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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명함/이춘규 논설위원

    명함은 처음 만나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성명, 직위, 직장주소, 전화번호, 전자우편주소 따위를 새겨 넣는다. 회사원이나 공무원 대다수는 직장에서 만들어주기 때문에 개성을 못 살린다. 어쩌다 멋진 캐리커처가 새겨지거나 디자인이 독특한 명함을 받으면 강한 인상이 남는다. 경험상 국적과 명함은 상관관계가 미미했다. 서양인들은 의외로 표준적인 명함을 내민다. 중국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은 친환경 재생종이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젊은층 다수는 사진 등을 넣어 차별화를 꾀한다. 정치인이나 기업체 영업사원, 예술인 등의 명함은 국적과 무관하게 개성이 풍부한 게 많다. 외식업체 대표로부터 인상 깊은 명함을 받았다. 전면에는 생일과 좌우명, 장래 꿈도 기입했다. 뒷면에는 ‘고객을 위해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글을 영어 알파벳으로 새겨 외국인을 배려했다. 인상이 강렬했다. 개성있는 명함을 새겨보자. 상대방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것 같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봉환예정 韓人유골에 日유골 섞여

    일본 도쿄 메구로(目黑)구의 사찰 유텐(祐天)사에서 한국 정부가 봉환하기로 한 한국인 군인·군속 피해자 유골에 일본인 유골이 섞인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17일 “일본 정부가 지난 12일 열린 ‘한반도 출신 구 군인·군속의 유골 문제에 관한 제7차 한·일 협의’에서 한국으로 이관하기로 한 유골 220여위 중에 10여위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정부는 일본과 협의를 통해 2008년 1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3차례에 걸쳐 유텐사에 보관된 연고 유골을 국내로 봉환했다. 이어 올 상반기에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무연고 유골 200여위를 처음 고국으로 갖고 오기 위한 협의를 진행해왔다. 일본 측은 “지난해 말 서류상의 본적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 유골의 생전 주소가 한국으로 기재돼 있어 한국인으로 분류된 사실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국내 봉환에 앞서 유골의 연고자가 있는지를 묻는 공시를 거쳐 이르면 5월쯤 유텐사의 무연고 유골 등을 한국으로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윤하, 日스크린 데뷔작 ‘일요일에’ 3월 국내 개봉

    윤하, 日스크린 데뷔작 ‘일요일에’ 3월 국내 개봉

    가수 윤하의 스크린 데뷔작인 일본영화 ‘이번 일요일에’가 내달 4일 국내에서 개봉된다. ‘오리콘의 혜성’이라 불리며 특유의 음악성으로 한국과 일본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윤하는 지난해 4월 일본에서 스크린 데뷔식을 치른 데 이어, 내달 국내 관객들과도 만나게 됐다. ‘이번 일요일에’는 일본으로 유학 간 한국 소녀가 3개의 직업을 가진 의문의 일본인 아저씨와 얽히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담은 성장 영화다. 지난해 4월 일본 전역에서 개봉한 윤하의 영화는 11월까지 관객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으며 장기 상영됐다. 윤하는 지난 2008년 3월부터 9월까지 ‘이번 일요일에’의 촬영을 진행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숨 가쁜 촬영 일정에도 윤하는 가녀리지만 호기심 많고 당찬 한국인 유학생 소라로 분해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윤하는 연기뿐 아니라 영화 OST에도 참여해 직접 부른 영화 주제곡 ‘무지개 저편’을 들려줄 예정이다. 일본영화프로듀서협회 최우수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켄모치 사토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번 일요일에’에는 윤하 외에도 이치카와 소메고로, 양진우, 다케나카 나오토, 전미선 등이 출연한다. 사진 = 인디스토리 서울신문NTN 박민경 기자 minkyu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시론] 한성백제박물관에 바란다/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

    [시론] 한성백제박물관에 바란다/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

    백제라고 하면 공주나 부여만을 생각해 왔는데 서울에 한성백제박물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에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건국되어 475년 공주로 천도할 때까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678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동안에 무려 500년 가까이 서울에 있었으나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한성백제 시대의 생활모습은 1980년대에 와서 서울 강남지역에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고, 백제 유적과 유물이 드러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1997년 1월에는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아파트 공사 중 대규모의 백제왕궁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성백제이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일대 백제유적을 발굴하여 한성백제의 면모를 밝혀내면서 마침내 박물관 건립이 추진될 수 있었다. 백제 건국 이전의 유적들이 도시개발로 많이 없어졌다지만 한성백제박물관은 한강유역에서 백제가 건국되기까지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되는 토착세력의 정통성을 구체화하여 전시하는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강남의 역삼동유적은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유적이지만 지금은 배드민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많이 훼손되었다고는 해도 이런 유적의 자취를 찾아서 박물관과 연계시킬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한성백제 시기를 중국의 낙랑군이나 대방군 시기로 보는 것은 물론, 심지어 한성백제 지역을 낙랑과 대방의 점령지로 보는 우리 역사 부정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국내 공공기관이나 일부 연구자 가운데도 한성백제 전반기를 역사가 없는 ‘원삼국시대’라고 하여, 백제가 기원후 4세기 전후로부터 국가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백제박물관은 한성백제 전기의 역사를 복원하는 학문적 노력과 함께 당시 유물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마땅히 고고학 발굴로 이미 찾아낸 역사적 유적·유물을 통하여 한성백제 전기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은 고구려와의 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일부에서 최근 한강유역과 경기·충청 일원에서 조사되고 있는 삼국시대 성곽의 주인을 고구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적 양식은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문화적 특징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에서 중국 한나라의 문화적 흔적이 나타난다고 한사군의 문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신라 유물 위주로 전시하고, 공주나 부여의 국립박물관이 그 지역의 백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듯이 마땅히 한성백제 시기의 한성백제 유물을 위주로 전시하는, 전문성을 지닌 박물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국적이 밝혀지지 않은 유물을 고구려 유물이라고 분류하여 전시한다면 역사인식을 왜곡할 수 있고, 또 한성백제 이후의 신라시기 유물을 위주로 전시하면 한성백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한성백제박물관은 단순한 유물전시관이 되기보다는 한성백제의 역사적 정체성을 밝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한성백제박물관은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을 보호하고 연구·교육시설로 활용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현재 영어마을로 사용되고 있는 풍납토성 내부의 옛 외환은행 숙소를 한성백제박물관 분관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을 보전하는 것은 2000년 역사의 서울을 진정한 서울로 지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월드 뉴스라인] 日 배우고싶은 외국어 3위 한국어

    일본인들이 올해 배우고 싶은 외국어로 영어, 중국어, 한국어 순으로 꼽았다. 1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자체적으로 자사의 인터넷 회원 4089명을 대상으로 세계 17개 언어 가운데 3개 국어씩 선택토록 한 결과 올해 영어를 익히고 싶다는 응답이 71.6%(복수응답)인 2936명에 달했다. 42.7%는 중국어를, 22.8%가 한국어를 골랐다. 영어는 세계 공용어로서의 위상, 중국어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발전, 한국어는 한류의 영향 등이 선호의 요인으로 분석됐다.
  • 교육·국가경쟁력·반부패지수 1위 ‘핀란드 따라잡기’

    교육·국가경쟁력·반부패지수 1위 ‘핀란드 따라잡기’

    지금, 여기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자유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책임지며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21세기적 이상향’에 가깝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핀란드의 정치행정, 문화, 교육, 주택, 보건 등 여러 분야의 사례를 들여다본다. 더불어 우리 사회로 눈을 돌려 분야별 현안들과 추구해야 할 대안적 과제 등을 살펴본다. 역사와 문화 등 처지는 다르지만 배워야 할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멀리 수백년 전 조선시대로도 거슬러 올라가 타산지석(他山之石)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를 총합해 본다. 영국 런던의 레가툼 연구소는 해마다 ‘레가툼 번영 지수’를 발표한다. 정치, 경제, 교육, 보건, 민주주의, 기업 등 여러 영역을 종합해 국가별 순위를 매긴다. 이 나라는 지난해 여기서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조사한 교육 경쟁력 또한 1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도 1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부동의 1위, 국제투명성기구(TI)가 뽑은 반부패지수 역시 1위다. 북유럽의 복지 선진국가 핀란드다. 2006년에는 유럽의회 의장국이 됐다. 인구 530만명의 조그마한 나라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일까 따이팔레 엮음, 조정주 옮김, 비아북 펴냄)은 많은 이들이 품었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다. 전·현직 정치인과 학자, 연구소·시민사회단체 대표 등이 ‘강소국’ 핀란드를 가능케 한 여러 제도, 문화, 생활상 등을 소개한다. 연립정부와 지방정부 등 국가 행정과 같은 크고 중요한 의제부터 자일리톨, 사우나, 노르딕 워킹 등과 같은 일상생활 속의 작은 부분들까지 아우르며 100개의 소재를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100가지 소재들을 꿰뚫고 있는 것은 모두 ‘사회적 창안(Social Innovation)’ 아이디어라는 점이다. ‘사회적 창안’은 특허화할 만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화합과 사회 안전망 구축, 의회민주주의의 발전, 사회 복지의 증대 등을 위한 아이디어를 일컫는다. 그동안 교육 정책 중심으로 소개되는 데 그쳤던 핀란드 사회의 실체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정치와 경제, 교육, 복지, 노동 등이 서로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끌고 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정치 분야를 보면, 1907년 세계 최초로 여성 의원을 19명이나 일거에 배출했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 영국과 미국은 각각 1918년, 1920년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또한 의회는 일반적으로 보유하는 입법권, 예산권 외에 ‘미래 비전 제시권’을 갖고 있다. 다른 특위가 임시위원회인 것과 달리 상임위원회로 운영되면서 에너지 안보, 기후 변화, 인구정책과 테크놀로지 등 인류 사회의 장기적 과제를 연구하고 제안한다. 1968년 노·사·정 간에 임금정책협정을 체결한 이후 4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삼자주의와 투명한 행정, 의사결정 투명성, 언론 자유 등에 토대를 둔 부정부패 척결은 핀란드 발전의 또 다른 한 축이다. 출산, 보육, 탁아 등에서 아이 낳기 좋은 ‘엄마들의 천국’ 핀란드, 대학 등록금, 하숙집 걱정 없는 ‘학생의 천국’ 핀란드 면모도 조목조목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2주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남부 엠마우스 마을 주민들이다. 이들은 ‘핀란드의 개발도상국 개발원조 수준이 너무 낮다.’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1% 운동’이 생겨났다. ‘핀란드 국민들이 자신의 연간 총소득 중 최소 1%를 후진국 개발협력 자금으로 기부하는 운동이다. 자발적 참여와 공유 정신에 기반한 ‘리눅스’가 핀란드에서 개발된 이유가 족히 짐작된다. 교육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룬 책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핀란드 교사는 무엇이 다른가’(마스다 유리야 지음, 최광렬 옮김, 시대의창 펴냄)다. 교사 양성과 관계 맺기, 교육 내용 등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OECD가 2000년 이후 3년마다 실시했던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세 차례 연속 1위를 차지했던 핀란드의 교육을 배우고자 하는 일본인 교사의 눈에 비친 모습을 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일본 교육계는 ‘핀란드 참배’라는 비아냥을 들어가면서까지 핀란드 교육 제도와 정책, 생생한 현장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핀란드를 방문했고, 자신들의 교육 정책을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자는 학업성취도 1위의 배경에는 질 높은 교사의 양성, 헌신적이면서도 평등한 교육을 추구하는 교사의 노력과 그 교사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교육당국 등이 있다고 분석한다. ‘핀란드 경쟁력’ 1만 6000원. ‘핀란드 교사’ 1만 35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물 건너가는 日王 방한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일왕의 한국 방문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다. 외교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12일 “건강문제와 한국 내 반대여론으로 일왕 방한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올해 77세인 아키히토 일왕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지난 9일 권철현 주일대사도 “(일왕 방한은) 현재로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도 11일 한·일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와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일왕 방한은 노태우 정부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꾸준히 초청해 놓고 있는 사안이다. 공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셈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간무(桓武·재위 781~806년)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말을 권 대사에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왕의 해외 방문은 ‘국사(國事) 행위’로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일왕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 “해외 방문은 일본 정부가 결정하는 문제”라며 즉답을 피한다고 한다. 패전(敗戰) 전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들에 의해 신처럼 받들어졌던 일왕의 해외 방문은 극히 민감한 문제라 일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부담은 정부가 고스란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왕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한국에 주재하는 한 일본 언론인은 “(일왕에게) 계란 한 개만 날아들어도 엄청난 사태라는 정서가 일본인들 사이에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992년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난징은 일제가 중국인 30만명(중국 측 추산)을 학살한 곳으로 반일감정이 우리 못지않은 곳이다. 그런 험지(?)에 일왕이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시민들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시위를 100%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일본 정부가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 지난 7일 한국 내 시민단체들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반환과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독도 망언 근절 등의 문제가 선결될 때까지 일왕 방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대사는 “일왕이 방한하려면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뭔가가 있지 않고서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日외상 “한일병탄 한국인 자긍심에 상처”

    日외상 “한일병탄 한국인 자긍심에 상처”

    방한 중인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이 11일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 고위관리가 한국어 관련 기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과거 일제가 우리말 말살정책을 펴던 역사와 대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지난해 출범한 일본 민주당 정권의 대한(對韓) 화해 제스처로 해석된다. 주한 일본 대사관 관계자는 “한·일 친선을 위해서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방문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일본인들 사이에 최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하는 학생 1357명 가운데 260명이 일본인 및 재일교포다. 오카다 외상은 이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올해 100년을 맞는 한·일 병탄과 관련,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은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합병당한 측의 아픔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기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하토야마 내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에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한 것으로, 그 후 역대 일본 정부가 줄곧 표명해온 입장이다. 오카다 외상은 일왕 방한과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면서 “오늘 양국이 설치하기로 합의한 한·일 문화교류회의를 통해 양국 국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싶다.”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국 옻칠문화 1등 브랜드 만들고파”

    “한국 옻칠문화 1등 브랜드 만들고파”

    │도쿄 박홍기특파원│‘조선의 옻칠장이’로 불리는 옻칠예술가 전용복(58)씨가 23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는다. 다음달 한국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나설 작정이다. 전씨는 10일 “일본에서 예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많이 배웠다.”면서 “다음달부터 한국에 정착, 서울에 ‘아카데미’를 두고 전통 옻칠을 연구하면서 옻칠예술의 전수에 힘쓸 생각”이라고 밝혔다. 23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한 만큼 이제 고국에 뿌리를 두고 좀 더 한국의 미를 가미한 작품을 제작할 생각이다. 7년 동안 몸담아 일으킨 ‘이와야마 칠미술관’의 관장직도 내놓았다. ●앞으로 후진양성에 전력 쏟을것 전씨는 1988년 7월 일본에 발을 디뎠다. 도쿄에 위치한 연건평 2만 6400㎡의 대형 호텔 겸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의 실내장식 복원을 위해서였다. 장식은 다름 아닌 옻칠작품이었다. 가조엔 측은 5000점의 작품을 되살리는 총책임을 전씨에게 맡겼다. 1991년 11월까지 3년간 2000점의 원형은 되찾았지만 3000점은 아예 새로 제작했다. 투입된 연인원은 10만명, 즉 매일 100명씩 3년간 작업한 꼴이다. 옻량은 10t, 비용은 50억엔이 들어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조엔 측에 감사한다. 믿어줬기 때문이다.” 일본 NHK의 문화센터와 칠미술관 등에서 옻칠예술강좌를 열었다. 13년간 문화센터의 수강생 600여명을 포함, 전씨로부터 옻칠을 배운 일본인은 1000명이 훨씬 넘는다. 전문적으로 뛰어든 문하생은 10명, 모두 일본인이다. 칠미술관을 거쳐간 ‘제자’ 가운데에는 한류스타인 ‘욘사마’ 배용준씨도 포함돼 있다. “배용준씨는 비록 1주일간 배웠지만 열심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욘사마 스승’으로 알려진 이유다. 때문에 전시회 때마다 욘사마 팬들이 몰려들고 있다. ●日제자 1000명… 배용준도 가르쳐 “한국이 도자기의 나라라면 일본은 옻의 나라다. 지진이 잦은 탓에 깨지지 않는 목기를 썼고 오래 사용하기 위해 옻을 칠했다. 그만큼 역사가 깊다. 옻의 본고장인 일본에서 한국의 옻 전통을 접목시켜 옻칠로써 모든 것을 표현했다. 다양성이 서양화를 그리는 것과 같다. 옻칠 문화를 일등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 한국 전통 옻칠의 역사를 고구려 벽화와 8만대장경에서 찾았다. “벽화의 채색이 옻칠 때문에 1500년을 버텼고, 8만대장경 역시 훼손되지 않았다.”는 게 전씨의 주장이다. 전씨는 “우리를 알고, 뿌리를 알아야 세계로 나갈 수 있다.”면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의 의미는 무겁고 깊다.”고 강조했다. “화려하고 뛰어난 우리의 옻칠예술을 세계에 보여주겠다.”고도 했다. 한국 생활을 위한 준비도 거의 마쳤다. “서울의 아카데미 이외에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아래 옷칠연구소와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모 대학에서 옻칠학과 신설과 전씨의 교수 임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 日사상가 15人 공통점은 무엇일까

    개인이건 국가건 어떤 일을 행하는 밑바탕에는 옳다고 믿는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특히 근대에 이르러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에 ‘몹쓸 이웃’이 됐던 일본이 ‘몹쓸 행동’을 스스로 용인하도록 명분을 제공한 사상은 무엇일까. 많은 역사·철학자들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광기를 낳은 사상적 토양이 된 인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를 꼽는다. 일본의 1만엔권 화폐에 새겨진 사상가로, 일본 우익의 ‘원조’쯤으로 여겨진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며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외쳤던 그가 네덜란드와 영국의 근대학문을 독학으로 깨우친 뒤 내뱉은 말은 ‘탈아입구’(脫亞入歐)였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자.’란 뜻. ‘서구화’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인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의 지향점이 잘 압축된 구호였다. 그는 ‘탈아입구’를 1885년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게재하며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서양사람들이 그들을 상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와 친한 사람은 함께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양의 나쁜 친구들을 사절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웃나라를 상대하는 데 서구 열강들처럼 악수 대신 함선을 보내고, 선린보다는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얘기다. 이런 그의 주장은 이후 일본 정치계의 정한론 주장과 맞물려 제국주의적 침략 사상의 한 배경이 됐다. 이처럼 일본의 문화와 사상의 형성 과정과 주요 흐름을 짚어 본 책이 출간됐다. ‘일본을 만나다’(임태홍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펴냄)이다.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15인의 생애와 사상’이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가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일본이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을 갖추기 시작한 헤이안 시대부터, 한반도와 중국을 손아귀에 넣고 세계 제패를 꿈꾸다 실패한 근대까지, 15인의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욕망이 바로 열반이다.”라고 외친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부터 ‘춤추는 염불승’ 잇펜(一遍), “도(道)라는 것은 바로 인륜이다.”를 역설한 퇴계학의 충실한 소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 불교, 성리학, 양명학, 국학, 기독교, 신종교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망라했다. 그들이 살다 간 시대와 환경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일본 문화와 일본 사상의 깊숙한 내면에 흐르는 원초적인 ‘기억’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하나하나 대답하고자 했다. 2만 5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배용준에게 고소당한 광고대행사, 억대 맞소송

    배용준에게 고소당한 광고대행사, 억대 맞소송

    한류스타 배용준(38)이 광고대행업체와 맞소송을 하게 됐다.여행상품 광고대행 업체 S사는 배용준과 소속사 키이스트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S사가 낸 소송은 지난해 12월 배용준이 S사를 ‘초상권’ 침해로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맞소송인 반소(反訴) 형태다.S사는 고소장에서 “지난해 6월 배용준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여행상품 광고를 삭제했으나 이후에도 관련 자료를 언론에 배포해 허위기사가 나오도록 했다.”며 “광고에 배용준의 이름과 사진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초상권을 침해한 것처럼 몰아갔다.”고 주장했다.배씨는 지난해 12월 S사를 상대로 자신의 집과 단골 미용실, 피트니스센터 등을 방문하는 여행상품을 광고해 초상권을 침해당했다며 1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배씨 측은 고소장에서 “S사는 배씨의 사진 등을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몰에 무단으로 올려 일본관광객을 모집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일본인 관광객이 배용준이 이용하는 미용실과 헬스클럽, 소속사 사무실 등까지 따라 다니는 등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 =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채현주 기자 chj@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홍도가 그린 초상화가 단돈 1원?

    김홍도가 그린 초상화가 단돈 1원?

    ‘단원 김홍도가 그린 초상화가 1원?’ 보물 제1487호인 ‘서직수 초상’은 1796년 화가 김홍도와 이명기가 각각 몸과 얼굴을 나눠 그린 초상화다. 191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 초상화를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사올 때 가격은 단 1원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7년부터 3년간 소장 중인 초상화 정리작업을 끝내고 이를 최근 ‘조선시대 초상화III’으로 발간했다. 여기에 박물관은 이들 초상화가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내력을 함께 유물카드에 쓰인 가격까지 정리해 실었다. 그 결과 소장 초상화 100여점 중 ‘서직수 초상’은 가격이 1원으로 가장 싸게 거래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 구입한 중국의 ‘제갈무후도’가 280원인 것을 보면 굉장히 싼 가격이다. 이에 대한 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신을 그린 것이긴 하나 관복이 아니고 사복을 입었다는 점, 당시의 중국 그림 가격이 한국 것보다 훨씬 비쌌다는 점 등을 고려해도 1원은 이례적으로 낮은 가격”이라면서 “김홍도, 이명기에 대한 당대 평가와 초상화에 대한 인식 등을 통해 연구해 봐야 할 문제”라고 설명했다. 한편 박물관은 ‘조선시대 초상화Ⅲ’에 1774년에 시행한 과거시험 등준시(登俊試)에서 무과시험에 합격한 18명의 초상화를 묶은 화첩도 공개했다. 전모가 처음 공개되는 이 화첩에는 그간 상대적으로 수량이 적었던 무신 초상화가 대량 포함돼 있다. 또 여기에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고위 관직자들의 모임인 ‘기로소(耆老所)’ 회원들의 초상화집인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보물 929호)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같은 자료도 실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종로 ‘외국인 안내’ 주민이 나선다

    종로 ‘외국인 안내’ 주민이 나선다

    “미국인, 일본인 모두 걱정없다. 우리 동네 안내는 우리가 맡는다.” 서울의 관광1번지로 불리는 종로구 주민들이 종로일대 고궁과 북촌(가회동, 삼청동)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들은 ‘북촌 외국어 강습반’ 수료생들로 관광성수기인 3월부터 본격적인 자원봉사에 나서게 된다. 구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구민의 ‘안내요원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자기 집 앞길은 최소한 안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충용 구청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 이에 따라 구는 종로구문화관광협의회와 함께 지난해 9월부터 4개월간 ‘제1회 북촌 외국어(영어·일어) 강습반’을 운영해 지난달 말 36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수료식 행사에서 영어반의 경완식씨와 일어반의 황혜주씨는 영어와 일어로 각각 학생대표 인사를 하는 등 그동안 닦은 실력을 자랑해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구는 제2회 북촌 외국어 강습반 강의도 오는 3월 중순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한편 서울 북촌지역 외국인 관광객 안내를 위한 ‘북촌 영어’, ‘북촌 일어’ 책자도 1월말 발간됐다. 종로구 문화관광협의회가 구와 배화여자대학 산학협력단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이 책자는 종로 북촌 현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각 시나리오별 상황을 수백 가지로 구성해 관광객이 필요한 곳을 찾을 때 현장 주민들이 교재로 활용해 안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궁궐, 맛집, 역사문화명소, 게스트하우스 등 장소와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설명을 담았다. 책자에 실린 각 시나리오별 안내문답을 다 익힐 경우에는 다른 길 안내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책자는 영어와 일어 각각 200권씩 총 400권을 비매품으로 만들었으며 제2·3차 외국어 강습 교재로 쓸 예정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2일 TV 하이라이트]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7시30분) 크리스티나의 빠져들 듯한 눈에 반했다는 김상철씨. 그녀 역시 상철씨의 눈부신 미소에 첫눈에 반했다는데. 첫 만남에 운명임을 느낀 두 사람.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서로에게 너무 완벽한 크리스티나, 상철씨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를 들어 본다. ●이야기쇼 락(KBS2 밤 12시45분) 1994년 KBS 공채로 데뷔해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던 탤런트 윤손하. 올해 일본 활동 역시 10년차로 가수, 배우, MC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여자 탤런트 중 하나다.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다쿠야와의 놀라운 인연을 전격 공개한다. 또 그녀가 말하는 한국 연예계 vs 일본 연예계는…. ●TV특종 놀라운 세상(MBC 오후 6시50분)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결혼을 못한다며 공개구혼까지 낸 화제의 주인공. ‘절대동안’ 27세 총각 중국의 허우 하이린씨를 만나 본다. 10년째 밥도 국도 먹어본 적이 없다, 익힌 음식은 절대 사절. 무엇이든 날로 먹어야 제맛이란다. 날로 먹는 게 곧 행복이자 진리라 외치는 생식 예찬론자 김재봉 할아버지를 만나 본다. ●아내가 돌아왔다(SBS 오후 7시15분) 잠에서 깬 영훈은 매일 아침 이렇게 일어나면 좋겠다고 말하고, 유경은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영훈은 미소를 짓고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인다. 유경은 왜 자신이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고, 영훈은 계속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다큐 10+(EBS 오후 11시10분) 세계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페루의 마추픽추. 마추픽추를 건설한 잉카 문명은 미라 숭배를 발달시킨 몇 안 되는 문명 중 하나였다. 이 프로그램은 잉카제국의 미라 문화가 어떻게 시작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했고, 어떻게 쇠퇴했는지, 지금 남아메리카 사람들한테는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알아본다. ●멜로다큐 가족(OBS 오후 11시) 경기도 오산시의 소문난 7공주 집 이야기가 방송된다. 족발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진욱(50)씨 부부는 20여 년 동안 7명의 딸을 낳았다. 주위에서는 아들을 갖고 싶지 않으냐고 하지만 이들은 7공주가 열 아들 부럽지 않다. 늘 바람 잘날 없이 소란스럽지만 언제나 행복이 가득한 7공주 집 가족을 만나본다.
  • 대구 삼성상회터 관광객 북적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대구시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터가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다. 이곳은 삼성 창업자인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와 대구상공회의소가 현재 기념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인근에서 기계공구 유통 전문기업을 운영하는 최영수(63) 사장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한다.”면서 “성공한 기업인이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라 그런지 부자의 기운을 받으려고 왔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가운데 일본인 관광객도 많다. 외국에서 삼성이 더 큰 회사로 평가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상회’ 간판이 붙어 있었던 지하 1층, 지상 4층의 옛 목조건물은 1997년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면서 제 모습을 잃었다. 삼성 측이 보존 목적으로 조성한 대리석 기념 벽과 삼성상회의 옛 모습 사진, 그리고 과거에 팔았던 별표 국수 상표 등을 통해 당시의 풍경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삼성물산 김종수(46) 과장은 ”옛 삼성상회 건물의 주요 부분은 용인에, 외벽은 대구에 있는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공구거리를 지나 삼성상회 터에서 250여m 안쪽으로 가면 호암이 살았던 집(인교동 164의 8)이 있다. 이 집은 3남인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1942년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호암은 부인, 자녀들과 함께 250㎡의 방 7개짜리인 이 한옥에서 생활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1947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6년여간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미수다’ 리에, 독도 발언에 몸살

    ‘미수다’ 리에, 독도 발언에 몸살

    “독도, 이름을 지은 건 우리 일본인”KBS 2TV ‘미녀들의 수다2’(이하 ‘미수다2’)에 출연 중인 일본인 아키바 리에가 독도에 대한 발언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한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했던 리에는 “한국이 먼저 독도를 찾았지만 독도가 어느 나라의 섬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한국인이 먼저 발견한 것은 맞지만 이름을 지은 건 일본인”이라고 밝혔다.이를 접한 수많은 네티즌들은 발끈했다. 누리꾼들은 ‘미수다2’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독도는 명백히 한국 땅이다. 리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사진=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김경미 기자 rornfl84@nate.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대구 삼성상회 터 관광객 북적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대구시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터가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다. 이곳은 삼성 창업자인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와 대구상공회의소가 현재 기념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인근에서 기계공구 유통 전문기업을 운영하는 최영수(63) 사장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한다.”면서 “성공한 기업인이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라 그런지 부자의 기운을 받으려고 왔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가운데 일본인 관광객도 많다. 외국에서 삼성이 더 큰 회사로 평가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상회’ 간판이 붙어 있었던 지하 1층, 지상 4층의 옛 목조건물은 1997년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면서 제 모습을 잃었다. 삼성 측이 보존 목적으로 조성한 대리석 기념 벽과 삼성상회의 옛 모습 사진, 그리고 과거에 팔았던 별표 국수 상표 등을 통해 당시의 풍경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삼성물산 김종수(46) 과장은 ”옛 삼성상회 건물의 주요 부분은 용인에, 외벽은 대구에 있는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공구거리를 지나 삼성상회 터에서 250여m 안쪽으로 가면 호암이 살았던 집(인교동 164의 8)이 있다. 이 집은 3남인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1942년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호암은 부인, 자녀들과 함께 250㎡의 방 7개짜리인 이 한옥에서 생활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1947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6년여간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日왕실 조선왕조 교양서 등 대량 보유”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왕실이 조선왕실의궤 이외에도 조선 왕조가 소장했던 도서와 왕의 강의에 사용됐던 서적들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3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왕실을 관장하는 궁내청이 보관중인 조선 왕조의 도서는 크게 두가지다.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불리는 조선 당시 의학과 관습, 군(軍)의 역사 등을 소개한 서적 38종 375권과 왕이 교양을 쌓기 위해 받던 강연인 ‘경연(經筵)’에 쓰던 책들이다. 특히 밝혀진 도서 중에는 1392년 조선 건국 초기 자료와 함께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의학서와 같은 종류, 해외에 흩어져 있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서적집도 포함돼 있다. 도서들은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으로 유출한 서적들로 보인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한국문화재청 측은 최근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는 6만 1409점”이라고 발표했지만 “개인의 소유까지 포함하면 30만점이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양국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 당시 문화재와 문화협력협정을 체결, 한국에서 온 문화재 1300여점을 일본이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또 1990년 이후 일본인들의 기증 등의 방식으로 한국에 반환된 문화재는 17건에 2500점가량의 미술품·고고학자료· 서적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양국 정부는 국제법상 문화재 인도는 완료된 것이라는 입장”이라면서 “그러나 조선왕실의궤의 경우 한국 국회가 2006년 12월 반환요구 결의를 채택하고 외교통상부 장관도 2008년 4월 한·일 외무장관회담에서 국내 사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반환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제실도서와 경연 서적도 조선왕실의궤와 유출 경로가 유사한 만큼 한국 정부에서는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 3점의 문화재를 함께 돌려줌으로써 양국간 우호의 상징으로 삼고 싶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hkpark@seoul.co.kr
  • [도시와 길] 서울 종로

    [도시와 길] 서울 종로

    ‘길에서 길을 묻는다.’는 말이 있다. ‘길’은 단순히 차와 사람이 오고 가는 통로라는 사전적 의미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길이 생기고, 그 길을 중심으로 집과 건물이 생기며 또 그곳에서 도시와 문화가 생긴다. 그래서 길은 도시나 나라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 한다. 유행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길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찾지 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있다. 서울신문은 ‘신년기획’으로 매주 월요일자에 ‘도시와 길’을 연재한다. ‘도시와 길’은 한국의 도시와 그 도시를 대표하는 길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부침을 겪었는지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는다. ‘종로로 갈까요~.’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 말 그대로 ‘1번지 길’이다. 매년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수만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의 강추위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모두가 외치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되는 보신각종의 서른 세 번 울림.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도 지켜보는 한 해의 끝과 또 다른 시작. 1953년 이래 오늘날까지 ‘종로(鐘路)’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한 해를 시작하는 거리다. ●서민들 삶의 터전… 추억이 고스란히 종로는 서울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길’을 떠올릴 때 감히 비교할 만한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서울시내 25개 자치구 중에서 이름에 유일하게 길을 담은 곳도 종로구뿐이다. 구로구가 있지만 구로(九老)는 길이 아닌 아홉 명의 노인이 장수한 곳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세종로 138번지 세종로사거리에서 종로6가 78번지 동대문에 이르는 너비 40m, 길이 2.8㎞의 왕복 8차선길인 종로는 수백 년 전부터 언제나 번화가였고, 지금도 그렇다. 세종로 사거리에 자리 잡은 교보문고의 철마다 바뀌는 초대형 간판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종각에서 인사동 초입, 종로3가부터 시작되는 귀금속 거리와 종로5가의 약국거리는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추억이 담겨 있다. 종로3가에서 귀금속점을 운영하는 우정호(60)씨는 “이곳에서 두 아들을 키워서 장가를 보냈다.”면서 “종로는 나에게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종로에 살거나 종로를 즐겨 찾는 사람들도 종로를 생각하는 의미는 특별하다. 종로 토박이로 살아온 김학수(85) 할아버지는 “처음 기억하는 종로와 지금의 종로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서울의 중심이자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술회했다.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종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로의 어학원 앞에서 만난 김호연(25·여)씨는 “다른 번화가들은 유행에 따라 모습을 바꾸지만 종로는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만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곳”이라며 “항상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져 아무리 번화한 밤에도 왠지 모르게 편안하다.”고 전했다. 또한 탑골공원의 어르신들 모습을 얼른 떠올리기만 해도 종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편안하게 찾는 곳이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상점과 간판이 바뀌고, 건물의 높낮이는 달라졌지만 종로는 그 자체로 역사다. 종로라는 이름은 지금의 종로사거리에 종을 매단 종루(鐘樓)가 세워져 있던 것에서 비롯됐다. 종가(鐘街), 종루가(鐘樓街), 종루십자가(鐘樓十字街)라는 이름도 모두 같은 연유다. 태종 때 시전행랑(오늘날의 상가)이 종로사거리에서 동대문까지 들어선 후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상점과 노점들이 길을 잠식하면서 도로폭이 오히려 줄어들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에 종로는 ‘최첨단’, ‘신문물’의 거리였다. 1899년 5월에는 전차가 개통됐고, 1900년 4월에는 종로사거리에 처음으로 전기 가로등 3개가 밝혀졌다. 당시 조선을 찾은 러시아인 파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코레야 1903년 가을’이라는 기록에서 “종로에는 서울에서 가장 좋은 상점과 가게, 시장들이 있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의 억압은 종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21년부터 일제는 종로를 동대문에서 경희궁 앞까지, 폭을 28m로 좁게 줄였다. 일제가 조선인 상가가 밀집돼 있던 종로를 의도적으로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로의 번영은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종로사거리 북동쪽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 들어섰고 1932년에는 동아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이를 중심으로 우리 상인들은 지금의 충무로인 ‘혼마치(本)’의 일본인 거리와 각축을 벌이며 상권을 지켜 나갔다. 3·1만세시위운동의 출발과 중심도 종로였고,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선 우리 민족의 경제자립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거점도 종로였다. ●‘도심재창조’… 변화의 갈림길에 선 종로 광복 후에도 화신백화점, 신신백화점, 배오개시장의 맥을 이은 광장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 세운상가는 종로 상업의 번영을 상징했고 피맛골은 서민들의 애환을 담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았다. 그러나 1980~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이 급격히 커지자 종로는 번화가의 기능을 다른 곳에 나눠주고 있다. 젊은이들은 백양로로 대표되는 신촌과 대학로를 찾기 시작했고, 유흥가는 강남대로와 영등포로 옮겨 갔다. 오래된 건물과 노점은 서민의 정취를 담는 데 그쳤을 뿐 더 이상 유행을 만들지도 못했고,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피맛골도 세운상가, 청진동 해장국 골목도 변화의 물결을 피해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과 간판들이 들어섰고, 오랜 세월 종로를 기억해 온 사람들의 ‘개발을 명목으로 역사를 지운다’는 비판이 거세다. 대신 서울시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도심재창조 프로젝트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세운상가 주변을 재정비해 창경궁~종묘~세운상가~퇴계로~남산을 잇는 대규모 녹지축을 조성하고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하겠다는 목표다. 종로는 지금 개발과 보존의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변화의 중심인 셈이다. 몇 권의 책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600년의 세월, 길 자체가 서울시민의 역사인 종로가 앞으로 또 다른 600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민청학련지원 일본인 기자 36년만에 재심서 무죄판결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취재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인 기자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이규진)는 27일 내란선동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된 다치가와 마사키(64) 일간현대 기자에 대한 재심에서 내란선동 등 혐의에는 무죄,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는 면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문건을 보면 일본인의 관여사실을 부정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고, 피고인 등이 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은 취재사례비가 아니라 폭력혁명 수행자금으로 하라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 의문사위 조사과정에서 민청학련 사건 수사 때 각종 고문이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폭력혁명을 위해 돈을 줬다는 진술도 임의성이 없는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1973년∼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이철·유인태 등을 취재한 다치가와 기자는 내란선동과 북한찬양을 위해 7500원을 거사비용으로 건넸다는 혐의로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10개월 복역한 뒤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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