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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울산에선] ‘굴뚝상업 메카’서 첨단전자 복합단지 탈바꿈

    [지금 울산에선] ‘굴뚝상업 메카’서 첨단전자 복합단지 탈바꿈

    국내 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는 울산의 산업지도가 바뀌고 있다. 조선·자동차·정유·전자업계 등이 최근 잇따라 울산에 공장을 새로 짓거나 확장하고 있다. 공장 확장 및 신설은 전통적인 굴뚝산업뿐만이 아니다. 첨단 전자산업 분야에까지 대규모 신규투자가 추진돼 울산지역 산업구조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 잇따르고 있는 공장 신·증설을 한동안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울산산업의 약동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울산 산업의 르네상스 삼성이 울산에서 첨단 전자산업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나선 점이 예사롭지 않다. 삼성SDI는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 울산공장 여유부지에 최첨단 디스플레이 제품인 PDP 생산시설 1개 라인을 최근 착공했다. 사업비로 7300억원이 투입된다. 기존 울산공장에서는 브라운관과 휴대용 LCD 등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삼성 PDP 제품은 생산시설 1∼3라인이 설치돼 있는 천안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선업계도 선박수주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모기업과 협력업체 등의 공장 확장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SK㈜로부터 남구 황성동 일대 10만여평을 사들여 선박블록 생산공장을 지난 3월 완공했다. 현대미포조선도 남구 장생포 해양공원 부지 2만 5000여평을 임대해 선박블록 공장을 지난 1월 준공했다. 정유회사인 SK㈜는 남구 용연동 기존공장 뒤 14만 4000여평에 1조 6000억원을 들여 2008년까지 고도화된 중질유분해공장(FCC)을 건설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 대우버스는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길천지방산업단지안 7만 4800여평에 버스 생산공장을 짓고 있으며 오는 7월 준공한다. 술 회사까지 처음으로 울산에 진출해 무학이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6000평에 하루 40만병을 생산하는 소주공장을 짓고 있다. 최대 산업도시 울산이 산업부흥기를 맞고있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공업입지는 역시 울산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울산에 현대중공업 터를 잡을 때 조선소 위치로 바다는 필수조건이었고 비 내리는 날이 적다는 점도 고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조선소 작업은 대부분 노천에서 하는 관계로 비가 자주 내리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울산에 터를 잡은 현대중공업은 세계 제일의 조선소로 컸고 근처에 있는 계열사 현대미포조선도 날로 선박수주가 늘어 공장을 확장하고 있다. 울산은 항만이 있고 산업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데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터를 잡고 있는 등 여건이 매우 좋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시는 이같은 장점을 앞세워 대대적인 기업 사랑하기 운동을 벌이며 기업유치와 지원에 전력을 쏟고 있다. ●강성노조 이미지 극복해야 울산 산업지도가 계속 팽창하는 데 걸림돌도 없지 않다. 큰 기업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수만∼수십만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울산은 입지가 좋은 곳은 이미 여러 대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좋은 위치에 넉넉한 부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지역보다 공장부지 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것도 불리한 조건이다. 울산 하면 떠올리는 강성노조 이미지도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다. 과거처럼 격렬한 노사분규는 진정된 분위기이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울산지역 상공계에서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자동차·조선·석유화학 등 주력산업을 포함한 울산지역 산업이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앞선 첨단기술 접목과 안정적인 노사관계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시민은 기업사랑…기업은 이익환원 울산은 공업도시를 조성하던 초창기 석유화학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한때 공해로 몸살을 앓았다. 국가의 “경제개발 우선’ 정책에 치어 환경은 한동안 뒷전에 밀려나 있어야 했다. 격렬한 노사분규까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됐다. 주민들은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울산에 공장을 짓거나 확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업들은 주민들을 달래려고 애를 쓰다 급하면 다른 지역에 공장을 지었다. 역외로 기업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산업공동화에 따른 울산지역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반기업 정서가 지속되면 울산 경제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데 공감한 행정기관·상공계·시민단체 등이 지난해초 기업사랑 운동을 외치고 나섰다. “기업의 발전이 나의 발전이고 울산의 발전입니다. 우리 다함께 기업을 사랑합시다.” 지난해 2월부터 울산시는 행정전화 착신 대기시간에 기업 사랑을 홍보하는 녹음 멘트를 내보내는 등 기업사랑운동 확산에 힘을 쏟고 있다. 이어 4월에는 기업체·시민 등 2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업을 아끼고 사랑하며 협력을 다한다.”는 선포식을 했다. 이어 11월에는 기업하기 좋은 도시와 기업을 사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기업활동을 지원하며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기업과 종사자를 예우하는 내용의 ‘울산시 기업사랑 및 기업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도 공포했다. 울산의 열정적인 기업사랑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면서 산업자원부에서도 지난해 6월 기업 기 살리기 선포를 하기도 했다. 시민·행정기관 사이에 일고 있는 기업사랑 운동에 대해 지역 기업체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쌀을 비롯해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농산물 사주기, 복지시설 건립, 대공원 조성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으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 민·관·기업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해와 협력 분위기가 울산 산업발전에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김상채 울산시 투자지원단장 “공업도시 울산의 미래는 지역 기업의 흥망에 달려있습니다.” 김상채 울산시 투자지원단장(서기관)은 2일 “울산에서 공장을 짓고 기업을 운영하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시는 국내기업 유치·외자유치·기업지원·산업단지 관리 등 기업유치 및 지원업무를 총괄해 전담하는 투자지원단을 지난 1월 구성했다. 김 단장은 “기업에 대한 행정자세가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기업이 공장설립 인·허가를 받기 위해 행정기관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2∼3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려고 오히려 공무원이 해당기업을 찾아다닌다. 공장 인허가 업무를 3일만에 처리해 준 사례도 있다. 그는 “각 자치단체마다 기업유치에 사활을 걸고 경쟁하는 판에 과거처럼 기업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기업유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지금은 행정이 머리를 숙이고 뛰어다녀도 쉽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첨단 중소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조성하는 303만여평의 6개 지방산업단지도 준공에 맞춰 모두 분양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기업이 들어올 수 있도록 100만∼200만평의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사업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김 단장은 “지역 3대 주력산업 구조 고도화를 지원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자동차부품 혁신센터, 조선해양기술 혁신센터, 정밀화학 지원센터 등이 내년에 준공돼 기술연구·개발·지원 업무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그때쯤이면 관련산업 구조 고도화가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주말화제] 주민들 “행복주는 행정”

    [주말화제] 주민들 “행복주는 행정”

    “고된 농사일을 끝내고 온탕에 몸을 담그면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집니다.” 전북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의 주민 김모(68)씨는 28일 오후 주민자치센터의 목욕탕을 나섰다. 개운한 뒷맛이다. 그는 안부를 묻자 “공중목욕탕 설치야말로 자치단체가 추진한 사업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민자치센터에 들어서자 아담하고 깔끔하게 단장된 2층 건물이 으레 ‘허름한 산골 면사무소’일 것이란 선입견을 싹 지워버렸다. 지난 2001년 지은 건물의 1층엔 행정사무실과 내과·치과를 겸한 보건소가 있고, 바로 옆에는 목욕탕이 자리하고 있다.2층엔 ‘정보의 바다’란 인터넷카페, 농민사랑방, 여성문화방, 전통솜씨방이 정겹게 주민을 맞이한다. 마침 농번기라 시설을 이용하는 주민이 그리 많지 않지만 겨울철에는 여간 북적거리지 않는단다. 한상오(54) 총무계장은 “주민들이 이곳에서 포크댄스, 한방뜸, 꽹과리 등 사물놀이, 한글 등을 배우거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며 “특히 목욕탕은 5일장이 열리는 날엔 인근 장수군 주민들까지 이용하는 바람에 늘 만원”이라고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곳만이 아니다. 지난 2월 리모델링을 마친 설천면 주민자치센터와 공중목욕탕은 이용률이 가장 높다. 덕유산 자락의 산골이라 주민들이 문화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최근까지만 해도 20㎞ 이상 떨어진 읍소재지나 대전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곳 61평 규모의 목욕탕은 사우나 2개와 냉·온탕 1개, 반신욕탕 1개의 시설을 갖췄다.65세 이상 노인과 청소년·어린이는 이용료가 1000원, 일반인은 1500원을 받아 관리비에 보탠다. 한 관계자는 “목욕탕을 홀수날엔 남자, 짝수날엔 여자용으로 번갈아 운영하고 있다.”며 “인근 충북 영동군 주민들까지 몰려와 하루 500여명이 이용할 정도”라고 자랑했다. 주민자치센터에는 원어민 교사를 둔 ‘영어교실’과 논술·독서를 지도하는 ‘생각교실’등이 개설돼 주민의 인기를 더하고 있다. 이처럼 무주군이 전체 6개 읍·면사무소를 ‘주민 종합건강·문화센터’로 꾸미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때마침 ‘시범군’으로 선정되면서부터. 무주군은 덕유산·적상산 등으로 둘러싸인 산골 오지다. 빼어난 경관과 깨끗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생활고통 지수는 어느 농어촌 벽지보다 높았다. 군은 이때부터 사업비 82억원을 들여 안성면·적상면·부남면·무풍면·설천면 사무소를 차례로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하는 사업에 나섰다. 주민자치센터에 목욕탕을 설치한 것은 전국 처음으로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자치센터를 설계한 기용건축 정기용 대표는 “당시 주민의 65%가 노인인 안성면의 경우 면접조사를 해보니 모두가 목욕탕을 원해 짓게 됐다.”면서 “효과가 알려진 뒤 너도나도 목욕탕을 지어달라고 해 혼났다.”고 귀띔했다. 주민자치센터가 서서히 문화복지의 전당으로 바뀌면서 보건소, 인터넷카페, 다목적강당, 목욕탕, 이·미용실, 체력단련실, 전통솜씨방, 여성문화교실, 농민회 사무실, 소회의실 등이 들어서게 됐다. 특히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는 ‘안성 면민의 집’으로 불릴 정도다. 편안한 휴식과 여가활동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자리잡아 전국의 지자체와 민간단체들의 견학이 줄을 잇고 있다. 무주군은 이에 고무돼 모든 공공시설을 ‘주민친화적 공간’으로 꾸며가고 있다. 무주읍 당산리 한풍루 어울터 일대에 조각공원과 문화의 거리 조성사업이 한창인 것도 같은 맥락. 여기에선 연극, 뮤지컬, 국악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 공연이 열리게 된다. 무주군의 자랑거리 가운데 또 하나는 전국 유일의 등나무 운동장이다. 기존 운동장은 군수 등 VIP석에만 차양막이 설치됐던 터. 이를 일반인이 앉는 객석에도 등나무를 이용해 그늘숲을 만들어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의 논에는 자치센터를 지으면서 천문대도 만들었다. 밤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무주의 별빛을 담아내기 위한 배려이다. 홍보관과 대기실, 관람실로 구성된 3층짜리 천문대에는 주망원경, 천체탐색기, 관람용 망원경이 있고 슬라이드 상영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2층엔 50평 콘도를 꾸며 단체관람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을 정도이다. 자연스레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자치센터의 인기는 그만이다. 무주군은 이런 시설을 활용해 반딧불축제(6월2∼11일) 준비에 한창이다. 설천면 청량리 일대에 ‘반디랜드’를 조성하고 이곳에 곤충박물관까지 세웠다. 김순길 무주군수 권한대행은 “농촌개발 정책은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켜 줄 차별화된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살거리의 발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살 만한 시골, 어떤 게 ‘위민행정’인지 하는 느꺼움에 싸여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무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세리말 비엔나/칼 쇼르스케 글

    예술과 지성의 산실인 19세기말 오스트리아 빈. 당시 빈은 그야말로 열병을 앓고 있었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치장한 도시는 몰락하는 구체제 유럽의 모순 속에 분열과 해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편에선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미학적 시도들이 꿈틀댔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현대건축의 개념을 정립한 오토 바그너, 현대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 빈 분리파 회화를 이끈 구스타프 클림트, 표현주의 예술가 오스카 코코슈카…. 19세기말 이 ‘빈의 자식들’은 동시대 시공간을 호흡하며 썩어가는 제국도시를 개조하는 데 앞장섰다. ‘세기말 비엔나’(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구운몽 펴냄)는 빈을 제국주의 도시에서 급진적인 현대 도시로 바꿔놓은 이들의 활동과 그 무대였던 빈의 변화상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19세기말 빈은 정치, 사회사상은 물론 회화, 음악, 문학, 건축 등 예술 전 분야에서 유례없는 창조적 열기를 뿜어낸 시기였다. 빈의 여명은 ‘너무 오래 살아남은 구세대의 전유물’이던 도심의 공터 링슈트라세를 개발하는 계획과 함께 시작된다. 자유주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현대적 스타일의 공공건축물과 시원한 대로들이 링슈트라세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무대가 마련된 것. 책은 링슈트라세와 그 비판자,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즘의 탄생 배경을 깊이있게 다룬다. 19세기말 빈에서는 건축사상 혁신적인 예술운동이 일어났다.‘분리파(Secession)’운동이다. 과거 건축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 이들은 직선을 위주로 한 건축·응용미술 양식을 추구했다. 링슈트라세 개발에 참여한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인간의 성적인 본능을 표현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주동 인물이다. 게오르크 폰 쇠너러, 칼 뤼거, 테오도어 헤르츨 등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무명의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889년 ‘꿈의 해석’을 내놓아 20세기 지성사의 한 장을 연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퓰리처상 수상작.3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책꽂이]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신정근 지음, 심산 펴냄) 저자(성균관대 유교동양학부 교수)에 따르면 논어는 온갖 자원과 생명을 잉태한 숲처럼 동아시아 지성사에 숱한 사유의 갈래를 낳았다. 그래서 논어는 숲과 같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공자라는 거대한 그늘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래서 공자는 그늘과 같다. 그 숲과 그늘이 얼마나 컸던지 장자(莊子)조차 자신의 저작 곳곳에 상징자본으로 공자를 출연시키기도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2만 8000원.●아프리카 신화(지오프레이 파린더 지음, 심재훈 옮김, 범우사 펴냄) 아프리카는 크게 이집트 지역과 사하라 사막 이남의 이른바 ‘블랙 아프리카’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보다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지중해나 서남아시아 지역과 더욱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교류를 지속해왔다. 따라서 같은 아프리카라고는 하지만 이 두 지역은 적잖이 다르다. 이 책에서는 블랙 아프리카 신화를 다룬다. 로마의 작가 플리니는 “아프리카에서는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고 했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 아프리카다.1만 2000원.●영토적 상상력과 통일의 지정학(홍면기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한국이 동북아에서 ‘질서형성자’의 역할을 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런 약소국 현실주의의 관성은 우리 장래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가능성의 공간’으로 중국의 동북지방에 주목한다. 한반도가 동북아의 중앙에서 동해와 황해를 아우르며 지중해의 중심과 같은 위치를 찾아갈 때 비로소 통일의 지정학은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5000원.●모노하의 길에서 만난 이우환(김미경 지음, 공간사 펴냄) 모노하(もの派)는 1960∼1970년대 일본 미술의 한 경향. 나무, 돌, 점토, 철판, 종이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보여줌으로써 사물에 근본적인 존재성을 부여하는 한편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선 ‘모노하의 창시자’로 불렸고 일본에선 모노하의 이론적인 부분을 정립한 인물로 인정받는 화가 이우환을 다뤘다. 모노하에서 이우환과 양대 산맥을 이룬 일본작가 스가 기시오의 저술과 이우환을 비판한 지바 시게요, 히코사카 나오요시 등의 논지도 소개한다.2만원.●글짓기 조심하소(김려 지음, 오희복 옮김, 보리 펴냄) 조선시대 문필가 김려가 남긴 시와 이야기, 일기 등을 골라 실었다. 함경도 민중들의 삶을 담은 연작시 ‘사유악부’, 장편서사시 ‘방주의 노래’, 귀양길의 기록인 ‘감담일기’ 등을 만날 수 있다.3만 5000원.●기니피그 사이언티스트(레슬리 덴디 등 지음, 다른 펴냄) 스테이크가 구워질 정도로 뜨거운 열에 인간이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1770년대 이같은 궁금증을 품었던 영국의 내과의사 조지 포다이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실험을 감행했다. 그들은 방의 온도가 127℃까지 올라 스테이크가 완전히 구워질 때까지 땀을 쏟으며 견뎌냈고 이 실험을 통해 외부 온도가 아무리 올라도 인간의 체온은 36.7℃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용맹무쌍한 과학자 10명의 이야기를 소개.9800원.●음유시인, 가객 김광석과 떠나는 추억여행(문제훈 엮음, 여름숲 펴냄) ‘부치지 않은 편지’‘광야에서’‘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을 노래한 음유시인 김광석을 추억하며 엮은 영상 에세이집. 그의 노래에 얽힌 이야기들을 잔잔한 산문으로 풀어냈다.8000원.
  • 이총리·R회장 첫만남 누가·어떻게 주선했나

    이총리·R회장 첫만남 누가·어떻게 주선했나

    ‘3·1절 골프 파문’에 대한 이기우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의 해명은 오히려 파문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먼저 이 차관이 밝힌 이 총리와 Y제분 R회장 등의 첫번째 골프 모임 시기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밀가루 가격담합 조사 한달 만이고, 지난 1일의 골프 모임은 최종 조사 결과 발표 하루 전이었다.“과징금 부과는 골프 모임이 있기 전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공정위 설명에도 불구하고 R회장의 로비 의혹을 전혀 불식시키지 못한다. 이 차관은 또 “R회장은 2004년 처음 봤으며, 이 총리가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산에 연고가 없는 이 총리가 2001년 주가조작으로 복역까지 한 R회장과 어떻게 만났는지, 만남을 누가 처음 주선했는지 등은 여전히 의문이다. 또 이 총리는 골프 모임 참석자들을 지난해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초청, 오찬을 했다. 이 차관의 말대로 이 총리와 골프 모임 참석자들이 2004년 9월과 지난해, 올해 3월1일 등 모두 3차례만 만난 사이라면 총리 공관에까지 초청할 만큼 친분이 쌓일 리도 없고, 초청을 요청한다고 성사될 리도 만무하다. 추가적인 모임, 적어도 개별적인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만큼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게다가 이 차관은 이들의 총리 공관 방문시기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음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만 짧게 답변했다. 이 때문에 공관 방문 시점을 숨겨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혹도 일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차관은 골프비용 가운데 이 총리 몫인 3만 8000원만 해당 골프장 사장이 대납했고, 나머지 비용은 참석자들이 개별 부담했다고 했다. 하지만 3만 8000원에는 라운딩·카트비용만 포함돼 있을 뿐, 캐디피와 식사비 등 다른 부대비용은 어떻게 지불됐는지 불명확한 상황이다. 해명이 맞다면 영수증 등을 공개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 차관은 “냈다는 것만 알아달라.”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줄기세포 현실과 미래] (3)끝 ‘줄기세포와 윤리’ 전문가 좌담

    [줄기세포 현실과 미래] (3)끝 ‘줄기세포와 윤리’ 전문가 좌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한편으로 많은 과제를 남겼다. 넓게는 과학자의 연구 윤리 문제와 좁게는 줄기세포 연구와 난자 채취 과정에서의 윤리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준 계기가 됐다. 서울신문은 가톨릭대 구인회 교수 등 전문가들을 초청, 줄기세포 연구와 생명윤리 문제에 대한 좌담회를 마련했다. 사회 서울대는 최근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대체로 허위라는 조사 결과를 밝혔다. 황 교수 사건과 관련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된 줄기세포 연구에 있어서의 윤리성 문제를 심도있게 짚어보려 한다. 구인회 교수 논의에 앞서, 언론이나 연구자들이 줄기세포를 하나인 것처럼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문제다. 국민들은 성체와 배아줄기세포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종교계나 시민단체가 배아줄기세포의 윤리성을 문제 삼는 것이지, 정당한 연구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성체냐 배아냐를 구분해서 보면 윤리문제의 내용이 전혀 달라진다. 이런 점에서 언론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 정형민 교수 구 교수 말씀대로 줄기세포 연구는 분명히 구분된다. 성체줄기세포는 성인에게서 추출하며 제한적이지만 현재 공용되고 있기도 하다. 반면 지난 98년 존재가 처음 확인된 배아줄기세포는 치료 분야에서 큰 잠재력을 가져 많은 나라에서 전폭적인 연구 지원을 하고 있으나 체세포 복제의 경우 난자와 배아를 사용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윤리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관아기 시술 등의 경우 환자의 동의하에 난자를 확보하는 만큼 앞으로 이런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황 교수의 문제가 모든 연구자의 문제는 아니다. 구 교수 윤리성을 간과한 연구나 지원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윤리문제를 너무 등한시했다. 일각에서 생명공학의 윤리문제를 지적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생명윤리 없이는 생명과학도 없다. 그럼에도 경제논리로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윤리문제를 제기하면 ‘반국가적’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지 않았나. 이런 충고를 귀담아 들었다면 지금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김헌주 팀장 두 분 말씀이 옳다. 이번 사태를 통해 윤리성이 결여된 생명공학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생명윤리, 연구윤리, 정부의 지원체계 등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과제와 교훈이 될 것이다. 생명윤리법 시행 1년 동안 실무자로서 과학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간극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자들도 윤리적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과학자와 윤리학자가 발전적인 논의를 통해 긍정적 효과를 내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 난자를 얻는 과정에서의 윤리문제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달라. 구 교수 법으로 금지된 매매, 알선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잔여배아 역시 동의절차를 거치므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연구용 난자 기증은 법 규정이 거의 마련돼 있지 않다. 기증자의 자격 기준 등을 명쾌하게 제시해 연구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야한다. 정 교수 현행 생명윤리법에는 인간 생식세포 이용에 관한 부분이 빠져있다. 이번에는 이 부분이 정리될 것으로 기대한다. 냉동잔여배아의 경우 법규정에 따라 동의를 얻어 연구 목적에 사용하지만, 난자는 황 교수 사례에서도 드러났듯 실비 규정이 없고, 난자 채취로 야기될 수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사전 고지 규정도 없다. 우리도 영국처럼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또 채취된 난자는 생명력이 짧기 때문에 이를 동결 보존할 수 있도록 은행화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해 적법하고 편리하게 난자를 얻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줘야 한다. 구 교수 황 교수 연구에서 난자 이용의 효율성이나 윤리성에 적잖은 문제가 드러났는데, 우리가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연구를 지원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맞춤형 줄기세포 연구의 실효성과 타당성을 다시 짚어봐야 할 시점이다. 정 교수 난자기증 문제는 이번에 법적 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윤리문제에 발이 묶여 연구자들이 배아를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서다. 독일의 경우 인공수정을 위해 채취한 잔여 난자의 동결 보관을 금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수정 전 난자만 동결을 허용한다. 이런 방안에 대응해 난자 동결법이 제시됐다. 난자를 생명 전 단계의 세포 수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동결 보존한 난자로 연구 성과를 거둔 사례도 많다. 줄기세포 연구에도 동결 난자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그러면 우리 생명윤리법의 실상은 어떤가. 김 팀장 난자 매매를 금지하고, 산부인과에서의 난자 채취를 정부가 관리하도록 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배아보다 난자에 대한 규정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게 사실이다. 대통령령을 마련하는 등 이 부분을 구체화하고 있다. 불임이나 난치병 치료를 위한 난자 관리나 연구 및 검사에 따른 실비 지급 규정도 마찬가지다. 사회 황 교수의 허위 논문은 과학자 윤리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구 교수 과학은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진실성이 생명이다. 특히 자연과학은 정확한 수치와 근거가 제시되지 않으면 곧 생명을 잃은 것이다. 과학자가 연구를 조작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다. 이로써 황우석 교수의 과학자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본다. 정 교수 구 교수 의견에 동의한다. 과학 연구는 전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야 하며, 그것이 논문과 특허출원이라는 과정을 거쳐 과학발전의 토대가 되고, 생활에서 실용화된다. 따라서 과학자의 연구에는 가감이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황 교수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번 사태가 모두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을 것이며, 생명공학 연구 관행에도 큰 깨달음을 줬을 것이다. 김 팀장 국민들의 충격이 컸다. 그동안 생명윤리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연구에 따른 윤리성 문제는 심도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원천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토론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물론 학계에서도 건설적 논의가 많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구 교수 관련 연구비 지원이 특정 분야에 치우쳐 지원된 것도 문제다.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한 다른 과학분야에 타격이 컸다. 만약 이런 불균형이 없었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성과가 있었을 텐데 아쉽다. 정 교수 고통스러운 점은 한국 과학계가 국제적 신뢰를 잃고, 어린이들까지 희망을 접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줄기세포 연구 전반에 오해가 있을까 걱정된다. 그러나 모든 생명공학 연구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또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바로 임상에 적용될 것처럼 과대포장된 점에 대해서는 언론도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전국 60∼70개 연구팀이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 누가 이전처럼 이들의 연구 성과에 관심을 갖겠는가. 과학자들 사기가 걱정이다. 국제적 공동연구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버드대에서는 사이언스지에 논문을 올린 한국 과학자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는가 하면, 특강을 위한 외국 학자의 방한이 취소되거나 투고한 논문이 이유없이 반려되기도 했다. 우리 과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사회 황 교수 없는 줄기세포 연구는 어디로 갈까. 그가 없어도 우리의 줄기세포 연구가 국제적 수준을 지킬 수 있겠는가. 정 교수 황교수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업적은 물론 줄기세포 생산에 있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 연구개발비와 연구 인프라, 기초기반기술이 다소 취약하지만 세계의 연구 수준이 다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배아줄기세포를 포함, 강점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플랜이 필요할 것이다. 또 성체줄기세포는 윤리 문제에서 자유로운 만큼 우리가 세계 연구를 주도해야 옳다.2000여개의 난자를 갖고 연구를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축적된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 앞으로 윤리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구 교수 법 체계 정비와 생명윤리 교육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다소 나아졌지만 기존 연구자들 대부분이 윤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재교육도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할 과제다. 정 교수 황 교수 파문이 산교육이 됐다. 우리 재단만 해도 연구 사안마다 법령부터 따지게 됐다. 과학자라고 생명윤리 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구 교수 말씀처럼 교육이 충분치 않았던 건 사실이다. 당연히 교육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한다. 김 팀장 지난 1년 동안 생명윤리법을 시행하면서 유사한 입법례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철저히 검토 중이다. 심의위에서 빈틈없이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법 개정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방향이 정해진 것은 없지만 과학계와 정부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위원회가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심의위 산하 생명윤리교육평가위를 통해 이에 대한 접근방법을 토론 중에 있으며 곧 좋은 결과가 제시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 황 교수에게 다시 연구 기회를 줘야한다는 견해는 어떻게 보나. 구 교수 개인적으로는 애석하지만, 황 교수가 연구에 참여한다면 국제 학계에서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또 정말 중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젊은 과학자들이기 때문에 연구에 큰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본다. 정 교수 황 교수와 인연을 쌓은지 20년이 넘었다. 같이 연구도 했고…, 그 분은 존경했던 선배 과학자였지만, 과학이 세계를 상대로 한 것이어서 조작으로 신뢰를 잃은 과학자는 다시 발 붙일 곳이 없다. 그것은 국제 통념이다. 정리 심재억·윤설영기자 구인회-가톨릭대 생명윤리과 교수 겸 가톨릭대 대학원 생명윤리학과 책임교수 정형민-포천중문의대 교수 겸 차병원 세포유전자치료연구소 소장 김헌주-보건복지부 보건산업육성사업단 생명윤리팀장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국제강-철인 3대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국제강-철인 3대

    대궁(大弓)양행, 남선(南鮮)물산, 조선(朝鮮)선재, 동국(東國)제강…. 고 대원(大圓) 장경호 회장이 1929년 설립한 가마니 회사 대궁양행을 시초로 한 동국제강그룹의 사명 변천사에는 웅대한 포부가 담겨있다. 활을 숭상하는 민족사를 표방한 대궁이나 바다건너 남쪽으로 뻗어나가길 소망한 남선, 조선, 해뜨는 나라의 긍지를 담은 동국 등 장경호 회장이 강조한 민족사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4년 락희(현 LG), 삼성, 현대, 한국화약에 이어 5대 그룹까지 올라섰던 동국제강그룹은 잇단 계열분리로 인해 지난해 4월 현재 자산 5조 8000억원으로 재계 26위에 랭크돼 있다. 하지만 가마니와 못을 팔며 시작한 이 전통의 그룹은 3세인 장세주(53) 회장대에 이르러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인수전에 뛰어들고 IT사업에 진출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지남철로 수집한 철사 토막에서 연산 860만t체제로 장경호 창업주는 1899년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부농인 부친 장윤식씨와 모친 문염이씨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부산 초량동 중앙시장 주변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창업주는 1913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보성학교에는 부산출신 유학생이 단 두명 있었는데 나머지 한명이 4·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허정씨다. 둘은 광복 이후 각각 정치인, 기업가로 재회했는데 허정씨가 정계 은퇴 후 어렵게 살 때 장 회장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장 회장은 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맏형 장경택씨가 운영하던 목재소 일을 돕고 농사를 크게 짓고 있던 두 형에게 가마니를 공급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30세 되던 해인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 본격적인 가마니 장사에 나서면서 사업인생을 시작했다.1935년에는 남선물산을 세워 수산물 도매업, 미곡사업, 창고업 등으로 발을 넓혔다. 장 회장과 철(鐵)과의 인연은 우연찮게 시작됐다. 남선물산 창고에서 신선기(伸線機)를 설치해 철사와 못을 생산하던 재일교포가 창고에 화재가 발행하자 장 회장에게 신선기를 넘긴 것이다. 동국제강의 모태가 된 조선선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당시 장 회장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퉁이를 맨 채 지남철을 들고 다니며 고철을 수집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동국제강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유니온스틸을 합쳐 무려 860만t에 이르지만 그 출발은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쇠붙이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후 재건사업으로 못 수요가 폭발하자 조선선재는 큰 돈을 벌게 됐고 1954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동국제강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민간 제철소 시대를 개막했다. 당산동 공장으로는 늘어나는 철강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장 회장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개 소금’으로 유명했던 부산시 남구 용호동 일대 갯벌을 매립해 20만평 규모의 부산제강소를 완공한다. 1965년에는 50t 규모의 국내 첫 ‘고로(高爐)’를 준공, 한국 철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당시 동국제강의 위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부산제강소를 방문,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장경호 회장은 “종합제철소는 민간기업이 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국책사업으로 추진돼야 한다.”며 완곡히 사양했다. 이후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을 설립, 오늘날 포스코를 탄생시켰으니 장 회장이 박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국 철강사가 새로 씌어질 뻔했다. ●아내 반지를 빼서라도 투자하겠다, 강철왕 송원 장상태 장경호 창업회장이 동국제강그룹의 기틀을 닦았지만 장 회장은 워낙 불심(佛心)이 깊어 수시로 절에 들어가 100일간의 수행정진에 들어가는 등 현대적 의미의 경영자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동국제강의 본격적인 역사는 195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당시 부흥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던 고 장상태 회장이 전무로 입사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큰 형(고 장상준씨)과 공직에 있던 둘째 형(고 장상문씨)과 함께 동국제강을 키워 온 장상태 회장은 1964년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2세경영’을 시작했다. 장 회장은 2000년 4월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국내 첫 후판공장 설립,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 설립, 동일제강 인수, 한국철강·한국강업 인수, 연합철강·국제기계·국제통운 인수, 기업 상장, 직류전기로 도입, 포항 후판공장 준공, 국내 첫 항구적 무파업 선언, 부산제강소의 포항 이전,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스틸)과의 포괄적 협력 체결 등 굵직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64년 취임 당시 4만 8000t에 불과했던 동국제강의 철강 생산량은 2000년 705만t으로 147배 증가했다.5억 6000만원이던 매출은 1조 5442억원으로 불어났다. 장 회장은 약간의 여유만 생겨도 설비투자에 나섰는데 주변에서 자금 걱정을 하자 “내 아내의 반지를 빼서라도 투자금을 마련할 테니 설비만큼은 최고를 써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장 회장의 존재감은 JFE홀딩스 스도 후미오 사장이 동국제강 사보 편찬팀과의 인터뷰에서 “장 회장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 때문에 지금도 동국제강 본사에 있는 장 회장 흉상 앞에 설 때면 자연스럽게 차렷자세로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게 된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스도 사장은 2005년 4월 방한했을 때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장 회장 납골탑을 참배하는 등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디지털경영 시도하는 3대 장세주 회장 동국제강은 장상태 회장 별세 직후 포항제철 사장을 역임한 김종진씨를 부회장으로 영입,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취임 1년여만인 2001년 7월 헬기를 타고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소를 방문하다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졸지에 수장을 잃은 동국제강 계열사 사장단은 ‘회장 주청의 글’을 통해 당시 장세주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키로 하지만 장 사장은 본인의 미흡한 점을 이유로 몇번을 사양했다. 장 사장은 선친과 교분이 두터웠던 박태준(현 포스코 명예회장) 전 국무총리와 해외 철강업계 수장, 모친인 김숙자(74)여사 등에게 차기 회장감을 상의했고 10여일의 고민끝에 “이젠 자네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박태준 회장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장세주 회장은 중앙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학사장교(ROTC)로 포병장교 근무를 마친 뒤 미국 타우슨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 경리부·일본지사·인천제강소장·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98년부터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가 사장으로 승진한 것은 입사 22년만인 2000년이다. 장 회장은 “동국제강에 입사해 부장때까지 다른 신입사원들과 똑같이 현장에서 일하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마시곤 했다. 아버지는 늘 현장에 있으라고 강조하셨는데 현장에서 쇳가루를 마시고 커야 나중에 본사에 오더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 귀공자풍의 장 회장은 골프, 스키 등 만능 스포츠맨이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들이 즐기는 스노보드도 수준급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스키를 즐겼던 선친과 많이 닮았다. 골프실력도 남다르다.74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를 만큼 프로급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자웅’을 겨룰 정도다.2오버파 정도를 친다고 한다. 장 회장은 또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도 친분이 두텁다. 방 사장과 허광수 회장이 사돈이고, 장 회장 역시 범 LG가(家)와 사돈이어서 눈길을 끈다. 장 회장 취임 이후 동국제강은 매출이 2001년 1조 7852억원에서 2004년 3조 2674억원으로, 순이익은 149억원에서 4562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장 회장은 2004년 7월 동국제강 창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CI(기업이미지)를 선포하면서 2008년 그룹 매출 7조원 달성 목표를 내걸었다.2005년 들어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유일전자(현 DK유아이엘)와 시스템통합업체인 탑솔정보통신(현 DK유앤씨)을 인수하는 등 IT영역으로도 발을 뻗고 있다. 중앙기술연구소 설립,MBA급 인재 100명 육성, 경영혁신운동 가동 등 인재육성과 기술개발에 정성을 쏟고 있다. 장 회장이 2005년 7월 ‘그룹경영회의’에서 주문한 내용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동국제강의 ‘체질’을 바꾸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영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철강업, 물류업 등 우리 사업의 개념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선대 회장 시대의 경영패턴과 지금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바뀌었다는 점을 인식하자.” ●창업회장 시절의 수수한 혼맥 장경호 창업회장은 보성고보 2학년 때 같은 고향 출신의 추명순씨와 결혼, 슬하에 6남 5녀를 뒀다. 창업회장이 성사시킨 11번의 혼사 가운데 유력가문이라고는 동명목재뿐이다. 장남으로 동국제강 회장을 지낸 고 장상준씨는 부산에서 사업을 하던 박상선씨의 딸 명년씨와 결혼,4남 2녀를 낳았다. 장상준씨의 장녀 옥자씨는 부산세무서장을 지낸 송귀범씨와 결혼했고 장남인 세창씨는 타워호텔 회장이었던 고 남상옥씨의 딸 덕자씨와 결혼했다. 덕자씨는 남충우 타워호텔 회장의 누나로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사촌동생이다. 차녀 옥빈씨는 태광그룹 이임룡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고 이영진씨와 결혼했다. 장상준 회장의 자녀들은 동국제강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선재 경영을 맡았는데 선친에 이어 아들들도 일찌감치 유명을 달리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978년 시집 ‘여(旅)’를 펴내는 등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남 장세창 전 동일제강 사장은 2000년 지병으로 별세했고 차남인 장세명 전 조선선재 사장도 2005년 12월2일 59세로 사망했다. 조선선재는 곧바로 장세명 전 사장의 아들인 장원영씨를 대표이사로 추대해 새출발했다. 보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원영씨는 불과 서른살이다. 3남인 장세승(57)씨는 조선선재 상무로 일하고 있다. ●불사를 이어받은 둘째 창업회장의 둘째 아들인 고 장상문씨는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장상문씨의 부인은 부산의 대표기업이었던 동명목재 창업주인 고 강석진 회장의 딸 강정자(76)씨다. 장경호 창업회장과 동향인 강 회장은 같은 불자로 친분이 두터웠다. 외무부 차관보, 스웨덴·멕시코 대사, 유엔대사 등을 역임한 장상문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1989년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전통문화 전문 출판사 ‘대원사’를 세웠다. 대원사는 현재 그의 아들인 장세우(57)대표가 맡고 있다. 장상문씨가 3대 이사장을 지낸 불교진흥원은 선친이 1975년 임종 직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불교의 중흥을 염원하는 서한과 함께 헌납한 31억 6000만원(현재가 2000억원)으로 설립됐다. 불교진흥원 초대 이사장은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태회 당시 제2무임소장관이 맡았다. 동국제강과 LG그룹은 이후 사돈지간으로 발전하는 등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2004년 동국제강 창사 50주년 기념식에 구본무 LG회장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었다. ●두 아들을 장교로 보낸 장상태 장남인 장상준씨가 일찍(1978년) 타계하고 차남은 회사 경영에 뜻이 없던 터라 동국제강은 3남인 고 장상태 회장 체제로 운영돼왔다. 부산 동래고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장 회장은 미국 미시간주립대 석사를 마치고 귀국, 잠시 부흥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다 1956년 동국제강 전무로 회사에 발을 내디뎠다. 장 회장은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김영희씨의 외동딸인 김숙자씨와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김숙자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미모의 재원이었다. 김숙자씨는 시부모, 시동생 등 대가족을 모시고 살았는데 워낙 검박한 시아버지가 생활비(당시돈 500원)를 매일 매일 나눠주는 바람에 살림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남편인 장상태 회장도 농림부 장학금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오면서 부친이 용돈을 많이 주지 않아 고생을 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도 미국 유학시절 부친이 차를 사주지 않아 걸어다녀야 했다고 한다. ROTC 출신인 장남 장세주 회장은 상명여대 교수를 지낸 남희정(44)씨와 결혼했다. 두 아들은 아직 학생이다. 막내인 장세욱(44) 동국제강 전무는 육사 41기생으로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96년에야 동국제강에 입사했다. 이후 남가주대 MBA를 졸업했다. 장 전무는 소위시절 친구 소개로 경제기획원 차관, 산업은행 총재, 금호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한 김흥기씨의 딸 남연(42)씨와 연애 결혼했다. 장 전무의 처남도 육사를 졸업했다. 장 전무는 “원래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선친의 권유로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 장상태 회장의 장녀인 영빈씨는 지병으로 이미 세상을 떴다. 차녀인 문경(48)씨는 울산대 의대 교수로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의사인 윤준오(52)씨와,3녀 윤희(45)씨는 부산지역 실업가이자 8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이학만 화양실업 회장의 아들 철(47)씨와 결혼했다. 이철씨는 현재 철강유통회사인 세광스틸 사장이다. ●강철가문의 철 박물관 장상태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장상철씨는 부산제강소 공사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등 동국제강 경영에 활발히 참여하다 1991년 세상을 떴다. 장상철씨 사후 유족들은 세연문화재단을 설립해 고인의 뜻을 이어갔다. 세연문화재단은 2000년 충북 음성에 세연철박물관을 개관, 전통제철 복원실험, 대장간 조사 등 철강문화 발굴·보급에 힘쓰고 있다. 장녀 인경(47)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장남인 세훈(44)씨는 동국제강 계열사인 국제기계 전무로 일하고 있고, 차남 세한(41)씨는 철강판매사인 ㈜동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차녀 은주(45)씨의 남편인 송봉헌(49)씨는 주 인도 공사다. ●불사와 사업을 동시에 장경호 창업회장의 5남인 장상건(71) 동국산업 회장은 부산지역 사업가인 김대성씨의 큰딸 명자(64)씨와 결혼,1남 3녀를 뒀다. 장 회장은 부산상고와 동국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동국제강 감사로 입사했다. 이후 동국제강 부사장, 동국건설 사장을 지낸 뒤 1977년부터 동국산업 경영을 맡아왔다. 장경호 창업회장이 1967년 설립한 대원사가 전신인 동국산업은 2001년 동국제강에서 계열분리됐고 현재 동국S&C, 대원스틸, 한려에너지개발, 동국내화, 신안풍력발전, 고덕풍력발전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장상건 회장의 형인 고 장상준 회장 자손들이 운영하고 있는 조선선재 지분도 16.6% 갖고 있다. 동국산업은 현재 장상건 회장의 외아들인 장세희(38) 전무(경영관리본부장)가 21.52% 지분으로 최대 주주다. 장 전무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96년 동국산업에 입사했다. 장 전무의 부인은 동방그룹 창업주인 김용대 회장의 차녀 유경(36)씨다. 장 회장의 차녀 혜경(42)씨는 김장&리 법률사무소 설립자인 고 김흥한 변호사의 아들 유동씨와 결혼했다. 아직 미혼인 막내 혜원(36)씨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화려한 혼맥, 눈부신 성장 장경호 창업회장의 여섯 아들 가운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이는 막내인 장상돈(69) 한국철강 회장이다. 경복고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조선선재에 입사, 동국제강 상무·전무를 거쳐 82년 한국철강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85년부터 98년까지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2001년 한국철강을 갖고 독립했다. 한국철강은 계열분리 뒤 환영철강, 영흥철강, 대흥산업을 인수하며 한국특수형강, 세화통운, 마산항5부두운영과 함께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철강 전문그룹으로 도약했다. 한국철강 자체만으로도 지난해 매출 6861억원, 순이익 1120억원을 거둔 알짜기업이다. 환영철강 역시 매출이 4000억원이 넘고 한국특수형강도 지난해 매출이 2500억원에 달한다. 장 회장은 동국대 재학시절 이화여대 미대생이던 신금순(66)씨와 연애결혼했다. 장인인 신종식씨는 한때 동국제강 계열사인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 사장으로도 일했었다. 장 회장은 3남 2녀를 뒀는데 혼맥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장남인 장세현(42) 한국특수형강 대표이사 부사장은 뉴욕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한국철강에 입사했고 환영철강 부사장을 거쳤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화학과와 일본 와세다대학원을 나온 차남 장세홍(40) 한국철강 전무는 고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차녀인 박은경(34)씨와 결혼했다. 박 전 회장은 재계혼맥이 두텁기로 유명한데 맏사위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아들인 김선협씨, 셋째 사위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인 허재명 일진소재산업 대표이사다. 3남 세일(35)씨는 영흥철강 기획이사를 맡고 있다. 차녀인 인영(38)씨는 구두회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장남 구자은(42) LS전선 상무와 결혼했다.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동생이다.LG가와 동국제강의 남다른 인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ukelvin@seoul.co.kr ■ 장씨일가 불교와 인연 동국제강 장씨 일가를 이야기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빼놓기 어렵다. 창업주인 고 장경호 회장의 묘비에는 ‘대원거사(大圓居士)’라고 새겨져 있다. 부인 고 추명순씨도 적선화라는 법명으로 통했다. 장 회장이 불교에 귀의한 계기는 17세 때 목격한 막내동생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 장 회장은 양산 통도사 주지 구하 스님을 통해 처음 불교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1925년 통도사에서 첫 안거를 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잡았고 수시로 금강산 마하연, 통도사, 청도 운문사, 부산 금정사, 금정산 무위암 등에서 안거와 정진을 거듭했다. 장 회장의 불사는 이후 불서보급사 설립, 대중포교당인 대원정사 설립 등으로 발전한다.1973년 대원불교대학까지 설립한 장 회장은 죽음을 예감한 1975년 스웨덴 대사로 있던 차남 장상문씨에게 불사를 부탁하고 사재 30억원을 불교사업에 희사, 대한불교진흥원을 탄생시킨 뒤 스스로 자리에 누워 입적했다. 그가 임종 직전 남긴 열반송은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를 믿고 깨달으라.’는 말로 끝난다. 창업 회장을 이어받은 장상태 회장도 부산제강소를 이전하면서 1996년 100억원을 출연해 대원복지재단(현 송원문화재단)을 설립, 장학사업·아동복지사업 등을 펼치며 선친의 유지를 이어갔다. 장 회장은 또 2000년 임종 직전 화장을 부탁해 장묘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는데 이 역시 그의 불심과 무관치 않다. 부인 김숙자씨, 아들인 장세주 회장, 장세욱 전무도 이미 화장을 약속했다. 창업회장이 생전에 불사를 부탁한 둘째 아들 장상문씨는 1981년 대원정사 이사장과 신행단체인 대원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선친이 못다이룬 사업에 속도를 냈다. 장상문씨는 1989년 불교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한 뒤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불교방송을 개국하는데 성공했다.UN방송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초대 불교방송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장상건 동국산업 회장도 현재 대원정사 이사장직을 맡아 선친의 뜻을 받들고 있다. 동국산업은 1992년 재단법인 ‘불이원’을 설립,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있다. 장 회장은 2004년 12월 부산에 대원정사 지원을 마련, 불교 포교에 힘을 쏟고 있다. 또 2005년에는 사재를 털어 부산 대원불교대학을 개교, 부산·경남지역 불교 인재 양성에 나섰다. 장상건 회장과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이 불교계열인 동국대를 졸업한 것도 이 집안과 불교와의 남다른 연을 짐작케 한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열린세상] 북·미 갈등에 신중한 대응을/정종욱 아주대 교수·전 주중대사

    요즈음 신문을 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빙판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뒤뚱대기 시작한 것처럼 보기가 불안하다.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이 넘어지면 우리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 다치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평생 불구자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미국과 북한이 주고 받는 설전이 그렇다. 사건의 단초는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버시바우 미국대사가 어느 모임에서 북한을 ‘범죄국가’라고 부른 것이었다. 정권차원에서 마약을 밀매하고 위조지폐를 찍어내는 범죄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 후 국무부 조지프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차관이 북한 정권은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 했고, 바로 지난 수요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하고 위조지폐를 만들면서 국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동안 잠잠해졌던 부시행정부의 북한 때리기가 재개된 것이다. 물론 북한이 발끈할 수밖에 없다. 조평통은 ‘선전포고’라 했고, 노동신문은 버시바우 대사를 ‘불한당’이라 했으며, 내각기관지인 ‘민주조선’은 버시바우대사의 추방을 요구했다.6자회담 재개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우리 정부도 협상 상대에 대한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어느 국회의원은 미국대사의 본국 소환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제출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불안한 건 역시 우리 국민들이다. 이러다가 6자회담의 불씨가 아예 꺼져버리지 않을지, 그리고 한반도에 군사긴장의 먹구름이 몰려오지나 않을지 가슴 졸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사태를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협상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본방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9월19일 제4차 6자회담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의 틀 속에서 문제를 풀어간다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시사는 아직 없다. 북한을 자극하는 이런 말들이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아니라 버시바우 대사와 조지프 차관의 발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조지프 차관은 그 직책이 북한에 자극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역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이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그런 악역을 담당해 왔다. 부시 대통령의 말도 일반론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협상 담당자는 가만 있는데 주한 대사와 군축담당대사가 강성발언을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인상도 짙다. 선양에서 북한과 일본이 비밀접촉을 했고, 중국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까지 특별한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반응도 비관적은 아니다. 노동신문의 논평이 나왔지만 ‘불한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6자회담에 불참한다는 언급은 없었다.‘9·19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위협도 하지 않았다. 지난 9월 말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에게 했던 약속이 유효하다는 증거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으며 6자회담에 복귀해서 평화적으로 풀어가겠다는 이 약속에는 김정일의 신뢰와 체면이 실려있다. 또 6자회담이 성사되면 가장 얻을 게 많은 쪽이 바로 북한이라는 점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현실주의자로서 김정일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추론이 맞다면 우리 정부나 정치인들도 너무 앞서가는 발언을 할 필요는 없다. 특히 대사를 소환한다거나 한·미동맹은 깨져도 좋다는 식의 극단적 언사는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6자회담이 더 빨리 재개되지도 않으며 북한의 태도가 완화되지도 않는다. 지금은 새해에 재개될 지루한 협상에 차분히 대비할 때이다. 정종욱 아주대 교수·전 주중대사
  • 세계무림촌 출발부터 ‘삐걱’

    경북 경주시가 추진 중인 ‘세계 무림촌’ 건설사업이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8일 경주시에 따르면 산내면 내일리 일원 240여만㎡에 ‘세계 무림촌’ 건설을 위해 당초 지난달 말까지 외국인 투자 신고 및 기반시설 타당성, 기본계획 수립 등을 완료할 예정이었지만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 또 공동 사업주체인 경주시와 미국태권도협회(ATA), 투자자인 ‘조인트 웨이브 인터내셔널’사가 올해 말까지 세계 무림촌 법인을 설립키로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이로 인해 시가 내년 4월 착공키로 한 무림촌 조성사업이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경주시는 “외국 투자사인 조인트 웨이브측이 최근 동남아 일대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바람에 대표자의 방한 및 사업계획 논의 자체가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무림촌 사업주체들은 지난 7월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태스크포스팀 구성 및 업무교육을 실시했었다. 세계무림촌 조성사업은 내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매년 1억 달러씩 모두 10억원(약 1조원)을 투자해 세계 유일의 전통무술 테마 무술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각국의 주제 무술관과 대학, 영상단지 등과 함께 호텔, 놀이공원 등이 들어서는 문화·레저 복합 테마파크로 조성될 계획이다.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경주를 ‘역사문화특별시’로”

    정부가 추진 중인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 등의 성공을 위해서는 경주가 ‘경주역사문화특별시’로 승격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는 경주경실련(공동대표 이성타·불국사 회주 스님)이 6일 개최한 ‘경주역사문화특별시 조성에 관한 시민대토론회’ 주제발표를 통해 “경주는 국내 유일의 2000년 역사도시”라며 경주 보존의 특별성을 강조한 뒤 이같이 주장했다. 정 교수는 “21세기 경주의 부활을 위해 경주역사도시 보존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경주에 대한 계획과 운영,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확보하자.”며 “경주역사문화특별시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고도(古都)·역사도시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도시 보존 및 발전의 기본원칙은 문화유산의 보호와 주민의 안정된 생활”이라며 “국가가 재정을 부담하고 도로·하천·복지시설 등의 체계적 정비와 주민에 대한 정당한 보상 등이 보존계획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황기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원장은 “경주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해 문화·전통을 보존·계승하는 한편 현대 경주인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왕경·반월성·황룡사 등 문화유산의 발굴·조사·연구는 치밀하게 진행돼야만 세계유산의 위상을 손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주경실련 관계자는 “현재의 경주는 고도·역사도시 의미가 퇴색되고 방치돼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사설] ‘대통합회의’ 공감대 형성이 먼저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제안한 ‘국민대통합 연석회의’의 기본취지는 좋다고 본다. 경제계, 노동계, 시민단체, 종교계, 농민, 전문가와 정당이 한 자리에 모여 양극화 해소, 노사문제, 국민연금 등 사회적 난제들을 풀자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갈등과 분열 해소, 국민통합 시대 개막도 바람직한 구호들이다. 하지만 지금 여야간, 노정간 대치가 첨예하다. 이렇듯 불쑥 제안한다고 의미있는 회의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장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권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야당이 빠진 상황에서 대통합은 달성될 수 없다. 노·사·정 대화도 표류하고 있고, 쌀협상 비준을 둘러싸고 농민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시민사회단체는 보·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사전 정지작업이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한 자리에 앉히기가 쉽지 않거니와, 모으더라도 효율적인 협의가 진행되기 어렵다. 정부 방침에 긍정적인 특정 세력을 중심으로 회의체가 구성되면 통합은커녕 도리어 사회 반목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의도가 없으며, 공연히 위원회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야당은 대통합 연석회의를 또다른 형태의 연정 추진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권 외부세력을 동원해 야당과의 대통합을 압박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이해찬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연석회의를 총리실 산하에 만들겠다고 밝혔다. 총리 주도의 회의체라면 탈(脫)정치, 정책중심 기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선거구제 개편 논의 등은 국회와 정치권에 일임할 뜻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대통합 연석회의를 통해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의 사회협약 같은 약속을 만들어내길 희망했다. 협약이 성사된다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지만 의욕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 여야 및 노정 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역량이 있음을 보여줘야 연석회의 구상이 힘을 얻는다.
  • “연정 한나라당 거부로 종결 盧 조기사퇴 가능성도 소멸”

    청와대가 연정 종결을 선언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밝혀온 조기사퇴 가능성도 소멸됐다고 밝혀 주목된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11일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대연정의 대상인 한나라당이 (대연정을)거부했다.”면서 “거부한 마당에 얘기할 필요성도 요구도 없어졌다.”고 답변했다. 이 비서실장은 조기사퇴 가능성이 소멸됐느냐는 질문에 “(대연정이) 전제로 했던 몇 가지 옵션, 전제가 있었고 필요시에는 임기단축도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며 “그러나 그 전제가 사라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독일의 대연정 성사를 바라보면서 “프랑스의 좌우 동거정부나 독일의 대연정은 유럽정치의 수준을 보여준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조기숙 홍보수석이 기자들에게 밝혔다.연정에 대한 아쉬움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아침 참모들과 차를 마시면서 독일 대연정에 대한 생각을 묻는 참모들의 질문에 “헌법에 규정돼 있지 않던 정부형태가 여야 정당의 협상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만은 높이 사줄 만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 수석은 연말에 대연정을 다시 제안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상대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제안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연정 얘기는 끝난 것”이라고 단언한 데 이어 청와대도 대연정 제안의 종료를 공식선언한 셈이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이현세 만화경] 고백이라면…

    [이현세 만화경] 고백이라면…

    나는 서른 살이 넘도록 연좌제에 시달려왔다. 태어나서부터 학교와 군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에 나와서도 해외여행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말하자면 나는 이 나라에서는 요주의 인물이요, 항상 감시추적과 도청으로부터 심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당연히 정보부에 대한 내 생각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이었으며 작가 생활 내내 영향을 주었다. 그런 내게 최근 터진 안기부 불법도청사건은 과거행위에 대한 필연적인 부메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고소해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의 분노가 워낙 커서인지 현재의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지난 과거의 불법도청에 대해 중간 진상발표를 하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현 국정원 지휘부는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자기반성과 사과를 한다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국정원의 고해성사를 색깔 있는 시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이다. 확실히 과거의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시절에는 정권 보위기관으로서의 폐해가 심각했고 지금의 국정원도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거 도청 책임자들의 체벌이라든지 X파일의 공개 따위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정원의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것에 훨씬 더 걱정이 앞선다. “정보국이 불법 도청했다.” “직원이 모기업을 협박했다.” “지휘부의 직원 관리 소홀의 탓이다.”라는 사실들은 국정원도 통렬하게 반성해야겠지만 그 당시 정보 정치에 영합한 정치인들의 속셈과 불법도청의 지시주체와 수혜자들에게 더욱 큰 잘못이 있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국정원도 대오각성하고 국가와 국민에게로 되돌아올 책임이 있다. 세계의 모든 정보부는 음지에서 일한다. 냉전시대가 없어진 지금 모든 나라의 정보부는 대테러활동이나 사이버 안전, 또는 산업 스파이 사건에 몰두한다. 우리 국정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하이닉스 반도체 산업 스파이 사건을 적발해서 12조원의 국부유출을 막아낸 바가 있다. 미국의 워싱턴은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준 도끼를 시험해 볼 양으로 아버지가 아끼시는 벚나무를 잘라버렸다. 워싱턴은 질책과 야단을 무릅쓰고 아버지에게 잘못을 사과했고 이를 진정한 용기로 받아준 그의 아버지의 배려가 워싱턴을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끌었다. 과거의 정보부는 확실히 어둡고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그러나 정보부에 누구보다 개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내 눈에도 작금의 도청 파문을 보면 한 마리의 악어를 수 많은 피라니아떼가 달려들어 도륙을 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러 탐욕이 한 탐욕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고와도 내 새끼지만 미워도 내 새끼다. 어쨌든 한 나라에 정보부는 있어야 하고 대한민국에 정보를 담당하는 조직은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은 벌하되 지금의 젊고 힘찬 국정원 직원들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세계는 각국간에 치열한 정보전쟁을 하고 있고 우리는 분단 현실과 대 테러위험, 국부유출을 막아야 하는 산적한 현안들이 놓여있다. 나는 차라리 이번 국정원이 과거시절의 잘못을 시인한 것을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제발이지 그 어둡고 은밀한 지하세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밝고 신비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한국판 ‘007 시리즈’라도 탄생해서 세계 문화 콘텐츠 시장을 휩쓰는 날도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경북 울진군이 오지 아닌 오지와 국내 최대의 원전(原電)지역이라는 오명을 벗고 ‘친환경 농업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를 개최할 만큼 자연친화적 농업을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고 있다.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울진은 한반도 동단부에 자리잡은 인구 6만의 미니 자치단체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아울러 푸른 동해의 200리 해안선과 기암괴석, 망양정 등 7개 해수욕장, 성류굴 등 각종 관광자원이 어우러진 관광의 고장이다. ●왕피천에서 푸른 생명의 축제 열리다 이곳에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독일,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다.‘친환경 농업! 인간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15일까지 울진 왕피천 엑스포공원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 등 28개국의 친환경 농업 및 관련 단체들과 국내 92개 자치단체 등이 참가해 역대 최고다. 이번 행사는 한국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한편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 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울진농업엑스포의 시작은 김용수 엑스포 조직위원장이 울진군수로 취임한 지난 200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위원장이 공약사업으로 농업엑스포 개최를 발표했으나, 주민들은 물론 중앙정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주위의 이런 냉대에도 불구, 국제 농업 환경이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 농업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해 농업엑스포 개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여기에 울진은 전체 면적(989.07㎢)의 86%가 임야여서 산림 부산물을 퇴비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다 전체 농가가 친환경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소규모 경작지 위주라는 이점도 감안됐다. 김 위원장은 “WTO,FTA 체결 등으로 고사 위기에 처한 국내 농업을 살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농업 엑스포 개최를 구상했다.”면서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울진군은 같은 해 12월 엑스포 개최를 위한 기본방향 등을 정한 뒤 2003년 6월 국무총리실로부터 국제행사로 승인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정부의 사업비 보조는 물론 인력·홍보 등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오리·우렁이 등 이용한 특수농법단지 확대 이에 따라 군은 성공적 엑스포 개최를 위해 그 해 9월 조직위 사무국을 출범시키는 한편 친환경농업 기반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군은 우선 주민들을 대상으로 ‘3·3·3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 운동은 ▲3무(無)=무농약·무제초제·무화학비료 농업 실천 ▲3유(有)=메뚜기·허수아비·반딧불이가 있는 들판 조성 ▲3실천=퇴비증산·녹비작물(토끼풀, 풋베기풀 등) 재배·볏집 되돌려주기 등이다. 또 땅심을 높이기 위해 5740㏊ 전체 농경지에 대한 단계적 객토사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군은 화학비료 및 농약 사용 절감과 오리, 미강, 우렁이 등을 이용한 특수농법 단지 조성을 확대했다. 이런 노력으로 울진군은 2003년 전국 친환경 농업 우수마을 최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4년 친환경 농업 대상 자치단체 부문에서 우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올해 울진지역 농경지 855㏊에서 생산될 무농약 인증 친환경쌀 ‘울진 생토미(生土米)’ 13만 5000포대(40㎏들이) 중 절반이 훨씬 넘는 8만 포대가 이미 판매 계약된 상태다. ●전체 농지의 15% 친환경농산물 재배 울진군은 농업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올해 말까지 총 74억원의 예산을 들여 친환경 농업 기반조성 면적을 전체 경지면적 5740㏊의 27%인 1549㏊로, 친환경 농산물 인증면적을 경지면적의 15%인 880㏊로 확대 추진할 계획이다. 또 195개 전체 리·동별 토질에 맞는 환경친화형 맞춤비료를 공급하고, 농업인들의 의욕고취를 위해 친환경 농업 실천농가에 ㏊당 60만원의 생산장려금을 지원한다. 울진군은 또 10개 전체 읍·면별 친환경 농업 추진위원회 구성, 농업인 교육, 특수농법 재배단지 등을 추가 조성하는 한편 벼 도정공장을 설치해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 과정까지 일원화시킬 방침이다. 이재동 울진군 부군수는 “농업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군의 친환경 농업 육성사업으로 울진은 국내 최고의 친환경 농업지역으로 탈바꿈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세계 농업엑스포 현장 가보니 친환경의 땅 울진의 왕피천 엑스포공원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는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는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다양한 농업문화 전시 및 공연, 각종 체험행사, 국내외 친환경·유기농산물이 망라돼 있다. 20여만평의 엑스포 행사장에는 ▲친환경 유기농업을 접해볼 수 있는 친환경농업관 ▲조선시대 온실을 재현한 친환경농업문화관 ▲300평 경작지에 미생물을 이용해 과채류를 재배한 유기농 경작지 ▲80여종의 야생화를 심은 야생화관찰관 ▲전통 작물과 오리, 거위, 흑염소 등이 노니는 ‘시골농장’ 등이 마련됐다. 특히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행사기간 내내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생명·생태환경·문화’를 주제로 한 주제공연과 상설행사가 야외공연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행사장 내에 마련된 전통문화체험마당과 주말농장, 민물고기잡이 체험장 등지에서는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전통문화체험장은 짚풀문화, 길쌈, 옹기, 한국의 탈 등 전통농업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학습 프로그램 위주로 짜여져 인기다. 특히 친환경농업관에서는 감자·고구마·옥수수·고추 등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작물을 직접 수확하며, 친환경 농업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행사 기간 내내 공연장에서는 친환경을 주제로 한 국내외 공연이 잇따라 열리며, 국방부 취타대 및 전통의장대 시범공연, 미8군 군악대 공연팀 초청공연 등 문화예술행사도 함께 마련된다. 또 매일 오후 2시와 5시 두차례에 걸쳐 친환경농산물 무료 시식회가 열린다. 조직위원회는 효과적인 관람 순서로 정문→울진 금강송 산책로→유기농경작지→친환경농업관→세계관→시골농장→민물고기체험장 건강흙체험관→주공연장→건강먹을거리마당→전통문화체험장→야생화관찰원→바이오산책로를 제시했다. 성인 1만 2000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7000원인 입장권으로는 울진의 관광 1번지인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을 무료 입장할 수 있고,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온천인 덕구온천과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백암온천, 신라 고찰 불영사, 향암미술관도 50% 할인받을 수 있다. 조직위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1일 최대 1만 7000여명의 숙박시설과 행사장 인근 바닷가 1만여평에 24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친환경 캠프촌도 조성해놓고 있다. 군청 전 공무원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휴일을 반납한 채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김용수 울진군수 “울진친환경농업엑스포에서 인간을 살리는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의 모든 것을 체험해 보세요. 분명 인간과 친환경, 유기농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조직위원장인 김용수 울진군수는 “올 하계휴가를 자녀들과 함께 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는 ‘땅속까지 깨끗한 울진’에서 보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엑스포 홍보에 열을 올렸다. 김 군수는 “이번 엑스포는 국내외 친환경농산물 재배 및 친환경 농업의 정보, 친환경 제품, 농업문화 체험 등 친환경의 모든 것을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산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알차게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를 통해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김 군수는 피서철 동해안의 교통이 혼잡하다는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 대구∼포항고속도로 및 울진∼영덕 7번 국도 개통으로 서울∼울진 4시간, 대구∼울진 3시간대로 접근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국민들이 농업엑스포를 찾아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하는 등 급변하는 국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침체돼 가는 우리 농업의 활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에 80만명의 관람객들이 찾을 것으로 전망돼 150억원 이상의 직접적 관광수입이 기대된다.”며 “엑스포 개최로 인한 ‘환경농업 1번지’라는 이미지 구축과 울진의 농·수·축산물에 대한 친환경 제품 인정 등 부수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효과”라고 설명했다. 친환경 농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는 그는 국내 최초로 개최되는 농업엑스포를 반드시 성공시켜 울진을 친환경 메카로 육성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장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친환경농산물 장터 및 전국 친환경 농업 상설교육장으로 운영하는 등 국내 친환경 농업의 중심센터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수도권플러스] 광진구, 고구려 유적지 조성 본격 추진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 모으는 박물관과 전시관 등을 갖춘 고구려 유적지 조성사업이 추진된다. 서울 광진구는 11일 이 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위해 국내 최대규모의 고구려 유적지인 아차산에 대한 기본조사를 마쳤다고 밝혔다. 조사는 명지대 박물관학과 김정화 교수와 고고미술사학과 전공의 고려대 최종택 교수, 프랑스 건축사 이상대 건축사사무소대표 등 각계 전문가들이 지난 3월부터 4개월간 문헌조사, 현장조사, 국내외 사례조사 등으로 이뤄졌다. 조사 보고서는 모두 17개의 고구려 보루 가운데 6개가 집중된 홍련봉과 용마산 일대에 고구려 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고구려 전시관은 단순히 유물을 나열하는 전시관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꾸며져야 할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또 전시관 인근에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박물관을 반드시 건립해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 [열린세상] 유럽헌법 좌초와 한국통일/이덕일 역사평론가

    유럽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잇달아 거부되면서 통합유럽호가 좌초위기를 겪고 있다. 유럽헌법의 핵심조항은 ‘대통령직과 외무장관직 신설, 집행위원회 구성, 상호안보, 기본권 헌장, 이중다수결제도, 핵심정책 거부권 폐지’ 등인데, 이중 핵심정책 거부권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반대표가 많아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유럽헌법이 가져올지도 모를 경제적 불안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5월 동구권 10개국가가 한꺼번에 EU에 가입한 것이 기존 회원국 국민들의 불안감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EU의 40% 수준인 동구권 국가들의 가세가 자신들의 경제상황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결국 유럽헌법안 부결의 속내는 통합비용 지불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통일문제를 돌아보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다.2004년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914달러로 남한의 16분의1 수준이다. 남북이 통일될 경우 한국이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 구체적 액수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지만 2003년 홍콩의 HSBC는 통일 첫 해 국내 총생산의 4.4%(236억달러)가 들 것으로 예상했다(서울신문 2003년 3월3일자). 마커드 놀랜드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0년간 매년 600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는데,10년간의 통일비용을 원화로 환산하면 약 700조원이었다(매일경제 2003년 10월14일자). 이보다 앞서 미국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2000년 통일 후 10년간 최소 7700억달러(약 855조원)에서 최고 3조 5500억달러(약 3940조원)가 들 것으로 예상했다(문화일보 2000년 4월21일자). 물론 이런 연구 결과들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통일이 되어 봐야 알겠지만 막대한 비용이 들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들이 경제적 불이익의 발생을 우려해 유럽헌법을 부결시킨 사례는 우리에게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할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다. 군사비와 젊은이들의 의무 징병비용 등 분단비용도 만만치 않다며 무조건적 통일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반론도 있지만 군사비와 의무 징병비용 등은 분단비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주독립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비용이라는 점에서 큰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중국과 일본이 군비경쟁에 나서는 현재의 동북아 상황에서 통일을 달성했다고 우리만 군을 해체하거나 우리 영토를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대폭 축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사적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을 이룩해야 하지만 자칫 섣불리 접근할 경우 기존의 성과마저 무효로 돌릴 수 있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는 냉정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통일에 대한 전략적, 전술적 로드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이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상호이익이 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만약 일정 정도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우리가 감내할 만한 수준의 피해인지 등에 대한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류 상황은 로드맵이란 말을 사용하기가 민망하다.20만t의 비료를 갖다 바친 끝에 맺은 합의가 일방적으로 파기되어도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수용하는 조공(朝貢)식 교류가 통일 로드맵에 의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행태가 반복된다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통일에 대한 회의가 확산될 것이 우려된다.‘역사적’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던 6·15회담이 몰래 달러를 갖다 바치고야 성사되었다는 사실 하나가 드러나면서 ‘6·15합의’에 감동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지 않았던가. 갈 길이 멀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설계도도 없이 거대한 집을 짓겠다고 덤비다가는 10년 이상 흉물로 방치되고 있는 105층짜리 평양 류경호텔 꼴이 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④-LG화재·LS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④-LG화재·LS그룹

    LG는 고 구인회 창업회장과 그의 형제들이 함께 일군 그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형제들의 활약이 컸다. 구 회장을 중심으로 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6형제는 말 그대로 ‘한솥밥’을 먹으며 회사를 키워왔지만 3대째 내려 온 현재는 각기 다른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구철회씨 자손 LG화재가 첫째 동생 철회(75년 작고)씨의 자녀(4남4녀)들은 지난 1999년 LG화재를 갖고 독립했다. 지난해 자산 4조 6000억원에 매출 3조 444억원, 순이익 500억원을 기록한 LG화재는 현재 4남인 구자준(55) 부회장이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장남인 구자원(70)씨는 LG화재 경영에서는 사실상 손을 떼고 방위산업체인 넥스원퓨처 회장을 맡고 있다. 진주고와 고려대 법대, 독일 쾰른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64년 락희화학에 입사한 구 회장은 럭키증권 사장, 럭키개발 사장,LG정보통신 부회장 등을 거쳐 99년 계열분리와 함께 보험업계에 뛰어들었다. 경춘관광 사장을 지낸 유기홍씨의 딸 영희(63)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LG화재 본부장인 장남 본상(35)씨는 지난해 LG화재 주식 10만 7150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3.53%로 늘렸다. 위기관리 전문업체인 TRC코리아 상무인 차남 본엽(33)씨는 지난해 말 소프트웨어 자문일을 하는 ‘LIG시스템’ 대표이사를 맡았다. 본상씨와 본엽씨는 또 넥스원퓨처 주식을 각각 31.79%씩 보유하고 있다.LG이노텍의 방산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넥스원퓨처는 자산이 3300억원, 매출이 3000억원에 달한다. 본엽씨가 감사, 구자원 회장의 제수인 이갑희(62)씨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차남 고 구자성 전 LG건설 사장은 이종구 전 산업은행 이사의 딸인 이갑희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뒀다. 장녀 본희(37)씨는 정재문(대양산업 회장) 전 국회의원의 아들인 정연준(41) 미디어플러스 사장과 결혼했다. 차녀 본주(35)씨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고 진성규 변호사의 아들 진상범(36) 남부지법 판사와 결혼했다. 구자성씨의 외아들 본욱(29)씨는 LG화재에 다니고 있다. 3남인 구자훈(58) LG화재 회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74년 금성사에 입사했지만 곧바로 범한화재(현 LG화재)로 옮겨 30년간 ‘보험인생’을 걸어왔다. 범한화재 런던·뉴욕사무소 소장을 지낼 정도로 국제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금융발전심의회 보험분과위원, 주한 우루과이 명예부영사도 맡고 있다. 임방인(61)씨와 사이에 세 딸을 뒀는데 3녀 문정(30)씨는 최근 타계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성용 명예회장의 장남 재영(35)씨와 결혼했다. 장녀 현정(35)씨의 남편은 글로벌 보험회사인 AON코리아 부사장인 에릭 호프먼(42)이다. ●보험경영도 탐험처럼, 구자준 부회장 미사일 전문가에서 보험전문가로 변신한 구자준 부회장은 경기고를 마치고 미국 캔자스·미주리 주립대를 다니다 귀국,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구 부회장은 74년 금성사 사원으로 입사, 금성정밀(현 LG이노텍)에서 방산사업부 경영을 주로 맡았다.94년 미국산 호크미사일의 탄두 재장착 시스템과 국산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할만큼 미사일 전문가로 통한다. 99년 계열분리로 LG화재 부사장으로 임명되자 생소한 보험영역을 공부하기 위해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보험전문대학인 ‘TCI’에서 보험전문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최근 북극점 정복 성공으로 세계 처음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탐험가 박영석 대장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졌는데 2001년 히말라야 K2등정 때는 베이스캠프까지 원정대와 동행해 전문산악인 못지않은 실력을 보여줬다. 마라톤 풀 코스를 6번이나 완주할 정도로 ‘철인 체력’을 자랑한다. 지난해 참가한 베를린마라톤부터는 1m마다 100원씩을 적립, 지금까지 900만원을 모았다. 구 부회장은 자동차보험 ‘매직카’와 장기보험 브랜드 ‘엘플라워’를 앞세워 보험업계 2위 진입을 노리고 있다. 부인 이영희(53)씨와의 사이에 동범(30), 동진(28) 형제를 뒀다. ●GS, 두산으로 이어지는 딸들의 혼맥 구철회씨의 네 딸은 하나같이 ‘좋은 집안’으로 시집갔다. 장녀 위숙(78)씨는 허만정씨의 3남인 고 허준구 LG건설 회장에게 출가, 허창수 GS회장 등 GS그룹의 핵심 5형제(창수·정수·진수·명수·태수)를 낳았다. 재계에서는 허준구 회장의 생가가 있던 옥인동을 따 이들을 ‘옥인동 5형제’라고 부른다. 2녀 영희(74)씨는 의학박사인 고 이호덕씨에게,3녀 고 구자애씨 역시 의사인 정승화(72) 형제의원 원장에게 시집갔다. 자애씨의 장남 정규원(42)씨는 LG화재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4녀 선희(61)씨는 박우병 전 두산산업 회장의 장남 박용훈(63) 두산산업개발 부회장과 결혼했다. 박우병씨는 박두병 전 두산 회장의 동생이다. 선희씨의 장녀 박성연(35)씨는 이창수 전 주 필리핀대사의 아들인 주학(40)씨와 결혼했다. ●트랙터부터 전자태그(RFID)까지,LS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셋째, 넷째, 다섯째 동생인 ‘태평두’씨는 2003년 11월 LG전선그룹(현 LS그룹)을 갖고 독립했다.LG의 성장과정에서 이들 3형제의 역할을 감안하면 자산 5조원 남짓한 전선그룹은 너무 작은 것 아니냐는 불평이 나올 만했다. 하지만 3형제는 큰 불만 없이 ‘가족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묵묵히 따랐다고 한다.LG는 이후 LG산전(현 LS산전)을 추가로 넘겨주는 형식으로 3형제의 노고에 대한 보답을 잊지 않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아셈타워를 ‘본부’로 한 LS그룹은 전선·산전·LS니꼬동제련·가온전선·E1·극동도시가스를 주축으로 17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자산 5조 8800억원으로 CJ와 비슷하며 동국제강, 대림, 동양, 효성, 코오롱보다 규모가 크다. 구태회(82) LS전선 명예회장과 구두회(77)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은 아셈타워 21층에 나란히 사무실을 두고 있다. 구평회(79) E1 명예회장도 같은 건물 14층 사무실을 쓰며 우애를 다지고 있다. 구태회 명예회장은 진주중과 일본 후쿠오카고를 마쳤는데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다 광복 후 광복군으로 귀국하는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다닐 때는 창신동 하숙집에서 ‘화장품연구’에 몰입,‘투명크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50년 락희화학의 전무로 입사,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는데 플라스틱 사업 진출, 서울사무소 개소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58년 고향인 진양에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공화당 대변인 겸 원내총무, 무임소장관, 국회 부의장 등 중책을 맡다 82년 LG그룹 고문으로 돌아왔다. 최무(83)씨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뒀는데 장녀 근희(62)씨는 이계순 전 농림장관의 아들 준범(64)씨와 혼인했다. 이준범씨는 현재 합성수지업체인 화인 회장이다. ●멜빵 맨 ‘디지털 전도사’ 구자홍 회장 장남 구자홍(59) 회장은 73년 LG상사에 입사한 뒤 홍콩·싱가포르 지사 근무를 통해 ‘국제감각’을 쌓았다. 영국에서 찰스 황태자를 만났을 때 영국 사람들조차 발음과 표현에 감탄할 정도의 빼어난 영어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87년 LG전자 해외사업본부 상무로 옮긴 뒤 2003년까지 18년을 전자에서 일하며 ‘디지털 전도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조사한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지수 평가에서 1위를 받을 정도로 대표적인 ‘스타CEO’로 GE, 모토롤라,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 기업들의 CEO와도 교우가 깊다. 특히 빌 게이츠 회장, 리빈 주한 중국대사와는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북미·아시아·유럽의 전직 고위관료, 기업인 등으로 구성된 TC(Triliteral Commission)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학창시절 쌓은 농구와 수영실력이 수준급인 구 회장은 골프에도 남다른 재질을 보여 지금까지 모두 4차례의 홀인원을 기록했다. 요즘 핸디캡은 7정도. 또 한국기원이 인정한 ‘아마 6단’의 바둑실력을 자랑한다. 지난해 주요 사업장을 순방하며 ‘분위기’를 익힌 구 회장은 ‘R&D워크숍’,‘혁신한마당’,‘테크놀로지 이벤트’ 등 그룹차원의 행사를 연이어 개최하며 회장으로서 행보를 넓히고 있다. 최근 전력망회의(CIGRE)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공식 대외활동도 재개했다.LG전자 CEO직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던 구 회장이 전자에서 못다 이룬 꿈을 LS그룹에서 실현시킬 수 있을지 관심사다. 구 회장은 70년대 재벌 오너일가의 장남으로서는 흔치 않게 지순혜(60)씨와 연애결혼했다. 구 회장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잠깐 다니다 미국 프린스턴대(경제학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인근 뉴저지주립대에서 식품영양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순혜씨를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고 한다. 순혜씨는 이화여대 가정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떠난 엘리트 여성으로 귀국 후 이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구자엽(55) 가온전선 부회장은 경복고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LG화재에서 주로 일했다.LG건설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사장을 지낸 뒤 2003년 희성전선(현 가온전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태향(55)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는데 장녀 은희(29)씨는 고 정몽우 전 현대알미늄 회장의 장남인 정일선(35) BNG스틸 사장과 결혼했고 장남 본규(26)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 3남인 구자명(53) LS니꼬동제련 부회장은 경기고를 마치고 아버지와 같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자 재벌가 자제로는 흔치 않은 학군단(ROTC) 출신으로 포병학교를 수석으로 마치고도 전방 부대 근무를 자원했다고 한다. 미국 페어리디킨슨대와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행정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뒤 미국 셰브론사에서 잠시 일하다 84년 호남정유 원유수급조정과 과장으로 입사, 정유사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부인 조미연(53)씨는 경희대 조영식 이사장의 차녀. 아들 본혁(28)씨는 LS전선 경영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4남 구자철(50) 한성 회장은 LG상사에서 잠시 일하다 일찌감치 독립 경영을 했다. 외동딸 원희(25)씨는 구 회장의 경기중·고 동창인 ㈜두산 박용만(50) 부회장의 장남 서원(26)씨와 오는 30일 낮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결혼한다. 마침 구평회 명예회장의 ‘팔순잔치’도 이날 저녁 그랜드 인터컨티넨털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어서 구씨 일가의 ‘대이동’이 예상된다. 2녀 혜정(57)씨는 이인정(60) 태인 회장과 결혼했다. 아들인 이상현(28)씨는 지난 2003년 운동권의 ‘메카’였던 한양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비운동권’ 후보로 나서 당선돼 화제를 낳았다. 이씨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현재 유학 준비 중이다. 구평회(79) E1명예회장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1951년 락희화학 지배인으로 경영에 첫발을 내디뎠다.1954년 뉴욕에서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 LG의 첫 해외주재원으로 기록됐다. 구 명예회장은 5·16 쿠데타 직후인 61년 ‘부정축재 기업인’ 처벌 때 형을 대신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할 정도로 LG경영의 핵심을 담당했다. 락희화학 전무시절인 65년 정유사업 진출 보고서를 형에게 제출, 오늘날 GS칼텍스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84년에는 국내 최초의 LPG수입사인 여수에너지(현 E1)를 설립했는데 이 인연으로 사업연관성으로 따지면 GS그룹에 넘어갔어야 할 E1이 LS그룹 몫으로 남았다. 재계원로 가운데 독보적인 영어실력과 국제감각으로 ‘재계의 외교관’으로 불린다. 한국인 최초로 태평양 경제협의회(PBEC) 국제회장을 지냈고 한·미경제협의회 회장, 무역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2대 월드컵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며 340억원의 유치기금을 조성하는 등 월드컵 개최에 큰 공을 세웠다. 현재도 한·미협회장을 맡아 한·미간 우호증진에 애쓰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1952년 금릉원예조합 문흥린 이사장의 딸 문남(75)씨와 결혼해 3남 1녀를 뒀다. ●‘철인 CEO’ 구자열 부회장 장남인 구자열(52) LS전선 부회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78년 LG상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뉴욕지사와 도쿄지사, 동남지역본부장 등 오랜 해외경험으로 영어와 일어에도 능통하다. 구 부회장은 해외경험을 살려 폭넓은 해외인맥을 자랑하는데 2003년에는 도쿄 주재 특파원, 은행지점장, 지사장 등이 모여 만든 ‘동경회’ 회장을 맡았다. 직전 회장은 김인진 한진 사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 등과는 ‘월가(Wall Street)회’ 모임을 통해 교류를 쌓고 있다. LG증권을 거쳐 2001년 LS전선 재경부문 부사장으로 부임한 구 부회장은 2002년부터 대표이사를 맡아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LS전선은 특수전선 업체인 GCI, 알루미늄 창호업체 알루텍, 광부품 업체인 네옵텍, 초고주파 부품업체인 코스페이스,2차전지 음극재 전문업체인 카보닉스에 이어 선박용 케이블업체인 진로산업을 인수하는 등 공격경영을 가속화하고 있다. 구 부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으로도 유명하다.2002년 독일에서 열린 ‘트랜스 알프스 산악자전거 대회’에 참가해 아시아인 최초로 7박8일 동안 650㎞를 완주할 정도. 스키는 물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노보드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지난겨울 사내 스키동호회 모임에 유일하게 스노보드를 들고 나타나 젊은 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명함에 ‘No Innovation,No Future(혁신 없이는 미래도 없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을 정도로 체질 개선을 독려하는 한편 임직원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사내게시판에 ‘애니 기븐 선데이’라는 영화 동영상과 메시지를 직접 올려 팀워크 정신을 강조했다. 미식축구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과감한 도전과 팀원들간의 협력을 통해 진정한 승리를 일궈 낸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12월24일에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한 해 동안 고생하신 사랑하는 LS전선 임직원들과 함께 듣고 싶다.”며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를 신청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사내동호회 행사에서는 직원들 자녀에게 일일이 용돈을 챙겨줬다고 한다. 육군 중장으로 청와대 경호실차장과 성업공사 사장, 전쟁기념관장을 역임한 고 이재전 장군의 딸 현주(48)씨와 결혼,1남2녀를 뒀는데 아직 학생이다. 차남인 구자용(50) E1 사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무역학과를 마쳤는데 사촌형인 구자명 LS니꼬동제련 부회장과 마찬가지로 ROTC 장교로 복무했다.79년 LG전자에 입사, 주로 미주법인에서 일하다 계열분리를 앞둔 2001년 LG칼텍스가스(현 E1)로 자리를 옮겼다. 구 사장은 보수적인 구씨 집안 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할 정도로 유머감각이 뛰어난데 직원들과의 자리에서도 본인이 나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한다고 한다.E1이 10년 연속 무교섭 임금 타결을 이뤄낸 데는 구 사장의 이같은 면모가 적잖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상돈 전 중앙대 의대 학장 딸인 현주(46)씨와 결혼, 두 딸을 뒀는데 둘다 외국 유학 중이다. 3남 구자균(48) LS산전 부사장은 중앙고와 고려대 법대를 마치고 미 텍사스주립대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를 거쳐 97년부터 고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해 말 경영인으로 전격 변신했다. ●8개사 사장을 거친 구두회 ‘막내’ 구두회(77)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은 고려대 상대와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경영에 뛰어들었다.74년 범한화재 사장을 시작으로, 희성산전, 금성계전, 금성통신, 금성반도체, 호남정유 등 주요 계열사 사장을 역임한 뒤 95년 구본무 회장 체제 출범과 함께 경영에서 물러났다. 위로 두 형과 마찬가지로 구 명예회장도 한·독경제협력위원회, 한·중남미협회장, 고려대 교우회장, 성북구 문화원장 등 활발한 외부활동을 벌였다. 이같은 공로로 78년 멕시코정부로부터 명예영사로 임명됐으며 94년에는 ‘멕시코 최고훈장’을 받았다. 지난달 고려대 10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도 선정됐다. 구 명예회장은 유한선(72)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장녀 은정(44)씨는 김택수 전 공화당 원내총무의 아들인 김중민(48) 전 국민생명보험 부회장과 결혼했다. 외아들인 구자은(41) LS전선 상무는 홍익고와 미국 베네딕틴대 경영학과, 시카고대 MBA를 거쳐 90년 LG정유에 입사했다.LG전자 상하이지사 근무로 중국과 인연을 맺어 LS전선에서도 중국지역 담당을 맡고 있다. 장상돈(고 장경호 동국제강 창업주 아들) 한국철강 회장 딸인 인영(37)씨와 결혼했다. 구 명예회장의 막내 재희(38)씨는 김세택 전 덴마크 대사 아들 동범(37)씨와 결혼했다. ukelvin@seoul.co.kr ■ LG·두산家, 겹사돈·사업제휴속 프로야구선 ‘서울 라이벌’ 신경전 LG가(家)는 고 구인회 창업회장 때부터 두산가문과 우애가 두터웠다. 구인회 회장이 1956년 서울 컨트리클럽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두산, 경방그룹 회장들과 골프 친목모임인 ‘단오회’를 결성할 정도였다. LG와 두산은 또 구인회 회장의 첫째 동생인 철회씨가 박우병 전 두산산업 회장과 사돈을 맺으면서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두 그룹은 LG가 90년 프로야구단 ‘MBC청룡’을 인수하면서 잠시 사이가 벌어졌다. 같은 서울을 연고로 한 두산구단의 ‘방해’가 심했던 것이다. 이후 LG임직원들은 두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구자경 당시 회장이 부산에서 행사를 가졌는데 평소 좋아하던 양주 ‘패스포트’ 대신 다른 술이 차려져 있었던 것. 두산 제품을 빼라는 기조실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구 회장은 기조실 사장에게 일부러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룹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만한 일로 감정적인 변화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LG와 두산은 오는 30일 구태회 명예회장의 4남 구자철 회장과 고 박두병 두산회장의 5남 박용만 부회장이 사돈을 맺으며 ‘겹사돈’으로 이어진다.LS전선과 두산엔진은 ‘합작사’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두 집안의 혼사나 제휴와 상관없이 프로야구 ‘서울 라이벌’의 팽팽한 긴장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LG트윈스가 최근 두산과의 잠실 홈경기에서 이길 때까지 무료입장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제시한 것만 봐도 그렇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名博 파문’ 고개 숙인 高大…부총장등 사퇴

    ‘名博 파문’ 고개 숙인 高大…부총장등 사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고려대 명예 철학박사 학위 저지소동과 관련, 고려대 부총장과 9명의 처장단이 3일 사퇴했다. 총학생회도 홈페이지를 통해 돌출된 행동이 일어나 물의를 빚은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안문석 교무부처장 등은 이날 오전 긴급회의를 갖고 일괄사표를 냈으며 이들의 사표 수리는 5일의 개교 100주년 기념식 이후 어윤대 총장이 결정키로 했다. 어 총장은 이날 이례적으로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이번 학위수여가 이 회장님의 거듭된 겸양에도 저희가 굳이 고집해 성사됐음을 생각할 때 이 회장님 가족과 행사에 참석한 내외빈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밝혔다. 어 총장은 “돌발적 사태였지만 학생신분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민주적ㆍ폭력적 행위로 스승이자 총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바른 교육을 통해 학생이 균형잡힌 시각과 절제된 행동양식을 갖추도록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고려대는 이 사과문을 이메일로 삼성에 보냈으며 삼성은 이를 그룹 홈페이지에 띄울 것을 검토 중이다. 고대 관계자는 “학위수여식 소동이 보도되자 동문으로부터 ‘시위를 한 학생을 징계하라.’는 수많은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면서 “하지만 학교측은 징계여부에 대한 방침이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려대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학위수여 저지를 주도한 대학연합조직 ‘다함께’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찬반 토론이 벌어지고, 접속이 폭주해 총학생회 홈페이지가 한때 닫혔다. ‘반운동’이라는 ID의 한 학생은 “이번 행동은 개념 없는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행동으로 전체 학생을 대변한 행동이 아니었다.”면서 학생회의 사퇴를 요구한 반면 ‘재학생’이란 ID의 한 고대생은 “잘못된 것을 묵인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은 “학교측이 지나치게 삼성의 눈치를 본다.”는 의견과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으로 엇갈렸다. 유지혜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리민(李敏·81) 여사는 10년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을 지낸 천레이(陳雷·90)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다. 12살에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여 동안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과 함께 당시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인근 브야츠크 마을의 소련군 야영지에서 88특별여단에 편입됐다. 리 여사는 이 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났다. 리 여사는 후에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리 여사는 하얼빈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노전사답게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60년이 넘는 과거사임에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2~45년까지 김일성부부와 활동 리 여사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북한 지도자로 옹립됐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리 여사는 “당시 88여단 내에서 최용건과 김책 등이 김일성보다 상급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투쟁 방향과 진로를 모색하는 내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해방 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88여단의 소련측 책임자가 ‘조선인 가운데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최용건 등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우리보다 젊다.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추대 이유를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문학적 재능 많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88여단 시절 ‘단결무’라는 가무극을 직접 만들어 조선인 부하들과 함께 공연하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리 여사는 “정열적이고 활달했던 김일성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줬으며 문학적 재능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여사는 당시 김일성이 직접 작사했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해….”라는 노래인데 당시 조선인 전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결혼 주례 김일성과의 일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 주례 사건이다. 당시 리 여사는 중국인 천레이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다. 천레이는 자아비판과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된 상태였고 조선인 동지들도 리민의 장래를 위해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가 아닌 ‘혁명적 동지의 결합’이란 김정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일성이 중국인 지도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1943년 섣달 그믐날 리민 부부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날 최광·김옥순 부부도 백년가약을 맺었다. 리민 부부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는 각별한 관계였다.9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통역없이 이들을 단독 접견했다. ●김정일은 전쟁놀이 즐겼던 골목대장 리 여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을 42년 가을로 기억하고 있다.“42년 가을 강보에 싸인 젖먹이 김정일을 처음 봤다. 이후 45년 8월15일까지 김정일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당시 리 여사는 통신대대에 근무, 상관인 최용건을 자주 만났다.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막사에 가면 가끔 어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피부가 검은 데다 키가 작고 총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김정일은 아버지의 큰 모자를 쓰고 목총을 갖고 군대놀이를 즐겨했다. 큰 모자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막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중국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엄마, 아빠’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전해지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파티가 벌어지고 흥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바지를 입기 싫어하던 김정일이 이날만은 스스로 바지를 찾아 입고 또래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94년 7월20일 김일성 주석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리민 부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대는 무례를 범했다.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김 위원장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서였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의 천레이 부부 접견 사진은 이례적으로 노동신문에 공개됐다. 리민 부부는 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만주 항일전사 리민 리 여사의 항일 투쟁은 남한의 역사책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30년대 만주 항일 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조선의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창립했다. 이 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45년 종전 당시 1000여명 가운데 3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리민은 중국인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1로군(동만주),2로군(지린성 동부),3로군(북만주)으로 재편된다. 당시 김일성은 1로군 제2방면 6사장(師長·대대장급)으로 일본군에 의해 동북항일연군이 와해되는 시점인 41년 전후로 상급자들이 대부분 사망,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최용건은 2로군, 김책은 3로군 소속이었지만 김일성보다 나이는 물론 직책도 높았다. 1924년 헤이룽장 오동하에서 태어난 리 여사는 부모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너 헤이룽장 삼강평원에 정착했다.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했고 천레이는 오빠와 절친한 전우였다. 리 여사는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유격대원들의 취사 보조원, 간호원 등 비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리 여사는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7∼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완달산 등지에서 큰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3로군은 기병대가 주력인 일본군에 맞서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의 늪지대로 퇴각하는 유격전술을 폈다. 1938년 여름 완달산 전투에서는 300여명의 부대원 가운데 고작 60여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군인과 개척단 수천명을 동원, 동서남 3면을 포위하고 고립 전술을 폈다. 서서히 좁혀 오는 포위망 속에서 6일간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결국 북쪽 절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상당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리 여사는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가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고 회상했다. 일본군은 30년대 말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앴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런 대로 참았지만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전우들의 배반이 가장 가슴 아팠다. 리 여사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그가 속한 3로군은 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갔다. 천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66∼76년) 당시 반동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실권 장악과 함께 복권됐다. oilman@seoul.co.kr ● 리민 여사는 1924년 중국 헤이룽장성 오동하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942∼1945년 김일성 주석과 부인 김정숙 등 북한 핵심 인사들과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중국인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식 주례를 김일성 주석이 할 정도였다.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렸다가 복권됐으며, 남편 천은 후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10년간 지냈고, 리 여사 역시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설훈 전의원 만난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항일 전사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천레이(陳雷·90)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의 부인이자 정협 부주석을 지낸 리민(李敏·81)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리해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기 위해 찾아온 설훈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항일동북연군에서 10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리 여사는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6·15 공동선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리 여사는 “2002년 6·15선언 2주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도자기’ 2개를 만들어 그 중 하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지만 김대중 선생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동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은 설 전 의원은 “리민 여사의 통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남은 여생 동안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말했다. 리민 여사가 기증한 통일기원 도자기는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oilm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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