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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교문화의 영향(백제를 다시본다:26)

    ◎고이왕때 경학사상 바탕 관제 정비/6좌평 16관계는 주례·예기 모델로/4세기엔 경학박사 배출… 일에 파견/성왕땐 태학교육 확충… 졸업생 대부분 관직에 등용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이는 백제불교가 계율불교로 자리잡는데도 유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백제유교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원시유교와도 부딪치지만,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건국 집단과 직결된다.이들 건국집단은 대륙의 선진학술을 수용,경학론이에 입각한 백제유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백제는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의 경학을 받아들였다.한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낭·대방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 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 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은 백제초기인 3세기경 국가제도정비에 우선 나타난다.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는 고이왕(AD 234∼286년)때의 중앙관제 제정이 그것이다.고이왕은 중앙관제를 6좌평 16관계로 제정했는데,이는 「주례」의 육관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공복제도를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그리고 고이왕은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예기」명당편에 나오는 남당은 군주가 신하들과 이야기하고 정사를 말하는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예속에도 영향 유교사상에 의해 국가제도가 정립된 것처럼 일반사회의 예속 또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는 인간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특히 원시유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의사상은 백제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중국의 사서 「주서」백제조는 이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백제는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절을 하는 예는 두손으로 땅을 짚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혼례는 중국 풍속과 거의 같았고,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3년동안 복상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체제를 굳건히 다지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고사상이 깔려있다.국민을 복종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과도 직결된 유교사상은 학술의 발전을 가져왔다.4세기경 백제를 중흥시키는데 공헌한 근초고왕(AD 346∼375년)은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했다.그 사서는 바로 「서기」다.국가 중흥기에 국사로서의 정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동시에 통치차원에서도 필수적인 국가사업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이역전에도 나온다.「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고흥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 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그리고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고흥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근초고왕 재위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이 그 사람이다.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의 추천으로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또 경서에 통탈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왕인,일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고사기」는 왕인의 이름을 화이로,「일본서기」는 왕인으로 적고 있다.화이나 왕인은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있으나,「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처럼 기록했다.30∼40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백제는 AD 475년 날로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핍박속에 웅진(공주)으로 남천하기에 이른다.이어 백제의 중흥대업을 꾀한 성왕(AD 523∼554년)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여러 제도를 정리,개정했다.내관 12부,외관 10부로 구성된 22부나 22첨노제가 그것이다.이들 관제는 10간12지와 오행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의 중앙집권체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에 완비되었다.이와 더불어 성왕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중국에 남량의 제도를 본떠 학교를 확충하고 오경박사를 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강화했다.그래서 성왕 때 들어와서는 전경전사가 비로소 등장하거니와,경학교육을 전담한 종래의태학교육은 신설된 22부의 하나인 사도부가 담당하게된다.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 도 하다.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중국의 군현제와 흡사한 첨노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백제전에 나온다.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전업박사의 존재는 AD 553년(성왕 31년)「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의,역,역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일본서기」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국의 유고/고구려·백제선 교육·통치와 직결/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2백∼3백년 뒤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나라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유교문화를 일찍 수용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교가 부분적으로 처음 들어온 시기는 대략 BC 3세기경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여겨진다.이 시대의 유교는 예의에 입각한 사회정의와 윤리적 정절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시유교다.다시 말하면 중국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와 주대의 인문주의적 예제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고대국가 가운데 맨 먼저 유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다.고구려 유교를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몇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유교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그 하나가 사서의 편찬인데,「유기」와 「신집」을 국가사업으로 찬수했다.그리고 교육제도의 정립은 가장 큰 고구려 유교문화의 소산으로,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태학을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설립한 것이다. 백제는 알려진대로 고구려계가 남하하여 세운 고대국가다.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유교체제의 통치력을 갖추었다.그 뿐이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묘제도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유교의 교사지례를 실천했다.이는 온조왕이 창업 6년만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것과 후대의 왕들이 즉위하는 해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 동남쪽에 외지게 자리잡은 데다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 유교수용시기가 늦다.법흥왕 재위시기인 AD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국사」편찬은 진흥왕 6년(AD 545년),국학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AD 682년)에 설치하는 등 유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3백년 뒤늦은 시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제천의식(백제를 다시본다:24)

    ◎능산리 금동향로 출토지는 제사터/건물규모 크고 고분 이웃… 사직 추정/송산리 개로왕 가묘도 제사터인듯 우리 민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제천의식을 베풀었다.옛 기록에 나오는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예의 무천 등이 모두 제천의식이다.특히 국가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지면서 국가경영과 관련이 있는 제례가 제도화하는 가운데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생겨났다.이와 더불어 여느 민간사회에는 마을 주민들의 무병안령,다산과 풍요,풍어 등을 기원하는 제사터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흔적 찾기 어려워 그러나 오늘날 백제강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을 대하기는 쉽지가 않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된 바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유적이 제사터였다는 국립부여 박물관의 발굴조사결과가 나왔다.이 능산리 유적은 충남 공주 송산리 개로왕의 가묘(1988년 문화재연구소 발굴),전북 부안 변산반도의 죽막동유적(1994년 국립 전주박물관 발굴)과 함께 몇 안되는 백제제사유적으로 떠올랐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출토상황으로 보아 분명히 백제멸망과 관련이 있거니와,제사유적으로 본건물터는 바로 앞에 자리한 능산리고분군(사적14호)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 자리에 세웠던 당초의 건물은 능들을 수호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나,나라의 태평을 기원한 사직자리일 가능성이 많다.능이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건물을 세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여기서 거두어들인 기와조각이 엄청난 분량이고 보면 건물규모도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금동향로가 나온 능산리유적 건물배치상황을 통해 유사한 다른 유적 하나를 연상하게 된다.그것은 바로 고구려 고토인 중국(만주)길림성 집안현 국내성 밖의 동대자 제사유적(사직)이다.고국양왕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제사유적에서는 능산리유적과의 유사성이 찾아진다.백제의 출자가 고구려에서부터인 것은 이미 건국신화나 역사사실을 통해 알려졌고,고고학적 유물들도 이를 입증한다. ○고구려 유적과 흡사 그러나이 능산리유적 건물터가 고구려 동대자 제사유적과 유사하다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다만 금동향로와 건물터의 관계와 중요성한 것이다.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된 방단계단형무덤도 일종의 제사터로 볼 수 있는 유적이다.서울 송파구 석촌동 계단식돌무지무덤과 흡사하여 한성시대 백제계 무덤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제사유적을 겸한 가묘로 보인다.백제 개로왕은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백제(BC18년∼AD475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다.그 아들 문주왕은 부왕의 시신을 얻지못한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일단 가묘로 만든 것이 송산리의 방단계단형무덤이 아닌가 한다.그러나 이 가묘는 개로왕을 위한 제사터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백제의 제사유적을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다룰 전북 부안군 죽막동 제사유적은 변산반도 해안절벽에 자리잡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이 발굴한 이 유적에서는 구멍이 뚫린 원판(유공원판)과 구리거울(동경),활석으로 모방한 갑옷,굽은옥(곡옥),쇠칼,동물을 형상화한 토제품이 출토되었다.이 유적을 발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죽막동 제사유적은 AD 5세기를 전후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죽막동 제사유적은 일본 오키노시마(충도)노천유적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추어 주목을 끈다.부안 죽막동은 섬은 아니지만,해안가 절벽에 위치했다는 입지가 우선 비슷한 것이다.유적 형성시기는 부안 죽막동 유적에 비해 훨씬 늦은 AD 7∼8세기경으로 밝혀졌다.그럼에도 출토유물 성격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유적으로 보고 있다. 오키노시마는 일본 규슈(구주)와 한반도 사이의 현해탄 망망대해 속의 섬이다.둘레는 약4㎞이고 해발 2백43m의 산이 우뚝 서있다.절해고도인데다 지형마저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상주하지는 않지만,여러 시대의 제사유적이 분포되었다.야요이(미생)시대로 부터 고훈(고분)시대를 거쳐 나라(나양)시대에 이르는 제사유적이 밀집되었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이니,「섬으로 된 정창원」따위의 호칭을 붙였다. 이 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전의 에도(강호)시대부터다.그러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지난 1953년부터 이루어졌다.현재까지 23개소의 유적이 조사되었다.오키노시마 출토유물로는 굽은옥,철제무기류,토기,활석제 사용품 등이 있다.이들 유물은 거의가 바위 끝자락에 만들어 놓은 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을 좀 장황하게 설명한 감이 없지 않다.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그것은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일본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제사유적인 동시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데 자리잡았다는 점이다.더 설명을 곁들이자면 오키노시마 유적은 우리 부안의 죽막동유적을 원형으로 삼아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유물을 수용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어떻든 한반도계의 유물이 오키노시마에서 나오는 것은 이른바 도래인과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고,더 흥미로운 것은 고대인의 정신세계 마저도 정확하게 반영시켰다는 점이다.갑옷을 모방한 활석제 제사용품이 부안 죽막동유적 출토품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오키노시마 출토의 김동제용두도 경북 풍기와 강원도 양양 출토품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가야유물도 나와 그리고 우리 가야고토의 여러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말띠드리개가 오키노시마에서도 나오고 있다.오키노시마가 극히 좁은 섬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실제 말을 타는 기마용 말갖춤(마구)의 일부라기 보다는 제의용으로 쓰였을 것이다.말갖춤 장식에 불과한 말갖춤까지도 신성시한 당시 오키노시마의 풍속을 엿보는 듯 하다.이렇듯 한반도의 문화는 현해탄 가운데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몇 백제의 제사유적을 살펴보았다.현재 뚜렷하게 나타난 유적이 3개소에 불과하지만,더 발견 될 수도 있다.이와 더불어 유적연구가 진전된다면 유적의 성격은 물론 백제인들의 기층심성에 깔린 제례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특히 국가의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민족의 정신적 구심력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역할론도 제기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제사의식/나라의 평안·풍년 등 기원/하늘·땅 등 자연물이나 조상숭배 고대인들은 우주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그래서 이들 현상을 초월자 또는 절대적 존재로 상정하고 평안을 기원하거나 혹은 감사하는 천제나 제사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이 외경의 대상은 때로는 하늘 땅 해 달 혹은 자연물이 되기도 했다.우리 민족은 아주 먼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여 제천의식을 올리고 농경이 시작된 뒤로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옛 기록에 나타나 있는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예의 무천 등이 그것이다.이 의식는 뒷날 조상 숭배사상과 합치되어 조상을 추모하고 자손의 번영,친족 사이의 화목을 도모하는 행사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막상 제사유적이라고 부를 만한 유적은 오늘날에도 지방 곳곳에 남아있는 서낭당이나 장승,당산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숫자는 적은 편이다.선사시대의 제사 유적으로는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국보 147호),고령 양전동(보물 605호),흥해 칠포리,포항 인비동,영천 봉수리,영주 가흥리,여수 오림동,남원 대곡리 등의 암각화가 남아 있다. 역사시대는 백제 유적을 제외하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제주 용담동 유적(1992년 제주대박물관 발굴)과 수신동굴,그리고 동대자유적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집안)동쪽에 위치한 수신 유적은 「후한서」와 「삼국지」에 고구려 왕이 10월에 동맹을 올리던 동국대혈로 불리고 있다. 동대자 유적은 1958년 중국 길림성박물관에 의해 국내성 밖 5백m 지점에서 발견됐다.발굴 결과 이곳은 고구려 중기(18대 고국양왕 9년 또는 광개토왕 2년,392년)에 속하는 「국사」라는 사직과 종묘의 제사유적으로 밝혀진 바 있다.
  • 묘제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22)

    ◎부여지역선 굴식돌방무덤이 주류/석실바닥 장방형… 삼국중 가장 발달/아치형 널방·물갈음한 널동 등 독특/토착묘제인 독무덤도 능산리·중정리일대 다소 분포 우리는 옛 무덤을 가리켜 고분이라고 부른다.그러나 고고학에서는 옛 무덤이라고 해서 모두 고분의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역사적이나 고고학적으로 자료가 될 수 있는 무덤을 고분으로 파악하고 있다.또 고분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무덤의 축조방식을 묘제라 일컫는 것이다.삼국시대의 무덤,특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실력자들의 무덤은 도읍지를 중심으로 축조된다.그것도 언덕처럼 생긴 거대한 분구를 이룬 무덤들이 떼로 만들어지고,돌널(석곽)이나 돌방(석실)등의 내부구조를 갖추었다.또 거기에는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어 무덤의 주인공이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백제시대의 고분 역시 도읍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그리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백제의 고분 변천은 크게 전기(AD2세기∼475년)한성(서울)시대,중기(AD475∼538년)웅진(공주)시대,후기(AD538∼660년)사자(부여)시대로 구분한다.전·중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면 잘 정비된 무덤이 영조되어 백제고분문화의 진수를 오늘날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분 내부구조 다양 사비시대 고분들은 다양한 묘제를 가지고 출현했다.널무덤(토광묘)을 비롯,독무덤(옹관묘),화장무덤,구덩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등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백제후기 사비시대 도읍지였던 부여지역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그리고 백제불교의 일본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점의 뼈그릇(장골용기)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은 언덕 위나 언덕 비탈,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또 산기슭이 부채꼴로 펼쳐진 지세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경우 지형을 살펴보면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앞쪽에 해당하는 남쪽에는 평지가 있다.그리고는 서쪽에는 나성이위치한 언덕이 뻗쳐있고 동쪽에는 이에 상응하는 언덕이 자리잡았다.외형이 반구형인 언덕으로 서상총,동상총,동하총등의 왕급 무덤들이 축조되었다. 이들 능산리 굴식돌방무덤은 내부구조는 신라·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를 필두로 신라·가야에서도 일찍부터 나타나지만 5세기중엽 백제지역에서 가장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한다.고구려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의 기본평면이 방형이라면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은 장방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또 돌방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석재,벽면의 구성및 천장형태,널길(선도)의 위치 등도 백제적 특징을 지니고 나타난다. 백제 굴식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이 때에 천장은 큰 널돌(판석)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놓았다.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이 있다. ○고구려·가야식 탈피 그 다음 형식은 널방의 평면은 역시 장방형이지만 사방의 벽을 다듬은 돌이나 물갈음한 큰 널돌을 가지고 축조한 굴식돌방무덤이다.이 형식의 굴식돌방무덤 천장은 대개 양쪽 끝이 경사지거나 평평한 평천장을 이룬다.또 천장이 반원통을 이룬 경우도 있다.널방 바닥에는 1∼2개의 널받침(관대)을 마련했다.널길은 남벽 좌우 한쪽에 치우친 것과 중앙에 위치한 예가 있는데 널길 입구에는 돌문(석비)시설을 갖추었다. 이같이 다듬거나 물갈음한 널돌을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는 능산리 제3호분,능산리 벽화고분,능산리 중하총이 꼽힌다.이들 고분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능산리 서하총의 경우 널방의 동·서벽은 잘 다듬어진 큰 널돌을 각각 4장씩 맞물려 세우면서 북벽은 위아래로 2장을,남벽은 널길문 위에 1장을 세워놓았다.천장은 동서벽 위에 1단의 고임돌을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놓고 널돌 4장을 가로질러 마감시켰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벽면과 천장을 1장짜리 화강암·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그 거대한 판돌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벽면에다는 사신도,천장에다는 비운과 연화도를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주검의 집을 멋을 부려 축조한 또 다른 예는 능산리 중하총에서도 찾아진다.널방의 4면벽을 벽돌모양으로 가지런히 다듬은 돌로 쌓았다.그 공인들 오죽했으랴,하는 마음이 든다.동서벽에 해당하는 긴벽을 쌓으면서도 예사롭게 처리하지 않고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점점 오그라뜨렸다.그래서 널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면 아치형 널방을 만나는 것이다.널방 바닥에는 방형의 널돌을 바둑판처럼 깔고 석회를 발랐다. 이 가운데 능산리 벽화고분과 중하총은 사비시대 백제고분의 백미다.삼국시대에 백제고분에서만 볼 수 있는 수준높은 건축기술의 산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백제시대 고분을 통틀어보면 삼국 어느 나라에 비해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백제적인 독자성을 끊임없이 추구했다.전기 한성시대에는 고구려적 요소의 돌묻이무덤(적석총)과 봉토분을 차용했으나 이를 곧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따라서 중기웅진시대에는 돌묻이무덤 대신에 분구의 외형이 반원형을 닮은 가장 백제적인 봉토분이 출현하는 것이다. ○벽화고분 등 백미 우리는 지금까지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 한성과 웅진시대의 고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그러나 백제강역의 토착묘제로서의 독무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독무덤을 기술할 차례가 되었다.광복을 맞기 직전에 왕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이웃에서 60∼90㎝가량의 구덩을 파고 묻은 독널(옹관)들이 발견되었다. 이밖에 부여 중정리에서는 부식된 암반 중심부에 지름과 깊이가 각각 30㎝정도인 구덩을 파고 안에 뼈단지를 묻은 다음 돌로 덮은 뼈단지무덤도 발견되었다.부여 염창리에서도 비슷한 뼈단지가 출토되는 등 사비시대 도성 언저리의 여러 독무덤 존재는 흥미를 끄는 무덤유적이기도 하다. 어떻든 고분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많은 자료를 던져준다.당시의 사상으로부터 문화와 예술,때로는 결정적 역사기록까지도 제시하고 있다.특히 제사유적설이 있는 김동용봉봉래산향로 출토지점 바로 옆이 능산리 고분군이고 보면,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능산리고분/모두 7기로 왕급 무덤 추정/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대표적 유적 백제 전시대에 걸쳐 백제문화요소를 가장 많이 함축한 고분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고분군이다.부여읍에서 논산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3㎞ 떨어진 해발 1백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고분군은 3기씩 앞뒤로 2열을 이루고,맨 뒤에 1기가 더 있다. 왕릉으로 전해지는 이 고분군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15년 일인학자 구로이타(흑판승미)가 2호(중하총)와 3호(서하총)를 조사하고부터다.이어 1917년 야스이(곡정제일)가 1호 (동하총)와 4호(서상총),6호(동상총)를 각각 발굴조사했다.이 가운데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유명한 고분으로 떠올랐다. 이 고분군이 들어앉은 자리와 주변지세는 명당으로 알려졌다.동쪽에 청룡,서쪽에는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튀어나왔다.또 앞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과함께 더 멀리에는 주작으로 풀이될 수 있는 안산이 솟았다.그 너머로는 백마강이 흐르니,풍수지리적으로 입지조건을 잘 갖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단지 도굴자들이 내팽개친 몇점의 유물만이 수습되었을 뿐이다.5호분 널받침 위에서 칠목관조각,금동맞새김장식,금동꽃모양장식이 나왔다.그리고 2호분에서는 칠기조각,여러점의 금동못 등이 나와 사비시대 백제의 공예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2호분이 6세기 중엽,1호분이 7세기 전후,3·4호분은 7세기 이후로 편년되었다.이들 고분을 통해 본 사비시대의 문화상은 외래문화를 백제화한 본격적인 백제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한성시대의 고구려 문화 영향기나,웅진시대의 중국 남조문화수입기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 미래의 차(외언내언)

    자동차로 인해 생활양식 자체가 바뀐 오늘의 세계에서 자전거 이야기는 어쩌면 한가로워 보일지 모른다.그러나 보스턴 거리의 10단계변속 고성능 자전거로부터 베이징의 인력거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자전거 수는 8억이 넘는다.연간 생산대수도 자동차의 3배를 넘고 있다. 미래예측서들에서는 자전거를 「미래의 차」라고 부른다.미래의 차가 아니라 오늘의 차인 나라도 적지 않다.중국은 3억의 자전거를 쓰고 있고 연간 수요가 3천5백만대나 된다.일본,베트남에도 자전거는 많다.런던,로스앤젤레스에선 교통체증이 심한 도심을 순찰할때 경찰도 자전거를 사용한다.네덜란드와 덴마크는 유럽의 자전거왕국이다.네덜란드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1만4천㎞나 갖고 있을만큼 자전거중심이다.주택가 자전거도로는 70년대부터 「소음이 없는 교통」운동으로 만들어졌다. 내무부가 「자전거 이용활성화에 관한 법률」을 입법예고 했다.내년부터 공공건물,백화점,공공주택단지 등 일정규모이상의 건물을 지을때는 자전거주차장을 확보해야 한다.새로 도로를 만들때와 기존도로를개·보수할 때도 자전거도로를 만드는 의무를 갖게 된다.현재 3%에 불과한 자전거 교통분담률을 일본 25%,독일 26%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자전거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출발시킨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하다.하지만 우리는 아직 자동차가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 있다.잘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특히 전용도로는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 쓰임새가 몹씨 어려울 것이다.자전거도로 사용이야말로 높은 질서의식을 필요로 한다.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는 자동차운전도 규칙은 너나 지켜라하는 것이 우리 습속이다.자전거길 제대로 쓰기가 얼마나 힘들지 걱정이 앞선다.미국서도 전용도로는 자전거 사용자들끼리 의견이 분열돼 시행치 못했던 경험이 있다.없는게 더 편하다는 의견도 나왔기 때문이다.그렇다해도 자전거로 향해가는 사회적 노력은 하는 게 옳다.
  • 장신구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19)

    ◎신분의 표상… 왕의 금동관엔 솟을 장식/U형 금동판에 봉황·구름 문양 새겨/은봉에 방울 매단 여자결발구 이채/목걸이·머리뒤꽂이·반지 등 독창적 공예술 돋보야 고대국가에서 장신구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왜냐하면 계층간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신분의 표상이 되었기 때문이다.장신구에는 물론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인류의 욕망이 함축되어있다.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부터 장신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만,당시 선사사회에서는 주술적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풀이된다.여기서도 역시 신분과 무관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국가 백제의 장신구는 어떠했을까.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난 뒤에 얼핏 무령왕릉 출토의 찬란한 장신구들을 떠올릴 것이다.지난 1971년 발굴당시 참으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웅진시대(AD475∼538년)공예미술의 극치를 보여준 무령왕릉은 가히 백제문화의 보고였다.무령왕이 세상을 뜬 것은 AD522년의 일이다.그로부터 16년 뒤에 도읍을 사비로 옮겨 사비시대(AD538∼660년)를 개막했던 것이다. 역사는필연적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를 따르면 사비시대문화는 웅진시대를 앞섰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지난해 연말 사비성 고토인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의 존재는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아닌가 한다.이 시대의 고분유적들이 일찍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백제고토에서 신분을 표상한 장신구들이 여기저기서 속속 출토되고 있다. ○전해진 유물 적어 백제의 유물로 남은 장신구는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다.특히 사비시대가 비명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럴 수 밖에 없다.가장 신분을 뚜렷이 나타내는 금동관의 경우 도성유적에서 출토된 완형은 전해지지 않는다.도성유적 출토품이라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중상총에서 나온 금동관의 솟을장식(입식)만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U자형 금동판에 봉황과 흘러가는 구름모양을 맞새김한 이 솟을 장식의 꼭대기는 산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비시대 금동관모는 대단히 훌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 이유는 사비도성 먼 변방에 해당하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도 멋들어진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데 있다.신촌리 출토 금동관은 아주 얇은 금동판을 구부려 만든 타원형 관띠의 정면과 좌우에 맞새김 초화문 솟을장식을 올렸다.그리고 솟을장식과 관띠에 작고 둥근 달개를 달았고,장식 끝부분 마다를 파란색 구슬로 마감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내관도 갖추고 있다.내관으로서 이 관모는 반타원형으로 오린 2장의 금동판을 맞붙이고,그 맞붙인 부분을 다시 금동판을 구부려 감쌌다.관모의 양쪽판은 두둘겨 만들어낸 점선이 연결되어 물결모양을 이루었다.그 사이사이에는 당초문과 인동꽃문양이 끼어있다.기본적으로 고깔과 흡사한 관모라 할 수 있다. ○여인들 비녀 사용 이같은 금동관모는 부여에서 그리 멀지않은 전북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관모에는 다만 S자형 장식이 달렸다.입점리 출토품 형식과 꼭 맞아떨어지는 관모가 일본 웅본현 선산(후나야마)고분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사비시대의 공예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뚜렷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기도 하다.백제강역의 변방과 전수국의 유물이 이럴진대 사비도성의 왕이 썼던 관과 관모는 더 훌륭했을 것이다. 백제의 여인들은 머리를 가꾸는데 비녀를 사용한 모양이다.조선의 여인들 처럼 비녀를 가지고 쪽을 쪘는지는 알수 없으나,어떻든 백제여인들도 비녀를 사용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고분에서 출토된 비녀 1점이 유일하게 현재 전해진다.이 비녀는 길이 10.1㎝로 머리부분에는 다섯 꽃술의 꽃문양을 조각한 금제장식이 달렸다.그리고 은제 몸뚱이에는 작은 동그라미와 대나무잎새를 점선으로 조각했다.금 머리에 은 몸뚱이를 한 이른바 김두은잠인 것이다.우아하기 그지 없는 장신구로 평가된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하황리 고분에서 출토된 앙증스러운 유물은 아직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작은 유리공에 네 잎새모양의 은판과 꼭지를 붙이고,꼭지에 은봉을 꼬인 이 유물의 용도는 도대체 무엇일까.꼭지쪽에 꼬인 은봉 부분에는 방울까지 달아매 더욱 앙증스럽다.학자들이 오래 논의한 끝에 장신구라는 결론을 얻었다.장신구 중에서도 여자들이 머리를 묶어 장식하는 결발구로 본 것이다.은자루가 달린 유리공이라는 의미의 은병유리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백제인들의 금세공술은 사뭇 놀랍다.금을 실 다루듯 했던 탓에 금세공으로 여길 수 없는 정교한 장신구도 보인다.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곡리 출토픔인 순금제장신구가 그것이다.연주문양을 돋을 새김한 금세공품을 두줄을 붙여 마치 사슬처럼 엮다가 아래쪽에서 갈라지게 한 장신구다.아래쪽에서 갈라진 한줄 끝에다가는 수술 같은 장식을 달았는데,이 수술이 걸작이다.수술 같은 장식은 금판 가장자리에 작은 금낟알을 붙이고,그 안에 금줄로 씨방 꽃잎 등을 도안화했다. 지금까지 사비시대 백제 장신구를 대강 살펴보았다.백제의 장신구를 말하면서 사비시대 개막 얼마전에 축조한 무령왕릉 출토품을 빼놓을 수 없다.우선 왕비의 유품인 금제 머리뒤꽂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삼국시대 유물로 유일하다는 뜻도 물론 지녔지만,전체 모양이 나으는 새 모양을 했다는 점이 돋보인다.양날개 부분과 몸뚱이에 정출수법으로 만들어낸 동그라미문양,여덟꽃술의 연꽃문양,S자형 인동문 또한 매우 아름답다. ○세공술 일에 전파 금제 목걸이에서는 백제인들의 독창적 공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리가 달린 여러개의 금막대를 연결한 목걸이가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다.무령왕릉에서 7마디 짜리와 8마디 짜리 금목걸이가 출토되었다.백제 쪽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유물이다.무령왕릉에서는 왕의 유품이 분명한 금제귀고리가 나왔다.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 나가보면 귀고리를 한 남자들을 만나게 되는데,이 유행은 아마도 삼국시대 귀족사회가 앞섰는지도 모른다. 백제쪽에서는 반지가 그리 흔히 발견되지는 않고있으나,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은반지는 유명하다.안에는 「경자년에 다리라는 장인이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경자년이월다리작대부인분이백주주이)는 새김글씨가 들어있고 밖에는 혀를 내민 용이 조각되었다. 띠꾸미개(대금구)와 띠드리개(요패) 역시 무령왕릉 출토유물의 명품이다.이밖에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 출토 짐승머리모양 띠꾸미개(정대)는 그 형식이 일본 장야현 수판시 요로이츠키(개)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김기웅 ◎문헌자료/왕은 오라관에 금꽃 달아/삼국사기 기록… 귀족은 은꽃 장식 백제의 장신구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3세기 후반으로 「삼국사기」고이왕27년(AD 260년)2월조에 나온다.「왕은 오라관에 금꽃을 달고 6품 이상은 관에 은꽃을 장식했다」는 것이다.중국 고대 정사인 「주서」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여인들의 헤어스타일을 통해 장신구를 생각할 수 있는 기록도 보인다.이를테면 「수서」 동이백제조에 적은 「처녀들은 머리를 땋아 뒤로 늘어뜨렸다가 시집을 가면 틀어올렸다」는 대목이다.머리를 틀어올리자면 반드시 어떤 용구가 필요했을 것이다.그 용구는 물론 장신구 구실을 했는데,비녀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다.실제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에서 금제장식 은비녀가 출토되었다. 백제 사람들이 귀고리나 목걸이를 했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그러나 이들 장신구가 존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원용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해진다.「후한서」 한조나 「진서」 마한조는 「구슬을 귀히 여겨 옷에 꿰매어 달기도 하고 귀와 목에도 건다」고 적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백제 사람들도 분명히 목걸이나 귀고리를 사용했다.그것도 고도의 기술을 함축한 실물의 금세공품 장신구로 유존되고 있는 것이다. 귀고리의 경우 자그마치 세 부분으로 이어진 찬란한 유물도 대하게된다.귀에 거는 고리 밑에 중간걸이가 달리고 이어 또 다른 달개가 따라붙는 형식이다.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귀고리가 특히 유명하다.그리고 부여 염창리에서는 이같은 형식의 금동귀고리가 출토된 적이 있다.목걸이는 금세공품과 비취 마노 수정 호박 유리제품 등이 전해진다. 팔찌는 금·은·금동제가 있다.무령왕릉을 비롯,신촌리·대안리·송산리 고분등에서 출토되었다.이에 대한 첫 기록은 「공주가 팔찌를 발목에 숨겨 달고 궁중을 나왔다」는 「삼국사기」열전 온달전에 보인다.
  • 뛰어난 축성술(백제를 다시본다:18)

    ◎토성 쌓는 판축기법 5세기에 발달/진흙·마사겹겹이 다져… 노동력 절감/통일신라에 전수… 일본에도 전해져/후기 들어 돌·흙 함께 사용… 안팎겹쌓기 등 공법 다양화 백제는 처음 창례성에 도읍하였고,이어서 하남창례성 혹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반기까지 였다.이후 웅진(오늘날 공주)과 사비(오늘날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익산지역에 별도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낭군과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또 한군현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축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 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것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이러한 강안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잦은 외침에 대비 백제가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침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내놓고 새로이 마련한 도읍이 웅진이었다.지금의 공산성이 그것으로 후대의 보수와 개축이 있었음에도 백제 도읍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공주에서 공산성의 외곽인 시가지까지 나성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도성제도가 있었는지는 학자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계획된 천도에 의해 서기 6세기 전반에 마련된 사비도성은 산에 의지한 산성과 거기서 뻗어내려 온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나성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성곽 발달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것임이 확인된다.이러한 나성을 가진 도성제도는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을 쌓은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어쩌면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결합한 도성제도는 백제인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경우 산성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가진 뒤에도 그 외곽에 또다른 산성을 쌓아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한 도성제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굳건한 방어망이 백제인들에게 안일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후세에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백제의 성곽들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하여 흙으로 켜쌓기하는 이른바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한 것들이 많다.본디 이 판축기법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전된 것이다.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구간마다 칸을 마련하여 진흙과 마사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길다란 대나무로 일일이 다져쌓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는 최근에 조사된 여러 개의 성들에서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많이 확인되었다.특히 처음에는 다지다가 차츰 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만든뒤 구간 사이에 돌로 가장자리를 쌓아 기단을 만들어 그 위를 판축하는 특유의기술이 공산성이나 부여의 나성,그리고 지방의 커다란 성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산성등서 확인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내외겹축)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외축내탁)이 확인되고 있다.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먼저 백제의 판축기법은 거의 그대로 통일신라로 이어졌다.신라는 돌로 겹쌓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으나 백제의 판축기법을 받아들여 낮은 위치나 험하지 않은 산성에 그대로 적용했다.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흙으로 쌓는 성은 돌로 쌓는 성보다 공사비가 약 3분의 1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크고 웅장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이 공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추세는 더욱 후대에까지 이어졌다.고려시대 주요한 지역에 축조된읍성들은 거의 전부 판축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또 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한양도성도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흙으로 쌓아졌으며 세종 때에야 돌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뒤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수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또 서기 665년8월에 달률(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시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대야·연이라는 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김전)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대야성)·미즈키(수성)·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고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으로 고고이시(신총석)란 것이 있다.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역설과 한국식 산성설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임이 확인되었다.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백제성곽 유적/한강·금강유역에 많이 남아/풍납동 토성·부여산성등이 대표적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 토성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 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에 이른다.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목책 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위례성의 주성,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 이성산성은 풍납동 토성,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 아차산성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광장동에 있다.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 및 나성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환산성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예산의 임존성은 백제가 망한뒤 유장 흑치상지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꾀했던 곳이다.이곳에서 흑치상지는 한때 나·당연합군을 깨뜨려 잃었던 옛땅을 한 때나마 되찾기도 했다.이곳은 또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와 견훤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94 타임캡슐(외언내언)

    1971년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은 허전하던 백제문화·예술연구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았다.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처녀분으로 1백8종 2천9백6점의 귀중한 백제시대유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무덤의 주인공과 확실한 연대를 적은 지석을 비롯,왕과 왕후가 사용했을 각종 장신구와 생활용품들이 1천4백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왕릉이나 고분의 부장품들은 이렇듯 당시의 생활상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고대의 타임캡슐」이라고나 할까. 현재의 생활과 문화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타임캡슐.갖가지 생활용품과 한시대를 상징하는 자료들을 캡슐에 수장하여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다.세계최초의 타임캡슐은 1939년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가 뉴욕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플러싱메도공원에 묻은 것.카메라·만년필·깡통따개·시계·화장품등 1백10개품목을 넣었으며 개봉시기는 5천년뒤인 서기 6939년으로 정했다.그러나 25년이 지난 뒤 문명이 몰라보게 발전하자 웨스팅하우스사는 64년 두번째 타임캡슐을묻었다. 그뒤 67년 캐나다에서 몬트리올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70년에는 일본에서 「엑스포70」을 기념하여 타임캡슐을 묻은 일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85년 남산 팔각정옆에 매설한 것이 처음. 서울정도 6백년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94타임캡슐」은 6백종의 물품을 수장하여 남산의 옛수방사터 광장에 묻기로 했다.정도 6백년이 되는 11월29일에 맞춰서.개봉시기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4백년 뒤인 2394년,바로 서울정도 1천년이 되는 해다. 타임캡슐은 흔히 어뢰형이나 항아리모양인데 서울시는 보신각종모양으로 결정했다고 한다.조선시대 장안의 도성문을 여닫게하던 명물 보신각종이 캡슐의 모형으로 선정된 것은 뜻깊은 일이다.원래의 종은 노쇠해 국립박물관으로 은퇴했고 새 종은 서울신문사가 85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주조한 것이다.
  • 불교건축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16)

    ◎호국사찰 건립 성왕때 본격화/왕흥·미륵사가 대표적… 기술 일에 전수/1사1탑 원칙… 남북축으로 건물 배치/왕권­미륵신안 결부… 통치·호국수단으로 세워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이 뒤져 384년인 침류왕원년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불교가 전래된 이듬해 한산(서울지역)에 불사를 조영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지금까지 서울 근방에서 백제의 사찰터가 확인된바는 아직 없다.백제의 사찰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부터다.즉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대통사라든가 수원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의 사찰 유적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성왕대 이후인 6세기초 부여시대(사비시대)에서부터라 할수있다.이 시대에는 절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만도 왕흥사를 비롯하여 호암사·칠악사·오함사·도량사·자복사·제석사·오금사·보광사·미륵사·사자사·북부수덕사 등이다.이중에서 도양사·자복사·보광사 등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그 외는 대체로 위치가 밝혀져 있다. ○한산에 첫불사 지어 특히 왕흥사와 미륵사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 자세한 기록이 있고 백제의 호국사찰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소개를 한다.먼저 왕흥사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백제 제29대 법왕의 휘(죽은 이를 높여 부르는 이름)는 선인데 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개황10년 기미년(599년)에 즉위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소를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민가에서 기르는 새나 매 그리고 짐승 등을 풀어주고 고기잡이나 사냥에 쓰이는 기구를 불살라 사냥을 일체 금지시켰다.이듬해 경신년에 30인의 승려를 두어 왕흥사를 사비성에 세웠다.처음 터를 닦을때 왕이 승하하여 무왕이 이를 이었다.아버지가 기초를 놓고 아들이 이루었으니 수십년이 지나 이루어졌다.이 절의 이름도 역시 미륵사라 했다.또 그절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 4계절의 꽃과 나무가 수려하여 아름다웠고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갈때 그 경치가 장관을 이루었다』라고 되어있어 익산 미륵사와 창건연대가 비슷하고 이름도 같아 우리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이 사찰 역시 국왕이 세운 호국사찰임이 분명하다.지금 부여의 북쪽 백마강을 건너 규암 왕은리 부락에 이 절터가 있어 초석의 일부가 노출되고 있지만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알수없다.익산 미륵사에 대하여도 재미있는 창건설화를 「삼국유사」에 남기고 있다.즉『하루는 무왕(600∼640년)이 부인과 같이 용화산위의 사자사를 가는 길에 용화산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하하여 배례를 하였다.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연못을 메울것을 물었더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이에 미륵삼존을 법상으로 불전과 탑·낭 등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다.이에 진평왕(신라)은 백공을 보내어 이를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왕권과 미륵신앙을 결부시켜 통치와 호국의 수단으로 미륵사를 세웠음을 알수 있다.또 기록으로 보아 절의 가람배치는 3곳에다 불전과 탑,그리고 회랑을 배치한 형식임을 알수있다.이 절터는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전부터 반파되어 남아있는 서탑을 비롯하여 금당터의 초석 그리고 두곳의 당간지주석이 남아 있었다.실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는 3개의 탑이 동서축을 맞추어 나란히 열을 지어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그중 중앙의 것은 목조탑이었고 동서양쪽의 것은 석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여기에 곁들여 각 탑앞에 중문터와 뒤에 금당터가 각기 발견되고 회랑도 각 구역마다 이용이 되었음을 알수 있었다.이렇게 세개의 전탑이 병렬로 놓인 예는 아직 다른 곳에는 밝혀진바 없다.또 절터의 지반을늪지를 메워 이루었음도 확인되고 절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은 위의 기록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었다. ○목조건물 모두 소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동탑에 사용했던 탑부재 약2백60편을 비롯하여 건축목재의 일부와 생활용구인 큰 토기항아리,녹청색 유약을 입힌 서까래 장식기와,금동제 판불 등 1만8천여점이나 되어 백제사찰건축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1992년 동탑을 9층으로 고증하여 복원할 수있었다. 이렇듯 백제는 일찍부터 미륵신앙을 발전시켜 왕의 권위를 한층 높이는데 이용한 것이다.불타에는 과거불과 미래불이 있는데 미륵신앙은 인류에게 평안과 희망을 주는 미래불의 도래 사상을 의미하며 미래불은 즉 미륵인 것이다.미륵신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미륵하생신앙으로서 석가가 입멸한후 56억7천만년이 지나서 미래불인 미륵불이 도솔천으로부터 중생계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성왕이후 부여시대의 백제의 사찰은 기록된 것이외에도 일제시부터 해방후 근래까지 그 터가 많이 조사되어 왔다.부여 군수이와 동남리절터,정림사와 부소산 폐사터,금강사터,용정리절터,구아리절터 등 이외에도 많다. 이들 절터의 조사결과 그 특징은 탑이 하나 있는데 대부분 목탑이었고 그 가람의 배치도 대체로 남북축을 맞추어 남쪽에서부터 중문과 탑·금당·강당을 두고 중문과 강당을양측으로 연결하여 회랑을 돌림으로써 방형의 안뜰을 만들었다.이것은 소위 백제의 전형적인 1탑식 가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본에 전래되어 대판의 사천왕사식 가람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어 동남리절터에는 탑자리가 확인되지 않았고 금강사터에서는 동서축에 맞추어 건물배치를 함으로써 가람이 동향을 한 것이다.백제는 538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아울러 경전과 불상은 물론 조불,조사공을 보내어 불사를 조영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였다.따라서 비조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법륭사 등 비조시대(552∼645년)와 나양시대 초기의 불사건축들의 대부분은 백제의 기술에 의존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한편 백제의 뛰어난 사찰 건축기술은 신라에서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라의 호국정신이 담긴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아비지의 조탑기술을 빌려 높이 80m나 되는 목조탑을 세우게 됐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아비지는 이 거대한 신라의 통일탑을 세우는 도중 어느날밤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는 공사를 중단하였었다는 기록은 지금 생각하여도 수긍이 갈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이 찬란했던 건축문화로서 백제사찰의 목조건축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려시대의 건축도 몇동만 남아있음)따라서 백제의 사찰건축을 연구하려면 일본에 남아있는 나라시대의 사찰목조건축을 그 방증자료로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면서도 가슴아픈 일이다.장경호(공박·문화재연구소장) ◎사찰과 미륵신앙/미륵신앙 6세기에 널리 퍼져/“강력한 왕조” 염원서 대가람·불상 세워 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은 원찰로 조성되었다.다시 말하면 어떤 간절한 염원을 사찰창건의 동기로 삼은 것이다.이 시대의 대표적 가람은 사비도성 밖 백마강 건너 왕흥사와 익산 미륵사다.이들 가람은 호국과 깊이 연관된 미륵신앙을 담았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가 제자인 미륵에게 장차 성물을 한 뒤에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할 것이라고 예견한 대승적 자비사상에서 비롯되었다.미륵신안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고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연유한 말이다.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와 비유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유토피아적 희망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미륵신앙은 6세기 이후 백제에 널리 퍼졌다. 이는 미륵과 연관한 사차르이 창건과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이 널리 성행한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글고 위덕왕(재위AD554∼597)때 신라의 승려 진자가 미륵화신을 친견코자 웅진(공주)이 수원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비도성 바로 지척에 완공한 왕흥사와 더불어 익산에 미륵사가 창건되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기(AD600∼640년)에 해당한다.법왕이 옥천전투에서 전사한 이른바 옥천회전 패배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을 회복한 그는 신라에 설욕전을 폈다.신라를 압박,낙동강까지 진출함으로써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래서 백제 정치사속에 우뚝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왕의 업적은 국민들이 품고있다 기층적 미륵신앙과도 맞물려 자연스럽게 호국으로 연결되었다.이같은 미륵신앙은 호국사찰을 표방한 대가람창건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 언어의 기원·발달사(백제를 다시본다:15)

    ◎마한 아닌 부여계어 유래/지명어미 「홀」은 마한의 「비리」와 판이/3∼5세기 한계어 함께 사용… 일에 전파/태율 천도이후 한계의 단일언어사회로 정착 백제는 마한이 망한 터전에 세워진 나라로 인식하여 왔다.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창례홀」에서 건국하였다.그리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편견은 백제어를 마한어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그러나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현재 서울 안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백제 시조 온조의 도읍지는 「위례홀」이었다.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지명어미 「­홀」이다.이「­홀」은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현재의 인천,즉 「미추홀」의 「­홀」과 더불어 부여계어의 특징을 극명하게 나타내 준다.그렇지만 마한의 지명어미 「­비리」(>부리)와는 이질적인 어소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분포 중부지역 국한 사학자들은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한 시기는 제13대 근초고왕(AD 346∼375년)때로 본다.이 학설에 따르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에 가까운 오랫동안을 공존하여 온 셈이다.그렇다면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종래의 주장은 속단이었음을 시인치 않을수 없게 된다.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을 부여계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뒷바침하는 다른 증거자료가 또 있다.앞에서 제시한 「위례홀」에 인근한 지명 「미추홀」이 「매소홀」로도 적혀있는 바,이는 「매」가 「매홀­수성(현재의 수원)」의 대응기록을 통하여 「물」의 뜻임을 알수 있다.더욱이 중부지역의 남단인 현재의 청주의 옛이름이 「살매­청천」으로 적혀있어 「매」가 「천」의 의미로도 쓰였음을 확인하게 된다.이처럼 「매」의 분포 역시 중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마한지역(충남 전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백제어에 대한 지식은 백제말기의 언어중심권인공주·부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이와 같은 말기적인 현상의 편견때문에 보다 이른 시기의 백제어는 일관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다.우리들을 이와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 사람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다.삼국사기 권34∼36(지리 1∼3)의 지명에 의하여 그려진 삼국의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장수왕 63년(AD 475년) 이후의 고구려 최전성기를 기준한 것이다.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거의 고려되어 있지 않다.따라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무시한 중요 사건들을 가능한 한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 고대 삼국의 전기 내지 중기시대의 한반도 중부지역은 결코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다.이 때의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 혹은 국내성이었으며,그 남쪽 경계는 압록강 이남의 살수 혹은 대동강이었다.따라서 장수왕이 장악하기 이전까지 고구려는 중부지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삼국사기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 전·중기의 판도를 그려보면 중부지역은 오히려백제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삼국사기 보완 필요 지도로 표시해 본 「삼국 각축과 언어권」을 참고하면 적어도 A지역에 살던 기층민의 언어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더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B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는 거의 무관하였던 것이며,A지역은 77년 동안의 고구려 점령기 이후에는 신라의 북진으로 a,b와 같이 두 지역으로 분리된다.따라서 a지역만이 정확히 1백84년간 고구려의 점령치하에 있었을 뿐 b지역은 겨우 77년간 고구려의 소유였고 오히려 보다 긴 1백7년간은 신라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고구려의 남침으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언어는 백제의 전기중기어인 것이라 하겠다. 백제어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수 있도록 독특하게 형성 발달하였다.백제전기어는 고이왕때(AD 260년)까지의 언어를 가리킨다.아직 부족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 또한 이전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하나의 부족국가에 의하여 부여계어가사용된 단일 언어사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이 시기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 준 언어재는 관직명 인명 지명 등 수십의 어휘 뿐이다. 백제중기어는 고이왕 28년(AD 261년)부터 개로왕 20년(AD 474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이 시기는 이른바 부족국가의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변모한 만큼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믿게 한다.더구나 비류왕 초년(AD 324년)에 「위례」에서 광주(광주)로 천도한 사실과 마한을 멸하여 흡수한 근초고왕때(AD 346∼375년)의 사건은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증언한다. 이 시기의 언어적 특징은 부여계와 한계의 복수언어사회였다는 점에 있다.이 시기는 우리에게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에 분포하였던 1백20여에 달하는 지명 어휘들을 넘겨주었다.특히 왕에 대한 호칭으로 「어라하」와 「건길지」를 사용하였던 점을 복수언어의 한 예증으로 들수 있다.이것들은 중국의 사서인 「주서 이역전 백제」에 소개된 백제어인데 그 기록에 따르면 「어라하」는 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고,「건길지」는 피지배층이 부르던 호칭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기때 크게 변화 이 시기는 또 오늘날과는 다른 수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기본 수사 중에서 「밀(밀=삼)」,「우츠(우차=오)」,「나는(난은=칠)」,「덕(덕=십)」등이 지명어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이 수사체계는 고대 일본어에 수출되어 「mi(삼)」「itsu(오)」「nana(칠)」「towo(십)」 등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백제후기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초년(AD 475년)부터 멸망하던 해(AD 660년)까지의 언어를 말한다.백제어사 7세기에서 이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이 시기는 삼국사기의 1백40여 지명을 비롯하여 인명 관직명 등의 언어자료를 국내외의 고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백제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우리가 오늘날 확보한 백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이 후기 백제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지명의 변천/한강유역 고유지명 거의 백제어/고구려가 점령후 한어화… 복수지명 사용 전해지는 삼국시대의 지명은 한 지역이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미 당시에 수차례에 걸쳐 지명의 개혁작업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명은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뒤 신라 경덕왕(재위 AD 742∼764년)때 상당수가 중국식 2자명으로 바뀌었다.그러나 경덕왕의 개정작업이 우리의 고유지명을 처음으로 한어화한 것은 아니다.그같은 작업은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사벌국이 법흥왕 11년에 상주로,다시 경덕왕 때 상주로 개정된 것도 한 예이다. 지명을 바꾸는 것은 지역을 행정적으로 개편하거나 정비하기 위해 필요했다.또 정복지역이라면 행정적인 필요성 이외에 고유정서를 말살하기 위해서도 요긴했을 것이다.경덕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한뒤 약 1세기만에 지명을 한어로 통일한 것처럼 그 이전 고구려도 장수왕의 남진으로 중부지역을 차지했을 당시 지명개혁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복수지명은 고구려가 점령했던 지역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 비해 훨씬 많다.그러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지명은 거의 하나만이 전해진다.그 지역은 고구려의 본거지로 새로운 이름을 지을 필요성이 그만큼 덜 했던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역으로 고구려가 점령지역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지명개혁을 단행했음을 보여준다.실제로 고구려의 지명이 복수로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어느 하나가 한역되어 있다.고구려 시대에 이미 고유 지명이 한역되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따라서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고구려지명은 정복사업이 활발했던 장수왕 당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한강유역의 지명 가운데 고유지명은 대개가 백제의 전기지명이라는 것이다.
  • 뒤늦은 국가체제 정비(백제를 다시본다:14)

    ◎5세기말에야 마한 완전 통합/부여족 남진정복… 토착세력과 갈등/방·군·성 지방행정망 갖춰 중앙통치/남북으로 긴 영토 사회통합 장애… 군정적 지배 의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은 자못 다르다.주지하듯 백제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온 부여주의 일파가 마한사회의 북방인 현재의 서울시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립한 일종의 정복국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족의 이동 정주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백제국가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한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어 발전 도상에 있던 백제 소국을 부여족이 정복한 것인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그것은 어쨌든 백제국이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건국사정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집단 간의 이중성이랄까 괴리현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백제의 정치·사회사는 바로 이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그 지형적인 특수성이었다.마한의 영역은 서해안을 끼고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차령산맥과 노영산맥이 달리고 서해로는 금강과 영산강이,남해로는 섬진강과 탐진강이 각기 흐르고 있어 여러개의 고립된 지형구를 형성하였다.그 결과 마한사회는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진한·변한사회에 비하면 현저하게 지역적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더욱이 서해안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마한의 50여개 소국들은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중국군현인 낙낭군이나 대방군과 자유로이 접촉했다.이는 백제 주도하의 마한세력 통합을 장기간 방해했다.신라가 진한 12개국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폐적인 자연환경에 힘입은 바 컸었다.그런데 마한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지역성을 고집하는 다양한 지역사회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다원적인 지역적 구성이 백제의 정복자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 한몫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마한정복을 시조 온조왕 27년(AD9년)때의 일인양 기술했으나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마한의 최북방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에서 국가형성에 성공한 백제가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사회 전체를 호령하게 된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 근소고왕 때의 일로 짐작된다.다만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백제가 곧바로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에까지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최근 전남지방의 고분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측해 볼 때,백제가 이 지방의 마한세력을 명실공히 통합하여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백년쯤 뒤인 5세기 후반,즉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년)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사실 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유역까지는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으며,그대신 이곳에는 옹관묘(독무덤)가 여전히 유행했다.이 지역에서 옹관묘가 석실분으로 바뀌는 시기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마한영역을 통합한 뒤 백제조정이 들고 나온 통치철학은 중국의 고전인 「주례」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 느낌이 든다.이 「주례」는 중국전국시대 말기에 장차 출현하게 될 대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위한 일대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기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통일적·체계적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비(부여)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바위 뒤에 두었다가 얼마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는 금강 대안의 규암면 울성산성 밑 호엽사터의 바위를 정사암 혹은 천정대라고 하는데 이 「천정」이란 말 자체가 「주례」에서 나온 것이다.즉 이 책의 천관 가재조에 의하면 천관은 3백60관을 총섭하는 최고의 관직이다.그러니까 천정대란 바로 그같은 천관의 정사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주례」의 통치철학 백제의 중앙정치제도를 보면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 중에는 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적지않다.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 하관 사마조의 「이좌왕,평방국」(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이라 한데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 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매우 우아한 한식으로 되어 있다.이는 토착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구려·신라의 관등 이름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편 지방통치조직은 국가권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차츰 정비되어 갔다.한성시대만 해도 전국의 각 지역세력의 대표자를 통해 성과 읍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근초고왕의 대정복사업이 성공리에 완수된 뒤 백제는 전국을 22개의 행정구역(당노)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보내어 통치했다.이같은 담로체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더욱 충실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백제가 정연한 통치망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538년 부여로 천도한 뒤의 일이다.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다.이 사비시대에 백제는 고사성(전북 고부)을 중방으로 하여 전국을 크게 5개 방으로 구획하고 37개 군을 두어 2백개 내지 2백50여개에 달하는 성을 장악했다.이 성은 후일의 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중 가장 취약 이같은 방·군·성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권력은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침투할 수 있었다.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현저하게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민정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대체로 보아 군정적 지배로 일관한 듯하다.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백제사회의 구성이 본디 이중성을 띠고 있는 데다가 지역공동체의 세력이 너무나 강고하여 국가권력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쨌든 이는 고구려나 특히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때 백제의 커다란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신라는 지역사회의 말단인 촌에까지 도사와 같은 행정관을 파견한다거나 혹은 지방세력가인 촌주에게 관등(이른바 외위)을 준다거나 하여 이들을 최대로 지배망에 포섭한 기반 위에서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원인을 통치체제 면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패망후의 마한/나주지역 중심 지방호족 할거/고유의 독무덤·금동관 출토가 증거 백제가 마한사회를 통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가 비록 정복국가의 기틀을 잡았을지라도 토착세력을 쉽사리 편입시키지 못했다.이같은 정황은 오늘날 전남북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고대묘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독무덤떼(옹관묘군)가운데 하나인 제9호분이다.마한의 전통묘제이기도 한 5∼6세기경의 이 무덤에서는 큰고리칼(환두대도),금동관,금동제신발(김동식리)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금동관은 9호분 안에 묻힌 8개의 독 가운데 가장 큰 이음독(합구식옹관)머리부분에서 나왔다.맞새김의 초화무늬 솟을장식(입식)을 단 외관안에 모자가 붙은 수준급 금동관으로 평가되었다. 이같은 유물은 5∼6세기경 까지도 영산강유역에는 막강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면 나주지역 중심의 당시 영산강유역은백제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한 가운데 지방호족들이 어느정도 할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따라서 기층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묘제 역시 마한고유의 독무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나주지역에 백제의 묘제가 수용되는 시기는 6세기말∼7세기초다.이 시기는 사비시대에 해당하는데,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난다.지난 1978년 당시 전남대 최몽용교수(현 서울대)가 발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 제3호분이 이 시기의 백제계통 무덤이다.돌방과 널길(선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긴목항아리(장경호),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은장도조각,금실,쇠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서남해안에 가까운 마한지역에는 백제의 발길이 더디게 미쳤다.
  • 백제문화권 개발의 방향/지명관(시론)

    지난5월8일에 정부는 충남 공주와 부여 일대를 백제문화권으로 크게 개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총 1천9백15㎦에 연간 5백7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8년간 1조1천5백억원을 투입하고 「백만평의 역사촌,40만평의 관광단지및 관광농업단지」를 조성하고 「부여와 공주를 잇는 도로변」에는 「청소년 수련촌과 기업연수촌,노인휴양촌,오토캠프촌」등을 건설할 의욕적인 계획이다. 아마도 이 「백제문화권 개발사업계획안」은 건설부가 작성하여 관계부처및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한다는 순서를 밟는 모양이다.지난해 6월에 이 지역을 「백제문화권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조사를 해왔는데 금명간 최종 학정,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잊어버리다시피한 백제문화가 크게 각광을 받게된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그 어마어마한 계획에 놀라면서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고 기뻐할는지 모른다.사실 관광사업이란 지금 전세계가 열을 올리고 있는 중요한 산업이다. 외화획득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 가득률이 가장 높아서 어느 산업에 못지않게 주목을 받고있다.이번 계획에 있어서도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대일무역 문제도 염두에 두고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백제문화란 그들의 본향인양 매력적이다.앞으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바르게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런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거기다가 요즘 관광객은 유락을 찾기보다는 문화를 찾는다고 하지 않는가.그러므로 이번에 뒤늦게나마 「백제문화권」대개발을 구상하게 된 것을 환영하면 했지 까탈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그런 뜻에서 몇가지 주문만 달고싶다.무엇보다도 지방의 시대가 온다는 세계적인 추세속에서 이번 계획은 중앙에 있는 정부가 너무 「과중부담」을 떠맡으려고 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지역 스스로가 그 지역발전을 모색하게 돼야한다.그것을 정부는 격려하고 도와야하지 않겠는가. 이번 계획에 지방의 그러한 자발적인 참여가 어느정도였는가를 알고 싶다.지역경제의 발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대기업이 세우는 호텔이니 골프장이니 휴양시설이니 하는 것만이 서고 그 지방거리는 낙후된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게 된다. 그 지역의 자연과 역사가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아니 더욱 풍부해져야 한다.문화재에는 될수있는 한 손을대지 말아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역사가들이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의 본향인 그 옛 문화재를 우리는 때로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때로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명상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재란 찾는 사람이 없을 때면 퇴락하기 쉽다.명화에는 감상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옛 문화의 터전도 찾는 사람,관광하는 일정한 길손들을 필요로 한다.문화재는 그 고장 거리와 하나가 돼 있어야 한다.그것은 그 거리와는 동떨어진 관광단지의 고급호텔에서 자동차로 휙 한번 돌아볼 고장이 아니다.관광객들은 그 고장 거리에서 그 고장 음식을 들고 옛 시대를 기리는 그 고장 물건을 살수 있어야 한다.그래서 그 고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경주의 관광개발이 한낱토목공사에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씻을수가 없었다.고대문화는 그대로 우리 가슴에 와닿아야 하는데 왜 그것이 위락시설과 혼합돼 있어야 하는 것일까.그런 시설이 경주를 활성화시키고 경주거리를 아름답게 하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 일본 서북쪽 해안에 가나자와(김택)라는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매력있는 도시일수 있을까 그들은 모색해왔다.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려고 했다.인구 80만의 좁은 도시에 연간 6백만의 관광객이 모여든다.가나자와시의 예산의 10분의1은 관광수입에서 나온다고 했다.정말 부유하고 깨끗한 거리였다.그 도시를 떠날 때 그곳 시장이 들려주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위하여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때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것이지요.관광객을 끌어들이려고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 미 만화영화 산업(월드마켓)

    ◎「컴퓨터 영상술」 발달로 재도약 시동/제작비 싸고 판매망 탄탄… 투자 “러시”/「알라딘」 8억불 수입… 30년 불황 탈출 컴퓨터의 발달로 미국의 만화영화산업이 각광받는 새로운 산업으로의 재도약기를 맞고 있다. 60년대 만화전성기 이후 제작비상승과 TV등장으로 스튜디오 폐쇄등 쇠퇴의 길을 걸어왔던 만화영화산업이 최근 디즈니사가 제작한 「알라딘」이 8억달러를 벌어들이는등 새로운 달러박스로 등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만화영화제작에 앞 다투어 뛰어들고 있다. 특히 IBM·애플등 컴퓨터회사들의 만화제작용 고성능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도입,제작비를 크게 감소시킴으로써 이 분야가 유망투자 종목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만화영화제작붐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만화영화가 다시 인기를 끌게 된것은 무엇보다도 극장은 물론 전세계의 TV매체와 비디오를 통해 직접 가정에 보급할 수있는데다 캐릭터 상품 또한 높은 수익이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사가 제작한 「알라딘」은 지금까지 극장수입 4억7천5백만달러,비디오테이프 판매수입 3억달러와 함께 수천만달러의 로열티로 수천만달러를 벌어들였으며 20세기 폭스사의 TV만화영화「심프슨 가족」의 캐릭터는 1억달러 어치 이상이나 팔렸다. 이에 따라 워너 브러더스,20세기폭스사와 마쓰시타 유니버셜 스튜디오,윌 빈튼,그리고 방송왕 테드 터너의 뉴라인시네마등도 만화영화제작에 뛰어들었으며 디즈니사의 「사자왕」,터너사의 「페이지매스터」,뉴라인시네마의「백조공주」를 포함,현재 12편 이상이 제작중이다. 미국내 극장및 홈비디오 시장만해도 연간 20억달러 정도에 이른데다 해외 판매망도 잘 정비돼 있어 제작이 다된다해도 소화에 무리가 없다는게 제작자들의 판단이다. 현재 이들 제작자들이 특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TV네트워크에 보급하기 위한 성인만화영화.이미 89년부터 일본의 성인만화영화가 수입된바 있어 시장성도 검증된바 있다. 그러나 성인만화영화는 드로잉에서부터 컬러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수작업에 의존하며 대부분 한국과 대만등에 외주를 줘 평균 3천5백만달러의 예산이 소요되는등 제작비가지나치게 높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앞으로 만화영화산업은 비디오기기및 테이프 제작은 물론 만화제작용 컴퓨터 프로그램과 함께 캐릭터를 이용한 셔츠등 의복·학용품등 다양한 산업과도 연관돼 있어 급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 수준높은 금속산업(백제를 다시 본다:13)

    ◎“주도술의 진수” 실납법 응용 향노제조/마한의 우수한 청동·철문화 계승 발전/6세기 삼국중 가장 뛰어난 기술선봬/칠지도·금동용봉향로는 당시 기술의 결정체 국립중앙박물관은 현재 지난해 부여능산리에서 발굴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라는 긴 이름의 백제향로를 보존처리하고 있다.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향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백제 금속문화의 진수다.긴 시간을 뛰어 넘어서 다시 보여준 백제 금속기술의 결정체이기도 하다.역사학자들은 백제가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마지막 사비시대(AD538∼660년)에 이 향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향로가 나온 건물지에 대해서는 왕릉들의 제사를 집행하던 곳이라는 의견과 왕릉에 넣을 부장품을 만들고 기타 제물들과 기구등을 수리하는 공방지라는 의견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왕릉과 관련짓고 있다는 점이다.이 향로가 왕릉과 관련된 성스런 행사에 쓰인 성스런 기물이라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다.왕릉과 관련한 기물은 국가적인 힘을 모아 제작했을 것이고 백제 금속산업의 실력을 한데 모은 것으로도 짐작할수 있다. 백제 금속기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1971년 여름,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의 무덤을 발굴했다.동방의 투탕카멘 왕 무덤이랄수 있는 유적이다.출토된 유물 가운데 뛰어난 금속제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왕의 위엄을 보이는 금동용봉손잡이 큰칼,왕권의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사람과 동물이 조각된 사신경(청동거울),3가지 금속으로 구성 제작된 등탁은잔이 있다. ○과학적 이론 바탕 등탁은잔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받침은 구리 합금이며,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고 손잡이는 연봉 모양이지만 꽃받침은 금이다.그리고 표면은 받침에서 뚜껑까지 역동하는 용과 겹겹이 핀 연꽃,봉래산과 그 위를 나는 봉황새등 무늬들을 새겼다.향로와 미술적모티브가 같다고 볼수 있다.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백제의 높은 금속기술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금속산업 입장으로 견주어보자.채광 제련 용범 합금 주물 분야는 독립적 설비와 분업적 전문기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하다.이 요소들은 과학적 이론과 경험의 토대에서 실력이 나온다.이러한 요소는 지금도 국력이다.무령왕릉의 제품보다 1세기 늦은 백제향로는 이같은 과학의 힘으로 완성한 것이다.늦은 만큼 더 발달된 터전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우연히 중국제품이 부여 땅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볼수는 없다.필자는 무령왕이 왕의 통치권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영면의 잠자리를 샀노라는 매지권까지 부장한 점도 긍지에 찬 백제문화의 기세를 우러러 볼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앞서 백제가 건국하여 세를 확장한 제1시기 한성시대(4세기초∼475년)에는 칠지도가 있다.일곱개의 가지가 벋은 철검(길이 83.9㎝)은 백제왕이 369년(태화 4년)에 일본의 왜왕에게 내린 칼로 영구히 잘 보존하라는 뜻이 담긴 글귀가 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이 칼은 일본 천이시에 있는 이소노가미신사에 보존되어 있다.지금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도 역시 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증거이다. 백제인의 조상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대로 청동기 문화를 크게발달시킨 예맥이라 부르는 고구려와 같은 부여족이다.고고학적으로 고찰하면 이 종족은 중국 황하강 북부의 오르도스 지역에서 요령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요령식 동검문화(BC8세기)를 크게 융성시키고,계속하여 우리나라로 남하하면서 드디어 독창적인 한국식 동검문화(BC4∼3세기)를 꽃피운다.여기에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과 철기문화를 받아 들이면서 고대국가를 발전시킨다.절정의 한국식 동검문화는 마한소국들의 문화이며 이 지역은 백제가 세를 모아 터를 잡은 오늘날의 경기·충청 지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명한 부여 송국리 청동기 유적과 대전·공주지방 일대에서 출토된 청동기(동경 동령 동검 동과 방패형동기등)는 종류별로 지정 문화재급이다.이들 청동기가 이 지역에서 직접 만들어졌다는 것은 용범의 출토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됐다. ○「아연­청동기」 특징 청동기는 대체로 쌍합법으로 주조가 가능하나 팔주령같이 구조가 복잡하거나 기하학적 무늬를 현미경적 작업으로 새긴 다뉴세문경은 소위 실납법이라는 주물기술로만 가능하다.특히 제조기법이 신비의 수수께끼로 알려진 이 세문경은 지금도 필자를 비롯한 많은 전문 과학자들이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92년7월 「한국의 청동기문화」특별전을 열면서 낸 도록에 청동기의 합금 조성비율을 각 유물별로 명시했다.이 분석치를 대표치 비율로 구하면 구리(Cu) 대 주석(Sn) 대 아연(Zn)=7.6대1.6대0.8이다.우리의 주석청동기가 중국과 다르게 「아연­청동기」라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이 비율은 금속학적 견지에서 보면 최고 강도와 주조성의 완전한 효율을 터득한 상태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진행중인 백제향로의 분석비율은 앞으로 확실한 값이 나오겠지만 1차로 7.8대1.6대0.3으로 나왔다.그리고 표면은 금을 수은(Hg)에 녹여 도금했으며 두께는 10∼20마이크로m 정도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여기서 우리는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라는 시대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동기는 역시 「아연­청동기」인 점을 알수 있다.이 점은 고고학이나 과학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따라서 백제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전통적 과학기술 바탕위에서 실납법 제조로 결론지을수 있다.그리고 표면 금치장 방법도 6세기초의 백제는 금박덧씌움법을 무령왕릉의 머리받침과 다리받침목에서 보여주고 있으나,구리합금재 향로는 수은 아말감법에 의한 손도금으로 처리했다.이로써 우리는 백제가 금치장의 여러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점도 알수 있게 됐다. 백제의 금속산업은 삼국중 가장 뛰어났으며 동북아시아 주변국가들에게도 기술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이 분야의 연구는 자료의 부족으로 미진했으나 향로의 출현이 백제과학의 실상을 밝히는데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이다.따라서 백제향로의 보존처리가 완료된후 많은 과학자들의 분야별 연구를 기대해 본다. ◎도금술 전래/BC1세기 서아시아서 유입 추정/사비시대땐 높은 기술의 아말감 수은법 사용 금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나타나고 있다.황금빛으로 비유되는 찬란한 광택은 인간으로하여금 금을 더욱선호하게 만들었다.금은 귀금속이기 때문에 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그래서 연금술과 함께 도금술까지도 발전시켰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역시 금을 선호한 고대인들의 욕망을 도금을 통해 대체한 사비시대 백제유물이라 할 수 있다.1천4백여년을 땅속에 묻혀있었음에도 황금광택을 발산하는 까닭은 고도의 도금술에서 찾아진다.최근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진 삼국시대 금동유물 도금분석에서 고대도금술의 신비가 어느정도 밝혀진 바 있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도금의 역사는 명확치 않다.다만 BC1세기쯤 서아시아,서역,중국을 거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현재까지 나타난 가장 오래된 도금유물로는 AD3세기쯤 원삼국시대 널무덤 출토품인 금박유리구슬이 있다.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및 가야 고분 등에서는 말갖춤,신발,관장식,관모,불상등의 도금유물이 출토되었다. 최초의 도금을 기술한 역사기록은 「삼국유사」진흥왕 34년(AD573년)의 황용사 장육상 조성과 관계된 내용.여섯팔 길이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도금하는데 금 1만1백98푼을 썼다고 적었다.백제의 도금관련기록은 없지만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유물 가운데 익산 미륵사 절터에서 나온 금동소탑등 3점의 도금제품에 대한 도금분석이 시도되었다.그 결과 「아말감수은법」도금제품으로 가려졌다. 아말감수은법의 도금은 금이 수은속에서 녹으면 수은처럼 액체가 되기때문에 이를 청동제품에 칠하는 방법이다.수은에 용해된 금물을 칠한 뒤에는 수은의 비등점인 3백75도까지 열을 가한다.이 때 수은은 증발해버리고 금피막만 남게되는데,몇차례 같은 방법을 되풀이해야 완벽한 도금이 된다.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제작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여 부소산성출토 금동맞새금장식품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도금분석이 이루어졌다.결과는 역시 아말감수은법의 도금으로 상당한 기술수준임을 보여주었다.능산리 출토 금동향로의 1차 도금분석에서 역시 아말감수은법에 의한 고도의 도금기술이 구명되었다.그러나 연금술은 물론 산지구명등의 숙제를 안고있다.
  • 홍등가:중/일제때 다동·인사동에 공창 생겨(서울 6백년만상:30)

    ◎해방후 미군정서 폐지… 사창가 번창/용산 미군기지 주변엔 기지촌 들어서 서울의 다동·무교동은 예부터 술집동네였다.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술시중을 들던 기생들이 이곳에 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이 일대 다방골에 기생조합이 생긴 것은 1913년. 관기에서 풀려난 기생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기생조합을 결성했다.당시 이들은 출신지방별로 따로 모여 조합을 만들었다.광교쪽에 자리잡은 광교기생조합은 서울출신과 남도출신들이 많이 모였고 다동기생조합은 거의 평양출신 기생들로 결성됐다.특히 한참뒤에 한성기생조합으로 이름을 바꾼 광교기생조합은 당시 서울에서도 내로라하는 명기들이 많았다. 초기의 기생은 긍지가 높아 아무리 돈많은 부자라도 호락호락 몸을 내던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장안에도 점차 매춘업이 일반화되어 갔다.사창이 늘어남과 동시에 공창은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사창이 번창하게 된 것은 당시 창기·기생들 모두가 일정액의 세금을 냈으나 매춘은 어디까지나 밀매음이었기 때문에 탈세가가능했다.고급 일본요정의 일인 예기,또는 한식 요정기생들의 매음은 당시 고위직 관리및 실업인들의 성욕처리 대상으로 편의상 묵인되고 단속에서 제외됐다. 우리나라에서 공창제의 본격적인 모습은 1904년 6월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식 유곽으로 나타났다.일제는 우리민족의 인권을 탄압하고 성을 유린하면서 이 땅에 공창제를 실시하였고,급기야 30∼40년대의 종군위안부정책도 이같은 공창제도의 연장선에서 감행했다. 서울의 공창지역은 중구 을지로2가 묵정동,다동,인사동에서 자리를 잡아갔다.인사동의 경우 「사람을 죽이는 곳」으로 알려지기도 했다.중구 쌍림동 일대의 「신마치 유곽」은 매음거리라는 표시를 하게 하였고,작부 몇명이라는 글귀로 손님을 끌기도 했다. 이 일대에서 하룻밤에 벌어들이는 화대는 당시 돈으로 평균 50여만원(쌀 한가마니 6백원)이었다. 서울의 유곽은 생긴지 44년만에 미군정청의 포고령에 의해 폐지됐다.그러나 이 법령의 발포는 상당수의 창기들을 공창에서 사창으로 전업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용산의 미8군 본부를 에워싼 후암동과 이태원 일대에는 기지촌들이 생겨났다.기지촌문화는 미군과 「양공주」를 중심으로 술집과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외제품 판매책,암달러상,포주등을 형성하며 확산되어 나갔다. 60년대들어 도농간의 불균형 발전이 심화되면서 빈곤층 여성이 「무작정 상경」하여 기지촌을 비롯,서울역·영등포·청량리「588」·종로3가 등지에 집단 거주하면서 포주와 공생관계를 맺게 된다.이들 여성은 흔히 「창녀」로 불리는데 절대빈곤으로 「거리의 꽃」이 된 경우다. 그러나 70년대들어 우리경제가 산업화과정에 접어들자 서울의 「홍등가」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 갔다.50년대이후 60년대까지 매춘의 대명사격이었던 창녀라는 그 서럽던 이름도 거의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즉 상대적 빈곤때문에,또는 보다 쉽게 돈을 벌거나 쾌락을 얻기위해 고학력자나 10대·20대층이 향락업소를 연결고리로 호스티스·콜걸·요정기생·면도사·안마사등으로 변신,「서울의 요지경」속을 거닐게 됐다.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백제의 불교미술(백제를 다시본다:10)

    ◎7세기초 반가사유상 “동양 최고” 평가/금동 등신불… 자비미소 살아있는듯/석불재료는 6세기 납석에서 화강암으로 발전/최초 금동불상은 6세기 선정인좌상… 공예기술 바탕 걸착 양산 백제는 비록 영토는 크지 않았지만 일찍이 그 문물은 동아시아에서 작으면서 빛을 발하는 금강석 같은 존재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거의 같은 시기의 서기384년에 불교를 중국의 동진으로부터 전해받았으나 불상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150여년이 지난 6세기초부터였다.한성시대(4세기초∼475년)나 웅진시대(475∼538년)에도 불교사찰들이 건립되었으나 아직까지 이 두 도읍지에서 백제불상이 발견된 예는 없다.그런데 웅진시대에는 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양의 연호를 따서 대통사가 건립되는등 몇 유적에서 웅진시대의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또 최근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묘실내부 전체를 연화문전으로 장식하고 왕과 왕비의 두침과 족침에 연화화생을 표현하는 등 극락왕생의 염원을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다. ○극락왕생 염원 표현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웅진시대에 예배대상인 불상이 마땅히 조성되었어야 한다.그러나 지금까지 공주지방에서 웅진시대의 불상은 단편조차 확인되지 않고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현 단계로는 어떠한 추측도 할수없다.고구려의 경우도 539년에 만든 연가칠년명금동여래립상이 현재로는 가장 오랜 불상이니 이로 미루어 백제도 6세기초,그러니까 다시 부여로 서울을 옮긴 사비시대(538∼660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불상의 조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5세기의 청동제 선정인좌상은 백제것이 아니고 중국제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상은 그와 같은 선정인불상인듯 한데 실제로 사비시대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보이는 불상은 두 손을 배에서 모은 부여군 규암면 신리 출토 선정인좌상이었다.그 만듦새는 투박하고 서툴러서 인체를 표현하는 불상제작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백제는 곧 그동안 축적된 금속공예기술을 바탕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중국의 북위 내지 동위시대의 불상양식을반영한 훌륭한 불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즉 부여 정림사지 출토 납석제삼존불좌상,서산군 운산면 보원사지출토 금동여래립상,부여 군수리사지출토 납석제여래좌상과 금동보살립상,부여군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립상등이 그것이다.모두 백제의 초기 불상을 대표하는 것들이다.이들 불상은 힘있고 우아한 모습은 그당시 중국불상을 능가할 정도이며 더 나아가 백제 특유의 조형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부여 군수리사지출토 김동보살립상은 온화한 미소,날카로운 천의의 표현,적절한 신체의 비례등 자신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백제특유의 정채를 보여주는 백제불상의 백미라 할수 있다. 특기할 것은 백제는 일찍이 납석이란 석재를 써서 불상을 조각한 일이다.부여지방에 많은 납석으로 불상을 조각한 것은 중국에도 없는 일이며 우리나라에서도 백제가 처음이었다.납석은 희고 약간의 빛을 발하므로 백제인들은 옥석대신 납석을 써서 옥제불상의 효과를 내려한것 같다.또 납석은 그리 단단하지 않으므로 정교하게 조각할수 있었다.그리하여 백제인은 작은 불상뿐만 아니라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처럼 등신대의 납석제 불상까지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므로 거대한 납석덩어리의 네 면을 다듬어서 네면에 불상을 새긴 예산의 사면불은 백제의 석불로서는 기념비적이라 할만하다. 7세기에 접어들면 백제는 불교미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660년 백제가 망하기까지 중국의 북재,수,초당의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불상들이 만들어졌다.7세기초의 불상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저 유명한 국보83호 금동련화관사유상이다.북재에는 백옥으로 만든 20㎝내외의 작은 사유상들이 많이 조성되었으나 백제에서는 등신대의 크기로 만들어 독립적인 예배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백제인들은 사유상에 온갖 힘을 기울여 백제나름의 조형성을 살렸다. ○손가락마다 생동감 아마도 이 금동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가운데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 할만하며 더 나아가 동양의 그당시 고대불상에서 이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소년의 애띤 얼굴엔 잔잔한 자비의 미소가 흐르고 검지와 중지를 살짝 뺨에 댄 오른손가락과 왼쪽 무릎에 올린 오른 다리의 발목에 내린 왼손가락은 마디 마디가 생동감에 차있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대좌에 느러뜨려진 보살의 옷자락은 자유분방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가 미풍에 약간 휘날리듯 표현되어 있어서 역시 생동감을 주고있다.이 사유상은 이와같이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으로 생명력을 살리고 있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영원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흔히 이 사유상은 일본의 경도 광륭사 목조사유상과 비교되고 있다. 두 불상은 비슷한 점들이 많아 광륭사상이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라 하나 다른 점들도 많아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어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한편 7세기에는 화강암이란 새로운 재료를 써서 불상을 조각하였다.화강암 역시 그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각재료로서 채택하지 않던 소재인 것이다.화강암은 경도가 강하고 입자가 굵어서 표면처리를 매끄럽게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조각하기에 부적당하였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우리나라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석탑을 건립하고대형불상을 조성하였으니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 백제가 처음으로 착상한 것이다.불상의 경우 전북 정읍 신천리 석조여래립상이 원각상으로 조각되었을뿐 대체로 암벽에 불상을 새긴 마애불이 조성되었다.말하자면 처음에 납석을 재료로 썼으나 부서지기 쉬운 석질이므로 화강암이란 재료를 선호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신앙 자유롭게 표현 그 대표적인 예가 태안 마애삼존불과 서산 마애삼존불이다.태안 삼존불은 보주를 손에 든 작은 보살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우람한 모습의 아미타상과 약사여래를 둔 삼존형식인데 이러한 도상은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다.또 서산 삼존불도 중앙에 여래립상이 있고 좌우에 사유상과 보주봉지보살립상이 협시하고 있는 특이한 도상이다.두 예가 모두 조각기법이 우수하고 독특한 도상이어서 7세기에 이미 독자적 조각기법을 개발하고 백제특유의 신앙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하였음을 알수 있다. 백제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창력을 발휘하여 화강암이라는 재료로 석탑형식과 양식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상에 있어서 백제나름의 형식과 양식을 발휘하였다. 백제미술은 단순하고 단아하며 정밀하고도 생명감이 있다.또 그 풍토성처럼 부드럽고 고요하여 적조미가 있다.그러나 애석하게도 백제는 그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제미술은 요절한 천재와 같다. ◎반가사유상/삼국 독자적 신앙배경서 유래/싯다르타태자 사색 모습… 2점 국보 지정 삼국시대 불상의 형식은 불교 수용경로에서처럼 중국의 유행과 깊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6세기 전반 중국에서 성행하던 미륵·석가는 6세기 후반에 삼국의 불상에 반영됐다.상당한 시간적 거리를 두고 들어왔다. 그러나 불교가 삼국의 대중적 신앙으로 발돋움한 7세기에는 중국의 유행과 관련이 없는 독자적인 불상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불상이 있다면 반가사유상이다.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거의 소멸해버린 서기 600년을 전후해 삼국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불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의 독자적인 신앙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반가사유상의 유행에 대한 미술사학자들의 견해는 대개 이런 쪽으로 일치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싯다르타태자의 모습이다.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의 자세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싯다르타태자는 이같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됐다.그러나 사유상은 인간을 구원하는 절대자는 아직 아니다.그럼에도 중요한 예배의 대상이었다.한국인은 「깊은 사색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절대자가 되기 이전 사색의 단계까지를 서슴지 않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대 사유상에 대한 숭앙은 세계미술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조각품들을 남겼다.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78호 「금동일월식반가사유상」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보 83호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이다.
  • 「장기읍성」「우금치 전적비」/사적 386·387호로 지정

    문화체육부는 최근 경북 영일군 장기면 읍내리 127의2 「장기읍성」과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의1 「오금치 전적지」를 각각 사적 제386호와 제387호로 지정했다. 장기읍성의 사적지정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1백9개소의 읍성 가운데 사적 등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는 곳은 모두 25곳으로 늘어났다. 우금치 전적지는 1894년 9월 당시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한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5년)중심의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패한 최후의 격전지.이 일대 1만5천7백여평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그동안 논란을 빚었던 위령탑 아래쪽의 주유소 건립계획은 백지화됐다.
  • 전봉준 피노리서 관군에 잡혀(동학의 함성을 찾아서:6·끝)

    ◎우금치전서 대패… 주력부대 뿔뿔이 흩어져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라도 금구·원평까지 쫓겨 거의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봉준은 정읍의 입암산성에 잠시 머무르다 갈재를 넘어 순창 피노리로 들어갔다.전봉준은 그곳에서 김덕명·최경선등 동지들과 다시 기병할 것을 모의하다 관군에게 붙잡혔다.1894년12월2일 밤이었다.전봉준은 곧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됐다. 한편 김개남은 우금치 이후 청주에서 또다시 패퇴해 태인으로 숨어들었다 뒤따른 강화병방 황헌주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붙잡혔다.전봉준이 체포된 바로 그날이었다.김개남은 전주감영으로 압송돼 12월3일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 사형에 처해졌다.손화중 역시 고창에 잠복해 있다 부락민들에 의해 관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됐다.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속속 체포되자 법무아문에 임시재판소가 설치됐다.이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백7명이었다.이 재판에서 총대장인 전봉준을 위시해 손화중 최영남 김덕명 성두한등 5명에 사형이 선고됐다.재판은 일본군이 무차별 학살을 은폐하고 형식적인 절차를 갖추어 공정히 처리하려했다는 인상을 주려는 책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재판의 문초관 가운데는 내전정퇴서울주재일본공사가 끼어 있었다.전봉준에 대한 문초는 모두 6차례 이루어 졌다.기록에 따르면 문초관이 전봉준에게 『고부군수에게 피해를 입은 일도 없는데 왜 봉기했는가』라며 1차기병의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이에 전봉준은 『일신의 해를 위해서 일어섰다면 어찌 남자의 일이겠는가,인민의 괴로움을 없에 주려함이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그는 또 2차기병에 대해서는 순전히 일본의 침략행위로 말미암은 항일투쟁이었음을 분명히했다. 전봉준은 교수대 앞에서 가족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는 법관의 말에도 의연했다고 전해진다.『다른 할말은 없다.다만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피를 뿌려주어라』 1895년3월29일이었다. ◎순창 피노리/동학혁명의 횃불 꺼진 곳/쌍치서 6㎞… 국사봉아래 작은마을 순창 피노리마을은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에게 붙잡힘으로써 동학혁명의 마지막 횃불이 사그러든 곳이다.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지금도 전봉준이 이곳에 몸을 숨긴 이유에 대해 머리가 끄덕여 질 만큼 깊은 산골이다. 쌍치는 정읍에서 최근 깨끗하게 포장된 산길을 따라 순창으로 가는 중간쯤에 있다.피노리는 쌍치면 소재지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옥정호가 있는 산내면쪽으로 비포장도로를 시오리쯤 가면 나타난다. 피노리는 하늘을 가로막은 해발 6백55m 국사봉 아래 있는 작은마을.전봉준이 밥을 먹다 관군에 붙잡혔다는 주막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 구멍가게 뒤편이다.경운기가 간신히 들락거릴 정도로 작은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는 십여호의 농가가 이어져 있다.이 집들은 대부분 다시 지어지기는 했지만 TV사극에 나오는 주막을 보는 듯한 집의 구조는 1백년전과 크게 다름없을 것이라는 동네노인들의 이야기다. 내장산이나 옥정호 담양 순창쪽으로 갈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일정에 넣어봄직하다.
  • 보존함으로써 개발한다/오세탁(일요일 아침에)

    초고층아파트 건립으로 천년고도가 사라진다는 신문기사가 났다.개발을 앞세운 주택정책과 이를 빌미로 삼은 건설업자들의 약삭빠른 욕심에 밀려 보존해야 할 천년고도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회고발이다. 필자도 지난 1월 하순에 경주를 찾은 일이 있다.3년만에 본 시가지는 많이 변하고 있었다.작은 언덕인양 바라보이는 왕릉들 사이로 들어선 신흥주거단지에는 단조로운 직사각형의 주택이 널려있고 용강택지개발지구내에 즐비한 아파트는 계림의 아름다운 정취를 무색케 하였다. 그때 받은 충격은 컸다.이른바 「개발」과 「보존」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말이다.하기야 얼마전 김유신장군묘 부근의 충효택지개발지구에 고층아파트를 건립하려던 현대산업개발이 장군묘와 송화산 고분등을 가린다는 각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회사측이 그 사업을 취소한 일이 있었고,지금 현재도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유적보존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듣고 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너무나 어려운 삶을 이어왔다.식민지하에서 민족문화가 말살되고 문화재가 여지없이 파괴되었었다.지금 우리가 공주·부여 어디에서 백제고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70년대에는 개발의 시대라 했다.경제개발에 밀려 정치적자유를 포함해 환경보전이나 문화재보존은 이름 뿐이었고 그것은 80년대까지 이어졌다.그동안에도 그 중요성이 전혀 무시된 것은 아니다.국가기본법인 헌법에 환경권조항과 문화조항이 등장한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규정된 자유권적기본권의 경우와 한가지로 국토개발,경제발전과 남북문제라는 시책아래 번번이 무시당해 온것이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문민정부 출범 1년만에 대망하던 정치개혁법도 여야합의로 타결되었고 경재지표도 희망적이라는 보도가 국민을 안도케 하고 있다.그리고 경재발전을 주도하는 국토개발의 필요성도 국민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개발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를 토대로 해서 우리가 보다 행복해지려는 것이고,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찾고,우리를 알고,우리를 보존하는 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문화유적의 소중함과 문화재보존의 참다운 뜻이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스크랩에서 1977년3월15일자 서울신문 기사를 펼쳐보고 있다.독립문 이전에 관련한 충격적인 사건기사이다.그 후로도 얼마나 많은 문화유적이 행정상의 편의나 개발상의 불가피성이라는 이유로 파괴되고,우리문화를 욕되게 해왔는가. 분명 문화재는 민족예지의 총합체이며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국민적 재산이고 역사의 징표이다.그것은 행복하고자 노력하는 우리 전통의 결정체이며 번영의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기반이다.그러면서 그것은 일단 파괴되거나 변형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가치를 상실한다.이렇듯 문화재보존의 당위성이 뚜렷한 것임에도 지금까지의 정부시책은 이를 소홀히 다루어 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어쩌다 정책의 가중치에서 밀려난 것에 지나지 않다는 변명이 있을지라도 이를 용납할 수는 없다.때를 놓치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에,법이 있다고 해서 방관할 수만은없다.방관해서도 안된다.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국민운동으로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며 우리의 역사를 지켜야 한다.이미 영국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거대한 내셔널 트러스트운동을 전개해 왔으나,일본은 60년대에 와서야 문화재보존국민운동이 정착되었으므로 때늦은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사연을 절실히 터득해야 한다. 그렇다.우리는 과감히 우리를 찾아야 한다.우리의 정치적자유를 위한 운동이 있었듯이 우리를 찾는 문화재보존운동이 하루속히 정착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1972년에 유네스코가 채택한 「문화유적 및 자연유산의 국내적 보호에 관한 권고」에도 있듯이 보존함으로써 개발한다는 방향에서만 가능하다.
  • 동학군,공주우금치서 일군과 결전(동학의 함성을 찾아서:5)

    ◎서울난입 소식에 전봉준 등 전국서 봉기 동학혁명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깨끗한 정부를 표방한 항쟁이다.그러나 외세에 대한 항쟁 역시 민족자존의 의지가 서렸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학혁명은 그 초기부터 「왜인과 양인을 쫓아내자」(축멸양위)는 구호를 내걸었다.이는 외국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항일전쟁으로서의 민족의식을 일깨웠지만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외세와 조우하는 숙명을 겪게되는 것이다. 이른바 전주화약에 이어 집강소가 설치되는등 호남은 일단 위급한 형세를 넘기는 듯했다.그러나 조정내 민씨 일파의 난국수습책에 따른 청나라로부터의 청병의도와 맞물려 1894년6월5일 정여창이 이끄는 청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온다.이어 6월5일과 8일에는 청의 육전대가 아산쪽으로 상륙하기에 이른다. 청의 출병소식을 들은 일본은 이에 뒤질세라 6월9일 군함 3척을 인천항에 투입시키는 한편 육전대를 서울로 몰고들어왔다.일군은 쿠데타를 통해 민씨 일파 대신에 대원군을 옹립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한다.일본군은 7월26일 충청도 앞바다에서 청의 함대에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봉준은 서울에 난입한 일군의 횡포를 소식으로 듣고 귀를 기울이다 마침내 전주에서 기병한다.손화중은 광주에서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 호남 각지역의 남접군 11만5천명과 충청,경기,강원도의 북접군이 삼례에서 합세했다.전국 각처에서기병한 동학군은 일군의 전신선을 끊고 병참기지를 습격하는등 항전에 나선다.이때의 동학군의 활동은 군으로의 성격보다는 동학교도로서 일군에 대한 봉기항쟁으로 기록된다. 당시 관군은 일군과 행동을 같이했다.이때문에 동학군은 담은 안은채 11월9일 공주의 관문격 요충지 오금치·웅치에서 장렬한 최후의 결전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우금치는 어디 있나/농민군이 일군에 참패 당한곳/동학사 있는 계룡산국립공원 지척에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참패를 당한 우금치는 공주시내에서 부여쪽으로 가다 마주치는 첫번째 고개에 있다.오금치는 글자 그대로 소도 못 넘어갈 만큼 가파른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학혁명기념비가 서 있는 고개마루에 서면 장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향해 죽창을 들고 달려드는 농민군의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서 참패한 농민군의 시체를 거두어 한데 묻었다는 송장배미는 거리상으로 우금치에서 십리안쪽이다. 금성여고앞,지금은 논으로 변한 송장배미에서는 몇해전까지만해도 농민군의 유골이 쟁기에 걸려나오곤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공주는 백제의 고도이자 조선시대에는 감영이 있었고 19 27년까지만해도 충남도청이 자리잡고 있었던만큼 찬란한 역사의 고장이다. 그만큼 주위에는 볼거리가 널려있다.시내에 있는 박물관과 송산리 고분군,공산성은 물론 갑사와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 국립공원이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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