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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책세상] 라쿠텐 회장 父子의 日경제 토론서 ‘경쟁력’

    ‘일본 기업계의 반체제 인사.’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의 대표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의 창업자 미키타니 히로시(48) 회장을 이렇게 정의했다. 일본의 인터넷 인구가 500만명에 불과하던 1997년 라쿠텐을 만들어 15년 만에 회원 8000만명, 연간 매출수익 4000억엔(2012년 기준·약 4조 3600억원)에 이르는 거대 그룹으로 키워낸 그는 일본의 전통적 기업가상과는 거리가 먼 모험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아버지인 미키타니 료이치(84) 고베대학 명예교수와 함께 일본 경제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묶은 ‘경쟁력’이라는 책이 최근 출간됐다.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총리 직속 산업경쟁력회의 멤버이기도 한 미키타니 회장은 혁신을 통해 일본을 다시 글로벌 경제의 맹주로 올려놓는 ‘재팬 어게인’을 역설한다. “세계는 IT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와 맞닥뜨리고 있지만 일본만은 마치 에도시대처럼 변하려고 하지 않아 갈라파고스화를 자처하고 있다”는 게 미키타니 회장의 지적이다. 일본은 사회의 전 부문에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수용하고,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혁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 2010년 일본 토종 기업인 라쿠텐의 공용어를 영어로 바꾸는 ‘잉글리시나이제이션’(Englishnization) 계획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와 의구심을 나타냈지만 그는 “영어는 더 이상 비교우위가 아니라 필수조건”이라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일본은 정말 행복한 나라다. 범죄도 없고 음식도 맛있다. 심지어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도 없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본은 행복하게 천천히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쿠텐이라는 회사가 이 나라에 (혁신이라는)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그는 FT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그가 일본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혁신과 세계화를 주창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1959년 29세의 나이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예일대, 옥스퍼드대 등 세계의 유수한 대학에서 강의를 한 일본 경제학계의 대표적인 국제파다. 아버지 미키타니 교수는 “국제화란 국적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국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는 데 우리 부자의 토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책을 통해 말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15승 새 역사를 던져라…류현진, 30일 콜로라도 상대로 정규시즌 최종전

    15승 새 역사를 던져라…류현진, 30일 콜로라도 상대로 정규시즌 최종전

    류현진(26·LA 다저스)이 30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미 프로야구(MLB) 콜로라도와의 경기에서 정규시즌 피날레 등판을 하고 시즌 15승에 도전한다.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이미 확정돼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류현진 개인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기록이 걸려 있다. 류현진이 15승을 달성하면 일본인 이시이 가즈히사가 갖고 있는 다저스 아시아 투수 신인 최다승 기록을 넘는다.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에서 뛰다 2002년 MLB에 진출한 이시이는 그해 14승 10패 평균자책점 4.27로 활약했다. 류현진은 또 2001년 박찬호(15승 11패) 이후 12년 만에 MLB에서 15승을 올린 한국인이 된다. 류현진이 15승을 따내면 올 시즌 빅리그에서 뛴 아시아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단독으로 최다승 투수가 된다. 26일 캔자스시티전을 끝으로 올 시즌 등판을 마감한 이와쿠마 히사시(시애틀)는 14승(6패)을 기록 중이며 30일 한 차례 더 등판이 예상되는 다르빗슈 유(텍사스)는 13승(9패)에 머물러 있다. 구로다 히로키(뉴욕 양키스)는 11승(13패), 타이완 특급 천웨이인(볼티모어)은 7승(7패)을 수확하는 데 그쳤다. 평균자책점 2.97을 기록 중인 류현진이 2점대로 시즌을 마치면 한국인 최초의 역사를 쓴다. 17시즌 동안 빅리그에서 뛴 박찬호가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해는 2000년으로 3.27을 찍었다. 2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은 특급 투수의 기준이며 27일 현재 MLB 30개 팀에서 15명만이 기록 중이다. 1901년 이후 다저스 투수 중 루키 시즌에 15승과 190이닝, 150탈삼진, 평균자책점 2점대 이하를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MLB 전체를 봐도 1901년 크리스티 매튜슨(20승-221탈삼진-336이닝-평균자책점 2.41) 이래로 21명에 불과하다. 1984년 드와이트 구든(17승-276탈삼진-218이닝-평균자책점 2.60) 이후 29년째 맥이 끊겼다. 188이닝과 150탈삼진을 기록 중인 류현진이 콜로라도전에서 새 이정표를 세울 가능성이 크다. 또 류현진은 계약에 따라 190이닝 투구를 채우면 25만 달러의 보너스를 추가로 받는다. 한편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은 27일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경기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류현진의 (콜로라도전) 투구 수를 제한할 것”이라고 밝혔다. 포스트시즌을 대비한 선수 보호 차원으로 풀이되며 정확한 투구 수는 밝히지 않았으나 5이닝에 70개 내외가 될 것으로 현지 언론은 전망했다. 다저스는 이날 2-3으로 역전패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종로(하)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종로(하)

    >>세운상가와 물거품이 된 녹지축 조성계획 우리가 흔히 세운상가라고 부르는 상가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다. 종로에서 퇴계로에 걸쳐 남북으로 1㎞에 이르는 8개 동의 거대한 건물군이다. 종로변 세운상가(현대상가)에서 시작해 청계천로를 건너면 대림상가로 이어지고 을지로 쪽 삼풍상가와 풍전호텔을 지나 만나는 마른내길을 건너면 나오는 신성상가와 진양상가가 퇴계로에 면하는 어마어마한 구조물이다. 아파트도 흔치 않던 시절인 1966년 6개 건설업체와 개인 지주 모임 등 8개 업체가 분할 시공해 1970년 초 완공했다. 언필칭 동양 최대였다. 종로,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 등 도심을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4개의 큰길을 남북 방향으로 거스르는 모양새 자체가 파격이었다. 한때 ‘도시 속의 도시’로 칭송받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역린(逆鱗)은 ‘도시의 괴물’로 낙인찍혔다. 과거 없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법. 세운상가에도 당대사가 담겨 있다. 세워진 지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건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세운상가는 처녀가 애를 낳은 것 이상으로 말 못할 태생의 비화를 간직하고 있다. 세운상가 터는 일제가 미군공습 때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개공지(疏開空地)로 비워 놓은 공터였다. 일제는 서울시내 19곳에 이르는 소개도로에 대한 대대적인 건물 철거작업을 시행했는데 그때의 유산이다. 종묘 앞~필동, 서울역~회현동, 필동~신당동, 서울역~충정로, 서울역~갈월동, 원남동~동대문~광희문 등이 주요 소개도로였다. 덕분에 해방 후 퇴계로, 의주로, 율곡로, 청파로 같은 큰길을 쉽게 낼 수 있었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1966년 6월 20일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 앞 사이의 무허가건물 일체를 철거 정리하고 도로용지 일부에 민간자본을 유치해서 산뜻한 건물을 짓겠다”라는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허락을 얻었다. 공병장교(예비역 준장) 출신답게 전격적인 철거 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인현동 지역의 무허가 상가주택 1100채가 자진 철거하거나 강제 철거됐다. 다른 지역의 철거 대상 무허가 건물도 1000채를 넘었다. 무려 2200채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는 사상 최대의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만인 1966년 8월 말 도로용지를 제외한 너비 50m, 길이 893m, 총면적 4만 4737㎡(약 1만 3533평)의 부지가 조성됐다. 기공식날 김 시장은 세운상가라는 휘호를 남겼다. ‘세운’(世運)이라는 작명은 ‘세계의 기운이 모인다’는 뜻이었다. 1970~1980년대 세운상가는 장사동·입정동·산림동의 기계공구상가, 부품상가와 함께 국내 전자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의 실리콘밸리였다. 최초의 개인용 PC를 개발한 삼보컴퓨터와 ‘아래아 한글’의 한글과 컴퓨터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음향기기 관련 기기를 사거나 수리하려면 세운상가로 가야 했다. 전자제품과 컴퓨터, 업소용 게임기, 불법 성인물과 해적판 등의 천국이었다. 도청장치와 감시카메라 업체는 지금도 호황을 누린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은 민자 유치를 통한 지역정비, 상가와 주택이 결합한 고급 주상복합이었다. 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보행 데크로 연결하고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하는 첨단 건물이었다. 그러나 시공사와 조합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통에 시대를 앞서 가던 보행 데크 개념 등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미완의 실패한 건물이 됐다. 2003년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창경궁~종묘~세운상가~퇴계로~남산~한강까지 서울의 녹지축을 복원키로 하면서 철거 대상으로 지목됐다. 실제 2009년 현대상가가 철거돼 녹지축이 일부 조성됐지만 ‘남산르네상스’를 부르짖던 오세훈 시장이 물러나면서 또 한 번 미완인 상태로 남았다. 1층을 도로로 사용하고 상부에 주상복합을 짓는 세운상가의 설계 형태는 이후 낙원상가에도 재연됐지만, 보편적인 도심개발 형태로 정착되지 못했다. 어쨌든 세운상가는 도심재개발사업의 초기 사업모델을 제시했고 이후 서울 도심부의 경관적 측면, 기능적 측면에서 다양한 논란을 일으킨 ‘문제적’ 건물로 남았다. 세운상가는 판잣집과 집창촌 철거 같은 시대적 소임을 다했지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나 역사의식 없이 이뤄진 즉흥적인 바벨탑 쌓기가 도시에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보여주는 증좌(證左)로 남았다. 김수근은 자신의 설계목록에서 세운상가를 빼곤 했다. >>세계 최대 집창촌 종삼 소탕 ‘나비작전’과 동대문운동장 종묘와 사창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외람스럽게도 한국전쟁 이후 20년 동안 종묘 앞에는 ‘종삼’(鍾三)이라는 이름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이 기생하고 있었다. 1966년 그때로 되돌아가 보자. 종묘 앞에서 대한극장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에 무려 4만 9586㎡(약 1만 5000평)의 공지에 2200여동의 무허가 판잣집과 집창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판잣집이라기보다 천막집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세운상가가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1950년 초 종묘 앞에 국회의사당을 짓는 계획이 문화재관리국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이 조선왕조의 정신적 고향인 종묘 앞에 국회의사당을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자 전주이씨 양녕대군파인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건립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1968년 종삼을 소탕하려는 ‘나비 작전’이 펼쳐졌을 때 종삼의 범위는 종로3가와 4가, 단성사 뒷골목, 종묘 앞 일대를 중심으로 낙원동, 봉익동, 훈정동, 와룡동, 묘동, 권농동, 원남동은 물론이고 길 건너 남쪽의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까지 암세포처럼 퍼져 있었다. 당시 서울시가 현재의 낙원상가부터 종로5가까지 조사해 보니 윤락여성 1368명, 포주 11명, 바람잡이 1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낙원동 등 한옥지구(고급), 종묘 앞 등 무허가 건물지대(하급), 종묘 건너편 소개도로 터(최하급) 등 3등급으로 분류됐다. 이 지역을 현장 답사하던 김현옥 시장과 중구청장 일행에게 윤락여성이 접근해 유객 행위를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흥인지문(동대문)은 종로의 끝이자 도성의 동쪽 관문이었다. 동대문종합시장(동대문쇼핑타운)은 18세기 영조의 청계천 준설 때 퍼낸 흙이 쌓여 생긴 인공산(假山)이 있던 자리였다. 1899년 전차가 다니면서 전차의 차고지로 쓰였다. 전차가 사라진 1970년 종합시장건물이 들어섰고, 시장 뒷골목에 책 도매상가들이 모여 ‘대학천’이라는 책골목 길을 형성했다. 서적도매상의 산실인 대학천은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에서 청계천 쪽으로 흐르던 하천 이름이다. 1977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 동대문종합시장 한쪽에는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전면 개통과 함께 고속버스시대가 열린 터였다. 고속버스 기사와 안내양이 지금의 항공기 승무원처럼 각광받던 때였다. 서울 도심에는 버스회사에 따라 동대문을 비롯하여 서울역 앞, 관철동, 충무로 등 6개의 고속버스터미널이 어지럽게 난립하고 있었다. 동대문터미널은 이용 인원이 가장 많은 ‘메이저’ 터미널이었다. 한남대교와 장충단공원을 거쳐 직선코스로 도심에 진입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조건이었지만 강남 개발과 강북 인구 분산이라는 대세에 밀려 사라졌다. 주차장 터에는 6성급 메리어트호텔이 지어지고 있으며 완공을 앞두고 있다. 중앙청과 서울시청,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1950~1970년대 우리 사회의 바로미터였다. 중앙청이 정치의 무대였다면, 시청 앞은 정치가 시각화되는 장소였다. 또 서울운동장은 스포츠제전의 장이기에 앞서 정치의 장이었다.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는 “시청 앞 행사를 보면 당시 정치적 화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운동장은 스포츠시설이었지만 스포츠보다는 정치의 무대로 사용된 기록이 많았다. 야구장이 있던 곳은 1882년 임오군란의 현장이다. 본래 훈련도감의 군대 주둔지였으나 이를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는데 사건 당시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은 일본인 교관이 숨지면서 임오군란을 촉발한 곳이다. 숨 가빴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격동의 시절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84회 생일축하 행사(1959년 3월 26일)가 열린 지 두 해 뒤 4·19혁명 1주년 행사(1961년)가 열렸고 이듬해에는 5·16 1주년 행사(1962년)가 열렸다. 운동장이 시대의 거울이었다. 훈련도감 훈련장~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을 거쳐 동대문운동장이었던 자리에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됐다. 그 중심에 이라크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내년 3월 완공을 앞두고 자태를 드러냈다. 마치 외계 비행물체를 연상케 하는 전위적인 금속 질감의 건물 외형이 생경하다. 600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보물 1호 흥인지문과 외계 물체의 기 싸움이 궁금하다. joo@seoul.co.kr
  • 아베 “날 군국주의자라고 부를 테면 불러라”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자신을 군국주의자로 불러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 NHK 방송에 따르면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아베 총리는 25일(현지시간) 미국의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중국을 겨냥해 “일본의 바로 옆에는 군비 지출이 적어도 일본의 2배에 달하고, 매년 10% 이상의 군비 증강을 2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며 “일본은 (올해) 11년 만에 방위비를 증액했지만, 겨우 0.8% 올리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이어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부디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항변했다. 아베 총리는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일본인에게 적극적 평화주의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짊어지도록 촉구하는 것”이라며 집단적 자위권을 통한 자위대의 해외 파병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날 강연은 허드슨연구소가 국가안보에 공헌한 인물에게 주는 ‘허먼 칸’ 상 수상자로 아베 총리가 선정된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에 대해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역사적 원인으로 일본의 군사동향은 계속 아시아 이웃 국가와 국제사회의 고도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라며 “일본은 역사를 거울 삼고 역사적 교훈을 경험 삼아 평화안정을 위한 일들을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차별 말자, 함께 살자… 反韓 반대” 도쿄 대행진

    “차별 말자, 함께 살자… 反韓 반대” 도쿄 대행진

    “(이웃과) 함께 살아가자! 차별은 그만두자!” 휴일 인파가 북적이는 도쿄 신주쿠 한복판에 흥겨운 랩이 울려 퍼졌다. 최근 기승을 부린 ‘혐한 시위’와 ‘헤이트(혐오) 스피치’를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차별철폐 도쿄대행진’이 22일 오후 열린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증오를 스스럼없이 표출하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 등 국적과 인종, 성에 따른 차별이 일본 내에 늘고 있는 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모여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모임’을 만들고 행진을 기획한 것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주도한 1963년 워싱턴 평화대행진이 흑인 인권운동의 시작이 된 것처럼 도쿄대행진도 조화로운 일본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이들의 목소리다. 이날 모인 시민 1000여명은 신주쿠 주오 공원에서 출발해 한인 상가가 밀집해 있는 신오쿠보 등 신주쿠 일대를 2시간 동안 행진했다. 50년 전 워싱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성과 여성 모두 검정색 정장을 맞춰 입고 ‘차별에 반대하는 도쿄대행진’이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킹 목사의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는 명연설을 본떠 이를 외치기도 했다. 일부는 간이 악단을 꾸려 미국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연주하며 걸었고, 꽹과리와 북도 합세해 시종일관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시민은 ‘어떤 아이든 우리 아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극우단체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 도쿄한국학교에 재정 지원을 중단할 것을 도쿄도에 요구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이들이 행진을 이어가는 동안 주변 행인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을 찍거나 손을 흔들어 주는 등 호의적인 반응이 대다수였다. 당초 우익 단체들이 반대 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이날 행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날 자발적으로 참가했다는 회사원 아리나가 미야코는 “한국인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으로서 차별이 점점 늘어나는 움직임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혼자 참가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 이쿠모리 요코(회사원) 역시 재특회 등이 주도하는 반한 시위에 관해 “정말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차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행사가 열려서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도쿄대행진을 기획한 실행위원회 일원인 김 노부카쓰는 “일본에 재특회 같은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세력에 반대하는 사람 역시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올해 초부터 도쿄 대행진을 기획했다”면서 “향후 일본 정부에 유엔 인종차별철폐조약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혐한 헤이트 스피치를 규제하는 법규를 만들도록 문제를 제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日유명 방송인, 도쿄올림픽 반대 표명 “마지막 1인 돼도 반대 계속”

    일본의 유명 방송인 쿠메 히로시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20일 일본 포털 라이브도어의 토픽뉴스가 전했다. 쿠메 히로시는 14일 TBS 라디오 ‘쿠메 히로시의 라디오입니다만’에서 위와 같은 발언으로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올림픽 개최지 결정 전 시행한 설문으로는 개최지 후보로는 도쿄가 최하위를 기록했었다. 뜻밖에 도쿄가 결정돼 놀랐다”면서 “내가 (도쿄 올림픽 개최에) 반대하는 마지막 일본인이 돼도 반대를 계속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어 그는 “일본은 지금 올림픽 유치보다 다른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오염된 물의 농도를 밝히는 것이나 미국에서 전문가를 데려오는 것 등은 모두 이후의 일”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개최지 결정 전날 7일 방송에서도 “올림픽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히면서도 “도쿄가 올림픽을 유치해 동북 부흥의 도움이 되거나 동일본 대진의 이재민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발언을 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올림픽 유치 비용과 개최에도 수천억 엔이 필요할 것을 거론하며 “수천억 엔의 돈을 쓰는 것이라면 부흥을 위해 모두 기부하는 것은 어떠냐. 그쪽이 상당한 용기와 힘을 줄 것”이라며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는 것이 재해지에 용기를 주는 것과는 연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도쿄 만의 왁자지껄한 축제로 재해 수습에는 적극적으로 할 수 없다”고 매듭지었다. 한편 쿠메 히로시는 지난 동일본대지진 당시 개인 명의로 2억 엔을 기부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스포츠 돋보기] 한국판 ‘발렌틴’ 왜 없나

    네덜란드 출신 거포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이 시즌 56호 홈런으로 일본 최다 기록을, 57호로 이승엽(삼성)이 보유한 아시아 최다 기록을 뛰어넘은 지난 15일, 박병호(넥센)는 이틀에 걸친 연타석 홈런으로 29호를 작성했다. 언뜻 비교해도 조금 초라하지 않은가. 일본에서도 외국인이 일본인이 세운 기록을 넘는 데 대한 거부반응이 없지 않지만 대기록이 몰고올 파급 효과를 감안해 모두 반기는 분위기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크리스 데이비스(볼티모어)가 50홈런을 채웠다. 홈런만큼 화끈한 팬서비스와 관중 유인 수단은 없다. 이승엽이 대기록을 세울 때 대구구장에 몰려든 잠자리채 열풍을 떠올려도 그렇다. 그런데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한 시즌 50홈런을 넘긴 것은 10년 전 이승엽과 심정수(당시 현대·53개)였고 40홈런조차 2010년 이대호(당시 롯데·44개) 이후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인 타자가 2011년 가코(삼성), 가르시아(한화), 알드리지(넥센)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긴 탓이 크다. 구단들은 2년째 외국인 선수를 전원 투수로 채웠다. 이런 현상은 국내 프로야구의 구조적 결함과 맞닿아 있다. 팀 운영의 기본은 투수력, 그중에도 튼튼한 선발 로테이션 구축이다. 팀당 2명인 외국인 쿼터를 투수에 올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을 만한 투수 자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팀들은 한 경기를 책임질 수 있는 착실한 외국인 투수를 찾는 데 열심이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팀 기여도에서 훨씬 밑돌고 발도 느리고 수비도 안 되는 외국인 거포의 쓰임새를 비교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대목. 문제는 외국인 투수 둘을 시즌 끝까지 보듬고 가는 구단도 찾기 어렵다는 점. 당장 리그 1~3위인 LG와 삼성, 두산 모두 외국인 투수 한 명으로 ‘가을야구’를 준비하고 있다. 그나마 이들의 스타일도 비슷비슷해 ‘그 얼굴이 그 얼굴’이란 비아냥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은 어떤가? 외국인 보유 한도가 따로 없으며 4명까지만 등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것도 투수나 야수만으로 채울 수 없도록 했다. 그런데 보유 한도를 늘리는 일도 쉽지 않다. 선수협의 반발을 다독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우리 프로야구는 ‘잔잔하게 가는 쪽’을 지향하고 있다. 야구로 돈 버는 구단이 적으니 구단 스스로 의지를 갖고 달려들라는 얘기도 건네기 어렵다. 그래서 ‘빵빵 터지는’ 이웃 나라 대포 소식에 체증 같은 게 쌓인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와세, 381세이브… 日투수 최다기록 타이

    ‘철완’ 이와세 히토키(39·주니치)가 의미 있는 기록 경신을 눈앞에 뒀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이 한신을 상대로 한 시즌 일본과 아시아 최다인 56·57호 홈런을 연속으로 뿜어낸 지난 15일 이와세는 일본프로야구 요코하마와의 경기에서 8-7로 앞선 9회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15시즌 통산 381세이브째를 작성했다. ‘대마신’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사키 가즈히로(45)가 미국과 일본에서 16년 동안 쌓은 일본인 투수 통산 최다 세이브와 타이를 이룬 것. 1999년 주니치 유니폼을 입고 프로 생활을 시작한 좌완 이와세는 2005년 46세이브 등 통산 4차례나 40세이브 이상을 기록하며 올해까지 9년 연속 30세이브 이상을 올린 ‘철완’이다. 올 시즌 35세이브를 쌓은 그는 1개만 보태면 일본인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갈아 치운다. 이와세의 뒤를 잇는 일본 통산 세이브 2위는 은퇴한 다카쓰 신고(286세이브)로 이와세에게 100개 가까이 뒤진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위안부들, 자연스레 모여들어” 왜곡 가르치는 日역사 교과서

    “위안부들, 자연스레 모여들어” 왜곡 가르치는 日역사 교과서

    지난 3월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일본사 고교 교과서 9종(일본사A 3종, 일본사B 6종)이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한국사 관련 내용을 전방위적으로 왜곡 서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군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역시 그대로 실렸다. 일제시대 창씨개명,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일본 측 주장도 전혀 걸러지지 않아 과거사를 입맛에 맞게 여전히 미화·왜곡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박홍근 민주당 의원실이 15일 동북아역사재단에 의뢰,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9종을 번역,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지에 설치된 ‘위안시설’에는 조선·중국·필리핀 등으로부터 여성들이 모아졌다”(산천출판, 일본사A)라고 적어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위안부 여성이 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일본사B 교과서에서는 ‘임나일본부설’ 서술이 두드러졌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공격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돼 왔다. ‘동경서적’에서 출간된 일본사B 교과서 17쪽에는 “야마토 왕권은 가야의 임나를 통해 조선반도 남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중략) 야마토 왕권은 조선반도로의 진출에 의해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갖게 됐다”고 적혀 있다. 2010년 3월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폐기에 합의한다’고 발표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왜곡이 여전한 셈이다. 당시 공동연구위원회는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일본이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합의했지만 전쟁 발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는 서술은 여전했다. 일본사B 교과서(동경서적, 105쪽)를 보면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하여 일본으로의 조공과 명으로 침공 시의 선도를 추구했다. 조선이 이것을 거절하면서 1592년 히데요시는 조선에 15만여명의 대군을 보내 침략전쟁을 시작했다”고 적어 임진왜란의 발발 책임을 조선의 비협조 때문인 것으로 몰아갔다. 이 밖에도 “소유권의 불명확 등을 이유로 광대한 농지, 산림을 접수하고 일본인에게 불하(拂下)했다.”(산천출판 87~88쪽, 일본사B), “1910년부터 일본의 토지개정에 맞게 대규모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조선을 자본주의 경제로 속하게 하는 기초를 만들었다”(실교출판 260쪽, 일본사B) 등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근거해 토지조사 사업을 서술했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했던 동학농민운동은 농민 ‘반란’, 농민 ‘반항’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일본풍의 이름으로 개명도 장려했다”(청수서원 153쪽, 일본사A)고 적어 조선민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던 부분을 삭제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우윳빛 보드라운 온천수 푸르러 고즈넉한 숲그늘

    우윳빛 보드라운 온천수 푸르러 고즈넉한 숲그늘

    이 아름다움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봄의 청순함도, 가을의 화려함도, 겨울의 단아함도 없었습니다. 여름의 짙푸름마저 끝물이었습니다. 어정쩡한 계절에 민낯으로 만난 아키타(秋田)는 그러나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적요했고 평온했으며 절정이 아니어서 더욱 정겨웠습니다. 일본 안에서도 가장 빈한한 축에 속한다는 아키타현을 우리에게 알린 것 가운데 하나가 트램핑입니다. 트레킹과 캠핑의 합성어로, 걷다 지치면 텐트 치고 쉬어 간다는 개념이지요. 어떤 단어를 들이댄다 해도 아키타를 가리키는 방향은 늘 하나입니다. 바로 치유지요. 아키타현은 북위 40도선에 걸쳐 있다. 북한의 함흥, 신의주 등과 비슷하다. 그러니 벌써 가을이 시작됐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억새가 꽃을 피웠고 벼는 노릇노릇해졌다. 그야말로 가을(秋) 들녘(田)이다. 아키타현은 일본 내에서 미인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를 빗대 ‘아키타 비진(美人)’이라 일컫는다. 이는 피부와 관련된 표현일 듯싶다. 아키타는 일조량이 적다. 그 때문에 여성들의 피부가 희다. 온천도 한몫 거들었다. 유황 향기 가득한 온천수가 흰 피부를 더욱 보드랍게 만들었다는 거다. 아키타는 온천으로도 이름났다. 현 안에만 유명 온천마을이 14곳이나 있다. 아키타현과 이와테현 경계 지역에 도와다하치만타이 국립공원이 있다. 이 국립공원 아래로 몇 개의 온천마을이 매달려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게 뉴토 온천향이다. TV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이병헌과 김태희가 온천욕 즐기는 장면을 찍었던 곳이다. 엉큼한 남성이라면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희번득댈 터.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온천을 둘러싼 뉴토산(1478m)의 모양새가 여인의 가슴 언저리를 닮았대서 혹은 온천수 빛깔이 맑은 우윳빛을 하고 있대서 나온 이름이라니 말이다. 뉴토 온천향엔 서로 다른 성분을 가진 온천 7개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쓰루노유 온천이다. 학이 다친 날개를 치료했다는 전설이 담긴 곳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웃한 아오모리현의 쓰가유 온천과 더불어 늘 인기 수위를 다툰다. 온천 초입의 낡은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억새, 띠 등으로 인 지붕과 거무튀튀한 바람벽 위로 수백년 세월의 흔적이 더께로 내려앉았다. 쓰루노유 온천은 탕치(湯治)를 위해 역대 아키타 번주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건물은 바로 번주를 호위하고 온 무사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본진(本陣)이다. 요즘엔 본관 숙박동으로 쓰인다. 현지 관계자는 “6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객실 예약을 받는데, 단풍이 절정인 10월의 경우 4월 첫날 10분 만에 객실이 동난다”고 했다. 온천을 둘러친 풍경이 그윽하다. 너도밤나무 가득한 숲과 연푸른 우윳빛의 온천수 그리고 낡은 건물이 수묵화처럼 어우러졌다. 너른 로텐부로(露天風呂·노천온천)는 남녀 혼탕이다. 북규슈 지역 온천에 드물게 남아 있는 옛 풍속이다. 건물 안엔 여성 전용탕도 마련돼 있다. 쓰루노유 온천 주변에 6개의 온천이 더 있다. 저마다 다른 수질과 숙박시설을 갖췄다. 예컨대 다에노유는 금과 은 2개의 온천으로 구성됐는데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남녀탕을 바꾼다고 한다. 가장 위쪽은 구로유다. 가을철 단풍이 들 때면 사방이 불붙은 듯하다는 온천이다. 11월까지만 영업한다. 겨울엔 눈에 파묻혀 문을 닫는다. 구로유에서 센다쓰 계곡을 따라 5분쯤 내려가면 마고로쿠 온천이 나온다. 이처럼 뉴토 온천향은 걸어서 한 시간 안쪽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온천탕들이 몰려 있다. 일본인들 또한 종종 트레킹 삼아 계곡을 걷다 온천욕을 즐기곤 한단다. 너도밤나무가 짙은 숲그늘을 이룬 산자락엔 캠핑장도 조성돼 있다. 캠핑과 온천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셈이다. 아키타현에선 이런 캠핑장을 흔히 볼 수 있다. 뉴토 캠핑장의 경우 규카무라 온천과 차로 불과 5분 거리다. 아키타현에서 운영하는 아스피아 캠핑장은 후케노유 온천과 가깝다. 해발 1100m의 하치만타이 산자락에 있는 비탕(秘湯)이다. 아스피아 캠핑장 또한 면적이 무려 19만㎡에 달해 직장인 등의 단체 캠핑에 적합하다. 뉴토 온천향에서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다자와코다. 공항 등 아키타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진, 그러니까 ‘아이리스’에서 김태희와 이병헌이 포옹하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지금은 이 사진이 아키타 관광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고 있다. 다자와코는 일본에서 가장 깊은(423.4m) 호수다. 둘레는 약 20㎞. 물빛은 삼색이다. 물가는 바닥의 색을 닮아 붉은 황톳빛이다. 호수 가운데로 나갈수록 물빛은 연초록에서 파란 잉크빛으로 변해 간다. 현지 가이드는 “물속에 함유된 알루미늄 성분 때문에 파란빛을 띤다”고 했다. 호수는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물가 한쪽에 황금빛 여인상이 서 있다. 다쓰코라는 전설 속 소녀의 동상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다자와코의 물을 마셨던 다쓰코가 용으로 변해 호수의 수호신이 됐다는 게 전설의 얼개다. 한데 이보다는 구니마스란 물고기 이야기가 더 현실적이다. 다쓰코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어머니가 가져온 횃불이 변했다는 물고기다. 구니마스는 다자와코에만 서식하던 희귀종이다. 70년 전 멸종이 공식 선언됐다가 2010년 야마나시현의 사이코에서 발견돼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키타 동북쪽, 하치만타이 산자락엔 너도밤나무숲이 조성돼 있다. ‘일본 숲 100선’ 가운데 하나로 꼽힌 곳. 겨울철 ‘아스피린 스노’(최상의 눈)로 유명한 앗피 스키리조트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숲은 깊다. 100만ha 정도 된다. 이 너른 공간이 죄다 너도밤나무다. 흔하지는 않지만 인적이 드문 시간엔 곰이 내려와 쉬어가기도 한다. 숲을 알리는 나무이정표를 찢어 놓은 것도 녀석의 짓이다. 앗피리조트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요쿠르트와 아이스크림 등 유제품이다. 리조트내 목장에서 직접 생산된 것들이다. 부드럽고 들척지근 하지 않은 맛이 일품이다. 아키타 남부의 가쿠노다테도 빼놓지 말아야 할 코스다. 1620년 에도시대에 세워진 사무라이 마을이다. ‘작은 교토’로 불릴 만큼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밀집해 있다. 가장 오래된 저택인 이시구로가와 정원, 무기장(武器臧) 등 볼거리가 많은 아오야기가 등은 관람료를 받는다. 드물게 일본 우익의 흔적과 마주하기도 한다. 일행 중 한 명은 아오야기가에서 욱일승천기와 마주하기도 했다. 가쿠노다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히노키나이 강 제방도 산책 코스로 좋다. 수령 200년이 넘은 수양벚나무가 즐비하다. 이 가운데 무려 152그루가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글 사진 아키타(일본)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가는 길:대한항공이 서울-아키타 직항편을 월, 목, 토요일 주 3회 운항한다.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에어포트라이너가 아키타 공항에서 뉴토 온천향(2시간 10분)과 다자와 호수(1시간 30분), 가쿠노다테(50분) 등 주요 관광지를 오간다. →현지 이동:뉴토 온천향에선 ‘유메구리 수첩’이 요긴하다. 일종의 통합권으로, 순례 버스를 타고 온천 7곳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1500엔. 유효 기간은 1년이다. →별미:아키타현의 대표 음식이 기리탄포다. 갓 지은 햅쌀밥을 삼나무 꼬치에 꽂은 뒤 히나이라는 토종닭 육수에 채소를 넣고 끓인다. 일반 마트에서 포장 완제품을 쉽게 살 수 있다. 기리탄포에 일본의 3대 우동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나니와 우동을 넣어도 맛있다. 지역 특산품으로 꼽히는 훈제 단무지도 별미다. →패키지:일본 개별 여행 전문 여행사인 에나프투어(www.enaftour.com)에서 다양한 유형의 ‘릴렉스 캠핑 & 피싱’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일본 10대 캠핑장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아스피아 캠핑장과 쓰루노유 온천, 다자와코 호수 등에서 캠핑과 온천, 카약 등을 즐기는 여행 상품이다. 특히 계류낚시가 포함된 상품이 이채롭다. 오보나이카와 등 포인트가 즐비한 계류를 오가며 플라이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일본어 전문 가이드가 늘 동행하고 쇼핑 등 불필요한 일정이 없어 알차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02)337-3088, 3070. 호도트레킹도 4일짜리 캠핑 투어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02)753-0777. 취재 협조 아키타현(akita.or.kr), 앗피리조트(www.appi.co.kr)
  • 수요집회 함께한 일본인들

    수요집회 함께한 일본인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일본 시민단체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 회원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빗속에서도 제1091차 수요집회를 열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극과 극] (9)30억원에서 12만원까지…6현의 예술, 기타의 세계

    [극과 극] (9)30억원에서 12만원까지…6현의 예술, 기타의 세계

    6개의 현(줄)과 바디, 프렛, 그리고 손가락과 영혼이 합주하는 악기. 현대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악기를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바로 기타일 것이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앨비스 프레슬리부터 록 음악의 시작을 알렸던 비틀즈,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 신중현까지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음악은 기타를 사용해왔다. 일렉트로닉과 힙합이 ‘대세’로 자리잡은 지금도 기타가 갖는 힘은 유효하다. 수많은 ‘뮤지션 지망생’들의 손에 여전히 기타가 들려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마치 전설의 무기인 ‘의천검‘과 ‘도룡도’를 찾아 헤매는 무협지 속 고수들처럼 현실에서도 최고의 기타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신문 온라인 기획 시리즈 ‘극과 극’ 9화의 주제는 수많은 음악팬들의 귀를 즐겁게 했던 기타다. 음악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장 손쉽고 눈에 잘 들어오는 비교거리는 여전히 ‘값’이기 때문에 최고가·최저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 650만원에 산 기타가 1억원으로…‘전설의 기타’를 가진 남자 현재 한국에서 공개 된 가장 비싼 기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이다. 김종진은 지난 2008년 세상을 떠난 재즈·블루스 기타의 거장 하이럼 블락이 사용하던 기타를 갖고 있다. 정확한 가격은 아니지만 경매에 내놓을 경우 1억원 가량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한다. 김종진이 이 기타를 손에 넣게 된 것은 20년전인 1994년. 음반 녹음차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종진은 맨하탄에 위치한 ‘위 바이 기타즈’(We Buy Guitars)라는 빈티지 악기점에 들어온 이 기타를 약 8000 달러에 구입했다. 당시 환율이 1달러 당 800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약 650만원에 ‘세계적인 기타’를 구입한 셈이다. 당시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던 하이럼 블락은 이 기타를 마약과 맞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정신을 차린 하이럼 블락은 지인을 통해 김종진에게 다시 기타를 되팔라고 요청했지만 “다시는 마약에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주겠다”는 말에 돌려받기를 포기했다. 결국 하이럼 블락은 인후암 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김종진이 가지고 있는 기타 외에 다른 것을 연주하지 않았다. ☞‘전설의 기타’를 멘 51세 ‘기타 키드’ 김종진 인터뷰(클릭!) 펜더사의 1962년형 스트라토캐스터를 기반으로 조립한 이 수제 기타의 감정가는 1억원 정도. 하지만 이 기타가 세계적인 거장인 하이럼 블락이 유일하게 사용했던 것임을 감안하면 그 가치는 훨씬 높다. 실제로 몇년전 김종진에게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무조건 사겠다”고 말한 일본인 수집가가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국내 최고의 기타 세션맨으로 꼽히는 함춘호가 가지고 있는 올슨사의 브라질리언 모델도 2만 달러(약 2200만원)로 최고가 기타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기타 꽤나 칠 줄 안다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명기’(名器)는 펜더사의 ‘스트라토캐스터’와 깁슨사의 ‘레스 폴’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두 회사가 주력으로 판매하는 이 모델들은 시중에서 150만원~500만원 사이에 팔린다. 펜더와 깁슨사 모두 유명 기타리스트들에게 이 모델들을 기반으로 한 특별한 기타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이런 ‘뮤지션 프리미엄’이 붙은 모델들은 양산형보다 2배에서 많게는 10배 가까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 ‘뮤지션 프리미엄’이 가격 좌우…입 벌어지는 세계의 기타 세계로 눈을 돌리면 기타의 몸값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올라간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타로 알려진 것은 펜더 사에서 만든 ‘Reach out to Asia Fender Stratocaster’란 모델이다. 2005년 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로 피해를 본 이들을 위해 세계적인 아티스트 브라이언 아담스가 주최한 자선기금 행사에 제공된 이 기타는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를 비롯해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스팅,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키스 리처드, 퀸의 브라이언 메이,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 AC/DC의 말콤·앵거스 영 형제 등 내노라 하는 기타리스트 21명의 사인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카타르 왕실에 100만 달러(약 11억 1000만원)에 팔렸고 이후 왕실이 기부해 270만 달러(약 30억원)에 다시 팔렸다. 한번의 경매로 이보다 비싸게 팔린 기타는 요절한 ‘기타의 신’ 지미 헨드릭스가 생전에 사용하던 기타다. 펜더사의 스트라토캐스터 1968년형 모델인 이 기타는 헨드릭스가 경매에서 200만 달러(약 22억 20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낙찰됐다. ☞ 지미 헨드릭스의 1969년 우드스탁 락페스티벌 공연 영상 보러가기 이 외에도 ‘레게의 아버지’ 밥 말리가 사용하던 수제 기타(120만 달러~200만 달러), 에릭 클랩튼의 ‘블랙키’ 스트라토캐스터(95만 9500달러)·깁슨 1964년형 ES0335(84만 7500달러) 등도 최고가 기타에 속한다. ● 나무 재질부터 차이가…12만원대 최저가 기타 그렇다면 가장 싼 기타는 얼마일까? 국내 최대 악기 시장인 낙원상가에서는 가장 싼 어쿠스틱 기타는 12만원대부터 시작한다. 이런 기타는 연습용으로 사용되는 보급형들이다. 저가 어쿠스틱 기타로 12만 9000원짜리 데임사의 모델을 소개한 조원기 뮤직메카 낙원점장은 “보급형 기타들은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는 초심자들이 많이 구입하는 편”이라면서 “하루 4~5대에서 많은 경우 수십대까지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어쿠스틱 기타의 가격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울림통을 구성하는 나무의 재질이다. 가격이 높을수록 좋은 원목을 사용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는 합판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조 점장의 설명이다. 어쿠스틱 기타보다 부품이 더 들어가는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는 15만원 안팎이 가장 싼 모델이다. 이정우 앰엔에스 대리는 “가격이 저렴한 기타는 인건비가 싼 중국산이 많다”면서 “부품의 질이나 마감에서 비싼 물건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저가 기타들도 초보자들이 연주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직접 최저가 기타를 시연한 조 점장이나 이 대리 모두 “소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듣기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 중요한 것은 재료가 아닌 영혼 지금까지 가장 비싼 기타와 가장 싼 기타에 대해 정리해봤다. 하지만 사실 기타의 가치는 악기 자체의 값 보다는 ‘누가 썼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앞에서 살펴본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타의 리스트는 양대 기타 제작사인 팬더와 깁슨이 양분하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시중에 판매하는 대중적인 모델보다는 고가의 부품들이 쓰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억원대의 물건은 아니란 얘기다. 하이럼 블락의 기타를 들고 있는 김종진 역시 “악기를 통해 무엇이 연주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기타의 값어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비싼 악기를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악기에 자신의 영혼을 싣느냐’에 달렸다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됐다. 최고가, 최저가 기타에 대해 알아본 이번 ‘극과 극’은 한 소년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마무리를 짓겠다. 1963년 영국, 이제 막 음악에 눈 뜬 16살 소년은 기타가 너무나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수십 파운드나 되는 기타를 살 돈이 있을리는 없었던 터. 소년은 아버지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기특하게도 소년이 원한 것은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재주’. 소년과 아버지는 허름한 창고 안에서 뜨게질용 바늘, 자전거 안장에 달린 주머니, 망가진 오토바이 스프링 같은 잡동사니를 모아 기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1년 반쯤 지나 그토록 원하던 기타를 손에 넣은 소년은 자신의 첫 기타에 ‘레드 스페셜’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음악을 시작한 소년 ‘브라이언 헤럴드 메이’는 현재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됐고 그의 기타 레드 스페셜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와 함께 여전히 아름다운 소리를 뽐내고 있다. 레드 스페셜의 재료값은 현재 기준으로 60만원 남짓. 하지만 혹자들은 레드 스페셜이 경매에 나온다면 수억원은 거뜬히 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 브라이언 메이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 기념 공연 영상 보러가기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 日유명 女아나 성관계동영상 유출루머 일파만파

    日유명 女아나 성관계동영상 유출루머 일파만파

    일본 후지TV 아나운서 출신이자 2020도쿄올림픽유치위원회 소속의 타키가와 크리스텔(35)이 40분 분량의 개인 동영상 유출 루머에 휩싸였다. 타키가와 크리스텔은 프랑스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배우 오자와 유키요시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이국적인 외모와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아온 그녀는 최근 2020도쿄올림픽유치위원회 소속으로 최종 프레젠테이션에 나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문제의 동영상이 최초로 언급된 시기는 지난 6월. 일본의 한 주간지가 타키가와 크리스텔의 성관계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있다고 보도했고, 타키가와 측은 단순한 스캔들로 치부해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열린 ICO총회에서의 최종 프레젠테이션이 주목을 받으면서 관련 루머가 또 다시 급부상 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언론은 지난 6월 타키가와의 사적인 동영상이 있다는 내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동영상이 유출됐다고 보도해 진위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CD에 녹화된 이 동영상은 타키가와 크리스텔로 추정되는 여성의 성관계 장면을 담고 있다. 상대는 백인 남성이며 동영상 속 여성은 레이스로 장식한 속옷 뿐 아니라 나체 모습까지 모두 드러낸다. 장소는 호텔로 보이며, 카메라의 각도로 보아 호텔 천장에 설치해 몰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영상 CD 표지에는 그녀가 뉴스를 진행하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여성이 옷을 모두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자극적인 사진 등이 인쇄돼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인터넷 뉴스사이트 및 게시판을 중심으로 타키가와 크리스텔의 성관계 동영상 루머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중국 언론들은 “동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 확인이 어렵지만, 최근 IOC총회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한 타키가와 크리스텔로 보인다.”면서 앞 다퉈 보도하고 있다. 중국의 한 언론은 “그녀가 지난 3월 후지TV 아나운서를 그만 둔 것이 동영상 유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지적인 매력과 섹시한 매력을 동시에 갖춰 일본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에서도 팬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사실로 밝혀진다면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타키가와 크리스텔 측은 지난 6월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전설의 기타’를 멘 51세 ‘기타 키드’ 김종진

    ‘전설의 기타’를 멘 51세 ‘기타 키드’ 김종진

    “이렇게 기타 얘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서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김종진과의 인터뷰 도중 부인인 배우 이승신이 무심코 던진 얘기다. 그가 가지고 있는 하이럼 블락의 기타를 보고 싶다는 요청에 흔쾌히 응한 김종진이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실제로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기타에 대한 그의 열정은 18살 소년의 그것과 다를 것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51세의 ‘기타 키드’ 김종진을 만난 것은 지난달 27일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였다. ●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전설의 기타를 입수한 ‘축복받은 남자’ 김종진과의 인터뷰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진 그의 기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김종진의 기타는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재즈·블루스 기타리스트인 하이럼 블락이 연주하던 것이다. 김종진이 기타를 입수하게 된 것은 지난 1994년. 원래 주인이었던 블락은 그 후로 2008년 인후암 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14년 동안 기타를 잡지 않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거장의 기타’가 김종진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처음 이 기타가 시장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이죠” 1994년 당시 미국에서 녹음작업을 하고 있던 김종진은 버클리음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동료 기타리스트 한상원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블락이 연주하던 기타가 뉴욕 맨하탄의 빈티지 악기점에 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한상원은 김종진을 ‘빈티지 기타’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한상원은 마약에 찌들어 있던 블락이 한 클럽에서 기타와 바꿔 마약을 샀고, 이 기타가 중고 시장에 팔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절친인 김종진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블락은 당시 난다긴다하는 뮤지션들이 모여있는 뉴욕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기타리스트였다. 김종진 역시 미국에 건너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그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블락이 자신의 눈 앞에서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넋을 잃었다고 전했다. 공연이 끝나고 말이라도 한 마디 건내볼까 하는 생각에 클럽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토록 동경하던 기타리스트의 애장품을 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위 바이 기타즈’(We Buy Guitars)란 이름의 악기점으로 달려간 김종진은 기타를 확인하고 환희에 가득찼다. 악기상이 제시한 가격은 단돈 8000 달러. 당시 우리 돈으로는 650만원 정도의 사실상 ‘헐값’이었다. 김종진이 기타를 입수한 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기타를 그리워하던 블락은 함께 밴드 활동을 하던 베이시스트 윌 리를 통해 기타를 되팔수 없느냐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직접 윌 리를 만난 김종진이 “블락이 다시는 마약에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냥 돌려 주겠다”고 말하자 윌 리는 “그냥 네가 간직해라”라며 포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설의 기타’는 김종진의 것이 됐다. 김종진의 기타가 화제가 된 것은 지난 2007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1억원의 감정가를 매기면서부터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떠돌던 기타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가 이 기타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본인 수집가가 ‘꼭 갖고 싶으니 가격을 제시해라.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사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팔 생각이 없고 조금 더 이 녀석을 연주하고 싶어서 거절했었습니다” 지금도 모든 공연에 이 기타를 매고 나가는 김종진은 ‘전설’이 주는 소리의 마법에 아직도 매료된 듯 보였다. 그는 “이렇게 좋은 기타를 연주하는 저도, 소리를 듣는 청중들도 모두 축복받은 셈”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명확히 소리가 좋은’ 기타가 풍기는 아우라 군데군데 흠집이 난 김종진의 낡은 기타가 풍기는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발터 벤자민이 말한 ‘아우라’라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종진은 이 기타를 구입한 뒤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바로 기타의 바디(몸통) 윗부분과 픽업(줄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꿔 소리를 증폭시키는 부품) 주변을 누군가 깎아낸 것이다. 실제로 그냥 우연히 닳았다고 볼 수 없는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마 이 기타를 만든 장인, 혹은 하이럼 블락이 소리를 조율하기 위해 일부러 자국을 낸 듯 해요. 그만큼 소리에 신경을 쓴 물건이란 것이죠” 김종진의 기타는 외관 상으로 팬더사의 대중적인 모델인 스트라토캐스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기타는 1962년판 스트라토캐스터의 바디에 1961년판 깁슨사의 험버커 픽업(싱글 픽업을 두개 겹쳐놓은 부품)이 달려있는 수제 기타다. 김종진은 “1961년에 넥(기타의 목)을 만든 뒤 이듬해 바디에 끼워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당시에는 이렇게 각자의 부품을 조합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진은 1년에 한번 하이럼 블락이 사용할 때부터 이 기타를 세팅해주던 로저 사도스키라는 루티어(현악기 제작자)에게 기타를 맡긴다. 사도스키의 세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기타의 소리는 어떨까? 김종진은 “저음에서는 뭉글대고, 중음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나며 고음에서는 배음(원음보다 몇배의 진동수를 가진 음)이 일반적인 것보다 확장돼서 들린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쉽지는 않은 부분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에게 김종진은 “쉽게 말하자면 ‘명확히 소리가 좋은’ 기타죠. 숫자로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집니다”라고 다시 설명했다. ● “데이터로 평가할 수 없는 최상의 기준, ‘좋은 것’에는 항상 ‘안목’이 따르죠” “이 기타를 들고 연주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퍼져요. 소위 말하는 ‘음악혼’이 불타는 기분이랄까요” 김종진은 일종의 ‘토테미즘’(무속신앙)과 같다는 말과 함께 “이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10%는 더 연주가 잘되는 듯 하다”는 말을 했다. 육상의 우사인 볼트가 ‘마법의 신발’을 신고 자신의 최고 기록을 10% 단축하는 것쯤으로 설명하면 될까. 반신반의하는 기자를 향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데이터로 표현할 수 없는 상위의 기준은 존재하고 있어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니콜로 파가니니가 연주를 하자 청중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잖아요. 저도 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정말 그런 것이 있구나’란 느낌을 받았어요. 경이롭다고 할까요” 김종진은 이 기타를 손에 넣은 뒤 자신의 음악도 한단계 끌어올리게 됐다고 했다. “하이럼 블락의 기타를 가졌으니 그와 같은 수준의 음악을 해야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김종진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단어는 ‘좋은 것’과 ‘안목’이었다.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것은 분명히 있다”면서 “그 좋은 것을 찾아내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안목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또 “진짜 예술은 진정한 안목이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데서 시작된다”면서 “그들의 안목을 빨리 파악하면 당대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 ‘안목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종진 역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다만 “재능과 경험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뒤 김종진은 기자를 위해 직접 즉흥 연주를 들려줬다. ‘안목’이 떨어지는 ‘범인(凡人)의 귀’로 듣기에도 확실히 다른 울림을 가진 소리였다. 비단 악기 본연의 소리 뿐이랴. 국내 최정상 기타리스트의 연주에는 그의 영혼도 담겨 있었다. 넋을 놓고 연주를 감상하고 난 뒤에야 “명확히 좋은 소리”라는 김종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맹수열 기자 guns@seoul.co.kr
  • “국적은 달라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한마음이죠”

    “국적은 달라도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한마음이죠”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이 외국인들로 북적였다. 중국, 일본, 몽골 등 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북유럽 아이슬란드와 남미 에콰도르,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다양한 국적을 지닌 외국인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이 이번 가을 학기에 처음 개설한 ‘외국인을 위한 동북아역사 아카데미’ 1기 동기생들. 이날은 입학식과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첫 만남의 자리였다. 서로 초면인지라 처음엔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감이 흘렀지만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외국인을 위한 동북아역사 아카데미’는 한국에 유학 왔거나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서로 연관 지어 이해하도록 돕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입학식을 시작으로 12월 11일까지 15주간 매주 수요일 두 시간씩 수업한다. 강의는 역사 이론과 역사 체험 수업으로 구성된다. 이론 수업에서는 현직 초·중·고 교사들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와 동북아시아사를 강의하며, 체험 수업에서는 한국어와 한국문화 전공 강사가 이론 수업에서 나온 내용과 연관된 한국문화에 대해 체험 학습을 이끌어 가게 된다. 남산골 한옥마을 투어, 울릉도·독도 답사, 수원 역사 유적지 방문 등 현장 탐방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아카데미를 기획한 재단의 정영미 박사는 “독도체험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외국인 방문객들을 많이 만났는데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더라”면서 “그런데 막상 전공을 하지 않는 한 외국인들이 한국사를 배울 곳이 거의 없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아카데미를 개설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건 학생들. 모든 강의가 한국어로 진행돼 한국어 4급 이상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까닭에 첫 학기 20명 정원을 채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22명이 원서를 냈다. 국적도 11개국으로 다양하다. 아이슬란드에서 온 욘애일(46)은 중국문헌학을 전공한 대학 강사 출신으로, 1년 전 한국에 왔다. 현재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그는 “앞으로 한국 역사와 동양 역사를 비교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망설임 없이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클라센 캐스퍼 헨드릭(25)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년째 한국농촌개발을 연구 주제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남아공 청년이다. 조선 초기 ‘농사직설’에 관심이 생겨 유학을 왔다는 그는 “한국 역사를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입학하게 됐는데 앞으로 강의가 기대된다”고 전했다. 일본인 유학생 마쓰다 에미(31)는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중·고교 교과서로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면서 “이번 기회에 한국 역사를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카데미 강의에는 동북공정과 독도, 일본 교과서 문제 등 역사 현안에 대한 특강도 마련돼 있다. 중국과 일본 유학생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되도록이면 역사적 사실 위주로 강의하면서 고구려 유적지를 보여 주거나 독도를 탐방하는 등 체험 학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내년부터 봄 학기와 가을 학기 두 차례씩 아카데미를 운영할 계획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대불호텔’…서울 아닌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대불호텔’…서울 아닌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 공개돼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공개된 게시물 속 흑백 사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게시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수도 서울이 아닌 인천에 위치했으며, 일본인 호리 리기타오로가 1888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양옥 건물로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췄다. 일본인이 지었기 때문에 다다미(일본식 돗자리 방)방이 240개, 침대가 있는 방이 11개에 달했다.이 호텔의 객실별 숙박료는 상급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당시 일본식 여관의 상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싼 요금이지만 사람들이 항상 북적였다고 기록돼 있다. 네티즌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신기한데”,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을 일본인이 지었다니 슬픈 역사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남산 하면 벼슬길 진출을 위해 ‘열공’하던 딸깍발이 선비와 그들이 살던 낭만적인 남촌 풍경이 떠오른다. 조선 신궁과 통감부, 헌병사령부, 일본인 거주지 같은 좋지 않은 상념도 꽈리를 튼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구절이나 한때 ‘남산’으로 불리던 옛 중앙정보부의 추억도 있다. 케이블카와 도서관, 어린이회관, 서울타워도 빠지지 않는다. 한강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기에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는 것이리라. 남산은 사대문 안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이기에 익숙하고 친근하다. 풍수지리학상 342m 높이의 백악(북악)이 조선 한양의 주산(主山)이었다면 265m의 남산은 안산(案山)이었다. 쉽게 풀면 나라(임금) 앞에 놓인 밥상이나 책상 같은 개념의 산이다.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대의 마지막 종착점이어서 남산 5개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가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평화의 산이기도 했다. 남산 위에 오르면 도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했다. 덕분에 산림이 우거지고 울창해 서울의 허파가 되었다. 서울의 팽창에 따라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자연지리적인 요건을 갖췄다. 우리가 남산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아는 것도 있다. 일례로 남산 소나무이다. 산림청에 등록된 4440개의 우리나라 산 이름 중 남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31개에 이른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마을 앞산을 남산 또는 앞산이라고 불렀다. 남(南)자를 ‘남녘 남’ 자가 아닌 ‘앞 남’으로 썼다. 남산은 앞산을 한자로 쓴 것이다. 목멱(木覓)의 유래도 흥미롭다. 남산의 다른 이름은 ‘마뫼’였다. 마뫼의 ‘마’는 ‘앞’, 뫼는 산의 우리말이다. 독립지사이자 역사학자였던 안재홍에 따르면 목멱은 이두식 표기다. 목(木)은 ‘마’를, 멱(覓)은 ‘뫼’를 적었다는 얘기다. 남산=앞산=마뫼=목멱이 같은 뜻 다른 이름이다. 방방곡곡 동네 앞산의 소나무가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인 셈이다. 샌님이 살던 남촌에 언제부터 왜색의 기운이 드리웠을까. 남산과 일본의 악연은 뿌리 깊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1592~1598) 이전까지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이 남산 기슭 인현동 2가에 있었다. 남산은 7년 전쟁기간 동안 왜군 진지였다. 마스다 나가모리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서 왜장터(왜성대)라고 불렸다. 그들의 진지는 지금의 정동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그로부터 292년이 지난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를 영사관자리로 제공받아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곳에 일본공사관, 통감부, 총독부가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1가인 진고개(본정)일대는 일본인 거주지였다. 진고개를 거점으로 남대문, 회현동, 명동(명치정), 을지로(황금정)쪽으로 주택가와 상가가 확장됐다. 화려한 남촌 일본인 상가는 북촌 조선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일본인 관광객이 유독 명동을 즐겨 찾는 까닭도 그들이 누렸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회귀본능이 아닐까. 해방 직후 본정(本町)을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딴 충무로(忠武路)로 바꾼 것은 이를 차단하려는 속뜻이 작용한 것 같다. 남산과 남촌은 조선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일본인촌으로 변했다. 종로 우미관을 주름잡던 김두한 패가 청계천을 경계로 진고개 일본 건달과 세력을 다투던 시절이다. 19가구 89명(1885년)에 불과하던 일본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1986가구 7677명(1905년)으로 늘었다. 강제병 탄이후 8794가구에 3만 4468명(1910년)으로 무서운 팽창세를 보였다. 일제의 남산 잠식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1898년 예장동에 대성궁(경성신사)이라는 작은 신사를 세우더니, 1904년에는 2만여 평을 임대해 필동에 헌병대사령부를 구축했다. 1908년에는 30만 평을 영구 무상임대,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조선 신궁을 세웠다. 그들이 잠식한 땅이 현재 남산공원(87만 6000평)의 3분의 1을 넘는다. 일제가 열도를 창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명치 천황을 모신 조선 신궁은 한반도 전역에 있는 일본 신사의 총본부였다. 신궁은 사대문 안 어디에서나 보이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으며 시내에서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승객 전원이 일어서서 묵념을 올려야 했다. 1918년 남산중턱 13만평의 수목을 베어내고 조성에 들어가 1925년 완공됐다. 지금의 남산식물원 자리이다. 일본의 성지 조성을 위해 남산은 깔아뭉개졌다. 남산 중턱 힐튼호텔에서부터 384개의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도록 꾸몄다. 남대문에서 조선 신궁에 이르는 참배로를 조성하려고 남대문에서 남산을 잇는 성곽을 부수고 자동찻길을 냈다. 지금의 소월로이다. 남산생태계를 파괴한 주범이다.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서사탑은 광복 직후 서울시민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파괴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남산의 동쪽 기슭 장충단은 명성황후시해사건(1895) 당시 일본자객에 맞서 순직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곳이다. 장충단(奬忠壇)이란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일제는 창경궁, 덕수궁과 함께 이곳을 공원으로 희화화하고서 장충단 동편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터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웠다. 일본 1000엔권 지폐에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 이토의 업적을 영구히 기념한다는 구실로 내선일체를 꾀했다. 당시 여행안내책자에서 경성 제일명소로 칭송했다. 총독부를 지을 때 헐어낸 경복궁 선원전을 부속건물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정문으로, 광화문 양옆 궁성벽 석재를 가져다가 담으로 쌓았다. 박문사 건물은 해방 후에도 동국대 기숙사로 쓰였고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구 필동 남산한옥마을은 악명 높은 헌병통치의 본산인 조선헌병대사령부 터였다. 조선 초 박팽년의 사저였던 한국의집은 조선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의 관저로 쓰였다. 이들은 남산 중턱 왜성대에 총독관저를 세우고 그 아래 조선헌병대사령부를 뒀다. 서울유스호스텔은 일본공사관과 통감관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가 각각 자리했었다. 남산은 경복궁 안에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일본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남산꼭대기 N타워 옆 팔각정은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평범한 정자에 불과하지만, 내력은 간단치 않다. 이 자리는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부터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조가 남산의 산신을 모시려고 지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무속사당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민속신앙 터인 국사당이 일본 토착신앙의 대표인 신궁에 쫓겨 인왕산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이다. 일제는 ‘일본 최고 신과 살아있는 신인 천황을 모시는 신궁에 식민지 나라의 굿 집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1925년 오백년 내내 있던 자리에서 내쳐버렸다. 한국의 무속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신도(神道) 역시 원시종교에 가깝지만, 정부나 국민이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을 건 야스쿠니 신사참배 행렬에서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국사당을 원상회복시키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 얘기를 꺼냈다간 종교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보고 싶어하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명동을 거쳐 남산타워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들이 국사당 축출 사연을 듣는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광복 후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국사당 터에 국사당을 되돌리기는커녕 자신의 호를 딴 우남정을 만들었고,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동상을 세웠다. 조선 신궁 터를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결정해 1959년 기공식까지 가졌지만 2년 뒤 5·16 쿠데타로 백지화됐다. 3500가구 2만 5000명이 정착한 서울 최초의 판자촌인 해방촌이 남산의 북쪽 기슭 12만 6000평을 차지하도록 사실상 허가해 남산의 피폐를 가속화했다. 이런저런 압력과 로비를 통해 숭의학원, 리라학교, 동국대학교가 남산에 틈입했다.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훼손된 곳은 장충단공원이었다.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반얀트리),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옛 재향군인회(동국대), 옛 중앙공무원교육원(동국대) 등이 줄줄이 들어선 것이다. 장충단공원은 21만평이 넘던 서울시내 최대 근린공원에서 9만평의 평범한 공원으로 쪼그라들었고 1984년 남산공원으로 흡수합병당하는 신세가 됐다. 1994년 외인아파트 2동이 폭파 철거되는 등 남산제모습찾기운동이 시작됐고 2009년 남산르네상스를 내세운 오세훈 전 시장이 찢어진 남산녹지축 연결을 시도했지만 마무리짓지 못했다. 남산에는 지금도 동상 10기, 기념비 14개를 비롯한 각종 시설물 28개, 체육시설 269개가 촘촘하다. 그러나 남산은 이들에게 마른 품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 아! 남산이여….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재밌는 역사/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재밌는 역사/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얼마 전 고교 동창들과 한라산에 오를 때였다. 중턱에서 쉬던 중 한 친구가 불쑥 한라산 높이를 아느냐는 말을 꺼냈다. 6명 중 1명을 빼곤 모두 ‘1950m’를 외치면서 오답을 낸 친구에게 이렇게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역사 시간에 졸았냐.’ ‘6·25전쟁 발발연도로 외우라고 했지.’ 한결같이 내뱉는 공유의 기억. 그러고 보니 가는 곳마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연상법’으로 외워놓은 수치며 사물들이 즐비하다. 수업 시간, 시험 때마다 줄창 외워댔던 암기의 역사공부가 톡톡히 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척척 튀어나오는 그 연상의 수치며 사물도 한 뭉텅이의 역사로 이어지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다. 며칠 전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된 일본 NHK 방송내용만 해도 그렇다. 일본어 문자의 하나인 ‘가타카나’가 신라에서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히로시마대 고바야시 요시노리 명예교수의 연구 말이다. 740년쯤 통일신라에서 일본에 건너간 불경 대방광불화엄경에서 가타카나의 조성원리와 똑같은 축약표기인 각필(角筆)문자 360개가 확인됐다는데. 일본인 교수가 가타카나의 전래문물에 천착한 것도 특이하지만 가타카나와 신라기 불경을 연결지은 착안이 흥미롭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한다. ‘한라산 높이=6·25전쟁’ 식의, 뚝뚝 잘리고 끊겨진 단순암기로 가타카나의 신라 불경 기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따져 보면 그 단순반복학습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가 아닌 단절의 첩경이나 다름없다. 역사 공부가 ‘죽도록 좋아하는’ 과목이라면 지금처럼 고등학교 교실에서 기피하고 외면하는 대상이 됐을까. ‘외울 게 많고 복잡한 과목’이란 인식보다 배울수록 더 재미있고 빠져드는 과목이라면 벌써 수능시험 과목에 들었을 게 아닌가. 교육부의 ‘대입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방안’에 포함된 한국사 필수 지정을 놓고 논란이 많다. 현재 중학교 3학년이 대학에 입학하는 2017년부터 한국사를 수능 사회탐구 영역에서 분리해 별도 영역시험으로 필수화한다는 안이 나오자마자 교실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온다. 그 신음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도 할 게 많은데 그 외울 것 많고 까다로운 과목을 더 해야 하나’라는 부담이다. 벌써부터 사교육 시장이 들썩이고 다른 사회 과목 교사들의 볼멘소리도 봇물을 이룬다. 역사를 중시한다는 정책의 방향이야 뭐 탓할 게 있을까만, 그래도 ‘역사 중시’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이다. 어찌 보면 이번 개편안에 함께 든 수능 문·이과 융합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한 분야와 영역에 갇힌 단절이 아닌, 서로 넘나드는 소통과 통섭의 원칙 말이다. 이것 역시 교육과정 운영의 어려움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이제 무시할 수 없는 큰 물결을 이루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융합은 역사 교육에서 먼저 이뤄내야 한다. 그저 뚝뚝 끊어진 역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진실의 흥미로운 교육 말이다. 하긴 지금 ‘좌편향이니 우편향이니’ 하는 역사 교과서 전쟁을 보자면 차라리 ‘한라산 높이=6·25전쟁’ 식의 암기가 나을 수도 있겠지만. kimus@seoul.co.kr
  • [韓日 관계 개선을 위한 제언] “지도자 일부 개헌 주장한다고 여론이 그 방향 가는 건 아니다”

    [韓日 관계 개선을 위한 제언] “지도자 일부 개헌 주장한다고 여론이 그 방향 가는 건 아니다”

    가와무라 다케오(71)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통이다. 정치 스승인 고(故) 다나카 다쓰오 전 문부대신의 뒤를 이어 김종필(87) 전 국무총리, 김수한(85) 전 국회의장 등과 교류하는 등 꾸준히 한국 정치인들과의 교분을 이어왔다. 자민당 내에서도 실세이기 때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對)한국 정책은 가와무라 의원이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은 일문일답.→한·일 관계가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 기대 밖이었을 것이고, 일본에서는 지난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케시마(한국명 독도)에 간 것에 대해 국민들의 감정이 격해졌다. 한류 붐이 사그라졌다고 해도 일반 국민들은 NHK에서 방송되는 한국 사극 ‘동이’도 많이 보는데 양국 정부의 분위기가 냉랭한 것은 걱정이다. 2015년이 국교정상화 50주년인데 빨리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한국 국민들은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재특회) 등 일본 내 혐한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다. -(재특회는)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인끼리도 마찬가지지만 드러내놓고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에서도 헌법 개정, 집단적 자위권 용인 등 우경화가 이뤄지고 있지 않나. -자민당은 원래 현재의 헌법을 (연합군) 점령하의 헌법이라고 해서 자주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창당 때부터의 입장이다. 그러나 지도자 일부가 주장한다고 해서 여론이 (헌법 개정의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 외교는 등한시하고 중동, 아프리카 등과의 외교에 치우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일·한, 일·중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그것이 최우선이 되겠지만 안 될 경우에는 다른 나라와도 외교를 해가면서 일·한, 일·중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중국이 아프리카와 중동 등에 진출하면서 (자원 외교가) 진행되고 있어 일본이 이를 간과하면 중국에 에너지와 관련된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점도 일본은 고려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폐를 끼쳤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잘해 가면서 최종적으로 일·한, 일·중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5년 국교 50주년을 맞아 일각에서 한·일 협정을 수정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거기까지는 상당한 신뢰 관계가 없으면 일방적인 얘기가 될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그렇게 나오면 일본은 더욱 안 좋은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빨리 흉금을 털어놓을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좀처럼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한·일 협정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 절도단이 쓰시마시 관음사에서 훔친 금동관음보살좌상의 반환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사법부가 정부의 의향을 너무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금의 일본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대화의 여지를 없애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한·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청소년 교류를 100만명 단위로 한다. 한국과 일본도 과거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각국 어린이들의 교류부터 활발히 해야 한다. (가와무라 의원은 ‘어린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의원연맹’의 위원장을 맡아 지난달 한·중·일 초등학생이 1주일간 함께 지내며 동화책을 만드는 ‘한·중·일 어린이 동화교류 2013’ 행사를 주관하는 등 민간 차원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한국 어린이들은 일본과의 과거를 알고 있겠지만 일본 어린이들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반성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이야말로 확실히 (역사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쿄 황성기 특파원 marry04@seoul.co.kr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규슈에서 걷는 올레길

    규슈에서 걷는 올레길

    ‘집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올레. 제주의 올레길이 단순한 길이 아니듯이 규슈의 올레도 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규슈 올레란? 사단법인 제주 올레와 규슈 운수국, 규슈 관광추진기구가 협정을 맺어 규슈의 매력적인 걷는 길을 ‘규슈 올레’로 선정하였다. 현재 총 길이 106.4km에 이르는 8개의 코스가 운영되고 있다. 규슈 올레 걷기 TIP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파란색과 붉은색 리본, 나무 화살표, 간세(제주 조랑말을 형상화한 모양)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파란색과 붉은색 리본은 나뭇가지 등에, 나무 화살표는 길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데 파란색 화살표가 정방향, 붉은색 화살표는 역방향을 뜻한다. 출발과 도착 지점, 관광 명소에 배치되어 있는 간세를 만나면 머리가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자. 숲의 정령이 함께하는 다케오 올레 코스 규슈 사가현에 위치한 다케오는 나지막한 산 속에 자리잡고 있다. 1,300년 이상 된 온천과 400년을 이어 온 도자기 공방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라 해서 지루할 것이라 생각하면 금물. 30대 후반의 히와타시 게이스케 시장이 부임하면서 공격적인 행정을 펼쳐 젊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다케오 올레 코스는 다케오 온천역에서부터 시작된다. 후쿠오카 국제공항에서 JR로 1시간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제8회 규슈역 도시락 대회에서 1등을 한 ‘사가규 스키야키 벤토’를 가방에 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길의 끝에 온천이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도 가볍다. 평일 차분한 도시의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산의 입구에서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길이라고 하나 잘 정비되어 있어 발걸음이 무겁진 않다. 조금 힘이 든다 싶을 때마다 쉼터가 나와 주어 평화로운 다케오를 감상하며 땀을 식힐 수 있다. 대나무가 병풍이 되어 길을 안내해 주고, 시원한 바람에 조용히 몸을 흔들어 사각사각 소리를 더해 준다. 시원한 녹색에 눈이 편안해지고 대나무의 응원에 귀마저도 안락해진다. 물 한 모금이 필요할 때 즈음 기묘지 절이 나타난다. 친절하게도 한 아주머니께서 녹차를 대접해 주신다. 주위를 둘러보니 빨간 모자를 쓴 조그만 석상들이 가득하다. 세상에 태어나 보지 못한 애기들을 위해 석상을 세우고 추울까 봐 빨간 모자와 이불을 덮어 준 것이라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도룡뇽과 반딧불 사가현 현립 우주과학관까지 내달렸다. A, B코스 분기점 푯말이 나타난다. 안내 팸플릿을 보니 A코스가 ‘상급자’를 위한 길이다. 마음 같아선 ‘일반’ 코스인 B코스로 유유히 걸어가고 싶지만 몸은 이미 A코스를 걷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오기가 발동한 까닭이다. 조금 걷다 보니 필자의 선택을 환영하는 도룡뇽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맑은 물이 흘러야만 산다는 도룡뇽을 보니 청정지역이 분명하다. 평소보다 한숨한숨 깊게 들이쉬고 내쉰다. 길에 집중하려는 찰나 ‘반딧불의 못’이라는 작은 연못 하나가 눈앞에 펼쳐진다. 밤 늦게 다시 찾아와 반딧불이 그려내는 빛의 선을 눈에 담고 싶지만 일정상 그러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아쉬움이 가시기도 전에 곧 바로 거대한 삼나무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됨을 알려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삼나무의 위용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끝을 바라본다. 삼나무의 높이만큼이나 다케오 코스도 태고의 코스로 접어든다. 삼나무 길 다음엔 본격적인 오르막 코스가 시작된다. 약 100m 정도를 거의 수직으로 오르게 되는데 상급자 코스의 클라이맥스다. 턱밑까지 숨이 차 오른 바로 그 순간, 다케오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상이 나타난다. 다케오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미후네야마를 왼편으로 작고 정겨운 도시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장마철로 접어드는 시즌이라 청명한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고된 산행 뒤 정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시원한 바람과 멋진 풍경만으로도 올레길은 충분히 즐거워진다. 다케오 코스의 상급자 코스를 정복했다고 자만할 때쯤 다시 수직에 가까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제주 올레팀의 지적에 따라 다케오시는 편한 길을 새로 내어 둘러갈 수 있게 했고 로프도 설치해 두었다. 수령 3,000년의 녹나무 이제 다케오 코스의 정점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힘을 실어 본다. 다케오 시립도서관과 다케오 신사의 큰 녹나무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다케오 코스의 진수 중 하나다. 사전적 의미의 ‘길’로서만 평가하라면 감히 ‘최고’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좋은 길이란 비단 길로서의 조건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사람과 소통하고 역사와 문화에 흡수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케오 시민의 열망을 담아 일본 제1의 도서관으로 재탄생한 시립도서관과 3,000년의 역사를 가진 큰 녹나무를 볼 수 있는 이 코스는 감히 최고의 길이라 불릴 만하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은 기존 도서관을 리모델링하여 시민의 편의성을 극대화했다. 일본 소프트웨어 렌탈 업체인 ‘츠타야’와 함께 도서관과 서점의 개념을 융합해 운영하고 있다. 하얀 패널의 책장에는 판매용 책들을, 검은 패널 책장에는 대여용 책들을 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립 도서관 최초로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으니 올레꾼들에겐 흡족한 쉼터가 되어 줄 것이다. 다케오 신사로 들어서니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밴 토리이鳥居가 굳건히 서 있다. 신사를 지나 녹나무를 대면하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른쪽엔 대나무, 왼쪽엔 삼나무가 곧게 서 있다. 그 길 끝에 3,000여 년을 버텨 온 녹나무가 그 웅장함을 드러낸다. 일본인들에게 녹나무는 영험함이 서린 ‘신물’과 같은 존재다. 모두 한순간 말을 잊는다. 순간 여행객 중 한 명의 독백이 들려왔다. “비워야 견디는구나.” 다케오 시청을 지나 자리한 온천 마을에는 1,300년 동안 이어 온 유서 깊은 온천들이 가득하다. 온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쿠라야마 공원에서 온천 마을을 내려다본다. 크게 힘들지 않은 길을 천천히 돌아나오면 다케오 올레길의 종착점인 다케오 온천 로몬이 나오는데 이 건물 안에 온천 박물관도 개방되어 있으니 과거 온천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들러 봄 직하다. 초원 너머 숲속으로 히라도 올레 코스 히라도는 규슈의 7개의 현 중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1,500년 전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상교역을 시작한 곳으로 ‘니시노미야코’ 즉, 서쪽의 도읍이라 불릴 만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번성하였다. 도시 곳곳에 네덜란드의 흔적이 고스란히 잘 보존되어 있어 올레를 걸으며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진홍색의 히라도 대교는 이 다리를 건너면 히라도가 시작되니 엄연히 히라도의 관문이라 하겠다. 희뿌연 하늘이 불안 불안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고 잘 정비된 마을을 빠져나와 사이쿄지 절을 지나 마을 이곳저곳을 걷다 보면 어느새 좁다란 숲길이 시작된다. 숲길이 끝났다 싶을 때 초록빛의 이끼가 비단처럼 깔린 길이 나타난다. 양탄자 위를 걷듯이 푹신푹신한 느낌에 절로 신이 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찍는 여행에서 걷는 여행으로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히라도 코스의 절정인 ‘가와치토우게’ 초원이 펼쳐진다. 언덕 위에서 보는 풍경이 궁금하여 한달음에 내달리고 싶지만 아직 걸어야 할 길이 10km 이상 남았다. 단시간 내 많은 것을 봐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래에서 목을 축인 후 언덕 위에 오르니 과연 절정이라 불릴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를 건너 언덕을 타고 온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한참을 앞서간 일행의 뒷모습이 손톱만하다. 서둘러 언덕을 내려와 다시 숲으로 몸을 숨긴다. 이 숲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길이라고 하기엔 어설퍼 보인다. 몇몇 곳은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나무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다 보니 어느샌가 마을로 들어섰다. 잘 정비된 아카사카 야구장을 지나고 아스팔트길이 시작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진 마을은 평온하기 그지없고 혹시나 꼬여 있는 리본을 누군가 보지 못할까 까치발로 고쳐 매는 올레꾼의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멀리서만 보였던 자비에르 기념교회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교회는 히라도에 가톨릭을 전한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를 기념하기 위해 1931년에 세워졌다. 교회를 지나 아름다운 담장을 두른 사원으로 향한다. 길만으로도 아름다운 이 사원길 끝에서 반드시 뒤를 돌아보자. 사원의 담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사원과 자비에르 교회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수령 400년 된 거대한 소철나무를 만나게 된다. 에도 시대 초기, 활발한 해외무역이 시작되는 시기에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히라도와 함께 성장한 상징적인 나무다. 어느새 히라도 올레길의 종착점인 우데유 아시유 족탕에 도착했다.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방석까지 준비되어 있다. 뜨거운 열기에 금세 피로가 녹아 버린다. 히라도의 역사와 사람냄새 나는 마을, 그리고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올레길이었지만 히라도 어디서나 보인다는 히라도의 상징 ‘히라도 성’이 코스에서 빠진 것은 못내 아쉬웠다. 아쉬워하는 필자를 위해 규슈 관광추진기구 측에서 이키스키섬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히라도섬과 이키스키섬을 잇는 이키스키 대교를 지나니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보이고 사오다와라 절벽 앞에는 기암괴석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낸다.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낸 장대한 예술 작품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바에 등대가 위치하고 있다. 80m의 오바에 절벽에 위치한 이 등대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이키스키섬의 멋진 관광명소를 모두 가보진 못했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천천히 길을 걸으며 해풍을 느낄 수 있는 올레길이 어서 빨리 탄생하길 기대한다. 대자연과 역사 속을 거니는 아마쿠사 올레 코스 아마쿠사는 구마모토현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아름다운 바다와 여러 개의 섬, 그 섬을 잇는 다양한 다리들,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 안은 웅장한 산까지 아마쿠사는 대자연이 펼쳐놓은 작품이다. 온난한 기후를 살린 농업과 풍요로운 수산자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도시다. 머금고 있던 빗물을 쏟아낼 것같이 흐린 날씨다.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아마쿠사 올레로 향하는 길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수묵화 같은 절경에 연신 탄성이 쏟아져 나온다. 거무스름하고 비옥한 토양이 나오다가, 잘 정돈된 채소밭이 싱그럽게 스친다. 이윽고 고요한 바다가 펼쳐지고 이국적인 장면들이 쉼 없이 연출된다. 코스의 시작점인 치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왜가리 한 마리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가 쏟아지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강과 바다가 교차하는 치쥬해안길을 따라 거친 돌을 밟아 나간다. 빗소리만이 가득한 길이 어느새 어두운 산 속을 향해 있다. 가파르진 않지만 만만하지도 않다. 우비 속이 뜨거워질 때 즈음 거대한 바위가 산 위에 박혀 있는 ‘센겐노모리다케’에 도착한다. 몸에서도 하얀 열기가, 산에서도 하얀 안개가 피어나고 있다. 현립 아마쿠사 청년의 집. 잘 정비된 캠핑장과 체육 시설이 눈에 띈다. 비를 피해 체육관에서 열심히 수업중인 아이들이 보인다. 수업에 방해될까 가던 길을 다시 재촉했다. 코스는 센간잔으로 이어진다. 아마쿠사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을 때 16세 소년이었던 아마쿠사 시로가 연회을 열고 술잔을 돌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아름다운 수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센간잔에 도착했다. 쏟아지는 비 사이로 렌즈를 만져 보니 나름의 운치가 짙게 배여 나온다. 숲 속에 느긋이 자리잡은 마을들도 멋진 그림이 된다. 센간잔에서 내려와 거대한 돌들의 무덤에 다다른다. 거대한 돌덩이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와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샌가 ‘용의 족탕’이 반겨 준다. 아마쿠사 5호 다리를 감상하여 뜨거운 족탕에서 피로를 녹인다. 아마쿠사 코스는 11.1km라는 비교적 짧은 길이지만 편한 길은 아니다. 편하지 않았기에 고통을 느꼈고 고통이 있었기에 ‘내 다리도 꽤 쓸 만하구나’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김기현 취재협조 규슈운수국, 규슈관광추진기구 www.welcomekyush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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