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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선 청춘들 … 날선 조국비하

    탈선 청춘들 … 날선 조국비하

    청춘들의 조난신호(SOS)일까, 극단적 사고의 방종일까, 아니면 ‘뭘 해도 안 된다’는 자기 비하일까. ‘헬조선’, ‘망한민국’, ‘지옥불반도’ 등 한국과 한민족을 혐오·비하하는 신조어가 2030세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글마다 꼬리표처럼 붙기 시작한 ‘헬조선’은 ‘지옥(Hell) 같은 한국’이라는 의미다. 비슷한 의미로 ‘망한민국’(이미 망한 대한민국), ‘개한민국’(부정적 의미의 ‘개’와 ‘대한민국’의 합성어), ‘지옥불반도·불지옥반도’(지옥불 같은 한반도) 등의 표현도 쓰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해 부르던 ‘조센징’도 부활했다. 서울신문이 29일 트위터 분석 사이트인 ‘톱시’(http://topsy.com)로 조사한 결과 지난 한 달 동안 ‘헬조선’이 등장한 트윗은 4700여건에 달했다. ‘망한민국’은 2533건, ‘지옥불반도’는 1681건, ‘개한민국’은 1288건이 노출됐다. ‘헬조선’이라는 사이트도 최근 개설됐다. 이 사이트에는 청년 세대가 처한 각박한 현실이 주로 언급돼 있다. 과중한 근로시간, 수능 일변도의 주입교육, 열악한 삶의 질 등 게시판마다 우울한 자기 처지와 국가와 사회를 향한 분노, 적개심을 드러낸 글이 적지 않다. 페이스북에 개설된 ‘망해 가는 대한민국’이라는 페이지는 팔로어가 2만 4000명이 넘는다. 이곳 역시 공공연히 한국을 부정하는 글들로 넘친다. 이렇게 극단적인 비하 표현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일상 용어에도 자주 등장한다. 대기업 3년차 직장인 윤모(30)씨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런 표현들이 자주 오르내린다고 말한다. 윤씨는 “경직되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직장 문화 등을 성토하다 보면 속이 터질 것 같다”며 “우리 또래끼리는 이 나라가 참 싫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전했다. 그의 목표는 자유로운 사내 문화를 가진 미국 현지 기업 취직이다. 윤씨는 여름휴가를 핑계로 간 실리콘밸리에서 현지 기업 취업 면접을 보기도 했다. ‘헬조선’과 ‘망한민국’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구조에 대한 적대감은 “한국인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국민성 비하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다. 특히 지난해 세월호 참사 등 각종 재난과 취업난 등 사회적 병폐와 불안, 피로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원 김모(29)씨는 “취업준비생 시절부터 30회 이상 낙방하며 깊은 좌절감을 맛봤다. 세월호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서 절감한 정부의 무능을 보면 차라리 외국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탈조선’도 떠오르는 신조어다. ‘지옥 같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이상향으로 가고 싶다’는 정서다. 전통적인 이민 선택지인 미국·캐나다뿐 아니라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복지국가 이민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2013년 미국에 어학연수를 간 조모(27·여)씨와 2011년 영국에 유학 간 정모(32)씨 모두 현지에 눌러앉았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는 ‘지잡대’(지방대를 낮춰 부르는 말) 출신 서러움에 인턴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며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옳다’ ‘그르다’는 식의 규범적 접근을 하기보다는 갈수록 계층·세대별 불평등이 심해지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들이 보내는 일종의 조난신호라고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젊은이들의 국가 비하적 표현 확산이 기득권을 쥔 기성세대에 대한 비난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헬조선이 가리키는 대상은 국가 전반이 아니라 지금의 각박한 현실을 만든 기성세대”라고 밝혔다. ‘헬조선’ 현상이 사회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 대신 혐오·비하에 머무는 현 2030세대의 한계를 보여 준다는 지적도 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동적인 환경에서 자란 현재의 2030세대들은 이전의 386세대만큼 사회변혁의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다”며 “젊은 세대들이 좀 더 희망을 갖고 우리 사회에서 미래 비전을 발굴하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상의 언어 표현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사회구조 속의 좌절감과 울분이 사적 폭력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포토] 신동주·동빈 일본인 모친 방한

    [포토] 신동주·동빈 일본인 모친 방한

    롯데그룹이 그룹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형제의 난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30일 신격호 총괄회장의 부인이자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어머니인 시게미쓰 하츠코 씨가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재일조선인 그들의 삶과 詩

    재일조선인 그들의 삶과 詩

    ‘세상이 넓다지만/나이 먹은 나에게는/발붙일 곳이 없네// 북으로 가면 <<귀포>>의 딱지/남으로 가면 <<똥포>>란 부름/이래서야 내 땅인들 정이 가겠나/차마 왜땅귀신은 될 수 없고//어디로 가야 하나//정말 몰랐네/고향을 등진 죄가/이렇게 무거울 줄은//삶의 어려움//이국의 달빛 아래/이 밤도 그림자 하나/유령같이/발붙일 곳을 찾아 얼른거린다’(정화흠의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 세금으로 사는/아베 총리/당신은 총리가 되자 바람으로/한 짓이 도대체 무엇이요/우리 학교 탄압에 이골이 나/차별의 첫 시책부터 폈으니//(중략) 차라리/미납자혐의로 옥에 갇히어/내 바친 세금으로/먹고 잔다면 참으로 시원하겠다’(김정수의 ‘세금 4만 8천엔’) 오늘날 재일조선인의 삶과 의식을 보여주는 ‘2000년대 재일조선인 시선집’(경진출판)이 나왔다. 시집을 엮은 김형규 아주대 다산학부대학 특임교수는 “정치적 견해나 이념이 강하게 드러나는 시보다 재일조선인의 역사 감각과 그들이 겪는 일상적 경험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품들을 선별했다”고 소개했다. 시선집에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시인 19명의 시가 수록됐다. 재일조선인은 대부분 일제 식민지라는 민족사의 상처 속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6000여명이 무참히 학살되는 등 식민지 시기 내내 생존의 위협 속에서 지냈고, 해방 후에는 외국인으로서의 차별까지 덧쓴 채 굴욕과 억압의 삶을 살았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외국인으로 취급당하며 여러 차별을 받고 있다. 의무 교육 혜택에서 제외되고 공무원이 될 수 없으며, 선거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과 일본의 정치적 대립 관계가 심할 때는 아직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모국에서는 언어나 문화 차이 때문에 반(半)일본인이라 불리며 이방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도 남북한에서도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기존 국내 자료집에는 해방 이후 작품들은 많이 수록돼 있지만 오늘날 재일조선인의 삶을 보여주는 시들은 드물다”며 “최근 시들을 보면 지금도 그들의 삶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욘사마 장가가는 날, 먼발치서라도… 日팬 장사진

    욘사마 장가가는 날, 먼발치서라도… 日팬 장사진

    ‘욘사마’ 배용준(43)과 배우 박수진(30)이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배용준과 박수진은 이날 오후 6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애스톤하우스에서 가족과 지인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웨딩마치를 울렸다. 청첩장과 명단을 대조해 초대받지 않은 취재진과 팬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한 비공개 결혼식으로, 식장으로 통하는 길목부터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예식이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 주변은 ‘욘사마’를 보기 위해 찾아온 일본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일본 팬 200여명은 오전부터 식장 주변과 워커힐 호텔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일부 팬들은 배용준의 성북구 자택 앞을 찾아 그를 배웅하기도 했다. 배용준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워커힐 호텔을 예약한 팬들도 상당수였고 아예 2박 3일 일정으로 한 여행사 패키지 상품까지 등장했다. 팬들 중 대다수는 40~60대 일본인 여성이었고 중국에서 온 팬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더운 날씨 속에 양산을 들고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하객으로 보이는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NHK, TBS, 후지 TV, 아사히 TV 등 일본 매체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날 오후 1시쯤 배용준은 개인 차량을 통해 식장으로 들어가면서 팬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섰으나 별도의 인사는 없었다. 대신 배용준은 팬들과 취재진에게 인근 한식당 식권을 돌려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두 사람은 28일 국내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배용준의 성북동 자택에 신접살림을 차릴 것으로 알려졌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한류 거품에 더이상 기대면 안 돼…양국 깊게 아는 지식인 양성 힘써야”

    [새로운 50년을 열자] “한류 거품에 더이상 기대면 안 돼…양국 깊게 아는 지식인 양성 힘써야”

    “한국어를 ‘좀 아는’ 외국인은 많아졌지만 정작 한국 사회와 문화를 깊이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일본인 사라타니 유미(37) 명지전문대 일본어과 초빙교수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익힐 공간과 기회가 제한돼 있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와서 초급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는 대학 어학당 등이 있지만 심화 한국어 혹은 ‘한국학’을 가르치는 곳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는 “제가 한국에서 만난 일본의 젊은 대학생들은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어 하지만 한국의 4년제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다”며 “4년제는 시간, 학비가 부담스럽고 대학에 간다 해도 ‘한국학’ 전공이 드물어 ‘국어국문학’을 배워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일본 나라현 출신인 사라타니 교수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나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경북 경주를 방문한 뒤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 때 한국외대로 교환학생을 오고 2002년부터는 한국에 정착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다. 사라타니 교수는 한·일 양국이 더이상 ‘욘사마’로 대표되는 한류 거품에 기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매 학기 일본어과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 명동에 나가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말도 걸어 보고 앙케이트도 하는 수업을 진행하곤 했는데 지난해부터 일본인들을 찾기가 어렵다”며 “그냥 수능 점수에 맞춰 일본어를 선택하는 등 한국 내 일본어과의 인기도 이제는 시들해졌다”고 아쉬워했다. 이런 고민들은 사라타니 교수를 한·일 교류회인 ‘가케하시’로 이끌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매주 수요일 가케하시에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한국을 찾은 20여명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진로 상담도 돕는 역할을 한다. 그는 “지금 한국에 와 있는 20대 일본 학생들은 부모의 반대, 차별적 시각 등을 무릅쓰고 온 사람들인 만큼 앞으로 양국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라며 “이들이 한국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초급 한국어를 아는 일본인들을 많이 양성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국을 깊게 아는 지식인을 만드는 데 힘써야 산적해 있는 양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앞으로 두 나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 사진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친구 사귀고 정보 얻고… 양국 잇는 ‘민간 문화사절단’

    [새로운 50년을 열자] 친구 사귀고 정보 얻고… 양국 잇는 ‘민간 문화사절단’

    한·일 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후 냉탕과 온탕을 끊임없이 오갔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시시때때로 마찰을 빚었고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의 전향적 태도가 나올 때면 양국 관계에 순풍이 불기도 했다. 봉합되기 쉽지 않은 한·일 양국의 역사, 정치, 외교적 분쟁 사이에서도 두 나라를 잇는 역할을 해 온 것은 민간단체들이었다. ‘가교’라는 의미를 가진 한·일 문화교류회 ‘가케하시’ 역시 지난 18년간 명맥을 유지하면서 한·일 청년들을 이어 주는 문화적 다리 역할을 해 왔다. 1997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자리 잡은 가케하시는 초기에는 인근의 연세대, 홍익대, 서강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일본인들이 찾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어 교류를 넘어 일본 관광객들이 찾아와 관광 정보를 얻고 한국 학생들이 일본 워킹홀리데이나 유학 상담까지 하는 등 한·일 양국의 정보 창구로 바뀌었다. 가케하시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다양한 주제로 운영된다. 월요일에는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참여해 여성과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글로벌 여자회’가 열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각각 중국어 교류회, 일본어 교류회가 열린다. 목요일에는 한국어 교류회가 마련되고 금요일은 ‘문화 교류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이벤트가 진행된다. 토요일에는 ‘모모타로’라는 한·일 교류회가 열리고 일요일에는 한·중·일 3국 교류회가 마련된다. 한·일 양국 교류를 표방하는 가케하시의 문은 이 때문에 365일 열려 있다. 고국에 가지 못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도 문을 닫지 않고 함께 명절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나 핼러윈데이에도 모여 파티를 연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가케하시가 18년 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누가 시키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자발적인 ‘재능 기부’에 있다. 대구가톨릭대의 한 외국인 교수는 가케하시에서 한국인,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러스트 만화 특강을 열고 유명 호텔 셰프 출신인 일본인 조리학과 교수는 가케하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일본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 한국에 온 각국 학생들도 가케하시에서 프로그램을 맡아 ‘문화 리더’ 역할을 체험하고 있다. 그동안 가케하시에서 맺은 인연은 한·일 양국의 민간 외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정영 가케하시 매니저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여행갈 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연락을 주고받아 일본인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일본인이 한국에 올 때 안내를 맡아 주는 등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진다”며 “과거 가케하시 교류회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이 결혼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가케하시를 거쳐 간 일본 사람들이 만든 문화교류회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가케하시가 양국 청년들의 취업과도 연계될 정도다. 하 매니저는 “가케하시에서 공부했던 한 일본인 학생이 일본 리크루트 회사에 입사하면서 해당 회사와 가케하시를 연결해 줬다”며 “일본에 취업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가케하시에 대한 입소문이 커지면서 일본, 대만의 언론 매체도 이를 소개했다. 나이나 국적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은 다양하다. 첫출발 때는 한국인과 일본인 두 나라에만 문호가 개방됐지만 지금은 대만, 중국, 홍콩, 프랑스 사람들도 가케하시를 찾는다. 연령도 20~70대로 폭넓다. 일본인 아베 마사코(70·여)는 일년에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케하시를 일부러 찾아 젊은 한국인, 일본인 학생들과 대화를 즐긴다. 회사원 김형희(43·여)씨는 “대학 때 일본어를 전공하고 2년 동안 일본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졸업 뒤에는 일본어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며 “일본어를 더 잊어버리기 전에 일본어 공부도 하고 일본인 친구도 만나고 싶어 가케하시의 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교환학생으로 온 일본인 사카자키 마나미(21·여)는 “다른 나라에 와서 친구도 없고 어려움도 많은데 가케하시에 오면 한국어도 늘지만 친구를 만나고 어려움이나 고민도 해결할 수 있어서 좋다”며 “지금 받고 있는 도움을 나중에 나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다”고 밝혔다. 김현수 가케하시 사장은 “가케하시는 민간에서 운영하다 보니 만년 적자에 허덕여 지난 18년 동안 운영 주체가 5차례나 바뀌었다”면서도 “한·일 관계의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이 많지만 민간 단체가 해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케하시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재능 기부하는 사람들 모두 마음이 움직여서 일을 하는 것”이라며 “가케하시에 모인 사람들이야말로 한·일 양국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며 지금의 작은 움직임이 나중에 한·일 관계의 훈풍이 되리라 믿는다”고 전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한국과 일본이 함께 여는 신 동북아시대 (7회)미래를 위해 뛰는 사람들-일본에선

    [새로운 50년을 열자] 한국과 일본이 함께 여는 신 동북아시대 (7회)미래를 위해 뛰는 사람들-일본에선

    한·일 국교 수립 50주년을 맞은 가운데 한류도 식고 일본 내 반한 감정도 어느 때보다 높지만 개인과 개인, 민간과 민간을 이어 주는 노력에는 쉼이 없다. 정부 간 공식 관계가 냉랭하고 어색한 상황에서도 두 나라 국민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을 만났다. ■통역사법인 ‘한·중·일에서 세계로’ 우시오 게이코 대표 “마음 잇는 통역으로 한·일 화해 도움 주고파”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직후인 4월 초 서울 홍대 앞에서 중년 여성 10여명이 일주일 남짓 지진 피해 지역 주민에게 보내는 한국 젊은이들의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전하는 ‘힘내라’ ‘용기를 잃지 말아 달라’는 격려 메시지들은 이들의 손을 거쳐 일본어로 번역됐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 복주머니 800여개에 메시지를 담아 지진 피해가 극심했던 미야기현 게센누마 지역 초·중·고교 교사와 주민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지역 교사와 주민의 감사 답장이 이들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번역돼 한국 젊은이들에게 다시 전달됐다. 게센누마 사람들은 답장을 통해 “한국인들의 격려와 관심이 큰 힘이 됐다. 감사한다”는 마음을 전해 왔다. 메시지를 통해 피해 지역 주민과 한국 젊은이들을 연결해 준 이들은 일본의 비영리법인(NPO) ‘한·중·일에서 세계로’의 우시오 게이코(66) 대표와 그 회원들이었다. 우시오 대표는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응원한다는 사실에 피해 지역 주민들이 감격하고 있다”고 26일 전했다. 그는 1년에 몇 차례씩 지진 피해 지역을 다니며 한국인들의 격려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30여년 경력의 일본 내 대표적인 한국어 통역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의원 시절 일본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고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과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근태 전 의원, 소설가 김훈, 가수 조영남 등의 방일 때도 통역을 했다. 일본 외무성 등 정부 기관이 가장 신뢰하는 베테랑 통역사로 손꼽힌다. 그는 2013년부터 일본 에도시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던 조선통신사를 젊은이들이 재현하는 ‘21세기 유스 조선통신사’ 프로그램을 주관하고 있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옛 조선통신사 사절들이 걷던 길을 걸으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협력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도록 한다는 의도에서다. 올해는 일본 대학생 50여명이 오는 9월 5일부터 열흘 동안 경북 문경새재를 떠나 영천, 경주, 울산을 거쳐 부산까지 조선통신사들이 한양(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한국 내 주요 경로를 밟는다. 일본 학생들의 순례가 끝난 직후인 그달 19일부터는 한국 대학생 50여명이 오사카, 교토에서 시작해 ‘조선인가도’(街道), 시즈오카 및 삿타 고개, 하코네 옛길 등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여정을 따라 걷게 된다. 우시오 대표는 “젊은이들이 직접 보고 듣고 부딪치면서 오해와 벽을 허물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행사가 끝난 뒤 체험을 영상물과 사진, 그림 등으로 남겨 놓고 이를 유튜브 등을 통해 더 많은 또래들과 나누는 것을 보고 힘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은 상황에서 한국에 직접 가 보고 한국인들을 만난 뒤 “(한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일본 젊은이들을 예상외로 많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보람이고 기쁨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혜자라는 이름을 일본 이름보다 먼저 얻은 그의 고향은 서울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9년 태어나 한국전쟁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고교 1학년 때인 1965년 한·일 국교 수립을 계기로 부친이 있던 서울로 돌아왔다. 서강대 국문과를 나와 일본에서 통역사 일을 하면서 언어를 통한 한·일 협력, 통역을 통한 동북아 화해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2010년 지금의 NPO를 조직했다. ‘한·중·일에서 세계로’는 그와 같은 통역사 40여명의 모임이다. “통역은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 나라 간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이라며 “규모는 작지만 이런 생각으로 각자의 경험을 한·일의 화해, 협력에 계속 활용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한국 서적 전문 북카페 연 김승복 ‘쿠온’ 출판사 대표 “문인·독자들 교류하는 한·일 사랑방 만들 것” 일본 도쿄의 서점가 진보초에 지난 9일 한국 서적 전문 북카페가 문을 열었다. 일본 유일의 한국 서적 전문 출판사 ‘쿠온’의 김승복(46) 대표가 ‘책거리’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 고서점과 각종 전문 서점 등이 있어 도쿄의 명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점 거리인 진보초의 중심가에 입성한 책거리에 들어서면 쿠온이 발간한 한국 작가들의 일본어 번역본과 각종 한국 관련 서적, 한국 신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서적과 한국 작품의 번역서들을 보는 곳만이 아니라 한·일 두 나라의 문인과 독자, 예술인, 인문학자들과 팬들이 모이는 사랑방, 교류 중심지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김 대표는 26일 “북카페와 출판사를 거점으로 작가와의 대화나 한국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 일본 독자 초청 감상회 등 한국 문학과 문화에 대한 행사도 계속 열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20일 와세다대 도야마캠퍼스에서 열린 ‘한·일 차세대 작가 대담 이벤트’도 그런 계획의 하나로 열렸다. ‘이만큼 가까이’ 등의 작품을 쓴 젊은 소설가 정세랑과 아사이 료가 주인공이었다. 아사이는 2013년 ‘누구’(何者)로 최연소 나오키상을 받은 신예 작가다. 김 대표가 기획하고 국제교류재단 일본사무소 등의 협력으로 함께 연 ‘한·일 차세대 문화인 대담’은 후속 프로그램들이 준비돼 있다. 올가을부터 내년 초까지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오카다 도시키와 소설가 박민규의 대담, 하반기에 디렉터 요리후지 분페이와 소설가 김중혁, 건축가 고시마 유스케와 건축가 안기현의 대담 등 벌써 일정이 빡빡하다. 문화인들의 토크쇼와 대담 등은 김 대표가 2010년 도쿄에 출판사를 열면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문학과 문인, 예술인들을 일본에 알리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말 도쿄 다이칸야마에 있는 대형 서점 ‘쓰타야’에서 소설가 은희경과 히라노 게이치로가 ‘문학은 왜 흥미로울까’를 주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구상 덕분이었다. 쿠온이 2011년부터 내놓은 ‘새로운 한국문학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불모지였고 문턱이 높았던 일본 출판계에 ‘문학 한류’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말 황인숙 시인의 장편소설 ‘도둑괭이 공주’, 올 들어서는 정세랑의 ‘언더, 썬더, 텐더’,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 13권이 번역돼 일본 독자들과 일본 출판 시장에 소개됐다. ‘쿠온 인문·사회 시리즈’의 하나인 ‘한국과 조선의 지(知)를 읽는다’는 한국문화의 지적 성과를 104명의 한국과 일본 지성들의 기고로 엮었다. 104명의 문인, 교수, 학자, 전문가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기고를 얻어 만들었다. 김 대표는 ‘한국과 조선의 미(美)’ ‘한국과 조선의 심(心)’ 등 후속 시리즈도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2011년 ‘케이북(K-BOOK) 진흥회’를 결성해 ‘일본어로 읽고 싶은 한국 책 50선’이라는 계간지도 내 왔다. 한국의 신간 등을 알리는 책이다. 이를 징검다리로 28권의 한국 책들이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인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한국의 책과 출판에 관심 있는 일본인들을 경기 파주 출판도시와 한국 각 지역의 출판 산업 및 문화와 접하게 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1991년 일본에 유학하러 와 25년째 도쿄에 사는 김 대표는 ‘사명감’이란 단어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저 한국의 좋은 작품을 일본에 알리고 한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일본 독자들과 함께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서 일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25) 용, 연꽃과 만나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25) 용, 연꽃과 만나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사람들은 어려운 내용을 짧은 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기를 바란다. 인류가 종교를 바탕으로 이루어 놓은, 동서양의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조형예술을 2500년 전부터 괴력난신(怪力神)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기록해 왔다. 이 때문에 빙산의 일각 아래 거대한 얼음 덩어리와도 같은 신비의 세계, 비밀의 세계가 깊숙이 묻혀 있었다. 바로 그 세계가 ‘초자연적 생명 생성의 과정을 보여 주는 만물화생의 놀라운 세계’임을 필자는 이 연재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를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서술할 수 있겠는가. 동서고금의 조형예술을 넘나들어야 해답을 얻을 수 있다. 3000년 전 그리스 미케네 문명의 조형이 AD 500년 한국의 백제미술에서 밝혀질 수도 있고, 고려의 조형이 2000년 전 선사시대 작품에 해답을 제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읽어 가노라면 이 글이 체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것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성향만 지닌 사람들은 이 불가사의한 인간행위의 더없이 중요한 본질적 세계를 생태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 인간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이성과 감성이다. 이 두 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어떤 분야든 위대한 업적을 낼 수 있다. 그동안 아무도 문자언어로 설명하지 못했던, 잘못 알고 있거나 보이지 않아 설명할 수 없었던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조형언어를 논리적이며 합리적으로 설명하느라 잠도 이룰 수 없는 날이 많았다. 논증할 수 없는 영기화생의 세계를 논증하여 쓰려니 고충이 크다. 앞에는 아무도 없다. 항상 스스로가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이 넓은 세계에서 일어난 긴 인류의 역사에서 ‘생명 생성의 과정을 보여 주는 영기문(靈氣文)’을 논리적으로 밝히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을 논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놓았고 설명과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기에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용은 보주의 집적이므로 ‘보주에서부터 영기문이 발산한다’는 것은 용의 입에서 발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조형적으로 이러한 도상들을 전개한다면 용의 무한한 확산이 가능하다. 보주의 개념은 이미 문명의 발상 시기부터 정립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찌 하여 그렇게 일찍부터 보주의 조형이 이루어졌는지 놀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런 보주의 세계를 잊어버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잊어버렸으므로 어떻게든 상기하여 기억해 내도록 해야 한다. 용을 모르면 보주를 알 수 없으므로 용을 통하여 보주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 생각해 보면 보주를 통하여 용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므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용은 무량한 보주의 집적이니 보주가 먼저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주를 두고 평면적 원이나 축구공 같은 구체를 항상 떠올리나 사각형도 있고 육면체도 있고 타원형이나 타원체도 있다. 보주란 원래 고정된 형태가 없을뿐더러 아예 형태가 없을 수도 있다. 대우주에 가득 찬 대생명력을 나타낸 것인데 무슨 형태가 있을 것인가. 다만 둥근 태양이나 지구 등 무한한 별들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상상했을 것이다. 중력이 크면 천체는 공 모양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보주를 나타낼 때 공 모양을 선호했던 것 같다. 앞서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살펴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어니 해도 보주다. 통일신라시대의 추녀마루 기와를 보면 용의 입에서 보주가 하나 나오는 것 ① , 둘 나오는 것②이 있다. 셋 나오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이마에 표현한 것은 보았으며, 네 개 나오는 것③도 찾아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귀면이라 부르니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네 개 보주가 모인 모양을 논문에서 사엽화문(四葉花文)이라 부른다. 꽃잎이 네 개인 꽃무늬라는 뜻이다. 네 개 이상 다섯 개를 합한 조형은 없다. 그러므로 네 개의 보주는 최대량이므로 무량보주라 불러야 한다. 실은 하나의 보주라도 무량보주이지만 그렇게 부르면 혼란이 일어나므로 일단 보류하자. 그리고 보주들이 입체적으로 겹치는 모양을 투각하는 조형이 있다. 기와에는 아직 없지만 중국 청대 청동 향로의 다리에 흔히 있는 용을 중국에서는 막연히 수면(獸面), 한국과 일본에서는 귀면이라 부르고 있다④ . 그런데 흔히 입에서 나오는 보주가 무량하게 겹친 조형을 일본과 한국 학계에서는 칠보(七寶)라 부른다. 칠보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불교의 일곱 가지 주요 보배로 무량수경에서는 금·은·유리·파리·마노·거거·산호를 이른다. 둘째, 전륜성왕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가지 보배로 윤보, 상보, 마보, 여의주보, 여보, 장보, 주장신보(왕의 대행자로 군사를 부리는 계략이 뛰어나다고 함)를 말한다. 따라서 전륜성왕이 지닌 여의보주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용법상 틀린 용어다. 이때의 보주는 불교 팔보(八寶)나 도교 팔보의 하나를 일컫는다, 즉 불교팔보는 연화 보병 금어, 반장, 법륜, 법라, 보산, 백개, 보주 등을 말한다. 도교 팔보는 구슬, 돈, 악기인 경쇠, 상서로운 구름, 네모가 연결된 방승, 물소 뿔, 붉은 단풍잎, 쑥잎, 파초잎, 솥, 영지버섯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임의로 여덟 가지를 선택하면 팔보가 된다. 이름은 모두 현실적 사물을 빗대서 말하고 있지만 실은 이러므로 투각 무량보주는 칠보가 아니라 팔보 가운데 하나다. 칠보와 팔보는 개념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인도의 칠보가 아니라 중국의 팔보를 따른 것이다. 일본인이 칠보로 부르니 한국인 모두가 칠보라고 부른다. 용의 입에서 겹쳐 나오는 무량한 보주를 표현할 때는 투각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투각 무량보주를 저 유명한 고려청자 향로에서 볼 수 있다⑤ . 왜 큰 연꽃 씨방 위에 무량한 보주가 화생하고 있는가. 바로 그 자리에는 여래가 앉거나 서 있어서 화생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량보주와 여래는 하나. 극적인 장면이다. 혹은 큰 보주 하나를 올려놓기도 한다. 평생 동안 불상조각과 불상회화를 전공해 온 필자는 여래와 보살이 큰 보주임을 밝혔는데 이 작품을 보고 얼마나 놀랐으랴. 연꽃의 씨방 안의 씨앗이 화생하여 보주가 되었으니, 여기에서 비로소 용과 연화가 만나 하나가 된다. 그래서 연꽃 중에 중앙에 사면 보주가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⑥ . 이제 바야흐로 용은 연꽃의 본질과 만나게 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연꽃은 현실에서 보는 연꽃이 아니요, 영화된 연꽃, 곧 영기꽃이다. 보주를 무량하게 발산하는 영기꽃이다. 마치 용의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끊임없이 발산하듯이. 그런데 ‘고려청자 무량보주 투각 향로’를 ‘고려청자 칠보투각 향로’라 부르며 위대한 상징을 지워 버리니 땅을 칠 노릇이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日 미쓰비시, 또 한국 외면…“韓 피해자 법적 상황 달라”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강제 징용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던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영국, 네덜란드 등 다른 국가의 전쟁 포로들에게도 사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 대해선 법적 상황이 다르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계열사인 미쓰비시중공업이 한국인 강제 동원 피해자와 손해배상 소송 중이라는 점을 의식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AP에 따르면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사외이사인 오카모토 유키오는 22일 외신 기자들과 만나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의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사과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호주 등의 전쟁 포로들에게도 똑같이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는 또 중국인 강제 노역 징용자들과도 원만한 해법을 찾고 싶다고 언급했다. 오카모토 이사는 “개인적으로 중국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들은 배상금 요구 소송을 하고 있어 해법은 돈과 관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선 법적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AP는 이에 대해 일본이 1910년 한국을 강제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당시 조선인도 법적으로 일본 국민이었기에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징용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오카모토 이사는 한·일 강제병합 등 과거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선 “근본적인 죄”라고 잘못을 인정했다. 외교관 출신인 오카모토 이사를 비롯한 미쓰비시 머티리얼 대표단은 지난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군 포로 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을 만나 과거 강제 노역에 대해 공식 사과했으나 한국과 중국 등 다른 나라 징용 피해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서울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박문각 남부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한국사

    [박문각 남부고시학원과 함께하는 실전강좌] 한국사

    서울신문은 가장 많은 수험생이 응시하는 7·9급 국가직 및 지방직 공무원시험에 대비해 국어·영어·한국사 등 시험 필수과목과 행정학·행정법·사회 등 선택과목에 대한 실전 강좌를 마련했다. 공무원시험 전문학원인 박문각 남부고시학원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매주 과목별 주요 문제와 해설을 싣는다. (문제)<가><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가>지주와 대치 중인 전남 무안군 암태도 남녀 500여명이 지난 8일 오후 6시쯤에 광주 지방 법원 목포 지청에 몰려 들어오자, 경찰 당국은 정·사복 경관을 늘어세우고 엄중한 감시를 하였다. <나>원산에서 2000여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단행한 결과 운수, 인쇄 및 기타 모든 기관의 업무가 중단되었다. 이에 일본 자본가, 상업 회의소, 국수회 등의 알선으로, 시내 각 상점의 점원, 목수, 미장이 등 50여명의 일본인 노동자가 동원되어 매일 부두에 나가 작업을 하였다. [보기] ㄱ. (가)-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ㄴ. (나)-항일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ㄷ. (가), (나)-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ㄹ. (가), (나)-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① ㄱ, ㄴ ② ㄷ, ㄹ ③ ㄱ, ㄴ, ㄷ ④ ㄱ, ㄷ, ㄹ (해설)<ㄱ>1923년 전남 신안군 앞바다 암태도에서 지주의 고율의 소작료에 항의하여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벌였고, 결국 소작료 인하에 성공한다. <ㄴ>원산 총파업의 시작인 일본인 공장 관리인의 조선인 노동자 폭행으로 시작되어, 조선 노동자들의 일제의 항쟁으로 확대되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ㄷ>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농민·노동자 항쟁이 시작되었다. <ㄹ>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4년 조직되어 1927년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시기상 연관짓기 어렵다. (정답) ③ (문제)다음 사료에서 등장한 국왕시기의 사건으로 옳은 것은? 왕은 즉위하기 전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였으며, 백성의 기대가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또 즉위한 후에는 정치에 노력하였으므로 국내외가 크게 기뻐하였고, 태평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부터는 과도히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하고 정치를 신돈에게 일임하였으며, 공훈 있고 어진 신하들을 내쫓거나 죽이고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킴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샀다. <고려사> ①몽골풍 의복과 변발을 폐지하고, 원의 관제와 연호를 폐지하고 문종 때 원래의 관제로 환원하였다. ②정치도감을 설치해 부원세력 척결을 시도하였다. ③3성은 첨의부로, 6부가 4사로 축소되었다. ④충숙왕에게 전위 후 북경에 들어가 그곳에서 만권당이라는 연구소를 차리고, 조맹부, 염복 등과 고려 이제현을 모아 유학을 연구 토론하였다. (해설)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뒤 중국 원나라를 배척하고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으며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등 개혁 정책을 단행하였다. ② 충목왕, ③ 충렬왕, ④ 충선왕에 대한 설명이다. (정답) ① (문제)신라시대 골품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못한 것은? ①관등 승진의 제한에 따른 불만을 무마하고자 중위제를 실시하였다. ②진골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6두품으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다. ③6두품은 득난이라 불리며, 중대에는 왕권과 결탁하여 진골에 대항하였다. ④6두품은 집사부 시중직과 각부의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해설)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강했지만, 전체적으로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이었다. 중대(통일기)에는 왕권과 결합하여 진골에 대항하지만 신라 하대에 반신라 세력이 된다. ④6두품은 집사부 ‘시랑’직과 각부의 차관직인 ‘경’을 맡고 있었다. (정답) ④ 현창원 박문각 남부고시학원 강사
  • “지배구조 좋으면 주가 올라… 주식 투자로 노후 대비하라”

    “지배구조 좋으면 주가 올라… 주식 투자로 노후 대비하라”

    “지배 구조가 좋은 기업은 주가가 오른다. 그래서 지배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주요 주주들이 알게 될 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존 리(57) 메리츠자산운용 사장은 “기업 지배 구조를 바꾸려는 행동주의 투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다”며 좀 더 근본적이고 우호적인 접근으로 주식 투자를 꼽았다. 존 리 사장은 2006년 일명 ‘장하성 펀드’로 유명한 미국 라자드자산운용의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를 운영했다. 지난해 1월 메리츠자산운용 사장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 이후 메리츠자산운용의 수익률은 업계 꼴찌에서 1위로 올라섰다. 그는 기업 지배 구조가 좋아 주가가 오른 기업으로 아모레퍼시픽을 꼽았다. 서경배 회장(55.70%)-아모레퍼시픽그룹(32.18%)-아모레퍼시픽으로 연결되는 지배 구조에다가 지난 5월 개인 투자자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 액면가를 5000원에서 500원으로 낮췄다. 최근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40만원대를 넘나들고 있다. 연초 이후 80%가량 올랐다. 존 리 사장이 주식 투자에 큰 관심을 쏟게 된 이유는 우리 국민의 노후 대비 수준 때문이다. 그는 “노후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데도 (국민들이) 별로 걱정하지 않아 충격적이었다”며 “주식 투자를 제대로 하도록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밝혔다. 주식을 팔아야 할 때는 노후 생활을 위한 자금화를 제외하고 딱 4가지를 꼽았다. “좋은 주식이라고 믿은 생각이 틀렸을 때, 주가가 아무런 이유나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오를 때, 성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을 때, 그리고 좀 더 좋은 주식이 생겨서 그 주식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 존 리 사장은 “금융의 선진화를 이야기하는데 주식 투자가 늘어나는 것부터가 선진화”라면서 “이미 자본가가 된 부자들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월급쟁이들이 주식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근로자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돈도 일하는 ‘두 개의 엔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후 대비를 위해 예·적금에 자산 대부분을 넣는 것에 대해서는 “집 밖에 나가면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집 안에만 머무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경제활동을 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처럼 주식에 투자해 돈이 일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월급쟁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노후를 걱정하고, 그래서 주식에 투자하면 자본시장이 자연히 발전하게 된다”며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이면에는 일본인들의 낮은 금융 이해도도 있다”고 말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中 해양 진출·北 핵무기 위협 강조… 아베의 집단자위권 합리화

    中 해양 진출·北 핵무기 위협 강조… 아베의 집단자위권 합리화

    일본 각의가 21일 통과시킨 2015년도 방위백서의 특징은 중국의 해양 진출 등 군사 안보적 위협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점이다. 집단자위권 법안에 대한 반발 여론이 거세진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안보 관련 법안 정비와 국제 정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중국 위협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방위백서는 ‘해양을 둘러싼 동향’이란 새로운 항목에서 “국제법 질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독자적인 주장에 근거해 자국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행동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며 중국을 비판했다. 또 “일방적인 주장을 타협 없이 실현하려는 태도”라는 새로운 인식을 추가했고, “예측 못한 사태를 초래할지 모르는 위험한 행위도 보인다”며 경계의 수위를 높였다. 중국의 방위정책 기술은 지난해 3쪽에서 올해 24쪽으로 남북한(18쪽)보다 30% 이상 많았다. 방위백서의 초점인 ‘중국의 위협’과 관련, 동·남중국해에서의 중국의 활동 영역 확대에 대한 위기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백서는 중국의 적극적인 해양 진출을 “고압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행동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주변에서 중국 어선, 지도선 및 공공 선박들의 영해 침입이 상시화됐다는 분석을 처음 내놨다. 중국이 동중국해의 일본과의 중간선 근처에서 진행 중인 가스전 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양 플랫폼의 건설이 확인돼 우리나라(일본)가 거듭 항의하고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고 명기했다. 남중국해에 대해서는 “(중국이) 스프래틀리군도(중국명 난사군도)의 7개 바위에 대규모 매립을 강행하고 일부에서는 활주로나 항만을 포함한 인프라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고 상술했다. 이에 따른 주변국과의 마찰과 국제사회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중국군의 통합작전 지휘센터 신설 사실이 새롭게 들어갔고, 공표된 2015년도 중국 국방예산(8869억 위안·약 165조원)의 명목상 규모가 지난 10년 사이 3.6배로 늘어난 것이자 27년 사이에 41배로 증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과 관련해선 핵무기 소형화·탄두화 등 핵과 미사일 개발 진전 가능성과 이에 따라 일본을 사정권으로 하는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 배치의 위험성도 강조했다. 또 지난 5월에 북한이 성공했다고 발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 등을 언급하며 이를 “안전보장에 중대한 불안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백서는 이를 “일본 등 관계국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안전에 중대하고 급박한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4월에 체결된 새로운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 대해서는 “동맹을 현시대에 적합하게 맞춘 전략적 구상”이라고 평가했다. 안보 관련 법안과 함께 내용을 상세히 기술해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안 개정 및 재무장 필요성을 사실상 뒷받침했다. 또 올 1월 일본인을 살해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테러 위협에 대한 경계도 포함시켰다. 일본은 해마다 7~8월 국제 정세에 관한 인식과 과거 1년 동안의 주요 방위정책, 주요 사건 등을 정리해 방위백서로 펴내고 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우리가 먼저 일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새로운 50년을 열자] “우리가 먼저 일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유홍준(66) 명지대 석좌교수가 1993년 처음 내놓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파천황(破天荒)적인 책이었다. 7권을 내는 동안 무려 340만부가 팔린, 한국 출판계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그의 답사 행보는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완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전 4권)도 22만권이나 판매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일본에서도 이와나미쇼텐 출판사가 1, 2권을 번역 출간했다. 곧 3, 4권도 나올 예정이다. 최근 명지대 연구실에서 만난 유 석좌교수는 한·일 관계의 전향적 발전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먼저 촉구했다. “한·일 관계가 이렇게 꼬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잘못됐다고 규정하기 전에 우리는 언제 일본을 알려고 노력했느냐, 그것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는 “일본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와 앎이 있는 사람들은 일본 얘기가 나오면 ‘다 우리가 해줬어’라고 말할 줄만 알았지, 실제로 속은 허망했다”면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자꾸 정신승리에 치중하게 하는 콤플렉스를 줬다”고 말했다. 그가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학문적 방법론에서 내재적 접근에 가깝다. 기존의 외부 시선과 인식이 아닌 일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일본을 바라봄에 국민적 감정, 민족적 정서에 기반하지 않는 것 자체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논리와 사고를 친일파류의 인식 혹은 식민사관의 언저리쯤으로 치부할 이는 없다. 또한 다수의 일본인 역시 혐한 흐름이 팽배한 속에서 고대사에 대한 역사적 사료를 짚고 얘기하며 분석하는 그의 입장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도래인(渡來人·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3세 이상으로 넘어가면 더이상 한국사람이 아닌 것이에요. 그런데 마치 백제, 신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고, 일본 문화는 모두 한국 문화 덕분에 만들어졌다는 듯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인식입니다. 폐쇄적 민족주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세계와 역사, 일본 등을 바라보지 말고 동아시아 차원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도 그렇게 봐야 하는 것이고요.” 일본에 대해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충분히 수긍이 가면서도 현재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유 석좌교수는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상호 협력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만 21명이고 많은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인데, 사실 일본과 경제 협력이 안 되면 우리는 죽는다. 아쉬운 것은 결국 우리 쪽”이라면서 “제 책의 일본어판 번역을 바랐던 것도 문화의 힘을 믿고, 문화에서 정치와 경제 분야의 어려움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일본에 대한 연구자가 많이 나와야 하고, 일본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책도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이 한국을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되는 것이죠. 일본 우익정권의 입장이 보편적인 국민들의 생각은 아닐 테니 우리의 노력이 선행돼야 일본의 양식과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활동 공간도 더욱 넓어지겠죠.”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패전 70년, 군국주의 상징 ‘제로센’ 다시 날아오르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패전 70년, 군국주의 상징 ‘제로센’ 다시 날아오르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태평양 전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일본 군국주의 광풍(狂風)이 멈춘 지 70년이 된 해이다. 같은 전범국이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이 반세기 넘도록 사과와 반성을 거듭하면서 국제사회의 모범 국가로 대접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종군위안부와 징용을 부정하면서 사과와 반성을 거부하면서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패전 70년에 즈음해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한 법안을 통과시키며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된 일본이 이제는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침략의 상징 ‘제로센(零戰)’ 전투기 복원을 준비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 태평양 전쟁의 상징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대규모 전투기 편대가 나타났다. 휴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 해군 태평양함대는 일본군 전투기 부대의 대공습을 받아 패닉 상태에 빠졌고, 이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가 이끄는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항공모함 6척에 441대의 전투기와 공격기를 싣고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의 대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하와이에 접근해 방심하고 있던 미 해군을 대상으로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당시 미 해군 전함을 공격했던 기종은 97식 함상공격기였지만, 하와이 상공의 제공권을 잡으며 미군 전투기들을 사냥했던 전투기는 제로센, 이른바 '0식 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만든 ‘바람이 분다’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소개된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가 설계한 이 전투기는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는 했지만 등장 당시에는 태평양 전선 최강의 전투기로 악명을 떨쳤다. 지로는 제로센을 설계할 당시 일본해군의 “최대한 멀리 날 수 있고 최대한 빠르고 날렵한 전투기를 만들라”는 요구에 대단히 고심했다. 전투기가 빠르고 멀리 날기 위해서는 고성능 엔진이 필요한데 당시 일본의 공업기술력으로 이러한 엔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안은 ‘기체 경량화’였다. 제로센은 장갑판을 최대한 생략했고 동체와 주익 외피에 사용된 금속판은 최대한 얇게 만들었으며, 골조 내부를 비게 만들어 최대한의 경량화를 달성했다. 제로센의 무게는 연료와 무장을 제외한 자체 중량이 약 1.7톤이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라이벌이었던 미 육군 항공대의 P-40 전투기보다 1톤 가까이 가벼운 수준이었다. 기체가 가볍다보니 제로센은 발군의 기동력을 자랑했다. 속도는 물론 가속성능과 선회 능력이 대단히 우수했는데, 이 때문에 개전 초기 태평양 지역의 미군과 영국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 능력, 즉 더 빠른 속도로 더 작은 공간에서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제로센을 발견했다 싶으면 어느 순간 꼬리가 물려 있는 상황에 종종 처했다. 이러한 이점으로 제로센은 개전 초기 2년 동안은 무적의 전투기로 군림했지만, 이러한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무기체계 관련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과 노력을 투입했던 연합군과 달리 일본은 전투기 성능 개량이나 개발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제로센이 기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사이 미군은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로센보다 더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추었음에도 속도가 더 빠른 F-6F 헬켓(Hellcat)이나 F-4U 콜세어(Corsair)을 배치했고 한때 태평양 상공을 주름잡았던 공포의 전투기는 같은 회사의 G4M 폭격기와 더불어 ‘원 샷 라이터(One-shot lighter)’로 전락했다. 한두 발만 맞춰도 불덩이가 되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별명처럼 제로센은 급격히 몰락했다. 기체 중량을 줄이기 위해 무장이 기관총 정도밖에 없다보니 두꺼운 장갑판을 두른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어려웠고, 반대로 제로센은 미군 전투기나 대공포로부터 몇 발만 맞아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뚫리며 추락했다. 이 같은 화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20mm 기관포를 탑재하는 개량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개량 때문에 기체가 무거워지면서 그나마 장점이었던 기동성이 희생되어 제로센의 피해는 더 커져만 갔다. 결국 1943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제로센은 1944년부터는 제대로 된 공대공 전투보다는 자살 돌격작전, 즉 가미카제(神風) 작전에 동원되었고 수많은 젊은 조종사들이 ‘일왕 만세(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허망하게 죽어갔다. ▲ 패전 70년, 일본 군국주의 부활 원년? 제로센 전투기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태평양 전쟁의 신호탄을 쏜 무기이자 침략자 일본 왕을 위해 옥쇄(玉碎)도 불사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기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전국 곳곳에 이 전투기와 조종사들의 활약상(?)을 기리는 박물관과 전시장이 11곳이나 존재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 내 전쟁박물관 한복판에도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투기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지난 70여 년 동안에는 복원 작업을 통해 다시 하늘로 날리려 하는 ‘패기’를 가진 이들은 없었다. 이 전투기가 복원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은 곧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날갯짓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내외 반발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전투기를 대중에게 친숙한 아이템으로 어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일본 NHK 방송의 경영위원이자 소설작가인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가 제로센 전투기와 자살 돌격대를 미화한 『영원의 제로(永遠の0)』라는 소설을 출간해 500만 부 이상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방위성과 육·해·공 자위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인기 아이돌 오카다 준이치(岡田准一) 주연으로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 영화는 700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문제는 이러한 ‘전범 미화작업’이 일본 문화계 전반에 걸쳐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대한 고발 소설을 써 극우 세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던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작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는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역사의 치부이며, 이들은 자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군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희생됐다”고 지적하면서 극우 세력의 제로센과 가미카제 미화 작업을 비난했다. 그러나 극우 세력은 이러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로센을 다시 띄우기 위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미쓰비시중공업 제품 올 8월 비행 예정 일본 극우세력들은 지난 2013년, 모금을 통해 조성한 자금으로 ‘주식회사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이라는 기업을 만들어 제로센 전투기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즈카 마사히데(石塚政秀) 소유의 전투기를 지난 2008년 구입, 수년에 걸쳐 이 전투기를 여러 파트로 분해해 일본으로 반입했으며, 지난주에 엔진 구동 시험을 마치고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형식 승인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복원작업 전 과정은 일본 방위성과 자위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는데, 현재 제로센 전투기가 격납되어 있는 곳도 해상자위대 가노야(鹿屋) 항공기지이며, 해자대는 제로센 복원 작업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일본은 이 제로센 전투기를 패전 70주년이 되는 올 8월 하늘로 띄울 계획이다. 공교롭게도 8월에는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제로센’이라 불리는 일본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 ATD-X(Advanced Technology Demonstrator-Experimental) 심신(心神)의 첫 비행이 계획되어 있으며, ‘공격무기의 상징’인 상륙돌격장갑차 시제차량 공개도 예정되어 있는데, 더 재미있는 것은 제로센 전투기와 ATD-X, 신형 상륙돌격장갑차를 만드는 회사가 모두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이라는 것이다. 패전 70주년에 맞춰 집단적 자위권 확보를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활시키고 70년 전 침략 전쟁의 선봉에 섰던 전투기를 복원시키며, 더 나아가 그 전투기를 만들었던 회사에서 신형 스텔스 전투기와 공격용 장갑차까지 개발해 패전했던 그 날에 공개한다는 계획! 이것을 단순한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역대 최대 2조대 환치기 적발… 동·남대문 수출업자 등 91명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에서 불법 환치기 등을 일삼던 의류 수출업자와 환전 브로커 등이 무더기로 세관에 적발됐다. 부산경남본부세관은 밀수출과 환치기로 2조 4000억원대의 불법 외환 거래를 일삼던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 의류 제조·수출업자 67명, 운송·환치기 브로커 23명, 환전상 1명 등 일당 91명을 관세법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13일 밝혔다. 2조 4000억원대의 불법 외환 거래 적발은 관세청 개청 이래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세관에 따르면 의류 수출업자 A(50)씨 등 67명은 2010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1838억원 상당의 의류를 일본에 밀수출한 뒤 대금을 보따리상, 일본인, 재일교포 등을 통해 수출 대금이 아닌 사업 자금인 것처럼 속여 국내로 반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환전상 B(45)씨는 미리 확보하고 있던 외국인 390여명의 여권 사본을 이용해 5000달러 이하로 소액 환전한 것처럼 기록을 조작하는 수법으로 1조 8000억원대의 돈을 환치기해 준 혐의를 받고 있다. 부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사설] 아베, ‘징용은 강제노동’이란 ILO 보고서 봤나

    유네스코가 지난 5일 일본의 23개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후 일본 조야의 말 바꾸기가 본격화하고 있다. 나가사키조선소, 하시마탄광 등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노동에 동원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면서다. 지난 10일 한·일 의원연맹에서 일본의 지한파 인사들마저 “일본인도 동원돼 강제 노역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정부가 그간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봤다는 느낌이 든다. 등재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 사실 반영을 놓고 한·일은 한반도 출신자 등이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는 표현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우리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히 반영됐다”고 자평한 배경이다. 그러나 그런 자화자찬이 무색해졌다. 일본 측이 등재 직후 강제 노동을 인정한 게 아니라면서 ‘일하게 됐다’는 표현으로 번역할 때만 해도 우경화한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한 ‘물타기’려니 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까지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징용된 ‘경우도 있다’는 의미”라며 아전인수식 재해석에 나선 걸 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물론 이런 언동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여하한 궤변도 징용자들이 지하 1000m 탄광 막장에서 생명을 걸고 노동을 강요당한 역사의 진실을 바꿀 순 없다. 아베 총리는 국제노동기구(ILO)의 1999년 보고서를 직시해야 한다. 일본이 식민지 국민을 징발해 강제 노역을 시킨 것은 명백한 불법 노동행위라는 게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사망률이 28.6%에 달한 참혹한 현장도 있었다니, 강제로 동원되지 않고 제 발로 걸어서 들어갈 리가 만무한 생지옥이었다는 얘기다. 특히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입수됐다는, 야마노탄광의 물자명세서를 보라. 미쓰비시사의 이 탄광 합숙소에 “반도인의 도망을 막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2m 10㎝ 높이의 철조망까지 쳤다는 기록은 강제 노동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닌가. 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자마자 강제 노역이 아니라고 발뺌하면서 전방위 홍보전을 펴는 일본 측의 태도가 쉽게 바뀔 리도 없다. 이러다간 등재 과정에서 약속했던, 강제 노역의 참상을 기록한 홍보센터 설립 등도 유야무야하며 무산시키려 들까 걱정스럽다. 그렇다면 정부도 일본의 왜곡된 홍보전에 맞서 긴 호흡으로 체계적인 국제 여론전을 준비하길 바란다. 일본 정부가 강제 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등 약속을 이행하도록 일본 내 양심세력을 포함한 세계 여론을 환기하는 지속적 노력을 펴야 한다.
  • [새로운 50년을 열자] 조선·일본 교역의 장 ‘초량왜관’… 日문화 유입 통로로

    [새로운 50년을 열자] 조선·일본 교역의 장 ‘초량왜관’… 日문화 유입 통로로

    일본 문화가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근·현대에 집중적으로 전해졌다. 대중목욕탕, 화투놀이, 가라오케 등등. 이 가운데 가장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것은 음식문화이다. 돈가스, 오므라이스, 스시, 우동, 소바, 라면, 샤부샤부, 덴푸라, 스키야키, 데판야키(철판구이), 쇼유, 다쿠안 등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신선하고 정갈한 맛이 특징인 일본 음식은 개운한 맛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호에도 맞아 기성세대는 물론 신세대의 외식문화에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일본 문화가 한국에 전해진 뿌리는 어디일까.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 및 교류의 장이었던 초량왜관(1678~1876)이 들어섰던 용두산공원을 찾아가봤다. 초량왜관을 통해서도 다양한 일본 문화가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해 내려오는 것은 거의 없다. 당시 일본인과의 접촉이 금지돼 문화교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산과 김해 일대에는 일본 부채와 일본 양산을 들고 다니고 일본 귤과 스키야키를 먹는 등 왜류(倭流) 바람이 불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200여년간 부산에 상주한 역사 그 자체가 일본 문화의 뿌리로서 상징성을 보여준다. 부산에는 왜관의 영향으로 이름 지어진 대청동, 복병산, 고관(두모포 왜관·현 동구청 자리)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초량왜관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부산대 한국학연구소 양흥숙(45) 교수와 함께 이날 초량왜관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양 교수는 “초량왜관은 한·일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이 컸지만 일본 문화가 조선에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초량왜관은 용두산공원을 낀 동광동, 광복동, 중앙동, 신창동 일대에 있었다. 당시 모습은 하나도 없어 200여년간 왜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광복로와 용두산 공원 입구 등에 초량왜관이 있었던 곳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용두산공원 타워전망대에서 동광동 쪽을 내려다보니 부산항 앞바다와 오륙도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확 들어왔다. 대마도는 부산과 직선거리로는 불과 49.5㎞로 제주도(약 92㎞)보다 훨씬 가깝다. 맑은 날씨에는 육안으로도 어렴풋이 섬이 보인다. “왜관은 동관(사신이 오면 머물었던 곳 · 동광동과 광복동 쪽)과 서관(당시 일본인이 상주했던 지역 · 신창동 쪽)으로 나뉘었는데 단순한 문물교류를 위한 무역뿐만 아니라 선린 교류의 장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계단을 이용해 5분여쯤 걸어 동광동 쪽으로 내려오니 계단 끝 화단 옆에 ‘약조제찰비’ 팻말이 있다. 양 교수는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공표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원본은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오른쪽 동광교회 쪽을 지나 5분여간 걸어가면 왜관 책임자가 상주했던 관수사 터가 나온다.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포함해 광복로와 현재의 부산데파트 자리까지 10만평 규모로 상주인구는 500여명, 건물이 150여채로 많을 때에는 1000여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대마도 인구가 1만 5000여명이었던 점에 비춰볼 때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최근 초량왜관이 재조명을 받으면서 사학자나 지역 향토사학연구가 등의 연구 활동이 활발, 향후 한국에 전파된 일본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양 교수는 “일제강점기 탓에 우리나라는 무조건 국내에 있는 건물과 일본풍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며 없애거나 파괴해버렸다”며 “한류에 열광하는 일본인들이 부산을 많이 찾고 있고 초량왜관은 스토리와 규모 면에서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독특한 유적인 만큼 스토리텔링 등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관광상품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가까운 듯 머나먼 대마도의 수수께끼

    가까운 듯 머나먼 대마도의 수수께끼

    대마도의 진실/한문희·손승호 지음/푸른길/362쪽/2만 5000원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이 찾는 일본 땅,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 일본 땅…. 한반도에서 배로 1시간 30분이면 닿는 외국 땅 대마도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연들이 숱하게 담긴 곳이다. ‘대마도의 진실’은 수수께끼 같은 그 대마도의 궁금함을 쉽게 풀어 주는 책이다. 사단법인 미래한국영토포럼의 이사장과 본부장이 작심하고 대마도를 파고들었다. 그동안 출간된 대마도 관련서와 달리 지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게 특징. 대마도의 장소적 특징과 지명 유래, 풍토, 주민 생활, 지리적 여건 등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책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역시 대마도의 역사적 역할과 영토주권이다. 국내외에서 제작된 고지도를 통해 고지도상의 대마도가 어떻게 묘사됐고 어느 나라에 속한 땅으로 표기됐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대마도를 구성하는 행정 단위인 6개의 마치(町)를 자세히 다룬 점도 도드라진다. 남쪽부터 북쪽 끝까지 포진한 각 마치의 특징을 비롯해 우리와 관련된 마을들에서 우리 역사 속 대마도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 중 ‘대동총도’의 설명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두산은 머리이고 대관령은 척추이며 영남지방 대마도와 호남지방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한 선조들의 유기체적 국토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조선 조정은 대마도를 일본에 어떠한 형태로도 넘겨주거나 양도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저자들은 대마도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우리 영토’였다는 지론을 설득력 있게 편다. 그러면서 “일본이 자기들 멋대로 잘라가 버린 우리 영토의 한쪽 발인 대마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매듭짓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심사 미룬 것은 극히 이례적 ‘무슨 일이길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심사 미룬 것은 극히 이례적 ‘무슨 일이길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일본 산업혁명 시설 세계유산 등재 심사가 열린다. 지난 4일 독일 본에서 제39차 회의를 개최 중인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산업혁명시설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조선인 강제노동을 둘러싼 한일간 이견이 계속되면서 심사를 하루 미뤘다. 세계유산위가 심사 일정을 미룬 것은 극히 이례적이며 이는 한일간 합의를 위해 시간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5일 아사히신문은 “한국 정부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탄광 등 7개 시설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일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려하고 있고 일본 정부는 이를 강제라고 표현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유산 등재 심사 때 한국 정부는 ‘강제노동(forced labour)’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7개 시설에 대한 의견을 밝힐 예정이다. 한국 정부의 의견 표명은 23개 산업시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설명이 있고 나서 이뤄질 예정이며 한국 정부의 발언 내용 초안을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받아 확인하면서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일본 정부는 당시 노동환경이 가혹했지만, 대가가 지급됐고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므로 ‘강제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국 정부는 7개 시설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 수와 사망자 수를 명기하기를 원하고 있고, 일본 정부는 일부 시설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일한 것을 인정하지만 숫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아사히는 덧붙였다.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사진 = 서울신문DB (일본 세계유산 등재 오늘 결정)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수교 후 무역적자 5000억弗… 한류가 혐한 변질 우리기업 타격

    [새로운 50년을 열자] 수교 후 무역적자 5000억弗… 한류가 혐한 변질 우리기업 타격

    일본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는 ‘가깝고도 먼 나라’다. 역사와 정치를 넘어 경제·산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대일본 무역적자는 5000억 달러가 넘는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에게 경제적 이익을 취해왔고 또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기업 경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과거 50년을 넘어 새로운 50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양국 본토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한·일 기업들의 모습을 짚어 봤다. 국교가 정상화된 지 50년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기업의 일본 진출 역사는 짧다. 그만큼 양국 간 기술과 자본력의 격차가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우리 기업은 삼성, 현대모터, 한화, 대우 등 대기업 중심이었다. 당시의 전략은 눈 높은 일본 소비자를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기업 간 거래(B2B) 등을 통해 실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기업들은 자체의 상표를 앞세우지 못하고 하도급이나 주문자상표부착(OEM) 등을 통해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의 앞선 기술력과 마케팅 능력을 벤치마킹했다. 이런 점에서 일본 소비자를 상대로 직접 시장을 공략한 진로의 일본 진출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1988년 진로가 일본에 법인을 세울 당시 국내 소주시장은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진로는 일본을 택했다. 나름 철저한 시장조사를 했지만, 한국에서 공수한 소주에 대한 초기 반응은 냉담했다. 진로는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 일본인에 맞는 소주를 개발했고 이 전략은 통했다. 그렇게 현지 법인 설립 이후 10년간의 노력으로 진로는 1998년 ‘JINRO’라는 단일브랜드 기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됐다. 진로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이후 2000년도 후반 일본열도에 덮친 한류는 우리 기업에게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CJ와 농심 등 식품관련 회사들이 일본에 진출했고 네이버, 넥슨 등 정보기술(IT)관련 기업도 일본에 터를 닦았다. 특히 일본의 국민메신저가 된 네이버 라인의 성공은 눈부실 정도다. 일본 스마트폰 이용자 10명 중 9명이 라인을 이용할 정도다. 그렇게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기업 수는 증가했고 투자도 줄을 이었다. 주일한국기업연합회(한기련) 소속 회원사는 지난해 말 기준 253개에 달한다. 비회원사 기업까지 포함하면 300개 기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대일 투자는 1968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5186건, 63억 8800만 달러(약 7조 270억원)에 달했다. 1980년까지 대일 누적 투자는 283만 달러(약 31억원)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한 해에만 5억 7800만 달러(약 6463억원)를 기록했다. 외형상으로 보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한국 기업의 일본 진출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해도 될까. 정작 일본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일본을 그리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입을 모은다. 일본은 자국 브랜드 외에는 글로벌 1등만이 통하는 대표적인 시장이다. 스마트폰과 자동차 등 한국을 대표한다는 상품도 일본에선 찬밥 신세다. 현대차는 2001년 일본 승용차 시장에 진출했다가 쓴맛만 보고 2010년 사실상 사업을 접었다. 철수 직전인 2008년에는 1년간 판매한 자동차 수가 불과 501대다. 현재는 애프터서비스와 버스판매 사업에만 집중하는 실정이다. 삼성 역시 일본에서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일본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아이폰의 점유율은 58.7%이지만 삼성은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4.7%로 4위를 기록했다. 2위 소니(13.7%), 3위 샤프(12.4%) 점유율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일종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삼성은 최근 일본에서 출시한 갤럭시S6 시리즈에서 삼성 로고를 빼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최근 한류가 혐한(嫌韓)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이어온 외교 실패와 엔저 현상도 또 다른 악재다. 2010년 1억 100만 달러를 수출했던 소주는 지난해 6780만 달러를 수출하는데 그쳤다. 같은 기간 김치 수출액은 8280억 달러에서 5660억 달러, 라면 역시 3910억 달러에서 2450억 달러로 수출액이 급락했다. 일본진출 엔터테인먼트업체인 CJ E&M과 SM 일본법인의 지난해 매출도 각각 전년 대비 17% 이상 감소했다. 환율 변수를 고려해도 낙폭이 심상치 않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권홍봉 한기련 부장은 “기업마다 일본 매출 감소폭이 크다 보니 오히려 쉬쉬할 정도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면서 “한국은 여전히 한류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적어도 일본 내에서는 한국색을 지우지 않으면 장사가 어렵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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