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인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징계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방사선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라이딩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 경상
    2026-08-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931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남촌 ‘다크투어’… 일제·독재의 잊고 싶은 기억을 기억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남촌 ‘다크투어’… 일제·독재의 잊고 싶은 기억을 기억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9회 서울사방 남촌 편이 지난 7일 중구 필동과 예장동, 회현동 일대 남산 아랫마을에서 진행됐다.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소서(小暑)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인터넷 예약에 실패한 네댓 분이 “신문 보고 왔다”며 즉석 합류를 요청해 운영진을 곤혹스럽게 했다.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 40개가 동나는 바람에 진행자용 기기를 양보했다. 많은 인원이 시원한 그늘을 찾아다니다 보니 행렬이 길어지고 시간이 지체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서울미래유산이 비록 국가공인 지정 및 등록문화재는 아니지만, 참가자 본인이 직접 겪고 들은 유형과 무형의 소중한 미래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실감했다.남산은 서울의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코스이다. 다크투어란 인간이나 자연이 저지른 어두운 현장을 찾는 역사교훈관광이다. 이날 참가자들은 남산골한옥마을(청학동, 조선헌병대사령부)을 출발, 필동 예술통(남학당)~서울소방재난본부(중앙정보부 유치장)~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녹천정, 통감관저·총독관저)~문학의 집(중앙정보부장 공관)~서울유스호스텔(중앙정보부 남산본관)~서울애니메이션센터(통감부·총독부)~남산원(노기신사)~한양공원비(왜성대공원)~백범광장(조선신궁)~안중근의사기념관(조선신궁)까지 빡빡한 코스를 2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김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독창적인 관점의 해설을 열정적으로 들려줘 호응을 얻었다.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 참여한 21명 중 6명이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면서 해설시간 연장이나 코스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참가자는 늘 걷던 남산 길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남산은 상념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서울 어디서나 고개만 들면 보이는 누이 같은 산이고, 서울 바깥에서 봤을 때 서울 진입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서울이 사대문 안을 벗어나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과 한강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조선 말 고종이 종로구 인사동 194(하나로빌딩)에 세운 서울중심점 표식이 지금은 남산 정상으로 남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의 관문 노릇을 하던 한강 또한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관통하는 도심 속 하천이 됐다. 남산은 광화문네거리에 솟아 있던 황토마루(黃土峴) 역할을 하는 중앙산이 됐고, 한강은 사대문을 북촌과 남촌으로 나눈 청계천처럼 서울의 강남과 강북 사이 중앙천이 됐다. 한강이 허리띠처럼 감싼 남산은 명실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북쪽을 병풍처럼 두른 삼각산(북한산)이 왕조와 왕을 지키는 장풍(藏風)의 산이라면 남산은 백성과 함께 즐기는 득수(得水)의 산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의 남산, 고려 개성의 자남산에 이어 서울 남산은 한반도를 지배하는 왕조가 백성에게 내준 어울림의 영역이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 뒤 백악산(북악산)에 여신 진국백(鎭國伯)을 둔 반면 남산에는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남신을 모신 국사당을 세운 데서 나타난다. 남산은 국가의 제례 공간이자 민간신앙의 터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관왕묘 중 남관묘가 남산에 가장 먼저 건립됐고 제갈공명을 모신 와룡묘도 따라 들어섰다. 남산 범바위를 중심으로 한 무속신앙이 성행한 이유도 남산을 한양도성의 수호신 목멱대왕이 깃든 신성한 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팔도에서 올라오는 봉수대의 종착 지점을 남산에 둔 까닭이기도 하다. 제왕은 남면(南面)하는 법이다. 남산은 왕이 바라보는 산이다. 이를 쫓아 옛사람들은 마을의 앞산을 남산이라고 불렀다. 남산의 남(南)자는 ‘남녘 남’ 자가 아니라 ‘앞 남’ 자를 썼다. 남산의 다른 이름 ‘마뫼’는 우리 말 ‘앞산’과 동의어다. 목멱이란 마뫼의 이두식 표기다. 남산=마뫼=목멱 등식이다. 남산은 소나무를 베거나 돌을 캐거나 무덤을 두지 못하게 엄히 규제한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역이기도 했다. 남산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실록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애국가 가사 중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서울사람이 늘 보는 일상 풍경이었다. 남산을 그린 옛 그림 ‘목멱산도’와 ‘은암등록’, ‘장안연우’ 속 큰 소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다. 서울에 사는 남인 양반촌의 시대는 옛 노랫가락처럼 흘러갔지만 남산만큼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칠정(七情)을 제대로 겪은 산이 또 있을까. 남산 아랫마을 중 회현동(호현동)과 필동, 충무로 일대에는 본래 경주 이씨, 동래 정씨, 안동 김씨, 풍산 홍씨 같은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살았다. 서울에 기반이 없던 다산 정약용 같은 ‘남산골샌님’이나 ‘딸깍발이’ 신세의 남인 선비들도 산등성이와 계곡에 초가를 지었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살던 가난한 동네였다. 남산산록을 수놓은 귀록정, 노인정, 청학동, 녹천정, 천우각, 쌍회정은 남산풍류의 본거지였다. 한양의 대표적 경관시 중 하나인 정이오의 ‘남산팔영’은 사실상 한양팔경가였다. ‘장소의 윤회’인가. 조선 건국 초 왜국사신 숙소 동평관을 지금의 인현동에 둔 게 화근이 돼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을 점령한 왜군이 진을 친 곳이 예장동(왜장대)이다. 또 300년이 흐른 1885년 일본공사관이 녹천정(통감관저 터)으로 틈입하면서 남산은 수난의 그림자에 덮였다. 황현은 “녹천정을 빼앗아 일본공사관으로 삼은 후로 야금야금 주동, 나동, 호위동, 남산동, 난동과 종현, 저동을 가로지르는 진고개 일대를 점거하여 남촌 50개 동 가운데 30개 동이 일본인 촌이 됐다”고 ‘매천야록’에서 절규했다.남촌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통감부를 중심으로 통감관저, 헌병대사령부, 정무총감 관저(필동 한국의 집)가 집결했다. 명동과 충무로에 화려한 상가가 들어서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등 경제수탈기구가 남대문에 집결했다. 벚꽃 묘목 1500그루를 들여와 왜성대공원(한양공원)에 심은 게 1907년이었다. 한양도성의 수호신 남산은 일본 국교 신도(神道)에 무참히 유린당했다. 1925년 조선신궁이 세워지면서 남산은 정치와 종교, 문화의 지배공간이 됐다. 1932년 남산기슭 장충단 자리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로 둔갑했다. 남산은 식민지배의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 채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 산업화 과정에서 훼손됐다. 경성호국신사(용산동 2가) 자리에 해방촌이 들어선 데 이어 적산 처리 과정에서 동국대, 서울중앙방송국, 숭의학원, 미군 통신부대, 외인주택 등 각종 정부기관과 학교, 군 및 종교단체가 파고들어 잠식당했다. 동상과 기념물 그리고 터널과 타워는 남북 체제 경쟁과 정치이데올로기 홍보의 상징물이다. 개발독재와 권위주의 시대 중앙정보부는 ‘남산’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예장자락에 무려 41개의 건물을 차지하고 정권의 홍위병 역할을 했다. 그 상처를 씻어내는 진혼곡이 이제야 연주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홍릉산책(홍릉수목원) ●일시: 7월 14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3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최준식의 거듭나기] 북촌은 한옥 마을이 아니다-풍문여고 터 유감

    [최준식의 거듭나기] 북촌은 한옥 마을이 아니다-풍문여고 터 유감

    서울 북촌이 한옥 마을이 아니라는 위의 제목은 많이 이들에게 생경할 것이다. 북촌은 한옥이 1000채 이상 보존돼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한옥 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한옥 마을이 아니다’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한옥 1000채 이상 보존됐다’는 위의 설명은 북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북촌은 그냥 한옥 마을이 아니라 ‘개량’ 한옥 마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촌은 1930년대에 걸출한 건축업자였던 정세권 선생이 전통 한옥을 개량해 만든 근대식 작은 한옥들로 구성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당시 정세권은 북촌 쪽으로 북상하는 일본인들을 막고 한국인들에게 저렴하고 좋은 한옥을 제공하기 위해 이 지역에 개량 한옥을 대거 공급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현재처럼 그가 만든 작은 한옥들이 즐비하게 된다. 그런데 북촌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의 고위 관리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면서 이 지역에 거대한 전통 한옥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놀랍게도 북촌에 있는 고관대작의 집은 윤보선 고택밖에 없다. 진짜 양반의 집은 1930년대에 사라졌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이 북촌에 제대로 된 사대부 한옥이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있는 한옥들에서는 사대부들의 한옥이 갖고 있는 유려하고 규모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조선 후기 양반이 살던 한옥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는 이런 한옥들을 복원해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는 것이다. 혹자는 남산 한옥 마을이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좋은 한옥들을 그저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 마을을 만들 때 전통 마을의 구성 원리를 적용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한옥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없다, 그래서 집들이 정체돼 있는 느낌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국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지날 때마다 상상을 했다. 이 터가 비면 이곳에 조선 사대부들의 집을 복원해 제대로 된 조선 전통의 한옥 마을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전통 마을이 어떤 원리로 구성돼 있는지, 그곳에 집들이 어찌 배치돼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 마을은 구성 원리가 매우 훌륭하고 재현해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서울에는 제대로 된 한옥 마을이 없다. 조선을 진지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전통 마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의 마을을 복원하자고, 그것도 서울 시내에 복원하자고 주장해 왔다. 그렇게만 된다면 부대 효과는 대단할 것이다. 우선 서울에 쏟아져 오는 외국인들에게 보고 즐길 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한국의 품격 있는 전통문화를 제대로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전통문화를 보여 줄 수 있어 교육적으로도 좋다. 나는 그 최적 자리로 풍문여고 터를 생각해 오고 있었다. 이곳에 전통 마을이 들어선다면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예박물관이 들어선단다. 서울시가 조언을 받아 그렇게 정한 모양인데 누가 어떤 권한으로 이렇게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조감도를 보니 전부 서양 건물로 돼 있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안동별궁이라는 규모 있는 궁이 있던 곳이 아니던가? 옛 사진을 보면 여고 교사 앞에 장대한 한옥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옥들은 지금 다른 곳에 보존돼 있다.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왜 굳이 여기에 서양식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지 그 변명을 듣고 싶은데 어디에 문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 한미일 “목표는 FFVD… 제재 유지”

    한·미·일은 8일 일본 도쿄에서 외교장관회담을 갖고 북한의 완전 비핵화를 위한 3국 공조 및 이를 위한 대북 제재 조치를 계속해 나가기로 거듭 확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강경화 외교부 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의 회담을 마친 뒤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 고위급 협상에서 진전이 있었지만,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북한의 비핵화’(FFVD)가 이뤄질 때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 외무성이 담화를 통해 ‘미국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고 비난한 데 대해 “우리의 요구가 강도 같은 것이라면 전 세계가 강도라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강 장관은 “완전한 비핵화는 완전한 핵물질 폐기이며 이것은 명확히 정해진 목표”라며 “북한은 이런 결의를 완전히 이행해야 하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할 때까지 유엔 안보리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3국이)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미 연합공동훈련 중지는 북한이 신속히 비핵화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노 외무상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재확인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폼페이오 장관이 이번에도 북한과의 협의 과정에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제기해 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베델 일대기, 영화·드라마로 더 많이 알려졌으면”

    “베델 일대기, 영화·드라마로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한국 독립운동 도운 삶에 매료 1970년대부터 英·日 돌며 연구 “목숨 바친 숭고한 희생 기억되길”“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된 1904~1909년은 양기탁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안창호, 고종, 이토 히로부미, 호머 허버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 등 역사책에 나오는 근현대사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스펙타클한 시기예요. 일제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용기 있게 담아낸 대한매일신보 창업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당시 우리나라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베델의 일대기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돼 보다 많은 분들이 기억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오는 18일부터 서울신문 창간 114주년을 기념해 게재되는 특별기획 ‘베델’ 취재를 위해 만난 ‘베델 전문가’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5일 자신이 일생을 바쳐 연구한 베델의 삶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현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일본에 우호적 기사를 강요하는 회사 방침에 반발해 해고된 뒤 그해 7월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등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적으로 보도했다. 국채보상운동을 공론화하고 독립운동단체 ‘신민회’의 본거지도 제공했다. 일본인이 무단 반출한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문제를 국제이슈화해 석탑 반환에 크게 기여했다. 1909년 일제의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와 심장질환 등으로 세상을 떠난 베델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정 교수는 “베델이 만든 신보는 원래 외국인들을 위한 영자지 KDN(4페이지)에 부록(2페이지)처럼 만들었던 것”이라면서 “하지만 되레 신보가 한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자 영국인인 그는 한국법이나 일본법을 적용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십분 활용해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베델의 삶에 매료된 그는 1970년대부터 영국과 일본을 찾아다니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 중이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요코하마 등을 돌며 사진과 기록을 찾아내 오류 투성이였던 베델 연구를 대부분 바로잡았다. 베델 한 사람을 취재하고자 런던정경대(LSE)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는 “베델 선생은 한·영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후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영국인”이라면서 “수십년간 국내 방송사 등에 베델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반응이 없어 안타깝다.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좀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세계 최대 돌덩어리’ 호주 울룰루 등반 중 또 사망…벌써 37번째

    ‘세계 최대 돌덩어리’ 호주 울룰루 등반 중 또 사망…벌써 37번째

    호주 한가운데에 있는 세계 최대 돌덩어리로, ‘지구의 배꼽’으로도 불리는 울룰루(Uluru)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영국 BBC가 4일 보도했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울룰루는 5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는 348m, 둘레는 9.4km에 달한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의 배경이었고, 일본 연인들이 방문하고 싶은 인기 여행지로 꼽힌다. 전 세계에서 매년 25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이지만, 지역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면서 등반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울룰루-카타주타 국립공원 관리이사회에 따르면 1990년대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 74%가 등반을 했지만, 현재는 원주민들의 16% 정도만이 등반을 할 정도로, 대부분 오르지 않고 있다. 높이 348m의 가파른 울룰루에 도전하는 몇몇 관광객들은 바위를 오르는 도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ABC방송에 따르면 일본 국적의 76세 남성 관광객은 현지시간으로 지난 3일, 바위의 가장 가파른 부분을 오르려다 떨어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현지 구조대가 헬리콥터를 이용해 그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이미 사망한 후였다. 해당 사건을 조사 중인 현지 경찰은 자살이나 타살 등 범죄와 연관된 특별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울룰루를 오르다 사망한 사람은 37명에 달한다. 결국 지난해 말, 울룰루-카타주타 국립공원 관리이사회는 오는 2019년 10월 26일부터 울룰루 등반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삼국시대 건물터 유적 3기 확인 “임시거처·제사 관련 시설 추정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 도움될 것”최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헤쳐 조사했던 백제시대 무덤과 유적들이 발굴조사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충남 공주 교동에서 일본인 도굴꾼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무덤’이라고 규정했던 백제 교촌리 벽돌무덤의 위치를 확인하는가 하면 이달에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 중 서쪽 고분군이 100여년 만에 이뤄진 재조사에서 백제 왕릉급 무덤의 전모를 드러냈다. 문화재청과 충남 부여군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서쪽 고분군 4기에 대한 2년간의 발굴조사를 완료했다고 4일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서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기씩 배치돼 있다. 고분 양식은 백제 사비도읍기의 전형적인 무덤 형태인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고분의 지름은 2·3호분이 20m 내외, 1·4호분은 15m 내외다. 문화재청 측은 “2·3호분과 1·4호분이 석실의 규모, 석재의 가공 정도, 입지 등에서 차이가 나는데 무덤주인들의 위계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시대 왕릉급 무덤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중앙의 고분 7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고분군이 있다. 이 중 서고분군 4기는 1917년 일제가 조사한 바 있으나 당시 조사단은 “능산리 왕릉군의 서쪽 소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중 2기를 발굴했다”는 짧은 기록과 간략한 지형도만 남긴 터라 지금까지 학계는 고분의 구체적인 규모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고분군의 경우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석실의 형태 등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나 형식, 규모 등을 확인했다”면서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조성 과정에 대한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국시대 고분군에서는 드러난 적 없는 건물의 존재를 확인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사단은 서쪽 능선에서 초석 건물지 1기를, 동쪽 능선의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 수혈(구덩이) 주거지 2기를 확인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관련 시설로 보인다”면서 “삼국시대 고분군 중 고분 구역에서 건물 유적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조사와 잦은 도굴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2호분 석실 바깥 구덩이에서 금제 장식과 목관 조각, 금동제 관못 등이 나왔다. 금제 장식은 길이가 2.3㎝ 정도로, 끝이 뾰족한 오각형을 띠고 있으며 부장품의 일부로 추정된다. 용이 몸을 틀고 있는 형상의 문양이 특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호주 울루루 산 오르던 일본인 76세 관광객 실족 사망

    호주 울루루 산 오르던 일본인 76세 관광객 실족 사망

    ‘이 산, 별거 아니잖아?’ 이런 마음 먹었다간 큰코 다친다. 호주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울루루 산은 평원에 뭉툭 솟아올라 가볍게 오를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지난 2010년까지 이 산을 오르던 37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3일 일본의 76세 관광객이 하산길에 바위에서 실족해 헬리콥터를 이용해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운명을 달리했다고 영국 BBC가 현지 경찰의 발표를 인용해 전했다. 과거 ‘에이어스 록’으로 불렸던 이곳에는 해마다 25만명이 찾고 있는데 당국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이 산을 찾은 이들 가운데 16% 정도만 정상을 오르는 데 성공한다. 애보리진 원주민들은 이 산이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등반을 허용하면 안된다고 진작부터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해 울루루-카타 국립공원 이사회는 투표를 실시해 만장일치로 내년 10월부터 일반인 등산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실린 성명에는 “울루루 산을 등반하려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한 사람이 죽거나 다칠 때마다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고 적혀 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 13번째 세계유산 등재된 산사 7곳의 역사와 특징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Sansa,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은 모두 천년 넘게 불교문화를 지킨 사찰이다. 각 산사마다 다른 창건 시기와 자연환경, 건물 배치, 눈여겨볼 만한 문화재, 설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양산 통도사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산 영축산 통도사(通度寺)는 신라 자장율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 사리와 금실을 넣고 짠 베로 만든 가사,대장경을 봉안해 창건했다. 통도사 역사를 정리한 책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도 비슷한 시기인 646년 자장율사가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고 기록됐다. 통도사는 무엇보다 부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佛寶寺刹)로 유명하다. 대웅전에 불상을 두지 않고,건물 뒤쪽에 금강계단을 설치해 부처 법신(法身)을 봉안했다. 사찰 명칭은 ‘이곳 산의 모양이 부처가 불법을 설파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혹은 ‘승려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문구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신라시대에는 계율을 지키는 근본도량이었다.조선 초기에는 수위사찰로 지정됐고, 경남 사찰 대본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 본사다.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이고,보물 18점과 경남유형문화재 50점을 보유한다. ● 영주 부석사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이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한 고려시대 건축물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676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뒤 처음 지은 절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관련 기록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 이후 40일간 법회를 연 뒤 대립을 지양하고 마음 통일을 지향하는 화엄사상의 근본 도량이 됐다. 부석사(浮石寺)라는 명칭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이 바위가 아래 바위와 붙지 않고 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중수했다는 묵서가 확인된 무량수전은 13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 중심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다. 누대인 안양루에서 올려다보는 무량수전 풍경은 한국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무량수전은 물론 무량수전 앞 석등과 전각 안에 있는 소조여래좌상,조사당과 조사당 벽화가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절이 있는 봉황산은 지세가 봉황을 닮았다는 곳으로,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나 실제로는 태백산과 이어진다. ● 안동 봉정사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국보 제15호 극락전(極樂殿)이 있다.1972년 건물을 보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1363년 처음으로 건물을 중수했다. 규모는 작지만 건축미와 품격이 느껴진다. 봉정사(鳳停寺)를 창건한 인물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명확하지 않지만,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대사가 7세기 후반께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능인대사가 봉정사가 있는 천등산에서 수행하던 중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렸더니 오늘날 사찰 자리에 머물렀다는 설화가 전한다. 천등산은 정상 높이가 574m이고 경사가 완만한 산이다.극락전과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이 한데 모여 있으며, 건물 배치는 전반적으로 일자형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피해를 보지 않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건축물과 불상, 불화가 잘 보존됐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들르기도 했다. ● 보은 법주사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조선시대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의신조사가 553년 창건했다고 기록됐다. 의신조사가 법을 구하러 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가 사찰 명칭의 유래다. 통일신라시대 승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 계시를 받은 뒤 김제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다 소달구지를 만났는데, 소가 울자 달구지 주인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역사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길상사(吉祥寺),고려시대에는 속리사(俗離寺)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법주사가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한 속리는 ‘속세에서 떠난다’는 뜻이다. 법상종 중심 사찰이었던 법주사 건물 배치는 화엄사상과 미륵사상 영향을 두루 받았다.가장 유명한 건물은 국내 최고(最古) 오층목탑인 팔상전(捌相殿).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사명대사가 1624년 복원했으며, 목탑 아래 월대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알려졌다.팔상전 외에도 쌍사자 석등과 석련지가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 13건이 있다. ● 공주 마곡사사찰 중심에 계곡이 흐르고 풍경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택리지’와 ‘정감록’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땅으로 기록됐다. 마곡사(麻谷寺) 창건 시기와 과정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마곡사사적입안’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세웠다고 적었고, ‘마곡사연기략초’에 따르면 보조선사 체칭이 지었다. 자장율사는 7세기,체칭은 9세기에 활동했다. 절은 고려시대에 중흥했다.계곡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는 건물 배치도 고려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했고, 17세기 이후 중창을 거듭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南方畵所)로 불릴 정도로 많은 승려화가를 배출했고,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한 일본인 장교를 살해해 옥살이하다 탈옥한 뒤 출가했던 절이기도 하다. 국보는 없지만 오층석탑, 영산전, 대웅보전, 대광보전, 석가모니불괘불탱이 보물로 지정됐다. ● 순천 선암사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순천을 대표하는 명찰인 선암사(仙巖寺)는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선암사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529년 세웠다는 글이 있고, 도선국사가 875년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 승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대찰이 됐으나,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고 1759년에도 화재를 겪었다. 이에 따라 건물 배치가 여러 차례 변했는데, 현재 모습은 1824년에 갖춰졌다.중심건물인 대웅전도 같은 해에 재건됐다. 선암사는 절 입구에 사천왕문을 두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사천왕은 법을 지키는 신인데, 조계산 정상이 ‘장군봉’이어서 사천왕을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내에 있는 보물 14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유물은 승선교(昇仙橋)다.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아치인 홍예를 만들었다.이른 봄에 피는 매화인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이다. ● 해남 대흥사한반도 남쪽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大興寺)는 창건 시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늦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운영됐다. 선암사처럼 아도화상 혹은 도선국사가 창건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사찰도 대둔사로 불린 적이 있다. 두륜산은 높이가 703m로, 계곡과 편백 숲 덕분에 경치가 수려하다.계곡은 대흥사도 지나가는데, 이로 인해 마곡사처럼 건물이 남원과 북원에 나뉘어 배치됐다. 대흥사가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점은 호국정신이 깃든 도량이라는 사실이다.대흥사에 대해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이라고 평가한 서산대사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도 있다. 차 문화도 대흥사의 특징이다.대흥사가 배출한 대종사(大宗師) 13명 중 한 명인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재정립한 인물이다. 조계종 22교구 본사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국보 제308호다. 보물 8건과 전남유형문화재 5건도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단독][커버스토리] 평양의 청춘, 그들도 우리처럼

    [단독][커버스토리] 평양의 청춘, 그들도 우리처럼

    8년간 7회 방북… 7개 도시 등 방문 적대감·색안경 벗고 개인의 삶 담아“무섭고 자유가 없는 전체주의 국가의 이미지가 강한 북한에서도 개개인의 삶의 애환이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적대감의 색안경이 씌워진 상태로는 볼 수 없는, 이웃국가로서의 북한을 제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던 거죠.”일본 사진작가 하쓰자와 아리(45)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일본인의 시선을 좀더 긍정적인 것 또는 객관적인 것으로 바꿔 볼 수 없을까, 그것이 북한 방문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2010년 이후 7차례 북한을 다녀온 그는 북한에서 촬영한 사진 수만 장 가운데 일부를 추려 얼마 전 사진집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北)’을 펴냈다. 지난 28일 서울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하쓰자와는 “8년 전 첫 방문과 올 2월 마지막 방문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북한의 경제적 발전이었다”고 말했다. →처음 북한에 들어간 건 언제였나. -2009년 도쿄의 조선총련을 통해 북한 관광을 신청했는데, 1년을 기다린 끝에야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평양외국어대 일본학과에 있는 학생들에게 일본어 서적을 전달하는 단체 사람들 틈에 끼어 갔는데, 일행 중에 사진작가인 나만 카메라 소지가 허용되지 않았다. →첫 느낌은 어땠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데 “아, 이 사람들도 뿔은 안 달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그 정도로 나 역시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만을 듣고 살아왔던 것이다. 공항에서 일행들이 가져온 책을 검사받고 있는 동안 혼자 나와 담배를 빼물었다. 베이징에서 압수됐기 때문에 라이터가 없었다. 인민복을 입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다가가 불을 빌려 달라고 말을 건 뒤 담배를 같이 피웠다. 나에 대한 감시를 맡았던 북측 안내원이 그런 모습들을 보며 차츰 경계심을 풀어갔던 것 같다. →사진 촬영은 두 번째 방북 때부터였나. -그렇다. 2011년 6월 두 번째로 북한에 들어갔다. 1년 전 방북 때 밤에 안내원과 술을 마시며 신뢰를 쌓으려고 노력한 게 어느 정도 먹혀들어 카메라 촬영이 허용됐다고 생각한다.→일본인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북한을 다닌 것 같다. -평양, 청진, 원산, 회령, 남포, 신의주, 함흥 등 주요 도시를 두루 돌았다. 작은 마을이나 농촌 등도 여러 곳 갔다. 안내원이 주민들에게 ‘이 사람은 우리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이미지를 좋게 바꾸기 위해 왔다’고 나를 소개하면서 촬영에 도움을 줬다. 그러나 몰래 찍은 사진들도 상당수 있는데, 안내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주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2016년 다시 북한에 들어간 이유는. -2012년 네 번째 방북을 마치고 그해 12월 ‘이웃, 38도선의 북’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열었다. 그러고서 한참이 흘렀는데, 북한 경제가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2016년 12월 다시 북한을 갔다. →방북은 매번 순조로웠나.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당장 올 2월 방북 때 입국심사 과정에서 스마트폰을 압수당하고 1시간 동안 억류돼 있었다. 나의 스마트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관련된 사진이 있었는데 그걸 문제 삼았다. 솔직히 그때는 오토 웜비어(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처럼 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두려웠다. →방북이 크게 2개 시기로 구분되는데. -2010~2012년(4차례 방북)과 2016~2018년(3차례)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2012년 떠나올 즈음 북한 사회는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애도 분위기로 크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갔을 때에는 한층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떤 변화를 느꼈나. -평양 거리의 자동차가 4년 전에 비해 얼추 3배 정도 많아 보였다. 특히 북한산 자동차와 택시가 눈에 띄게 늘었다. 백화점에서도 과거 중국산 일색이던 의류 판매대에 북한산이 많이 보였다. 고려항공 기내 촬영이 허용된 것, 고급 음식점에 부유층이 택시를 타고 오는 것, 남자들의 복장이 과거보다 다채로워진 것 등이 과거와 달라진 점들이었다. →스마트폰은 어느 정도나 보급돼 있었나. -젊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다른 나라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 게임을 즐겼고 수시로 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세그웨이(1인용 이동수단)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2010년 첫 방북 때에는 못 봤던 카페들도 생겨나 예쁜 여성들이 음료와 케이크를 팔았다. 일본에 없는 ‘낫토(콩을 발효시킨 일본 전통음식) 아이스크림’ 제품도 개발돼 팔리고 있었는데, 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 사진을 찍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출발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오키나와와 재일 한국인의 차별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북한을 다녀온 것 역시 큰 틀에서 같은 맥락이다. →오키나와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들었다. -미군의 일본 주둔에 따른 고통을 왜 오키나와 주민들만 뒤집어써야 하나.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민족이 살던 곳이었는데, 본토인들이 정복한 뒤 원주민들을 태평양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더니 전쟁이 끝나자 주일미군을 집중적으로 이곳에 주둔시키면서 일본 전체 안전보장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다. 이젠 그 부담을 본토로 가져올 필요가 있다.(그는 2013년 말부터 1년 3개월 동안 오키나와에 살면서 현지를 촬영했고, 현재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본토로 가져오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본 정부도, 국민도 어떻게 북한과 마주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북한을 가상의 적국으로 놓고 때로는 무서운 나라로, 때로는 우스운 나라로 만들며 정치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학생들 중 태반은 100여년 전 한·일 병합에 대해 전혀 모를 만큼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다. 학교에서 안 가르쳤든, 학생들이 열심히 안 배웠든 엄연한 현실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역사와 그에 따른 남북 분단의 책임에는 눈을 가리고 있으면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반도 통일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일본은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하쓰자와 아리는 누구 1973년 프랑스 파리 출생. 일본 조치대 사회학과 졸업. 2002년 전쟁 중인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촬영하고 2013년 오키나와의 슬픔을 담은 작품집을 내는 등 반전(反戰), 소외 등을 주로 다루는 사회참여형 사진작가. 사진집 ‘바그다드 2003’, ‘이웃. 38도선의 북’, ‘오키나와를 말하세요’, ‘이웃, 그리고 38도선의 북’ 등을 펴냈다.
  • 북한 “일본, 과거 덮고 미래로 갈 수 없다” 과거청산 촉구

    북한 “일본, 과거 덮고 미래로 갈 수 없다” 과거청산 촉구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9일 일본을 향해 과거청산과 대북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죄악의 과거를 덮어두고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일본이 평양 문턱을 한사코 넘어서고 싶다면 역사 앞에 성근(성실)하고 책임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며, 시대착오적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대담하게 결별하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조일(북일)관계 개선에서의 근본의 근본이며 전제 중의 전제인 과거 죄악 문제가 청산되기 전에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선린우호 정책으로 바뀌기 전에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며 “죄악의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일본 당국은 똑똑히 명심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신문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에 대해 이미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완전히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납치자 문제로 말하면 도리어 우리가 일본에 대고 크게 꾸짖어야 할 사안”이라며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징병, 위안부 공출 등을 거론하고 “일본의 국가납치테러 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우리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또 일본의 북일 정상회담 추진 시도를 거론하며 “이웃을 극도로 불신하고 적대하면서 손님으로 초청받겠다고 남의 대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라고 비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길섶에서] 화장실 휴지통/이종락 논설위원

    ‘휴지나 쓰레기는 반드시 옆에 있는 휴지통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기 안에 버리면 작은 막힘의 원인이 됩니다.’ 화장실에서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힌다. 휴지통에 쌓여 있는 휴지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는 탓이다. 일본인들은 이 건으로 조롱하기도 한다. “한국은 하수도 배수 처리가 원활하지 못한 모양이죠”라고. 서울시 관련 공무원의 설명은 다르다. “일반 휴지만 변기에 버리면 배수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답한다. 올해부터 ‘공중’ 화장실에 휴지통을 없애는 것을 의무화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상가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아직도 버젓이 붙은 건 왜 일까. 변기가 막혔다고 변기 압축기를 들고 화장실을 들어오는 뿔난 관리직원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화장실 배수관 세척제 ‘뻥뚫어’와 ‘뚜러뻥’ 등 유사 제품은 불티나게 팔린다. 그 집만 유독 수압이 약해 막힌다는 해명을 이해할 수 없다. 연내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 돌파가 유력한 ‘선진국 대한민국’의 화장실에 비위생적인 휴지통은 사라져야 한다. 화장실 배수 문제도 해결하고, 공중뿐 아니라 민간 화장실 휴지통도 없애야 한다. jrlee@seoul.co.kr
  • [열린세상] 산업유산은 ‘흉물’이 아니다/황두진 건축가

    [열린세상] 산업유산은 ‘흉물’이 아니다/황두진 건축가

    청계천 고가도로가 헐리기 얼마 전이었다. 한 일본인 건축가에게 질문을 받았다. ‘저 고가도로에 대해 심리적 유대감을 갖는 서울 시민이 많은가. 또한 일부라도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있는가.’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답을 주었다. 여기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본에도 전후에 급조된 고가도로가 많으며, 대부분 경제가 어려울 때 지었기 때문에 물리적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도쿄 같은 도시에는 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가도로의 곡선을 자연경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산업시대의 유산으로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고가도로 철거는 도쿄 같으면 상당한 반대가 예상된다고 했다. 이후 청계천 고가도로는 별다른 사회적 저항 없이 사라졌다. 철거 직전 ‘시민 걷기대회’가 열리고 하류에 몇 개의 교각이 남았다. 지금 같았으면 어땠을까? 제3의 대안을 찾거나 상당한 논의가 진행됐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철거되지 않고 서울로로 변신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결과다. 근대의 역사가 그 나름의 두께를 갖기 시작하면서 그 흔적들이 시대의 유산으로서 많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중 근대 건축유산에 대한 보존과 활용의 노력이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그러나 산업유산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건축유산은 원형 자체가 아름다운 경우가 많지만, 산업유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정확히 말해 산업유산의 고유한 미학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폭은 건축유산에 비해 현저히 좁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근대화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산업유산을 다루는 방식은 보통 세 가지다. 그 하나는 용도가 끝났으면 그냥 철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산업유산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당연히 사라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충실한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기존 산업유산의 성격을 그대로 긍정하고 그 실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다른 쓸모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원래 정수시설이었던 선유도 공원, 쓰레기 소각장이 문화예술 공간이 된 부천아트벙커B39 등 좋은 평가를 받는 사례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보존의 비율을 높이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사다. 마지막으로는 원형을 일단 ‘흉물’로 규정하고 여기에 다른 성격을 덧씌우는 방식이 있다. 언젠가부터 유행하고 있는 소위 벽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산업유산뿐 아니라 오래된 마을, 혹은 건물을 페인트 그림으로 치장하는 사연이 이것이다. 한때 김포공항 관제탑은 꽃무늬로 덮였고 대학로 벽화마을의 계단에는 잉어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최근 인천항의 한 곡물 사일로는 책을 주제로 한 초대형 슈퍼그래픽의 캔버스가 됐다. 이런 사례는 워낙 많고 당연히 그 평가도 다양하다. 그러나 산업유산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고유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행위다. 즉 원래의 느낌을 불가역적으로 지우거나 가리는 것이다. 아무리 원형은 ‘흉물’이고 결과물은 ‘명물’이라고 주장해도 여전히 무거운 질문이 남는다. 그것은 결국 역사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에게 산업화란 무엇이었나? 그것은 민주화와 함께 근대화의 한 축으로서 엄청난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필요로 했던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산업유산의 흔적과 그것이 갖는 실물의 가치는 쉽게 지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00년 전 근대건축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르코르뷔지에는 비행기, 배, 사일로 등 산업 장비와 시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순수하고 강렬하며 꾸밈 없는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여기서 찾았다. 어렵게 살아남은 우리의 산업유산 또한 바로 그러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들에게 자기 고유의 모습을 지우고 다른 무엇처럼 보이라고 강요한다면 우리에게 근대, 그리고 근대사란 없다.
  • [월드피플+] 30년 간 무인도서 알몸 생활…진짜 자연인의 사연

    [월드피플+] 30년 간 무인도서 알몸 생활…진짜 자연인의 사연

    21세기판 '로빈슨 크루소' 혹은 '나체 은둔자'로 유명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터전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 등 해외언론은 작은 무인도인 소토바나리섬(外離島)에서 30년 가까이 홀로 생활한 일본인 할아버지의 근황을 전했다. 지난 2012년 국내 언론에도 보도돼 큰 화제가 된 할아버지의 이름은 마사푸미 나가사키. 올해로 82세가 된 나가사키 할아버지가 현지 어부도 찾지 않는 무인도에 정착한 것은 지난 1989년이다. 섬으로 오기 전까지 도시에서의 그의 직업은 다양했다. 한때는 사진작가로, 또 한때는 술집 웨이터로도 일하며 일본 전역을 돌아다닌 그는 40세 되던 해 결혼하며 정착하는듯 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결국 처자식을 두고 50대에 가출한 그는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 소토바나리섬에서 홀로 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처음 섬에 갔을 때는 강한 바람과 태양 때문에 오래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자연 속에 홀로 생활하며 불편함이 곧 행복으로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물도, 먹을 것도 딱히 없는 무인도에 정착한 그는 30년을 살면서 완전한 '자연인'이 됐다. 입고있던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졌고 바닷물로 양치를 하고 나뭇잎을 휴지로 썼다. 다만 정기적으로 뭍으로 나가 식료품을 조달할 때만 옷을 입고 문명인이 된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지만 인생의 행복을 찾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4월 경이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누군가 현지 경찰에 신고한 것. 이에 관계 당국은 할아버지가 섬에서 홀로 객사할 것을 우려해 병원이 있는 뭍으로 강제로 이동시키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같은 사실은 무인도 투어회사를 운영하는 알바로 케레조를 통해 언론에 알려졌다. 케레조는 "할아버지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지만 저항할 힘 조차 남아있지 않다"면서 "여생을 이곳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있다"고 밝혔다. 한편 과거 인터뷰에서도 할아버지는 이곳 무인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 할아버지는 "이곳은 나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라면서 "여기에서 한번도 슬픔을 느낀 적이 없으며 이곳은 나의 안식처이자 무덤"이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윤형빈 제작’ 개그 아이돌 코쿤 공개 “만능 엔터테이너 그룹 기대”

    ‘윤형빈 제작’ 개그 아이돌 코쿤 공개 “만능 엔터테이너 그룹 기대”

    개그맨 윤형빈이 제작하는 개그 아이돌 ‘코쿤’ 5인의 사진이 공개돼 화제다. 26일 개그문화 브랜드 윤소그룹은 “오는 7월 국내 최초로 데뷔하는 ‘개그 아이돌’의 팀명을 ‘코쿤’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코쿤(KOKOON)은 번데기를 깨고 나와 나비처럼 날아 오르는 누에고치처럼 한국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코미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큰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 잘생긴 외모와 위트, 연기력과 가창력 등 실력을 두루 갖춘 만능 엔터테이너 그룹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코쿤은 전재민·이창한·강주원·김태길 등 한국인 멤버 4인과 일본인 멤버 다나카 료로 구성된 5인조 남성 그룹이다. 이들은 개그·노래·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듀서와 함께 준비하고 있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활발한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윤형빈은 일본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요시모토흥업과 ‘개그를 기반으로 하는 아이돌’을 제작하는 ‘개그 아이돌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 밝혔다. 국내 데뷔와 동시에 해외 진출도 가능한 ‘글로벌 개그 아이돌’ 제작을 위해 윤소그룹과 요시모토흥업은 글로벌 오디션도 개최하며 코쿤 멤버를 발탁했다. 윤형빈은 “코쿤은 공개 코미디뿐만 아니라 공연·음반·예능·드라마 등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그룹이 되길 기대한다”며 “가요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아이돌 팬덤이 개그 시장에서도 형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지금, 이 영화] ‘오 루시!’

    [지금, 이 영화] ‘오 루시!’

    ‘오 루시!’를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현대 일본인들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접근법이 있겠지만, 나는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의 분석을 추천하고 싶다.이를테면 그는 현대 일본인들에게 만연한 무기력증을 거론한다. “무기력은 무욕망이다. 무엇에도 흥미가 없고 욕망이 솟지 않는다. ‘성’이라든가 ‘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할 정도다.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은 그조차 번거롭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한다. 무슨 일에 대해서건 ‘별로’라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다.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욕망’이 없어지는 현상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일본인의 심성과 일본 문화’ 중에서)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이에 대한 적확한 예시다. 출근 시간 직장인들이 승강장에서 전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전부 하얀 마스크를 쓴 채 침묵하고 있다. 표정과 소리가 사라진, 마치 표백된 공간에 놓인 것 같은 사람들. 그곳의 적막을 깨뜨린 건 한 사내다. 그는 주인공 세쓰코(데라지마 시노부)를 스치면서 말한다. “잘 있어.” 그러고 나서 남자는 승강장에 진입하는 전철로 뛰어든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그의 자살에 반응하는, 세쓰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다. 이들은 남의 죽음에 놀랍도록 무신경하다. 문제 삼는 것은 전철이 지연돼 출근이 늦어진다는 사실뿐이다.이는 비정함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가와이 하야오의 말대로 이것은 타인의 삶은 물론이고 본인의 삶에서조차 의욕을 갖지 못하는 ‘무기력―무욕망의 병리 현상’ 탓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세쓰코가 쓰레기집에 사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생활을 방기한다. 이럴 때 해결의 키워드는 간명해진다. ‘소진된 욕망에 어떻게 다시 불을 지피느냐’이다. 세쓰코의 경우는 영어강사 존(조시 하트넷)과의 짧은 만남이 계기가 된다. 그 덕분에 그녀는 새로운 캐릭터로 변할 수 있었다. 욕망이 결여된 검은 머리 세쓰코에서, 욕망으로 충만한 노란 (가발) 머리 루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존을 향한 사랑이 그녀를 마냥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루시가 돼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세쓰코 주변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떠나버린 존을 찾아 미국까지 건너가게 한 엄청난 욕망은 결국 그녀도 망가뜨리고 만다. 분명 무욕망보다는 욕망을 가진 편이 낫다. 그러나 욕망을 좇는 동안 그것이 과연 어디로 뻗어나가는가 하는, 욕망의 방향성 역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삐뚤어졌다면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내야 할 테다. 진짜 욕망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데는 많은 연습이 요구된다. 이 명제가 꼭 현대 일본 사회에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 한국 사회의 상황도 날로 비슷해지고 있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씨줄날줄] 114년 만의 귀환 ‘용산’/김성곤 논설위원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 시대를 마감하고, 오는 29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한다. 용산에 미군이 주둔한 지 73년, 미군사령부가 창설된 지 61년 만이다. 미군이 용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이다.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따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24군단이 일본군 무장해제와 행정권 장악을 위해 서울에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 용산이다. 이후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을 제외되면서 한때 482명의 미 고문단만 남기도 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미군이 다시 투입된다. 1957년엔 미군사령부가 용산에 자리를 잡는다. 미군사령부의 평택 이전은 ‘한국민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명목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한국과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에 따라 미국은 2003년 주한미군 재배치에 나섰고, 당시 한국에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전 시기와 규모를 놓고 한ㆍ미 양국 간 줄다리기를 하고, 개발 주체 문제로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갈등을 빚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미군 사령부 이전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안타까운 오욕의 땅이 용산이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처음 진을 친 것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이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퇴한 고니시 군이 지금의 원효로 4가에,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갈월동에 각각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했다고 한다. 지금은 배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태원(梨泰院)으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항복한 일본인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타인(利他人)으로, 왜군의 만행으로 태어난 2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청나라 군대가 청일전쟁 때까지 여기에 주둔한다. 1882년 흥선대원군의 청나라 압송도 이곳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때인 1904년 일본의 강압으로 맺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은 용산 일대 땅 300만평을 강제 수용해 군기지화한다. 이렇게 보면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은 114년 만이다. 성공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전기가 마련된 시점에 114년 만에 온전하게 용산이 우리 품에 돌아온다. 그 자리에는 민족공원이 조성된단다. 새삼 용산을 다시 보게 된다.
  • “일본에 한국 민주화 희생·성취 보여주려 다큐 만들었죠”

    “일본에 한국 민주화 희생·성취 보여주려 다큐 만들었죠”

    日, 촛불혁명에 관심 가져 시작 NHK 방송 뒤 현지 다양한 반응 “민주화 질문에 답이 되었길…”북·미 정상회담으로 떠들썩했던 지난 12일 밤 9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일본 공영방송 NHK의 전파를 탔다. 제목은 ‘그때, 시민은 군과 싸웠다’. NHK의 고정 다큐멘터리 코너 ‘어나더 스토리’를 통해 방영된 이 영상은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제작돼 일본에서 공개된 최초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다큐멘터리였다. 방송이 나가자 트위터 등에는 ‘한국 현대사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지는 전체 흐름이 명확하게 들어왔다’ 등 일본 시청자들의 의견이 줄을 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연출가 전용승(51) PD. 전 PD는 21일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과 그것을 발판으로 이뤄낸 성취를 일본인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 PD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일본에 유학해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1997년부터 방송 연출가의 길을 걸어왔다. ‘NHK스페셜’ 등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2009년 ‘일본과 한반도 2000년’으로 NHK회장상, 2012년 ‘알려지지 않은 방사능 오염’으로 총리상을 받는 등 일본에서도 알아 주는 시사·역사 전문 PD다. “한국에서 촛불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저렇게 수십만명이 광장에 모이는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다큐멘터리 ‘그때, 시민은 군과 싸웠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일본 사회에는 정치적인 정체감 내지 무력감 같은 것이 팽배해 있다”며 “그래서인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난 4월 일본에서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에 관객이 지속적으로 들고 있는 것을 하나의 방증으로 들었다. 전 PD는 기초적인 자료 수집과 분석을 마치고 올 초부터 현장을 다녔다. “광주 학살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당시 독일 ARD 도쿄 특파원에 대한 취재부터 시작했습니다. 힌츠페터는 5·18 이전과 이후를 합해 총 17년을 도쿄에 있었지요. NHK와 아사히신문 등 1980년 당시 광주에 있었던 특파원들에 대한 취재도 다각도로 시도했습니다.” 광주로 가서 당시 시민군 인사들은 물론이고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군인들도 여러 명 만났다. 그중에서 신승용 예비역 소령은 이번에 처음으로 방송 카메라 앞에 섰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도 만났다. 이렇게 해서 모인 100시간 이상의 취재 분량을 제한된 60분으로 편집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일본인 지인이 ‘민주화란 게 뭐냐. 민주화가 되면 대체 뭐가 바뀌는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크게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개념이나 느낌 같은 걸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민주화가 아닌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 주었으니 어느 정도 답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중구, 건축물대장 일제 잔재 청산

    충무로에 있는 한 단층짜리 건물. 공장과 사무실로 쓰이는 이곳은 1979년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그런데 이곳의 건축물대장에는 1933년 일제강점기에 사용 승인된 일본인 소유의 목조주택도 같이 등재돼 있다. 사라진 지 오래지만 건축물대장에는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울 중구는 이처럼 실제와 달리 부동산 공적장부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선다고 21일 밝혔다. 구 관계자는 “지난 4월부터 건축물대장에 올라 있는 관내 건물 총 11만 3509곳 가운데 일본인 소유로 나오는 638곳을 적발했다”면서 “이달 중으로 현장에 나가 실제 건축물 존재 여부를 가린 뒤 건물이 없는 경우 직권으로 건축물대장을 정리하고 법원에 등기말소를 의뢰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러시아 찾은 콜롬비아 남성, 일본 여성들에게 외설적 발언 파문

    러시아 찾은 콜롬비아 남성, 일본 여성들에게 외설적 발언 파문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일본에 무릎을 꿇은 콜롬비아가 사실상 일본 국민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콜롬비아 외교부는 2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콜롬비아 정부는) 나쁜 행실을 규탄한다"면서 "(나쁜 행실들이) 우리의 문화와 언어, 민족성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중남미 언론은 "사과나 유감이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사실상 콜롬비아 정부가 완곡하게 사과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발단이 된 건 한 편의 동영상이다. 문제의 동영상엔 러시아로 원정 응원을 간 콜롬비아 남자 축구팬과 일본인 여성 2명이 등장한다. 일본인 여성들 역시 자국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멀리 러시아까지 날아간 축구팬들이다. 영상에서 콜롬비아 남자는 일본인 여성들에게 스페인어로 말을 건네며 따라하라고 한다.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 여성들은 웃으며 따라하자 남자는 재밌다는 듯 자지러진다. 남자가 따라하라고 한 건 모두 외설적인 표현들이다. 동영상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오르자 콜롬비아에선 비판이 쇄도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외국인에게 모욕을 준 건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며 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여론이 들끓자 결국 콜롬비아 외교부가 나섰다. 콜롬비아 외교부는 "일본인 여성 2명에게 스페인어로 무례한 말을 따라하라고 한 건 여성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다른 국가의 문화와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까지 욕보인 것"이라고 규탄했다. 언어가 다른 점을 악용해 여성을 놀린 건 여성을 학대한 것으로 전대미문의 일이라고 콜롬비아 외교부는 규정했다. 그러면서 콜롬비아 외교부는 "러시아에서 콜롬비아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수천 명 축구팬들은 타인을 존중하고 선의로 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콜롬비아 경찰은 "러시아 경찰과 협력,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진=영상캡처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글로벌 인사이트] ‘총리 아베’ 만든 납북 피해자 문제… 정권의 운명도 걸렸다

    [글로벌 인사이트] ‘총리 아베’ 만든 납북 피해자 문제… 정권의 운명도 걸렸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가 다시 전면에 부상했다. 올 초부터 본격화한 남북과 북·미의 한반도 비핵화 대화 국면에 편승해서다. 납치 피해자 문제 자체는 북·일 간에 새로운 이슈가 아니지만, 현재 놓여진 여건은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 속에 한국과 미국이 일본의 요청에 따라 대화 분위기 조성을 거들고 나섰고, 자국 내 정치역학 때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성과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치 피해자 문제의 해결은 북한과 일본 모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북·일 수교’의 가장 확실한 마중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인 납치 피해 문제와 관련한 과정을 정리하고 향배를 전망해 본다.18일 현재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는 17명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는 민간단체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는 북한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특정실종자’가 전국적으로 470명에 이르고, 이 중 77명은 가능성이 특히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식적인 북한의 납치 피해자는 17명 정부 집계 기준으로 첫 번째 피해자는 도쿄 관공서 경비원이었던 구메 히로시(당시 52세)로, 1977년 9월 19일 이시카와현의 바닷가에서 납치됐다. 이어 10월에 회사원 마쓰모토 교코(29)가 돗토리현에서, 11월에 중학생 요코타 메구미(13)가 니가타현에서 납치되는 등 석 달 새 연달아 3명이 납치됐다. 특히 당시 니가타시 요리이중학교 1학년이었던 요코타는 학교 배드민턴부에서 연습을 하고 오다 실종돼 1년간 연 3000여명의 경찰이 수색을 했지만, 전혀 행방이 파악되지 않았다. 특히 요코타는 자기 집 근처에서 납치된 어린 소녀라는 점 때문에 ‘납치 피해자의 대명사’처럼 일본 국민 사이에 인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남녀 3쌍을 포함해 10명이 북한으로 끌려갔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유학생 등 4명이 납치됐다. 대부분 원인불명의 실종 상태로 분류돼 있던 가운데 결정적인 전기가 되어 준 것은 1987년 11월 일어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었다. 당시 체포된 범인 김현희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경찰은 북한 피랍 가능성이 있는 실종사건에 대한 수사에 다시 착수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1988년 3월 최초로 북한의 개입 혐의를 공식화했다. 당시 가지야마 세이로쿠 공안위원장은 참의원 질의에서 “1978년 발생한 3건의 남녀 실종사건은 북한의 납치 혐의가 뚜렷하다”고 답변했다. 요코타 사건의 경우 발생 20년 만인 1997년 1월 북한 공작원 출신 탈북자의 입을 통해 확인됐다. 그해 3월 요코타의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85)를 대표로 하는 ‘납치피해자가족회’가 결성됐다. ●사건 11년 만에 北 개입 혐의 공식화 북·일의 협상이 시작된 것은 28년 전이었다. 1990년 9월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 전 부총리와 사회당의 다나베 마코토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가네마루 방북단’이 북·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위해 평양에 들어갔다. 방북단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납치문제는 직접적인 의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2년 남짓 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1992년 11월 일본 정부가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일본인 ‘리은혜’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 달라”고 하자 북한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납치문제 해결을 북한에 처음으로 직접 요구한 것은 1997년 9월 제1차 북·일 적십자 연락협의회에서였다. 그해 11월 김용순 조선노동당 비서가 일본에 ‘피랍자’가 아닌 ‘실종자’로서 조사는 해 볼 수는 있다고 하며 진전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북한이 “일본이 찾고 있는 실종자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보하면서 대화는 다시 중단됐다. 다시 전기가 마련된 것은 2002년 9월 17일의 제1차 북·일 정상회담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사상 최초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일본과의 수교를 원했던 김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1970, 80년대 초에 특수기관의 일부가 망동주의, 영웅주의에 사로잡혔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책임 있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며 사과했다. 이때 북한이 집계한 수치는 ‘5명 생존, 8명 사망’이었다. ●2002년 정상회담 후 첫 책임 인정 북·일 평양선언이 채택되고 그해 10월 15일 하스이케 가오루 부부, 지무라 야스시 부부, 소가 히토미 등 5명이 일본에 돌아왔다. 북한은 ‘일시 귀국’이라며 나중에 5명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일본 외무성은 북한과의 수교에 장애가 된다며 일단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했으나 일부에서 “우리 국민을 다시 북한에 보내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반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당시 관방 부장관 자격으로 같이 갔던 아베 현 총리다. 그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성원에 힘입어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2003년 자민당 간사장, 2005년 관방장관을 거쳐 2006년 9월 총리(1차 아베 내각)까지 초고속으로 올랐다. 아베 총리가 북한 비핵화를 위한 대화 국면에 과도하게 자국의 이슈를 끼워 넣으려 한다는 비판을 여당 내에서도 받을 만큼 납치 피해 해결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서 이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5월에 열린 제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사망했다는 8명에 대한 설명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며 재조사를 요구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가 급했던 북한은 이를 수용했다. 이에 더해 2년 전 송환했던 하스이케 부부와 지무라 부부의 자녀 5명도 일본으로 보냈다. 이어 7월에는 소가의 남편 찰스 젠킨스도 두 딸과 함께 일본에 송환했다. 같은 해 11월 북한은 “납치 문제를 다시 조사했지만, 2002년 9월과 비교해 달라진 게 없다”고 일본에 통보하는 동시에 “요코타 메구미의 것”이라며 유골을 전달했다. 그러나 DNA 분석 결과 이는 요코타의 것이 아니라고 판명 났다.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납치문제, 日 정권차원 이슈로 팽창 ‘재조사’ 요구와 ‘해결 완료’ 주장의 평행선 속에 양측의 협상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근근이 이어져 왔다. 2014년 5월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납치 피해자와 함께 특정실종자도 포함해 전면조사를 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북한은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나름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의 제4차 핵실험과 2월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에 일본의 독자적 제재 등이 이어지면서 북한은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해 버렸다. 그로부터 2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북·일의 협상 재개 가능성에 일본 내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오른 상태다. ●9월 총선 앞두고 납치 문제 올인한 아베 일본에서 납치 문제는 한 번 불거지면 급격히 정권 차원의 이슈로 팽창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 없는 북·일 수교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를 해결된 것으로 볼 것인가”라는 대목으로 들어가면 복잡해진다. 외무성 관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한·일 정부 간에 어떠한 타협이 이뤄져도 한국 국민들이 ‘해결됐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처럼 북한 납치 피해자 문제도 일본 내에서 똑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해 그동안 납치 문제에 ‘올인’하는 바람에 ‘해결의 수준’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임계점을 한껏 상승시켜 놓은 상태다.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연임에 성공,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을 다시 쓰고 싶은 아베 총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지나치게 서두르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주요 대학 교수는 “아베 정부가 납치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을 과도하게 높여 놓고 있다”며 “이 문제를 일단락 짓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기대치를 낮춰 놓아야 하는데 아베 총리는 정반대로 가면서 마치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한 일간지 기자는 “일본 국민 정서를 볼 때 납치 문제 해결에 있어 시작과 끝은 요코타 메구미 사건의 진전”이라면서 “요코타와 관련된 성과를 북한으로부터 얻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성과로 들이대더라도 국민을 설득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