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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로→고려대로’ 성북, 일제 잔재 거리명 지운다

    ‘인촌로→고려대로’ 성북, 일제 잔재 거리명 지운다

    서울 성북구 ‘인촌로’가 ‘고려대로’로 바뀐다. 성북구는 지난달 15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실시한 ‘도로명 변경 서면동의’에서 인촌로 주소 사용자 9118명 중 5302명(58%)이 고려대로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고 19일 밝혔다. 구는 지난 2월 항일독립지사선양단체, 고려대 총학생회와 인촌로 변경 논의를 착수했고, 8월엔 인촌로 직권 변경 추진 계획을 수립하고 주민설명회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주민 의견을 수렴했다. 인촌로는 지하철 6호선 보문역~고대병원~안암역~고대앞사거리 구간(약 1.2㎞)으로, 도로명판 107개와 건물번호판 1519개에 사용된다. 구는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을 교체하고, 공적장부의 도로명 주소 전환 작업도 최대한 빨리할 계획이다. 인촌 김성수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인물이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 심우장으로 옮겨온 후 그를 따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성북구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쳐 온 만큼 인촌로 변경은 당연한 노력”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앞두고 바른 역사 세우기에 동참해 주신 구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125개 별자리 덮개돌…1500년 前 가야 왕국은 우주를 품었다

    125개 별자리 덮개돌…1500년 前 가야 왕국은 우주를 품었다

    지름 40m 아라가야 최대급 ‘붉은벽 고분’ 돌덧널 덮개돌 아래 궁수자리 등 그려져 크기·깊이 다르게 표시… 밝기 나타낸 듯아라가야(가야 6국 가운데 한 나라)의 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에서 ‘별자리’ 그림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5세기 후반 아라가야인들의 천문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함안군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하고 있는 도항리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515호)에서 붉은 안료로 채색된 구덩식 돌덧널무덤의 벽면과 125개의 성혈(星穴, 별을 표시한 자국)이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됐다고 18일 밝혔다. 말이산 주능선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13호분’은 지름 40.1m, 높이 7.5m에 달하는 아라가야 최대급 고분이다. 1918년 일제강점기 때 야쓰이 세이이쓰가 한 차례 조사한 적이 있으나 도굴식 조사에 그쳤다. 돌덧널 내부가 네 개의 벽면 전체가 붉은 물감으로 칠한 ‘주칠 고분’이라는 사실도 이번 조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궁수자리 등의 별자리를 새겨 놓은 성혈 125개는 무덤방을 덮은 덮개돌 가운데 중앙돌 아랫면에서 확인됐다. 각각 크기와 깊이가 다른데, 이를 통해 별의 밝기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고분 덮개돌 윗면에서 드물게 발견된 별자리가 이처럼 돌덧널 안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무덤 축조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성혈이 고분 덮개돌 윗면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기는 하지만,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가야 무덤 1000여개가 밀집한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또 지난 6월 최초로 확인한 아라가야 왕성지를 추가 발굴한 결과 망루와 창고, 고상건물, 수혈(구덩이), 집수지 등 군사시설로 보이는 건물지가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14동으로 수혈건물지 12동과 고상건물지 2동이다. 특히 10호 건물지는 판석(쪼갠 돌)을 세워 긴네모꼴의 정교한 건물터를 조성하고 길이 약 5m의 부뚜막을 설치했는데, 이는 가야에서 처음 확인된 구조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이 밖에 쇠화살촉과 쇠도끼, 비늘갑옷, 토기받침 등 일반적인 집자리에서 출토되지 않는 유물이 다수 발견돼 군사집단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실장은 “이렇게 대규모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존재했고, 전문화한 군사집단이 거주했음을 볼 때 추정왕성지가 아닌 왕성지로 단언해도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경남 함안 아라가야 고분서 ‘별자리’ 그림 125개 처음 발견

    경남 함안 아라가야 고분서 ‘별자리’ 그림 125개 처음 발견

    함안 말이산 고분군서 별자리 새긴 덮개돌 처음 나와“아라가야 천문사상 엿볼 수 있는 획기적 자료 평가”함안 가야유적 발굴현장 공개왕성지서서 특수건물지도 확인아라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에서 궁수자리·전갈자리 등 ‘별자리’ 그림이 발견됐다. 무덤 천장 한복판 덮개돌에 새긴 별자리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 가야 무덤에서 별자리 발견은 처음으로, 옛 아라가야인의 천문사상을 엿보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문화재청은 함안군과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조사 중인 경남 함안군 가야급 도항리 936번지 소재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515호)에서 네 벽면을 온통 붉게 채색한 구덩식 돌덧널무덤 덮개돌에서 125개 별자리를 찾아냈다고 18일 밝혔다. 13호분은 말이산 고분군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봉분 규모도 직경 40.1m 높이 7.5m에 달하는 아라가야 최대급 고분이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가 한 차례 조사한 적이 있으나 유물 수습 수준이었다.100년 만에 재개된 이번 조사에서는 13호분이 붉은 채색을 입힌 이른바 주칠(朱漆)고분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무덤방 내부 4개 벽면은 먼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적색 안료로 채색했다. 돌방무덤에서 주로 보이는 붉은 채색고분이 시기적으로 앞서는 돌덧널무덤에서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무덤방도 길이 9.1m,폭 2.1m,높이 1.8m 최대급 규모로 도굴구멍에서 수습한 유물 연대로 보아 5세기 후반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방을 덮은 덮개돌 아랫면에서는 125개 별자리 그림인 성혈(星穴)이 발견됐다.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으로,각각 다른 성혈 크기는 별 밝기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특히 성혈을 새긴 면을 주인공이 안치된 무덤방 중앙부에 배치한 것을 보면, 무덤을 축조할 당시부터 이렇게 구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사단은 “성혈이 고분 덮개돌 윗면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기는 하지만,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옛 아라가야인들의 천문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별자리는 청동기 시대 암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무덤에 별자리를 표현한 경우로는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다. 한편 지난 6월 확인된 인근 아라가야 왕성지 추가 발굴조사에서는 망루, 창고, 고상건물, 수혈건물, 집수지로 추정되는 특수목적 건물지가 다수 발견됐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독립운동 할아버지처럼… 뇌과학 연구로 조국에 이바지”

    “독립운동 할아버지처럼… 뇌과학 연구로 조국에 이바지”

    조부 최창식 선생, 임시정부 설립 멤버 부친 최영화 박사는 KIST 설립 도와세계신경과학회장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장을 지낸 데니스 최(한국명 최원규)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의과대학 석좌교수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을 찾았다. 2016년 뇌과학연구소장 임기를 마친 뒤 해마다 한국을 찾아 KIST와 신약개발업체를 대상으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신경과학 분야 세계적인 권위자로 재미동포 2세인 최 교수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이유를 묻자 조부와 아버지 얘기를 먼저 꺼냈다. 최 교수의 조부 최창식(1892~1957) 선생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멤버이자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을 지낸 독립투사다. 일제강점기에 황성신문 기자와 오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역사 저술물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옥살이했다. 아버지 최영화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만들어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초석을 다졌다.최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의 KIST 뇌과학연구소장직 제안을 수락하고, 이후에도 한국의 뇌과학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것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3대째 조국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 최 박사는 KIST 설립을 도운 주인공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리든 존슨 대통령이 손잡고 한국에 국립연구소 설립을 추진할 당시 미국 바텔연구소에 근무하던 최 박사는 KIST 설립지원팀을 이끌었다. 최 교수는 “KIST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준 한국에 대한 미국의 보답 성격이었다”면서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에게 부탁해 이뤄진 것으로 건축자재 등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뜻밖 요구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앞당기는 단초가 됐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후보로 거론되는 그는 “한국의 뇌과학 연구 수준은 이미 상위로 평가받는다”면서 “치매치료제 등은 세계 유수 제약업체들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했음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만일 국내에서 성공한다면 블록버스터 신약을 개발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그는 “특히 중개의학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 사진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전, 베니스 비엔날레 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전, 베니스 비엔날레 간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윤형근전’이 내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로 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탈리아 베니스 포르투니 미술관과 윤형근전을 내년 5월~11월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순회 전시하기로 11일 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포르투니 미술관(Fortuny Museum)은 베니스의 시립 미술관으로 저명한 디자이너였던 마리아노 포르투니(Mariano Fortuny, 1871-1949)의 스튜디오가 그의 사후 베니스 시에 기증됨으로써 1975년 개관된 미술관이다. 최근 비엔날레 기간 중 ‘직관’(2017), ‘비례‘(2015), ‘사이’(2011) 등의 전시를 통해, 비엔날레와 함께 꼭 방문해야 할 산 마르코(San Marco)의 미술관으로 꼽혀 왔다. 윤형근전은 포르투니 미술관에서 비엔날레 기간 중 열리는 첫 번째 작가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 순회는 포르투니 미술관장 다니엘라 페레티(Daniela Ferretti)가 지난 8월 서울에서 열린 윤형근전 개막식에 참석해 직접 전시를 관람한 후, 바르토메우 마리 전 국립현대미술관장과 협의한 끝에 이뤄졌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인 윤형근(1928~2007)은 면포에 청색과 암갈색을 섞어 만든 색을 큰 붓으로 내려찍은 이른바 ‘천지문’(天地門) 작업을 남겼다. ‘윤형근전’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유신 시대를 거치며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작가적 양심을 올곧게 지켜나갔던 한 예술가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지난 8월부터 현재까지 약 10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당초 오는 16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베니스 순회전 개최 협약을 계기로 내년 2월 6일 설 연휴까지 연장 운영된다고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밝혔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인권위, “선감학원 사건, 특별법 제정 및 지원 시급”

    인권위, “선감학원 사건, 특별법 제정 및 지원 시급”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발생한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피해생존자 구제가 필요하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의견 표명이 나왔다.인권위는 14일 국회의장에 현재 계류 중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개정해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을 명시적으로 포함거나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행정안전부장관과 경기도지사에게는 관련 법안 마련 전 지원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냈다. 생계, 주거 또는 쉼터의 지원 및 상담과 의료서비스 제공 등 다양한 정책으로 지원해야한다고 봤다. 현재 피해생존자 대부분이 고령이고 질병과 경제적 빈곤 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설립된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국가 부랑아 정책에 따라 부랑아 강제 수용 시설로 사용됐다. 1955년부터 1982년 폐쇄 전까지 총 4691명의 아동들이 경찰과 공무원에 의해 선감학원에 강제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감학원에 수용된 선감학원 아동들의 약 41%는 8~13세였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염전, 농사, 축산, 양잠, 석화 양식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식사도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제공 돼 열매, 들풀, 곤충, 뱀, 쥐를 잡아먹었다. 선감학원 종사자나 다른 아동에 의한 상습적인 폭행 및 구타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탈출하거나 사망한 아동도 있다. 남은 피해자들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트라우마,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권위는 이에 선감학원 아동인권 침해가 국가폭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 국제인권규범을 위반 사례이며 국가의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의견 표명과 함께 인권위는 관계 전문가들과 피해자 지원 대책 마련에 대해 논의할 것을 예고했다. ‘선감학원 사건 특별법 제정 및 피해자 지원 대책 마련 토론회’는 17일 오후 2시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장 공동으로 인권위 인권교육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다.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책꽂이]히피, 할머니를 업은 할머니 외

    [책꽂이]히피, 할머니를 업은 할머니 외

    히피(파울로 코엘료 지음, 문학동네 펴냄) ‘영혼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가 1970년대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왔다. ‘히피’로 살았던 자신의 청년 시절 경험, 깨달음을 얻게 되기까지 모험과 방황, 사랑과 상처 등을 담았다. 소설 속 주인공이자 작가이기도 한 파울로는 1968년 여자친구와 함께 볼리비아 라파스를 지나 잉카의 옛 도시 마추픽추로 향한다. 첫 히피 순례길을 통해 세상은 진정한 교실임을 깨닫는다. 2년여 후 그는 진정한 내면 탐구를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난다. 광장에서 우연히 카를라를 만나 ‘매직 버스’에 탑승하며 두 번째 본격적인 히피 순례를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을 떠나 오스트리아, 터키 이스탄불 등을 지나 네팔 카트만두로 향하는 길 위에서 파울로와 카를라는 다양한 길동무를 만나 마침내 ‘나 자신’을 발견한다. 360쪽. 1만 4500원.할머니를 업은 할머니(김형진 지음, 최지영 그림, 파란정원 펴냄) 한집에 사는 두 명의 할머니. 나이가 동갑이고 해와 달만큼 다르게 생겼지만, 둘은 무척 친하다. 손녀의 가족은 외할머니를 그냥 할머니, 다른 할머니를 ‘작은 할머니’라 부른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의 몸이 불편하다. 건강했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타게 된다. 정신마저 흐릿해져 사랑했던 가족들 얼굴도 하나하나 잊어 간다. 손녀는 이런 할머니의 모습에 마음 아프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곁에서 손을 잡아 주는 일 뿐.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 남은 가족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다. 같은 날 세상을 떠난 두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마음을 애잔하게 표현했다. 할머니가 할머니를 어떻게 업는다는 것일까. 작가는 작은 할머니의 정체를 마지막에서야 알려준다. 작은 할머니의 정체를 아는 순간 ‘아하!’ 하면서 무릎을 칠 것이다. 80쪽. 1만원.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김철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문학평론가이자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저자가 2010년부터 발표한 글을 모은 산문집이다. 독립투사도, 부일협력자도 아닌 일제강점기 2000만 조선인, 그리고 그냥 그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 묻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자기동일성 혹은 정체성에 대한 병적인 강박, 공포에 시달리는 근대인으로 설명한다. 소설 토지의 일본인, 위안부 문제 등의 주제로 다양한 일제 식민지의 시공간과 우리 모습을 들춘다. 한국 근대문학을 통해 식민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노력해온 저자는 식민지 조선이 한국 정치의 수원지이며, 마르지 않는 폭력의 저수지라고 지적한다. “모든 혐오는, 타자에게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공포와 혐오라는 점에서, 결국은 자기 혐오이자, 그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말이 섬뜩하다. 272쪽. 1만 6000원.재미있는 곁말 기행(박갑수 지음, 역락 펴냄) 조선 명종은 유명한 점쟁이 홍계관을 궁으로 불러 “궤짝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맞춰보라”며 문제를 낸다. 홍계관은 “쥐 세 마리가 있습니다”라고 답하지만 쥐는 두 마리뿐이었다. 왕은 홍계관을 죽이라 하고, 광나루 밖에 있던 한 산에서 홍계관의 사형이 집행된다. 왕이 이상히 여겨 뒤늦게 암컷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쥐가 한 마리 더 있었다. 왕은 선전관을 보내 사형을 멈추라 하지만, 간발의 차로 홍계관의 목이 떨어진다. 선전관이 “아차! 늦었구나”라고 해서 산의 이름이 아차산이 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사실일까. 빗대어 표현하는 해학과 풍자가 담긴 말, 또는 동음어와 유의어, 다의어를 사용한 언어유희, 속담, 수수께끼, 육담과 같은 해학적인 표현을 통틀어 ‘곁말’이라 부른다. ‘월간중앙’에 연재됐던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의 글을 모으고 덧붙여 두 권의 책으로 냈다. 346쪽, 349쪽. 각 권 2만원.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문신 1·2·3 /윤흥길 지음/문학동네/각 408·408·400쪽/각 1만 4800원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 윤흥길 작가의 연재소설 원고를 챙겼다는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듯이 소설을 짊어지고 그 고통스러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최근 1·2·3권이 출간된 장편소설 ‘문신’은 올해 일흔여섯의 작가가 등단 50주년에 독자들을 향해서 힘껏 내미는 손이다. ‘경박단소’(輕薄短小·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음)의 시대. 독자들이 이를 원하고 출판사가 이에 부응하는 시대에 노(老)작가가 내미는 주름진 손. 총 5권인 소설의 4·5권은 내년 상반기에 출간된다. 소설은 황국신민화 정책과 강제 징용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산서(山西) 마을 천석꾼 최명배 가족의 엇갈린 신념과 욕망, 갈등을 그려 냈다. 아버지 최명배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당시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막대한 부를 쌓지만, 둘째 아들 귀용은 아버지를 ‘악덕 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라 부르며 사랑채를 턴다. 여기에 ‘기회주의자’ 아버지와 ‘사회주의자’ 동생 모두에게 거리를 둔 장남 부용도 있다.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시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과해 나가는 다종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린다.제목 ‘문신’은 전쟁에 나가기 전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 ‘부병자자’에서 비롯됐다.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말했다. “학교 선배이신 이규태 선생님 저서 중에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다가 부병자자에 눈이 꽂혔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도 6·25 때 동네 젊은이들이 입영 며칠 전 집 떠나기 전에 가족들이 보는 자리에서 팔뚝에다가 ‘일심’(一心) 같은 걸 새기는 걸 봤거든요.” 죽은 몸뚱이라도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간절한 비원이 부병자자에, 그리고 ‘문신’에 담겼다. 왜 다시 일제강점기일까. 작가는 “어떤 면에선 이 작품이 역주행 소설 같다”고 했다. 글로벌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이더라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해 한 번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민족성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일제 말기가 작가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최적기’였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신’은 대하소설에는 못 미치는 ‘중하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토지’처럼 그 시대를 다룬 호흡 긴 소설들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간상이 등장한다. 지주집에 먹물 아들들, 생각 많고 냉소적인 첫째와 행동파 둘째, 그리고 이들 형제에 자극제가 되는 친척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데 많은 공을 기울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야마니시 아끼라’로 개명한 악덕 지주 최명배는 실은 전통과 조상 신위를 끔찍이 여기는 인물이라는 식으로. “최명배는 놀부 같은 인물인데, 놀부가 사실은 못된 인간이지만 어떤 면에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력적인 인물일 수가 있죠.” 소설은 전반적으로 다지기 잔뜩 들어간 남도 김치같이 풍성한 맛이다(‘다지기’는 ‘다대기’의 바른 말이다). 한평생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다는 작가의 글답게 곳곳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어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또 멈칫할 사위 없이 책장이 막 넘어간다. 문장에 흐르는 유장한 가락 때문이다. ‘둥기당당 쿵덕쿵덕’ 읽으며 뜻을 유추해 보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거나 하면 좋겠다. ‘전두엽이 크지 않아 스스로를 범재라 생각한다’는 작가는 실제 이와 유사하게 소설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야심한 시각 AFKN(주한미군방송)을 소리 죽여 보면서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식으로.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총천연색 딱지본 표지… 그때 그 시절 추억 소환

    [그 책속 이미지] 총천연색 딱지본 표지… 그때 그 시절 추억 소환

    오래된 근대, 딱지본의 책그림/오영식·유춘동 지음/소명출판/676쪽/5만 5000원1970~80년대만 해도 시골장터에서 ‘딱지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딱지본은 ‘딱지’와 ‘본’을 합쳐 만든 단어로,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고 화려한 색깔과 모양으로 표지를 꾸민 책을 가리킨다. 정식 명칭이 아닌, 출판계에서 편의를 위해 만든 용어다. 대중을 위한 책이었기에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34년 발행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런가’(춘양사) 딱지본은 1930년대 당시 신여성의 유행을 반영한다. 배경을 크게 그리고 그 속에 주인공을 넣어 그렸던 표지도 당시 로맨스 영화 인기에 맞춰 주인공 남녀가 나란히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바뀌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생활 속 친근한 출판물이었지만, 그만한 학문적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저렴하게 사서 가볍게 즐기는 책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오래된 근대, 딱지본의 책그림’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나돌았던 딱지본 553종 771책의 생생한 표지와 도판 등을 싣고, 시대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이다. 700여쪽에 수록한 총천연색 컬러의 딱지본 표지를 넘기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조선을 사랑했지만 지워진 일본화가들

    조선을 사랑했지만 지워진 일본화가들

    일제강점기는 우리 근대 미술계에 참 난감한 시간이다. 기억하자니 친일이 돼버리고, 잊자니 40년 공백으로 남는다. 그래서 애써 이를 부정하곤 한다. 이 부정의 시간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우리에게 여전히 큰 과제다.‘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는 근대 미술계의 공백으로 남은 일제강점기 일본 화가들에 관한 책이다. 황정수 미술연구가가 20년 동안 발로 찾아다니며 챙긴 일본인 화가 30여명의 작품과 생애가 담겼다. ‘도화서’로 대변되는 조선 미술계는 일제강점기 때 ‘개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미술 세계를 마주하고 일본 미술과 서양 미술에 자리를 내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식민지인을 계도한다면서 이른바 ‘문화정책’을 펼친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년 동안 열린 조선미술전람회가 바로 그 대표적인 통로였다. 전람회는 많은 미술가를 배출하는 순기능이 있었지만, 미술계가 조선 총독부의 의도에 맞춰 왜색을 띠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출품·입선한 그림은 빼어난 작품이 많았지만, 현재 전하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일본 화가가 그린 작품은 불태워졌거나 이름을 바꿔 유통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한국 화가 조석진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조선 사찰 풍경’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림 좌측 위쪽에 ‘1925년 초봄에 조석진이 봉운사를 그린 작품이고 ‘매애’(梅涯)라는 사람이 글을 썼다’는 설명이 붙었다. 조석진의 화풍과 전혀 다른 데다가 그림에 글이 지나치게 과하다고 생각한 저자는 그림의 인장에서 ´산본’(山本)을 보고 글자를 맞춰 본다. 이렇게 나온 ‘산본매애’(山本梅涯)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와서 활동했던 유명 일본 화가 ´야마모토 바카이´였다. 그의 그림이 마치 조석진의 작품처럼 팔린 셈이다.저자는 일제강점기 그림 가운데 이런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오히려 근대 미술계를 왜곡시킨다고 지적한다. 그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조선 총독부가 이른바 왜색 짙은 작품에 상을 주고, 한국 미술계가 거기에 맞춰 흘러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도 “당시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한국 화가와 일본 화가가 교류했다. 한국의 유명 화가가 일본인 교사에게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는데, 우리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부정해버리면 우리 근대 미술은 결국 반쪽밖에 남질 않는다”고 강조했다.실제로 이들의 그림은 굉장히 한국적인 색채를 띤다.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가토 쇼린의 ‘마포풍경’은 한국의 시대상을 잘 드러낸다. 마포 쪽에서 한강 마포나루를 바라보며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린 이 그림은 조선 평민의 애환을 그대로 담았다. 조선 총독부가 조선미술전람회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한 가타야마 탄 역시 누구보다 한국적인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한복을 입은 조선 여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 ‘구’는 김기창의 ‘엽귀’와 비슷한 소재와 구도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두 작품은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란히 출품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도큐다 교쿠류는 그 누구보다 금강산을 빼어나게 그렸다. 그의 그림은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었던 ‘그리운 금강산’전에서 허백련의 제자인 임신의 그림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744페이지 방대한 분량의 책에는 400점의 도판을 실었다. 이 가운데 120점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다. 저자가 20년 동안 찾고 5년에 걸쳐 정리한 책은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일본 화가들이 그린 그림임에도, 그들이 애정을 가지고 그린 한국의 인물과 풍경을 보노라면 우리 미술계가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예술에는 이념도 국경도 없다.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다시 돌아보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때가 아닐까.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일본인들의 ‘경성 뉴타운’… 세월따라 주인 바뀐 ‘비극의 목격자’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일본인들의 ‘경성 뉴타운’… 세월따라 주인 바뀐 ‘비극의 목격자’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 투어’ 제31회 후암동(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편이 지난 1일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에 집결한 참석자들은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 동상~남대문교회(서울미래유산)~남관왕묘 터~남산도서관(서울미래유산)~옛 미쓰비시경성합숙소(장우오피스텔)~옛 전생서 터(영락보린원)~문화주택 지월장(지월장 게스트하우스)~옛 조선은행 사택(한국은행 후암생활관)~성의사(서울미래유산)~옛 삼판소학교(삼광초등학교)~옛 경성 제2공립고등여학교와 수도여고(서울시교육청 시설관리본부)를 차례차례 둘러봤다.일제강점기 경성은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의 도시였다. 연희전문 이순탁 교수는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기고문에서 “…경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의 중심이며, 조선인의 경성이 아니라 일본인의 경성이다”고 선언했다. 당시 경성부 토지면적 약 1000만평 중 일본인 소유 토지가 164만평으로 조선인의 159만평을 앞섰다. 국공유지 440만평을 합치면 경성 토지 72%를 일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다. 보유 토지를 돈으로 환산하면 조선인은 879만원인데 반해 일본인은 78% 이상 높은 1566만원에 이르렀다. 1927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도 “값이 높은 중앙 번영지는 전부가 일본사람과 외국인이요, 조선사람은 모두 산 밑 움막살이 초가집이 대부분…”이라고 보도했다. 1920년 당시 인구분포는 조선인이 20만명이고, 일본인은 7만 6000명이었다. 일본인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웃돌 정도였지만 경성 도심지의 토지와 집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다. 중외일보 1929년 11월 8일자에 따르면 “경성부민의 태반이 제 집을 가지지 못하고…조선인 측의 주택 문제는 일본인에 비하여 일층 심각한 형편이다”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당시 조선인 가구 4만 9000호(23만여명) 중 3만호가 월세 신세였다. 1895년 청일전쟁 승리 이후 한성부 남부 남산기슭에 자리잡았던 일본인들은 점차 진고개를 넘어서 서울역과 남대문로 일대까지 야금야금 점유공간을 넓혀갔다. 병탄 이후 충무로~필동~남대문로~후암동~용산 중심의 일본인 거주지를 청계천 이북 종로까지 확장해 나갔다. 1926년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안에 세우고 청운동과 효자동, 통의동과 동숭동, 명륜동 등 서울의 전통 주거지인 북촌과 동촌에 총독부와 경성부청, 동양척식회사, 식산은행, 경성제국대학 관사와 사택을 세웠다. 단순한 통치기구의 이전이 아니라 조선인의 북촌 축출과 일본인의 북촌 진입을 의미했다.적산가옥(敵産家屋)이란 일본인이 철수한 이후 정부에 귀속됐다가 일반에 불하된 주택이다. 일본인의 생활방식에 맞게 지은 일본식 주택 또는 서양식 문화주택이다. 일제는 서양식 주택을 집단적으로 지은 문화주택단지를 개발했다. 남대문 일대에서 후암동과 용산을 거쳐 영등포와 흑석동으로 나가는 축 선상과 광희문 밖 신당동을 지나 왕십리까지 뻗쳤다. 주로 경인선 철도와 전차 노선, 신작로를 따라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장소는 자연현상과 문화역사 그리고 환경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체이다. 사람의 행위와 의도가 이뤄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후암동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이다. 1900년 경인철도 개통과 1908년 일본군 용산 병영 건설 이후 최고급 주택단지로 군림했다. 광복 직후 유명인사들이 모여 사는 부촌이었다가 1970년 동부이촌동과 강남 개발 이후 거주민 교체를 겪었다. 1980년대 다세대, 연립주택단지로 주거형태가 바뀌었다. 거주자의 정치사회적 특성에 따라 주거공간의 변화가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일제는 뉴타운 개발계획에 따라 후암동에 거대 문화주택단지를 개발했고, 이어 왕십리와 보문동에도 새로운 단지를 세웠다. 후암동~용산과 신당동~왕십리를 연결하는 남산주회도로 공사가 1936년 시작돼 1939년 완공됐다. 현재의 삼각지역~약수역~보문동에 이르는 지하철 6호선 구간과 일치한다. 일본군 주둔지인 용산으로부터 이태원과 신당동, 왕십리, 신설동, 보문동 일대를 연결하는 거대한 동부 축 건설을 꾀했다. 두텁바위의 한자 표기인 후암동(厚巖洞)이라는 지명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1886년에 일본인이 제작한 ‘한성근방도’에 후암동이라는 지명과 이 일대의 구릉과 물길, 마을이 그려진 게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일제강점기까지 두텁바위라는 이름의 바위가 존재했다고 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없는 지명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터이니 조선시대에도 후암동이라는 지명이 실재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두꺼비바위(蟾巖)가 음운변화를 일으켜 두텁바위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이 동네에 살았던 실학자 안정복의 제자 황덕길(1750~1827)이 두꺼비바위에 대한 기록을 문집 ‘하려집’에 남겼다. 두텁바위 혹은 두꺼비바위라는 지명은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후암동 일대를 대표하는 지명은 본래 도동(桃洞)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전집’에서 봉숭아나무와 닥나무가 유명한 이 지역을 노래한 ‘도곡팔경’을 남겼다. 남관왕묘가 위치했던 도동은 1985년 후암동에 편입된 뒤 사라졌다.후암동은 남산의 남서쪽 산륵에 안겨 있다. 나라의 제사에 바칠 양과 염소 등을 기르고 공급하는 관청인 전생서의 목축장이었다. 1921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사택이 입주하면서 일본인 주거지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해 1930년대 문화주택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개항 이후 부설된 경인철도 남대문역(서울역)이 용산 일대를 가장 빠르게 도시화했다. 후암동의 총독부 관사와 조선은행 사택, 미쓰비시경성합숙소 그리고 단지형 고급 주거지는 서구식 삶을 지향하는 주택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후암동은 남산의 조선신사와 용산의 군대가 지켜주는 신성하고 안전한 보금자리였다. 특히 신세이다이 주택지, 미요시와 주택지, 쓰루가오카 주택지 등 민간주택지들은 꿈의 집이었다. 소설이나 잡지, 신문기사를 통해 ‘빨간 기와 파란 기와의 문화주택들이 아름다운 색채로 늘어서 있는 동네’라고 묘사되곤 했다. 문화주택의 구조는 철근콘크리트 블록조였으며, 지붕은 평지붕에 아스팔트 방수처리가 됐고, 난방은 집마다 지하실에 전용보일러와 벽난로를 갖췄다. 세로로 긴 창문을 두고 남쪽에 발코니를 설치하는 등 구조, 의장, 설비 면에서 혁신적인 주택이었다. 온 동네에 도시가스가 공급되는 최고의 주택단지 옆에는 일본인들이 다니는 삼판소학교와 경성제2고등여학교, 용산고등학교가 위치했다. 지금 우리에게 후암동은 무엇인가. 후암동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거주자가 전원 교체된 곳이다. 조선시대 한가로운 목축 마을에서 일본인 고급주택단지로 바뀌었고, 광복 후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이었다가 1970년대 동부이촌동 및 강남 개발로 명성을 잃었다. 100년 만에 급격한 퇴락의 길을 걸었다. 후암동에 남아 있는 300여채의 문화주택은 근대주거사의 비극적 단면이자 우리에게 과제로 남겨진 유산이기도 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서울의 문학4(박태원의 천변 풍경) ●일시: 12월 8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신청·안내: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 ‘우리나라 교과서 역사 한눈에 본다’, 경남도교육청 교과서 전시회

    ‘우리나라 교과서 역사 한눈에 본다’, 경남도교육청 교과서 전시회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교과서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교과서 전시회가 열린다. 경남도교육청은 4일 일제강점기 부터 현재까지 교과서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교과서 전시회인 ‘안녕, 나는 교과서야’를 오는 6일부터 31일까지 창원문화원 1층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이번 교과서 전시는 도교육청 기록관에 소장돼 있는 기록물 가운데 교과서와 학용품 등 100여점을 선별해 우리나라 교과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전시 시간은 평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다. 전시장 공간이 좁아 15명 이상 단체관람 때는 도교육청 기록관(268-1335·1337)으로 미리 예약하면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다. 도교육청은 교과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롭고 재미있는 시각으로 교과서 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전시 주제를 ‘교과서와 계절’, ‘교과서와 인물’, ‘교과서와 시대’ 등으로 나누어 교과서를 의인화 해 교 과서가 편지를 써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또 전시된 교과서에 나오는 당시 놀이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교과서와 놀이’, 교육과정 변천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교과서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로 전시를 꾸몄다. 전시회를 보면서 옛날 교과서 내용에 나오는 평균수명과 기온, 물가 등을 현재와 비교해 살펴볼 수 있고, 우리말의 아름다운 단어와 다양한 표현들을 찾아보며 우리말의 소중함과 우수성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전시회가 초등학교 학습과정과 연계될 수 있게 전시장 곳곳에 활동지를 배치했다. 도교육청은 그냥 보기만 하는 평면적 전시 개념에서 벗어나 직접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수수깡 만들기, 딱지치기 등의 재미있는 놀이를 할 수 있는 체험존을 설치하고 어른들에게 지나간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다양한 포토존도 마련했다고 밝혔다. 강종태 도교육청 지식정보과장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소장 기록물을 단순히 보존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사설] 근로정신대 첫 배상 판결, 남은 징용피해 재판 서둘러야

    대법원 2부는 어제 양모(87)씨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일본의 전범 기업인 미쓰시비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1억~1억 5000만원씩 배상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또 정모(95)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8000만원씩을 배상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두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이 있었다고 해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지난달 30일 전원합의체의 ‘신일철주금의 1억원 배상’ 판례를 인용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지연된 정의이지만 사필귀정이다. 이번 판결은 근로정신대 소송에 대한 최초의 확정판결이며 강제징용 배상의 경우 신일본제철에 이어 두 번째 확정판결이다. 두 판결은 일제강점기 법률관계 중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헌법 정신을 재확인하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바로 세운 것으로 주권국가의 사법부에서 내린 당연한 판결이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전범 기업 사업장 등에 강제로 노동자로 동원한 우리나라 여성들을 일컫는다. 그동안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일본군에게 성적 착취를 당한 위안부라는 오해를 받으며 가슴에 억눌린 한을 안고 살아야 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15세 때인 1944년 5~6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꼬임에 속아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가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했다. 일본에 끌려가 이날 10여초의 판결 주문을 듣기까지 74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사이 많은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 반인도적 불법행위 단죄를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다. 이번 판결로 한·일 간 외교 마찰은 불가피하다. 당장 일본 정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한·일 청구권협정에 분명히 반한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정부는 실제 손해배상이 이뤄지도록 나서되 미래 한·일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경우 2000년 소 제기에서부터 확정판결까지 18년이나 걸렸다. 검찰은 재판 지연에 대한 진상 규명을 서두르고 각급 법원에서 심리 중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10여건의 손해배상 청구 재판도 이번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신속하게 해야 한다.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양승태 사법부와 박근혜 정부가 짜고 재판을 지연시켰다는 의혹만으로도 사법부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 근로정신대 恨도 풀렸다… 바로 선 ‘정의’

    근로정신대 恨도 풀렸다… 바로 선 ‘정의’

    강제징용 5명도 8000만원씩 지급 확정 日 “매우 유감… 못 받아들여” 격앙대법원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에 이어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에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법원에서의 패소 판결은 국내에서 효력이 없고, 한·일 청구권협정이 있었다고 해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결론이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는 29일 일제강점기 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돼 일본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등에서 임금 한 푼 없이 노동을 강요당한 양금덕(87)씨 등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들에게 1억~1억 5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근로정신대에 대해 일본 기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10년간 이어진 일본에서의 법정 다툼에서 지고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낸 지 6년 만에 일본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이날 법정에서 선고를 지켜본 김성주(89) 할머니는 “평생 한을 품고 살았다”면서 “뼈가 튀어나온 채로 살고 있다. 그렇게 한이 많다”며 눈물을 흘렸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는 또 이날 강제징용으로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와 조선소 등에서 일한 정창희(95)씨와 이미 사망한 피해자 4명의 유족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도 피해자 5명에게 8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파기환송 후 원심을 확정했다. 일본 법원에서 패소한 정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00년 국내 법원에서 소송을 시작했지만 1·2심에서 잇따라 패소했다. 2012년 5월 24일 당시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에서 신일철주금 피해자들과 함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며 전향적인 판단을 했지만, 박근혜 정부의 ‘재판 지연’으로 처음 소송이 시작된 지 18년 만에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한 달 만에 또다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자 일본은 더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담화를 내고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명백히 반하고 일본 기업에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 외무성은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청사로 초치해 “한국 정부는 국제법 위반 상태를 즉각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서울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미쓰비시 “한국 대법원의 일본 패소 판결, 극히 유감”

    미쓰비시 “한국 대법원의 일본 패소 판결, 극히 유감”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미쓰비시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에 패소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29일 판결에 대해 “극히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이날 자사 홈페이지에 ‘오늘의 한국 대법원 판결(2건)에 대해’라는 제목의 입장문에서 “한일 양국 사이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돼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일본 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해 가겠다”며 사실상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을 방침을 밝혔다. 지난달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비슷한 소송을 당한 자국 회사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 회사에게 배상과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패소한 미쓰비시중공업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나카니시 히로아키 게이단렌(일본의 대표적 재계 단체) 회장은 이날 서울에서 열린 ‘유엔 SDG와 일본의 소사이어티 5.0 특별대담’에 참석해 “일본 측에서 보면 놀랄 내용인 만큼 악영향이 나오지 않도록 부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 대사도 “최근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있어서 관계가 (다시) 곤란해진 상황”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한국 대법원은 이날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 강제징용 피해자 5명이 각각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모두 원고 승소를 확정 짓는 판결을 내렸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대법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에 배상하라” 최종결론

    대법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에 배상하라” 최종결론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도 대법원이 미쓰비시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한 차례 대법원 파기 환송을 거쳐 2013년 대법원에 재상고된 후 5년 만에 내는 최종결론이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29일 박모(75)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5명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했다. 박씨 등은 1944년 9∼10월 강제로 징용돼 일본 히로시마 구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서 일했다. 이로 인한 손해배상금과 받지 못한 임금을 합친 1억 1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지난 1·2심은 “불법행위가 있는 날로부터는 물론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부터 기산(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계산)하더라도 소송 청구가 그로부터 이미 10년이 경과돼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청구권이 소멸 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했다는 피고들의 주장은 신의 성실의 원칙(상대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원칙)에 반해 허용되지 않는다”며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다시 열린 2심에서는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봤다. 또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더이상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거나 미쓰비시중공업이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다른 기업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은 피해자에게 각각 8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판단이 옳다고 보고 이날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차(茶) 한 잔, 여유로운 - 보성 한국차 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차(茶) 한 잔, 여유로운 - 보성 한국차 박물관

    “차(茶)는 삶의 길을 알려주는 종교다.” 서양 문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메이지 유신 시절 동양 정신은 음다(飮茶) 문화에 있다고 강조한 오카쿠라 덴신(1863~1913)은 영어로 다서(The Book of Tea)를 출간하여 동양의 차 문화를 서양에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그에게 있어 차는 종교였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으로 한국에서도 이름이 꽤나 알려진 중국의 린위탕(林語堂: 1895~1976) 역시 유교의 덕을 차에서 찾았으며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걸명소(乞茗疏:차를 애걸하는 글)’라는 해학과 애정 가득한 시마저 썼을 정도였다. 이렇듯 차에 대한 애정은 동북아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여기에 더해 동양의 차는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는데 영국 홍차가 바로 그것이다. 홍차는 녹차 잎이 자연 발효된 차로 네델란드 상선이 적도를 지나자 찻잎이 발효되었고, 유럽에 도착한 후에는 온통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를 '블랙티(Black Tea)'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해 180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는 홍차는 영국 사교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1904년에는 뉴욕의 토마스 설리반이라는 상인이 실크 주머니에 찻잎을 넣어 샘플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 현재 티백의 기원이 되었고, 같은 해 여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장에서 한 직원이 뜨거운 홍차에 얼음을 넣어 만든 것이 최초의 아이스 티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차와 관련된 일화들은 많다. 한국 차의 일화를 가득 담고 있는 보성의 한국차 박물관으로 가 보자.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와 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료의 차이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인 생두를 볶은 후 갈아서 음료를 추출하는 데 비해 차는 차나무 ‘잎’을 주원료로 사용한다. 하기에 커피가 원산지, 로스팅의 방법에 따라 차이를 두는 것처럼 차 역시 찻잎의 채취시기에 따라 우전, 곡우, 세작, 중작, 대작으로 구분한다. 또한 찻잎의 색에 따라 백차, 녹차, 황차, 우롱차, 홍차, 보이차와 같은 흑차로 나눌 수 있다. 즉 우리가 흔히들 녹차로 부르는 것은 차를 빛깔에 따라 분류한 이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외에도 발효정도, 가공방법, 모양에 따라 차는 다채롭게 제 이름과 맛을 지니고 있어 진정한 차 애호가가 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듯 하다.우리나라에 차는 다성(茶聖)인 초의 의순(1786∼1866)이 쓴<동다송(東茶頌)>에 "우리나라 장백산(長白山)에 백산차의 일종인 식물의 잎으로 차를 만들었다."고 언급한 데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또한 '차' 전래에 관한 공식적인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로 흥덕왕 3년조 기록에 의하면 차가 들어온 것은 선덕왕(632∼647) 때이지만, 차 종자의 본격적 파종은 흥덕왕(828) 때에 이르러서라고 전해진다. 당시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차는 다점(茶店)에서 돈이나 베를 주고 사 먹을 만큼 기호음료로도 인기를 누렸다. 또한 각종 제(齊)를 올릴 때도 차를 올리는 제반 의식인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고 이는 곧 백성들의 제례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오늘날 ‘차례 (茶禮)’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조선에 접어들자 일반 가정의 제례에서는 제주(祭酒)로 술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 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숭늉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의 변화로 인하여 차 문화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여기에 더해 차 산지 백성들에 대한 다세 부과로 차 생산지가 줄고 지방 관리들의 다공(茶貢)에 대한 지나친 수탈은 기호음료로서 차가 일본과 달리 조선에는 정착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커피 등의 서양의 차 문화가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보성에 위치한 한국 차 박물관은 이러한 차의 역사를 잘 소개하고 있다. 2010년 9월에 개관한 한국차박물관은 연면적이 4,598.22㎡에 이르며 지하1층, 지상 5층 규모로 수장고와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1층에는 차문화관, 2층 차역사관, 3층 차생활관을 테마로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 공간과 다례 등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한국의 차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차문화도 살펴볼 수 있다. <보성 한국차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보성지역은 우리나라 차생산의 주요한 거점이다. 보성지역에 간다면 필수 코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식물원과 공원이 있어 반나절 여유를 누릴 수 있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녹차로 775 (봉산리 1197번지) - 대중교통이 용이하지는 않아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홈페이지 참조 4. 감탄하는 점은? - 한국차의 다채로움. 차문화공원의 넓은 풍광.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접근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다. 단체관광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편. 6. 꼭 봐야할 것은? - 식물원, 차 체험관, 녹차밭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꼬막정식 ‘국일식당’, ‘거시기꼬막식당’, ‘외서댁꼬막나라’, ‘특미관’, ‘꼬막회관’, 녹차아이스크림 ‘대한다원’, 간단한 전라도 백반정식 ‘실비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boseong.go.kr/tea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보성 녹차밭 대한다원, 보향다원, 태백산맥 문학관, 대원사 티벳박물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차(茶)의 미학은 비움이다. 차는 과학적 효능보다 인문학적 정서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올 겨울 녹차밭에서 한 해 묵은 마음도 차 한 잔 들면서 잘 비워내는 것도 좋을 듯.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배소송 오늘 잇따라 선고

    대법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배소송 오늘 잇따라 선고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미쓰비시)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상고심 선고가 29일 잇따라 열린다.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손배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 이날 상고심에서도 미쓰비시에 배상 책임을 묻는 선고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는 이날 오전 박모(72)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6명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을 연다. 1944년 9∼10월 강제징용돼 일본 히로시마 구(舊) 미쓰비시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서 일한 피해자들은 불법행위인 강제징용에 따른 손해배상금, 그리고 지급받지 못한 임금을 합친 1억 1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며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2심은 “불법행위가 있는 날로부터는 물론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부터 기산하더라도 소송청구가 그로부터 이미 10년이 경과돼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현행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소멸시효는 범죄사실을 안 날로부터 3년, 범죄 발생일로부터 1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는 피고들의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되지 않는다”면서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다시 열린 2심은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또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더이상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거나, 미쓰비시가 구 미쓰비시와 다른 기업이라는 미쓰비시 측 주장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피해자에게 각각 8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 선고 직후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는 양모(87)씨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을 선고한다. 피해자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5월 일본인 교장의 회유로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돼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중노동을 했다. 피해자들은 1999년 3월 1일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지만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됐다. 이후 2012년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고, 1심은 피해자 4명에게 각각 1억 5000만원씩, 유족 1명에게 8000만원 등 총 6억 8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2심도 2015년 6월 “일본 정부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동원 정책에 편승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로 13~14세 소녀들을 군수공장에 배치해 열악한 환경 속에 위험한 업무를 하게 한 것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며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배상액을 일부 조정해 피해자 3명에게 각각 1억 2000만원씩, 다른 피해자 1명에게 1억원, 유족에게 1억 208만원 등 총 5억 6208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회 신림동(대학촌과 고시촌) 편이 지난 24일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서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참석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 예술관(서울미래유산)과 규장각을 둘러본 뒤 캠퍼스를 빠져나와 첫눈이 제법 소담스레 쌓인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또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지난해 폐차된 콜럼버스 스넥카와 폐가 일보 직전의 조각가 전뢰진 가옥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고시촌과 녹두거리, 지난해 조성한 민주열사 박종철 거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자리를 옮긴 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198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됐다.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이래 첫 ‘천재지변’이 발생했지만 참가자들은 불평 없이 미끄러운 고갯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첫눈을 즐겼다. 관악산은 어떤 장소의 역사를 갖고 있을까. 서울을 정치·지리학적으로 설명할 때 역사도심은 한양도성이 에워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 안쪽을 가리킨다. 도성 안에 내수(청계천)가 흐르고 외수(한강)가 도성 밖을 감싸고 있다. 도성 바깥의 북쪽 삼각산(해발 836m), 서쪽 덕양산(125m), 남쪽 관악산(629m), 동쪽 용마산(348m)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른다. 외사산은 내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와 외사산 영역은 다르다. 성 밖 십리의 북쪽은 비봉~정릉동, 동쪽은 미아리~용답동, 남쪽은 한강변, 서쪽은 역촌동~모래내를 이른다. 도성 밖 십리는 서울의 통치 영역인 반면 외사산은 경기도에 속했다. 한강 이북의 성 밖 십리와 외사산의 영역은 겹치는 곳이 많지만 한강 이남은 소외됐다. 서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생산기지이자 문화적으로 서울권에 속하는 강남지역은 관악산 안쪽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서울의 풍수개념에서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상산(祖上山)이요, 지리산에서부터 뻗어 오른 관악산은 임금이 아침마다 알현하는 조산(朝山)이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축선(軸線)은 삼각산과 관악산 선상에 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보면 서울의 주산 백악산과 경복궁이 직선 라인에 있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서울의 남북 간 축선은 삼각산~백악산~경복궁~숭례문~관악산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듯했다.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라고 부르고, 관악(冠岳)이라고 썼다. ‘벼슬 산’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고, 목멱산(남산)은 목산(木山)이어서 관악산 화기가 목멱산 나무를 불쏘시개 삼아 도시를 태운다고 예언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남대문(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 부적을 삼았고, 남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파서 방화수를 채웠다. 불이 길을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직선도로(세종대로)를 닦지 않고, 숭례문에서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까지 둘러간 뒤 운종가(종로)에서 꺾여 육조대로(광화문광장)에 이르도록 정(丁)자형 길을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는 황토마루라는 낮은 언덕을 쌓아 관악산의 불길이 대궐에 미치지 못하게 막았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치 두 마리에게 광화문 앞을 지키게 했다. 모두 5겹의 방화장치를 할 정도로 관악산 화기를 두려워했다. 관악산 기슭 지금의 신림동,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금주, 조선시대엔 금천이라고 불렸다. 고려 강감찬 장군의 5대조 강여청이 터를 잡았으며, 부친 강궁진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장군이 태어난 관악구 낙성대동 218의 14번지 생가 앞마당에 탄생기념 삼층석탑을 세울 정도의 떵떵거리는 호족이었다. 신림동(新林洞)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캠퍼스 안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의성 김씨가 모여 사는 자하동이라는 집성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영장 등 군사시설로 썼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해방촌, 청계천, 이촌동, 대방동 등지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을 수용하는 철거민 정착촌을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기반시설 부재의 우범지대였다. ‘돼지막’이라는 절간 분위기의 하숙방 몇 채가 고시촌의 원조이다. 1969년 서울대를 ‘한강 이남 수원 이북’으로 옮기는 관악캠퍼스 건립계획이 확정됐다. 태릉, 신갈 일대, 과천, 안양 등이 후보지 물망에 오른 끝에 관악컨트리클럽이 있던 골프장 용지가 낙점된 것이다. 일부에선 “서울대 종합화는 구실이고, 데모 막으려고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1975년 2월 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옮긴 서울대의 시위와 저항정신은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풍으로 타올랐다. ‘관악산의 화염이 나라를 태울 것’이라던 무학대사의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서울대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이념서클활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인 김지하는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했다.학사주점 ‘녹두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오늘날 유흥가로 바뀐 녹두거리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 지성의 의식화 공간이요, 은신처였으며, 화염병 제조 공장지대였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던 골목이었다.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녹두거리는 ‘녹두 베가스’로 불렸다.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서울대 학내 시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그날이 오면’, ‘전야’, ‘열린글방’ 등은 녹두거리의 서점 트로이카로 꼽힌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고,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 5만명이 북적거리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신림동이라고 불리던 신림9동은 2013년 행정명이 바뀌면서 대학동이 됐다. 고시촌은 2008년 로스쿨 도입을 꼭짓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고시생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 특수 때 신축한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를 넘어섰다. 수많은 서점, 헌책방, 복사집, 고시식당, PC방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관악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10집 중 3집 이상이 1인 가구다. 서울 전역의 고시원 6곳 중 1곳이 관악구에 있다. 고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공무원시험이나 국가고시 준비생, 외국인 유학생이나 취업자, 새내기 직장인,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들이 스며들었다. 집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고, ‘혼밥 혼술’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고, 발조차 뻗을 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안식처로 풍속도가 변했다. 2018년 신림동 고시촌은 등껍데기가 없는 달팽이처럼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민달팽이족’들이 잠시 머무는 밀실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고 고시촌 시대의 아픔과 자기성찰을 얘기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후암동 (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일시: 12월 1일(토) 오전 10시~낮 12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사의찬미’ 신혜선X이종석, 실화 바탕으로 한 찬란한 사랑 ‘오늘 첫방’

    ‘사의찬미’ 신혜선X이종석, 실화 바탕으로 한 찬란한 사랑 ‘오늘 첫방’

    비극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 ‘사의찬미’가 드디어 베일을 벗는다. 11월 27일 SBS TV시네마 ‘사의찬미’(극본 조수진/연출 박수진)이 첫 방송된다. ‘사의찬미’는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신혜선 분)과 그의 애인이자 천재극작가인 김우진(이종석 분)의 일화를 그린 작품. 화려한 캐스팅, 주목 받는 제작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 등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이종석 신혜선이 그릴 슬프지만 눈부신 사랑 ‘사의찬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100여년 전 슬픈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조선 최초 소프라노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만큼은 오롯이 가질 수 없었던 여자 윤심덕. 윤심덕을 사랑해서 비극적 운명으로 뛰어든 남자 김우진. 이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이 100여년을 뛰어넘어 안방극장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기력과 스타성을 모두 갖춘 두 배우 이종석, 신혜선이 만났다. 어떤 작품이든, 어떤 캐릭터든, 설득력 있는 연기로 시청자 마음을 훔쳐내는 두 배우가 100여년 전 인생을 송두리째 내던질 만큼 절절했던 두 남녀의 사랑을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고 또 기대된다. ◆ 지금껏 조명되지 않았던 천재극작가 김우진의 작품세계 ‘사의찬미’는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수 차례 변주되어 왔다. 그만큼 100여년 전 두 사람의 사랑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SBS TV시네마 ‘사의찬미’는 이 사랑이야기에 또 다른 한 가지를 추가했다. 지금껏 윤심덕과 김우진의 절절한 사랑에 가려 조명되지 않았던 천재극작가 김우진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극중 김우진과 윤심덕이 사랑에 빠진 것은 글과 극을 통해서다.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이 줄곧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주고 받은 글을 통해서다. 암울한 시대, 나라 잃은 아픔과 슬픔을 글과 극에 고스란히 녹여낸 천재극작가 김우진의 작품이 궁금하고 또 기대된다. ◆ 고통, 아픔, 낭만이 뒤섞인 시대적 배경 ‘사의찬미’의 시대적 배경은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다.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몸부림쳤고, 민족을 압박하는 무리에 무너져야만 했던 암울한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이 피어난 시대이기도 했다. 아픔 속에서도 새로운 문물과 지식들이 물밀듯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춘은 더욱 아파야 했다. 지식과 문물을 접하며 나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잔혹한지 뼛속 깊이 느꼈기 때문. ‘사의찬미’는 고통과 아픔, 그럼에도 낭만과 희망이 뒤섞였던 100여년 전 이 땅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안에서도 사랑이 피어났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의찬미’가 그려낼 아프지만 꼭 기억해야 할 100년 전 이 땅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또 기대된다. 한편 SBS TV시네마 ‘사의찬미’는 11월 27일과 12월 3일, 12월 4일 3일에 걸쳐 각 오후 10시 방송되며, 12월 10일에는 SBS 새 월화드라마 ‘복수가 돌아왔다’가 첫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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