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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통합당 초대대표 한명숙] 뼛속까지 노무현 사람… 제1야당 ‘넘버2’

    [민주통합당 초대대표 한명숙] 뼛속까지 노무현 사람… 제1야당 ‘넘버2’

    15일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가 ‘친노(친노무현) 진영의 화려한 부활’로 평가되는 분명한 이유는 이 사람, 문성근(59) 최고위원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 뛰어들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이후 노 전 대통령이 급서하자 정권 교체를 반드시 이루겠다며 어금니를 물고는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을 만든 게 바로 문 최고위원이다. ‘뼛속까지 노무현 사람’인 그가 마침내 제1야당 민주통합당의 ‘넘버2’에 올랐다. 한명숙 대표의 공고한 지지 기반을 뛰어넘지는 못했으나 전당대회 내내 그는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찌감치 파란을 예고한 바 있다. 문 최고위원이 정치권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노사모를 이끌면서지만 야권과 그의 인연은 사실 훨씬 오래됐다. 재야 통일운동가인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쌓은 친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내용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이다. 당시 국내 언론들이 공판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고 외신기자들의 공판 참석마저 제한되자 그는 공판이 열리는 날이면 법정으로 나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재판을 지켜보며 공판 내용을 머릿속에 담은 뒤 이를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해체와 정권 교체 이후 한동안 정치권에 발을 끊었던 그는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를 맞아 다시 정치활동에 나섰다. 현 정부의 집권 연장을 막겠다며 지난해 8월 야권 단일 정당 건설을 목표로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 운동을 시작, 18만명에 이르는 회원을 모집하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현정·강주리기자 hjlee@seoul.co.kr
  • ‘화염병 투척’ 중국인 구속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투척한 중국인 류모(38)씨가 구속됐다. 김상환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0일 “국내 주거가 부정하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류씨는 경찰조사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인 한국인이었고, 외증조부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돼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면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등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데 화가 났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외조모와 외증조부에 관한 류씨의 진술이 맞는지 가족관계를 파악해 정확한 범행 동기를 밝힐 계획이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한족의 탁월한 문명이 블랙홀처럼 이민족을 빨아들였다…

    한족의 탁월한 문명이 블랙홀처럼 이민족을 빨아들였다…

    중국 동북공정이 화제였다. 우리 역사를 통째로 삼키려 든다는 분노가 대단했다. 근거는 한화(漢化)다. 중국의 옛 역사를 돌이켜보니 한(漢)족의 탁월한 문명이 블랙홀처럼 다른 이민족들을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족을 정복해 군림한 왕조들마저 한화를 피하지 못하고 그 속에 녹아들었으니 한족의 문화적 저력이 엄청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틀을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청사(新淸史)다. 논문이나 저서가 산발적으로 나오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청사라는 이름 아래 묶이게 된 흐름이다. 이를 개괄해 볼 수 있는 김선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의 논문 ‘신청사의 등장과 분기-미국의 청대사 연구동향’이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겨울 호에 실렸다. 김 교수가 신청사에서 흥미롭게 보는 대목은 중국사를 한화의 역사로 보는 시각 자체가 “20세기 초 중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산물”이라 지적하는 부분이다. 탈민족주의자들이 ‘단군 이래 반만년 단일민족 신화’를 비판하면서 항일운동 시기에 한국의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신화화됐다고 주장하듯 중국의 ‘한화’ 개념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신청사는 최근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다. 연초에 나온 이블린 로스키의 ‘최후의 황제들-청 황실의 사회사’, 마크 엘리엇의 ‘건륭제’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화에 대한 부정이다. 한자 자료뿐 아니라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문헌 분석을 통해 만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남달리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례는 많다. 가령 러시아와의 국경 협상에 대해 청나라는 한문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북방 문제는 남쪽에 사는 한족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여긴 탓이다.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볼 수 있듯 여름이면 청 황제는 열하로 갔다. 문제는 왜 그랬을까다. 한화의 시각에서 황제의 여름철 열하 체류는 북방 이민족에 대한 견제구로 읽히지만 신청사의 시각에서는 만주의 전통과 자존심을 잊지 않겠다는 황제의 선언으로 읽힌다. 한걸음 더 나아가 김 교수가 눈여겨보는 대목은 팔기(八旗)에 대한 해석이다. 팔기는 청나라만의 독특한 군사·행정조직이다. 팔기에 속한 이들은 기인(旗人)이라 불렸는데, 처음엔 만주족으로 구성됐으나 청나라 팽창과 더불어 몽골·조선·여진·한족 등 다양한 민족이 발탁됐다. 그럼에도 팔기는 곧 만주족으로 간주됐다. 김 교수는 “정치, 세금, 예산 등과 관련 있던 기인이 단일민족 집단처럼 여겨진 것은 19세기 후반 반청혁명 운동의 흐름에서 나타난 근대적 현상”으로 “한족 중심 공화혁명 과정에서 중국을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집단으로 만주족을 묘사”하기 위해 ‘기인=만주족’이란 선입관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청나라는 한화된 국가가 아니었을뿐더러 그렇다고 오로지 만주족만의 국가였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진다. 이 점은 청 황제가 ‘유학자’이자 ‘문수보살’이자 ‘대칸’임을 자임한 데서 잘 드러난다. 한족을 상대할 때는 유학자임을, 티베트를 상대할 때는 문수보살임을, 몽골 등 유목민족을 상대할 때는 대칸임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제국을 총괄하는 보편 황제의 지위였던 셈이다. 보편이란 언제나 그렇듯 텅 빈 기호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생각해봐야 할 화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교통문화발전대상] ‘교통안전 지킴이’ 236명 포상

    제4회 ‘교통문화발전대회’ 시상식이 15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국토해양부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사와 교통안전공단이 공동 주관한다. 도로·철도·항공·해양 등 각 분야에서 교통안전을 위해 노력한 단체와 개인에게 포장(1명), 대통령 표창(8명), 국무총리 표창(개인 10명·단체 4곳), 서울신문사장 특별상(단체 1곳) 등이 주어진다. 국토해양부 장관 표창(140명)과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표창(40명)도 이뤄진다. 또 교통문화지수 우수 지방자치단체 8곳을 선정해 국무총리표창(4곳)과 안전공단 이사장 표창(4곳)을 수여한다. 교통안전 사용자제작 콘텐츠(UCC) 공모전 입상자 22명에 대한 시상도 실시된다. 지난해부터 해양 분야가 추가돼 수상자가 소폭 늘었다. 대회는 서울신문사가 주최하는 교통봉사상과 교통안전공단이 주관해 온 교통안전촉진대회가 통합돼 2008년 출범했다. 올해에는 교통문화발전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 등 236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포장(개인) ▲조성일 중부고속㈜ 대표이사 ■대통령 표창(개인) ▲강대석 경남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대표 ▲김기봉 교통안전공단 센터장 ▲김성식 신성기업사 대표이사 ▲김인하 영인운수㈜ 대표이사 ▲박희대 대구광역시 주사 ▲이득로 손해보험협회 자동차보험 본부장 ▲임충성 새서울고속㈜ 전무이사 ▲조동혁 한국철도공사 강릉역 역무원 ■국무총리 표창(개인) ▲권순돈 인천국제공항공사 운송시설처 팀장 ▲문원우 한국중부발전㈜ 서천화력발전소 차장대리 ▲박치영 전북지방경찰청 경사 ▲서종도 한국도로공사 경남지역본부 차장 ▲성기천 한국공항공사 시설안전본부장 ▲신성필 교통안전공단 선임연구원 ▲이규민 충남고속㈜ 대표이사 ▲이상공 대기해양㈜ 상무이사 ▲이원귀 경기도 새마을 교통봉사대 부대장 ▲최강환 인천광역시 행정사무관 (단체) ▲경전여객자동차㈜ ▲용남고속㈜ ▲전국버스공제조합 ▲한남관광개발㈜ ■국토해양부장관 표창(개인) ▲신인휴 ▲임종택▲ 박도형 ▲김성곤 ▲변홍구 ▲윤병주 ▲조장우 ▲김현수 ▲변장선 ▲안광엽 ▲곽수민 ▲서종호 ▲이판호 ▲백정기 ▲김종면 ▲이혜경 ▲김용한 ▲최상구 ▲백승권 ▲오주일 ▲배치호 ▲강위석 ▲윤복한 ▲이홍석 ▲정평훈 ▲신우균 ▲박경환 ▲조재갑 ▲김춘길 ▲이창순 ▲박세장 ▲김영조 ▲한윤택 ▲이종섭 ▲장유진 ▲정관목 ▲공태영 ▲문창용 ▲오문식 ▲홍성령 ▲허치영 ▲김학현 ▲최종훈 ▲주정식 ▲박문환 ▲장병주 ▲박종화 ▲박종수 ▲이철희 ▲임성규 ▲한재혁 ▲염규한 ▲문종호 ▲배영진 ▲김정기 ▲김인충 ▲한우진 ▲민승곤 ▲박정근 ▲박수일 ▲이공우 ▲전연후 ▲빈주연 ▲전병규 ▲박성권 ▲윤재승 ▲양태모 ▲우남철 ▲전봉기 ▲이승형 ▲고양권 ▲이동기 ▲박창준 ▲김춘식 ▲임덕수 ▲이규일 ▲권영길 ▲이동환 ▲강병정 ▲김석 ▲우춘식 ▲박수한 ▲조주현 ▲전선영 ▲최영박 ▲이춘희 ▲정춘택 ▲김명주 ▲이대호 ▲안상태 ▲김명기 ▲강남택 ▲정창숙 ▲이민자 ▲김윤배 ▲이애경 ▲배연돈 ▲유진화 ▲김혜원 ▲이상원 ▲김주수 ▲권영희 ▲이강영 ▲이광호 ▲이덕형 ▲안동문 ▲김덕성 ▲김경원 ▲김수진 ▲권오우 ▲ 서기수 ▲남임숙 ▲신원집 ▲위지환 ▲우영근 ▲조을현 ▲김병태 ▲지태희 ▲강대규 ▲이용배 ▲김길호 ▲최구원 ▲소순기 ▲김윤기 ▲김성태 ▲권종하 ▲임정백 ▲박재식 ▲서광옥 ▲신건규 (단체) ▲공군본부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 충북 청주 흥덕지회 ▲대전광역시 도시철도공사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 전주 덕진지회 ▲한승택시㈜ ▲한일운수㈜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 강원 삼척지회 ▲금강운수㈜ ▲가성㈜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 경북 영주지회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표창 ▲심윤수 ▲안종형 ▲정행균 ▲김기철 ▲장충구 ▲손주호 ▲방상선 ▲박광식 ▲박명식 ▲곽원준 ▲강명훈 ▲정종희 ▲박찬주 ▲장명식 ▲석인주 ▲공석영 ▲박영하 ▲최윤정 ▲박경아 ▲권윤근 ▲김병락 ▲김종식 ▲김종훈 ▲김희철 ▲임신풍 ▲황윤환 ▲이종원 ▲김술호 ▲황임수 ▲이은미 ▲김정환 ▲오세윤 ▲박종화 ▲이동경 ▲유영국 ▲이경구 ▲변상호 ▲허석길 ▲양철용 ▲공양진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종서러움…조국을 되찾자” 1세기만에…조국서 해방가

     95년만에 발굴된 신흥무관학교 ‘학우단가’(學友團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가사에는 독립운동에 몸 바친 선열들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해외 항일문화 국내 영향”  1절 ‘조상의 세우신 녯나라 어듸메뇨. 충용한 무리아 그 은혜 끄까지 이즈랴’라는 부분에서는 나라를 잃은 설움과 함께 조국을 기억하려는 독립투사들의 의지가 엿보인다. 2절의 ‘종설음 받으며 이 목숨 이여가는 이천만 생령의 인생길 인도할이 뉘뇨’라는 노랫말에서는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사명감이 느껴진다. 3절 ‘우리의 마음을 련단코 큰 힘 길너 녯나라 억만년 새기초 공고케 세우세’는 해방 조국에의 희망과 의지가 담겼다.  노동은 교수는 “가사를 음미해보면 당시 어려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함께 선각자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낄 수 있다.”면서 “특히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뜻이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은 당시 항일운동이 국외에서는 항일무장투쟁, 국내에서는 계몽운동으로 구분돼 있었다는 기존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 노래가 국내에 전파돼 핍박받던 국민들의 독립의지를 키우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노 교수는 “당시 만주에서 불리던 많은 항일노래가 국내에 전파돼 민족사학을 중심으로 교육됐다.”면서 “해외 독립운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가 국내에 영향을 줬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학우단가의 발굴이 항일음악은 물론 우리 음악사 연구에도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노래는 단순한 유흥의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문맹률이 높아 주로 교육·선전의 도구로 사용됐었다. 실제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라는 미명하에 민족문화 말살을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가요를 우리 국민들에게 강요해 황국신민화의 내용을 담은 노래가 국민들 사이에서 불려지게 됐다. ●항일음악·친일음악 연구 전환점  그러나 자료가 대부분 망실돼 항일음악과 친일음악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학우단가의 곡이 실린 ‘광성중학교 최신창가집(1914년)’도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항일운동 중에서도 무장투쟁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국군의 뿌리인 만큼 육·해·공군사관학교부터 이런 정신들을 발굴·계승하려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신흥학우단가 가사와 해설  1절  祖上(조상)의 세우신 녯나라 어듸메뇨  忠勇(충용)한 무리아 그 恩惠(은혜) 끄까지 이즈랴  四千春光(사천춘광) 빗나소든 배달 내나라  自由(자유)의 樂園(낙원)을 지을자 우리가 안인가    조상이 세우신 옛 나라는 어디냐  충성스럽고 용감한 무리야 그 은혜를 끝까지 잊으랴  4000년 역사의 빛나는 배달 내 나라  자유의 낙원을 만들 자 우리가 아닌가    2절  종설음 받으며 이 목숨 이여가는  二千萬(이천만) 生靈(생령)의 人生(인생)길 引導(인도)할이 뉘뇨  굳은 마음 참된 精誠(정성) 힘을 다하야  썩어진 民族(민족)의 새 榮光(영광) 나타내이여라    종의 서러움을 받으며 이 목숨을 이어가는  이천만 생명의 인생길을 인도할 사람이 누군가  굳은 마음 참된 정성 힘을 다해  썩어진 민족의 새 영광이 나타나게 해라    3절  우리의 마음을 鍊鍛(련단)코 큰 힘 길너  녯나라 億萬年(억만년) 새基礎(기초) 鞏固(공고)케 세우세  大千世界(대천세계) 덥고 남은 긔운 다하라  普天下優勝(보천하우승)의 冕旒冠(면류관) 길히 빗나도다    우리의 마음을 단련해 큰 힘을 길러  옛 나라 억만년의 새 기초를 공고하게 세우자  큰 세상을 다 덮고 남은 기운을 다해라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면류관 길이길이 빛나라
  • 고법 “독립운동 유죄판결은 친일 행위”

    서울고법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에게 실형을 선고한 행위로 훈장을 받은 판사에 대해 친일 행위라고 판결했다. 1심은 ‘항일운동 재판에 관여했다는 것만으로 일제에 협력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친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었다.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 곽종훈)는 10일 고(故) 유영 판사의 손자가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친일 반민족 행위 해당자 결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1심과 달리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헌법 이념상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유죄 판결은 당시 실정법에 따랐다고 할지라도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형사재판은 관존민비의 직권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고 인권 침해의 사례가 빈번했으며 항일독립운동의 탄압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 점 등을 볼 때 판사의 재판 행위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적극적인 행위로 친일 반민족 행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유 판사는 재직 당시 밀양경찰서에 폭탄 투척을 한 독립운동가 이수택 등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는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독립운동가의 형사재판에 참여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이란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을 펼친 애국지사 이란 선생이 9일 오후 11시 20분 별세했다. 86세. 강원 춘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1938년 춘천중학교의 항일 학생결사 조직인 상록회의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된 뒤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높이고자 ‘독서회’를 만들어 독서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의 부친과 친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춘천을 자주 방문하자 학생들은 그를 찾아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세계 정세 소식 등을 들으며 항일 의식을 높였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 원후정, 김영근 등이 일제의 민족 차별에 분개해 1941년 3월 10일 일본 육군 기념일을 맞아 벌인 모의 시가전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하는 사건으로 독서회 활동이 발각된다. 이 때문에 체포된 선생은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2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부순(79)씨와 아들 위찬(KBS 기술국장), 호찬(신화 엔지니어링 이사), 중찬(자영업)씨가 있다. 발인 11일 오전 7시 30분, 장지 대전국립현충원, 빈소 서울 보라매병원.(02)841-7652.
  •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집 나간 부처가 돌아왔다’를 사자성어로 하면 뭘까.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이승에서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왕좌왕 헤맨다고 한다. ‘금강경’에 그 뜻을 풀이해놨다.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 이른 시일에 인도하겠다.” 이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4년간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한·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협력해 이루어 낸 한·일관계의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 스님이 있었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이라고 하는 도쿄대를 끈질기게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의 중심인 일본 왕궁에 직접 들어가 조선왕실의궤를 목격한 뒤 반환의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혜문 스님은 이 밖에도 도쿄 시내 오구라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율리사지 오층석탑’ 환수 등 북한까지 포함시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오류 바로잡기’ 운동가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가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하여 당국에 정정 신청을 내 ‘송어’라고 교과서에 고쳐놨다. 국보146호 청동방울은 당초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추적 끝에 강원도가 아닌 충남 논산으로 올바르게 돌려놨다. 안동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안동군수가 심었다는 것도 그가 새롭게 밝혀낸 일이다. 도산서원 준공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서 금송을 심었는데 겨울이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겁을 먹은 안동군수가 몰래 금송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 또 있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쓰던 표범가죽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과 백백교 교주 머리의 보존 중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런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까닭을 먼저 물었더니 ‘환지본처’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다시 “그래도 꾸준히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을텐 데요.”라고 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교수나 공무원이 독립운동하는 것 봤냐고 말입니다.”라며 크게 웃는다. 그렇다면 문화재 환수를 위해 그동안 일본에만 40여 차례 오갔는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다. “다 부처님 것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구, ‘도 닦은 스님’에게 괜히 물어봤나 보다. 이렇게 그의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랬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어떻게 벌이게 됐을까. “2003년 저희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께서 경기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철안 스님은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선사의 관할 사찰 중 27개의 전통사찰에 대한 문화재 현황 파악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멸실된 문화재의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지요. 예를 들어 현등사 사리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유통경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흩어진 문화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탄력을 받은 혜문 스님은 ‘한·일협정 문서공개’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문화재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한·일협정 문서는 일부만 공개됐다가 2004년 완전 공개되는 과정에서 과연 1432점의 반환 문화재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의심되는 것들을 보고 졸속 협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신물(神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문득 느꼈습니다. 일왕 궁내청에서,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린 ‘조선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봤을 땐 더욱 그랬습니다. 원래의 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 2개월에 걸쳐 치러진 생생하고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보인소의궤’란 책이 눈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단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로 이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 제작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서 제작된다고 한다. 스님은 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의궤인 ‘대례의궤’란 책을 봤을 때도 ‘신물의 부름’으로 울컥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한·일 간 피로 피를 씻었던 사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의병,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반일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봉선사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신물의 부름이 아니겠습니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후쿠오카에서 봤을 때는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고종의 갑옷과 투구 반환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대로 내려오던 임금의 투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군대가 싸울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것과 같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번 강조한다. “조선시대 군사권력의 최고 상징인 투구, 정치권력의 최고 상징인 임금의 관모 익선관(翼善冠·높이 19㎝)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아직까지 인질처럼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스님이 던지는 말문마다 조목조목 비장함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까지 친일 논쟁만 했습니다. 누가 친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얘기지만 2000년 이후에야 직접 도쿄에 와서 ‘우리 문화재 내놓으라’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당국은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장본인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북·일 수교 때 대대적인 문화재 반환을 약속받아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은행에 있는 징용 노무자 공탁금 4조원이나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 등도 말입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50가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10가지밖에 못 했다.”며 웃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조경과 석등이 일본식으로 돼 있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중국 갑옷과 일본도를 차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실의궤도 원소장처인 오대산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오늘 화장을 하는데 염불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자리를 떴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혜문 스님은 1998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1년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다. 2004년 일본 교토 유학 중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한 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2006년 9월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일본 정부로부터 1205점의 문화재를 반환받게 했다. 그 외에도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했던 ‘표범카펫’의 행방에 문제를 제기, 60년 동안 박물관수장고에 있던 것을 찾아냈으며 보스턴미술관 소장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과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등을 맡고 있다.
  • “담배 끊고 나랏빚 갚자”… 달구벌서 되살리는 선열의 얼

    “담배 끊고 나랏빚 갚자”… 달구벌서 되살리는 선열의 얼

    한국 근대사에서 기부 문화의 효시로 꼽히는 국채보상운동이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대구시는 옛 대한제국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5일 문을 연다고 3일 밝혔다. 기념관은 대구시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지하 2층, 지상 2층(연면적 1129㎡) 규모로 지어졌다. 여기에는 국비와 시비 각 20억 1000만원과 국민모금액 7억 8000여만원 등 모두 50억 1000여만원이 들어갔다. 전시관에는 일제 침략의 배경과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에 대한 사료와 사진이 비치된다. 또 이 운동을 주도한 김광제, 서상돈, 양기탁, 베델 등 인물 코너도 마련됐다. 항일운동에 관한 도표와 모형도 전시된다. 국채보상운동의 발단은 일본이 한국을 경제식민지화하는 계략에서 비롯됐다. 한일합방(1910년) 3년 전에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와 을사늑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일본은 불필요한 차관을 강요했고, 식민지건설 비용을 모두 한국 정부에 전가했다. 1905년부터 1908년 사이 일본에 빌린 부채는 1300만원으로, 이미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에 대구지역의 선각자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선 국가채무부터 갚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김광제·서상돈 선생 등은 담배를 끊어 외채를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1월 대구 인쇄업체인 광문사(현 중구 수창공원)에서 발기인 대회를 가진데 이어 2월 21일 첫 집회인 대구군민대회를 북후정(대구시민회관)에서 열었다. 거사일 북후정에는 아이들까지 포함해 2000여명의 대구 시민들이 집결, 시위를 했고 경북도 경무부는 이를 무허가 집회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등 덕분에 전국 각지와 해외로 확산됐고, 고종황제까지 참여했다. 부녀자들은 은비녀와 가락지 등 패물을 내놓는가 하면 고관들도 비단옷과 가마를 버리고 밥 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1년 반만인 1908년 일제의 탄압과 방해로 막을 내렸고 목표액인 1300만원에 크게 못 미치는 16만원을 모금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국민의 피와 눈물이 섞인 국권 회복운동은 훗날 3·1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준공되면서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당시의 흔적과 이를 기리는 상징물이 대구 시내 곳곳에 있다. 기념관이 자리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4만여㎡ 규모의 대형 도심 공원이다. 이 공원은 국채보상운동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공원에는 우리 역사상 처음 일어난 여성운동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있다. 김광제·서상돈 선생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기념관을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은 ‘국채보상로’이다. 달구벌대로와 함께 대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주 도로에 국채보상운동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북후정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광문사 자리와 진골목에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표석이 설치됐다. 대구시 관계자는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대구의 자랑인 국채보상운동을 자세히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그처럼 바라던 통일의 봄 못보고…”

    “그처럼 바라던 통일의 봄 못보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6일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의 유가족에게 조전을 보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7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조전에서 박용길 장로의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박용길 여사는 그처럼 바라던 통일의 봄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애석하게 떠났지만 그가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바친 애국의 넋은 북과 남, 해외 온 겨레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 장례위 방북 불허 앞서 김양건 북한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은 26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 팩스를 보내 박 장로의 장례에 대해 협의하자며 유족과 장례위원회 관계자의 개성 방문을 요청했지만 통일부가 방북을 불허했다. 장례위는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통일부의 조치에 유감을 표명했다. 장례위에 따르면 북측의 개성 방문 요청 사실을 통일부에 알렸으나 통일부는 ‘조문단이 서울로 온다면 정중하고 안전하게 편의를 보장하겠지만, 북이 내려오지 못한다면 개성이든 다른 곳이든 일체의 접촉을 허용할 수 없다.’며 방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례위는 이 같은 내용을 북측에 전했다. 북측은 이에 대해 “준비시간 관계상 개성으로 갈 수 없게 됐다.”는 답변을 보냈다. 북측은 박 장로에 대한 조의 표시나 조문단 파견 등을 위한 협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박 장로는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 명예대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지내며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 류우익 통일부 장관 취임 이후 이번 장례 접촉 제의를 통해 남측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떠보기 위한 포석이 깔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장례식 소박하고 검소하게… 노제 생략 김상근 장례위원장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아쉽다.”며 “장례위와 유족의 입장을 정리해 북측에 전하겠다.”고 말했다. 통일부 측은 “유가족이나 장례위 관계자가 방북해 북측 관계자를 만나는 것은 전통적인 장례 예법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박 장로의 장례식은 28일 오전 9시 30분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한신대 신학대학원 예배당에서 ‘겨레장’으로 치러진다. 겨레장 명칭은 ‘통일의 봄길’로 정해졌다. 장례식에서는 고은 시인이 조사를 낭독하고 한명숙 전 국무총리,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이 조사를 한다. 소박하고 검소하게 하겠다는 유가족들의 바람에 따라 운구, 영정 차량은 없이 이동하며 노제 또한 생략한다. 장례식을 마친 뒤 수유리에 있는 통일의 집을 거쳐 오후 1시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와 합장된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부고] 故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 별세

    [부고] 故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 별세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자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인 박용길 장로가 25일 오전 1시 30분 별세했다. 93세. 황해도 수안군 출신인 박 장로는 1944년 문 목사와 결혼한 뒤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쳤다. 통일맞이·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화협·통일연대 상임고문과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명예대표 등을 지냈다. 1995년 6월에 김일성 주석 1주기를 맞아 평양을 방문한 데 이어 2000년 10월에는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초청 인사로 방북하기도 했다. 2005년 남북 화해 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아들인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박 장로는 문 목사가 그랬듯 각막을 기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 목사는 1994년 별세 당시 각막을 기증해 두 명의 환자가 성공적으로 이식 수술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발인은 28일 오전 9시다. 유족으로는 딸 영금씨, 아들 의근(JP모건 시카고 부사장)·성근씨, 며느리 정은숙(성신여대 석좌교수)·김성심씨와 사위 박성수씨가 있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02)2072-2010.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종로, 27일 ‘홍난파 가곡제’ 개최

    종로구가 ‘한국의 슈베르트’ 홍난파(1898~1941)의 가곡을 들으며 초가을 밤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구는 27일 오후 6시 홍파동 ‘홍난파의 집’(서울시 등록문화재 제90호) 앞 월암공원 특설무대에서 ‘2011 홍난파 가곡제’를 개최한다고 25일 밝혔다. 사단법인 ‘홍난파의 집’이 함께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고향의 봄’과 ‘봉선화’ 등 한국인이 애창하는 가곡과 동요들을 선보인다. 가곡제에 앞서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홍난파 선생의 대표곡인 ‘봉선화’가 남긴 의미를 되새기며 가옥 앞에 심은 봉숭아를 따 봉숭아 물을 들이는 문화 체험 행사도 곁들인다. 이어 오후 6시부터 이성배 MBC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소프라노 홍보연, 윤이나, 바리톤 박진석이 ‘그리움’, ‘사랑’, ‘옛 동산에 올라’ 등 가곡을 선보인다. 종로구립여성합창단은 홍난파 동요 메들리를, 남성 9중창단 Il Cuore Singers는 홍난파 가곡 메들리와 ‘사공의 그리움’ 등을 노래한다. 홍난파의 집은 1935년부터 선생이 생을 마감한 1941년까지 살던 곳으로 독일 선교사가 건립한 근대식 가옥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다양한 음악활동을 하며 근대음악의 보급에 힘썼다.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민족의 아픔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로 일제강점기 한국문예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점이 밝혀지는 등 논란에 얽힌 뼈아픈 일을 겪기도 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국가보훈처는 대한제국 시기 러시아 상주공사였던 이범진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가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헤이그 특사를 후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올해는 이범진 공사가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번 선정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광복절을 맞아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연계하며 연해주에서 무장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이범윤 3인의 활동을 되돌아본다. 이범진의 일생은 ‘배일연아’(排日連俄)로 응축된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는 세력 균형 외교를 추구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고종의 명에 따라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려가 일제가 황후를 시해할 것이라 전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아관파천을 계획하고 이를 실현했다. 아관파천은 고종을 일본군의 포위 상태로부터 해방해 친일 내각을 해산하는 등 독립국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정변이었다. ●전재산 독립운동자금 제공하고 목매 이후 이범진은 1896년 주미 공사로, 1899년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3개국 주재 겸임 공사로, 1901년 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돼 국제 무대에서 외교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를 돕고자 노력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지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범진은 대한제국 특사 파견을 위해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범진은 항일혁명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이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편성할 때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군자금 1만 루블을 제공하는 등 동의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러시아 한인들의 민족운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해조신문’ 창간에도 직접 개입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자 유산을 모두 정리해 미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1911년 1월 13일 자결했다. 이범진은 죽기 전 만주에 있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망했다. 폐하도 모든 권력을 잃었다. 나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그들을 벌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범진의 자살은 나라는 망했지만 자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굴의 투쟁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목숨조차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내놓은 것이다.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이 자살로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범진은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지만 그의 아들 이위종은 일제가 부친의 유해를 욕보일지 모른다고 판단해 독립이 될 때까지 부친의 유해를 페테르부르크에 안장하기로 했다. 이위종은 당시 러시아 퇴역 군인 놀겐 남작의 딸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 부친과는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위해 러시아 정교에 귀의했고,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러시아 이름도 사용했다. 이위종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부친을 따라다니며 미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프랑스에서 초등군사교육을 이수하고 러시아의 사관학교에서 장교교육을 받았다. 이런 생활 덕분에 그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평화회의에 파견되었을 때 특사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을사늑약이 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위종은 7월 9일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주제로 유창한 불어로 연설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감동시켰고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이위종 러시아군 장교로 일본군과 싸워 1911년 부친 이범진의 자살은 이위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위종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방황하며 부인과 자녀를 돌보지 않아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위종은 1916년 이후 러시아군과 소비에트군에서 장교로 활동하며 의젓한 항일혁명가로 성장했다. 1918년 이위종은 붉은 군대 장교로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와 한국 공동의 적인 일본 간섭군을 상대로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국 거류민단 집회에서 이위종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진정으로 박해받은 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자유로운 러시아 인민들만이 우리에게 원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범진이 유서를 남긴 만주의 동생은 바로 이범윤이다. 이범진과 이범윤은 둘 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의 후손인데 러시아 문서들은 이 두 사람이 친척 관계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로 간도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맡아 인망을 얻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인부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일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1908년 연추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범윤 의병부대는 1908년 7~9월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안중근도 우영장의 신분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러일전쟁 이후 이범윤의 활동은 이범진과 밀접히 연계된 것이었다. 이후 이범윤은 유인석과 함께 13도의군을 결성하고 그 창의군 총재가 되어 재차 국내 진공작전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성명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19년에는 만주·노령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3·1운동 이후에는 북간도로 들어가 독립군 단체인 의군부 총재, 광복단 단장으로 추대돼 활동하다 1940년 10월 20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 “아버지처럼 고국에 공헌하는 한국인 되고 싶어”

    “아버지처럼 고국에 공헌하는 한국인 되고 싶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아버지의 유언은 어머니와 형을 통해 선우광협(45)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국에서 태어나 두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중국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도 마음 속에는 늘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누리는 안정적인 삶과 한국에서 새로 꾸려가야 할 삶을 두고 끝없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선우씨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진짜 한국인이 되기로 하고 이를 실행했다. ●두살이 되기전에 부친 돌아가셔 11일 국적 증서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선우씨는 들떠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중국 안후이성(安徽省)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충칭(重慶) 남안구 구당부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유공자 선우완(1924~68) 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선우완 선생은 한국 광복군 제1지구대에서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지난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날 법무부에서 국적 증서를 받은 독립유공자 후손 13명 중 직계 아들은 선우씨가 유일하다. 선우씨의 딸 민(6)양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선우씨는 중국 선양에서 제법 잘나가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중국 국영기업에서 근무하다 2004년 화장품 회사 ‘F2F’를 차렸고, 현재는 직원 120명을 거느린 견실한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 화장품 원자재를 수입, 중국에서 재가공해 출시하고 있다. 형과 누나도 중국 고위직 공무원과 교사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뒤 가족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한국 국적 취득 문제였다. 한국인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삶의 기반이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게다가 선우씨의 아들(16)과 딸은 한국말을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도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가족회의를 정말 많이 했어요. 아내의 걱정이 컸지만 결국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제 마음을 받아줬죠.” 중국에서 어렵게 일궈 놓은 안락한 삶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이유는 뭘까. 선우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잖아요. 아버지의 뿌리인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한시도 제 머리를 떠난 적이 없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한국에 공헌하는 한국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형과 누나, 아내와 아들도 조만간 귀화를 신청할 계획이다. 해방 후 고향인 평북 태천군으로 돌아갔던 선우완 선생은 좌우 대립에 실망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뒤 문화대혁명 와중에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1968년 작고했다. 일곱 식구는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내몰렸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렸다. 4남매가 장성해 자리를 잡았지만 항상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참담한 가난을 이겨냈지만 고국에 대한 미련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독립유공자 후손 13명 특별귀화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선우씨는 요즘 귀국 준비에 바쁘다. 딸이 다닐 학교도 알아봤고, 다음주에는 아들과 고국 곳곳을 여행할 계획이다. “화장품 브랜드를 한국에서도 론칭할 계획입니다. 중국과 한국을 잇는 무역 외교사절이 되고 싶습니다.” 한편 법무부는 이날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대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 선우씨 등 13명에게 특별귀화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적증서 수여식은 2006년 이후 6번째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차기 통일연구원장 경쟁 후끈

    오는 8월 초 임기(3년)가 끝나는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통일연구원장(차관급) 자리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연구원 내부 인사와 교수, 탈북자 출신 전문가 등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8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차기 통일연구원장에 박영호(56)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 김동성(65)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안찬일(57)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등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 연구위원은 대북·통일정책·북한인권 전문가로, 통일부·민주평통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연구원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가 서재진 현 원장도 연구원 출신으로 승진했다는 점에서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된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범한 통일시민단체인 자유통일코리아포럼 상임대표를 맡아 ‘풀뿌리 통일운동’을 펼치고 있다. 탈북자 출신인 안 소장이 지원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안 소장은 북한 연구단체인 세계북한연구센터를 이끌고 있으며, 최근 출범한 탈북자 단체인 선진통일북한인연합 상임의장을 맡았다. 안 소장은 1997년 건국대에서 탈북자로서는 첫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탈북자 출신인 조명철 박사가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되면서 관심이 높아졌으나, 연구원장에도 탈북자 출신을 앉힐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와 함께 홍양호(56) 전 통일부 차관도 물망에 올랐으나 이미 차관을 했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강한 대한민국과 자주국방’ 세미나

    (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회장 이동한)은 24일 오후 2시 서울 청파동 통일빌딩 대강당에서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강한 대한민국과 자주국방’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세미나에서는 이동한 회장의 기조연설에 이어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의 사회로 각각 ‘한·미동맹과 자주국방’, ‘자주국방과 국방개혁’을 주제로 한 분과 세미나가 진행됐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외교안보연구실장, 민경자 예비역 육군대령 등이 주제발표를 했다.
  • “취약계층 삶 추슬러 인권이 살아 숨쉬는 도시로”

    “취약계층 삶 추슬러 인권이 살아 숨쉬는 도시로”

    “1980년 5·18 때 각계 시민이 보여 준 ‘공동체 정신’이 현재의 일상 생활 속에 뿌리내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국 지자체 가운데 처음 도입한 광주시 인권담당관(서기관급)에 임용된 이경률(50)씨는 “광주를 명실상부한 ‘인권도시’로 만들기 위해 장애인·이주 노동자·노인 등 취약계층의 삶을 추스르고, 행정과 시민사회 간 소통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취약 계층의 구체적인 실태 파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면서 이들을 돕기 위한 방안 마련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이어 “5·18의 가치를 도시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 등 항쟁 중심지에 윤상원 열사 등의 동상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를 통해 인권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영감을 주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30년간 통일·청년·환경운동에 매달려온 이씨는 “지속가능한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행정과 비정부기구(NGO), 주민 간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인권이 모든 생활 영역에 자리잡도록 그간의 경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이 서기관은 전남대 불문과를 나와 전남민주주의 청년연합 의장과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사무처장 등을 지냈으며, 지난 1991년 분신 사망한 전남대생 박승희씨 장례와 통일운동 참여 과정에서 각각 공무집행방해와 국가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두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국군 모범용사 독립기념관·포스코 방문

    국군 모범용사 독립기념관·포스코 방문

    서울신문과 국방부가 선정한 국군 모범용사 60명과 배우자들이 초청 행사 3일째인 15일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방문했다. 모범용사 부부들은 오전 10시 독립기념관에 도착해 2시간 동안 전시관 곳곳을 둘러보면서 조국수호의 의지를 다졌다.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듯 진지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사,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등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히 살펴봤다. 육군 특수전사령부 서수석(55) 주임 원사는 “군생활 중에 이런 기회가 없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됐다.”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군생활에 다시 한 번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오찬은 안희정 충남지사가 함께했다. 안 지사는 “고향이 논산 연무대라 어릴 적 연무대 기상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면서 “안보에 여야, 좌우가 있을 수 없고 국방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범용사들은 오찬이 끝난 뒤 경북 포항으로 가 포스코를 견학하고 저녁을 먹은 뒤 경주에서 숙박했다.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인촌길’ 다시 ‘개운사길’로

    성북구가 안암동 소재 조선시대 사찰 개운사의 진입로 이름을 종전 ‘개운사길’에서 ‘인촌길’로 바꿨다가 친일 논란이 일자 되돌렸다. 발단은 이렇다. 구는 2007년 도로명 주소법에 따라 지난해 6월 개운사 진입로인 ‘개운사길 51’을 주(主)도로인 인촌로의 이름을 따 ‘인촌로 23길’로 바꾸고 지난달 이를 개운사 측에 알렸다. 주도로 명칭은 광역자치단체 소관이라 앞서 4월 서울시는 인촌로 일련번호를 매겼고, 성북구 도로명주소위원회는 샛길 이름을 붙이면서 통일성을 기한다는 취지로 이같이 결정했다. 그러나 개운사와 항일운동단체들은 “일제강점기 항일 불교운동의 거점이었던 개운사 진입로에 친일인사 김성수의 호를 딴 이름을 용납할 수 없다.”며 환원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구는 행정안전부에 도로명주소법상 ‘개운사길’이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질의해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고 7일 밝혔다. 행안부는 “지정 문화재인 종교시설을 포함하면 가능하다.”며 “개운사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해 국가지정문화재 5건이 있어 문화재 지정 사찰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답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박세일 “리더십 표류가 통일 어렵게 해”

    박세일 “리더십 표류가 통일 어렵게 해”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이끄는 선진통일연합이 6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황우여 한나라당 대표권한 대행, 김문수 경기지사, 정두언 한나라당 전 최고위원,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등 5000여명의 하객과 발기인이 행사장을 찾아 ‘박세일 파워’를 실감케 했다. 전국 시·군·구에서 올라온 회원은 물론 해외 지부 및 탈북자 출신 인사들도 대거 참여했다. 참가자들이 넘쳐나 3개의 별실을 따로 마련할 정도였다.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은 박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통일을 어렵게 하는 것은 패배의식과 내부 분열, 표류하는 국가사회의 리더십”이라면서 “선진통일운동은 나라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운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자회견을 갖고 “일각에서 범우파 운동이라고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선진화와 통일은 개혁적인 보수와 합리적인 진보가 힘을 합쳐야 이룰 수 있다.”면서 “이익 중심의 현재 정치로는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없는 만큼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국민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박세일 위원장의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은 축사에서 “통일운동을 이끄는 박 위원장에게 심심한 사의를 보낸다. 대한민국 만세, 박세일 만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도 “박 위원장은 우리 모두가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강직한 학자요, 당대의 사상가”라고 치켜세웠다. 광역단체장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김문수 경기지사는 “이 행사장은 보통 대통령 후보 출정식이 열리는 곳”이라면서 “애국심은 없고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만 판치는 여의도의 물길을 시원하게 물갈이하는 정치혁신 운동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기표 원장도 “투철한 역사적 사명감을 가진 박 위원장이 통일운동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선진통일연합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원하는 전국 조직인 ‘희망포럼’과 지난 2일 발족한 선진국민연대 후신 격인 ‘대통합국민연대’, 이재오 특임장관을 지지하는 ‘평상포럼’, 관변단체인 자유총연맹, 대통령 직속 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 보수 성향의 조직들과 ‘보수 가치 재정립’을 놓고 경쟁할 전망이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이 이들 단체에 겹치기로 가입한 상황이어서 여권의 대선 후보가 확정되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합쳐질 가능성도 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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