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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일반인과 결혼식 올린 日 아야코 공주

    [포토] 일반인과 결혼식 올린 日 아야코 공주

    29일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에서 아야코 공주가 일반인인 게이 모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모리야 케이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지난 6월 결혼발표 당시 공주와 일반인의 결혼으로 화제가 됐다. 일본에선 여성 왕족이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족의 신분을 잃게 되고 왕족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도 연합뉴스
  • ‘강서 PC방 살인’ 김성수 목 문신…일본 애니 ‘나루토’ 닌자 문신

    ‘강서 PC방 살인’ 김성수 목 문신…일본 애니 ‘나루토’ 닌자 문신

    서울 강서구 PC방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성수(29)의 얼굴이 22일 공개됐다. 그러면서 김성수의 왼쪽 목덜미에 새겨진 문신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따르면 문신 문양은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등장하는 닌자부대의 표식으로 추정된다. 닌자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무협만화 나루토는 키시모토 마사시의 작품이다. 1999년 연재를 시작해 2014년 완결됐으며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방영돼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김성수는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암살전술 특수부대’(암부) 대원들이 왼쪽 팔뚝에 새기는 문신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암부는 마을을 수호하는 정예 닌자부대로 동물 모양 가면을 쓰고 활동한다. 암살, 감시, 첩보 등 비밀 업무를 수행한다는 설정이다. 김성수는 이날 오전 정신감정을 위해 공주 치료감호소로 이송됐다. 서울 양천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된 김성수는 이송을 위해 경찰서 밖으로 나오면서 처음 언론에 얼굴을 드러냈다. 비교적 평범한 외모에 안경을 쓴 김성수는 잔혹한 범행을 한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공범 의혹을 받는 동생에 대해서는 “공범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또 피해자 가족들에게 “죄송하다”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뒤 호송차에 올랐다. 김성수는 지난 14일 강서구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모(21)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PC방 손님이었던 김성수는 다른 손님이 남긴 음식물을 자리에서 치워달라고 요구하며 신씨에게 폭언과 살해 위협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김성수를 PC방 밖으로 끌어냈지만 김성수는 집에서 흉기를 갖고 돌아와 PC방 입구에서 신씨를 살해했다. 신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범행 과정에서 김성수의 동생이 아르바이트생의 팔을 붙잡는 등 범행을 도왔다는 의혹이 일었지만 경찰은 동생을 공범으로 보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민담의 역설, 그리고 삶의 역설… 그 안의 부조리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민담의 역설, 그리고 삶의 역설… 그 안의 부조리

    민담의 심층/가와이 하야오 지음/고향옥 옮김/문학과지성사/399쪽/1만 5000원‘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이라는 조건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놀랍다. 고정돼 있지 않은 바람결 같은 과정을 통해 이야기는 깎여 나가고 덧붙여진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장면, 인상적인 부분은 이야기의 척추처럼 깊고 단단하게 남는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 기준은 논리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다. 그렇다면 민담을 오늘까지 전해지게 하는, 계속 읽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저자 가와이 하야오는 일본에 융 심리학을 최초로 소개한 임상심리학자다. 일본 문화청 장관을 역임하는 등 일본 지성계의 거목으로 인정받던 그는 특히 아동문학, 그림책, 신화, 민담에 주목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을, 무의식의 세계를 찾아보려 했다. 이 책에서는 그중에서도 그림동화 열 편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트루데 부인’, ‘헨젤과 그레텔’, ‘게으른 세 아들’, ‘두 형제’, ‘들장미 공주’, ‘충신 요하네스’, ‘황금새’, ‘수수께끼’, ‘지빠귀 부리 왕’, ‘세 개의 깃털’이 차례차례 관찰대 위에 오른다. 저자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자기실현을 이루는 삶의 과정 하나하나를 민담과 견주어 이야기한다. 그는 이야기 속의 대화와 행동, 도구, 숫자 등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상징을 찾아내고 해석한다. 아무 말 대잔치 같던 이야기가 사실은 대단히 정교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민담의 역설은 삶의 역설을 반영하고, 민담의 부조리는 삶의 부조리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민담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삶에서 늘 접하게 되는 선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저자는 말한다. “민담은 어떠한 물음에 대해서도 대답을 마련해 두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도 있고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도 있다.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뒤편의 부록에 따로 실어,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도왔다. 그러나 그 이야기 말고도 동서양을 망라하는 무수한 이야기가 불쑥불쑥 올라온다. 거기에 자신이 심리치료를 하면서 만났던 내담자들과의 경험이 겹치면서 이야기는 생생한 의미를 띤다. 민담이 그토록 강조하듯, 삶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위험과 고난을 기꺼이 지불할 때 이루어지는 성장과 자기실현에 대해 민담처럼 효과적으로 알려 주는 장치는 흔치 않다. 이 책은 1977년에 출간돼 40년의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랑받으며 일본인들의 ‘인생의 처방전’ 역할을 해 왔다. 이 책을 계속 찾게 하는 힘은 또 무엇일까. 민담의 힘은 이 책 안에도 담겨 있다.
  • 서경덕·알베르토·다니엘, ‘유관순 열사 순국일 실검 프로젝트’

    서경덕·알베르토·다니엘, ‘유관순 열사 순국일 실검 프로젝트’

    “9월 28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한국 홍보 전문가로 알려진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와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와 다니엘 린데만이 ‘유관순 열사 순국일’인 28일 ‘대한민국 역사, 실검(실시간 검색) 프로젝트’에 나섰다. ‘대한민국 역사, 실검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에 맞춰 그날의 정확한 한국사 지식을 이해하기 쉬운 카드뉴스로 제작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 퍼트리는 대국민 역사교육 캠페인이다. 서 교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이 캠페인은 팔로워 스가 많은 셀럽들과 함께 펼쳐 나가는데 이번 9월에는 방송인 알베르토와 다니엘이 함께 동참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몇 달 뒤면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게 된다”며 “이를 기념해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 관한 일문, 사건 등의 다국어 영상 제작 및 SNS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지난 17일에도 방송인 안현모와 래퍼 라이버 부부와 함께 ‘한국광복군 창설일’을 기억하는 실검 프로젝트에 나선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 병천면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 고향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다.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을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해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맞이했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열사는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했다. 열사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또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 김구응 등과 만나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옛 천안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 일대뿐 아니라 청주와 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시위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 3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곧이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한 오후 1시쯤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쓰러졌다. 열사는 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숨어버렸다. 시위 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쯤, 지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자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이 감행됐다. 시위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일제의 만행으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4시쯤, 열사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열사는 일본 헌병에게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공주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열사는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학생 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을 만났다. 유관순 열사의 가족은 모두 독립만세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애국투사가 됐다.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열사는 이에 불복해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7년형이 확정돼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열사는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 모진 고문으로 1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전 11시 천안 병천면 소재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천안시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순국 제98주기 유관순 열사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제에는 심덕섭 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기념사업회원, 시민,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했고, 문재인 대통령 명의 추모화환이 증정됐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서른살 춘천인형극제 28일부터 엿새간 열린다

    서른살 춘천인형극제 28일부터 엿새간 열린다

    강원 춘천인형극제가 올해로 30회째를 맞아 다채로운 볼거리로 관객을 맞는다. 21일 춘천시에 따르면 추석연휴가 지난 오는 28일부터 내달 3일까지 엿세 동안 춘천인형극장, 축제극장 몸짓, 시청 등에서 춘천인형극제가 펼쳐진다. ‘30년의 여정! 인형, 세상으로 번지다!’를 주제로 모두 130회에 걸쳐 인형극이 열린다. 이번 춘천인형극제에는 국내 10개팀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해외 8개팀이 참가한다. 세계 인형극축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수상하고 세계 각지에서 450회 이상 공연된 ‘Hanging By a Thread’를 비롯해 폴란드, 보스니아, 세르비야 등지에서 호평받은 스페인 극단의 금속 고철 인형극 ‘The game of time’ 등이 무대에 오른다. 국내에서는 서울어린이연극제 최고인기상, 김천국제가족극연극제 대상 등을 수상한 극단 이야기꾼의 책 공연의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등 국내 대표 극단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일반 참가작으로는 극단 아산의 광대놀이극 등 18개 작품이 출품됐다. 인형극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인형극 워크숍도 마련돼 이탈리아, 일본, 미국, 스페인의 인형극 전문가를 초청해 머펫 만들기와 그림자 관절인형 만들기 등이 열린다. 어린이를 위한 슬라임 만들기, 부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와 부대행사도 마련 된다. 개막 당일인 28일 오후 7시에는 춘천시내 팔호광장에서 시청 광장까지 국내 최대의 인형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춘천농악대를 선두로 하는 퍼레이드는 이탈리아 지미 데이비스가 제작한 4m의 대형 괴물인형, 춘천인형극제 마스코트인 코코바우 등 각양각색의 인형들이 행진하며 이색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어 개막식은 오후 8시 시청 광장에서 타악기 밴드 라퍼커션의 개막공연으로 막을 올려 영상 상영, 레이저 쇼, 애니메이션 쇼 등이 펼쳐진다. 춘천인형극제는 1989년 처음 개최돼 1995년 문화체육부 우수 지역축제로 선정 되기도했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 인형극 전용극장인 춘천인형극장이 건립되는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인형극 축제로 자리 잡았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주식시장에 ‘메르스 희비’

    주식시장에 ‘메르스 희비’

    전문가 “묻지마 투자는 경계해야”국내에서 3년 만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환자가 발생하면서 10일 주식시장에서도 희비가 엇갈렸다. 백신과 마스크 관련주는 강세를 보인 반면 여행과 항공 관련주는 하락세를 탔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서 제주항공은 전 거래일 대비 4.50% 떨어진 3만 7100원에 거래를 마쳤다. 티웨이항공(-4.28%), 진에어(-2.20%) 등 항공주들은 일제히 약세를 나타냈다. 중국인 관광객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면서 롯데관광개발(-3.56%)과 호텔신라(-3.25%) 등 여행이나 면세점 관련주도 떨어졌다. 카지노 관련주인 강원랜드와 파라다이스도 각각 1.23%, 3.86% 내렸다. 여행·항공 관련주는 추석 성수기를 앞두고 일본 오사카 태풍과 홋카이도 지진으로 1차 타격을 입은 데다 메르스 소식에 2차 충격까지 더해진 모습이다. 앞서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에도 여행이나 유통 등 내수 관련 업종은 치명타를 입었다. 반면 코스피와 코스닥에서 마스크나 백신 관련주는 기대감에 활기를 보였다. 지난 8일부터 전국에 ‘방역 비상’이 걸리면서 마스크 관련 업체인 오공은 장 초반부터 상한가를 찍어 4290원에 마감했고, 웰크론도 전 거래일 대비 20.10% 뛰었다. 메르스 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진원생명과학도 29.89% 상승해 8040원에 장을 마쳤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메르스 치료제 개발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일부 제약·바이오 업체는 가격이 급등락하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장중 한때 9.3% 올랐던 일양약품은 상승분을 반납해 이날 1.34% 오르는 데 그쳤다. 바이오니아는 장 초반 9.9% 올랐으나 하락세를 타면서 전 거래일보다 1.65% 떨어졌다. 아직 환자가 1명에 불과한 만큼 ‘묻지마 투자’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도 메르스 테마주는 6~8주 오르는 데 그쳤다”며 “보건 당국의 결과 발표에 따라 1~2주만 유행할 수 있다”고 짚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어머니인 의친왕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의 마지막은 늘 비극으로 끝났다. 대한제국 왕실의 비운은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게 아흔이 다 돼서야 받아들여져요. 아버지 의친왕의 잘잘못을 역사가 정확하게 평가했으면 합니다. 그게 제 마지막 바람이에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녀’ 이해경(88) 여사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 이 여사는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조선왕조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떤 연유에서 이 같은 생각을 떠올릴까 궁금했다. 이 여사는 고종 황제의 친손녀다. 아버지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순종 다음 서열이었으나 일제의 견제 등으로 동생인 영친왕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다. 동생인 영친왕이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의친왕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독립운동가와의 접촉이 잦았으며,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기도했다가 만주에서 일제에 발각돼 송환되기도 했다. 의친왕은 일제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하며 항일정신을 사수한 왕족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이 여사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미래를 바로 세우려 했던 고종 황제나 의친왕과 비슷한 고민을 문재인 대통령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면서 “생각한 대로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결과’는 ‘운명’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친왕의 13남 9녀 중 다섯째 딸이다. 세 살 때 생모와의 이별,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사동궁(의친왕부·義親王府) 생활, 그리고 8·15 광복, 이어진 6·25 전쟁, 1956년 가혹한 현실을 피하고자 선택했던 도미(渡美) 등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여정을 보냈다. 특히 그는 순탄치 않은 노년을 보낸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매일 술에 빠져서 살았다는 일제에 의한 역사적 오류가 아직도 그대로”라면서 “항일정신이 강했던 아버지는 일제의 핍박과 삼엄한 감시가 본격화되면서 매일 술집에 다니는 척해야 했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의친왕이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이토 히로부미가 대통(大統) 계승을 권유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고, 1919년 중국 상해(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유일한 ‘왕손’”이라면서 “의친왕의 열정과 행동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을 떠난 지 62년, 26살의 꿈도 많고 한도 많았던 앳된 여인에서 이제 미수(米壽)를 넘긴 ‘호호 할머니’로 변한 조선의 마지막 왕녀인 그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일제 치하에서 의친왕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사동궁을 찾았다. 그때마다 노래와 춤으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린 기억이 있다. 특히 길러주신 의친왕비(이하 지밀 어머니)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궁 밖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말을 옮길 수 있어서 조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역사 문헌 등을 보면 퍼즐처럼 맞춰지는 일들이 있다. 어렸을 때 갑자기 일본 경찰들이 집 주변에 늘었다든지,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사동궁을 찾았던 일 등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의친왕의 독립운동 행적은 어떻게 아는가. -미 컬럼비아대학 한국학과 사서로 27년간 일하면서 많은 한국 역사책과 자료를 접했다. 거기서 아버지의 흔적을 많이 찾았다. 또 유학 오신 한국 학자들이 나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가 있는 미 도서관 등을 알려줬다. 미국에서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했다. →여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텐데. -맞다. 어렸을 때는 상당히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역사 자료 등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심정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미국 생활이 아버지와 나를 연결해 준 것 같다.→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겠지만 특히 더 했던 것 같다. -한때는 드라마처럼 ‘궁’에서 호강하며 살았다. 어렸을 때 시녀들이 ‘공주마마’라고 부르며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줬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에 ‘왕족’이 ‘망국의 원흉’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친북 인사로 몰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62년이 지났다. 한국을 몇 번 찾지 않았다고 알려졌는데. -맞다. 사실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당시 왕족이라는 굴레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사회에 대한 반감 등 때문에 한국에서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왔다. 정말 안 가려다 생모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9년 만인 1975년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50년 중반에 미국 유학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닌가. -당시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어 왕족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지밀 어머니 등 가족들이 먹을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지밀 어머니가 나의 혼수품으로 주신 비단을 팔아서 연명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8군의 도서관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데이비드 스트릿맨이라는 군인의 아버지가 도와줘서 미 유학이 가능했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비행기 값을 마련하고자 지밀 어머니가 사 주신 야마하 피아노를 팔았다.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돈 80달러를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했던 것 같다. 다행히 텍사스의 메리 하딘 베일러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모두가 반대했던 미국행이라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한국과 연락도 끊었다. 사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도와줄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과 방학에는 식당과 백화점, 보육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먹고살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아무도 내가 조선의 왕녀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어도 누가 쳐다보지 않았다. →의친왕비가 자신의 호적에 이 여사만 올리는 등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생모, 낳아 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3살 때 헤어진 생모를 10년 후인 13살 때 화신상회(현 종로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서 만났다. 그 이후로 또 거의 본 적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잠시 같이 지냈다. 생모는 박금덕 여사다. 그는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정도로 정·재계의 마당발로 소문난 여성이었다. 의친왕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미모에 당찼던 것 같다. 내가 궁 생활을 힘들어 했던 것이 자유분방하고 당찬 생모의 성격을 닮아서인 듯하다. →일부에서 ‘공주’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건 분명히 잘못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고종 임금님이 황제가 되고, 왕자인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의친왕, 영친왕 등으로 봉작됐다. 그러니까 나는 왕자의 딸이지, 왕의 딸이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마지막 공주’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내 밑으로 여동생들은 궁 생활을 하지 않았고, 위로 언니들은 돌아가셨다. 그래서 ‘마지막 왕녀’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인연을 못 만나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결혼할까 고민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다. 복잡했던 우리 가정사를 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꿈꿨는데, 막상 선택의 순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내가 힘이 미약하고 나서는 것을 싫어해 숨어 있었지만, 일제에 의해 왜곡·날조된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일에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나도 미력이나마 돕고 싶다. 글 사진 뉴욕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이해경 여사는 누구 -1930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다섯 번째 딸로 출생. -1933년 생모인 박순덕씨 곁을 떠나 ‘궁’으로 거처 옮김. -1946년 경기여고 졸업 -1950년 이화여대 음악과 졸업 -1953년 미8군 사령부 도서관 사서 근무 -1956년 미국으로 유학 -1959년 미국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대 졸업(성악 전공) -1969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 사서 취직 -1996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과장 정년퇴직 -현재 뉴욕의 컬럼비아대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음.
  • 태풍 ‘솔릭’ 8~9시 서울 근접한 후 낮부턴 영향 벗어날 듯

    태풍 ‘솔릭’ 8~9시 서울 근접한 후 낮부턴 영향 벗어날 듯

    세력이 약해진 태풍 ‘솔릭’이 오늘 낮엔 동해로 빠져나갈 예정이다. 23일 밤늦게 한반도에 상륙한 제19호 태풍 ‘솔릭’이 호남과 충청지역을 거쳐 북동 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태풍이 지나는 지역에는 강풍을 동반한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오전 6시쯤에는 충청권에 진입해 현재 충북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솔릭은 전날 오후 6시 목포 앞바다에서 최대풍속 초속 35m(시속 126㎞)에 달하는 강한 중형급 태풍이었지만, 내륙에 도달하면서 소형으로 약화됐다. 솔릭이 서울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시점은 이날 오전 8~9시로, 동남쪽 100㎞ 부근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솔릭은 이날 오전 9시쯤 충주 동쪽 약 30㎞ 부근 육상까지 올라가고, 24일 오후 3시쯤엔 원산 동남동쪽 약 240㎞ 부근 해상으로 빠져나갈 전망이다. 다음날 오전 9시 일본 삿포로 서남서쪽 약 280㎞ 해상에서 소멸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모든 지역에 태풍 특보가 발효됐다. 제주도에는 강풍주의보가 발효됐다. 충남 공주·논산·청주, 전북 전주·대전·세종·광주 등에는 태풍 경보가 발효됐다. 서울·인천·대구·울산 등에는 태풍 주의보가 내려졌다. 이날 일 최대 순간 풍속은 간여암(여수) 32.7m/s, 남항(부산) 26.7m/s, 매물도(통영) 26.3m/s, 간절곶(울산) 25.3m/다. 주요지점 누적 강수량은 사제비(제주산지) 1천111㎜, 윗세오름(제주산지) 1천30㎜, 가거도 318㎜, 수유(진도) 308㎜, 제주 302.3㎜, 지리산 236㎜, 설악산 109㎜, 시천(산청) 120.5㎜다. 낮부터 솔릭의 영향에서 차차 벗어나기 시작해 밤에는 대부분 비가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갑오(甲午) 최후의 전쟁 -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갑오(甲午) 최후의 전쟁 -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석대들로 내뺀다. 저놈들 몰살을 시켜라!”<송기숙, 녹두장군, 1989> 지금도 전라남도 장흥은 지리학적으로 빼어난 곳이다. 뭍으로는 나주, 화순, 강진, 보성에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닷길로는 완도에 뻗어 있다 보니 사통팔달 장흥 땅에는 예부터 사람과 물산이 차고 넘쳤다. 이에 더해 나주 너른 평야와 화순 너릿재 터널, 자울재고개 앞으로 나아가면 금강천, 탐진강 사이에 있는 너른 석대들판은 한결같이 그 빛깔이 곱고 평화롭다. 하지만, 이 석대들은 국가지정 사적 제 498호로 지정된 장소로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공주 우금치, 정읍 황토현, 장성의 황룡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이자 동학 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펼쳐진 땅이기 때문이다. 장흥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으로 가 보자. 1894. 갑오(甲午)년이다. 동학농민혁명이 기포하였다. 그 해 1월 10일, 동학 북접의 지도자였던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5)이 고부관아를 점령한 이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기치를 내걸고 남도 땅을 휩쓸고 다녔던 동학의 파죽지세는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와 태인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한다. 더더군다나 지도부였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대부분 피체되자 구심점을 잃은 농민군들은 나주와 화순을 지나 장흥으로 모여든다. 이에 동학의 장흥 접주였던 이방언(李邦彦 1838~1895)을 중심으로 적게는 1만, 많게는 3만 여명에 달하는 동학 농민군이 집결하여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12월 3일 전투를 시작한 이후 동학 농민군은 금새 장흥 벽사역과 장흥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공과를 세운다. 하지만 이런 성과도 잠시였다. 곧이어 일본군 대장이었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와 관군 이두황, 조희연, 이두재 등이 신식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즉 회선포(回旋砲)를 석대들 양옆에 걸고 쏘아대자 한 번에 수백여 명의 농민군들은 바로 절명한다. 곡괭이, 몽둥이, 화승총으로 무장한 동학 농민군의 최후는 석대 들녘을 가득 메운 피비린내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세상을 뒤집어 보려던 동학 농민 혁명은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된다. 10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장흥 석대들은 여전히 그 안타까운 시간을 어루만지고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전라남도 장흥읍 남외리 165일대에 터 2만6000㎡, 지상 1층, 건축면적 2800㎡ 규모로 134억원을 들여 2015년 4월 26일에 개관하였다. 외부에는 동학 농민 전쟁 당시의 상징 조형물과 깃발광장을 조성하였고, 전시관 내부에는 체험실, 영상실, 수장고, 휴게실 등을 설치하여 동학 최후의 전투였던 석대들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특히, 이 곳에는 당시 일본군의 총탄을 막기 위해 사용하였던 ‘장태’ 모형과 더불어, 동학 농민군들의 무기 등도 전시되어 있어 실감나는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22살의 여자 장수였던 ‘이소사’와 13세 소년 장수 최동린, 농민군 수백명의 생명을 완도와 고흥 섬으로 피신시켰던 소년 뱃사공 윤성도의 이야기도 관람객들에게 의미를 더하고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반외세, 반봉건을 외친 동학의 마지막 전투 현장이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2. 누구와 함께? -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읍성로 2 4. 감탄하는 점은? - 기념관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석대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관람객들이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것은? - 장태, 기념탑, 석대들 전경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삼합 ‘명희네장흥삼합’, 키조개 ‘갯마을’, 콩국수 ‘시루와 콩’, ‘삼대곰탕’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jangheung.go.kr/tour/attractions/exhibit_hall?mode=view&idx=48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두륜산 대흥사, 다산초당, 윤선도 기념관, 정남진 토요시장 10. 총평 및 당부사항 - 동학의 마지막 전쟁터. 나라를 지키려는 민초들의 순수한 열정이 아직도 석대들에는 남아있는 듯하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인어공주’ 김서영 女 개인혼영400m 銀

    ‘인어공주’ 김서영 女 개인혼영400m 銀

    김서영(24·경북도청)이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수영 선수로는 처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김서영은 2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겔로라붕카르노(GBK) 수영장에서 열린 대회 경영 여자 개인혼영 400m 결승에서 4분37초43을 기록해 2위로 레이스를 마쳤다. 4분34초58로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은 일본의 오하시 유이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오하시는 올 시즌 세계랭킹 1위 기록(4분33초77)을 가진 선수다. 일본의 시미즈 아키코는 4분39초10으로 3위에 올랐다. 전날 수영에서 동메달만 두 개를 딴 한국은 김서영의 메달로 이번 대회 첫 은메달을 수확했다. ●접영 100m 안세현 銅… 日이키 첫 4관왕 이어 열린 접영 여자 100m 결선에서는 안세현(23·SK텔레콤)이 58초00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따냈다. 일본의 이키 리카코(56초30)가 금메달을, 중국의 장유페이(57초40)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함께 출전한 박예린(부산체고)은 59초57로 7위를 차지했다. 이키는 경영 종목 첫날인 19일 계영 400m에 이어 20일 접영 50m, 자유형 100m에서도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정상에 올랐고 이날 접영 100m에서도 금메달을 따 대회 첫 4관왕이 됐다. 이 종목에서 57초07의 한국 기록을 갖고 있는 안세현은 지난해 부다페스트세계선수권 접영 200m에서 한국 최고 성적인 4위(2분06초67)에 올라 새로운 기대주로 떠올랐다. 100m로 몸을 푼 안세현은 22일 자신의 주종목인 200m에서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우슈 조승재 중국에 0.07점 밀려 銀 우슈에서는 조승재(28·충북개발공사)가 이번 대회에서 불운에 울었던 한국 대표팀에 첫 메달을 안겼다. 조승재는 이날 자카르타 인터내셔널 엑스포에서 열린 곤술 연기에서 9.73을 받아 전날 도술에서 받은 9.72를 더해 19.45로 2위에 올랐다. 도술은 검을, 곤술은 곤봉을 이용해 연기를 펼치는 종목이다. 금메달은 합계 19.52(도술 9.76, 곤술 9.76)를 얻은 우자오화(중국)가 차지했다. 동메달은 19.41(도술 9.70, 곤술 9.71)의 아시마드 후라에피(인도네시아)에게 돌아갔다. 조승재의 값진 은메달로 한국은 이번 대회 우슈의 자존심을 살렸다. 우슈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2~3개의 금메달을 따낼 것으로 기대됐지만, 앞서 12일 열린 투로 남자 장권 결선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이하성(24·경기도우슈협회)이 손을 바닥에 짚는 실수로 12위에 머물렀다. 서희주(25·순천우슈협회)도 같은 날 투로 여자 검술·창술 경기를 앞두고 무릎 부상으로 기권해야 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문화재 수난사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말하는 ‘문화재’“우리 문화재의 과거사를 정리하다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골동품상 이희섭(李禧燮)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에서 조선대공예전람회를 7차례 엽니다. 전람회 한 번에 우리 문화재 1500점에서 3000점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전시하고 모조리 팔아치웁니다. 이희섭은 도록을 7권 만들었지요. 도록에 실린 문화재 일부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7차례 전람회에 진열된 문화재가 1만 4516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희섭은 서울에 ‘문명상회’라는 본점을 두고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해 우리 문화재를 상설 전시해 팔아먹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으로 팔려나간 문화재가 최소 3만점에서 5만점에 이를 겁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인데요, 한 개인이나 상인이 그렇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조씨 문중, 가전 서적 700여권 일본에 스스로 갖다바쳐”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30년째 연구해 정리하는 정규홍(62)씨는 광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이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갖다바친 것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어느 조씨 가문에서는 일본 도쿄대박물관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서적 700여권을 아주 싼 값에 넘겼다는 기사가 고고학 잡지에 나옵니다.” 어느 문중이냐고 묻자 정씨는 “기사에서 그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한자로 조나라 조(趙)가 적혀 있더라.”고 소개했다.정규홍씨는 1981년 교직 연수를 받으면서 석굴암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담한 취급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문화재 수난일지와 우리문화재 수난사, 유랑의 문화재 등을 펴낸 수난 문화재 전문가다. 문화재 수난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중학교 교사직도 그만뒀다. 그동안 정부나 관계당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경북지역 문화재 수난사를 쓰면서 용역 의뢰받은 것이 당국의 지원 전부였다. - ‘돈 안 되는’ 우리 문화재 역경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이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희열감도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랄까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잠자면서도 술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들고, 꼬투리가 잡히면 잊으려해도 그게 안돼요. 강단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때문에 중도에 끊기는데, 난 그런 것도 없기에 이것 하나만 파고 들어갑니다. ●“문화재 수난사 정리 이유?···중독성에 희열감이죠”- 많이 힘들겠다.☞ 돈 안되는 일을 하니깐 무엇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교직에 있을 때 월급받아 상당액을 이것 연구에 쏟아부었으니깐. 지방에 한번씩 현지 조사 다니면 교통비에 숙박비도 만만찮죠. 책도 사고,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도 엄청 합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때 복사비가 한장에 3원이었는데 이젠 50원으로 16배가 됐어요. 문화재 수난사에 관한 책을 냈는데, 잘 팔리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책 몇 권 주고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니 시간은 잘 갑니다. - 그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이번에 ‘요것만 정리하고 손 떼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런데 한 건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기에서 또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다보면 숙제처럼 이만치 쌓입니다. 그러니깐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수난 문화재가 그동안 왜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됐나.☞ 1945년 해방 직후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정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고적조사와 유적연구 등에 한국인의 근접을 못하게 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했거든. 해방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이 떠나고 나니깐 총독부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남은 고적조사, 발굴보고서 등의 정리를 전혀 못한 채 박물관에 쳐박혀 있었던거지요.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물 목록과 실물과의 대조가 정확하게 안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력 부족 탓이지만 국가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빨리 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일제시대 한국인 유적연구 차단···유몰 목록과 사료 대조 못 해”- 문화재 수난 분야, 처음 연구는 어떻게 했나.☞ 처음엔 마땅한 자료가 없으니 헌책방을 많이 기웃거렸죠. 1981년 이후 헌책방에 다니면서 문화재 관련 책을 사모았죠.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축쇄본을 돋보기로 보면서 자료를 모았죠. 또 일본인이 남긴 조사자료와 잡지 이런 것을 위주로 연관지어 보죠. 연관성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거죠. 예컨대 발굴사업 보고서가 나오면 이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옵니다. 기사와 고적조사 보고서가 약간 차이가 날 경우가 있거든요. 무덤 발굴의 경우 일본인들이 1차적으로 유물명을 기록하고 바로 박물관에 수장시키지 않고 1년간은 걔네들이 연구를 해요. 그 기간 유물이 분실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분실이나 망실 그런 문헌이나 문서가 나와 있어요. 이를 비교해서 불법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 당시 일본이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혈안이 됐나.☞ 일본의 각 대학이 잔치를 벌이듯이 우리문화재를 진열해 놓고 경쟁적으로 전람회도 가졌지요. 낙랑 유물부터 그때까지. 도쿄대 공과대와 문과대가 별도로 진열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람회 도록이나 기록들이 감춘 게 없이 매우 정확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통치할 줄 알았던 게지. 식민지 정착을 위한 하나의 사료로 삼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수집해 가져갔지. 그때 조선에는 1908년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뿐이었거든. 1915년 12월에서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생기면서 법으로 유물 반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얼마든지 일본으로 가져갔지. 이런 단체로는 조선고적연구회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일본 도굴꾼들이 대거 몰려들어 우리나라 무덤을 다 파헤쳤죠. 1908년 이전에 고려 무덤의 경우 거의 다 파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수시로 어느 무덤이 파괴되고, 어떤 무덤은 4~5회에 걸쳐 도굴됐지요. 심지어 대낮에 총칼을 갖다놓고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도굴하고···. ●“고려 무덤 마구 도굴···日대학들, 우리 문화재 진열 경쟁도”- 해방이 되면서 문화재 수난이 줄었나.☞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합니다. 그리고 9월20일 미군 300명이 부산항에 들어오지요.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 군인의 무장해제와 퇴출이예요. 미군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에 눈치빠른 일본인들이 문화재를 잔득 가지고 일본으로 나갔던 거죠. 미군이 10월 말쯤부터 일본 민간인을 퇴출시키죠. 그때 귀국 일본인에게 돈 1000원과 작은 옷보따리 정도만 허용하고 귀중품은 모두 압수했든거죠. 그러니깐 일본인들은 어선같은 것을 빌려서 밀항을 합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공주에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이들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가져간 것이지요. 이들에 빌붙어 밀한을 도운 게 한국사림이예요. - 미군에 의한 문화재 유출도 있었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귀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세화인회(世話人會)’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일본인들의 물품 같은 것을 맡아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맡은거지요. 당시 서울역에서 화물을 부산으로 보내면 중간인 대전역에서 미군이 화물을 압수해 물자영단(物資營團)에 넘겨버리는 것이지. 그 물자영단 창고를 미군이 관리했는데, ‘우리 문화재나 귀중품은 박물관에 넘기고 나머지는 P.X에 넘긴다’고 말하지만 미군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처분해버린 경우도 많았죠. 해방전후 골동계에서 유명한 이영섭이 부산에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물자영단에 있는 그림 1000점 이상을 싼 값에 샀지. 그가 샀던 그림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가 없어. 또 한때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맹호도’ 출처는 흥미롭지. 1946년 한 미군이 골동품 상인 두명을 일본인 창고로 데려갔지요. 골동품 상인들에게 감정을 요청해 감정해 주니 미군이 그 댓가로 주었던 게 맹호도이지요. 나중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사들였지만 미군에 의해 흩어진 문화재도 부지기수예요. ●“미군정기와 6·25 전쟁서 문화재 수난도 어머어마”- 6·25 한국전쟁 때도 문화재가 많이 파괴·유출되었다.☞ 6·25 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파괴됐지.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파괴가 가장 심했지요. 유엔군이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펼쳤던거죠. 소개령이 떨어지니 사찰에선 중요 유물들을 갖고 나옵니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가보면 절은 없어지고 재만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유물들이 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것이죠. 전국을 돌아다녀보면 오래된 절인데 건물만 새로 짓고, 유물이 없는 사찰이 많아요. 또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는 극히 일부인데, 이마저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이 불타버렸지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는 미군들이 찾아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종묘에 있는 옥새와 금보(金寶·선왕이나 선비에게 올리는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 이런 것이 상당히 분실됐지요. 1952년 신문을 보면 미군들이 옥새와 금보를 금은방에 가져와 감정해달라고 하다가 다른 미군에 의해 검거되는 그런 기사가 몇건 나옵니다. - 그 이후엔 문화재 수난이 더 없었나.☞ 1960~70년대에는 왠 도굴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본인 밑에 따라다니면서 도굴을 배운 기술자들이 그렇게 많이 도굴을 해요. 일재 잔재지요. 심지어는 집 짓는다하고 장막을 두르고 밤에 도굴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유물은 1970년대엔 이삿짐으로 위장해 미국에 갖다나르다 적발된 경우가 많지요. 유물을 모조품처럼 가장해서 밀수출하다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밀수전문가들과 한국의 중간 브로커들하고 짜고 가져간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많지요.- 지금까지 수난당한 문화재는 몇 점이 되나.☞ 1981년부터 올 4월까지 조사해 파악한 국외유출 문화재는 17만 2300여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관공서·도서관·박물관 등 공식기록을 비교 조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한 것으로 낙랑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유물입니다. 제 조사는 관공서 위주여서 개인소장은 거의 포함돼 있지 않거든요. 오구라가 반출한 문화재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인 1100여점만 도쿄박물관에 기증됐고, 나머지 수천점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소장한 것을 포함하면 100만점이 해외에 떠돌고 있지 않겠느냐고 추산합니다. ●“파악된 수난 문화재 17만 2300여점···실제론 100만점 넘을듯”- 국외 유출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어떻게.☞ 현재 파악된 17만 2300여점은 물론이고 앞으로 소재가 확인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차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굴해 소장했느냐는 경로 파악을 위해 고적 조사자료, 잡지에 실린 논문, 신문기사 한 줄까지도 축적해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불법성 드러날 것입니다. 불법성이 드러난 것은 환수 운동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협정 때의 ‘청구권 포기 규정’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 환수 부분은 민간단체가 적극 나서야지요. 정씨는 “문화재는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혼이자 공동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것 즉, 함부로 관리하고 방치한 것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내가 조선의 국모다”… 명성황후의 비극 서린 산책길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홍릉산책(홍릉수목원) 편이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과 회기동, 성북구 종암동과 하월곡동을 넘나들며 진행됐다. 정릉천을 경계로 동대문구와 성북구가 갈리고 정릉천과 중랑천 사이 천장산 자락에 홍릉수목원을 비롯해 의릉, 북서울 꿈의 숲, 배봉산 등이 안겨 서울 동북부의 허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날 홍릉수목원은 33도를 기록하는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하면서 피톤치드가 충만한 삼림욕까지 즐기는 일석이조의 피서지였다.참가자들은 고려대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정릉천~한국국방연구원(KIDA)~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홍릉수목원(국립 산림과학원)~카이스트 서울캠퍼스~옛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인재캠퍼스~수림문화재단~세종대왕기념관 코스를 걸었다. 다들 “서울의 부도심에 이런 울창한 숲과 고즈넉한 시가지가 남아 있다는 게 경이롭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땅 향기가 살아 있는 홍릉수목원의 그늘은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다만 주말에도 개방하는 홍릉수목원과 세종대왕기념관 이외 다른 공공기관은 휴관 중이거나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서울미래유산 해설자로 첫 데뷔한 숲 전문가 임혜란 해설사는 해박한 생태지식과 구수한 입담으로 투어단을 이끌었다.홍릉수목원이 있는 청량리는 조선시대 능행과 농경 제례의 상징공간이었다. 청량리는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왕실 최대 묘역 동구릉으로 향하는 능행길이자 능행행차를 통해 왕실의 존엄을 내보이는 홍릉 묘역이었다. 또 청량리 일대는 농경사회의 수호자인 왕이 몸소 경작의 시범을 보이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다. 사대문을 둘러싸고 형성된 성저십리(성 밖 10리)를 뜻하는 동교, 서교, 남교, 북교 등 교외지역 중 청량리와 왕십리로 대표되는 동교지역의 위상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까닭이다. 능행은 선왕의 기억과 권위에 기대 효를 다하는 왕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문상외교, 문상정치와 뿌리를 같이한다. 왕의 견문을 넓히고, 도성 밖 사대부나 지방 백성과 소통하는 중요 행사였다. 왕은 최대한 천천히 가면서 피지배 계층에게 권위를 보이고, 민원을 청취한 뒤 덕을 베풀었다. 민원이 있는 백성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소란을 피워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억울함을 고한다. 이때 왕은 소란죄로 가볍게 처벌한 뒤 민원을 듣고, 우선 처리해 주는 ‘능행정치쇼’를 벌였던 것이다. 정조는 배봉산(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옛 수원(화성시)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12차례 한강을 건너는 효행을 선보였다. 정조의 능행잔치는 조선 최대의 볼거리, 즐길거리였다. 이 덕분에 정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백성이 인정하는 ‘대왕’의 반열에 올랐다. 1883년 서울을 방문했다가 능행을 구경한 독일인 마예트는 ‘코리아의 수도 서울 견문기’에서 “시내가 구경꾼으로 가득 차서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길에는 집 창문이나 대문간, 뜰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로 메워졌다”면서 “도로는 깨끗하게 치워졌고 길 중간에는 붉은 흙이 깔려 있었다. 왕은 말을 타지 않고 지붕이 있는 가마를 탔다”고 능행 풍경을 묘사했다.홍릉이 먼저인가, 청량리가 먼저인가. 우문이지만 헛갈리는 사람이 많다. 당연히 청량리가 주인이요 홍릉은 객이다. 홍릉은 청량리에 22년간 잠깐 깃들었다가 떠났을 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청량리라는 유구한 지명은 홍릉이라는 19세기 비극의 장소성에 밀렸다. 비명에 간 명성황후는 지아비 고종을 따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진짜 홍릉’으로 떠나고 없지만 나라와 국모를 잃은 당대인의 가슴속에는 청량리보다 ‘빈 홍릉’이 각인됐다. 옛 홍릉의 기억이 청량리라는 장소를 지배하게 됐다. 그렇게 주객이 전도돼 이제는 홍릉이 청량리를 떠올리게 한다. 장소의 역사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 22년간 이뤄진 고종·순종의 숱한 홍릉능행 덕분에 청량리라는 작은 마을이 유명해지고 서울 동북방의 중심지로 떠올랐다.능행의 정치사에서 흥릉은 일개 황후 능에 불과했지만 조선 말, 대한제국 초에는 개국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능가하는 역사의 무대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 고종의 황후 능이요,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친모 능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군인에 의해 비명에 간 황후의 장례식이 2년 2개월 후인 1897년 11월 22일에 치러졌다는 시간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국장 1개월 전인 1897년 11월 22일 최초의 근대국가이자 황제국인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연호를 바꾼 점도 놓쳐선 안 된다. 명성황후의 죽음 자체보다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이 더 컸다. 국장은 3개월을 넘기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시간을 끌면서 배일, 극일을 모색한 끝에 1896년 아관파천에 이어 1897년 대한제국 탄생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명성황후의 비극적 시해와 홍릉 조성은 대한제국의 탄생 및 멸망사와 궤를 같이한다. 홍릉은 어렵게 얻은 장지였다. 안감천(성북구 안암동)과 회암(양주시 회암동) 등 모두 7곳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결국 고종의 마음에 차지 않아 다른 7곳을 골랐고 그중 연희궁 터(연희동 일대)와 청량리가 부각됐다. 권세를 누린다는 연희궁보다 ‘평안하고 길한 땅’으로 평가된 청량리가 선택됐다. 동구릉에서 멀지 않고, 참배도 쉬운 점이 점수를 땄다.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에 따르면 상여를 따라가는 수행원은 대략 4800명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황후 장례식이기 때문에 역대 어떤 왕의 국장보다 성대했고, 수행 인원이 많았다. 상여가 가는 코스는 경운궁(덕수궁)~청계천 혜정교~흥인지문~동관왕묘(동묘)~보제원(제기동)~한천교~청량리 홍릉으로 이어졌다. 홍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국고를 털었다. 절과 민가 92호에 보상비 3만냥을 주고 철거했으며, 무연고 묘와 연고 묘 450총을 이장하는 비용 2만 2000냥, 홍릉 아래 전답 수용에 4만 6000냥을 지불했다고 기록돼 있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애통해한 고종을 노국공주를 잃은 고려 공민왕에 비유한다. 3년간 국상을 치르면서 수없이 홍릉길을 오간 고종이 1919년 67세를 일기로 숨지자 금곡 홍릉에 합장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사별한 지 24년 만에 저승에서 만나 해후했다. 청량리 홍릉 옛 황후능 터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비석 한 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홍릉은 전설로 남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도봉(창포원의 붓꽃) ●일시 : 7월21(토) 오전 10시~12시 ●집결 장소 : 도봉산역 2번 출구 ●신청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혹서기인 7월28일부터는 저녁 6 시부터 8시까지 야간에 진행됩니다.
  • 사카구치 켄타로 “서강준 닮은꼴 알고 있다” 러브콜에 화답

    사카구치 켄타로 “서강준 닮은꼴 알고 있다” 러브콜에 화답

    일본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가 자신의 닮은꼴로 알려진 서강준을 언급했다. 9일 방송된 MBC 연예 정보 프로그램 ‘섹션TV 연예통신’에는 사카구치 켄타로가 출연했다. 사카구치 켄타로는 지난 2일 영화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다. 그는 한국 스타들과의 연결고리를 살펴보던 중 서강준에 대해 “일본 분들에게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서강준 씨 알고 있다. 정말 잘생겼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강준이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에 기뻐하면서 “서강준 씨 꼭 함께 일했으면 한다”고 화답했다. 또 친분이 있는 방탄소년단에 대해서는 “일본판 ‘시그널’ 테마곡을 만들어줬다. 만났는데 역시 너무 멋진 팀이다. 조금 친해졌기 때문에 이제부터 함께 일하고 싶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이어 “진짜 멋있더라. 댄스, 노래 모두 최고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는 고전 영화 상영관인 ‘로맨스 극장’에서 현실로 나오게 된 흑백 영화 속 공주님 미유키(아야세 하루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 영화감독 지망생 켄지(사카구치 켄타로)의 러브스토리를 그린다. 오는 11일 개봉.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삼국시대 건물터 유적 3기 확인 “임시거처·제사 관련 시설 추정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 도움될 것”최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헤쳐 조사했던 백제시대 무덤과 유적들이 발굴조사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충남 공주 교동에서 일본인 도굴꾼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무덤’이라고 규정했던 백제 교촌리 벽돌무덤의 위치를 확인하는가 하면 이달에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 중 서쪽 고분군이 100여년 만에 이뤄진 재조사에서 백제 왕릉급 무덤의 전모를 드러냈다. 문화재청과 충남 부여군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서쪽 고분군 4기에 대한 2년간의 발굴조사를 완료했다고 4일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서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기씩 배치돼 있다. 고분 양식은 백제 사비도읍기의 전형적인 무덤 형태인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고분의 지름은 2·3호분이 20m 내외, 1·4호분은 15m 내외다. 문화재청 측은 “2·3호분과 1·4호분이 석실의 규모, 석재의 가공 정도, 입지 등에서 차이가 나는데 무덤주인들의 위계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시대 왕릉급 무덤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중앙의 고분 7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고분군이 있다. 이 중 서고분군 4기는 1917년 일제가 조사한 바 있으나 당시 조사단은 “능산리 왕릉군의 서쪽 소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중 2기를 발굴했다”는 짧은 기록과 간략한 지형도만 남긴 터라 지금까지 학계는 고분의 구체적인 규모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고분군의 경우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석실의 형태 등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나 형식, 규모 등을 확인했다”면서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조성 과정에 대한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국시대 고분군에서는 드러난 적 없는 건물의 존재를 확인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사단은 서쪽 능선에서 초석 건물지 1기를, 동쪽 능선의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 수혈(구덩이) 주거지 2기를 확인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관련 시설로 보인다”면서 “삼국시대 고분군 중 고분 구역에서 건물 유적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조사와 잦은 도굴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2호분 석실 바깥 구덩이에서 금제 장식과 목관 조각, 금동제 관못 등이 나왔다. 금제 장식은 길이가 2.3㎝ 정도로, 끝이 뾰족한 오각형을 띠고 있으며 부장품의 일부로 추정된다. 용이 몸을 틀고 있는 형상의 문양이 특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사카구치 켄타로 “기회 된다면 서강준과 함께 연기하고파”

    사카구치 켄타로 “기회 된다면 서강준과 함께 연기하고파”

    사카구치 켄타로가 닮은꼴 배우 서강준과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3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는 영화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의 언론배급시사회가 열렸다. 이어진 기자간담회에는 주연을 맡은 사카구치 켄타로가 자리했다. 사카구치 켄타로는 “한국에 온 것이 처음이고, 팬분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기대가 된다. 공항에도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한국 팬분들께 영화의 매력, 그리고 제 매력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한국을 찾은 소감을 전했다. 사카구치 켄타로는 배우 서강준과 닮은꼴 외모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서강준’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사카구치 켄타로는 알고 있는 한국 배우를 묻는 질문에 “처음에 서강준 씨를 잘 몰랐는데, 주위에서 이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어떤 인연이 느껴진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영화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는 영화 속 말괄량이 공주와 현실의 순박한 청년의 로맨스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 감독을 꿈꾸는 남자 켄지(사카구치 켄타로)가 우연히 발견한 흑백 고전 영화 속 미유키(아야세 하루카) 공주를 동경하게 되고, 스크린 속 미유키 공주가 현실에 나타나면서 두 사람의 믿을 수 없는 로맨스가 시작된다. 오는 11일 개봉. 사진=뉴스1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Sansa,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은 모두 천년 넘게 불교문화를 지킨 사찰이다. 각 산사마다 다른 창건 시기와 자연환경, 건물 배치, 눈여겨볼 만한 문화재, 설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양산 통도사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산 영축산 통도사(通度寺)는 신라 자장율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 사리와 금실을 넣고 짠 베로 만든 가사,대장경을 봉안해 창건했다. 통도사 역사를 정리한 책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도 비슷한 시기인 646년 자장율사가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고 기록됐다. 통도사는 무엇보다 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佛寶寺刹)로 유명하다. 대웅전에 불상을 두지 않고,건물 뒤쪽에 금강계단을 설치해 부처 법신(法身)을 봉안했다. 사찰 명칭은 ‘이곳 산의 모양이 부처가 불법을 설파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혹은 ‘승려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문구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신라시대에는 계율을 지키는 근본도량이었다.조선 초기에는 수위사찰로 지정됐고, 경남 사찰 대본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 본사다.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이고,보물 18점과 경남유형문화재 50점을 보유한다. ● 영주 부석사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이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한 고려시대 건축물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676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처음 지은 절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관련 기록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 이후 40일간 법회를 연 뒤 대립을 지양하고 마음 통일을 지향하는 화엄사상의 근본 도량이 됐다. 부석사(浮石寺)라는 명칭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이 바위가 아래 바위와 붙지 않고 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중수했다는 묵서가 확인된 무량수전은 13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중심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다. 누대인 안양루에서 올려다보는 무량수전 풍경은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무량수전은 물론 무량수전 앞 석등과 전각 안에 있는 소조여래좌상,조사당과 조사당 벽화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절이 있는 봉황산은 지세가 봉황을 닮았다는 곳으로,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나 실제로는 태백산과 이어진다. ● 안동 봉정사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국보 제15호 극락전(極樂殿)이 있다.1972년 건물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1363년 처음으로 건물을 중수했다. 규모는 작지만 건축미와 품격이 느껴진다. 봉정사(鳳停寺)를 창건한 인물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명확하지 않지만,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대사가 7세기 후반께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능인대사가 봉정사가 있는 천등산에서 수행하던 중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렸더니 오늘날 사찰 자리에 머물렀다는 설화가 전한다. 천등산은 정상 높이가 574m이고 경사가 완만한 산이다.극락전과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이 한데 모여 있으며, 건물 배치는 전반적으로 일자형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피해를 보지 않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건축물과 불상, 불화가 잘 보존됐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들르기도 했다. ● 보은 법주사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조선시대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의신조사가 553년 창건했다고 기록됐다. 의신조사가 법을 구하러 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가 사찰 명칭의 유래다. 통일신라시대 승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 계시를 받은 뒤 김제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다 소달구지를 만났는데, 소가 울자 달구지 주인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역사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길상사(吉祥寺),고려시대에는 속리사(俗離寺)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법주사가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한 속리는 ‘속세에서 떠난다’는 뜻이다. 법상종 중심 사찰이었던 법주사 건물 배치는 화엄사상과 미륵사상 영향을 두루 받았다.가장 유명한 건물은 국내 최고(最古) 오층목탑인 팔상전(捌相殿).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사명대사가 1624년 복원했으며, 목탑 아래 월대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알려졌다.팔상전 외에도 쌍사자 석등과 석련지가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 13건이 있다. ● 공주 마곡사사찰 중심에 계곡이 흐르고 풍경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택리지’와 ‘정감록’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땅으로 기록됐다. 마곡사(麻谷寺) 창건 시기와 과정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마곡사사적입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세웠다고 적었고, ‘마곡사연기략초’에 따르면 보조선사 체칭이 지었다. 자장율사는 7세기,체칭은 9세기에 활동했다. 절은 고려시대에 중흥했다.계곡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는 건물 배치도 고려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했고, 17세기 이후 중창을 거듭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南方畵所)로 불릴 정도로 많은 승려화가를 배출했고,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한 일본인 장교를 살해해 옥살이하다 탈옥한 뒤 출가했던 절이기도 하다. 국보는 없지만 오층석탑, 영산전, 대웅보전, 대광보전, 석가모니불괘불탱이 보물로 지정됐다. ● 순천 선암사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순천을 대표하는 명찰인 선암사(仙巖寺)는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선암사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529년 세웠다는 글이 있고, 도선국사가 875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 승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대찰이 됐으나,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고 1759년에도 화재를 겪었다. 이에 따라 건물 배치가 여러 차례 변했는데, 현재 모습은 1824년에 갖춰졌다.중심건물인 대웅전도 같은 해에 재건됐다. 선암사는 절 입구에 사천왕문을 두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사천왕은 법을 지키는 신인데, 조계산 정상이 ‘장군봉’이어서 사천왕을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내에 있는 보물 14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물은 승선교(昇仙橋)다.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아치인 홍예를 만들었다.이른 봄에 피는 매화인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이다. ● 해남 대흥사한반도 남쪽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大興寺)는 창건 시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늦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운영됐다. 선암사처럼 아도화상 혹은 도선국사가 창건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사찰도 대둔사로 불린 적이 있다. 두륜산은 높이가 703m로, 계곡과 편백 숲 덕분에 경치가 수려하다.계곡은 대흥사도 지나가는데, 이로 인해 마곡사처럼 건물이 남원과 북원에 나뉘어 배치됐다. 대흥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점은 호국정신이 깃든 도량이라는 사실이다.대흥사에 대해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라고 평가한 서산대사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도 있다. 차 문화도 대흥사의 특징이다.대흥사가 배출한 대종사(大宗師) 13명 중 한 명인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재정립한 인물이다. 조계종 22교구 본사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국보 제308호다. 보물 8건과 전남유형문화재 5건도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욕의 2인자, 고향 부인 옆에 영면하다

    영욕의 2인자, 고향 부인 옆에 영면하다

    전·현직 정치인 등 250여명 참석 이한동 “자유의 오늘 있게 한 분” 화장 후 부여 가족묘원에 안장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다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7일 그의 고향인 충남 부여군 외산면 가족묘원에 안장됐다. 이곳은 김 전 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여사가 2015년 잠든 곳이다. 가족묘원으로 떠나기 전 김 전 총리는 모교인 충남 공주고등학교에서 밴드부의 교가 연주 속에 동문과 주민 등 1000여명으로부터 마지막 인사를 받았다. 가족묘원에서는 김 전 총리를 따랐던 많은 후배 정치인들과 전·현직 부여군수, 종친회원 등 수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식이 열렸다.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그의 삶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지만 안장식에서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총리는 항상 나라와 국민만을 생각하셨던 분”이라며 “그야말로 처음과 끝이 같은 분이었다”며 “생전에 ‘소이부답’을 언급하셨듯 상대방이 기분 나쁜 말과 행동을 해도 항상 웃음으로 대신하던 모습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김 전 총리의 유골함은 사각형 돌 정자의 지붕 아래 가로세로 1.5m 안팎의 사각 석조함에 안치됐다. 석조함에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김 전 총리 아내의 유골함이 들어 있다. 김 전 총리는 생전에 부인 곁에 잠들고 싶다는 뜻을 가족들에게 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결식은 앞서 아산병원에서 열렸다. 영결식에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이한동 전 국무총리, 한국당 정우택·정진석·안상수 의원 등 25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장례위원장인 이 전 국무총리는 조사에서 “김종필 총재는 우리가 자유와 민주를 만끽하고 있는 ‘오늘’을 있게 한 분”이라며 “산업화의 기반 위에 민주화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부미 참의원이 대독한 조사에서 “전후 혼란 속에서 하루라도 빨리 조국이 부흥하고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중책을 맡으시며 한시도 마음 편한 날 없이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면 실로 대한민국과 행보를 같이한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부여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김종필 전 총리 영결식…부여 가족묘원 부인 곁에서 영면

    김종필 전 총리 영결식…부여 가족묘원 부인 곁에서 영면

    향년 92세를 일기로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영결식이 27일 오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이날 오전 7시 시작된 영결식에서는 장례위원장인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조사에 이어 고인의 오랜 친구로 올해 100세가 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조사를 아들 나카소네 히로부미 참의원이 대독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김 전 총리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는 고인이 머물렀던 청구동 자택으로 향해 오전 9시부터 노제를 지내고,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장지로 이동한다. 이어 운구차는 김 전 총리가 졸업한 공주고등학교와 부여초등학교 교정, 그리고 고향 부여 시내를 거쳐 부여군 회산면 가족묘원으로 향한다. 이곳은 김 전 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여사가 2015년 잠든 곳으로, 김 전 총리는 부인 곁에서 영면한다. 부인과 천생배필로 불릴 만큼 다정했던 김 전 총리는 생전에 “고향의 가족묘원에 먼저 간 아내와 같이 묻히겠다”며 국립묘지 대신 부인이 묻힌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을 택했다. 김 전 총리는 지난 23일 오전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왕족 신분 버리고 일반인과 결혼하는 ‘日공주’ 화제

    왕족 신분 버리고 일반인과 결혼하는 ‘日공주’ 화제

    아키히토 일왕의 5촌 조카인 아야코 공주가 일반 회사원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교도통신이 26일 보도했다. 아야코 공주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 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1954∼2002)의 셋째딸이다. 다이쇼 일왕 증손녀로, ‘여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왕족에 속해 있다. 궁내청은 아야코 공주가 선박회사 닛폰유센 사원 남성(32)과 10월 29일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왕족의 결혼은 아야코 공주의 언니 노리코 씨가 2014년 결혼한 이후 4년만이다. 아야코 공주는 현재 일본 지바현 조사이 국제대 복지종합학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야코 공주의 결혼 발표와 관련해 일본에서는 여성 왕족이 일반인과 결혼해 분가하면 왕족 신분을 이탈하는 규정을 놓고 논란이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왕실 관련 규정을 담은 ‘왕실전범’은 왕족 여성이 일반인과 혼인하면 왕족 신분을 떠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안그래도 저출산으로 왕족이 적은데, 이런 규정 때문에 왕족 수가 더 줄어들어 왕실 활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아야코 공주의 언니 노리코 씨 역시 일반인과 결혼해 왕족에서 이미 이탈했고, 아키히토 일왕의 친손녀 마코(26) 공주도 일반인과 결혼할 계획이어서 왕실전범이 바뀌지 않는 이상 왕족에서 제외된다. 마코 공주와 아야코 공주가 예정대로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족은 19명에서 17명으로 줄어든다. 여성 왕족 역시 14명이었던 것이 12명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한 ‘일왕 퇴위를 실현하는 특별법’의 ‘부대 결의’ 사항에 여성 왕족이 일반인과 결혼한 후에도 왕족을 유지하며 ‘여성 미야케’(宮家)를 창설하도록 하는 방안을 ‘신속하게’ 검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평화가 시작된 해, 김기림의 평화주의를 생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열린세상] 평화가 시작된 해, 김기림의 평화주의를 생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필자가 김기림이라는 시인을 알게 된 것은 10여년 전 일본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대학에 재직하던 무렵이다. 문학에 문외한인 관계로 겨우 이름 석 자만 알고 있던 그가 제국대학 시절의 도호쿠대학 영문학과를 다녔다는 것을 알고 살짝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그가 당대 지식인들 가운데 보기 드문 ‘평화주의자’임을 알고 반가웠다. 김기림은 190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보성고보, 도쿄의 니혼대학 등에서 유학하고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가 도호쿠대학에서 영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스물여덟이던 1936년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에서 국가총동원법이 성립하던 시기를 센다이에서 보내고 1939년 서른하나의 나이로 돌아왔다. 그는 센다이에서 ‘모든 신념을 차례차례로 다 잃어버린 생활’을 지옥처럼 보내고(신념 있는 생활, 1939.1.),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왔다(바다와 나비, 1939. 4).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김기림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는 센다이 생활을 마감할 무렵 쓴 시다. 센다이에서 김기림은 모국어와 영어,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하면서 조선 모더니즘의 시간적 공간적 위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총동원 체제가 등장하고, 이에 대응하듯 조선에서 민족말살 정책이 실시되던 때, 김기림이 다녔던 도호쿠제국대학은 가까스로 리버럴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쿄제대나 교토제대가 메이지 일본의 국가 관료 양성소로 출발해서 관학의 분위기가 강했던 데 비해 같은 제국대학이면서도 도호쿠제대는 연구 중심 대학을 표방해 연구의 자유가 비교적 존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사상가 카를 뢰비트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나치스를 피해 도호쿠대학에 재직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김기림의 도호쿠제대 선택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1922년 12월 일본을 방문해 순회 강연 중이던 아인슈타인이 센다이를 방문했다. 당시 도호쿠제대에는 이론물리학자 이시하라 아쓰시(石原純)가 있었다. 이시하라는 상대성 이론 연구의 1인자였다. 근대 과학에 관심이 깊었던 김기림이 도호쿠제대를 선택한 데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기림이 평화주의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해방 공간에서 두드러졌다. 좌의 급진성도 우의 고루함도 김기림에겐 근대성의 결여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김기림은 좌와 우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근대’와 ‘과학’과 ‘문화’를 선택했다. 이들은 모두 국경과 이념을 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평화주의가 가장 잘 밴 글이 ‘꽃에 부쳐서’이다. “꽃은 아무가 보아도 좋다. 그러기에 꽃에는 국경이 없다. 풍토를 따라 키의 장단과 빛의 짙고 연함이 다소 갈리나 이 나라 모란꽃이 저 나라 모란꽃에 적의를 품거나 서로 모함하는 일은 없다.”(1949. 4. ‘꽃에 부쳐서’) 그러나 좌우가 극한 대립을 하는 시대에 적의를 거두어들이는 ‘평화’는 패배였다. ‘평화’로 앞서간 김기림은 좌에서도 우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조국의 남에서도 북에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사라졌고, 다시 발견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1988년 해금된 뒤 그의 시가 읽히기 시작했지만, ‘평화’를 염원한 그의 사상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 같다. 그를 평화주의자로 재조명해 센다이의 김기림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아오야기 유코(?柳優子)와 준이치(純一) 부부, 그리고 그들과 함께 김기림의 작품들을 강독했던 일본의 시민들이다. 필자가 도호쿠대학에 재직할 때부터 친분이 있었던 아오야기 유코가 김기림의 시와 평론 등을 번역하고, 거기에 김기림 연구 노트를 붙여 ‘조선 문학의 지성, 김기림’(朝鮮文?の知性, 金起林, 2009)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는 것을 듣고 반갑게 생각했던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책을 두른 띠에는 “한국전쟁 와중에 사라진 김기림. 평화를 향한 염원이 그의 작품과 함께 일본에서 처음 되살아난다”고 씌어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종식하는 여정이 시작된 올해 센다이에서 김기림을 기리는 일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한·일의 시민과 남북의 문인이 함께한다면 동아시아의 작은 평화를 여기에서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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