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 왕실
    2026-03-09
    검색기록 지우기
  • 자격증
    2026-03-09
    검색기록 지우기
  • 성공회
    2026-03-09
    검색기록 지우기
  • 영업이익
    2026-03-09
    검색기록 지우기
  • 좀비
    2026-03-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67
  • “7~19세기 국내 축성술 변화·동아시아 건축 교류 증거”

    “7~19세기 국내 축성술 변화·동아시아 건축 교류 증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의 가치는 ‘비상시의 왕궁’이라는 데 방점이 찍혔다. 임진왜란(1592~1598)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국가전란 시 왕실과 조정의 명운을 보장하는 임시 수도의 역할을 했다. 또 방어력을 갖춘 산성도시로서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왕궁이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장인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일상적인 왕궁과는 별개 산성이면서도 전란 때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곳은 남한산성 외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남한산성은 그 원류를 찾아가면 백제 온조왕 때 왕성과 통일신라 시대 주장성에 잇닿는다. 그러다 1624년 인조 때 뒤로 굽어지는 ‘굽도리 방식’의 산성으로 탈바꿈했다. 18세기 영·정조 때는 석재 중간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 지지력을 높였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포좌와 포대를 만들었다. 이들 성벽은 시기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는 “남한산성은 7~19세기에 이르는 국내 축성술의 발달 단계와 무기체계의 변화상을 잘 드러낸다”면서 “동시에 16~18세기 동안 전란을 거치며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남한산성이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라는 점과 축조와 운용 과정에서 사찰과 승려가 동원된 점 등에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의 기념물 외에 남한산성 소주와 같은 유·무형유산 10점이 곳곳에 자리한다. 아울러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현대 도시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점도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을 등재하는 기준은 ‘유적이 얼마나 잘 보존돼 있는지’와 ‘역사성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 ‘현대인의 삶과 얼마나 잘 조화되느냐’ 등이다. 여기에 인류의 보편 가치까지 강조된다. 이를 포괄하는 것이 ‘세계유산협약의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으로 남한산성은 특정 기간·지역 내에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발달 단계를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로 꼽힌다. 경기 광주시 중부면에 자리한 남한산성은 2009년 6월 세계유산 등재 잠정목록 후보로 선정된 뒤 지난해 1월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가 제출됐다. 지난 4월에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씨줄날줄] 식민사관 논란/문소영 논설위원

    사관(史觀)은 역사적인 현상을 파악해서 이를 해석하는 태도와 입장을 말한다. 1910년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을 맞은 뒤로 한국의 역사해석은 예민하고 까다롭다.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공부했고, 일본인 교사에게도 배웠다. 이때 조선인은 어떤 내용을 배웠을까. 일본은 조선과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웠으나 현실은 식민지배자로서의 일등 국민 일본인과, 피지배자로서의 이등 국민인 조선인을 나누고 차별을 당연시했다. 일본이 조선을 쉽게 지배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은 열등한 민족이란 인식을 의식·무의식에 심은 것이다. 이른바 ‘식민사관’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거나 ‘조선인은 단결할 줄 모른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신의 뜻’,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허송세월하다 망했다’는 식의 왜곡과 망언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식민사관의 대척점에 민족주의 사관이 놓여 있다. 대한제국이 망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신채호, 박은식이나 정인보와 같은 학자·언론인들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역사왜곡에 대항해 조선 민족의 우수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특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던 박은식은 ‘동명성왕실기’, ‘한국통사’를 쓰며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에릭 홉스봄과 같은 서양 학자들은 민족이란 근대국가들이 탄생하면서 만든 허구이자 가상의 공동체로서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민족적 전통도 불과 100~200여년 전의 역사를 가진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독립한 나라들에서 민족이란 ‘가상·허구의 공동체’가 아니라 핍박과 고통을 함께 견디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함을 스스로 입증한 집단으로 공고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제국주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이웃나라가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각국 보수의 철학적 기반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자국민이 너무나 우수하고 뛰어나다고 미화하기 바쁘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자국민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 발언의 기초도 일제의 식민사관과 그대로 일치하기 일쑤다. 책임총리로 최근 박근혜 정부가 지명한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발언처럼 말이다. 요즘 사회문화 코드로 ‘의리’가 유행이다. 의병·독립운동가에게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과연 대한민국 총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총리가 아닌 대한민국의 총리가 되려면 마땅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헌법 전문의 정신에 합당할 만한 역사의식과 정치철학, 한민족적 기상을 지녀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일본 노리코 공주, 15살 연상인 ‘신관’과 결혼, “일본 들썩들썩”

    일본 왕실의 25세 공주가 올가을, 15세 연상인 신관(神官)과 결혼식을 올린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최대 화제다. 신관은 신사(神社)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왕족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비(妃)의 둘째 딸 노리코(典子·25) 공주가 시마네(島根)현의 유명 신사인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신관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40)와 곧 약혼한다고 발표했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5촌이다. 일본에서 왕족 결혼은 2005년 아키히토 일왕 장녀인 구로다 사야코(黑田清子) 이후 9년 만이다. 노리코 공주는 3년 전 왕족이 많이 다니는 도쿄의 명문 가쿠슈인(學習院)대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이나 취직하지 않은 채 왕족 행사에 참석하는 등 공무만 봐왔다. 예비 남편 센게는 이즈모타이샤의 최고위 신관인 센게 다카마사(千家尊祐·71)씨의 장남이다. 일본에서 미에(三重)현 이세신궁(伊勢神宮)과 함께 신사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이즈모타이샤에서 센게 집안은 대대로 ‘신 중의 신’이자 ‘인연을 맺어주는 신’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大神)의 제사를 책임지고 있다. 두 가문은 노리코 공주의 아버지이자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高円宮憲仁)가 2002년 사망하기 전부터 가깝게 지냈다. 노리코 공주의 센게 만남은 대입 직후인 2007년 4월 어머니와 함께 이즈모타이샤를 참배했을 때다. 이후 양가 교류 속에 가까워진 두 사람은 결혼을 추진해왔다. 노리코 공주는 센게에 대해 “서글서글하고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건강하며 밝고 즐거운 가족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센게도 “따뜻함, 부드러움이 처음부터 인상에 남았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모의 25살 일본공주와 결혼하는 15살 연상男 직업 알고보니…

    일본 왕실의 노리코(25) 공주가 15살 연상의 신관과 결혼을 발표했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노리코 공주가 신사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돌보는 신관 센게 구니마로(40)와 약혼한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고(故) 다카마도 왕자의 딸이다. 일본 왕실은 지난 2005년 아키히토 일왕의 장녀인 사야코 공주와 공무원인 구로다의 결혼식 이후 9년만에 경사를 치르게 됐다. 하지만 왕실전범에 따라 노리코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신분에서 제외된다. 일본 왕실에서는 현재 3명의 왕자만이 왕위 계승 자격을 갖고 있고, 7명의 공주는 일반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노리코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한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다시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모의 일본공주, 15살 연상 신관과 약혼…알고보니 18살때부터 ‘충격’

    미모의 일본공주, 15살 연상 신관과 약혼…알고보니 18살때부터 ‘충격’ 일본 왕실의 노리코(25) 공주가 15살 연상의 신관과 결혼을 발표했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노리코 공주가 신사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돌보는 신관 센게 구니마로(40)와 약혼한다고 전했다. 결혼식은 올 가을 이즈모타이샤 신사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고(故) 다카마도 왕자의 딸이다. 즉 아키히토 일왕의 5촌 조카다. 노리코 공주는 도쿄의 명문 가쿠슈인 대학을 졸업한 뒤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왕족 행사에 참석해 왔으며, 악혼자 센게는 이즈모타이샤의 최고위 신관인 센게 다카마사(71)씨의 장남이다. 노리코 공주는 18살인 지난 2007년 어머니와 함께 이즈모타이샤를 참배하면서 센게와 인연을 맺었다. 두 가문은 노리코 공주의 아버지인 다카마도 왕자가 2002년 사망하기 전부터 가깝게 지낸 것으로 전해져 차근히 결혼을 추진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왕실은 지난 2005년 아키히토 일왕의 장녀인 사야코 공주와 공무원인 구로다의 결혼식 이후 9년만에 경사를 치르게 됐다. 하지만 왕실전범에 따라 노리코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신분에서 제외된다. 일본 왕실에서는 현재 3명의 왕자만이 왕위 계승 자격을 갖고 있고, 7명의 공주는 일반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노리코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한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다시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일본 공주 결혼에 열도 들썩…25세 노리코 공주 결혼 상대는 40세 신관

    ‘일본 공주 결혼’ ‘노리코 공주’ 일본 공주 결혼 발표 소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일본 왕실의 노리코(25) 공주가 15살 연상의 신관과 결혼을 발표했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노리코 공주가 신관 센게 구니마로(40)와 약혼한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고(故) 다카마도 왕자의 딸이다. 신관은 신사(神社)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일본 왕실은 지난 2005년 아키히토 일왕의 장녀인 사야코 공주와 공무원인 구로다의 결혼식 이후 9년 만에 경사를 치르게 됐다. 하지만 왕실전범에 따라 노리코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신분에서 제외된다. 일본 왕실에서는 현재 3명의 왕자만이 왕위 계승 자격을 갖고 있고, 7명의 공주는 일반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노리코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한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다시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센게에 대해 “서글서글하고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건강하며 밝고 즐거운 가족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센게도 “따뜻함, 부드러움이 처음부터 인상에 남았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모의 일본공주, 15살 연상 신관과 결혼…공주·신관 얼굴 보니

    미모의 일본공주, 15살 연상 신관과 결혼…공주·신관 얼굴 보니 일본 왕실의 노리코(25) 공주가 15살 연상의 신관과 결혼을 발표했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노리코 공주가 신사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돌보는 신관 센게 구니마로(40)와 약혼한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고(故) 다카마도 왕자의 딸이다. 일본 왕실은 지난 2005년 아키히토 일왕의 장녀인 사야코 공주와 공무원인 구로다의 결혼식 이후 9년만에 경사를 치르게 됐다. 하지만 왕실전범에 따라 노리코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신분에서 제외된다. 일본 왕실에서는 현재 3명의 왕자만이 왕위 계승 자격을 갖고 있고, 7명의 공주는 일반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노리코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한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다시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리코 공주, 40세 신관과 결혼 발표…일본 공주 결혼 첫 만남은 18세

    ‘일본 공주 결혼’ ‘노리코 공주’ 일본 공주 결혼 발표 소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일본 왕실의 노리코(25) 공주가 15살 연상의 신관과 결혼을 발표했다. 일본 궁내청은 27일 노리코 공주가 신관 센게 구니마로(40)와 약혼한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인 고(故) 다카마도 왕자의 딸이다. 신관은 신사(神社)에 종사하며 제사 등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노리코 공주가 18세 때 센게의 집안이 관리하는 신사를 참배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일본 노리코 공주의 결혼 발표는 2005년 아키히토 일왕의 장녀인 사야코 공주와 공무원인 구로다의 결혼 발표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왕실전범에 따라 노리코 공주는 결혼과 동시에 왕족 신분에서 제외된다. 일본 왕실에서는 현재 3명의 왕자만이 왕위 계승 자격을 갖고 있고, 7명의 공주는 일반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 현지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노리코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한 후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논의가 다시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노리코 공주는 센게에 대해 “서글서글하고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건강하며 밝고 즐거운 가족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센게도 “따뜻함, 부드러움이 처음부터 인상에 남았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국가개조는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가개조는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대통령이 어느 날 국무회의에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읽어 보기를 권했다고 한다. 1995년 4월 미국 오클라호마 시에서 발생한 연방정부 청사 폭파사건을 계기로 하버드대 조셉 S 나이 교수팀이 쓴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라는 책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왜 정부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고 있는지를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추적한 이 책은 경제정책의 실패와 부정부패로 인한 도덕성 상실, 개인주의적 성향과 몰가치적 현상, 정부업무의 효율성 저하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정보기술(IT) 기술 발달에 따른 정보접근성 확대와 국민의 기대와 욕구의 증가도 정부에 대한 신뢰 하락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뿐만 아니라 대기업, 대학, 의료계, 언론계 등 주요 기관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30년 전에 비해 반 토막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특히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각국 정부신뢰도 조사결과 한국 국민의 23%만 정부를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4개 회원국과 러시아·브라질을 포함한 36개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스위스 국민의 정부 신뢰도가 77%로 가장 높았고 OECD 회원국 평균은 39%였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24.8%에서 올해는 더 하락했다. 세월호 참사로 정부에 대한 신뢰는 더는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 정부 불신뿐만 아니라 이번 참사로 한국 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이 낱낱이 드러나 국민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개조를 천명한 것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을 반영한다. 현재 거론되는 국가개조의 요지는 국가안전처를 신설해 안전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편하고,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난 ‘관피아’ 개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얼마나 성공할지 국민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때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과 인력을 보강해 국민 안전을 최우선시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고 정보의 공유와 공개를 통해 유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어 ‘정부3.0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관료조직의 카르텔이 얼마나 견고하고 촘촘히 얽혀 있는지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역대 대통령들도 국가개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한국창조’를 위해 ‘한국병’을 고치겠다고 칼을 빼들었지만 임기 후반에는 측근 비리와 관료들에 포획되어 국가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제2건국’을 내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가개조론도 관료주도의 개혁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4대강 사업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개조론’에 빗대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강산개조론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최근 한국사회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민초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과 맞섰고, 구한말 왕실과 위정자들의 무능과 부패에 분개해 국가의 존엄을 되찾겠다고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주체도 민초들이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고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섰고, 태안 앞바다의 기름을 닦아낸 것도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직과 시스템을 점검하고 책임자를 엄벌해야 한다. 국가개조 수준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와 시스템을 작동하고 매뉴얼을 실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세월호 참사는 위기관리시스템의 부재나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절차보다는 이익만 추구하려는 성장 지상주의와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그래서 국가개조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 시민단체, 교육계, 종교계가 나서 인간존중과 신뢰회복을 위한 국민의식 개혁운동을 벌여야 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시민정신과 공동체의식이 뿌리내릴 때에야 비로소 국가개조가 성공할 수 있다.
  •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아라이 신이치 지음/이태진·김은주 옮김/태학사/256쪽/1만 5000원2011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가 89년 만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도서가 145년 만에 돌아왔다. 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에 약탈된 우리 문화재의 소재가 확인돼 우리 정부가 요구하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 책임 문제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아온 아라이 신이치 일본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겸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가 조선 말기와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의 문화재에 관해 쓴 책이다. 원제는 ‘식민주의와 문화재-근대 일본과 조선을 통해 생각한다’. 그는 2011년 4월 조선왕실의궤 등 귀중 도서 반환에 관한 한·일 협정을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가 심의할 때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반환 문제는 식민지 지배 청산을 위한 기본틀이며, 역사자료 등 문화재는 그것이 태어난 환경이나 배경에 두어야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조선왕실의궤도 조선왕조 문화의 상징으로서 원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진술했다. 저자는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 어떻게 시작됐고 진행됐는지를 추적했다. 첫 무대는 1875년 9월 강화도였다. 그때 일본은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의 지휘 아래 조선의 귀중 도서들을 노획해 갔다. 이후 1894년의 청일전쟁에 편승해 일본은 궁중의 재화와 보물들을 마구 약탈했다. 일본 궁중 고문관 겸 제국박물관 총장인 구키 류이치는 전시 문화재 수집 지침을 정부와 육해군 고관들에게 전달했다. 평시에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명품을 얻을 수 있으며, 평시에 비해 중량 있는 물품을 운반할 방법이 있다는 등 군이 주도하는 문화재 약탈의 이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일본의 학계와 정치인, 군이 일체가 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문화재 약탈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일제의 목표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미술품까지 약탈, 수집함으로써 ‘동양미술 유일의 대표자’ 지위에 서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인 1894년 7월 23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궁중의 재화, 보물, 역대 제왕의 진기한 물건이나 법기(法器), 종묘의 주기(酒器)류를 모조리 챙겨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조선이 수백년간 축적해 온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간 것이다. 개성과 강화 부근의 고려 고분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파헤쳐졌고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를 포함한 고미술품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뒤 발군의 것들을 골라 일왕에게 갖다 바쳤다. 오사카에는 조선에서 나온 고물(古物)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일제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는 우량(雨量) 측정기인 측우기를 일본으로 빼갔다. 이후 1923년 이 측우기는 영국에 기증돼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가 학술조사라는 이름으로 시행한 고적(古跡) 조사는 한국의 문화재를 더욱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빠트렸다. 낮은 등급 판정을 받은 경희궁이 헐렸고, 고분묘 조사는 결과적으로 사굴이나 남굴 풍조를 심화시켜 유적들을 괴멸시켰다.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일본으로 반출된 한반도 문화재가 6만 1409점이 넘을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 내에서 개인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만 해도 30여만 점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한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사례가 부쩍 늘었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에우프로니오스의 항아리를 포함해 21점을 이탈리아에 반환했다. 영국은 20만년 전 돌도끼와 기원전 7000년대의 토기, 동전 등 2만 5000점의 유물을 이집트에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도 약탈 문화재의 일부를 반환했다. 책에는 한·일 간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참고 사항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해외 여러 나라들의 문화재 반환 사례, 국제법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반환 움직임, 문화재 반환과 식민지 청산의 현재적 의미 등을 두루 짚어볼 수 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향대기람/공성구 지음 /박동욱 옮김/태학사/188쪽/1만 2000원 1928년 4월 30일 개성삼업조합의 조합장인 개성의 거부 손봉상, 부조합장 공성학과 그의 사촌 공성구 등은 미쓰이사의 직원 아마노 유노스케와 홍삼 판로 시찰을 떠난다. 이들은 6월 10일까지 홍콩과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돌며 동아시아 곳곳에 퍼져 있는 미쓰이 지사를 방문하고 지역의 명승지를 관광한다. 공성구는 42일간의 행로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향대기람’(香臺紀覽)을 남겼다. 예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고려인삼의 명성은 자자했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인삼에 관한 이권을 장악했던 이유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홍삼과 관련한 권한을 보유하다 1914년 이후 미쓰이물산에 독점 판매권을 줬다. 이 때문에 당시 개성상인들은 홍삼 판매를 위해 미쓰이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개성상인들의 동아시아 시찰도 그렇게 이뤄졌다. 개성에서 시작된 여정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대만, 홍콩, 마카오, 상해까지 이른다. 그들은 곳곳에서 격랑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와 마주한다. 5월 14일에는 타이베이에서 독립운동가 조명하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독검으로 찔렀다. 그 기간 중국 산둥성 지난에서는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혁명군이 무력 충돌해 중일전쟁을 촉발한 ‘지난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각지에서 배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해 엔화를 거부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는 통에 육지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덤덤하다. 반면 곳곳에서 열린 미쓰이 지사 초대의 연회는 분위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하면서도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일본과 타이완의 신사에 꼬박꼬박 참배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신문물과 현대 문명에 집중됐다. 시모노세키에서 타이베이 항으로 가는 배에서는 선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배의 내부를 구석구석 시찰하기도 한다. 타이완에서 원시림의 거대한 목재를 운송하는 철도시설이나 운송 수단에 주목하는 등 조선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운송 및 교통수단, 도로, 기계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주요 도시의 인구와 주요 산업을 점검하며 홍삼 판매량을 계산하기도 하는 철저한 상인의 모습을 보였다. 번역을 맡은 박동욱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는 “개성상인인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나 역사보다 경제와 시장이었다”며 “책은 근대 한문학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 일제강점기에 홍콩과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일기 형식으로 상세한 묘사를 남긴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헌사·역사적 사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박 교수는 평가했다. 책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엮어 이해를 돕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오바마, 스시 가장 좋아했다고? 천만의 말씀…가장 좋아한 일본 음식은

    ‘오바마 스시’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최고급 스시(초밥)를 대접했지만 정작 오바마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25일 산케이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일본 왕실이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떠나며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녹차 아이스크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은 후지산 모양을 본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녹차 아이스크림에 대한 애정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만찬에서 “어머니가 나를 일본에 처음 데리고 온 지 거의 50년이 지났다. 나는 집을 멀리 떠나온 여섯 살 아이에게 일본인이 보여준 친절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일본을 방문해 연설할 때 ‘대불보다 녹차 아이스크림에 더 열중했다’고 가마쿠라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 일본 여행을 추억햇다. 이어 201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시 가마쿠라를 찾아가 실제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반면 국빈방문 첫 일정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스시 만찬의 효과에는 의문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애초 아베 총리는 만찬 후 취재진에 오바마 대통령이 “평생 가장 맛있는 스시였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지만 이 스시만찬은 ‘참다랑어(bluefin tuna)’가 재료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참다랑어는 다랑어의 한 종류로 남획으로 인해 최근 멸종 위기에 몰려 국제 환경 단체들이 보호에 나선 어종이다. 국제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는 이날 성명을 내고 오바마 대통령은 음식 선택에 있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박 3일 일본 국빈방문을 마치고 25일 방한해 1박 2일 일정을 이어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바마 日방문서 감탄한 음식, ‘초밥’이 아니라… 아베 ‘헛발질’?

    오바마 日방문서 감탄한 음식, ‘초밥’이 아니라… 아베 ‘헛발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최고급 스시(초밥)를 대접했지만 정작 오바마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25일 산케이신문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일본 왕실이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떠나며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녹차 아이스크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은 후지산 모양을 본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녹차 아이스크림에 대한 애정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제 만찬에서 “어머니가 나를 일본에 처음 데리고 온 지 거의 50년이 지났다.나는 집을 멀리 떠나온 여섯 살 아이에게 일본인이 보여준 친절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그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일본을 방문해 연설할 때 ‘대불보다 녹차 아이스크림에 더 열중했다’고 가마쿠라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 일본 여행을 추억햇다. 이어 201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시 가마쿠라를 찾아가 실제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반면 국빈방문 첫 일정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스시 만찬의 효과에는 의문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애초 아베 총리는 만찬 후 취재진에 오바마 대통령이 “평생 가장 맛있는 스시였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지만 이 스시만찬은 ‘참다랑어(bluefin tuna)’가 재료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참다랑어는 다랑어의 한 종류로 남획으로 인해 최근 멸종 위기에 몰려 국제 환경 단체들이 보호에 나선 어종이다. 국제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는 이날 성명을 내고 오바마 대통령은 음식 선택에 있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日 교과서 도발] 日에 특별대우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일 일정이 1박 2일로 확정됐다. 일본 정부는 4일 오전 각의(국무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오는 24~25일 국빈 방문으로 예우할 것을 결정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24일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일본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시간으로 23일 늦은 밤이나 24일 새벽에 도착할 것이며, 정상회담과 왕실 행사 참석 등 공식 일정은 24~25일 진행된다고 보도했다. 당초 일본 언론들은 최근 일본 외교 당국의 적극적인 대미외교의 성과로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 예정했던 기간보다 늘어난 2박 3일간 일본을 국빈방문하게 됐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일 양국을 이틀씩 방문하는 것으로 정리된 모양새다. 이는 아베 총리의 지난해 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에서는 사흘, 한국에서는 이틀을 보낼 경우 한국이 반발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감안한 결과로 보인다. 현재 일본 외교당국은 이틀간의 국빈방문 일정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공식 일정 시작 전날 일본에 도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소개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오바마 25~26일 1박2일 방한…일본에선 사흘? 예정대로 이틀?

    오바마 25~26일 1박2일 방한…일본에선 사흘? 예정대로 이틀?

    버락 오바마(얼굴) 미국 대통령이 오는 25~26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방한에 앞서 일본을 먼저 방문하는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 체류 기간과 관련해 1박2일 일정을 택할 지 2박3일 일정을 택할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도통신은 3일 오바마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대하겠다는 일본의 제의와 관련해 양국 정부는 일단 24∼25일 이틀간 왕실 만찬 등 공식 행사를 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일본 정부소식통을 인용해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 시점이 23일인지 24일인지 결정되지 않았으며 23일 일본에 도착하는 경우 일본 체류 기간은 2박3일이 된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로 조율 중이다. 앞서 워싱턴 외교 소식통들은 2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이 예정대로 한국을 1박2일 일정으로 방문할 것”이라며 “국빈방문을 요청해 온 일본은 2박3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개진해 미국이 이를 수용하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미 외교에서 일본에 밀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당초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도 1박2일 방문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지난 2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국빈방문을 요청했고, 끈질긴 구애의 결과로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최종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방문하는 것은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 이후 18년 만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순방 일정 연장 대가로 미국에 모종의 ‘선물’을 제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서 미국 측의 요구를 들어줄 개연성과, 아베 총리가 역대 총리의 역사 인식을 계승하겠다고 한 만큼 과거사와 관련한 후속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100년전 조선의 돈줄, 세 갈래로 나뉘었다

    100년전 조선의 돈줄, 세 갈래로 나뉘었다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오미일 지음/푸른역사/444쪽/2만 5000원 1910년대를 전후해 초기 한국 자본가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의 토대와 경로 등을 기준으로 근대 한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자본 축적 방식 및 정치·사회적 활동 등을 분석한 책이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인문한국) 교수인 저자는 초기 한국 자본주의 주도 세력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첫째는 관료 출신으로 기업 설립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휘다. 한반도 유일의 부호라고 불릴 정도의 부를 쌓은 민영휘지만 아버지 민두호가 어릴 적에 돗자리 장사를 했을 만큼 빈한했기에 자본 축적은 민씨 부자가 관직에 진출한 1880년대에 들어 이뤄졌다. 민두호는 1880년 황주 목사를 시작으로 1887년 이후 춘천 부사, 춘천 유수를 지냈고 민영휘는 1887년 평안도 관찰사, 1893년 국가의 세입 및 재정을 관장하는 선혜청 당상(지휘 감독자)으로 부임했다. 민두호와 민영휘는 권력을 기반으로 인민들의 논밭과 화폐를 강제로 빼앗아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민영휘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에게 재산을 빼앗긴 평안도 지역민들이 10여건의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아 민영휘가 평안도 감사 시절 수탈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민영휘의 재산 탈취를 상세히 기록했고 대한매일신보는 논설에서 “국사가 지금에 이른 것은 민영휘, 조병갑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으며 당시 한 잡지는 “민영휘가 돈 긁기에 전력한 것이 갑오농민전쟁의 한 원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민영휘는 수탈을 통해 집적한 토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자본을 기초로 금융권에 진출해 한일은행장이 되면서 재계에서 기업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두 아들 민대식과 민규식은 제조업에 투자해 부국직물, 조선견직과 같은 기업체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자본 축적의 주요 토대는 토지 소유와 농업 경영, 건물 임대 등의 부동산 투자였으며 주식 투자를 겸했다. 둘째는 상업 활동이나 무역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기업에 투자한 상인층을 들 수 있다. 정부의 관용물품 조달이나 관영사업을 통해 성장한 어용 상인, 시전 상인 등으로 백남신, 백인기 부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아전(관청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 보던 사람) 출신인 백남신은 1897년 전주 진위대(지방 군대)의 향관(위관급의 회계관)으로서 군량 및 기타 군수물자 조달과 군인들의 월급 지급을 담당했다. 또한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궁내부 주사(정6품)로 대궐에서 필요한 물자를 구입해 상납했다. 그는 관청의 물자 조달 등으로 축적한 부를 주로 토지 매입과 사채업에 투자했다. 아들 백인기는 부친의 자본을 바탕으로 한일은행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의 대주주, 중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기업 설립을 주도해 경영자로서 분투하기보다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이나 조선인 대자본가 및 귀족들의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을 택했고 토지 매수와 농장 확장에 골몰했다. 셋째는 수공업자나 공업학교 출신의 기술자로서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이다. 이들은 자본 축적에서 뒤져 근대 초기 기업 설립에서 독자적인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태화가 그런 사례다. 화신백화점 하면 대개 박흥식을 연상한다. 그러나 화신상회를 창립한 이는 신태화이며 박흥식은 빌려준 돈을 신태화가 갚지 못하자 대신 그것을 인수했다. 13세 때 종로 은방(銀房)의 사환으로 취직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그는 6년 뒤 가내 공업체를 운영하고 32세 때는 금은세공업계의 패왕이라 불린 신행상회를 설립했다. 신태화는 백화점 형태의 화신상회를 만들어 사업 확장에도 힘썼으나 불황기인 데다 대출금 상환 및 이자에 시달리다 결국 화신상회를 박흥식에게 넘겼다. 자본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이 밖에 민족자본가의 전형인 안희제는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연락망 구축을 위해 무역회사인 백산상회 등 여러 기업들을 설립했으나 영업 부진으로 대부분 해산됐다. 저자는 “지주적 배경을 토대로 한 일부 관료 출신이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기업가로 변신하거나 상인층이 개항과 정변, 전쟁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권력에 접근함으로써 자본 축적의 기회를 포착해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가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로”라고 설명한다.기존 학계의 연구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해방기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책이 그에 앞선 1910년대 국내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에 주목한 시도는 무척 색다르다. 복잡한 도표 등이 많아 얼핏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인물 이야기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 덕분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책이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저자와 차 한잔] ‘우리 혜성 이야기’ 펴낸 안상현 박사

    [저자와 차 한잔] ‘우리 혜성 이야기’ 펴낸 안상현 박사

    “우리 조상들이 남긴 천문 관측 기록들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쁘고 놀라웠던 것은 우리 옛 문헌에 천문 관측 자료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이었어요. 현대의 천문학자들에게 수백년에 걸친 천문 현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 관측 자료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문헌 속에 잠자고 있던 혜성에 얽힌 이야기를 천문학자의 시각에서 풀어낸 ‘우리 혜성 이야기’(사이언스북스)를 쓴 안상현(43·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사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체계적으로 발달된 천문 관측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혜성 관측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문헌에 남아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의 천문학자들이 밤낮으로 천문·기상 현상을 관측해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와 풍운기(風雲記)를 남겼다. 일정 기간 계속된 천문 현상을 모은 책 ‘천변등록’(天變謄錄)을 만들었다. 또한 매년 1월과 7월의 상순에 각각 6개월 동안 일어난 천문기상 현상들을 발췌해 정리한 ‘천변초출’(天變抄出)을 역사 기록을 담당한 춘추관에 보냈다. 이렇게 보고된 내용들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고, 사초로 두었다가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록됐다. 왕실 천문학자들은 여러 천문 현상 중에서 흰 무지개가 해나 달을 뚫는 경우, 지진, 혜성, 영두성(낮에 별똥이 보이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일급 천변으로 봤다. 특히 혜성은 재앙의 전조로 특별히 다뤘다.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혜성은 반란, 전쟁, 죽음, 질병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은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고 사면령을 내리는 등 선정을 베풀고 제사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사과정 시절에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2000, 현암사)로 우리 조상들이 관측한 별자리를 소개한 바 있는 그는 통섭형 학문인 역사천문학 분야에서 발군의 성과를 보이는 소장학자로 꼽힌다. 천문학도로 우주론을 연구하던 그가 역사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1년 가을 사자자리 별똥 소나기가 제공했다. “혜성의 잔재가 대기권을 지나면서 만들어 내는 멋진 모습에 매료돼 옛 문헌에 담긴 기록들을 찾아 연구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려사에 기록된 별똥과 별똥 소나기 기록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가의 종손이어서 어려서부터 족보를 들여다보며 역사와 한문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그는 갈고닦은 수준급의 한문 실력으로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외규장각의 천문서적, 정두원의 천리경 등 옛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그는 “과거 왕들에게는 귀중한 통치 자료였고 현재 천문학자들에게는 소중한 데이터가 될 기록들이 전란이나 궁궐 화재로 소실되고 국외로 반출된 점은 아쉬움을 넘어 너무 분한 일”이라고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관상감이 해체되고 제물포에 총독부관측소가 만들어졌다. 그때 소장으로 부임한 와다 유지가 관상감 천문학자들의 기록을 일본 천문학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천문월보’에 논문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 후로 관측 기록물들은 대부분 종적을 감췄다. 그는 “현재 일본 어딘가에 조선 천문학자들의 관측 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언젠가 우리 손에 돌아와야 할 귀중한 사료들”이라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강화역사박물관

    [명인·명물을 찾아서] 강화역사박물관

    흔히 강화도는 역사 문화유적의 보고(寶庫)로 불린다. 선사시대를 비롯해 삼국·고려·조선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분포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강화도의 지정학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화는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위급할 때 왕실과 조정이 피란해 전란을 극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주변국에서 내륙으로 문화와 물자가 드나드는 주요 길목이었다.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이 전국적으로 산재한 역사박물관 중에서도 유독 주목을 받는 것은 이 같은 특수성 때문이다. 우선 선사시대 유물이 눈에 띈다. 박물관 옆에는 남한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높이 2.6m, 길이 7.1m, 너비 6.5m, 무게 80t에 달한다. 이를 중심으로 고인돌광장이 형성돼 있는데 강화역사박물관은 고인돌광장 내에 2010년 10월 문을 열었다. 국·시비 125억원이 투입돼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233㎡ 규모로 조성됐다. 강화 고인돌은 고려산과 별립산 주변인 부근리, 고천리, 오상리 일대에 160여기가 있다. 이곳 고인돌은 탁자 모형 북방식 지석묘 형태의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묘제로 200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역사관에 전시된 선사시대 유물은 다양하다. 전체 전시 유물 3841점 가운데 30%가량이 선사시대 것이다. 전문가들은 문명의 여명기인 신·구석기시대에 대륙의 문화가 바닷길을 따라 한반도로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선사유물은 강화도를 비롯해 인근 섬인 덕적도, 삼목도, 영종도 등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섬 지역에 널리 퍼져 살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주거지 모형이 여러 형태로 재현돼 있다. 이 시대 유물은 반달도끼, 주먹도끼, 돌망치, 주먹찌르개, 청동숟가락, 어망추,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이 주를 이룬다. 다양한 종류의 석검과 돌화살촉도 크기별로 비치돼 있다. 조계연 강화역사박물관장은 “신·구석기, 청동기시대 유물은 중앙박물관보다 많이 소장돼 있다”면서 “강화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활동이 매우 왕성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삼국시대 유물은 철제갑옷, 청동초두, 허리띠고리, 마구, 발걸이 등 주로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삼국시대에 강화는 주로 백제에 예속돼 있었다. 유물의 형태가 백제문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유물이 보다 다양해진다. 고려 말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겨 60년간 임시 수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철제투구를 비롯해 금동좌불상, 동경(거울), 경문금고(타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다. 청자류인 병, 잔, 접시 등은 창후리 고분군에서 다수 발굴되었다. 고려청자는 대개 전라도 강진이나 부안에서 생산돼 공물 또는 상품으로 서해의 조운로를 따라 강화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강화도 시기는 고려청자의 전성기로 불린다. 강화에 있는 고려왕릉 4기에서 출토된 항아리, 수막새, 석인상, 잡상 등도 전시됐다. 고문서인 대장경, 동국이상국집, 강도고급시선, 시권 등은 당시 인쇄문화 발달상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유물도 국난 극복사와 관련이 있다. 병인양요(1866년) 당시 강화 수비군이 재래식 무기로, 첨단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정족산성 전투 장면도가 음향 설명과 함께 배치돼 있으며,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모형은 너무 생생해 당시 협정 현장을 보는 듯하다. 신미양요(1871년) 당시 미국 해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군기인 수자기와 광성보전투 모형도 눈에 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2013년 구입유물 전시전’이 열리고 있으며, 박물관 1층 로비에서는 지난달부터 나비·잠자리·장수풍뎅이·하늘소·사슴벌레 등 곤충 300여점을 전시한 ‘신비로운 곤충의 세계’가 개최되고 있다. 박물관 측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역사체험 행사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개관 이래 매달 1회 유치원생·초등학생들이 민속방패연·한지연필꽂이·민화부채 등을 직접 만들어보는 현장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참가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영상실에서는 강화의 역사를 시대별로 설명하는 영화를 상시 상영하고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화문석문화관, 고인돌군(群), 평화전망대, 각종 돈대 등 연계 관광지들이 즐비해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적합하다. 지난해에만 24만명이 박물관을 찾았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박영주 연구사는 “오는 7월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모아 갑곶리에 ‘호국박물관’을 별도로 개관해 강화에 깃들어 있는 선인들의 호국정신을 기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씨줄날줄] 시와스 마쓰리/서동철 논설위원

    지난 금요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일본 미야자키로 가는 비행기는 골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200명이 넘게 탈 수 있는 보잉 767이었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이유는 미야자키공항에 내리는 순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는 한겨울이었지만 한 시간 반 만에 닿은 미야자키는 봄날이었다. 시와스 마쓰리(師走祭·섣달축제)가 열리는 난고손(南鄕村)은 두 시간 남짓 더 가야 한다.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면 휴가시(市)가 나타나고, 다시 서쪽으로 한계령을 방불케 하는 산길로 한 시간쯤 올라가면 ‘백제마을’을 알리는 푯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산간은 다시 겨울이었다. 백제마을의 중심에는 백제왕의 후손 정가왕이 모셔진 미카도(神門) 신사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왕족들은 왜(倭)로 건너갔지만, 또다시 정변을 만난다. 당시에는 일본에서도 백제계와 신라계 귀화인의 쟁투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탄 정가왕 일행은 미야자키 북부 해안에 닿았다. 결국 정가왕은 난고손에, 세자 복지왕은 기조(木城) 마을에 자리 잡는다. 기조마을에는 복지왕을 모신 히키(比木) 신사가 세워졌다. 섣달축제는 히키 신사의 복지왕이 미카도 신사를 찾아가 아버지 정가왕과 상봉하고 기약 없이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가왕 스토리는 여전히 논란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일본 학자들은 그저 전설로 치부하는 반면 마을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이 상당 부분 담긴 것으로 이해한다. 718년 창건된 미카도 신사의 존재도 역사를 뒷받침한다고 믿는다. 지자체 공무원들의 자세에서는 백제왕의 존재를 지역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열의가 느껴졌다. 실제로 부여객사를 모델로 백제관을 세우는가 하면, 일본 왕실의 유물창고 쇼쇼인(正倉院)과 같은 크기로 니시노(西) 쇼쇼인을 지어 섣달축제를 소개하고 미카도 신사의 유물을 전시한다. 지자체의 업무용 차량에도 ‘백제마을’ 로고를 자랑스럽게 붙여 놓았다. 섣달축제는 지난 24일부터 사흘 동안 열렸다. 마을의 유일한 우동집 주인은 손님을 받는 대신 문을 닫고 축제를 구경했다. 신관(神官) 역할의 주민은 정가왕과 복지왕이 살아서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헤어지는 장면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이었다. 들판에 불을 질러 추격군을 몰아내는 것을 상징하는 불놀이는 이미 지역의 대표 볼거리로 자리 잡은 듯했다. 그럴수록 축제 기간 한국 관광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난고손과 섣달축제의 존재를 알았다면 반나절쯤은 흔쾌히 투자했을 골프 관광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아베 총리, 평화헌법 개정의지 재확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한국 및 중국 정상과 회담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아베 총리는 6일 새해 첫 공식 활동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세신궁에 참배한 뒤 현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헌법이 제정된 지 68년이 되어 간다. 시대의 변화를 파악해 해석의 변경과 개정을 위한 국민적 논의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헌법 해석상 불가능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헌법 해석을 변경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어 아베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과 개헌에 대해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제대로 설명하고 싶다”고 부연했다. 이와 함께 아베 총리는 “중국, 한국과 대화를 도모하는 것은 지역 평화와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면서 양국 정상과 “어려운 과제가 있을수록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며 정상회담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 지난달 26일 자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해서도 “중국, 한국에 성의를 갖고 설명하고 싶다”면서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했다. 이와 관련해 화춘잉(華春塋)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아베는 양면적인 방법으로 대중관계를 희롱해 왔다. 신사 참배를 해 중·일 간 4개 정치문건의 원칙과 정신을 저버리고 중·일 관계의 정치적 기초를 엄중히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또 “이 같은 행동은 소위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중국 지도자와 대화를 희망한다는 말의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면서 “아베 스스로 중국 지도자와의 대화의 문을 닫았고 중국 인민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며 대화 제의를 재차 거절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