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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러 이주 올해 150돌 이달부터 기념행사 대거 개최

    조선인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지 올해로 150주년을 맞는 가운데 오는 10월 관련 기념행사들이 대거 열린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오는 10월 9∼12일 서울 광화문과 고려인 밀집지역인 경기 안산 ‘땟골’에서 기념행사를 열기로 확정했다고 2일 밝혔다. 기념사업 추진위는 한글날인 9일에는 광화문에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 중인 고려인 150명을 초청해 ‘국민 참여 한마당’을 연다. 10일에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공식 기념식이 예정됐다. 11∼12일에는 고려인 최대 밀집 지역인 안산 단원구 선부2동 땟골에서 ‘고려인 페스티벌’이 열린다. 국내 고려인 동포들이 대거 참여할 예정이다. 각종 세미나와 학술대회도 이달부터 이어진다. 오는 10일에는 2011년 설립된 최재형장학회가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던 최재형 선생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최재형 선생 순국 94주기 기념 세미나’를 연다. 해외에서는 9월 20∼24일 연해주에서 고려인 축제가, 10월 5∼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콘서트와 세미나 행사가 예정됐다. 시베리아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다른 4개 도시에서도 고려인 문화축제와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유교, 美독립에도 영향… 시대 맞게 개혁할 것”

    “유교, 美독립에도 영향… 시대 맞게 개혁할 것”

    “1000만 유림의 본산인 성균관이 재건운동과 대오각성을 거쳐 다시 서게 돼 다행입니다. 전통문화 창달과 성학(聖學)의 도통을 정립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최근 선거에서 5명의 후보를 제치고 제30대 수장에 선출된 서정기(76) 성균관장은 27일 “비록 가난하지만 이제 도(道)를 펼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성균관의 1년 예산이 10억원인데 빚이 75억원이라는 현실을 해학으로 받아쳤다. 성균관은 전임 관장의 국고보조금 횡령 사건으로 1년 가까이 내홍을 겪어왔다. 그 파란을 의식해서일까. 서 관장은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균관과 유림의 낡은 관행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겠다”고 거듭 밝혔다. 우선 유림 행사 때도 양복도 입는 등 융통성 있는 옷차림을 권장할 계획이다. 성균관에서 갈라졌던 ㈔유도회와 성균관유도회를 통합해 40년 묵은 분규도 해결하겠단다. 그는 일반인들이 어려워하는 유학의 예법을 우선 간소화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전통혼례 때 신랑은 절을 두 번 하고 신부는 네 번 하는 근거 없는 예법을 없애 남녀 똑같이 하도록 하겠단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서 관장은 ‘운동권’ 출신이다. 4·19혁명과 통일운동에 참여했고 5·16군사정변에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 석 달 넘게 갇혔다. 퇴학과 재입학을 거듭하며 대학을 졸업했으나 1979년 유신독재에 맞서다가 구금됐다. 유림에서는 거의 ‘파문’을 당했지만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줄곧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5경(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과 5서(논어·맹자·중용·대학·예운)를 새롭게 주석해 47권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가 성균관의 대개혁을 천명한 바탕은 유교의 우수성이다. “공자 사상이 멸절된 줄 알죠. 프랑스혁명의 바탕인 계몽주의와 영국 산업혁명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 독립선언서는 대학(大學)을 참고문헌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도 유학을 공부했고요.” 서 관장은 유교의 우수성을 알리는 ‘민중유교’론을 강조했다. “조상의 은공에 감사하고 정결한 부부생활을 하고 성실하게 세금 내면서 살면 모두가 유림이지요.”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모닝 브리핑] 美 소도시 2곳 ‘동해 단독 명기’ 결의안 채택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도시들이 3·1절을 맞아 동해(East Sea)를 단독 명기한 3·1절 기념 결의안을 채택했다. 2일(현지시간)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해외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캘리포니아주 다이뉴바시와 리들리시 정부는 지난 1일 3·1운동 기념식을 열고 이 같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해 명칭을 단독 명기한 결의안을 미 지방 정부가 채택한 것은 조지아주에 이어 두 번째다. 다이뉴바 시정부는 전쟁 중 종군위안부와 중국 내 탈북 여성 인신매매 등 여성 착취를 규탄하는 내용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두 도시는 100여년 전 미 본토에서 최초로 한인들이 집단 정착했던 지역이자 해외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고려인도 항일운동… 외국인 아닌 동포예요”

    “고려인도 항일운동… 외국인 아닌 동포예요”

    지난 27일 오후 10시 경기 안산시 단원구 땟골마을의 고려인(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의 후예) 동포 지원단체 ‘너머’ 사무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시간, ‘너머’가 운영하는 한글야학 교실에는 30여명의 고려인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칠판에 적힌 한글을 한 자씩 더듬더듬 읽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박알렉산드라(왼쪽·60·여)씨는 “3·1절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번도 고려인이란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면서 “이번 ‘3·1 만세 기념식’에 참여해 역사적 의미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2006년 일자리를 찾아 홀로 한국에 온 박씨는 “한글은 책과 TV를 보면서 배웠지만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는 없었다”면서 “고려인들에게 한국의 기념일을 소개하고 역사를 알려주는 행사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3·1절을 맞아 안산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익수, 윤동욱 선생 등 독립유공자 묘역을 참배하고 선언서 및 기념사를 낭독하는 ‘안산 3·1 만세 기념식’이 열린다. 안산 지역사 연구모임과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 및 문화복지 지원을 위한 안산시민 원탁회의’가 주최한 이 행사는 항일운동의 후예인 고려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고려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김종천 안산미디어공동체 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인을 동포가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한다”면서 “일제 강점기에 고려인들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위해 항일 운동을 벌였다는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고려인을 같은 민족으로 보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해주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삼으며 항일 투쟁을 벌인 고려인들은 1937년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올해는 제정러시아 당국이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를 공식 허가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3만명으로 주로 안산, 동대문, 부산, 광주 등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시화·반월공단이 있는 안산에는 5000명 이상의 고려인 동포들이 모여 산다. 2003년 한국에 왔다는 고려인 임이고리(오른쪽·53)씨는 “한국인 고용주들이 고려인들을 상대로 월급을 두세 달 체불하는 것은 예삿일”이라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승력 ‘너머’ 사무국장은 “고려인 동포들은 모국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커서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안산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일제, 조선인부대로 항일 조선인 열사를 치다

    일제, 조선인부대로 항일 조선인 열사를 치다

    간도특설대/김효순 지음/서해문집/384쪽/1만 5000원 1938년 9월, 일본이 중국 북동부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 치안부 산하에 조선인특설부대 창설이 결정됐다. 특설부대는 일본인 장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주요 임무는 항일 무장 세력의 섬멸이다.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조사한 항일 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이 98%를 차지한 것을 보면, 결국 이 부대는 일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의 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만 해도 이 부대를 ‘민족의 자랑’ ‘무적의 상승부대’로 평가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 선임지휘관이었던 김석범은 ‘만주군국지’(1987년 10월)에 “일제 탄압하에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그 공훈은 건국건군사에서 빛나고 있다”고 썼다. 부대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독립군은 보지도 못했고 토벌 대상은 공비나 팔로군이었을 뿐”이라고도 했다. ‘공비’라는 표현으로 척결 대상을 희석시켰지만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치안기관이 당시 항일세력을 ‘공비’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결국 대상은 항일 조선인이었던 셈이다. 간도특설대의 존재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창설 배경과 가담자, 활동 양상 등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대부분 자료가 중국과 일본에 분산돼 있기 때문이다. 신간 ‘간도특설대’를 낸 김효순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는 20일 전화통화에서 “간도특설대는 우물쩍 끝낼 문제가 아닌, 치욕의 역사”라면서 “누군가는 간도특설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책은 간도특설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지리적 의미, 파시즘과 군국주의 투쟁, 항일연군의 정체와 풍상,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장교들의 전후 행적과 출세 가도까지를 매우 포괄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가 낸 문서를 비롯해 관동군헌병대 자료, 만주군에 근무한 일본인들의 희귀 자료집 등을 치밀하게 활용했다. 특히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1993)와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2000)의 일어판을 파헤친 것이 눈에 띈다. 백 장군은 한국어판에는 이 부대에 대해 말을 극히 아끼지만 일어판에는 훨씬 상세하게 서술했다고 소개했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연군을 일소한 것을 언급하고는 “특필해야 할 전과를 올린” 부대로 평가하고, 한겨울 눈 속에서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한 사명감에 타오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매복을 했음을 회고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의 의문은 풀리지만, 끝내 맞닥뜨리는 한국사의 모순에는 답답해진다. 만주군에서 활동한 박정희가 해방 조선에서는 ‘광복군 정신이 씩씩하게 넘친다’는 내용의 노래 가사를 썼다는 건 유머 수준이다. 항일투사 자손인 박남표 장군이 만주 관동군 헌병보좌관 출신인 허정일에게 되레 “빨갱이 집안”이라는 모략을 당하거나, 항일운동을 한 송지영이 5·16군사정변 이후 특수반국가행위 위반으로 극형을 선고받자 독립운동가 50여명이 박정희에게 관용을 애원하는 상황 등은 먹먹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일본인 심금 울리는 윤동주 詩… 日서 추모 열기

    일본인 심금 울리는 윤동주 詩… 日서 추모 열기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16일 일본 도쿄 니시이케부쿠로의 릿쿄대학 교회. 전전날 폭설의 영향으로 강풍이 부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250여명이 자리를 가득 채운 가운데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윤동주 시인의 69주기인 이날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인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 시인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열었다. 시인은 25세이던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릿쿄대학 출신으로 윤동주 시인의 사연에 감동을 받은 야나기하라 야스코를 주축으로 모임을 만들어 2008년부터 매년 윤동주 시인의 기일에 맞춰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행사는 매년 200~300명이 찾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이날 행사에서는 ‘아우의 인상화’, ‘햇빛·바람’, ‘자화상’, ‘사랑의 전당’, ‘쉽게 씌어진 시’, ‘서시’ 등 5편의 시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낭독했다. 또 일본·조선(한국) 근대사 전문가인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가 “역사연구자가 본 윤동주”라는 주제로 윤동주 시인의 창씨개명 여부와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 등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야나기하라는 “약 20년 전 윤동주 시인이 겪은 일을 알게 되면서 매우 가슴이 아팠다. 그가 일본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도쿄에서 집필한 미작성 원고는 없는지 조사를 하고 윤동주 시인에 대해 많은 일본인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 행사를 치러 왔다”고 설명했다. 또 야나기하라는 “윤동주 시인이 겪은 아픔과 그의 시가 일본인들에게도 심금을 울리게 하는 면이 있다”면서 “나 같은 전후 세대는 과거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윤동주 시인이 겪은 일을 비롯해 과거의 진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한국인들에게도 제대로 인정을 받고, 양국 관계도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이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대女 시험 계속 떨어지자 택한 방법이…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는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항일투쟁’ 안승갑 선생 유고집 내년 발간

    태평양전쟁의 종전을 9개월여 앞둔 1944년 12월 29일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고려 독립 청년단’이 결성됐다. 항일운동 단체였지만 청년단을 조직한 10여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일본군 소속의 포로 감시원이었다. 일본군에게 극심한 차별을 받았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당시 필리핀과 미얀마의 독립 선포에 고무돼 청년단을 조직했다. 청년단은 1945년 자바섬 동부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등 일본군에 저항했다. 1942년 6월 자바섬 반둥시의 일본 제16군 포로수용소에서 연합군 포로 감시를 시작한 안승갑(1922~1987)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안 선생의 아들인 안용근 충남대 교수는 29일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야학을 개설하고 독립운동가와 접촉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발각된 뒤 일본군 군속(군무원)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 선생은 당시 자바섬에 있던 조선인 인명부와 조선인 군속들이 저축한 예금 내용을 적은 ‘사금회수증명서’ 등을 남겼다. 안 교수는 “아버지는 1947년 귀국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체불 임금과 위로금 배상청구 운동을 벌였고 청년단 활동가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도록 힘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안 교수는 내년 초 안 선생의 호를 딴 ‘낙산 유고’라는 책을 출간한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유고집을 통해 이들의 기구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재일교포 의사 출신 세계적 크로스오버 뮤진션 양방언

    [김문이 만난사람] 재일교포 의사 출신 세계적 크로스오버 뮤진션 양방언

    한 남자의 넋두리를 들어본다. “왜 나는 이 시대, 제주도의 아버지와 신의주의 어머니 사이에서 ‘양’이라는 성을 지니고 도쿄에서 태어나 조총련계 학교에 다니고, 일본의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었고, 그러다가 음악을 선택해서, 일본과 아시아권에서 음악을 하고, 유럽에서 레코딩을 하며, 성당에서 음악을 듣고, 지금은 일본의 고원에 거주하면서 나의 나라 한국에서 음악을 왜 계속하고 있는가.” 인생을 살면서 ‘왜’라는 의문부호는 숱하게 접할 터. 어떤 좌절의 순간이나 결단의 기로에서 ‘왜’로 인해 인생이 확 달라지기도 한다. 하여, 남자는 다시 읊조린다. “수천 가지가 되는 ‘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경계를 그을 수도, 매듭을 지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왜’가 재미있다. 나에게 한없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왜’이다. 그 ‘왜’는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이 남자가 우리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가 ‘프런티어’를 작곡하면서였다. 이후 MBC 드라마 ‘상도’의 메인 타이틀곡 작곡, KBS 다큐멘터리 ‘도자기’와 ‘차마고도’ 음악감독,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음악감독, 엔씨소프트 게임음악 ‘아이온’ 총감독, ‘아스타’ 게임 OST 음악작업, 2013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 개막공연에서 배병우, 황병기 등과 ‘토크 콘서트’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내팬들과 친숙해졌다. 특히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때 ‘아리랑 판타지’를 작곡해 직접 피아노를 치고 가수 인순이, 뮤지컬 배우 최정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국악인 안숙선 등과 무대를 함께해 주목을 받았다. 이쯤 되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듯싶다. 한국, 일본, 중화권에서 활동하면서 런던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으로 유명한 크로스오버 뮤지션 양방언(53)씨. 재일교포 의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으로 작곡가, 연주가, 편곡가, 프로듀서 등 전방위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록, 월드뮤직, 재즈 등 여러 음악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러한 폭넓은 창작활동은 물론 국립극장 예술감독, 서울시 홍보대사 등을 맡아 사회활동에도 분주하다. 지난 10월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를 찾아 돌문화공원에서 도민 2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양방언의 제주판타지’를 공연해 제주와 음악적 인연을 ‘찐’하게 맺었다. 또한 이 자리에서 그가 직접 새롭게 작곡한 ‘해녀의 노래’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제주 동부지역의 ‘해녀의 노래’는 일제 강점기인 1933년 당시 동경행진곡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양씨가 작곡한 온전한 우리의 ‘해녀의 노래’(현기영 글)로 불려지게 됐다. 양씨에게 올해는 이래저래 특별한 해이다. 바쁜 일정도 그렇지만 다가오는 크리마스 시즌에는 그동안 숨겨놓은 비장(?)의 음악을 선보이며 한 해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의 넋두리처럼 ‘왜’가 궁금해서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양씨를 만났다. 공연 얘기부터 나왔다. 제목이 ‘크리스마스 피아노 판타지’인 것에 대해 그는 “피아노는 내 음악 인생의 시작점이었고 현재도 근간을 이루고 있다”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고전적 악기인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선율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총체적 공간, 미지의 세계를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곡들을 엄선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의 음악인생 30여년을 결집시켜 다양한 퍼포먼스와 영상이 어우러진 판타지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전국의 의대생들로 구성된 음악 봉사단 ‘스마일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무대를 통해 불우 이웃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감동을 선사한다.(23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이달 중순 ‘피아노 판타지’ 음반과 생애 첫 악보집이 나올 예정이다. 여기에는 ‘프런티어’ ‘아리랑 판타지’ 등 그의 베스트곡을 비롯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2집 앨범 ‘인투 더 라이트(Into the light)’의 대미를 장식한 감미로운 피아노 솔로 연주곡 ‘피시스 오브 드림’(Pieces of Dream) 등이 담겨진다. “틈틈이 신작을 작곡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곡 안으로)들어가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때가 가장 좋습니다. 특히 이번 공연에 선보이는 피아노곡은 그동안 저의 음악인생을 응축시킨 곡으로 의도적으로 다양한 장르를 모았습니다. 게임음악도 있고 영화음악도 있고 스토리도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할 때 어떤 제약이나 경계 없이 넘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말투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중간중간 해맑은 웃음이 담겨 있다. 음악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음악 없이는 못 살아간다. 의사를 그만두고 음악인생을 살면서 흔들려본 적이 없다. 음악은 행복이고 산소”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음악에는 수학에서의 x축, y축, z축처럼 여러 축이 있고 그 차원을 넓혀가면서 새로운 감성을 찾아내는 일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 축 중에 하나가 바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상음악이다. 1995년 홍콩스타TV 드라마 ‘정무문’의 음악감독을 맡아 중화권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음악과 영상매체의 환상적인 호흡을 실감했다. 이후 성룡 주연의 영화 ‘썬더볼트’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십이국기’ ‘채운국 이야기’ ‘영국사랑 이야기-엠마’, 그리고 한국에서의 방송과 영화 등의 음악감독을 맡아 이 방면에 한 축을 이루었다. 의사출신인 그는 어떻게 음악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도쿄에서 제주 협재 출신인 친북 성향의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재일교포 2세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 형과 누나들도 의사나 약사일 만큼 의학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한테 양방언(梁邦彦)이라는 이름자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양’은 성씨이니 집안 내력의 상징이고, ‘방’은 많은 나라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사는 동안 일본 이름을 가진 적도, 쓴 적도 없었다. 중국에서도 양방언(Liang Bang Yen)으로 통했다. 그만큼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린 시절 그는 피아노를 치는 누나 덕분에 집에서 클래식, 재즈, 팝, 영화음악, 가요 등 다양한 음악을 자주 접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조총련계 학교에서 보냈다. 당시 병원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학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 계기가 됐다. 중학시절에는 친척 형 집에 놀러갔다가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접하면서 음악의 놀라움을 체험했다. 이때부터 음악을 들을 때마다 ‘왜’라는 많은 의문을 갖게 됐다. 공부하는 척 방 안에 틀어박혀 여러번 반복해서 헤드폰과 스피커로 음악을 바꿔 들으며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일본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밴드활동을 했다. 음악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당시 집안 분위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의학공부를 하면서 독일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콘라드 한센에게 피아노 레슨을 계속 받았다. 또한 여러 세미프로 음악인들과 자주 만나면서 음악적 영역을 넓혀나갔다. 1984년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 등을 거쳐 마취과 의사가 됐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두 글자가 한번도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드디어 결심을 했다. 도쿄대 병원으로 발령받고 며칠 뒤 병원 의국장한테 찾아가 의사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알렸다. 어머니는 충격에 엎드려 울었다. 형과 누나들은 노발대발 화를 냈다. 우여곡절 끝에 음악의 길로 방향을 튼 양씨는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며칠동안 전전긍긍하다가 대학동기의 권유로 낡은 아파트를 구해 10년동안 살았다. 집을 나올 때 가진 돈이 5만엔뿐이어서 건강진단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음악 기자재 등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음악을 같이할 동료들을 만났고 스튜디오와 라이브 무대로 꾸준히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당시 라이브 투어로 유명한 하마다 쇼고를 만나면서 전국 투어를 수차례 경험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는 한편 CF 음악 제작, 레코딩, 편곡 등을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 레코드 회사에서 홍콩의 록밴드를 프로듀스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비욘드’ 멤버들과 만나면서 중화권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한국 국적을 받은 계기는 이러했다. 조선적(朝鮮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과는 다르며 일본 법률상 무국적이다)인 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려고 일본 법무성에 문의하자 성(姓)을 일본 성으로 바꿔야 한다는 대답을 듣고 그럴 수가 없어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1999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음악활동을 하게 됐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내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때 평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음악으로 작곡하게 될 것같다”고 귀띔한 뒤 “음악을 통해 좋은 작품을 만나고 멋대로 살고 싶다. 또한 아버지가 태어난 제주가 너무 아름다워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해보는 작업도 할 것”이라며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양방언은 영화 ‘천년학’ 게임 ‘아이온’ 등 음악감독 朴대통령 취임식 ‘아리랑 판타지’ 작곡도 1960년 일본 도쿄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주도 한림읍 협재리 출신이고 어머니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이다.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시절에 밴드 활동을 했고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키보드 연주자, 작곡가, 사운드 프로듀서로서 1980년에서 1995년까지 레코딩, 라이브에 꾸준히 참가했다. 마취과 의사를 그만둔 뒤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재개했으며 록, 재즈, 클래식, 국악, 월드뮤직 등 다채로운 음악성으로 호평받았다. 1996년 일본에서 첫 솔로 앨범인 ‘더 게이트 오브 드림스’(The Gate of Dreams)를 발매했다. 이후 7장의 앨범을 출시했으며 런던 교향악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의 유명 관현악단들과 협연했다. 2001년 발매된 ‘파노라마’(Pan-O-Rama)는 한국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고, 앨범에 수록된 ‘프런티어’(Frontier!)는 2002년 부산아시안 게임의 공식 주제가로 채택됐다. 1999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본 NHK 애니메이션 ‘십이국기’, 홍콩 드라마 ‘정무문’, 성룡의 영화 ‘썬더볼트’, MBC 드라마 ‘상도’, KBS 다큐멘타리 ‘차마고도’, 영화 ‘천년학’ 등에서 음악작곡을 했다.
  • 별이 된 ‘베트남의 별’

    별이 된 ‘베트남의 별’

    ‘영원한 무인’으로 평가받는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예비역 중장)이 25일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했다. 모태신앙을 지닌 그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임관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때 9연대로 발령받아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중령으로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불리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4후퇴 무렵,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백골부대는 정식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 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 후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당시 대령과 인연을 맺었다.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은 그를 박정희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5사단장이던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 박정희 당시 소장을 도왔다. 당시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군복이 더 좋다면서 과감히 돌아섰다. 1965년 8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69년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72년 박 대통령은 그를 불러 유신의 뜻을 내비치며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국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같은 해 6월 전역했다. 사실상 강제 예편이었다. 군 복무기간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최고2등훈장, 미국 공로훈장, 타이완 공로훈장, 필리핀 명예훈장, 태국 왕관훈장, 브라질 문화훈장 등 외국 훈장도 다수 받았다. 2000년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과 2004년 사단법인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을 거쳐 같은 해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 등을 맡아 활동했다.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지며, 28일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02)3010-2631.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별이 된 ‘베트남의 별’

    별이 된 ‘베트남의 별’

     ‘영원한 무인’으로 평가받는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예비역 중장)이 25일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했다. 모태신앙을 지닌 그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임관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때 9연대로 발령받아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중령으로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불리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박해진 1951년 1·4후퇴 무렵, 대구에서 단 3주간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백골부대는 정식 군번도 없이 적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벌였다. 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 끝에 1951년 4월 강릉으로 귀환했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647명 중 283명밖에 되지 않았다.  휴전 후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당시 대령과 인연을 맺었다.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은 그를 박정희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5사단장이던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 박정희 당시 소장을 도왔다. 당시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군복이 더 좋다면서 과감히 돌아섰다. 1965년 8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69년 4월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72년 박 대통령은 그를 불러 유신의 뜻을 내비치며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결국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같은 해 6월 전역했다. 사실상 강제 예편이었다. 이후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을 역임했다.  군 복무기간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최고2등훈장, 미국 공로훈장, 타이완 공로훈장, 필리핀 명예훈장, 태국 왕관훈장, 브라질 문화훈장 등 외국 훈장도 다수 받았다.  2000년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과 2004년 사단법인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을 거쳐 같은 해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 등을 맡아 활동했다.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지며, 28일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02)3010-2631.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데스크 시각]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하는가/박찬구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하는가/박찬구 사회부장

    지난 3일은 제84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적 항일운동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군사정부와 유신시대에 정권의 홀대를 받아 폐지되기도 했지만, 민주화 정부 당시인 2006년 현재의 이름으로 부활했다.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광주를 비롯해 일부 시도교육청과 학교에서 조촐하게 열렸을 뿐이라고 하니, 일본의 역사왜곡이 기승을 부리는 마당에 씁쓸한 일이다. 위로부터의 기념식은 초라했지만, 젊은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는 이날도 이어졌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과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청소년 단체와 대안학교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사회를 만들어’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지역별, 대학별 시국선언도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84년 전 제국주의 일본을 향했던 분노가 무소불위한 정보기관의 반(反)헌법적 행태를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비단 항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랜 민주화 투쟁사에는 젊은 학생들의 행동과 희생이 따랐다.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민주화 정부 10년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사회 변혁의 부채를 안겨야 하는 현실은 모순되고 가혹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대학가의 정치편향과 이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국가 기관이 지난 대선 기간에 저지른 사안의 흑백은 명확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가치를 훼손하고, 유권자의 표심(票心)과 여론을 우롱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일부 직원의 일탈이라고 항변하지만, 조직적이고 반복된 범법 행위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해명은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음습한 과거 이력과 상명하복의 조직 특성을 생각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를 두고 정치 공세니, 대선 불복이니 하며 정치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 또한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행태라 할 수 있다. 헌법 정신이 유린당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될 처지에 정파의 이익과 정치의 유불리를 따질 일은 더더욱 아니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여권은 검찰 수사를 지켜보겠다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제3자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 정보기관의 근본적인 개혁과 인사조치를 비롯한 선제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보이는 게 옳다. 단순히 재발방지의 차원을 넘어, 권력기관이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균형과 견제 장치를 마련함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것이 소모적이고 작위적인 정쟁을 차단하고, 정치권이나 국민 모두가 더 큰 불행과 비극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처방이 될 것이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에겐 사회로 향하는 첫 번째 고비가 될 관문이다. 격려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수능의 모범답안과는 달리 그들이 뛰어들 대학과 사회가 원칙과 정의, 상식에 항상 부합하지는 않기 때문일 터다. 바람이라면,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해야 하는지 그 ‘시선’을 공유하고 싶을 따름이다. ckpark@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후설(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엮음, 한국고전번역원 펴냄) 후설은 목구멍(喉)과 혀(舌)라는 뜻으로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정원의 별칭이다. 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이 ‘후설’(喉舌)이란 이름으로 일기의 정수만을 골라 책을 펴냈다. 승정원일기는 정7품 관원인 주서들이 임금을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국정의 이모저모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국보 303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이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또 영조대와 고종대에 화마를 치르며 많은 분량이 소실됐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인조 이후의 조선왕조 288년치 기록이다. 그런데 이 분량만도 무려 3245책, 2억 4300만자로 왕조실록의 5배가량이나 된다. 단일 서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이다. 292쪽. 1만 2000원. 위험한 언어(울리히 린스 지음, 최만원 옮김, 갈무리 펴냄) 국제 공통어인 에스페란토에 얽힌 희망과 고난의 역사를 담았다. 1887년 폴란드 안과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 박사는 인종, 언어,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소통할 언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창안한 언어가 바로 에스페란토다. 에스페란토는 ‘만국공통어’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내걸었지만, 가시밭길을 걸었다. 좌우파나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숱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유는 다양했다.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의 좌파적 성향이 문제가 됐고, 유대주의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정치 상황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서유럽 국가에서는 초기 에스페란토 지지자들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통합을 위해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고 선언했다가 ‘위험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낙인찍혔다. 독일 정치학자인 저자는 의사소통의 권리가 인권의 하나로 여겨지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에스페란토의 미래가 밝다고 말한다. 628쪽. 3만원.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김삼웅 지음, 현암사 펴냄) 여천(汝天) 홍범도(1868~1943)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평전이 출간됐다. 독립전쟁의 전설로 불리는 홍범도는 평양에서 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수 출신으로 사격 실력이 뛰어난 데다 신출귀몰해 간도와 극동 러시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독립투쟁 사상 가장 빛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도 실은 그가 주도했다. 하지만 해방 후 남북에서 모두 철저히 배제된다. 남쪽에선 그의 볼셰비키 입당 경력이 문제가 됐다. 북쪽에선 김일성 우상화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또 공산 정부 수립이 아닌 민족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논리에 휘말렸다. 책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나 1943년 10월 75세를 일기로 생을 달리한 홍범도에 대해 유해 귀환 논의조차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한다. 312쪽. 1만 8000원. 광신(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우리시대의 광신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인가, 이에 저항하는 몸짓인가.’ 책은 이런 물음에 답을 준다. 책의 주인공은 ‘관용과는 담을 쌓았고 소통은 불가능하며 어떤 논쟁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오직 상대편의 관점이나 생활방식이 뿌리 뽑힐 때라야 비로소 안도하는’ 광신자들이다. 역사에서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로 등장했다. 천년왕국운동, 노예폐지론자, 농민 혁명가,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까지 인류는 수많은 광기의 역사를 경험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광기를 부채질한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들의 신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비이성적인 병리 현상으로만 치부해야 할까. 책은 모든 급진적인 시도에 ‘광신’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말고, 정면으로 맞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454쪽. 2만 2000원.
  • 일제… 유신… 광주… 낮은 곳에서의 80년

    일제… 유신… 광주… 낮은 곳에서의 80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선교회 측은 한국 진출 80년이 되는 오는 2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개회미사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10일 밝혔다. 이에 따라 내년 4월 27일까지 전국 순회 미사·음악회를 비롯해 6·25전쟁 골롬반선교회 순교자 영상전 등 80년사를 정리한 물품전시회 등이 잇따라 열리게 된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유일하게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국제 가톨릭 선교단체.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현장에서 함께 활동한다’는 설립 목적을 갖고 있다. 1933년 10월 29일 아일랜드의 선교사 10명이 부산항에 입항한 게 한국 진출의 시초. 선교사들은 대구교구 신학교에서 한국말을 배워 광주·목포·순천·제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유배지 흑산도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정치인들과 협상하지 말고, 한국어를 배우라’는 초대 감목대리 맥폴린 신부의 지침을 따라 빠르게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활동 중인 사제 35명과 평신도 3명을 포함해 지난 80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회 신부는 266명에 달한다. 서울대교구 30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131개 성당을 건축해 한국 교회에 넘겨준 것으로 집계된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추방,가택 연금된 신부도 부지기수. 6·25전쟁 중에는 골롬반선교회 신부 7명이 순교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는 선교회에서 야학과 노동사목을 폈으며 지학순 주교 투옥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철수 지시를 받고도 “6·25전쟁 때에도 나가지 않았다”며 시민들과 함께한 일화는 유명하다. 정부는 1999년 선교회 신부 3명에게 독립유공훈장을 수여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인 아일랜드 출신 오기백(63·본명 도날 오 키프) 신부는 “사회가 변한 만큼 교회도 변했고 이에 따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며 “지난 8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월드뉴스 Why] 中 지방정부까지 휩쓰는 ‘자아비판 운동’ 왜

    [월드뉴스 Why] 中 지방정부까지 휩쓰는 ‘자아비판 운동’ 왜

    중국 전역에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년) 당시 성행했던 ‘비판 광풍’이 거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 최고지도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인이 전국 각지에서 ‘군중노선’ 교육 및 실천 활동을 벌이면서 정풍(整風)의 정신으로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3일 보도했다. 이러한 비판 광풍은 각 지방정부로 확산된 상태이며 조만간 국영기업 등 일선 기관 및 대학가에서도 실시될 예정이다. ‘비판과 자아비판’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옌안(延安)을 근거지로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과 항일운동을 벌이던 1942년 봄에 주창한 것이다. 그는 3년간 이어진 이 캠페인을 통해 당시 소련과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의 지지를 받은 정치적 라이벌 왕밍(王明)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당원들의 사상을 통일시키고 복종을 이끌어 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마오는 1945년 제7차 전국대표대회(5년마다 열리는 당 최고기구) 당시 ‘비판과 자아비판’을 공산당원이 반드시 견지해야 할 3대 작풍(作風·업무 스타일) 중 하나이자 당원의 의무라고 당장(黨章·당헌)에 명기했다. 이후 반(反)우파 운동, 문혁 등 반대파를 쳐내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던 주요 시기마다 이 캠페인을 이용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시 주석이 최근 반부패와 함께 ‘비판과 자아비판’을 실시하는 것도 집권 초기 권력기반을 다잡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그는 지난 9월 23~25일 허베이(河北)성에서 이 지역 당 지도부와 함께 실시한 ‘비판과 자아비판’ 회의에서 “‘비판과 자아비판’은 당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마오의 말을 상기시켰다. 당초 취지처럼 자아 및 상호 비판으로 당원 간 갈등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당의 사상을 통일시킴으로써 지도부에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전한 셈이다. 하지만 개혁파는 ‘비판과 자아비판’이 원래의 취지대로 자율적인 감시·감독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지도부의 ‘정치 쇼’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옌안에서 마오가 처음 ‘비판과 자아비판’ 운동을 벌일 때에도 일부 지식인들이 캠페인의 취지대로 상급자를 비판한 대자보를 붙였다가 마오에 의해 ‘(노동자를 착취하는)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돼 척결된 바 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홍사덕 민화협 의장 추대… ‘친박 원로’ 속속 귀환

    친박(친박근혜)계 좌장인 홍사덕 전 새누리당 의원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 새 대표상임의장에 추대된다. 친박 원로들의 복귀가 급물살을 타는 양상이다.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민화협 공동의장단 회의에서 홍 전 의원의 공동의장 선임 안건이 의결될 예정이라고 민화협 측이 1일 밝혔다. 홍 전 의원은 이어 열리는 의장단 회의에서 대표상임의장에 추대될 예정이다. 민화협은 국내 200여개 정당 및 종교·사회단체의 통일운동 상설협의체다. 홍 전 의원은 2007년과 지난해 경선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6선 경력에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다. 지난해 9월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가 불거지자 “당과 박근혜 후보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전격 탈당했다. 친박 원로들의 ‘중앙무대 귀환’이 더욱 가속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지난 8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임명되는 등 박 대통령 원로 자문그룹인 7인회 멤버들이 속속 주요 위치에 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내에서 친박 원로들의 복귀를 환영하는 분위기만은 아니다. 김성태·박민식·조해진 의원 등 소장파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서청원 전 대표 공천 반대 입장을 밝혔고, 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이날 밤늦게까지 서 전 대표 공천을 확정짓지 못했다. 3일 최종 회의가 열린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권영길과 나살림’ 출범…정치복귀 행보 관련 주목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0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나살림) 출범식을 가졌다. 나살림의 출범은 권 전 대표에게 지난해 경남지사 보궐선거 패배 이후 중앙정치무대 복귀를 위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나살림은 이날 행사를 신호로 각계 전문가 및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강화한다는 계획이어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으로 위축된 진보진영이 위축된 상황에서 진보의 새로운 정치적 대안 마련 가능성이 주목된다. 이사장을 맡은 권 전 대표는 “18대 국회의원을 끝낸 뒤 1년여간 평등, 평화, 통일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사단법인 설립 작업을 했다”면서 “나살림 사업의 중심적인 내용은 1997년 대선 이후 외쳐 오던 ‘교육비,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 만들기’ 즉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의 실현”이라고 강조했다. 발족식에서는 민주당 문재인 의원과 무소속 안철수 의원,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전 진보정의당 대표, 강기갑 전 통합진보당 대표 등이 함께했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물 위의 섬’ 무섬마을,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물 위의 섬’ 무섬마을,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경북 영주시 무섬마을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됐다.문화재청은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일명 ‘무섬마을’ 일원 214필지 66만 9193㎡가 조선 중기 이래 집성촌이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지역 구심체 역할을 한 곳이라며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한다고 22일 밝혔다. 무섬마을은 17세기 중반 입향시조(入鄕始祖·마을 터를 처음 잡은 사람)인 박수와 김대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래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으로 유서 깊은 전통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뜻있는 주민들이 아도서숙(亞島書塾)을 세워 항일운동의 지역 구심체 역할을 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이름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삼매의 고요에 휩싸인 천년고찰… ‘참나’와 마주하다

    삼매의 고요에 휩싸인 천년고찰… ‘참나’와 마주하다

    불기 2557년 여름철 집중수행인 하안거 해제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오전 9시 경북 울진 천년고찰 불영사. 뒷산 부처님 바위를 알듯 모를 듯 연못에 담고 있는 경내는 나는 새도 숨을 죽일 만큼 침묵의 바다였다. ‘동해 제일의 비구니 수행처’라는 불영사 천축선원의 안거 끝자락은 해제에 임박해 어수선할 만도 하련만, 참선 수행에 든 대중들은 참나를 보기 위한 삼매의 고요에 휘잠겨 불청객을 더 멀게 만든다.대웅전 맞은편 설법전. ‘지금 이 순간을 살자’는 플래카드가 걸린 법당에 100여명의 재가 신도들이 등을 맞댄 채 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가슴마다 걸린, ‘오후불식 묵언수행’이라 쓰인 표찰은 수행을 올곧게 다잡는 마음다짐의 또렷한 정표인가. 20여년 전부터 주지 일운 스님의 원력으로 안거 해제 사흘 전 재가 신도들을 정진 수행에 동참케 한 오랜 전통의 현장엔 수좌 못지않은 푸른 눈빛이 형형하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해 가는가.’ 저마다 풀어내려는 화두는 각기 다를 터. 법당 맨 앞에 가부좌를 튼 주지 일운 스님의 무언이 무서울까. 침묵의 한복판에서 불현듯 터지는 죽비 소리도 그저 잠시 이는 바람일 뿐. 참선을 푼다는 주지 스님의 신호에도 역시 차분한 몸짓들. 아침 수행의 끝에서 찾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간 설법전 오른쪽 천축선원. ‘숨소리도 선원 담장을 넘지 않는다’는 수행 가풍의 기세가 이번 안거 철에 방부를 들인 40명 비구니 수좌들의 결기 어린 눈빛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간간이 들리는 죽비 소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높은 이념은 흔들리는 지금의 마음자리를 얼마나 무겁게 누르고 있을까. 새벽 3시부터 좌선을 시작해 하루 10시간, 용맹정진에는 12시간을 참선에 든다는 수좌들. 오후 1시 이후엔 물만 마실 뿐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금욕과 묵언의 순간들은 가람과 선원 밖 세상 모든 소식과의 단절이기도 하다. 아침 참선 수행을 마친 10시쯤. 가부좌를 풀고 법당 밖으로 나선 수좌들과 재가 신도들이 한 줄로 서서 경내를 돌기 시작한다. 또 다른 수행의 이어짐인 포행. 참선 수행의 점검이기도 하고 짤막한 휴식이기도 할 걷기. 연못에 우뚝 선 부처님 상이 더욱 또렷하다. 다음 날 오전 10시면 해제법회. 수좌 스님과 재가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석달, 그리고 사흘간에 걸친 단기출가의 정진 수행을 마무리하는 회향의 순간이다. 제각각 발견한 참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아니 중생 구제의 원력은 더욱 다져졌을까. 비구니 수좌 스님들은 걸망을 챙겨 이제 또 다른 수행 자리를 향해 만행 길에 나설 것이고, 재가 신도들 또한 생활 속의 수행으로 다시 들어설 것이다. 포행을 마친 재가 신도가 기자의 어리석은 채근에 마지못해 묵언을 깬다. 20년 넘게 불영사 안거 해제 수행법회에 한 철도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는 불자. “비록 무명초를 이고 있지만 마음만은 이미 부처”라는 조심스러운 소감을 짤막하게 전하는 눈매가 촉촉하다. 글 사진 울진 불영사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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