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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서울서 독도까지 광복절 행사로 뜨겁다

    광복 63주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가 8·15 광복절을 전후해 전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펼쳐진다. 독도 영유권 마찰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반영하듯, 일제의 폭압 통치로부터 해방을 자축하는 행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 뜨겁다. ●서울시청 대형태극기로 덮는다 서울시는 오는 13일 시청사 본관을 70m×20m 크기의 대형 태극기로 감싸는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고 10일 밝혔다. 시청사에는 2005년과 2006년에도 대형 태극기가 등장했고, 지난해에는 전면을 3만 4000송이의 무궁화 조화가 장식한 바 있다. 올해 태극기는 소형 태극기가 삽입된 투명 페트 소재의 반원구 2만 7000개를 태극 모양 등으로 조합해 만들어진다. 같은 날 서대문 독립문 인근에는 실제 독립문과 동일한 크기의 조형물 ‘태극 독립문’이 세워진다.17일까지는 서울광장과 서대문 독립공원에 무궁화 꽃으로 한반도 모양을 형상화한 설치미술 작품도 선보인다. 특히 13일 오후 7시에는 서대문 독립공원을 ‘독립운동 성지’로 재조성하는 사업이 첫삽을 뜬다. 총 234억원을 들여 ‘독립광장’을 조성하고 일본식 조경을 전통 조경으로 개선하는 사업이다. 착공식에서는 주민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물놀이, 국악공연이 흥을 돋울 예정이다. 14일 오후 8시 서울광장에서는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교향악단의 전야음악회가 청중 1만 2000여명에게 감동을 준다. 중간에 시청의 대형 태극기가 점등되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계획이다. 서울 19개 자치구에서도 경축음악회, 영화제 등을 마련했다. ●독도 앞바다 대학생 퍼포먼스 경남 김해시의 인제대 총학생회 간부 35명은 12일 울릉도를 정벌했던 신라 이사부 장군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독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들은 선상에서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떠온 바닷물을 독도 앞바다 물과 합치는 합수식을 가진 뒤 일본 정부 앞으로 보내는 항의서한을 낭독한다. 부산보훈청도 15일 정오부터 자전거로 부산 시내를 일주하며 항일운동 기념 시설을 참배하는 ‘나라사랑 자전거 대행진’을 갖는다. 부산에서는 이날 오전 9시 충렬사 참배를 시작으로 10시 광복절 기념식(시민회관),11시 태극기 축제(용두산 공원) 등이 잇따라 열린다. 김해 강원식·서울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민화협 10년…보수·진보 ‘용광로’ 통일운동사 큰 획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 상설협의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다음달 3일 결성 10주년을 맞는다. 다음달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과 후원의날 행사를 함께 열어 10주년을 자축하기로 했다. 또 10월에는 ‘한반도 평화와 국제협력’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21∼23일)를 열고,‘북한 나무심기 지원을 위한 원코리아 마라톤대회(26일)’도 개최한다. 민화협측은 7일 “통일에 대한 견해 차이로 대립했던 각계 각층이 함께 어울리고, 소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민화협 결성은 통일운동사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고 자평했다. 민화협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통일운동을 하는 200여개의 정당, 종교,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결성됐다. 당시 통일부는 8·15행사를 앞두고 경실련통일협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18개 단체로 구성된 ‘민족의 화해·평화·통일을 위한 대축전 남측본부’에 정당과 보수단체가 포함돼 있지 않은 점을 들어 진보와 보수단체간 간담회를 주선해 양측이 참여하는 통일운동 최대 규모의 민화협이 출범하게 됐다. 민화협은 보수든 진보든 이념에 상관없이 수긍할 수 있도록 ‘민족화해의 추구’,‘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등 3가지를 활동목표로 내세웠다. 민화협은 지금까지 정부와는 별개로, 정부가 하기 힘든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일조해 왔다. 보수와 진보단체가 모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둘러싼 남남갈등도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종교플러스] 日서 태고종 영산재 시연

    태고종 봉원사 영산재보존회(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산하 옥천범음대는 다음달 20∼24일 일본 오사카문화원 대극장에서 불교의식 영산재를 시연한다. 오사카 한국문화원 초청으로 마련된 행사에선 마일운 스님을 비롯한 옥천범음대 영산재범음단 30명이 ‘깨침의 소리’와 ‘수행자의 하루’를 주제로 시연한다.
  • 日언론 “‘독도는 우리땅’ 우리도 만들자” 주장

    日언론 “‘독도는 우리땅’ 우리도 만들자” 주장

    “교과서보다 노래와 춤이 먼저다.” 일본 언론이 “우리도 ‘독도는 우리 땅’ 같은 노래와 춤을 만들자.”는 이색 주장을 펼쳐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24일자 ‘하야이하나시가’(早い話が)라는 칼럼을 통해 “한국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노래 때문”이라며 “일본정부는 교과서보다 독도를 소재로 한 노래와 춤을 먼저 만들어라.”라고 촉구했다. “또 다시 독도문제다.”라고 운을 뗀 칼럼은 “‘한국과 일본 간에 독도를 둘러싼 이견이 있다.’라는 문장 때문에 주일대사가 화를 내며 귀국해버렸다.”며 “어째서 한국인들은 그렇게 흥분할 수 있는가? 어째서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믿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가? 한국 교육과학기술부의 학습지도 해설서가 그토록 훌륭하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한국인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지난 1996년 독도 접안시설 건설을 둘러싼 반일운동 이후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부르며 춤추는 국민노래가 됐다.”고 덧붙였다. 칼럼은 ‘독도는 우리땅’을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라고 평가한 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먼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로 시작하는 1절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총론”이라며 “2절에서는 지리적 지식을 3절에서 특산물에 대한 학습을 그리고 4절에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증명하는 역사지식을 배운다.”고 전했다. 또 “마지막 5절은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 뒤 “각 절의 마지막 구절인 ‘독도는 우리 땅!’은 특히 힘주어 부르는 것이 포인트’라고 밝혔다. 이어 “일본인들은 독도의 경도와 위도 그리고 일본이 내세우는 역사사료는 알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한국인들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 그만”이라고 주장했다. 칼럼은 “아이들에게 독도영유권을 인식시키기 위해 노래와 춤을 공모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면서 “이게 안 된다면 교원채용시험에 영토와 관련된 문제를 1문제씩 출제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교사를 키우라.”라고 주장했다. 또 “한국정부가 교원출제문제에 대해 문의한다면 ‘시험문제는 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 된다.”라고 끝을 맺었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 캡쳐 서울신문 나우뉴스 김철 기자 kibou@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초기 남방불교 수행 체험 오롯이

    초기 남방불교 수행 체험 오롯이

    부처님 당대에 행해졌던 불교 초기 수행법인 위파사나의 실체를 생생한 체험을 통해 수행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소개한 책이 나왔다. 태고종 정명(사진 위·44) 스님이 2006년 3월부터 지난 5월까지 13개월간 미얀마 파아옥 명상센터에서 겪은 몸과 마음의 변화를 전한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처럼’(불교정신문화원 펴냄). 남방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위파사나’를 직접 체험하면서 매일 매일 기록한 ‘남방불교 선방일기’인 셈이다. 정명 스님은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나와 청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드렉셀 대학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은 재원. 굴지의 반도체 관련 대기업에서 17년간 근무하던 중 스님이었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불현듯 생과 사의 의심이 일었다고 한다. 은사인 봉원사 일운(옥천범음대학장) 스님에게 범패를 공부한 뒤 미얀마로 옮겨 파아옥 사야도(큰스님)로부터 남방불교 수행법인 위파사나를 집중적으로 익혔다. 정명 스님은 “한국불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간화선은 사마타(선정삼매)와 궁극적인 실재의 깨침인 지혜를 구분하지 않지만 위파사나는 선정과 지혜를 따로 구분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미얀마 파아옥 명상센터는 부처님 제자들이 불교 경전을 알기 쉽게 풀이해 작성한 논문격인 아비담마와, 남방불교의 정통 수행 매뉴얼인 청정도론에 입각해 수행을 지도하는 남방불교의 대표적 수행처. 정명 스님은 책에서 이곳 명상센터의 경전 공부와 수행을 세밀하게 전달한다. 명상센터에 가게 된 배경부터 첫 명상 자리며 안거 결재에 얽힌 단상은 물론 공양법, 좌선법, 눈을 감는 법 등 수행과정과 그 어려움의 고백이 잔잔하게 풀어진다. 각 장마다 붙인 ‘초기불교의 이해’도 수행의 각 단계를 알기 쉽게 거든다. 정명 스님은 “수행자가 수행체험을 공개하는 것은 주머니 속 재산을 공개하는 것과 같아 내 주머니를 열어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을 꺼린다.”며 “그러나 부처님의 왜곡되지 않은 수행법을 소개하고 이 인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면 이 또한 공덕이 될 것”이라고 책 출간 배경을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동북아 현대사의 블랙박스 만주

    흔히 동북3성(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을 가리키는 중국의 ‘만주’.17세기말 청나라와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 지역은 일제하 항일운동의 본산이자 중국 조선족의 본향이다. 최근엔 한국판 웨스턴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의 무대로도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한석정 등 지음, 소명출판 펴냄)은 지난 수십년간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던 만주를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한다.1998년 창립된 만주학회 회원들이 필자로 나섰다.‘거란과 여진’등 북방민족의 요람으로써의 만주 역사부터 오늘날 탈북자들의 은거지가 된 만주의 현대적 의미까지, 만주의 실체를 살핀 18편의 논문이 실렸다. ‘중국 조선족의 현황’(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만주 이해에 도움을 줄 만한 논문. 개혁·개방 이후 동북3성 조선족의 인구변동, 한국인과 결혼인구 등을 꼼꼼하게 짚어 조선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산업화로 인한 이농현상과 출산율 저하로 1980년대 전체의 40%선을 넘었던 옌볜 조선족 인구는 2000년대 초반 37%으로 떨어졌다.1990년대 ‘한국 바람’으로 한국내 불법 체류자가 6만명선을 넘어서며 조선족 사회는 심각한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만주국과 오키나와의 비교사적 고찰’(임성모 연대 사학과 교수)은 태평양전쟁 당시 ‘대동아공영권´의 중심이었던 괴뢰국 만주국과 2차세계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패권 장악에 필요했던 일본 오키나와가 ‘공식 식민지’가 아니라 ‘간접 지배지’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주장을 편다.‘간도문제의 시대적 변화상,17∼21세기’(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모호한 영토개념 이래 20세기의 간도를 둘러싼 국경문제를 살핀다. 편저자인 한석정(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하 항일 민족운동의 본산이라는 우리 민족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다 보니 만주가 ‘전설의 땅’으로 치부돼 왔다.”며 “항일운동 역사뿐 아니라 가려져 있는 만주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서술의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한족 중심의 중국 민족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만주가 아닌, 베일 속에 가려진 만주의 본모습을 끄집어냈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 별세

    중국과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 조영진 선생이 21일 오후 7시 별세했다.91세. 선생은 191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1935년 원산상업학교 3학년 때 ‘독서회’를 조직, 한글역사서적 및 위인전 등을 탐독하고 비밀리에 토론회를 열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적발돼 퇴학당했다. 1936년 2월 중국에서 한인회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하 항일조직을 결성했으며 1938년 4월 일본대학 부속 제2상업학교에 편입해 동지를 규합하고 지하 항일학생단체인 ‘동경영흥유학생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41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도쿄 물리학교의 본과 수학부에 진학해 유학생 및 교포들과 접촉하며 배일사상 고취 활동을 벌이던 중 일경에 체포됐다. 도쿄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을,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보경(82) 여사와 아들 경삼(경희대 의대 내과교수), 경식(울산의대 영상학과 교수), 딸 경설 등 2남 1녀가 있다. 발인 24일 오전 7시30분, 장지 국립대전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 빈소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02)3010-2230.
  • 역사의 뒤안에 묻힌 여성운동가의 일생

    역사의 뒤안에 묻힌 여성운동가의 일생

    차미리사(車美理士·1879∼1955). 이 낯선 이름은 두 개의 진실을 끌어안고 있다. 대중의 기억에 제대로 편입된 적이 없었던 이름이라는 표피적 진실이 하나이며, 한국 근대공간의 빛과 그림자가 그대로 투사된 이름이라는 실제적 진실이 또 하나이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한 사유로 근·현대 공간을 누빈 여성 사회운동가였고, 교육운동가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삶이 또렷이 발자국을 찍으며 대중 앞으로 걸어 나왔다.‘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란 부제를 단 ‘차미리사 평전’(한상권 지음, 푸른역사 펴냄)은 역사의 기억 저 편에 함몰된 사회운동가의 꼿꼿했던 일생을 치밀하게 복원해낸 책이다. 1879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섭섭이’라 불렸다.17세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이후 그의 삶에는 파동이 멈춘 적이 없었다. 기꺼이 온몸으로 근대화의 세례를 받아들이는 선각자를 자임했다. 사회 개화운동의 현장에는 그래서 늘 그가 있었다.‘미리사’란 이름은 그가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 뜰 무렵, 교회에서 받은 세례명이다. 23세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고학하면서 지독한 열병을 앓은 뒤로는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하는 치명적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았다.34세이던 1912년 미국 유학을 거쳐 귀국한 그가 헌신한 운동은 여성교육 사업.“조선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보다 보통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보통교육론’을 주창했다. 문맹을 떨칠 길이 없는 당시 여성들을 위해 그가 주장한 교육제도 개혁안이었다. 실업교육론을 현실화하는 데 주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굴욕적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기술교육을 통한 경제자립뿐이라는 지론을 실현하는 데 교육운동의 초점을 맞췄다. 그런 그는 ‘잊혀진’ 덕성여대 설립자였다.1920년 전국순회 강연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부인 야학강습소를 열었는데, 그 이름이 근화학원. 지금의 덕성여대 전신이다.1940년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떠난 그의 뒤를 이어 취임한 이가 친일파로 알려진 송금선. 덕성여대 교수인 지은이는 2000년 ‘건학 80주년 기념 덕성여대 뿌리찾기 토론회’를 기점으로 차미리사의 삶에 주목했다. 책은 8년 만의 인물탐구 결실인 셈이다.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이기도 했던 차미리사의 면모를 소환해 내는 데도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배화학당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 넣는 데 전력했던 그다.“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고 유언한, 잊혀진 독립운동가에게 정부는 2002년 뒤늦게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역사의 뒤안에 잠든 여성운동가를 새삼 기억해야 하는 작업에는 뚜렷한 당위가 있다. 지은이는 “과거 민족의 공기(公器)로 기능했던 사학의 제자리 찾기, 친일 잔재 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이라고 출간의미를 밝혔다.1만 8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부동산플러스] 거제 일운면에 국민임대 470가구

    대한주택공사는 경남 거제 일운면 소동리에서 휴먼시아 국민임대 아파트 470가구를 공급한다.29∼51㎡로 이뤄졌다. 임대보증금 및 임대료는 29㎡는 700만원에 6만원,36㎡는 800만원에 8만원,46㎡는 1400만원에 12만원,51㎡는 1700만원에 15만원이다.2009년 6월 입주가 이뤄질 예정이다.(055)682-0251.
  • [부고] 애국지사 이두일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 학생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이두일(李斗一) 선생이 7일 별세했다.94세.제주 태생인 이 선생은 제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3월 한국인 학생들을 억압하던 일본인 교장의 사택을 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그해 10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의 판결을 받고 출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발인은 9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대전묘지 애국지사 3묘역, 빈소는 경기 군포시 수리동 성당. 전화 017-719-0324.
  • [부고]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황장연 선생이 16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5세.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경기공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근무 중이던 1943년 3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려재건당을 조직하고 무기 공급 책임을 맡았다. 황 선생은 이듬해 일본 육군 조병창에서 무기를 밀반출해 상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인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황인기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미국 LA 자택. 발인은 20일 오전 9시(현지시간).LA 글렌데일 공동묘지.
  • [열린세상] 북한,남북 상생협력에 동참해야/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열린세상] 북한,남북 상생협력에 동참해야/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지난 4월부터 대남비난 공세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단순 비난공세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반 이명박 정부 투쟁’을 부추기는 선전선동 움직임조차도 보인다. 북한의 각종 언론매체들의“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한편, 반 괴뢰 투쟁을 더욱 과감히 벌여”나가야 한다는 논조들이 그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부터 ‘반미·자주와 연공·연북’을 주 내용으로 하는 ‘민족대단결’ 공동투쟁을 전개해 왔다.‘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우리 민족끼리’가 ‘민족공조’로 개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7년도 북한 신년공동 사설에서 남과 북, 해외의 “온 겨레가 자주통일의 기치 밑에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6·15 민족공동위원회를 모체로 한 각 계층 통일운동단체들의 연대와 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확대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북한은 ‘민족공조’ 기치하의 공동투쟁을 공공연하게 촉구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북한 당국이 ‘6·15,10·4 선언’ 이행을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이러한 대남 공동투쟁 전술 이행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만약 북한 당국이 남한의 이명박 정부를 겨냥해서 ‘반 이명박 정부 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남한 ‘대결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크나큰 시대착오적인 오판이라 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더 이상 이데올로기 투쟁은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세계사회주의권도 붕괴되었고 사회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몇몇 국가들조차 실용주의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이명박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나 논쟁을 뒤로하고 남북한이 어떻게 하면 ‘상생’할 수 있고 ‘공영’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실용주의적인 남북관계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비핵·개방·3000’은 남북한의 ‘상생·공영’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다. 북한의 핵은 세계와 한반도의 군사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이 분명한 것인 만큼 북한의 핵문제 해결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다지 새로운 것도, 지나친 것도 아니다. 남북한이 ‘상생’하기 위해서는 북한은 핵포기라는 대결단을 내려야 한다. 물론 북한의 핵폐기 과정은 지난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지만 남북한이 ‘상생’을 위한 교류협력노력이 동시에 전개되도록 해나간다는 것이다. ‘상생’의 개념은 남북한 체제를 상호 인정한다는 상호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더 이상의 남북한 체제경쟁이나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이번 정부가 북한의 체제‘개혁’이라는 어휘사용 자제로 북한체제 부정이라는 인상을 최소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남북한이 단순히 ‘상생’ 차원을 넘어서 ‘공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요구된다. 남북한 ‘공영’을 위한 교류협력을 활성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북한의 본격적인 ‘개방’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의 개방은 체제를 부정 또는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교류협력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북한은 남한사회를 진보-보수 또는 친북-반북세력의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대남 체제부정 또는 체제파괴적인 투쟁 유혹에서 벗어나 좀 더 실용적인 관점에서 남북관계 발전노력에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명랑주의자’의 도발적 주장과 꼬집기

    ‘명랑주의자’의 도발적 주장과 꼬집기

    우석훈(41)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명랑주의자’다. 엄숙주의를 멀리하고, 오직 명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글은 여느 학자의 글처럼 먹물티를 풍기는 대신 유머와 위트로 비판 대상을 꼬집는다. 남들이 보지 못한 혹은 소홀히 한 문제의 핵심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짚어낸다. 우 교수가 지난해 펴낸 ‘88만원 세대’(레디앙)는 출간과 동시에 ‘출구 없는 20대’를 규정하는 사회·경제학적 개념으로 보통명사화됐다. 그 자신도 출판계가 가장 눈독 들이는 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가 최근 새 책 두 권을 한꺼번에 내놨다.‘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란 부제의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와 생태미학의 구축을 주창하는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이다. 수십만개의 촛불이 환하게 타오른 10일 저녁, 촛불집회 참가자들로 빽빽한 서울 시청 앞 도로에서 우 교수를 만났다. 그는 자칭 ‘C급 경제학자’다.“A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만들고,B급 경제학자가 이론을 수정할 때,C급 경제학자는 이론을 적용한다. 곧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C급 경제학자의 삶을 ‘액션 대로망’이라고 정의한다.“늘 조금씩 하던 액션을 필요에 따라 세게 하는 것”이다. 두 권의 책도 각각 ‘행동하는 평화경제학’과 ‘행동하는 생태경제학’이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한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도발적 주장을 담았다. 제국주의이되 ‘촌놈들의 제국주의’다. 우 교수는 “식민지를 만들어낼 능력도, 식민지 경영의 경험도 없으면서 생존의 돌파구는 식민지가 요구되는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한국 자본주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전환을 보여주는 변곡점으로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남북 경협을 꼽는다. 우 교수에 따르면, 이라크 파병은 석유확보를 목표로 자원전쟁에 동참한 것이자 국익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한 제국주의적 현상이다. 경제영토의 확장을 꾀하는 한·미 FTA도 시장과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적 특징을 노정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남북간 평화의 가교로 평가돼온 경협을 제국주의로 보는 시각도 논쟁적이다. 우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경제적 의미로 식민지에 가까워진 게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 입장 차이는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전환시킬 때 정부를 그대로 두고 식민지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정권을 무너뜨리고 일종의 총독부처럼 직접 관리할 것인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햇볕정책 지지자들 내에서도 간간이 제기돼온 지적이나 우 교수처럼 대놓고 날을 세우기엔 민감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진보진영 원로들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과 전쟁을 해서라도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소설가 조정래의 주장과 한국 문화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 전망하는 시인 김지하의 문명담론 또한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팽창주의와 묘하게 공명한다는 점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통일운동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미학적 전환을 말하는 책이다.‘직선’은 구불구불한 강들을 곧게 펴는 대운하 공사를 상징한다. 책은 개발주의적 건설미학이 팽배한 한국에서 생태미학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한강물을 억지로 흘려보내야 하는 청계천은 ‘거대한 어항’에 불과하지만, 청계천을 어항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대중의 미학을 거스르는 생태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학은 철학의 분파로 출발했다. 미학과 철학은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나, 오늘의 한국에서 생태미학은 사유를 넘어 행동을 필요로 한다. 우 교수는 “한국적 생태미학은 ‘촛불’ 속에서 진화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촛불이 수많은 촛불들 속으로 흘러들었다. 글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민족종교 항일운동 재평가한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맞서 저항운동을 벌였던 나라 안팎의 개인과 단체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 가운데 민족종교의 항일운동은 나라의 독립 때까지 치열하게 이어졌지만 그 실상은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저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회장 한중환)가 26일 오후2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서 여는 제5회 ‘민족종교 국제학술대회’는 이같은 점에 착안, 민족종교의 항일운동사를 제자리매김하자는 뜻을 모아 마련한 자리이다. 학술대회에선 일제강점기 각 민족종교의 계통별 항일운동(이경우 한국신종교학회 회장)을 짚고, 북간도에서의 청림교의 반일운동을 자세히 부각(허영길 옌볜박물관 근현대사연구실장)시킨다.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에 이어졌던 비밀결사의 종류와 항일운동을 지원했던 군자금 모금운동(성주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발표도 있을 예정이다. 특히 3·1운동 1년 전인 1918년(무오년) 만주에서 민족종교 대종교가 자체적으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선언 추진 배경도 처음 공개된다. 여기에 일제에 대항해 2만여 명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힌 민족종교 청림교의 활약상도 구체적으로 발표된다. 김홍철 원광대 명예교수는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항일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됐지만 그동안 각 종교의 입장 차이와 적극적인 연구 소홀로 평가절하됐다.”며 “무저항 선언운동을 비롯해 교육운동, 산업활동, 혁신·계몽운동 등 종교별로 전개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실상을 파악해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류재혁 선생 별세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류재혁 선생이 27일 별세했다.97세. 충북 옥천 태생인 류 선생은 1939년 7월 일본에 부응하는 기사를 게재한 친일 관료 최병협 옥천군수에게 협박문을 제작해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1년5개월 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지난해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발인은 29일 오전 9시30분,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3묘역, 빈소는 대전 을지병원 (010)7522-8298.
  • [부고] 애국지사 백옥순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백옥순 선생 별세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백옥순 선생이 24일 별세했다.95세.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백 선생은 무장투쟁을 위해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자금모금 및 연락체계 구축 등의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백 선생은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남편인 고(故) 김해성 선생도 광복군에 입대해 중앙전시간부훈련의 ‘한청반(韓靑班)’을 수료했다.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손자 김창인, 김창호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보훈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6일 오전 8시.011-441-4028(김창인).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면 썩게 되죠”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면 썩게 되죠”

    신자 5만명, 전체 사제 수 230명의 작은 교회 대한성공회. 많은 일반인들에겐 그저 ‘영국 국교’쯤으로 알려진 소수종교이지만 이 땅에서 1890년부터 선교를 시작해 옹골찬 신앙을 이어 개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유연한 교단 운영과는 달리 구성원들의 ‘줏대있는 소신’으로 인해 작지만 강한 교회로 인상지어지는 대한성공회. 내년 1월 박경조 주교의 뒤를 이어 대한성공회 제5대 서울교구장으로 착좌하는 김근상(56) 신부는 어찌보면 성공회에서 가장 ‘성공회적인 사제’중 한 명이랄 수 있다. 어느 자리에서나 분방하게 속말을 뱉으면서도 남의 말을 잘 듣는, 아주 유연하고 강한 신부이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처럼 진짜 신앙의 의미는 뻔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서울교구장 착좌에 앞서 22일 주교 서품을 받는 김 신부는 13일 기자들과 만나 “공부도 못했고, 품성이 썩 고운 것도 아닌데 교구장으로 뽑힌 것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함께 잘 어울릴 사람이 누구인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운동권·베이시스트·연극배우…‘괴짜´ 신부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결탁할 때 빠르게 부패한다.”는 김 신부는 그러나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키듯 잘나지 못한 이 사람에게 성공회를 지키는 큰 소임이 주어졌다.”면서 뼈있는 말을 이어갔다. “성공회가 500여년간 변함없이 가져온 큰 미덕은 서둘지 않고 민주적 절차를 거쳐 합의점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제가 맡은 교구장은 바로 이 미덕을 지켜 교회 안팎의 갈등과 대립을 풀고 일치시키는 소임이겠지요.” 법으로 강제하는 공동체가 아닌, 자발적 신앙으로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전형이라고 성공회를 설명하는 김 신부. 그는 극우니 극좌니 하는 양단의 분별이 아니라 여러 색깔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빚는 무지개처럼 느슨한 일체감으로 어우러지는 성공회의 신앙 전통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서강대 화학과를 3학년 1학기에 중퇴하고 가톨릭대 신학부를 나와 성공회 성미가엘신학원 과정을 마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재학시절 이른바 운동권에도 몸담았고 밴드에 가입해 베이스 기타를 치는가 하면 연극배우와 연출가로도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툭툭 쏟아내는 말이며 짓는 몸짓이 어디 한군데에 맺히지 않은 채 자유롭다. 별명 그대로 ‘괴짜’스럽다. ●아버지는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 외할아버지가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를 지낸 뒤 6·25전쟁 중 평양에서 교회를 홀로 지키다 순교한 이원창 신부. 아버지는 성공회 서울성당 주임사제를 지낸 김태순 신부. 신학대에 진학할 뜻을 비치자 어머니가 “아버지와 남편을 이어 어떤 여자를 또 데려다 더 고생시키려드느냐.”며 다림질하던 다리미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장과 ‘온겨레 손잡기 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과 북한돕기에도 앞장선 활동가. 그 누구에 못지않게 북한동포를 향한 연민이 크지만 “아프리카의 불쌍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손잡고 도와야 할 인간들이기 때문에 돕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아주 싫어한단다. ●“후배 사제들 고통의 땅으로 보낼 것” “불교며 기독교 사람들이 지탄받는 데 대해 종교인의 하나인 성공회 사제로서 공동 책임을 느낀다.”는 김 신부. 종교인, 신앙인으로 손가락질받지 않기 위해 동료 사제와 교우들이 절실하게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00명 중 89명이 끼니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오지의 사람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성직자들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을 받고 뛰어야 합니다. 후배 사제들을 라오스며 캄보디아 미얀마 등 고통의 땅에 보내 도전의식을 키울 것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Local] 국민임대주택 5700가구 공급

    올해 경남도내 8개 지구에 국민임대주택 5700여가구가 공급된다.25일 경남도에 따르면 다음 달부터 10월까지 주택공사가 도내에 공급하는 주택은 모두 5726가구에 이른다. 지구별로는 ▲김해 율하 2024가구 ▲양산 대석 961가구 ▲거제 일운 470가구 ▲고성 동외 410가구 ▲사천 용강 496가구 ▲밀양 삼문 861가구 ▲창원 도계 504 가구 등이다. 규모는 전용 면적 29∼59㎡까지 7개. 신청 자격은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257만 2800원 이하이고, 토지 5000만원, 자동차 2200만원 이하의 요건을 갖춘 무주택 가구주이다.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스탈린 치하때 정치 희생 한인 인명록 8년만에 완간

    옛소련 시절 스탈린 치하에서 처형된 한인 인명록 전 10권이 완간됐다. 항일운동가의 딸 스베틀라나 구(70)가 지난 1995년 자료 수집에 나선 지 13년 만이자 2000년 1권이 나온 지 8년 만이다.‘소련에서 정치탄압 희생자들-고려인(1934∼1938)’이란 제목의 이 러시아판 책에는 스탈린 압제시절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된 총 6500여명의 이름이 처형 일자, 장소 등과 함께 실렸다.1937년 연해주 지역 고려인 17만 1000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될 무렵 희생된 인사들은 물론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정치적으로 희생된 한인들이 망라돼 있다. 관련 사진들과 일부 수인들이 처형되기 전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 등도 수록됐다. 스베틀라나는 러시아 민간단체와 러시아 역사도서관에서 자료 대조작업을 한 뒤 컴퓨터에 일일이 입력하는 과정을 거쳐 이 책을 완성했다.모스크바 연합뉴스
  •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20&30]경찰 체포전담반 추진… 다시 떠오르는 ‘백골단의 추억’

    봄 기운이 완연한 요즘,30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는 ‘벚꽃 구경’과 함께 ‘백골단’이 단골 메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불법 시위 엄단 조치의 하나로 발표한 ‘체포 전담반’이 90년대 중반까지 시위 현장에서 흰색 헬멧을 쓰고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던 ‘백골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곤 했던 대학가 시위와 ‘백골단’을 둘러싼 30대들의 추억을 들어봤다. 90학번인 조모(37)씨는 봄만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린다. 실제 상처가 남아 있다기보단 그저 화인처럼 남아 있는 곤봉 폭행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1학년이던 90년은 수업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다. 매일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진압에 픽픽 쓰러지고, 농민들은 시장 개방에 비쩍 말라갔다. 책을 든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절 조씨에게 ‘백골단(白骨團)’은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1991년 봄.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학과 동료를 위해 법원 마당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 앞에 전·의경들이 서 있었고, 경찰 기동대장은 해산을 요구했다.“평화시위를 해산할 이유가 없다.”고 호소한 지 10여분 뒤. 청재킷과 흰 운동화, 몽둥이를 든 백골단이 전·의경 머리 위로 날아오르듯 확 튀어나오더니 시위대를 마구 팼다.“몸집이 참 큰 사람들이었죠. 그저 공포였습니다. 철거예정지에 가면 가끔 조폭들과 연계해 나타나기도 했죠. 대학생들이 왜 정치적인 사건에 개입하냐고 말들 많지만, 배우는 학생들이 주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게 21세기가 원하는 협동심과 리더십을 공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죠.” 직장인 이모(36)씨도 봄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벚꽃놀이 갈 생각에 설레는 게 아니라 대학 새내기 시절인 91년 봄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학교 앞 집회에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매일 집회가 계속 됐죠.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 굉음과 강의실까지 스며드는 최루가스가 절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집회가 시작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강씨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생 김귀정씨도 을지로 골목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숨졌다. 이후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매일 대규모 집회가 서울시청 주변에서 열렸다.“서울시청 광장을 놓고 백골단·전경과 매일 싸웠죠.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꼭 서울시청 광장만 고집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9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청바지·청재킷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명동, 시청, 종로, 을지로 거리에서 숨바꼭질을 계속했다.“백골단은 전·의경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보유했죠. 한마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경찰이 바로 백골단이었습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은 전·의경은 그저 특정 장소를 지키는 일에 주력했지만, 백골단은 검거가 목적이었죠. 백골단에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뛰었던지….” 최근 경찰이 체포 전담반을 꾸린다고 하자 이씨는 가슴이 벌렁거린다.“지금이 대체 어떤 때입니까. 진짜 과거의 백골단을 다시 만든다는 얘기는 아니겠죠?” ●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 통일운동가 황선(34·여)씨도 씁쓸한 추억담을 털어놨다.92학번인 황씨는 같이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백골단에 의해 숨지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참 많이 닦아냈다고 돌아본다.“87년 민주화 이후에 집회시위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골단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죠. 당연히 집회 참가자들은 더욱 분개했고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운동가 안진걸(37)씨도 백골단에 대한 ‘추억’ 아닌 ‘추억’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안씨는 백골단이 단순히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포의 존재’였다고 말한다.“무작정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백골단이 누가 시위대고 누가 시민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몽둥이를 휘두르는 거죠. 이유도 모른 채 다치는 시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군데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96학번인 대학생 황모(31)씨는 백골단의 끝물을 맛봤다.97년 노동절 집회 때 한양대 근처에서 당한 토끼몰이식 폭행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집회는 80년대와는 달리 선배의 강압 없이, 자기 생각대로 나가든 말든 결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경찰은 96년 있었던 한총련 집회 뒤 또다시 강경 진압을 남발했다. 집회에 갔다가 여자 후배 한 명과 함께 백골단에 쫓겼고 여자 후배를 멀리 피신시킨 뒤 자신만 집중 폭행을 당했다.“백골단은 시위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생겼던 조직입니다. 해외에도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리는 경찰들이 있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방어선을 유지하다 시위대가 흥분해 주변 시민을 위협하면 그제서야 곤봉을 듭니다. 무조건적인 체포와 폭력진압을 위주로 하는 백골단과는 성격이 다르죠.” 중학교 교사가 된 96학번 이모(31·여)씨는 같은 대학, 같은 학번 노수석씨를 기억한다.96년 초 새내기였던 이씨는 선배들의 권유로 등록금 투쟁에 나섰다. 이씨는 “당시에도 등록금은 치솟고 있었고, 신입생 때는 무엇이든 참여하고픈 생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남대문에 다다르자 ‘등록금 투쟁’ 구호는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최루탄이 터졌다. 이씨는 남자 동기의 손을 잡고 서울역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백골단이다. 남대문엔 골목이 많다. 큰길로 뛰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었다.“대부분 서울역으로 뛰었죠. 하지만 나중에 들으니 노수석씨를 비롯한 몇몇이 골목으로 뛰었다는 거예요. 골목은 목격자도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데….”결국 노씨는 백골단에 폭행당해 숨진 채 발견됐다.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유모(32)씨는 백골단하면 촌스러운 청재킷이 떠오른다.96년 여름, 신분증 검사도 떠오른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측은했다고 말했다.“연세대에서 8월 사태가 있었죠. 그리고 교문을 들어갈 때면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어요. 당시에는 정말 무서웠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서 시킨다고 폭력까지 휘둘렀던 백골단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백골단으로 불리는게 너무 싫었어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백골단’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던 전남지방청 소속 한모(44) 경사에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누가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당시엔 초임 경찰관 가운데 덩치가 좋고 날렵한 사람들이 대거 검거전담반으로 차출됐죠. 백골단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진압복도 입지 않은 채 대학생들이 휘두르는 쇠파이를 막느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더이상 그런 아픔은 없어야 겠죠.” 회사원 이모(32)씨는 98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그가 기억하는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는 ‘최후의 수단’이다.“의경 입장에서는 하얀 헬멧과 청재킷만 봐도 힘이 났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대학생들 앞에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백골단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씨에게 대학 시절 백골단은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지만, 전·의경 복무 시절 시위 현장에서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갑자기 시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싫어졌어요. 어떤 생각도 뛰어넘은 평화주의자가 되고 싶었죠.” 사건팀 nomad@seoul.co.kr ■ 백골단을 아시나요? “백골단이요? 알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백골부대를 모르는 사람 있나요.” 백골단이 한창 활동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벌써 어엿한 대학생과 직장인이 됐다. 그들에게 백골단은 그저 생소한 이름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회사원 김모(25·여)씨는 백골단을 백골부대의 다른 이름으로 알았다.“백골단, 유명한 부대잖아요. 여자인 저도 아는 걸요. 해골 부대 마크 있고…. 철원에 있잖아요. 백마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 아닌가요.” 백골단은 80∼90년대 활동했던 사복 시위 진압대라고 알려주자 김씨는 몹시 당황했다.“그런 진압대가 있었나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그 당시 유치원생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의 일부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 부끄럽네요. 인터넷에서 좀 찾아봐야겠어요.” 새내기 대학생 정모(19)씨도 백골단을 부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글쎄요. 왠지 군대쪽에 관련된 거 같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백골단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아직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돼 잘 모르겠네요.” 정씨는 기자로부터 백골단의 의미를 알게 되자 되레 의아해했다.“정말 그런게 있었나요. 진짜 조선시대 이야기 같습니다. 당당하게 경찰복을 입고 진압하지 왜 치사하게 사복을 입고 진압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직장인 최모(26)씨도 백골단은 금시초문이었다. 최씨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화려한휴가’를 본 뒤 관련 책 등을 읽어봤지만 백골단은 난생 처음 듣는 단어였다. “사복경찰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들이 백골단이란 이름으로 움직인 조직원들인지는 몰랐습니다. 고작 20여년밖에 안 된 일인데 정부가 교묘히 국민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나네요.”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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