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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이그 특사 파견(秘錄 南柯夢:24)

    ◎“이준 열사 피뿌리며 救國자결” 소문/4,000년 역사­500년 조선 당당히 알리지만 열강들은 쳐다보기만/약소국 울분 누르며 ‘오냐 이한목숨 죽어…’/일제,施政改善 핑계로 덕수궁 관리들 모두 쫓아내고/고종은 ‘행여 國運 도움될까’ 누각동 移居 준비하는데…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手決)도 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에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침략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황상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聖朝)에 없었던 일이다. 그후 2년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44)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해 한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그 뿐인가.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癸巳)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조선 전국이 공포에 쌓여 바람소리 학울음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뒤 갑오년(1894)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들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이어 을미년(1895)에는 왜적이 중궁(中宮=명성황후)을 시해하였다.병신년(1896)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그 뒤 무술년(1898)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1904)년에는 러일전쟁,1905년 을사5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7개월만인 1906년 6월 어느날 한 통의 외교문서가 고종에게 전달되었다.이것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보내온 초청장이었다.화란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이 얼마나반가운 소식인가. 니콜라이황제가 고종황제의 뜻을 알아서 보낸 것이었을까.고종은 즉시 극비리에 외교사절을 임명하였다.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조직해 위임장을 써 이준에게 전달했다. 어느날 밤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직접 돈2만원을 하사하시었다.물론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헤이그)에 도착하였다.해아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엄숙하게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준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의관과 문화는 우리와 달랐고 그 위의(威儀)는 산과 바다와 같았으니 마치 신왕(神王) 신제(神帝)가 노는 것 같아서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했다.모두가 후한 봉급을 받고 고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은빛 훈장을 달고 어깨와 팔뚝에는 금줄로 누볐다.또 얼굴에는 금테안경을 쓰고 한결같이 남만격설(야만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을 하니마치 까마귀떼가 모인 것과 같았다. 이런 곳에 멀리 조선의 일개 백면서생이 참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니요,받아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이준의 사람됨이 8척이나 되는 키에 위엄이 당당하여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그래서 각국 대표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중략).이때 이준이 4천년 역사와 조선왕조 5백년의 내력을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진술하였다.그러나 가부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모사는 사람이 하고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것인가. 본래 서양사람들은 성질이 느리고 의심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 평생 하는 짓거리가 바위아래 노불(老佛)같고 구멍속의 긴 뱀과도 같으니 무슨 의리로 남의 나라를 구해 주겠는가.이에 이준은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一死報國)이 낫다고 생각,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각국의 대표들의 의관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죽었다.이날 해가 빛을 잃고 푸른 하늘이 캄캄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의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이 전해져 이준의 충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위대하고 장하도다.이상은 내가 이준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울분끝에 순국한 것은 190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우유부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준열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항일독립의지을 굳게 다졌다. 한편 일제는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앉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란 명분을 걸고 덕수궁의 고종에게 수발을 들었던 모든 궁중 관리들을 밖으로 쫓아냈다.정환덕도 쫓겨나 고종과는 서신으로 통신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사령부가 명령하기를 덕수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시종들은 궁밖으로 나가라고 하여 나도 대궐을 물러나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서상궁을 통해 극비리에 봉서(封書)를 보내셨으니 나는 3일이 멀다고 봉서를 받아 보았다. 폐하께서 정환덕에게 분부하시기를 “지난 10년동안 궁 안의 대소사를 너와 더불어 상의해왔는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너를 만나 보지 못하게 하는 구나.저들이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 우린들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서상궁으로 하여금 통신하게 할 것이니 경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서울에서 대기토록 하라”고 하시었다. 정환덕이 그래서 서대문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국인 왕대유(王大有)가 찾아와서 고종의 이거(移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청국인 왕대유는 본시 풍수지리에 밝기로 유명하였다.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고종황제께서 지금 어거(御居)하고 계신 덕수궁 함녕전 터를 보면 북악산이 조금 멀어 정기가 미치지 못하고 남산은 너무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정년(丁年 1907)에 수(數)가 다하고 경년(庚年 1910)에 국토를 잃게 되고 무년(戊年 1918)에 식록(食祿)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니 지금 당장 경복궁으로 폐하의 어거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못하면 화변(禍變)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술년 7월 이화(李花)가 떨어진다느니 방부과인구혹다화(方夫戈人口或多禾=國移라는 뜻)라는 말이 떠돌고 있어 불안한 판이라 주상에게 이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국고가 탕진되어 창졸간에 경복궁을 수리해 이거할 수가 없다.그러니 차차 형편을 보고 시행하기로 하자”고 하시었다. 이 말에 이거를 결심하였던가.하루는 고종이 정환덕에게 은거할 집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상감께서 봉서하시었는데 꼼꼼하게 풀칠한 봉투를 뜯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지금 시국이 막다른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만일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도 잠시 피신할까 생각하고 있다.길성(吉星)이 비추는 곳에 몇 칸의 집을 구입해 준비하여 두라”하시었다.그래서 명을 받들어 팔문생사방(八門生死方)에 따라 누각동(樓角洞) 가장 한적한 곳에 50여칸의 집을 사서 미리 준비했다. 고종이 몰래 집을 지금의 적선동 근처 누상동에 은신처를 구해두었다는 사실은 필자도 금시초문이다.물론 이 50칸 집이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통감부가 자리잡았던 남산이 일제 침략을 의미하였다는 사실,그리고 북한산이 침략을 막아주는 큰 기둥이었던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9월16일자 ‘南柯夢’23회 글 앞부분에 “1905년 1월17일 을사오조약”이라 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조약”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습니다.
  • 지구촌 구석구석 24시간 ‘그물 감시’/美 첩보체계

    미국은 북한의 발사체에 대해 미사일이 아니라 소형 인공위성이라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10여일이 걸렸다. 우주에 수백개의 위성을 띄워놓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24시간 한치의 오차없이 지켜보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의 첩보체계. 미국은 북한의 발사체에 대한 정체식별과 관련,인공위성의 기능을 거의 못하는 ‘장난감’ 수준이라 식별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했었다. 북한은 미국의 첩보 수준을 놀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로켓발사 장면을 공개했던 터다.북한의 이번 로켓발사를 계기로 골프공 크기 물체의 움직임도 식별하고 내막을 정확히 분석해낼 수 있다는 미국의 첩보능력이 세인들의 궁금증을 부풀리고 있다.정보제국 미국의 첩보 능력을 점검해본다. ◎첩보 위성/DSP­전세계 모든 미사일기지 동향 분석/NGSP­자동신호장치 부착물건 찾아내/DSCS­해외주둔 미군과 본토 연락 담당/DMSP­저궤도 돌며 각종 기상정보 제공 미국의 첩보위성은 수백개에 이르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이 가운데 우주항공사령부가 지휘하는 8종의 60개 위성이 군사목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상 위치 파악을 비롯,대륙간 탄도미사일 추적,군사통신정보 연락,항공기운항정보 제공,기상 측정 등 군 활동에 핵심적인 정보분석이 주기능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위성은 방위지원위성(DSP).이른바 총괄위성이다.2만2.000마일(3만5,200㎞) 상공의 지구궤도를 돌면서 전세계 미사일기지를 감시,같은 시간대의 정보를 제공한다.이 위성에 부착된 열추적 센서는 추진발사체의 열을 감지해 발사 위치,비행속도,궤적에 의한 목표지점 구성 등을 분석한다. 또 다른 위성 NGSP는 계속해서 일정신호를 발사,방위지원 위성의 정보를 수신해 지구상 위치 파악,시간 측정,항해 방향 측정 등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지상의 모든 미군 기지나 병력에 갖가지 정보를 전달해준다. 개별 병력도 이동식 장비를 이용,위성을 통해 교신을 할 수 있다.자동신호감지장치를 단 물건이라면 어디에 있든지 찾아낸다.오차는 거의없다. 미국 육군의 통신을 담당하는 DSCS.미국 본토와 전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그리고 백악관을 비롯한 정부기관과의연락은 맡고 있다.걸프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실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성이랄 수 있다.10개가 지상 2만2,300마일(3만5,600㎞) 상공을 돌고 있다. 저궤도위성인 DMSP는 지난 20년 동안 미군에 각종 기상정보와 함께 지구상 곳곳의 사진을 찍어 자세한 분석데이터를 제공해온 첩보위성의 원조.상공 450마일(720㎞)에 위치해 있다.각종 폭풍 등에 관한 기상정보는 민간에게도 제공한다. 이밖에도 우주항공사령부와 NATO군이 함께 운용하고 있는 위성으로는 NATO Ⅲ·Ⅳ 그리고 Milstar가 있다.모두 육·해·공군간의 통신을 담당한다.해군이 통신위성으로 FSCS를 독자적으로 띄워 놓았다.23개의 채널이 있고 12개는 핵 관련 시설끼리의 전용회선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주항공사령부/스타워즈 대비 차세대 방위망 본산/85년 설립… 91년 걸프전때 성가 발휘 미국 우주항공사령부(USSC)는 이른바 스타워즈를 대비한 차세대 방위망의 본산이다.지난 85년 설립됐다.현재 사령관은 리차드 메이어 공군대장. 우주항공사령부는 91년 걸프전에서 성가를 톡톡히 발휘했다.▲군사목적 위성의 발사 및 운용 ▲전세계 주둔한 미군의 정보,통신,기상,항공정보 등은 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경보체계를 운용하는게 주임무다.북미 방공사령부(NORAD)와 긴밀한 업무협조를 하고있다. 우주방공사령부 산하에는 육·해·공군의 방공·레이다 망을 관장하는 군조직이 총망라돼 있다.단일조직이라기보다는 미국의 하늘을 방어하고 나아가 세계의 하늘을 외계로부터 막는 다기능 복합유기체 성격이 강하다. 통합방어망을 비롯 육·해·공군우주사령본부,육군우주미사일방어본부,합동 전투센터 등 모두 18개 조직체가 우주사령부를 구성하면서 이곳의 지시를 받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사령부의 본부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샤이엔 산의 암반밑 지하벙커.산밑을 파서 만든 요새로 핵무기에도 거뜬히 견딘다.. 비록 지하 깊숙히 위치하고 있지만 총 10층 높이의 건물구조로 최신식 인텔리전트 빌딩 형태다.이안에서 1,100명의 전문인력들이 24시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관장하는 위성만 ▲지상위치 측정시스템(GPSS)위성 24개 ▲방위위성통신시스템(DSCS)위성 10개 ▲방어용 기상측정 위성프로그램(DMSP)위성 2개 ▲항해위치 시스템(NGPS)위성 24개 등 모두 60개다. ◎첩보위성 장비/‘미다스 프로그램’이 대표적/야전지휘본부∼본토기지 효과적 연결 미국 첩보위성은 위성 자체 성능보다는 탑재된 첨단장비가 위력적이다. 다른 위성들과는 장착 장비에서 서너 차원 높다. 대표적인 장착 장비가 미다스(MIDAS)프로그램 운용장비.손에 닿는 무엇이든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그리스 신화속의 왕 ‘미다스’ 처럼 신통하다는 뜻이다.위성에 장착되는 통신 장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술의 집합체로 DSCS의 핵심 장비다. 이 장비는 전장에 위치한 개별 병력은 물론 야전지휘소나 지휘본부 혹은 후방의 사령부,나아가 본토의 각종 기지 등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있다. 핵심기술은 각종 신호나 전파를 모두 받아들여 이를 분류해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는 것.광통신을 이용한 통신이나 전파를 이용한 통신 등 군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주파수대의 엄청난 통신 수요를 엉키지 않게처리해준다. 통신의 핵심이 미다스라면 화상정보쪽에는 퀵버드 멀티스펙트럴 기술이 있다.위성에서 각종 전파나 적외선,광학렌즈 등을 이용,지상 사진을 찍은 뒤 놀라운 해상도로 전달한다. 파랑·초록·빨강·적외선 등의 색을 이용해 찍는 사진은 최소 가로·세로 22㎞까지 촬영되는데 확대하면 골프공이 보일 정도의 놀라운 해상도를 나타낸다. ◎정보오판 사례/98년 5월 인 핵실험­강행 6시간전 위성사진 받고 판독 못해/98년 8월 수단 공습­제약공장 화학무기공장으로 잘못 판단 우주 궤도를 떠다니는 60여개의 미국 첩보위성이 뽑아낸 정보의 최종 귀착지는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중앙정보부(CIA)본부.최첨단 위성이 보내는 ‘따끈따끈’하고 치밀한 자료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CIA는 최근 치명적인 오판으로 잇따라 국제적 망신을 샀다. 지난 5월11일 인도의 핵실험,8월7일 케냐·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탄 테러.세계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해온 CIA가 ‘정보 부재’및 ‘정보 오판’으로 낭패본 대표적 사례들이다.지난달 20일 미국은 케냐 대사관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화학무기공장에 폭격을 가했다.알고 보니 제약공장.CIA가 잘못 판단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정보부의 한 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오판을 시인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인도 라자스탄주 포크란 핵실험 기지에서의 핵실험도 첩보위성이 실험 6시간 전 정확한 사진을 보냈지만 정보요원들이 제대로 판독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첩보위성 성능의 완벽함을 인적자원의 부실이 흠을 낸 것. 어쨌든 이 실수로 국내 여론의 집중 화살을 받았고 조지 테넷 국장은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공위성 사진판독 요원 충원 등 개혁조치를 취한 3달 뒤 수단에서의 실수로 CIA는 또 비난의 도마위에 올라야 했다. 2차대전 중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국이 사전 정보입수를 위해 47년 7월 설립한 CIA가 냉전종식 후 정치·안보보다는 경제정보에 치중하면서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우량은행끼리 합병… 슈퍼銀 탄생/국민銀­長銀 짝짓기 배경­파장

    ◎소매금융+도매금융 시너지효과/부산∼경남 등 지방銀 결합 잇따를듯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의 합병은 상업·한일이나 하나·보람의 합병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량은행간 자발적 합병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보람은행과 비슷하다.그러나 국민은행의 자산은 98년 6월 말 현재 60조4,914억원으로 장기신용은행과 합하면 90조원이 넘는다.하나·보람은행은 자산규모가 41조원 수준이다. 따라서 두 은행의 합병은 우량은행간 합병인데다 규모도 커 단숨에 슈퍼뱅크(선도은행)로 탈바꿈하게 된다.상업·한일의 합병은 자산규모는 크나 부실은행간 합병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그동안 은행권에서 갖가지 짝짓기설이 나돌았으나 두 은행이 ‘합방’한다는 얘기는 거론되지 않았다.두 은행의 합병은 그만큼 전격적이다. 두 은행은 소매금융(국민은행)과 도매금융(장기)을 합해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합병키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합병 이후 자기자본비율을 10% 이상 유지하기 위해 정부에 일정수준의 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은 다른 은행과의 합병설이 나돌 때마다 비교적 여유있는 편이었다.한때 외환은행과의 합병설이 나왔을 때에는 “국민은행도 함께 부실화된다”며 공식 부인한 적이 있다. 그러던 국민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8%를 초과한 13개 은행에 대한 금융감독위원회의 경영진단 결과가 나오면서 마음을 바꾼 것으로 분석된다.국제기준을 적용할 경우 자기자본비율이 간신히 8%를 넘으면서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국제기준으로 자기자본비율이 8%를 넘긴 곳은 주택 하나 국민 전북은행 등 4곳뿐이다. 장기신용은행은 원래 규모가 작은데다 경쟁상대였던 하나와 보람은행이 합병하면서 생존전략 차원에서 합병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두 은행의 전격적인 합병으로 그 파장이 적지 않을 것 같다.금감위는 조건부 승인을 받은 조흥과 외환은행 등에 다음 달 말까지 외자유치나 합병을 성사시키지 못할 경우 임원진 전원을 퇴진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연이은 합병성사 여파로 지방은행간 합병도 뒤따를 것으로보고 있다.부산은행과 경남은행이 합병할 것이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 예리한 필봉 휘두른 항일언론인/9월의 독립운동가 張道斌 선생

    ◎대한매일신보 시절 반일 언론의 선봉/일제의 행각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국사연구 몰두… 황국사관 정면 반박도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일(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 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에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張道斌의 대한매일신보 논설중에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선생. 타고난 문재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애국자다. 반일·항일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기자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해 일제하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망명과 귀국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굽힐줄모르는 지조와 의식을 발휘했던 빼어난 애국자·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張선생은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 소문을 들은 평양감사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여기서 교편생활을 했던 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와 인연을 맺어 총무인 梁起鐸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됐고 申采浩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을 맡아 친일내각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미움을 받았지만 영국인 裵說이 사장을 맡아 항일의 강한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의 폭압이 더해가면서 신문압수와 검열이 심해졌으나 선생은 일제의 행각을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한 장본인으로 이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安昌浩의 신민회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이 때 金九·李昇薰·李商在·尹致昊 등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중 망명생활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 필진들이 묶여 들어가고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 밤엔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국사연구에 몰두, 사학자의 발판을 다졌다. 선생의 사관은 당시 팽배해 있던 황국사관과 사대주의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의 독립적인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행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신한촌에서 다시 申采浩를 만나고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신병으로 安昌浩가 초청한 미국행을 포기하고 1916년 귀국했다. 평북 영변의 서운사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적 ‘국사’를 저술했다. 1919년 귀경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해 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운영을 양도했다. 하지만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때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조선사요령’‘조선위인전’‘조선역사록 등 숱한 책자를 편찬했다. 1927∼45년은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던 시기. 일제말기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의 심산에 은둔하며 역사서적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뜻이 컸다. 1947년 한국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1948년 단국대학을 설립,초대학장을 맡았다. 1949년엔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단국대 명예교수로 강의를 가던 길에 짐수레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1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98년 9월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의 후손들/高合 회장 致赫씨 등 5남1녀/모두 재계·학계 뿌리내려 저명 선생은 늦은 나이인 33세에 평북 영변의 기독교 집안 출신 金淑姿씨(1979년 타계)와 결혼,5남1녀를 두었다. 선생의 은둔생활과 구국운동에 따라 부인 金여사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모두 재계·학계에서 뿌리를 내린 유명인사들이다. 장녀 致豊씨는 지난 60년대 결혼후 도미,76년 작고했고 장남 致榮씨는 신동아손해보험 상임이사·고려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를 지낸뒤 92년 별세했다. 삼양식품을 창설한 차남 致德씨도 지난 88년 작고했고 3남 致健씨는 신화다이아몬드공업 회장·고려합섬 이사를 거쳐 현재 BBC 영어연구원 고문이다. 고려합섬을 창업한 4남 致赫씨(고합그룹 회장)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81년 산운학술문화재단(현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막내 致順씨는 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金 대통령 제2건국 선언­건국 50주년 경축사 전문

    ◎“해낼수 있습니다… 희망·용기를 가집시다”/우리민족은 21세기를 위해 ‘준비된 민족’/‘제2의 건국’ 국민운동 모두 동참합시다/2000년부터는 세계 일류국 대열에 꼭 합류/고생·기쁨 함께하며 영광된 주인이 됩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광복 53주년 기념일이자,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존경과 사랑의 인사를 올립니다.아울러 북한동포와 해외동포들에게도 따뜻한 안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뜻 깊은 날을 경축하면서 저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자 합니다.이는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정립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민족의 재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제2의 건국’을 제창하는 일입니다. ○민족의 재도약 결의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파란의 시기였습니다.국토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수십년간의 군사독재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우리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 땅에 건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50년만에 이룩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국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세계의 모든 민주시민들이 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 국민과 함께 정권교체의 기쁨을 나눌 겨를이 없었습니다.저는 당선되자마자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6개월은 오랫동안 누적된 병폐를 청산하고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에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본격적인 개혁은 이제 시작입니다.우리가 가는 길은 가혹하고 힘겨운 고난의 길이지만,용기 있는 국민에겐 기회와 가능성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의 정부’가 ‘제2의 건국’을 통하여 추구할 철학과 원리,그리고 총체적 개혁의 미래상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작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저는 잠시도 쉴 틈없이 국가위기의 극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다해 왔습니다.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에 힘입어 외환위기가 일단 수습되었습니다.상당히 많은 외환보유고와 더불어 환율과 금리도 하향 안정되고 있습니다.물가도 어느 정도 안정 추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경상수지 흑자는 크게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환경도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노사간 대타협을 위한 노사정 협의기구가 창설되어 착실히 운영되고 있습니다.금융,기업,노동,그리고 공공부문의 4대 구조조정이 강도있게 진행중입니다. 또한 대ASEM 외교와 대미 외교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이 모두가 국민 여러분의 성원 덕택입니다.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시련의 터널 벗어나야 그러나 국난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합니다.과거의 유산이 계속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그동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습니다. 그 결과,경제를 포함한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은 총체적으로 부실해졌고,국제경쟁력은 취약해졌습니다.외환위기는 필연적인 인재였습니다.이 원인은 반드시 규명되어 앞날의 교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제2의 건국’을 추진해야 할 여러 가지 절실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방만한 몸집을 줄이고 거품을 빼며,효율을 높이는 구조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물론 이것은 고도성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시련임에 틀림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현재의 고통을 달리 피할 길이 없습니다.오직 국민과 정부가 하나가 되어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하루빨리 이 시련의 터널을 벗어나는 길 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더이상 오늘의 저효율과 고비용의 체제로는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국가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이 불가피합니다.오랫동안 관치경제에 눌려있던 미완의 시장경제를 ‘제2의 건국’을 통하여 경쟁력있는 체제로 완성해야 합니다. 한편,우리는 지적으로 고급능력을 갖춘 인적자원을 크게 육성해야 합니다.우리의 미래는 국민 개개인의창조적 실천능력을 배양하는데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혁명,정보혁명,첨단기술혁명,벤처기업혁명,그리고 문화산업을 이끌어 갈 인재양성이 우리의 국운을 좌우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국민은 모두가 국난극복에 동참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과감한 개혁과 새로운 출발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인 저에게 강력한 리더십으로 개혁을 이끌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국민의 정부’와 여당에게 개혁의 선봉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야당에 대해서도 이 고난의 기간만은 정쟁을 중단하고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민의 저력을 다시 모아 ‘제2의 건국’을 시작하라는 국민 여러분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저는 기꺼이 저의 신명을 다 바쳐 여러분이 명령한 바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국민 지혜 모아야 성공 ‘제2의 건국’은 우리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그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시대적 결단이자 선택입니다.또한 ‘제2의 건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저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한 국정의 총체적 개혁이자 국민적 운동을 가리킵니다. ‘제2의 건국’으로 가는 길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역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오직 ‘국민의 정부’가 표방해온 새로운 국정철학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지금부터 추구해야 할 국정의 방향입니다.‘국민의 정부’는 이러한 국정철학을 기초로 그 실천 원리로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효율을 중시합니다. 우리는 오늘,뜻깊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제2의 건국’을 향한 장도의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제2의 건국운동’은 정부가 위에서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국민이 생활의 현장에서 지혜를 모아 꾸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생활속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나라일에 참여하고,서로 협력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경쟁력을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 ‘제2의 건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는 ‘제2 건국운동’의 대열에 참여합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 정부’는 ‘제2의 건국’을 계획하고 추진하고자 다음과 같이 국정운영의 6대 과제를 제시합니다. ○부정부패 철저히 척결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참여 민주주의로의 대전환을 이룩하여 국민과 정부사이에 쌍방통행의 정치를 만들겠습니다.과도한 중앙집중의 폐해를 도려내고 행정,재정,교육,치안 등 모든 분야에서 지방정부의 권한과 책임을 과감히 확대할 것입니다.지방경찰제도도 실현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국정에 대한 참여의식을 저상시키는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천명합니다. 특히 모든 국민이 기쁜 마음으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망국적인 지역대립을 반드시 청산할 것입니다.이를 위하여 인사와 지역발전의 공정한 처리가 철저히 이행될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지역의 모든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저는 4,500만 국민의 대통령이자 7,000만 민족을 위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저에게 지역의 차별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에게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모든 정당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습니다.저효율 고비용의 국회제도도 크게 개혁되어야 합니다.인사청문회제도도 공약한대로 실시하겠습니다. 각 자치단체별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주민투표제의 도입도 추진하겠습니다.언론도 스스로의 노력과 국민의 여론에 따라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21세기는 참여정치의 시대입니다.국민이 모든 국정분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이것이 ‘제2건국’의 정치적 기본목표입니다. 둘째는 관치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켜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불필요한 정부규제를 과감히 줄이고,기업·금융·노동·공공부문 등 4대 분야의 구조조정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낼 것입니다.앞으로는 기업을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흑자를 내고 세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외화를 많이 벌어들인 기업인만이 애국적 기업인으로서 존경받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한편,수출을 늘리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자 합니다.이를 위하여 수출금융을 과감하게 지원하고 외국인 투자촉진법을 연내에 입법하겠습니다. ‘제2의 건국’아래서는 무엇보다도 정보와 첨단기술 중심의 지식기반 산업국가를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유망한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습니다.또한 농어민의 생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물류체제를 바꾸기 위해 농업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이렇듯 관치경제의 폐습을 일소하고 모든 경제활동이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제2의 건국’이 지향하는 경제적 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독선적 민주주의와 같은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WTO체제는 앞으로 수년내에경제적 국경을 없앨 것입니다.이제는 세계와 더불어 경쟁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같이 생존하고 같이 번영해 나가야 합니다. ○지식 기반의 국가 건설 그런데 세계에는 아직도 우리 한국을 ‘접근하기 힘든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이래서는 안됩니다.세계를 친구삼아 우리 나라의 이미지를 적극 개선하는데 힘써야 합니다.좋은 이미지야말로 수출과 관광 그리고 투자유치를 위한 필수조건입니다.저는 세계주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각종 국제교류를 촉진하고,인재의 양성에도 적극 힘쓸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로 나아가는 세계주의야말로 ‘제2의 건국’아래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인 것입니다. 넷째는 물질주의의 공업국가를 창조적 지식과 정보중심의 지식기반 국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정보와 과학기술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국민의 정부’는 교육입국의 이상아래 오늘의 소모적인 교육을 창조적인 교육으로 바꾸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덕·체삼위일체의 전인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입시지옥이 없는 대학입시제도를 실현하며 학부모의 과외부담을 대폭 줄이겠습니다.실력있는 학생만을 졸업시키고,학벌주의도 타파할 것입니다.그리고 교육자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조치를 추진하겠습니다. 학교 가는 것이 즐거운 교육을 실현함으로써,어린이와 청소년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마음껏 가꿀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이러한 교육개혁을 위한 종합적인 실천방안을,이제 활동을 시작한 ‘새교육공동체위원회’가 수립하고 추진할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교육과 더불어 21세기의 기간산업인 문화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교육과 문화의 창달을 통한 지식기반 국가의 건설이 곧 ‘제2 건국’의 이상인 것입니다. 다섯째는 노사간의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향한 신노사문화를 창출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이룩해야 합니다. 고통과 성과의 공정한 분담에 바탕을 둔 신뢰는 ‘제2 건국’의 기초입니다.특히 저는 종업원지주제와 사회보장제도의 강화 등으로 경제성장의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겠습니다. 세계적 추세에 따라 우리도 노사 쌍방간에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이룩하는 것이야 말로 국제적 무한경쟁 속에서 함께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이러한 신노사문화 창조의 사명을 띠고 노사정위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공정한 여건속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양보로 노사간에 대타협을 이루어야 합니다.그래서 적어도 ’99년 말까지 쟁의가 없는 노사협력체제를 성사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지금 10조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입해서 실업대책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내년에도 이를 더욱 강화시켜 나가겠습니다.앞으로 모든 근로자는 예외없이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일용근로자에게도 공공취로사업 또는 생계비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에게 확실히 약속합니다.앞으로 모든 실업자에 대해 먹을 것과 입을 것,그리고 의료혜택과 초중등학교 교육비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을 반드시 실현하여,직업을 갖지 못한 국민의 삶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제2의 건국’이 추구하는 신노사문화 창조를 위한 뒷받침이 될 것입니다. 여섯째는 지난 50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남북대결주의를 넘어서,확고한 안보의 기반위에 남북간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 나가고자 합니다. ‘제2 건국’의 기치아래 ‘국민의 정부’는 남북간의 오랜 불신을 해소하고,정경분리의 원칙에 따라 남북간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고자 합니다.아울러 남북간에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의 교류도 촉진할 것입니다. 한편,이미 천명한 대북정책의 3대원칙,즉 ‘북의 어떠한 무력도발도 용납하지 않는다,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남북은 상호 교류협력을 실현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할 것입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을 없애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쌓아 나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북한 당국에게 말합니다.오늘의 냉엄한 국제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한반도에 화해와 교류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우리는 이미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틀 안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공존공영의 관계를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산가족 고통 덜어줄것 ‘국민의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한의 안정과 발전을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우리는 금강산 개발과 농업개발을 포함한 모든 경제협력을 지원하고 권장할 것입니다.특별히 강조할 것은 남북 양측이 모두 인도적 정신과 동포애로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혈육에 대한 그리움속에 애태우고 있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겠습니다. 이렇듯 지금 남북간에는 서로 협의하고 논의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이미 남북간 합의로 구성되어 있는 분야별 공동위원회들을 하루속히 가동시켜야 합니다.공동위원회의 정상운영에 앞서 우리는 장차관급을 대표로 하는 남북상설 대화기구를 창설하여 성실한 대화의 장을 갖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저는 북한이 원한다면 이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낼 용의가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본철학과 자유·정의·효율의 3대 원리 아래,참여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성,세계주의와 지식기반 국가의 실현,신노사문화의 창조와 남북간의 교류협력 촉진 등 앞서 말씀드린 6대 국정과제의 실천을 ‘제2 건국’의 나아갈 길로 삼고자 합니다. 이를 위한 종합적인 정책과 프로그램의 개발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제2의 건국’을 위한 국민운동이 국민적 참여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제2건국’의 기치 아래 세계 속의 선진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는 많은 지식인과 전문가,그리고 깨어 있는 국민의 참여가 요망됩니다.국민 여러분,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국난을 타개하고,다시 일어서는 민족의 내일을 힘차게 열어 나갑시다. ○국민의 저력 굳게 믿어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제2의 건국’을 위한 힘찬 출발을 시작합니다.고생도 같이하고,기쁨도 같이하는 ‘제2의 건국’을 이룩합시다. 저는 일생을 국민 여러분 곁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살아왔습니다.그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40년 넘게 감내해 왔습니다.저는 반드시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위업을 이룩한 우리 국민의 저력을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21세기가 지식과 문화의 시대라면,조상으로부터 유별난 교육열과 유구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우리 민족이야말로 21세기를 위해 준비된 민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한때의 인기보다 후세의 평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면서,21세기를 향한 ‘제2의 건국’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그리하여 국민 여러분과 같이 98년은 전면적인 개혁에 총력을 다하고,99년말까지는 IMF관리 체제를 종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2000년부터는 우리 한국이 세계 일류국가의 대열에 참여하는 민족의 재도약을 반드시 실현시키겠습니다. 국민 여러분,희망과 용기를 가집시다.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조국의 광복과 민주대한의 수호를 위하여,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몸받쳐 싸우다가 먼저 가신 애국 영령들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제2의 건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이 시대의 영광된 주인이 됩시다.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내일을 물려줍시다. 감사합니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최고인민회의 구성이후(사설)

    북한이 김일성사망후 계속 미뤄왔던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새로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8년3개월만에 지난 26일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전체 대의원의 67%가 새로운 인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김정일시대를 맞은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의미하며 남북관계에도 변화를 기대하게 해준다. 새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에는 김일성시대의 거물들이 많이 사라진 대신 신진 군부실력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김정일체제가 앞으로 군부세력에 더욱 의존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하고 있다. 특히 전금철을 비롯하여 오랫동안 대남사업에 관련했던 인물들이 많이 탈락한 것은 대남관계에 새로운 변화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한다. 북한의 선거라는 것이 당이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의사만 표시하는 것으로 99.85% 투표율에 100%찬성이라는 식이라 대의원선거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김정일시대를 공식화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북한은 이번 선거과정을 통해 줄곧 이번 선거가 ‘김정일의 사상과 영도를 철저히 구현해나가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해왔고 전선거구에서의 김정일후보추대,충성편지,이어달리기 등 선거자체보다는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위한 축제분위기를 조성했다. 해외에서도 김정일을 찬양하는 유료광고를 내고 ‘김정일 노작’의 무료배포 사업도 대대적으로 벌였다. 선거가 끝나자 바로 매체들을 통해 ‘지금 세계는 우리 시대를 김정일시대라고 부르고 있다’며 사실상 김정일시대가 열렸음을 선전하고 있다. 김정일은 곧 열릴 최고인민회의 제1차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돼 북한정권창건 50주년인 오는 9·9절에 맞추어 공식 취임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인민회의 구성에 이어 김정일이 주석으로 취임하면 북한은 김일성 사후 ‘유훈통치’라는 어정쩡한 ‘통치공백’을 마감하고 확실한 김정일체제를 굳히게 된다. 권력체제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며 이에 따라 대남정책도 크지는 않지만 세부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교류와 협력등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북한의 변화에 관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잠수정 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때 맞추어 금강산관광 및 개발사업을 위한 현대그룹의 실무협의단이 방북하고 소떼의 추가지원을 검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김정일시대의 개막을 계기로 그동안 중단됐던 4자회담의 재개는 물론 북한의 변화정도에 따라 대북정책의 획기적인 진전을 시도해봄직하다.
  • ‘金正日 주석’ 축하해야하나

    ◎정부 “총비서때보다 진전된 내용 있어야”/“국민에 반감” 관계개선위해 무방” 兩立 정부가 고민에 빠졌다. 金正日이 국가주석으로 취임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를 놓고 그렇다. 金正日은 8월 말 주석에 선출되고 북한 정권 창건 50주년인 9월9일 주석으로 취임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정부가 대외적으로 어떤 입장을 밝힐지 관심거리다. 통일부·외교통상부·국방부·국가안전 기획부 등 관련 부처간에 의견조율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해 10월8일 金正日이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됐을때는 통일원(현 통일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냈다. “북한이 화해협력의 세계사적 흐름에 합류해 안정적 변화를 이루고 우리와 함께 평화통일의 큰 길을 열어 나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다소 두루뭉실한 원론적인 내용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金泳三 정부때보다는 대북(對北)정책에 적극적인 편이다. 북한과의 교류와 대화 접촉을 늘려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햇볕정책 기조에 변함이 없다. 따라서 총비서에 추대될때보다는 다소 구체적이고 진전된 내용의 입장발표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우세하다. 빠른 시일안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길 희망하고 남북교류와 협력이 보다 활발하게 추진되길 바라는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길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다. 정부의 고위 당국자도 27일 “총비서로 추대됐을 때보다는 진전된 내용의 성명을 내는 쪽으로 갈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金正日이 주석으로 선출된 것을 ‘축하’한다고 표현할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아무래도 국민의 정서상 용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무방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는 다음달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정부의 입장을 최종 정리할 계획이다.
  • 현대 鄭夢憲 회장 뜬다/금강산개발 성사로 그룹경영 전면에

    ◎訪北 경협 실무 지휘… 후계구도 주목 鄭夢憲 현대건설 회장이 뜬다.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의 성사를 계기로 그룹경영의 전면에 나섰다. 鄭夢憲 회장은 지난 1월13일 현대그룹 공동회장으로 취임,형인 鄭夢九 현대정공 회장과 함께 그룹의 ‘투톱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지금은 鄭夢憲 회장의 ‘원톱’체제로 급격히 선회하는 느낌이다. 따라서 鄭周永 명예회장의 후계구도가 마침내 가시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마저 일고 있다. 鄭夢憲 회장의 부상은 대북사업을 계기로 두드러진다. 鄭회장은 지난 2월 북경에 날아가 全今哲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은밀히 만나 鄭명예회장의 방북을 타진했다. 이번 방북 기간 중에는 鄭명예회장을 대신해 북한과의 경제협력 실무협의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 통천을 방문했을 때는 여러 곳을 둘러보느라 불과 3시간 동안만 머물렀을 뿐이다. 그는 귀환 후 가진 23일의 기자회견에서는 鄭명예회장과 鄭夢九 회장 등을 대신해 경협 결과를 발표하고 기자들의 까다로운 질문을 여유있게 받아 넘겼다. 25일에는금강산 유람선의 첫 운항일자를 ‘방북 101일 째’를 기념해 오는 9월25일로 결정,전격 발표했다. 7월2일에는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다. 뉴스 메이커로서 그 ‘상품가치’를 언론인들로부터 검증받는 것이다. 鄭회장의 이같은 저돌적인 ‘금강산 대시’는 한때 ‘빅딜’을 거부한데 따른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한 고차원적 전략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재계에서는 鄭회장이 대북 사업의 주도권을 쥔 채 그룹 내 위상을 굳힘에 따라 ‘세자책봉’이 임박했다고 보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 재구성해본 鄭周永씨 訪北 7박8일

    ◎유람선 서명… “4,500만 최고의 선물”/16일­판문점 넘어 평양행… 모란봉초대소서 첫밤/19일­10년만에 밟은 고향땅서 망향의 회포 풀어/20일­금강산 방문… 北과 유람선사업 추진 합의/21일­원산 산업시설 시찰… 합작타당성 구체조사/23일­“할일 다했다” 9월 재방북 기약하며 귀로에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7박8일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23일 돌아왔다. 그와 동행했던 방북단 15명이 전하는 얘기와 관련보도를 엮어 鄭 회장의 북한 체류 8일을 재구성한다.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모든 게 변해 있었다. 흘러간 50년이 남긴 흔적을 찾으러 두 눈은 더욱 가늘어져만 갔다. 그러기를 잠시….무언가가 갑자기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감나무. 鄭周永 회장은 19일 이렇게 고향을 찾았다. 강원도 통천 아산리. 분단의 오랜 세월은 기억 속의 고향마저 앗아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며 심어놓은 그감나무 만은 그 자리에 있었다. 鄭 회장이 설레이는 가슴으로 판문점을 넘은 것은 16일. 宋虎景 조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鄭雲業 민족경제협력연합회 회장이 밝은 표정으로 맞았다. 서로의 얼굴이 상기됐다. 벅찬 가슴을 추스리기도 전에 방북단은 평양일행과 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수대 의사당에서 金容淳 조선 아·태평화위 위원장과 담화를 나눈 뒤 저녁에는 목란관으로 자리를 옮겨 연회를 가졌다. 金위원장은 “잘 키운 소를 선뜻 건네 줘 감사하다”며 “통일의 길을 열 수 있는 힘을 모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鄭 회장을 비롯한 현대 방북단은 “자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남북경협의 물꼬를 이 자리에서부터 제대로 터보자”고 화답했다. 모란봉 초대소에서의 첫날 밤을 설레이는 마음에 뒤척이며 보낸 鄭 회장은 17일 평양교예극장에서 종합교예공연을 보는 것으로 이틀째 일정을 시작했다. 혁명과 기백을 강조하는 북한 특유의 공연이 낯설었다. 고향 방문과 금강산 개발사업 등에 대한 상념으로 공연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일행은 아·태평화위와 民經聯 등 북측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금강산 개발 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유람선 사업과 고선박 해체,자동차 합작,제 3국 건설 공동진출,서해안 공단개발,통신사업 등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업이 없었다. 3일째도 평양이었다. 18일 국제친선전람관을 둘러보고 묘향산을 찾았다. 깎아만든 듯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일 鄭 회장은 마침내 고향땅을 밟게 됐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비행기를 탔다. 다시 통천까지는 육로와 해로가 함께 이용됐다. 승용차뿐 아니라 요트도 동원됐다. 앞선 공연관람과 묘향산 비경의 눈요기 등 기타 일정에서의 소회는 통천땅의 아늑함과 인척들의 환대엔 견줄 일이 아니었다. 감개무량했다. 사흘전 판문점을 넘을 때만 해도 담담하던 북한방송들도 이날만은 “약 10년 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명예회장 일행은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면서 친척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며 요란을 떨었다. 돌멩이 하나,잡풀 하나 하나를 붙들고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갔다. 1915년 11월25일 통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지금이미 팔순을 넘긴 노신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소년이었다. “이게 내 고향이든가”“그래요 이곳이 바로 우리 고향입니다” 동생들과 큰아들 夢九씨 등 4명과 함께 한 잠자리는 모란봉초대소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89년에 이어 두번째 고향 땅을 밟은 鄭 회장은 9년전보다 가슴이 더 절절했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 집 드나들 듯이 오갈 수 있는 시절은 언제나 다시 올까”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경협사업에 대한 꿈을 다지고 또 다졌다. 형제들과 큰 아들이 망향의 회포를 푸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경협사업협의에 몰두했다. 통천에서의 하룻밤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른 시일안에 꼭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하며 고향의 흙내음나는 그 땅과 풋풋한 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다. 고향 사람들은 인삼차와 토속주,대로 엮어 만든 모자 등을 정성어린 손길로 일행에 쥐어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鄭 회장은 89년 방북때 그랬던 것 처럼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그대로 두고 고향을 뒤로 했다. 20일에 찾은 곳은 금강산. 더없이 잘생긴 절경을 보는 순간 일행은‘이 산을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샅샅이 살폈다. 안개때문에 멀리 볼 수는 없었지만 민족 최대의 비경을 자랑하는 금강산임에는 틀림없었다. 기기묘묘한 일만이천 봉우리가 방북단 일행을 황홀경으로 몰아 넣었다. 일행은 “어서 통일을 이뤄 온겨레가 이 절경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야할 텐데…”라며 입을 모았다. 일행은 鄭 회장의 9월 재방북과 금강산 유람선 투어사업 성사를 위한 실무협의에 고삐를 바짝 당겼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7박8일의 일정이지만 남쪽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놓을만한 선물은 이것이 최고라는 판단에서였다. 마침내 북측 고위관계자와 금강산 유람 사업화를 위한 협력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유람선사업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이제 온 겨레가 금강산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부푼 희망을 안은 채 21일 원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북 6일째. 6·4차량종합기업소 등 여러 산업시설을 둘러보며 합작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기회를 가졌다. 현지 관계자들과 시설규모와 투자 필요성 등에 이르기까지 대화가 쉼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날인 22일. 비행기 편으로 평양에 되돌아 왔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다. 한 꼬마가 안겨준 꽃다발에 鄭 회장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인척들도 만나고,성묘도 했고,금강산 개발사업도 잘 마무리될 것 같고. “나름대로 할 일은 다 했구나”하는 마음이 일었다. 金正日을 만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9월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인민문화궁전에서 마련된 연회에서 鄭 회장은 연설을 통해 “하늘과구름,땅이 하나로 통하는 가깝고도 먼 고향에 오니 꿈만 같다”고 했다. “너무도 정답고 따스한 가슴의 문을 열어주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도 했다. “부강한 나라를 창조하기 위해 새 이정표를 세우고 우리 민족이 힘을 모아 출발하자”고 당부하고 “남과 북이 협력해 조국의 번영을 이룩하고 상호협력사업을 토대로 분열을 버리고 통일과 화해로 가는 광명의 길을 웃으면서 함께 가자”고 역설했다. 23일 아침 鄭 회장은 다시 판문점으로 향했다. 金 아·태위원회 위원장은 “9월에 다시 봅시다. 金正日 장군께서 그때는 꼭 만날 것이란 뜻을 전하셨다”며 추가 방북에 무게를 실었다. 9월,금강산은 황금색으로 반기리라.
  • 공세적 對北정책 실현 의지/‘판문점 축전’ 수용 배경

    ◎축구대회 등 京·平 상호방문 개최 기대/北 보안법폐지 거론… 성사여부 불투명 정부가 북한이 제의한 ‘8·15 판문점 대축전’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북(對北)정책을 하겠다는 방침과 맥을 같이한다. 북한의 제의가 없었더라도 정부는 8월15일의 행사와 관련된 제의를 할 방침이었다. 북한은 지난 90년부터 연례행사처럼 광복절을 앞두고 대축전을 제의해 왔지만,한국 내부의 혼란을 부추기려는 ‘선전 및 선동용’의 성격이 짙어 그동안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판문점 대축전을 수락한 것은 수세적인 입장을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게 더 이상 선전용 제의는 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있다. 하지만 북한은 19일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불법단체인 한총련과 범민련 남측본부 대표들이 판문점 대축전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단골메뉴인 국가보안법과 국가안전기획부 폐지도 다시 들고 나왔다. 우리측이 판문점 대축전 개최를 받아들인 상태지만 성사여부는 불투명해진 셈이다. 정부가 서울과 평양을오가면서 음악제와 축구대회 등을 개최할 것을 추가로 제의하려는 것은 북한측의 주장대로 판문점에서만 하는 ‘1회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계속 왕래하면서 진정한 교류를 하자는 뜻에서다. 북한이 우리측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의 공동행사가 가능하다. 남북교류도 그만큼 활성화돼 남북관계에 일대 전환점이 될수 있다. 하지만 안기부 폐지와 한총련 인정 등을 또 다시 들고 나온 북한이 우리측의 제의를 받아 들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북한의 선택이 주목된다.
  • 남북관계 개선 기대된다(사설)

    金大中 대통령의 방미로 한·미간에 경제제재조치 완화등 대북정책에 관한 긴밀한 조율이 이루어진 것을 비롯하여 최근 남북관계개선을 기대해볼 수 있는 몇가지 청신호들이 보이고 있다.물론 현재까지 북한측이 이렇다할 태도변화를 보이지않고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강경자세를 견지하고 있긴 하지만 변화의 추세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한 조짐들이 여러가지 점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6일로 확정된 鄭周永 현대그룹명예회장 일행의 판문점을 통한 방북을 우선 들 수 있다.鄭회장 일행이 민간차원의 교류로서는 처음으로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장관(壯觀)일뿐 아니라 남북관계개선을 바라는 모든 국민들과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하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틋한 소망을 함께 안고가는 鄭회장일행의 방북이 벌써부터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鄭회장일행은 이번 방북에서 지난 89년 방북때 합의했던 금강산개발계획을 더욱 구체화하여 속초와 원산을 잇는 금강산관광 유람선운영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하니 그 결과도 기대할 만하다. 이달중 판문점에서 갖기로 한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장성급간의 접촉 성사도 남북관계개선을 향한 큰 진전이다.북한측이 지난 91년 군사정전회담을 일방적으로 보이콧한 이후 7년만에 다시 열리는 장성급간 대화는 그동안 막혀있던 고위급 군사대화채널의 회복으로 군사적 대치상황에 있는 남북간의 위기와 긴장감을 완화해주는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金대통령의 한·미간 대북정책조율과 함께 새 정부가 남북간 교류활성화를 위해 취하고 있는 여러가지 조치들도 앞으로의 남북관계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분단후 보안법등으로 엄격하게 금지해왔던 북한의 도서와 음반·비디오 등을 남북교역 대상품목으로 고시하여 통일부장관의 승인만 얻으면 들여올 수 있게 하고 앞으로 북한방송의 청취도 허용할 뜻을 밝힌 것들이 모두 남북관계의 앞날을 밝게 해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지속적으로 활성화해나가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다같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북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남한 정부의 노력에 부응하는 북한측의 성의있는 자세를 다시한번 촉구한다.
  • 초대형화로 경쟁력 강화/벤츠­크라이슬러 합병 추진 배경·파장

    ◎성사땐 연 매출 1.300억불… 포드 바짝 추격/미·독 시장 상호 보완진출 점유율 확대 전략/현대­크라이슬러 합작 행보 가속도 붙을듯 세계 자동차업계의 지각변동이 가시화되고 있다. 6일 공식 발표된 다임러 벤츠사와 미국의 크라이슬러사의 합병 추진이 현실화되면 세계 자동차시장의 기존 판도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두 회사의 합병이 실현되면 총매출액 규모는 연간 1천3백억달러.세계 5위 규모지만 연간 매출액 규모로 볼때 현재의 1·2위인 GM과 포드의 매출액인 각각 1천7백80억달러와 1천5백30억달러를 바짝 뒤쫓게 된다. 고급 승용차와 버스 등을 주로 생산하는 벤츠와 경트럭 및 다용도 스포차차량 생산에 강한 크라이슬러의 보완적 결합은 시장 경쟁력을 높일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기존 벤츠사 계열 차량의 미국 시장 진출과 기존 크라이슬러 계열 차량의 독일 시장 진출도 각사의 기존 현재 판매망 등을 이용,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이 두 회사의 합병이 실현되면 국내 시장에도 적잖은 여파가 예상된다.대우와 GM간의 제휴 등에 대항해 현대와의 합작을 추진해온 크라이슬러사의 국내 기업과의 합작 추진 행보가 보다 본격화되고 국내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시장개척노력도 강화될 전망이다.또 한국시장을 둘러싼 GM 등과 ‘벤츠­크라이슬러’합작 기업과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벤츠와 크라이슬러사이의 합작 추진은 자동차업계의 살아남기 위한 몸집 불리기로 해석된다.연간 세계적인 자동차 수요인 5천만대보다 1천만대나 공급과잉상태인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경쟁력강화를 위한 전략적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지난 3월말 독일의 폭스바겐사가 국적을 뛰어넘어 영국의 롤스로이스사를 인수하기로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같은 합병은 전체적인 측면에선 ‘기업의 초대형화’,‘거대합병’이라는 세계적 추세의 연장선위에서 이뤄지고 있다.지난 3월말 프랑스,영국,독일,스페인사이에 합의된 ‘유럽단일 항공·방산기업체 설립’이나 지난 4월 발표된 미국의 시티코프사와 트래블러스그룹사이의 세계최대규모의 금융기업합병,미국의 뱅크아메리카와 네이션스뱅크간의 합병등도 모두 같은 예다.
  • 佛 북한문제 전문가 캉파니아 교수 佛誌 기고

    ◎美中 정치타협이 한반도통일 전제 프랑스의 대표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인 앙드레아 캉파니아 플로랑스대학 교수는 아시아 지역 전문잡지인 ‘뮈티아시옹 아시아티크’ 최신호에 실린 ‘한국의 재통일’이라는 기고에서 “한국의 통일은 동북아 안정에 기여할 것이며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인 타협이 전제되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다음은 기고문 요지이다. ○동북아 안정에 이바지 모든 한국사람들은 통일을 바라고 있다.특히 일제 치하에서 미분단 상태의 한국을 기억하고 있는 고령자일수록 통일을 더욱 꿈꾸고 있다.북한 지도층도 방법이야 어찌됐건 통일을 지상명령의 과제로 삼고 있다.반면 한국의 젊은 노동인구층과 경제계는 경제적인 풍요함에 만족하며 통일로 인한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재벌들은 단지 값싼 노동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한국정부는 통일을 원하고 있지만 점진적인 통합을 주창한다.전문가들은 한국의 통일비용은 독일의 20배에 달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그래도 통일은 여러가지 이득을 가져다주리라 믿는다.공업화가 이루어져 있고 우수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과 천연자원이 풍부한 북한의 경제체계는 상호보완적이다.통일이 된다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金正日 체제가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정치선동을 일삼고 있어 남북대화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지난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경제는 북한을 절대성장과 효율성 부문에서 월등히 앞서기 시작했다.따라서 독일이 통일됐을 때처럼 북한의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의 가능성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물론 흡수통일의 전제조건도 잘 갖춰져 있다. ○중국 객관적 자세 주목 90년대 들어 한국과 북한간의 공식적인 통일방식은 현실적인 면에서 유사점을 찾아가고 있다.북한은 ‘1국2체제 원칙“을 고수한다.한국은 북한과의 ‘점진적인 경제통합’에 중점을 두고 있다.이러한 통일 접근방식은 이론적으로 유연한 연방체제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국제정세의 변화 덕분에 한반도 상황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냉전종식으로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한국과 북한간의 경쟁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과 냉전시기 이전인 해방 직후 정치적 타협을 찾을 수 없었던 상황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이는 한국을 항상 완충국으로 여기는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한반도 문제가 종속되어왔던 게 가장 큰 이유다. 베이징에서 있었던 미국과 북한과의 협상 이후 한반도 긴장은 점차 완화되어가고 있다.중간중간 북한의 돌출행동으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특히 지난 96년 6월 한국과 미국과 제안한 한국,북한,미국,중국의 4자회담이 성사되면서 더욱 무르익고 있다.한국과 점점 더 밀접한 경제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이 전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자세를보이고 있다는 대목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北 상황따라 빨라질수도 물론 남북한 당사자간의 관계는 APEC과 ASEAN 등 동아시아의 통합 움직임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그러나 통일은 위한 협상은 강대국들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따라서 먼저 온건정치 및 자유경제와 강경한 국수주의의 정치기류 사이에서 망설이는 중국과 경제적 실리와 완고한 인권옹호 정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미국의 타협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지금부터 한국의 통일은 미국과 중국이 관계된 일인 셈이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 주변상황에 변화가 없고 북한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국제사회가 한국 문제를 UN에 회부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재통일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뤄질 수도 있다.
  • 제갈량 문집 난세를 건너는 법/오수형 편역(화제의 책)

    ◎난세의 지략가 제갈공명 문집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량(181∼234).우리에게 공명(孔明)이란 자(字)로 잘 알려진 그는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와룡선생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제갈량은 207년 위의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됐다.그는 이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고 군신지교를 맺었다.221년 한(漢)이 멸망하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그는 재상이 됐다.그러나 제갈량은 234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한 채 과로로 오장원에서 병사,정군산에 묻혔다.한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특히 지혜의 상징이자 충성스런 신하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이 책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흩어져 있는 제갈량의 글들을 모은 문집이다.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완전무결한 경지에 이른 실질상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그러나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은 문학작품 속의 제갈량이 아닌 현실의 제갈량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처세를 했는가를 보여준다.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1부 ‘제갈량의 난세경영’에는 제갈량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초려에서의 천하대계’‘형 제갈근에게 수양계곡의 길을 닦은 일을 알리는 글’‘도끼제작의 교령’ 등 50여편의 글이 실렸다.또 2부 ‘장군의 길’은 비록 위작(僞作)이기는 하나 제갈량의 이름을 빌려 세간에 크게 유행한 ‘장원(將苑)’으로 엮여져 있다.‘장원’은 장군의 덕목과 군대 운용에 관한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제갈량은 유가5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의 한 대목을 인용해 장군의 바른 길을 일러준다.“군자를 모욕하면 그 진심을 다하게 할 수 없고,소인을 모욕하면 그 힘을 다하게 할 수 없다” 문학과지성사 8천원.
  • 제임스 녹스 폴크(美國의 대통령 문화:17)

    ◎美 영토 2배로 확장해낸 ‘전쟁 영웅’/멕시코와 3년전쟁서 텍사스州 등 7개州 점령/중앙銀 개설­관세인하 등 국가재정 안정 주력 【콜럼비아(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인내의 술잔은 이제 비었습니다.멕시코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고 미국인의 피를 미국 땅 위에 흐르게 했습니다.” 1846년 5월12일,텍사스병합을 위해 멕시코의 선공을 기다리고 있던 11대 미국대통령(1845­1849) 제임스 녹스 폴크는 선전포고를 위해 의회에 보낸 교서의 앞부분에서 이같이 단호한 결의를 나타냈다. 미역사상 유일하게 하원의장 출신인 그는 미국의 기존 영토를 두배로 확장,서부 경계를 미시시피강에서 대서양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동시에 미국을 대륙국가로 만든 용감하고 뚝심있는 대통령으로 미국민들에 기억되고 있다.폴크는 7대 대통령으로 대중의 시대를 개막시키고 영토확장의 불을 당겼던 앤드루 잭슨의 열렬한 추종자로 ‘영 히커리’(Young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잭슨의 강인함을 히커리나무에 비유해 붙여졌던 ‘올드 히커리’에서 따온 것이었다.○40세때 연방하원의장 피선 1795년 노스 캐롤라이나주 멕킨버그 카운티에서 스코틀랜드인 후손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폴크는 10살때 아버지를 따라 테네시주 콜럼비아로 옮겨살게 됐으며 그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다.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다시 테네시로 돌아와 당시 하원의원이던 필릭스 그룬디의 지도로 법학을 공부,24세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여 콜럼비아에서 개업했다. 폴크는 스승이 앤드루 잭슨의 친한 친구였던 것을 계기로 잭슨과 교류를 갖게 됐으며 민주당에 입당하게 됐다.그는 주하원의원을 거쳐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후 1835년에는 하원의장에 선출됐다.나이 40세때 였다.168㎝로 미국인으로서는 작은 키에 체격이 다부져 ‘땅딸보 나폴레옹’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던 그는 7선의원으로 두차례 하원의장을 역임한뒤 39년에는 테네시주지사에 당선됐다.그는 자연스레 반 뷰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목됐으나 지명도가 낮다는 이유로 민주당 전국전당대회는 그의 후보지명을 거부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연거푸 주지사 선출에서 고배를 마시게되자 마치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듯이 보였다.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으며 마침내 44년 볼티모어 민주당 전국전당대회가 그에게 행운을 안겨주었다.당시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반 뷰랜과 루이스 캐스가 끝내 승자를 가리지 못하자 9차 투표에서 당의 화합을 이룰 인물로 폴크가 극적으로 부상,후보로 지명됐던 것이다. 정치생명이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던 폴크의 지명에 대해 헨리 클레이를 후보로 지명했던 상대편인 휘그당은 해보나마나한 게임이라며 냉소를 보였다. 그들은 ”제임스 녹스 폴크가 누구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폴크가 대통령에 부적격자라는 점을 집중 강조했다.반면에 폴크는 당시 미국민들의 영토확장 욕구를 간파,“텍사스와 오레곤의 병합”을 구호로 내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단임으로 그 약속을 이룰 것임을 공약했다. 선거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폴크의 승리로 끝났다.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취임사에서 ‘한 당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대통령’임을 강조,소신있는 통치를 위해 당의 영향력에 분명한 선을 긋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는 취임 이듬해부터 3년간 계속된 멕시코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텍사스에 이어 뉴멕시코,아리조나,캘리포니아,네바다 유타주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한 것은 물론 멕시코시티까지 함락했다. ○스페인령 쿠바도 구입 시도 폴크는 멕시코 전체를 미국령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까지도 있었으나 48년2월 강화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으며 멕시코정부는 1천500만달러라는 헐값에 오늘날 미국땅의 7분의1에 달하는 1천300만㎢의 땅을 미국에 양도해야 했다. 폴크는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구입,멕시코만을 내해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사단계에 이르렀으나 의회의 반대로 쿠바 구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사가들이 당시 폴크의 선견지명을 따랐다면 오늘날처럼 미국이 쿠바로 인해 골치를 썩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간선거 이후에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휘그당이 다수당이 되는 바람에 집권 후반기 정국운영에 많은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관세 인하를 위한 새 관세법과 워싱턴에 중앙은행,주요도시에 국유은행을 설치하는 독립은행법을 통과시키는등 국가의 재정안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일벌레 폴크’라고 불릴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의 폴크는 1849년 대통령 퇴임후 콜럼비아의 사저로 돌아와 3개월만에 과로와 콜레라로 54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세기 상류층 생활용품 집대성”/임기중 최초 우표발매­첫 야구경기 개최도/존 스탠위치 폴크 박물관 큐레이터 【콜럼비아(美 테네시주)=羅潤道 특파원】 테네시주 주도(州都) 내슈빌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인구 3만의 콜럼비아시는 11대 대통령 제임스 폴크의 체취가 곳곳에 서려 있다.웨스트 스트리트 7가에 위치한 폴크 대통령의 사저는 폴크 생전의 유품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었으며 큐레이터 존 스탠위치씨는 폴크 관련 22개소의 위치와 사연을 기록한 ‘폴크 따라 걷기’라는 소책자를 주며 한차례 돌아볼 것을 권했다. ­먼저 이 소책자에 관해 설명해달라. ▲시내에 산재한 폴크가(家)와 관련된 유적들을 걸어다니면서 체계적으로 볼수 있게 만든 것이다.폴크가의 집들과 부친 새뮤얼 폴크가 딸인 나오미의 결혼기념으로 선사한 집.폴크의 변호사 사무실,당시 법원,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폴크의 환영대회가 열렸던 스테이트 뱅크 앞 광장,그들이 출석하던 교회,학교 등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박물관으로 꾸며진 사저의 소장품은 어떤것들이 있나. ▲이 집은 1816년 폴크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공부하러 가있을때 지은 집으로 폴크가 대통령 퇴임후 돌아와 숨질때까지 살았다.퇴임후 백악관에서 가져온 집기들과 19세기 테네시 상류층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이 잘 보관돼 있다.그 가운데 특히 폴크가 부인에게 선사한 취임기념 부채,폴크의 선거포스터 등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부인 사라 폴크는 어떤 유형의 퍼스트 레이디 인가. ▲사실상 폴크의 보좌관으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폴크 못지 않게 부인도 일을 좋아했다.그들이 백악관에 들어온후 백악관 내에서 술과 파티와 카드가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오락은 일에만 탐닉했다. ­소개할만한 폴크의 또다른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업적이 많다.스미소니안 박물관 개관,최초의 우표 발매,미국내 최초의 야구시합 개최 등도 그의 임기중 일이다.
  • 북한의 협상 행태/全寅永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서울광장)

    ○무위로 끝난 4자 본회담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남·북한과 미국 및 중국이 참여한 제2차 4자 본회담이 3월 16∼21일 기간 제네바에서 열렸었다.4개국대표들은 예정된 회담 일정을 하루 연기하면서까지 공동위원회 구성과 의제결정 등에 관한 합의 도출을 시도했으나,양측은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회담이 무위(無爲)로 끝나자,미국과 북한은 평화회담의 실패원인을 서로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4자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은 무위로 끝난 회담결과를 아쉬워하면서,북한과 한·미 양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중도적 입장을 택했다.IMF한파와 ‘북풍(北風)’의 2중 난기류(亂氣流)에 휘말려 4자회담에 전념할 수 없었던 남한은 소극적 자세로임할 수 밖에 없었다. 제2차 4자 본회담은 주한미군에 관한 미국의 분명한 입장과 북한의 확고한 협상목표 및 전략 고수로 인하여,시종일관(始終一貫) 고전을 면치 못했다.북한 협상단 대표 金桂寬 외교부부부장은 북한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상대로부터호응을 얻지 못했다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계가 회담의 핵심 의제임을 강조했다.미국은 주한미군에 관한 견해를 북한과 교환할수는 있으나,미군 주둔이 한반도 긴장 원인이라는 북한주장에 찬성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제2차 4자 본회담은 북한의 특이한 협상목표와 전략 및 행태(行態)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가지 흥미 있는 에피소드를 제공했다.북한 대표단은 지난 16일의 제2차 본회담 벽두(劈頭)부터 좌석배정에 이의를 제기하여 회담을 5시간이나 지연시켰었다.북한은 왜 좌석문제를 가지고 중요한 회담을 지연시켰을까.북한 대표단이 그토록 완강하게 미국과 대좌(對坐)하기를 바란까닭은 우연이 아니라,회담을 미­북 중심의 회담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책적·전략적 고려와 의지 때문이었다.미국과의 정면 대좌 요구는 북한의 협상목표인 미­북 평화협정과 한국배제라는 협상전략을 반영한 것이다. ○‘좌석 배정 시비’의 시사점 참고로 1951년 7월 8일 키니(Andrew J.Kinney)공군대령이 인솔한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은 개성의 회담장에도착하여 남쪽을 향해 일렬로 놓여있는 의자에 앉게 되었는데,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이 북쪽을 향한 의자에 앉도록 끈질기게 요구했다.2차 접촉시 회담장에 도착한 유엔군측은 공산군측이 미리와서 그들이 원했던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유엔군측은 동양에서 승자가 북쪽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협상 테이블에서 만만한 상대가 아닌 북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물론 한·미 양국이 좌석문제 때문에 어렵게 성사된 4자회담을 섣불리 깰 수는 없지만,유사(類似)한 상황 재발방지를 위해 적절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예를 들면,회담기간중 4국 대표단이 좌석을 매일 매일 윤번제로 바꾸어 앉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경우,1968년 북한에 억류중인 푸에블로(USS Pueblo)호 승무원들 송환을 위해 미국이 사용했던 ‘레오날드 案’(Leonard Proposal)과 같은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푸에블로호가 주는 교훈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을 위한 미­북한 협상경험은 자존심이 강한 북한이대외적 체면과 대내적 선전효과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문제로 고민하던 미국은 한 주부의 참신한 아이디어 덕분에 1968년 12월 23일에 82명의 승무원과 시신 1구를 무사히 귀환시킬 수 있었다.석방 대가로 미국정부는 ①북한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②그에 대하여 사과하며 ③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확약한 ‘서명한 문서’를 북측요구대로 넘겨주었다.미국측은 북한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문서에 서명하기전에 국무성 대책반원 레오날드씨의 부인 앨리노가 제안한대로 “이제 막 서명하려는 문서는 진실이 아닌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 세계를 상대로 선언해 버렸다.이 에피소드는 매우 경직(硬直)되고 양보를 모르는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한·미 양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리하면 부인하고 지연 북한은 크게 유리하지 않는 한 협상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불리하면부인하고 지연시키는 데 익숙하다.북한은 협상시 자국(自國)의 기본원칙과협상 목표를 고수하려 든다.북한은 협상 초부터 가장 핵심적인 이익 또는 문제를 제기하며,자국 요구를 벼랑 끝까지 밀고 가는 뱃심을 보인다.물론 북한이 협상태도를 전환하거나 후퇴하는 경우도 있으나,이는 급박한 상황를 전제로 하는 극히 예외적 경우뿐이다.미국의 대북 ‘참여’정책과 남한 신 행정부의 전향적 대북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북한의 입장은 강경했다.제2차 4자 본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무척 멀고 험난한 과정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 국태공의 보은(비록 남가몽:2)

    ◎대원군,정권잡사 신세진 쌀장수에 관직/이조판서 홍종응 집서 무참하게 냉대받고/서 강사는 쌀장수 이천일 찾아가 사정하니/쌀 20섬·돈 1천냥 꾸러미·정육 100근 선뜻/아들 보위 오를던날 궁중잔칫상 차려 대접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국태공이라 불렀다.운현궁도 초가 삼간에서 대궐같은 기와집으로 탈바꿈했다.당시의 돈으로 1만7천830냥이나 들여 신축하였으니 만일 그 때가 IMF시절이었다면 즉각 공사중지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실로 오랜만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이었던 만큼 그까짓 1만이나 2만냥 같은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겼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나라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동안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하고 자기를 능멸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응분의 불이익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먼저 대원군이 손을 보려 했던 사람은 이조판서 홍종응이었다.이사람은 당대 유수의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는데 안목이 없었고 세상일에 너무 각박했다.○하인폭거로 왼손에 유혈 1863년 임술민란(일명 진주민란) 직후의 경제는 특히 어려웠다.요즘과 같은 경제난국이 닥쳐 모든 사람들이 하루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는데,흥선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래서 하루는 흥선군이 홍판서 댁을 찾아가 구걸하게 되었는데,홍판서는 문전박대를 했다.문전박대 뿐만 아니라 그 댁 하인이 대원군에게 폭행까지 하여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국태공이 흥선군 시절에 너무 가난하여 늘 꾸워 먹고 살았다.임술민란이후에 인심이 점점 각박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다.이조판서 홍종응의 집에 가서 입을 열고 싶었으나 여러 번 은혜를 입은 처지라서 쉽게 말하기도 어려웠다.그러나 염치를 불고하고 부득이 찾아가니 하인들이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감께서는 근래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잠시 산정의 사랑에 쉬러 갔습니다. 소인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아무라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다른 날 다시 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했다.그러나 세모에 날씨가 너무 추운데다 배도 고프고 목마름이 심하여 일이 성사되건 안되건간에 한번 만나 얘기나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흥선군이 애걸하니 하인들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여 협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홍종응이 답하기를 ‘이왕에 몇번 청구하신 것은 즉시 봉행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세모를 당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구걸하니 이들을 다 구제해주기 어렵습니다.얼마 안되는 이조판서의 봉급으로는 그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해주기 어려우니 대감께서 금번에 청하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차차 형편을 보아 후일에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흥선군의 청을 거절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흥선군이 그 집 문밖을 나설 때에 불상사가 생겼다.뒤를 따라 나온 홍종응의 하인이 발길로 협문의 판자를 찼다.그 조각이 흥선군의 손을 내리치니 다섯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나 서강에 사는 쌀장수 이천일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홍종응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흥선군은 손에 붕대를 감은 채 그 길로 이천일의 집을 찾아갔는데 맞이하는 태도부터가 홍종응과는 크게 달랐다. ○“집권자 되면 은혜 갚겠다” “부득이 서강에 사는 쌀가게 주인 이천일을 찾아갔다.흥선군을 맞은 천일은 크게 놀랐다.문안을 드린 후에 보니 흥선군의 왼손 다섯 손거락에 피가 엉기어 얼었고 상처의 흔적이 매우 심하였다.천일이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하고 물으니 대원군은 ‘나귀를 모는 아이가 실수하여 빙판에 떨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천일이 약수로 피를 씻어낸 후에 손을 헝겊으로 싸니 조금 통증이 가셨고 정신이 들었다. 그런 뒤 천일이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누지)에 행차를 하셨습니까.’고 물으니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절기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고하고 찾아왔네’ 하고 답했다.이에 천일이 아뢰기를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메모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송구할 따름입니다.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요.내일 아침일찍 조처하여 보내 드리겠습니다’고 황송해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냈다.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 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돈 1천꾸러미,장작나무 50바리,정육 100근,서초(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경상감사와 비슷한 녹봉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거지 흥선군이 국태공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1863년 12월8일 젊디 젊은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이 임금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가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부인 민씨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치상을 내어오게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뒤 큰 은반에 홍로주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체면을 많이 떨어 뜨렸으나 그 정분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뿐만 아니었다. “드디어 이천일이 선혜청 고직에 임명되니 그 수입이 경상감사의 봉급보다 못하지 않았다.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홍종응 처럼 한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천일같이 착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일은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이 명심할 일이라 할 것이다.
  • 철마를 달리게 하자/김용상 연구위원(남풍북풍)

    김대중 정부 출범에 때맞춰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71.5%가 ‘남북 정상회담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응답했다 한다.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지는 이 결과는 상대가 상대인 만큼 대북정책은 신중히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일게다.그렇지만 이산가족문제나 경제협력까지 늦춰도 좋다는 것은아닐 것이다.김대통령은 이미 남북기본합의서의 바탕 위에 남북간 협력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다짐했고 이를 위한 특사교환도 제의했다.특히 이산가족 간의 편지왕래나 상봉을 실현시키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이산가족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책정한데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남북간 교통 통신망 연결도 서둘러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최근 속초와 신포 양화항 사이에 임시 여객항로가 개설됐고 다른 뱃길을 여는 문제도 성사를 앞두고 있다지만 철도와 육로도 하루 속히 복원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남북한간 전화 전신 우편물 등 통신교류도 시급한 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한가지만 꼽으라면 기자는 서울∼신의주간을 잇는 경의선 복원이라고 대답하겠다.그 까닭은 뱃길이나 육로보다 철도의 수송능력이 월등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분단의 표징이었던 ‘끊어진 철로’를 복원하는 것은 민족 화해의 꽃을 가꾸는 일이고 멀지 않아 통일의 열매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헤드라인밑에 으례 사진으로 실리곤 했던 험상궂은 ‘녹슨 기관차’대신 날렵한 최신형 기관차가 신의주까지 달리게 된다면 그때 이미 7천만 민족의 가슴 속에선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물론 북한 당국자들은 체제안정에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한 경의선 복원공사를 반대하거나 뒤로 미루자고 할 것이다.그러나 개통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일단 복원공사부터 서두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러다가 곧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대북 농업지원과 여러 합작사업등 경제협력에 소용되는 화물을 실어 나를 필요가 생기면 그때가서 바리케이드를치우고 철마가 달리게 하면 될 것이다.그렇게 하면 비용도,수송시간도 아낄수 있는 가까운 길을 놔두고 수십배의 시간과 비용이드는 뱃길이나 제3국을경유해 물자를 실어나르는 ‘바보같은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게 아닌가.단절구간이 20㎞밖에 안되는 경의선의 경우,1년반이면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지금부터 서두르면 내년 안에 생산설비와 원자재,그리고 생산품을 가득 싣고 힘차게 임진강을 건너는 ‘한반도 특급열차’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지금은 문산에서 멈춰버린 북행열차의 힘찬 기적소리를 하루라도빨리 듣고 싶다.
  • 총리인준 정국 여야 움직임과 전략

    ◎“JP 빠진 조각 안된다” 야 설득 총력/여­1인당 야 3명 할당 ‘삼고초려 작전’/야­“밀리면 당 깨진다” 집안단속 분주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의 국회 처리를 이틀 앞둔 23일 여권은 한나라당 의원들을 상대로 개별설득에 나서는 등 인준 성사를 위한 총력전을 전개했다.여권은 이날 한나라당 일각에서 ‘무조건 거부’의 강경기류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자 인준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치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따른 불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국민회의는 이날 소속의원 전원을 한나라당 설득에 투입하는 한편 ‘김종필 총리’를 지지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등 물밑과 외곽에서의 양동작전을 전개했다.하오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은 결의문을 통해 “김종필 총리 지명은 국민과의 약속으로서 한나라당은 정국운영의 책임을 나눠 가진 다수당으로서 새정부 출범에 협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의원들은 또 “한나라당은 총리 교체를 주장하나,이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에게 국민회의·자민련간 공동정부 구성합의를 깨고 국정혼란을 자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회의는 총리인준을 성사시키기 위해 남은 기간 ‘삼고초려’의 자세가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의원당 2∼3명씩 한나라당 의원들을 할당,집중적인 설득작업에 나섰다. ○…자민련은 하오 의원총회를 열어 소속 의원들에게 전원 대기령과 함께 비상대책을 전달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개별접촉을 계속하는 등 분주했다. 이날 의총에서는 ‘침몰의 위기속에서 경륜있는 국무총리를 맞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나라당측이 ‘김종필 총리’인준에 협조해줄 것을 촉구했다.결의문은 “총리 임명동의안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되어 새정부의 국정공백이 초래된다면 그로인해 발생되는 정국의 불안과 경제적 파국에 대한 책임은 한나라당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와 확대당직자회의를 잇따라 열어 JP총리 인준반대 당론을 재확인했다.당론관철 방안을 논의할 의원총회도 25일 하오 1시 열기로 방침을 정했다.맹형규 대변인은 주요당직자회의후 “어떻게 행동통일을 할 것인지 깊은 논의가 있었다”면서 “이한동 대표와 서청원 사무총장,이상득 원내총무 등이 지역별,상임위별로 의원들과 만나 뜻을 모으는 노력을 계속키로 했다”고 밝혔다.조순 총재는 지난주에 이어 이날도 대구·경북,강원·충북·제주 및 전국구 중진의원들과 조찬,오찬간담회를 갖고 집안단속에 분주했다.이대표는 확대당직자회의에서 “JP반대 당론이 관철되지 않으면 당이 크게 훼손될 뿐만아니라 처참해질 수 있다”며 단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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