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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년만에 ‘10만 시위’… 日국민 입열다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집단행동을 자제하던 일본인들이 최근 들어 잇따라 길거리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로 환경문제에 민감해졌고, 민주당 정권 들어 미군 주둔 반대 운동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2030년 국가에너지 기본정책’을 세우면서 원전 재가동 방침을 밝혔다. 이에 반발해 원전에 반대하는 단체인 ‘수도권 반(反)원전 연맹’이 지난 3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총리 관저 앞에서 대정부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3월 29일 첫 시위에는 약 300명이 참여했지만 6월 들어서는 시위대가 만명대로 늘어났다. 급기야 지난 16일 도쿄 요요기공원에는 17만명의 시민이 몰려 들었다. 시민단체 회원뿐 아니라 샐러리맨, 주부, 대학생, 가족 등 그동안 시위와는 무관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에서 10만명이 넘는 군중이 시위에 나선 것은 1960년 미·일 안보조약체결 반대시위 때 이후 52년 만이다. 반원전 시위는 지난 6월부터 본격화된 것을 가리켜 ‘아지사이(자양화·일본에선 ‘6월의 꽃’) 혁명’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시위 참가자가 급증하는 배경에는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보급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처럼 특정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참가자를 동원하는 게 아니라 퇴근길 회사원, 아이를 업은 주부들이 인터넷상의 호소 글을 보고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반원전 시위는 미군 반대 운동으로도 번져 가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해외에서 빈발하는 추락사고로 안전성 논란을 빚은 신형 수직이착륙기의 일본 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주일 미군은 지난 23일 신형 수직이착륙기 MV-22 오스프리 12대를 민간 수송선에 실어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의 주일 미군 기지로 반입했다. 이르면 8월 말에 이와쿠니 기지에서 시험 비행을 거친 뒤 10월부터 오키나와의 주일 미군 후텐마 기지에서 본격 운용할 예정이다. 2014년까지 오키나와에 24대를 배치할 방침이다. 이와쿠니시 주민들은 이날 고무보트 10척을 동원해 수직이착륙기 배치에 항의하는 해상 시위를 벌였다. 오키나와 주민도 미군의 수직이착륙기 배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 주민들은 후텐마 미군 기지를 현 외로 이주할 것을 강력 요구하며 일본 정부와 미군에 맞서고 있어 미·일관계의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는 “일본 국민들도 이제 작은 꽃망울이 모여 큰 봉오리를 이루는 수국처럼 시민 개개인의 힘이 일본정부의 오만함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노래·춤·연기로 하나되어 ‘다문화 편견’을 뛰어넘다

    노래·춤·연기로 하나되어 ‘다문화 편견’을 뛰어넘다

    “유치원 다닐 때랑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이 제 피부가 검고, 엄마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놀리곤 했어요. 많은 친구들이 ‘레인보우 드림즈’ 공연을 보고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우리를 차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필리핀 어머니 자이다 세라핀씨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황관룡(12·은평초) 어린이가 똘망똘망한 큰 눈으로 기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관룡이는 지난 6월부터 국립극장에서 15명의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과 15명의 ‘PG153’ 주니어 단원들과 함께 노래, 발성, 발레, 연기 등을 배우고 있다. 27일부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KB 하늘극장 무대에 오르는 극무용극 ‘레인보우 드림즈’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어머니 세라핀씨는 “관룡이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에는 늘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아이돌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몰래몰래 공연 안무 등을 연습하며 즐긴다.”면서 “가장 기쁜 건 관룡이가 많이 밝아졌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관룡이가 밝아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에 3번, 지난 16일부터는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 2~3시간 국립극장에서 공연 연습에 한창인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지만, 한여름 더위도 이 아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 부딪히면 ‘미안’이라는 말보다 ‘아임 소리’(I’m sorry)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나오는 아이들부터, 외모는 다소 이국적이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부모 모두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나고 자라 영어가 더 익숙한 아이들까지…. 그야말로 다문화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춤과 연기, 노래에 빠져 있었다. 호주 국적의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로빈(8·덜위치칼리지)과 미국계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브리애나(8·용산국제학교)는 동갑내기로 레인보우 드림즈 팀의 분위기 메이커 그 자체였다. 일명 ‘까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소녀들은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아이들이다. 이국적인 외모를 지녀 아동복 모델로도 활동 중인 로빈은 한국어도 곧잘 했다. 한국어에 서툰 브리애나를 위해 통역사를 자처할 정도다. 로빈은 “학교보다 여기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서 손잡고 노래 부르고 너무 좋아요.”라며 연신 까르르 웃었다. 옆에 있던 브리애나는 “솔직히 춤이 어려워요. 하지만, 다양한 문화의 친구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게 기뻐요. 팀워크도 배웠어요.”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2시간 넘게 연습이 진행됐지만 아이들은 지칠 줄 몰랐다. 청소년들이 출연하는 장면에선 초등학생들은 잠시 빠져 있지만, 형들이 하는 것 그대로 따라하고 싶다며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습실 외곽에서 연신 춤을 췄다. 스페인계 우루과이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티네스 율리시스(8·복정초)는 “춤을 출 때마다 짜릿해요.”라며 1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도 눈에 띈다. 배우 박신양의 딸 승채(9·YISS)도 레인보우 드림즈 무대에 오른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승채는 “힘들지만 재밌어요. 아빠가 연기지도를 직접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특히 친구들과 동생을 배려하며 연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체성 혼란을 겪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소통을 통해 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극무용극 ‘레인보우 드림즈’는 29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전석 2만원. 36개월 이상 관람가. (02)2280-4114.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1) 인천 홍예문 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1) 인천 홍예문 길

    인천 홍예문(虹霓門)길은 파란만장한 한국 근대사의 영욕과 굴곡을 간직하고 있는 근대사의 무대다. 인천항이 1883년 개항한 뒤 조계지(租界地)로 몰려들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유입과 확대 속에 생겨나고 번창했다. 해방 후에도 1990년대 남동구에 신도심이 생기고 시청 등 주요 기관들이 옮겨가기 전까지 늘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드는 ‘인천의 명동’으로서 100년간의 영화를 누렸다. 이 길은 인천항과 청나라 및 일본 조계지로 이뤄진 개항장을 비롯해 옛 인천 중심지의 한 축으로서 대표적 상권을 형성했다. 지금도 청국영사관 회의청,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제1은행 등 일본 은행건물, 조선식산은행 터 등이 주변에 남아 있고, ‘인천 개항장 문화지구’에 포함돼 있다. 홍예문길에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중구청은 개항기 일본 영사관과 일제강점기 인천부청으로 쓰였고, 1995년까지 시청으로 사용됐다. 홍예문길은 인천항과 지금의 동인천역을 끼고 있는 전동, 동인천동 지역을 최단거리로 잇는 지름길이다. 인천항 부두에 맞닿아 있는 제물량로에서 시작해 중앙동, 관동을 거쳐 송학동을 통해 동인천의 참외전로로 빠져나오게 된다. 총연장은 1㎞ 남짓하지만 오르막길로 시작해 내리막길로 이어져 훨씬 길게 느껴진다. 그 중간쯤에 홍예문이 서 있다. 1908년 응봉산 남쪽 마루턱을 깎은 뒤 세운 홍예문으로 이 길은 홍예문길이란 이름을 얻었다. 산마루턱 9m가량을 깎은 뒤에 양쪽 편에 석축을 쌓고, 마루턱 정점에 세운 아치형 돌문인 홍예문은 인천항을 동인천과 이어주는 연결 통로 역할을 해 왔다. 지금도 인천역에서 동인천역 쪽으로 걸어가려면 이 길을 넘는 것이 가장 빠르다. 70m 남짓한 응봉산이 가로막고 있는 탓에 인천항에서 동인천 방향으로 가려면 에둘러 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제물량로에서 시작해 홍예문 직전까지 2차선 너비로 이어지다가 홍예문에서는 차가 한 대씩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진다. 아치형 화강암 터널 격인 홍예문의 폭이 4.5m밖에 안 되는 탓이다. 한쪽에서 차가 오면 다른 방향의 차량은 홍예문에 들어서지 못한 채 대기한다. 문 안으로는 보행자들이 차들과 함께 길을 재촉한다. 이 길은 지금도 학생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홍예문 상단부는 응봉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자유공원과 고급 주택가였던 내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천 개항지역을 동서로 연결하고 있다. 홍예문 상단부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인천항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지 않았던 1960년대만 하더라도 홍예문 정상 난간에서는 인천항은 물론 팔미도, 대부도, 용유도, 영흥도 등 여러 섬들도 바라볼 수 있었다.”고 인천시의 견수찬 학예사는 설명했다. 외국인 범죄 등을 재판하던 인천감리서 터에 자리 잡은 아파트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김구 선생이 일본인 살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돼 노역살이를 했던 곳이다. 홍예문 길은 예전엔 지역명문 인천여고, 제물포고, 박문여고 학생들의 주요 통학로였다.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길 곳곳에 스며 있고, 인천에서 나고 자라 1930~1940년대의 추억을 지닌 일본인 노인들이나 그들의 자손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홍예문 바로 앞에 위치한 인성여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하굣길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홍예문을 지나 동인천 쪽으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 눈에 들어오는 제물포고도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 지역 유지는 “또 한 역사가 떠나가려 한다.”고 아쉬워했다. 1990년대 아파트 단지들과 쇼핑센터들이 남동구에 생겨나면서 구도심에 살던 시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홍예문 주변을 떠받쳤던 시청 등 주요 시설들도 이전하면서 홍예문길도 100년 영화를 접게 됐다. 지금은 대형 음식점 몇 군데를 빼놓고는 대부분 작은 규모의 음식점들과 소규모 상점들이 이어져 있었다. 일제시대 인천항 쪽에서 홍예문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던 미두취인소(곡물 선물거래소) 터에는 국민은행 신포지점이 들어서 있었다. 옹진군 선거관리위원회 건물을 지나 홍예문 직전에 있는 인성여고 학생체육관은 일제시대 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일제시대 경찰서 등 주요 건물들도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많은 공공시설과 학교 등이 떠나갔지만 홍예문길 주변에 남아 있는 가옥과 단독주택들은 나이 먹은 가로수들과 무성한 담쟁이 덩굴 속에서 노신사와 같은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개항장 일대가 문화지구로 재정비되고, 이곳을 찾는 중국 등 해외관광객들도 늘면서 홍예문길도 차츰 활력을 되찾고 있다. 개항장 일대와 함께 홍예문길은 인천의 역사탐방 도보 여행길인 ‘인천개항누리길’에 포함됐다. 문화재보호법과 ‘근대건축물 밀집지역 지구단위계획’ 등으로 고도제한 등 개발에 제한을 받고 있었지만 한국근대사의 대표적인 무대로서 ‘문화·역사관광의 메카’라는 새로운 발전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역예술인들의 작업장과 전시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인천 아트플랫폼은 이 지역의 변신 노력을 보여준다. 1883년 세워진 일본 우선주식회사 창고 등을 개조해 만든 아트플랫폼은 옛 인천의 현대적 변신을 상징한다. 홍예문길과 개항장 일대는 변신을 꿈꾸고 있었다. 인천시와 중구청은 문화를 매개로 한 상권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공을 들이고 있었다. 최인선 중구 관광문화재과장은 “인천개항장 문화지구에 박물관, 공방, 전통찻집 등 권장 업종 용도로 취득한 부동산에 대해서는 취득세 절반을 경감하고, 재산세도 3년에 걸쳐 절반으로 줄여준다.”고 말했다. ‘인천 내항 재개발구상’은 홍예문길로 상징되는 근대 인천의 다양한 모습과 근대 한국의 유산들을 보다 현대적으로 결합시켜 문화관광의 메카로 도약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인천발전연구원의 김용하 도시기반연구부장은 “인천 내항의 주요 물류기능을 외항으로 옮기고 박물관, 미술관 및 공연공간 등 문화시설과 공원 등 주민 편의시설을 건설해 시민들의 접근이 가능한 시민개방형 항만으로 만들려는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내항을 일본의 대표적 문화생태 관광지로 변모시킨 요코하마의 미나토 미라이 지구와 같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건설 중인 수원~인천 철도가 2014년 개통되면 경기 남부와의 접근성도 좋아져 발전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12회는 충남공주 고마나루길을 소개합니다. 글 사진 인천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홍예문은

    [길을 품은 우리 동네] 홍예문은

    홍예문(虹霓門·무지개문)은 인천 구도심의 남산 격인 응봉산 마루턱을 깎아서 길을 내고 그 정점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돌문이다. 중구 홍예문 1길과 2길이 만나는 해발 65m의 고개에 서 있다. 산 마루턱을 파내 길을 내고 50㎝ 정도의 직육면체 화강암들을 쌓아서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8.9m로 만든 터널형이다. 마루턱을 깎은 뒤 문 양측에 축대를 쌓았다. 마름모꼴로 쌓아놓은 일본식 석축은 건설 당시 그대로의 견고함을 자랑한다. 무지재 돌문 또는 무지개 수레문의 뜻으로 한자로는 ‘홍여문’(虹礖門), ‘홍여문’(虹轝門)으로도 불렸다. 일본인들은 ‘아나몽’(穴門)이라 불렀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해 3년 만인 1908년 완성됐다. 중국인 석공들과 한국인 노동자들이 동원됐고, 암반층으로 인명피해 등 희생을 치렀다고 인천향토사료 등 기록들은 전한다. 건설비 3만 2250원 가운데 한국정부가 1만 6800원, 일본거류민단이 1만 5000원, 일본영사관 격인 인천이사청이 450원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홍예문은 일본인들의 유입이 가파르게 늘고 인천항 부근의 조계지가 포화 상태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모여 살게 된 만석동 등 주요 배후 지역과 인천항 조계지를 연결시키기 위한 연결 통로로 건설됐다. 일본 공병대가 건설을 맡을 정도로 인천과 조선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들과 식민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에 중요하고 특별한 공사였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49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김정일 요리사’ 후지모토 방북 “김정은 원수가 직접 초대…”

    ‘김정일 요리사’ 후지모토 방북 “김정은 원수가 직접 초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20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초청으로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후지모토는 이날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김정은 원수가 직접 초대한 만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 일가의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는 이번 방북이 2001년 이후 첫 북한행이다. 후지모토는 회고록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김정은은 10대에도 술·담배를 하는 등 거침없는 성격에다 승부욕 또한 남달랐다.”고 어린 시절을 묘사했다. 김정은이 김정일을 닮아 활동적이어서 김정일 자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도 적잖게 해 북한 전문가들은 이번 김정은의 초청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北 비판했던 日 요리사, 김정은 초청받자마자…

    北 비판했던 日 요리사, 김정은 초청받자마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20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초청으로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후지모토는 이날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김정은 원수가 직접 초대한 만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 일가의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는 이번 방북이 2001년 이후 첫 북한행이다. 후지모토는 회고록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김정은은 10대에도 술·담배를 하는 등 거침없는 성격에다 승부욕 또한 남달랐다.”고 어린 시절을 묘사했다. 김정은이 김정일을 닮아 활동적이어서 김정일 자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도 적잖게 해 북한 전문가들은 이번 김정은의 초청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특파원 칼럼] 일본경제, 우습게 봤다간?/이종락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일본경제, 우습게 봤다간?/이종락 도쿄특파원

    일본에서 지내면서 가장 흥미로운 일은 한국인들만큼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다. 한때 나라를 강제병합당한 분풀이 탓도 있겠지만 이상하리만치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에 자신 있어 한다. 몇년 전부터 한국의 전자와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계가 일본 기업을 앞서면서 일본 경제를 얕보는 경향은 더욱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3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은 끝났다.”라고 말하는 한국인들도 종종 만났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도 일본 경제의 쇠퇴를 일반화하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일본은 끝났는가. 기자의 답은 단연코 ‘아니다’다. 세계 최강의 부품, 소재업 등이 버티고 있는 일본 경제는 아직 건재하다. 오히려 일본 경제를 우습게 봤다간 큰코 다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최근 ‘데프레(디플레이션)의 정체-경제는 인구의 물결로 움직인다’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 정책투자은행을 거쳐 현재 일본종합연구소 연구원인 모타니 고스케의 저서다. 저자는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이라는 혹평을 듣고 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고 주장한다. 2009년 세계 동시 불황에도 감소하지 않는 일본 금융자산, 버블 경제 이후에도 증가하고 있는 일본 수출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2010년 6월에 출간돼 경기 침체에 빠져 있는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50만부 이상 팔렸다. 베스트 경제서 2위에 뽑히기도 했다. 이 책이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출간됐다는 점에서 지난해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태국 홍수, 사상 최고의 엔고 영향 등을 담지 못한 결함이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유럽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지금,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잃어버린 20년의 종언’ ‘일본 경제의 실력’ 등 일본 경제의 강점을 소개하는 책들의 출간이 줄을 잇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여전히 세계 1위의 해외 순자산 보유국이다. 대외부채를 뺀 일본의 대외순자산(NES)만을 보면 2011년 말 무려 253조엔(약 3670조원)에 달한다. 일본은 1990년 이래 21년간 세계 1위의 대외순자산국이라는 지위를 내주지 않았다. 지난해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지만, 경상수지는 123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외환보유액은 2011년 말 기준 1조 2958억 달러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실업률도 4%대 초반으로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일본 경제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세계 석학들의 주장도 잇따르고 있다. 칼럼니스트이자 아시아 전문가인 이먼 핑글턴은 지난 2월 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일본의 실패는 신화’라는 글에서 ‘잃어버린 10년’ 또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용어 자체가 근거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서구 경제학자들이 비난했던 일본 경제를 이젠 서구의 역할 모델로 삼아야 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는 갑자기 부상하지 못하지만 갑자기 하락하지도 않는다. 유럽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일본의 존재감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시장인가. 일본은 1인당 소득 4만 2000달러, 인구 1억 3000만명으로 우리의 약 5배에 달하는 거대시장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 유사하다. 세계 경제가 유럽의 재정위기, 중국의 성장률 저하, 신흥국의 인플레 등으로 불안한 상태다.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는데 바로 옆에 일본이 있다. 그동안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돼온 대일 무역수지 적자도 지난해 전년에 비해 65억 달러나 감소한 264억 달러를 기록했다. 수출이 전년 대비 41.3%나 급증해 20여년 만에 최고 증가율을 기록했다. 한류 붐 등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한국상품에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의 파고를 뚫고 갈 해답이 바로 우리 옆에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jrlee@seoul.co.kr
  • “동일본 대지진은 천벌” 자민당 의원 발언 파문

    일본 자민당의 가와무라 다케오 선거대책국장이 지난 18일 니가타시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국가 재건을 다시 할 때가 왔다. 3월 11일의 동일본지진을 천벌로 받아들이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가와무라 의원은 민주당 정권의 정책을 비난하며 국내 경제 및 사회의 복구와 재건을 연설하는 가운데 발언한 것이지만 재해지 이재민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회에서 “일본인은 윤리, 도덕관이 높은 부지런한 국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세계가 존경하는 국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제력이 저하되면 멸시를 받을 우려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앞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지사도 지난해 3월 14일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일본인의 정체성은 이기심이다.”라며 “이번에 쓰나미를 잘 이용해서 이기심을 한번에 씻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 대지진은) 역시 천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발언한 지 하루 만에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 철회와 함께 사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北 비판 김정일 요리사, 김정은이 오라고 하자

    北 비판 김정일 요리사, 김정은이 오라고 하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20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초청으로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후지모토는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김정은 원수가 직접 초대한 만큼 거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김정일 일가의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는 이번 방북이 2001년 이후 첫 북한 행이다. 후지모토는 회고록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김정은은 10대에도 술·담배를 하는 등 거침없는 성격에다 승부욕 또한 남달랐다.”고 어린 시절을 묘사했다. 그는 “정은은 농구를 할 때도 남달랐다.”며 “정철팀과 정은팀이 농구시합을 한 뒤 경기가 끝나면 형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로 그치는 반면, 정은은 코치처럼 친구들을 불러모아 게임을 분석하는 등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다.”고 회고했다. 김정은이 김정일을 닮아 활동적이고 부끄러움을 타지 않아 김정일 자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도 적잖게 해 북한 전문가들은 이번 김정은의 초청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나도 당당한 서울주민… 가슴 뿌듯”

    “나도 당당한 서울주민… 가슴 뿌듯”

    웬만한 서울 토박이보다도 더 서울을 잘 알 정도로 서울을 사랑하는 무로야 마도카(30). 평소에도 서울을 더 잘 알기 위해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이런저런 소식과 정보를 찾곤 하던 그가 어느 날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위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한글 서예 매력에 끌려 한국과 인연 주소지나 직장이 서울에 있는 서울 ‘주민’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는 자격조건에 서울을 제대로 알고 싶기도 하고, 다양한 서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신청서를 작성했다. 추첨에선 떨어졌지만 무로야가 보여준 관심과 열의에 서울시는 감동했고, 박원순 시장이 추천하는 25명 가운데 한 명으로 주민참여예산위원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서울 주민이라는 걸 인정받았다는 기분도 들고요. 앞으로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합니다. 부모님과 친구들도 많이 응원해 주고요.” 무로야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과의 인연은 서예를 통해서 이어졌다. 서예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글 서예가 주는 매력에 끌려 한글을 익혔고 그 인연으로 2002년에는 한국에 어학연수를 오기도 했다. 한·일 교류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스태프로 참여한 뒤 줄곧 한국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2010년부터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로야가 예산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직장과 연관된 문화관광위원회를 분과위원회로 신청했지만 경제산업위원회에 배정됐다는 무로야는 19일 “예산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걸 배울 수 있고 시에서 예산학교를 통해 모르는 것도 많이 가르쳐 줘서 아주 좋다.”고 시원스레 웃었다. ●“자전거 이용 활성화 제안해보고 싶어” 그는 “중요한 건 전문성보다도 애정과 관심, 배우려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예산사업을 많이 제안해 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일본 자민당 의원, “동일본 대지진은 천벌” 발언

    일본 자민당의 가와무라 다케오 선거대책국장이 지난 18일 니가타시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국가 재건을 다시 할 때가 왔다. 지난해 3월 11일의 동일본지진을 천벌로 받아들이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고 있다. 가와무라 의원은 민주당 정권의 정책을 비난하며 국내 경제 및 사회의 복구와 재건을 연설하는 가운데 발언한 것이지만 재해지 이재민들의 반발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회에서 “일본인은 윤리, 도덕관이 높은 부지런한 국민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세계가 존경하는 국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제력이 저하되면 멸시를 받을 우려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앞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지사도 지난해 3월 14일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일본인의 정체성은 이기심이다.”라며 “이번에 쓰나미를 잘 이용해서 이기심을 한번에 씻어내야할 필요가 있다. (이번 대지진은) 역시 천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발언한 지 하루만에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 철회와 함께 사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소통의 장’ 광장의 10년 명암] “거리응원·촛불시위는 한국의 에너지”

    도쿄신문 사사가세 유지(47) 서울특파원은 2002년부터 3년간 서울에서 특파원 생활을 한 뒤 지난해 11월 다시 서울에 왔다. 2002년 광장이 열리던 순간을 목격한 그는 “당시 한국의 거리응원과 촛불집회가 보여준 에너지는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 “술집에 가면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 큰소리로 떠들고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사사가세 특파원은 한국에서 그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고 전했다. “한국 사회가 과거에 비해 여유가 생긴 반면 그만큼 활기와 열정은 줄어든 느낌”이라면서 “한국도 고령화가 진행되는 만큼 세대간의 이해와 양보를 통해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불통의 문제가 현 정권의 스타일과 관련이 있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사사가세 특파원은 “많은 일본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강한 리더십의 성공한 지도자로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가 없는 것을 보면 강한 리더십이 국민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업무 추진 방식이 국민들의 불만을 낳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2002년 월드컵을 목격하고 다이내믹한 한국에 푹 빠졌다는 이코노미스트의 대니얼 튜더(31) 특파원은 사사가세 특파원과 달리 한국 사회의 소통이 적극적이고 활발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2002년부터 한국과 영국을 오가다 2010년부터 특파원 생활을 하고 있는 튜더는 “몇 해 전 택시에서 기사가 대통령 지지율과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면서 “대다수 사회 구성원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또 “한국의 집회는 영국에 비해 평화적”이라면서 “집회를 통해 끊임없이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은 영국인들이 사회문제에 냉소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튜더 특파원은 정치권과 언론이 국민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일방적인 주장과 의견만 전할 것이 아니라 자세를 낮춰 국민과의 소통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도 엄청나게 많은 문제가 있다.”면서 “서구인의 오만한 시각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사랑하는 한 외국인의 의견으로 봐달라.”고 당부했다. 김동현·배경헌기자 moses@seoul.co.kr
  • “일본이 잘못했습니다”

    “일본이 잘못했습니다”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역사를 극복하고 우호를 추진하는 모임’의 일본인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제주는 中관광객 경유지?

    제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 3명 중 2명은 서울과 부산 등 다른 지역을 경유해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中관광객 13만명 직항 이용해 입국 12일 제주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제주공항 국제선 직항이용 실태를 분석한 결과 중국~제주 간 직항편을 이용해 제주를 찾은 중국인들은 13만 4114명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 동안 국제선 직항편을 타고 제주를 찾은 외국인 입국자가 23만 5144명으로 중국인 비중은 57%로 나타났다. 또 이 기간에 제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모두 39만 6351명으로 중국~제주 간 직항편 이용 비중은 34%에 그쳤다. 이는 중국관광시장에서 제주도는 아직 최종 목적형 관광지이기보다는 경유 관광지로 여기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올 상반기에 제주를 찾은 일본인은 9만 696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7만 1880명)보다 35%가량 늘었다. 특히 직항노선을 타고 제주를 찾은 일본인이 7만 5621명으로 집계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제주에서 체류하며 관광을 즐기다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日관광객 대부분 처음부터 제주 체류 제주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인천공항~제주공항 무사증 환승제도가 본격 시행되면 제주를 최종 목적지로 찾는 중국인 입국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일본인을 격퇴하라!” 아이패드 게임 판매금지 논란

    “일본인을 격퇴하라!” 아이패드 게임 판매금지 논란

    조어도(釣魚島·중국명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치열한 논쟁이 게임으로도 번졌다. 지난달 말 중국의 한 게임회사가 발표한 아이패드용 전용 게임이 갑자기 앱스토어에서 판매가 중지돼 그 이유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의 게임은 바로 조어도의 영유권을 놓고 전투를 벌이는 ‘보위 조어도’. 게임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일본군이 조어도를 침략하고 사용자가 각종 필살기술을 이용해 이를 격퇴하면 스테이지가 클리어된다. 총 71스테이지로 구성되어 있는 이 게임에는 ‘일본 정부가 우리의 섬을 침략하고 있다’, ‘일치단결해 섬을 방위해 일본 도깨비들을 전멸시키자’라는 설명도 붙어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언론들은 “일본인을 도깨비로 지칭하는 등 비하하고 있다.” 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이 게임은 공개된지 6일만에 무료게임 톱10에 오르며 인기를 끌었지만 지난 11일 갑자기 판매가 중지됐다. 게임제작업체인 ZQGame은 “애플 측에 문의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대해 IT전문가인 선 멍쯔는 “애플은 게임이 인종, 문화, 정부 정책 등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때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인터넷뉴스팀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관심을 모은 건축가 고 정기영 선생은 생전에 펴낸 책 ‘서울 이야기’(현실문화 펴냄)에서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했다. 집을 소유의 의미로가 아니라, 삶을 누리는 공간, 혹은 시선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또 자주 찾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명륜동 성균관 앞 마당을 꼽으며, 그곳을 자신의 정원이라고 했다. 성균관 앞마당은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홀로 즐기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는 정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건축물에 삶의 향기, 시간의 풍진, 자연의 생명을 담으려 애쓴 그는 자연이 지은 풍경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기대어 지은 집이어야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무 앞의 공원은 아이들의 정원 “나무 앞의 공원이 바로 우리 아이들의 정원이에요. 세상에 이만큼 좋은 정원이 어디 있겠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느티나무 그늘이잖아요.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이들이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며 노는 걸 바라보는 게 제일 큰 행복이죠. 하늘이 지어준 정원에서 사람을 짓는다고 할까요.” 강원 삼척 도계읍 도계리,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나무 앞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시설장 이이순(62)씨는 서슴없이 나무를 ‘우리 나무’ 나무 앞의 공원을 ‘우리 정원’이라고 말한다. 20년 째 자원봉사활동을 이어온 이씨가 나무 바로 앞에 지역아동센터를 건축한 건 2004년, 처음 자리 잡을 때부터 큰 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보살피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위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도계리 느티나무에는 ‘긴잎’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다. 느티나무는 잎의 생김새에 따라 긴잎느티나무와 둥근잎느티나무로 나누기도 한다. 속리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교적 동그란 잎의 나무는 둥근잎느티나무로, 강원과 경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좁고 길쭉한 잎을 가진 나무를 긴잎느티나무라고 구분한 이름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구별은 쉽지 않다. 도계리 느티나무를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일제 식민지 때의 조사에서는, 긴잎느티나무를 ‘조선의 특산’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생육 환경에 따른 약간의 차이로, 굳이 이를 나누지 않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산림청의 국가식물표준목록에서도 긴잎느티나무, 둥근잎느티나무를 모두 느티나무 동일종으로 취급했다. ●키 20m·줄기둘레 9m 국내 最大·最古 느티나무 키 20m, 줄기둘레 9m라는 거대한 덩치의 도계리 긴잎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에 속한다. 1988년 태풍을 맞아 나무 줄기의 윗 부분이 부러져 수형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키도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가장 큰 키의 느티나무다. 1910년대에 이 나무를 조사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당시 나무의 키를 26m로 기록에 남겼다. 땅에서 4m쯤 올라온 자리에서 일곱 개로 나뉜 가지는 동서로 25m, 남북으로 24m를 펼치며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 보호 울타리가 있어서 그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설 수야 없지만, 울타리 바깥에서도 나무그늘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태양의 방향에 따라 주변에 골고루 삽상한 그늘을 드리우며 나무는 찾아오는 모두를 품어 안는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넘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느티나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라는 이야기다. 줄기 곳곳에 두드러지게 드러낸 혹과 몇 차례에 걸친 외과수술 흔적에는 나무가 겪어온 세월의 풍진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이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고려 말, 조선 건국 즈음에도 이미 400살 가까이 된 큰 나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당시 정치적 혼란을 피해 고려의 선비들은 이 나무를 은신처로 삼아 훗날을 기약하며, 자손과 후학을 양성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맥락에 닿는다. 학문 도야의 현장이었다는 이야기 탓에 예전에는 입시 철만 되면 학부모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리는 나무였다고도 한다. 물론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풍습이다. 마을의 평안을 지켜주는 서낭당 나무로서 살아오던 나무였는데, 한때에는 이 자리에 도계중학교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데에 적잖이 불편함을 느끼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다른 나무로 서낭당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노여움을 표시하는 바람에 서낭당은 그대로 두고 나중에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나무의 기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도 있어요. 특별히 주제를 지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무를 주제로 글을 쓰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느티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든가, ‘우리 느티나무처럼 크고 뜸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많이 써요.”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정원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느티나무의 너그러움과 생명력이 자연스레 닿은 결과이지 싶다. ‘받은 만큼 베푼다’는 삶의 이치가 아이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연의 큰 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어서인지, 심성이 고운데다 마음 씀씀이가 참 너그러워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느티나무의 기운을 받은 탓 아니겠어요.” 이씨는 비가 새는 허름한 집에서 아이들의 잠자리 걱정으로 날을 새워야 하지만, 느티나무 정원에서 도담도담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이 지은 천상의 느티나무 정원에서 펼치는 생명 예찬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287-2.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 태백 방면으로 간다. 태백시의 황지교사거리에서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14㎞ 가면 도계읍에 닿는다. 도계삼거리에서 도계강교를 건너서 도계역 앞에서 좌회전하여 400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난 다리를 이용해 개울을 건넌 뒤 우회전한다. 다시 400m 가면 오른쪽으로 도계전산정보고등학교가 나오고, 학교 맞은편의 마을 공원에 나무가 있다. 자동차는 도로변의 노견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 “민주주의 이후 세계 열려면 프랑스혁명 이해해야”

    “민주주의 이후 세계 열려면 프랑스혁명 이해해야”

    “유럽 문명을 넘어서는, 민주주의 이후의 가치를 아시아인들이 열어 가려면 프랑스혁명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사토 겐이치(44)는 ‘소설 프랑스혁명’(한길사 펴냄)의 1차분 4권이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것을 기념해 10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 12권 분량… 내년 완간 목표 사토는 “프랑스혁명은 인류에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 민주주의 가치를 제창했지만, 결코 성공한 혁명이었다고 할 수 없다.”면서 “박애를 바탕에 깔고 평등을 선택한 공산주의체제나, 자유를 선택한 서방국가나 모두 인류를 행복하게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프랑스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인류는 큰 문제를 겪고 있고, 민주주의 이후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년에 완간을 목표로 하는 총 12권 분량의 ‘소설 프랑스혁명’ 중 작가는 8번째 책을 집필하고 있고, 7권은 일본에서 막 출간됐다. 대학원에서 서양사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던 1993년 ‘재규어가 된 남자’라는 소설로 등단한 사토는 그 후 자퇴를 하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유럽사를 공부한 그에게 프랑스혁명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였다고 한다. 일본인 작가가 프랑스혁명을 소설로 프랑스인들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지만,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부정했다. 혁명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한다. 나는 아시아인이라는 약점도 있지만 그래서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볼 수 있는 강점도 있다. 일본에 있는 프랑스 친구들이 내 소설을 읽고 너무 재밌다고 한다.” ●“아시아에선 자유·평등 양립 가능” 그는 소설에서 부르주아 혁명에 철저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귀족이면서 제3신분 대표였던 오노레 미라보(1749~1791)와 공포 정치의 냉혈한으로 비난받는 로베스 피에르(1758~1794)에게 듬뿍 사랑을 주었다. 사토는 “1791년 미라보가 죽지 않았다면 프랑스도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로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면서 “‘단두대의 정치’를 편 로베스 피에르도 자유, 평등의 양립을 시도하고자 엄청나게 갈등하는 인간적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의 양립이 서양에서는 어렵지만 동양, 아시아에서는 구현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미 유교를 바탕으로 한 아시아적 가치에는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현장 답사를 통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1789~1794년의 프랑스인이 되고자 했던 그는 “미래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믿는다.”며 활짝 웃었다. 사토는 1999년 ‘왕비의 이혼’으로 대중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일본의 나오키상(121회)을 수상했으며, 1993년 등단 이후 다작(多作)을 내고 있는 작가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한복 입은 손님 레스토랑 출입제한 논란 신라호텔 귀빈실 日유카타 비치

    한복 입은 손님 레스토랑 출입제한 논란 신라호텔 귀빈실 日유카타 비치

    지난해 한복 입은 손님의 레스토랑 출입과 관련해 논란을 빚었던 신라호텔이 이번에는 일본 전통 옷을 객실에 비치해 또 한번 도마에 올랐다. 9일 한 인터넷 블로그에 오른 “신라호텔이 귀빈층(Executive Floor) 객실에 일본 전통 평상복인 유카타 히로소데를 비치해 놓았다.”는 주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타고 빠르게 확산됐다. 이 블로거는 “일본인 지인으로부터 ‘머무르던 신라호텔 객실에 일본 전통 평상복인 유카타가 있었다’는 연락이 왔다.”며 “서구적으로 개조된 목욕 가운이 아니라 실제 유카타”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지인이 직접 촬영한 유카타 사진을 함께 올렸다. 유카타는 기모노의 일종으로 주로 목욕 후나 여름에 평상복으로 입는 간편한 옷이다. 그는 “외국인 투숙객이 혹시 유카타를 우리 전통 복장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며 “더욱이 이 호텔은 지난해 4월 한복을 입은 디자이너의 뷔페식당 출입을 거부해서 사회적 논란까지 일으킨 적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내용은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됐다. 한식당 폐지와 한복 논란 등 과거 ‘원죄’까지 더해져 공분을 샀다. “한복은 거부하던 호텔이, 유카타는 전시하는 패기”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신라호텔 관계자는 “특급호텔은 외국인 고객이 70~80%인데 그중 대부분이 일본인이라 고객 편의를 위해 유카타를 제공했다.”며 “일본인 고객이 주로 이용하는 일부 객실에만 비치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특급호텔들의 상황을 확인한 결과, 호텔 규정에 따라 일본인 선호 객실에 한해 유카타를 상시 비치해 놓는 곳도 있고, 고객의 요청이 있을 때에만 제공하는 곳도 있었다. 신라호텔 관계자는 “앞으로는 투숙객의 요청이 있을 때에만 (유카타를)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말뚝테러 항의” 日대사관에 1톤트럭 돌진

    “말뚝테러 항의” 日대사관에 1톤트럭 돌진

    일본 극우파의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와 집단자위권 행사 움직임 등으로 반일 감정이 높아진 가운데 60대 남성이 화물차를 몰고 주한 일본대사관으로 돌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日정부 항의… 외교부 “유감” 서울 종로경찰서는 9일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에 항의하기 위해 화물차로 일본대사관 정문을 들이받은 김모(62)씨를 붙잡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전 4시 55분쯤 1t 화물차를 몰고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정문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대사관의 미닫이형 철제문이 1m가량 뒤로 밀렸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경찰은 이날 김씨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본 사람은 소녀상 앞에 말뚝까지 박았는데 내가 내 나라에서 이 정도도 못하냐.”면서 “대사관 정문을 뚫고 들어가 ‘말뚝을 박은 일본인을 구속하라’고 외치려 했지만 문이 안 열려 실패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위안부 소녀상 앞에 말뚝을 박은 너희의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혹 내가 죽으면 화장해 독도 앞바다에 뿌려 달라.’는 내용의 메모지 2장을 갖고 있었다. 김씨는 “정부가 일본 극우파의 만행에 너무 미온적으로 대응해 실망했다.”면서 “나라도 응징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덧붙였다. 골동품 수집상인 김씨는 지난달 28일과 지난 2일, 5일 등 3차례에 걸쳐 대사관 주변을 살폈으며, 김씨의 트럭 옆면에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적힌 대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경찰은 “김씨가 일본과 관련한 집회·시위 등에 참가한 전력이 없고 특정 단체 소속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외교부, 말뚝테러 일본인 입국 불허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외교통상부에 항의의 뜻을 전달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엄중히 항의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는 이에 대해 “주한 일본대사관에 유감을 표했다.”면서 “대사관 앞 경비 강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말뚝 테러를 저지른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에 대해 입국 불허조치가 내려졌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이날 “지난 4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0명이 서울출입국관리소에 제출한 스즈키에 대한 입국 불허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오늘 연락받았다.”고 밝혔다. 김동현·김미경기자·도쿄 이종락특파원 mose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임진왜란을 앞두고 비둘기파였던 류성룡(1542~1607)과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된 매파 조헌(1544~1592)은 원칙주의자로서 서로 갈등했다. 전쟁 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했고,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사한 조헌은 그의 제자 안방준의 기록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두 개의 문헌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류성룡과 조헌에 대한 해석은 제2라운드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망상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대마도)의 지배자인 소씨(宗氏)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 요시시게(1532~15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아니면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도요토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도요토미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이견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대제학이던 류성룡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의 첫머리에 성종에게 신숙주(1417~14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실은 것이나, ‘징비록’에서 “왜”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도 실무가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도요토미가 선왕(先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른 도요토미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 귀국한 황윤길(1536~?)과 김성일(1538~1593) 등이 가져온 도요토미의 국서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적혀 있다.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 군사정보, 일본으로 유출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영규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참가한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 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군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조선국 바깥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의 장서목록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징비록’ 17세기 日 지성계에 큰 영향 근세 일본에서 이야기되던 임진왜란 담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 측 시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내정(內政)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 측의 상황이 소략됐고, 조선에 대한 명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반복돼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도 되풀이된다. 17세기 중기 조선의 임진왜란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을 통해 명측 문헌에서 보이는 조선 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 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식된 것도 ‘징비록’의 영향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판 ‘징비록’의 서문을 쓴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1630~1714)은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과 ‘조선정벌기’만이 ‘실록’(實錄)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日 ‘은봉야사별록’으로 ‘징비록’ 비판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징비록’을 폄하하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지닌 쓰시마의 학자가 쓴 ‘조선정토시말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1814~1857)는 류성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징비록’을 ‘실록’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사카와는 1849년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에도 서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을 비판한다. ‘은봉야사별록’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水戸学)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일본중심적 학파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사카와처럼 ‘징비록’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봉야사별록’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류성룡과 조헌의 대립과 갈등은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1773?~1834)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왜란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문헌의 기본틀을 잡기 위해 ‘징비록’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이·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서 ‘징비록’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의 글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다만, ‘징비록’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다고도 적고 있다.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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