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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국새용 황금도장/박대출 논설위원

    신한민보(新韓民報). 구한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한 신문이다.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기사다. 제목을 현대식으로 풀면 ‘순종 황제의 유조’다. 내용은 이렇다.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 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순종이 그해 4월26일 조정구(趙鼎九)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한·일 병합조약을 인정하지 않음을 천하에 알린 것이다. 얼마전 한·일 병합 조서가 공개됐다. 일본 측 문서엔 국새(國璽)가 찍혀 있고, 일왕의 서명도 있다. 우리 측 문서엔 국새도, 이척(李拓)이란 순종의 서명도 없다. 대신 칙명지보(勅命之寶)란 어새가 찍혀 있을 뿐이다. 어새란 황제의 행정 결재용이다. 문서를 입수한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순종 황제가 병합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증거”라고 말한다. 국새는 제왕의 시대엔 옥새(玉璽)로 불렸다. 고려 땐 중국에서 보낸 옥새를 사용했다. 조선왕조에선 만들어 썼다. 하지만 용이 아닌 거북을 새겼다. 용은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용 문양의 국새를 만들었다. 자주의 상징이었다. 광복 65주년에 맞춰 공개된 경복궁 경회루. 원래는 연회장소였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곳이기도 하다. 옥새 전달은 왕위 이양을 공식화하는 절차였다. 이처럼 왕조시대엔 국새는 임금이자, 국가였다. 지금도 국가의 표상(表象)이다. 헌법 개정 공포문 전문,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훈장 및 포장증, 고위 공무원 임명장 등에 쓰인다. 건국 후 4차례 국새가 제작됐다. 1대는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3대는 균열이 발견돼 4대로 대체됐다. 4대는 2007년 민홍규씨와 보조 장인 3명이 제작했다. 부속 의장품 16종을 만드는 데는 무형문화재 9명 등 장인 25명이 동원됐다. 경남 산청군에 위치한 국새전각전에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氣)가 세다는 왕산 기슭에 있다. 부근엔 강력한 기가 나온다는 귀감석도 있다. 산청군이 전통 한의학을 접목한 관광휴양지로 개발 중이다. 이렇듯 공을 들인 4대 국새가 논란에 휩싸였다. 국새용으로 구입한 순금은 3㎏. 쓰고 남은 순금 800~900g으로 황금도장을 만들어 참여정부의 정·관계 실세들에게 상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한민국의 명예와 왕산의 기를 내려받은 순금이다. 개인이 욕심낼 물건이 아니다. 의혹 규명이 시급하다. 행여 받은 이가 있다면 국가에 반납하고.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이대통령 8·15 경축사] 日 야스쿠니 대신 전몰자 묘원 헌화

    일본 민주당 정권은 집권 뒤 처음 맞은 8월15일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간 나오토 총리를 포함, 대신(장관), 부대신(차관), 정무관 등 각료 전원은 이날 야스쿠니신사 대신 도쿄에 위치한 전몰자 묘원을 방문해 헌화했다. 각료 전원이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를 찾지 않은 것은 1980년대 이후 처음이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해 신경 씀으로써 자민당 정권과의 차이를 국내외에 호소하려는 의도라고 교도통신은 분석했다. 간 총리는 이후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역대 총리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여러 국가의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며 가해 책임을 언급한 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세계 영구 평화의 확립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도 “역사를 돌아보고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절실히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자민당이 중심이 된 ‘다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의원모임’ 소속 여야 의원 41명은 이날 야스쿠니를 집단참배했다. 간 총리는 지난 10일 담화에서 밝힌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위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를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카다 가쓰야 외무상도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한반도에서 유래한 도서를 한국 측에 인도하기 위한 조약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각 당에 협조를 요청하겠다.”며 한국 측과 조약체결을 통해 조선왕실의궤 등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1993년 8월부터 94년 4월까지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72) 전 총리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간 총리의 한·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에 대해 “한일병합은 힘을 배경으로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며 간 총리가 담화에서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침략전쟁’이라고 발언했다가 파문을 일으킨 것과 관련, “상식적으로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에 큰 고통과 희생을 유발한 만큼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침략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다.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아 인격과 성정이 서체에 고스란히 배어난다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특별전으로 23일 개막하는 ‘붓 길, 역사의 길’은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흥미로운 기획이다. 망국의 시기를 전후해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주역들의 필적을 통해 근현대사의 굴곡을 반추하겠다는 자못 야심찬 시도다. 한획두획… 역사를 담고 신념을 말하다 척사와 개화, 매국과 순절, 친일과 항일 등 역사의 굽이마다 대척 관계에 섰던 인물 70여명의 필적 1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이를 테면 이토 히로부미의 칠언시에 차운(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지음)을 한 박제순, 조중응 등 을사오적과 이와 정반대 입장에서 순절을 택한 민영환, 안중근 등 애국지사의 필적을 대비하는 식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글씨는 그 사람인 동시에 그 인물이 생존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면서 “필적이야말로 사회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증언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일례로 이토 히로부미가 1908년 5월 귀국을 앞두고 쓴 칠언시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당시 매국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가 ‘뭇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 더 아쉬워/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교린의 기월이 맹단에 남아 있으니/양국에 화기가 오랫동안 맴돌리라’는 칠언시를 쓰자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조중응은 ‘동풍에 돛을 달아 귀국하시고 나서도/큰 꿈이 이따금 접역에서 뒤척이시라’는 답시를 썼다. 박제순은 ‘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라며 낯뜨거운 찬양가를 덧붙였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초대 일왕인 신무를 기리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반면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명함에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옥중에서 ‘국가안위 노심초사’라는 명필을 남겼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22일 “이완용은 서체에 변화가 심해 상황에 따라 성정이나 기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반면 안중근은 송곳 같고 칼 같은 필체로 직필(直筆)의 표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공동정부 수립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대립했던 김구와 이승만의 필체도 뚜렷이 구분된다. 김구는 차돌처럼 단단하고 강직한 서체인 데 비해 이승만은 서체가 부드러워 자유주의자로서의 기질이 드러난다는 평이다. 이 밖에 흥선대원군의 ‘묵란’, 민영익이 상해 망명 당시 기거했던 집인 천심죽재를 그린 그림, 갑신정변의 4인방 필적, 만해선사와 여운형의 필적 등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들이 상당수다. 문창국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부장은 “이번 전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망국·분단·통일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3부작 시리즈의 하나로, 내년 초 분단과 통일을 다룬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8월31일까지. (02)580-130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친일파의 은사금(恩賜金) /최광숙 논설위원

    독립운동가 장태수(張泰秀·1841~1910)는 1910년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개와 말도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 있는가.”라며 통곡했다. 그는 일제가 회유책으로 권한 은사금(恩賜)을 거부했다. 24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결국 그해 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장태수가 비난한 역적들은 일왕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아 호사롭게 살았다. 일왕은 친일파 귀족들이 한일합방에 협조한 대가로 은사금 3000만엔을 하사했다고 한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은사금을 가장 많이 받은 친일 인사는 병합조약 체결에 직접 참여한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83만엔(현재 화폐가치로 약 166억원)을 받았다고 한다. 순종 장인인 후작 윤택영은 50만 4000엔(100억 8000만원), 매국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 을사오적 송병준은 10만엔(20억원)을 각각 받았다. 은사금의 시혜를 받은 의외의 인물도 있는데 박영효다. 그는 태극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개화사상의 중심 인물로 28만엔(56억원)을 받았다. 은사금으로 친일파들은 전국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완용만 보더라도 일제 초기 소유한 땅이 여의도의 1.9배나 되는 1573만㎡에 이르렀다. 1925년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인 그는 갖고 있는 현금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에 이를 정도였다. 은사금은 친일파 귀족 외에도 효자 및 효부, 홀아비와 과부, 노인, 고아, 정신병자의 구제금 등으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민심 수습용으로 복지사업에도 은사금을 뿌린 셈이다. 은사금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일왕과 관련된 단어이다 보니 일본 귀족층 등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도쿄 근교의 우거진 숲을 다니다 보면 은사림(恩賜林)을 볼 수 있는데 일왕이 내려준 돈으로 숲을 조성해 붙여진 이름이다. 올해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민족정기 회복과 과거사 청산을 위해 친일파들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할 수 있도록 특별법이 시행된 지도 벌써 5년째다. 지난해 기준으로 친일파 77명의 소유이던 여의도 면적의 70%에 달하는 토지 554만㎡를 국가로 귀속시켰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재산을 되찾으려는 소송을 계속 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 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다른 것 같다. ‘못난 조상도 다 내 복(福)’이라고 우기는 것 같아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이완용, 나라 팔고 30억 받아

    친일파 귀족 등이 한·일 병합 협조로 일왕에게 받은 돈을 일컫는 ‘은사금’(恩賜)’의 수령자와 구체적인 액수가 14일 공개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발간한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에 따르면 일제 강점 직후 병합에 협조한 조선귀족 등은 지위에 따라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은사금 액수는 작위와 일제에 대한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 등을 토대로 결정됐다. 가장 많은 돈을 받은 친일파는 고종의 친형이었던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83만엔(166억원)을 받았고,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50만 4000엔(100억 8000만원)의 거액을 챙겼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을 받았고, 같은 백작이었지만 이완용보다 공로가 작았던 이지용은 10만엔(20억원)을 받았다. 당시 1엔은 현재 가치로 약 2만원에 해당한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친일파, 나라 팔아·일왕에 최고 166억 ‘은사금’

    친일파, 나라 팔아·일왕에 최고 166억 ‘은사금’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친일재산조사위)가 14일 한일병합 등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에게 수만엔씩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은 친일파 귀족들의 이름과 액수를 공개했다.친일재산조사위는 최근 역사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를 발간, 일제 강점 직후 ‘공로자’로 인정받은 조선귀족 등이 지위에 따라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았으며 당시 1엔은 요즘 돈 가치로 환산하면 약 2만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최고액 수령자는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한일 병합조약 체결에 참가해 무려 83만엔(166억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이어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50만4천엔(100억8천만원)을 받았고 신궁봉경회 총재로 활동한 이준용은 16만3천엔(32억6천만원), 대표적인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 이지용은 10만엔(20억원)을 챙겼다.또 왕족 출신으로 후작이 된 이재각·이재완 등은 16만8천엔(33억6천만원), 조선귀족회 회장이면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박영효는 28만엔(56억원)을 받았다.백작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인 자작 중에서는 송병준과 고영희 등이 일제를 도운 공이 커 10만엔(20억원)의 거금을 받았다.귀족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병합에 일조한 이용구도 10만엔(20억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간 총리 체제 첫 관문 새달 참의원 선거

    간 총리 체제 첫 관문 새달 참의원 선거

    일본의 간 나오토 신임총리가 6일 관방장관에 센고쿠 요시토(64) 국가전략상, 재무상에 노다 요시히코(53) 재무 부대신을 각각 내정했다. 행정쇄신상에는 초선인 렌호(42) 참의원 의원을, 국가전략상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측근인 아라이 사토시(64) 총리보좌관을 기용하기로 했다. ●친미 노선 선회, 소비세 인상할 듯 간 총리는 특히 당 간사장에 반(反)오자와 전 간사장의 선봉인 에다노 유키오(46) 행정쇄신상을 발탁했다. 당정의 핵심 요직을 반오자와 계열의 인물들로 채운 셈이다. 다음달 11일 치러질 참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 탈오자와 색깔을 분명히 했다. 나머지 각료 11명은 국정의 연속성 차원에서 유임시켰다. 간 총리는 7일 열리는 민주당 중의원·참의원 양원 총회에서 인사 방침에 대한 동의를 얻은 뒤 8일 아키히토 일왕의 재가를 받아 공식발표할 예정이다. 간 총리는 당과 내각을 한 손에 장악함으로써 당정 일체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오자와 그룹을 적으로 돌려놓고는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게 간 총리의 고민이다. 오자와 그룹에 속한 중의원·참의원 의원은 150여명으로, 이는 민주당 전체 의원 423명의 3분의1이 넘는다. 여차하면 당을 쪼개 새 정당을 창당하거나 다른 당과 합당,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오자와 전 간사장은 지난 1993년 “일본의 미래는 없다.”며 자민당에서 탈당한 이래 네 차례나 창당과 합당을 반복했다. 실제로 오자와 그룹은 간 총리가 반오자와 그룹 일색으로 조각과 당직인선을 추진하자 강력 반발하고 있다. 오자와 전 간사장은 지난 4일 당 대표 경선 때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고려, 후보를 내지 않았지만 오는 9월 말 대표 선출에서는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을 정도다. 간 총리는 당 대표 경선에서 오자와 그룹의 지원을 받은 다루토코 신지 중의원 환경위원장을 국회대책위원장에 내정하고, 친오자와 계열의 하라구치 가즈히로 총무상을 유임하는 방식으로 ‘화합인사’의 모양을 갖췄지만 오자와 그룹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간 총리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사임을 불러일으킨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와 관련해 미·일 정부의 합의안을 준수할 것으로 보인다. 간 총리는 이날 새벽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양국) 합의를 기본으로 확실히 대처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카다 가쓰야 외상의 유임으로 한·일 외교관계도 기존 기조에서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소비세 인상론자들이 대거 중용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간 총리를 비롯해 센고쿠 관방장관 내정자, 노다 재무상 내정자는 심각한 국가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 인상을 요구해 왔다. ●간 총리 지지 여론 60%대 여론은 일단 간 총리체제에 우호적이다. 교도통신이 4일과 5일 실시한 전국 긴급전화 여론조사에서 간 총리에게 ‘기대한다.’는 응답자는 57.6%에 달했다. 아사히신문은 59%, 마이니치신문 63%, 도쿄신문 조사에서는 57%를 기록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지지율의 20%선과 비교, 큰 변화다. 민주당 지지율도 지난달에 비해 무려 15.6% 포인트 오른 36.1%로 상승, 자민당의 20.8%와 차이를 벌렸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씨줄날줄] 신의 아들/이춘규 논설위원

    일본 수도 도쿄 핵심요지에 ‘천황(天皇·일왕)’이 사는 왕궁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왕궁으로 이용되고 있다. 왕궁에서는 매년 1월2일 수차례 일본 국민의 신년인사회가 열린다. 수만명의 국민들이 찾아가 2층 베란다에 나와 손을 흔드는 일왕을 향해 “천황폐하 만세”를 뜨겁게 외치며 인사를 올린다. 신처럼 떠받든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 일 왕족은 국민들은 갖고 있는 성(姓)이 없다. 일반 국민의 의무도 다수 면제된다. 신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일왕이 신의 아들로 본격 자리매김한 것은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서양에 뒤진 것을 우려한 존왕개국 세력이 이끌었다. 그 이전 일왕은 가마쿠라바쿠후 이후 675년간 신하들에게 줄 녹봉도 없고, 왕궁에 비가 샐 정도로 아주 고단한 신세였다.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런 일왕을 메이지유신 세력이 건국신화를 기초로 신의 위치로 격상시켜 일본 국민 통합의 중심으로 삼았다. 유신세력은 불교를 탄압하고 신토를 대대적으로 보급해 일왕을 신격화했다. 근대화를 달성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를 침략했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일왕은 국가원수로서 군통수권을 가졌다. 그리고 쇼와 일왕은 2차대전의 중심에 섰다. 가미카제 특공대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 갔다. 일제가 미국에 패한 뒤에야 일왕은 점령군사령부의 뜻을 따라 1946년 1월 인간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왕은 신도, 국가원수도 아닌 상징적인 존재로만 인식돼 왔다. 패전 뒤 일 왕실 범위도 대폭 축소됐다. 일왕들은 측실(후궁)들이 있어 측실 소생 일왕도 다수였지만 다이쇼 시대(1912~26)에 폐지됐다. 측실제도가 없어진 지 1세기가 되어 가고, 왕실이 축소되며 왕실에 남자가 적어 대를 잇기 힘든 상황이다. 왕세자는 외동딸만 있고 둘째 왕자가 늦둥이 외아들을 낳아 네 살이 됐지만 안정적인 왕위계승은 여전히 일 왕실의 과제다. 왕실이 여러 문제로 편치 않다. 이 시기 경제마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불황에 시달리며 일왕이 신으로 부활하려 한다. 문부과학성이 검정을 마친 초등학교 교과서 5종 모두 일왕이 신의 자손임을 암시하는 건국신화를 새로 추가했다. 니혼분쿄출판의 교과서 1종은 ‘신의 자손이 천황이 되어 국가를 통일해 간다.’고 기술할 정도다. 일본 정부와 국민이 자학사관을 버리고 국수주의로 내달리나. 벌써 태양신의 아들 일왕이 중심이었던 군국주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지방시대] 국민통합은 불편한 진실 인정부터/이병화 조선대 국제경제학 교수

    [지방시대] 국민통합은 불편한 진실 인정부터/이병화 조선대 국제경제학 교수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지역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역내 국가 간 어떤 교훈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실이 역내 국가들 간에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간 덮어두고 싶은 불편한 진실의 역사는 깊다. 예를 들면 고대 일본국가 형성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도 일본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기 전 일왕은 고대 일본 왕실의 뿌리가 한국과 연결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발언하며 한국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도 역사적 이유 때문에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리콴유, 타이완의 장제스, 중국의 덩샤오핑 등은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일본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을 강요받은 후 개혁주의자들이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시대를 열어 국가개혁을 선도하였다. 메이지 유신시절에 일본의 선각자들은 전 세계로부터 최선의 관행(best practice)을 찾아내 자국 실정에 맞게 보완하여 적용하였다. 일본의 사법, 행정, 교육 등의 제도와 산업화 전략, 수출산업 육성 등의 정책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도입되었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 전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한국이 최빈국의 대열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모델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러나 과거 일시적으로 불행했던 한·일관계와 정권연장을 위한 유신헌법 때문에 우리 국민들에게 메이지 유신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중국도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을 모방하였다.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덩샤오핑은 1950년대 말의 대약진 운동과 1960, 70년대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를 목격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된 이듬해 싱가포르, 방콕 등을 방문한 후 중국은 싱가포르의 산업화 전략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용주의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 일본과 한국의 모델을 말하지 않고 싱가포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은 당시 냉전시대의 유산 때문이다. 북한에도 한국이 성공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사실과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 눈감고 넘어가고 싶은 진실이다. 눈을 국내로 돌려보면 우리의 해묵은 지역갈등에도 그 근원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이 모두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국민통합의 출발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사실들을 덮어두고 넘어간다고 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이종락 특파원 도쿄이야기] 한·일 정상회담 日민주 희망사항?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놓고 한국과 일본 정부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산케이신문은 다음달 10일쯤 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양국 정부가 조정하고 있다고 최근 잇따라 보도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오는 5월에 개최되는 한·중·일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이 대통령이 ‘셔틀외교’ 차원에서 먼저 방문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냉담하다. 이 대통령의 일본 방문 시기와 형식 등이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일본 측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이라는 뉘앙스가 풍긴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이 대통령의 방일 가능성을 언론에 흘리는 이유는 뭘까. 끝을 모르고 지지도가 추락하고 있는 여당인 민주당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방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의 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이니치신문이 15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하토야마 내각 지지율이 43%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45%)에 역전됐다. 앞서 지난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내각 지지율이 요미우리신문 41%, 교도통신 36.3%, 도쿄신문 36%로 비(非)지지율에 못 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성과 없는 정상회담을 받아들여 봤자 손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올해는 한일병탄 100년인데도 일본 측의 ‘한 단계 넘어선 한·일 관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도 이례적으로 일본에 대한 비난을 자제했던 것도 이런 일본 정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구체적으로 일왕의 방한 추진, 약탈 문화재 반납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우회적으로 압박했지만 일본 정부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일본에서도 이 대통령의 ‘독도 발언’ 논란으로 한국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정상회담 추진이 부적절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 대통령의 방일을 새로운 모멘텀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 민주당으로서는 악재만 쌓이고 있는 셈이다.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11)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前의장 특별인터뷰

    [한·일 100년 대기획] (11)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前의장 특별인터뷰

    “장기간에,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됐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은 옛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감언과 강압을 쓰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한 사례가 많았다.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다는 것이 명확하다. 위안소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아래 참혹했다. 위안부는 일본을 빼면 한반도의 비중이 컸다. 결국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줬다. 정부는 종군위안부로서 큰 고통을 당하고,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드린다. 역사의 사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하겠다. 같은 잘못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 고노 요헤이 담화 요지 1993년 8월 4일 │도쿄 박홍기특파원│지난 1993년 8월4일 ‘고노 담화’는 2년 뒤인 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졌다. 고노 담화는 인권을 짓밟고 유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 반성한 ‘사건’으로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등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담화를 발표한 장본인인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은 지난달 18일 도쿄 토라노몽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특별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처받은 많은 분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생활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거듭 담화의 취지를 밝혔다. 고노 전 의장은 지난해 7월 중의원 해산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한 뒤 처음 외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1993년의 고노 담화는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담화 발표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안부 피해자인 당사자들을 찾아 경험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사자들은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나 서로 시간을 가진 끝에 신뢰감이 쌓여 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시점에서조차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세상을 떠난다면 영원히 묻혀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대화가 가능했다. 귀중한 경험담을 들었다. 명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당사자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한 자료가 진실성이 높다고 판단, 발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정부 차원에서는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인 것들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당사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은 하고자 했다. →고노 담화는 자민당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2007년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했는데. -아베 전 총리는 항상 부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대부분의 국민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진실이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직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들 중에도 여러 입장이 있다. 명예를 중히 여겨 사죄를 요구하시는 분, 과거의 사실을 나름대로 인정받아 전에 비해 한이 좀 풀렸다는 분 등등. 한 가지의 형태로 묶어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외교장관과 대화를 나눴을 때 일본이 사실을 사실로 시인하면 그 이후는 한국 정부의 일로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은 사죄하는 기분, 감정을 잘 전달해야 한다. 정부로서는 대응에 한계가 있어 민간단체를 구성, 뜻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 점에 대해 이해 받고 싶다. 거듭 밝히지만 일본의 잘못된 행동 탓에 상처받은 많은 분들이 무거운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데 대단히 죄송하다. →올해 100년이 된 병탄의 역사적 의미는. -현역에서 물러나 있으므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할 뿐이다. 오카다 외무상이 방한해 밝힌 발언과 내 의견이 다르지 않다.(오카다 가쓰야 외무상은 지난달 11일 방한 때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은 일이었다. 합병 당한 측의 아픔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기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일 간에는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이른바 ‘3점 세트’가 있다. 해법을 찾는다면. -현재 상태에서 완전한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무엇보다 양국 정치권에 바란다. 해결될 때까지 예민한 부분은 자극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의 한·일관계는. -좋다.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한국의 대통령도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병탄 100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 관계의 이정표를 만들 방안은. -양국 사이에 협력의 의지를 명확히 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국 정상의 합의도 중요하다. 여러 면에서 협력하고 관계를 이뤄 나가야 한다. 민간차원에서는 영화나 음악 등 이미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들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일본 문화 개방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정부차원에서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니 양국 상호 간 좋은 것들을 교류, 흡수해 나갔으면 좋겠다. 문화라는 것은 섞였을 때 더 강해진다. →일본과 북한의 과거 청산, 국교 정상화를 향한 진전이 없다.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 정상화될 상황에 있지 않다. 북한과의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적 보상 및 지원 등 여러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이해를 먼저 얻어야 한다. 납치 문제는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정부 간의 교섭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한 빨리 납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북한은 일본의 피해자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과 행동을 해야 한다. →동북아시아의 관계는 복잡하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한국·일본의 역할은. -국제사회에서는 어느 한 나라도 자국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환경,식량 등 지구적 규모의 문제들은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몇 개의 국가 또는 전세계가 협력해 해결에 나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 중국은 긴밀히 협력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을 한국에 초대하겠다고 밝혔는데. -조건이 갖춰지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이웃 나라로서 더더욱 그렇다. 양국 간에 좋은 조건을 만든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에서도 여론이 천황(표현대로)의 방한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형성돼야 하고, 한국에서도 천황의 방한에 대한 의미를 바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전제 아래 추진돼야 한다. 즉, 조건이라기보다 양국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위에 진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의 지방정치참정권 부여에 대한 찬반이 뜨겁다.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일치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조차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안에서도 오랫동안 토론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도 신중한 결론을 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관광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 나라를 알고,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되길 바란다. 단지 책을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방적으로 추측하거나,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같은 시대 사람들끼리 직접 만나서 친구가 되고,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깊게 교류하길 바란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 日공주 “학교 다니기 무서워”

    日공주 “학교 다니기 무서워”

    아키히토 일왕의 손녀인 아이코(8) 공주가 남학생들의 난폭한 행동이 무섭다며 이번 주 내내 거의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고 5일 궁내청이 밝혔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왕위계승 서열 1위인 나루히토 왕세자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는 도쿄 시내 가큐슈인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며 현재 학교에 대한 심한 불안감과 복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코 공주는 지난달 말 미열을 호소하며 자주 결석했고, 지난 2일 조퇴한 이후 학교를 가지 않고 있다. 궁내청은 일본 왕족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슬픈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면서 학교 측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아이코 공주를 겨냥한 폭행이나 집단 따돌림(이지메)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히가시소노 모토미사 가쿠슈인 상무이사 등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2일 아이코 공주가 조퇴하던 중 복도에서 급식을 받으러 달려가는 다른 반 남자 아이들과 부딪칠 뻔했다.”면서 “지난해 7월에는 같은 학년의 남자 아이들이 큰 소리를 내며 복도를 달려가는 등 난폭한 행동을 했는데 아이코 공주가 그때 일을 떠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이날 밤 기자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쾌유해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고 말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자민당 “일왕을 국가원수로”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 자민당이 일왕을 단순히 ‘국가의 상징’으로 놔두지 않고 국가원수로 격상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헌법개정추진본부(본부장 호리 고스케)는 4일 회의를 열어 헌법 개정을 위한 ‘논점 정리’를 발표했다고 아사히신문이 5일 보도했다. 자민당은 보수색을 강화한 이들 내용을 논의한 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절차 등을 규정한 국민투표법이 시행되는 5월 말까지 개헌안을 만들 방침이다. 자민당이 거론한 주요 논점은 일왕을 국가원수로 명기하자는 것이다. 1889년에 공포된 구 제국헌법은 일왕을 국가의 원수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인 1946년 11월3일 공포된 현행 일본 헌법은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어서, 이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따른다.’고 규정했다. 일왕이 상징적 존재로만 남은 것인데 자민당은 이를 고쳐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다시 바꾸자는 주장이다. 자민당은 또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점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명시했다. 국회를 지금처럼 상·하원 양원제로 운영할지 아니면 일원제로 바꿀지도 명확히 하자고 주장했다. 특히 집단적 자위권은 동맹국 등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외국이 무력공격을 받을 경우 실력행사를 통해 저지할 수 있는 권리여서 주변국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크다.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닮은꼴’ 서울·도쿄올림픽

    [한·일 100년 대기획]‘닮은꼴’ 서울·도쿄올림픽

    아시아에서 첫 번째, 두 번째로 열린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20여년의 격차가 있었지만 꼭 닮은꼴이었다. 국민을 열광시키며 열린 양국의 올림픽은 국제적 위상을 한껏 높이고, 세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양국 모두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 안팎에서 유치한 올림픽은, 올림픽을 개최하면 경제가 발전하고 서양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환상과 풍요를 국민들에게 심어줬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도쿄올림픽 참가국은 94개국으로 당시 사상 최대였다. 서울올림픽 역시 세계 167개국 중 160개국이 참여해 사상 최대의 국가 간 이벤트였다. 1984년 LA올림픽이 공산권 국가가 참여하지 않은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던 탓에 이념을 초월한 올림픽이라는 의미가 가중됐다.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은 금메달 16개, 은메달 5개, 동메달 8개 등 모두 29개 메달 획득해 미국, 소련, 독일에 이어 역대 최고의 성적인 4위를 했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도 마찬가지.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역대 최고의 성적인 4위를 했다. ●올림픽을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 일본은 도쿄올림픽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자 패전국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애초 194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된 뒤 24년 만에 재유치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었다. 패전 이후 일본 젊은이들은 국기인 ‘히노마루’와 국가인 ‘기미가요’ 등에 대해 혐오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올림픽 동안 메달 시상식에서 16차례 히노마루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가 연주되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맥아더와 치욕의 패전 사진을 찍었던 일왕도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복귀했다. 당시 일본 선수단은 ‘2위는 소용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시합했다. ‘동양의 마녀’라고 불리던 여자배구팀의 우승이 결정된 순간, 도쿄 내에서 전화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국민 통합이 이뤄졌다. 한국도 서울올림픽을 통해 일본 식민지였던 과거의 굴욕을 떨쳐내고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음을 세계에 자랑했다. 한국은 1981년 1인당 국민소득이 1719달러에 불과했으나 1988년에는 4040달러로 2.5배가 증가했다. 5공화국에서 유치했지만, 6공화국에서 개최하면서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벗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으로 알려진 한국을 독자적이고 세련된 민족문화를 가진 나라로 인식하게 됐다. 올림픽 이후로 코리아는 몰라도 ‘서울’을 아는 세계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세계화의 발판도 됐다. 동구 공산권에 서울올림픽 참가를 독려하기 위한 스포츠 외교로 수교국이 19개국 늘어난 148개국이 됐다. 소련,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7개 공산권과의 수교는 이후 ‘북방외교’의 성과로 이어졌다. ●도쿄·서울올림픽에 숨겨진 애증 코드 그러나 도쿄와 서울올림픽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양국의 성화봉송 마지막 주자였다. 두 나라의 해묵은 역사의 애증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1964년 10월10일 도쿄올림픽 개막식 성화봉송 최종 주자는 1945년 8월6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라는 19세의 젊은이였다. 일본이 전쟁 도발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새로운 형태의 파괴적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적인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된 연출이었다. 사카이는 175㎝에 63.5㎏으로 당시 일본인으로서 뛰어난 신체조건으로, 전후 일본의 부흥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요소였다. 올림픽 개최국 선정 과정에서 유일한 경쟁상대였던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을 유치한 한국 역시 손기정옹을 성화봉송 최종주자 4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1936년 일제 강점기 시절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옹의 존재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의 역사적 죄악을 세계 곳곳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물 건너가는 日王 방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일왕의 한국 방문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다. 외교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12일 “건강문제와 한국 내 반대여론으로 일왕 방한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올해 77세인 아키히토 일왕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지난 9일 권철현 주일대사도 “(일왕 방한은) 현재로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도 11일 한·일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와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일왕 방한은 노태우 정부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꾸준히 초청해 놓고 있는 사안이다. 공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셈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간무(桓武·재위 781~806년)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말을 권 대사에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왕의 해외 방문은 ‘국사(國事) 행위’로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일왕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 “해외 방문은 일본 정부가 결정하는 문제”라며 즉답을 피한다고 한다. 패전(敗戰) 전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들에 의해 신처럼 받들어졌던 일왕의 해외 방문은 극히 민감한 문제라 일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부담은 정부가 고스란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왕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한국에 주재하는 한 일본 언론인은 “(일왕에게) 계란 한 개만 날아들어도 엄청난 사태라는 정서가 일본인들 사이에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992년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난징은 일제가 중국인 30만명(중국 측 추산)을 학살한 곳으로 반일감정이 우리 못지않은 곳이다. 그런 험지(?)에 일왕이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시민들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시위를 100%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일본 정부가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 지난 7일 한국 내 시민단체들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반환과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독도 망언 근절 등의 문제가 선결될 때까지 일왕 방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대사는 “일왕이 방한하려면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뭔가가 있지 않고서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日외상 “한일병탄 한국인 자긍심에 상처”

    日외상 “한일병탄 한국인 자긍심에 상처”

    방한 중인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이 11일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 고위관리가 한국어 관련 기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과거 일제가 우리말 말살정책을 펴던 역사와 대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지난해 출범한 일본 민주당 정권의 대한(對韓) 화해 제스처로 해석된다. 주한 일본 대사관 관계자는 “한·일 친선을 위해서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방문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일본인들 사이에 최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 1357명 가운데 260명이 일본인 및 재일교포다. 오카다 외상은 이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올해 100년을 맞는 한·일 병탄과 관련,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은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합병당한 측의 아픔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기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하토야마 내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에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한 것으로, 그 후 역대 일본 정부가 줄곧 표명해온 입장이다. 오카다 외상은 일왕 방한과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면서 “오늘 양국이 설치하기로 합의한 한·일 문화교류회의를 통해 양국 국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싶다.”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분단 떠안은 광복… 날선 이념대립이 전쟁 불러

    조국의 해방은 절실했고, 침략적 제국주의는 대를 이었다. 이념으로 재편된 국제 정세는 조국을 더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었다. 제국 간의 다툼과 이해관계의 공존 속에서 한민족의 평화에 대한 갈망은 깊어만 갈 뿐 아니라 요원하기까지 했다. 1945년 8월15일 오전 종로 거리 등 서울 곳곳에는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국민들은 반드시 들어라.’라는 내용의 방이 붙었다. 그리고 낮 12시. 라디오 앞에 모여든 흰 옷 입은 백성들은 지직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선언, 즉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느릿하고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훗날 시인 서정주가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처럼 “못 가도 100년은 가리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그렇게 패망했다. 8월6일과 9일 사흘 간격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발은 수십만명의 일본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일본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각의’, ‘황족회의’, ‘어전회의’ 등을 거친 끝에 일왕은 직접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14일 밤 11시40분 항복선언 발표를 녹음했다. ●질곡의 씨앗이 된 비(非) 자주적 독립 광복(光復)이었다. 식민의 설움을 겪던 백성들은 라디오 방송을 들은 8월15일 그날은 감격을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제히 광장으로, 거리로,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독립에 ‘스스로’ ‘자주’가 빠져 있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결정으로 광복군특공대가 1년 남짓 동안 준비해왔던 국내 진공작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자력이 아닌 상태로 일본의 항복이 나왔다는 점에서 독립은 ‘비자주적’인 측면이 강했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훈련하다가 일본의 항복선언을 듣고 무산된 계획에 오히려 땅을 치며 통곡한 특공대원들의 모습은 한반도에 드리워진 또 다른 불안한 미래를 상징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이번 전쟁에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적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손에 맡겨지게 됐다. 오로지 평화와 독립만을 간절히 바랐던 한반도의 백성들은 순진했고, 침략의 이해관계와 앙상한 이념의 대립을 앞세운 제국주의에게 약소국 백성들의 순수한 열정은 안중에 없었다. 갇힌 독립투사들의 석방, 강제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청년들의 귀환, 임시정부가 아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수립 등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분단(分斷)이라는 업보만 덤으로 떠안겨졌다. 강대국들의 협상 결과 아프리카 대륙의 여느 나라들처럼 한반도에도 뜬금없는 38선이 직선으로 그어졌고, 그해 9월 남쪽에는 미 군정이, 북쪽에는 8월 말 소련의 군정이 들어섰다. 1948년 8월 비록 단독 정부였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모양과 주체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식민의 시간은 연장됐다. ●남북으로 갈라져 연장된 식민통치 국제연합(UN)은 공식적으로 남북 총선거를 결의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이 거부하면서 UN은 2월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김구·김규식 등 단독 선거, 단독 정부를 반대한 정치인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UN 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북쪽에도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했다. 그 결과 그해 4월19일 김구와 김규식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지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방북을 감행하고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요인 15인회담, 이른바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이러한 안간힘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날 선 이념의 대립으로 민족이 서로 적대하는 속에서 한국 전쟁의 발발은 필연이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정총리 “日王 방한때 과거사 반성해야”

    정운찬 국무총리는 5일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국군포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이날 국회 외교·통일·안보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우리는 원칙을 지키면서 대화가 필요할 때 대화할 것이며, 그 원칙은 비핵화와 납북자 송환 및 국군포로 석방 등 여러 인도적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정 총리는 남북정상회담 시기와 관련, “북한이 비핵화에 성의를 보이고 인도적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만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북핵 폐기에 확고한 결심이 서고 일괄타결(그랜드 바겐)의 틀에 들어올 수 있다면 물론 평화협정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정 총리는 아키히토 일왕(日王)의 방한과 관련, “(만약) 일왕이 방한하면 과거에 대해 확실히 반성하고 새로운 한·일 관계를 설정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운 허백윤기자 jj@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병탄 100년을 맞은 올해 양국간의 최대 관심사는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여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양국 간의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초청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일본 정치권도 한국 내 여건이 충분히 조성됐다고 판단되면 일왕의 방한을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일왕의 역할과 방한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흑선을 몰고와 개국을 요구한 뒤로 일본은 구미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식민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부국강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 한국을 병탄하고 중국을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탱해준 게 바로 근대 일왕제의 이데올로기였다. ●일왕은 군국주의 지탱해준 이데올로기 메이지 정부가 1877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을 상대로 일본에 유리한 조일수호조약을 강제로 맺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민족주의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일왕과 관계없던 일반 국민은 제2차세계대전에 패할 때까지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열광적으로 숭배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은 군부의 주도로 일왕 중심의 ‘황국사관’과 일왕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를 강조했다. 초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이래 124대 ‘천황’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왕위가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왕실이 단절된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논리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했다. 일왕이 통치하는 일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광신적인 국수주의로 질주했다. 일왕의 절대적인 권력은 1889년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확립되고 이로써 일왕은 정치대권과 군사대권, 제사대권을 일신에 독점하는 현인신(現人神)이 되었다. 헌법은 외견상으로는 입헌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왕주권과 신성불가침을 법적으로 명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일왕이나 일왕제에 대한 비판은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에 따라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패전 후 미국의 지시에 의해 일왕의 지위를 ‘상징’으로 규정한 것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과 일왕 신격화에 의한 국민통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후 일본은 일관되게 일왕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일왕제를 국민통합의 한가운데에 놓으려 노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전쟁 이후에도 일왕 및 일왕제에 대한 비판이나 불경스러운 언행은 종종 우익의 공격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우익은 일왕제라는 일본의 ‘국체’ 자체를 절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왕제라는 시스템의 전통 속에서 국민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요소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일왕제가 표면적으로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심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위기에 직면하면 할수록 일왕제의 전통적인 요소를 이용해 국민통합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위기때마다 일왕제에 기대 실제로 일부 정치인은 일왕을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는 일왕을 거론하며 중의원 선거에 활용했다. 1992년 아키히토 일왕의 중국 방문은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중국 시장 공략의 일환으로 성사됐다. 최근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이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방일시 관례를 깨고 일왕의 면담을 긴급히 추진한 것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왕의 한국 방문은 또 다른 논란을 확대시킬 공산이 커 보인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방한이 추진되고 있지만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일왕제가 일본 사회속에 불가결한 시스템으로 존속하는 한 근대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 전공 교수는 “일왕의 방한을 통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일왕의 중국 방문 이후에도 중·일이 과거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일왕의 방한은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서 “방한을 계기로 향후 양국 관계에 있어 카드(협상 우선권)를 일본에 넘겨줄 수도 있다.”며 경계했다. →역대 한·일 관계에서 일왕의 역할이 어떠했나. -해당 시기에 따라 일왕의 정치적 역할이 달랐다. 메이지 일왕은 조선 병합에 관여했고, 다이쇼 일왕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와 일왕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군국주의를 선동했다. →일왕의 시대적 역할이 달랐지만 총체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로 내몬 것은 일왕제에 대한 폐해 때문이지 않나. -일왕은 군부를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내각이 있었지만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등 군 통수권자를 일왕이 실제로 지휘했다. 중국과의 전쟁은 군부가 일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왕은 전쟁 상황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중 모든 보고가 일왕에 보고됐다는 점에서 일왕이 태평양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평가가 진실에 가깝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일왕과 군부중에서 누가 더 크나. -군부가 일왕을 앞세우고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일본 재벌의 책임은 없나. -일본 재벌은 우익의 속성을 지녔고, 일왕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한 또 다른 세력으로 평가받을 만 하다.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없고, 아무런 대가없이 일왕이 방한하는 게 실익이 없다는 차원에서 반대한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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