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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백척간두에 선 한국의 운명/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열린세상] 백척간두에 선 한국의 운명/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의 운명에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마침내 일본 아베 정부는 지난 1일 총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쟁에 뛰어들 수 있다는 헌법 해석 변경을 의결했다.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안보원칙을 폐기하고, 총리의 뜻에 따라 무력행사를 하겠다는 군국주의의 명백한 부활이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전쟁할 수 없는 나라였다. 지난 69년간 일본 지배계급은 절대주의 천황제국가를 염원하며 전쟁금지를 규정한 평화헌법 개정을 노려왔다. 사실상 일본은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추구하는 천황제국가다. 팔굉일우는 팔방의 넓은 세계를 일본이라는 하나의 집 아래 천황이 지배하겠다고 하는 침략이데올로기다. 밀접한 타국이 공격을 받아 일본의 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총리가 판단하면 전쟁을 하겠다는데 그 1순위는 당연히 남북한이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굳이 들출 필요도 없다. 만약 남북한에서 유사사태(전시상황)가 발생하면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의 요구로 일본군은 한반도에 출격할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일본이 동북아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일본극우파들은 오랜 경기침체와 중산층 붕괴, 지진과 원전사고 등으로 야기된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쇼비니즘으로 결집해 왔다. 이런 극우적 사고가 일본 시민사회 저변에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위력적인 사건 전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다. “당신네들은 우리 할머니들이 불쌍하다고 하지만 강간범, 범죄자로 몰린 우리 할아버지들이 불쌍하다.”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 한 시민단체 대표가 한 말이다. 더 무서운 전조는 우리 내부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인정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 없다. 오히려 그 의미를 축소하려고만 한다. 19세기 말 한·중·일의 역사가 지금 우리 앞에 다시 서 있는 셈이다. 역사의 복수를 피하려면 누구를 위한 한국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인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작 ‘역경의 행운’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고 공중도덕을 잘 지킨다. 가정교육의 모토는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이 국가를 의식할 때는 이와 판이한 행동을 한다. 기습공격을 잘하는 것이 그 일례일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910년 한국 강제 점령, 1937년 중국 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군의 소위 ‘위안부’, 731부대 등을 그 예로 들었다. 2012년 9월 일본의 양심세력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 영토 갈등은 근대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했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기억하자는 호소다. 역사는 한 공동체가 경험한 집단기억이다. 기억에서 지워진 역사는 수레바퀴의 축처럼 다시 돌아온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을 넘어서서 지극한 충성의 대상인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신분적 상하관계를 절대시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을 얽어매는 치명적인 족쇄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겪은 일본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아직도 무거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역사의 질곡은 민초들이 온전히 떠안게 마련이다. 한·중·일 모두 백척간두에 서 있다. 누구를 위한 일본인가, 누구를 위한 중국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한국의 운명은 중국과 일본의 운명과 따로 있지 않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는 그 바퀴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 결국 세계 각국 민초들의 몫이다. 특히 한국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한국인 그 누구도 한국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변하듯이 운명도 변한다. 주어진 명이 움직이기에 운명이다. 역사에 감춰진 운명의 비밀이 있다.
  • “北 서대하는 김정은의 숨겨진 비서관”

    4일 북한이 발족한 납치문제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서대하 국방위원회 안전담당 참사 겸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에게 일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이날 서 부부장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숨겨진 비서관’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상철 류코쿠 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 비서실이 김 제1위원장 취임을 전후로 권한이 집중되면서 큰 힘을 갖게 됐는데, 비서실 소속의 대다수가 제1부부장급을 겸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서 부부장도 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요미우리신문도 이날 2004년에 북한이 납치 조사위원회를 설치했을 때는 경찰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성 국장이 수장이었기 때문에 납북 일본인을 관리해 온 권력의 중추를 조사할 수 없었다고 지적하고 이번에는 실세인 서 부부장이 위원장을 맡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바꾸기를 반복해 온 북한의 전력과 조사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도쿄신문은 “특별조사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북한의 간부는 일본 측이 처음 듣는 이름이 많고 구체적인 권한이나 조사 대상, 방법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북한이 지금은 협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폐쇄 국가인 만큼 조사와 관련한 실태 파악이 어렵다”고 보도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법원, 객관적 자료 없는 일제 강제징용 이웃 목격담으로 피해 인정

    이웃 목격담만으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 사실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부장 이승한)는 김모씨 유족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상대로 낸 위로금 지급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4일 밝혔다. 유족에 따르면 1904년에 태어난 김씨는 1940년 4월 일본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다 크게 다쳤다. 노동력을 잃은 김씨는 1943년 4월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김씨는 귀국 뒤에도 후유증으로 농사일을 하지 못하고 병치레를 하다가 53세에 사망했다. 유족은 김씨가 강제 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나 위로금 지급이 거부되자 소송을 냈다. 위원회는 김씨가 강제 징용 때 다쳤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향 이웃들의 목격담을 근거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웃들이 각자 작성한 보증서에 의하면 고인은 일제에 강제 동원돼 심한 노역을 했고 일본인 감독자들로부터 구타당했으며 귀국 뒤에도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가 패망이 임박하지 않았던 때 고인을 귀국시킨 것은 노동력을 상당 부분 잃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며 “사망 당시 고령이 아니었던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日 대북제재 해제 확정…北 납치 전면조사 착수

    일본 정부는 4일 각의(국무회의)를 열고 북한에 대한 독자 제재 중 일부를 해제하기로 정식 결정했다. 이날 각의 결정에 따르면 ▲인도적 목적의 북한 선박 입항 금지 ▲양국 간 인적 왕래 제한 ▲송금 보고 의무화 등의 조치가 해제됐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입국 금지자를 제외한 북한 국적 보유자가 입국 심사를 통과하면 일본에 입국할 수 있게 됐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간부는 북한을 왕래할 수 있게 됐다. 또 일본인에게 북한 여행을 자제하라는 ‘도항 자제 요청’도 해제됐다. 인도주의 목적의 북한 선박은 일본에 입항할 수 있게 됐다. 또 대북 송금에 대한 신고 의무는 현행 ‘300만엔(약 3000만원) 초과 시’에서 ‘3000만엔(약 3억원) 초과 시’로 완화됐다. 방북 시 신고 없이 반출할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은 10만엔에서 100만엔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사람·화물을 실어 나르는 만경봉 92호는 제재 해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조치로 북한이 즉각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가지만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대북 공조에 균열이 생겼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일본은 앞으로 북한의 납치문제 조사 결과를 보고 나머지 제재 조치의 해제 여부를 결정할 전망이다. 북한은 이날 서대하 위원장 등 특별조사위원회 명단을 공개하며 “전면적인 조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산케이신문은 “새달 초 미얀마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지역 포럼(ARF) 각료회의에서 리수용 북한 외무상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회담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북한이 1년 이내에 조사를 끝내겠다는 뜻을 북·일 국장급 회의에서 밝혔다”고 전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금관총 연구와 마립간기 신라 사회’를 주제로 하는 기조강연을 하는 데 이어 ▲ 일제강점기 금관총의 발견과 의의(김대환) ▲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명 대도의 보존처리(권윤미,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 신라 적석목곽묘 연구와 금관총(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 ▲ 이사지왕명 대도와 신라 고분 출토 문자 자료(이용현, 국립대구박물관) ▲ 이사지왕과 금관총의 주인공(김재홍, 국민대) 같은 발표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中 보란 듯… 통 크게 주고받은 北·日

    북한과 일본은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했다. 북한은 납치 문제 특별조사위원회에 일본이 만족할 만한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본은 즉시 일부 제재를 푸는 것으로 화답했다. 본격화된 북·일 간 협상의 열쇠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쥐고 있다. 3일 교도통신은 일본의 대북 제재 완화가 김 제1위원장 집권 후 처음으로 낸 본격적 외교 성과라고 분석했다. 자신의 권위 향상에 의한 체제 강화와 중국에 대한 견제, 그리고 북한에 대한 한·미·일의 연대에도 흠집을 낼 수 있는 일석다(多)조의 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그만큼 김 제1위원장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통 큰 결단을 했다. 4일 발족할 특별조사위원회는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로부터 모든 기관을 조사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특별조사위원회에는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인민무력부 등 당국자가 포함돼 있다. ▲납치 피해자 ▲행방불명자 ▲일본인 유골 문제 ▲잔류 일본인·일본인 배우자 등 4개 분과회를 설치하고 지방에 지부도 설치하는 대대적인 규모다. 경시청 등 일본 측 관계자도 전부 수용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 전향적인 태도를 언제 거둬들일지 알 수 없다. 납북 일본인 재조사를 약속했다 백지화한 전례(2008년)도 있다. 제재 해제로 사람과 물건과 돈을 들여보내 놓고 조사와 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북한에 ‘떼어먹기’를 당할 수도 있다고 한 외무성 간부가 말했다고 통신은 전한다. 일본에서 납치 문제의 상징인 요코다 메구미를 비롯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재조사가 끝나면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 종결’에 이용당했다고 비판받을 위험도 있다. 결국 아베 총리의 수완은 지금부터 시험대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베 총리의 방북 시점에 관심이 모아진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의 방북에 대해 “현재로서는 어떤 계획도 없다”고 밝혔지만 “북한이 1차 조사 결과를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 대해 양국이 인식을 공유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조사 결과 발표에 맞춰 아베 총리가 방북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北제재 일부 해제” 한·중 정상회담날…日, 대북 독자행보

    일본 정부가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관련, 북한과 약속한 제재 해제를 단행한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3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납치 문제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에 대해 “납치 문제를 비롯한 모든 일본인의 문제 해결을 위한 조사에 대해 국방위원회, 국가안전보위부라는 국가적인 의사 결정이 가능한 기관에서 전면에 나섰고, 전에 없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며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일본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일부 조치를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2일 밤 이하라 준이치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에게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북·일 국장급 협의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날 오전 관계각료회의를 연 뒤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라 일본은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 외에 독자적으로 취하던 제재 중 ▲인적 왕래 규제 ▲인도적 목적의 북한 선박 입항 금지 ▲대북 송금 보고 의무화를 해제할 방침이다. 그러나 북한이 요구한 만경봉92호의 입항, 북한과의 수출입은 금지를 유지했다. 북한의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서태하 국방위원회 안전담당 참사 겸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 맡으며, 30명 규모로 구성된다. 그러나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의 공조가 요구되는 시점에 일본이 공개 협상 한 달 만에 속전속결로 독자적 제재 해제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될 전망이다. 북측 수석대표인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는 이날 중국 서우두(首都)공항에서 “우리도 일본의 제재 해제에 상응하는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中·日 6개월 만에 외교국장급 협의… 정상회담 포석

    중국과 일본이 지난 1일 중국 베이징에서 외무성 국장급 협의를 했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2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북·일 협의를 위해 1일 베이징을 방문한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이날 쿵쉬안유(孔鉉佑) 중국 외교부 아시아 국장과 만찬을 겸한 협의를 했다. 중국과 일본이 외교부 국장 간 협의를 한 것은 지난해 12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처음이다. 외무성 관계자는 “약 2개월 전 취임한 쿵쉬안유 국장과의 첫 인사가 주요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와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냉각이 지속되고 있는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고 일본 언론들은 이날 보도했다. 특히 오는 11월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방안 등이 논의됐을 것으로 일본 언론들은 보고 있다. 또 납북 일본인에 대한 재조사와 이에 따른 일본의 대북 제재 해제 논의를 위한 북·일 국장급 협의,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등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기자회견서 괴성 지르며 ‘통곡’ 日 의원, 무슨 사연?

    기자회견서 괴성 지르며 ‘통곡’ 日 의원, 무슨 사연?

    외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일본의 한 지방의회 의원의 통곡이 화제가 되고 있다. 2일 미국 허핑턴포스트는 지난 1일(현지시간) 일본 효고현의 노노무라 류타로(47) 의원이 자신의 공금횡령 의혹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에서 기괴한 통곡으로 일관해 일본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노무라 류타로 의원은 지난 한 해 동안 무려 195차례의 온천 지역과 항구 등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정무비(국가 목적의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경비) 명목으로 300만 엔(한화 약 3000만원)의 혈세를 허비한 혐의로 기소됐다. 영상에는 기소 혐의를 해명하는 기자회견에 선 노노무라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기자회견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그가 “주민 한 분 한 분의 뜻을 받아들여…”라는 말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확실한 해명과 솔직한 인정으로 임해도 모자랄 판국에 초상집의 ‘곡소리’로 일관하는 그의 모습에 이를 지켜보는 기자회견장의 취재진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날 노노무라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195차례의) 출장은 확실히 다녀왔으며 현지 조사활동을 성실히 행했다”면서 “정무비를 함부로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출장 가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는 식의 무성의한 대답만 일삼았다. 이 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은 “정말 47살인가요? 창피하네요”, “우는 것도 연기 같아요”, “이상한 일본인이 늘고 있다”등의 질타하는 댓글을 달았다. 1일 유튜브에 게재된 노노무라 의원의 통곡 영상은 현재 170만 7000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사진·영상= KAAANcha youtube 손진호 기자 nasturu@seoul.co.kr
  • 북·일 납치조사 논의 앞서 ‘미사일 설전’

    납북 일본인에 대한 재조사와 이에 따른 일본의 대북 제재 해제 논의를 위해 1일 중국 베이징에서 국장급 협의를 한 일본과 북한이 납치 조사 논의에 앞서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 일본 측 수석대표인 이하라 준이치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이날 오전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회의 모두발언에서 “중요한 협의를 앞두고 지난달 29일 새벽 북측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면서 “일본 정부는 다시 한번 강력하게 항의하며 앞으로 탄도미사일 발사가 거듭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또한 “유엔안보리 결의, 일·조(북·일) 해양선언, 6자 회담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 대표인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 대사는 “조선전략군사령부의 전술 로켓 발사와 관련해 우리는 조선중앙통신에서 밝혔듯이 유엔안보리 미사일 결의를 인정하지 않고 배격한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면서 “이번 발사는 발사 전 과정을 과학적으로 계산하고 궤도와 목표 지역에 대한 조사를 빈틈없이 진행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본격적인 협의에 앞서 북·일 양측이 미사일 문제를 두고 공방을 벌였지만 이번 접촉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사일 문제를 제외하고는 북·일 양측 모두 지난 5월 이뤄진 합의를 확실하고 착실하게 이행하면서 실효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데 공감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소식통은 “일본은 이번 협의가 잘못될 경우 정치적 부담이 클 수 있어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면서 “추가적인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이 납북 일본인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 방침을 밝히고 이를 수행할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방안을 일본 측에 설명하면 일본은 이 방안을 검토한 뒤 대북 제재 해제 여부와 범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정부 ‘동북아 안보질서 파장’ 주시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이 1일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결정한 데 대해 우리 정부는 동북아시아 안보 질서의 ‘새로운 현상 변화’라는 점에서 파장을 주시하고 있다. 특히 과거 침략 역사를 부인하는 태도를 견지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부터 독도 영유권 주장, 고노 담화 검증까지 한반도를 향한 과거사 도발을 이어 가고 있는 아베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 총괄 기획의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기류가 짙다. 정부는 이날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전후 방위안보정책의 중대한 변경’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한반도 안보와 우리 국익에 대한 영향은 ‘불용’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이날 집단적 자위권 행사 사례로 제시한 낙도(외딴섬)에서의 불법 행위 대처 관련 내용은 ‘독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도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또 성명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 범위를 ‘미·일 안보 동맹의 틀’로 제한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후속 조치로 일본과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에 나선 미국을 향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미·일 방위협력지침은 일본 및 주변 지역에서의 유사시 자위대와 미군의 역할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진정으로 과거의 침략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전후 체제의 탈피를 시도하는 건 부당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우리 요청 없이 한반도에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건 한·미·일 3국 모두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데 이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주일 미군이 주한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는 현실과 유사시 한반도 내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의 군사적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심을 갖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으로 묶인 미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방위 확약 및 중·일 영토 분쟁 등 미·일 대 중국의 대결 구도 강화가 한반도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화 In&Out] ‘석굴암, 법정에 서다’ 낸 성낙주 소장

    [문화 In&Out] ‘석굴암, 법정에 서다’ 낸 성낙주 소장

    ‘석굴암’(국보 제24호)은 이름값만큼이나 한국 미술사에서 뜨거운 감자다. 원래 모습을 놓고 벌이는 ‘석굴암 원형 논쟁’이 그렇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섣부른 복원이 참사를 불렀고, 가뜩이나 모자란 관련 자료 탓에 혼란을 부추겨 왔다. 학자마다 해석이 다르고 같은 사료를 놓고도 의견이 엇갈린다. 1960년 정부의 복원공사는 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4년여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석굴암은 한국 미술사학의 우울한 초상에 다름 아니다. 751년 김대성이 창건해 774년 완성했다는 석굴암에는 애초 신라인의 미감(美感)과 수리, 토목, 기하학 등이 녹아 있었다. 국어교사이자 소설가, 재야사학자인 성낙주(60) 석굴암미학연구소장이 석굴암 연구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여년이다. 신라 천년고도인 경주의 토함산 중턱에 자리한 동아시아 최고의 불교조각을 놓고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수백번 산을 오르내리며 주지의 허락을 얻어 석굴암에서 잠을 청한 적도 여러 차례다. 그런데 어느새 그는 석굴암 논쟁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제도권 주류 학계의 학설과 막연한 통념을 신랄하게 반박하면서부터다. 그간 성 소장은 석굴암의 미학을 소설, 논문, 단행본으로 풀어내 왔다. 최근 만난 성 소장은 “석굴암에 얽힌 신비주의부터 과감하게 걷어 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건 그가 소장한 1910~1960년대의 희귀 사진 등 방대한 자료 때문이다. 2009년에는 석굴암과 관련된 근대사 100년을 풀어낸 사진전 ‘석굴암 백년의 빛’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달 말 그간의 주장을 모아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를 출간했다.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 얼굴을 찾아서’란 부제가 달렸다. 성 소장이 반박하는 주류 학계와 대중의 가장 큰 오류는 ‘일출 신화’. 신라인들이 동짓날 동해의 아침 햇살을 석굴 내로 수렴해 본존불의 백호에 비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암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돔 지붕 정면에 아침 햇살을 끌어들이려는 채광창이 있었고, 일제가 햇살을 막기 위해 주실 입구 쌍석주 위에 신사의 구조를 본떠 홍예석을 얹었기에 이를 철거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학계에 퍼져 있다. 그는 “대중에게 유포, 확산된 과정을 살펴보니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식민사관에 불과했다”고 일축했다. 일제의 태양신앙이 투영된 신비주의의 부산물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달을 숭상했던 신라의 향가에선 ‘달’과 관련된 표현이 주를 이루며 ‘월지’, ‘감산’, ‘토함산’ 등 달과 관련된 옛 지명이 나온다고 했다. 이 밖에 물 위에 지었다는 ‘샘물 위 축조설’, 본존불 앞 전각이 없는 개방구조라는 ‘개방구조설’, 석굴사원이 아닌 일반 건축물이란 ‘석조신전설’ 등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현실과 건축원리까지 무시한 견해들이 오히려 석굴암의 진면목을 가린다는 뜻이다. 1일은 옛 문화재관리국이 석굴암 보수공사를 마무리한 지 50년째 되는 날이다. 하지만 학계에선 아직 이렇다 할 학술대회조차 마련한 적이 없다. 가끔씩 석굴암 훼손과 위기론만 반복될 따름이다. “석굴암의 신비를 걷어 내고 맨 얼굴을 직시해야 한다”는 재야사학자의 목소리에 주류 학계는 적어도 한번쯤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아니다” 외교부, 일본 헌법해석 변경에 공식입장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아니다”라고 외교부가 공식 입장을 내왔다. 일본이 1일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해석을 변경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한반도 안보와 우리의 국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안은 우리의 요청 및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저희는 항상 일본의 집단자위권 관련 논의가 평화헌법의 기본 이념하에 과거사로부터 기인하는 주변국의 우려를 해소하면서 역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노 대변인은 ‘(집단자위권 행사로) 한반도 급변사태 발생 시 일본이 미국과 함께 개입할 수 있게 되느냐’는 질문에는 “집단자위권이라는 것이 남의 땅에 들어와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일본 측에서 각의 결정 내용을 발표하면 그 이후에 종합적으로 (정부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변인은 집단자위권 행사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에는 “집단자위권이라는 것은 동맹을 상정하는 것인데, 동맹은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할 때는 적용이 안 된다”며 “해당이 안 되는 사항”이라고 답했다. 이밖에 그는 납북 일본인 재조사 및 일본의 대북제재 해제와 관련한 북일 접촉에 대해서는 “북한 및 북핵 문제에 있어 한미일 3국 공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3국 공히 인정하고 있다”며 “그런 맥락 하에서 지켜보겠다는 입장은 계속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안부 소녀상 말뚝 테러’ 일본인 지명수배

    법원이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한 혐의로 기소된 일본 우익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49)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동안 열린 재판에 수차례 나오지 않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안호봉 부장판사는 30일 스즈키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검찰에 지명수배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재판에 임하는 태도에 비춰 보면 자발적으로 출석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설명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아니다” 외교부, 일본 헌법해석 변경에 공식입장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일본 집단적 자위권, 전가의 보도 아니다”라고 외교부가 공식 입장을 내왔다. 일본이 1일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해석을 변경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한반도 안보와 우리의 국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안은 우리의 요청 및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저희는 항상 일본의 집단자위권 관련 논의가 평화헌법의 기본 이념하에 과거사로부터 기인하는 주변국의 우려를 해소하면서 역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노 대변인은 ‘(집단자위권 행사로) 한반도 급변사태 발생 시 일본이 미국과 함께 개입할 수 있게 되느냐’는 질문에는 “집단자위권이라는 것이 남의 땅에 들어와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일본 측에서 각의 결정 내용을 발표하면 그 이후에 종합적으로 (정부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변인은 집단자위권 행사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에는 “집단자위권이라는 것은 동맹을 상정하는 것인데, 동맹은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할 때는 적용이 안 된다”며 “해당이 안 되는 사항”이라고 답했다. 이밖에 그는 납북 일본인 재조사 및 일본의 대북제재 해제와 관련한 북일 접촉에 대해서는 “북한 및 북핵 문제에 있어 한미일 3국 공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3국 공히 인정하고 있다”며 “그런 맥락 하에서 지켜보겠다는 입장은 계속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일본인 입맛 사로잡은 떡볶이·부침개

    일본인 입맛 사로잡은 떡볶이·부침개

    “떡볶이, 지지미(부침개) 정말 맛있어요!” 일본의 최대 유통그룹 이온에서 한국 식품을 소개하는 ‘한국 페어’가 열렸다.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이온그룹 16개 계열사 전국 약 3500개 점포에서 동시 개최된 이번 행사에서는 한국에서 직수입한 참외·애호박 등 농산물을 비롯해 김치, 젓갈류, 율무차 등 총 75개 품목의 한국산 식품이 일본 소비자에게 선보였다. 특히 지난해 말 문을 열어 하루 10만명이 찾는 것으로 알려진 지바현의 이온 마쿠하리 신도심점에서는 한국문화 체험마당, 한국요리교실, 막걸리 칵테일 쇼 등 다양한 이벤트도 함께 진행됐다. 이온 관계자는 “한국의 길거리 음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한 포장마차가 특히 인기가 많다. 문을 연 오전 10시부터 고객들이 몰렸다”고 전했다. 이번 행사는 2011년 이후 3년 만에 개최되는 것이라 의미가 크다. 이온은 해외상품 판촉전인 ‘월드페스타’의 일환으로 한국 식품 페어를 정기적으로 열어 왔는데, 2012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관계가 급랭하자 행사가 중단됐다. 행사를 주관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배용호 도쿄 지사장은 “그동안 한·일관계 악화로 인해 일본 유통업체들이 한국식품 취급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업계를 선도하는 이온그룹에서 한국 페어를 개최함에 따라 한국식품 수요가 다시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日대지진 이재민 “세월호 아픔 함께” ‘진혼’ ‘기도’… 한글 쓴 위로의 인형

    ‘우리들은 당장 아무것도 도울 수 없지만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을 이웃 나라에서 함께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국가적 재앙’ 수준의 참사를 겪은 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한 ‘위로의 선물’을 한국에 보냈다. 선물은 3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일본 도호쿠(東北) 지역의 이재민들이 직접 만든 일본 전통 인형 300여개. 한땀 한땀 정성스레 완성된 휴대전화 액세서리 크기의 인형에는 한글과 한자로 ‘진혼’(鎭魂), ‘기도’(祈禱), ‘기원’(祈願) 등 세 단어가 적힌 메모지와 함께 포장돼 있다. 이재민들에게 인형 제작을 제안한 일본인 영화감독 시이 유키코는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내는 인형이라서 이재민들이 특별히 한국어로 일일이 메시지를 적었다”며 “이재민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했을 때 받은 위로를 이번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동일본 대지진은 2011년 3월 11일 일본 미야기현 산리쿠 앞바다에서 발생한 규모 9.0의 강력한 지진으로 사망자만 1만 5000여 명, 실종자는 26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이재민들 역시 3년째 임시 주택에 거주하고 있어 완전히 일상생활로 복귀하지 못한 상태다. 일반적인 성금이 아닌 인형을 만들어 보낸 것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온정’인 셈이다. 인형을 전달 받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조만간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직접 전달할 예정이라고 29일 밝혔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자동차 800대 카풀해 7600㎞ 응원 온 3000명 칠레팬 열정만은 ‘최강’

    자동차 800대 카풀해 7600㎞ 응원 온 3000명 칠레팬 열정만은 ‘최강’

    압도적인 브라질 홈 팬들의 야유에 기죽지 않고 “발모스(가자) 칠레!”를 외친 원정 팬들의 함성을 들으셨는지. 칠레대표팀이 29일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주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브라질월드컵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분패했다. 원정에서 한 번도 브라질을 이기지 못해 독을 품은 칠레 선수들은 연장까지 120분 동안 145.8㎞의 거리를 뛰어다녀 브라질(136.3㎞)을 압도했다. 무릎이 좋지 않아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87분을 뛴 아르투로 비달은 “우리는 영혼을 경기장에 남겨뒀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어디든 공이 가는 곳에 칠레 선수가 한 명 더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칠레가 세계 최강 브라질에 전혀 주눅들지 않는 경기력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글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와’ 성원한 팬들의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건설노동자인 윌슨 히메네즈(42)는 7명과 함께 미니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주일을 달려와 브라질에 도착했다. 10개월 전부터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고 응해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다. 이렇게 3000여 칠레 팬들이 800여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7600㎞를 달려왔다. 원래는 6000㎞ 코스를 짰는데 안데스 산맥에 눈보라가 덮치는 바람에 북상, 볼리비아쪽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쪽 국경을 통과하는 바람에 길어졌다. 그렇게 가까스로 14일 호주와의 조별리그 1차전이 열리기 전 쿠이아바에 도착했다. 브라질의 몇몇 지방정부는 교통헬기를 띄워 지리에 어두운 이들 행렬을 안내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교통경찰은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라며 이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물론 국립공원의 야영장을 개방해 이들이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한 아르헨티나 지방정부도 있기는 했다. 캐나다 일간 ‘글로브 앤드 메일’ 기자가 만났을 때 히메네즈 일행은 리우데자네이루 외곽의 농장에서 캠핑 중이었다. 모두 해외여행이 처음이었으며 1인당 경비는 2000달러(약 210만원). 돈이 떨어진 친구들은 다른 차를 구해 돌아가고 남은 이들은 돈이 떨어질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멕시코와 콜롬비아인 수만명이 비행기로 날아와 호텔에 숙박하며 남미 중산층의 성장을 방증하는 것과 달리 칠레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인들은 블루칼라들로 낡은 차 안에서 먹고 잠을 자며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상당수가 입장권 없이 무작정 왔다. 지난 19일 스페인을 격침시켰을 때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주경기장 미디어센터에 난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던 100여명을 지휘한 이는 현직 교사였다. 그들은 단지 지구촌 최대의 축구잔치를 가급적 선수들이 뛰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런 짓을 벌였다고 털어놓았다. 원정 여행을 기획한 카를로스 가에테(24)는 스페인전이 열린 마라카낭 경기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서성대던 일을 돌아보며 “일본인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면서 ‘가만, 왜 쟤들은 들어가고 우리는 이러고 있지’ 생각하는데 마음이 저려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함께 칠레는 브라질월드컵 일정을 아름답게 마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한양도성은 어떻게 훼철(毁撤)됐나 한양도성은 일제 히로히토 황태자의 1907년 10월 서울 방문을 계기로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다. 천황이 될 지엄한 몸이 보호국의 성문(숭례문) 아래를 지날 수 없다며 헐어냈다는 설이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히로히토를 보호한다고 호들갑을 피웠는데 숭례문 밖 남지(南池)를 전염병의 온상으로 몰아 메워 버렸다. 고니가 유유히 노닐던 연못은 이때 사라졌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서대문)을 다 헐고자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대포를 쏴서 파괴하겠다고 하자 조선거류민단 단장 나카이 기타로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전승 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식민 통치가 무르익었던 1925년에는 히로히토 결혼 기념 행사를 치를 장소를 만든다면서 흥인지문 양쪽 성곽과 청계천 수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훈련도감과 하도감을 허물어 땅에 파묻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으로 옷을 갈아입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다. 이간수문과 성곽은 복원됐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들춰 보면 진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등장한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사람들이 붐비고 거마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 매양 전차와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니…문루의 좌우 성첩(성가퀴·城堞)을 각각 8칸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훼철은 일제의 강압이 아니라 우리 정책인 것처럼 적혀 있다. 사실이라면 성곽 철거는 백성의 통행 불편과 사고 예방 차원에서 각부 대신이 연명으로 건의해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시행됐다고 볼 수 있지만 여느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식민 시기에 집필, 편찬된 고종실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히로히토의 방한과 도성 훼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후인 ‘1907년 6월 24일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가퀴와 성벽 일부를 철거토록 통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맡을 ‘성벽처리위원회’가 7월 30일 내려진 ‘내각령 제1호’에 의해 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황태자’를 쓴 송우혜 작가는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서 “성벽이 실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황태자가 서울을 다녀간 지 5개월이 지난 뒤였다”고 주장했다. 실제 성곽 철거 기사는 황성신문 1908년 3월 10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2일자에 각각 실렸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 유발용으로 일본 황태자 원인설을 조작,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① 한양도성 낙산 구간 흥인지문~혜화문 가는 길의 서울디자인지원센터에 자리 잡은 한양도성박물관의 전경. ②~④는 내부 전시공간. 서울시는 2015년까지 한양도성 성곽을 복원해 끊어진 전 구간을 연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등 한양도성 복원 종합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 비록 히로히토 방한 시기에 성곽이 손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원회가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부인 못 한다. 성벽처리위원회는 민간 전문가 조직이 아니라 정부의 차관급 인사로 구성됐는데 당시 각 부 차관 전원이 일본인 관리였다. 이들은 간선도로변의 성벽을 철거키로 하면서 교통 방해를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다. 저의는 딴 데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도쿄나 교토와 비교할 수 없는 한양도성의 위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성벽처리’라는 사무적인 기구 명칭에서도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느껴진다. 쭉정이가 머리 드는 법이고, 어사는 가어사(假御使)가 더 무섭다고 했다. 백성을 위한다면서 전찻길을 따로 내자고 건의한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성벽처리위원회 설치를 명하는 내각령 1호를 발동한 이완용은 이근택과 함께 우리에게 ‘을사오적’으로 더 익숙한 매국노들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학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이지용은 내부대신, 권중현은 농상공부 대신이었다. 백성을 팔아 일제의 환심을 사려는 사리사욕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벽처리였다면 우연치곤 너무 고약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10년 병탄에 앞서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도성의 해체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들은 태조가 행했던 나라 세우기의 역순으로 와해를 꾀했다. 도성 성곽 해체가 식민지 건설의 첫 단추라고 본 것이다. 일제가 성곽을 거느린 위풍당당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문루만 덩그러니 남은 도심의 외딴섬으로 만든 까닭이다. ●도성 성곽의 해체는 국권 상실의 다른 말 도성 성곽의 해체는 왕조의 멸망과 외세의 지배를 백성에게 피부로 느끼게 했다. 무장해제된 도성문의 초라한 행색이 우편엽서로 만들어져 전국에 뿌려졌고 전국 각 읍성의 성곽도 뒤이어 철거됐다. 오백년 동안 익숙했던 도성 출입 시스템이 바뀌면서 생활상도 급변했다. 매일 새벽 4시와 밤 10시를 기해 도성문을 여닫으면서 통행금지 해제(인정·人定)와 통행금지(파루·罷漏)를 알리던 보신각 종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성 출입과 하루의 시작 및 끝을 알리던 전통적인 통제 장치가 사라지면서 일상이 무너졌다. 성곽이 없는 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지엄한 권위도 힘을 잃었다. 도성 해체는 국권 상실을 뜻했다. 한양도성 성곽의 전체 둘레는 모두 18.627㎞이지만 남아 있는 산악 지역 성벽을 제외한 도심 구간 5.471㎞는 멸실됐다. 12.4㎞만 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으로 지정돼 있다. 훼손이 가장 심한 구간은 돈의문~숭례문~흥인지문 구간이다. 일제와 친일파는 처음 숭례문 양쪽 성곽 8칸을 허물어 전찻길을 낸다고 했다가 야금야금 다 허물었다. 남산~숭례문 구간도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지형을 변형시켰다. 최근 회현지구 정비가 마무리돼 남산 자락 성곽이 위용을 드러냈고 옛 조선신궁터 복원이 진행 중인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창의문(자하문)~백악(북악)~숙정문~혜화문 구간은 대부분 복원됐지만 서울과학고와 경신고 사이 일부 구간은 성벽이 담장이나 축대로 쓰이는 형편이다. 숭례문은 화재 소실을 계기로 성첩 일부를 복원했지만 흉내에 그쳤다. 소덕문(서소문)~돈의문 구간에는 잔존 유구가 지하에 묻혀 있다. 정동구간 중 주한 러시아 대사관과 창덕여중 등에 성곽이 포함돼 복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직터널에 이르는 돈의문~창의문 구간에는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 흥인지문~광희문 구간은 운동장을 헐고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복원이 이뤄졌다. 광희문~남소문 구간 중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 지역 성곽은 대부분이 주택가에 포함돼 복원까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 구간은 박정희 정권 시절 타워호텔(반얀트리)과 자유센터를 짓도록 허가를 내 주면서 망가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알려진 김수근은 두 건물을 설계하면서 한양도성 성곽을 완전히 해체했으며 그 돌로 도로변 석축을 쌓는 만용을 부렸다. 일제에 못지않은 훼철을 저질렀다. 문루가 희생된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은 큰 도로가 자리 잡아 원상회복이 어렵다. 청계천의 수문인 오간수문터는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소외돼 발굴 상태로 방치돼 있다. 혜화문과 광희문도 도로에 자리를 빼앗겨 한옆으로 밀려나 있다. 도시화에 밀려 엉거주춤한 상태인 한양도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보수와 복원 그리고 재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무너진 성곽을 원재료로 다시 쌓는다면 보수이며 발굴 등을 통해 드러난 기저부에 새 돌을 다시 쌓아 본래 모습으로 되돌린다면 복원이 될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거나 없어진 부분이 기록과 고증에 의해 문화재적 가치를 되찾으면 재건이다. 홀랑 타 버려 다시 세운 숭례문을 재건했듯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의 재건 방안을 찾아야 한다. 자리를 옮김으로써 역사 가치를 상실한 광희문과 혜화문은 원위치 이축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임기 내 청계천 복원 사업을 끝내고자 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서 버림받은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에서 본디 자리로 돌아오고 오간수문도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처럼 순성길 이어져야 미국 보스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은 ‘프리덤 트레일’에 담겨 있다. 건국과 독립전쟁 유적지로 가는 4㎞의 길 위에 붉은색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줄만 따라가면 사적지를 만날 수 있는데 트레일은 보스턴 국립역사공원의 일부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은 이어지지 않는다. 토막 나 있고, 흔적도 없다. 도성 길라잡이의 안내가 없다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한양도성 복원과 재건은 서울의 정체성 회복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 해 1000만명이 넘는 서울 방문 외국 관광객들은 빌딩숲과 아파트단지,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가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한강이나 남산을 서울의 랜드마크로 지목하는 사람도 많다.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2000년 고도 서울의 정체성 확립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역사문화도시 서울의 정체성은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에서 흘러내려 사대문을 울타리처럼 감싼 한양도성 성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가파른 고갯길과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한옥 처마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내사산과 그에 겹쳐진 고색창연한 성곽이 곧 서울이다. 내사산과 도성 성곽의 어울림이 서울을 상징하는 도시 경관의 결정체다. 한양도성 순성이 서울 관광의 알갱이라는 사실을 웬만한 외국인은 다 알고 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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