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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투4’ 이용진 VS 광희, ‘흑역사 왕좌’ 맞대결 “굴욕담 대방출”

    ‘해투4’ 이용진 VS 광희, ‘흑역사 왕좌’ 맞대결 “굴욕담 대방출”

    ‘해투4’에 출연한 이용진과 광희가 ‘흑역사 왕좌’의 자리를 놓고 맞대결을 펼친다. 목요일 밤을 웃음으로 가득 채우는 KBS 2TV ‘해피투게더4’(이하 ‘해투4’)의 21일 방송은 ‘2019 예능PICK’ 특집 2부로 꾸며진다. 이날 방송에서는 2019년 예능 센터를 노리는 남창희-이용진-양세찬-광희-B1A4 신우-러블리즈 미주가 출연해 안방극장을 후끈 달굴 예정이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이용진과 광희가 ‘흑역사 맞대결’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쌓고 쌓아왔던 각양각색의 흑역사들을 모조리 공개한 것. 먼저 이용진은 슈퍼주니어와 함께 한 해외 촬영에서 현지 팬들에게 가이드로 오해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이용진’이 아닌 ‘니혼진(일본인)’으로 불렸다는 웃픈 사연을 전했다. 이에 광희는 “해외라면 그럴 수 있다. 나는 박명수를 만나러 라디오 부스에 갔는데 경호원이 내 팔을 꺾었다”며 제대 후 인지도 굴욕담을 공개해 포복절도를 유발했다. 이를 듣던 이용진은 “브라질리언 왁싱을 했다는 것을 깜빡하고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며 강렬한 승부수를 띄워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 그가 공개한 ‘목욕탕 굴욕담’에 현장이 발칵 뒤집어졌다는 후문이어서 그 전말에 궁금증이 높아진다. 이밖에도 광희는 이용진의 흑역사를 제치기 위해 라면 면발을 뒤집어 쓴 광고를 직접 공개하는가 하면 관상가가 관상 보기를 포기한 사연까지 몽땅 털어놓으며 총공전을 펼쳤다는 후문. 이에 과연 누가 ‘흑역사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지 관심이 증폭된다.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하는 마법 같은 목요일 밤 KBS 2TV ‘해투4’는 오늘(21일) 밤 11시 10분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을 아십니까”

    1919년 3월 삼천리강산은 뜨거웠다. 일제 야욕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부천에서도 항일 시위가 이어졌다. 100년 전 그날 우리는 민족독립의 새날을 꿈꿨다. 3·1운동 100주년. 부천시는 그때의 함성과 뜨거운 가슴을 기억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기 위해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 ■부천에서 만나는 3.1운동 발자취… 부천 계남면 만세운동 1919년 3월 24일 3·1 만세운동 여파가 부천에도 불어 닥쳤다. 당시 부천군 계남면 중리(현 심곡동·중동 일대) 주민들이 일제의 농민 수탈정책에 불만을 품고 계남면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과 벽체·집기류·서류 등을 부수거나 훼손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당시 계남면사무소 직원들은 다음날인 25일 아침부터 인접 부내면사무소에서 집무했다. 27일에는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면사무소 부근 민가를 일시 빌려서 집무했다. 이런 사실을 당시 부내면 서기 이경응이 경찰서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돌자 시위 군중들이 이경응의 집을 습격해 가옥·가구 등을 모두 파괴해 가옥은 네 기둥과 지붕만 남고 벽과 창문 등은 모두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다. 부천의 항일 만세운동 사적지인 당시 계남면사무소 자리는 현재 경원여객 차고지(경인로 244-5)로, 최근 항일유적지임을 알리는 바닥돌과 안내판이 세워졌다. 이 밖에도 부천에는 1927년 10월 일본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해 농민조합운동이 있었던 부평수리조합 터(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1927년 9월 24일 당시 소사역 하역노동자들이 일본인 역장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해 동맹파업을 일으킨 소사역 하역노동자 동맹파업지(현 심곡본동 부천역사) 등 항일운동 사적지가 있다. ■안중근공원에서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항일 민족정신을 기리는 대표적인 장소로 20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반입된 안중근 의사 동상을 유치해 조성한 부천의 안중근공원을 꼽을 수 있다. 시는 오는 3월 1일 이곳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독립선언서 낭독, 국가유공자 표창, 기념사, 삼일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이 진행된다. 기념공연으로는 부천의 독립운동을 다룬 초이스 뮤지컬 컴퍼니의 연극 공연이 마련된다. 기념식 후에는 시민들과 함께 손태극기를 흔들며 3.1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거리행진을 벌인다. 행진은 안중근공원부터 부천우체국, 뉴서울아파트 등을 지나 시청 잔디광장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부대행사로는 시청 1층 로비에서 ‘3.1운동, 부천과 만나는 100년’ 전시회가 열린다. 부천의 독립운동과 3.1운동 기념사업을 소개하는 전시는 3월 1일부터 8일까지 진행된다. 한편 안중근공원에서는 매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추모제가 열리고 10월 26일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일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3·1운동 기념 만화벽화, 특별강연, 영화상영, 기념마라톤 등 다양한 기념사업 부천시는 이 외에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한국만화박물관 광장 외벽에는 3·1운동 기념 만화벽화를 조성한다. 박물관 관람객과 시민들의 캐리커처로 3·1 만세운동을 벽화로 재현해 3월 1일부터 8월까지 전시한다. 3월 1일 박물관 로비에서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태극기 그리기 체험을 진행하고 1층 상영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생을 그린 영화 ‘동주’를 상영한다. 항일운동 코스튬 플레이어의 만세 퍼포먼스도 열릴 예정이다. 상동도서관에서는 역사릴레이 강연 ‘역사의 그날-시민과 소통하다’를 연다. 3월 2일, 9일에는 한국근현대사 및 민족운동 연구자로 저명한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16일에는 ‘단박에 한국사’, ‘헌법의 상상력’ 등 베스트셀러 역사도서를 집필한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이 강연한다. 심곡도서관에서도 3월 8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강좌 ‘인물로 배우는 역사, 독립운동가 대 친일파’를 개최하고, 3월 1~10일 도서관 로비에서 항일저항 작품을 전시하는 3·1운동 100주년 도서 전시전을 연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무료 영화 상영도 진행한다. 22일 영화 ‘밀정’을 시작으로 3월 8일 ‘박열’, 3월 15일 ‘귀향’, 3월 22일 ‘암살’이 시청 어울마당에서 저녁 7시에 상영된다. 삼일절에 부천종합운동장에서는 ‘3·1절 100주년 기념 부천마라톤대회’가 열린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국운 짓누른 일제, 조선왕실 태실 부장품 빼돌리고 집단 이장했다

    국운 짓누른 일제, 조선왕실 태실 부장품 빼돌리고 집단 이장했다

    20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허름한 보리밥집 앞 이름도 없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삼릉 서쪽 끝 가까이 된다. 1시 방향 숲길을 따라 150m를 걸으니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선 묘비 50여기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왕가 ‘태실’(胎室)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출산 때 나오는 태를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항아리에 정성껏 담아 땅속에 묻었다.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심을 보여주는 우리의 대표 풍속 중 하나다. 보관하는 방법은 신분의 지위고하에 따라 다르다. 왕실은 국운과 관련 있다 해 전담 부서에서 전국 명산의 좋은 터에 석실과 석탑을 만들어 보관해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 서삼릉에 집단화 그런 조선왕가의 태실 중 54기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이후 서삼릉 경내로 옮겨 집단화됐다. 태조 등 역대 왕의 태실이 22기, 왕자·대군·왕녀·왕비의 태실이 32기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던 태조의 태실을 비롯해 서삼릉역으로 옮겨온 태항아리 등은 시멘트 원통 속에 자갈을 깔고 묻었다. 바깥 가장자리에는 일제를 의미는 ‘일’(日)자형 시멘트 담장을 쌓고 일본식 철 대문으로 걸어 잠갔다. 효율적인 관리와 도굴 방지를 구실로 한곳에 모아놨으나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고 태항아리와 함께 묻었던 부장품을 빼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이은홍 종묘제례보존회 전례이사는 “태실을 신격화했던 일본인들이 조선국왕 태실을 훼손한 것은 조선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서 였다”고 밝혔다. 심현용(고고학박사) 한국태실연구소 소장도 “죽음을 의미하는 서삼릉에 삶과 미래를 의미하는 태실을 집장한 것은 조선의 국운을 말살하려는 의도다”고 했다. 그는 “전통방식은 내항아리에 태를 담아 외항아리에 다시 집어넣는 방식인데 일본은 서삼릉 땅속에 일장기를 상징하는 시멘트 원통을 묻고 태항아리를 넣은 뒤 시멘트 뚜껑 2개를 덮어 일제를 상징하는 日 모양이 되도록 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바깥을 日 모양의 담을 더 쌓아 조선왕가의 정기와 국운을 이중 삼중으로 억누르려 했다”고 강조한다. 이 담장은 가로 28m, 세로 24m, 높이 1.5m, 총 둘레 104m이다. ●일제, 태실 훼손에 대해 사죄해야 일제강점기 조선 왕실은 일본 황실에 부속돼 이왕가(李王家)가 됐고, 조선총독부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행정관청을 둬 세입세출 및 의전을 담당케 했다. 이왕직은 1928년쯤부터 전국에 흩어진 조선왕실의 태실을 옮기면서 ‘태봉’(胎封)이라는 복명서로 기록을 남겼다. 태실을 옮기는 이봉작업은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와 태지까지 포함됐다. 태봉 기록에 따르면 1928년 8월 5일부터 30일까지 태종대왕, 세조대왕, 인종대왕, 세종대왕 태실을 조사해서 태항아리와 지석을 경성 봉안실에 보관했다. 이후 서삼릉경에 태실 49기를 이장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장 시기는 1930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이다. 49기의 태실 외 5기의 태실은 1930년 이후에 새롭게 조성됐다. 태실군 주위를 둘러싼 日 모양의 담장은 고양시민들의 민원과 건의를 받아 문화재청이 1995년 3월 27일 중앙을 가르는 담장을, 외곽의 담장과 철문은 1996년 3월 6일 철거했다. 이듬해 3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하면서 태실의 실체와 태항아리 등의 보존 상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각각의 태실은 시멘트를 이용한 조잡한 이장으로 방수가 안 돼 물이 차고, 태항아리는 물에 둥둥 떠 있다 쓰러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출토된 태항아리 중 일부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교체한 사실도 확인했다. 문화재청은 보존관리를 위해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로 태항아리 등을 옮겼다. 태를 생명체의 근원으로 여기며 태의 봉안을 신성시했던 우리 민족에 일제가 속죄해야 하는 이유다. ●자발적으로 집단화했다는 주장도 일부 있어 반면 서삼릉 태실은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설립 주체를 더 파악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안재성 고양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은 “왕세자였던 이구의 태실은 왕자녀의 태실에 있어야 함에도 국왕의 태실 반열에 있다. 이는 다음 왕이 될 신분이므로 그같이 조처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왕가 왕실을 일본 황실에 부속된 한 왕실이 아니라 예전 대한제국의 황실임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밝혔다. 태실 서삼릉 이전이 이왕가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시행한 것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태실을 서삼릉역으로 집단 이전한 이유는 뭘까. 당시 조선왕조 태실이 망국과 함께 이를 보호하는 방어막도 점차 엷어졌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가운데 이왕직에서는 서둘러 왕가 태실의 태를 한곳으로 옮겨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수호하려는 명분을 찾았고 당시 총독부의 허수아비 이왕가는 자진해 태실을 포함한 태봉산을 불하해 이왕가 재정을 충당하려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태실 이전 장소를 서삼릉역으로 잡은 것은 서울과 가깝고 역대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으며, 당시 이왕가 소유였기 때문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아니다”라는 입장이 더 우세하다. 정동일 고양시 향토사전문위원은 “서삼릉에 집결돼 조성된 태실은 이전 각지에 세운 조선시대의 격조 높은 왕실의 태실과 너무도 차이가 나는 작고 단순하며 볼품없는 모습 즉 공동묘지처럼 집단화한 모습으로 볼 때 수긍할 수 없다”면서 “태실을 둘러싼 담장이 일본을 상징한다는 일자인데다, 철문 모양도 일제 양식이기 때문에 더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왕직 장차관 임면권을 일제의 총독이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더 많다는 설명이다.●운명 결정짓는 태… 삼국사기에 유래 남겨져 태실을 조성하고 태항아리와 지석을 묻는데 이것을 장태 또는 안태라고 한다. 태의 처리에 대해서 옛 선인들은 다음 아이를 잉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어서 재앙이 없는 방향에서 태우거나 매장했다. 태장경에는 태의 의미를, 귀인이 되고 못 되는 게 태에 달렸으며, 어질거나 어리석어지거나 쇠망하고 성하는 것은 모두 태에 의해 결정된다고 쓰여 있다. 안태에 대한 기록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그 기원이 신라 때부터 시작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삼국사기에는 진천현 태영산에는 신라 때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자를 지어 고려 때까지 국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美트럼프 “文대통령과 훌륭한 대화”…日아베와도 오늘밤 통화

    美트럼프 “文대통령과 훌륭한 대화”…日아베와도 오늘밤 통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후 “훌륭한 대화를 나눴다”고 평가했다.미 백악관은 19일(현지시간) 보도자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북미 정상회담에 관해 논의했다”면서 “(한미) 두 정상은 정상회담 이후에도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오늘 아침에 문 대통령과 훌륭한 대화를 나눴다”면서 “우리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논의했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과 나는, 아마도 회담의 모든 측면에 대해 논의했다. 그것은 좋은 대화였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밤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도 전화 통화를 가질 예정이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핵, 미사일,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등 3대 현안에 대한 일본 측 메시지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아베 총리는 특히 북한에 있는 가족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바람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한 뒤 이 문제 해결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김 위원장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앞서 이날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신뢰하고 있다”며 긴밀한 미일 연대를 통해 북미 협상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남북, 한미, 북미, 북중 등의 협력 및 대화 구도에서 일본이 소외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충남교육청 학교 내 일제잔재 청산한다

    ‘일본도(刀) 차고 군복 입은 교장과 교사,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 충남도교육청이 3·1 운동 100주년인 올해 대대적인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작업에 나선다. 김지철 도교육감은 20일 충남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식민지 잔재 청산을 통해 새로운 학교문화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현관·계단 벽면·복도 등 공개 장소에 게시된 일본인 학교장이나 교사 사진이다. 도교육청이 지난해 12월부터 2개월간 도내 713개 초·중·고를 전수조사해보니 29개 학교가 이런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일본도를 들고 있거나 군복을 입고 있는 등 일본 제국주의 색채가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8·15 해방 후인 1945년 10월에도 여전히 재직 중인 일본인 학교장도 있었다. 친일 작곡가인 김동진·김성태·이흥렬·현제명과 친일 작사가인 김성태·이원수 등이 지은 교가를 사용하는 학교도 31개교에 달했다. 156개 중·고교는 일제강점기 학생들이 했었던 항거 방식인 백지동맹(전교생 시험 거부)과 동맹휴학(식민실업교육 거부) 등을 학생 징계 항목으로 정하고 있고, 1970년대 이전 개교한 상당수 학교는 일제의 지배 방식인 성실, 근면, 협동 등을 교훈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교육청은 다음달 초 개학 전에 일본인 교장·교사 사진부터 철거해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 김 교육감은 “일제강점기 교장도 학교의 역사라는 주장도 있지만 교내 게시는 표상이 된다는 의미인 만큼 일본인 교장을 표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교가 가사에 담긴 식민 잔재 내용은 즉시 고치고 학교 구성원들 의견을 수렴해 교체하는 방안을 권고할 계획이다. 수업 등에서 자주 쓰이는 일본어, 일본식 한자어 100개를 선정해 이를 쓰지 않도록 각급 학교에 공문을 보내고 실천 운동도 벌이기로 했다. 또 학생 생활규정을 대대적으로 점검해 독재정권 잔재인 ‘반국가적’ ‘불온’ ‘이적 행위’ 등의 표현도 개선하도록 권고할 참이다. 김 교육감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며 “후학들이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학교 상징이나 교표도 한자나 영어를 쓰는 곳이 많은데 한글로 형상화하고, 교훈도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하도록 권장하겠다”고 강조했다. 도교육청은 오는 26일 독립기념관에서 ‘학교 내 일제 잔재 청산과 새로운 학교문화’ 학술대회를 열고 이런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예산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도대체 왜”…日아베, 트럼프 노벨상 추천을 둘러싼 ‘3대 쟁점’

    “도대체 왜”…日아베, 트럼프 노벨상 추천을 둘러싼 ‘3대 쟁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을 놓고 일본 내에서 논란과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논점은 크게 3가지다. 아베 총리 스스로 ‘북한의 위협’과 관련해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과 미국에 대한 추종이 도를 넘었다는 것,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더해 아베 총리 스스로 트럼프 대통령 추천 사실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는 데 대해서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아베 총리는 지난 1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트럼프 대통령 노벨상 추천과 관련해 야당의 집중 추궁을 받았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진행했으며, 당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를 직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제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노벨위원회는 후보자와 추천자를 50년 동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에 의거해 (추천 여부에 대한) 코멘트를 삼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2야당인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냐”고 재차 따져묻자 아베 총리는 결국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사실상 시인했다. 이와 관련해 “국익을 해쳤다”(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나가츠마 아키라 대표대행)는 등 야당으로부터 거센 비난이 나온 가운데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국제적으로 일본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려하지 않는가”, “트럼프 대통령의 필요에 따라 아베 총리가 이용당하고 있다” 등 지적이 제기됐다.아베 정권은 지난해 6월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하고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된 이후에도 그 성과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해왔다. “북한의 위협은 변하지 않았다”며 육상배치형 미사일 요격시스템 ‘이지스 어쇼어’와 최신예 F35 전투기 105대 추가 도입 등을 추진했다. 그랬으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평화 정착을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상 후보에 추천한 것은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위기감을 부추기며 자국내 군비 확충은 가속화하면서, 노벨상 추천서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긴장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사설에서 “아베 정권에 일관된 것은 트럼프의 환심을 사려는 자세다. 노벨평화상 추천 카드까지 꺼내들다니 놀랍다. 이것이 국제사회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라고 개탄했다. 도쿄신문은 “오래 전부터 미국을 추종하는 자세가 두드러졌던 만큼 (이번 노벨평화상 추천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느낌마저 든다”고 조롱했다.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일주의’를 내걸고 세계 곳곳에서 무역마찰을 일으키며 글로벌 경제의 변동성을 높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파리협정 등 국제합의 틀을 깨뜨리려는 움직임을 계속해 왔다. 이란과 맺은 핵합의 탈퇴와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파기 등도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의 적임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2017년 핵무기 확산 방지를 위해 힘쓰는 국제단체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ICAN)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아베 총리는 원폭 피해국가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아 논란을 부른 바 있다. 그런 전력을 감안하면 이번 트럼프 대통령 추천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아베 총리가 노벨평화상 추천 여부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데 대해서도 논리가 빈약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는 노벨위원회가 50년간 추천자와 피추천자를 공표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사실관계 확인을 회피했지만, 추천자 스스로 추천 여부를 밝히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아사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일본을 대표해 경의를 담아 (나를) 추천했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랬다면 국민들 앞에 당당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못하면서 마치 일본의 전체 총의(總意)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비판했다.한편 마이니치신문은 아베 총리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을 직접 요청한 사람은 다름아닌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라고 이날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아베 총리가 지난해 8월 22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직접 의뢰를 받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게 됐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전화통화에서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미사일이 일본의 상공을 날아가고 있느냐”고 아베 총리에게 자기 성과를 과시하며 노벨상 추천이 가능한 지 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동아시아 국가 중에 러시아가 가장 특별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한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현재 러일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은 쿠릴 열도 문제이다. 이번에는 그 문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약 56개의 섬이다. 여기에 러시아인들이 처음에 들어온 시기는 1640~1641년이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639년 이반 모스크비틴을 수장으로 한 카자흐 원정대가 오호츠크 해에 진출하였으며 쿠릴 열도에 상륙했고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쿠릴 열도의 인구는 주로 아이누족을 비롯한 여러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따로 없었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릴 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 일본인들도 홋카이도 북부와 쿠릴 열도 남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러시아와 충돌하였다. 전쟁을 피하려던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에노모토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사할린 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후 새로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더불어 일본은 사할린 섬의 남부를 얻어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사실상 파기되었다. 10월 혁명 발생으로 1918년 내전 중인 러시아의 상황을 이용해 일본은 1918년 4월 5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는데 붉은 군대와 한인(韓人)의 항일부대 등의 저항으로 1922년에 철수했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백위파 정권은 무너졌다. 또한 일본은 1920년 ‘노령 거주 일본인들의 생명과 그 재산의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사할린 섬의 북부를 점령했다가 1925년에 이르러 러시아에 반환하였다.1930년대부터 일본은 쿠릴 열도를 소련 캄차카나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비행장과 해군 기지 등 시설을 건설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위치한 이투루프 섬에서 출발했다. 진주만 공격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소련 대사를 만나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한 근거이기도 하다. 12월 11일, 소련은 2차 대전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측도 그 요구를 계속 반복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 독일도 1942년 7월 10일 일본 정부에 독소전쟁 참전을 요구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당하는 일본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소련 대일전쟁 참전은 결국 1943년 12월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약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에서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고 소련은 대일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사할린 남부, 그리고 쿠릴 열도를 요구하였다. 독일 패전 직전 1945년 2월 4일에 얄타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참전의 계획을 재확인하였고 독일 패전 2~3개월 이내 대일참전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소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영토 회복과 별도로 쿠릴 열도가 소련에 양도될 것을 요청하였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독일을 패배시킨 소련은 유럽에서 부대를 극동지역으로 빨리 옮기고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쿠릴 상륙 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극동전선군 참모부가 캄차카 방어구 사령관에게 일본이 항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슘슈를 비롯한 쿠릴 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소련군이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준비하고 8월 18일 소련군 부대들이 쿠릴 열도 북단에 위치한 슘슈 섬에 상륙했다.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츠츠미 후사키 중장은 8월 15일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으며 이에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9일 ‘자위 행동이라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츠츠미 중장은 시간을 벌기 위해 항복이 아닌 정전(停戰)을 제안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츠츠미 중장은 결국 8월 20일에 항복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 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츠츠미 중장으로부터 쿠릴 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이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8월 29일 쿠릴 열도 북부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 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오전 3시 15분 청진 상륙 작전에 참여한 레오노프 해군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이투루프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무장해제에 착수하였으며 9월 5일까지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전투 행동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 간에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키고 급속도로 남하하는 소련을 막고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8월 15일 소련 최고사령관인 스탈린에게 일본 항복 절차를 규정한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보냈다. 이 명령의 내용을 검토한 스탈린은 미국이 제안한 한반도 분할 점령 등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트루먼에게 소련군 책임 지대에 홋카이도 북부와 모든 쿠릴 열도를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8월 18일에 보낸 답변에서 모든 쿠릴 열도를 소련군 책임 지대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했으나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속한 모든 섬들의 점령은 맥아더 장군이 담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대답을 받은 스탈린은 미국측의 동의를 재확인한 후 8월 22일 홋카이도 상륙 작전 준비를 중단하고 쿠릴 열도 남부에 진출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일반 명령 제1호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지도부에게 전달되었으며 대본영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 열도에 대한 …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중국이 초대받지 못한 점, 일본 재군사화를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회는 쿠릴 열도의 남부도 얄타 협정에 언급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6년 2월에 의견을 바꾸고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群島)가 쿠릴 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 사망 후 외교노선을 바꾼 소련은 일본과의 별도의 평화조약 협상에 들어갔으며 일본을 미국 영향권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탈피시키기 위해 조약의 대가로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섬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소일 양국은 1956년 10월 19일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양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 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소일 평화 조약의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러시아와 일본은 현재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러시아와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푸틴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아베 총리와 만나서 쿠릴 열도 남부에서 공동경제활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 방문단이 2017년 6월에서 2018년 10월에 걸쳐 3번이나 쿠릴 열도를 방문하였으며 러일 무역 규모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양국 정부는 2018~2019년을 ‘러시아에서 일본 해’, ‘일본에서 러시아 해’로 지정했으며 러일 간의 문화 교류가 전대미문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영토’가 빨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본 매체가 조성한 일본 국내 분위기 속에서 아베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인에게 반일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일 평화 조약을 협상하기 전에 일본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일본 측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일본인들로 하여금 큰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쿠릴 열도 남부를 포함한 쿠릴 열도의 전체가 러시아 영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도 변한다는 것도 객관적 사실이다. 미국 경제 제재로 러시아의 경제가 발전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그 대책으로 연금을 받는 연령을 높이는 연금 제도 개혁 등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에서도 영토를 양도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자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러시아가 일본에 ‘북방열도’를 돌려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발전되고 러시아의 경제 발전 속도가 계속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가능성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글 사진: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임정욱의 혁신경제] 제로페이와 핀테크 생태계 키우기

    [임정욱의 혁신경제] 제로페이와 핀테크 생태계 키우기

    지난해 12월 20일 제로페이가 처음 등장한 후 지난 두 달간 자주 써보려고 노력했다. 내 스마트폰 네이버앱에 은행계좌와 연동해 제로페이를 쓸 수 있도록 해놨다. 하지만 겨우 한번 써봤다. 우선 제로페이가 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파리바게뜨에서 된다고 해 여러 매장에서 물어봤지만 단 한 곳에서만 가능했다. 본사 직영점이었다. 물론 서울시청 인근에는 제로페이를 받는 곳이 있다. 하지만 강남에서 일부러 광화문까지 가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하철역 등 서울시내 곳곳이 제로페이 광고로 도배돼 있는데도 그렇다. 그럼 왜 상인들은 제로페이를 적극 받아들이지 않을까. 제로페이를 먼저 쓰자는 고객이 없는 탓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제로페이를 쓰지 않을까. 기존 신용카드보다 혜택이 거의 없고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소득공제가 더 된다지만 모든 지출을 제로페이로 하지 않으면 공제금액은 미미하다. 잔고 없이도 물건을 살 수 있는 신용카드와 달리 제로페이는 연결 계좌에 꼭 돈이 있어야 한다. 제로페이를 은행앱 등에 등록하고 사용하는 과정도 신용카드 사용에 비해 더 불편하다. 상인 입장에서도 제로페이가 줄여 준다는 결제 수수료는 체감상 크지 않다. 이미 영세 상인에게 카드 수수료는 높은 편이 아니다. 카드 수수료 몇푼 줄여 주는 것보다는 손님이 더 많이 와서 매출이 올라가는 것이 휠씬 중요하다. 그래서 제로페이를 외면하는 것 같다. 반면 이웃 나라 일본을 보자. 일본은 QR코드를 기반으로 한 모바일 결제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NTT도코모, 라쿠텐, 라인, 아마존, 페이페이, 오리가미 등 통신, IT 대기업과 스타트업 회사들이 현금 사용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습관을 바꾸기 위해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경쟁 중이다. 가맹점으로 가입하는 상점들에는 대부분 회사가 향후 2~3년간 수수료를 무료로 하면서 가입을 유도하고 있다. 업계 자발적으로 경쟁을 통해 제로페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존 등은 상점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태블릿 컴퓨터를 무상으로까지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고객이 자신의 모바일 결제 상품을 사용하도록 오히려 돈을 준다. 소프트뱅크와 야후재팬이 설립한 후발 주자인 페이페이는 지난해 12월 이 회사의 모바일 결제 상품을 사용하는 고객에게 결제 금액의 20%를 환원해 준다는 마케팅 캠페인을 실시해 큰 화제를 모았다. 즉 1만원을 결제하면 2000원을 포인트로 돌려준다는 것이다. 약 100억엔(약 1000억원)의 마케팅 예산이 소진될 때까지 진행한다고 했는데 큰 관심을 모으며 불과 10일 만에 전액이 소진됐다. 가입자도 폭증했다. 큰 효과를 본 페이페이는 최근 다시 한번 1000억원을 들여 20% 환원 캠페인을 또 시작했다. 심지어 아베 총리도 이달 소상공인의 꽃집에 가서 페이페이로 꽃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일본의 소상공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마케팅 캠페인으로 고객이 늘어나고 경쟁으로 당장 수수료도 받지 않는다면 안 쓸 이유가 없다. 한일 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서는 민간 업체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정부가 직접 경기장에 선수로 뛰어들어서 경쟁에 참가한다. 경기장에서 심판을 봐야 할 사람이 말이다. 구청 직원 등 공무원들이 나가서 가맹점을 늘린다. 공공광고 공간을 이용해 마케팅에 나선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다. 근본적으로 공무원들이 첨단 모바일 결제 상품을 개발해 업계를 선도한다는 것이 무리다. 잘된다고 해도 인센티브도 없다. 결국 정부가 잘할 수 없는 일이다. 결제 비즈니스는 엄청나게 복잡하다. 한편 민간 결제서비스 업체들은 속앓이를 한다. 한 결제 스타트업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 “한 고객이 전화해서 그럽니다. 제로페이는 돈을 안 받는데 너희는 왜 수수료를 받느냐고요. 이러다가 이 비즈니스 자체가 공짜라는 인식이 생길까봐 두렵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은 소프트웨어 등 지식형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인색한 시장이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키는데도 그렇다. 모바일 결제 시스템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우습게 생각해 정부가 뛰어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 간단해 보일수록 그 뒤에서는 더 많은 소프트웨어 노동자들이 고생하고 고민해 만들어 낸다.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민간에서 알아서 고객을 위한 혁신 제품을 만들어 내도록 정부는 뒤에서 응원하고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어 주기 바란다.
  • 봄철 日열도 ‘화분증’의 역습… 국민 절반이 재채기·안구충혈 몸살

    봄철 日열도 ‘화분증’의 역습… 국민 절반이 재채기·안구충혈 몸살

    개인소비 감소액 年 7조 6000억원 추산 태평양전쟁 후 심은 삼나무의 꽃이 원인 신품종 대체·벌목 더뎌 고충 갈수록 심화봄이 오면 일본의 거리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넘쳐난다. 꽃가루가 날리면서 몸에 이상증세를 일으키는 ‘화분증’(花粉症)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가 실외활동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지만, 일본에서는 봄철 화분증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꽃가루 알레르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재채기, 코막힘, 가려움증, 안구충혈은 물론이고 심하면 밤새 잠도 못자고 몸살을 앓는다. 일본인 2명 중 1명은 크든 작든 화분증을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해마다 5월 정도까지 화분증이 사람들의 활동을 둔화시켜 경제에도 큰 부담을 준다. 화분증에 따른 개인소비 감소액이 연간 7550억엔(약 7조 6000억원)에 이른다는 추산도 나와 있다. 화분증 유발 꽃가루의 90%는 삼나무에서 온다. 태평양전쟁 중 물자동원과 패전 후 무분별한 벌채 등으로 전국의 산림이 황폐해지며 산사태 등 문제가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경제적으로 탁월한 삼나무 녹화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일본이 원산지인 상록침엽수 삼나무는 생장이 빠르고 목재 가공도 쉬워 주택 등 건축자재로 각광받았다. 전후 일본의 재건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로 인한 반대급부가 ‘꽃가루의 역습’이다. 화분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1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화분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전체의 45.6%(도쿄도 조사)로, 10년 전 28.2%에 비해 17.4% 포인트나 증가했다. 수령이 늘어날수록 꽃가루 비산이 왕성해지는 삼나무의 특성에 주된 원인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 임야청 등 당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삼나무 꽃가루 저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그 결과 목재의 질은 유지하면서 꽃가루 발생량은 기존의 1% 이하로 줄인 ‘화분증 대책 삼나무’ 개발에 성공, 10여년 전부터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화분증으로 인한 고충이 더 심해지는 것은 왜일까. 신품종 대체가 너무 더디기 때문이다. 개량형 묘목이 기존 삼나무를 대체하는 면적은 연간 2100~2600㏊에 불과하다. 전국의 삼나무 인공림이 440만㏊(도쿄돔 90만개 규모)임을 감안하면 극히 미미하다. 이는 일본산 목재의 경제적 효율성이 낮은 데서 기인한다. 값싼 외국산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일본의 목재 생산은 40년 전에 비해 70%나 감소했다. 수요가 줄면서 삼나무 목재의 가격은 1980년 최고점 대비 3분의 1로 떨어졌다. 판로와 가격이 보장되지 않으니 사업자들이 벌목과 가공에 나서지 않는다. 기존 삼나무들이 베어지지 않은 채 빽빽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개량형 삼나무가 이식될 여지가 없다. 임야청은 “국산 목재를 사용해야 화분증 문제가 완화된다”고 건설업계 등에 호소하고 있지만, 값싼 외국산 목재들을 놔두고 자국산 삼나무로 옮겨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트럼프·김정은의 동행 스웨덴까지 이어지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가을 미국의 요청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실제 수상 가능성에 시선이 쏠린다. 지난해는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시한인 2월을 넘겨 제1차 북미 정상회담이 치러졌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후보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반면 올해는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명단에 올라 ‘자격’을 갖춘 데다 두 정상 간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되며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다. 지난해는 ‘추측’ 수준이었다면 올해는 ‘현실’로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2차 정상회담으로 가시적인 비핵화의 진전을 이룬다면 두 사람의 올해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을 예상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17일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아베 총리가 미국 정부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기 바란다’는 비공식 의뢰를 받아 지난 가을쯤 노벨상 관련 인사에게 트럼프 대통령을 추천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5일 아베 총리가 자신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노벨위원회에 추천했다고 깜짝 공개했다. 이에 워싱턴포스트(WP)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혼동한 게 아니냐”는 전문가 의견을 전하는 등 ‘트럼프의 착각설’이 돌기도 했지만, 이날 아사히 보도로 트럼프의 말은 사실로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자신을 추천한 이유에 대해 “일본 영공으로 미사일이 지나갔으나 이제 갑자기 일본인들은 안전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후보 거론 당시 그는 “평화는 상이다”라고 쓴 게시물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등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달 1일 추천을 마감한 올해 노벨 평화상에는 304명이 후보 명단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평화 프로세스’ 촉진자 역할을 한 문 대통령까지 포함해 남·북·미 정상 3자 공동수상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평화 프로세스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벨 평화상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서울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日아베, 美트럼프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한 이유 알고보니…

    日아베, 美트럼프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한 이유 알고보니…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가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아사히신문은 17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한 보도에서 “아베 총리가 미국 정부로부터 비공식으로 의뢰를 받아 지난 가을쯤 노벨상 관련 인사에게 트럼프 대통령을 추천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6월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이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기 바란다”며 미국 측이 일본에 비공식적으로 의뢰를 해왔다고 아사히에 말했다. 앞서 지난 1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자신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노벨위원회에 추천했다고 밝혔으나 워싱턴포스트(WP)가 “문재인 한국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혼동한 게 아니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하는 등 ‘트럼프의 착각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아사히 보도로 트럼프의 말은 사실로 확인됐다.트럼프 대통령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노벨위원회에 보낸 5장짜리 서한에서 한반도 평화 무드 등에 기여한 공로로 트럼프 대통령을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해당 서한의 사본을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일본을 대표해 귀하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해 ‘고맙다’고 했다”면서 “아마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난 괜찮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가 자신을 추천해준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 영공으로 (북한의) 미사일이 지나갔으나 이제 갑자기 일본인들은 안전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북미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자신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자 ‘평화는 상이다’라고 쓴 게시물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등 수상에 대한 의욕을 보인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 뒤 주재한 청와대 회의에서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린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돌고래 몰이잡이는 日동물보호법 위반” 현지 단체가 소송제기

    “돌고래 몰이잡이는 日동물보호법 위반” 현지 단체가 소송제기

    일본 와카야마현 다이지마을의 돌고래 몰이잡이는 잔혹할 뿐만 아니라 동물보호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일본의 한 동물보호단체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14일 공개됐다. AFP통신과 일본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나가노현에 본부를 둔 동물보호단체 ‘라이프 인베스티게이션 에이전시’(이하 LIA)는 이날 도쿄 소재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러한 사실을 밝혔다. 제소자는 이 단체의 대표이며, 와카야마현지사와 현을 상대로 몰이잡이 허가 취소를 요구하는 이번 소송은 지난 9일 접수됐다. 뿐만 아니라 이번 소송에는 다이지마을의 한 주민이 원고로 참가하고 있으며, 호주 돌고래 보호단체 ‘액션 포 돌핀스’가 소송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돌고래를 작은 만에 몰아넣고 포획하는 이 몰이잡이는 공황 상태에 빠진 돌고래가 그물에 엉켜 질식사하는 경우가 많다. 바위에 부딪혀 죽는 돌고래도 있고 어부가 긴 금속막대로 반복해서 척수 부분을 질러 죽는 돌고래도 있다. 이를 소재로 한 2009년 개봉 영화 ‘더 코브’가 미국 아카데미상의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음에 따라 돌고래 몰이잡이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제소에 관여한 변호사에 따르면, 다이지마을의 몰이잡이에 관한 소송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고 측은 이 어법이 동물의 불필요한 살상을 금하고, 죽일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규정한 일본의 동물보호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이지마을 주민 1명과 함께 소송을 제기한 이 단체의 야부키렌 대표는 “많은 일본인이 돌고래를 어류로 간주하고 돌고래에는 동물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일본에는 돌고래를 식용으로 포획하는 전통이 있다. 몰이잡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어법이 현지 전통문화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데다가 돌고래는 멸종위기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진=LI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봄을 달린다, 봄을 달군다… 생활체육인 6만명 충북으로

    봄을 달린다, 봄을 달군다… 생활체육인 6만명 충북으로

    39개 정식 종목에 빙상 등 시범 종목 4개 일본인들도 9개 종목에 176명 출전 준비생활체육인 6만여명이 운집하는 축제가 올봄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2019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이 4월 25일부터 나흘간 충주시를 중심으로 충북 11개 시·군·구 60개 경기장에서 열린다. 2001년 제주도에서 제1회 대회를 시작해 올해로 19회째를 맞이하는 대회지만, 최근 생활체육이 일상에 더욱 가까워지면서 그 관심도와 열기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은 전국체육대회, 전국장애인체전, 전국소년체전, 전국장애학생체전과 함께 손꼽히는 국내 5대 체전 중 하나다. 엘리트 체육인 위주가 아닌 순수 생활체육인만을 대상으로 한 전국 대회로는,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이 최대 규모다. 엘리트 선수들의 대회는 10~20대가 주축을 이루는 반면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은 40대 이상의 참여율이 높다. 지난해 충남에서 열렸던 대회만 해도 10대 이하는 2005명, 20대는 1634명의 선수가 참가했지만 40대는 전 연령대 중 가장 많은 3709명이 출전했다. 80대 이상의 고령자 그룹에서도 316명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치열한 승부를 벌이기보단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확인해보며 함께 즐기는 데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올해는 39개 정식 종목에다가 줄다리기, 줄넘기, 핸드볼, 빙상 등 4개의 시범 종목이 추가됐다. 기존에 있던 농구 종목에서는 3대3 부문이 올해부터 신설됐다. 3대3 농구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동호인도 늘어나자 세부 종목을 추가한 것이다. 올해 개회식은 4월 26일 오후 5시 충주종합운동장에서 시작된다. 개회식 때는 유명 전·현직 국가대표선수들을 섭외해 팬 사인회를 여는 등 일반 시민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폐회식은 4월 28일 오후 4시부터 충주시 장애인형 국민체육센터에서 진행된다. 충북에서 생활체육대축전이 개최되는 것은 2002년 이후 17년 만이다. 대한체육회는 전국체육대회 개최 도시가 이듬해 전국소년체전을, 그다음 해에는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을 연달아 치르도록 하고 있다. 2017년 전국체전과 2018년 소년체전을 주최한 충북이 자연스레 올해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을 맡게 됐다. 2002년 당시 2만 5000여명이 참여해 27개 종목에서 뜨거운 경쟁이 펼쳐졌다. 대회 조직위는 올해 43개 종목에서 선수와 임원·관중을 모두 합쳐 나흘간 6만여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 생활체육인도 9개 종목에서 176명이 출전한다. 미세 먼지가 많을 것이라 예상되는 4월에 대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고농도 예보 시 야외 경기의 일정을 조정하고 미세먼지 마스크도 제공할 계획이다. 대회 기간 동안 공공기관 차량 2부제를 실시하고 도로 청소차도 확대 운영한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글로벌 In&Out]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을 재평가하자면/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글로벌 In&Out]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을 재평가하자면/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2주 후면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일주일이다. 3ㆍ1절 100주년이다. 100이라는 숫자는 어느 나라에서도 의미가 있는 숫자이다. 그러다 보니 올해 3ㆍ1절 그리고 3ㆍ1절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이 특별히 관심 대상이 될 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이나 좌우로 갈렸던 독립운동에 대해서 애국심을 고취하지 못하고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논쟁들이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들이 어설프게 진행되다 보니 국민 머릿속에 독립운동을 중요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 제기들이 잇따라 발현된다. 과연 한국의 독립운동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가? 1895년 명성황후의 피살 사건에서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지던, 즉 자유를 잃은 시기부터 시작해서 광복을 얻은 1945년까지의 기간을 외국 사례와 비교해서, 내 나름대로 재평가를 해 보았다. 많은 나라의 독립 역사와 한국의 독립 역사를 비교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독립 후의 나라 상태이다. 일부 나라들이 독립했지만, 나라 운영은 잘 되지 않았다. 외국인 입장에서 봤을 때 차라리 독립을 안 하고 외세의 지배를 받고 살았으면 현재 상황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1945년 독립한 뒤 한국인의 삶이 매일매일 나아졌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식민지 시절에도 ‘해방’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었고, ‘왜 주권을 잃었을까’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국민을 계몽하는 등의 교육사업 등에 큰 투자를 했다. 그러다 보니 독립했을 때 나라를 운영할 현대적인 국민이 준비되어 있었다. 독립과 관련된 또 다른 쟁점은 학살 문제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다른 나라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제국 군부 중심인물이나 조국을 팔아먹은 배신자 한국인을 대상으로 물리적 폭력을 강행했다. 무고한 일본인이나 하급경찰은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른 나라의 독립군은 식민지 세력과 싸울 때 식민지 제국의 무고한 시민을 대대적으로 죽일 때도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독립운동가들이 무력투쟁할 장소를 고를 때도 일제가 한국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 않도록 자국민의 안전까지 신경 썼다. 물론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만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ㆍ일 전쟁 때 일본군의 난징학살과 같은 대학살이 한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술하니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할 만한 면이 눈에 잘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치 맛있어요” 식으로 ‘외국인이 한국을 칭찬한다’는 등의 미디어 활동을 포퓰리즘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한다. 예전에 한국 사회의 비판할 부분을 마음껏 비판했던 사람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을 찾아서 칭찬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 젊은이들이 선조들이 얼마나 힘들게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느끼고, 도덕적인 면에서 ‘해방’했다는 점을 같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읽은 태화관이 어떤 레스토랑이니, 임시정부는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정을 무시해도 된다느니, 민족 대표 33인이나 임정 의원 중에서 친일 행적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느니 하는 논쟁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물론 학자들은 연구 차원에서 감정에 치우침 없이 역사적 사실을 끝까지 따져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불필요하게 국민의 통합 의식을 흔드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유관순과 지역의 학생, 교인들은 진명학교와 교회 등에서 밤낮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유관순에게 최일선 연락 책임을 맡긴 것도 김 의사였다. 그는 천안 동부 6개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의사는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조인원은 현장에서 군중을 이끈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 의사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를 필두로 천안 주변의 총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거사 일로 정한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을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넘어섰다. 김 의사는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과 50보 거리의 지척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만세운동은 극히 평화적이었다.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커졌다. 오후 2시쯤 천안헌병분대에서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유중권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발포에 놀라 군중은 일단 흩어졌지만, 오후 4시쯤 발포와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15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김 의사는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칼로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의사는 그들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며 꾸짖었다. 황망한 중에도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헌병은 논리에서 밀리자 김 의사를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는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의사는 시신이 되어서도 독립선언서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오후 6시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참살당한 말을 들은 의사의 어머니 최 여사가 달려왔다. 여사는 헌병의 멱살을 잡아채며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헌병은 사정없이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김 의사의 나이 32세, 최 여사의 나이 66세였다. 아우내장터 시위로 김 의사 등 19명이 죽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병천면 가전리 뒷산에 의사의 시신을 묻었다. 김 의사의 사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선생의 손자 김운식(70)씨에게 들은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김 의사는 아들 셋을 뒀는데 맏아들이 열 살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김 의사의 부인, 즉 김씨의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 안성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의사의 맏아들은 그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와 인천에서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친일파들은 위세를 떨치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가는 도리어 빨갱이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좌익 사상에 빠졌다”고 말했다. 맏아들은 6·25가 터진 후 공장 인민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판단해 9·28 수복 후 국군에 자수했다. 자수했지만 방면되지 않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몇 달 뒤 1·4후퇴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천감옥의 좌익사범들을 총살했는데 그때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도 천안을 떠나 곳곳을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우내장터를 찾았다. 두 개의 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뜻인 아우내를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어로 지명을 바꿨다. 근처엔 유관순기념관도 있고 해마다 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만세운동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없고 순댓집 간판만 즐비했다. 단지 시장 입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아우내에는 순대만 있고 역사는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일본인 극장 몰려 있던 충무로… 조선 영화관 각축장 된 종로

    일본인 극장 몰려 있던 충무로… 조선 영화관 각축장 된 종로

    1903년 6월 한성전기회사가 주최한 동대문 기계창에서의 활동사진 상영회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 공간은 동대문활동사진소로 자리잡는다. 한국에서 관람료를 내고 들어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했다는 가장 첫머리의 기록이다. 그리고 1919년 10월 조선인 거리의 영화 상설관 단성사에서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상영해 조선인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한국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가 다중이 모인 극장에서 공개된 가장 첫 번째 사건이다.이번 주제는 활동사진이 상영됐던 공간, 바로 ‘영화관’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처음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동대문활동사진소에 운집했던 1903년부터 조선인 거리의 연극장 단성사가 영화 상설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1918년까지 서울 도심에는 어떤 영화관들이 생겨났고, 영화관 거리는 어떤 모습으로 형성됐을까. 우리가 이 시기 영화관의 설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영화산업의 기초적인 형태가 구축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영화관 설립 이전의 상영 공간 한성전기회사가 운영하던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흥행 단체인 광무대(光武臺)가 인수하며 ‘광무대’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한다. 전통 연희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사진까지 상영했던 공간으로 1914년까지 이어졌다. 운영은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이 맡았는데, 이후 그는 단성사를 경영하고 연쇄극을 제작하는 등 초창기 한국 영화의 기반을 만든다. 아직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이 설립되지 않았던 시기 활동사진을 상영하던 공간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서대문 정차장 근처 프랑스인 마르탱이 운영하던 호텔 애스터하우스에서 1907년 프랑스에서 가져온 필름들을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즈음 영화 상설관은 아니지만, 무대 공연을 중심으로 한 극장들이 생겨났다. 상설 극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이 국가 경사를 위해 설립한 ‘희대’(戱臺)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다. 사실 이전의 조선은 건물 안에서 공연하는 극장문화가 없었으므로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기록되는 곳이다. 희대는 협률사(協律舍) 또는 원각사(圓覺社)로도 불렀는데, 이곳을 빌려 연희를 하던 단체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가장 먼저 협률사가 운영했던 희대는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폐지됐다가 1907년 2월부터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라는 이름의 사교회장으로 활용됐고, 1908년 7월부터 작가 이인직이 ‘원각사’라는 이름의 연희장으로 운영하며 연극과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들을 상연했다. ●북촌과 남촌의 극장가 일제강점기 서울 장안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한산 아래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산 아래 남촌의 일본인 거주지가 분리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극장가 역시 민족별로 구분해 형성됐다. 조선인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상권인 종로통을 중심으로 들어섰고, 일본인 극장들은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의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촌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종로 2가의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1907년부터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寺), 장안사(長安社)와 같은 민간 극장이 설립됐다. 조선인들을 위해 전통 연희, 신파극, 활동사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상연됐던 공간들이다. 조선인 극장의 형성과 프로그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 시기 한국으로 많은 수의 일본인이 건너왔고, 자연스럽게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한 극장이 생겨났다. 1907년을 전후한 시점 욱정(旭町) 1정목 쪽의 가부키자(1906년 설립·이하 설립연도), 본정 2정목의 혼마치자(1906년쯤), 본정 3정목의 고토부키자(1907년쯤), 본정 4정목에 이르면 게이조자(1906년쯤)가 있었다. 명동 방향으로는 나니와부시(浪花節)를 공연하는 나니와칸(1909년), 그리고 남대문 앞에는 신파극을 공연하는 이나리자(1910년)가 있었다.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첫 활동사진 상설관은 1910년 지금의 을지로인 황금정 2정목에 세워진 경성고등연예관이다. 목조 건물로 1층에는 긴 의자, 2층에는 다다미를 배치해 600여명이 앉을 수 있었다. 당시 개관 광고를 보면 프랑스 파테사의 영사기를 도입해 세계 각국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세계 제일 활동사진관’임을 거창하게 선전한다. 당시 관객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각 절반 정도였다. 초창기 영화감독 이구영의 기록에 따르면 서양인 권투선수와 일본인 유도선수가 겨루는 단편영화를 상영하던 중 조선인 관객들이 서양 선수를 응원하는 바람에 일본인 관객들과의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후 일본인 거리의 황금정 3정목에는 다이쇼칸(1912년), 고가네칸(1913년)이 들어섰다. 본정의 가장 번화가인 1정목과 2정목의 교차점에는 1915년 유라쿠칸이 설립돼 남촌의 대표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자리잡았다.●서양 영화를 상영한 조선인 영화관 북촌에는 1912년 우미관(優美館)이 영화 상설관으로 처음 등장한 후 1907년 설립된 단성사(團成社)가 1918년 영화관으로 재개관했으며, 1922년 조선극장이 설립되면서 조선인 영화 상설관으로는 3대 극장이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종로통에 세워진 우미관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처음 설립한 영화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주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serial film·지금의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20분 분량의 필름을 1주일에 1편씩 상영하는 방식)와 유니버설의 자회사인 블루버드와 레드페더 등에서 제작한 5권 분량의 장편 영화를 상영한 서양 영화 전문관이었다. 1907년 세워져 복합 연희장으로 운영되던 단성사는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극장이었다. 1914년 1월 안재묵이 수용 인원 1000명의 대형 극장으로 신축했으나 1년 만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17년 2월 고가네유엔(黃金遊園)의 소유자 다무라 기지로가 인수했다. 다무라는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에게 단성사의 운영권을 주었고, 그는 1918년 12월 활동사진관으로 신축해 흥행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선인 영화 상설관이 서양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외화전문관’이었고, 일본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 영화를 기본으로 상영하는 ‘방화관’(邦畵館)이면서 서양 영화를 함께 상영하는 ‘병영관’(映館)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들어 경성의 영화관 거리는 조선인 영화관의 경우 조선인 변사가 해설하는 서양 영화를 상영하고, 일본인 영화관은 일본인 변사가 해설하는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구도가 굳어졌다. 이즈음 서울 장안 극장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활동사진 수입 초기에 선보이던 뤼미에르 형제나 미국 바이타스코프의 백 피트짜리 짧은 필름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던 구경꾼들은 이미 지난 얘기였다. 이야기 전달을 위한 구성력을 갖추어 가는 미국과 유럽의 장편 극영화들은 활동사진을 좋아하던 ‘애활가’(愛活家)들을 본격적인 ‘영화관객’으로 훈련시켰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배우보다 몸값 높은 조선 최고의 변사는?

    무성영화 시대 외국어 자막 등 해설 필수변사의 입담에 흥행 좌우… 스카우트 싸움도무성영화 시대의 영화관 풍경을 떠올려 보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스크린 옆의 변사(辯士)가 영화를 해설하는 모습이 아닐까. 변사는 서양에서 발명된 영화라는 매체와 전통적인 동양의 공연 방식이 만나 빚어낸 독특한 산물이다. 물론 서구 영화관에도 영화를 설명하는 해설자 역할이 있었지만, 이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서구의 무성영화는 영상과 영상 사이 간(間) 자막 화면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영화 고유의 언어와 문법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 등지에서는 외국어 자막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줘야만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성영화 시대 변사라는 직업은 일본 흥행 산업의 산물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 그리고 일본인 흥행업자들이 시장을 개척했던 태국과 만주에서도 존재했다. 조선에 변사가 전문직업인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하면서인데, 영화 상영 전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해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인 변사로는 서상호, 이한경, 김덕경이 활약했다. 이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정관과 황금관이 속속 등장하면서 변사의 해설도 언어별로 구분됐다. 무성영화 시대의 흥행 성적은 오로지 변사의 입담에 좌우됐다고 할 정도로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보통 변사들은 70~8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류 배우가 40~50원의 월급을 받았고 고급 관리들의 월급이 30~40원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변사들의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유명했던 서상호가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하며 스카우트된 것처럼 변사는 무성영화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사가 전성기를 구가한 무성영화 시기 단성사의 주임변사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가 3대 변사로 꼽혔고, 우정식·서상필·김덕경·성동호 등도 이름을 날렸다.
  • 문정인 “北, 비핵화 실질적 행동 먼저 보여줘야 할 때”

    문정인 “北, 비핵화 실질적 행동 먼저 보여줘야 할 때”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가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현 단계에서는 북한이 비핵화 관련 조치를 선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 특보는 지난 9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구상’ 심포지엄 기조발제에서 “북한이 (지난해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요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모든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폐기할 의사가 있다고까지 말했다”며 “하지만 지금까지는 말뿐이고 행동은 없었으니 이제는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선(先) 핵폐기’를, 북한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강조하며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가시적인 선행 조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에서 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양측이 나중에 (핵폐기와 이에 대한 보상의) 동시 교환을 하더라도 처음 행동은 북측에서 가시적으로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특보는 미국의 보상 조치와 관련해 “북한의 핵폐기 약속에 대해 미국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포괄적으로 완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며 “이보다 남북 간 경제 교류를 예외 규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어 2차 정상회담에서 “빅딜, 스몰딜의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로드맵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특보는 “미 정보당국 추산에 따르면 북한이 핵탄두를 60~65개를 갖고 있다는데, 만약 북한이 이보다 적은 숫자를 신고하면 미국은 속임수를 쓴다고 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협상의 판이 완전히 깨지기 때문에 북·미가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 일본 정부를 배제하려 한다는 일부의 주장과 관련해서는 “1~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요청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제기했고, 아베 총리에게 회담 결과도 설명했다”며 부인했다. 그는 이어 “일본 외무성은 유럽연합(EU) 같은 데에서 북한 문제 해법에 대한 우리 대통령의 주장을 봉쇄하며 지나친 행동을 했다”고 지적하며 “일본이 부정적인 외교만 적극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판이 되는 쪽으로(상황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지난 6일 일본 시민·지식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한 성명의 보도를 놓고 한·일 간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에는 7일자에 이어 8일자에도 보도됐지만 일본 언론에는 아사히신문 단 1개 신문 만이 두 문장 짜리의 짧은 기사로 7일자에 처리했을 뿐 다른 전국지나 방송, 통신사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한국 언론들은 성명 내용을 6일 연합뉴스에 이어 7일자 조간에 일제히 보도했다. 심지어는 사설로까지 언급돼 `한일관계 악화 더 이상 방치 말라는 日 지식인들의 호소’(동아일보 7일자), ‘아베 내각에 식민지배 사죄 촉구한 일본 지식인들’(한겨레신문 8일자), ‘日 지식인들 식민지배 반성 성명, 아베 총리는 새겨듣기를’(한국일보 8일자) 등으로 성명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극심한 한·일 보도의 온도차 성명을 들여다 보자.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담화에 바탕을 두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것이야말로 일·한, 일·북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열쇠이다’라는 긴 제목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돼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등은 이날 도쿄 시내의 중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종원 와세다대학 교수 등 총 226명이 발기인으로 혹은 서명을 통해 동참 의사를 표시했다. 성명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한다”면서 “일·한 간의 이른바 ‘징용공’ 문제인 전시 노무 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의적인 對韓 보도 어려운 분위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지식인 성명이 일본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만 이렇게 일본 언론에서 무관심과 홀대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서울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 정치부의 우에노 미키히코 기자는 “한국 신문을 7일에 읽고 성명이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 일본에 통계부정 논란, 아동학대 문제가 있어서 기자들이 관심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우에노 기자는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는 일본 여론이 지식인들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분들 주장을 역지사지 해보자. 한국 지식인들이 최악인 지금의 한·일관계 타개를 위해 ‘위안부 합의도 잘 지키고 강제 징용문제도 65년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하자. 일본과 한 약속을 잘 지켜야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도쿄신문 독자까지 레이더 사건에 대해 ‘한국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꾸 하는 나라다. 어떻게 하라’라는 의견을 보내오고 있다. 한국, 특히 문재인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없어졌다”고 말했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학 교수(한국정치)는 보다 신랄하다. 그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학자, 언론인들은 항상 한·일관계에서 그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인데다 새로운 내용도 없다”면서 “일본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야기를 뉴스로 다룰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오쿠조노 교수는 “일본에서는 위안부, 징용피해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한국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웃나라여서 이사갈 수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나’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전했다. 韓 ‘조속한 입장 발표’ 日 ‘냉정한 대처’ 주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0년간 한국을 취재하고 있는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진보적 일본 매체조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일본 여론이 한국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역으로 한국에서 비슷한 기자회견이 열렸다고 하면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일본도 역정만 내지말고 냉정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0년 한·일 병합 100주년 때에도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던 일본 지식인들의 ‘2019년 성명’을 둘러싼 한·일의 보도 격차는 갈수록 깊어지는 양국의 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다음은 성명 전문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로, 협력하지 않으면 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양국 사이에 1904년 이후 41년간 군사 점령, 1910년 이후 35년간 식민지 지배가 일본 제국에 의해 한반도에 가해졌다. 이것이 양국 역사의 암부(闇部)를 만들었다. 한국·조선인의 역사 기억에서 이것을 지울 수는 없으며, 일본인은 이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선 식민지지배는 1945년 8월 15일로 끝났지만 일본인은 국가, 국민으로서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독립한 조선의 한 쪽 나라인 대한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조약을 1965년 체결했다. 그러나 1910년의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한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의에 의한 병합이었고 식민지 지배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쌍방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한다’라고 명기된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근본적 인식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이런 한·일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대한민국과의 국교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다면적 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20여 년이 지난 1987년 한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야 1995년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각의결정을 통해 패전 50년 총리담화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다. 일본은 “아시아 제국(諸國)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이 반성과 사죄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고, 2002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북·일 평양선언에서 “조선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러한 반성과 사죄표명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반성과 사죄 표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병합 그 자체에 대한 역사 인식이 추가되어야 한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우리 일본의 지식인 500명은 한국의 지식인 500명과 함께 병합의 과정과 병합조약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라고 지적한 다음 병합조약에 대해서는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을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한국병합에 동의했다는 신화”에 의해 덮어 숨기는 것이고, 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리하여 한국병합에 이르는 과정이 불의부당한 것처럼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이 성명은 2010년 5월 10일 발표된 이후 제2차 서명자가 추가되어 7월 28일에 다시 발표됐다. 그리고 이 성명에 답이라도 하듯 일본 정부와 간 나오토 총리는 8월 10일 각의결정을 통해 한국병합 100년 총리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는 다음과 같은 일본정부의 인식이 담겨 있는데 반성과 사죄가 재차 표명됐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행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히 임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해지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아픔을 받은 쪽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간 나오토 총리 담화)  이것이 일본이 ‘한국병합’으로부터 100년, 식민지 지배 종식으로부터 55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역사인식이다. 한국 국민의 비판에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진 반성과 사죄의 새로운 지평이다. 이 총리담화의 성과로 일본 통치 하에서 조선총독부가 빼앗아 일본의 황실 재산으로 삼은 ‘조선왕조의궤’가 담화가 발표된 그 해에 한국 정부로 반환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일본과 대한민국,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25년간 여러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문제는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징용공’ 문제,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가 큰 문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일조약 당시의 협의와 2000년대 한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있었지만 20만명 정도로 일컬어지는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다시금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 북한의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대처를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도 존재한다. 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92세의 이학래 노인은 지금껏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신속히 실현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를 바탕 삼아 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의 협력을 얻어 남아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올해는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다. 일본에 병합되어 10년 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 민족은 이날 일본인들에게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양 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한·일, 북·일 간의 상호 이해, 상호 부조(扶助)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2019년 2월 6일
  • [씨줄날줄] 디테일의 함정/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디테일의 함정/황성기 논설위원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독일 태생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1866~1929)가 1925년 강의 메모에 남긴 말이다. 그림을 감각만으로 볼 게 아니라, 문헌과 자료의 치밀한 조사에 바탕을 둔 독해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디테일을 강조했다. 이 말에서 파생한 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인데, 신이든 악마든 그 뜻은 도긴개긴이다. 최근에는 잘 진행되던 협상이 뜻밖의 세부 사항에 막혀 난항을 겪는다는 의미로 바뀌어 쓰인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북·일 회담은 두 정상의 절대적 위임을 받은 실무자가 30차례 넘는 협의 끝에 신뢰를 구축하고 성사됐다. 국교정상화의 조기 실현을 제1항에 담은 평양선언에 합의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5명을 제외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전원 사망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에 걸렸다. 김 위원장의 통 큰 납치 고백까지는 좋았지만, 고백이 가져올 파장을 섬세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디테일을 양쪽 모두 놓쳤다는 점에서 북·일 최초의 정상회담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북한 국무위원회 소속으로 알려진 김혁철 전 주스페인 대사가 평양에서 이틀째 협상 중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의 초안을 다듬어야 할 중차대한 시간을 맞은 것이다. 본격적인 비핵화의 입구에 들어갈 열쇠를 찾아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7~28일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 핵심은 핵무기와 핵물질의 반출 등 비핵화 초기 조치의 이행인 ‘프런트 로딩’과 제재를 완화하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되돌리는 ‘스냅백’이다.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은 상호 적대 정책 폐기의 길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었지만, 구체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풍계리 핵실험장 파괴 외에 북한이 장담한 비핵화 조치도 없었고, 그에 상응하는 미국의 보상도 없었다. 8개월 만에 재상봉하는 북·미 두 정상이 각자의 나라에 돌아갈 때 1차 때와 같아서는 비핵화는 포기하는 편이 좋다. 1박2일간 세기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손에 쥐고 갈 구체적이고, 누가 봐도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는 디테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 때 미흡했던 납치 해결의 디테일은 김정은 시대 들어선 2014년에서야 재구축됐지만, 현재 협상은 중단 상태다. 비핵화는 북한이 요구할 디테일보다는 미국이 원하는 디테일이 많은 협상이다. 비건·김혁철은 역사의 새 장을 쓴다는 각오로 디테일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신도, 악마도 감탄할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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