김향화 외에 이하영(1870~1952) 목사, 필동 임면수(1874~1930), 교육가 김세환(1888~1945),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1902~1921) 등이 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정찬주의 산중일기] 낙향한 작가의 예의

    [정찬주의 산중일기] 낙향한 작가의 예의

    폭설이 내리면 산방 부근의 산길은 어김없이 끊긴다. 아침 체조를 하는 셈 치고 산방으로 오는 언덕길 한쪽의 눈만 치우는 데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과격한 아침 체조는 더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삽으로 적설의 무게를 경험해 보니 그렇다. 힘을 무리하게 받은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만류해도 오겠다는 손님이 있으니 언덕길이라도 터 준 대가다. 눈이 쌓이지 않는 고흥 땅 사람들은 폭설로 산길이 막혔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던 듯하다. 승용차로 오다가 끝내 운전할 수 없다면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까. 나와 약속한 2월 초의 강연 행사가 다가오고 있으니 공무원인 그분들 마음이 급했던 것도 같다.안사람은 식당에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분들에게 떡국을 내놓았는데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산중 반찬으로 동치미와 김치밖에 없었지만. 그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려 응달의 눈까지 다 녹아 지금은 이른 봄 날씨처럼 포근하다. 겨울비가 제설 작업을 말끔하게 한 셈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가뭄도 어느 정도 해갈되지 않았나 싶다. 산방 마당의 연못에도 제법 빗물이 고여 있다. 놀랍게도 마당가에는 푸른 싹들이 점점이 돋아 있다. 눈 속에서 얼음새꽃처럼 스스로 발열이라도 했는지 파랗게 살아 있다. 손톱만 한 어린 질경이 잎도 보인다. 생명력이 질겨서 질경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봄날에 잡초를 뽑을 때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호미가 덜 갈지도 모르겠다.산길이 뚫린 뒤 첫 번째 손님은 보성읍에 사는 김아무개씨다. 작년에 탄원서를 써 주었는데 해가 바뀌었다며 날짜를 수정해 달라고 한다. 현재 영어의 몸이 된 김아무개씨의 직장 상사를 위해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탄원서다. 김아무개씨의 상사는 나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전후 사정을 살펴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텐데 명색이 작가로서 직접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모른 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대서소 직원처럼 고향 사람들이 요구하는 글을 거절하지 못하고 대행하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요구하는 글도 여러 가지다. 탄광에서 희생한 광부들을 기리는 화순탄광 위령비 비문부터 다산 정약용이 화순에서 2년 동안 ‘맹자’를 공부해 다산학의 바탕을 다졌던바 화순읍내 공원의 조형물에 새겨질 ‘화순과 다산 이야기’를 써 주었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느 선각자의 공덕비 비문을 지어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다산 동상 옆에 소개한 ‘화순과 다산 이야기’와 천년고찰 쌍봉사에 세워진 시판(詩板), 즉 초의 선사와 고려시대 지식인 김극기 시 번역은 주관이 가미됐으므로 나를 밝혔지만 다른 글들에는 모두 내 이름을 뺐다. 지역민을 도운 선각자나 탄광 희생자를 위한 글에 내 이름이 들어가면 누가 될 것 같아서였다. 몇 해 전에는 난생처음으로 별세한 분을 애도하는 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생전에 그분이 남긴 공덕을 충분히 헤아려 본 뒤에 쓴 글이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을 대며 내 산방을 찾아와 부탁하면 대부분은 외면을 못 하고 만다. 재작년에는 면사무소 앞의 커다란 입석에 새길 글을 지어 주었는데, ‘면민의 날’에 감사패를 받고 나서 쑥스럽기만 해 슬그머니 행사장을 나온 적도 있다. 내가 사는 이양면은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의 정중앙이다. 그래서 지은 문구가 ‘꿈꾸는 남도의 심장, 의로운 볕고을 이양’이었다. 의로운 볕고을이라고 한 까닭은 이양면 계당산에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한말 의병훈련 터인 ‘쌍산의소’(雙山義所)가 있고 양명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은 글은 고흥에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수군이 처음으로 승전한 싸움이 절이도(거금도) 해전인데, 승전탑의 비문과 해전의 배경을 설명한 사각형의 돌에 새긴 글도 내가 작성한 것이다. 앞에서 나를 대서소 직원 같다고 표현했는데 무보수로 썼다는 점이 그분들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고향 사람들이 부탁하는 글에는 고료를 청구하지 못할 게 뻔하다. 고향에 뼈를 묻으려고 낙향한 작가로서 최소한의 기부이자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 ‘종로署 폭탄’ 김상옥 의사 기념식

    ‘종로署 폭탄’ 김상옥 의사 기념식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관 중 하나로 독립투사 검거에 혈안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열혈 의거를 기리는 기념식이 22일 오후 4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벽루·석조여래입상…‘수몰’ 청풍도호부 역사·아픔 오롯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벽루·석조여래입상…‘수몰’ 청풍도호부 역사·아픔 오롯이

    조선 현종의 부인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관향(貫鄕)은 청풍(淸風)이다. 이 때문에 현종은 즉위한 1659년 청풍군(郡)을 청풍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킨다. 청풍은 고을 규모에 비해 읍격(邑格)이 높았고, 남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하면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같은 거리의 다른 고을보다 한양을 오가기가 크게 수월했다. 무엇보다 청풍은 읍치(邑治)가 남한강이 절경을 이루는 곳에 자리잡았으니 당대의 실력자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묵어 갔다. 자연스럽게 청풍도호부사는 관료들에게 크게 인기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청풍도호부는 고종의 189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郡)으로 낮아졌고, 청풍군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다시 제천군에 편입됐다. 도호부로 위세를 떨치던 청풍은 이후 일개 면으로 지위가 낮아진 채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청풍도호부는 오늘날 충북 제천시의 청풍·금성·한수·수산면에 해당한다. 그런데 청풍 고을의 핵심을 이루던 옛 읍치는 1985년 충주다목적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당시 충주·중원·제천·단양 등 4개 시·군의 11개면 101개 이·동에서 7105가구 3만 8663명이 동시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4개 시·군 7105가구가 삶의 터전 잃어 전체 수몰 면적 7698만 8069㎡ 가운데 제천이 차지한 면적은 절반에 이르렀다. 제천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이 청풍면이었는데, 25개 이·동이 물에 잠겨 1665가구, 9514명의 주민이 옛집을 떠나야 했다. 여기에 청풍면사무소와 파출소, 학교, 우체국 등도 모두 물에 잠겼으니 그야말로 ‘청풍 신도시’ 건설은 불가피했다. 새로운 청풍면소재지는 청풍도호부의 읍치이자, 청풍면의 옛 면소재지였던 읍리의 서남쪽 물태리에 세워졌다. 옛 읍치에는 청풍의 상징과도 같은 한벽루(寒壁樓)를 비롯해 문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문화재 이주단지 또한 물태리에 조성됐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청풍문화재단지다. 한벽루는 물론 청풍도호부의 동헌(東軒)인 금병헌(錦屛軒)과 청풍향교, 황석리 고가(古家)를 비롯한 여러 채의 민가(民家)에 불상과 각종 선정비까지 옮겨 놓았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기는 했어도 청풍 고을의 옛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일종의 야외 박물관이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조선 후기 지도 ‘청풍부팔면’(淸風府八面)를 보면 옛 읍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관아를 중심으로 청풍 고을의 8개 면을 원형으로 배치한 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청풍 읍치는 청풍호가 넓게 열린 청풍문화재단지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의 남쪽에 자리잡았던 청풍 면소재지 읍리(邑里)는 물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마을이었다. 강 상류 쪽에서 하류 쪽으로 읍상리, 읍중리, 읍하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청풍 고을의 관문이었던 팔영루(八詠樓)는 이제 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다. 제법 규모 있는 문루(門樓)다. 물길 의존도가 높았던 청풍이다. 배를 타고 청풍 관아에 가려면 북진(北津)에서 내려 팔영루로 들어섰을 것이다. 팔영루 앞 사적비(史蹟碑)에는 1702년(숙종 28)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賢德門) 자리에 중건해 ‘남덕문’(覽德門)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팔영루는 서향이었지만, 지금은 남향이다.팔영루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경양 민치상이 청풍 부사 시절 청풍팔경을 읊은 팔영시(八詠詩)를 짓고 이곳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척족(戚族)인 민치상은 공충도(公忠道) 관찰사 시절에는 오페르트의 남연군무덤 도굴사건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충청도는 순조와 철종 시대 각각 공충도라 이름이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팔영시는 청풍호의 조는 백로(淸湖眠鷺·청호면로), 미도에 내리는 기러기(尾島落?·미도낙안), 청풍강에 흐르는 물(巴江流水·파강유수), 금병산 단풍(錦屛丹楓·금병단풍), 북진의 저녁 연기(北津暮煙·북진모연), 무림사 종소리(霧林鐘聲·무림종성), 한밤 목동의 피리(中夜牧笛·중야목적), 비봉의 해지는 모습(비봉낙조·飛鳳照)을 읊은 것이다. 청풍부팔면 지도를 보면, 과거 팔영루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감옥이 있었다. 지도에는 영어(囹圄)라고 적혀 있는데 둥그런 모습이다. 지금은 물론 팔영루로 들어서도 감옥은 보이지 않는다. 감옥은 댐 건설 당시 이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이곳에서 관람객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이어지는데, 청풍부의 아문(衙門)이었던 금남루(錦南樓)가 나타날 때쯤 오른쪽 솔밭 사이에 세칸짜리 맞배지붕이 보인다. 보물로 지정된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이다. 역시 읍리에서 옮겨진 것이지만 이름에는 ‘청풍’도 ‘읍리’도 간데가 없다. 요즘식 표현으로 ‘출신지 세탁’이 이루어진 꼴이니 부처님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청풍은 고려시대 이 고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에 오르면서 1317년(충숙왕 4년) 군(郡)으로 승격한 역사도 있다. 물태리 여래입상은 높이가 341㎝에 이른다. 비교적 날씬한 몸매여서 당당해 보이지는 않지만 규모는 제법 크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는 듯하다. 불교국가 고려의 청풍 고을에서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금남루를 지나면 금병헌, 응청각, 한벽루가 줄지어 복원된 모습이 보인다. 한벽루가 객사(客舍)의 누각이라면 응청각은 관아의 누각이다. 한벽루와 응청각은 과거에도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객사는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시설이자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이 머무는 숙소다. 응청각은 별도의 숙소이자 연회장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객사와 한벽루로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홀히 할 수 없는 방문객이 많았으니 연회 수요도 그만큼 늘어났을 것이다. 한벽루는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처럼 본채 옆에 부속채가 딸려 있는 화려한 모습이다. 청풍 고을을 찾는 인물들의 정치적 비중도 그만큼 높았음을 뜻한다. 한벽루 내부에는 우암 송시열과 곡운 김수증의 편액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걸려 있다. 우암은 조선 후기권력을 오로지했던 노론의 영수, 곡운은 역시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 영화 ‘남한산성’에도 척화파의 대표로 등장했던 청음 김상헌의 손자다.●청풍문화재단지엔 수몰역사관도 한벽루 왼쪽에 솟은 해발 373m의 망월산에는 둘레 495m의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처음 쌓은 것이라는데, 서남쪽과 남쪽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망월산성은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청풍문화재단지 안팎에서 유일하게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금병헌과 망월산성 중간의 왼쪽 골짜기에는 청풍향교가 복원되어 있다. 옛 청풍 읍치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교리(敎里)에 있었다. ‘명륜당 중수기’에 따르면 청풍향교는 고려 충숙왕 시절 물태리에 세워진 것을 조선 정조 시대 교리로 이건했다. 이것을 다시 물태리로 옮겼으니 이 동네와는 인연이 적지 않다. 문화재단지에는 수몰역사관도 있다. 물이 차오르는 강가에서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 주민들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청풍의 문화유산은 그나마 문화재단지에 일부가 남았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몇 장의 사진 말고는 모두 물밑에 가라앉았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마식령 스키장과 동해안 육로/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마식령 스키장과 동해안 육로/서동철 논설위원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시아 하이웨이’(Asian Highway)를 알리는 표지판이 가끔 나타난다. 아시아 각국의 교류협력을 확대하고자 32개국을 연결하는 총연장 14만㎞의 국제 자동차 도로망이다.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가 일찌감치 1959년 채택한 ‘아시아 하이웨이 프로젝트’(AHP)다.한국은 2개 노선이 여기 들어 있다. 일본~부산~서울~평양~신의주~중국~베트남~태국~인도~파키스탄~이란~터키로 이어지는 1번 노선(AH1)과 부산~강릉~원산~러시아~중국~카자흐스탄~러시아로 이어지는 6번 노선(AH6)이다. AH1과 AH6는 각각 터키와 러시아에서 유럽대륙의 고속도로망에 합류한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종종 흘러나온 해저터널 구상도 아시아 하이웨이와 무관치 않다. 우리는 부산~쓰시마~이키시마~후쿠오카를 잇는 노선을, 일본은 후쿠오카나 가라쓰에서 출발해 이키시마와 쓰시마를 거쳐 부산이나 거제도를 종착지로 하는 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다. AH1의 부산~서울 노선이 경부고속도로라면 AH6의 부산~고성 노선은 7번 국도다.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아름다운 7번 국도에서도 AH6를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AHP에 우리나라는 서명했지만, 북한은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북한 구간은 여전히 ‘막힌 길’이다. 아시아 하이웨이는 우호·협력의 길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실리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AH1과 AH6의 통행이 자유로워진다고 해도 우리 상품을 트럭에 실어 유럽이나 베트남, 인도, 이란으로 직접 나르는 것은 바닷길과 비교해 경제성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시아 하이웨이는 중국횡단철도(TCR)나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이용한 유럽 화물 수송에 결정적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AH6는 우리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의 동북지방 물류 수송에 엄청난 강점이 있다. 7번 국도처럼 고성~원산~함흥~나진을 잇는 북한의 도로는 일제강점기 건설됐다. 일부는 금강산 육로관광에 활용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남북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해 금강산에서 공동 문화행사를 하고 원산 마식령 스키장을 훈련장으로 활용하는 데 합의한 것을 놓고 논란이 없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고성~원산에 이어 원산~나진까지 육로로 이용할 수 있다면 두만강 건너는 러시아 하산이다. AH6의 완성이다. 정부가 금강산과 마식령 스키장 활용을 북한에 제안한 배경에는 당연히 이와 관련한 ‘큰 그림’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dcsuh@seoul.co.kr
  • ‘솔’ 너와 서있는 공간

    ‘솔’ 너와 서있는 공간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숲이 있습니다. 나무 사이를 지나온 바람은 객의 몸을 씻고 마음까지 헹궈냅니다. 충남 아산의 봉곡사 솔숲이 꼭 그랬습니다. 500여 그루의 토종 소나무들이 이리저리 얽혀 자라는 곳입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명자깨나 날리는 숲에 견주면 그저 ‘경량급’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숲이 전하는 향기는 어느 숲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짙고 청량합니다.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두 시간가량 차를 몰아가면 만날 수 있지요. 이웃한 여러 명소들에 온천까지 곁들이면 아마 겨울 나들이 코스로 제격일 겁니다.빼어난 솔숲이다.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한 그루 한 그루의 형태는 제각각이어도 여럿이 어우러져 독특한 리듬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한 세기 전쯤 이 숲을 지나 봉곡사로 들어갔던 젊은 승려 만공(1870~1946)도,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한 농사법을 궁리하며 눈 내린 새벽길을 올랐던 젊은 실학자 정약용(1762~1836)도 이 솔숲처럼 빼어났을 것이다. 붉은 수피의 소나무들은 이리저리 굽었다. 솔숲 사이로 난 길도 나무들처럼 구불구불하다. 휘고 구부러졌다는 건 그만큼 너그러워졌다는 뜻일 터다. 삼나무처럼 쭉쭉 뻗은 나무들이 이룬 숲에 견줘 조형미는 떨어져도 외려 편안한 느낌은 더하다. 소나무 가지 위엔 밤새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였다. 눈은 주변의 어지러운 풍경들을 덮고 지운다. 그 덕에 수묵담채화 같은 담백한 풍경이 숲에 펼쳐져 있다. 숲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둥치에 상처를 안고 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항공기들의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나무가 상처 치유를 위해 분비하는 송진을 얻기 위해 일부러 깊은 상처를 낸 셈이다. 그 고된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도 필경 조선인이었을 터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나무들이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겪었는지 저 검은 상처가 일러주는 듯하다.봉곡사 솔숲은 토종 소나무들이 이룬 천연림이다. 아산시청 등에 따르면 소나무의 평균 높이는 15m가량, 수령은 100여년 정도다. 비슷한 크기의 소나무 500여 그루가 700m 남짓한 숲길에 빼곡하다. 우리나라 숲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괴됐다. 현재 숲의 80%가량은 1960년대 산림녹화 사업을 거쳐 조성됐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토종 솔숲이 여태 살아남았다는 것은 드문 경우에 속한다. 솔숲은 ‘봉곡사 천년의 숲길’이라고도 불린다. 인근의 갈매봉, 장군봉 등으로 오르려는 등산객들은 이 솔숲을 들머리 삼아 산행에 나선다. 솔숲의 끝은 봉곡사다. 봉수산(鳳首山), 그러니까 봉황의 머리 아래 깃든 절집엔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의 체취가 남아 있다. 조선 말기의 선승인 만공 스님은 23세 때 봉곡사로 왔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딘가)를 화두로 참선한 스님은 2년간의 수행 뒤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 오도송(悟道頌)이 바로 우주는 한 송이 꽃과 같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다. 솔숲을 오르다 보면 봉곡사 못 미처 만공탑과 만난다. 만공 스님을 기리는 탑이다. 만공탑 꼭대기에 음각된 ‘世界一花’는 만공 스님의 친필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1795년 겨울 정3품에서 종6품으로 강등된 뒤 이 절집을 찾았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넷. 한창 삶의 기초를 세울 나이(이립·而立)였다. 당시 그는 봉곡사 경내의 ‘ㅁ’자 요사채에서 머물며 실학자 13명을 모아 성호 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흘간 열었다고 한다. 모인 이들 대개가 젊은 실학자였던 만큼 새로 접한 서양의 과학을 이용해 더 많은 수확을 낼 농사법 등을 궁리하지 않았을까 싶다.이웃한 설화산 자락에도 명소가 깃들어 있다. 남서쪽엔 외암민속마을, 북동쪽엔 맹씨행단이 각각 터를 잡았다. 외암민속마을은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기와집과 초가집 등 전통가옥 60여 채가 돌담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표적인 고택으로는 건재고택과 참판댁 등이 꼽힌다. 주민들이 살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아름다운 돌담 너머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앞내’라 불리는 실개천를 건너면 곧 마을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돌담이다. 돌담은 막돌을 규칙 없이 쌓은 형태다. 이를 ‘허튼층쌓기’라고 부른다. 집집이 쌓은 담장 길이를 죄다 더하면 무려 5㎞에 달한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돌담에 쌓인 셈이다. 집집마다 울을 이룬 담장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을 곳곳으로 객들을 이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올해 3월 2일) 앞뒤로 달집태우기 등의 전통 행사도 연다.맹씨행단(孟氏杏壇)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초의 청백리였던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옛집을 일컫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사적 109호다. 본래 고려 말의 최영 장군이 낙향해 살다, 자신의 손녀사위였던 맹사성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로 세 칸씩 온돌방을 배치한 ‘H’자형의 건축 형태와 밖을 내다보는 데에만 쓰던 ‘눈꼽재기창’ 등이 인상적이다. 본채 외에도 사당으로 쓰인 세덕사, 맹사성과 황희, 권진 등 3명의 정승이 각각 3그루씩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구괴정 등이 남아 있다. 본채 옆의 600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 역시 맹사성이 심었다고 한다.이웃한 평촌리의 석조약사여래입상(보물 536호)도 찾아볼 만하다. 고려시대 세워진 석불상이다. 키가 1장 6척(4.8m)에 달해 형태상 장육불상으로 분류된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좌우대칭으로 규칙적인 옷주름, 짧은 목과 움츠린 듯한 어깨, 꼿꼿이 서 있는 자세 등의 형식미를 근거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미끈하고 말끔하다. 맵시 있는 자태도 일품이지만 잔잔한 미소 역시 방금 전에 지은 듯하다. 대체 어디서 수백년 세월을 건너온 흔적을 찾아야 할지 모를 정도다. 공세리 성당은 계절을 따지지 말고 찾아야 하는 아산의 명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겨울철 눈이 내릴 때 성모상 앞에 서면 자신의 온갖 허물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정의 마무리는 아산호다. 호수 위를 건너온 시리고 찬 바람이 헝클어진 정신을 퍼뜩 일깨운다. 엄혹한 계절을 이겨내는 철새들의 강인함을 목격하는 것도 좋고, 아산만과 서해대교 너머로 지는 붉은 해를 감상하는 맛도 일품이다. 아산호는 평택호로도 불린다. 충북의 충주호(청풍호)와 마찬가지로 평택과 아산 등 두 지자체가 이름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글 사진 아산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41) →가는 길: 공세리성당, 아산호 등은 아산 북쪽, 봉곡사와 외암마을, 맹씨행단 등은 남쪽에 붙어 있다. 묶어서 돌아야 보다 효율적으로 볼 수 있다. 봉곡사나 외암마을 등만 보겠다면 기차로 갈 수도 있다. 아산온천역에서 봉곡사, 외암마을 등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아산은 온천 도시다. 조선 시대 온천 행궁이 있던 온양온천, 충남도 1호 보양 온천인 도고온천, 게르마늄 온천인 아산온천 등 이름난 온천 지구만 세 곳이다. 세 온천이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만큼 여정이 끝나는 지역의 온천을 찾아 피로를 풀어도 좋겠다. →맛집 : 공세뜰두부집(533-1545)은 집에서 만든 두부를 내는 집이다. 두부 요리도 맛깔스럽지만 무엇보다 두부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칼칼하게 끓여 내는 김치찌개가 일품이다. 청국장도 별미다. 아산 공세리성당 앞에 있다. 지중해 마을은 지중해풍의 건물들이 밀집된 곳이다. 맛집 등 다양한 상가들이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먹고 사진 찍기 좋은 장소다. 아산호 주변에 해물칼국수를 내는 집들이 많다. 저물녘에 찾으면 아산만 너머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
  • [현장 행정] “터놓고 말씀하세요” 가슴으로 듣는 민심

    [현장 행정] “터놓고 말씀하세요” 가슴으로 듣는 민심

    “성내천 둑길 벚꽃이 참 예쁘게 자라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키 큰 벚나무 사이사이 주눅이 든 듯 피질 못하는 무궁화를 볼 때면 우리나라가 억압당했던 1936년 일제강점기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파크리오에 사는 이상태씨)●박춘희 구청장, 올해 첫 구민과의 대화 지난 8일 오후 3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서문 앞 예한교회 3층. 잠실4동 구민의 제안에 박춘희 송파구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올해 ‘구민과의 대화’를 위해 박 구청장이 처음 문을 두드린 잠실4동이다. 송파에서도 전형적인 ‘베드타운’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본격적인 구민과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박 구청장은 “무술년 만사형통의 해가 되시길 기원한다”며 현장에 모인 400여명의 구민에게 덕담을 건넸다. 이어 “88올림픽과 함께 탄생한 송파가 30년을 맞고, 국가적으로는 30년 만에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상징적인 해”라면서 “송파를 구민이 평생 살고 싶어 하는 행복도시로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파크리오(옛 잠실시영)·미성·크로바·진주 4개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잠실4동에는 1만 174가구, 3만 350명이 살고 있다. 최근 재건축 추진으로 주민들 이주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송파구 전체 27개 동 가운데 주민자치 프로그램이 2번째로 많은 지역이다. ●잠실4동 주민들, 고충 가감없이 토로 “구정에 관한 궁금증, 제언 등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구청장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10여명의 구민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잠실4동 자율방범대장인 지승용씨는 “안보 위험이 커질 때마다 불안하다. 구 예산으로 가구당 방독면이 들어 있는 안전 가방을 일괄 구입해 지급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답답한 마음에 건의드린다”면서 말문을 연 송희종씨는 “지체 장애가 있는 어머니가 아산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갈 때 택시를 1시간 이상 기다리기도 한다. 병원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한두 대만이라도 저상버스로 교체하도록 구청 차원에서 병원과 협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주민자치센터 시설 노후화, 구 차원의 강사료 지원 중단, 65세 이상 수강생 할인 혜택 감소 등 의견이 나왔다. ●“공공성 강한 사안은 예산 강구” 박 구청장은 이에 “공공성이 강한 사안의 경우 구청에서 적극 검토해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개선해 나가겠다”면서 “둑길 무궁화꽃에 대한 지적을 많은 분들이 해 주셨는데, 아무래도 함께 펴 있는 벚꽃과 비교돼 가슴이 아프신 것 같다. 반드시 시정하겠다”고 답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6·25 참전 당시 참혹함 체험… 전쟁 종식·평화 정착 이뤄야”

    [인터뷰 플러스] “6·25 참전 당시 참혹함 체험… 전쟁 종식·평화 정착 이뤄야”

    “땅의 평화운동으로 전쟁 없는 세계를 이루자.” 올해로 창립 35주년을 맞는 신천지예수교회는 그동안 ‘성경 중심의 신앙’을 최우선 가치로 평화와 나눔, 봉사를 통한 희망을 전해 왔다고 밝혔다. 그렇다 보니 교단 이름도 성경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요약해 ‘신천지’라 했다고 한다. 교회 창립자인 이만희 총회장은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참전한 까닭에 전쟁의 참혹함을 그 누구보다 똑똑히 체험했고, 성경의 ‘하늘에 영광, 땅의 평화’에 따라 평화운동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은 최전방 전투에 나서는 젊은 청년들의 희생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때문에 청년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전쟁 종식, 평화 정착’을 이뤄야 한다는 설명이다. “종교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하는 이 총회장을 인터뷰했다. 편집자 주→‘신천지’라는 이름의 유래와 신천지예수교회를 간략히 설명해주십시오. -종교인이 아닌 분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성경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한 시대가 부패하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노아 홍수 사건으로 아담 세계가 끝나고, 노아 세계가 부패하자 아브라함의 자손 모세가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끝나고 육적 이스라엘 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방 신을 섬기니 예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영적 이스라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는 이 영적 이스라엘도 부패가 되어 끝나고 새 나라 새 민족을 창조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를 새 하늘 새 땅, 요약해서 ‘신천지’라고 합니다. 곧 종교 세계를 기준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죠. 세상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종교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이전 것은 없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천지예수교회의 말씀과 다른 교단의 교리가 차별화되는 핵심을 말씀해주신다면. -자랑을 하게 되면요. 사람들은 이 성경을 모르다 보니 인정을 잘 못 합니다. 한마디로 종교 역사가 6000년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천지예수교회보다 더 나은 곳은 없고, 6000년 있었던 어떤 교리보다 신천지예수교회 교리가 몇십 배는 더 낫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도 ‘일곱 인(印)으로 봉한 책은 그 누구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기록돼 있어요. 일곱 인으로 봉해왔는데 우리 신천지는 통달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습니다. 또 아무나 온다고 안 받아줍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 씨 뿌리고 갔는데 (추수한) 열매 데리고 와서 계시록의 이룬 실상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인(印) 맞는다’고 하는 이 말씀으로 새겨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12지파를 만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했는데 목자로 한다면 14만 4000명입니다. 이것이 끝나자 많은 흰 무리가 모여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 약속했으니 한다는 믿음입니다. 새로운 한 시대를 맞이하는 주인공들이죠. 만들어놓으면 종교 세계가 여기서 끝나야 합니다. (신천지는) 성경을 배워서 시험을 칩니다. 시험 쳐서 합격해야 해요. 그래도 급성장합니다. 하늘의 고시인데 엄격하게 해서 시험 치고 점수를 매깁니다. 지구촌에는 이렇게 하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보시기에나 자신에게나 완벽하게 걸어 다니는 성경책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최고의 말씀이겠죠? 신천지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권을 가감 없이 가르치고 있고 특히 요한계시록이 이루어진 실상까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달하는 것이 가장 큰 자랑입니다. →교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관계자로부터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이 좋으니까 오는 것입니다. 성경 전권을 육하원칙에 맞게 가르치는 곳은 신천지예수교회입니다. 말씀 배우려고 많이 오는 것이죠. 특정 신학자의 교리나 철학 등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 그 자체를 가르칩니다. 배워보면 성경이 제대로 보이고 재미있거든요. 참 의미를 알게 되니까요. 이 말씀이 꿀 같이 달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너무나 확실하거든요. 작년에는 이렇게 공부한 사람들 2만 3000명이 수료를 했습니다. 수료는 수료시험에 합격하고 전도까지 한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수료를 할 수 없거든요. 교회에서도 성경 시험을 치고 있습니다. 과정이 어려워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기성 교회에 대한 입장은요. -우리나라 교회는 장로교가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장로교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입니다. 하나님도 성경도 하나인데 해석이 다 다르니까 교파가 나뉩니다. 이 교단 목사님이 저 교단에서는 사역할 수 없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때 일본 신에게 절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종교인이라면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이죠.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들었습니다. -네. 전쟁 이야기를 하자면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보병 최전방 전투병으로 갔습니다. 너무 참혹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전투기, 포탄 소리에 가슴이 울립니다. 젊은 청년들이라 견뎠을 것입니다. 전쟁을 하고 나면 사람이 반 이상 죽어서 없어집니다. 어떤 지역은 한두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전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학도병들도 많았습니다. 그 어린 학생들이 앞에서 다 죽습니다. 동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부를 원망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갑니다. 권력 가진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6·25 때 꽃 한번 못 피우고 많은 청년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서러움을 당하고 해방되고 얼마 되지 않아 동족끼리 전쟁을 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울어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죠. →현재는 평화운동도 하고 계시고요. -네. 제가 왜 평화의 일을 하는지 궁금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경에는 ‘평화’ 혹은 ‘화평’이라는 단어가 68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목적도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났을 때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도 평화를 외치셨고요. 종교인이 평화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전쟁이 80%입니다. 종교인은 이 세상을 선도해야 하는데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세계를 후대에 전해주자고 외치고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일들을 각국 전문가들과 논의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청년들 여성들도 함께 지지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88세이십니다. 건강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일 시키시려고 건강하게 하신 것이지… 저로서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회에는 종교인도 있지만 종교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행동은 종교인들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분들은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분명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부패된 종교 세계를 끝내시겠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종교가 없는 분들도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종교가 없는 분들과 종교인들을 깨우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씨줄날줄] ‘술 권하지 않는 사회’/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술 권하지 않는 사회’/임창용 논설위원

    술 소비량이 줄고 있다고 한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소비량이 감소하면서 주류 업체들이 앞다퉈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국내 술 출고량은 399만 5000㎘로 전년보다 1.9% 줄었다. 2014년에 비하면 소주와 맥주, 막걸리 등 주종별로 2.7~7.2% 감소한 것이다. 지난해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주류 업계에선 380만㎘ 이하로 줄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술 소비량 감소는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해 6월 국제 주류시장연구소(IWSR)는 2016년 전 세계 술 시장이 1.3% 감소했다고 밝혔다. 최근 5년간 평균 감소율이 0.3%였던 것을 고려하면 감소 추세가 가팔라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웰빙 바람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수명 연장에 따른 고령화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음주량이 많은 젊은층 대신 술을 적게 마시는 노인 비중이 늘어나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선 2015년 조사에서 맥주 소비량이 20년 전보다 62%나 줄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무엇보다 음주문화 변화가 크게 작용한 듯싶다. 술 강요와 폭음을 부르는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 양주나 소주보다는 와인이나 맥주 등 저도수의 술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신이 선호하는 술을 마시고 싶은 만큼만 혼자 즐기는 혼술족이 늘어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술 소비 감소는 국민 건강 차원에서 바람직해 보인다. 사활이 걸린 주류 업체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말이다. 음주가 사회의 건강과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브루스 알렉산더라는 캐나다 심리학자는 쥐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한 그룹의 쥐들은 비좁은 우리 안에, 다른 그룹의 쥐들은 넓고 쾌적하고 놀이시설까지 갖춘 쥐공원에 넣었다. 이어 양쪽 모두에게 모르핀을 탄 물과 보통 물을 넣어 주었더니 비좁은 우리 안의 쥐들이 모르핀이 든 물을 16배나 더 마시더라는 것이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보면 비슷한 설정의 스토리가 나온다. 매일 밤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내가 술을 먹고 싶어서 먹었단 말이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내는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탄식한다. 음주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남편이나, 그것을 일제강점기라는 억압된 사회 탓으로 받아들여 주는 아내의 모습이 대비돼 묘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술 소비가 계속 줄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일까?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라 해도 그렇기를 희망해 본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조선시대 양반도 술자리서 ‘원샷’ 즐겼다

    조선시대 양반도 술자리서 ‘원샷’ 즐겼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428쪽/2만 2000원첫 잔은 ‘원샷’.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든 지인들과의 저녁 모임이든 일단 동석한 구성원의 잔이 술로 채워졌다면 어김없다. 이제는 익숙해진 술자리의 대표 공식. 예전보다는 원샷을 강요하는 문화가 덜 하다고는 하나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연대감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처럼 우리는 보통 첫 잔을 한 번에 비워낸다. 오죽하면 한국계 미국인 키이스 킴은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음주 예절을 소개하면서 “첫 잔은 다 함께 마시려고 노력하라”고 설명했을까.어쩐지 오래되지 않았을 것 같은 ‘원샷 문화’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751년 영조가 주최한 잔치에 당대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 황경원(1709~1787)도 참석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술을 따르는 이에게 술잔을 가득 채우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우리는 취했는데 공만 홀로 취하지 않았구려” 하며 흉을 보았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그릇된 일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 사정(司正)을 그의 옆에 세워두고 감시하게 하는 통에 황경원은 영조가 내린 1ℓ에 달하는 술을 한꺼번에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황경원처럼 한 번에 술잔을 비우는 방식은 어른이 아랫사람을 모아놓고 예법을 가르치는 의례인 ‘향음주례’라는 행사에서도 행해진 것으로,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지속해온 오래된 관습이었다고 한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신간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에서 파헤친 음주 문화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를 조망했던 그는 이번엔 한국인들은 익숙해서 의심조차 안 했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그저 낯설기만 식습관의 역사를 추적한다. 왜 식당에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양반 다리를 하고 식사를 하는지, 왜 낮은 상에서 밥을 먹는지, 왜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사용하는지, 왜 식사 후에는 꼭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는지 등 13가지 주제로 나눠 우리 밥상 문화의 기원을 살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식사 방식이나 에티켓이 사실은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밥과 국을 제외한 반찬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눠 먹는 건 100년 전 양반 남성에게는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고급 식탁’인 소반에서 혼자 앉아 식사하는 것을 예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손님이 오면 당연히 독상을 차리는 것이 예의였다. 또한 서양에서 개인용 포크가 식탁 위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것도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 유럽 귀족들은 식사 때 포크를 쓰지 않고 대부분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 먹었다. 현재 한국인의 식사 방식에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경험이 깃들어 있다는 저자의 관점은 당연한 듯 들리면서도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가 식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 도자기 산업이 일본에 넘어가고 저렴한 질그릇과 오지그릇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60년대 이후 스테인리스 재질의 밥공기가 식당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는데, 당시 식량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정부가 쌀밥의 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식기에 대한 분석에서 보듯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이 겪었던 식민 지배 경험과 전쟁,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음식 문화에 미친 영향을 짚어내는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민의에 쏠린 文정부 여민정치, 책임 중시하는 위민정치로”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민의에 쏠린 文정부 여민정치, 책임 중시하는 위민정치로”

    “청년에게 일자리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잘 가꿔 나가도록 환경을 만들고 지원하는 게 고용정책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누군가 한 말이 아니다. 정책이념에서 문재인 정부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브레인 박재완이 2010년 9월 고용노동부 장관에 취임하며 한 말이다. 청년 일자리를 비롯해 국리민복이라는 지향점은 같지만 지난 9년여 보수 정권이 걸어온 오른쪽 루트를 버리고 왼쪽 루트를 택한 문재인 정부의 국정을 이명박 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과 기획재정부 장관 등을 지낸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현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이념과 가치에 따라 다르겠으나 국정이 나아갈 길은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작될 것이다. 지난 4일 오후 그가 국정전문대학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성균관대를 찾았다.-탄핵 이후의 정국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 “촛불 정국은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듭 확인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존중하고 창의와 다양성을 창달하는 실체적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집단최면에 걸린 듯한 편향과 쏠림이 걱정스럽다. 정론(正論)이 힘을 잃고, 중론(衆論)이 활개를 치면 편 가르기가 심화되고 국민 통합은 요원하다.” -탄핵 정국 이전에도 분열상은 극심했다. “그렇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랑을 거친 상황에서 국민 갈등을 보듬는 통합 노력이 더욱 중요한데 현 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아 걱정이라는 얘기다. 적폐 청산만 해도 국민 통합과는 다른 방향으로 치달아 왔다. 적폐는 사실 안전 불감증과 허례허식, 교통질서 위반 등 일상 속에도 뿌리 깊게 존재한다. 이런 문제들을 제쳐 놓고 과거 정부에 대한 전면 부정에만 치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여민(與民)정치’에만 치중할 뿐 ‘위민(爲民)정치’는 소홀히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참여와 대표성을 중시하고 중론을 좇는 여민정치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리민복의 실체적 관점에서 책임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위민정치다. 소통에 치중하는 여민과 책임을 강조하는 위민이 조화를 이뤄야 성숙한 민주주의에 이를 수 있다. 민의를 받드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다르다. 민의에 매달리는 국정은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각 정부 부처가 시민단체 인사 등을 중심으로 적폐청산 기구들을 만들고, 이들 기구가 사실상 부처를 지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과연 어떤 법적 근거와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의문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검토한 외교부 태스크포스(TF)만 해도 어떤 법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 그들의 권한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의문이다. 한·일 관계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 일제강점기에 저질러진 일본의 만행과 한반도 분단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망각하자는 말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양국의 지난번 합의가 성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참된 반성과 역사적 책임은 백마디 말보다 앞으로 북한을 정상국가로 바꾸고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일본이 적극 협력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구현돼야 한다.” -위민정치를 보완할 대안은 뭔가. “교육이나 에너지 문제처럼 나라의 내일과 직결된 정책들이 정권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부터 중요하다. 금융통화위원회가 통화 정책을 주관하듯 재정위원회, 교육위원회, 에너지위원회 같은 독립된 기구를 구성하고 전문가들을 대거 참여시켜 정책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위원회 위원들의 임기를 10년 이상이나 아예 종신직으로 해 정권 눈치를 보지 않고 나라의 내일을 위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비교해 문재인 정부는 그래도 소통하는 정부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재인 정부의 장점인 건 분명하다. 소통을 바탕으로 한 여민이 없으면 국정은 아예 되질 않는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모두 잇따른 선거 승리로 자만했던 것이 결국 불통 논란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 점은 현 정부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70% 안팎의 높은 국정지지도를 바탕으로 일방통행식 행보를 보이고 있으나 이럴수록 더 겸손하고 반대 진영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다.” -젊은층에서 보수는 배척당하는 상황이다. 보수 정파의 쇠락을 넘어 보수우파의 이념 자체가 지지를 잃어 가는 것 아닌가. “젊은층이 보수를 배격하는 경향은 취업과 결혼, 보육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그 책임을 보수우파 기득권 세력에게서 찾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기득권층은 보수우파의 이웃 말이 아니다. 대기업이나 의사, 변호사 등을 기득권층이라고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조나 우버택시 도입에 반대하는 택시업계 등도 사실 기득권층이다. 어쨌든 우파의 분발이 요구되는 게 사실이다. 우파의 본질적 가치, 즉 자율과 창의, 다양성, 가족,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국민 행복을 증진할 정책들을 개발해 내는 게 첫번째 소명이다. 나아가 개인보다 집단, 자율보다 규제, 다양성보다 획일성, 인간 존엄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시대 역행의 흐름을 제어하고 막아 내는 일도 중요하다. 당장은 좌파가 내세우는 여러 정책들이 솔깃해 보일 수 있으나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혁 등 국민 피부에 와 닿는 정책들이 바탕이 됐다. 우파는 그런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홍준표 대표의 자유한국당, 잘하고 있다고 보나. “책임지는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출당했지만 대통령이 저 지경이 됐다면 정계은퇴든, 총선 불출마든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몇 명은 나왔어야 했다. 그런 게 없으니 국민들 마음이 떠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보수우파 진영도 이제 40~50대가 전면에 서서 혁신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용기가 없거나 허물이 많거나 자신이 없거나 소시민으로 자족하려는 생각들, 쥐꼬리만 한 걸 지키려는 마음이 복합돼 ‘비겁한 보수’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우파 진영 모두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하고 우파의 새로운 세대를 양성해야 한다. 특히 한국당은 세대교체가 불가피하다.” -소득주도 성장을 기치로 한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어떻게 보나. “시장이 다양화, 전문화, 글로벌화하면서 정부의 정책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인 시대가 됐다. 지금은 민간이 정부보다 더 많이 알고 훨씬 책임 있게 행동한다. 그런 만큼 경제 패러다임도 민간 부문에 더 힘을 싣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여전히 정부 주도로 경제를 끌고 가려 한다. 그게 문제다. 이제라도 정부는 시장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민간이 새 질서를 만들어 내도록 도와야 한다. -현 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면. “노동 문제다. 지금의 노동제도는 제조업, 공장, 남성, 전일제 정규직을 중심에 둔 초기산업화시대의 틀에 머물러 있다. 실리콘밸리엔 근로시간도, 정규직도 없다. 업무공간과 업무시간이 다양화됐다. 고부가가치 경제시스템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지금 역주행을 하고 있다. 노조 쪽에 치우쳐 있는 점도 문제다. 노동이사제를 비롯해 노조가 요구해 온 것들을 국정 5개년 기본계획에 거의 다 담았다. 노조와의 이런 약속들을 다 이행하면 총고용이 위축되고 기업활동도 크게 활력을 잃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는 비단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영세기업들도 다 걱정하는 일들이다.” jade@seoul.co.kr ■박재완 前 장관은 2008년 6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역풍으로 이명박 정부 청와대는 출범 4개월 만에 비서실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참모가 교체됐다. 그러나 박재완 정무수석은 오히려 국정기획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이명박 정부 국정 전반을 총괄하게 된다. 이후 노동부 장관을 거쳐 2011년 6월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은 뒤로 이명박 정부와 임기를 같이했다. 민간의 자율성을 중시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반대하는 그의 경제정책 기조는 이른바 MB노믹스의 골간을 이뤘다. 실용우파를 표방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대표적 인사로, 멘토라 할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지난해 1월 작고)에 이어 2014년부터 우파 진영 싱크탱크인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이끌고 있다. ▲63세, 경남 마산 ▲서울대 경제학과, 하버드대 정책학 박사 ▲성균관대 교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 ▲17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 ▲노동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장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 서울시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

    서울시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

    서울시는 1987년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31주기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 터’ 등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을 설치 완료했다고 11일 밝혔다. 사진은 남영동 대공분실 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민주화운동 당시 단일사건 최대인 1288명의 학생이 구속당한 10·28 건대항쟁 터,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 빙고호텔 터, 일제강점기 여성인권을 탄압한 대표적인 기생조합인 한성권번 터,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했던 명동파출소, 부실공사와 안전관리 소홀로 49명의 사상자를 낸 성수대교 표지석. 서울시 제공
  • 배우 채시라, 알고 보니 채용신 화백 후손...“고조할아버지 덕에...”

    배우 채시라, 알고 보니 채용신 화백 후손...“고조할아버지 덕에...”

    배우 채시라가 조선 말기에 활동한 채용신 화백의 후손인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10일 배우 채시라(51)가 SNS를 통해 자신이 조선 말기 화가 채용신의 후손이라고 전했다. 이날 채시라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종 2품 무관이셨던 석강 채용신 한국 화가를 고조할아버지로 둔 덕에 어려서부터 미술, 특히 세밀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연필을 좋아해 틈나는 대로 곤충을 그려보았다. 위에서부터 장구애비, 물방개, 물자라. 털 하나하나, 더듬이 마디 수까지 세어 그대로”라며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애들한테까지도 나타나는듯 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나저나, 그림 많이 그려두란다, 전시회 열어준다고, 태욱 씨가”라고 전했다. 채시라는 이날 자신이 그린 그림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에서 채시라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한편 이날 채시라가 고조할아버지라고 밝힌 채용신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한국의 화가다. 그는 전통 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 화가이기도 하다. 채용신 본명은 동근(東根), 자는 대유(大有), 호는 석지(石芝)·석강(石江)·정산(定山)이다. ‘송정십현도’, ‘칠광도’, ‘권계도’, ‘팔도미인도’ 외 다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70여 점의 초상화를 비롯, 총 1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채시라 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고려 건국 1100주년… 고려불감 日서 돌아왔다

    고려 건국 1100주년… 고려불감 日서 돌아왔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은 올해 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감(佛龕)과 관음보살상이 귀향했다. 국립중악박물관은 후원 단체인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YFM)이 일본의 고미술상으로부터 구매한 뒤 박물관에 기증한 고려 불감과 관음보살상을 9일 공개했다.이번에 기증된 금속제 불감은 높이 13.5㎝, 너비 13.0㎝의 상자형으로, 고려시대인 14세기 말에 제작된 것이라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불감은 나무나 돌, 쇠로 만든 매우 작은 규모의 불전(佛殿)으로, 휴대하며 예불을 돕는 기능을 하거나 탑에 봉안하는 데 쓰였다. 이런 소형 금속제 불감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집중적으로 제작됐으며 현재 15점이 전해진다. 특히 소형 불감은 지붕 모양의 덮개가 있는 ‘전각형’과 지붕이 없는 ‘상자형’으로 구분되는데 이번에 환수한 불감은 상자형으로, 2012년 전북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돼 보물로 지정된 불감 외에는 없었다. 함께 돌아온 관음보살상은 높이 8.0㎝, 기단 너비 5.2㎝로, 불감에 안치됐던 것으로 보인다. 불감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한 점만 남았다. 은으로 제작된 뒤 도금한 이 보살상은 원과 명의 영향을 받은 금동상과 양식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 돌아온 불감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리건판 사진으로만 존재가 알려졌으나 기증을 통해 실물을 볼 수 있게 됐다. 불감은 일제강점기 고미술 수집가 이치다 지로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광복 이후 그의 가족이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반출됐다. 이후 30여년 전 고미술상에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에 기증된 불감과 불상은 고려 말 불교 미술의 양상과 금속 공예 기술, 건축 양식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고려 금동불감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을 시작하는 상징이자 기존에 박물관에 있던 고려 불감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라며 “이번 기증이 방황하는 우리 문화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불감과 관음보살상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해 오는 12월 개막하는 ‘대고려전’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일제강점기 민중들의 삶과 투쟁

    일제강점기 민중들의 삶과 투쟁

    35년/박시백 글·그림/비아북/904쪽/4만 3000원(1~3권 세트)만화로 그린 조선왕조실록으로 유명한 박시백 화백의 신작이 나왔다. ‘35년’은 일본에 강제 합병된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집필이 강제로 멈춰버린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일본의 폭압적인 통치 아래서 내적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독립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동시에 근대화된 신분·토지 제도를 경험한 당시의 조선 민중들에게 주목한다. 작가는 그때의 35년을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가까운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인물 중심의 서사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단독][생각나눔] “생태 파괴” “동물 학대”…‘독도 지킴이’ 삽살개 중성화 수술 논란

    [단독][생각나눔] “생태 파괴” “동물 학대”…‘독도 지킴이’ 삽살개 중성화 수술 논란

    ‘독도 마스코트’로 불리며 독도에 살고 있는 삽살개가 번식 예방을 위한 중성화 수술(불임 수술)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4일 한국삽살개재단과 독도경비대에 따르면 현재 독도에 사는 6세대 삽살개 부부 ‘흑미’(암컷·1년생)와 ‘백미’(수컷·1년생)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 삽살개재단 관계자는 “2012년 독도에 입도시킨 4세대 삽살개부터 번식을 제한하기 위해 수컷에 대해 중성화 수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천연기념물 제368호인 삽살개는 1999년 3월부터 독도에 들어가 경비대와 함께 살고 있다. 당시 삽살개재단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 토종견인 삽살개를 매년 수십만 마리씩 사살했던 역사를 감안해 삽살개를 독도 지킴이로 상징화하자며 독도경비대에 암수 한 쌍을 기증했다. 이후 1~3세대 독도 삽살개 부부들은 현지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했다. 1999년 10월 1세대 암컷 ‘서순이’와 수컷 ‘동돌이’가 7마리의 새끼를 출산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10여년간 매년 새끼를 낳았다. 2012년엔 독도에서 태어난 삽살개 새끼 5마리를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해 전국적인 호응을 얻기도 했다. 삽살개재단이 독도 삽살개 수컷을 대상으로 갑자기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나선 것은 독도에서 세 마리 이상을 키우기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독도에 삽살개 관리 전담요원이 없어 불어나는 개체수에 대한 관리가 어려운 데다 독도 삽살개들이 바다제비와 괭이갈매기 등 서식 조류들을 해치고 산란기 새들의 알을 먹어 치운다는 점이 환경부와 환경운동가 등에 의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독도 삽살개의 중성화 조치에 대해서는 동물 애호 운동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부산의 한 동물 애호단체 관계자는 “중성화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하는 것으로 동물 학대”라며 “특히 독도 삽살개는 영토적 상징성이 큰 독도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중성화는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동물 권리 단체 ‘케어’의 임영기 사무국장은 “독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삽살개 개체수를 계속 늘릴 경우 독도 생태환경 파괴 우려가 있는 만큼 불임 수술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라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국일(대경대 경임교수) 서라벌대 한스케어스쿨 대표는 “독도 경비대에도 군견병과 같은 삽살개 전담 요원을 배치해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재정적 지원도 절실하다”고 밝혔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우이신설선 타고 추억을 달린다… 역사를 만난다

    우이신설선 타고 추억을 달린다… 역사를 만난다

    “지역 상인들이 체감할 정도로 관광객이 많이 늘었습니다.”(박겸수 강북구청장) 서울 강북구로 향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지난해 9월 우이신설 도시철도의 개통이 촉매제가 됐다. 1·2호선 환승역인 동대문구 신설동역에서 강북구 북한산우이역까지 11.4㎞를 약 23분 만에 주파하는 노선이다. 소요시간이 기존 50분대에서 30분가량 줄었다. 지하철이라고는 4호선밖에 없어 접근성이 떨어졌던 강북구에 ‘가뭄의 단비’였다. 박겸수 구청장은 “도시철도가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를 관통하면서 역사문화관광벨트와 북한산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문화·관광도시’ 강북구에 대한 매력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이신설 도시철도 개통 100여일을 맞이해 가볼 만한 강북구의 역사·문화·관광 자원을 소개한다.북한산우이역 ●봉황각·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이곳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10년 안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결심하고 교육기관으로 세운 곳입니다.” 박충남 의창수도원 원장이 눈이 하얗게 쌓인 봉황각을 가리키며 기자에게 봉황각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했다. 봉황각 안에는 당시 독립투사들을 키워냈던 손병희 선생의 초상화가 벽 한쪽에 걸려 있어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강북구 우이동에서 북한산으로 오르는 길 초입에 자리한 봉황각은 1912년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지도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건립한 교육 시설이다. 이곳에서는 독립정신 교육도 함께 이뤄졌고, 이때 교육을 받은 483명은 3·1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5인도 봉황각에서 배출됐다. 봉황각 맞은편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다. 이 건물은 원래 1921년 종로구 경운동에 지어졌던 천도교의 중앙총부 건물이다. 천도교는 150년 전 수운 최제우에 의해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창도된 바 있다. 1960년대 도시계획이 시작되면서 중앙총부 건물은 구조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 우이동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던 소파 방정환에 의해 어린이 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도선사 도선사는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인 백운대와 만경봉, 인수봉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앉아 있다. 실제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 산세가 절묘하고 풍광이 빼어나 ‘천년 후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언하고 절을 세운 뒤, 손으로 큰 바위를 갈라 마애불입상을 새겼다고 전해질 정도다. 마애불입상이 있는 석불전은 기도영험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1년 내내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 관계자는 “수능 때 특히 학부모들이 많이 찾는다”고 기자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그 외에 목아미타·대세지 보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1호), 석나반존자 독성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2호) 등의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다. 솔밭공원역 ●솔밭근린공원 우이동 주택가 인근에 위치한 솔밭근린공원에 들어서면 기분까지 맑게 만드는 은은한 솔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100년 이상 된 소나무 1000여 그루가 내뿜는 향기다. 특히 솔밭근린공원은 사람이 계획해 꾸미거나 가꾼 것도 아닌 자연 그대로의 숲이라 가치가 더 크다. ‘도심 속의 산림욕장’으로 총면적만 3만 4955㎡에 이른다. ?이곳은 원래 사유지였다. 숲은 개발 붐이 불어닥친 1990년 아파트 개발지로 선정돼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과 강북구가 앞장서 보존운동을 벌였고, 1997년 서울시와 강북구가 땅을 매입해 2004년 솔밭근린공원으로 개장했다. 최근에는 공원 내에 반려동물 전용 산책로가 문을 열었다. 산책로는 총길이 800m로 일부 구간에는 나무 데크(난간)가 깔려 있어 반려동물과 주인이 함께 솔향을 맡으며 쾌적하게 산책할 수 있다. ●박을복 자수박물관 솔밭공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박을복 자수박물관이 나온다. 전통 자수와 근현대 회화를 접목시켜 현대 섬유 조형예술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박을복 선생의 자수 작품들을 전시한 곳이다. 이곳은 2010년 설립됐다. ?전시실 1층은 기획 전시실과 문화 체험 학습 공간, 2층은 박을복 선생의 자수 작품을 전시하는 상설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넓은 야외 마당에서는 각종 공연을 할 수 있다. 박물관은 평일 낮 12시~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열고, 관람 전 전화로 예약한 후 방문해야 한다. 4·19민주묘지역●국립 4·19 민주묘지 북한산을 배경으로 순백의 화강암 기둥이 푸른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국립 4·19 민주묘지’ 앞쪽에 세워진 기념탑의 모습이다. 국립 4·19 민주묘지에는 1960년 4·19혁명 당시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잃은 185명의 영혼이 고이 안장돼 있다. 구는 4·19혁명의 참된 의미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념하고 이를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2013년부터 4·19 관련단체와 공동으로 ‘4·19 혁명 국민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박 구청장은 “4·19 혁명은 민중들의 희생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 및 법치국가의 토대 위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근현대사기념관·초대길 국립 4·19 민주묘지를 나와 우이동 일대 카페거리를 걸어 올라가면 근현대사기념관이 나온다. 2016년5월 강북구는 구한말부터 정부 수립 전후, 4·19 혁명까지의 역사를 시대별·사건별로 정리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을 개관한 바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고, 관람 비용은 무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초대(初代)길’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라는 상징성을 가진 선열들의 묘역만을 이은 역사탐방길이다. 코스는 근현대사기념관을 출발해 대한민국 초대 제헌국회 부의장과 2대 의장을 지낸 신익희 선생, 대한민국 제1호 검사가 된 이준 열사의 묘역을 지나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선생,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인 광복군 합동묘소와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의 묘역을 돌아 다시 근현대사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윤극영 선생 가옥 기념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윤극영 선생 가옥 기념관에서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동요 ‘반달’이다. 작사·작곡가 윤극영 선생은 반달 외에도 ‘까치까치 설날’, ‘고기잡이’, ‘우산 셋이 나란히’ 등 100여편이 넘는 동요의 노랫말을 짓고 곡을 썼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안효경 윤극영 가옥 해설사는 “이곳은 윤극영 선생께서 타계하기 전인 1988년까지 거주하던 집으로 2014년 10월 서울시 미래유산 1호로 지정해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박 구청장은 “우이신설선을 타면 북한산우이역까지 23분밖에 걸리지 않아 언제든 우이동으로 떠날 수 있다. 많은 시민들이 다양한 역사문화 유산과 관광지를 품고 있는 도시 강북구를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