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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 소년합창단 ‘스타킹’ 출연…궁전생활 공개

    빈 소년합창단 ‘스타킹’ 출연…궁전생활 공개

    500년 전통의 세계 제일의 소년 합창단 ‘빈 소년 합창단’이 국내 최초로 주말 예능프로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아름다운 합창 실력과 평소의 ‘궁전 생활’을 공개한다. 빈 소년 합창단은 슈베르트, 하이든 등 음악계의 거장들을 선배로 두고 있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품 소년 합창단으로, 궁전에서 생활하지만 여느 또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소년들로 구성돼 있다. 방송에서 소년들은 유튜브를 통해 폴 포츠, 코니탤벗이 스타킹에 출연한 모습을 봤다며 자신들도 스타킹 무대를 통해 유튜브 스타가 되고 싶다는 깜찍한 소망을 밝혔다. 빈 소년 합창단은 장래에 음악가는 물론 나중에 국제무대의 외교관, 정치인이 될 수 있는 단순 합창단이 아닌 왕실이 인정한 엄격한 규율을 가진 정통 영재교육기관. 때문에 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도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의 궁전이다. 2명의 가정교사 겸 보모가 늘 곁에 따르며 마음의 안정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한다고. 녹화에서는 평소 백인 합창단으로 알려졌던 빈 소년에 검은 눈동자의 일본소년 신타로(14)가 속해있어 더욱 관심을 받았다. 알고 보니 빈 소년 합창단은 국적에 상관없이 오디션을 통해 선발될 수 있다고 한다. ’빈 소년 합창단’의 한국 첫 예능 나들이는 오는 30일 저녁 6시 30분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서 전격 공개된다. 사진=SBS 서울신문NTN 김진욱 기자 actio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日궁내청 명성황후 국장기록 공개

    日궁내청 명성황후 국장기록 공개

    │도쿄 박홍기특파원│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사무처장인 혜문 스님은 21일 일본 왕실 전담부처인 궁내청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의 국장기록을 직접 확인했다고 밝혔다. 궁내청은 혜문 스님이 요청한 국장기록의 열람을 받아들였다. 혜문스님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국장기록을 봤다. 공개된 기록은 조선왕조의 제례와 행사 방법 등이 기술된 의전서(儀典書)인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의 일부로 한국 정부가 반환을 요구, 외교문제가 돼 있는 사료다. 왕실의궤는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뒤 국장이 치러지기까지 2년여에 걸쳐 기록한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4권 가운데 한권이다. 또 국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과 강점 이후인 1922년 일본 궁내청에 보낸 증거인 ‘다이쇼(大正) 11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주인(朱印·도장)이 찍힌 문서가 포함돼 있었다. 혜문 스님은 22일 “궁내청 측은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왕실의궤가 진본이 아닌 복사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번에 진본임을 인정했다.”면서 “내년에 강점 100년이 되는 만큼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왕실의궤를 반환할 것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외무성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명성황후의 국장은 조선이 망하기 전에 치러진 마지막 국장이라는 점에서도 왕실의궤의 의미는 크다.”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 국회에는 의원 입법으로 왕실의궤반환을 요구하는 법안이 상정돼 있다. hkpark@seoul.co.kr
  • [그의 삶 그의 꿈] 마이센(Meissen)을 아세요

    [그의 삶 그의 꿈] 마이센(Meissen)을 아세요

    테이블웨어展 경기도 부천종합운동장에 있는 유럽자기박물관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를 하고 있다. 8월 말까지 열리는 <한여름의 테이블웨어展>이다. 테이블웨어(Tableware)는 음식을 담고 차려내는 식탁용품을 통칭하는 말인데, 이 전시회는 그러니까 유럽 식탁에서 사용되던 정통 유럽자기들의 진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놀랄 만치 다양한 구성품과 재질을 통해서 유럽의 식탁 문화 코드를 읽을 수 있고, 동양의 자기들과는 또 다른 양식과 특색을 지닌 유럽 자기들의 매력을 감상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전시회를 마련한 이는 유럽자기박물관 관장인 복전영자 씨. 일본 사람이었으나 19년 전에 한국인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귀화한 어엿한 한국인이다. 온화한 미소에,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히 한국어로 담아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데, 유럽자기박물관에 있는 900점이 넘는 자기류와 유리류, 그리고 가구들을 부천시에 선뜻 기증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수십 년 동안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세계의 유명 옥션들을 돌아다니며 모은 엄청난 수집 열정을 다른 이들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꺼이 내놓을 줄 아는 참으로 드문 용기를 지닌 분이다. 장롱 속에 넣어두고 혼자서만 꺼내 보고는 혼자 기꺼워하는, 재산적인 가치만을 거기 부여하는 대다수의 한국인 수집가들은 이분에게서 뭔가를 좀 느껴야 하리라. “혼자 보고 즐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훌륭한 예술품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아 주는 게 한결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수집해온 자기들을 부천시에 기증하면서 기증식장 단상에 올라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났습니다. 남들이 보면 아까워서 그러는 줄로 알았을지 모르지만, 뭐랄까요, 오래 품 안에 품고 있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엄마의 심정이 이럴까 싶었어요.” 그랬겠다. 현실적인 가치만을 따졌다면 아예 기증할 생각 같은 걸 하지도 않았을 테니. 기증에 인색하기만 한 우리들이 한 번쯤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마이센, 세브르, 로열우스터 이런 사연들을 지니고 2003년에 개관한 유럽자기박물관은 그야말로 유럽 자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으로 대표되는 우리 동양의 자기들이 각 나라마다 고유한 양식을 지니고 있듯이 유럽도 나라와 생산지에 따라서 각기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럽 최초로 백색자기를 개발한 독일의 마이센, 금채장식이 화려한 프랑스의 세브르, 왕실의 권위와 기품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영국의 로열우스터 등이 대표적인 유럽 양식들입니다. 마이센은 독일의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18세기에 중국에서 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자기를 황금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마을에 마침 고령토가 있어서 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게 지명을 따 마이센 자기가 된 것입니다. 저희들도 잘 알고 있는 영국의 본차이나는 물소의 다리뼈를 갈아 넣어 얇으면서도 강도가 높은 자기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럽 자기는 동양 자기에 비해 화려하고 독특한 문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자기는 곧 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자기는 부천시에 기증한 것들이 전부가 아니다. 김천시에도 1500점을 기증했다. 직지사 옆에 자기박물관을 지었다는데 그 건물의 형상이 항아리 모양이라고 한다.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이라니, 기증한 보람이 더 크지 않을까. “김천시장님이 자기의 가치를 알고 계셨어요.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딸이 자기 인형을 선물로 사다 달라고 주문했었답니다. 귀국길에 공항 면세점에 들러 딸의 선물을 사려는데 물어보니 값이 너무 비싸서 못 사왔다고. 아주 작은 것도 2백만 원이 넘더래요. 그런 경험이 있는 분이니 자기의 가치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렇잖아요.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없어지는.” 부끄럽다. 우리의 눈은 돈 앞에서만 화들짝 크게 떠진다. 아쉬운 기부문화 “오늘 아침에 일본 꼬마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관람을 왔었는데 아홉 살짜리 아이가 자기를 보더니, 마이센이다! 그러는 거예요. 대견하고 귀여워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어떻게 마이센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아빠 엄마에게 듣고 보아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과 대만에는 유럽자기박물관이 많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나. 담장 밖 주변 나라들을 좀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그 아이들과도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을 계속해야 할 텐데. “독일 드레스덴 국립박물관에 갔을 때인데 자기로 만든 새 두 마리가 있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도 두 마리인데 똑같아서 박물관 부관장님에게 물었더니 캔들러라는 장인이 여섯 마리를 만들었대요. 그 박물관에 두 마리가 있고 제가 두 마리를 가지고 있으니 네 마리는 있는데 나머지 두 마리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어요. 어디서 두 마리가 마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럽자기박물관에는 나폴레옹이 사용했던 잔도 있다. 역사적인 평가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튼 그 잔을 사용했던 이가 나폴레옹이라니, 듣는 순간 묘한 감회가 머릿속을 스친다. “박물관을 찾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강남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는 기증, 기부문화가 너무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더불어 나누는 기쁨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장인과 예인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물질만능시대에 정작 소중해지는 게 그분들의 존재라는 걸 잊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치관이고 인생관이다. 아니, 이런 것들 모두 접어두고 유럽 귀족이 되어 화려한 접시에 고급 요리 담아 먹는 호사스런 꿈에 한순간 젖어보는 건 어떨까.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 유럽자기박물관 전시가 끝나기 전에. 글_ 최준 기획위원 TIP 유럽자기박물관 특별전시회 <한여름의 테이블웨어展> <한여름의 테이블웨어전>은 테이블웨어의 구성과 다양한 문양을 통해 유럽의 문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기획됐으며 유럽자기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8월 30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는 유럽의 자기를 처음 생산하고 다양한 시도로 유럽자기의 원형을 세운 독일 마이센의 테이블웨어부터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의 취향과 왕실의 기호를 반영하고 있는 프랑스 세브르 테이블웨어, 1851년 제1회 런던박람회에 출품해 빅토리아 여왕이 디너세트를 제작 주문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헝가리 헤렌드의 테이블웨어, 2009년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현대도자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스테파니 헤링의 테이블웨어 등이 선보인다. 또한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독일 마이센 도자회사의 소장작품 30여 점과 마이센 코리아의 소장작품 40여 점도 함께 전시돼 전통 유럽자기의 진수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동서양의 식문화 공간을 주제로 4회에 걸쳐 성공회대 김재화 명예교수 등의 특별강연을 연다. 일시: 8월 31일까지 장소: 부천종합운동장 내 유럽자기박물관 문의: 유럽자기박물관(032-661-6238)
  • 건칠반 등 근대 공예유물 4건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건칠반(乾漆盤), 은제이화문탕기(銀製李花文湯器), 은제이화문화병(銀製李花文花甁), 유제화형촛대(鍮製花形燭臺) 등 근대 공예유물 4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25일 밝혔다. 근대문화를 표상하며 조형적 완결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해 공예사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건칠반은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도쿄미술학교의 공예분야에서 유학한 강창규(1906~1977)의 1933년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단절 위기에 있던 건칠공예를 현대적으로 승화한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은제이화문탕기는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는 단조(鍛造)기법으로 제작한 은그릇으로, 덮개와 몸통에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인 오얏꽃(李花)을 새겼으며 덮개에 ‘萬壽無疆’(만수무강) 글자를 금으로 박아 넣고 꼭지를 달아 실용성을 가미했다. 은제이화문화병도 오얏꽃 무늬를 붙였으며 기계로 생산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제작하기 위해 설립된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191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유제화형촛대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등잔걸이 형태의 유기(鍮器) 촛대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품이며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부산 범어사 일제 잔재 ‘퇴출’

    범어사가 일제 잔재 청산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범어사는 오는 2013년까지 총 200억원을 투입해 범어사의 민족문화 중장기 발전계획인 ‘범어사 종합 정비계획’을 마련, 추진한다고 13일 밝혔다.우선 1단계 사업으로 2013년까지 50억원을 들여 일제 강점기 때 잔재의 청산 작업을 벌인다. 이날부터 사찰안에 있는 일제 잔재의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표지석 제거와 보물 제250호인 3층 석탑을 원형대로 복원하고자 난간석 해체 공사에 들어갔다.또 대웅전 앞에 심어져 있는 금송(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나무) 3그루와 편백나무, 삼나무 등도 제거한다. 이와 함께 일본 건축양식을 따른 대웅전과 관음전 전면에 있는 난간대 등도 고유의 우리 불교 건축양식으로 바로잡는다.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인 범어사는 한국불교건축의 진수를 담은 대표적인 사찰로서 가람 배치는 전통불교 건축양식인 상·중·하단 3단 구성의 틀과 함께 선교양종(禪敎兩宗) 교리적 측면을 적용한 체용설(體用說)에 기반을 두고 있다.그러나 이런 가람 배치와 문화재는 일제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크게 훼손하고 왜곡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요정정치 산실 ‘대원’ 역사속으로

    요정정치 산실 ‘대원’ 역사속으로

    1970~80년대 삼청각 등과 함께 ‘요정 정치’의 근거지였던 서울 종로구 교북동의 ‘대원’이 3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4일 종로구에 따르면 지난달 말 돈의문뉴타운 제1구역에 대한 사업 시행인가가 완료돼 대원을 포함한 교남동 일대 건물들이 늦어도 연말까지 철거된다. 1975년 문을 연 대원은 1990년대까지 권력자들이 모여 ‘밤의 정치’를 하던 곳이었다. 군사정권시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정일권 전 국무총리 등 고위 관료들이 밀실 정치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5·16 군사 쿠데타 당시 1군 사령관을 지냈던 이한림 전 건설부 장관 등도 단골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대원은 지금은 문화시설과 사찰로 바뀐 삼청각, 대원각 등과 함께 정·관계 인사들이 각종 협상을 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 대원은 외국에서도 유명했다. 미국의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게리 하트 전 상원의원도 대원을 찾아 한국의 전통음식을 맛보고 찬사를 연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왕실의 가족과 아프리카의 대통령 등 외국 귀빈들도 방한 때 빠지지 않고 이곳에 들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곳은 전통가옥에서 고급 한정식을 즐길 수 있어 바이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상 접대장소로 각광받았다. 일본 등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아 한때 매달 1500~2000명이 이곳에서 식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은 요정이 ‘기생 관광’으로 관광객을 유혹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로써 서울의 요정집은 강북의 ‘오진암’을 비롯해 역삼동과 서초동 등 1980년대 새로 들어선 일부 업소만이 남아 명맥을 잇게 됐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역사 바로세우기에 모든 것 바칠래요”

    “역사 바로세우기에 모든 것 바칠래요”

    “살아 있는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에 모든 것을 바칠 겁니다.” 아버지 의친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의친왕 이강’(박종윤 지음, 하이비전 펴냄)의 출간에 즈음해 23일 서울 운현궁에서 기자들과 만난 황실문화재단 이석(68) 총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버지 의친왕은 다정하셨던 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인 이 총재는 “우리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잊혀 가는 때에 이런 작품이 나와 아직 조선의 역사가 살아 있음을 이야기해 반갑다.”면서 입을 열었다. 작품은 일제의 계략으로 왕위를 잇지 못했지만 황족 중 유일하게 일제와 맞섰던 의친왕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했다. 소설가 박종윤이 8년 동안의 자료수집을 거쳐 썼다. 그 과정에서 이 총재도 작가를 만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증언했다고 한다. 작품 속 의친왕은 강인한 모습이지만 이 총재는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의친왕을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 문안을 드리면 제 볼을 만지며 다정히 말을 건네곤 하셨죠.” 해방의 순간까지 의친왕은 탄식으로 살았지만, 해방이 되고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친일파를 등에 업은 이승만 정부는 황실 재산을 국고에 환속시키고 황족을 핍박했다. 헌법이 바뀌고 정부가 새로 생길 때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정권의 강압으로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 현재 남은 10명의 황족 중 한국에 있는 건 이 총재뿐이다. ●“명성황후·대원군 갈등 심하지 않았다” 미국 영주권을 버리고 한국에 온 지 20년.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의식 형성에 모든 힘을 쏟으며 강의를 나가고 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은 심하지 않았다. 당파싸움이 조선을 망하게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다. 근대사와 관련해 왜곡된 역사의식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었다는 것 등이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이 나라는 지금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돼 있다.”는 이 총재는 “돈을 너무 밝히면서 정신이 피폐해져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도 모르게 됐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최근 국회를 겨냥해 “국민들이 뽑은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상놈의 짓”이라고 강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와 더불어 왕실문화 재건을 위해서도 힘쓴다는 계획이다. 왕실품위유지를 위한 대책마련을 정부에 요구하고, 왕실문화와 정신이 이어지도록 역사강의도 꾸준히 진행한다. 글 사진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韓, 17세기 이후 족보 성행… 철저히 부계 중심으로 기록”

    “韓, 17세기 이후 족보 성행… 철저히 부계 중심으로 기록”

    족보(族譜)는 한 집안의 내력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사회구성, 종족제도 등을 엿볼 수 있는 역사 자료이다. 족보는 중국 고대에서 비롯됐는데 송나라때 비교적 완성된 형태의 족보가 등장했고, 명청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뤘다. 한국 족보와 일본 계보 기록은 중국 족보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라마다 특성은 조금씩 다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의 족보를 비교연구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10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에서 강원대 산학협력단 주최로 ‘동아시아 족보 자료의 구조와 활용 방안’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차장섭 강원대 교수, 호다테 미치히사 도쿄대 교수, 유상광 타이완 국립정치대 교수가 각국 족보 구조의 특성을 발표하고 이건식 한중연 연구원이 족보의 학문적 활용을 위한 방안을 소개한다. 차 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 ‘한국 족보의 유형과 내용’에서 우리나라 족보는 조선 시대 왕실 족보가 간행되면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고려 때도 가계 기록이 있었으나 족보 형태는 아니었다. 족보는 조상에 대한 가계 기록을 체계화해 서책으로 편찬한 것을 말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76년 간행된 ‘안동권씨성화보’다. 사가(私家)의 족보 편찬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명문가가 몰락하는 대신 신흥세력이 대두해 족보를 경쟁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국가가 전란으로 인한 재정부족을 벌충하기 위해 공명첩을 팔고, 군공면천(軍功免賤)을 실시하면서 신분질서가 해이해졌다. 이 틈을 타 명문가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족보를 보강했고, 신흥세력은 미천한 가계를 은폐하고 가문의 품격을 높이고자 족보를 위조했다. ●조선시대 왕실족보 간행되면서부터 시작 17세기를 기준으로 족보의 수록 내용은 변화한다. 조선 전기 족보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기록하는 내외보로 자녀와 친손, 외손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자녀를 기록하는 순서도 남녀구분 없이 출생순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족보는 외손을 제외한 친손만을 기록하고 출생연도와 상관없이 선남후녀의 순서로 기록하는 등 철저하게 부계중심으로 이뤄졌다. 또한 조선 전기 족보에는 양자가 일반화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활성화됐는데 이는 종가사상이 강화됐음을 보여준다. 차 교수는 “족보 기록 형식이 달라진 것은 성리학의 심화와 예학의 발달, 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 등 당시 사회의식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흥세력 미천한 가계 은폐위해 족보 위조 유 교수는 논문 ‘중국 근세 족보의 구성 형식’에서 “송원 시기에 전해온 원본 족보는 없으나 현존하는 송원 문집속에서 두 시대에 여러 사대부와 사인이 족보 편사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면서 “명대 중기 이후부터 형식과 내용이 증가하는 등 새로운 발전을 이뤘다.”고 밝혔다. 호다테 교수는 ‘일본 역사 계보 자료에 대한 개관’에서 계도(系圖)의 시대라고 불렸던 14세기의 가계 기록을 분석한다. 한편 이건식 연구원은 ‘학문적 활용을 위한 족보 자료의 사실정보화 방법 연구’에서 족보 자료의 디지털 정보화 작업을 체계적으로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제 금동대향로 오악기 소리 복원

    백제의 대표적 유물인 국보 287호 금동대향로에 새겨져 있는 ‘오악사의 다섯 악기와 소리’가 1400여년만에 복원된다. 15일 충남도에 따르면 도는 최근 국립국악원, 국립민속박물관 등과 ‘금동대향로 오악기 및 음원 복원’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올해 말까지 8억 2000만원을 들여 국립국악원과 충남도문화산업진흥원은 오악기 복원과 표준음원 발굴을, 국립민속박물관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악기 고증·조사 및 백제 가요 가사 정리에 나선다. 오악기는 피리·비파·소·현금·북으로, 금동대향로 뚜껑의 봉황 밑부분에 새겨져 있다. 소는 배소(排蕭·가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악기), 피리는 종적(縱笛·세로로 부는 피리), 비파는 완함(阮咸)이라고도 부른다. 타악기와 관현악기로 꾸며진 실내악 형태를 띠고 있다. 복원된 오악기는 내년 9~10월 대백제전 때 충남국악단과 국립국악원 단원 50여명이 합동으로 처음 연주한다. 연주곡은 백제 가요인 ‘정읍사’ 등의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다. 충남도는 중국과 일본 등 인근 해외 문화권 내 유사 악기의 음을 채집, 원음에 가깝게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유재룡 도 문화산업계장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악기였던 만큼 소리가 은은하고 고급스러울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국악인 한기복(41)씨는 “현대 악기보다 작아 요즘 사람 듣기에는 소리가 날카로울 수 있다.”고 예측했다. 도는 태교음악과 휴대전화 벨소리 등으로 복원 음원을 산업화할 계획이다.이완구 충남지사는 “대향로 발굴 16년만에 또 하나의 꿈이 시작된다.”면서 “백제문화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념비적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좌충우돌 조선에서 살아남기

    좌충우돌 조선에서 살아남기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방대한 역사서다.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472년(1392∼1863년)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엮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적어 놓은 정치책일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 적어 놓았다. 왕과 신하를 중심으로 기술한 만큼 어지간한 공직에 있거나 반역을 저지르지 않으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동물들이 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조선을 놀라게 한 요상한 동물들’(박희정 글, 이우창 그림, 신병주 감수, 푸른숲 펴냄)은 기록에 나타난 동물들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한 역사 동화책이자 역사 참고서이다. 딱딱하지 않은 내용에 읽는 재미가 쏠쏠한 역사책이다. 태종 11년에 일본에서 들어온 ‘코에 길다란 살덩이를 매단 괴상한 동물’ 코끼리를 시작으로 중종 4년 농부들에게 분양된 중국에서 수입된 검은 물소, 성종 8년 낮술을 한 잔 걸친 것 같이 얼굴이 발그레한 일본 원숭이, 세종 30년 조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죽어가는 양, 숙종 21년 궁궐에 들어와 신하들을 고민스럽게 만든 낙타 등 다섯 가지 동물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런 식이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던 것이다. 명령을 내려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 5두씩을 소비하였다.(태종 11년 2월 22일)’ 그런데 일본은 조선왕에게 왜 진귀한 코끼리를 선물했을까. 공짜가 아니었다. 일본은 고려대장경을 대가로 받고 싶어했다고 한다. 주변국에서 선물받은 낯선 생명체들을 이 땅에서 적응시키기 위해 애쓰는 선조들의 모습들은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코끼리의 조선시대 이름은 ‘코길이’였다는 대목에서 웃음. 최소한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야 할 코끼리나 물소 등이 삼한사온이 뚜렷한 조선의 겨울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해 보면 이런 동물을 추운 나라에 선물하는 일은 동물학대 같기도 하다. 왕실에서 제사지낼 제물로 매번 중국에서 양을 수입했다는 것도 새삼스럽다. 물소는 세종 때부터 중국으로부터 수입을 꿈꿔왔던 동물이었다. 주몽의 자손들로 활쏘기의 명수인 조선사람들에게 각궁을 만들기 위해 물소뿔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실제로 물소의 대량 수입은 중국 정부의 통제로 불가능했다. 추위에 떠는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싶었던 성종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끝내 포기하는 것을 보면 왕이라고 모든 일을 맘대로 하지 못했던 조선의 모습도 발견한다. 애완동물 기르는 것을 저어했던 조선의 선비들도 18세기에는 앵무새, 비둘기 기르기 유행에 휩싸인다. 부록으로 ‘책 속의 책’으로 조선시대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 조선실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붙어 있다. 이야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겠다. 98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선생님 12명 곗돈 부어 유럽 도서관여행 떠난 까닭은?

    선생님 12명 곗돈 부어 유럽 도서관여행 떠난 까닭은?

    조선 중종 때 어득강이란 늙은 선비는 제발 서점을 허가해 책을 유통하게 해달라는 간곡한 상소를 올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조선은 학문을 숭상해 집현전이나 규장각과 같은 왕실 소속 연구소나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지만, 서점이나 도서관과 같은 기관은 없어 개인이 책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나라가 그러했다. 우리나라의 서점과 도서관 문화가 척박한 현실의 역사적 바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지음, 우리교육 펴냄)는 책읽는 문화가 척박하고 도서관 시스템이 불충분한 우리 현실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독서문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유럽의 도서관을 둘러본 유럽 기행기이자 견문기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의 주상태 중대부중 교사를 비롯한 12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도서관이 가난한 아이든 부잣집 아이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든, 친구에게 인기가 있든 없든 모두를 똑같이 보듬어 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도서관 업무를 자원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렇게 5~6년을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교육환경과 내용이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싸하게 도서관이 꼴을 갖춰가자 아이들 어깨 위에 또 다른 짐을 올려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아이들에게 필독서를 수십 권, 수백 권씩 지정해 읽도록 강요하고, 독서·논술이란 이름으로 국내외 고전과 명작을 줄줄이 엮어 문제가 딸린 요약본을 억지로 삼키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곗돈을 부어 2008년 겨울방학에 유럽으로 12박14일의 여행을 떠났다. 철저하게 국내외 도서관 공부로 무장하고 말이다. 이들의 유럽 탐방은 공공도서관이 발달한 영국 국립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을 시작으로 프랑스 퐁피두 센터와 미테랑도서관·뷔퐁도서관, 이탈리아 성프란체스코 수도원 도서관과 로마도서관·서점을 거쳐, 인구대비 공공도서관이 가장 많다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후겐두벨 서점 등에서 끝난다.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보고 느꼈구나 싶다. 출국 전에 세미나를 가져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던 덕분일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 국립도서관의 모태는 개인 수집가 한스 슬론이 소장품 8만 점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만들어졌다. 자메이카에서 의사로 활동한 그의 수집품은 올바른 방법으로만 수집된 것은 아니겠지만, ‘지식은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영국의 공공도서관은 한 달에 한 차례 동화구연이나 독서클럽 등의 다양한 행사도 연다. 독서에 흥미를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복합문화센터인 프랑스의 퐁피두센터는 무료로 개방돼 있다. 부랑자와도 지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국립도서관인 미테랑도서관은 연간 3.5유로의 회비를 받는다. 지은이들은 충남 안면도의 ‘배바우 도서관’이나 서울 서대문구의 ‘이진아 도서관’, 부산의 구립 금정도서관과 시립시민도서관, 일산의 마두도서관 등을 좋은 도서관으로 꼽는다. 문제는 이처럼 좋은 도서관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도서관의 숫자가 적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파리 시내에는 60개 남짓한 도서관이 있고, 독일은 걸어서 10~1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영국은 상가나 주택가마다 도서관이 있다. 일본은 도쿄 시내에만 350개의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국내 도서관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현재 국내의 공공도서관은 2일 현재 644여개에 불과하다. 부록으로 도서관과 관련한 책의 목록을 붙여놓았다. 1만 30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가기] 잠자던 뭉칫돈 깨어나, 수익찾아 꿈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밑에 생기는 것은 렌터카 업체의 보험 ‘꼼수’ 국회의원들 김연아 짝사랑 G20 정상부인 ‘패션 배틀’ 北 로켓 발사 주말이 D-데이? 한지혜 이태리서 뭐하나
  •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펴낸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펴낸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

    영국의 비평가 겸 사학자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말했다. 서구의 역사는 살상과 약탈, 정복으로 얼룩져 있음을 비유한다. 지난달 프랑스 크리스티 경매장에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 원명원(圓明園)에서 약탈된 동상 2점이 출품됐다. 발끈한 중국은 경매 중단을 요청했고, 프랑스 법원은 이를 기각하는 등 양국간 한바탕 신경전이 벌여졌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유품이 경매에 나와 인도 국민을 분노케 했다. 이처럼 중국과 인도를 비롯해 그리스, 이집트 등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둘러싼 피탈국들의 반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등 일본, 프랑스, 미국 등 국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모두 7만 6000여점에 이른다. ●15년동안 세계 돌며 자료 모아 1978년 외무고시 첫 여성 합격자이자 여성 2호 대사를 지낸 김경임(61) 전 튀니지 대사. 15년 동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약탈 문화재에 대한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여기에 30년 문화 외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얻은 경험을 녹여 최근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클레오파트라의 바늘’(홍익출판사)이라는 책을 펴냈다. 문화재 환수의 해법을 어느 정도 제시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세계 최초의 약탈 문화재 ‘함무라비 법전’과 인류 최초의 인권문서 ‘사이러스 칙령’, 그리고 덴마크로 유출됐다가 아이슬란드로 반환된 ‘레기우스 필사본’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는 “문화재를 약탈해간 유럽은 피탈국들의 반환 요구에 대해 오랫동안 반대논리를 개발해왔다. 우리는 그 논리의 허점을 기술적으로 잘 파고들어야 한다.”면서 “각국의 대응과 반환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세계 문화재 약탈사를 다루게 됐다.”고 했다. 또한 올해 말에는 우리나라 문화재 약탈사를 다룬 제2권을 펴내는 등 앞으로 우리의 문화재 환수운동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언제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까. -1990년대 파리 유네스코 주재 한국대표부에 근무하면서였지요. 국제사회가 문화재 반환청구국과 반대국가로 양분돼 치열한 외교전을 치르며, 자국의 문화재 수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이러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틈틈이 집필을 했지요. ●“일본의 약탈 관행·입장 등 간파해야” →문화재를 찾기 위한 해법은 어떤 것인가요. -요즘 국제사회는 문화재의 윤리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약탈의 경우 불법성과 비윤리성 때문에 반환운동에 도덕성이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지요.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를 인류공동의 문화재라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그게 말이 됩니까. 프랑스가 조선왕실의 의식과 행사를 기록한 문서를 해독하고 연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환요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그들의 약탈 관행이나 현재 입장 등을 간파하면서 적절히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문화재 반환운동은 어떻게 전개해야 합니까. -그리스는 180년 넘게 문화재 반환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단기간이 아닌, 대를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문화재란 그 나라 국민들의 인격체입니다. 잘려지고 흩어진 것들을 원래대로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화재가 경매로 나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그는 1974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미 오하이오주립 애크론 법대에서 수학했으며, 1978~2007년 도쿄·뉴욕·파리·뉴델리·브뤼셀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지금은 문화재 반환문제와 관련된 초청 강의를 틈틈이 나가고 있다.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은밀히 새긴 ‘황제어새’ 고종황제의 혼 오롯이

    은밀히 새긴 ‘황제어새’ 고종황제의 혼 오롯이

    ■ 되찾은 ‘대한제국 국새’ 의미 1897년 10월12일 조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황제국에 걸맞은 지위와 화려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2년 전 황비(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고종은 여전히 러시아와 일본, 중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경국(傾國)의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고종은 나라를 사실상 빼앗긴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열강의 황제·군주에게 적지않은 친서를 보냈는데 대부분 품에 지니고 있던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찍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17일 공개한 국새가 바로 이 ‘황제어새’다. 따라서 고궁박물관이 이 국새를 되찾은 것은 단순히 조선시대 국새를 하나 더 갖게 된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즉위 후 만든 13개에 포함 안돼 고종 13년(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도 대부분 녹아버리거나 손상됐다. 이에 따라 고종은 소실된 옥새와 인장을 새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의 상세한 제작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 보인다.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비롯한 새로운 보인은 그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작됐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대한제국의 선포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이때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 13과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교문서에 쓴 비밀국새는 2개? 하지만 황제어새는 이 기록에 들어 있지 않다. 국새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은밀히 추진해야 했던 고종의 위기의식과 절박함을 황제어새는 보여주고 있다. 비밀로 남았던 황제어새는 이처럼 제작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누가, 언제, 어떻게 해외로 반출했는지조차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궁박물관이 고종의 친서에 사용한 국새를 판별한 결과 두 종류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을 박물관은 ‘제1유형 국새’(1903~1906년 사용)와 ‘제2유형 국새’(1905~1906년 사용)로 구별했다. 활자체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두 국새에는 모두 ‘황제어새’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제1유형 국새’로 확인됐다. 두 과의 비밀 어새가 존재했던 셈이다. 고궁박물관은 이번에 공개한 비밀 국새가 만들어진 시기와 관련해서는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 5년 11월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위감정 절차와 환수의 의미 문화재청은 이번에 전각, 금속공예, 서체, 매듭 등 각 분야별로 10명에 이르는 평가위원을 따로따로 불러서 국새의 진위를 감정했다. 일반적으로 중요문화재라 하더라도 3명 정도의 평가위원회를 구성하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국새의 재질 분석, 활자 비교, 국사편찬위의 유리원판 사진 비교 등의 과정을 거쳤다. 국새의 제작 관련 문헌이 없는 상황인 만큼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국새 구입의 실무를 추진한 정계옥 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은 “10명의 위원 중 매듭을 감정한 분만 상중하에서 ‘하’ 판정을 내렸을 뿐 나머지 위원은 모두 틀림없는 진품으로 감정했다.”고 말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원수보(국방 관련용 국새), 제고지보(고급 관리 인사 때 쓰는 국새), 칙명지보(칙령을 내릴 때 쓰는 국새) 등 3과의 국새는 관련 제작 문헌(대례의궤)이 존재하지만 사용된 문서가 없는 데 반해 고종의 비밀 국새는 제작 관련 문헌은 없지만 사용된 문서가 존재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는 앞으로 국보 지정 절차를 밟은 뒤 덕수궁 석조전이 복원되면 고종 관련 전시에 활용할 계획”이라면서 “환수된 국새는 대한제국기의 정치, 사회, 왕실상 등 학술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박록삼 강병철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디카로 보는 한양] (1) 한양정도(漢陽定都)와 궁궐(宮闕)

    [이종원 선임기자 디카로 보는 한양] (1) 한양정도(漢陽定都)와 궁궐(宮闕)

    500여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서울’. 거기엔 세계 어느 고도(古都)에 견주어 뒤지지 않을 만큼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유서 깊은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미미하고 통속적이었던 탓에 서울의 전통과 역사가 점점 사라지고, 잊혀져 가고 있다. 문화재는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고 한다. 전통문화의 정수인 ‘서울의 문화재’를 첨단과학의 총아라고 불리는 디지털 카메라에 하나하나 담아 봄으로써 정도 600년을 넘긴 도시 서울의 현대적 의미, 옛 선인들의 삶과 철학 등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초등학교 시절이던 1960년대 중반 혜화동이 종점이던 전차를 타고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던 추억이 아련하다. “리쿠사쿠(Rucksack·륙색의 일본식 발음) 잘 챙겨라.” 어머니가 끈 달린 소풍 물통을 어깨에 메어 주시며 김밥 가방을 잘 간수하라고 소리치신다. 선생님은 옛 왕실의 생활과 옛 건축기술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사람도 많고 볼거리가 많은 고궁에서 아이들은 한눈을 팔기가 일쑤였다. 구름다리 건너 종묘로 가서 도시락을 까먹고 비원(秘苑)으로 불리던 창덕궁을 볼쯤이면 모두가 기진맥진이다. 어릴 적 소풍의 단골 코스였던 궁궐에 대한 기억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웅지를 펼칠 궁궐로서 경복궁을 짓기로 한다. ‘경복(景福)’은 태평성세를 임금과 백성이 함께 오래도록 누리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으로서 건국 의지와 유교사상의 왕도(王都) 정신 등이 가장 잘 구현된 궁입니다.” 서울시 문화재과 김수정 학예사(40)는 경복궁은 조선시대 국가권력 그 자체였다고 설명했다. 궁은 임금이 정사를 돌보며 생활하는 법궁(法宮)과 화재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어놓은 이궁(離宮)으로 나눈다. 임진왜란 이전엔 경복궁이 법궁, 창덕궁·창경궁이 이궁이었다. 이후엔 창덕궁·창경궁이 법궁이고 경희궁이 이궁이었다. 궁궐은 신전 등 종교건축과 더불어 규범과 격식을 갖춘 당대 최상의 건축물이다. 건물들은 유교의 법식과 입지 지형을 최대한 고려해 지어졌으며,저마다 쓰임새가 달랐다. 김 학예사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이 일반적인 양식”이라고 말한다. 정무공간이 앞에 오고, 생활 건축물은 뒤편에 배치하는 식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서울에 남은 궁궐은 일제 통치와 왜곡된 근대화로 인해 그 규모와 형태가 많이 훼손, 변질된 상태이다. 다행히 헐렸던 전각들이 다시 서고 경복궁 전면부의 궁장(宮墻)을 복원, 광화문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아쉬움도 있다. 전문가들은 경복궁의 망루인 동(東)· 서(西)십자각이 모두 복원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의 궁궐은 중국의 자금성이나 일본의 황거처럼 위압적이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왕조라는 전체주의적 의식구조 속에서도 자연을 의식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규모와 비례에도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궁은 조선왕조가 성취한 최고급 문화의 결정체이다. 이러한 궁궐이 서울 도심 곳곳에 있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최상의 왕실문화를 접하고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아무쪼록 고궁 나들이를 하며, 저마다 한번쯤 왕이 되는 꿈을 꿔보면 어떨까. jongwon@seoul.co.kr
  • [익산 미륵사지 유물 출토] 미륵사는 백제 최대규모 사찰

    익산 미륵사는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절터 크기만 1338만 4699㎡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설화에 이어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 창건작업을 도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전한다. 하지만 창건 주체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밝혀짐에 따라 미륵사는 신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공산이 커졌다. 당시에는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의 전쟁도 빈번했다. 익산에는 백제의 궁터로 추정되는 왕궁평성과 이를 외곽에서 호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금산성과 미륵산성, 저토성, 그리고 왕실기원사찰로 알려진 제석사터 등 많은 백제 유적이 남아 있다. 이번 조사에 따라 의구심이 커졌지만,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쌍릉도 있다. 학계에서는 특히 원광대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놓고 백제의 천도설(遷都說)과 별도설(別都說) 등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우선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근거해 무왕이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설이 있다. 또 무왕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인 익산이 수도였다기보다는 수도와 동일한 행정구역인 별부(別部)로 편성되어 수도의 일부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미륵사의 규모는 새로운 수도에 세워진 왕실사찰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왕이 익산 왕궁리에 왕궁을 세우고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천도를 계획했으나, 사비(부여)지역을 근거로 한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천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에 백제의 천도와 관련된 정보가 담겨 있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새로 밝혀진 미륵사의 창건 연대인 639년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제석사의 창건 연대와 같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장 천도설 등을 밝혀줄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연구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익산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고려왕실 명품 290점 ‘천년의 비취빛’ 뽐내다

    고려왕실 명품 290점 ‘천년의 비취빛’ 뽐내다

    고려 청자의 으뜸가는 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국보 제94호 참외 모양 병은 고려 제17대 임금인 인종(재위 1122~46)의 장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다.개성 주변일 것으로 추측될 뿐 장릉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1916년 도굴꾼과 결탁한 일본인 골동품상이 조선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긴 일괄 유물 가운데는 인종의 시책(諡冊)이 포함되어 있었다.시책이란 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올릴 때 여러 장의 판에 시호와 생전의 덕행을 새겨 책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이 유물이 인종 장릉의 부장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참외 모양 병 등 일반에 처음 공개  국립중앙박물관이 2일부터 미술관 테마전 ‘고려 왕실의 도자기’를 펼친다.참외 모양 병과 ‘황통(皇統) 6년’(1146년)이라는 명문이 뚜렷한 시책을 비롯하여 청동 내함과 석제 외함은 지금까지 한번도 일반에 소개된 적이 없는 유물이다. 내년 2월1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는 12세기부터 13세기 전반에 이르는 고려시대의 왕실 도자기 290점이 대거 선을 보인다.19대 명종의 지릉,21대 희종의 석릉,22대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의 곤릉(坤陵),24대 원종 비인 순경태후의 가릉,그리고 고려시대의 왕립호텔격인 파주 혜음원 터 등에서 출토된 도자기가 체계적으로 정리된다.고려 청자의 최고 명품이 망라되었다고 보면 된다.개성과 강화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참외 모양 병을 비롯하여 국보 4점과 보물 2점이 포함됐다. 인종의 시책은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넓은 판(33×8.5×2.5㎝) 2점과 단정한 해서체 글귀가 새겨진 길쭉한 막대 모양의 판(33×3×2.5㎝) 41점,부서진 조각 7점으로 구성돼 있다.인종 시책의 재질은 당초 옥으로 알려졌으나 분석 조사 결과 대리석의 일종인 방해석(方解石)으로 드러났다. ●왕실 가마서 출토된 파편도 전시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려의 왕실용 도자기를 제작했던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도 최초로 복원하여 일반에 처음으로 소개한다.강진은 신증동국여리승람에 고려시대 자기소가 있었다고 기록된 곳이다. 특히 강진에서는 인종 장릉에서 나온 참외 모양 병과 똑같은 청자 조각이 발견되어 왕실 도자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부안 유천리의 청자도 명종 지릉과 희종 석릉,파주 혜음원 등의 출토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3일 오후 3시에는 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강사로 나서는 특별학술강연회가 열린다.현장에서는 2일 오후 5시 전시설명회,3일 오후 5시10분 전시실 설명,17일 오후 7시30분 큐레이터와 대화가 각각 열려 일반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왕실과 대신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성(出城)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척화신 가운데 누구를 뽑아, 몇 명을 보낼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사신을 보내 인조의 신변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으려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척화신을 ‘낙점’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出城을 결정하고 三學士를 ‘낙점’하다 1월27일 김신국과 이홍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이전에 가져갔던 국서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臣)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머뭇거렸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스스로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만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300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국서의 내용은 공순하고 처절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가겠다고 ‘굴복 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던 ‘호소’는 사라지고 대신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상황에서 출성을 거부하고 버틸 여력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결을 시도하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鄭蘊)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출성을 약속했음에도 청군은 포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조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처절하고 황망한 분위기 속에서 인조와 대신들은 청군 진영으로 보낼 척화신의 숫자를 조율했다. ‘홍익한만을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강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열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묶어 보낼 대상자로 김상헌, 정온, 윤황(尹煌), 윤문거(尹文擧),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김수익(金壽翼), 김익희(金益熙), 정뇌경(鄭雷卿), 이행우(李行遇), 홍탁(洪琢) 등이 거명되었다.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뺄 것인가? 이 ‘불인지사(不忍之事)’를 둘러싼 논란 끝에 오달제와 윤집 두 사람만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들 두 사람과 당시 남한산성에 없었던 홍익한을 가리켜 보통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홍타이지, 항복 조건을 제시하다 1월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詔諭文)을 가지고 왔다. 조유는 ‘그대는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 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향후 인조와 조선이 준수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맨 먼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명 황제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반납하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하라고 했다. 조선의 ‘상국(上國)’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이어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질들을 붙잡아 놓음으로써 조선의 ‘변심’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향후 자신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도 보병, 기병, 수군을 동원하여 원조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자신이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가도( 島)를 공격할 계획임을 밝히고, 조선이 전함 50척과 수군을 내어 동참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군과 화기수(火器手)를 조선으로부터 보충하여 명을 공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성절(聖節), 정조(正朝), 동지(冬至), 중궁천추절(中宮千秋節), 태자천추절(太子千秋節) 등 청나라와 관련된 경조사가 있을 때는 대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심양으로 오는 사신이 지참하는 외교 문서의 형식, 조선에 오는 청 사신에 대한 의전과 접대 절차 등은 한결같이 과거 명나라에 행했던 구례(舊例)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포로와 관련된 이 조항은 훗날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된다. 홍타이지는 그 밖에 조선이 해마다 바쳐야 할 세폐(歲幣)의 수량을 제시한 뒤,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조선의 성들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조선에 사는 우량허(兀良哈) 사람들을 쇄환할 것’,‘일본과의 무역을 계속 하고 그들의 사신을 심양으로 인도해 올 것’ 등의 조건도 같이 내 걸었다. 홍타이지가 제시한 항복 조건은 조선에 대해 이중 삼중의 그물을 쳐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건’을 따를 경우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유시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 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청은 조선의 항복을 코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역공을 취했던 것이다. ●오달제와 윤집을 적진으로 보내다 1월28일 저녁, 인조는 하직 인사를 하러 온 오달제와 윤집을 만났다. 인조는 두 사람을 보자 목이 메었다. ‘그대들의 본 뜻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구나.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인조는 결국 오열했다. 임금으로서 자신의 신하를 붙잡아 적진에 보내고, 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담함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윤집은 오히려 인조를 위로했다. ‘이러한 시기에 진실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오달제는 의연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다만 전하께서 성을 나가시게 된 것이 망극합니다. 신하된 자로서 지금 죽지 않으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인조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울음 섞인 소리로 자책과 회한,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인조는 오달제와 윤집에게 가족 사항을 물은 뒤, 자신이 그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술을 내렸다. 이별주였다. 술을 다 마시기도 전에 승지가 아뢰었다. 사신들이 두 사람을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직을 고하는 두 사람에게 인조는 울면서 꼭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출성을 코앞에 둔 남한산성의 밤이 슬픔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국립박물관 ‘알차고 풍성한’ 진화

    국립박물관 ‘알차고 풍성한’ 진화

    박물관이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문화재 등 유물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술심포지엄과 강연회, 음악회, 전시 설명·교육프로그램 등 다채로운 행사를 곁들여 대중에 다가가고 있는 것.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이 대표적인 곳으로 꼽힌다. ●‘토요 가족음악회´ 곁들여 국립중앙박물관은 2일부터 새달 6일까지 ‘가을,秋-유물 속 가을 이야기’전을 열면서 전시설명 프로그램인 ‘큐레이터와의 대화’와 음악한마당을 함께 진행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새달 2일까지 한·중·일 3국 장황(粧潢·표구)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전을 열면서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도 새달 23일까지 특별전 ‘新羅, 서아시아를 만나다’와 함께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서아시아 여행’을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을,秋-유물 속 가을 이야기’전은 가을을 주제로 한 산수화와 꽃그림, 가을 농가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은 풍속화 등 140여점을 선보인다. 김홍도의 ‘벼 타작’, 조선 정조 임금의 ‘국화도’, 심사정의 ‘국화와 풀벌레’, 김득신의 ‘갈대와 기러기’ 등이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 이와 함께 매주 수요일 전시 내용을 소상히 일러주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대중 가요와 퓨전 재즈가 어우러지는 ‘토요가족 음악회’도 곁들여져 가을 정취를 돋운다. ●‘일본 족자 역사´ 특별 강연 한·중·일 문화셔틀 사업의 하나로 열리는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전은 한국 장황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선 왕실의 의장품과 서화 유물, 중국 청나라의 격조 높은 예술품,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일본 서화 등 3국의 장황 문화재가 한곳에 모이는 전시장. 두루마리(교명과 공신교서), 족자(어진과 능비탁본), 첩(어필과 궁중목록), 책, 병풍 등을 통해 장황의 다채롭고 화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국내 유물로는 국보 제131호 ‘조선태조 호적원본’을 비롯해 보물 제931호 ‘조선 태조 어진’, 왕실 족보인 ‘선원록’ 등이 전시된다.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청나라 강희제의 초상 ‘강희편복사자상(康熙便服寫字像)’과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의 ‘대마도 종가(宗家) 문서’ 두루마리 등이 출품된다. 특별전과 함께 오는 17일 오카 이와타로 국보수리장황사연맹 이사장이 ‘일본 족자의 형태와 역사’를 주제로, 김경미 문화재청 학예연구사가 ‘조선 왕실의 장황’을 주제로 한 특별 강연회도 연다. ●‘신라·서아시아 교류´ 국제토론회 국립경주박물관의 ‘新羅, 서아시아를 만나다’전은 서아시아 지역의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신라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유물이 선보인다.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국보 제193호) 등 110여점의 신라 문화재와 일본의 미호뮤지엄 등이 소장하고 있는 서아시아지역 문화재 49점이 전시된다. 9∼10일 국내 및 이란, 카자흐스탄, 중국, 일본 학자들을 초청해 신라·서아시아의 문화교류 양상을 살펴보는 국제학술 심포지엄도 열린다.3∼5일에는 신라와 서아시아간의 문화교류에 대해 설명하는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함께 떠나는 서아시아 여행’을 진행한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조선왕실의궤 즉시 반환” 日에 촉구

    “조선왕실의궤 즉시 반환” 日에 촉구

    남북 불교계가 조선왕실의궤의 조속한 반환을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등 약탈문화재 반환 공조에 나섰다. 남북 불교계의 이같은 공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색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지난 5일부터 4박5일간 북한을 방문,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 인사들과 접촉하고 돌아온 불교방북단은 13일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 공동합의서를 채택했다.”며 “문화재 반환의 원활한 공조를 위해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장소에서 실무접촉을 갖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인묵 스님(조계종 25교구본사 주지), 법상 스님(조계종 운흥사 주지),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회장, 김원웅 전 의원을 공동단장으로 한 이번 방북단은 조계종 중앙신도회, 문화재제자리찾기, 조선왕실의궤환수위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북측의 조불련 중앙위원회와 조불련 전국신도회 초청으로 방북했었다. 방북단에 따르면 남북 불교계는 조선왕실의궤 반환과 관련,“일본의 조선강점기인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출되어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의궤에는 조선강점 당시 암살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가 포함되어 있다.”며 “이런 비극적인 시해사건과 관련한 장례기록이 아직도 일본왕실 소유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고 밝혔다. 양측은 특히 1965년 한일 수교조약 체결당시 ‘국유문화재는 원칙적으로 돌려 주겠다.´는 일본정부의 원칙에 따라 일본 궁내청 소장 도서 852책이 반환된 전례가 있고 2002년 조일평양선언에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북측과의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문화재 문제를 성실히 협의키로 약속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왕실의궤의 즉시 반환을 촉구했다. 남북 불교계는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독도문제와 관련해서도 한 목소리를 냈다고 방북단은 전했다. 남북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단호히 규탄한다.´는 제목의 남북불교도공동성명을 통해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강탈 책동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의 옛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재침 야망이 구체적인 실천단계에 들어섰음을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이라며 “남북 불교도는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애국애족의 실천행을 줄기차게 벌여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Beijing 2008] 李대통령·김영남 말없이 악수만

    [Beijing 2008] 李대통령·김영남 말없이 악수만

    이명박 대통령과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 8일 중국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날 낮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후진타오 중국주석 주최 환영 리셉션에서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악수만 했을 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청와대 측은 전했다. 두 사람은 원형테이블에 우방궈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중심으로 이 대통령은 오른쪽으로 3번째, 김 위원장은 왼쪽으로 3번째에 앉았다. 당초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사각형 테이블에 6명의 참석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측이 테이블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해 한때 두 사람의 조우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같은 테이블에 배치된 두 사람은 오찬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베이징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도 마주쳤다.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세 자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개막식을 관람했다. 오찬에는 후 주석을 비롯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 등 100여개국의 국가원수와 행정수반, 왕실 대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개막식에는 청와대에서 김성환 외교안보수석과 박병원 경제수석, 이동관 대변인, 김창범 의전비서관, 김재신 외교비서관, 김휴종 문화체육관광비서관 등이 수행했으나, 입장권 확보가 어려워 일부 수행원은 이 대통령과 떨어져 개막식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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