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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김지원이 추는 트와이스 ‘샤샤샤’ 댄스

    배우 김지원이 추는 트와이스 ‘샤샤샤’ 댄스

    ‘태양의 후예’에서 윤 중위를 열연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배우 김지원이 트와이스의 ‘샤샤샤’ 댄스를 선보였다. 지난 25일 소속사 킹콩엔터테인먼트는 공식 인스타그램에 “화보 촬영장에서 흐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귀요미 지원씨 포착. 오늘부터 흥지원이라 불러 봅니다”라는 글과 함께 영상을 올렸다. 공개된 영상에서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김지원은 화보 촬영 중 흘러나오는 트와이스 ‘치얼 업’(CHEER UP)에 샤샤샤 댄스를 추며 귀여운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이다. 이후 김지원은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턱에 가져다 대는 포즈를 취하기도. 김지원의 샤샤샤 댄스에 누리꾼들은 “흥얼거리는 사소한 동작이지만 “너무 귀엽다”, “심쿵이다”, “이쁘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트와이스 ‘치얼 업’(CHEER UP)의 ‘샤샤샤’는 원래 ‘샤이 샤이 샤이(SHY SHY SHY)’ 가사에서 비롯됐다. 트와이스 일본인 멤버 사나가 발음을 빠르게 하다 보니 음원에서 ‘샤샤샤’로 들린 것인데, 중독성 있고 귀여운 발음 때문에 ‘샤샤샤’와 함께 이를 부른 사나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영상=kingkongent(킹콩엔터테인먼트)/인스타그램 영상팀 seoultv@seoul.co.kr
  • [新전원일기] 함께, 백만 송이 장미… 소망, 1억 달러 수출

    [新전원일기] 함께, 백만 송이 장미… 소망, 1억 달러 수출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한 존재로 만든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보낸 시간 때문이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장미에 관해서는 권위자라고 할 만하다. 어린왕자가 장미에 관해 한 말들은 전적으로 사랑에 관한 말들인데, 좀처럼 반박할 수가 없다. 장미를 키우고, 장미와 함께 성장해 본 적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장미가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것들,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안다. 마침 장미의 계절에, 어린왕자만큼이나 장미를 사랑하는 사람을 전북 전주시에서 만났다. 그 역시 권위자라 할 만한데, 그것은 ‘로즈피아’를 키워 낸 대표로서의 얘기다. 장미 앞에서 그는 어린왕자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였다. 정화영(58) 로즈피아 대표가 장미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그 전에는 도시에서 직장인으로 살았다.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았지만 남들처럼 사람과 일에 치이기도 했다. 귀농을 결행한 그가 처음 심은 것은 고랭지배추, 오이 등 채소류였다. 몇 해 지나 작물을 장미로 바꿨는데 그것은 장미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다소 낭만적인 이유였으니까요. 채소류는 사람의 몸을 살찌우는 거잖아요. 반면에 꽃은 정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행복할 것 같았거든요. 훨씬 멋있어 보였어요. 그런데 꽃농사라고 다른가요 어디. 힘들고 속 타는 건 마찬가지더라고요.” #첫 번째 시련, 함께 풀었다 꽃을 가꾸는 일은 꽃을 보는 일과는 전혀 달랐다. 땅을 고르고, 비료를 주고, 농약을 치느라 드는 수고는 먹거리 농사 저리 가라였다. 그래도 장미가 커가는 것을 보는 기쁨은 컸다. 농사가 안정될수록 스스로도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수익성도 높았다. 장미는 그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누가 꽃을 사겠어요. 파탄이 났죠. 화훼는 항공기의 뒷바퀴와 같다는 말이 있어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가장 나중까지 땅에 붙어 있고 착륙할 때는 제일 먼저 땅에 닿는 게 뒷바퀴잖아요. 화훼가 그래요. 경제가 안 좋을 땐 가장 먼저 피해를 보고 경제가 살아날 때도 그 영향을 제일 나중에 받거든요.” 정 대표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품목을 전환할 것인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것인가. 지금까지 장미에 기울인 노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 만만하지도 않았다. 그는 국가 경제가 파탄 나고, 자신이 망할 판국에도 고운 자태 뽐내며 피어난 꽃잎들을 하나하나,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답을 얻었다. 뭉쳐서, 살아남기로. “전북 전주, 김제, 장수 등의 화훼농가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어요. 뭉쳐야 살지 않겠느냐고요.”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나았다. 장미를 키우고 절화를 해서 저장고에 넣는 것까지 각 농가에서 담당하고 이후 꽃을 취합하고 선별하여 보관과 유통, 판매까지를 한 곳에서 담당하면 생산 단가와 물류비, 유통비를 대폭 절약할 수 있으리라는 말로 농가들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점차 정 대표의 말에 수긍하기 시작했다. 몇몇 농가가 나섰다. 이들과 공동으로 2000년 7월 로즈피아를 설립했다. 뭉쳐서만 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한 타개책은 수출이었다. 곧바로 8개 소속 농가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화훼 시장은 국내 시장의 8배에 달했다. 일본 시장을 뚫으면 살길도 뚫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길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통이 발목을 잡았다. 국내 시장과 달리 일본으로 상품을 보내는 데 통상 4~5일이 걸렸다. 공산품하고는 다르게 생물을 유통하는 데는 신선도가 최우선인데, 일본에 도착한 로즈피아의 장미는 대부분이 상해서 거래가 되지 않았다. 정 대표는 농촌진흥청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문의하고 관련 서적을 통해 공부를 하면서 노하우를 쌓았다. 그 과정에서 보관뿐 아니라 생산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정 대표는 꽃이 보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재배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품질 좋은 장미를 생산하기 위해 ‘저온 유통 시스템’을 적용했다. 로즈피아는 2002년 이 분야에서 화훼업계 최초로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ISO9001 품질경영 시스템’ 인증을 획득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농가에서 꽃을 건식으로 유통하는 것과 달리 로즈피아는 습식 유통 방식을 도입했다. 포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유통의 전 과정에서 꽃대가 물에 잠겨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 끝에 설립 초기 6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은 2004년 500만 달러, 2010년에는 1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참여 농가도 8곳에서 130여곳으로 크게 늘었다. 더불어 정부의 지원도 수출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2007년 당시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의 원예 전문생산단지로 지정된 로즈피아는 매년 실시하는 운영실태 조사 평가 결과에서 2007년부터 7년 연속 최우수 단지로 선정되며, aT로부터 수출 물류비의 10%를 지원받았다. 연구와 혁신 못지않게 정 대표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브랜드’다. “지금 로즈피아를 이끄는 것은 브랜드입니다. 저는 세월이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그동안의 노력과 신뢰들이 브랜드로 평가받은 것이라고요. 일본이 매우 보수적인데 로즈피아를 보면서 일본인들도 놀라워해요. 매장에 로즈피아 코너를 따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곳이 생겼을 정도예요. 앞으로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즈피아가 우수한 품질의 장미를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들은 깐깐한 일본 시장에서도 통했다. 2004년 1월 도쿄 다카시마야 백화점이 고객 선물용으로 장미 30만 송이를 납품할 회사를 선정할 때 일본과 한국, 대만에서 몰려온 10여개 업체를 물리치고 로즈피아가 납품권을 따낸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정 대표가 성공 요인으로 꼽는 한 가지는 ‘신뢰’다. “로즈피아의 장미 수출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수출에 필요한 포장 선별비와 수출물류비 외의 모든 수익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농가에 전액 되돌려 주고 있죠.” #두 번째 시련, 협상으로 풀었다 사람이 모여 일을 하다 보니 박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개체 단위로 보면 농가는 각자가 독립된 경영체다. 구성원 모두가 ‘사장님’인 것이다. 이들이 자기 농가의 경영 이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데, 농사의 특성상 언제나 같은 이윤을 얻을 수는 없다. “로즈피아는 품질을 구분할 때 기준이 엄격해요. 기준을 안정화하는 데만도 여러 해가 걸렸어요. 농가마다 늘 같은 품질의 꽃을 키워 낼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내가 기른 꽃이 상급에서 제외되면 불만이 생기죠. 끝내 갈등을 풀지 못하고 로즈피아에서 이탈한 농가도 있었어요. 그래도 대부분은 소주 한 잔 하면서, 서로 등을 두드려 주면서 풀죠. 속은 상해도 다들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서로에 대해 믿음이 있으니 밀고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지금도 로즈피아가 ‘꽃길’만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시장 자체가 초토화된 가운데 2012년 엔화 가치가 폭락해 로즈피아는 큰 시련에 직면했다. 수출 단가를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화훼시장은 총 100여곳, 그중 로즈피아가 거래하는 시장은 60곳 정도. 정 대표는 1년에 20여 차례 일본 현지를 오가며 가격 협상을 한 끝에 장미 단가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현재 수출단가는 송이당 70~100엔(약 750~1080원)으로 일본산 장미 가격의 70%에 이른다. 처음 일본산 가격의 40%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할 때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아직 매출이 안정세를 되찾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지난해 600만 달러로 떨어진 매출이 올 들어 다시 성장세로 돌아서고 있다. 정 대표는 앞으로 일본산 장미 가격의 80% 정도까지 가격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국내시장 확보와 수출시장의 다변화도 꾀하고 있다. 초기에는 로즈피아 매출의 80% 이상을 수출이 차지했지만, 현재는 수출과 내수의 비율이 5대5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출에 더 주력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러시아에 판로를 개척한 상태이고 중국 역시 차세대 주력 시장으로 판로를 탐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15억명의 인구가 살고 있어요. 이들에게 꽃을 한 송이씩만 팔아도 장미 1억 달러 수출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입니다.” #묵묵히 기다리며… 다시 시련은 없다 이를 위해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품종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장미도 유행을 많이 타기 때문에 신품종 출하 후 3~4년이 지나면 매출이 눈에 띄게 감소한다. 그러나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무엇보다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가 자체에서 감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국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 농가에서 네덜란드와 독일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100억원 정도인데, 이를 감안할 때 자체 품종 개발은 생산 원가를 줄이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이 자명하다. 정 대표가 로즈피아에 기대하는 바는 크다. 농사와는 무관한 두 아들을 설득해 장미 농사를 짓게 만들었을 정도다. 물론 장밋빛 미래만을 그려 보여 준 것은 아니다. 마음을 준 만큼, 손길을 준 만큼 정직하게 돌려주는 것이 농사지만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묵묵히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농사란 게 쉽지가 않아요. 묵묵히, 오래 기다려야 하죠. 한 해 농사에 실패하면 1년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실패의 원인을 금세 찾았다고 해도 동일한 조건 속에서 다시 시도를 하려면 1년이 걸려요. 기다림과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죠. 더구나 식물은 어디가 아파도 말을 하지 못하잖아요. 식물과 대화할 정도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은 걸린다고 봐요.” 농사도, 로즈피아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런 시간을 버텨 내지 못했다면 거듭되는 위기를 넘겨 가며 한 우물을 파지는 못했으리라.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낱낱의 존재는 미약하지만 서로 연대했을 때에는 예상치 못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일 테다. 그것의 한 예가 ‘로즈피아’일 것이다. ■ 글쓴이 소설가 진연주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방(房)’으로 등단. 2015년 ㈜문학동네에서 장편소설 ‘코케인’ 출간.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곡진한 이야기가 된 피난살이…부산 초량 이바구길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곡진한 이야기가 된 피난살이…부산 초량 이바구길

    '참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눈두. 이북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잉. 야하, 눈 보구 싶다, 눈이.’ 한국 문단의 대표적 분단작가인 이호철(84)의 작품 ‘탈향(脫鄕. 1955)’의 마지막 문장 일부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그는 1950년 인민군으로 6·25동란에 참전했다가 월남한 경험 때문인지 ‘실향(失鄕)’이라는 표현 대신 ‘탈향(脫鄕)’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그토록 이북의 눈을 그리워하는, 초량 부두 노동자 ‘하원’은 산꼭대기에 판잣집을 짓는 게 꿈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늘 고향의 함박눈을 그리워할 것이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지어진, 그 때의 산꼭대기 판잣집들이 ‘이바구’길 전설의 시작이고, 끝인 셈이다. 6·25동란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의 소박한 꿈들이 모여 만들어진 동네 위치가 바로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으로 이어지는 산복도로 주변이었다. 어느덧 세월은 이들이 만들어 낸 ‘이바구(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산[山]의 배[腹] 중턱을 지나는 도로’라는 뜻의 산복도로가 다시금 부산 원도심 골목 여행의 신(新) 르네상스를 열고 있다. ● 구(舊) 백제병원 괴담은 이제 그만!! 초량(草粱)은 다시 바빠지고 있다. 부산의 도시재생 선도사업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과 더불어 새로운 원도심 골목 투어의 중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 일대가 북항재개발사업과 맞물려 '신(新) 르네상스 지역'이라고도 불린다. ‘이바구길’,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혹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자극적이며 부산(釜山)스럽다. 여하튼 달동네 좁은 길을 한 번에 스타 관광지로 만들어버린 작명 실력이니, 누구인지 이름 갖다 붙이는 재주는 분명 예사스럽지 않다. 이바구길은 부산역으로 유입되는 관광객들이 ‘가깝다’라는 이유로, 가벼이 다가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냥 부산역 앞, 길만 건너면 된다. 불과 1년 만에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갔으니, 이 정도면 블록버스터 급은 못 되어도 손익분기점 가뿐히 넘긴 저예산 독립영화처럼 맘은 편한 상태이다. 그리고 지금의 관심이 조금은 어리둥절하다. 불과 1.5㎞ 내외의 짧은 골목길이 무언가 일을 낼 조짐이다. 이바구길은 구 백제병원-남선창고 옛터-초량교회-인물담장거리-이바구 정거장-168계단-모노레일-김민부 전망대-이바구 공작소-장기려 더 나눔센터-유치환의 우체통-까꼬막 게스트하우스-올레길-천지삐까리 마을카페로 이어진다. 원래 이바구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말 그대로 제각각 ‘이바구 한 트럭씩’ 쏟아낼 정도의 삶의 이력을 지닌 고령자들이 많다. 부산은 65세 고령자 비중이 인구의 13%가 넘는 고령화 도시이다. 이 중에서 부산 동구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은 고령자 비율이 더더욱 높아서 그동안 부산 시민들 사이에서도 ‘할배, 할매 동네’라고 불린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기에 '2014년 융·복합 노인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이바구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박이다. 매주 토·일요일에 운행하는 '산복도로 투어버스'는 이미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할 노릇이고, 자전거 투어는 한없이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이곳 어르신들 표현대로 관광객들은 어디선가 ‘꾸역꾸역 천지 삐까리로’ 몰려오고 있다. 이바구길의 시작은 구(舊)백제병원에서 시작한다. 시작으로서는 가장 걸맞는 건물이다. 겉모습만 보지 말고 반드시 들어가 보는 것이 좋다. 지금 이 건물은 한 가구 디자인 전문회사가 임대하여 디자인 쇼룸으로 사용하면서 커피와 각종 간단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내부는 흡사 베트남 하노이의 낡은, 그리고 철거를 앞둔 프랑스식 건물 느낌이다. 1920년대의 벽돌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구(舊)백제병원은 1927년 2월, 12월에 개별로 건립된 두동이 하나로 합쳐진 건물로 내부 평면이 사각형, 마름모꼴 형태이다. 최초 건립되었던 1, 2, 3층에는 목조계단과 장식, 디테일 등 목재로 마감된 원형이 잘 남아 있어서 현재 영화 촬영장소로 사용이 되기도 한다.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서양의료진까지 있었던, 20, 30년대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당시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지역에서 중요한 의료기관 건물이자, 근대 의료사적으로 가치도 있는 등록문화재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병원괴담이라는 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의 괴담이 많았다. '돈 없는 환자는 죽여서 옥상에 보관한다', '지하에 감옥이 있어 밤마다 원혼이 떠돈다'는 등의 악성 루머로 인해 병원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되고 결국 병원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 거의 모든 부산 시민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실제 이 건물에 거주하는 세입자 변상률(74)씨는 항간의 괴소문에 대하여 어처구니 없어한다. 원래 이 건물은 한국인 의사 최용해씨가 일본인 아내를 맞이하면서 장인이 부산에 지어준 건물이며, 이후 최용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다시 장인이 거두어간 건물이라는 것이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중국집으로, 일본 아까즈까부대의 장교숙소로, 귀국한 학도병을 위한 치안대 건물로, 신세계 예식장, 탁구장으로 용도 변경을 하면서 지금까지 용케도 잘 버티어 왔다. 말 그대로 ‘입이 여럿이면 쇠도 녹인다’라는 속담이 들어맞는 비운의 건물이다. 백제병원을 돌아, 남선창고의 옛터, 담장갤러리를 돌면 부산 동구 출신의 유명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유치환· 이경규, 박칼린, 나훈아, 이윤택·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담장 반대편에는 1892년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인 초량교회가 있다. 이 곳에서 안창호 선생의 예배와 신사참배 반대 운동 등 부산 지역 항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1951년 4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예배를 본 교회이기도 하다. ● 168계단에 모노레일이 - ‘이바구’가 한 가득 초량 교회를 뒤로 하고 20m남짓 앞으로 나아가면 바로 168계단이 있다. 168계단은 그동안 이바구길 체험객들에게는 차마고도(茶馬古道)와 진배없는 곳이었다. 만약 스위스였다면 분명 최고급 난이도 슬로프였을터. 경사가 33도! 바로 이 난코스 중의 난코스, 부산 동구 산복도로 초량 168 계단길에 8인승 모노레일이 놓이고 있다. 공사비 총 31억 원을 투입해 길이 60m, 폭 7m짜리 모노레일이 6월 중순 운행을 목표로 설치 중이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중 '초량168계단 산복 희망길 조성 사업'은 가장 주요한 핵심 사업 중의 하나였고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168 계단을 오르면 부산시내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김민부 전망대를 지나면 이제 오리지날 산복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곳에서 우리는 부산역 건너편 훤한 태평양을 맘껏 내려볼 수 있다. 압권이다. 경치가 파노라마 버전이다. 본격적인 이바구길의 주무대가 열린다. 이바구공작소, 장기려기념관 『더 나눔』, 유치환 우체통, 까꼬막 카페, 이바구 정거장, 168도.시.락.국, 6.25 막걸리, 도심 민박인 이바구 충전소, 까꼬막 전망대를 지나는 동안 이바구길 2시간의 시간은 훌쩍 지난다. 이바구 정거장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소울아띠’의 류은영(41) 대표는 ‘주민들과 공무원들이 합심하여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바구길에 거주하는 옛 삶의 기록을 좀 더 많이 남겨 단순한 볼거리 관광이 아니라 훌륭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희망했다. 여행은 눈으로만, 입맛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도 하고 코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애시당초 이바구길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볼 것이 없다고 타박하는 것은 어리석다. 살기 위해 허둥지둥 뛰어 다녔던, 고단한 거리를 이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순서대로 걸어가는 풍경이 낯설기도 하다. 애달픈 삶의 흔적들이 묻어나는 길과 계단들은 사뭇 다른 풍광과 ‘이바구’를 전달해준다. <초량 이바구길에 대한 여행 20문답> -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20문답입니다. 1. 부산에 가면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요? - 이번에 부산 여행이 12번째이고, 부산역 출발 기차 시간이 3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면 도보 여행을. 그러나 이바구길 자전거 투어를 하게 된다면 일부러라도 체험해보길. 2. 누구와 함께 가면 좋을까요? - 길이 대단히 가파르다. 따라서, 무릎이나 관절이 성하지 않은 분들은 불편할 수도 있다. 약간 높은 뒷동산 동네를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누구라도 가면 만족할 듯. 풍광이 예술이다. 3. 교통편은 어때요? - 대단히 편리하다. 부산역 앞 횡단보도 투썸 플레이스 골목으로 그냥 걸어 올라가면 된다. - 산복도로로 접근하려면 38, 86, 186, 190 동일파크맨션 정류장 하차(공휴일에는 333번 운행)하여 이바구 공작소에서 시작하면 된다. 다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 해당홈페이지주소 : http://2bagu.co.kr/user/abt/map.do 4. 인근 편의시설, 주차장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요 ? -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제일 낫다. 자동차 진입이 되지 않는 골목이 많다. - 이바구길에서 운영하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을 적극 추천하다. 제일 나은 방법이다. - 자전거문의 : 부산역광장 홍보부스에서 티켓 발매 후 탑승 . - 운행시간 : 오전 10시 ~ 오후 4시 (월요일 및 우천시 휴무) - 운행코스 : 코스분리 없이 1개 코스로 운영 (소요시간 : 1시간 정도) ▷ CU편의점 → 백제병원 → 남선창고 → 초량2동 주민센터 → 한중우호센터 → 초1새마을금고 → 이바구담장 → 소림사 뒷길 → 죽림공동체 → 168도시락국 → 이바구충전소 → 이바구공작소 → 금수사 → 유치환우체통(반환점) → 이바구충전소 → 168도시락국 → 소림사 → 초량1동주민센터(동화문) → 패루광장 → 삼국지벽화 → 외국인거리 → 종착지 5. 유명세에 비하여 실제 모습은 어때요? - 아직은 정비가 더 필요하다. 모노레일이 완성되면 본격적인 관광지로서 역할 수행이 가능할 듯. 6. 여행객 응대 수준은 어떤가요? - 공무원들이나 길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경우는 대개 친절하지만, 아직도 불만이 있는 주민이 많은 것도 사실. 주민들끼리 해결해야할 문제도 많아 보인다. 기자가 이바구길 투어시 목격한, 검은 한복을 입은 도인(?) 할머니의 욕설은 가히 전설로 남아도 될 만큼 강렬했다. 욕할매 수준은 애교 수준이다. 부산은 원래 험한 바닷가 도시라는 것을 깜빡했다. 7. 여행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은 어떠한가요? 공부를 많이 하고 가야 하나요? 조심할 것이 있나요? - 그냥 피난민들이 만든 옛 도심 골목길이다. 다만, 부산의 피난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면 좋다. 8. 전체 여행 경비는? - 이 곳에는 노인 일자리 사업장으로 168 도시락, 625막걸리,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충전소가 있다. 동네 주민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가성비는 최강이다. 특히 도시락집에서 판매하는 시락국과 도시락은 꼭 먹어보길. 9. 가장 감탄하는 점은 어떤 것인가요? - 경치, 부산이 다 내려다 보이는 경치. 그리고 이 높은 곳을 오르내리는 노인분들의 건강한 다리. 정말 가파르다. 10. 아쉬운 점이 있다면? - 시작단계여서 무언가 어수선하다. 정학한 동선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나 이야기들이 더 많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도 부족한 가운데서 열심히 노력하는 공무원들이나 주민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11. 운영진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 수익사업이 더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마땅히 쉴 공간이 잘 안내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대한 자전거를 늘릴 수록 이바구길은 성공할 듯. 12. 홈페이지 주소는? - 이바구길 http://2bagu.co.kr/user/main/main.do 13. 꼭 추천하고픈 공간이나 체험활동은? - 무조건 자전거 투어. 자전거가 8대 뿐이다. 빨리 신청하자. 14. 여행을 비추하고픈 사람과 이유는? - 부산역 기차 출발시간에 쫓기는 분이나 고소 공포증이 있으신 분들. 15. 먹거리 정보와 식당 정보는? - 168 도시락과 625 막걸리외에도 동네 작은 식당들이 많다. 이바구길 입구 왼편이 인천 차이나타운에 버금가는 부산 차이나타운 맛거리이다. 16. 어떤 코스를 도는 것이 좋을까요? 추천코스는? - 구 백제병원에서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코스가 제일 낫다. 17. 도움되는 사이트? - 소설가 이호철씨의 네이버 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3&contents_id=27299) 피난민과 전쟁세대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필요하다. 18. 부산에 이와 유사한 다른 공간도 있나요? - 원래 부산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이 골목 투어의 원류이다. 초량 이바구길외에도 호랭이이바구길, 부산이바구길이 인접해있다. 19. 숙소정보는? - 이왕 온 것이니 이바구길에서 운영하는 이바구충천소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20. 총평 및 당부사항 - 현재 점점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고 있다. 좀 더 전문화된 관광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김민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치 하나로 이 모든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다. 부산 전경을 바라보는 풍광은 진정 최강임!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개’와 ‘일본인’은 출입 금지…심화하는 中의 반일감정

    ‘개’와 ‘일본인’은 출입 금지…심화하는 中의 반일감정

    최근 베이징에 자리한 한 상점에서는 ‘개와 일본인 입장 사절(谢絶日本人入內)’라는 팻말을 내걸어 해당 상점에 대한 이목이 집중됐다. 베이징 하이덴취(海淀區) 빠고우(巴沟) 인근에서 수 년 째 등산용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해오고 있는 해당 상점 관리인은 "이 일대에 유독 애견을 키우는 분들이 많이 거주한다. 상점에 들어올 때 강아지를 상점 밖에 묶어둔다면 들어올 수 있다"면서도 "일본인은 어떤 경우에도 상점에 입장할 수 없도록 이같은 푯말을 게재했다. 그들에게는 물건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일대 상점 주인들의 일관된 생각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해당 상점 이외에도 신발 소도매점, 소규모 숙박업체 등에서 '일본인 입장 금지'라는 푯말을 내걸고 운영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중국에서의 반일 감정의 역사적 연원은 깊다.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대륙 침략과 중국인 학살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가 없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2013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국유화 절차 진행 등 현재 닥친 문제로 인해 한층 골이 깊어진 것이다. '일본인 출입금지' 팻말에서 보여지듯 중국의 반일 감정 수준은 비단 정치적 사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욱이 베이징은 중국에서도 유독 반일 감정이 깊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지난 2005년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중국 네티즌 서명자들의 지역별 통계수치에서 베이징 거주자의 참여도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반일 감정이 악화됨에 따라, 최근 베이징에 소재한 일본인 학교의 학생 수가 급감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경제전문지 산징신원(产经新闻)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베이징 소재 일본인 초중등학생의 수가 398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7~2008년 집계 당시와 비교해 약 40% 이상 감소한 수치로, 지난 20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학생 수가 급감했으며, 2013년 600여명이었던 학생 수는 2014년 500여명, 2015년 398명 등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지난 1974년 베이징 차오양구(朝阳区)에 처음 설립된 일본인 학교는 1976년 중국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고 이후 일본 경제 성장이 가파르게 성장, 중국에서의 지속적인 확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최근 중국에서 반일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해마다 일본인 학생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것으로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실제로 2014년 이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9월 3일 항일 승전일에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도요타, 닛산, 혼다 등 일본산 자동차 소유자들이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활용해 출퇴근을 하거나, 자차를 이용해야 할 경우 차 전면에 '차주는 중국인입니다'라는 표시를 게재한 뒤 이동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목격된다. 일본산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시에 발생할 수 있을 만일의 폭력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다. 또 이에 앞서 지난 2012년 베이징에서는 일본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차주를 차 밖으로 끌어내 폭행하고 차량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 베이징시 소재 혼다 영업점에서는 차주들에게 운전 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메일을 보내기도 한 바 있다. 글·사진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위령비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 없는 글귀가

    위령비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 없는 글귀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27일 방문하는 일본 히로시마시 평화공원은 요즘 수학여행철을 맞아 하루에도 수 만명의 학생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공원은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기점이 된 원폭돔(옛 히로시마 물산장려관) 등 폭심지 주변을 정돈해 1952년에 조성됐다. 정문 격인 공원 남쪽 입구에는 ‘폭풍 속의 모자상’이 세워져 있다. 원폭으로 인한 열선(熱線)과 초강력 태풍 속에서 두 아이를 업고 안은 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성을 표현했다. 바로 뒤 분수를 지나면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이 나온다. 세계 최초 원폭 피해 자료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원폭 화상으로 숯덩이처럼 형태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소녀의 얼굴, 타고 녹아버린 손과 발, 원폭의 열에 녹아 고철이 된 자전거, 원폭으로 부서지고 녹아버린 건물과 기물 잔해들, 희생자 유품, 백혈병, 암 등 각종 후유증으로 천천히 고통을 받다가 죽어간 피폭자들…. 이곳을 한번 돌아보면 “가해국 일본이 피해만을 강조한다”는 말이 쑥 들어간다. 자료관은 그만큼 원폭의 처참함과 무서움을 실감케 한다. 히로시마에서만 원폭 투하 직후 7만명이 폭사했고 또 다른 7만여명은 후유증으로 죽었다. 지난달 27일 주요 7개국 히로시마 외무장관회담 뒤 이곳을 찾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마음을 흔들어대고, 속을 쥐어짜는 전시”라고 말을 잊지 못했다. ‘원폭의 비극과 평화의 염원’을 모티브로 한 이 공원을 돌아보고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구름다리로 이어진 두 동의 자료관 뒤에는 이 공원의 핵심 조형물인 ‘원폭사망자위령비’가 서 있다. 석관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아치 모양의 석조 구조물이 싸고 있다. 기자가 찾은 23일 일본인 학생과 방문객들은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외국인들은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단체로 온 일본 학생들은 추모 노래를 부르며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이들 역시 공원을 오가면서 오바마를 화제에 올리고 있었다. 원폭사망자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십시오.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주어가 없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위령비 주변을 둘러싼 연못 바닥에는 한국어 등 8개 나라말로 같은 글귀가 쓰인 동판이 깔려 있었다. 이 위령비가 일본인뿐 아니라 모든 희생자를 위한 것임을 알리는 동판들이었다. 참혹한 역사의 증언장은 1996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돼 외국인들의 발길을 잡아당기는 곳이 됐다. 원폭 위령비 앞에 서면 평화를 염원하며 타고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마주하게 된다. 그 뒤로 원폭돔이 일렬로 눈에 들어온다. 뼈대만 남은 원폭돔은 보수 중이었다.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101년 된 이 건물은 원폭에도 무너지지 않은 몇 채 안 되는 건물로 원래 이름은 물산장려관이다. 왜 원폭이 투하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 보였다. 오바마는 자료관을 둘러보고, 위령비에 헌화할 예정이다. 앞서 존 케리 국무장관은 방문 당시 예정에 없던 원폭돔까지 갔었다. 원폭사망자위령비에서 서쪽으로 3분여 거리에는 나무들 사이에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운 높이 5m, 무게 10t의 한국식 비석인 ‘한국인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1970년 세워진 것을 1999년 일본 우익과 조총련 등의 반대를 뚫고 공원으로 옮겼다. 이곳은 평화공원을 찾는 일본 학생들이 꼭 들러가는 곳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도야마현 가미이치 중학생들은 피폭단체 회원 등 자원봉사 해설사들로부터 “한국인들은 강제징용 등으로 이곳에 와서 살다가 5만여명이 피폭되고 2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을 듣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한국인 8만여명이 살고 있었다. 원폭 투하 당시 전차 안에 있다가 피폭됐던 박남주(84·여) 피폭자대책위 고문은 “한국인들이 많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오바마가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면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일본은 먼저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히로시마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우린 오바마 사죄 요구하지 않겠다 日총리가 먼저 하와이서 사죄해야”

    “우린 오바마 사죄 요구하지 않겠다 日총리가 먼저 하와이서 사죄해야”

    “우리(한국인 피폭자)들은 (핵폭탄 투하에 대해) 오바마의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 원폭이 사라져야겠지만 우리는 일본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광복 뒤에는 미국(원자탄)이 있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전에 일본 총리가 하와이 진주만을 먼저 찾아가서 사죄했어야 했다.” 피폭자 이종근(88)씨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의 원폭 피해에 대해 정확히 알아주었으면 하고 평화공원 내 한국인위령비에도 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인 이씨는 16세 때 폭심지에서 1.8㎞쯤 떨어진 곳에서 피폭됐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이었다. 그날 그는 전차를 타고 가다 시내의 서쪽 외곽 고진바시에서 내렸고, 시내 쪽으로 더 달리던 전차에 타고 있던 친구는 폭사했다. 운 좋게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부상이 회복됐지만 시내 공장에 일하러 갔던 두 살 터울 누나(이동녀)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평화공원에 오면 빼놓지 않고 한국인위령비와 함께 무연고 유골들을 모셔 놓은 공양탑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 행여 누나의 시신이 이곳에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그의 가장 큰일은 피폭 증언이다.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원폭자료관에 가서 수학여행 오는 일본 학생들에게 경험을 전하고 대화를 나눈다. 23일에도 이씨는 강연장에서 야마구치현 고신초 6학년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인이 아닌 내가 왜 히로시마에서 피폭됐을까”라면서 강연이 시작됐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화, 강제징용 등 한국인 피폭자들의 역정과 핵무기의 처참함 등을 알리고 있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외국관광객 재방문율↑, 체류기간↑, 1인당 지출경비↑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래관광객의 46.1%가 한국을 2회 이상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의 체류 기간과 1인당 지출경비, 방문지역 등도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3일 이같은 내용의 ‘2015 외래관광객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방한 횟수가 2회 이상인 외래관광객은 46.1%였다. 1회 방문은 53.9%, 2회는 16.3%, 3회는 7.9%, 4회 이상도 21.9%로 나타났다. 국가별로는 일본인 관광객의 재방문율이 78.7%로 가장 높았다. 이어 싱가포르(60.6%), 홍콩(59.0%), 러시아(57.7%) 순이었다. 하지만 재방문율의 전체적인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관광객의 재방문율이 37.8%에 그친 점은 매우 아쉽다는 것이 관광업계 안팎의 분위기다. 한국 선택 시 고려 요인은 여전히 ‘쇼핑’이 72.3%로 가장 높았으나 전년 대비 비중은 감소했다. ‘음식·미식 탐방’ ‘역사·문화유적’ ‘패션 유행 등 세련된 문화’ 등은 전년 대비 비중이 증가했다. 1인 평균 지출 경비는 1712.5달러로 전년 대비 107달러 늘었다. 여행유형별로는 개별여행객이 1673.4달러, 단체여행객이 1908.4달러, 에어텔 여행객이 1286.2달러로 조사됐다. ‘1일 평균 지출 경비’는 328.1달러로 전년 315.8달러에 비해 증가했다.  한국 여행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는 93.5%로 전년 94.0%에 비해 0.5%포인트 하락했다. 다만 ‘앞으로 3년 이내 관광목적 재방문 의향’은 85.6%로 전년 대비 0.2%포인트, ‘타인 추천 의향’은 90.3%로 전년 대비 0.8% 포인트 증가했다. 이번 조사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뒤 출국하는 만 15세 이상 외래관광객 1만 2900명을 대상으로 면접을 통해 실시됐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콰이강의 다리´서 셀카 몰입 일본 남성, 열차에 ´쾅´

    ´콰이강의 다리´서 셀카 몰입 일본 남성, 열차에 ´쾅´

     태국 유명 관광지인 ‘콰이강의 다리’(사진)에서 셀카에 열중하던 일본 남성이 열차에 치여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22일 치앙마티타임스 등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날 태국 서부 깐짜나부리 무앙 지구에 있는 ‘콰이강의 다리’에서 일본인 남성 하루히사 사이토(52)씨가 열차에 치였다.  경찰에 따르면 현지에서 일본 기업의 현지지사 대표인 사이토씨는 이날 직원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가 혼자 다리 위로 올라가 셀카를 찍던 중이었다. 그는 열차 선로가 지나는 다리 위를 걸으며 셀카에 열중한 나머지 뒤쪽에서 다가오는 열차를 감지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 심지어 그는 열차가 여러 차례 경적을 울리며 경고를 했는데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결국 그는 열차와 충돌하면서 5m 높이의 다리 아래로 추락했고 머리와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주변에 있던 1000여 명의 관광객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충돌 상황에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 다리는 일제가 동아시아 정복을 위해 수십만 명의 전쟁포로와 부역자를 동원해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죽음의 철도’ 구간에 있는 다리로 지금은 태국의 유명 관광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금주령 내린 영조도 송절주만 보면 술술~

    금주령 내린 영조도 송절주만 보면 술술~

    #1. 조선의 영조대왕은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다. 백성의 주식인 쌀을 술 빚는 데 쓰는 것, 관료들이 반주를 하다 폭행으로 비화돼 당파싸움이 심해지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최대 사형에 처할 정도로 중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정작 영조 자신은 소나무 여린 가지의 마디로 담근 송절주(松節酒)를 즐겨 마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대왕이 송절차를 즐겨 마셨다’고 기록돼 있지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부 교수는 영조가 자주 마셨다는 ‘송절차’가 실제로는 차가 아니라 송절주라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문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영조가 송절차를 내렸는데 취기가 돌았다’고 적힌 대목이 나오고,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조에게 술을 적게 마시라고 권유했던 것 역시 영조의 이러한 ‘이중생활’이 사실임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은은한 솔 향기와 함께 쌉쌀하고 새콤한 맛에 뒤끝이 깨끗한 송절주는 관절통과 근육경련, 타박상, 관절과 발의 만성통증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 교수는 “영조는 하반신 관절이 약했는데, 여기에 송절주가 효과적이었다”고 전한다. 영조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은 법주를, 연산군은 녹파주, 숙종은 삼해주, 고종은 이강주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알려졌다. #2. 18세기 프랑스 지성의 토론이 ‘살롱’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면, 조선의 실학은 다산 정약용의 ‘사의재’(四宜齋)에서 꽃피웠다. 사의재는 다산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동문매반가’라는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했던 주막의 골방이다. 사의재는 생각·용모·말·행동의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뜻이다. 다산은 이 주막에서 세상과 소통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저술했다. 비록 유배지의 누추한 주막 골방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사의재는 다산이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희망과 창조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온 서양 선교사들, 금주를 제1계명으로 우리 민족은 술을 좋아한다. 희로애락(喜哀). 기쁠 때와 즐거울 때는 물론, 화나고 슬플 때도 술을 마셨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으면, 조선을 처음 찾은 서양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기 전에 술부터 끊으라고 ‘금주’를 제1계명으로 내세웠을 정도다. 아이가 태어나도, 어른이 돌아가셔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것은 술이었다. 갑신정변의 뒷얘기를 담은 ‘윤치호 일기’를 보면 김옥균 등 당시 급진 개화파들은 살 떨리는 ‘혁명’의 대사를 앞두고도 술잔을 주고받다 ‘대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다 보니 국내 전통주는 조선시대에 그 종류만 수백 가지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 들어서면서 술이 과세 대상이 되고, 조선총독부가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해 양조장을 통폐합하면서 전통주의 명맥도 급격히 끊어졌다. 잊혀져 가는 전통주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행사가 20일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열렸다. 한국전통음식연구소가 농림축산식품부,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서울시의 후원으로 ‘제9회 전통주와 전통음식의 만남 축제’를 개최했다. 전통주 종류가 가장 다양했던 조선시대 주막을 재현, 각 지역의 다양한 전통주를 소개했다. 조선시대는 전통주가 가장 다양하던 시기다. 집집마다 술을 직접 양조해 마시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발달했다. 지방과 가문의 명주들도 이때 등장했다. 서울의 춘주, 평양의 벽향주, 김제의 청명주, 충남의 소곡주가 특히 유명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통주 종류만 600여 가지에 달했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통주는 모두 32가지다. 문배술, 송절주, 안동소주, 진도홍주, 한산 소곡주 등 잘 알려진 술도 있는 반면 대구의 하향주, 경기의 계명주 등 대중에게 생소한 술도 그 종류가 적지 않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주 명인들은 조선의 전통주를 폄하하고 대대적인 밀주단속을 벌이기도 했던 일제 치하에서도 명맥을 잇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런데 그 엄혹한 시대에도 맛으로 일본을 홀린 술이 있었으니, 바로 김천 과하주다. 일본인들이 나서서 합작회사를 만들어 대량생산하고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다. 과하주는 조선 초기부터 왕에게 진상됐고, 상류층이 즐기던 접대용 술이었다고 한다. 살짝 맛을 보니 쌀(찹쌀, 멥쌀)과 누룩으로만 술을 빚었다는데 신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은은한 국화향까지 풍겼다. 송강호 명인은 그 비법을 “보통 술을 만들 때 발효를 돕기 위해 일정하게 온도를 올려주는 것과 달리 과하주는 반대로 술을 천천히 발효시키기 위해 저온을 유지한다”면서 “일반적인 제조법과 반대로 고두밥도 완전히 식혀서 사용하는데, 당질이 모두 알코올로 바뀌지 않고 약간 남아 있을 때 발효를 끝내기 때문에 기분 좋은 단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과하주도 일제 말기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군량미 수탈이 심해지면서 생산이 금지되는 고초를 겪었다. 국권을 되찾은 뒤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제 성장기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정부가 양곡보호 조치(1965년)로 쌀로 술을 빚는 것을 전면 금지했고, 대신 밀가루 막걸리와 희석식 소주가 보급됐다. ●한옥마을서 한국판 소믈리에 ‘주향사’선발대회 한옥마을에서는 ‘주향사’ 선발대회도 열렸다. 주향사는 와인으로 치면 라벨을 보지 않고, 생산연도와 포도 품종을 맞히는 소믈리에와 유사한 직업이다. 8명의 참가자는 무대 위에 둘러앉아 신중한 표정으로 술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제공된 술은 감미로운 향과 특유의 감칠맛 때문에 ‘앉은뱅이 술’로 알려진 한산 소곡주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골똘한 생각에 잠겼던 8명의 주향사 지원자 가운데 정확하게 한산 소곡주를 맞힌 이는 4명이었다. 주향사는 우리 술의 맛을 감별하는 것 외에도 전통주에 맞는 우리 음식을 선별하는 전문가이다. 예를 들어 한산 소곡주에는 술의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는 미나리전을, 신맛이 감도는 과하주에는 고추장 양념 불고기 등을 조합·추천하는 것이다. 또 ‘소폭’(소주+맥주)보다 막걸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셀프 칵테일 제조법도 갖가지다. 막걸리의 텁텁한 맛을 사이다로 잡아내고, 망고나 오이 등을 갈아 넣어 과일의 맛을 내는 식이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부부를 비롯한 각국의 대사들도 행사장을 찾아 우리 전통주의 맛과 제조과정을 체험하고는 엄지를 추켜세웠다.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은 “우리 술의 맛과 향은 와인이나 사케보다 더 깊고 다채롭다. 백곡, 조곡, 이화누룩 등 20여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누룩 때문”이라면서 “누룩으로 발효시키는 것으로 고두밥만 생각하지만, 고두밥 대신 죽, 백설기, 우엉떡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재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맛과 향을 낸다”고 설명했다. 올 초 정부는 전통주 문화 활성화를 위해 관련 법령을 완화했다. 맥주로 한정한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 대상에 탁주, 양주, 청주를 추가했다. 기존에는 양조장의 담금·저장용기가 탁주·약주는 5㎘ 이상, 청주는 12.2㎘ 이상인 경우에만 전통주를 제조할 수 있었다. 이젠 1㎘ 이상 5㎘ 미만 저장용기를 보유하면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를 받을 수 있다.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를 얻으면 음식점에서 팔거나 병에 담아 외부에 판매할 수 있다. 이날 한옥마을에서는 국세청 직원의 주류면허 취득에 관한 컨설팅, 창업 설명회도 열렸다. 윤 소장은 “이제 우리의 술과 음식으로 식문화를 되살리는 한편 전통주의 상품화도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면서 ”지역별 고유의 술 혹은 집안의 내림술을 발굴해 상품으로 개발하는 일은 한식 세계화는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외국인 보유토지, 전체 국토의 0.2% 차지… “제주도 중국인이 1.1% 가져”

    외국인 보유토지, 전체 국토의 0.2% 차지… “제주도 중국인이 1.1% 가져”

    외국인 소유의 땅이 국토의 0.2%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는 전체 면적의 1.1%를 중국인 등의 외국인이 가진 것으로 집계돼 전체 면적 대비 외국인보유토지 비율이 처음으로 1%를 넘었다. 20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외국인(외국 국적 개인·외국 법인·단체)이 국내에 보유한 토지는 2억 2827만㎡로 전체 국토면적의 0.2%였다. 이는 여의도 면적(윤중로 둑 안쪽 290만㎡)의 약 79배로, 공시지가로 따지만 32조 5703억원에 달하는 가치다. 외국적을 가진 교포의 토지가 1억 2435만㎡(54.5%)로 외국인 보유토지의 절반 이상이었고 나머지는 합작법인(7564㎡·33.1%), 순수외국법인(1742만㎡·7.6%), 순수외국인(1029만㎡·4.5%), 정부·단체 등(57만㎡·0.3%)이 보유했다. 국적별로는 미국인이 1억 1741만㎡(51.4%), 유럽 국적이 2209만㎡(9.7%), 일본인이 1870만㎡(8.2%), 중국인이 1423만㎡(6.2%), 기타 국적이 5584만㎡(24.5%)를 가졌다. 용도별로 나누면 임야·농지가 1억 3815만㎡(60.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공장용 6393만㎡(28.0%), 레저용 1196만㎡(5.2%), 주거용 1016만㎡(4.5%), 상업용 407만㎡(1.8%) 등의 순이었다. 시도별로는 전남(3826만㎡·16.8%), 경기(3599만㎡·15.8%), 경북(3485만㎡·15.3%), 강원(2164만㎡·9.5%) 순으로 외국인보유토지가 많았다. 최근 외국인투자가 급증한 제주도는 외국인보유토지가 2059만㎡로 제주도 전체면적의 1.1%를 차지했다. 중국인이 제주도에 땅을 914만㎡(44.4%)나 가지고 있었고 미국인은 368만㎡(17.9%), 일본인은 241만㎡(11.7%)를 보유했다. 지난해 말 외국인보유토지는 재작년 말과 비교하면 1999만㎡ 늘었다. 증가분(면적)을 시도별로 나누면 경기도가 797만㎡, 제주도가 489만㎡, 경북이 179만㎡, 강원이 123만㎡였다. 제주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적을 둔 외국법인이 오라관광단지에 복합리조트를 조성한다며 땅을 289만㎡ 사들여 외국인보유토지가 늘었다. 외국인보유토지의 총 공시지가는 1년간 2조 3308억원 뛴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제주도 땅 1% 외국인 소유

     국토의 0.2%를 외국인이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도 땅은 외국인 보유토지 비율이 1.1%에 이르렀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말 현재 외국인(외국적 개인·외국 법인·단체)이 보유한 토지는 2억 2827만㎡로 국토면적의 0.2%로 집계됐다고 20일 밝혔다. 외국인 보유 토지는 여의도면적의 약 79배이다. 공시지가 기준 32조 5703억원어치다. 전년과 비교해 1999만㎡ 늘었고, 공시지가는 2조 3308억원 올랐다.  외국적을 가진 교포 소유가 1억 2435만㎡(54.5%)이고 합작법인(7564만㎡·33.1%), 순수외국법인(1742만㎡·7.6%), 순수외국인(1029만㎡·4.5%), 정부·단체 등(57만㎡·0.3%) 등이 갖고 있다. 국적별로는 미국인이 1억 1741만㎡(51.4%), 유럽 국적 2209만㎡(9.7%), 일본 1870만㎡(8.2%), 중국 1423만㎡(6.2%), 기타 국적자 5584만㎡(24.5%) 등이다. 제주도 외국인 보유땅은 중국이 914만㎡(44.4%), 미국 368만㎡(17.9%), 일본인은 241만㎡(11.7%)를 보유했다.  세종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오바마, 한국인 위령비는요?

    오바마, 한국인 위령비는요?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는 18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오는 27일 일본 히로시마 방문과 관련, 한국인을 포함한 원폭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 정부가 오바마 대통령의 추모 대상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처음이다. 미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 기간 중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방문하거나 원폭 피폭자들과 만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모른다”며 함구했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태 담당 선임보좌관은 이날 외신기자센터 브리핑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에 들를 것이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 알지 못한다”며 “강조하고 싶은 것은 대통령이 2차대전에서, 그리고 원폭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을 기리고자 이번 방문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역사적 기록을 보면 원폭으로 많은 일본인에 더해 많은 한국인도 희생됐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온 많은 다른 아시아인(희생자)도 있었다”며 “대통령이 가서 모든 희생자를 기린다고 말할 때는 바로 그것을 진정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통령이 거기에 있는 동안 무슨 행동을 하든, 하나의 중심 목적은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 같이 참석한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오바마 대통령은 깊은 존중의 마음으로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할 것”이라며 “원폭으로 수많은 일본인이, 수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었고 다른 아시아인들과 미국 전쟁포로도 희생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 및 관련 단체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인 위령비 참배를, 일본 측 피해자 단체 등은 피폭자와의 만남을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체류 시간 및 동선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인 위령비 방문이나 피해자 만남은 어려울 것”이라며 “한국인 위령비 방문은 일본 측이 민감해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1970년대 청계천, 그 곁을 지켰던 제정구

    1970년대 청계천, 그 곁을 지켰던 제정구

    일기장 등 제 前의원 유품 처음 공개 “판자촌 사람들의 삶 기억하는 기회” ‘도시 빈민의 친구’ 고 제정구 전 국회의원의 삶을 다룬 사진전이 열린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청계천박물관은 ‘제정구의 청계천 1972-1976’ 사진전을 4일부터 다음달 26일까지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1971년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던 제정구는 교련 반대 시위로 제적된 뒤 우연히 청계천 둑 판자촌에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일기에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라며 도시 빈민의 열악한 삶을 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1972년 청계천 활빈교회의 배달학당 야학 교사로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1월에는 아예 청계천으로 이사해 넝마주이와 단무지 장사를 하며 본격적인 빈민운동가가 됐다. 빈민들의 삶에 녹아들어 갈 즈음 제 전 의원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다. 감옥에서 나온 뒤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도시빈민연구소를 세웠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인 뒤 1992년 처음 경기 시흥·군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재선에 성공한 제 전 의원은 임기 중인 1999년 폐암으로 5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번 전시에선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의 협조로 제 전 의원의 유품이 처음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된다. 유품 중에는 청계천 판자촌 생활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제 전 의원이 사용한 수첩과 일기장, 1986년 수상한 ‘막사이사이상 메달’ 등도 있다. 전시회에선 일본인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기증한 사진 90여점도 볼 수 있다. 노무라 목사는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 사진을 비롯한 826건의 자료를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사종민 박물관장은 “까마득하게 잊힌 사회적 약자, 판자촌 사람들의 삶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료. 월요일은 휴관한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홍콩 누아르에 바친다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홍콩 누아르에 바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택이 방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보면서 어설픈 중국어로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웅본색’의 주제가다. 생각만 해도 맘이 짠해지면서 젊은 그 시절을 생각게 하는 영화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는 홍콩 누아르의 시대였다. 한국 영화가 대세인 지금과는 달리 80년대 극장가는 홍콩 영화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웅본색’이 있었다. 학창 시절 공부했던 사자성어 네 글자 제목으로 우리를 홀리던 영화는 지독히도 어두웠다. 80년대 홍콩의 허무한 분위기를 반영하며 남성 간의 유대를 강조한 범죄영화들이 유독 많았다. 음산한 톤과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영상이 특징이다. 범죄와 파멸이 반복되는 지하 세계의 운명을 그려 보이는 자동차 브레이크의 파열음과 총소리가 뒤섞인 음향이 날카롭다. 희미한 담배 연기가 깔린 듯 스크린은 늘 어둡다. 살인청부업자, 형사 등을 주인공으로 비정하고 냉혹하게 범죄자들의 세계를 묘사했다. 스크린 곳곳에 바닥 삶의 고단한 냄새가 배어 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홍콩 누아르’라고 불렀다. 암흑가의 범죄물을 다룬 영화 장르를 ‘필름 누아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80년대 홍콩 영화는 이처럼 대개 음울했다. ‘검다’는 뜻의 불어 ‘누아르’(Noir)를 알게 된 것은 과외의 소득이었다. 홍콩 누아르는 70년대 이 땅의 청소년들을 들뜨게 했던 이소룡 세대에게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시그널과 같았다. 이소룡은 1973년에 죽었다. 하지만 미녀 여배우와의 섹스 도중 절정의 순간에 죽었다는 확인되지도 않은 야한 소문과 함께 그의 영화는 그 시절 한국 청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교실에는 ‘아뵹’ 소리를 지르며 쌍절곤을 들고 설쳐대던 소년들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로까지 발전된다. 영화는 70년대 말 유신 말기 고등학교를 다녔던 내성적인 현수라는 인물이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남성적인 정체성을 촉진하는 일종의 촉매로 ‘아뵹’이라는 요상한 기합 소리와 함께 이소룡의 절권도가 등장한다. 정무문, 당산대형, 용쟁호투 등등 주먹을 사용한 이소룡 영화가 기성세대의 치기 어린 십대를 사로잡았다면 총을 무기로 한 영화 ‘영웅본색’류의 홍콩 누아르는 기성세대의 이십대 청춘을 열광케 했다. 무협영화의 서슬 퍼런 칼싸움은 굉음과 함께 스펙터클한 총싸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발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슬로모션의 총격신은 비장미를 더했다. 이 같은 누아르 영화의 본질은 의리였다. 수컷들의 우정과 의리, 그리고 거금이 등장하는 영화에는 곧잘 배신이 숨겨져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방정식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웅본색’도 의리와 배신, 그리고 파국이라는 전형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영웅본색’을 두고 이 같은 플롯을 나열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기실 이소룡이 ‘아뵹’으로 70년대 십대들을 사로잡은 것과 같은 이치로 ‘영웅본색’은 주인공 주윤발의 스타일이 한몫한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긴 버버리 코트를 입은 채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던 바로 그 장면이다. 아, 또 있다. 틈만 나면 성냥개비를 이쑤시개처럼 씹어대던 그 모습은 또 어떠했던가? 무서울 만큼 냉정하고 장난기 가득한 유머를 지니면서도 짙은 페이소스가 넘치던 그는 극 중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기에 사람들은 ‘영웅본색’과 주윤발을 동일시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까지 빚게 된다. 이는 조금 앞서 등장한 할리우드 영화 대부를 말런 브랜도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어 등장한 밀키스 광고가 그의 인기를 가늠케 한다. 단언컨대 그는 이 영화 한 편으로 1980년대 한국의 모든 남성에게 온갖 판타지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영웅본색’이 80년대 청춘을 사로잡은 데는 배경 도시 홍콩이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 금융이 발달한 도시이며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다. 낭만과 범죄가 동시에 가능한 최적의 도시가 홍콩이었다. 기억하시는가. 유년 시절 구슬치기를 하면서 멀리 보낼 때 홍콩 보낸다고 얘기하곤 했다. 지금에야 하루이틀 잠깐 쇼핑하러 다녀오는 땅이다. 하지만 먼 나라까지는 갈 생각도, 능력도 없던 80년대 홍콩은 이 땅에서 극소수 부유층들이나 다녀올 수 있는 꿈의 도시였다. 중국 땅이지만 오랜 세월 영국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가까이서 유럽의 풍취를 느낄 수 있어 더욱 인기였다. 그래서 치파오 차림의 제니퍼 존스와 윌리엄 홀든이 나왔던 영화 모정(Love is many splendored thing)의 무대인 리펄스 베이와 빅토리아 병원 뒤 늙은 느티나무는 가 보고 싶은 곳으로 손꼽혔다. 키 큰 느티나무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인증샷을 찍는 최고의 장소였다. ‘영웅본색’의 인기는 시대적인 분위기에도 힘입었다. 중국 반환을 앞둔 그 시기 홍콩은 암울했고 푸른빛 바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함께 사람들을 스산하게 했다. 모두들 마음속에 영웅이 필요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영웅본색’을 보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 총격신과 의리적인 복수는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하는 영웅의 비극적인 죽음은 현실을 잠깐 동안 잊게 하는 효과적인 기제가 됐다. 영화는 코믹한 이류 영화를 만들던 오우삼 감독을 일약 최고의 감독으로 만들었다. 첩혈쌍웅, 종횡사해, 첩혈속집, 영웅본색2 등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그는 홍콩 누아르 영화의 불패 신화를 지켜 나갔다. 지금이야 톰 크루즈, 니컬러스 케이지 등을 기용하며 세계적인 거물로 성장한 그를 두고 존 우(John Woo)나 우위썬으로 부르지만 기성세대에게 그는 오로지 ‘영웅본색’의 오우삼으로 기억된다. 나는 ‘영웅본색’을 생각하면 늘 80년대 중반 개봉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연결고리가 맞지 않아 이해되지 않던 그 영화가 3분의1 이상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민주화 이후 알고 잠깐 동안 절망했다. 세르조 레오네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아마포라의 선율 위에 펼쳐지던 밑바닥 인생들의 진한 우정과 배반, 상처,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에 우리는 망연자실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영웅본색’과 자연스레 연결돼 있다. 그래서 할리우드 갱 영화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우리는 이어 등장한 홍콩 누아르에 큰 거부감 없이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홍콩 누아르, 80년대 암흑세계를 다룬 그들과 울고 웃으며 우리들은 자랐다. 그 속에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영웅본색’의 핏빛 액션이 또렷히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얼마나 경제와 정치권력, 폭력과의 야합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영화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다. ‘영웅본색’, 80년대 이 땅의 뭇 남자들에게 성냥개비를 씹게 만들었던 영화와 함께 우리들의 이십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매체경영) yule21@empal.com ■편집자주: 격주 금요일자에 연재돼 온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은 필자 사정으로 잠시 중단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 [서울 핫 플레이스] 성북 역사문화지구

    [서울 핫 플레이스] 성북 역사문화지구

    서울 한복판에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 갱과 같은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있다. 옛날 왕과 고관대작의 무덤에 세운 문인석 300~400개가 있는 성북동 우리옛돌박물관이다. 우리옛돌박물관을 비롯해 옛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사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성북동이다. 성북동 역사문화지구가 도로 다이어트와 박물관 특화거리를 통해 더욱 찾고 싶은 곳으로 거듭난다. ■걷다 보면 시진핑이 놀란 가구박물관… 백석의 사랑 깃든 길상사 “근자열원자래(近者說遠者來)란 말이 있죠? 성북동 주민들이 우선 기쁘고 편안하면 멀리에서도 성북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성북구의 전경이 손에 잡힐 듯이 들어오는 우리옛돌박물관 4층 옥상에서 성북동 역사문화지구에 대한 구상을 펼쳐놓았다. 성북동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등 국보 12점을 소장한 간송미술관, 중국 시진핑 주석이 감탄한 한국가구박물관,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가 깃든 길상사 등 역사문화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여기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부터 성북초등학교 부근 선잠단지 앞까지를 보행 친화 거리로 만든다. 성북동 역사문화지구는 외부 관광객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성북동 주민들이 우선 만족하고 즐겨야만 나중에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등이 올라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김 구청장의 생각이다. 지나친 관광위주 개발로 변질한 삼청동, 북촌과 달리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성북동의 또 다른 매력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우리옛돌박물관은 성북동 박물관거리의 신생아다. 오후 9시까지 야간 개관을 하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100여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인기다. 옛돌박물관은 천신일 세중 회장이 건립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절친’답게 옛돌박물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언덕에는 이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소나무가 성북동을 굽어본다. 천 회장은 40년 가까이 석조 유물을 모아 대지 5500여평에 석물 1200여점을 갖춘 옛돌박물관을 열었다. 사립박물관이 도굴품이나 장물을 종종 전시해 논란을 일으켰지만, 옛돌박물관은 지난 15년간 용인에서 전시하면서 시비를 없앤 유물만 내놓았다. 전시품은 천 회장이 골동상이나 미술대학 교수로부터 사들였다. 특히 일본인 구사카 마모루부터 사들인 문인석 70점은 천 회장의 자랑거리다. 일본에서 문화재를 환수하는데 천 회장이 들인 정성은 일제 강점기의 ‘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박물관 1층에서 단아하게 똑 떨어지는 조명을 받는 문인석은 고고한 기운을 풍긴다. 문인석은 왕이나 고관대작 사대부들이 무덤에 세운 석물이다. 진시황이 죽어서도 능을 지키라며 병마용을 만든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세워졌다. 주은경 학예사는 “어른들은 어릴 때 지나가며 보던 돌 조각의 의미를 새로 배우고, 처음에는 무섭다고 울던 아이들은 박물관을 나갈 때면 벅수를 친근하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또 걸으면 석물 1200여점 옛돌박물관… 국보 창고 간송미술관 벅수는 동네 입구에 서 있던 돌장승이다. 생소하고 어렵고 무섭게만 느꼈던 돌 조각에 담긴 뜻을 깨우칠 수 있는 곳이 바로 옛돌박물관이다. 성북동 입구인 한성대입구역은 성북동역으로 문패를 바꿔달 예정이다. 지하철역부터 선잠단지 앞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약 850m의 길은 현재 왕복 6차선이다. 이 길은 도로 다이어트를 통해 왕복 2차선으로 줄이고 8~20m 이상 넓어진 보도에는 소규모 공연장, 상설 전시관, 거리카페 등이 생긴다. 현재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집터 앞에 만들어진 ‘방우산장’이 성북동길 다이어트의 좋은 예다. 시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있는 곳 앞에 공공 조형물인 의자가 여럿 놓였다. 의자는 도시에 놓는 장식용 건축물인 ‘어반폴리’로 실제로 주민이나 성북동 탐방객들이 앉아서 쉬어 갈 수 있다. 방우산장은 조 시인이 자신이 살던 곳에 붙였던 이름이다. 박원순 시장은 성북동에 옛날 사람들의 의식주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 특화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조선의 왕비들이 명주를 생산하고자 잠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지 옆에는 실크박물관을 만든다. 모시를 표백하던 마전터에는 공예공방을 조성하여 조선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다. 최순우 옛집, 성락원, 길상사, 이종석 별장, 심우장 등 아름다운 옛 건축물이 조화롭게 들어선 성북동에서는 한옥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시 산하기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면서 복합문화공간이란 기능을 못하는 데다 ‘임원 공짜식사’로 논란을 낳은 삼청각은 한국전통 식문화 체험공간으로 탈바꿈한다. 300억원의 예산을 들여 ‘한국 음식 문화의 전당’으로 2018년까지 재탄생한다. 1층은 한식당과 한식아트몰, 2층은 문화공간, 별채들은 테마 한식관으로 꾸며 민간업체에 운영을 맡긴다. 용인민속촌까지 가기 어려운 외국인들이 성북동에서 전통 의식주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성북구는 유엔아동기구인 유네스코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아동친화도시로 인증한 만큼 아이들을 위한 배려도 빠질 수 없다. 수유시설을 마련하고 유모차도 힘들지 않게 한양도성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무장애 보도를 조성한다. 김 구청장은 “코끼리 열차 같은 친환경 교통수단을 마련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성북동 전철역에서 한양도성까지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도시 빈민의 친구’ 제정구 사진전, 청계천박물관에서 26일까지

    ‘도시 빈민의 친구’ 제정구 사진전, 청계천박물관에서 26일까지

    ‘도시빈민의 친구’ 고 제정구 전 국회의원의 삶을 다룬 사진전이 열린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청계천박물관은 ‘제정구의 청계천 1972-1976’ 사진전을 4일부터 다음달 26일까지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1971년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던 제정구는 교련 반대 시위로 제적된 뒤 우연히 청계천 둑방 판자촌을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일기에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라며 도시빈민의 열악한 삶을 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1972년 청계천 활빈교회의 배달학당 야학교사로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1월에는 아예 청계천으로 이사해 넝마주이와 단무지 장사를 하며 본격적인 빈민운동가가 됐다. 빈민들의 삶에 녹아들어 갈 쯤 제 전 의원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다. 감옥을 나온 뒤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도시빈민연구소를 세웠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그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인 뒤 1992년 처음 시흥·군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재선에 성공한 제 전 의원은 임기 중인 1999년 54세 폐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번 전시에선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의 협조로 제 전 의원의 유품이 처음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된다. 유품 중에는 청계천 판자촌 생활 당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제 전 의원이 사용한 수첩과 일기장, 1986년 수상한 ‘막사이사이상 메달’ 등도 있다. 전시회에선 일본인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기증한 사진 90여점도 볼 수 있다. 노무라 목사는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 사진을 비롯한 826건의 자료를 지난 2006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사종민 박물관장은 “까마득하게 잊힌 사회적 약자, 판자촌 사람들의 삶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무료. 월요일은 휴관한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짝퉁’ 샤이니 고양이 그룹…샤이냥, 일본서 데뷔

    ‘짝퉁’ 샤이니 고양이 그룹…샤이냥, 일본서 데뷔

    그룹 샤이니(SHINee)를 모방한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 나왔다. SM재팬 소속 샤이냥(SHINYAN)이라는 그룹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람이 아닌 고양이 다섯 마리로 구성됐다. 멤버들의 이름도 샤이니 멤버들의 이름을 따 온유냥(ONEWNyan), 종냥(JONGyan), 키냥(KEYyan), 미노냥(MINONyan), 태민냥(TAEMINyan)이다. 샤이냥은 오는 18일 발매 예정인 샤이니의 ‘너 때문에’를 편곡한 ‘너 때문에 포 캣(For Cat)’으로 지난달 데뷔했다. 1일 유튜브에 공개된 ‘너 때문에 포 캣(For Cat)’ 뮤직비디오에는 샤이냥 멤버들이 무대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편 샤이냥은 고양이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에게 샤이니의 음악을 좀 더 친숙하게 알리고자 기획된 그룹으로 알려졌다. 사진·영상=SHINyan - 「君のせいで for cat」 Music Video/유튜브 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일본인 아닌 호주인이 비트코인 개발자였다

    일본인 아닌 호주인이 비트코인 개발자였다

    7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비트코인 개발자의 정체가 호주 기업가 크레이그 스티븐 라이트로 드러났다. 2일(현지시간) BBC와 이코노미스트 등 외신들은 그동안 ‘나카모토 사토시’로 불려 온 비트코인 개발자가 라이트라며 기술적인 증거들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라이트는 자신이 비트코인 개발자라며 초기에 만들어진 암호 키를 활용해 디지털 방식으로 메시지에 서명하는 모습을 시연했다. 또 비트코인재단 이사로 올라 있는 존 마토니스 등 비트코인 주요 관계자들도 라이트가 개발자임을 확인했다고 BBC는 덧붙였다. 라이트는 이날 인터뷰에서 “비트코인 개발자로 알려지면서 많은 거짓 이야기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며 “이제는 진실을 밝혔으니 세상이 나를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비트코인 개발 건으로 호주 당국의 압수수색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호주 브리즈번 출신인 라이트는 정보기술(IT) 업체, 호주 증권거래소 등에서 보안 및 방화벽과 관련한 업무를 했고 통계학석사, 컴퓨터공학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암호화가 가능한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은 발행 기관의 통제 없이 P2P(다자 간 파일공유) 기술을 통해 익명으로 거래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통 규모는 1500만 비트코인(약 7조 9000억원)이다. 2009년 1월 개발된 이래 폭발적 관심을 끌었으나 개발자는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의 일본계 프로그래머로만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정체를 놓고 다양한 추측이 제기돼 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도심선 드론이 ‘택배’·공원엔 보육원… 미래 바꾸는 日의 실험

    도심선 드론이 ‘택배’·공원엔 보육원… 미래 바꾸는 日의 실험

    한국과 마찬가지로 저출산·고령화란 주술에 걸려 있는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각 지자체 특유의 강점을 살려 미래와 미래의 먹을거리 준비에 분주하다. 소형무인항공기(드론) 실용화를 목표로 ‘하늘의 신산업’에 뛰어들고, 외국인을 받아들여 맞벌이 가정의 가사지원을 실시하는가 하면 턱없이 모자란 보육원을 공원 안에 짓는 등 ‘암반’으로 표현되는 규제의 벽을 뚫고 과거라면 상상도 못했던 실험을 일본 열도 곳곳에서 벌이고 있다. 지난달 11일 오전 도쿄 인근 지바시의 대형 쇼핑몰 앞 공원. 보슬비와 강풍이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와인 1병을 실은 드론이 쇼핑몰 옥상에서 이륙, 150m를 날았다. 드론은 1분 만에 무사히 착륙해 공원에서 기다리던 상품주문자 역할을 맡은 마키시마 가렌 내각부 정무관(중의원 의원)에게 와인이 전달됐다. 이어 1시간쯤 뒤, 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의 한 공원에서는 의약품을 탑재한 드론이 50m 상공을 날아 아파트에서 약을 기다리던 주문자에게 전달하는 상황도 연출됐다. 일본 정부로부터 ‘드론 실용화’를 위한 국가전략특구로 지정된 지바시가 내각부와 민간사업자와 함께 주최한 드론 택배 서비스의 제1차 실증실험은 성공리에 끝났다. 실험을 주도한 노나미 겐조 지바대 교수(주식회사 자율제어시스템연구소 대표 겸임)는 “미국에서는 벽지 등에서 드론을 이용한 실험은 있었으나 도시에서의 실험은 세계에서 처음”이라면서 “향후 1개월 1차례씩의 실험을 거쳐 3년 이내에 실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구 90만명의 지바시가 드론 상용화를 통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나카다이 히데요 지바시 마쿠하리 신도심과장의 설명은 이렇다. “새로운 산업의 상용화를 통해 정보, 통신, GPS 등 관련기업을 유치할 수 있고, 기업과 고용이 늘어나면 지자체의 세수 증대를 통해 시민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 나카다이 과장은 나아가 “저출산·고령화 추세 속에서 시민과 국민들의 생활 편의성을 높이는 한편 노동력 부족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항공 관련법 등은 바꿔… 새 규제 설정 과제 드론 운항의 안전성과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서는 사전에 해당지역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주민들은 오히려 ‘미래도시’라는 새로운 가치에 기대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3년 이내에 드론 상용화에 필요한 규제 완화 가운데 이미 드론 운항을 위한 항공관련법, 기업유치 지원을 위한 관련법이 개정된 것은 물론 새로운 규제도 설정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도쿄와 인접한 가나가와현. 인구 912만명으로 경기도와 비슷한 가나가와는 외국인 가사 대행서비스란 실험을 막 시작했다. 이민정책에서 세계적으로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이지만 부분적으로 규제를 완화한 것이다. 여성인력의 활용을 돕는다는 점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내건 ‘1억 총활약사회’를 뒷받침하는 야심 찬 플랜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신설된 1억총활약국민회의를 통해 “일본의 구조적 문제인 저출산·고령화에 정면으로 도전해 ‘희망을 낳는 강한 경제’, ‘꿈을 짜는 육아지원’, ‘안심하는 사회보장’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 ●가사도우미 27만명 필요… 인력 공급 회사 모집 이 같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맞벌이나 일하는 일본 여성의 가사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집안일과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인력을 외국에서 데려와 도우미 희망 가정에 배치한다는 게 골자. 가나가와현 노정복지과의 고가 신야 부과장은 “첫해에는 70~80명의 가사전문 인력을 외국에서 데려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민간연구소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3%가 가사지원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감안할 때 가나가와현에서도 27만명 정도의 가사지원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가나가와현은 외국인 인력을 들여올 민간회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3년 이상의 사업실적 등의 기준으로 선정할 계획이다.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경우 만 18세 이상으로 실무경험이 1년 이상이고, 가사에 관한 지식과 기능이 있어야 하며, 필요최소한의 일본어능력을 갖춰야 한다. 고가 부과장은 “제도가 실시되면 집안일이나 아이를 돌보는 데 시간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보수의 경우 외국인 가사도우미에게 일본인 이상의 보수를 제공할 방침이다. 도쿄도의 세타가야구는 일본 전국에서 어린이집 대기자가 전국 최상위로 보육수요가 높은 곳이다. 특히 중산층 이상 젊은 부부들의 전입이 많아 취학 전 아동이 한 해 1000명씩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 시설과 보육교사의 질이 좋고 보육비가 싼 국공립 어린이집을 선호해 대기자가 많은 데 비해 일본은 국가와 지자체가 인정한 인가보육원이 시설, 교사, 보육비 면에서 인기가 높아 공립 혹은 민간 구분 없이 대기자가 많다. 세타가야구는 현재 1만 4675명인 보육원 정원을 향후 5년간 2만명 규모로 늘려야 하는 ‘지상과제’를 안고 있다. 60인 규모의 보육원을 87개 정도 더 지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부동산 조사 전문인력 특채… 보육시설 8곳 개원 그래서 세타가야구는 보육원을 늘리기 위한 독특한 방법을 두 가지 고안했다. 스가이 히데키 보육계획·지원정비담당과장은 “민간 소유의 토지나 시설을 보육원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발로 뛰며 정보수집을 하고 보육원 전환을 유도하는 ‘부동산조사전문원’을 특별채용했는데 전국 지자체 중에서는 유례가 없는 제도”라고 말했다. 2013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전문직원을 통해 총 500건의 상담을 통해 실제로 8건이 보육원 개원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공원법상 공원 내에는 보육원을 짓지 못했으나 규제완화를 적용받는 특구로 지정됨에 따라 2곳의 공립공원에 보육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스가이 과장은 “공원이라면 주민과의 마찰도 적고, 보육원 입지로서 환경이 좋아 원활히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지바·요코하마 황성기 기자 marry04@seoul.co.kr
  • [MLB] 박병호, 데뷔 첫달 6방…김현수, 가끔 나와 6할

    [MLB] 박병호, 데뷔 첫달 6방…김현수, 가끔 나와 6할

    박병호 솔로포… 4월 팀내 홈런 1위 김현수 3안타… 감독 “정말 훈련 열심” ‘루키’ 박병호(30·미네소타)가 메이저리그(MLB) 데뷔 첫 달에 6홈런을 폭발시키는 괴력으로 한국인 거포에 대한 ‘의구심’을 걷어냈다. 박병호는 30일(현지시간) 타깃 필드에서 열린 디트로이트와의 홈 경기에 5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대포를 쏘아올렸다. 0-3이던 4회 2사 후 우완 선발 조던 지머먼의 슬라이더(시속 140㎞)를 걷어올려 좌중간 담장을 넘는 1점 아치를 그렸다. 지난달 27일 클리블랜드전 이후 3일 만에 나온 시즌 6호이자 비거리 130.45m짜리 대형 홈런이다. 4타수 1안타를 친 박병호는 4월 타율 .227(66타수 15안타)에 그첬다. 대신 안타 15개 중 10개를 장타(홈런 6개, 2루타 4개)로 연결하는 펀치력을 뽐냈다. 데뷔 첫 달 홈런 6방을 터뜨린 신인은 1982년 켄트 허벡(8개)에 이어 그가 두 번째다. 6홈런 중 5개가 타깃 필드에서 나와 홈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홈런 평균 비거리도 131.37m에 달해 빅리그 최강 거포에 뒤지지 않는 ‘파워’까지 입증했다. ●박병호 아시아인 최다 홈런 기대감 이로써 박병호는 한국인 거포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미네소타가 KBO리그에서 2년 연속 50홈런을 친 한국인 거포를 영입할 당시 현지 언론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지 의문”이라며 의구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박병호는 간판 미겔 사노(3개) 등을 제치고 팀 내 홈런 선두를 달렸다. 전날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4월 포지션별 최고 선수를 선정하면서 데이비드 오티스(보스턴) 대신 박병호를 꼽았다. 현재 박병호는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 시즌 최다 홈런을 갈아치울 기세다. 한국인 최다는 추신수(텍사스)의 22개, 아시아인 최다는 일본인 마쓰이 히데키의 31개다. 시즌 40홈런 페이스의 박병호를 감안하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빠른 변화구 공략·득점권 한 방 필요 하지만 과제는 남아 있다. 앞으로 박병호에 대한 견제를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관건이다. 빠른 공에 적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빠른 변화구에 약하다. 특히 득점권에서 무기력한 탓에 강한 인상을 심지 못하고 있다. 홈런이 6개이지만 모두 솔로포여서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박병호도 이날 “더 많은 타점을 올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선구안과 집중력을 높여 ‘해결사’ 면모를 과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MLB “김현수가 반전 일으켰다” 한편 김현수(28·볼티모어)는 이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 경기에 9번타자, 좌익수로 나서 4타수 3안타 1득점으로 활약했다. 하루 3안타는 처음이다. 김현수의 타율은 무려 .600(15타수 9안타)이다. 제한된 출전을 감안하면 김현수의 활약은 놀랍다. MLB.com도 “김현수가 반전을 일으켰다”고 전했다. 초반 극도로 부진했던 그도 빅리그에 적응한 모습이나 여전히 출장 기회가 적다. 벅 쇼월터 감독은 “정말로 타격 훈련을 열심히 소화했다”고 칭찬했다. 쇼윌터의 시선이 달라졌고 경쟁자 조이 리카드의 방망이도 주춤해 5월 기대를 부풀린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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