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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는 일본] 세계서 머리카락 가장 긴 18세 여성, 싹둑 잘라 기부하다

    [여기는 일본] 세계서 머리카락 가장 긴 18세 여성, 싹둑 잘라 기부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헤어 도네이션'(Hair donation·머리카락 기부)에 참여한 10대 여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일 아사히 신문 등 현지언론은 ‘세계에서 머리카락이 가장 긴 10대’로 지난해 3월 기네스 세계기록을 세운 가고시마현 이즈미시(鹿児島県出水市)의 가와하라 게이토(18)가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길러온 머리카락을 처음으로 잘라 의료용 가발을 만드는데 기부한다고 보도했다. 기네스 기록이 된 지난해 3월 게이토의 머리카락 길이는 155.5㎝. 현재까지 170㎝ 넘게 머리카락을 기른 게이토는 최근 머리카락의 절반 이상을 싹둑 잘랐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게이토가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한 이유는 출생 직후 머리 피부에 반점이 생겨 수술을 했는데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유이치(49)씨는 "딸의 머리손질은 우리집의 일상 업무였다"면서 "아내가 딸의 머리카락을 씻기면 나는 건조시키는 것이 하루일과였다"고 말했다. 게이토가 애지중지하던 머리카락을 잘라 기부한 이유는 있다. 재작년 여름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머리카락을 잘라 ‘헤어 도네이션’을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 게이토는 "내 머리카락이 환자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밝아지게 한다면 좋겠다"면서 "기네스 기록은 큰 추억거리로 계속 남을 것이기 때문에 전혀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 유이치씨도 "딸의 키보다도 더 길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카락 기부를 생각한 딸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강보윤 도쿄(일본) 통신원 lucete1230@naver.com
  • ‘꽃기운’ 싣고 돌아온 볼빨간사춘기 “행복한 봄 만들어드릴게요”

    ‘꽃기운’ 싣고 돌아온 볼빨간사춘기 “행복한 봄 만들어드릴게요”

    볼빨간사춘기가 봄 기운 가득한 새 앨범을 들고 나왔다. ‘여행’으로 지난해 여름을 강타한 데 이어 올해는 봄을 볼빨간사춘기의 색을 물들인다는 각오다. 볼빨간사춘기는 2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일지아트홀에서 새 미니앨범 ‘사춘기집1 꽃기운’ 발매 쇼케이스를 열었다. 우지윤(23)은 “오는 길에 벚꽃이 예쁘게 피었더라. 이번 앨범 공개를 기다리는 마음도 되게 설렌다”며 인사했다. 안지영(24)은 “콘서트도 하고 싱글도 내고 휴식시간도 가졌다. 여행도 다니고 서로 취미 활동도 하면서 재충전을 했다”며 근황을 알렸다. 이번 앨범에는 모두 5곡이 수록됐다. 그 중 3곡이 타이틀곡이다. 안지영은 “저희가 이번에 욕심을 많이 부린 탓인지, 좋은 곡이 많아서인지 타이틀곡이 많다”며 웃었다. 메인 타이틀곡인 ‘나만, 봄’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나만 봐줬으면 좋겠다는 ‘나만, 봄’, 그래서 나만 같고 싶은 ‘나만, 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에는 파란 하늘과 함께 봄과 잘 어울리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우지윤은 “뮤직비디오에서 화살을 맞는 액션신이 있는데 촬영 때가 생각나서 뿌듯하다”며 “다음에는 욕심을 부려서 더 완성도 높은 액션신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해 주위를 웃겼다. 두 번째 타이틀곡인 ‘별 보러 갈래?’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영화처럼 풀어냈다. 전체적으로 팝스러운 사운드와 리듬감 있는 안지영의 보컬이 돋보이는 곡이다. 세 번째 타이틀곡 ‘머메이드’(Mermaid)는 발라드곡이다. 동화 ‘인어공주’에서 영감을 얻은 곡으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정적인 가사로 표현했다. 앨범 제목의 ‘꽃기운’, 커버 아트에 담긴 활짝 핀 꽃들, 싱그러운 봄기운 가득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봄을 위한 앨범이 완성됐다. 안지영은 “대놓고 봄을 저격하고자 나온 앨범이다. 많은 분들의 마음을 간지럽히러 저희 볼빨간사춘기가 출동했다”고 말했다. 우지윤은 “봄이니까 밖에 축제도 많고 예쁜 곳이 많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 저희 노래가 쓰였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안지영과 우지윤은 비주얼적으로도 봄 느낌에 맞는 변화를 줬다. 밝은 금발과 핑크빛 머리로 염색을 했다. 안지영은 “화사하고 밝은 느낌으로 가면 많은 분들이 볼빨간사춘기의 색깔을 잘 느끼지 않을까 했다”며 “두피가 굉장히 아프기는 하지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어서 아직은 견딜 수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보컬 때문에 발표하는 노래들이 전형적으로 들리게 될 시점이 오지 않았나 하는 질문도 나왔다. 안지영은 “많은 분들이 저희를 걱정해주시는 부분 중 하나”라며 “여행 때는 밴드 사운드를 시도했다면 이번에는 일렉트로닉과 감성적인 걸 많이 담았다. ‘시애틀 얼론’(Seattle Alone)은 아예 느낌이 다른 곡이다. 들으시는 분들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서 재미와 신선함을 더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들은 쇼케이스를 마치면서 새 앨범을 사랑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안지영은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일상,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봄이다. 올해는 볼빨간사춘기의 봄을 더해서 꽃기운 가득한 행복한 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지윤은 “봄 하면 볼빨간사춘기가 가장 떠오르는 계절이 됐으면 좋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글·사진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단독] 나눔의 집, 진입로 확장공사 주민 반대에 ‘속앓이’

    [단독] 나눔의 집, 진입로 확장공사 주민 반대에 ‘속앓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생활 시설인 경기도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으로 향하는 진입로 확장·포장 공사가 인근 주민들과의 의견충돌로 차질을 빚고 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지난 1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진입로가 좁아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해 방문객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며 “진입로 확장·포장 공사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하소연했다. 1995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나눔의 집은, 1992년 나눔의 집 건립추진위원회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을 통해 세워졌다. 이곳은 애초에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비포장도로였으나, 1996년과 2011년 두 차례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도로포장과 확장공사를 진행했다.문제는 마을 초입부터 나눔의 집까지 총 800미터 구간 중 500미터 도로만 공사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나머지 300미터는 당시 손을 대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현재 마을 초입부터 시작되는 미 공사 구간은 폭 4미터로 차량 통행에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일부 의원과 정부 도움으로 지난해 진입로 확장·포장공사를 위해 19억 원의 예산이 확보됐고, 최초 계획했던 800미터 전 구간을 폭 8.5미터로 확장해 공사가 진행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시 일부 주민들과 의견충돌이 발생하면서 300미터 구간을 폭 6미터로 한정, 확장하는 방향으로 수정됐다. 이에 안신권 소장은 “당시 주민들도 300미터 구간에 대해 확장공사를 원했다. 어렵게 예산을 확보했는데, 일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니 안타깝다”며 “도로가 좁아 불편을 호소하는 방문객이 많다. 나눔의 집을 찾는 외국인 단체관람객은 주로 대형버스를 이용하는데, 버스 진입이 어려워 불편을 호소한다”며 답답한 심경을 밝혔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원당리 마을 이장은 “도로 확장 문제에 대해 마을주민 전체 의견이 반대 기조가 많다. 더욱이 사업 구간의 토지수용 대상자는 전원이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답했다. 이어 “퇴촌면 쪽은 물류창고 수요가 많은 동네다. 실제로 물류창고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진입로를 넓히면, 이런 물류창고가 더욱 늘어날 테고, 화물차가 들락날락할 것이다. 옆 동네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며 “큰 차들이 다니면, 조용했던 마을이 시끄러워지고, 통행이 더 불편해진다”며 반대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마을 입장에 대해, 안 소장은 “마을 주민들이 조용하게 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사실상 납득하기는 어렵다”며 “특히 800미터 전체 구간을 폭 8.5미터로 확장하고, 그중 2미터는 인도로 할 계획이기에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현재 나눔의 집 측은 도로 확장·포장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3300여명이 동참한 상황. 안 소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는 방문객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진입로가 좁아 불편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 죄송하다”며 “광주시가 방문자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적법한 행정력을 발휘해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한편 광주시청 측은 사업 진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광주시청 도로사업과 관계자는 “주민설명회를 거치면서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온 상황이라 내부적으로 다른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나눔의 집 측과 주민들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해서 확장공사를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무엇보다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공동 생활하는 시설로 복지시설 그 이상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주민들의 이해와 지자체의 사려 깊은 절차 등 적절한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비올레타’에 담은 응원… 아이즈원 “많은 활동으로 위즈원에게 보답할래요”

    ‘비올레타’에 담은 응원… 아이즈원 “많은 활동으로 위즈원에게 보답할래요”

    한일 합작 프로젝트 걸그룹 아이즈원이 보랏빛 사랑을 가득 담은 응원 메시지를 들고 돌아왔다. 아이즈원은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미니 2집 ‘하트*아이즈’(HEART*IZ) 발매 쇼케이스를 열었다. 타이틀곡 ‘비올레타’ 무대와 뮤직비디오가 처음 공개됐다. 약 5개월 만의 국내 새 앨범이자 두 번째 한국 활동이다. 리더 권은비는 그간의 근황에 대해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입학한 친구들도 있다. 일본 활동도 병행했고 무엇보다 새 앨범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말했다. 데뷔곡 ‘라비앙로즈’가 붉은 장밋빛을 띈 노래였다면 이번 ‘비올레타’에서는 보랏빛 향기가 느껴진다. 안유진은 “‘라이방로즈’는 저희 아이즈원이 피어내고 싶은 열정을 장미꽃으로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모든 분들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널 기다릴게/ 항상 난 곁에 있으니까/ 화려한 조명보다 더 널 향한 빛으로 더/ 오직 너를 위한 나니까’ 등 가사에는 사랑과 격려가 담겼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의 스토리에 착안해 탄생했다. 멤버들이 ‘제비’가 돼 행복을 상징하는 ‘사파이어’를 제비꽃인 ‘비올레타’에게 전한다는 의미다. 컴백 준비를 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묻는 질문에 김민주는 “이번 노래와 안무가 너무 신나서 즐겁게 연습했다. ‘라비앙로즈’ 때보다 합이 잘 맞아서 신기했다”고 답했다. 혼다 히토미는 “많은 분들게 보석을 가져다드리는 ‘제비춤’이 있다”며 이채연, 권은비와 함께 포인트 안무를 보여줬다. 모두 8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에는 ‘프로듀스 101’ 선배인 워너원 출신 이대휘가 선물한 ‘에어플레인’(Airplane)이 포함됐다. 안유진은 “선배님께서 정말 바쁘신 와중에도 저희를 위해 상큼하고 밝은 곡을 선물해주셨다”며 “첫 시작부터 상큼해서 저희 아이즈원이랑 잘 어울린다.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앨범에 수록됐던 유닛곡 ‘고양이가 되고 싶어’와 ‘기분 좋은 안녕’은 한국어 버전으로 새로 녹음했다. 이채연은 “한국 위즈원(팬덤명) 분들이 너무 좋아해주셔서 12명 버전으로 다시 녹음했다”고 밝혔다. 미야와키 사쿠라는 “저희를 응원해주시는 팬분들과 좀 더 소통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며 웃었다. 지난해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을 통해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은 12명이 아이즈원으로 데뷔했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데뷔 앨범은 총판매량 20만장을 넘기는 등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지난 2월 일본에서 발매한 데뷔 싱글 ‘좋아한다고 말하게 하고 싶어’ 역시 초동 22만장을 돌파하며 일본에서도 높은 관심을 확인했다. 막내 장원영은 이번 활동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지난 데뷔 앨범 때 주신 사랑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 1위 목표보다는 많은 무대와 활동으로 위즈원 분들께 보답하고 싶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글·사진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여기는 일본] 드라마? 애니?…역사상 첫 ‘가상 유튜버’ 출연 드라마 제작

    [여기는 일본] 드라마? 애니?…역사상 첫 ‘가상 유튜버’ 출연 드라마 제작

    드라마 주인공들이 사람이 아닌, 가상의 존재라고 하면 어떤 느낌일까? 지난 1일 마이니치 신문 등 현지언론은 전 출연진이 '가상의 유튜버'인 역사상 최초의 지상파 드라마 '와타누키 씨의 집'(四月一日さん家の)이 방송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다소 생소한 단어인 가상의 유튜버(Virtual Youtuber)는 영화 ‘아바타’처럼 모션 캡처와 3D 그래픽 기술 등을 이용해 만들어진 존재로 줄여서 ‘브이튜버'(Vtuber)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히 브이튜버의 주 활동무대는 유튜브지만 인기 브이튜버의 경우 가상 공간에서 콘서트를 하거나 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오는 19일부터 TV도쿄에서 방영될 이 드라마는 부모를 잃고 살아가는 세 자매의 삶을 담고 있다. TV도쿄 프로듀서 고카(五箇)씨는 "브이튜버는 새로운 영역의 엔터테이너"라면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브이튜버들과 함께라면 지금까지 보지못한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TV도쿄 측은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이 아닌 드라마인 이유에 대해 드라마 제작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과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연기 모두 브이튜버가 스스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 때문에 실제 오디션에서는 목소리만이 아닌 움직임을 포함해서 연기력을 보았고, 애드리브도 넣고 싶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과 대처도 눈여겨 보았다고 말했다. 다만 이 작품이 보통의 드라마와 다른 점은 VR기술 스태프가 필요하다는 것. 작품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VR 제작사 측은 "자체 제작한 VR공간에서 브이튜버의 연기를 촬영하고 방송국에서 이를 실사 드라마에 어울리는 배경과 연속드라마의 포맷에 맞는 편집을 했다"고 밝혔다. 강보윤 도쿄(일본) 통신원 lucete1230@naver.com
  • ‘컴백 D-1’ 아이즈원, 미니 2집 ‘HEART*IZ’ 기대 포인트 셋

    ‘컴백 D-1’ 아이즈원, 미니 2집 ‘HEART*IZ’ 기대 포인트 셋

    아이즈원의 컴백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서 음악팬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이즈원(장원영, 미야와키 사쿠라, 조유리, 최예나, 안유진, 야부키 나코, 권은비, 강혜원, 혼다 히토미, 김채원, 김민주, 이채연)은 약 6개월 만에 발표하는 두 번째 미니앨범 ‘하트아이즈(HEART*IZ)’를 통해 한층 더 새로워진 콘셉트와 물오른 비주얼, 업그레이드된 음악을 예고했다. 앨범 발매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즈원의 컴백 주요 관전 포인트를 짚어봤다. # ‘보랏빛 여신’ 변신! 독보적 콘셉트 ‘두근두근’ 지난 20일부터 공식 SNS와 프로모션 홈페이지를 통해 비올레타 버전 오피셜 포토 공개를 시작한 아이즈원은 화사한 바이올렛 컬러를 기반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청량미 넘치는 매력을 발산하며 팬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이어 공개한 사파이어 버전 오피셜 포토에서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초특급 미모와 화려하고 럭셔리한 이미지를 자랑하며 비올레타 버전과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을 선사했다. 두 가지 버전의 오피셜 포토를 통해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매혹적인 콘셉트를 예고한 만큼, 아이즈원의 컴백 활동 콘셉트에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 타이틀곡 ‘비올레타’부터 이대휘 곡 선물까지…역대급 트랙 라인업 아이즈원의 미니 2집은 타이틀곡 ‘비올레타’를 비롯해 ‘해바라기’, ‘하이라이트(Highlight)’, ‘리얼리 라이크 유(Really Like You)’, ‘에어플레인(Airplane)’, ‘하늘 위로’, 일본 데뷔 싱글에 수록됐던 ‘고양이가 되고 싶어’, ‘기분 좋은 안녕’까지 총 여덟 개의 트랙으로 구성됐다. 지난 27일 전곡 음원 일부를 미리 감상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메들리가 공개된 가운데, 타이틀곡 ‘비올레타’는 중독성 강한 사운드와 아이즈원만의 신비로운 에너지로 벌써부터 리스너들의 귓가를 매료시키고 있다. 타이틀곡 외에도 김민주와 혼다 히토미가 작사에 참여한 4번 트랙 ‘리얼리 라이크 유’, 워너원 출신 이대휘가 작사·작곡을 맡은 5번 트랙 ‘에어플레인’ 등 수록곡 역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 ‘선주문만 20만장’ 앨범 판매 레코드 세울까 현재 온라인 음반 사이트를 통해 예약 판매 중인 미니 2집 ‘하트아이즈(HEART*IZ)’는 지난 28일 선주문 판매량 20만장을 돌파했고, 일본 타워레코드 온라인 종합 예약 판매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데뷔 앨범 ‘컬러라이즈(COLOR*IZ)’ 발매 당시에도 압도적인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역대 걸그룹 데뷔 앨범 초동 판매 레코드를 경신했던 아이즈원이기에, 새 앨범 ‘하트아이즈(HEART*IZ)’로 어떤 새로운 기록을 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제공=오프더레코드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은둔형 외톨이’ 문제에 골머리 앓는 일본…40대가 전체 40%

    ‘은둔형 외톨이’ 문제에 골머리 앓는 일본…40대가 전체 40%

    일본에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중장년 층에서도 심각해지고 있다. 29일 마이니치 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장년 층을 대상으로 한 정부 조사 결과 히키코모리가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폭 넓은 연령층의 문제가 되고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전체 100만 명에 달하는 히키코모리 규모와 함께, 그 다양성은 문제의 뿌리깊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히키코모리 3명 중 1명이 주로 가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나 어머니였다. 조사관계자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80대의 부모가 장기간 집 안에 틀어박힌 50대 자식을 지탱해주는 '8050'문제"라면서 "40대가 히키코모리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는 ‘8050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년퇴직 후 있을 곳을 잃어버려 집 안에 틀어박힌 60세 이상도 전체의 25%를 넘었다. 전업주부나 가사도우미라고 판단되었으나 실제로는 히키코모리 였던 경우도 밝혀졌다. 이같은 조사결과는 히키코모리가 청소년 문제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책마련에 대한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방자치단체 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들과 손잡고 조속히 대책 마련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히키코모리는 ‘6개월 이상 집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상태’로 정의된다. 신체적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취미로 하는 일이 있을 때만 외출’, ‘근처 편의점 등에만 외출’, ‘방에서는 나오지만 집에서는 나오지 않음’,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음’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며 그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는 사람은 히키코모리로 인정된다. 강보윤 도쿄(일본) 통신원 lucete1230@naver.com
  • 통영 찾은 윤이상 수제자 호소카와 “스승과 나는 아버지와 아들와 같았죠”

    통영 찾은 윤이상 수제자 호소카와 “스승과 나는 아버지와 아들와 같았죠”

    “윤이상 선생님과 저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였습니다. 제 음악의 뿌리는 윤이상입니다.“ 재독작곡가 고(故) 윤이상을 기리기 위한 2019 통영국제음악제를 찾은 일본 출신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64)는 스승 윤이상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29일 음악제를 앞두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스승님이 없었다면 저는 작곡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그는 1974년 윤이상을 처음 만났다. 당시 일본에서 공연을 하던 윤이상을 본 뒤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다. 호소카와는 “일본에는 그와 같은 선생이 없었다”면서 “스승의 음악을 듣고 큰 영감을 받고 당시 일본인 선생님을 통해 윤이상 선생님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고 말했다. 그후 2년뒤인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윤이상을 사사했다. 이후 호소카와는 서양음악과 일본 전통음악을 넘나드는 작품활동으로 현존 최고의 일본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스승께서는 고향 통영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베를린 집 근처를 산책하는데 붉게 물든 낙엽을 보고 고향의 낙엽이 더 붉다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피처럼 붉은 빛깔이라고 하셨는데, 스승께서 고향을 너무 그리워하며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소카와는 윤이상으로부터 수없이 통영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소회했다. 그는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오는 것이 스승의 꿈이었기 때문에 통영 방문은 저 역시 굉장히 기쁘고 행복하다”면서 “스승의 음악을 들으며 (통영으로 이장된) 묘소를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독일 유학 때 윤이상의 집에서 하숙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통영 방문에서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도 만났다.현대음악작곡가로서 윤이상의 세계적 위상은 높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등에 연루되며 사후까지도 이념 논란에 휩싸여왔다. 호소카와는 “스승은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낸 사이이기 때문에 저는 스승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정치적 이슈에 연류돼 있은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2012년 음악제에선 ‘3·11 쓰나미 희생자를 위하여’ 등을 선보인 바 있는 호소카와은 올해 음악제에서는 4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29일부터 31일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이는 현대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이다. 난민 문제를 다룬 이 작품으로, 일본 전통 가무극 노(能)와 현대음악을 접목해 무대에서는 노(能) 가수와 소프라노가 함께 출연한다. 그는 “파리에서 작품을 의뢰 받았을 당시 유럽에 난민 이슈가 불거졌는데, 단지 유럽이 아닌 전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면서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문제를 갖고 있는데, 음악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싶다”고 말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여기는 일본] 중장년 층으로 퍼지는 ‘히키코모리’…40대가 전체 40%

    [여기는 일본] 중장년 층으로 퍼지는 ‘히키코모리’…40대가 전체 40%

    일본에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중장년 층에서도 심각해지고 있다. 29일 마이니치 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장년 층을 대상으로 한 정부 조사 결과 히키코모리가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폭 넓은 연령층의 문제가 되고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전체 100만 명에 달하는 히키코모리 규모와 함께, 그 다양성은 문제의 뿌리깊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히키코모리 3명 중 1명이 주로 가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나 어머니였다. 조사관계자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80대의 부모가 장기간 집 안에 틀어박힌 50대 자식을 지탱해주는 '8050'문제"라면서 "40대가 히키코모리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결과는 ‘8050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년퇴직 후 있을 곳을 잃어버려 집 안에 틀어박힌 60세 이상도 전체의 25%를 넘었다. 전업주부나 가사도우미라고 판단되었으나 실제로는 히키코모리 였던 경우도 밝혀졌다. 이같은 조사결과는 히키코모리가 청소년 문제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책마련에 대한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방자치단체 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들과 손잡고 조속히 대책 마련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본 후생노동성(厚生労働省)에 따르면 히키코모리는 ‘6개월 이상 집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상태’로 정의된다. 신체적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취미로 하는 일이 있을 때만 외출’, ‘근처 편의점 등에만 외출’, ‘방에서는 나오지만 집에서는 나오지 않음’,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음’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며 그 상태가 6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는 사람은 히키코모리로 인정된다. 강보윤 도쿄(일본) 통신원 lucete1230@naver.com
  • 장미사진관, 백세건강원… 시간이 멈춘 마을

    장미사진관, 백세건강원… 시간이 멈춘 마을

    속수무책으로 빠른 세상에 현기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넘긴 것 같은데 달력 한 장을 또 넘겨야 할 때, 하루만 뉴스를 안 봐도 대화에 끼기 힘들 때, 1년 전 유행가를 듣는 것도 겸연쩍을 때. 그럴 때는 빠름과 정반대에 있는 어딘가로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충남 서천의 판교마을은 모든 것이 느린 마을입니다.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시간이 멈춘 마을’이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마을은 1970년대 어디쯤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오래된 골목 따라 녹슨 철문, 빛바랜 간판, 간판 속 예스러운 글씨가 이어집니다. 간판은 마을에 극장, 사진관, 주조장이 있었음을 일러 줍니다. 해묵은 간판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아직 변하지 않은 것도 이렇게나 많다고요.키 낮은 집들, 미용실 아랫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할머니들, 낡은 자전거를 탄 어르신 등 마을의 첫인상은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다. 정겹고 소박하지만 낡고 허름하다. 하나 이곳은 서천에서 손꼽히게 잘나가던 마을이었다. ●1930년대엔 인구 8000명 넘었던 큰 마을 1930년, 마을 남쪽에 장항선 판교역이 들어섰고 큰 우시장이 열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 인구는 8000명을 넘었다. 우시장이 열리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깨가 부딪힐 정도였다고. 판교마을의 시곗바늘이 느려진 건 일대가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묶이며 건축 제한에 걸리면서부터다. 쑥쑥 크던 마을은 개발이 어려워졌고 1980년대에는 우시장마저 사라졌다. 지금 마을에 남은 이들은 480명 남짓.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젊은이가 떠난 곳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젊은이가 는다. 개발되지 못한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했다는 이유로 주목받는다. 마을이 입소문을 타는 건 예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다. 마을 곳곳에 남은 수십 년 된 간판은 과거로 순간 이동을 한 듯, 197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을 걷는 듯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다.판교마을 여행은 마을의 옛이야기를 읽어 가는 일이다. 간판에 깃든 이야기를 꺼내어 먼지를 털고 그때를 되짚어 보는 일이다. 수십 년 전 세월을 헤아리느라, 간판에 얽힌 사연을 상상하느라 걸음이 느려지는 것도 당연하다. 마을은 1시간이면 둘러볼 정도로 아담하다. 관광지가 아닌지라 이정표는 없지만, 오성초등학교를 기점으로 마을 중앙에 난 도로를 따라가면 이 골목과도 저 골목과도 이어진다. 판교역이나 판교면행정복지센터에서 스탬프 투어 지도를 챙기는 것도 방법이다. 지도에 가볼 만한 곳이 잘 정리돼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농협 창고는 출발지로 적당하다. 때밀이로 벽을 박박 문지른 듯 외벽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졌다. 빨간 철문 위에는 ‘협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판매하자’는 표어가 남아 있다. 표어는 마을 농민들끼리 힘을 모아 잘살아 보자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젊은이 핫플레이스 된 옛 풍경 간직한 동네 마을 오른쪽 끄트머리, 판교철공소 맞은편 건물은 ‘공관’으로 불리던 극장이다. 새마을운동 당시에 세워졌으니 50세를 바라보는 극장이다. 극장이 드물던 시절 부여, 보령, 서천 등 인근 주민들도 영화를 보러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어둑한 건물에 영사기가 돌아가고, 관객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 문을 열었으리라. 낡은 건물이 극장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1960~70년대 흥행작 포스터와 매표소 창구다. 창구에 새겨진 영화 관람료는 일반 500원, 청소년 200원. 지금의 20분의1 가격이다.공관 건너편, 판교농협하나로마트 옆 골목에 담벼락 벽화가 있다. 사람 반, 소 반, 판교마을에서 열린 우시장을 그린 것이다. 벽화에서 북서쪽 길을 따라가면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인 적산가옥이 나온다. 장미사진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인증샷을 많이 남기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면(판교면의 당시 이름) 주민 5500여명을 쥐락펴락한 일본 부호 11명이 살았다. 광복 후에는 우시장에 온 사람들이 묵는 여관이었다가 그 후 반쪽은 쌀가게, 반쪽은 사진관이 됐다. 간판에 ‘쌀, 잡곡 일절’, ‘사진관’ 글씨가 또렷하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수시로 여닫았을 마을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쌀 한 됫박을 사서 밥을 안치고 기억하고 싶은 날을 사진으로 남겼을 순한 사람들을 말이다.장미사진관 맞은편의 백세건강원은 낡고 빛바랜 것으로 가득한 마을에서도 으뜸이다. 지붕 슬레이트는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벽에 덧댄 나무판자 역시 성한 데가 없다. 건강원 건물은 한때 통닭집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왼쪽 창에 붕어즙, 흑염소 중탕 등 각종 건강식품을, 오른쪽 창에 ‘백숙, 통닭’ 글씨와 ‘근육질’의 닭을 그려 넣었다. 판교마을 여정의 종착지는 마을 북쪽의 주조장이다. ‘동일주조장’ 간판 아래 재미난 숫자가 있다. ‘TEL 45.’ 서천 지역 번호가 041이 아니라 45이던 시절, 그러니까 1996년에 지역 번호가 세 자리로 바뀌기 전에 생긴 주조장이다. 자료에 따르면 건물은 1974년 이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3대째 가업을 이은 주조장은 주민들에게 술을 공급하며 팍팍한 일상을 달래줬다. 쌀이 귀하던 1970년대에 주조장은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었다. 덕분에 주민들은 술 마시는 낙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주조장의 시간은 20여년 전에 멈춰 있다. 열린 창 사이로 보이는 달력은 2000년 12월. 주조장은 2000년에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았다고 과거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창 사이로 달력 날짜를 짚어볼 때, 마을 사람들이 주조장 앞을 지날 때, 막걸리에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버리던 날이 되살아날 때, 주조장은 모두에게 확실한 기억이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변치 않음’이 판교마을을 지킨다. 1590년대 세워진 문헌서원…4000번을 매만진 한산모시●가정 이곡·목은 이색 정신 깃든 서원 문헌서원은 고려의 대학자 가정 이곡 선생과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사원이다. 서원이 세워진 건 1590년대, 조선 선조 때다. 19세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으나 100여년 뒤 유림들에 의해 지금 자리에 복원됐다. 문헌서원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잡아채는 건 서원을 둘러싼 언덕의 솔숲이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소나무 군락이 서원을 에워싸 청신한 기운이 감돈다. 서원은 크게 사당, 강당, 재로 나뉜다. 사당은 선현에 제사 지내는 곳, 강당은 원생들이 공부하는 곳, 재는 원생들이 숙식하는 곳이다.●유생들 모여 학문 논하고 수양하던 진수당 홍살문과 진수문을 지나 마주하는 진수당은 강당에 속한다.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자신을 수양하던 강당이다. 훌륭한 건물은 머무는 사람을 담아야 하는 법. 진수당의 건축 양식은 선비 정신을 반영했다.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단청 색을 줄여 독서하고 사유하기 마침한 공간이 됐다. 진수당을 마주한 방향에서 서쪽으로 가면 이색 신도비, 북으로 몇 걸음만 더 오르면 목은이색선생영당이다. 영당은 목은 이색 선생의 초상(보물 제1215호)을 모신다. 바로 옆 아름드리 배롱나무는 영당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늦여름 배롱나무에 진분홍 꽃이 환히 피면 한옥과 꽃의 어울림이 아름답겠다.●1500년 역사 자랑하는 대표 공예품 ‘모시’ 모시 풀이 처음 발견된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 기슭에 한산모시관이 있다. 한산모시관은 한산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전통의 맥을 잇는 공간이다. 한산모시는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산의 대표 공예품. 한산모시의 또 다른 이름은 ‘가늘 세(細)’ 자를 써서 한산 세모시, 올이 가늘고 촘촘해 붙은 이름이다. 얼마나 가늘면 ‘밥그릇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모시짜기 역사부터 제작까지… 한산모시관 한산모시관은 한산모시 전시관, 전통공방, 한산모시 홍보관 등으로 나뉜다.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ㄱ자 모양의 전통공방이다. 공방에는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장인 외 여러 장인이 머물며 모시 짜기 시연을 한다. 눈앞에서 장인이 개량 베틀을 돌리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베틀 주변에 가습기를 몇 대씩 놓고 비닐 천막을 친 건 건조하면 날실이 벌어져 끊어지기 때문이란다. 전시관은 한산모시의 역사, 제작 과정과 사용 도구, 모시로 만든 옷 등 한산모시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 준다. 한산모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모시 한 필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고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수확한 모시풀로 모시의 원재료인 태모시 만들기, 이로 태모시를 쪼개 일정한 굵기로 만들기, 모시 올의 머리와 꼬리를 이어 모시실 만들기 등 베틀로 모시를 짜기 전의 과정만 일곱 가지에 이른다. 한국의 전통 여름 옷감 정도로만 여겼던 모시가, 4000번의 손길 끝에 태어나는 귀한 옷감으로 다시 보이는 순간이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권대홍(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 서울에서 자동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지나 서천공주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서천공주고속도로 서부여IC교차로에서 ‘군산, 서천’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대백제로를 따라간다. 수성교차로에서 ‘판교, 현암리’ 방면 좌회전 후 종판로를 따라가면 판교마을이다. →맛집 : 옛 판교역이 있던 자리에 판교음식특화촌이 들어서 식당이 모여 있다. 판교마을 내 삼성식당(951-5578)은 50년 가까이 된 냉면집이다. 메뉴는 단 세 가지로 물냉면, 비빔냉면, 왕만두다. 메밀면을 써서 쫄깃한 식감과 상큼한 육수의 궁합이 좋다. 서천특화시장 맞은편에 자리한 두레분식(953-4305)은 해물칼국수를 잘한다. 바로 앞 수산시장에서 사 온 생바지락이 푸짐하게 들어간다. →잘 곳 : 문헌전통호텔(953-5896)은 문헌서원 안에 자리한 한옥 호텔이다. 8개의 객실이 있으며 호텔 내 식당에서 정갈한 한정식 메뉴를 차려낸다. 휴모텔(952-0077)은 전 객실에서 서해가 보인다. 창밖 경치가 아름다울뿐더러 갯벌 체험이나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다.
  • 인테리어만 조금 손봤을 뿐인데… 홈카페·호텔로 바뀐 우리 집

    인테리어만 조금 손봤을 뿐인데… 홈카페·호텔로 바뀐 우리 집

    집안 주거 공간이 달라지고 있다. TV와 소파가 마주 보는 단순한 거실이 식사 또는 취미활동을 하는 ‘홈카페’로 바뀌는가 하면, 음식 조리와 식사하는데 사용되던 주방은 담소를 나누거나 가벼운 업무를 보는 장소로도 쓰인다. 침실은 수면과 쉼이라는 본연의 기능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가구와 인테리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가구·인테리어 업체들은 친환경·기능성과 더불어 감성·소통을 반영한 아이템들로 한 차원 높은 생활의 만족감을 주고 있다. ●한샘, 개성·취향 담은 4가지 모델하우스 선봬 한샘은 가족의 개성·취향을 담은 4가지 모델하우스를 선보였다. 가족 구성원의 생애주기를 아파트 평면에 구현해 놓은 것으로, ‘모던 그레이’, ‘모던 클래식 화이트’, ‘모던 내추럴’, ‘모던 화이트2’ 등의 스타일로 구분했다. 먼저 모던 그레이 스타일은 신혼부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전용 59㎡(25평형) 아파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는 ‘워라밸’을 즐기는 맞벌이 신혼부부가 산다. 벽, 바닥, 도어 등 넓은 면적에는 라이트 그레이 컬러를 적용해 집을 깔끔하면서 넓어 보이게 했다. 중문과 창호에는 포인트 컬러로 네이비를 입혔다. 여기에 옐로우를 더해 캐주얼하고 산뜻하게 연출했다. 두 번째로 모던 클래식 화이트 스타일이다. 이 집은 5개월 된 아이가 있는 전용 84㎡(34평) 가정을 콘셉트로 꾸몄다. 특히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요즘 엄마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침실 옆에 엄마만의 작은 서재를 마련했다. 화이트 몰딩과 밝은 오크 톤의 바닥, 골드 손잡이로 로맨틱하게 꾸몄다. 여기에 민트 컬러 등 파스텔톤 패브릭을 더해 우아한 공간을 연출했다. 출산율이 갈수록 줄고 있지만 아직은 두 자녀 가정이 많다. 세 번째 스타일은 초등학생 쌍둥이 자매를 키우는 가정을 위한 모던 내추럴이다. 거실 소파 뒷벽에 수납장을 별도로 만들었으며 가운데를 오픈형으로 설계해 아이들의 작품을 수납할 수 있도록 했다. 도어와 벽체 등 큰 면적에는 그레이 컬러를 적용하고 곳곳에 내추럴한 컬러로 포인트를 줬다. 바닥재 컬러는 내추럴 우드를 선택했다. 끝으로 모던 화이트2 스타일이다. 전용면적 98㎡(37평형)에 맞벌이 부부와 사춘기 여중생이 사는 것을 가정해 연출했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익숙한 청소년을 고려해 집 안 곳곳에 IoT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홈’으로 꾸몄다. 화이트 인테리어를 바탕으로 중문·창호에 블랙을 가미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곳곳에 레드 컬러의 패브릭으로 포인트를 줘 세련되면서도 트렌디하게 마무리했다. ●LG하우시스, 디자인 넘어 건강·에너지까지 고려 LG하우시스는 올봄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건강과 에너지 비용까지 절약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제안한다. 먼저 프레임 두께를 줄여 시야를 넓힌 소형창호 ‘유로시스템9 mini’다. 유로시스템9 mini는 같은 재질(PVC)의 기존 소형 창호 제품과 비교해 프레임 두께를 약 40% 줄이고 환기구와 창호 손잡이를 창호 한쪽 편으로 배치해 답답했던 시야 문제를 개선했다. 창호 손잡이는 세균 감소에 효과적인 은이온을 특수 코팅해 황색포도상구균, 대장균 등 주방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세균을 막는 데 효과적이다. 두 번째로 프리미엄 친환경 벽지 ‘디아망’이다. LG하우시스의 벽지 제품 중 최고급 라인인 ‘지인(Z:IN)’ 계열의 벽지로, 기존 벽지보다 표면 엠보싱 깊이가 두 배 더 깊어 디자인 패턴의 섬세함과 입체감을 높였다. 또한 특수 처방기술을 적용해 깊은 엠보싱을 구현하면서도 무게를 기존 제품보다 약 25% 줄였다. 디아망은 피부에 닿는 표면층에 옥수수 유래 성분을 적용해 ‘유럽섬유제품품질인증’ 1등급과 국내 ‘환경표지인증’을 받았다. LG하우시스는 창호 제품 브랜드를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능과 가격대에 따라 3· 5·7 숫자로 구분한 ‘수퍼세이브 시리즈’를 선보였다. 수퍼세이브 시리즈는 유리 표면에 은(Ag) 등의 금속 및 금속 산화물로 구성된 얇은 막을 코팅한 로이유리를 적용했다. 일반 판유리보다 에너지 절감효과가 높아 난방비를 줄일 수 있다. 시리즈별로 살펴보면 수퍼세이브3는 합리적 가격의 보급형 창호로 개보수 시장 공략을 위한 제품이며, 수퍼세이브5는 ‘이지 오픈 손잡이’, ‘곡면 모서리’ 등 편의성을 높인 고급형 제품이다. 최고급인 수퍼세이브7은 창이 움직이는 부분에 알루미늄 레일을 달고, 창의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이중 엣지 프레임’을 적용했다. ●에이스침대, 온전한 휴식 위한 특허 기술 에이스침대는 온전한 휴식을 원하는 신혼부부에게 스테디셀러 매트리스 ‘하이브리드 테크 Ⅶ(HYBRID TECH Ⅶ·이하 HT Ⅶ)’과 ‘하이브리드 테크 레드(HYBRID TECH RED·이하 HT RED)’를 추천한다. HT Ⅶ과 HT RED의 가장 큰 특징은 ‘하이브리드 Z 스프링’을 내장한 점이다. 하이브리드 Z 스프링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15개국에서 특허받은 독자적인 기술이 담겨있다. 신체의 무게를 받는 상단에서 ‘독립형 스프링’을 통해 신체 라인을 부드럽게 맞춰주고, 하단의 ‘연결형 스프링’에서 한 번 더 받쳐줘 편안한 수면을 돕는다. 에이스침대는 HT Ⅶ과 HT RED 매트리스와 함께 쓰기 알맞은 프레임으로 ‘루나토Ⅲ(LUNATO Ⅲ)’와 ‘BMA-1151’을 추천한다. ‘박보검 침대’라는 애칭을 가진 루나토Ⅲ는 프렌치 모던 스타일의 고급 패브릭 침대로, 포근함을 주며 어떤 인테리어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릴만한 디자인을 갖췄다. BMA-1151은 화이트월넛과 그레이화이트 색상이 조화돼 깔끔하고 화사한 공간을 연출해준다. 사이드 패널 옵션을 선택하면 USB 충전 포트가 내장된 별도의 수납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에이스침대는 모든 제품을 E0등급의 친환경 자재만 사용해 만든다. 매트리스 내부의 주요 소재는 직접 자체 생산한다. 또한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으로부터 생활용품의 위생·안전·품질에 대한 성능을 인증하는 HS마크를 받았으며, 친환경 상품임을 공인하는 환경마크를 받았다. 라돈 등 방사능 유해 물질로부터의 안전도 확인받았다. 에이스침대는 예비 부부들이 풍성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에이스침대 웨딩멤버스’를 선보이고 있다. 멤버스에 가입만 해도 매트리스 연계 품목에 대해 20%를 할인해주며, 항균 케어인 ‘마이크로 가드 에코’를 5년간 무상으로 준다. 또 200만원 이상 구매 시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백팩, 300만원 이상 구매 시엔 내셔널지오그래픽 20인치 여행용 가방을 준다. ●에몬스가구, 안락함·안전성 높인 리클라이너 에몬스가구의 리클라이너 소파 ‘아도니스’는 유럽을 대표하는 리찌사의 매스티지 통가죽을 입혔다. 매스티지 통가죽은 60년 전통의 이탈리아 리찌사와 독점계약을 통해 개발한 것으로 가격 경쟁력은 물론 통가죽 그대로의 가치를 지녔다. 아도니스는 고급스러운 통가죽 엠보싱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높여준다. 피부가 닿는 부분뿐만 아니라 주름이 져서 가죽을 잘 사용하지 않는 부분까지도 가죽을 적용해 내구성을 높였다. 보이지 않는 소파 내부는 수축현상이 적은 유칼립투스 정제목과 E0등급의 친환경 자재로 만들었다. 또한 리클라이너 작동 시 세계적인 전동모터인 독일 오킨사(社)의 모터를 적용해 부드럽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리클라이너 하드웨어는 L&P의 정품을 사용해 내구성과 품질력이 좋다. 아도니스는 벽과의 간격 0㎜인 ‘퍼펙트 제로월 시스템’을 적용해 뒷부분에 여유 공간 없이도 설치할 수 있다. USB 포트가 내장된 버튼스위치를 팔걸이 안쪽에 달아 누구나 손쉽게 리클라이너 기능을 제어할 수 있다. 한 번의 터치로만 작동 또는 정지하는 ‘스마트한 원터치’ 기능도 있다. 안전성도 높였다. 리클라이너 작동 시 이물질이 끼거나 어린이가 손을 넣어 다치지 않도록 하드웨어에 ‘Safe cap’(안전가드)을 장착했고, 잠금 설정이 가능한 ‘키즈락’ 2중 안전장치를 달아 아이와 반려동물의 안전사고를 막아준다. 최근에는 거실을 영화관으로 연출하고자 하는 라이프 트렌드를 반영해 기능성 홈바를 추가한 제품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무선 충전과 내부 수납이 가능하며 화이트 세라믹 플레이트를 장착해 간단한 음식물을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다. 에몬스는 창립 40주년과 신학기 시즌을 맞아 오는 31일까지 인기 상품을 특별 세일 한다. 블리스 시리즈 풀패키지, 아델 침대, 로미앤쥴리 슈퍼싱글 침대, 로미앤쥴리 중침대·렉스매트리스·h형책상·토미의자 패키지 등을 할인 판매하며 학생가구 시리즈를 100만원 이상 사면 책상용 가습기를 준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독립운동” 포고문… 친일 부호들 암살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독립운동” 포고문… 친일 부호들 암살

    “피고인 박상진, 김한종은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사천년 종사는 허사가 되고 우리 이천만 민족은 노예로 되어 섬나라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하고 달로 늘어 이를 돌이켜보면 피눈물이 샘솟아…(중략) 그리하여 각 자산가는 미리 저축하였다가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고, 만약 우리 광복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본회 스스로 정률이 존재함을 알게 하겠다’는 정치상 불온한 문구를 기재했다.”(192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1부 재판장 마에자와 나루미의 판결문 일부)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884~1921)의 포고문은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상당한 재력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국내에서 처음 실시된 판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경술국치를 지켜보다 스스로 법복을 내던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공주지법 예심, 대구복심법원 확정 판결문에는 박상진을 주축으로 광복회가 친일파 부호들의 집을 습격해 독립자금을 모으고, 요구에 응하지 않는 부호들에 대해선 암살 활동을 벌인 행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1915년 7월 15일 결성된 광복회는 대구를 거점으로 상업조직을 활용해 영주, 삼척, 광주, 예산, 연기, 인천으로 세력을 펼쳐 나갔고, 만주 안둥·창춘 등 해외에도 거점을 뒀다. 훗날 청산리 전투를 이끄는 김좌진은 2대 부사령으로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에 파견되기도 했다. 일제의 시선에서 바라본 광복회의 탄생과 목적은 일제 판결문에도 남아 있다. ‘피고인 박상진과 김한종은 일한 병합에 불평을 가지고 구(舊) 한국의 국권 회복을 호칭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다 채기중 및 우이견이라는 자들과 함께 광복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자금 조달이라는 명분하에 광복회 이름으로 조선 각도의 조선인 자산가에게 공갈로 금원을 받아내기로 했다.’(대구복심법원 판결문)박상진은 일제의 무단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선 무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믿었고,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군자금 모금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광복회는 비밀사수·폭동·암살·명령엄수 등 4대 투쟁강령과 함께 7가지 실천사항을 정했다. 첫 번째가 ‘무력 준비’로, 일반 부호로부터 기부를 받는 한편 일본인이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해 무장을 준비한다는 내용이다. 이어 무관 양성·군인 양성·무기 구입·기관 설치·행형부(형 집행 기관) 조직·무력전 등을 규정했다. 광복회는 특히 첫 번째 실천사항에 따라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부호들에게 군자금 협조 공문을 보낸 광복회는 예상보다 실적이 더디자 ‘친일 부호 처단’을 통해 경각심을 내비치기로 했다. 첫 번째 목표는 경상도에서 제일가는 부자 경북 칠곡의 장승원이었다. 장승원은 해방 직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정부 수립 이후엔 3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당초 그는 독립자금으로 20만원을 내놓겠다고 공언했으나, 막상 광복회의 요청이 들어오자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박상진은 1917년 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등에게 장승원 암살을 지시했다. ‘채기중은 강순필과 유창순과 함께 김한종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가지고 장승원 집 부근에 가서 우선 손님인 듯 꾸미어 숙박을 구하며 정황을 정찰했다. 다음날 해진 후 이들은 집에 침입하여 유창순은 망을 보고 채기중과 강순필은 각각 소지한 권총으로 장승원을 향해 발사한 뒤 광복회원 소행임을 표시하고 도주했다.’(대구복심법원 판결문) 장승원은 머리와 왼쪽 무릎에 총을 맞고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충남 아산의 도고 면장 박용하에 대한 암살까지 이루어지자 일제는 박상진과 광복회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고, 결국 1918년 2월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던 박상진은 일제에 체포됐다. 박상진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법 예심에 이어 이듬해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고는 기각됐다. 결국 박상진은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였다. 함께 뜻을 도모한 채기중, 김한종도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인 것은 광복회뿐만이 아니었다. 국가기록원에 ‘독립 군자금’을 검색해 보면 400여건의 판결문이 나온다.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인 박상진과 같이 대중에게 인지도가 있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잊힌 활동가들이 대부분이다. 1922년 김명수, 김백순 등은 김좌진을 돕기 위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1924년에는 김기룡 역시 김좌진에게 받은 독립공채권 55매를 휴대해 조선 내 각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살았다. 같은 해 정기환은 독립 단체인 의창단에 가입해 차용금 명의로 돈을 빌려 군자금으로 제공하려 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조선 무장독립투쟁은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이 녹아들어 가며 서서히 이루어졌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임시완 복귀작 “‘타인은 지옥이다’ 군 동료들 추천”

    임시완 복귀작 “‘타인은 지옥이다’ 군 동료들 추천”

    배우 임시완이 오늘 27일 전역했다. 임시완은 오늘(27일) 오전 경기도 양주 25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전역식을 치렀다. 그는 2017년 7월 해당 부대에 입소해 5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조교로 복무했으며 입대 2개월 만에 특급전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육군 25사단 정문을 나서 감악산회관에 마련된 행사장으로 이동한 배우 임시완은 밝은 표정으로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어 취재진과 팬들 앞에서 서서 힘차게 경례한 그는 “아직 실감이 안 나고, 내일 아침에 기상나팔 소리 없는 집 침대에서 늦잠을 자면 실감이 날 것 같다”며 만기 전역 소감을 전했다. 현장에는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 등 다양한 국가 팬 100여 명이 몰려 여전한 그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임시완은 “군 생활을 하면서 간부와 동기, 전우들이 큰 힘이 됐다. 또 저를 기다려주신 팬들께 감사하다. 설경구 선배님도 휴가 때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도움을 받았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인사했다. 2010년 아이돌 그룹 제국의아이들로 데뷔한 임시완은 드라마 ‘미생’을 통해 연기를 인정받고 영화 ‘변호인’,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등을 통해 배우로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전역 후 임시완은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취직 때문에 상경해 고시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청년 윤종우를 연기한다. 그는 복귀작을 선택한 데 대해 “처음 웹툰이 나왔을 때 동료들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했다. 전우들이 이 작품과 제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는데 실제로 하게 돼서 신기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올 하반기 방송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비극과 활극의 만남… 조선인 가슴에 저항정신 불 지르다

    비극과 활극의 만남… 조선인 가슴에 저항정신 불 지르다

    한국 사람이라면 나운규(1902~1937)라는 존재와 ‘아리랑’(1926)이라는 영화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무성영화 시기를 대표하는, 아니 한국영화사 전체를 관통해서도 가장 무게 있는 영화인과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랑’의 필름은 사라졌다. 우리 대부분은 처음 개봉한 지 90년도 훨씬 지난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저 여러 매체를 통해 얼마나 위대한 영화인지 전해들었을 뿐이다. ‘아리랑’은 왜 훌륭한 영화인가.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원로 영화인들의 증언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신화화된 결과가 아닐까.‘아리랑’을 걸작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바로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아낸 민족 영화라는 평가 때문이다. 어쩌면 이 관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애초 나운규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조선영화도 미국영화처럼 한번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목적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더이상 활동사진에 신기해하는 초창기 관객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의 활극적 볼거리와 속도감에 열광하는 영화 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조선인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6·25 전쟁 시기까지 수십 차례 반복 상영되며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을 넘어 사회 현상이 되어버렸다. 과연 ‘아리랑’은 어떤 영화였을까.●일본 신파를 극복하다 먼저 1920년대 전반기 조선영화계를 살펴보자. 조선 극영화의 시작은 ‘월하의 맹서’(1923)를 만든 윤백남의 역할이었지만 이후 조선영화를 주도한 감독은 윤백남의 조감독을 맡았던 이경손(1905~1977)이었다. 그는 고대소설을 영화화한 ‘심청전’(1925)으로 감독 데뷔해 이광수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개척자’(1925)로 인정받았다. 이 시기 조선영화 제작은 초창기의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춘향전’(1923), ‘장화홍련전’(1924), ‘운영전’(1925) 등 고대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즉 조선 사람이 조선 옷을 입고 활동사진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몰려들던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경손은 일본영화를 모델로 삼아 상업적인 노선을 모색하는데 일본 신파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1926), 일본 시대극 영화를 참조한 ‘산채왕’(1926)이 그것이다. 두 영화는 당시 일본 신파소설을 번안하던 조중환과 이경손이 함께 설립한 계림영화협회가 제작했다. 이 시기 조선은 일본 문화의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영화 역시 ‘나의 죄’(己が罪)가 원작인 ‘쌍옥루 전후편’(1925), ‘새장 속의 새’(籠の鳥)를 각색한 ‘농중조’(1926) 등 일본 신파의 조선적 번안이 대세였다. 이처럼 연애비극이나 가정비극을 다루는 신파 서사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기본적 설정으로 안착하게 된다.나운규의 ‘아리랑’이 특별한 점은 일본 신파영화의 화법을 받아들인 시기에 등장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을 찾았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어떤 의도로 만든 영화인지는 나운규의 운명 전 해인 1936년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바로 ‘조선영화감독 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조선영화’ 제1집)라는 글이다. “그 당시에 조선에 오는 양화(洋畵)를 보면 수(數)로는 서부활극이 전성시대요 또 대작연발시대다. 그리피스의 ‘폭풍의 고아들’(1921)을 보던 관중은 참다 못하여 발을 굴렀고 더글러스의 ‘로빈 후드’(1922)는 조선 관객의 손바닥을 아프게 하였다.” 나운규가 미국영화의 “대작연발시대”를 강조한 것처럼, 당시 조선인 관객들은 화려한 볼거리와 물량 공세, 또 스케일 큰 액션 장면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했고, 이에 익숙해지면서 영화의 감식안도 높아져갔다. 관객들의 취향을 포착한 나운규는 ‘아리랑’을 만들기 직전 선배 감독 이경손에게 “화나는데 서양사람 흉내를 내서 한 작품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했고, 어떻게 하면 “하품 나는 조선영화”를 탈피할 수 있을까, 조선영화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아리랑’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서구영화의 창조적 수용 연출의 기회를 잡은 나운규는 할리우드 활극 스타일을 연출 방향으로 잡고, 어떻게 하면 서구식의 활극 장면을 경제적으로 연출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스토리까지 고안해냈다. 대중적 화법인 신파 양식을 기반으로 비극과 활극을 직조한 동시에 조선의 식민지적 상황을 상징과 비유가 담긴 이야기로 녹여 민족적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가장 핵심은 ‘아리랑’이 나운규의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점이다. 당시 “전 조선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장면”(‘동아일보’ 1926년 10월 7일자)으로 기록된 사막 장면은 단연 영화의 압권이다. 한 나그네(나운규)가 여자(신일선)를 취하려는 악마 같은 상인을 살해한 장면은 주인공 영진(나운규)이 여동생 영희(신일선)를 겁탈하려는 지주의 하수인 기호를 환상 속에서 살해하는 것으로 정확히 반복된다. 광인의 내면세계를 일그러진 세트로 시각화해 보여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같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나운규는 할리우드 활극뿐만 아니라 유럽 예술영화 등 동시기 서구영화의 여러 요소를 포착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또 작품의 인물 구도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지주도 그 하수인도 조선인이라는 설정이지만 돈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자본가 계급의 폭압적 행태를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짐작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민족영화가 되었고,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으로 한국영화사의 신전에 올랐다.●아리랑의 실제 감독은 누구일까 ‘아리랑’ 개봉 당시 이 영화의 감독은 쓰모리 슈이치(한국 이름 김창선)라는 일본인으로 기록되었다. 이 영화의 실제 감독에 대한 논란을 일으킨 결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 시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조선영화인의 협업으로 구축되었던 조선영화 제작현장을 감안해야 한다. ‘아리랑’을 제작한 영화사는 일본인 흥행사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인데, 그의 조카 사위 쓰모리 슈이치가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현대 영화의 프로듀서 역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조선키네마의 첫 번째 영화 ‘농중조’와 ‘아리랑’ 개봉 당시 감독 크레디트로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의 문헌들은 두 영화의 감독으로 각각 조선영화인 이규설과 나운규를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당시 제작 현장에서 일본인이 감독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각본을 쓰고, 무성영화이지만 동작 연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배우들의 조선어 대사 연기를 지도한 것은 조선인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무성영화의 논리상 그들의 입에서 발성되어야 할 대사는 변사의 음성에서 들리게 된다). 다시 ‘아리랑’으로 돌아가면 쓰모리가 설령 크레디트상의 감독직을 맡았더라도 각본을 쓰고 실질적인 연출을 진행한 나운규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나운규는 계속해서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풍운아’(1926), ‘야서(들쥐)’(1927), ‘금붕어’(1927)라는 활극멜로드라마를 그의 이름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워 ‘사랑을 찾아서’(1928) 등 자신의 감독 및 주연작을 이어 나간다. ●조선 무성영화 황금기 이끌다 마지막으로 ‘아리랑’이 이후 조선 무성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을 언급해야 한다. 먼저 지주와 소작민, 그 사이 희생양이 되는 젊은 여성이라는 계급구도에 기반한 서사와 활극이 더 선명하게 앞으로 나서는 스타일이 이후 조선영화의 상업적 기준이 된 점이다. 또 일제 치하의 식민지적 현실을 드러내고 저항의 관념을 싣는 수단, 즉 계급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하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진영의 영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프 진영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소설가 심훈의 감독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8)는 단연 ‘아리랑’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파산한 내 이름과 주소가 구글지도에 떡하니…日정보공개 파문

    파산한 내 이름과 주소가 구글지도에 떡하니…日정보공개 파문

    일본에서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아 지도상에 표시한 인터넷 서비스가 개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파산 당사자들의 강력한 반발 등으로 생긴 지 4개월 만에 사라졌지만, 개인정보에 대한 정부 공표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일부에서 이 사이트 운영자에 대한 집단소송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24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기관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파산자 관련 정보를 지도로 알려주는 ‘파산자 맵’ 사이트에 대해 폐쇄를 명하는 행정지도를 최근 내렸다. 개인정보보호위는 이 서비스가 “본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해서는 안되며, 개인정보를 취득할 경우에는 이용 목적을 본인에게 통지 및 공표해야 한다”는 개인정보보호법 규정을 어겼다고 판단했다. 파산자 맵은 개인정보보호위 조치와 파산자들의 강력한 반발 등에 못이겨 지난 19일 문을 닫았다. 지난해 12월 2일 개설된 이 사이트는 최근 10년 동안 일본 정부 발행 관보에 게재돼 온 파산자들의 이름과 주소 등을 구글지도 위에 표시하고 있었다. 운영자는 사이트를 폐쇄하면서 트위터에 “많은 분들에게 폐를 끼쳐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사이트 운영자는 파산자 맵 서비스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데이터에 누구라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기를 바라는 평소 생각을 현실에 옮긴 것”이라고 아사히에 답했다. 이미 정부에서 공표한 내용을 취합해 시각적으로 구현할 것일뿐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의미다. 그는 또 “사이트에 광고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즈니스 목적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일본 관보는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되며 공립도서관 등에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관보에는 법원으로부터 파산절차가 시작된 것을 채권자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파산 선고를 받은 채무자의 이름과 주소가 기재돼 있다. 파산자 맵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SNS 등에는 “사생활 침해”, “차별과 편견 조장” 등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는 동안 사이트 운영자 측에는 지도에서 자신의 정보를 지워달라는 파산자들의 요청이 1000건 이상 들어왔다. 그러나 운영자는 한술 더 떠 “삭제를 원할 경우 자신이 파산에 이른 이유나 파산 이후의 생활에 대해 200자 이상 설명을 하라”고 요구해 더욱 분노를 유발했다. 서비스는 중단됐지만, 파문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많은 변호사들은 “이런 사이트가 운영되면 정작 파산을 통한 법적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 파산 전문 변호사는 아사히에 “이 사이트가 등장한 이후 집 밖에 나갈 수가 없다는 파산자들의 호소를 100건 이상 접수했다”며 “파산한 사람들 중에는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도 많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변호사들은 이런 사이트가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이트 운영자를 상대로 집단소송에 나서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파산법 전문가인 야마모토 가즈히코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사생활 보호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 지금, 정부가 파산자에 대한 공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아사히에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슬플 때 사랑한다’ 지현우, 이런 힐링 남주 봤나요?

    ‘슬플 때 사랑한다’ 지현우, 이런 힐링 남주 봤나요?

    MBC 주말특별기획 ‘슬플 때 사랑한다’(극본 송정림, 연출 최이섭, 유범상, 제작 DK E&M, 헬로콘텐츠)에서 지현우가 섬세한 멜로 연기로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이 시대의 힐링 남주를 선보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슬플 때 사랑한다’는 1999년 일본 TBC에서 방영된 노지마 신지 작가의 ‘아름다운 사람’을 정식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사랑은 흔하나 진짜 사랑은 힘든 시대에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남녀의 격정 멜로드라마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의 두 번째 사랑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진짜 사랑의 의미를 전하며 시청자 가슴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여기에는 지현우가 분한 남자 주인공 ‘서정원’의 매력이 주효했다. ‘서정원’은 능력 있는 천재 성형외과 의사이자 사랑에 한없이 헌신적이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무결점 남자이다.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내 ‘우하경’을 5년 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변함없는 사랑을 펼치는 인물. 아내 하경이 죽은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한 정원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얼굴을 바꿔달라는 ‘윤마리’(박한별 분)를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아내와 같은 얼굴로 성형 수술하게 된다. 이후 하경의 얼굴을 한 마리를 보며 죄책감과 애틋함을 함께 보이는 정원의 복잡한 심정을 배우 지현우가 나노 단위로 섬세하게 표현하며 역시 ‘멜로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이후에도 정원은 혹시나 마리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친구인 해라(왕빛나 분)를 통해 대신 집을 구하게 하고, 경찰서를 나와 불안함에 눈물을 흘리는 마리에게 위로의 말 대신 따뜻한 국밥을 건네고, 마리의 옥탑방 앞에 구두를 놓아 위험을 대비하게 하는 가 하면, 누구보다 먼저 마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여자 주인공을 한없이 지원하는 따뜻한 힐링 남주의 모습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극의 중심을 단단하게 이끌고 있다. 드라마를 접한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정원이는 대사가 많지 않아도 표정으로 눈빛으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놀랍다(hyki****)’ ‘표정 연기, 내레이션 다 정말 좋아요(m717****)’ ‘위험에 처해도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는 정원이에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치게 될지 보는 내내 가슴 졸이게 됨. 정적인 감정 연기와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진짜 손끝 하나도 허투루 하는 것이 없는 지현우의 연기가 너무 좋다(hyki****)’ 등 절대적인 호평으로 ‘서정원’ 역의 지현우를 응원하고 있다. 지현우 역시 “‘서정원’은 매우 클래식한 캐릭터로 따뜻하고, 섬세하지만 강한 면도 있는 인물이다. 이 남자의 다양한 매력을 오롯이 시청자에게 전하기 위해 표정 하나 눈빛 하나에도 많은 고민을 하면서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다. 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앞으로 ‘정원’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해질 예정이니 이 남자의 변신에 많은 응원과 기대 바란다”고 시청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한편, 추격의 끈을 좁혀오는 남자 ‘강인욱(류수영 분)’과 추격을 피해 마리를 보호하려는 남자 ‘서정원(지현우 분)’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MBC 주말특별기획 ‘슬플 때 사랑한다’는 매주 토요일 밤 9시 5분에 연속 4회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여고생 짝사랑 쟁취기 오글거리지만 설렌다

    여고생 짝사랑 쟁취기 오글거리지만 설렌다

    뻔하지만 설렌다.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그렇듯. 청춘 남녀의 마음을 한껏 간질이는 봄에 찾아온 영화 ‘장난스런 키스’(27일 개봉)는 일본 순정만화의 대표 작가 다다 가오루가 자신의 연애담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만화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태국 등에서 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제작되며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2005년 제작된 대만 드라마 버전 ‘악작극지문’은 한국 등 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일본 원작 만화 한국서도 인기 이번엔 영화 ‘나의 소녀시대’(20 16)에서 고등학생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그린 프랭키 첸 감독이 소녀 감성을 녹여 영화로 재해석했다. 대만의 ‘국민 첫사랑’이자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배우 왕다루(28)가 ‘나의 소녀시대’에 이어 프랭키 첸 감독과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영화는 평범한 여고생 위안샹친(린윈)이 새 학기 첫날 준수한 외모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공부 실력으로 전교생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학교 최고의 ‘남신’ 장즈수(왕다루)와 우연히 입맞춤을 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장즈수에게 첫눈에 반한 위안샹친은 자신의 마음을 용감하게 고백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설상가상 전교생의 놀림거리가 된다. 장즈수에 대한 위안샹친의 마음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 가운데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진 위안샹친이 장즈수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포기를 모르는 ‘직진녀’의 거침없는 사랑 표현에 ‘철벽남’의 마음도 서서히 열린다. ●대만 청춘 로맨스 특유의 감성 그간 드라마와 영화에서 수없이 봐 온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대만의 청춘 로맨스 영화 특유의 감성과 유쾌함이 돋보인다.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을 붙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소녀의 순수한 모습과 자신에게 돌진하는 소녀의 진심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소년의 모습은 새삼 연애 세포를 일깨운다. ‘대륙의 전지현’이라 불리는 배우 린윈(23)의 해맑고 사랑스러운 모습과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한 왕다루의 ‘케미’ 역시 한몫한다. 다만 만화가 원작인 만큼 우연이 반복되고 과장된 설정과 오글거리는 대사도 다수 등장한다. 개봉을 앞두고 프랭키 첸 감독과 배우 왕다루가 21~24일 내한해 팬들과 만나는 가운데 20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장난스런 키스’는 전체 예매율 5위를 기록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소녀상 말뚝테러’ 일본인 6년째 재판 불출석…법원 “인간성 말살 범죄행위 처벌에 국경 없어”

    ‘소녀상 말뚝테러’ 일본인 6년째 재판 불출석…법원 “인간성 말살 범죄행위 처벌에 국경 없어”

    2012년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한 극우 성향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54)씨가 사건 접수 6년이 지나도록 우리나라 법원에 출석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일본 정부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했지만 아직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이상주 부장판사는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스즈키씨에 대한 올해 첫 공판을 열었다. 스즈키씨는 2012년 6월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 위안부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은 말뚝을 묶어놔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윤봉길 의사 순국비에도 비슷하게 ‘말뚝 테러’를 한 혐의로 2013년 2월 기소됐다. 2015년 5월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는 소녀상 모형을 국제우편으로 보내 추가 기소됐다. 이날까지 총 16회의 공판기일이 잡혔지만 스즈키씨는 소환장을 송달받고도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이에 법원이 2016년부터는 강제 구인을 위한 구속영장까지 수차례 발부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지난해 4월 이 부장판사는 법무부 장관이 일본 정부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할 것을 검토하라고 검찰에 명령했고, 법무부는 지난해 9월 스즈키씨에 대한 인도 청구를 했다. 2002년 서명·발효된 한일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르면 인도 청구를 받은 나라는 인도 청구에 대한 결정을 청구국에 신속히 통보해야 한다. 이날 이 부장판사는 “종군위안부 사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범죄 행위나 이를 사실상 옹호해 참혹한 비극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어선 국경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인도 청구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그간 진행 경과를 묻는 이 부장판사의 질문에 검찰은 “(지난해 9월) 인도 청구와 별도로 지난 1월에도 이 사건 인도를 적극 검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 공식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일본에서의 인도 절차 진행을 기다려봐야 하는 상황이다”면서 “피의 자발적 출석을 기다리기 위해 다음 공판기일을 4월 3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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