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 침탈
    2026-05-3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34
  •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일제강점기 기술 너무 축약… 침략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국정 역사교과서 공개] “일제강점기 기술 너무 축약… 침략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논란 끝에 국정 역사교과서인 ‘올바른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28일 공개됐다. 한국사의 시작인 상고사부터 현대사까지 곳곳에서 이념과 기술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에 서울신문은 시대사별로 대학 역사학과 교수와 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을 섭외해 현장검토본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독자들이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학자들에게 ① 내용의 충실성 ② 사료의 충실성 ③ 구성의 충실성 ④ 기술의 충실성 ⑤ 논란 가능 여부 ⑥ 총평으로 나눠 물었다. 일부 번호가 없는 것은 응답이 겹치거나 답하지 않은 부분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의 필진이 같아 한국사만 분석했다. [상고사] ■일부 개인 학설 지나치게 강조… 객관성 의심 소지성정용(51) 충북대 고고미술사 교수 ① 선사·고대 부분은 기존의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하나, 일부 논란을 의식하거나 개인 학설을 지나치게 강조한 듯한 부분이 보인다. 청동기문화에서 갑자기 고조선의 서술로 넘어가면서 고조선의 출현 과정을 잘 보여 주지 못하고 낙랑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생략한 것은 위치 논란을 의식한 서술로 생각된다. ② 백제의 요서경략설 같은 경우 일부 사료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 기록의 합리성이 의심받고 있고 고고학적으로 거의 뒷받침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견이 있다고 하면서 사실처럼 느끼도록 서술했다. ⑤ 백제가 해상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의 교류를 주도한 나라임은 틀림없지만, 해상 강국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백제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또 4세기 서해안의 대양횡단이 가능한 것처럼 지도상에 표시한 것은 집필자 개인의 주관적 학설을 그대로 일반론화한 게 아닌지 의심된다. ⑥ 많은 내용이 너무 일반론적인 반면 낙랑 위치처럼 논란이 많은 부분에서는 집필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술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교과서라면 왜 국론을 분열시키고 거금을 들여 국가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 정당성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현 고고학 연구수준과 큰 괴리… 역사인식 못 키워이남규(61)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 ① 최신 조사연구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현재 고고학적 연구수준과 괴리가 너무 크다. 잘못된 검인정교과서 틀에 부분적인 자료만 첨가했다.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내용들이 많이 누락됐다. 각 시대의 역사문화적 진상과 흐름이 명료히 이해되지 않는다. ② 자료가 체계적, 종합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각 시대의 문화적 실체와 변동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③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 한군현-삼한-삼국 형성과정에서 역사적 진실과 괴리된 서술을 하고 있다. ④ 역사적 배경과 맥락은 물론 시대별 문화변동의 계기와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학생들의 이해는 물론 역사에 대한 흥미 촉발도 어려워 보인다. ⑤ 고조선 부분은 고고학적 자료 중심의 설명과 해석으로 한결같이 서술하고, 신화적 내용은 본문에서 자료탐구 부분으로 한정해야 한다. 한군현의 역사적 사실을 축소 내지는 배제해 삼한의 문제와 고대국가 형성기의 서술에 있어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사실과 괴리를 크게 한다. 최근 삼한 관련 고고학 자료들이 폭증해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대한 서술을 새로이 해야하는데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불확실한 문헌사 중심 설명이 중심을 이뤄 논쟁 여지가 많다. ⑥ 고교생의 고고학과 역사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역사인식과 이와 관련한 판단 역량을 키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겨우 이 정도의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그 난리를 쳤다니 한심할 뿐이다. 정부는 올바른 국정역사교과서를 쓸 능력이 없음을 이번에 여실히 보여줬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즉각 폐기돼야 한다. [고대사] ■정치·문화사 위주 서술… 일부 사료 뒷받침도 안 돼전덕재(54) 단국대 사학과 교수 ① 내용이 충실하다고 보기 어렵다. 삼국시대 통치체제의 성격과 변화 및 삼국과 통일신라, 발해 귀족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고대의 수취제도 등에 관한 내용이 완전히 빠져 있다. 지나치게 정치사·문화사 위주로 서술했고 사회경제사 및 생활사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② 대체로 기존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서술 가운데 사료로써 뒷받침되지 않은 것, 사료와 불일치하는 것들이 많이 눈에 띈다. ③ 내용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사료에 대한 소개가 매우 적다. 다만 문화사 부분은 이전의 교과서에 비해 충실하게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의 균형 잡힌 역사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다. ④ 비교적 쉽게 서술됐다. 다만 지나치게 간략하게 서술해 전후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불가피하게 부교재를 사용하거나 교사의 부가적인 설명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⑤ 학계의 통설과 괴리되는 서술, 다양한 오류 및 근래의 통설과 배치되는 서술도 다수 눈에 띈다. ⑥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술 양을 대폭 축소하거나 다양한 시각 자료를 활용한 게 두드러진다. 그러나 고대사 부분은 내용과 구성이 충실하다고 보기 어렵고, 최근의 연구성과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고려사] ■이자겸 사대외교를 ‘평화 관계 유지’ 기술… 자의적 느낌황선의(43) 백영고 교사 ① 이전 교과서보다 전체적인 분량은 적으나 절대적 차이는 없어 보인다. 사회사나 경제사 서술은 대단히 간략한 반면 정치사는 이전 교과서의 서술보다 훨씬 자세하고 다소 복잡하게 돼 있다. ② 사료는 크게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글과 사료의 크기나 구성과 같은 편집이 조악한 느낌이 든다. ⑤ 동북 9성의 위치 논란에 대한 설명은 생략돼 있다. 다만 학설 중에 최대 영토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인 공험진 등은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⑥ 당시의 경제상이나 사회상에 대한 설명은 간략하게 전달하면서 정치사 중심의 흐름을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인물 중심의 서술이 도드라져 보인다. 예를 들어 “태조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었던 고려의 왕권은”, 혹은 “(광종은) 이에 반발하는 호족을 ‘과감하게’ 숙청하면서 왕권을 안정시켜 갔다”라는 기술에서 볼 수 있듯이 왕 중심의 단순한 정치 서술을 넘어 영웅적 사관이 비치는 듯하다. 또 고려의 대외관계 중 거란과 금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통상 이자겸의 사대 외교를 “금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통상 자학사관을 피하기 위한 자의적 서술과 같은 느낌이 든다. [조선사] ■검증·교정 안 거쳐 졸속… 학계서 통용되기 힘든 학설 포함돼송양섭(51)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① 현 검정 교과서의 체제와 문제점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충실성 정도는 검인정 이래 집필 기준의 틀에서 쓰인 교과서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 ② 현 교과서에서 활용된 사료가 재활용·재배치된 느낌이다. 교육부 발표에서 강조하면서 새롭게 넣었다는 균역·준천·탕평이라는 영조의 삼대 치적도 이미 중학교 미래엔 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 ③·④ 현 교과서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했고, 일부 순화하지 않은 용어나 표현이 거슬린다. ⑥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서술, 학계에서 이미 통용되기 힘든 학설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균역법의 시행 관련 서술은 상당 부분 부정확하거나 오류다. 신분제 동요와 관련된 신분 구성 비율에 관한 설명도 보편적이지 않은 주장이다. 집필진 전공이 고르게 배치되지 않고 특정 분야에 치우쳐 학계의 연구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급히 작업하면서 나타난 문제인 듯하다. 초안은 한 자 한 자 엄밀한 검토를 거치고 주변의 전공자들에게도 수시로 문의하면서 수십 차례 검증과 교정을 하는 게 통상적이다. 검토본은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에 밀실 집필을 하면서 내용의 검증을 원천봉쇄한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한 사진에 내용 축약 지나쳐… 서술과정도 뒤죽박죽서광욱(53) 대구 경일여고 교사 ① 전반적으로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축약됐고 서술 과정이 뒤죽박죽이어서 교사가 교과 내용을 재구성해서 수업을 해야 할 상황이다. 학생 주도 수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② 과할 정도로 사진이나 그림 자료가 많다. 역사 과목의 특징상 자료의 제시는 필요하지만 사족처럼 보이는 그림이 많다. ③ 시간에 쫓겨서인지 교과 구성에 연계성이 부족하다.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에서 민중의 노력이나 광해군의 활약상이 전혀 서술되어 있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④ 기존 교과서로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에게 혼란을 줄 우려가 있을 만큼 조선의 건국 과정이나 정치 조직의 정비 과정 등이 지나치게 단조롭게 서술됐다. ⑤ 이성계의 건국을 합리화하며 명의 내정간섭이나 종속관계를 부정하고 있지만 실제 내정간섭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민란의 발생을 단순하게 제도상 문제로만 서술해 민중들의 의식 수준 향상을 누락하고 있다. ⑥ 교육 현장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집필자 선정부터 편찬까지 좌우 편향 없이 역사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다양한 견해를 수렴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현장에서 수업을 진행해야 할 역사교사로서 자괴감이 생길 정도다. ■독도 수호 안용복 4단원서만 설명… 3단원 조선은 빠져서인원(55) 진선여고 교사 ① 조선 시대는 전체 내용적인 측면에서 7차 국정 국사 교과서 및 2009 개정 교육과정 이후 검정 한국사 교과서와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대외 관계에서 백두산정계비와 독도를 수호한 안용복의 이야기를 4단원에서만 설명하면서, 정작 3단원 조선 부분에서 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내용 배치와 설명 부분에서 상당히 아쉬운 점이 보인다. ② 7차 국정 국사 교과서 이후 교과서들의 특징은 학생 주도 수업을 중시하면서, 사료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탐구 생활을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2단 구성으로 설명 부분이 많다 보니 각 내용에 해당하는 사료를 충분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7차 국정 국사 교과서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③ 제시된 사료들은 내용과의 연계성은 충분하다. 일부 사료들은 기존의 사료와 다른 새로운 사료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배워야 할 내용이 축소된 것이 아니라 사료가 축소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④ 전체적으로 기존의 서술 방식과 큰 차이가 없으며, 일부 내용은 풀어서 서술한 면도 보인다. 그러나 135쪽의 예송에 대한 설명 등 일부 내용은 충분한 설명 없이 어렵게 서술된 점도 있다. 전체적으로는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⑤ 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없다. ⑥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는 국정이든 검정이든 교과서 내용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는 적다. 문제는 고대사와 근현대사의 서술 부분이다. 국정 한국사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절차상의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국정 교과서를 발간한다면 내용에서의 이념 여부 문제를 떠나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그르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근대사] ■제2차 한일협약은 을사늑약인데… 日측 입장서 기술이계형(50) 국민대 특임교수 ① 근대사 부분이 축소 기술되다 보니 장과 절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④ ‘Ⅵ. 일제 강점과 민족운동의 전개’는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민족운동의 실상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목차 구성이 민족운동에 쏠려 있다. ‘2장 민족분열정책과 국내외 민족운동의 전개’는 ‘민족분열정책’의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고 ‘3장 1930년대 이후~’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명시했지만 내용 중 1920년대 부분도 있기 때문에 구성이 적절하지 않다. ⑤ 일본과의 조약 명칭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1차, 2차, 3차 한일협약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것이다. 공식적인 조약 명칭은 1907년 7월에 체결한 ‘한일협약’밖에 없다. 이를 기준으로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기 위해 체결한 여러 조약들에 숫자를 매긴 것에 불과하다. 특히 2차 한일협약은 을사늑약인데 이를 한일협약이라고 한다면 을사늑약의 체결 자체가 무효임을 주장하는 것과 배치된다. ⑥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술이 너무 소략하다. 관련 내용이 국내외뿐만 아니라 1910~1940년까지 방대한 양이다 보니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너무 축약해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도 지식인, 예술인, 종교인 등의 친일 활동이 있다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미주지역 독립운동 등 특정 내용 부각 위한 노력 눈에 띄어신주백(53) 연세대 HK연구교수 ① 개항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동아시아사와 한국사를 연계한 설명이 부족하고, 결과적인 사실만 나와 있어 현 검정 교과서들보다 더 불친절하다. 특정한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한 모습이 눈에 띈다. ‘외교 독립 선전 활동의 전개’(224쪽)처럼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에 높은 비중을 뒀다. 전체 민족운동의 양상과 운동 방법을 고려할 때 한쪽 분량으로 언급할 이유는 없다. ② 탐구활동이 지나치게 없다. 현 교과서처럼 여러 사료를 학생 스스로 분석하고 교사가 토론식으로 수업하는 데 방해될 수 있다. ③ 본문 내용과 시각자료의 연계성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제작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지도가 부족하고, 만화 등 상상력을 자유롭게 자극하며 학생의 흥미를 유발할 형식이 없다. 불성실한 구성이다. ④ 평이한 문장으로 학생들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 듯하다. 그러나 본문과 다른 구성요소 사이의 연계가 자연스럽지 않아 교사의 전달 효과와 학생의 학습 효과를 반감시킬 우려가 있다. 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와 민족운동의 관계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은 생소한 내용이다. ⑥ 본문을 완성하는 데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내용을 받쳐 주는 다른 학습요소에 대한 완성도가 매우 떨어진다. 편집이 딱딱하고 불성실해 전형적으로 주입식 교육에 맞는 교과서가 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개항기 외세 일본과의 대항관계 너무 간략 서술 한계왕현종(56) 연세대 역사문화학교수 ① 근대사에 대한 서술이 너무 축소됐다. 기존의 검정 교과서의 분량(60쪽)의 3분의2 수준이다. 근대 세계사의 전개와 한국사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없게 구성했다. ② 자료의 이해는 자료 탐구활동의 일환으로 된 반면 사진 자료의 설명이 지나치게 많다. 관련 사료를 제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어 본문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다. ③ 근대국가의 건설 운동 부분은 지나치게 간략하다. 각 운동의 전개와 대립, 외세 일본과의 대항관계가 제대로 서술되지 않아 중학교 교과서의 서술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④ 용어와 개념 그리고 인물에 대한 서술이 학생들의 수준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한 면에 좌우 양단 구성은 교과서 체제에서는 처음 사용된 것으로 가독성,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편집이다. ⑤ 개항기 서술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으로 독도의 영유권 문제, 대한제국 패망 원인,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의 논쟁,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등이 언급되지 않는 등 이 시기 공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⑥ 만일 검정 과정이 있었다면 탈락 사유가 많다. 학생의 눈높이, 단계적인 역사이해, 역사 쟁점에 대한 이해를 고려하는 내용이 없다. 학생들을 중학교 수준으로 간주하고 주입식 교육을 하려는 일방적이고 획일화한 역사 교과서다. [현대사] ■냉전·반공주의 기조… 민주주의 진전 부분 등은 거의 없어허은 (50)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① 냉전·반공주의와 성장주의가 기조를 이루면서 주요한 시기와 서술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거나 누락했다. 일상생활문화와 민주주의의 진전을 설명하는 부분도 거의 없다.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강조하는 데 치중해 주한미군 주둔이 한국사회에 초래한 제반 문제점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② 20세기 역사를 평면적으로 접근하게 만들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서술들이 적지 않게 확인됐다. ③ 민주공화국의 실제 내용을 채워 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민주화운동에 관한 서술이 여전히 부족하다. 재야인사,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자, 여성, 종교 분야의 생존권 투쟁, 인권운동 등을 더 충실히 서술해야 한다. 냉전반공체제가 초래한 국가폭력에 대한 언급도 매우 부족하다. 북한사 서술이 매우 소략하며, 그나마도 체계적인 역사적 서술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④ 역사 지식이 많지 않은 학생들이 읽을 때 오독하거나, 현 시국을 체험한 학생들이 용납할 수 없는 부분 또한 적지 않다. ⑤ 대한민국 수립이나 5·16 군사정변과 같이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을 모호하게 다루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민주공화국을 위한 한국 현대사의 도정에서 그 의의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제목을 바꾸는 게 옳다. ⑥ 역사학계가 민주공화국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 교과서는 그 내용의 충실도나 완성도와 상관없이 나와서는 안 될 교재다. ■역사 교과서라기보다는 정치·경제·통일 교과서 성격 강해 김찬수(49) 동원고 교사 ① 실제 역사학자가 아닌 집필진이 썼기 때문에 ‘역사적인 관점’이 부족하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라기보다는 정치, 경제, 통일 교과서의 성격이 강하다. ② 냉전적 사고를 기반으로 해 남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분단 비용, 국방비 문제 등에 대한 서술이 부족하다. 남북 체육 교류, 남한 통일단체의 노력과 대학생들의 통일 열망 등이 보이지 않는다. ③ 279쪽에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지수의 경우 2012년 20위로 8.13이었는데 2015년 22위로 후퇴한 것 등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 ④ 282, 283쪽 외환위기 극복 등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논하면서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라 하고,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계층 간 교육 격차가 확대된다고 비판하는 등 서술이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있다. ⑤ 논란이 되는 부분은 피하고자 한 의도가 역력하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나 ‘박정희 치적 강조’ 등 뉴라이트 사관이 보인다. 이승만의 독재 장기집권욕은 외면한 채 이승만 정부가 부정선거를 자행했다는 식으로 정부 차원의 문제로 서술한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 청산을 실패한 것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제주 4·3 사건의 구체적인 피해 상황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베트남 전쟁도 참전으로 얻은 이익만 쓰고 이면의 고엽제 피해, 양민 학살 문제는 두루뭉술하다. ⑥ 이승만에 대해 북진통일 주장,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사건, 작전 지휘권 이양 문제를 외면하면서 정작 6·25전쟁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루는 등 균형 감각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6·25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은 외면하고 있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가시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가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군부의 힘과 시민의 힘이 맞서고 있던 1987년 6월 13일 밤이었다. 성당 내부에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건넨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온화한 경고는 결국 가장 강력한 정치적 카리스마가 되어 명동의 신화를 만들게 된다. 결국 경찰은 병력 1500여명을 철수하게 되고 1987년 6월 15일 오전 11시, 시위대는 해산한다. 이로써 6월 10일부터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은 6월 항쟁의 신호탄을 명동에서 청와대로 쏘아 올린 기폭제가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종루(鐘樓)의 역할을 하던 명동성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당 앞뜰과 언덕을 숨 가쁘게 뛰어 오르던 낯빛 붉은, 꽃병(화염병) 쥔 청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DUTY FREE' 로고 한 가득, 흰 비닐가방 서너 개 든 외국인 관광객의 셀카봉에 명동성당 첨탑 십자가는 그윽한 서울의 배경으로 내려 앉았다. 삼일대로와 서울로얄호텔에서 명동성당 앞까지 밀려오던 사복경찰(일명 백골단)들이 즐겨 입던 청재킷은 어느덧 4만9000원 가격표를 달고 매장 앞 옷걸이에 ‘가을 신상’으로 걸려 있다.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중심에서, 2016년 서울 투어의 중심이 되었다. 명동성당이다. ●1898년 5월 29일 축성, 봉헌된 고딕 양식의 성당 2016년 9월, 명동은 24시간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지극히도 붐비는 곳이자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바로 이 곳,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가에 자리 잡은 명동성당(明洞聖堂)은 현재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 성당이며 고딕 양식의 기독교 교회당이라는 역사적 의미 역시 깊은 곳이다. 성당은 높이가 23m, 종탑의 높이는 46.7m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성당 내부에는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 글라스 등으로 공간의 미를 최대한 살렸다. 이런 종교적, 건축적 의미들로 인해 1977년 11월 22일에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문화 유산이기도 하니 처음부터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인 곳이었다. 우선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는 1784년 명례방 종교 집회였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천주교 박해가 풀리고 1883년 조선 교구는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집과 땅을 사들여 1887년에 성당 건립을 위한 땅다지기 공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성당의 터가 종현(鐘峴·진고개) 지역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있어서 왕궁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저택 역시 고종이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이에 고종은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고 결국 후일 금교령까지 내려진다. 하지만 천주교회측은 공사를 강행하여 1898년 5월 29일 작업을 완료하고 성당의 축성식을 연다. 그리고 성당 이름은 지역 명을 따서 종현성당(鐘峴聖堂)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후 이 곳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분들의 일부 유해를 모시게 되었고, 현재까지 지하성당에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일제 침탈 시기인 1930년대의 명동 성당의 역사에는 전시총동원(戰時總動員) 협력이라는 아픈 기록도 분명히 남기고 있다. 중일전쟁 발발 여드레 만인 1937년 8월 15일의 성모승천축일에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는 등의 일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당시 천주교 선교의 도움을 받고자 한 이런 비정치적 행동이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천주교회가 협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여 지금까지도 명동성당 기억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겨져 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아 종현성당(鐘峴聖堂)이라는 이름은 명동대성당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1970, 80년대 근현대사 격동기의 중심으로 명동성당이 한국 근현대사 정치의 중심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1960년대였다. 성당 측은 4·19 학생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자세를 드러내었고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에 대한 애정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후 5·16 쿠데타에 의한 장면 정권의 교체는 명동 성당으로서 뼈아픈 일이었다. 이 시기 서울 대교구와 성당측은 적지 않은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경향신문을 군사정권에 탈취당하는 등 힘겨운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본격적으로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성당측은 가지게 된다. 드디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는 역량을 키우게 된 것이다. 1980년 6월 25일 김수환 추기경은 시국관련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피의자들이 원주교구에 피신을 요청하게 되고, 최기식 신부가 이를 받아들여 구속된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은 1982년 4월 7일 강론을 통해 ‘가톨릭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인정한다. 이제 군부정권은 뜻하지 않게, 조선시대 이후 역사의 ‘산전수전'(?) 다 겪은 명동성당이라는 지독한 상대를 만나는 불운(?)을 겪기 시작한다. 이후 명동성당 본당 사목회 산하 ‘사회정의위원회’가 신설되고, ‘청년연합회’의 활발한 정치적 활동, ‘카톨릭 민속연구회’의 창설 등 민주화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난다. 결국 1987년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이루어진 ‘명동농성’을 통해 시위대, 정의구현사제단과 수녀단, 명동성당의 평신도들의 삼각협력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그 빛을 발한다. 당시 시위대의 안전한 귀가와 그 어떤 문책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군부정권으로부터 받아냄으로써 명동성당은 어느 순간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정치참여 활동은 순수한 종교적 구원을 추구하는 일반 신도들에게는 또 다른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 아고라(Agora)의 위상 유지와 순수 가톨릭 정신의 구현이라는 본래의 역할 수행이라는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1990년대를 맞이한다. 이후 현재까지 명동성당은 한국사회의 변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또 다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의 적절한 역할을 향해 끈임없이 고심중이다. 현재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 속에서 80년대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명동성당의 풍경은 항상 역사적으로 남아있음은 분명하다. <명동성당에 대한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인가? -당연하다. 굳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입장이어도,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방문의 가치는 충분하다. 경건한 종교 시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명동을 방문할 일이 있는 누구에게나. 쇼핑으로 무겁고 힘든 짐을 진 자들부터 성지순례를 원하는 가톨릭 신자까지 누구나 열려 있다. 3. 건축학적인 의미는 어떠한가?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본당 성당으로 전주의 전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의 원형이 되는 곳이다. 4. 시간은 많이 걸리나? -그리 넓지는 않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본당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5. 명동성당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공간은? -성당 내부 곳곳에 있는 성화와 성상,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화. 6.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mdsd.or.kr/ 7. 미사시간은? -평일미사는 오전 6시 30분, 오후 6시, 7시. 주일미사(일요일)는 오전 7시, 9시(영어미사), 10시, 11시, 12시(교중미사), 오후 4시, 5시, 6시, 7시(청년미사), 9시/ 자세한 시간은 홈페이지 참조 8. 성당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박물관, 평화화랑-1898 아케이드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공간은? -지하성당. 엄숙한 종교적 공간이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명동성당은 결코 관광지는 아니지만, 의미있는 여행지임에는 분명하다. 바티칸의 거대함보다 우리 삶의 현장에 있는 명동성당의 가치를 느껴보는 것도 종교를 떠나 가치있는 일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들아,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들아,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죽음을 앞둔 아들의 수의(壽衣)를 마름질하는 어미의 마음을 어찌 필설(筆舌)로 나타낼 수 있으랴! 아들 응칠(應七·안중근의 아명)의 사형소식을 접한 조마리아 여사(1862~1927)는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의 구설(口說)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전했다. '땀맘'을 먹지 말고 죽는 길이 어미가 원하는 길임을. 참으로 모진 어미다. 구설 내용은 당시 만주일일신문 1910년 2월 13일자 기사로 보도되었고, 지금까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1909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수의를 입고 그렇게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은 힘들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1901~1989)의 항복 선언을 통해 광복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주벌판 불던 칼바람이란 칼바람은 다 맞아오던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외세에 의한 해방이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노릇이었다.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또 다른 힘겨움을 예고하였기 때문에 일본천황의 항복선언은 두 눈이 얼얼해질 정도로 기뻤지만, 시간은 매웠다. 아쉬웠다. 우리 힘으로도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런 가슴 시린 조국 독립의 기억을 전시한 곳이 있다. 바로 천안의 독립기념관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한문(大漢門 ) 앞뜰 가득 울려 퍼지던 3.1 운동의 눈물소리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맞추고 외쳤던 안중근 의사의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대한! 만세!)’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또한 눈보라 폭염 헤치며 항일독립운동의 한길을 걸어온 선대들이 건국절 운운하는 이들에게 내려치는 준엄한 꾸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 수 있다. ● 한반도의 얼을 담다! “말로만 듣다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왔는데, 정말 좋습니다. 모든 전시물들도 훌륭하고,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귀한 체험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립기념관을 가족과 함께 방문한 이무일(45·한의사)씨는 연신 전시물들을 보고 감탄을 쏟아냈다. 실제로 천안 목천읍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은 세계의 어느 독립기념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구성면이나 전시물의 수준, 규모 등 이 정도면 과히 한 국가의 독립을 기념할 만한 자격은 될 듯 하다. 독립기념관의 건립 계획 시초는 1982년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하여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결정이 발표되었다. 이후 각계 대표 55명으로 구성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성금 500억을 기반으로 건립되었다. 원래 1986년 8월 15일 개관 예정이었으나 개관 11일 전에 전기화재가 발생하여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인 1987년 8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입구에는 민족의 비상을 표현한 '겨레의 탑'이 있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민족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독립기념관 본관은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들었는데 동양 최대 규모의 기와집으로 맞배지붕으로 모양을 마무리 하여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본관에 들어서면 시계방향으로 제 1전시관에서 제 7전시관과 입체영상관이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전시관은 그 자체로도 규모가 있고 전시물들도 알차서 실제 모든 전시관을 다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 제 1전시관에서 제 7전시관까지 감동으로 우선 제 1 전시관의 경우 ‘겨레의 뿌리’라는 전시관명에 걸맞게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거북선까지 모형을 위주로 실감나는 전시물을 배치하였다. 제 2 전시관은 186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주로 일제 침탈시기의 기록을 전시하였다. 이 곳에서 을사늑약 전문과 형무소 체험을 할 수 있다. 제 3 전시관은 구한말 국권회복 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유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제 4 전시관의 경우 일제강점기 우리 겨레 최대 독립운동인 3.1 운동을 다루고 있다. 제 5 전시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제 6 전시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제 7전시관은 일제 침탈 시기 각지에서 일어났던 독립 운동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외에 입체 영상관에서는 민족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여러 영상물들이 제공되어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은 다양한 특별전시들이 마련되어 있어 매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도 늘 색다른 전시공간을 제공하여 우리 겨레의 얼을 느끼게 한다. 또한 6.4m에 달하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 과거 선조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시관 이외에도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야외 캠핑장으로 인기가 있다. 특히 단풍나무길이 조성되어 조선총독부부재전시공원에서 통일염원의 동산 입구까지 약 4㎞에 걸쳐 아늑한 산책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니열차. 어린이방, 해설사 관람 안내 등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는 최적의 휴식 공간 및 문화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독립기념관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하는 무언가 무거운 주제의식에 버거워할 필요는 없다. 정말 볼만하고 가 볼만한 곳이다. 추천한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이라면 필수 방문 코스. 혹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언제나 눈물짓는 전시물 하나는 발견한다. 3. 시설환경은 어떠한가? -바로 이 지점이다. 한 마디로 훌륭하다. 특히 여름철 캠핑장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추천 1순위!! 4. 관람시간은 많이 걸리나? -가볍게 오후 반 나절 대강 보려고 한다면 기념관을 나설 때 아쉬움이 가득할 것이다. 제 1 전시관하나가 작은 박물관 규모라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5. 독립기념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공간은? -전시관들만 보지 말고 주변에 잘 정리된 숲길이다. 원래 독립기념관 주변은 풍광이 수려한 곳이어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산책을 꼭 해보길 바란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독립기념관 http://www.i815.or.kr/kr/ 7. 입장료와 기타 관광지정보는? -고맙게도 무료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공휴일 정상개관). 주차료는 소형 2000원, 대형 3000원.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독립기념관만으로도 충분하다. 주변에 상록리조트와 남산 중앙시장 등이 볼 만하다.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체험은? -전시물들이 워낙 방대해서 독립기념관만큼은 꼭 해설투어를 들어야 한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예약할 수 있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독립기념관은 말 그대로 민족의 얼과 혼이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진정한 맛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1922년 9월 <백조 3호>지에 발표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설움을 토해내던 홍사용 시인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마지막 시구이다. 눈물의 왕이었다. 고종(高宗)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1919년 1월 21일 식혜를 마시고 승하했다. 조선의 제 26대 임금으로, 대한제국(1897~1910)의 초대황제로, 결국은 일본 제국의 이태왕(李太王)으로 조각 구름같은 삶을 정동(貞洞)의 하늘에서 놓았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절멸, 고종의 독살(毒殺)설, 3.1운동의 실패로 만들어진 공포와 비애의 감정, 그 시원(始原)이 ‘덕수궁’이다. 비가 내렸다. 엊그제 폭염을 하루 만에 추억으로 만들어 버린 비였다. 덕수궁이 앉아 있는 정동에도 낮 동안 가을 내음, 비가 내렸다. 덕수궁은 비가 어울린다. 덕수궁은 다른 궁과는 달리 눈물겹다. 목이 한껏 메어오는 공간이다. 서글픈 집이다. 누구든 이 궁에서는 주인 자리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이야기만 한가득 만들었다. 굳이 지금에서야 벼르고 벼른 듯 덕혜옹주의 삶을, 고종황제의 삶을, 역사적 진위를 확인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문세가 노래하듯 이제는 그 때의 모든 것들이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서 이 모든 것들의 덕수궁의 아픔, 그 시간만으로도 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궐로서의 덕수궁만을 우리는 살펴보자. ● 정릉동 행궁(行宮)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덕수궁은 시청 광장 옆,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만 3069㎡에 이르는 서울 도심 속에 위치한 궁궐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시민들에게는 늘상 지하철 1호선이나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만나게 되는 생활 속의 공간이자, 가을길 은행나무 잎 가득 덮인 돌담길로 연인들을 유혹하는 옛날 궁궐이기도 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덕수궁을 20세기 역사의 언저리에 등장하는 근대의 궁궐로 인식한다. 그러나 애당초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세조(世祖)의 큰 손자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그러다 조선의 역사 한가운데로 급작스레 등장한 시기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을 시어소(時御所)로 명하여 거처하는 행궁으로 삼는다. 비로소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되었다. 이후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붙여주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명명한 경운궁에서, 자기를 쫓아낸 인조가 임금이 된다. 인조는 경운궁에 거처하지 않고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한적한 별궁으로 변한다. ●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에서 덕수궁으로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 경운궁으로 옮겨오게 되자 본격적으로 근대 궁궐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9월 17일에는 소공동(小公洞)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된다. 그러나 1904년에서 화재가 일어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이 되고 급하게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 복원되었지만 제대로 보수되지는 못한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純宗)이 즉위하면서 이제껏 불렀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된다. 이는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이기 때문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고, 이후 1910년에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게 되자 덕수궁은 일제 총독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13년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벚나무 500그루가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에 의해 덕수궁 곳곳에 심어졌으며, 1914년에는 대한제국의 원년을 선포했던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선다. 이후 일제는 193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덕수궁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많은 공사들을 시행한다. 우선은 1933년에 덕수궁의 주요 전각인 함녕전, 덕홍전, 중화전, 석조전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을 철거하거나 그 규모를 축소하고,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한다. 석조전은 일본근대미술품을 전시하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고 급기야 1935년 5월에는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신설해서 옛 궁궐로서의 품격을 완전히 격하시킨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쳐 1955년 6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다시 우리 역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본격적인 수많은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운영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덕수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 -당연하다. 서울 4대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을 들 수 있는 데, 이 중 가장 근대적인 면모를 갖춘 궁궐이다. 특히 석조전, 석어당, 정관헌 등은 기존의 옛 궁궐에서 찾기 힘든 근대 역사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궁궐로서의 위엄보다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친근함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라면 누구든지. 특히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의 경우 10월과 11월에는 누구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고즈넉함을 제공한다. 3. 덕수궁 야경이 그렇게 유명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1964년 4월 15일에 덕수궁 야간공개가 시작된 이래 야경투어의 정석이다. 특히 종로의 높은 빌딩과 네온사인들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밤풍경을 제공한다. 4.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 연인들은 진짜 헤어지나? -과거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역시 덕수궁 돌담길을 유명하게끔 만든 재미있는 이야기다. 5. 덕수궁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건축물은? -물론 최근에 복원된 건축물들도 많지만, 근대 건축물로서의 원형이 보존된 곳이 많다. 덕수궁 미술관으로 불리는 석조전, 새로 지어진 석어당,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드시던 정관헌,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던 준명당 등이 있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문화재청 덕수궁 http://www.deoksugung.go.kr/ 7. 입장료와 기타 관광지정보는? -25세 이상 개인1000원, 단체 800원이다. 만 24세 이하, 65세 이상은 무료이다. 단, 미술관은 덕수궁의 관람권을 구입하고 난 뒤, 미술관에서 별도의 관람권을 구입해야 한다.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정동 주변은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우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난 뒤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예전 대법원과 가정법원자리였던 서울 시립 미술관,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러시아 공사관, 세실극장, 김수근의 경항신문 사옥 등등 덕수궁 돌담길은 다른 볼거리도 무궁무진한 진정한 서울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체험은? -당연히 덕수궁 대한문에서의 수문장 교대 의식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3회 이루어지는데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에 의식이 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02-120(다산콜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모든 궁궐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덕수궁은 더더욱 그러하다. 비운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귀한 체험이 될 수 있다. 반드시 문화재해설을 듣는 것을 강추!!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구본영 칼럼] ‘고종의 길’에서 통일의 길 묻는다

    [구본영 칼럼] ‘고종의 길’에서 통일의 길 묻는다

    문화재청이 구한말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의 ‘고종의 길’을 복원한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길이다. 광복절인 그제 저녁 덕수궁 뒷길을 걸었을 때 벽돌로 지은 그 르네상스식 공사관은 3층의 탑 부분만 남아 희미한 옛 자취를 드리우고 있었다. 현재 주한 미대사관저에 걸쳐 있는 ‘왕의 길’. 덕수궁 북서쪽에서 옛 러시아공사관까지 길이 약 110m의 이 통로를 내년에 되살린다는 소식이 처음엔 영 마뜩잖았다. 일국의 황제가 타국 공관으로 줄행랑친 길을 복원한다니 말이다. 더구나 고종의 1년간 공사관 더부살이 때 러시아는 우리의 금·은광과 산림 자원 등 온갖 이권을 삼켰다는데…. 하지만 치욕의 역사 현장을 체험해 교훈을 얻는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 차원이라면 의미가 적잖다. 주한 미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의 여진이 한반도를 뒤흔들고 있다. 중·러, 특히 중국의 반발로 인한 후폭풍이 거세다. 중국이 관영 매체를 총동원해 내정간섭에 가까운 압박을 가해 오자 우리 내부는 벌집을 쑤신 형국이다. 사드 배치 예정지인 성주 군민들의 반발은 그렇다 치자. 일부 야당 의원들은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사드 반대 청원’을 독려하고 있다. 열강의 침탈에다 조정마저 친중·친일·친러 등으로 갈려 국권을 상실한 구한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국왕의 신변조차 외국 공관에 의탁해야 했던 대한제국에 비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브레진스키 교수가 말한 것처럼 더는 서양 장기판의 졸은 아니다. 광복 후 지구촌 최빈국이 세계 11위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했다면 자신감을 갖고 ‘중견국 외교’를 펼칠 때다. 물론 우린 아직 국제정치의 ‘슈퍼 파워’는 아니다. 그래서 주변 강국 중 너무 한쪽에 쏠리는 외교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드 문제로 각종 보복 가능성을 흘리는 지금 미·중 간 기계적 ‘균형 외교’의 효용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워싱턴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톈안먼 망루에 오르고, 우리는 중국 주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4조 3000억원을 투자했다. 그런데도 한·미 동맹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중 ‘짝사랑’은 별 소용이 없으라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윤영관 전 외교장관이 “한반도에 대해서 영토적인 문제와 관련해 야심이 없는” 미국과의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배경을 알 것 같다. 친중 경향성을 띠어 가던 참여정부 때 숭미파로 몰려 하차한 그의 ‘객관적 진단’이라면…. 그렇다면 ‘통일 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주변 4강의 우리 영토에 대한 ‘야심’부터 경계해야 한다. 한반도를 병탄했던 일본이 남북 통일을 도울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광복 71주년인 올해 우리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에도 억지를 부리는 일본이 아닌가. 방어용인 사드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중국은 또 어떤가. 북한의 핵 도발에 대한 유엔 제재에 동참하는 시늉만 하면서 곤궁해진 북한으로부터 동해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 조업권을 사들였다. 혹여 김정은 체제가 제 풀에 무너져도 ‘통일 한국’의 출현을 용인하긴커녕 이를 빌미로 중국군이 한·만 국경을 넘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러시아가 진화된 ‘영토 야심’을 보여 줘 다행인가. 부동항 확보는 ‘차르 시대’ 이래 러시아의 비원이었다. 이제 러시아가 북한의 나진항 이용권에 눈독을 들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남·북·러가 참여하는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북한 개방 효과를 거둔다면 통일의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다. 영토 야심에 관한 한 ‘일본=중국>러시아>미국’ 순이라는 부등식을 깨달아야 통일 방정식도 풀 수 있다. 다만 ‘중견국 외교’는 말은 쉽지만 고난도의 곡예다. 일치단결해도 될까 말까다. 그런데도 정부의 무기력한 ‘안보 리더십’에다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론’의 확성기 역을 맡아 총부리를 안으로 겨누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분열로 자멸했던 구한말의 통한을 되새길 수만 있다면 25억원보다 더 큰 예산으로 ‘고종의 길’을 복원해도 아깝지 않을 듯싶다.
  • ‘욱일기’는 왜 ‘하켄크로이츠’가 되지 않을까?

    ‘욱일기’는 왜 ‘하켄크로이츠’가 되지 않을까?

    광복절인 지난 15일 ‘소녀시대’ 멤버 티파니가 SNS에 올린 ‘욱일기 마크’ 논란이 당사자의 사과에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티파니의 국적은 논란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국적상 미국인인 티파니가 욱일기 사용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옹호 의견과 “한국에서 오래 활동한 연예인으로서 조심했어야 할 일”이라는 비난 의견도 부딪히고 있다. ●욱일기에 대한 서구권의 인식부족이 문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티파니의 모국인 미국을 포함한 서구권 국가 대부분에서 욱일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보편화 돼 있지 않다는 근본적 문제 제기도 나온다. 실제로 한국, 중국 등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침탈의 피해국가에서는 욱일기를 ‘전범기’로서 규탄하고 있지만 서구권에서의 문제의식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해외 기업 및 문화·예술인들이 무심코 욱일기 디자인을 차용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일부는 피해국 국민들의 직접적 불만 제기에도 ‘철회의 명분이 없다’며 욱일기 사용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 글로벌 스포츠 의류업체 나이키는 지난 2월 한정판 에어조던 운동화에 일본 전범기인 욱일기를 본뜬 디자인을 사용해 국내에서는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지난 4월 영국 기타리스트 겸 가수 에릭 클랩튼의 일본 도쿄 공연 포스터 역시 기타에 욱일기를 합성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논란이 됐다. ●서방권에 ‘욱일기=나치마크’ 와 닿지 않는 이유 이는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갈고리십자가)가 전 세계적으로 배척되고 있는 현상과는 대조적이다. 전후 독일은 ‘반 나치 법안’을 통해 하켄크로이츠의 자국 내 사용을 금지했다. 여기에 피해국들의 극렬한 반감까지 더해져 일부 극렬 우익세력을 제외하면 유럽 지역에서 하켄크로이츠를 찾아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반면 욱일기는 서구권은 물론 아시아 지역에서도 적잖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와 기업의 몰염치한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상당수의 일본 기업들은 제품 디자인에 욱일기 마크를 노골적으로 차용해왔다. 일본 해상자위대와 육상자위대는 욱일기를 원형으로 삼은 깃발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욱일기를 끊임없이 접해온 세계인들이 욱일기에서 군국주의의 메시지를 읽어내기란 이미 어려운 일이 됐다. ‘욱일기=하켄크로이츠’라는 등식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와 닿지 않는 이유다. ●외신, “한국인 분노 당연” 하지만 전쟁범죄 및 침탈행위에 대한 규탄은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이며, 욱일기 사용이 이러한 정신에 위배될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파악하기 힘든 것이 아니다. 실제로 ‘티파니 논란’을 다룬 몇몇 외신의 보도는 욱일기가 군국주의의 상징에 해당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 전문지 인터네셔널 비즈니스 타임즈(IBT) 미국판은 15일(현지시간) 기사에서 욱일기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이 한국 및 주변국에 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범죄를 상기시키는 깃발”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외신들은 욱일기 사용의 정당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으면서도 ‘피해 당사국’인 한국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 자체는 온당한 것이라고 평했다. 미국 연예 매체 인퀴지터 또한 같은 날 기사에서 “(티파니의 욱일기 포스팅 때문에) 한국이 분노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고 전한 바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서울 명동(明洞)과 금호동(湖洞), 인천 송도(松島) 등 일제의 잔재가 서려 있는 지명을 바꿔야 한다.’ 14일 우리 역사와 문화계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려고 만든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해방 이후 범정부적 차원의 체계적 노력 없이 지방자치단체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명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호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서울 ‘한성’을 ‘경성’으로,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격하시켰다.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바꿔 놓더니 산봉우리와 하천의 이름에서 ‘크다’는 의미가 담긴 ‘대’(大)자, ‘한’(韓)자가 들어가는 명칭은 모조리 없애거나 바꿨다. 여기에 1914년 10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리 민족이 자자손손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의미 왜곡’ 파주 문산 한자 바로잡아 일제의 지명 변경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해당 지역의 지형이나 물, 산 등 특징이 담긴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아무렇게나 바꾼 사례가 가장 흔하다. 서울 금호동의 경우가 그렇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또는 ’무수막’으로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湖洞)으로 바뀌었다. ‘새마을’로 불리던 경기 파주 금촌(村)은 일본이 경의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쇠마을’로 잘못 알아듣고 일본식 한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 온다. 파주 교하의 ‘새터마을’, ‘괸돌’ 등은 그 일대에 지석묘가 많은 점을 들어 한성과 가까운 쪽은 상지석리(上支石里), 먼 쪽 마을은 하지석리(下支石里)로 불렀다. 높은 산봉우리에 주로 붙던 ‘왕’(王)자에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를 더해 ‘왕’(旺)으로 바꿨듯, 특정 한자에 부정적 의미의 부수를 더해 완전히 다른 뜻의 지명으로 왜곡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파주 문산이 대표적이다. 본래 지명은 ‘문산’(文山)이었으나 1910년 전후부터 ‘문산’(汶山)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문’(汶)자는 ‘더럽다’, ‘불결하다’라는 뜻이 있어 1990년대 심각한 홍수를 겪었던 문산 주민들이 삼수변이 없는 ‘문’(文)자로 바꾸자는 운동을 벌였다. 파주시는 2014년 6월 지명위원회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문산읍과 문산리의 한자 표기를 ‘汶山’에서 ‘文山’으로 바로잡았다. 한글학회가 1966년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은 서울 편에서 원남동(苑南洞)을 “창경원 남쪽에 있으므로 원남동이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학설 및 주장도 있지만 ‘본래 순라동이었으나 1911년 순종황제가 머물던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바꾸고서, 창경궁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일제가 개명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지금의 서울 옥인동, 인사동 등 성격이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마을 이름을 제멋대로 합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은 “청운동은 청풍계(창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차용해 만들었다. 또 옥인동도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 지명”이라면서 “일제가 4개 지명을 2개로 줄이면서 의미가 축소되고 고유 의미가 퇴색했다”고 지적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洞)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토박이 지명이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한 경우가 많다”면서 “원남동처럼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끊고 모욕을 주기 위해 개명했거나, 땅이름 속 우리의 얼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합성 지명화한 곳은 마땅히 본래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역별 특색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정적 이미지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지명 변경도 그중 하나다. 충남 홍성군은 ‘홍주(洪州) 지명 되찾기 범군민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00년 가까이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제가 강제 개명한 만큼 주민들의 찬반 의견을 물어 2018년 시 승격을 앞두고 홍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다. 반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명동(明洞)과 송도(松島) 등처럼 일부 지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고 그 자체가 상품성을 갖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또 일부 지역 주민들도 지명이 갖고 있는 ‘가치’ 때문에 반대하기도 한다.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인 명동은 조선 시대에 명례동(明禮洞)이나 명례방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제가 1943년 6월 명치정(明治町·메이지초)으로 바꿨다. 서울의 한복판, 행정구역의 중심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일왕을 기리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명치정에서 ‘치’(治) 한 글자만 빠진 채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 지금의 명동이다. 또 인천을 대표하는 국제 신도시인 ‘송도’는 일본 전함 송도호, 일본명 마쓰시마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섬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10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원남동 역시 한때 지명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악의적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 “日 문화침탈 계속된다는 방증” 부산 동구 범일동에 ‘조방’(朝紡)이라는 지역이 있다. 1917년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군수공장(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조선방직은 1968년 사라졌으나 줄임말이 새로운 도로명과 각종 상호, 심지어 지자체가 지원하고 지역 경제단체가 추진하는 거리축제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아들 상국(56)씨가 “식민지 노동 약탈의 상징이었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호소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조방 앞 일원의 화려했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의도로 ‘조방 이끌리네 거리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명은 지역의 특성, 자연의 이치, 역사적 사실 등 다양한 사연 및 유래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광복 70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 주변엔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왜곡된 수많은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일본의 문화 침탈이 계속되고 있다는 방증이며, 정부 주도의 전국적인 실태조사와 동시에 지명 회복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 원장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 전쟁’”이라면서 “하루빨리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경북도·도의회 “일본 방위백서, ‘독도 영유권 주장’ 폐기하라”

    경북도·도의회 “일본 방위백서, ‘독도 영유권 주장’ 폐기하라”

    김관용 경북지사는 2일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의 2016년도 방위백서 즉각 폐기를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올해 방위백서에 12년 연속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실었다. 김 지사는 이날 도청 브리핑실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임에도 일본이 매년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과거 한반도 침탈의 역사적 잘못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규탄했다. 이어 “독도에 고의적인 도발행위는 국제적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이같은 노골적 영토 침탈행위는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또 “일본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뼈 저린 자기 반성과 성찰로 반역사적인 만행을 중단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정상화 및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라”며 “일본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독도 도발에 대한 일체의 책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경북도의회도 이날 의회 브리핑실에서 의원 일동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 정부는 방위백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망동을 12년째 반복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김응규 도의회 의장은 “겉으로는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표명하며 주변국과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반인류적 범죄행위를 깊이 반성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함께 방위백서를 비롯한 외교청서, 각종 교과서 등에 기술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체의 문구를 삭제하라고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백재현 국회 윤리특위원장 “금배지 대신 태극기 달자”

    백재현 국회 윤리특위원장 “금배지 대신 태극기 달자”

    더불어민주당 소속 백재현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은 지난 11일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태극기 배지를 전달하며 ‘금배지 대신 태극기 배지를 달자’는 내용의 친전을 보냈다고 12일 밝혔다. 또 백 위원장은 제헌절인 오는 17일부터 태극기 배지를 달자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금배지 대신 헌법기관으로서 국민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의 상징이자 평화의 상징인 태극기 배지를 달고, 국회가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상징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백 위원장은 금배지는 1950년 개원한 2대 국회 때 일본 제국의회를 본떠 도입된 만큼 금배지 대신 태극기 배지를 다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친전에서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한 8·29 경술국치일을 국가기념일로 재지정해 우리 근현대사를 바로 인식하고 국가의 미래를 올바로 성찰하는 시간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백 위원장은 18·19대 국회에서 1960년대 폐지된 경술국치일을 국가기념일로 재지정하는 내용의 ‘국가기념일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울산박물관 ‘독도’ 특별전 개최

    울산박물관은 3일부터 오는 7월 24일까지 ‘독도, 아름다운 그곳’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특별전은 울산박물관과 독도박물관이 공동 주최하고 해양수산부와 경북도에서 후원한다. 특별전은 ‘한민족의 섬, 독도’, ‘일본은 알고 있다’, ‘독도 침탈’, ‘독도, 광복되다’, ‘울산, 그리고 독도’ 등 5개의 주제로 나눠 열린다. ‘한민족의 섬, 독도’에서는 우리 사료를 통해 독도가 우리 삶의 공간이었음을 보여 주고 ‘일본은 알고 있다’에서는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인식했던 과거 일본의 자료를 전시한다. ‘독도 침탈’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울릉도와 독도의 행정구역을 정비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을, ‘독도, 광복되다’에서는 1945년 광복으로 한반도와 독도의 독립을 알려주는 자료 등을 전시한다. 또 ‘울산, 그리고 독도’에서는 17세기 안용복과 함께 일본으로 간 울산 출신 어부 박어둔 등의 자료를 통해 울산과 독도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준다. 이와 함께 울산박물관은 독도의 사계를 담은 사진과 1960년대 울릉도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희귀 동영상 등도 전시한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울산박물관, ‘독도’ 특별전 3일~7월 24일 개최

    울산박물관은 3일부터 오는 7월 24일까지 ‘독도, 아름다운 그곳’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특별전은 울산박물관과 독도박물관이 공동 주최하고, 해양수산부와 경북도에서 후원한다. 특별전은 ‘한민족의 섬, 독도’, ‘일본은 알고 있다’, ‘독도 침탈’, ‘독도, 광복되다’, ‘울산, 그리고 독도’ 등 5개의 주제로 나눠 열린다. ‘한민족의 섬, 독도’에서는 우리 사료를 통해 독도가 우리 삶의 공간이었음을 보여주고, ‘일본은 알고 있다’에서는 독도를 조선의 섬으로 인식했던 과거 일본의 자료를 전시한다. ‘독도 침탈’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울릉도와 독도의 행정구역을 정비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을, ‘독도, 광복되다’에서는 1945년 광복으로 한반도와 독도의 독립을 알려주는 자료 등을 전시한다. 또 ‘울산, 그리고 독도’에서는 17세기 안용복과 함께 일본으로 간 울산 출신 어부 박어둔 등의 자료를 통해 울산과 독도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준다. 이와 함께 울산박물관은 독도의 사계를 담은 사진과 1960년대 울릉도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희귀 동영상 등도 전시한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대구상의 설립 110주년 기념식 열고 공로자 표창 등 진행

    대구상공회의소가 설립 110주년을 맞았다. 대구상의는 2일 10층 대회의실에서 권영진 대구시장, 대구상의 회장단, 상공의원, 사무처 임직원 등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1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행사는 모듬북 식전 공연, 대구상의 연혁 보고, 모범 기업인과 근로자, 유관기관 공로자 표창 등 순으로 진행됐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하던 1906년 대구민의소로 출발한 대구상의는 대구상무소(대구조선인 상업회의소)로 개편됐다. 대구상공회의소라는 이름을 단 것은 1930년 10월이다. 대구민의소는 출범 초기 일제의 침탈에 맞서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했다. 결성 이듬해부터 시작한 국채보상을 위한 담배 끊기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대구상의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상의, 일본 시즈오카 상의, 페루 아레키파 상의, 이탈리아 밀라노 상의 등과 결연해 국제적인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대구상의는 110여명의 상공의원과 60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진영환 대구상의회장은 기념사에서 “대구상의가 걸어온 시간은 언제나 위기와 맞서고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의 연속이었으며 지금도 지역 경제는 대내외 악재 등 영향으로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다”며 “우리 상공인은 지역 경제의 성장 기반을 더 튼튼히 하고 희망찬 미래를 후대에 물려주는 소명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어김없이… 日 각료·의원 90여명 야스쿠니 참배

    어김없이… 日 각료·의원 90여명 야스쿠니 참배

    극우 총무상 “외교문제 삼을 일 아니다” 일본 각료와 여야 의원들이 2차 대전의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잇달아 참배했다. 야스쿠니신사의 춘계 예대제(例大祭·제사) 이틀째인 22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무상과 의원 90여명이 참배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라”고 촉구했다.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디카이치 총무상은 “나라의 정책을 위해 순직한 영혼의 안녕과 함께 유족의 건강을 기원했다”며 자신이 참배한 것을 외교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자민당, 민진당, 오사카유신회 등 여야 의원 90명가량도 이날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참배자에는 자민당의 야마타니 에리코 전 국가공안위원장, 민진당의 하타 유이치로 전 국토교통상, 오사카유신회의 아주마 도루 총무회장 등이 포함됐다. 다카하토 슈이치 내각부 부대신, 이토 요시타카 농림수산 부대신 등 정부 측 고위 인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일본의 일부 현직 각료 및 국회의원들이 과거 식민 침탈과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또다시 강행한 것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면서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며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서울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올해도… 아베, 야스쿠니에 공물 보내

    올해도… 아베, 야스쿠니에 공물 보내

    아베 신조(얼굴) 일본 총리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의 봄철 제사에 맞춰 공물을 보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야스쿠니신사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신사의 춘계 예대제 첫날인 21일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라는 이름으로 ‘마사카키’라는 공물을 봉납했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재집권 1년을 맞은 2013년 12월 직접 참배했다가 한국,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고 국제사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후 직접 참배하지 않고 공물을 보냈다. 오시마 다다모리 중의원 의장, 야마자키 마사아키 참의원 의장,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노동상 등도 이번 제사에 맞춰 공물을 보냈다.봄 제사는 23일까지 예정돼 있으며 22일에는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일본 의원들이 집단 참배할 예정이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아베 총리가 과거 식민 침탈과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신사에 또다시 공물을 헌납한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일본 정부는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실제 행동으로 보임으로써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갈 것”을 촉구했다. 구마모토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40]텃밭에 핀 붉은 양귀비꽃, ‘약손’의 비밀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40]텃밭에 핀 붉은 양귀비꽃, ‘약손’의 비밀

    중국과 영국이 벌였던 아편전쟁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의 하나로 꼽힙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확보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일군 영국이 떼돈 좀 벌어보겠다고 중국 전역에 막대한 양의 아편을 풀어 폐해가 속출하자 청나라 황제였던 선종이 아편 교역금지령을 내리고, 특사를 파견해 영국의 아편상들을 척결하도록 했지요. 아편 때문에 나라가 무너질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자 아편을 식민지 교역의 ‘전략상품’으로 내세워 큰 재미를 보고 있던 영국이 엉뚱하게도 자국 무역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국에 군대를 출병시켜 벌어진 전쟁, 바로 아편전쟁입니다. 그 아편 바람에 중국이 초토화했고, 중국과 교역을 하던 우리 나라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속절없이 아편의 덫에 걸려 신음해야 했었지요.  결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축한 영국의 해군력에 청나라가 굴복해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는 유명한 난징조약이 맺어졌습니다만, 역사를 바꾼 이 전쟁의 빌미가 된 것이 바로 아편(阿片)입니다.  ‘할양’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한일병탄을 앞두고 우리 나라도 일본에 많은 땅을 할양했고, 이곳을 무대로 일인들은 야금야금 조선을 먹어치웠으니까요. 그 때부터 일본은 우리 나라 곳곳에 ‘작은 일본’을 만들어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한일병탄 후에야 온 나라가 다 그들 땅이었으니 할양이라는 말을 쓸 이유도 없었지요. 그 때 일인들은 스스로를 ‘내지인’이라고 불러 ‘조센징’이나 ‘반도인’이라며 비하했던 우리들과 차별화했고, 거주지 등 생활권도 따로 꾸렸는데, 이 때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 바로 ‘혼마찌’나 ‘사꾸라마찌’ 같은 용어들이었습니다. 국권 침탈보다 먼저 이뤄진 할양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통 효과 뛰어난 아편  아편이라는 말은 아편의 영어 표기인 ‘Opium(오피엄)’에서 따온 차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의 원료이기도 한 아편은 중추신경을 마비시켜 강력한 진통작용은 물론 경련을 진정시키거나 설사를 멈추게 하는 등 활용 범위도 무척 넓었습니다.  그러나 중독성이 강해 한번 습관성에 빠지면 ‘목은 잘라도 아편은 못 끊는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값도 비싸서 한번 의존성에 빠져들면 살림은 물론 삶 자체가 거덜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중국이 영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을 벌인 게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의 벵갈지방에서 대량으로 재배, 생산해 중국에 퍼뜨린 이 아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출병한 청나라 병사들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바로 그 영국산 아편이 퍼졌다니 말입니다.  이런 아편은 우리의 민간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더러는 의아해 하기도 하겠지만, 약도 의사도 없던 시절에는 아편만큼 요긴한 상비약도 없었습니다.  ●아편 혹은 앵속(罌粟)  마당 한켠의 토담을 끼고 돌면 탱자나무에 둘러싸인 텃밭이 있었습니다. 넓이가 어지간한 집 마당보다 훨씬 넓었으니 아마 너댓 마지기는 됐을 것입니다. 평수로 따지면 1000평쯤 되었겠지요.  집 안쪽으로 이어진 토담을 따라 텃밭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른 키를 훌쩍 넘을만큼 높다랗게 아주까리며 옥수수가 자라 있었고, 그 옆에는 당귀와 모시풀 등속이 심어져 있었는데, 그 안쪽에서 양귀비가 몰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높다란 흙담에 가려지고, 골목길 쪽으로는 무성한 탱자울에 당귀와 아주까리 등이 숲을 이뤄 밖에서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할머니의 영역’이었습니다.  텃밭에 심은 고추며 채마밭 고랑을 따라 아침, 저녁으로 이곳을 찾은 할머니는 양귀비 꽃이 피면 혼잣말로 “앵속, 참 곱다”면서도 누가 볼세라 꽃잎을 다 따내 버리곤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더러 앵속 단속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지 단속반이 떠도 주로 외진 산비탈의 뙈기밭이나 뒤지지 마을 가운데 있는 텃밭까지 뒤지지는 않았거든요.  어린 제가 봐도 그 꽃은 참 붉고 예뻤습니다. 텃밭에 살랑∼ 바람이라도 스치면 가는 꽃대궁 위에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나온 꽃잎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너무 뇌세적이어서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목줄기가 타드는 듯한 충동이 일곤 했습니다.  시골에서 살다보면 오래 기억에 남는 색조의 충동이 그것 뿐만은 아닙니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무리지어 나는 방죽 너머로 해가 막 넘어갈 때면 노을이 마치 잉걸불처럼 이글거리기도 했고, 이슬이 찬 9월이면 매운 맛이 들어 붉어지는 고추가 또 보기만 해도 화닥거릴 정도로 붉었습니다. 홍시로 익어가는 땡감이야 그렇다 해도 그 감나무 잎에 단풍이 들면 붉은 색조가 한 순간 마당 한켠을 뜨겁게 물들였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옻이 오를까봐 곁에 가지도 않았던 옻나무 잎도 가을이면 정말 다가가 만져보고 싶을만큼 붉어져 길 가다가 한참을 바라보고 서있기도 했습니다.  양귀비 꽃잎은 이런 붉음을 무색하게 할만큼 선연하게 붉었습니다. 붉다 못해 검어 보이거나, 붉은 꽃잎의 가장자리에 흰 테두리를 둘러 붉음이 더 선명하기도 했던 그 꽃잎을 똑똑 따서 버리는 할머니에게 “왜 꽃을 따버리느냐”고 물으면 “글씨, 앵속은 나라에서 못 키우게 하니 그렇지”라고 말하곤 했지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어렴풋 그 꽃의 정체를 알아갔지만, 그 꽃에서 ‘기막힌 약’이 생산된다는 건 몰랐습니다.  꽃이 피었다 지면 할머니는 대나무를 삐져서 만든 손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씨방에 죽죽 칼집을 내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내 하얀 수액이 칼집을 따라 배어나곤 했는데, 그 이후엔 어떻게 처리를 했는지 잘 모릅니다. 예닐곱 시절의 기억이지만, 딱지치기도 해야 했고, 자치기도 했야 했으니,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 저도 나름 바쁜 축이어서 맨날 할머니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나중에 할머니가 보리알만 한 아편을 비닐에 싸서 앞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걸로 봐서는 씨방의 상처 자국에서 솟아 적당하게 굳어진 양귀비 수액을 따모아 잘 개어서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손끝에 따모은 수액을 손으로 개면 이내 검은 고약처럼 변했지요. 마치 옻나무 수액처럼.  ●의사도 없고 약도 없으니  참 아픈 곳이 많았던 시절이었고, 세상이었습니다.  물론, 병원도 없고, 약도 없어 어지간한 고통은 다 참고 견뎠지만, 그러다가 고질이 된 통증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마디마디 관절염과 치통, 결핵에 해소와 천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아이들은 시나브로 횟배앓이를 하거나 동통이 지독한 몸살에 크고 작은 외상도 많앗습니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도 번갈아가며 배앓이를 하곤 했는데, 배가 한번씩 뒤틀리기 시작하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자빠져 뒹굴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얼른 할매한테 가봐라”시며 등을 떠밀었고, 그러면 득달같이 할머니 방으로 달려가 그 ‘명약’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윗목 앞닫이를 열고 잘 감춰둔 그 약을 꺼내 손칼 끝으로 깨알만큼 떼어낸 뒤 입안에 넣어주시고는 배를 살살 쓸어주셨습니다.  배앓이에 부대낀 탓인지, 그 약의 효험 때문인지 한동안 뒹굴다가 잠이 들었고, 자고 나면 씻은 듯 고통이 사라져 다시 마당으로 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천방지축 뛰어놀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절제없는 아편은 ‘마약(魔藥)’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아편은 매우 위험한 약물입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성은 습관성에 빠지는 것이지요. 질병 때문에 몰핀을 자주 사용하는 환자들은 내성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몰핀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처방이나 사용에도 엄격한 약전 기준을 적용합니다.  물론, 최근 통증의학 분야에서는 이런 진통제를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처방하는 추세가 뚜렷합니다. 환자가 극심한 통증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보다 마약성 진통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득이 많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진통제는 비록 아편 성분이 든 마약성일지라도 중독 등 위험 부담이 적습니다. 전문의들이 정해진 기준과 준칙에 따라 적절하게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사도, 약도 귀했던 예전에는 통증이 반복될 때마다 아편을 쓰다가 중독에 빠져 종국에는 패가망신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통증이라고 하면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질병은 통증을 수반합니다. 특히, 처음에는 통증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질환도 마지막은 통증으로 귀결하는데, 암도 그렇고, 고혈압이나 당뇨병도 예외가 아닙니다. 통증의 정도도 다양합니다. 현재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통증 척도인 VAS 기준에 따르면, 총 10단계 중 1단계는 통증이 없는 상태, 10단계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통증이 8~9단계 정도에 이르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되니까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고통을 못 견뎌 아편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 탓이라기보다 그런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한 몽매함과 미개함, 거기에서 비롯된 낙후한 의료시스템과 보건안전망의 부재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이 다 그랬으니 그걸 탓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가 ‘마약청정국’이었습니다만, 요즘 들어 갈수록 마약 밀수량이 많아지고, 유통량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마약은 퇴폐적인 향락의 주술(呪術) 같은 것이어서 마약 밀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 사회의 건전성이 훼손되는 징후라고도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의료용 마약의 소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이고, 마약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충족시키는 많은 방법 중 하나라는 강변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성정을 왜곡하는 물질인 데다 습관성의 폐해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부담없이 되돌아보는 약손의 추억이지만, 거기에는 이런 위험도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할머니는 절대로 한 사람에게 이 약을 두 번, 세 번 잇따라 쓰지 않았습니다. 어제 아팠던 배가 오늘 다시 아파도 할머니는 “약 다 쓰고 없다”며 배만 쓸어 주셨는데, 아마 아편의 중독 위험성을 알고 계셨던 게 틀림없는 듯 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또한 이 세상을 만들어 냈으니, 알아도 모른 척 했던 약손의 효험을 새삼 의심하고 지워버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체온으로 전해진 그 약손의 사랑이야말로 지금은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참으로 외경스러운 ‘내리사랑’의 기억이니까요.  jeshim@seoul.co.kr
  • 정부, 日 왜곡 교과서 강력 규탄·즉각 시정 촉구

    정부, 日 왜곡 교과서 강력 규탄·즉각 시정 촉구

    ‘독도 동영상’ 13개국 언어 추가 홍보 정부는 18일 독도 영유권 주장 확대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모호하게 기술한 일본 고교 교과서가 검정에서 통과된 것을 강력히 규탄하고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했다. 또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독도가 우리의 고유 영토라는 점을 적극 홍보하기로 했다. 정부는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가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함해 왜곡된 역사관을 담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또다시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강력히 개탄하며 즉각적인 시정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장래를 짊어질 미래 세대뿐만 아니라 침탈의 과거사로 고통받은 주변국들에 대한 엄중한 책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병원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로 스즈키 히데오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초치해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 외교부는 이날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에 게재된 독도 동영상을 한국어와 영어를 포함한 기존 12개 언어뿐 아니라 베트남어, 네덜란드어, 말레이시아어 등 13개 언어 자막으로도 볼 수 있도록 개편했다. 교육부도 초·중·고교에 다음달 중 ‘독도 바로 알기’ 교재를 배포해 수업 시간에 이를 활용한 독도 교육을 하도록 할 예정이다. 교육부는 또 중학교 자유학기제 기간에도 활용할 수 있는 교수학습 자료를 개발해 보급하기로 했다. 현재 집필 중인 고등학교 국정 역사 교과서에도 독도 관련 기술이 한층 강화된다. 오는 6월에는 교과서 왜곡 시정 요구안을 일본 외교부에 전달할 계획이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친일인명사전 필사본’ 제작 범국민운동 전개

    ‘친일인명사전 필사본’ 제작 범국민운동 전개

    서울특별시의회 교육위원회(교육위원장 김문수)는 2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장 앞에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친일인명사전 4,389명 필사본 제작 범국민운동’ 행사를 개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1994년부터 작업하여 2009년 11월 출간한 인명사전으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찬양하고,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들을 정리・분류하여 수록한 책이다. 이 사전에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일제의 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구체적인 반민족행위와 해방 이후의 주요 행적이 담겨 있다. 이날 행사와 관련하여 김문수 교육위원장(더불어민주당, 성북2)은 “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취지는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공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며 가슴깊이 기억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지난 2월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스기야마 신스케 외무성 심의관이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고, 위안부는 조작된 것이며 위안부가 20만명에 달한다는 것도 착각에 따른 오류이고,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일본이 아직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할 필요성이 큼을 역설했다. 또한 김 위원장은 “친일인명사전에는 조약체결 등 매국 행위에 가담한 자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 등의 민족반역자(반민족행위자)와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자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지식인 문화예술인과 같은 부일협력자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번 행사를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행적을 시민들께 바로 알림으로써 국권침탈시기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고, 최근 위안부 졸속 합의의 문제점 등에 대한 대국민 인식을 고취시켜 일본의 참된 반성과 사죄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할 것”을 강조했다. 서울특별시의회 교육위원회는 이번 범국민운동을 3.1절부터 8.15 광복절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누구나 1인 1명씩 4,389명이 참여하는 친일인명사전 필사본 제작 범국민운동에 국민들의 전폭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참여방법과 관련해, 김문수 교육위원장은 4,389명의 참여자와 대상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김문수 교육위원장 블로그(blog.daum.net/soomoonjang2, log.naver.com/soomoonjang2)와 SNS, 이메일(soomoonjang2@naver.com ), 팩스(02-3705-1451~2), 우편(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15 서울특별시의회 의원회관 6층 교육전문위원실)로 신청을 받고 이름을 게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다케시마의 날’ 규탄, 정부 “일체 도발 중단하라” 日대사 불러 항의

    ‘다케시마의 날’ 규탄, 정부 “일체 도발 중단하라” 日대사 불러 항의

    ‘다케시마의 날’ 규탄, 정부 “일체 도발 중단하라” 日대사 불러 항의 다케시마의 날 규탄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22일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일본 중앙 정부가 이 자리에 고위급 인사를 참석시킨 데 대해 정부는 독도에 대한 도발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이날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섬영을 통해 “지난해 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간 합의를 계기로 새로운 양국관계를 열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일본 정부가 지방 정부의 소위 ‘독도의 날’ 행사에 중앙정부 고위급 인사를 또 다시 참석시킨 데 대해 강력 항의하며 재발방지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일체의 도발을 즉각 중단하고,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를 겸허히 직시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이와는 별도로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스즈키 히데오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이날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로 불러 이번 도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시마네현은 이날 오후 시마네 현립 무도관에서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으며, 이 행사에는 중앙 정부에서 차관급 인사가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행정 구역에 편입하는 고시를 했으며 이에 착안해 2005년 3월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로 제정했다. 이어 2006년부터 기념행사를 열었고 올해가 11년째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다케시마의 날’ 규탄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日 정부 고위급 파견 대체 왜?

    ‘다케시마의 날’ 규탄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日 정부 고위급 파견 대체 왜?

    ‘다케시마의 날’ 규탄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日 정부 고위급 파견 대체 왜?다케시마의 날 규탄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22일 개최하는 ‘다케시마(竹島)의 날’ 행사에 일본 정부가 4년째 차관급 인사를 파견했다. 시마네현에 따르면 이날 시마네 현립 무도관에서 약 5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과 ‘다케시마·북방영토(쿠릴 4개 섬) 반환요구 운동 현민대회’가 열렸다. 일본 정부는 이 행사에 사카이 야스유키(酒井庸行) 내각부 정무관(차관급)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이후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에 올해로 4년째 정무관을 파견했다.또 ‘일본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자민당 중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 10명이 이번 행사에 참가할 것으로 알려졌다.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행정 구역에 편입하는 고시를 했으며 이에 착안해 2005년 3월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로 제정했다.이에 따라 2006년부터 기념행사를 열었고 올해가 11년째다.요미우리(讀賣)신문은 다케시마의 날 행사와 관련해 “영토문제의 역사적 경위나 현상에 관해 더 많은 국민이 올바른 지식을 지니고 공통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여러 분야에서 일본·한국의 협력을 착실히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의 주장을 확실히 전해야 한다”고 22일 사설을 썼다.한편 최재익 독도수호전국연대 대표 등 한국인 4명은 전날 일본을 방문해 주오사카(大阪)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독도 영유권 주장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며 22일 행사장 인근에서 항의 행동을 펼칠 계획이다.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정한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폐지하라는 기자회견이 잇따라 열렸다. 이날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맞은 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는 본적을 독도로 옮긴 사람들의 모임인 독도향우회와 독도 관련 시민단체인 독도NGO포럼 소속 회원 10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 독도 침탈 음모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다케시마의 날’을 ‘거짓 독도의 날’로 규정하고서 일본 정부와 시마네현이 이를 조속히 폐지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독도를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중간수역’에 둬 논란을 빚은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을 하루빨리 파기하라고 요구했다.독도NGO포럼은 특히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도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은 앞서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으므로 구한말에 강점한 대마도 역시 바로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어 오전 11시에는 독도사랑국민연합·독도칙령기념사업국민연합 등이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일본을 규탄했다.오후에는 독도살리기운동본부가 개최하는 약 500명 규모의 ‘다케시마의 날’ 규탄 문화제도 가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다케시마의 날’ 규탄, 소녀상 옆에서…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

    ‘다케시마의 날’ 규탄, 소녀상 옆에서…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

    ‘다케시마의 날’ 규탄, 소녀상 옆에서… “거짓 독도의 날 폐지하라“다케시마의 날 규탄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22일 개최하는 ‘다케시마(竹島)의 날’ 행사에 일본 정부가 4년째 차관급 인사를 파견했다. 시마네현에 따르면 이날 시마네 현립 무도관에서 약 5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과 ‘다케시마·북방영토(쿠릴 4개 섬) 반환요구 운동 현민대회’가 열렸다. 일본 정부는 이 행사에 사카이 야스유키(酒井庸行) 내각부 정무관(차관급)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이후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에 올해로 4년째 정무관을 파견했다.또 ‘일본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자민당 중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 10명이 이번 행사에 참가할 것으로 알려졌다.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행정 구역에 편입하는 고시를 했으며 이에 착안해 2005년 3월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로 제정했다.이에 따라 2006년부터 기념행사를 열었고 올해가 11년째다.요미우리(讀賣)신문은 다케시마의 날 행사와 관련해 “영토문제의 역사적 경위나 현상에 관해 더 많은 국민이 올바른 지식을 지니고 공통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여러 분야에서 일본·한국의 협력을 착실히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의 주장을 확실히 전해야 한다”고 22일 사설을 썼다.한편 최재익 독도수호전국연대 대표 등 한국인 4명은 전날 일본을 방문해 주오사카(大阪)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독도 영유권 주장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였으며 22일 행사장 인근에서 항의 행동을 펼칠 계획이다.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정한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폐지하라는 기자회견이 잇따라 열렸다. 이날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맞은 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는 본적을 독도로 옮긴 사람들의 모임인 독도향우회와 독도 관련 시민단체인 독도NGO포럼 소속 회원 10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 독도 침탈 음모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다케시마의 날’을 ‘거짓 독도의 날’로 규정하고서 일본 정부와 시마네현이 이를 조속히 폐지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독도를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중간수역’에 둬 논란을 빚은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을 하루빨리 파기하라고 요구했다.독도NGO포럼은 특히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도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은 앞서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으므로 구한말에 강점한 대마도 역시 바로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어 오전 11시에는 독도사랑국민연합·독도칙령기념사업국민연합 등이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도가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일본을 규탄했다.오후에는 독도살리기운동본부가 개최하는 약 500명 규모의 ‘다케시마의 날’ 규탄 문화제도 가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