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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1917년 최초의 신문 1면 소설 한국에서 근대 백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무정’이다. 26살의 청년 이광수는 생애 두 번째 일본 유학을 하던 1917년, 조국의 ‘매일신보’에 자신의 원고를 보냈다. 바야흐로 을사조약 후 12년이 지났고, 삼일운동을 2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새해 벽두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대 독서대중을 쥐락펴락하며 그해 6월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된다. 최초의 신문 1면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일일연속극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광수는 일약 조선의 문사이자 조선의 스승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정’은 해방 이후에도 줄기차게 간행되어 그 판본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05년에는 일어로, 2006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과연 이 작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작품의 주인공인 일본 유학생 출신 이형식의 속물근성, 그를 중심으로 기생 박영채와 여학생 김선형이 만드는 애정의 삼각관계, 폐쇄적 공간 안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동성애 코드, 공원 데이트와 고백에 이르는 신식 자유연애의 문법, 청나라를 신봉하던 박진사와 그 딸의 퇴행적 삶, 오로지 미국만 외쳐대는 얼개화꾼 목사의 허영까지, ‘무정’은 그 자체로 전통과 근대를 넘나드는 일상의 박물지였다. 독자들은 당장이라도 경성과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주인공들의 행동과 말솜씨에 열광했다. 그러나 ‘무정’은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게 된 식민지의 현실 안에서 지사와 학생들은 우왕좌왕했다. ‘난세(世)의 시대,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하나?’ 와세다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광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이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무정’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명하다. 청년들이여 무정하라! 과연 무엇에 대해? 또 어떻게? ‘무정’을 관통하는 것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이다.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버린 첫사랑 영채. 그리고 이제 막 ABC 받아쓰기를 시작했지만 반드시 미국 대학 졸업생과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는 속물 선형. 영채는 낡았고, 선형은 타락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두 여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형식은 선형의 집안이 밀어줄 학력과 금력을 원했지만, 보잘 것 없는 고아였던 자신을 돌봐준 영채 가족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봉건적 인습으로 얽힌 아내를 버릴 수도 없고, 자유연애로 사랑을 키운 엘리트 애인을 어찌하지도 못하는 조선의 ‘찌질남’! 그들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형식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무정’에는 사랑과 출세의 화신인 형식이 무정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대목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살하러 평양에 간 영채를 형식이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돌아오면서다. 형식에게는 순결을 잃고 평양으로 도망친 영채의 죽음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불결한 과거와는 굳이 손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형식은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며 선형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1917년의 독자들은 영채를 자살시키지 말아달라고 떼를 쓰는 투서를 연일 신문사로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독자들은 무정한 형식과 무정한 사회를 비난했다. 두 번째 변신이 이루어지는 건 삼랑진 수해의 국면에서다. 살아 돌아온 영채는 자신을 구해준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형식과 선형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형식, 선형, 영채, 세 사람은 운명처럼(!) 조우한다. 허나, 이 돌발적 조우 때문에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의를 완전히 잃게 된다. 무정했던 세상을 핑계로 영채에게 등을 돌렸던 형식이 다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선형은 난데없는 영채의 등장으로 비로소 질투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고, 형식의 무정함이 야속했던 영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삼랑진에 엄청난 수해가 닥친다. 강물 위로 돼지가 떠내려가고 , 곧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는 산모는 물 위에서 정신을 잃을 찰나였다. 이를 본 형식은 갑자기 영채와 선형에 대한 사랑이 사소하게 생각되고, 정신없이 수해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는 사명감에 몸서리치면서 자신의 미래를 재정립하게 된다. 영채와 선형의 연인(lover)이 아니라 민족의 스승, 민족의 지사이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수해의 폭력은 순식간에 형식의 사적 열정을 쓸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날 형식은 결국 기차 안 젊은 예술가들과 정치인들을 독려해 수해 복구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에게 감화된 영채와 선형은 서로 화해하고 각자의 길을 축복한다. 작품을 관통하던 세 남녀의 각종 정념이 수해와 함께 모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세 사람은 사랑도 미움도 없는 동지애를 느끼며 ‘조선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민족을 향해서는 달콤하게, 자신의 연인에게는 살벌하게! 근대적 문명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조국과 민족의 운명부터 생각할지어다! 이것이 ‘무정’의 무정하고도 숭고한 결말이다. ●민족지사여 무정한 세상을 살라! 삼랑진 수해 앞에서 보이는 이형식의 돌연한 결단과 확신에 찬 행동은 지금 읽어도 강렬하다. 근대적 개인, 개성과 자율을 자랑하는 독아적(獨我的) 주체들이 사회를 장악한 시대에 이처럼 민족을 생각하는 헌신적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이라면 마땅히 대의를 위해, 역사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백년을 관통한 ‘무정’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형식을 향한 사랑 대신에 민족애를 거머쥐게 된 선형은 행복할까? 자신을 배신한 형식이 조선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채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정말로 형식은 여인에 대한 육체적 욕망을 다 버리고 계속 계몽운동만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민족 지사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까? ‘무정’의 주인공들은 끝내 가난한 고향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들처럼 방황하게 될 자식도 낳지 않았다. ‘무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춘의 에너지, 그 모든 의욕을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흡수했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줄기찬 의심, 미래를 향한 당돌함, 자신의 맨몸에만 기대는 패기! 이 모든 방황이 조선을 위할 때에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뜨겁던 청춘은 실종되었다. 각양각색의 청년들은 사라지고, 민족지사만 남게 되었다. 무정한 세상을 무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만 살게 된 것이다. 오선민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매국경축가를 아시나요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매국경축가를 아시나요

    ‘경축하네 경축하네/이천만 국민 다 죽어도 나혼자 살면 제일이네/안 입고 안 먹을리있나 돈과 비단은 안 챙겼겠나/고대광실 좋은 집에 예쁜 여자와 즐기고/금으로 지은 옷, 옥으로 만든 음식 먹으며 내 몸이 가장 중요하니/국민은 무슨 소용인가(慶祝일세 慶祝일세/이천만生靈 다 죽어도 唯我獨生 제일일세/無依無食할리있나 無無帛하단말가/고대광실 好家舍에 絶代佳人 行하고/依玉食 自取하니 身外無物이라/국민은 何用인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1월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에 실린 ‘매국경축가(賣國慶祝歌)’의 일부이다. ‘나라 팔아먹은 것’을 ‘경축’한다는 반어법으로 통렬히 비판한 이 풍자가사의 주인공은 짐작처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넘기는 을사늑약에 찬성한 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이다. 신보는 ‘매국경축가’를 시작으로 1910년 8월28일 일제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일 풍자가사를 게재했다. 특히 1909년 11월17일부터는 아예 시사만평의 역할을 하는 풍자가사를 싣는 ‘사회등(社會燈)’이란 고정란을 만들었다. 신보의 풍자가사는 엄혹한 시절 침략자와 그에 동조하는 자들을 문학의 형식을 빌어 참아내기 힘든 수준의 독설과 야유, 냉소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사회등’을 비롯한 신보의 항일 풍자가사는 단재 신채호가 직접 참여하여 제작하는 등 그 형성 전개의 주인공이라는 국문학계의 연구 성과도 있다. 단재는 몸담고 있던 황성신문이 을사늑약 체결 직후 정간된 직후 신보로 옮겼고, 1906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1910년 5월까지 주필로 활약했다. 따라서 작자가 ‘매국대신’으로 되어있는 ‘매국경축가’도 단재가 구상부터 집필, 게재까지 이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보는 1907년 7월부터 9월 사이에는 민요를 바탕으로 한 풍자가사 23편을 싣는다. ‘교육을 하자니 할 수 있나/벼슬을 하자니 할 수 있나/…오적·칠적 십이인이/한국을 망하게 하였으니/동상세워 기념하세/좋구나 매화로다’라는 ‘매화타령’ 역시 ‘매국경축가’에 못지않은 반어법으로 국운이 쇠잔해감을 안타까워하며 매국노들을 질타했다. 신보의 풍자가사는 ‘사회등’의 이름으로 나간 것만 610편이다. ‘매국경축가’와 민요풍의 풍자가사 등 이전 것까지 합치면 모두 634편에 이른다. ‘사회등’을 비롯해 신보에 실린 방대한 분량의 풍자가사를 ▲부정적인 행태를 보여준 인물의 군상을 종류별로 한데 모아 비판하는 유형비판기와 ▲직접 이름을 거론하여 비판하는 실명비판기로 나누어 분석한 권오만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1908년 1월24일자에는 ‘칠협약에 얻은 공명/정부수석 높였으니/…/이 술 한 잔 잡으시면 만고죄인 되시리다’는 ‘유하일곡(流下一曲)’이 실렸다. 기생이 대신들의 만찬에 동원되어 술을 따르면서 부르는 권주가의 형식으로, 대신들을 뭉뚱그려 욕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명으로 대신들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칠협약’이란 ‘대한제국은 한국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1907년의 정미7조약을 말한다. 그러나 1909년 4월18일자에는 한일병탄 직후 일제로부터 공로자로 인정받아 자작 작위에 은사금까지 챙겨 조선 최고의 부호가 된 ‘망국대부 민영휘’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또 당대의 세도가로 군림하던 송병준은 요리접시나 돈냥을 받고 벼슬을 팔아먹으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꼬리치는 추악한 매국노로 그려졌다. 권 교수는 “의병전쟁이 아직 곳곳에서 계속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던 1907~08년에는 부정적인 인물에게도 개과천선을 권고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국권 회복에 대한 기대가 절망으로 바뀐 1909년부터는 치유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실명으로 상처 입히고 벌주고 파괴하는 거친 풍자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설명했다. 서동철 부국장 dcsuh@seoul.co.kr
  • [사설] 한상렬 목사에게 국법의 엄중함 보여야

    무단으로 방북했던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한상렬 목사가 어제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한 목사는 70일 동안 북한에 체류하며 우리 정부를 비난했다. 지난 15일 판문점을 통해 내려오겠다고 했다가 그 전날 북한 조선적십자회를 통해 한 차례 일정을 연기했다. 그의 귀환으로 우리 사회가 다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당국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선 그를 즉각 체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단체들은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북한으로 추방하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진보단체는 구속 수사를 반대하고 있다. 한 목사는 자신의 모든 활동이 민족 통일을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국법을 무시한 그의 행위를 소영웅주의에 의한 불법 행위로 규정한다. 절대다수가 관용을 베풀지 말고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도 진보단체는 한 목사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이념 문제로 인해 극단적으로 갈라진 모습을 보여 안타깝다. 이래선 안 된다. 한 목사 귀환이 남남갈등의 새로운 불씨가 되면 곤란하다. 광복 65년이 지났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더 이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면 안 된다. 한 목사는 2008년 촛불집회 사건 때도 구속 기소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었다. 그가 상임고문으로 있는 한국진보연대는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해 왔다. 그의 이번 방북도 이런 활동들의 연장선인 것이다. 한 목사는 불법방북이 통일을 위한 열정이라고 하지만 당국은 유사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 추후라도 관용 조치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 목사 사건 때문에 공안정국으로 회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통일은 중요하다. 그래도 통일운동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한다. 통일운동과 불법 이적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국가는 팔짱낀 채 후손이 증거 입증하라니…”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국가는 팔짱낀 채 후손이 증거 입증하라니…”

    ‘후손들이 어디 한 번 입증해 보세요.’ 제주에 사는 임정범(55·성산고 교사)씨는 광복절만 다가오면 속이 터진다. 임씨는 백부인 임도현씨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행적을 8년째 나홀로 추적 중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찾아낸 백부의 자료들을 제시하며 2005년부터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 독립유공 공훈 심사를 요청했지만 ‘독립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국가보훈처 통보에 허탈감에 빠져 있다. 임씨에 따르면 백부는 1931년 일본으로 가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한 뒤,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 중국군 장교로 임관해 중·일 전쟁에 참전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임씨는 제주 4·3사건 당시 불타 버린 집에서 할머니가 건져낸 이 같은 행적 등을 담은 백부의 자필기록과 비행기로 일본을 탈출했던 기록이 담긴 1936년 조선총독부 재판기록 등을 근거로 2005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공훈심사를 신청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가신 백부는 직계 가족이 없어 누군가 국가의 보훈 혜택을 받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후손으로서 백부의 명예를 찾아 드린다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증거자료 미비’를 이유로 1차 심사에서 탈락했다. 이후 임씨는 백부가 남긴 자필 기록 등을 근거로 나홀로 기나긴 일제 강점기 당시 백부의 행적 추적과 자료 찾기에 매달렸다. 일본을 찾아가는 등 노력 끝에 2008년 고향으로 돌아온 백부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일본 경찰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는 내용의 1938년 일본 경시청 비밀문서를 찾아냈다. 2006년에는 중국도 직접 찾아가 백부가 일본 탈출 후 중국에서 다녔다는 비행학교 행적 등을 추적했지만 낯선 땅 중국에서 나홀로 자료를 찾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2007년 임씨는 중국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류저우 항공항교에서 근무하던 백부로 추정되는 당시 사진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후손들이 어느 정도 근거를 제시하면 추가 자료 발굴에 백방으로 나서야 하는 게 국가의 기본 책무가 아닌가요.” 백부의 당시 행적 등을 알고 있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 조사마저 국가는 외면했다고 한다. 모든 입증 책임은 철저하게 후손인 임씨의 몫이었다. 임씨는 “독립유공자 선정은 객관적인 근거자료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입증 책임을 유족 등 후손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국가가 기본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독립정신, 타인 배려로 승화해야”

    “독립정신, 타인 배려로 승화해야”

    “자기 희생정신은 일제 강점하에서도 필요했지만 이제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으로 승화돼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역사를 남의 얘기로 받아들이는 게 안타깝죠.”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광복절을 맞아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를 일으킨 의혈단 김상옥 의사의 조카인 김창수(78)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명예교수를 13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역사가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특히 근현대사는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담했던 일제강점기를 잊지 말고 이해의 폭을 넓혀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한 것에 대해 김 교수는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사과가 사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실제 행동으로 자신이 한 말을 책임져야 한다.”면서 “미반환 문화재를 반환하는 것은 물론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이 없다면 그냥 말에 그치는 것 아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처우 문제에 대해서는 “친일 후손들은 친일로 말미암아 얻은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귀국도 못한 채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면서도 “국가보훈처가 이들을 찾아도 기록이 없어 지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이뤄져야 할 이유”라고 말했다. 친일문제 청산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에 대한 평가는 정확히 하되 미래를 내다보고 국가 발전을 위해 합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1996년 정년퇴직,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은 김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최근까지 아홉 차례 한·일 역사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을 주도했다. 그는 “일본학자 중에는 도쿄대 와다하루키 같은 양심적인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활발한 학술교류를 통해 친분도 쌓고 서로 이해를 넓혀 나가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에 대해 보다 사실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후배 사학자들에 대해 “‘침략’이라고 막연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침략이라고 하려고 해도, 침략의 실상을 나타낼 수 있는 더 철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당숙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항일운동 탄압의 상징 같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혈혈단신 일경들과 시가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서울 효제동 시가전에서 15명의 일경을 쓰러뜨리고 마지막 남은 총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에게 잡히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의혈단의 강령에 따른 것이다. 김 의사의 의거 이후 가족들은 직장을 잃고 일제를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직계는 물론 김 교수의 가족들도 수난을 당했다. 김 교수도 일제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전학만 다섯 번 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보석같은 新휴양지 ‘정읍’, 다문화 체험지로 각광

    보석같은 新휴양지 ‘정읍’, 다문화 체험지로 각광

    휴가철을 맞아 어디로 떠나야 할 지 직장인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옛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전북 정읍시가 새로운 휴향지로 각광받고 있다.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역사의 고장이자 우도농악의 발생지, 아름다운 내장산을 품고 있는 정읍은 아직 잘 아려지지 않았던 문화 관광지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정읍시는 지역내 문화재 발굴과 보존 사업에 적극 투자한 덕분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다양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보석같은 휴양지 정읍의 곳곳을 둘러봤다. 정읍을 처음 들렸다면 농업기술센터에서 자생차를 통해 차 문화를 배워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자생차가 만들어지는 과정 뿐 아니라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과정 속에 옛 조상들의 얼과 예절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이어 인근에 있는 선비마을을 찾아 식사 때의 예절과 선비들의 정신수련법, 택견 등을 배워보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 선비마을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잊고 지냈던 우리문화를 발견하고, 아이들에게는 우리문화의 전통과 그 뿌리를 제대로 배우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정읍 우도농악 전수회관에서는 우리소리를 직접 체험하는 기회도 생긴다. 징, 꽹과리, 북, 장구를 연주해 다함께 호흡을 맞추다보면 한데 어우러지는 국악의 흥겨움에 한껏 취해 멀게만 느껴졌던 국악의 매력에 푹 빠질 법하다.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산고장인 정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바로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다. 이 곳에서는 일제시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백 의사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활동과 그 정신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뿐만아니라 천단마을을 찾아 먹음직스러운 청포도를 직접 따보거나, 올 7월 개장한 칠보 물 테마 유원지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도 최고의 휴가를 보내는 한 방법이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정읍의 먹거리를 찾아보고자 한다면 칠보 한우마을을 가기를 권한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안전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정읍의 한우는 그 맛과 품질이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여행의 피로를 풀어 줄 숙박처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송참봉 조선마을’이 정읍에서 가장 유명하다. 사극에 나올 만한 마을하나를 그대로 옮겨놓은 ‘조선마을’은 모든 숙소가 초가집으로 지어져 있으며 벌레가 거의 없을 정도의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어 머리를 식히는데 제격이다.사진 = 참살이, 프레스21 서울신문NTN 채현주 기자 chj@seoulntn.com
  • [기고]서울역 110주년을 맞이하여/윤중한 코레일 서울역장

    [기고]서울역 110주년을 맞이하여/윤중한 코레일 서울역장

    대한민국 대표역이자 경부선과 경의선의 기점인 서울역이 7월8일 110주년을 맞는다. 서울역은 1899년 노량진~제물포 간 경인선 개통 이듬해인 1900년 7월8일 현재의 자리에 10평 남짓 작은 목조건물에서 출발해 남대문역, 경성역, 서울역으로 역 이름이 바뀌었다. 2004년 4월1일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2003년 역사를 새로 지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약소국 수탈의 상징이었던 철도는 서구열강의 손에 의해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이 건설됐고 6·25전쟁 중에는 목숨을 건 피란행렬이 우리 철도를 통해 이뤄졌다. 1960~1970년대 경제개발시대에는 산업발전의 견인차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이후 철도의 역할이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KTX 개통을 계기로 우리 철도는 다시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서울역은 우리 민족과 함께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소중한 우리들의 산 역사다. 단순한 기차역이 아니라 개항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 광복 직후 환호성이 메아리쳤던 서울역 광장은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과 명절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귀성전쟁으로 붐볐다. 1980년대 초에는 민주화시위의 현장이 됐고, 숱한 연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추억 어린 장소가 되기도 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옛 서울역사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원형 복원을 위한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초에는 상설전시관과 전시공연장, 야외카페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새로운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11월 개최되는 G20 세계경제정상회의와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 연말 코레일공항철도가 완전 개통되면 서울역은 명실공히 교통의 관문이자 중심이 될 전망이다. 서울역은 현재 일일 승하차 인원이 10만명에 육박하고 코레일 전체 여객수입의 22%를 차지한다. 미래를 향해 웅비하기 위해 역을 찾는 고객들에게 세계 1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고객감동분야 혁신허브사업을 추진하면서 고객만족문화 정립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철도를 열망하는 녹색생활’을 의미하는 ‘GLORY코레일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역도 주변의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들과 함께 힘을 모아 기차타기 생활화를 실천하고 저탄소 녹색성장 시대에 걸맞은 ‘푸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동차 보급으로 밀렸던 철도의 영광을 되찾고, 녹색교통수단인 철도의 가치를 재조명하며, 국민철도로서 녹색한국의 희망을 열어가고자 한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연결되고 시베리아, 몽골, 중국횡단철도를 잇는 대륙철도망 건설로 ‘제2의 철도르네상스’를 위한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이 선도적인 경제축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남북한과 대륙을 잇는 연계철도망 구축은 우리의 희망 그 자체다. 서울역은 2014년까지 ‘서울역북부역세권개발사업’과 광화문까지의 ‘국가상징거리 조성’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표 역으로서 손색 없는 모습을 선보일 계획이다. 미래를 향해, 세계를 향해 힘차게 웅비하는 코레일의 핵심영업장인 서울역은 앞으로도 세계1등 역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 [부고]

    ●정진완(전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씨 별세 명범 윤교(미국 거주)씨 부친상 김두명(미국 거주)씨 장인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일 오전 8시 (02)3410-6903 ●문장환(삼척MBC 사장)장훈(유니온랜드 〃)씨 모친상 30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일 오전 7시 (02)2227-7547 ●최강석(코메르츠은행 서울대표)씨 모친상 장영국(전 미주한인방송 사장)씨 장모상 29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2일 (02)2227-7597 ●이건호(변호사)씨 부인상 주연(한림의대 교수)주희(청주대 〃)주경(서울사이버대 〃)씨 모친상 김진환(한림의대 교수)조한상(청주대 〃)박영수(젠사운드 이사)씨 장모상 29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2일 오전 10시50분 (02)2258-5973 ●임병모(알파정보통신 대표이사)병창(세진테크 차장)씨 부친상 방종현(공부습관트레이닝센터 대표)이명규(소망문화사 대표이사)이승용(세진테크 〃)이명상(노벨러스 부장)씨 장인상 3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일 오전 7시30분 (02)3010-2231 ●문영호(태일운수 차장)중호(원일통상 대리)씨 모친상 백병목(대우증권 주식운용부장)씨 장모상 29일 분당 서울대병원, 발인 1일 오전 10시20분 (031)787-1501 ●여재락(수협중앙회 방송팀장)씨 부친상 29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1일 오전 9시30분 (02)2227-7577 ●임형준(한국교육신문사 편집부장)기환(자영업)씨 부친상 정규택(전 경찰공무원)황병홍(대구수성구청 건축계장)정선태(한국과학기술원)씨 장인상 30일 대구 한패밀리병원, 발인 2일 오전 7시 (053)760-8800
  •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한국전쟁의 여파에 휩싸이며, 미국과 유엔 동맹국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관련국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전쟁은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반란의 뿌리는 1919년 3월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에 있다. 3·1만세운동이 실패하면서 일부는 중국으로 피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한국 내에서 은신처를 찾아 숨었고, 일군의 무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련에 의탁했다. 독립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이들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물밀듯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는 희생의 경험이 주를 이룬다. 1945~1948년 미국과 소련 군정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에서 일본과 이들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소련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참패에 대한 인적·물적 배상을 북한에 물어 2차대전의 피해를 충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 잔존 인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경제·사회적 개혁을 순탄하게 진행시키길 바랐다. 이처럼 한반도에 들어서는 과도정부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돼야 했고, 결국 서로 다른 후원국들에 의해 남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서로의 적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모두 흡수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간의 차이점은 미국은(물론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련은 직접 관여하기보다 북한과 중국을 앞세워 싸웠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대된 1950~1953년은 남북한 상호간에 뿌리깊은 증오를 낳았고, 이같은 적개심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과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한간 증오는 전선을 넘어 광범위하게 자행된 잔혹성에 근거한다. 한국전쟁은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공포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군 전사자수를 능가했다. 기근과 질병, 유엔군의 무자비한 폭격, 남북한군에 의한 인질과 포로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배한 북한은 수많은 양민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수천명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의 ‘신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됐다. 남한의 사정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게릴라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산당 잔당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남한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잔혹했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에 결국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체결과 10억달러 원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한국·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한국을 방위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뒤에야 휴전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지불했고, 현재도 지불하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민간인과 군인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2차대전에서 입은 인명피해와 맞먹는다. 이 밖에 교전국 인명피해는 50만명에 이르며, 이중 90%가 중국인이다. 휴전협정은 순식간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복이 아닌 전복을 위한 전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지한다는 데 암묵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남북한은 계속해서 주변국들과 미국의 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이 태평양의 주요 국가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 한, 역사와 지정학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미래는 다른 여타 포스트모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밝다. 반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이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체제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에 닥쳐올 ‘제국’의 몰락을 국제사회는 준비 없이 맞아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새로운 통일된 국가를 전쟁 없이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길섶에서] 생각대로/박대출 논설위원

    출근길은 전단지와의 전쟁이다. 지하철 입구 계단은 주 전쟁터다. 주는 이는 둘로 나뉜다. ‘선수’들이 많다.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전단지를 마구 들이댄다.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그들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가끔 초보가 있다. 머뭇거리거나 부끄러워한다. 아침에 한 초보를 봤다. 길 가는 이가 외면하자 난감해한다. 괜히 안쓰러웠다. 그에게 물어봤다. 한 시간에 1만원 받는다고 했다. 시민 표정도 엇갈린다. 혹은 맥없거나, 혹은 활기차다. 전자는 주로 전단지를 피한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외면한다. ‘선수’가 막아서는데도 게걸음으로 빠져나간다.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는 이도 있다. 부정이 엿보인다. 후자는 다르다. 여유와 배려가 읽힌다. 긍정이 깃들어 있다. 긍정의 힘. 요즘 화두다. 어릴 적 캠페인이 생각난다. 스마일운동이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란 해석도 배웠다. 웃으며 전단지를 받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일상은 어떨까. 생각대로 되지 않을까. 나한테 물어보는 말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부고] 항일 애국지사 전병철 선생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성한 울산비행장 근로작업 태업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친 애국지사 전병철 선생이 12일 오전 10시18분 별세했다. 84세. 유족으로는 전규환씨 등 3남2녀가 있다. 빈소는 부산보훈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6시30분. (051)601-6784.
  • [부고] 애국지사 이창도선생 별세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펼친 애국지사 이창도 선생이 27일 오전 9시35분 별세했다. 84세. 1926년 5월 평북 의주에서 출생한 이 선생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로 진공하기 위한 한·미특수훈련인 OSS훈련에 참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이동범씨 등 3남1녀가 있다. 발인은 29일 오전 6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 빈소는 서울보훈병원. 010-8312-7221.
  • 18일 5·18 30주년 기념식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운찬 국무총리 등 정부 요인과 각 정당 대표, 5월단체 회원과 유가족,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분향, 추모의 나비 날리기 순으로 30여분간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전야제가 열렸다. 전야제는 ‘저항과 공동체’란 주제의 거리 퍼포먼스인 ‘시민난장’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대학생·주민 등으로 구성된 거리 퍼레이드단은 동학혁명, 항일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대동세상 등 다섯 가지 주제를 표현하며 거리 행진을 펼쳤다. 또 오후 8시쯤부터 옛 도청 앞에서 ‘빛-이어지다’란 주제로 열린 본행사는 합창단 518명의 노래와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 등이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글로벌 시대] 한·러 역사의 의미/아르촘 산지예프 로시스카야가제타 서울특파원

    [글로벌 시대] 한·러 역사의 의미/아르촘 산지예프 로시스카야가제타 서울특파원

    얼마 전 서울주재 러시아대사관이 개최한 한·러관계사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세미나에서 한국 역사학자들이 양국 관계사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발표를 했지만 정작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런 행사에 한국사람들의 관심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매일 한국의 신문과 잡지를 보는데, 거기에서 한국의 독립투쟁에 관한 기사들을 자주 읽는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제정 러시아와 구 소련이 한국의 독립투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다시 봐야 한다. 사실 한·러 양국 국민 간의 진정한 형제애가 싹튼 것은 러·일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한국 정부가 일본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도록 강제하는 ‘한·일의정서’ 체결을 요구했다. 일본의 대대적인 반러책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은 여전히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러시아의 고문서 보관소에는 한국군 사병과 장교, 한반도 북부 주민들,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러시아군을 지원하여 대일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많은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1904년 3월 최초로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백인대 대장 레비츠키는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회령에 파견된 북방군 책임자 지명찬이 일본군 이동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보고했다. 1904년 6월 아니시모프 소장의 지휘 하에 한반도 북동부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부대 내에 한인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한인부대와 더불어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이범윤이 조직한 조선의용군이 대일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범윤을 비롯한 많은 의용군이 러시아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배는 일본이 획책해 온 한국 주권침탈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항일 독립군이 결성되어 활약했다. 계몽운동도 지속되었다. 한인 독립투사들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수십 종의 신문, 잡지를 발간했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었던 ‘권업신문’도 그런 항일노선의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 199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학대학이 설립되었다. ‘권업신문’의 발행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장도빈의 아들 장치혁이 이 한국학대학을 위한 5층 건물을 신축, 기증했다. 현재 200명 이상의 학생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있고, 대한매일신보의 기자이자 독립투사였던 장도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러시아의 극동은 한국의 역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겼고, 한국인들은 그 지역의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6년 전 대학을 막 졸업한 나는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에서 활약했던 항일 독립투사들에 대한 연재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던 서울신문 취재진과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그때 나는 양국 관계의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러시아 극동지방 최남단인 연해주에는 한인들의 항일투쟁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장소와 기념물이 있다. 크라스키노 마을에는 커다란 물방울 모양의 돌로 된 기념비가 서 있다. 당시 그곳을 답사하면서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단지동맹’한 것이 바로 그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 한국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한다. 그러나 아직도 단지동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이전에 신한촌이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구역에서는 서울거리가 있다. 한·러관계에서 형제애가 발휘되었던 사례는 아주 많다. 우리가 상대방의 민족감정과 애국심을 상호 존중했음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그런 상호존중은 어려움에 빠진 형제를 도와주려는 자세로 표출되었다. 러·일전쟁시 한인들이 러시아인들과 더불어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일, 양국 애국자들의 운명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수십 년 간 지속된 한인들의 항일 독립투쟁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세계일보 사장 유종관씨

    유종관(68)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회장이 27일 세계일보 제12대 사장에 취임한다고 세계일보가 26일 밝혔다. 유 신임 사장은 중앙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고려대 교육대학원·경영대학원을 거쳐 미국 TIBS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멕시코 총회장을, 2000년부터 세계일보 비상근 부사장을 맡아왔다.
  •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지 써보세요”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지 써보세요”

    “평양을 떠난 뒤 제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는 건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에요. ‘아이가 태어나 첫 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겠는가.’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부귀영화는커녕 독립운동 자금 품어 안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기를 몇 번이었던가요.” ●‘임정 안주인’에 손녀가 보낸 편지 ‘상해 임시정부의 안주인’이라 불리는 고(故) 정정화(1900~1991) 여사에게 손녀 김선현씨가 보내는 편지다. 정 여사는 1920년 시아버지 김가진이 74세의 고령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자 이를 뒤따랐던 인물. 여성이라 감시가 덜하다는 점을 이용, 10여년 동안 국내에 수차례 드나들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건넸다. 해방 뒤 임시정부의 상징 김구 선생이 암살되고, 김구 선생의 비서이자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남편 김의한이 한국전쟁 때 납북되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김씨는 그런 할머니에게 4년 전,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북한 평양에 들러 할머니 묘의 흙을 가져다 뿌려드린 얘기를 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는 22일 상해임정 설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 4월13일까지 10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지를 쓰자는 ‘100년 편지’ 사업을 벌인다고 밝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강화학파 홍승헌(1854~1914) 참판에게 편지를 썼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에 가깝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조선 후기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만, 망국 뒤에는 가장 강력한 항일운동을 벌였던 집단으로 꼽힌다. 편지에서 한 교수는 “세상의 변화에 끝까지 책임지려 했던 마지막 보수주의자들의 의리를 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였던 홍 참판님과 벗들께 술 한 잔 올리려 합니다. 잔을 든 손이 왜 이리 떨리는지요.”라고 추도했다. ●글 쓰는 형식은 자유… 이메일로 접수 기념사업회 측은 “평소에 어렵고 딱딱하게 느끼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보자는 취지”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함께 나누는 가상의 대화 등 글 쓰는 형식은 자유”라고 설명했다. 편지는 이메일(kpg1919@korea.com)로 보내면 된다. 오는 8월15일 광복절에 맞춰 책으로도 낼 예정이다. 편지나 관련 사진을 단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면 사업회에 요청(02-732-2871~2)하면 된다. 사진에 얽힌 사연은 소설가 서해성이 썼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화마당]故 한주호준위에 대한 우리의 의무/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문화마당]故 한주호준위에 대한 우리의 의무/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지난달 29일과 30일, 두 사람의 죽음이 연이어 우리 사회 큰 뉴스가 됐다. 배우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과 베테랑 구조요원 한주호. 이 두 사람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느낌의 종류는 달랐다. 전자는 유명한 스타지만, 후자는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군인이다.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비관해서 자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 전자가 사적인 죽음이라면, 후자는 공적인 죽음이다. 전자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무상을 느끼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를 생각한다. 이에 반해 후자의 살신성인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의미 있는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성찰한다. 죽기 전 최진영은 “모든 인생은 꿈이야. 한여름 밤의 꿈.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영원으로의 세계, 영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머릿속에 있나, 가슴에 있나. 모든 것은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훨훨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최진영의 자살은 이 같은 고뇌의 결론이다. 하지만 한 준위의 죽음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딸에게 “슬기, 한의원에 전화 안 했으면 아버지가 하마. 그리고 기숙사 주소 문자 보내거라. 내딸 싸랑해. 만히.”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특수임무를 맡은 군인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닌, 국가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그의 일상적 과업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로 로마를 꼽는 것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희생하는 시민적 덕성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거론된다. 로마의 군인은 병상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했다. 나의 죽음이 공동체를 살리고 번영을 이룩하게 만든다면 나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 이 같은 시민적 덕성을 토대로 하여 나타난 근대적 정치공동체가 민족이다. 프랑스 종교학자 르낭은 민족을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정의했다. 민족이란 지금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영적인 가족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같은 핏줄이기에 한 민족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하나의 이념을 공유하는 시민이기에 같은 조국에 산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마치니는 조국이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조국이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당신의 형제 중 어느 하나라도 투표권이 없어 나라 일에 자신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교육을 받은 자들 사이에서 교육받지 못한 채 고통 받고 있는 한,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고 또한 일하고자 하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가난 속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야 하는 한, 당신에게는 당신이 가져야 할 그런 조국이 없다. 모두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조국을 당신은 갖지 못하고 있다.” 2010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마치니가 말하는 그런 ‘조국’이 과연 있는가?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물음은 국가가 나의 조국이 될 때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요구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그런 조국으로 만드는 것이 한 준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다.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 묻힌 감옥일대 개발바람에 파헤쳐져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 묻힌 감옥일대 개발바람에 파헤쳐져

    │다롄 박홍환특파원│100년 전 ‘그날’도 이렇게 발해만의 바닷바람은 매섭게 살을 엘 정도로 세게 불어제쳤을까?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은 3월의 막바지에도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의사는 ‘고국의 봄’을 그리워하며 찬바람이 뼈를 에는 이국 땅의 감옥에서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사형집행 직전 그는 이렇게 소원했다. “내가 죽거든 뼈를 하얼빈의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조국 땅으로 옮겨다오.” ☞ [사진] 안중근 의사, 그 분은 가셨지만… 안 의사 압송 길을 따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밤 기차를 타고 창춘(長春), 선양(瀋陽), 다롄을 거쳐 24일 오전 도착한 뤼순의 옛 일본군 감옥은 일본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항일 교육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4m 높이의 담장이 700여m에 걸쳐 둘러쳐져 있는 수감시설 면적은 약 2만 6000㎡. 러·일전쟁 승리로 감옥을 포함, 뤼순 전체를 획득한 일본은 패망할 때까지 이곳을 주요 반일 정치범 수용시설로 활용했다. 안 의사와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무수하게 많은 항일 열사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 의사의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로 활용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일제는 유해를 유족하게 인도하길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담장 밖은 상당히 개발돼 있었다. 2008년 3~4월, 29일간 한국 단독으로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던 곳은 이미 수십층짜리 고층 아파트 여러 동이 들어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로 옆 뤼순감옥 정북 방향 야산도 개발을 위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만약 이곳에 유해가 있었다 해도 이미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다. 담장 바로 뒤에는 항만 하역시설에 쓰이는 철골 구조물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고, 잇대어 있는 공터에는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일용직 노동자)들의 임시숙소가 세워졌다. 공장 직원 등은 안 의사 유해에 대해 무신경하게 “처음 듣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우리 측 일부 인사들이 뤼순감옥 동쪽 500여m 지점을 유해 매장 장소로 지목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이미 저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유해를 찾기는 어려워보였다. 우리 정부가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한·중·일 3국 간 협력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현실적 여건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해야 그나마 발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측 사정에 밝은 한 현지 인사는 “이미 1960~70년대에 중국과 북한이 여러차례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다.”며 “중국 측은 오래 전에 (유해 발굴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 발굴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는 꼴사나운 광경도 펼쳐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조차 어느 쪽의 유해 관련 정보도 믿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안 의사 추모를 위해 뤼순감옥을 찾은 한 인사는 “이런 모습을 안 의사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100주기를 계기로 안 의사의 정신을 우리 가슴에 묻는 것으로 유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는 낯선 이국 땅에서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글 사진 stinger@seoul.co.kr
  • [모닝브리핑] 국가안보전략硏 “김정일 2주에 1번 신장 투석”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은 24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으며 2주에 1번씩 신장 투석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는 국가정보원 산하의 기관이다. 남 소장은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주최로 서울 충무로 세종호텔에서 열린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 전망’ 주제 강연에서 “김 위원장의 손톱이 흰색을 띠는 것은 만성 신부전 때문인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남 소장은 “키가 165~166㎝로 추정되는 김 위원장은 2008년 뇌졸중이 생기기 전 몸무게가 86㎏이나 돼 곧 순환기 계통의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그는 “2008년 8월15일쯤 뇌졸중이 온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2009년 1월 회복된 뒤 3개월간 제2의 뇌졸중을 막기 위해 다이어트를 해 지금은 70~73㎏ 정도로 감량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남 소장은 김 위원장의 3남 김정은의 후계구도와 관련,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후계작업을) 가속화했지만 하늘에 태양이 2개 있는 게 이상하고 김정은의 인사 개입 문제점도 나타나 지난해 6월 이후 조금 물밑으로 내려온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 별세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 별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경호원 유평파 선생의 아내인 애국지사 송정헌 여사가 지난 22일 중국 난징(南京)에서 별세했다. 91세. 1919년 중국 항저우에서 중국인으로 출생한 여사는 1937년 중국 강서성 노산구강 폐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당시 임정 의정원 의원이자 광복군 군의처장이던 유진동 선생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남편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했고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해는 귀국 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될 계획이다. 유가족으로는 장남인 유수송씨 등 3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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