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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정치인의 왜곡된 역사인식/이창순 국제부 차장(오늘의 눈)

    일본 사회당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두개의 얼굴로 인식돼왔다.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붉은 색의 사회주의정당이라는 인식과 함께 일본의 「양심세력」이라는 인식이 혼재해왔다. 냉전의 잔재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회주의정당은 우선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하지만 사회당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거부하고 그들의 만행을 비난해왔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그러한 사회당의 당수다.그는 사회당내에서도 과거의 침략을 가장 강도 높게 비난해온 좌파의 대표다.그러한 무라야마총리가 『한·일합방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실시됐다』는 망언을 했다. 그의 망언은 지금까지 되풀이돼온 일본지도층의 일상적인 망언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일본의 반복돼온 망언은 보수·우익세력의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그들은 진정으로 침략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다.그것이 일본 보수세력의 실체다.그러나 그러한 보수세력의 반대편에 있던 무라야마총리마저도 왜곡된 역사인식을 정당화하고 있다. 무라야마총리의 망언은 이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큰 충격이다.과거 침략행위를 반성·사죄해야 한다는 사회당과 무라야마총리의 지금까지의 주장이 단순히 허구적인 「행위예술」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라야마총리는 진솔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가 된 후 그의 말과 행동은 조금씩 보수·우익세력의 논리에 접근해왔다.그러다 마침내 군국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는 일본의 보수화물결속에 일본사회 모두가 용해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일본사회에서는 지금까지도 2차대전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인식이 통하지 않아왔는데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일본인의 그러한 왜곡된 역사인식을 그들 스스로 바로잡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함을 무라야마총리의 망언은 증언하고 있다.그들의 되풀이되는 망언은 이제 신물이 난다.하지만 매번 발끈하는 우리의 처지도 서글프다.냉엄한 국제현실에 의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일본을 역사왜곡의 초라한 섬나라로 보이게 하는 빠른 길인지도 모른다.
  • 일 자민당 총재/하시모토 당선

    【도쿄 연합】 22일 실시된 일본 자민당총재 선거에서 보수강경노선의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이 고이즈미 준이치로(소천순일낭)전 우정상을 큰 표차로 누르고 총재로 당선됐다. 하시모토 통산상은 이날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3백20표)및 당원투표에서 고노 요헤이(하야양평)현 총재의 출마 포기에 따른 무투표 당선 저지를 위해 입후보한 고이즈미 후보를 2백17표차로 눌렀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과 국제공헌 등에 적극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하시모토 통산상이 자민당 총재로 취임함에 따라 자민당의 색채는 무라야마(촌산)연립정권에 집착해온 고노 체제에 비해 강경노선으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된다. ◎프로필/내각요직 두루 거친 보수파/정책에 밝아 차기총리감으로 높은 인기/“2차전 침략전쟁 아니다” 주장해 말썽도 오카야마현 출신으로 보수·우익의 논리를 능란하고 교묘하게 펴온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 신임 자민당 총재는 일찍부터 자민당 총재와 내각의 총리감으로 꼽혀온 보수 우익 정객으로 11선 의원이다. 대장상과 후생상,운수상,통산상을 거치는 등 내각에서도 주요 포스트를 거친 것을 비롯해 자민당 내에서도 간사장과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해 정책에 밝으며 말을 매우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앞서 있었던 미국과의 자동차 협상에서도 끈질긴 버티기 끝에 수치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협상을 타결로 이끄는 등 국민적 인기도 꽤 높아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감 1위를 차지했다. 아버지도 후생상을 지낸 2세 의원이며 동생은 고치현지사인 정치가가족. 우익 출신답게 2차대전중 일본의 역할에 관해서도 한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는 인정하면서도 대동아전쟁은 꼭 침략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소신을 피력,말썽을 빚기도 했다. 총재선거에서 「힘을 내자 일본」을 슬로건으로 내걸어 정체상태에 빠진 자민당에 기력을 불어넣었으며 자민당 단독정권 수립을 최종목표로 내걸고 있어 향후 일본 정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보수·양당제 개편가속화 예고/하시모토의 일 자민당 어디로 가나

    ◎연립정권 붕괴 위기… 개각 불가피/「과거」 문제로 아주국과 마찰 우려 일본 자민당의 차기총재가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으로 사실상 결정됨에 따라 일본정계는 자민당과 야당인 신진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양당제로의 개편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총재와는 달리 보수원류인 하시모토 통산상이 자민당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은 자민당의 보수·우경화를 의미하며 사회당·신당사키가케를 중심으로 한 사민·리버럴 세력의 약화를 더욱 촉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시모토 통산상이 자민당 총재로 사실상 결정된 것은 오는 9월22일로 예정된 총재선거를 한달 가까이 남겨두고 고노총재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총재선거 입후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고노총재는 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을 성공시킴으로써 자민당을 여당으로 복귀시키는데 공헌하고 이번 총재선거에서도 「연립정권을 구성할 수 있는 인물은 고노뿐」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으나 자민당내 여론은 하시모토통산상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국민적 인기도높은 하시모토는 유력 정치가문 출신으로 젊고 강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하시모토는 또 최근 대미자동차협상을 통해 원칙을 지키는 단호한 자세로 임해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자민당내에서는 특히 고노총재로서는 다음 총선에서 힘들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국민적 인기가 있는 하시모토로 장수를 바꿔야 승리를 거두고,더 나아가 단독정권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시모토통산상이 자민당의 총재가 될 경우 일본정국은 흐름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우선 개각이 불가피할 것이다.「무라야마 총리,고노 총재,다케무라 신당사키가케 대표」의 3거두는 연립정권의 기둥이었다.그 중 하나가 무너지게 되어 보수공사가 불가피하다. 연립정권이 얼마나 유지될 것인가도 관심의 초점이다.하시모토는 입후보하면서 고노의 강점­「연립정권 유지는 고노뿐」이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자신도 총재가 되면 연립정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이 공약은 힘이 실린 것은 아니다.하시모토통산상은 또 보수 우익을 대변해 왔고 지지를 받아 왔다.그들은 사회당과 연립정권을 이루면서도 줄곧 정책과 전후처리등에 있어 마찰을 빚어왔다.사회당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는 미국과의 무역마찰에 있어서도 원칙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강경입장을 강조해 왔다.앞으로 일본 정부의 목소리는 강경해질 가능성이 높다. 하시모토의 등장으로 특히 과거사문제와 관련,아시아피해국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우려된다.그는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등 일본 우익의 역사관을 일부 공유하고 있으며 지난 15일에는 「일본유족회장」자격으로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공식참배하기도 했다.
  • 일 자민당 총재/하시모토 확정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자민당의 차기 총재에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통산상이 사실상 확정됐다. 오는 9월22일 실시될 예정인 총재선거를 앞두고 하시모토통산상과 치열한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상돼 오던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총재가 28일 총재선거 입후보를 공식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고노 총재는 이날 당내 알력과 혼란을 막기 위해 총재선거 입후보를 단념한다고 밝혔으며 외상직 잔류문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판단에 맡긴다고 말했다. 고노총재의 입후보 포기는 이미 총재선거 출마를 발표한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상의 당내 지지도가 앞서고 있다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하시모토통산상은 총재선거에 입후보하면서 현 연립정권 구도의 유지를 표명해 왔으나 그가 보수 우익의 지지를 받아온 만큼 사회당과의 연립정권 유지여부 및 중의원해산 등이 일본정계의 초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일 자민당/총재 선거전 돌입/재선 겨냥 고노 총재도 출마 선언

    【도쿄 연합】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 연정의 제1여당인 자민당의 총재선거가 21일 사실상 막이 올랐다. 재선을 겨냥하고 있는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총재(외상)는 이날 하오 당 간부회의에서 새 정권 창출을 위해 다음달 22일 실시되는 총재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자민당의 보수세력을 대표하고 있으며 전몰자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 통산상도 「힘을 내자.일본 자신회복 선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총재선거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비교적 진보주의자인 고노 총재는 자민당내 최대 파벌인 미쓰즈카(삼총)파와 자신이 소속해 있는 미야자와(궁택)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하시모토 통산상은 옛 다케시타(죽하)파인 오부치파와 파벌을 초월한 보수·우익세력이 뒷받치고 있다. 하시모토 통산상이 만약 총재로 선출될 경우 보수성향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총재선거는 다음달 22일 국회의원 3백9명과 1만명당 한표의 결정권을 지니는 1백70만 당원의 투표로 치러진다.
  • 「한국전쟁 기원」 논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2)

    ◎「이데올로기 잣대」 따라 남침­북침설 대립/본지연재 「모스크바 새증언」이 남침 입증 한국전쟁의 진행 상황은 본지 연재물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했습니다.따라서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시리즈에서는 전황을 직접 다루지 않는 대신 한국전쟁 기간중 있었던 주요 사건·사고와 정치·경제·사회적 흐름을 주로 소개하겠습니다.독자 여러분께 배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25일 상오 4시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었다.일요일을 맞아 새벽 단잠에 빠진 한국군부대 막사 위로 한순간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니 이어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었다.이에 앞서 상오 3시30분쯤에는 북한 게릴라 3천1백여명이 해군 상륙선단편으로 동해안 옥계·삼척·임원 등 3곳에 상륙했다.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터진 것이다. ○북 군사력 한국 압도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경상도·제주도를 제외한 국토 전역을 수중에 넣는 등 파죽지세로 대한민국을 유린했다.북한군이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공세를 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북한은 일찌감치 전쟁준비에 나서 개전 당시 군사력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개전 초기 양쪽의 전력을 볼 때 북한이 침략의도를 갖고 대한민국을 먼저 공격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쪽이 어디냐는,곧 「한국전쟁의 기원」을 따지는 논쟁이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이는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민족간에 벌어진 내전이나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세계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블록으로 갈라져 냉전체제로 돌입한 다음 벌어진 첫 대결의 장이었다.따라서 한국전쟁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전쟁 자체의 성격 분석을 전제한 이데올로기적 잣대가 작용하게 마련이었다.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시각은 냉전 발생의 책임을 미·소 중 어느쪽에 두느냐에 따라 두갈래로 나뉜다.하나는 「소련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이 미국의 단호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다.거꾸로 「미국이 월등한 군사·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므로 소련이 불가피하게 대응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쪽은 수정주의 학파라고 부른다.기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남침설」을,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을 지지한다. 전통주의자들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자 수상인 스탈린을 대개 지목하며 그 동기는 다음 몇가지로 분석한다.첫째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유럽에서 압박을 가하자 이를 분산시키려고 극동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압력분산설」이 있다.또 ▲세계 적화를 노리는 스탈린이 미국의 대응 의지를 떠보려고 도발했다는 「저항력 실험설」 ▲주한미군 철수,애치슨라인 설정으로 미국이 한국방위를 허술히 한데다 한국에서도 「5·30선거」에서 우익세력이 패하자 그 틈을 노렸다는 「허점공격설」 등이 있다. ○냉전발생책임에 무게 반면 수정주의 학설은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가설에서 출발했다.미국의 좌파 언론인 스톤이 제기한 이 주장은 「이승만은 국내 정치위기를해소하려고,맥아더는 미 정부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전쟁을 획책했다는 논지로 구성됐다.정확한 근거없이 단순한 추측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점차 미국·일본 등 서방국가 좌파 지식인사이에 널리 퍼져 수정주의라는 한 갈래를 이뤘다. 「6·25」를 겪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처구니없어 할 「북침설」이 나름대로 세력을 이룬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전통주의자건,수정주의자건 한국전쟁을 지나치게 냉전논리로만 파악했다는 점이다.이들은 당시 남북한의 정세나 군사력 비교 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소련 또는 미국이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했다.또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북한·소련측 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은 점도 학자들의 연구를 제약한 큰 요인이었다.예컨대 북한군의 남침을 밝히는 한글 문헌은 1986년까지 한건밖에 공표되지 않았다. 이같은 학계 분위기는 80년대 후반 들어 반전한다.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북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6·25」를 철저히 준비했고,치밀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음이 속속 밝혀졌다.「북한 노획문서」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에 나선 미군이 평양 등 북한 각지에서 압수한 각종 문서를 총칭하며 그 분량이 1백60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이 북한측 자료는,인민군 5개 사단이 6월23일부터 24일 밤사이 38선이북 수㎞ 안에 집결해 25일 새벽 선제공격을 가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가령 6사단 문화부가 6월13일 예하부대에 내려보낸 「전시 정치·문화사업」명령서를 보면 38선으로의 이동­공격 개시­점령지에서의 정치선전 활동에 이르기까지를 5단계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북한 노획문서」의 공개와 이에 근거한 연구성과 발표는 어느쪽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전쟁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이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자료가 서울신문이 올해 발굴해 「6·25 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러시아 소장 비밀문서 9백50여건이다.러시아 외무부·대통령궁·옛소련공산당 중앙위·국방부에서 각각 입수,이번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더미는 한국전쟁 준비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던 많은 의혹들을 해명해 주었다. ○“3인 공동정범” 밝혀 이에 따르면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은 한국전쟁에 있어 각각 주요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김일성은 1949년 3월 스탈린을 만나 먼저 전쟁을 제의한다.이를 거부하던 스탈린은 50년 3∼4월 회담에서 남침을 허락했고,이후 53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전쟁을 주도한다.전쟁 계획을 확정하고,중공군을 끌어들였으며,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등 주요 결정은 모두 스탈린이 내렸다.한편 모택동은 초기에 참전을 주저하긴 했지만 막상 중공군을 투입하고 부터는 전쟁터를 책임진다. 러시아 비밀문서 발굴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해묵은 논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한민족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긴 「6·25」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공동정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로 증명됐다. ◎「당 7∼8월 사업계획서」/북,108군·1168면에 「인민위」 설치/도·시·군·면 행정단위 남노당위 “재건”/「평화옹호 서울위」,지지 서명 받아내 전쟁 개시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국토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에서 당·정 기관의 건립,토지개혁,군지원을 보장하는 활동에 즉시 돌입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비밀문건을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국내 처음으로 공개한다.「당 중앙본부 7월∼8월 사업계획서」라고 이름붙은 이 문서는 「절대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등사본으로 50부만 찍은 귀한 자료다.이 문건은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북한이 세운 전략을 알려준다. 사업계획서는 점령지 행정 중심방향으로 ▲옛 남로당조직 복구등 당세 강화 ▲군수품 생산 증대 ▲군·면·이 단위 인민위원선거 및 토지개혁 실시 ▲사회단체 활동 강화 ▲농촌에서의 증산 장려와 현물세 징수 등 5개항을 제시했다.또 10일마다 회의를 열어 이같은 지시사항을 점검하도록 했다. 이 문서에서 나타나듯 북한은 행정구역에 따라 중앙(서울)·도·시·군·면 단위로 각급 당 위원회를 재건하는 동시에 임시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들을 복구했다.당 위원회 재건작업은 북로당원으로서 파견된 공작대원,남로당 출신 월북자,형무소에서 출감한 남로당 간부 출신,빨치산 간부들이 맡았다.이어 두단계에 걸쳐 「인민정권기관」을 지체없이 세웠다.먼저 점령지에 지역 정권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곧바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를 정식 설치했다.남한에서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곳은 1백8개 군,1천1백68개 면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다.「무상 몰수,무상 배분」을 원칙삼아 일제와 한국 정부,지주 소유 토지는 모두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자작농은 5∼20정보만 인정했다. 북한은 정치 선전·선동에도 힘을 기울여 7월14일 「평화옹호 서울시위원회」를 조직,북한을 지지하는 서명을 억지로 받아냈다.그 내용은 ▲유엔에 미국의 참전 중지를 요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등 대한민국 요인을 반역자로 지목,처형을촉구한 것이었다.
  • 이제 일본콤플렉스 벗을때(임춘웅 칼럼)

    「일본은 없다」로 일약 문명을 날리게된 전여옥씨가 일본의 한 보수우익인사를 만났다고 한다.그때 그인사가 한다는 말이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이 후회하는 것은 하필이면 이처럼 집요하게 사죄를 요구하는 끈질긴 민족을 식민지로 삼은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물론 농담이지만 재미있는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세계에는 침략했던 나라도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는 지겹게도 끈질긴 일본한테 식민지노릇을 해 50년이 되도록 사과다운 사과,반성다운 반성 한번 못들어보고 사나』싶기도하다.지난 15일 무라야마(촌산) 일본총리가 모처럼 「사과」라는 것을 하긴했지만. 해마다 우리는 8월이 되면 「광복행사」를 갖는다.우리는 이때가 되면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에서부터 일본의 침략야욕이 얼마나 잔악했는가를 회상하고 그들이 한민족과 이나라를 어떻게 착취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그리고 우리는 구한말 이나라의 지도자들이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두었고 또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상기하며 자성의 계기로 삼는다.금년은 특별히 광복 반세기가 되는 역사적전환점이었다.그래서 광복의 의미도 한결 새로웠고 그만큼 기념행사도 다채로웠다. 광복을 통해 우리가 민족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다시 확보하고 오랜 정통문화를 복구하게된 뜻을 되살리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민족의 아픔과 일본의 만행을 되새겨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 역사를 바로 가르치고 민족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의 「광복행사」를 언제까지 계속해야하는 것일까.지금까지 그것이 중요했고 의미가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것인가.현실적으로 「반일」을 반복적으로 하는데도 한계가 있다.똑같은 얘기의 되풀이가 되고있다.세상은 이미 너무 좁아졌다.「반일」을 계속해서 하는것이 과연 우리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에겐 일본콤플렉스가 있다.바로 이 콤플렉스가 아픈 상처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광복 50년에 우리가 일본콤플렉스에서 벗어날수만 있다면 그것은 구총독부 건물을 헐어내는 일보다 더큰 소득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해마다 「광복행사」를 하지만 실제의 한일관계는 그렇지 않은데서 오는 괴리의 문제다.정치적으로는 벌써 30년전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됐고 경제적으로 양국간에는 연간 무려 4백억달러가 넘는 경제교류를 하고있다.작년 한해만 1백65만명의 일본인이 한국을 다녀갔고 1백5만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다녀왔다.공식적으로는 닫아놓고 있지만 문화교류도 이미 제어할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약자가 아니다.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다.광복은 「반일」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그것은 미래로 웅비하는 한민족의 기상이어야하고 능동적인 세계화여야 한다.
  • 일본 총리의 「침략전쟁」론(사설)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일본총리가 「종전50주년 기념일 총리담화」를 통해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을 「식민지배와 침략」이라 규정하고 그들의 침략에 의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인들에게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한 것은 진실을 인정하는 역사적 반성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무라야마 총리는 16일 김영삼대통령에게도 담화내용을 친서로 보내왔다.일본총리가 과거사 사과문제로 한국의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온 것도 사상 처음 있는 일로 하나의 변화다. 이번 총리담화는 특히 일본내각의 의결을 거쳤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침략전쟁」을 인정하는데 50년이 걸렸다는 일이 되레 우습고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듣는데 반세기가 걸렸다는 것이 쑥스럽기까지 하다.그러나 그동안 일본이 보여온 역사왜곡과 사실은폐 집념이 너무나 집요했기 때문에 비록 때는 늦었지만 그나마의 변화도 하나의 「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16일종군위안부문제에도 언급,사과했다.일본총리의 이런 발언은 분명히 과거에는 없었던 일로 진일보한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번 총리담화가 비록 내각의 의결을 거쳤다고는 하나 말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총리가 사과담화를 내놓은 날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대동아전쟁은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우익단체들의 집회가 도쿄 곳곳에서 열렸다는 보도를 우리는 접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철저히 왜곡된 역사교과서의 개편에서부터 시작해서 대국민 교육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앞에서는 사과하고 뒤에서는 망언하는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무라야마 총리담화의 구체화가 중요한 것이다.일본 국민 모두가 역사를 바로 알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일본은 아시아 이웃들과의 참다운 화해나 선린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 일 총리/“과거 전쟁은 침략” 인정/일 언론 보도

    ◎8·15회견 때/“아 국민에 많은 고통 줬다” 【도쿄=강석진 특파원】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 총리는 오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전후 50주년에 즈음한 총리담화」에서 과거 전쟁이 침략이었음을 명백하게 인정할 것이라고 일본언론들이 12일 보도했다. 총리 담화문 초안은 과거 전쟁에 대해 『국책을 그르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명기하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하는 것으로 돼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초안은 또 과거의 교훈을 살려 「독선적인 내셔널리즘(국수주의)을 배척」함으로써 일본이 국제협조와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고 잘못을 두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젊은 세대에게 강조해야 하며 일본과 아시아 국가의 근현대사 역사연구를 지원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15일 열리는 각료회의에서 이 담화를 확정한뒤직접 발표할 예정이며,자민당 일각의 보수·우익세력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들은 덧붙였다. ◎“망언 문부상 파면”/일 공산당 촉구 【도쿄 연합】 일본 공산당은 12일 과거 전쟁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시마무라 요시노부(도촌의신)문부상을 즉각 파면하라고 촉구했다.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지위화부)서기국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건성으로 발언을 철회함으로써 속임수가 통하는 문제가 아니다』고 지적하고 시마무라 문부상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노골적으로 합리화했고 문부상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파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일본에선…/유출 한국 문화재(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1)

    ◎약탈·밀반입 문화재 10만점 추산/고려 대장경 등 10점 「일 국보」 지정/알려지지 않은 개인 소장품 훨씬 더 많아/고려청자·회화 희귀품 많아… 반환이 과제 고려청자의 걸작품 청자투각당초문상자. 화려한 투각문양과 청록색의 이 명품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도 맑은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있다.그것을 만든 장인은 가고 없지만 고려청자의 예술은 오늘도 찬란하다.그러나 그 걸작품은 지금 한국에 없다.굴절된 한국의 현대사를 증언하듯 그 작품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의 안내책자는 8만8천여점의 소장품 가운데 엄선한 26개 작품중에 청자투각당초문상자를 소개하고 있다.일본도 걸작품의 예술성을 아는 것일까.고려청자의 전성기였던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4점밖에 남지 않은 상자형 청자중의 하나이다. ○3만여점은 공개 도쿄 국립 박물관에는 청자투각당초문상자 외에도 많은 한국문화재가 있다.문화재 수집가 오쿠라 다케노스케(소창무지조)가 기증한 「오쿠라 컬렉션」을 포함,2천여점의한국 예술품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그러나 도쿄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는 일본에 의해 약탈됐거나 불법유출된 한국문화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정부에 의해 파악된 해외유출 문화재는 세계 17개국에 6만4천여점이며 그중 가장 많은 3만여점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공개된 것일 뿐 실제로는 10만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일본의 경우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대판)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대화)문화관,도쿄에 있는 민예관 등 박물관에 있는 한국문화재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은 개인소장 문화재가 더 많다고 주일 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역사연구에 중요 한국국제교류 재단은 해외에 있는 문화유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 민예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한국문화재」라는 제목으로 93년 12월에 발간한데 이어 95년1월에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문화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만들었다. 한국의 문화재들은 멀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본의 식민통치 기간과 그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4백여년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됐거나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중에는 국보급의 걸작품들도 적지 않다.일본정부는 고려판 「대장경」을 비롯,10점을 국보로 지정하는 등 1천2백70여점을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때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수집했던 오쿠라씨가 죽은 후 지난 81년 기증된 「오쿠라 컬렉션」의 1천여점의 한국문화재가 전시돼 있다.오쿠라 컬렉션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고고(고고)자료가 많으며 고려·조선시대의 미술작품,청자 등도 적지 않다. 오쿠라가 모았던 문화재들은 양이 많을 뿐만아니라 예술성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많다고 민속학자 김광언교수(인하대)는 지적한다.그중에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이정의 「니금죽도」,정선의 「산수도」,장승업의 「묘도」등이 있다.도자기도 신라·가야의 마형도기,수레형도기 등 50여점과 고려·조선시대 도기 1백30여점이 있다.명품이 많은 고려청자는 38점이며 조선백자도 많다. 오사카시립 동양미술관에도 1백여점의 도자기들이 있는데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명품들도 많다고 윤용이교수(원광대)는 말한다.오사카미술관은 지난 92년11월 고려청자,조선분청사기 등을 포함한 일부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열어 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야마토(대화)문예관에도 많은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도쿄에 있는 민예관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제창한 민예이론에 따라 수집된 1천5백여점의 문화재들이 있다.일본의 유명사찰 등에도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조선초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덴리(천이)대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민간기업도 참여 한국은 일본에 있는 이러한 많은 문화재들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성과는 별로 없다.지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일간 문화재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그동안 돌아온 문화재는 2천7백77점에 지나지 않는다.지난해에는 일본의 하치우다 다다스씨(68·부동산업)로부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등 3백82점을 기증받은 경우도 있으나 문화재를 돌려받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한국정부는 문화재 반환을 위해 일본정부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일 문화원 관계자는 말한다.일본내 우익세력들이 개인소장가들의 문화재 반환을 막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문화재 반환은 세계적으로 어렵고 미묘한 문제이다.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문화재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강대국들이 대부분 유출 문화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실효성이 별로 없다.이때문에 민간기업들이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갖고 해외 경매시장에서 사들이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지적하는 문화재 전문가들도 많다.
  • 또 망언인가(외언내언)

    일제가 조선강점이후 첫번째 착수한 전국 규모의 사업이 「토지조사」였다.합방직후 토지조사국을 만들었고 1918년말까지 계속된 이 조사작업은 식민지 경제수탈의 근간이었다.수많은 조선인 지주가 땅을 빼앗기고 더 많은 소작인들이 농토를 잃었다.역둔토 14만5천정보가 국유화되었고 4만6천여정보의 민간인 농토가 총독부소유로 바뀌었다. 토지조사 7년만에 조선에서 일본인의 토지경영은 10배로 늘어났고 면적도 4배나 증가한다.1930년 조선의 쌀생산고는 1천3백51만섬,이중 40%인 5백42만섬을 일본으로 빼돌렸다.조선인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좁쌀과 콩깻묵을 식량으로 삼아야 했다.농업생산이 경제의 대종을 차지하던 때였으니 조선의 경제전체를 약탈해 간 것이다. 그뿐인가.6백여만명의 노동인력을 징용이란 이름으로 끌고갔으며 태평양전쟁중에는 50만명의 젊은이를 징병으로 사지에 몰아넣었다.심지어는 부녀자와 어린 여학생까지 종군위안부로 끌어간 일제다.그 만행을 조선인들은 36년동안 겪고 지켜 보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후 과거역사에 대한 사죄는 건성으로 해넘기고 기회있을 때마다 식민지통치를 정당화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망언을 되풀이해왔다.「식민지 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각료까지 등장했으니까. 우리에겐 광복50년,일인에겐 패전50년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문부상에 취임한 시마무라(도촌의신)는 「망언행진」을 또 되풀이했다.『태평양전쟁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아니며 따라서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보수 우익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지만 그런 망언을 들으며 「일본인의 왜소한 심리」에 분노와 함께 연민을 느낀다. 『전쟁에서의 죄악과 옳지 않았던 일을 공평하게 판단하려면 역사의 진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바이츠제커 전 독일대통령의 최근 일본방문 강연은 옹졸한 일인의 망언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일 우익/「아주독립 지원」 비디오 조작

    ◎인니 지도자들이 일제압제 지적 삭제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우익세력인 「종전 50주년 국민위원회」가 『태평양전쟁은 아시아 독립을 지원했다』고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비디오 「독립아시아의 빛」이 왜곡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마이니치(매일)신문이 20일 자카르타발로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비디오에 등장한 루슬란 아부도르가니 전외무장관 등 인도네시아지도자들의 회견 내용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일부 일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만 수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신문에 따르면 아부도르가니 전외무장관은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 의미에 관한 질문을 받고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서 일제가 잔학한 압제를 행한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위해서 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일본군이 군사훈련을 시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데 움이 됐다는 점을 설명했으나 이 비디오에는 부정적인 측면은 고스란히 빠지고 네덜란드의 우민정책만 소개됐다는것이다.
  • 일 연립여당 「종전 50년」결의안

    일본 연립여당이 전후(전후)50년에 즈음한 국회결의안이란 것을 마련했다.작년 6월 자민·사회당등의 연립정권 발족당시 채택키로 합의한지 1년만의 일이다.그러나 「과거의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미래의 평화결의를 다짐한다」는 당초 취지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일본은 반성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는 결의안 같다는 것이 우리가 받는 인상이다. 우선 이결의안 채택을 둘러싸고 지난 1년동안 일본에서 전개된 우여곡절은 한마디로 불쾌하고 실망적인 것이었다.누구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작한 일이었다.그럼에도 사회당본부 화염병투척 등 우익들의 반대는 완강했으며 결과적으로 마련된 결의안은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자민당을 비롯,일본정계에 일제)와 침략전쟁이 정당했다고 신봉하는 우익세력이 얼마나 뿌리깊게 남아 있는가를 재확인하는 역설적인 기회였다. 물론 우리는 처음부터 기대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그동안 국왕과 총리등의 입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수없이 해왔으며 그 이상이 나올 수 없는일본의 속성과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우리가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그동안의 수준에서도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결의안 내용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사죄 및 다시는 않겠다는 다짐보다는 한마디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변명과 정당화에 급급하고 있다.그당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은 세계열강 모두가 추구한 보편적 시대상황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인 자기변명과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의라면 왜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그것은 한국 등 아시아 이웃들의 지난 상처를 달래고 공존공영의 미래를 함께 개척해 나가자는 일본국회의 전후 50주년 결의안에 걸맞는 내용은 아니다.와타나베망언과 함께 일본제국주의·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부전」등 알맹이 뺀채 “겉치레반성”/일여당「전후결의안」합의 의미

    ◎침략·식민지 지배 범죄책임 회피/연정붕괴 우려 「물타기 결의」 변질 산고 끝이라고 꼭 옥동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연립여당이 6일 밤 간사장·서기장급 회담을 열어 오랫동안 논란이 벌어져온 전후 50주년 국회결의안에 합의했다.자민당내 우익정치가를 비롯한 우익세력의 집요한 반대로 무산될 뻔한 결의가 연립여당 안에서 합의에 이른 것은 사회당이 강공을 펼치고 연립정권의 붕괴를 우려해 자민당이 양보한 결과다.또 와타나베의원의 망언에 대해 한국이 단호하게 반발한 것도 합의를 촉진시켰다.이제 남은 절차는 야당인 신진당과 협의를 거쳐 중·참의원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는 것이다. 합의안이 산고 끝에 나왔지만 그 내용은 피해당사국 주민에게 실망스러운 것들이다.합의안에는 자민당이 반대해온 「침략행위」·「식민지지배」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는 하다.하지만 당초 내건 「사죄」나 「부전결의」라는 말은 모두 빠졌다.결의안의 제목은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가 돼버렸다.「침략행위」라는 말도 「침략적 행위」라고 바뀌었다.외무성이 영어로 번역하면 「Acts of Aggression」으로 똑같다고 유권해석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한자어권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물타기수법」에 불과하다.많은 역사가가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내용에 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본총리들이 『침략행위와 식민지지배를 반성한다』고 말한 것보다도 후퇴한 형태다. 또 일본의 책임을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세계 근대사에 있었던 식민지지배와 침략적 행위에 집착해 우리나라가 이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비켜나갔다.일본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일본 국회의 결의안이 서구 제국주의국가보다는 아시아국들을 향한 선언이라는 성격이 강한데도 책임부분을 모호하게 만든 것이다. 국회결의가 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후속조치다.결의는 법적인 효력을 갖는 문서가 아니다.단지 선언일 뿐이다. 결의내용이 비록 형편없어도 성의 있는 후속조치가 따른다면 일본이 어느정도 반성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여당안을 마련하는 논의과정에서 보듯이 일본의 지도층에는 과거반성을 거부하는 자들이 두껍게 포진하고 있다.후속조치가 이어질 가능성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 침략 사죄관련 주요 발언 ▲히로히토(유인) 일왕=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84.9.6 전두환 대통령 방일 만찬사) ▲아키히토(명인) 일왕=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90.5.24 노태우대통령 방일 만찬사) ▲가이후(해부) 총리=과거의 한 시기,한반도의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의 행위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슬픔을 체험하게 된데 대해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를 드리고자 한다.(90.5.24 노태우대통령 방일 회담) ▲호소카와(세천) 총리=2차대전은 침략전쟁이었으며 잘못된 전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과 함께 분명한 매듭을 짓고 평화와 국제협조를 위해 책임을 다해 나갈 생각이다.(93.8.10 취임기자회견) ▲하타 쓰토무(우전목) 총리=일본은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이 많은 사람에게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슬품을 가져다 줬다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94.5.10 참의원 본회의 소신표명연설) ▲무라야마(촌산부시) 총리=우리나라의 침략행위와 식민지지배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데 대해 깊은 반성에 입각,부전 결의하에서 세계평화창조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94.8 전후 50년을 향한 담화)
  • 와타나베 사과와 사실/강석진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올해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가 응징된 지 50주년을 맞는 해다. 아시아 여러나라의 국민들은 올해가 「밝은 미래를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랐다.가장 쓰라린 경험을 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과거보다는 미래를 개척하자』는 말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온 터이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고 있는 요즘 일본에서의 움직임은 주변국들이 충분히 우려해야 할만큼 거꾸로 가고 있다.지난해 연립정권을 세우며 스스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국회에서의 부전결의는 우익세력의 반대로 이미 그 본래의 취지를 잃어가고 있다.자민당 등 일부 우익세력이 반대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말들을 보면서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본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윤리적 불감증은 지난 3일 와타나베 미치오 전외상의 발언에서 다시 한번 입증됐다.친한파라는 그는 『한일합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적은 있지만 식민지 지배를 한 적은 없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와타나베는 5일 파문이확산되자 서둘러 사과했다.그의 「코멘트」는 이렇다.『원만히라는 단어를 취소하고 사과한다.일본이 36년동안의 조선반도 통치기간동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점을…인정한다.내 발언의 취지는 한일합방조약이 「이미 무효」라는 65년도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뒤집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일본어로 오와비라는 말로 사과한다고 했다.오와비는 사죄에는 못미친다.미안하게 됐다는 뉘앙스가 강하다.일본에서 사과한다고 할 때 오와비라는 말을 자주 쓰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타부타할 생각은 없다.하지만 내용을 보자.그는 그저 「원만히」만 취소했다.무력에 의하지 않았다는,사실과 다른 말은 그대로다.또 식민지지배가 아니라 통치했을 뿐이라는 기본 인식도 그대로다.그의 「사과」는 과거 여러번 되풀이됐던 망언들과 마찬가지로 말만의 사과일 뿐이다. 와타나베식 사과에서 보듯이 일본의 지도층은 과거 침략의 역사,만행의 역사를 반성,새출발을 위한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그러면서 미래를 함께 개척하자고 강조한다.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응시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다시 과거사를 뒤집으려 하곤한다.바로 일본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때문에 여러가지 낙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지역에는 긴장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일 우익 「한·중 수탈사」 왜곡입증/일 귀족원 비밀회의록 공개의미

    ◎태평양전쟁에 조선인 징용 준비 확인/“공격대상 미·영” 논리 허구성 드러내 일본참의원의 전신인 명치헌법하의 귀족원(추밀원) 비밀회의록이 5일 모두 공개됐다.비밀회의록은 24건으로 A4판 4백70쪽 분량.그 가운데 전후 미점령군 사령부가 가져간 「미국의 일본 공습 및 상륙에 관한 질의」는 공개대상이지만 자료는 입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중의원이 갖고 있는 비밀회의록의 공개가 과제로 남게 됐다. 비밀회의록의 공개는 대부분 한국에서는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등에 의해 널리 확인돼 왔으나 일본에서는 극우주의자나 일부 보수정치인등에 의해 제멋대로 왜곡돼 왔던 과거의 침략수탈사가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됐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41년 1월 회의록에는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키기 1년전 이미 영미와의 전쟁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이는 뒤에 징용으로 나타난다. 또 고노에 당시총리는 대동아공영권 구상과 관련,「대동아 각 민족을 구미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한다」면서 「(예상되는 지구전에 대비해)남방경영에 의해 소요물자의 보급을 확보해 지구전체제를 정비하는 외에 길은 없다」고 본심을 드러내고 있다.즉 구미로부터 동남아시아를 분리시켜 자원을 강탈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정치권에서 부전결의등의 채택을 둘러싸고 비뚤어진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시아와 싸운 것이 아니고 영·미와 싸우다가 본의아니게 아시아인에게 폐를 끼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영·미가 일본의 생명선인 유류등의 금수조치를 실시해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일본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논리가 엉터리라는 점이다.고노에총리는 『영·미는 중일사변과 관련,9개국조약에 기초해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이 대륙침략정책을 포기하지않자 영·미가 일본을 준적국화하고 가솔린등 대일수출금지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 모든 원인이 한반도와 만주에 이어 중국까지 마구잡이로 침략을 자행한 일본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밖에 비밀회의록에는 1894년(한국의 동학농민전쟁에 일본이 개입,청일전쟁이 벌어진 해) 청일전쟁 임시군사비를 심의하는 귀족원 회의가 히로시마에 건설된 대본영의 가의사당으로 의원들이 집합해 열리는가 하면 심의도중 군사비에 관한 사항이라며 속기까지 정지돼 기록이 남겨지지 못하게 되는 등 군의 문민정치원리에 대한 훼손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45년 3월 도쿄대공습 직후 열린 비밀회의에서는 이미 공습사망자가 5만5천명을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이와관련,한 전쟁작가는 당시 일본이 전쟁을 포기했다면 일본은 원자탄 투하도 피할 수 있었고 일본인 사망자 3백10만명 가운데 2백만명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침략에 눈이 먼 지도자들이 일본국민과 아시아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회의록 내용을 살펴본 도쿄도립대 사사키 류지교수등은 「고노에내각은 절망을 선택했다」,「무책임한 체계의 공허함을 본다」면서 침략의 역사에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일제 비밀회의록 요지 일본 참의원은 18 91년부터 19 45년까지 명치헌법하의 귀족원에서 행해진 비밀회의록을 5일 공개했다.다음은 비밀회의록 가운데 한반도 및 침략전쟁과 관련된 부분들의 주요내용. ▷태평양전쟁과 조선인 노동력 착취 계획◁ 1941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총리의 「국내외정세에 관한 보고」.…제국장래의 생명인 대동아 공영권건설 문제에 관해 독일·이탈리아 양국은 일본의 지도권을 인정한다고 함이 명료하다. 독·이와 더불어 나아가는 길 말고는 길이 없다.전쟁은 독일측의 승리로 귀결될 것으로 믿는다.영국과 미국은 중일사변에 대해 우리의 지금까지의 대륙정책을 포기하도록 하고 있다.제국으로서는 그렇게 해서는 장래의 발전이 되지 않는다.그 결과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준적국화하고 장개석정권을 원조하고 있으며 가솔린등의 대일수출금지에 이르고 있다. (영·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면서)특히 노동력 보급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곤란을 느낄 것으로 생각된다.지금의 탄광종사자 30수만명에 더해 시급히 약 4만명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다른 산업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쉽지 않다.국내 노동자 모집,조선 노동자 도입등에 관해 현재 응급 특별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아시아각지의 침략과 관련)예상되는 지구전에 대비해 남방경영에 의해 소요물자의 보급을 확보해 지구전체제를 정비하는 외에 길은 없다. ▷중일전쟁◁ 40년 2월 요나이 미쓰마사총리(해군장관출신) 상황보고.중경정권(장개석정권)이 항전을 계속하는 한 사변은 계속된다.(왕조명정권의 목적은)중경정권을 약화굴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국제연맹탈퇴◁ 1933년 2월 사이토 마코토총리(조선총독역임)의 보고.(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는 립튼보고서를 국제연맹이 채택하면)동양평화의 확립에 대해 연맹과 소신을 달리하게 되므로 연맹과 협력할 여지가 없게 된다.…최후의 결정을 할 필요가 있다(이 회의는 연맹이 보고서를 채택한 2월 24일보다 사흘 앞선 21일 열렸다).
  • 일 우익,「전쟁찬미」 집회/의원·전각료 수천명 부전결의 반대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국회의 부전(불전)사죄결의를 반대하기 위한 우익집회인 「아시아공생제전」이 29일 하오 「종전50주년 국민위원회」(회장 가세 도시카즈(가뢰준일)일본 초대유엔대사)주최로 도쿄 일본무도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일본 우익세력들이 총망라돼 개최한 이날 집회에는 유족회회원,「종전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쿠노 세이스케(오야성량)자민당의원),「올바른 역사를 전달하는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자와 다쓰오(소택진남)전 후생상)소속 국회의원 등 수천여명이 참석,국회 부전사죄결의 저지를 외쳤다. 국회부전결의가 연립여당내의 첨예한 의견대립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열린 이번 집회에서 주최측은 태평양전쟁 등이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강변으로 일관했다. 이에 따라 이날 집회는 과거의 전쟁에서 희생된 아시아 전몰자들을 추도하고 아시아의 공생을 도모한다는 주최측의 당초 설명과는 달리 침략전쟁 찬미와 국회결의저지를 위한 집회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다.
  • 일 자민당내 우익의원 단체/“부전결의 채택 보류” 결의

    ◎중·참의원 60%이상 가입… 논란 예상 【도쿄 연합】 종전 50주년에 즈음한 일본 국회의 부전결의 채택에 반대하고 있는 자민당의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야성량)은 17일 총회를 열어 국회결의 채택을 보류시키기로 결의했다. 총회는 『국회결의는 모든 교섭단체가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국론이 분열돼 정치혼란을 가속시키는 상황에서는 결의를 보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자민당은 의결기구인 총무회 간담회를 열어 국회결의 문제에 대한 당론을 논의할 예정이나 중·참의원 전체의 3분의2이상이 가입하고 있는 이 의원단체가 「보류」를 결의함으로써 앞으로 의견수렴에 적지않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의원연맹은 결의에서 『일방적으로 침략행위나 식민지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결의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단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늘어놓았다. 의원연맹은 앞서 사회당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가 자민당총재인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부총리겸 외상,사키가케 대표인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 대장상에게 「국회결의에 침략적행위와 식민지배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밝힌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 부전결의 반대 「5백만 서명」 전달/일 우익/「공생제전」 추진단체

    ◎자민 통해 국회청원 내기로 【도쿄 연합】 일본국회의 부전사죄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구성된 「전후 50주년 국민위원회」(회장 가등준일)는 11일 자민당본부 홀에서 집회를 갖고 모리 요시로(삼희낭) 자민당간사장에게 부전결의반대를 요구하는 5백만명분의 국회청원서명을 전달했다고 산게이(산경)신문이 12일 보도했다. 모리간사장은 이에 대해 국회에 이같은 청원을 제출할 것을 약속했다. 전후50주년 국민위원회는 최근 전쟁미화의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 오는 29일 개최예정의 「아시아 공생제전」을 준비하고 있는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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