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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녀상 말뚝 테러’ 극우 일본인 재판, 올해도 공전 거듭할까

    ‘소녀상 말뚝 테러’ 극우 일본인 재판, 올해도 공전 거듭할까

    2012년 6월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한 극우 성향의 일본인 스즈키 노부유키 재판이 올해 7년째를 맞는다. 하지만 스즈키의 거듭된 출석 불응과 일본 정부의 비협조적 태도로 재판은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이상주 부장판사는 오는 20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스즈키의 올해 첫 공판을 열 예정이다. 스즈키는 2012년 6월 당시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세워진 소녀상 옆에 ‘다케시마(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는 말)는 일본땅’ 등이 적힌 말뚝을 묶어놔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2013년 2월 기소됐다. 그는 2012년 9월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에 ‘말뚝 테러’를 하고 윤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욕한 혐의(사자명예훼손)도 받고 있다. 2015년 5월에는 경기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 등에 피해자를 모욕하는 소녀상 모형과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일본어가 적힌 흰색 말뚝 모형을 국제우편으로 보낸 혐의로도 이듬해 추가 기소됐다.하지만 일본에 있는 스즈키는 출석통지서를 적법하게 송달받고도 2013년 9월 열린 첫 공판기일부터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법원은 그를 법정에 데려오기 위해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의 비협조 탓에 집행되지 못했다. 지난해 재판에도 스즈키가 불출석하자 법원과 검찰은 범죄인 인도 청구 절차를 밟았다. 재판부의 주문에 검찰이 법무부에 스즈키의 범죄인 인도를 청구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즈키가 올해에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정부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2013년 7월 법원이 윤봉길 의사의 조카가 스즈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하지만 스즈키는 이 민사재판 변론기일에도 출석하지 않았고, 출석 대신 재판부에 나무 말뚝을 보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中서 코카인 밀수 혐의로 체포…에티오피아 사업가, 사형 위기

    中서 코카인 밀수 혐의로 체포…에티오피아 사업가, 사형 위기

    중국이 또 한 명의 외국인에게 마약 밀수죄로 사형을 선고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에티오피아 주간지 ‘더 리포터’ 등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한 여성 사업가가 지난 1월 중국 여행 중 코카인 밀수 혐의로 공안(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혐의를 받고 있는 사업가는 에디오피아 최고대학인 국립 아디스아바바대(공학프로그래밍과 전공)를 나온 나즈로이트 아베라(27). 현지에서 건설 사업을 하는 이 여성은 중국 입국 전 한 어린시절 친구의 부탁으로 샴푸 몇 병을 전달해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들 샴푸 병에서 코카인이 발견된 것이다.이에 대해 아베라는 그 안에 코카인이 들어있는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샴푸가 어떤 종류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가루 샴푸 형태라면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아베라의 가족들과 친구들 역시 그녀의 결백을 지지하며 단지 문제의 친구에게 속은 것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문제의 친구는 이 일로 에티오피아 현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지만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풀려났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아베라의 친구들은 문제의 친구가 잠시 케냐로 출국했다가 돌아왔고 이달 초에는 볼레국제공항을 통해 태국으로 가려던 것을 자신들이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 친구는 그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중국은 세계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마약 범죄에 관해서만큼은 무관용 정책을 펼친다고 알려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비영리 중국 인권단체 뚜이화(对话) 재단에 따르면, 중국 법원이 아베라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99.9%다. 아베라의 오빠는 “동생이 양형을 기다리는 동안 베이징 주재 에티오피아 대사관이 법적 대리인을 고수하고 있다”면서 “가족과의 면회도 금지돼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친구도 “우리는 두렵고 화가 나며 어디로 가서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베라에게서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거의 알지 못한다”면서 “아베라의 부모는 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우간다와 케냐 그리고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인들이 주로 중국에서 마약 밀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실제로 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반면 서양인이 처형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알려졌다. 실제로 서양인이 사형을 당한 사례는 지난 2009년 영국인 아크말 샤이크가 마지막이다. 반면 그후로는 2010년 일본인 4명, 2011년 필리핀인 4명, 2013년 필리핀인 1명, 2014년 파키스탄, 일본인 각 1명, 한국인 3명, 2015년 한국인 1명 등 거의 매년 형 집행이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의혹이긴 하지만 중국이 이런 재판을 통해 보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캐나다에서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이 체포되자 중국은 징역 15년형을 받았던 캐나다인 로버트 로이드 셸렌베르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의혹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한편 멍 부회장은 체포 열흘 뒤 1000만 캐나다달러(약 84억 5000만원)에 달하는 보석금을 내고 석방돼 현재 캐나다에서 가택연금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우리나라 최초 성냥공장 있었던 자리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개관

    우리나라 최초 성냥공장 있었던 자리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개관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 옛 동인천우체국 자리에 성냥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인천시와 함께 ‘2019년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으로 인천 동구 금곡로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을 15일 개관했다고 밝혔다. 성냥마을박물관은 첫 전시로 ‘신 도깨비불! 인천성냥공장’을 선보인다. 성냥의 역사와 제작 공정, 성냥으로 인한 생활 변화상을 알려주는 자료 200여점이 나온다. 성냥마을박물관은 배다리마을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우체국을 남겨두기 위해 옛 동인천우체국의 숙직실과 금고를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 인천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를 가리키는 배다리마을은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게 밀려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 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있었다. ‘인촌’(燐寸)은 ‘도깨비불’이라는 뜻으로 과거에 성냥을 일컬었다. 조선표, 쌍원표, 삼원표 등 다양한 성냥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한국전쟁 이후 문을 닫았다. 공장 주변에 성냥 제조 기술자가 많아 대한성냥, 한양성냥, 고려성냥 등 여러 성냥공장이 들어섰다.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는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 배다리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길 바란다”고 밝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혼다 전 美하원의원 “아베, 과거사 솔직히 사죄해야”

    혼다 전 美하원의원 “아베, 과거사 솔직히 사죄해야”

    진선미 “김복동 할머니 안 외로우실듯”“아베 총리가 이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솔하게 사죄해야 합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마이크 혼다(78) 전 의원이 13일(현지시간)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과 함께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해켄섹의 위안부 기림비를 참배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과거사 인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진 장관은 유엔 여성지위위원회(CSW) 연례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이다. 해켄섹 기림비는 2013년 버겐카운티 법원 앞 ‘메모리얼 아일랜드’에 세워졌으며 미국 자치정부가 건립한 첫 위안부 기림비다. 미 노예제도로 희생된 흑인, 나치에 학살된 유대인, 아일랜드 대기근 희생자, 아르메니아 학살 피해자 등을 추모하는 기림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혼다 전 의원은 이날 “위안부 이슈는 동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후세대에 역사를 가르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은 모든 것을 요구하고, 한국은 많은 것을 내준 불평등한 합의였다”면서 “무엇보다 그 합의에는 할머니들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만약 내 할머니가 그런 치욕을 느꼈다면 외교 무대에서 지금과 같은 예의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겠다”고 덧붙였다. 이는 2015년 합의가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배려없이 이뤄졌으며 일본 정부가 진실한 사죄 없이 배상금 몇 푼으로 역사를 지우려 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이어 혼다 전 의원은 “그(아베 총리)에게 사과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모든 이들이 잘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면서 “그의 역사 부정은 미국에 노예가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사죄를 촉구했다. 또 그는 “아주 많은 일본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 아파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없다”면서 “언론이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진 장관은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다 함께하면서 외롭지 않으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화답했다. 혼다 전 의원은 미 정계에서 일본의 과거사 인식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일본계 3세 정치인이다. 2001년부터 17년간 민주당 소속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이후에는 위안부 문제 등 인권 운동에 참여해왔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11세 소녀 스케이트보더 브라운, 영국 최연소 하계올림픽 출전?

    11세 소녀 스케이트보더 브라운, 영국 최연소 하계올림픽 출전?

    11세 소녀 스케이트보더 스카이 브라운(영국)이 14일(현지시간) 영국 스케이트보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릴 것이 확실시된다. 내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하면 영국의 하계올림픽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된다.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당돌한 소녀는 BBC 스포츠에 “그냥 대회에 나가 즐기고 싶어요. 내가 누구랑 경쟁할지 등 아무것도 모르지만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일본도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데뷔하는 이 종목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국가대표로 선발하려 했지만 영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브라운은 영국 대표로 나서기로 결심한 데 대해 “스케이트보드를 그저 즐기고 싶어서, 그게 첫째니까, (일본에서와 같은) 압박감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여덟 살이던 2016년 브라운은 밴스 US오픈에 최연소로 출전해 메달은 못 땄지만 어머니 또래 선수들을 발 아래 뒀다. 지난달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린 성인 대회 심플 세션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대회 코스는 브라운 몸집의 두 배는 되는 남자 선수들을 위해 설계된 곳이었다. 서핑과 브레이크댄스도 좋아하고 재능도 있다. 남동생 오션(7)과 함께 서핑을 많이 해 피부가 새까만 브라운은 올림픽 어떤 종목을 택할지도 고민했지만 우선 도쿄에서는 스케이트보드를 택했다. 미야자키에 거주하지만 대부분 미국에서 보내는데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와 최연소 계약을 맺어 미국 모든 매장의 스케이트보드 코너에 사진이 걸려 있다. 최근에는 체조 스타 시몬 바일스, 축구 스타 알렉스 모건(이상 미국), 육상 스타 캐스터 세메냐(남아공) 등과 어울려 여성 스포츠 캠페인 광고도 찍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동영상] 11세 스카이 브라운 내년 도쿄올림픽에? 못하는 게 대체 뭐냐

    [동영상] 11세 스카이 브라운 내년 도쿄올림픽에? 못하는 게 대체 뭐냐

    영국의 11세 소녀 스카이 브라운은 못하는 게 없고, 꿈도 야무지게 많다. 내년 도쿄올림픽 스케이트보드에 출전하는 게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뤄야 할 꿈인데 14일(현지시간) 발표되는 영국 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 확실하다. 이 꿈이 12세에 이뤄지면 물론 영국의 하계올림픽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된다.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당돌한 소녀는 선발을 자신하고 있다. 그는 BBC 스포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냥 거기 나가서 즐기고 싶어요. 내가 누구랑 경쟁할 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스카이는 서핑도 스케이트보드 못지 않게 좋아한다. 남동생 오션(7)과 함께 두 종목 모두 좋아한다. 대부분의 서퍼가 그렇듯 삶에 대해 느긋함을 갖고 있지만 나이답지 않게 단호한 면도 있다.그는 “나이가 몇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며 “난 작지만 이 대단한 대회에 나가게 됐다! 나이가 몇살이든 관계 없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때때로 스스로의 벽을 넘고 싶고, 소년들이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왜 소년들은 이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거지? 내 생각에 소년들이 하는 무슨 일이든 소녀들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야자키에서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미국에서 보내는데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와 최연소 계약을 맺어 미국 모든 매장의 스케이트보드 코너에 그의 사진이 걸리면서 얼굴을 알렸다. 최근에는 체조 스타 시몬 바일스, 축구 스타 알렉스 모건(이상 미국), 육상 스타 캐스터 세메냐(남아공)와 디나 애셔스미스(영국) 등과 어울려 여성 스포츠 스타 캠페인 광고에도 등장했다. 여덟 살이던 2016년 스카이는 반스 US 오픈에 최연소로 출전해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스무살 위의 선수들보다 더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지난달에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린 성인 대회 심플 세션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대회 코스는 스카이 몸집의 두 배는 되는 남자 선수들을 위해 설계된 곳이었다. BBC의 스키 및 보드 전문가인 에드 레이는 “아직 잠재력 수준이며 힘과 스피드가 올림픽 수준은 아니다”면서도 “도쿄올림픽은 그녀에게 가치를 잴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며 앞으로 더 커나갈 선수”라고 평가했다. 스케이팅과 서핑 외에도 댄싱도 있다. 미국의 ‘댄싱 위드 더 스타스 주니어’와 비슷한 ‘스트릭틀리 컴 댄싱 포 키즈’를 지난해 12월 우승했다. 이를 계기로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폭발적으로 늘어 30만명이 됐다. 그 뒤 부모와 함께 캄보디아를 찾았다가 물과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다. 해서 보드 제작사, 자선단체와 협력해 수익의 일부를 가난한 나라의 소녀들을 위한 스케이트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지금까지 1만 7000 달러를 모았다. “제 꿈은요, 전세계를 계속 여행하며 계속 스케이팅을 하고, 계속 서핑을 하고, 계속 아이로 남아 있는 거랍니다. 특별히 혜택을 받지 못한 나라들에 가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영국 BBC 인터뷰 동영상은 여기에 옮길 수 없게 해놓았다. 궁금하면 http://www.bbc.com/sport/olympics/47523698
  •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시대를 잘못 타고난 개혁군주 고종(1852~1919),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1851~1895),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1912~1989).’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뮤지컬이 보여 주는 조선 황실 인물의 모습이다. 이들은 열강의 조선 침탈 압박에도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부끄러운 우리 역사까지 항일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상이 허용되지만 일부 작품은 가히 역사 창조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조선 황실의 과오를 희석시키고자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모두 전가하는 ‘분노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조선 황실 남성들 日장교 돼 일왕에 충성”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과 긴밀히 소통하는 ‘우국(憂國) 군주’의 모습으로 나왔다. 이태진(76)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도 “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광무개혁(1896~1904) 등을 통해 청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국가를 만들려고 애썼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미지는 다양한 작품에 투영돼 고종을 ‘비운의 군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학계 대다수는 이런 현상에 매우 회의적이다. 다른 나라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해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오직 고종만이 조선을 전제군주제로 되돌려 망국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땐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비싼 대가를 치렀다.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 등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외세에 의탁하기 바빴다. 1898년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등 개혁을 요구하자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이들을 탄압한 것도 큰 과오다. 당시 조선사회를 기록한 외국인들도 그를 ‘무능한 군주의 전형’으로 여겼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개탄했다. 조선이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하지 못해 세계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일본에 병합됐다는 것이다. 망국의 가장 큰 책임이 왕 자신에게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고종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에 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3일 “고종과 황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키고자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장서 협력했다”며 “조선 황실은 식민지 기간 내내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이 제공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반민족 행위”라고 꼬집었다.실제로 조선 황실은 1910년 경술국치 뒤로 별다른 국권 회복 노력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이왕가’(李王家)로 책봉된 뒤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경술국치 때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는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문이 빼곡히 담겨 있다. 황실 인사들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고 특히 남성들은 일본군 장교가 돼 일왕에 충성했다. 그나마 1919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 유일한 항일 운동이었다.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학생의 기록에는 “주민들은 가난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데 (고종 사망을 계기로) 그간 조선 황실이 너무도 호화롭게 지내 온 사실을 알게 돼 크게 실망했다”고 나온다. ●백성들에게 ‘늙은 여우’로 조롱받은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 역시 매스컴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 황실 인사다. 일부 문화계 인사들은 그를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한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1~1898)과 권력 다툼을 벌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무속 신앙에 심취해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세기의 악녀’로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조선의 국가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넘어서는 사치를 부렸다”고 지적한다. 1895년 시해 때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칭했는데, 이는 일본인이 만든 별명이 아니다. 조선 민중들이 그의 악행에 분노해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무용, 뮤직비디오 등에서 조선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애국자로 등장한다. 그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대중의 안타까움이 과잉 이입된 탓이다. 역사 전공자들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명성황후 미화가 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평론가는 “명성황후가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것은 2001년 KBS에서 그의 삶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부터다. 국민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이 되레 망국의 주범을 구국의 위인으로 탈바꿈시켰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덕혜옹주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 입어” 2016년 개봉 당시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이덕혜는 1912년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쓰시마번주 귀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1962년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 이덕혜’는 분명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희생물이다. 영화 속 그는 시대 상황을 마음 깊이 고민하고 일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 옷 입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일 교류 모임을 가졌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중국 상하이 망명도 추진했다. 그러다가 일제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정신병을 얻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 덕혜는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를 입었다. 정신질환도 일본의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인 10대 때 나타났다. 그가 일본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 영화 속 내용은 모두가 원작소설 ‘덕혜옹주’를 바탕으로 허진호 감독이 머릿 속에서 만든 상상의 소산이다. 역사소설가 이원규(72)씨는 “대중 문화계에 근대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살아있는 왕에 대해 ‘우리 고종께서…’라며 묘호(죽은 뒤 왕에게 내려지는 이름)를 썼다”면서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작가들이 역사의 궤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으려는 듯한 콘텐츠를 생산해 우려스럽다. 문화계 내부에 문제의식은 있지만 ‘동업자 정신’ 때문에 비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단독] 정부 “日 경제보복 땐 맞보복 대응”

    [단독] 정부 “日 경제보복 땐 맞보복 대응”

    예상 시나리오·보복리스트 등 점검일본 정부 관료로는 처음으로 아소 다로 부총리가 대법원 강제징용 및 위안부 판결을 둘러싼 자산압류 및 매각에 대한 보복으로 송금 및 비자 발급 정지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정부도 맞대응을 포함한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3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응해 예상되는 보복리스트를 검토했으며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지난 12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 등 관련부처 관계자가 비공개로 모여 최악의 상황을 포함한 예상 시나리오 등을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일본이 사용할 수 있는 경제보복 수단을 일일이 리스트로 만들어 가능성을 검토하는 한편 이에 따른 대책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언론은 대법원 판결에 대항해 100여개 한국 상품을 대상으로 한 보복관세 검토,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불화수소’ 등 핵심 물자에 대해 한국 수출 금지, 한국 송금 및 비자발급 정지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그동안 일본의 움직임과 관련해 즉각적인 대응을 자제했지만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 입에서 직접 구체적인 보복 관련 언급이 나오면서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일본 언론 등에 따르면 아소 부총리는 지난 12일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일본 기업의 자산압류에 대항해 “관세뿐만 아니라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 다양한 보복조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확전은 원하지 않지만 한국 상품이나 관광객 등에 대한 불합리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맞보복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방침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에서 경제 보복을 운운하지만 우리한테 통보한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외교부도 14일 열리는 한일 국장급 협의에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역사문제와 미래지향적 관계를 분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강조할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역시 경제보복을 감행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아소 부총리는 한국에 취하는 조치와 관련된 정책라인에 있지 않다”며 “송금·비자 금지는 현실성이 없어서 일본이 선택지에 올릴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일본으로서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특정국의 출입국 심사를 강화하는 부담을 감수하기 힘든 상황인 데다 비자발급 제한도 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은 714만명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231만명)의 3배가 넘는 상황이다. 서울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日 “北인권결의안 작성 올해는 안 하겠다”

    북일회담 염두 납치문제 대화 국면 조성 일본이 북한과의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한인권결의안 작성에 올해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13일 유럽연합(EU)과 공동으로 진행해 온 북한인권결의안 작성에 올해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스가 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미 회담 결과와 (일본인)납치문제 등을 둘러싼 모든 정세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북한인권결의안 불참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북한인권결의안은 지난해까지 16년 연속 채택됐다. 일본은 첫 해부터 EU와 공동작업을 통해 결의안 작성을 주도해 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제40차 유엔인권이사회는 오는 21일이나 22일 북한인권결의안을 상정해 채택 여부를 논의한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북한인권결의안 작성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북한 인권을 중시한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혀 결의안 채택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일본 언론은 “북일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분위기 조성 차원”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노력한다는 기본 입장을 바탕으로 올해 결의안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서울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日편의점에 내걸린 “인종차별 항의”…대체 뭐라고 했길래

    日편의점에 내걸린 “인종차별 항의”…대체 뭐라고 했길래

    일본 도쿄 신주쿠의 한 편의점이 일부 손님의 몰지각한 ‘인종차별’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문구를 매장에 내걸어 인터넷 상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13일 일본 데일리스포츠에 따르면 ‘라면 애호가 이시즈카’(@HaruhiyaNishin)라는 이름의 30세 남성 트위터리안은 지난 11일 신주쿠 골든가이에 있는 자신의 단골 편의점 패밀리마트에 갔다가 계산대 옆에 붙은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종이에는 ‘특정 고객으로부터 인종차별이 아닐 수 없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차별로 보고 강력히 항의하겠습니다. 또 그런 분의 방문은 거절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손부족으로 중국, 동남아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대거 일본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 중 일부가 이들에게 인종이나 국적과 관련한 모욕적 언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인이 많은 곳에 살아본 경험이 있어 평소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언동에 대해 민감하게 느껴왔다는 이시즈카는 문구가 적힌 종이 사진을 찍어 당일 오후 2시 42분 트위터에 올렸다. 이 트윗은 13일 오전까지 ‘좋아요’ 5만 1000여건, 리트윗 2만 3000여건을 기록 중이다. 댓글의 90% 이상은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의 서툰 일본말과 한껏 웃는 표정을 보면서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걸까’, ‘아르바이트 테러를 하는 일본인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외국인을 응원하고 싶다’, ‘그들이 없으면 일본은 농업도 어업도 관광도 편의점도 돌아가지 않는다’ 등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이시즈카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적인 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피해자에게 또다시 상처가 될 수 있어 물어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명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상습적으로 그런 행위를 했기 때문에 편의점 점장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면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으로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편의점에 걸린 종이는 12일 매장에서 제거됐다. 데일리스포츠는 “해당 편의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패밀리마트 본사에 취재했으나 개인의 프라이버시 차원에서 알려줄 수 없다고 답해왔다”고 전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글로벌 In&Out] 예민한 역사 때문에 골치 아픈 한국과 터키/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글로벌 In&Out] 예민한 역사 때문에 골치 아픈 한국과 터키/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 편집장

    터키와 한국의 역사 문제는 참 비슷하다. 근현대사에 예민한 사건들이 가득 차 있는 두 나라에는 좌우 갈등 문제를 건드리는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 화합이 점차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일단 터키부터. 터키에서는 1960년과 1971년에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있다. 1960년 쿠데타는 우파를, 1971년 쿠데타는 좌파를 소멸했다. 1960년 군사정변을 일으킨 군인들은 터키 국무총리를 비롯한 우파 고위급 정치인 3명을 사형시키고, 당시 여당인 보수 쪽의 대표 정당인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1980년대 이후 군부의 힘이 약해지다 보니, 국무총리를 사형하기 위해 제시됐던 증거들이 다 거짓이고 사형 판결의 법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도 증명됐다. 1990년대부터 그들을 위한 대대적인 추모식이 열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 누구도 사형당한 당시 국무총리를 비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억울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학자로서 양심적으로 그리고 중립적으로 따져 보면, 그 총리가 정치를 못했기 때문에 결국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변 이전에 인권이나 언론의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관에 대한 인식들이 아주 낮았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그를 사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면 터키 사회가 흔들리게 된다. 또 다른 사연을 좌익에서 들어 본다. 1971년 쿠데타는 1960년과 달리 우파 정치인이 아닌 좌익세력을 없애버렸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학생 3명이 내란죄 혐의로 사형당했다. 이 3명 중에 데니즈 게즈미쉬는 오늘날에도 터키 좌익 세력의 상징이다. 이념이 완전히 다르지만, 사형당한 우익 총리를 비난하지 못하듯이 좌익 학생 운동가 데니즈 게즈미쉬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물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죽은 탓이다. 그러나 같은 사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하자면 게즈미쉬는 학생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려고 은행을 털었던 적도 있었고, 경찰에게 총을 쏜 적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게즈미쉬에 대한 공개적인 논쟁도 터키 사회를 분열시킨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좌우 이념의 문제는 아니지만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인과 친일세력 등에게 너무 잔인하게 죽었다. 100년이 넘은 사건인데도 아직도 많은 사극에서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감성적으로 다루고, 뮤지컬로도 크게 성공했다. 아직도 그 사건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명성황후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업적을 낸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한국 민족의 근대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는가? 역사학자들의 답변은 주로 후자이다. 조선 왕조가 근대화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명성황후와 민씨 가문의 정치 간섭이었다. 그렇다 보니, 역사학자들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썩 좋지 않다. 다만 끔찍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대중적으로는 토론이 잘 열리지 않는다. 명성황후는 한국에서 보수나 진보의 상징성도 없는 오직 역사적 인물일 뿐이다. 명성황후 말고 보수나 진보 쪽에서 상징적인 인물들이 암살되거나 ‘법적 살인’되었다. 그들의 사후에도 역사적 논쟁들이 진행되고 있다. 대중 앞에서 대놓고 정치적 목적으로 진행되는 이 논쟁들이 사회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극렬하게 사회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역사적 논쟁들은 더는 정치적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논문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민한 역사적 문제들로 현재 사회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환경 문제라든가 교육, 경제 등 좀더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뤄야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 나이 들어서도 건강한 사람 1위는 일본인…한국인은 몇 위?

    나이 들어서도 건강한 사람 1위는 일본인…한국인은 몇 위?

    인간이 다양한 노화 관련 질환에 노출돼 질병을 앓기 시작하는 나이를 국적별로 분석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건강트렌드예측센터 연구진은 세계 질병부담연구(GBD) 데이터에 있는 293가지 질병 중 노화수반 질병(환자가 병으로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은 것을 수치로 나타낸 것) 92가지를 골라냈다. 92가지 질병 중 81가지는 비전염성 질환으로, 심혈관 질환과 암, 만성 호흡기 질환, 소화기 질환, 당뇨 및 신장 질환 등이 포함돼 있다. 이후 연구진은 195개국의 1990~2017년 노화수반 질병부담을 수치화 하고, 실제 나이와 노화의 정도를 비교 분석했다. 연구진이 195개국의 평균적인 65세 노인과 똑같은 노화수반 질병부담을 경험한 나이, 즉 65세 노인이 겪는 건강문제를 경험하는 나이를 국가별로 비교한 결과 일본인이 76.1세로 1위를 차지했다. 이는 평균적인 65세가 겪는 노화 질병을 일본인은 76세가 되어서야 겪는다는 의미로, 그만큼 노화관련 질병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파퓨아뉴기니인이 노화 질병을 겪는 시기는 46세로 나타났다. 1위를 차지한 일본과는 무려 30년이나 차이가 난다. 스위스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76.1세, 뒤를 이어 프랑스와 싱가포르가 76세, 쿠웨이트가 75.3세롤 기록했으며 한국은 75.1세로 세계 6위를 차지했다. 영국과 독일은 각각 70.8세와 70.7세로 나타났으며 미국은 이보다 한참 뒤떨어진 68.5세, 중국은 66세로 75위에 머물렀다. 세계 평균 수준의 노화수반 질병부담률을 보인 국가는 65.2세의 부탄과 볼리비아, 브루나이 및 65.1세의 도미니카, 팔레스타인으로 조사됐다. 북한은 59.5세로 세계 평균에 못미치는 149위에 머물렀다. 연구진은 “늘어난 기대수명은 전체 삶의 웰빙에 기회가 될 수도,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화와 관련한 건강 문제는 건강비용 증가뿐만 아니라 조기 은퇴 및 노동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각국 정부 및 보건시스템 관계자들은 사함들이 ‘노화의 부정적 효과’(노화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인지적 능력 약화 및 손실)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나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의학전문지 랜싯공중보건(The Lancet Public Health) 7일자 최신호에 실렸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꽃이여, 속내를 보여 다오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꽃이여, 속내를 보여 다오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밤 벚꽃놀이’라는 게 있었다. 놀이라고 해 봐야 별것이 아니고 밤에 벚꽃 구경을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전깃불이 휘황하지 않던 시절에는 깜깜한 밤에 하얗게 빛나는 벚꽃을 구경하는 것이 나름 운치 있고, 낭만적으로까지 여겨졌다. 일본인들이 심은 벚나무라고 벚꽃 보길 꺼리는 이도 있지만 꽃이야 무슨 죄가 있으랴.사실 일본에서도 꽃놀이의 풍속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소상공인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7세기쯤에 기원을 둔 꽃놀이를 그린 당대 병풍 그림이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꽃을 보고 설레며 즐거워하는 일은 일본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니 애꿎은 벚꽃에 눈을 흘길 일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꽃을 즐겨 그려 집안을 장식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사찰이나 궁궐의 단청, 기와에 표현된 꽃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꽃과 관련된 그림을 독립 회화로 그려 완상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중국 남송(南宋)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마린(馬麟)의 ‘병촉야유도’(秉燭夜遊圖)는 13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등불을 켜고 봄밤을 즐긴다는 제목 그대로 화면 가운데 뾰족한 지붕이 있는 건물 속에 주인이 앉아 밖을 내다본다. 앞마당에는 두 줄로 늘어선 높은 등잔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잔잔하게 흰 꽃을 이고 있는 나무가 그려졌다. 빈 곳처럼 보이는 화면 상단 타원형의 도장 옆으로 작은 달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떠 있다. 중국 그림에 찍힌 도장들은 수장가의 도장인지라 도장이 많이 찍힌 그림들은 매우 유명한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한 어스름한 달밤에 꽃이 질까 노심초사하며 등촉에 불을 밝히고, 점점이 눈처럼 앉은 꽃들을 보는 사람의 정취가 아스라하다. 이 그림은 북송의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ㆍ1036~1101)의 ‘해당’(海棠)이라는 시에서 화제를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밤 깊으면 꽃이 잠들어 떨어질까 두려워, 촛불 높이 들고 붉은 그녀 비춰 보네”(只恐夜深花睡去 故燒高燭照紅?)라는 구절이다. 결국 아름다운 꽃에 마음을 두다 보니 꽃이 질까 염려돼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가는 꽃의 현란한 자태보다 봄밤의 정취를 드러내려 꽃인지 아닌지 아득하게 느껴지도록 붓을 놀렸다. 흐르는 시간이 어지간히 야속했던 모양이다. 그 아련한 마음은 앞쪽의 진한 먹으로 그린 나뭇가지보다 뒤로 멀어지며 흐릿하게 보이는 꽃과 나뭇잎, 윤곽만 남은 산등성이에서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린은 아버지 마원(馬遠)과 함께 남송 황실의 총애를 받았던 화원 화가다. 그런데 남송은 여진족의 침입으로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항저우로 쫓겨가 재건한 나라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지녔지만, 남송 그림은 후대 지식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림에서 지적인 세계를 추구하던 문인들의 눈에 마원과 마린의 그림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는 남송이 처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하노이에서의 북미 회담이 기대에 어긋난다고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 두 정상의 속내가 무엇인지 해석도 분분하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를 보면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다. 때가 되면 피울 꽃을 피기 전에 아쉬워하며 등불을 밝힐 필요는 없다.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게 화향과 아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만산에 평화의 꽃이 흐드러지길 기대해 본다.
  • 재일동포 3세 감독이 본 그날 그후 그래도 늘 희망은 태어나고 있었다

    재일동포 3세 감독이 본 그날 그후 그래도 늘 희망은 태어나고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진도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본 동북 지역을 뒤흔들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된 동일본 대지진 직후 발생한 피난민 수만 약 47만명. 새로운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가혹한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무너진 땅위에서도 희망의 싹을 보듬는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윤미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봄은 온다’(14일 개봉)는 재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윤 감독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10개월간 지진 피해를 입은 이와테현과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에서 굳건하게 삶을 일구고 있는 10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작품에서 참혹한 ‘그날’이 아닌 이재민들의 평온한 ‘지금’을 조명한 건 ‘비참하고 슬픈 동북’을 ‘희망이 태어나는 동북’으로 다시 조명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거나 화내지 않고, 그 일을 오롯이 끌어안은 채 의연하게 내일을 향해 걷고 있었다. 대부분 “잊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속상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이들은 윤 감독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을 가감없이 들려주었다. 쓰나미로 세 아이를 잃은 엔도 신이치 부부는 지진 당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위한 지역공동체를 운영하며 애틋한 마음을 나누고 있다. 미국에 사는 앤디 앤더슨 부부는 지진 당시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던 딸 테일러를 재해로 잃었지만 미국 전역에서 모인 기부금으로 기금을 설립해 매년 ‘테일러 문고’라는 이름의 책장을 기증한다. 결혼 5일 만에 남편을 잃고 뱃속의 아이와 단둘만 남았던 오쿠다 에리카는 주산 공부에 빠져 있는 씩씩한 어린 딸을 보며 삶의 의지를 되새긴다. 윤 감독은 “우리는 누구든지 심각한 고민이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면서 “동북 지역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힘든 인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를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 윤 감독은 이 작품이 비단 “일본의 이야기, 재난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해마다 4월이면 안타깝게 떠나보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에게 그래서 이 작품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윤 감독은 “일본인들이 재해가 이미 일어난 이상 그로부터 배움을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희생된 사람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자신 만은 아니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조선인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첫 상업영화 시대 열다

    1920년대 전반, 드디어 조선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올렸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로 조선 영화의 첫발을 뗀 1919년부터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 이전의 시기, 조선 영화계는 어떤 영화들을 만들면서 무성영화 시대를 개척해 갔을까. 주목할 부분은 식민지와 제국 구도에서 조선인들만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 아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국의 정책뿐 아니라 재조선 일본인의 자본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조선의 이야기를 다루는 조선인 감독의 연출과 조선 사람을 연기하는 조선인 배우들의 연기였다. 이 지점이 조선의 무성영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던 셈이다.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 일본인 흥행사가 제작한 최초의 상업영화 ‘춘향전’(1923),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제작된 ‘장화홍련전’(1924)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의 무성영화 제작 현장을 살펴보도록 한다.●조선인이 감독한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1923년에 공개된 ‘월하의 맹서’는 온전한 극영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야외의 활극 장면만 영화로 표현했던 이전의 연쇄극과 달리,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모두 필름 촬영으로 소화한 극영화라는 점 그리고 각본, 감독, 출연 모두 조선인의 손으로 이뤄낸 점이다. 당시 언론인이자 연극인으로 활동했던 윤백남(1888~1954)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그가 이끌어 온 민중극단의 단원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다. 신파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월화(1904~1933)는 이 영화를 통해 조선 영화 최초의 스타 여배우로 등극한다. 한편 영화 매체를 성립시키는 기술 파트까지 조선인이 해결하기는 힘들었는데,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오타 히토시가 맡았다. 사실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개봉한 극영화가 아니라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였다. 다시 말해 영화관용 상업영화가 아니라 당국의 선전영화였다.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처음 상영했고, 이후 순회영사로 각 지역에서 공개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는 ‘월하의 맹서’의 분량을 ‘전 2권’, ‘2천척의 긴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이를 상영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33분 정도에 해당한다. 중편 길이의 영화였던 것이다. ‘월하의 맹서’ 제작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무성영화는 자본과 기술의 제공, 연출과 배우의 역할이 분리되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은 무엇보다 큰 자본이 필요한 작업이고 촬영, 현상 등의 근본적인 기술이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본, 연출 그리고 출연 영역에서 조선 영화인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렇게 조선 무성영화는 첫발을 뗐다.‘월하의 맹서’ 공개 이전에도, 일본인 영화제작사가 만든 ‘국경’(1923)이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 등 재조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극동영화구락부가 제작한 영화로, 촬영은 일본에서 온 나리키요 에이가 담당했다. 물론 출연은 박순일 등 조선인 배우들이 맡았다. 이 영화는 중국 국경 지대의 마적을 토벌하는 일본국경수비대의 활약을 묘사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다시 상영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조선공론’의 문예담당 기자 마쓰모토 데루카가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직접적인 야유를 보내 중지시키는 것은 심히 좋지 않은 일이다”고 기록한 것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과격한 반응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학생들 야유로 하루 만에 상영 중단된 ‘국경’ 이 영화의 상영이 하루 만에 중단된 사정을 현재로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인 관객들이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알려진다. 조심스러운 추정이지만, 조선인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마적들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무장독립군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관객과 만나지 못한 ‘국경’은 상업영화로서 실패했지만, 조선인 관객들이 영화를 거부한 사건으로 영화사 기록에 남게 되었다. 조선 영화계가 본격적인 상업영화의 시대를 연 것은 일본인 흥행사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설립한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1923) 그리고 조선인 영화관 단성사가 영화제작을 위해 설립한 촬영부의 ‘장화홍련전’(1924)이 등장하면서이다. 하야카와는 1913년 경성의 일본인 거리에 고가네칸을 설립하며 조선 흥행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조선부업공진회 개최에 맞춰 고전 소설 ‘춘향전’의 영화화를 추진하며, 하야카와 고슈라는 이름으로 직접 연출까지 나섰다. 영화는 전북 남원 현지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조선인 관객들을 위해 당대 최고의 인기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으로, 기생 한명옥이 춘향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였던 김조성이 배우의 역할로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자본주가 감독에 나선 작품이지만, 조선 고전의 각색과 연출 과정에서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던 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춘향전’은 조선부업공진회가 개최된 1923년 10월 5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해 조선인 관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18일부터 전북 군산의 군산좌에서, 21일부터 공진회 내의 활동사진관에서 연이어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의 영화관에서 상영된 최초의 상업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하야카와는 ‘춘향전’의 성공을 기반으로 1924년 7월 인사동의 조선인 상설관 조선극장을 인수해 단성사의 라이벌로 나섰다.●‘장화홍련전’ 흥행에 日 ‘춘향전’ 재개봉 응수 당시 ‘춘향전’은 “이건 한 개의 슬라이드지, 영화에 대한 몽타주가 아무것도 없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흥행에 성공하자, 조선 영화계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는 조선 흥행계의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고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으로 응수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이 추동된 점이다. 바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였다. 조선인 주도의 영화 제작은 바로 이듬해에 이어졌다. 하야카와의 행보에 자극 받은 단성사의 박승필이 1924년 7월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설치하고, 역시 고전 소설인 ‘장화홍련전’을 극영화로 제작했다. 배우는 장화와 홍련 역에 기생 김옥희와 김운자, 원님 역에 인기 변사 우정식을 출연시켰다. 앞선 ‘춘향전’의 성공 요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연출 인력이 보강되었다. 각색은 단성사의 변사로 유명한 김영환이, 감독은 우미관 출신의 영사기사로 단성사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었던 박정현이 나섰다. 훗날 감독이 되는 이구영도 당시 단성사 직원으로 각본과 연출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무성영화 현장은 지금의 프로듀서와 감독처럼 그 역할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촬영 역시 조선인이 맡았다는 점이다.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로 기록되는 이필우(1897~1978)가 이 영화로 데뷔하게 된다. ‘장화홍련전’의 영화사적 의미는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초창기 영화매체의 가장 중요한 성립 조건인 기술에서도 전부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경성 천지의 키네마 팬이 한결같이 손꼽아 기다리던” ‘장화홍련전’이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조선에 영화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맞는 대성황을 이뤘고, 이에 하야카와의 조선극장은 ‘춘향전’의 재개봉으로 응수한다. 이후 동아문화협회는 하야카와가 다시 감독으로 나선 ‘비련의 곡’(1924), 김조성이 감독으로 나선 ‘흥부놀부전’(1925)을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후, 경영난으로 해산했다. ●무성영화 개척해 간 조선영화인들 초창기 조선 영화계에서 극장의 산하가 아닌, 영화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다. 1924년 7월 11일 일본인 사업가들에 의해 부산에서 설립됐다. 촬영소는 복병산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했고, 회사의 중심인물은 부산 묘각사 주지였던 승려 다카사 간초였다. 그는 왕필렬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회사 창립작 ‘해의 비곡’(1924)과 원제가 ‘암광’이었던 ‘신의 장’(1925), ‘동네의 호걸’(1925)을 직접 연출했다. 촬영기사는 작품마다 일본에서 불러왔다. 동아문화협회에서 김조성의 역할처럼,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도 조선 영화인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무성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는 이경손, 안종화 등 당시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다. ‘해의 비곡’의 경우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등 조선인 배우들이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실질적인 감독 역할이었다. 규모를 키운 2회작 ‘운영전’에서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이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조선키네마 역시 조선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가담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한편 무성영화의 스타 나운규가 조선키네마의 연구생이던 당시 ‘운영전’에서 처음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1923년부터 1925년까지의 무성영화 전기에 모두 12편의 조선 영화가 제작되었다. 1923년 2편, 1924년 3편, 1925년 7편이다. 이 작품들 중 다수는 일본인 제작자가 만들고 연출도 겸했다. 그리고 그 제작 현장에서 조선인 감독과 기술 스태프들이 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처럼 연출과 출연은 물론이고, 조선인 촬영기사가 전면에 나선 작품도 있었다. 이처럼 무성영화 시기, 제작, 연출 그리고 촬영 등의 기술 파트에서 일본인과 조선 영화인이 만들어내는 도제, 경합, 협업 등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황제의 옥새2]충신 다 쫒겨난 조선...정해진 망국의 운명

    [황제의 옥새2]충신 다 쫒겨난 조선...정해진 망국의 운명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인을 위해 기꺼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앞서 나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 단행한 첫 번째 모험 때 조선 황제(고종)와 함께 한강에서 요트로 한반도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가 탈출 직전 마음을 바꿨다. 도착 예정지인 중국 상하이의 러시아 피난처(당시 러시아 비밀정보기관인 ‘상하이 서비스’로 추정)에는 나와 소녀(이 소설의 전편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 등장한 러시아 스파이)만 가게 됐다. 러시아의 거물급 정치인(당시 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이 그녀에게 내린 비밀 임무는 수포로 돌아갔다. (번역자주: ‘황제 납치 프로젝트’에서 주인공인 빌리와 베델, 소녀는 러시아 정보당국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고 합니다. 고종의 해외 망명 시도는 러시아 기밀 문서가 공개돼 최근에야 세상에 알려진 극비 사안입니다. 100여년 전 작가는 조선에 직접 와서 베델을 취재해 소설을 썼습니다. 아마도 베델은 러시아가 추진하던 고종 망명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하이에 머물던 나는 마음 속에서 타오르던 무모한 충동에 이끌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일제가 나를 어떻게 대할 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일본은 나에게 아무 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일본 총독은 조선 황제의 대담한 탈출 작전에 내가 관여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내 조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공식적으로 나를 잡아 가두기보다는 어느 날 어둠 속에서 내 등에 칼을 꽂아 조용히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듯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추론이 더 정확한 판단이겠지...나는 일본인들의 감시 속에서도 서울에서 나름 즐겁고 활기차게 지냈다. 밤에도 혼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강철로 된 셔츠가 내 몸 전체를 휘감고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내 모습이 옛날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1792~1828) 같다고 여겼다. (번역자주: 입실란티스는 그리스의 혁명 지도자로 러시아의 장군이었지만 고국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1821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8년 뒤인 1829년 그리스는 오스만 투르크에게서 해방됐습니다.) 조선 황제를 은밀히 도피시키려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지 2년쯤 지난 1907년 여름이었다. 먼지로 뒤덮힌 서울의 최고 지도자는 이토 히로부미(1841~1909) 후작이었다. 일본은 만여명의 총검으로 조선을 손쉽게 점령했다. 불쌍한 황제는 왕궁(덕수궁)에 갇혀 무기력하게 지냈다. 그는 하기와라(당시 일본 공사관원으로 훗날 외무성 통상국장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1868~1911)의 허락 없이는 재채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왕자(순종·1874~1926)는 한 나라를 감당하기에 너무 나약했다. 그는 내전(內殿·왕비가 거쳐하던 곳)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바둑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라를 위해 고민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조선을 구하려던 충신들은 모두 쫓겨났다. 남은 신하들은 녹봉만 잘 챙겨주면 됐다. 이들에게 조선의 흥망은 관심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일본인들의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서울을 지키던 대한제국의 군대는 탄약이 들어가지 않는 소총과 약실이 없는 포를 부여잡고 힘겹게 버텼다. 일본인들은 이런 군대를 대놓고 비웃곤 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커튼을 걷어내고 새로운 무대를 올릴 준비가 돼 있었다. 아...안타깝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본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라도 황제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일제의 음모는 마치 또아리를 튼 독사처럼 500년 역사의 암물한 왕좌를 휘감고 있었다. ‘황제의 옥새’는 3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 바비 인형 주인공으로, 휠체어 탄 보겔도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 바비 인형 주인공으로, 휠체어 탄 보겔도

    두 차례 그랜드슬램 챔피언을 지내고 세계랭킹 1위인 오사카 나오미(22·일본)가 바비 인형으로 등장했다. 바비 인형을 제작하는 마텔 사는 바비 브랜드 탄생 60주년이자 국제여성의 날인 8일 지난해 US오픈에 이어 연초 호주오픈까지 우승하며 75위에서 일약 세계 1위로 떠오른 오사카를 새 바비 인형으로 내놓게 됐다고 발표했다. 오사카 뿐만아니라 사이클 스타 크리스티나 보겔(독일), 아이스댄스 피겨 스타 테사 버츄(캐나다), 스포츠 전문기자 멜로디 로빈슨(뉴질랜드)까지 18개국 20명의 여성이 인형 주인공이 됐다. 일본인 어머니와 아이티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사카는 이번 주초 어린이들에게 영향력있는 여성으로 각인되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트위터에 소감을 밝혔다. 그는 “최근 수많은 부모들이 내게 다가와 아이들이 날 우러러본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정말로 날 붕 띄우는데 내 롤모델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기억하기 때문에 솔직히 충격받았고 엄청난 책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인디언 웰스에 있는데 모든 아이들이 날 보면 즐거워하며 사진과 서명을 해달라고 한다. 솔직히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게 단지 테니스 뿐만 아니며 다음 세대에 영감을 전하는 것이란 점을 깨닫는다”고 말했다.보겔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데 지난해 6월 훈련 도중 추락 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치고 사지가 마비돼 휠체어에 앉은 채로 지내고 있는데 바비 인형도 의족을 차고 휠체어에 앉은 모양으로 제작됐다. 그는 트위터에 “어린 소녀들에게 큰 꿈을 꾸게 하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보겔은 고향 에르푸르트에서 5월 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버츄는 다섯 차례 올림픽 메달을 땄으며 뉴질랜드 럭비 스타였던 로빈슨은 지금은 유명 스포츠 기자로 일하고 있다. 특히 로빈슨은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 출신으로는 처음 바비 인형 주인공이 됐다. 이들의 인형 판매 수익은 소녀들에게 운동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마텔의 드림 갭 프로젝트에 전달된다. 이전에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미국 대표로 히잡을 쓴 채 출전한 펜싱 스타 입티하지 무하마드, 한국 출신 스노보드 챔피언 클로이 킴, 복싱 스타 니콜라 애덤스가 바비 인형 주인공이 됐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판다 한쌍 짝짓기 앞두고 일본 열도가 들썩

    판다 한쌍 짝짓기 앞두고 일본 열도가 들썩

    일본인들이 도쿄 중심부 우에노 동물원의 자이언트 판다들의 짝짓기 소식을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다. 이 곳의 자이언트 판다 한 쌍이 번식기에 들어서면서, 암컷 판다의 임신과 새 생명의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이언트 판다의 번식기는 1년에 단 1번, 2월부터 5월까지 인데 실제 임신의 최적기는 그 가운데 단 3일 정도 밖에 없다. 우에노 동물원측은 지난 6일 “올 봄에 13세 된 수컷 릴리와 동갑네기 암컷 신신에게 발정 징조가 보이면, 이들의 첫 아이인 샨샨(20개월)을 포함해, 3마리의 전시를 일시적으로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일년에 단 3~4일 밖에 찾아오지 않는 번식 적기인 발정 시기에 생식에 전념하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만, 판다들에 대한 내방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고려, 20개월 된 샨샨에 대해서는, 전시 중지 기간중에도 이들 부부 판다와는 별도로, 인터넷과 동물원내 대형 tv 등을 통해 일거수 일투족, 생활상을 라이브 영상으로 계속 전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에 따르면 현재 수컷 릴리는 이미 발정기에 들어선 행동을 보이고 있다. 반면 암컷 신신에게는 아직 발정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신신에게 발정 기미가 나타나면, 릴리와 바로 동거시켜 교배를 유도할 계획이다. 현재는 3마리 모두 각각 떨어져서 생활하고 있다. 자이언트 판다는 번식기에 이성의 냄새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평소와는 다른 울음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냄새와 울음소리는, 판다의 번식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NHK 등은 지적했다.동물원에서 사육된 판다들은 야생종 자이언트 판다들에 비해 적응력 등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인공적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개체들은 새끼를 가진 뒤 출산하더라도 새끼들을 잘 안아서 기르거나 심지어 수유 방법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갓 태어난 자이언트 판다 새끼는 크기는 15.5cm, 몸무게는 75g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사육사들은 인공적인 환경에서 수유방법 등 비상 사육을 위한 만반의 준비도 해 놓고 있다. 릴리와 신신이 우에노 동물원에 온 것은, 2010년이다. 중국측이 대여 형식으로 보내온 것으로 두 마리 사이에 2012년 새끼가 태어났지만 생후 7일만에 죽어 버렸고, 2017년 6월 12일에야 샨샨이 태어났다. 일본 수도권 시민들의 귀여움을 받아온 우에노 공원 판다들의 교배와 출산에 이목이 집중돼 있는 것은 동갑내기 자이언트 판다 한 쌍인 리리와 신신 사이에 2017년 6월에 태어난 샨샨이 있지만, 이 아기 판다는 일본측이 중국측과 맺은 약속에 따라 있는 생후 2년에 중국에 반환하게 돼 있다. 시기는 오는 6월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아가 판다가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에는 고베시립 동물원, 와카야마현 어드벤처 월드 등에 모두 9마리의 자이언트 판다가 있지만 , 수도권이란 점에서 단연 도쿄 우에노 동물원의 판다 가족에 가장 큰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전세계적으로 사육 환경 아래의 판다 개체 총수는 471마리로 지난 10동안 2배가 늘었고, 세계 야생 동물기구이 추정하는 야생 판다는 1,864마리가 생존해 있다. 세계 야생 동물기구에 따르면 전세계에 남아있는 판다는 약 1,800마리로 추정된다. 판다의 자연적 포식자가 많지 않더라도 서식지에 해를 입히는 인간의 활동들로 인해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현재 멸종위기 등급은 취약으로 간주된다. 우에노 동물원이나 어드벤처 월드에 한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자이언트 판다의 사육 환경 하에서의 번식은,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 동물원 등, 2016년 시점에서 55마리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국, 일본, 미국, 스페인, 벨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성공해, 최근 10수년간 2배로 증가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금요일의 서재]만화 ‘드래곤볼’ 속에 ‘경영’, ‘제국주의’ 숨어 있다고?

    [금요일의 서재]만화 ‘드래곤볼’ 속에 ‘경영’, ‘제국주의’ 숨어 있다고?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맞수 ‘프리더’를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어떨까. 자신의 종족을 이끄는 실력 있는 뛰어난 경영인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캐릭터로도 분석할 수 있다면? 완결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드래곤볼’을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한 신간 2권이 눈에 띈다. 한 권은 드래곤볼에서 ‘경영’을 배울 수 있다 주장하고, 다른 책은 드래곤볼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저 재미로만 읽었던 만화책을 이런 식으로 분석한 게 놀라울 따름. 이번 주 금요일의 서재에서는 드래곤볼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 신간 두 권을 묶었다. ●손오공→손오반, CEO 세대교체 실패사례=‘드래곤볼에서 경영을 배우다’(더봄)는 드래곤볼을 경영으로 풀어낸다. ‘초베스트셀러 만화로 즐기는 난생처음 경영학’이란 부제답게, 만화 장면에 관련 이론을 적용한다. 조직개발 전문가인 저자는 어린 시절 즐겨보던 만화 드래곤볼을 성인이 된 후 다시 읽어보고 재밌는 점을 발견한다. 만화 주인공들이 강한 적을 상대하고자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니 기업 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경영 전략이 보인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 손오공을 기업의 CEO라고 해보자. 드래곤볼 연재가 길어지면서 토리야마 아키라는 지속적인 어린 독자 유입을 위해 주인공의 2세를 등장시키기로 한다. 손오공보다 훨씬 강하고 가능성도 큰 손오반이 등장한다. 손오공은 죽고, 손오반이 전체 극을 이끈다. 그러나 독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드래곤볼 7개를 모아도 죽어버린 손오공을 살릴 수 없도록 했지만, 하루만 이승으로 올 수 있도록 설정이 바뀐다. 저자는 이를 ‘세대교체’로 설명한다. 갑작스런 리더의 부재는 조직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체계적인 승계 프로그램을 구축해야 하며, 충분한 경험 시간의 확보가 필요하다. 저자는 적을 쓰러뜨리면 더욱 강한 적이 계속 등장하고, 치열하게 수련을 쌓지 않으면 도태되는 드래곤볼의 배경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경쟁 기업과 지속적인 혁신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지금의 비즈니스 환경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거나, 어제의 적과도 이익에 따라 과감하게 손을 잡는 글로벌 경쟁시대의 역학 관계는 강한 적을 상대하고자 적군과 아군이 손을 잡는 드래곤볼 캐릭터들의 선택과 유사하다. ●드래곤볼 배경 2차대전, 손오공 일본 상징=드래곤볼이 단순한 만화의 수준을 뛰어넘어 비즈니스와 조직에 주는 영감과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앞선 책이 주장하지만,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아이네아스)는 드래곤볼이 일본 제국주의 요소를 아주 많이 담고 있다고 반박한다. 드래곤볼은 지금까지 16세기 중국 소설인 ‘서유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판타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역사를 소환하고, 전후 일본인의 자기정체성, 그리고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일본인의 욕망을 여러모로 분석했다. 저자는 드래곤볼의 주인공인 손오공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고 설정했다. 베지터, 라데츠, 네퍼, 버독 같은 사이어인도 마찬가지다. 서구 제국주의로 프리더, 도도리아, 자봉을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로 놨다. 예컨대 프리더의 경우 초반에 캐리어를 타고 다니는데, 이는 휠체어를 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프리더가 행성 베지터를 에너지 볼로 파괴하는 장면은 어떤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이렇게 보면 손오공의 맞수이자 같은 종족인 베지터는 일본사회의 엘리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프리더에게 무참히 패배한 이후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엘리트로 풀이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이어인은 위기를 넘어 초사이어인이 되는데, 그 모습은 백인과 흡사하다. 일종의 백인을 지향하는 ‘클리셰’인 셈인데, 금발의 파란 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내세우던 이상적인 모습의 독일 아리아인을 상징하는 게 과연 우연이냐고 저자는 묻는다. 저자는 독자들이 만화 속에 일본 제국주의와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인 그들 국가의 시각이 담겼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이에 반해 일본이 과거 세대의 죄를 지워가며 어떻게 과거를 기억했고, 또 기억하려 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이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 들어맞으니 묘한 기분이 들 정도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일은 이처럼 재밌지만,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지기도 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특파원 생생 리포트]“걸으면서 먹는 게 죄냐?”…日관광지 ‘보행 중 취식금지’ 논란

    [특파원 생생 리포트]“걸으면서 먹는 게 죄냐?”…日관광지 ‘보행 중 취식금지’ 논란

    관광객이 너무 빠르게 늘면서 이런저런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 이른바 ‘관광 공해’로 불리는 여러 문제들 중 많은 일본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 중 하나가 걸으면서 음식을 먹는 행위다. 언뜻 생각하면 마음껏 즐기자고 관광지에 와서 맛있는 음식 사들고 다니며 먹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해당 지역 상인과 주민들은 ‘실질적으로 피해가 크다’며 자제를 호소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도쿄 인근 대표적 관광지 가마쿠라에서 보행 중 음식을 먹는 행위와 관련한 조례 제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8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는 보행 중에는 음식을 먹지 않도록 하는 조례안을 마련, 조만간 확정할 계획이다. 음식을 먹으며 걸어다니는 관광객들에 대한 불만이 지역 상인 등으로부터 줄기차게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대표적으로 문제가 되는 곳은 ‘고마치도리’라는 상점가다. JR가마쿠라역 동쪽에서 스루가오카하치만구까지 이어지는 길이 300m 정도의 골목으로, 기념품샵이나 음식점 등이 좌우로 빼곡히 늘어서 있다. 이곳 상점회의 다카하시 노리카즈 회장은 “음식을 길바닥에 흘리거나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기도 할뿐 아니라 음식 묻은 손으로 진열된 상품을 만지는 문제도 심각하다”며 “손님들이 음식을 구입한 상점 내부나 바로 앞에서만 먹도록 해달라고 음식점주들에게 요청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자기 돈으로 음식을 사서 누구나 다니는 길거리에서 먹겠다는데 벌칙을 부과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했다가는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따라서 조례에는 단지 ‘음식을 먹으며 산책하는 것은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라는 정도만이 명문화된다. 가마쿠라시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매너에 신경을 쓰기를 바랄뿐, 먹으면서 걷는 것 자체를 못하게 할 의도는 없다”고 아사히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에 대해 관광객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상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고마치도리에서 튀김을 판매하는 남성은 “주변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싸서 버리는 종이까지 제공하고 있다”며 “먹으면서 걷는 것을 즐기러 오는 손님도 많은데, 행정기관에서 관광객 행동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절인 센소지가 있는 아사쿠사 지역에서는 이미 몇해 전부터 관련 규제가 시행되고 있다. 아사쿠사 입구 가미나리몬에서 센소지를 잇는 ‘나카미세도리’ 인근 ‘이치후쿠코지’와 ‘덴보인도리’에서는 각각 2016년과 2017년부터 먹으면서 걷는 것이 금지됐다. 교토 니시키 시장에서도 지난해 가을부터 현지 상인회에서 보행중 취식의 자제를 촉구하는 스티커를 붙였다. 아사히는 “음식을 먹으며 걷는 게 확산된 것은 대략 2010년 이후 TV 정보 프로그램에서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소개되면서부터”라면서 “최근에는 관광지에서 음식을 먹는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규제 움직임과 반대로 먹으면서 걸을 수 있는 환경을 일부러 조성하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도쿄 시나가와구 도고시긴자 상가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지역 활성화 차원에서 2009년 고로케를 특화해 ‘도고시긴자 고로케’로 브랜드화했다. 동시에서 걸으며 먹는 문화를 활성화했다. 손님들에게 전용봉투도 나눠주고 있다. 토·일요일에 찾는 3만명 정도의 손님 중 2만명이 관광객이다. 상가연합회 관계자는 “쓰레기 무단투기를 하더라도 우리 상가에서 구입한 것들은 우리 상인들이 처리하면서 ‘손님들은 그저 즐겨만 달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스스로 봉투를 챙겨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이러한 자발적 움직임이 확산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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