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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만3천여명 중국 배우기/한국유학생 실태

    ◎북경학원로 상가는 사랑방 역할 북경 서북쪽 해정구의 학원로.북경어언문화대학(어언학원),북경대,청화대,화공대,지질대 등 중국의 주요대학이 반경10㎞내에 집결해 있는 대학가촌이다. 넓다란 도로엔 20대초반의 남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흥겹게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이들 가운데 적잖은 수는 한국학생들이고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주중대사관이 집계하고 있는 유학생만도 8천5백여명.단기 언어연수 4천4백여명,박사과정 3백명,석사5백명 등,일본유학생을 밀어내고 중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낸 나라가 됐다. 학원로 주위의 ‘우따오코우’(오도구)로 불리는 지역은 한국학생들을 위한 식당,카페,노래방 등으로 한국유학생의 거리가 됐다.5백여곳의 점포의 대부분이 한국학생들을 주고객으로 한다.간판도 한국어로 돼 있다.발랄한 학생들이 몰리다 보니 북경시내에 찌든 상사원이나 대사관 직원 등 기성세대까지 원정으로 합세,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다.먹는 장사뿐 아니라 안경점,편의점,비디오방,복덕방,미용실 등도 70여곳이나 된다. 식당에 들어가면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제작하는 소식지를 얻어볼수 있고 학생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카페에 들어서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수입 포도주 한병에 5만∼7만원을 받기도 하니 가격이 헐한 편도 아니다.밤이면 비디오방과 노래방은 늘 한국유학생들로 초만원이다. 이같은 유학생들의 급증은 한·중 교류의 심화와 쌓여가는 연륜을 상징한다.유학생중 절반가량은 북경지역에 몰려있고 길림성에 7백50여명,천진에 7백30여명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그러나 유학생의 증가는 부작용과 부정적인 측면도 따라 온다.북경대의 한 관계자는 한국 유학생들은 성실하지 못하다는 정평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외문출판사에 근무하는 조선족 김광렬씨는 “한국유학생들은 중국사람들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지 못하다”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술마시고 노는데 정신팔려 있는 학생들이 적잖다고 꼬집는다.그러나 북경대의 양통방한국학연구센터 주임은 “유학생문제를 한·중 교류 확대과정에 거쳐야할 하나의 과정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 “한국유학생 사회도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북경의 학원로와 오도구는 한·중 수교의 연륜이 싸여감에 따라 그 규모도 커가고 화려해질 것이고,한국유학생들도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 의무사령관 신검개입 의혹/친구아들 군면제 압력 행사

    전태준 의무사령관(육군소장)이 지난해 8월 친구 아들 김모씨의 신체검사 과정에서 병무청 신검과장으로 파견 근무중인 군의관에게 전화를 걸어 “7급만 제외하고 판정을 내리라”고 지시,신검과정에 개입한 의혹을 사고 있다. 김씨는 당시 일본유학생 신분으로 7급 판정을 받으면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국내 체류기간이 길어져 7급 판정을 기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사령관은 이에 앞서 디스크를 앓고 있던 김씨가 신검을 받기 전 일반 병원에서 찍은 자기공명촬영(MRI) 사진을 국군수도병원 신경외과 과장에게 판독받도록 주선한 뒤 “5급 면제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독결과가 나오자 김씨에게 신체검사를 받을 것을 통보했다. 김씨는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7급 판정을 받았다.하지만 국군수도병원에서 실시된 정밀 신검에서 김씨의 MRI 사진을 판독했던 군의관이 포함된 의료진으로부터 최종적으로 5급 면제판정을 받았다.
  • 실존인물 모델 장편 「장강」 1·2 펴낸 박영한씨

    ◎“우리 현대사의 독특한 인물형 조명”/이념에 중독됐던 세대 해독제처럼 신선 『비인간적 이데올로기라면 어느편의 것이든 맞서 싸웠던 그릇 큰 한 인물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장강」을 더듬어보려 했습니다』 작가 박영한씨(49)가 1922년생 실존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모델로 장편 「장강」1∼2를 창공사에서 펴냈다.이두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일제,해방공간의 소련점령,분단전쟁 등 질곡의 역사를 허무하다 싶을 정도의 저돌적 반항으로 통과한다.함북 회령에서의 소학교시절 벌써 만적단사건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하는가 하면 40년대초 일본유학당시엔 군국주의 막바지의 발악속에서도 인물과 어깨를 규합,항일결사 「혈우회」를 조직한다.해방이후엔 소련 점령군의 비인간적 통치에 대들다 5년간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르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뚜렷한 이념적 지향도 없이 항일,반공,남한비판 등을 오가다 깨지기만 하지요.하지만 맨주먹과 인간애 하나로 살아온 이 돈키호테에게서 이념으로 중독됐던 지난 연대의 해독제같은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소련유형생활을 그린 2권 전반부는 스탈린체제 하층부 삶의 또다른 진실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한국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 불러볼만 하다. 박씨는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 굵직한 역사물의 매력』을 말하면서도 『먼젓번 장편 「키릴로프의 사랑」에서처럼 존재의 내면탐구도 병행해나가겠다』고 앞으로의 소설계획을 밝혔다.〈손정숙 기자〉
  • 기미년 「서울역 만세시위」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

    ◎서울신문·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3·1운동 전국확산 계기… 일에 쫓겨 망명/임정 수립·만주 「대일전선동맹」 결성 주역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2일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항일독립투쟁을 펼치고 광복후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894년 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뒤 13살때인 1908년 상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영어과를 택했다. 선생은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졸업했다.극일의 심정으로 일본유학을 단행,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1918년 림규·송진우·최남선 등과 독립운동을 밀의한다.3·1운동을 지켜본 선생은 3월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한다.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면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선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하고 같은 해 4월13일 임정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하는 10개항의 임시헌장도 선포한다. 임정의 조각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대리로 선임되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를 창안,실시하게 된다. 임정 법무총장·외교부장을 두루 역임한 선생은 한국청년 5백명을 모집,군사행동을 위한 유격대성격의 「분용대」도 편성하는 등 한·중 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했다.한국혁명당을 창당한 선생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도발하며 중국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 모든 독립운동단체와 정당이 결속할 것을 주장,「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그러나 가맹단체간 협의기관인 이 동맹은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드러내 1935년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아래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5당 통합을 이뤄낸다.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으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무장투쟁노선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한 뒤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1943년 4월 임정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유림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했다.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광복을 맞는다. 광복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2일 임정요인의 2차환국 때 자주적 민족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민족국가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민족 자주성을 길러나가는 데 일조했다. 1948년 5월 제헌의원선거때 경기 광주에서 출마,당선됐고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5월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황성기 기자〉
  • 「학교종이 땡땡땡」 출간차 귀국/김메리 할머니 특별 인터뷰

    ◎“요즘 부모들 「가르침없는 자유」 주는게 문제”/「뭐든지 배워라」 어머님 말씀 내인생의 좌표/우리교과서 만들며 작곡… 50년 애창 큰 보람/20년만 젊어도 그림 배울텐데… 서울신문 초대에 감사드려요 □대담=임영숙 문화부장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 국민에게 애국가 다음으로 친근한 노래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할머니(92·미국 뉴욕거주).격동의 한 세기를 현대여성도 엄두를 못낼 도전과 모험으로 치열하게 살아 온 「영원한 젊은이」이기도 하다.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의 출판기념회와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김할머니를 2일 임영숙 문화부장이 만나 보았다.〈편집자 주〉 ­자서전을 단숨에 읽었습니다.재미있고 감동적이더군요. 『고마워요.할 이야기가 많아서 「속 학교종이 땡땡땡」을 써야 할까봐요.처음엔 영어로도 쓰려고 했는데….우리 딸 귀인(조귀인 미국 뉴욕타임스 매거진 편집국장보)이가 「학교종이 땡땡땡」을 영어로 다시 쓰기로 했어요.미국에서도 책이 나올거예요』 숙소인 남산의 힐튼호텔을 찾은 이날 상오,김할머니는 진분홍 꽃무늬가 돋보이는 하늘색 옷에 같은색 스카프,브로치를 단 흰 털실 베레모 차림으로 햇볕 가득한 방에서 일행을 맞이했다.뉴욕에서 서울까지 13시간의 비행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한 자세에 웃음을 잃지 않고 80여년전의 일까지 하나하나 기억해 얘기하는 모습은 거의 「소녀」에 가깝다.아직도 마음은 25∼29세라고 말했다. ○남산 신사참배 “생생” 『일제때 저 남산언덕배기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했어요.한달에 두번씩 신촌에서 이화학당 학생들 20여명이 함께 걸어와 저기서 절 한번하고 또 신촌까지 걸어갔습니다.지금 남산을 보니 그때 가슴아팠던 것이 사라지는군요.아주 시원해요』 ­한국이 많이 변했지요. 『나쁜쪽으로 보다 좋은쪽으로 변화가 더 많아요.이제 남은 것은 북한이 문제인데 통일도 곧 될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불리는 「학교종」의 가사가 원래와 달라졌다고 어제 공항에서 말씀하셨는데… 『아동문학가 윤석중씨가 나중에 바꾸었어요.문법상 문제가 있다면서.그래서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 「내가 한국에만 있었어도 가만두지 않았다」고 항의를 해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죠.그러나 지금은 좋아졌어요.그리고 올해부터 미국 뉴욕주 국민학교 음악책에 「학교종」이 실리는데 종소리가 「딩딩딩(Ding)」으로 번역돼 좀 우스워요.』 ­해방직후 이화여전 음악과장 시절 현제명 김성태씨등과 음악교과서를 만들면서 20여곡을 작곡하셨다는데 「학교종」말고 다른 작품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당시 교과서가 있으면 찾을 수 있을텐데 안타까워요.1950년 미국에서 내 손으로 직접 써서 출판한 「한국민요집」은 아직도 미시간의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학교종」이 지난 95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교사용 지도자료에만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매우 섭섭해 했다. ○김규식씨가 사촌오빠 ­「학교종이 땡땡땡」을 읽다 보면 나이와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삶을 사는 선생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구한말 명문가의 규수로서 결혼하기 싫다고 만주로 도망가고,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미국유학을 떠나 전공인 영문학대신 음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귀국후 이화여전 음악과장이 됐다가 학칙을 어긴 고위층 자녀 학생을 유급시킨 일로 말썽이 나자 음악과장 자리를 박차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 화학과 미생물학 석사가 돼 49세부터 미국 병원실험실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고,정년퇴직후 70세가 넘은 나이에 평화봉사단이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고,80세에 서예를 새로 배워 전시회를 열고….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살면서 어머니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어머니는 늘 나에게 무엇이든 배우라 하셨어요.도둑질 빼고 무엇이든지요.항상 남을 도우라는 말씀도 하셨어요.또 그 시대의 여성치고는 개방적이어서 내가 하려는 일이 옳으면 막지 않으셨어요.소학교때 선생님의 얘기도 가슴 속에 살아 있어요.한 사람이 나뭇가지에 올라갔는데 그 나뭇가지가 약해서 부러지러 하자 빨리 그 옆의 든든한 가지로 옮겨 살았다는 거예요.우리의 삶도 「좀 더 나은길」을 찾아 부단히 움직야 합니다』 ­지금도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다 했는데 한가지만 아직 못했어요.그림 그리는 일이예요.79세때 뉴욕대학 평생교육 과정에 들어가 3년간 소설 쓰는법도 배웠어요』 ○공부하고 싶어 만주로 ­어린시절 이름은 지금과 달랐지요. 『셋째딸이라 해서 삼식이었지요.그러나 기독교신자인 어머니가 메리(Mary)라고 부르셨습니다.아버지(김익승)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일본유학을 한 뒤 일본어,영어에 능통해 외무대신까지 지냈고 김규식박사가 사촌오빠됩니다.보통학교를 나온 뒤 배화학교를 다녔으나 졸업반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졸업은 못했지요.그러나 그때 교사들이 잡혀가 보통학교 졸업반 학생이 임시교사가 됐어요.나도 15세 되던 해 논산의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는데 17,18세나 되는 남자학생들이 가득찬 학교에 도착하니 「아기선생 왔다」며 놀려대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까지 살아 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만주에 3년간 있을때 였어요.논산에서 6개월만에 올라 오니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당시 궁중전의였던 다섯째 삼촌이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을 역이용한 일본인들때문에 만주로 떠나게 돼 영어사전 하나만 달랑 챙겨들고 따라갔어요.삼촌의 병원 일을 도우면서 영어사전을 통째 외우고 교회에서 풍금반주를 하기도 했는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74세에 아프리카 봉사 ­만주에서 돌아 와 이화학당에 입학하셨을 때의 동급생이나 후배들 얘기 좀 해주시죠. 『이화학당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동기중 이기붕씨의 부인이 된 박마리아가 있어요.1,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었죠.하지만 이씨와의 결혼은 내 중매로 이루어졌어요.게다가 한 학년 밑에는 모윤숙 백낙준씨의 부인이 된 최이권 등이 있었는데 이들도 여간 극성이 아니었어요.학생회장도 선배인 우리들을 제치고 서로 맡겠다고 난리였어요』 ­미국으로 다시 떠나서 뒤늦게 전공을 바꾸신 이유는….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였어요.70세까지 병원 실험실에서 일했어요.75년 남편(조오흥)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 벙원에서도 정년퇴임 하고 나자 이제는 또 무얼할까 하다가 74세가 되던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에 지원,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떠났어요.2년동안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80년 4월 라이베리아에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으로 돌아왔지요』 ­대단하십니다.건강유지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음식과 운동이예요.매일 동네를 3블록씩 산보하고 비가 오는 날은 집안에서 자전거등 운동기구로 운동을 해요.아침은 과일주스나 과일,보리죽과 볶은 가루에 우유를 타서 먹든지 달걀반숙을 먹어요.점심은 좀 양이 많은데 7첩반상으로 차려먹죠.맵지않게 만든 김치와 깍두기,생선,나물무침,전을 즐기지요.돼지고기,닭고기는 안 먹고 일주일에 세번 생선국,두번 야채국을 먹어요.외식은 안해요.또 뇌세포 생성을 돕기 위해 매일 TV 교양프로의 토론을 보며 받아쓰기도 하지요.아직 돋보기도 안쓰고 바느질도 직접 해요.지난 89년 뇌일혈로 한때 쓰러졌던 적이 있어요.그때도 기억력,시력을 그대로 유지해 의사가 「신비하다」고 말했어요.지난해 기억력테스트를 해보니 25∼29세 연령의 기억력으로 나오더군요.「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우리 옛말의 그 정신으로 삽니다』 ○주일학교 교사 맹활약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지금은 주일학교에서 한국인 어린이들의 교사로 일해요.「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면 좋은 인물됩니다」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 우리말,영어로 가르쳐주기도 하죠.월요일이면 하루종일 드러누워야 할 정도로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가르치는 동안에는 생기가 나요.20년만 젊다면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텐데…』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노래를 배우고 자라는 우리 어린이들과 부모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린이들이 가짜 동물,식물만 보면서 놀잖아요.그게 못마땅해요.자연에서 진짜 동물,식물을 보면서 놀아야 배우는 것도 많아요.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유는 무제한으로 주지만 지도를 안하는 것 같아요.지도하면서 자유를 주어야합니다』 ­서울에 얼마나 머무실겁니까 『2∼3주일 있을 생각이예요.떠나기전에 서울신문을 방문하겠습니다.서울신문에서초대 해 줘서 고마워요』〈정리=서정아 기자〉
  • 화가 김흥수(이세기의 인물 탐구:87)

    ◎하모니즘 창시… 세계화단에 우뚝/뜨거운 열정으로 작품마다 혁신적 표현 시도/93년 동양작가로 처음 푸슈킨 미술관서 개인전/작품 모두 1천여점… 미술사에 남기려 대작은 안 팔아 검은 펠트모자에 브라운컬러가 든 선글라스를 쓰고 김흥수 화백이 공식석상에 나타나면 그의 현란한 차림에 좌중은 경이의 시선을 집중시킨다.오늘날 우리 화단에서 알아주는 멋쟁이에다 그 재치가 탁발하여 예술가적 기질이 충일한 반면 옳은 말을 참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세우려는 불 같은 정의감 때문에 그는 곧잘 엉뚱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에선 「폭군화가」「독설가」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외모는 사나이답고 솔직하며 내심은 섬세청렴하여 저질스러운 것,치사한 것,부당한 것을 용납치 않는다.오죽하면 바람 잘 날이 없는 자신을 향해 『넓고 넓은 황무지를 혼자서 한없이 걷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중에서도 49년 국전에 입선된 「나부군상」과 53년 「침략자」에 얽힌 사건은 화단이면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의 하나다. ○화면곳곳 고뇌의 흔적 선전에서의 입선과 특선후 국전 제1회에 출품한 「나부군상」은 나체화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라는 이유로 전시도중 철거되었고 6·25를 테마로 한 「침략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너무 적나라하게 다룬 것이 화근이 되어 전시철회를 권유받기도 했다.당시 심사위원측은 작품 「침략자」를 취소할 경우 그의 「군동」에 대통령상을 줄 것을 제의했으나 『상을 타기 위해 자식 같은 그림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는 끝내 「침략자」전시를 고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격인 만큼 경우에 어긋나는 처사를 묵과할 리 없다.한 미술전문지가 조사한 화가의 「그림값문제」를 놓고 『특정한 몇사람에게 부당한 이득을 주기 위해 많은 작가의 자존심을 짓밟은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조작극』으로 비판한 일과 외국작가초대전에 대해서도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외국작가를 데려다가 온갖 경비를 들여 모든 영광을 바치는 비굴한 발상,거지 같은 음모』등으로 몰아붙여 주최측을 곤혹스럽게 했다. 또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의 자격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은 과연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공개서한을 신문에 발표한 것도 그가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련의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한군데 머물지 않고 모색과 탐구를 계속해온 그의 작업은 「그림의 내용과 형식·색채에 대한 진취적이고 장인적인 고뇌의 흔적을 화면에 면면이 점철시킨 것」이 특징이다.초기에는 민족적 주제의 사실적 화풍이 주조를 이루다가 도쿄유학이후 주관과 객관의 문제에 파고들기 시작했으며 파리시절은 「탐미주의적 경향」을 무제한으로 방출한 풍요로운 색채의 의장이 두드러진다. ○크리스티서 작품 거래 평론가 오광수는 한국고유의 양식에 뿌리를 둔 그의 거대한 아라베스크의 화면을 보고 『추상적 톤과 장식적 요소,예리한 선획으로 대상을 해체하고 분할하면서 마티엘의 파편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시적 감흥을 준다』고 이를 설명한다.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재미시절 「주관적인 표현과 객관적인 표현,구상과 추상을 하나의 화면에 공존」시킨 이른바 새로운 미술사조인 「하모니즘」으로 다시 한번 「화면속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77년8월 워싱턴에서 선보인 그의 하모니즘은 미국화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지난 90년,세계적인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선한 파리 「김수(Kimsou) 하모니즘(Harmonism)」전으로 세계화단의 스폿을 받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유서깊은 뤽상부르초대전은 한국인으로서 처음이기도 하지만 관람객이 줄을 잇는 이변 가운데 현지 매스컴도 전례없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그가 친애해 마지않는 레스타니는 『그가 창안한 하모니즘,즉 조형주의는 예술에서 서로 상반되거나 대조적인 테마를 자연발생적인 변증법적 논리로 결합한 아주 특별한 세계』임을 전제,『바로 이와 같은 이원적 우주관은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시간의 정지속에서 몽상적인 초현실과 현실을 지속케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파리 악튀알리테」와 「렉스프레스」도 「그는 한 작품속에서 우연과 필연,유형과 무형,표와 이,긍정과 부정,음과 양의 상반된 양극을 화합하여 오리지널리티의 완결성을 보여준다」고 보도한 바 있다.이로써 예술을 향한 뜨거운 집념과 고집스러운 창작욕은 「조형주의 창시자」로서 세계미술사에 등재되고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은 한치의 오차없이 정상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흥수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네르기슈의 작가이며 작품에 대해 그가 구현하려는 의욕은 참으로 끈질기고 고집스럽다』고 임영방씨(국립현대미술관장)는 말한다.이어서 『불굴의 기백과 투지,그리고 집요한 탐구와 비범한 예술적 아이디어는 작품마다에서 혁신적인 표현을 이룩해낸다』고 경탄해 마지않는다.그는 거장답게 지난 91년 국제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에서 작품이 거래되는 기쁨을 누렸으며 93년 동양작가로는 처음 러시아 푸슈킨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이는 74년 샤갈전 이후 생존작가로는 그가 두번째다. 그의 치열한 삶의 지표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허덕거리도록 온 힘을 다 받쳐서 완성된 작품 앞에 섰을 때의 그 희열을 위해」 그는 「한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망각속에 묻어버린 채」 새희망,새 삶속에 솔직하고 싱싱한 생동감을 그때마다 재확인해 나간다.그리고 정열과 돈과 시간을 자신의 화업에 아낌없이 쏟아붇는다.그동안 20여회의 개인전과 1백20여회의 국내외 그룹전·초대전을 통해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은 1천여점,그러나 미술사에 남기기 위해 대작을 절대로 팔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웬만한 기성화가가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그래선지 『내가 돈 잘 버는 화가인 줄 안 전처는 내게 실망하고 떠났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육식 즐기고 춤솜씨 일품 3년전 연하의 제자인 장수현(34)과의 결혼으로 장안이 떠들썩할 때도 『예술가는 평범한 생활을 해서는 개성과 창조를 생명으로 하는 작품을 남길 수 없다』고 자적한 태도를 보였다.거실을 화실로 쓰고 있는 방배동 황실아파트에 들어서면 현관에서부터 그 짙은 유화냄새와 함께 황홀한 그림의 범람이 눈앞을 압도한다. 부인은 현재 파리유학중. 함남 함흥시 공무원이던 김영국씨와 창덕궁 양잠소 교사를 지낸 이부갑여사의 3남1녀중 차남,그림그리기를 좋아한 소년시절에는 완고한 부친이 『표현능력이 뛰어나고 말을 잘하니 변호사가 될 것』을 명령했으나 함흥고보시절 「밤의 정물」이 선전에 입선하자 부모는 일본유학을 허락해주었다. 그의 화업은 이제 「예술은 내용이냐,탐구냐 또는 형식의 발견이냐」를 지나 「하나의 화면을 채색으로 쌓아올리는 루오의 탐구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와 달라질 그날을 위하여 나는 나의 그림을 자유속에 놓고 싶다.그리고 격렬한 현실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호흡을 화면에 재현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고정된 틀속에 묶어두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도 볼보를 몰고 육식을 즐기는 대식가에다 눈부시게 돌아가는 춤솜씨가 일품인 그의 예외적인 정열은 몸속으로부터의 깊고도 끈질긴 모티베이션,자유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과연 누가 뭐라 해도 자유의 화가다.그리고 깨어 있는 형식과 의식으로 인해 어디서나,언제까지나 자유다. ◇연보 ▲19 21년 함남 함흥 출생 ▲36년 함흥고보재학중 제16회 선전 「밤의 정물」입선 ▲38∼39년 가와바타화(천단화)학교 데생수학 ▲44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선전 「밤의 실내정물」특선 ▲49년 귀국,서울 첫개인전(현신세계미술관),국전 「호」특선 ▲53년 국전「군동」특선 ▲54년 도불고별전(미도파화랑) ▲57년 파리 개인전(라라 뱅시화랑),살롱도토느 회원피선 ▲60년 라벨가브리엘 화랑주최 개인전 및 살롱 콩파레종 초대출품 ▲61년 귀국전,국전심사위원 ▲62∼67년 국전추천작가 ▲66년 도미고별전(서울신문회관) ▲67∼68년 필라델피아 무어미술대 초빙교수,필라델피아 미대강사 ▲69년 시카고·위스콘신 개인전 ▲71년 우드미어 아트갤러리 「이해의 수작초대전」1등상 ▲73년 젠킨타운 아트페스티벌 믹스드 미디어 1등상 ▲79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85년 김흥수 유화전(현대화랑) ▲86년 한불수교 1백주년기념 서울·파리전 출품 ▲90년 김흥수 조형주의미술전(파리 뤽상부르미술관) ▲92년 김흥수 장수현 부부전 ▲93년 김흥수 조형주의작품전(모스크바 푸슈킨 박물관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박물관),대한민국예술대전 구상부문 심사위원장 5월문예상(61) 한국미술대상(73) 문화훈장 옥관장(86)
  • 일본에서…/한국 유학생(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7)

    ◎1만3천명 “지일열기”… 7년새 3배로/어학원생·연수생 합치면 3만여명/물가·학비 비싸고 장학금 적어 “3중고”/귀국뒤 미·유럽출신 비해 냉대… 불안감 일본유학생 오병국씨(30)의 하루는 생활에 지친 고달픈 아침으로 시작된다.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피곤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학교수업을 위해 일어나야하는 그에게 아침은 하나의 고통이다. ○새벽까지 부업 예사 그는 저녁9시부터 다음날 새벽1시까지 빠찡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유학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는 지난 91년말 많은 꿈을 안고 일본으로 왔지만 그의 유학생활은 고단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다. 그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어려운 가운데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대학졸업후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그는 유학오기전 부산동의대 3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3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지난 91년 대위로 제대한 그는 보다 넓은 세계를 찾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왔다.그는 일본어학원을 거쳐 지난해 명문대학중의하나인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입학했다.그는 도쿄 시나가와(품천)에 있는 조그만 3평짜리 방 한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러나 오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그는 4시간정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학생들보다 아르바이트시간이 짧고 그가 일하는 빠찡꼬는 외삼촌이 경영하는 곳이다.그의 방은 욕실도 딸려있을 뿐만아니라 집세도 외삼촌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일본에 온 많은 학생들은 오씨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일본의 물가가 워낙 비싼데다 학비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며 생활하는 경우도 상당하다.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생활의 한부분을 스스로 해결하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들은 대부분 식당이나 상점·회사 등에서 일을 하며 보통 한시간에 1천엔(약8천원) 정도를 받고 있다.아르바이트시간도 하루에 5∼7시간이나 되어 공부에 적지않은 지장을 주고 있다. ○월집세 24∼40만원 일본유학생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외국의 낯선 사회관습속에 이같이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현실이다.그들은 대부분 좁은 방 한칸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그나마 그러한 집을 얻는데도 보증인이 필요하는 등 어려울 뿐만아니라 집세도 비싸다.도쿄의 경우 3∼4평정도에 부엌·화장실이 있으면 월 3만∼5만엔(약24만∼40만원)이며 욕실이 딸려있을 경우는 3만엔정도 더 비싸다. 생활비 뿐만 아니라 학비도 비싸다.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부 3학년인 김선남씨(29)의 경우 1년 학비가 30%의 감면을 받아 50만엔(약4백만원)정도다.그러나 전문대는 그러한 혜택도 없으며 학비도 비싸 연 1백만엔(8백만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고 김씨는 말한다.장학금이 있으나 액수가 4만8천엔(약38만원)∼6만엔(48만원)으로 많지않으며 그나마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30∼40%에 지나지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유학생활은 이같이 경제적 어려움이 많지만 학생수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일본 문부성 통계에 따르면 94년5월1일 현재 한국유학생은 1만2천9백6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이는 문부성이 처음으로 유학생 실태조사를 실시한 1987년의 4천8백52명과 비교할때 7년동안 3배정도 늘어난 것이다.한국유학생은 일본의 전체 유학생 5만3천7백88명중 24.1%에 이르고 있다.이는 전체 유학생의 43.2%를 차지하는 중국(2만3천2백56명)에 이어 두번째다.그러나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의 김선남 회장은 일본어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연수생 등을 모두 합하면 3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일부학생 “환락 유학” 일본유학은 대학원·대학·전문대학이 중심이며 여기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어학원을 대부분 다닌다.많은 유학생들은 비교적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김씨는 말한다.그러나 일부 유학생들은 도쿄의 신주쿠(신숙)등 환락가에 몰려다니며 공부보다는 노는데 빠져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유학생들은 또 학교에서의 차별은 별로 없지만 일본학생들과의 교류는 나이차 등으로 그렇게 활발하지 않다고 오병국씨는 말한다. 오씨는 그러나 『유학생활은 국제감각을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일본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고 말한다.김선남씨는 또 『단순히 교과서적인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과는 달리 유학을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체험하게 되어 보다 깊이 있게 일본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그는 『일본의 실체를 체험을 통해 알게됨으로써 앞으로 일본과의 관계에 유학생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일실체 이해 큰 도움”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 고상균씨는 『일본에서 공부한 것이 한국에 돌아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한국의 대기업들도 국제화 바람을 타고 일본유학생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고급인력 스카우트는 이공계 박사·석사 중심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유학생들의 취업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김선남씨는 지적한다.그는 『일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가도 미국이나 유럽 유학생을 여전히 선호하는 사회풍토와 나이제한(유학생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음)등으로 자신이 원하는 직장이나 학계로 진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유학이라는 화려한 환상은 이러한 어려운 취업환경과 생활고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일본유학생사회에는 비관적인 분위기가 강하다고 김씨는 지적한다.그런 가운데서도 미국·유럽 유학파 중심의 한국현실에서 일본유학파의 존재가 기업·학계 등에서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
  • 북경 33평아파트 월세 570만원/북경=이석우(특파원코너)

    ◎45평 860만원… 더 비싼 호텔엔 「바퀴」 득실/외국인 푸대접 당연시… “싫으면 가라” 배짱 방3개의 45평형 아파트 8백60만원.33평형 5백70만원.중국 북경의 아파트 월세 금액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5백달러 미만이고 먹고 사는 데는 한국의 10분의 1밖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북경을 찾는 장기체류자들에겐 이 터무니없는 북경의 집세는 가장 먼저 다가오는 당혹이다. 한국대사관과 우리 기업들의 사무실과 아파트가 몰려있는 중국국제무역센터(꾸오 마오)의 오피스텔과 아파트는 이중 가장 비싼 곳중 하나여서 45평정도에 입주하려면 매달 1만달러를 내야 한다.지난해초 3천5백달러 수준이었던 북경 동부지역 량마오일대의 연사빌딩의 45평형도 1만달러 수준을 돌파했다.2년도 채 안돼 3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중국정부가 지난90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려고 북경의 서남쪽에 건설했던 외국인 집단거주구역 야인촌도 꾸오 마오나 연사일대보다는 훨씬 싼 편이었지만 최근 외국인들에 대한 주택 임대료 인상에 발맞춰 1년도 채 안돼 갑절씩 올리면서 꾸오 마오일대의 가격까지 육박하고 있다. 대학의 기숙사비 역시 최근 월4백달러수준을 넘어서는 곳이 생기기 시작하는 등 적은 비용의 유학을 꿈꾸었던 장기체류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북경사범대학은 구내에 한국과 일본유학생을 주대상으로 하는 2백여실 규모의 기숙사를 짓고 있는데 오는 11월 문을 여는 대로 한달 기숙사비를 4백달러수준으로 올려 받기로 했다.또 돈많은 한국학생들이 몰려 있기로 유명한 중의학원(한의과대학)도 이미 월4백50달러이상의 기숙사비를 받고 있는 등 높은 방값으로 큰 돈을 벌고 있다. 「숙」때문에 당혹스럽기는 단기체류자도 마찬가지다.북경반점,상그리라호텔 등 5성 A급호텔은 최하1백60달러∼1백80달러는 주어야 하고 서울의 장급 여관 정도 되는 곳에서 자려해도 내국인보다 최소2∼3배를 물리기 때문에 최소 하루 50∼65달러를 내야한다(이 정도 수준이면 욕조 없이 샤워기만 있는 곳이 많다).그나마 성수기에는 이것도 10∼20달러씩 인상되는데 이정도 수준의 반점에서 자기 위해선 북경의 명물인 대형 바퀴벌레(한국의 그것보다 2배쯤 크다)와 친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이처럼 주택유지비와 숙박비가 높은 까닭은 첫째로 외국인을 봉으로 알고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이지만 또 한편 그만큼 많은 외국기업과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등소평 사후 정치적인 불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가능성과 투자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더 크게 놀라는 것은 뉴욕이나 워싱턴보다 더 비싼 임대료 수준보다는 그렇게 황당한 액수를 받아내면서 당당한 중국사람들의 자세다.한마디로 이들은 「중국은 너희들을 부른적이 없다.너희들이 필요하고 아쉬워서 오지 않았느냐.있고 싶지않은 자는 중국을 떠나라」는 식이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투자지로서의 매력이 바뀌지 않는한 북경과 중국 각 대도시들에서 상상외로 높은 임대료와 당당한 중국인들의 반응에 대한 외국인들의 놀람은 앞으로 더욱 더 커질 것 같다.북경의 상당수의 외국인전용 아파트단지내에선 계약기간을 95년말까지로만 제한하고 있는데 이도 역시 임대료 일제인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 기업들,“일유학 인재를 잡아라”

    ◎대우등 5사,25∼26일 도쿄서 취업상담/석·박사에 한해 40∼100명씩 채용계획 「일본유학생을 잡아라」­우리기업들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인유학생 유치에 나선다.국제화바람을 타고 그동안 미국에 치중돼 있던 해외두뇌 유치전이 일본으로 번진 것이다. 삼성·대우·선경·삼양사·만도기계 등 5개 기업은 오는 25∼26일 일본 도쿄 도립무역센터에서 열리는 유학생 유치를 위한 기업상담회에 인사팀을 파견,우리 유학생을 상대로 구인활동을 편다.일본경제신문계열의 인력개발전문업체인 (주)디스코사와 한국의 인력소개업체인 (주)아리오가 공동주최하는 「커리어포럼」에 우리기업들이 처음 참가하는 것이다. 이 행사는 일본대학에 재학중인 외국인유학생을 대상으로 자국기업이 기업홍보와 취업상담을 하는 기업설명회다.올해 다섯번째로 한국과 중국·대만 등 6개국이 참가,행사장에 마련된 2평남짓한 상담실에서 자기기업의 내용을 설명한 뒤 유학생들의 인생설계를 듣고 취업상담을 한다.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인학생은 1만6천명정도이며 삼성은 1백명안팎,다른 기업들은 40∼50명의 석·박사들을 유치할 계획이다. (주)아리오 임우재전무는 『일본유학생들은 정서상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기업정신을 간접체험할 기회가 많은데다 기술의 응용·실용적인 면에서 미국유학생보다 유리해 이들을 유치하려는 국내기업들의 활동이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미의회 대일제재/클린턴 찬성

    【워싱턴 공동 연합】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25일 의회의 대일무역제재법안 마련움직임이 일본 시장 개방을 위한 『미국민들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리처드 게파트 하원 민주당 원내총무가 주도하는 이 법안과 관련,『무역을 개선하고(일본)시장을 열기위한 미국민들의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특히 상원의 존 록펠러 의원(민주·웨스트버지니아)과 같은 「친일파」도 이 법안에 관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 법안은 일본이 미국이 정한 구체적 수입목표치를 맞추지 못할 경우 미정부에 대일 보복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는 것으로 57∼60년 일본유학을 한 적이 있는 록펠러의원은 전날 일본정부가 미국의 재화·용역에 대해 시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게파트 총무가 주도하는 이 법안에 동참하겠다고 말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러나 소위 「게파트­록펠러 법안」에 대한 지지의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 빈혈 여대생 다이어트/춤추다 절명

    13일 하오7시15분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힐탑호텔 지하 사가나이트클럽에서 춤추러 무대로 나가던 일본유학생 오현경양(22·호리츠대 2년)이 갑자기 「어지럽다」며 쓰러져 숨졌다. 경찰은 오양이 평소 장이 좋지 않아 빈혈과 경기증세를 일으켜온 데다 최근 체중조절위해 다이어트를 해왔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다이어트로 인한 부작용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있다. 오양은 91년 서울 J여고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지난 7일 설연휴를 지내기 위해 귀국했었다.
  • 장성단감/알굵고 당도 높아 값비싸도 “인기”(내고장 특산품)

    ◎무기질 풍부… 가래·숙취에 효과 탁월/황룡 등 4개면서 한해 3백여톤 생산 장성단감은 주먹만한 크기에 당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무게가 개당 6백g으로 다른 지역 단감보다 한배반이나 크고 노란 은행잎 때깔과 연한 육질로 단감중에는 단연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 장성단감이 이같은 명성을 얻게 된데는 이 지역이 경사도가 20%이하의 찰흙토질의 구릉지가 대부분이고 연평균기온도 20∼25도로 단감재배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 현재 황룡·동화·남·삼서면등 군내 4개면 1백20여농가에서는 조생종인 「대안」 1백40여t을 비롯,중·만생종인 「부유·차랑」 1백40여t등 한해 3백여t의 단감을 생산하고 있다. 소득도 한해 6억여원에 달해 가구당 5백만원의 고소득 작목으로 자리잡았다. 장성지역 단감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데는 지난 1930년 황룡면 신호리 출신인 고광준씨(79년 작고)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가져다 심은 한그루의 묘목이 이웃으로 퍼지면서 부터다. 이후 장성지방의 이같은 재배조건에 힘입어 급속히 퍼져이젠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볼 정도가 됐다. 장성단감은 요즘 수확철을 맞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등 전국시장에서 진영단감등 다른 지방산보다 비싸지만 인기를 더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진영단감은 다른 지역산보다 무기물과 비타민 A·C가 많이 함유된 것으로 평이 나있다.또 기침과 숙혈(피를 멈춤),구역질,가래등을 멈추게 하고 어린이 발육부진과 숙취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생산농가들은 지난 85년 「장성단감 출하협의회」를 구성,공동출하로 장성단감의 신용과 품질을 지켜나가고 있다.40개짜리 한상자에 6만원,50개짜리 4만원,60개이상은 2만∼3만원선에서 팔려나가고 있다. 협의회 김광채총무(37)는 『앞으로 가격이 좋은 조생종으로 품종을 바꿔 농가소득을 올리고 장성의 명물로 키워나가겠다』면서 『50평규모의 저온저장고를 이용,홍수출하를 조정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온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 배움없는 할머니들 장학의지에(박갑천칼럼)

    며칠전 청주의 구두쇠 신언임(62살)구멍가게 할머니 얘기가 신문에 났다.평생 모은 30억 전재산을 충북대학교에 기증한다는것이 그내용이다.그런 유형의 얘기는 지난4월에도 전해진바 있다.삯바느질로 보비리소리 들어가면서 애면글면 모은 30억원재산을 대원(대원)학원에 기증한 이순옥(80살)할머니가 그사람이다. 이보다 앞선 김밥할머니 일화는 지금쯤 모두들 잊고있을까.90년 그가 충남대학교에 50억상당의 재산을 내놨을때는 이름을 감춘채였다.나중에 이복순이라는 이름이 알려져 감동을 안긴 그는 지난해 79살로 세상을 떠났다.이밖에도 충북 제천의 김학임할머니(70살)가 도서관부지로 13억상당의 재산을 희사한일이 있고 지난해 78살로 타계한 박화숙할머니는 막일로 모은 재산 2백50억원 상당을 불우이웃을 위한 복지재단으로 남겨놓고 있기도 하다. 이 일련의 선행에서 공통되는게 몇가지 있다.모두가 가린스럽고 억척스럽게 돈을 번 여성이라는 것,젊어서 홀로되었다는 것,맨마지막의 박할머니 말고는 배우지못한 처지이면서 학교에다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는 점등등이다.자신이 배우지못한 처지였기에 가난해서 공부못하는일은 없어야겠다는 한이 서렸던것인지 모른다.아무튼 그래서 더욱더 값지고 너볏해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여성이 있다.이준열사의 후처 이일정이다.여성의 경우라면 방물장수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서울 안현동에 「안현부인상점」을 차렸던(1907년)신여성.여성으로서의 시판경제 길잡이구실을 했다고 할 것이다.그가,일진회에서 보낸 우리의 21명 일본유학생들이 학비조달을 못하여 곤경에 빠진끝에 단지동맹으로 면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송금하고 있다(추계최은희전집1).교육을 향한 이같은「여자의 마음」이 백선행등 숱한 여성교육가를 배출하면서 오늘에 흘러「장학할머니」들을 내놓고 있다고 할수 없을 것인지. 『재물에는 세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벌기어려움이 하나요 지키기어려움이 하나요 쓰기어려움이 하나라.벌고자 하는자 천만명에 번자는 하나요 번자 천만명에 지키는자 하나요 지키는자 천만명에 쓰는자는 하나로다.…쓰는자 천만명에 선용하는자는 하나라 할지니라』(육당최남선의 「재물론」 첫머리를 풀어씀:최남선전집10).벌기보다 쓰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아프고 슬프게 벌어 선용한 할머니들 앞에 부끄러워해야 할 부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 제1회공초문학상/이형기씨 선정/서울신문사주최 공초선생 숭모회 주관

    ◎5일 30주기 맞아 성대한 추모행사/“초윤리의 사상가·시를 체험한 시인”평/후배문인들 91년 기금1억 마련 근대 신시운동의 선구자이자 자신이 즐겨 피우던 담배연기처럼 살다간 기인 공초 오상순시인(1894∼1963)이 우리곁을 떠난지 5일로 30주기를 맡는다.올해는 또 선생의 탄생 99돌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서울신문사와 공초오상순선생숭모회(회장 구상)는 선생의 설흔번째 기일을 맞아 3일 상오11시 문인·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수유리 빨래골 묘소에서 기제를 올린다.이와함께 하오4시부터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올해 처음 제정한 「공초문학상」시상식을 개최한다.제1회 수상자로는 이형기시인이 선정됐다. 이어 열릴 추모행사에서는 수상자인 이형기시인이 「공초의 시와 공사상」이란 공초론을 발표하며 시인 이원섭씨(숭모회 부회장)가 「공초의 생애와 사상」강연등 성대한 행사를 치를계획이다. □공초문학상제정배경및 취지 「공초문학상」은 지난91년 10월 공초선생의 제자인 구상숭모회회장 주도로 서울갤러리에서열린 「공초문학상기금마련 희사작품전」의 수익금으로 제정됐다.숭모회측은 구상·박두진·서정주·조병화·설창수·홍윤숙씨등 문인들과 화가 김기창·김영주·박고석·이대원씨등 모두 1백5명이 내놓은 자작친필과 소장품 1백32점을 팔아 모은 기금 1억1천5백만원을 지난4월 서울신문사에 기탁해 온 것이다. 이에따라 「공초문학상」은 서울신문사 주관으로 매년 시부문 1명을 시상하며 시상대상자는 20년이상의 문단경력을 가진 작가로 작품의 우수성뿐만아니라 수상자의 인품을 고려하는등의 운영규정을 정했으며 매년 6월중 시상식을 갖게 된다. □공초의 생애와 사상 오상순은 1894년 8월9일 서울 시구문안(지금의 장충동2가)에서 태어났다.비교적 개방적인 중산층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경신학교를 거쳐 19세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경도의 동지사대학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한 인텔리였다. 1920년 변영노·남궁진·김억·염상섭과 함께 한국신시운동의 선구가 된 동인지 「폐허」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허무혼의 선언」「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등 명시를이때 발표했다. 청춘기의 공초는 만년의 트레이드마크인 빡빡깎은 머리와는 달리 길게 드리운 올백머리의 멋쟁이 청년이었다.그는 40대에 대구에서 연하의 과부와 잠시 동거생활을 한 이외에는 평소 지론이던 독신주의를 지켰다. 그는 살아생전 혈육한점,머물 지상의 집한칸,시집 한권 내지 않았다.공간을 초월,시간속에 영원히 산다고 해서 「공초」라 했던가.그득한 담배연기속에 묻혀 살았다고 「꽁초」라고 불리었던가.그의 삶은 세속을 떠난 성자의 그것이었다. 6·25를 전후해 서울 푸라워,대구 아리스,부산 금강,서울 명동 청동,서라벌등 다방을 무대로 문학을 교리처럼 설파한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며 신화다.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담배불을 꺼뜨리지 않았다.제자의 결혼식 주례에서도,세수할때도 담배는 항상 손에 있었다.하루평균 1백80개비(20개들이 9갑)를 연기로 만들었다.다방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여 「청동산맥」이라는 서명첩을 내놓고 「연기는 사라져 어디로 가나」같은 선문답문제를 내 제자나 방문객들이 나름대로의 단상을 적은 「청동문집」1백98권이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이다. 무일푼,무소유로 일관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예술원종신회원,예술원상,서울시문화상등 상복이 따랐다.1963년 6월3일 노환으로 입원한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제자들의 간호를 받으며 운명했다.그는 무교리의 종교가,초윤리의 사상가,시를 몸소 체험한 유일한 시인이었다.
  • 신세대작가의 편견/신항섭 미술평론가(굄돌)

    요즘 30∼40대 작가들은 60∼70대 중진·원로작가들의 작품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한마디로 현대감각이 없다는 지적이다.젊은 작가들이 말하는 「현대감각」이란 무엇인가.「현대감각」이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작품에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거기에서 우리가 짚어볼 수 있는것은 「현대미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류의 새로운 미술사조의 얼굴이다.발생지에서조차 미학적인 논리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 실험적인 표현방법들이 그대로 복사되는 상황인 것이다. 중진·원로들은 일제치하라는 가장 불행한 시대에 미술공부를 했다.더구나 대부분이 일본유학을 통해서 서구미술을 받아들여야만 했다.그래서 그들중 일부는 친일성향의 작품이라고 매도당하기까지 했다.그래도 그들로서는 감수할 뿐이었다.국민적인 정서속에는 일본혐오 감정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거기에 작가 개인의 예술적인 신념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이처럼 작가적인 신념을 지키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극히 한정되었다.서구 모더니즘의 완전한 수용이거나 한국적인 정서의 표출뿐이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일본혐오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이미지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나 할까.그 결과 비록 표현재료 및 기법은 서구적일망정 이미지 및 내용,그리고 주제는 한국적인 정서의 표출로 집약되는 성과를 얻었다.물론 거기에는 새로운 미학의 전개는 미흡했다.이미지 차용 및 변형이라는 제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그림」으로 일별할 수 있는 정서적인 공감대 형성에는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현대미술」에 탐닉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은 어떤가.그들이야말로 감성을 차단당한 지식의 노예가 되고 있지 않는가,또한 그들의 의식이야말로 예술사대주의에 저당잡히고 있는것은 아닌가.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고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의 무감각과 편견이 한국미술을 서구미술의 종속화로 몰아가고 있다.
  • 고 박봉수화백 26일부터 대규모 회고전

    ◎새달 9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서 마련/“시대앞선 예술감각” 새롭게 평가/시기별 화풍대표작 50여점 전시 한국화가 지홍 박봉수화백.1년전 75세의 나이로 숨진 이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화풍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오늘,이 작가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작업이 일부 미술평론가 윤범모,김진송씨등 미술계 인사들에 의해 새롭게 이뤄지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는 찬사속에 대대적인 회고전이 준비되고 있다. 오는 26일부터 7월9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마련되는 그의 1주기 회고전에는 유족이 소장해온 1천여점의 유작가운데 시대별 화풍을 대표하는 대작 50여점이 전시된다. 평론과 도판 2백50여점이 컬러화보로 담긴 두터운 화집도 발간되며,전시기간중에는 유족과 관계전문가로 구성된 감정위원회가 시중에 크게 나도는 박화백의 가짜그림을 가리기 위해 작품감정을 해주고 작품보증서를 무료로 내줄 예정이기도 하다. 이같은 감정행사는 유례없는 일로 최근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멧돼지 잉어 등을 그린 박화백의 초기사실작품의 가짜가 수백점 나돌고 있는데 따라 취해지는 것이다. 박화백의 가족을 통해 최근 1천여점의 유작을 접한 미술평론가 윤범모씨는 『그의 시대를 앞서간 예술감각에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그리고 윤씨는 이번 재조명작업에 앞장서고 있다. 사후에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게 된 박화백은 1916년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9세무렵부터 뛰어난 그림을 그려 신동이란 얘기를 들었다.15세에 일본인 교장선생의 추천으로 일본유학의 길에 오르고,17세에 일본 수채화전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공식적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1934년 조선전람회에 입선하고 그 이듬해 중국의 북경미술학원에서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7년 귀국,금강산에 입산해 3년간 사찰을 돌며 불상과 탱화제작에 전념했다. 이때부터 토속적이고 원시주술적인 내용의 작품과 실험성 있는 콜라주기법의 표현,문자와 인체를 소재로한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이는 고 이응로화백의 문자도보다도 앞선 것이어서 당시엔 그를 보고 『약간 돌았다』는 말까지 했다. 1959년 미국의 화랑초대로 발예모초대전,피렌체국제전 등에 출품하며 국외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국내 화단에서는 방랑벽을 지닌 국외자 신세를 면치못했다. 1970년이후 일본 아프리카 유럽등 세계 각국에서 스케치여행을 하며 프랑스미술협회(ADAGP)의 정회원이 됐다.국내작가로는 이응로 이항성화백과 박화백 단3명만이 정회원이었고 그중에서도 국내거주자로는 유일했다. 파리예술원회원·파리조형예술작가보호협회회장 등의 직함이 시사하듯 그는 외국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고 생활도 외국에서 팔리는 그림으로 꾸려갔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한 평론가는 『지홍은 전형적인 수묵산수화나 채색화훼도의 세계로부터 분방한 자세의 실험정신에 이르기까지 늘 출렁거리는 일생을 살다갔다』면서 『형식이나 재료의 다양함뿐 아니라 즐겨 다루는 내용이나 주제도 참으로 변화무쌍하다』고 평했다. 구도의 행각승처럼 노년에도 청년미술학도같은 열정으로 실험정신을 구가했던 지홍은 지난해 더운 여름날 병상에서 제작하던 대작 「태풍」을 절필작으로 남기고 예술인생을 마감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86아주대회 3관왕 임춘애/어제 이대졸업… 코치 꿈꿔(조약돌)

    ○…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3관왕인 임춘애양(23)이 24일 이화여대 체육과를 졸업했다. 라면을 먹으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된 연습을 한끝에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온 국민들의 눈물을 자아냈던 임양은 지난 88년 이화여대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었다. 임양은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 때 부진한 성적을 낸데다 고질적인 무릎부상 때문에 90년8월 선수생활에서 은퇴했었다. 그녀는 국내 첫 여자육상코치가 되기를 바라면서 일본유학을 준비하는 일본어문화원의 임시직원으로 회원관리업무를 맡고 있다.
  • 김춘수 그리고 박노해(송정숙칼럼)

    지난주의 한 TV에 김춘수 시인이 등장했었다.가파르게 수척한 칠순의 시인이 구사하는 남도사투리는 알아듣기가 매우 거북했다.그렇기는 하나 그 말에 담긴 진률한 목소리는 TV같은데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숨을 죽이고 귀기울이며 들어야 했다. 육신의 고통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의 체험담은 오늘의 시인이 지닌 그 이기적인 정직성을 이해하게 했고 그중의 한 대목인 「3개의 빵」에 대한 삽화는 오래오래 지워지지않을 부조로 새겨진 느낌이 들었다. 일제하의 일본유학시절 관헌의 끄나풀을 못알아본 실수로 그는 감옥에 간 적이 있다.거기서 거물급 좌익사상가인 일인 노교수와 잠깐 부딪는다.굶주린 탓에 피골이 상접한 대학생 정치범 앞에서 「김이 무럭무럭나는 빵을 3개씩이나」차입받고 앉았던 노교수는 그 빵에 시선이 못박힌채 신음하며 마주앉아 있는 젊은이를 묵살한채 혼자서 독식을 해버렸다. 그 노교수가 출옥한 뒤 「감옥까지 다녀온 경력」을 과시하며 펼쳐갔을 「사상운동」을 생각하며 시인은 인간성의 한계앞에스스로 부끄러워진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예수만이라도,인간의 자존심을 위해 예수만이라도 『있어 줘야겠다』고 말한다.그 말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시인의 고백중 관심을 끈 것은 그의 「80년도의 행적」이다.그는 이른바 5공시대에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평소에 증류수를 느끼게 하는 맑음과 순수함을 풍기던 시인의 이 느닷없는 「정치리환」은 당시의 문단을 놀래준 이변이고 당혹이었다.그래서였던지 「신세력」과의 피치못할 관계설이 소문으로 떠돌았었다.의리로도 친분으로도 거역하지 못할 「관계」때문에 거절이 허락되지 않았다는,그 소문으로 사람들은 양해를 자청한 셈이다. 그러나 TV에서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의원직」은 강압도,피치못할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60살이던 그때의 내게,이상하게도 그일은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이다.정치라는 것이 무엇하는 것인지 한번 경험해보고도 싶었고 문화예술,교육같은 분야에서 도움이 되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에도 솔깃해지더라는 것이다.그의 그 무섭도록 이기적인 정직성이 토해놓는 이 고백이,신뢰감도 주고 위안도 준다.호기심이나 솔깃함이 짓밟혀 결국은 『괜히 들어온게 아닌가』하는 회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났지만,그것 역시 정치적 역량의 문제였음을 체험한 그로서는 「한 체험의 소득」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런 그에게서는 성숙한 해답같은 것을 기대하게 한다.이제는 우리도 이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위선에 찬 궁한 답이나 일차방정식같은 우답,가짜대답들에는 염증이 났으니까. 자기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시인,그러니까 이른바 참여파의 이념시인에 대해서도 명징한 답을 그는 가지고 있다.그런 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다만 그 시인들이 「자신들것만 시다」라며 다른 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김춘수시인은 최근의 박노해시인을 생각나게 했다.「얼굴없는 노동자시인」으로 80년대의 일부를 영웅처럼 차지했던 시인이다.그는 지금 영어의 몸이다. 그가 최근 법정에 서서 「거대한 꿈의 환상에서 깨어났음」을 고백했다.1차공판때인 몇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주의」를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정정당당」을 최대의 자존심으로 삼았던 참여파 시인이다. 그런 그가 『무거운 침묵속에서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았다』고 말했다.또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했음」을,「경쟁을 통한 자기성취와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승리의 요인임」을 인정했다.그러면서 그는 「소월」과 「미당」같은 순수파 시인들의 작품을 옥중에서 읽은 소감도 피력했다.『국어를 갈고 닦은 그들의 노력을 평가한다』는 것이다.동양적 예의나 겸손의 미덕같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버릇없는 「평가」이긴 하다.거인같은 민족시인들을 국어의 갈고닦음 속에 축소시켜버리려는 듯한 맹랑함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구사한 어휘가 지닌 본래의 뜻만 살려도 시인들의 크기에 손상이 가지 않는다.다만 김춘수시인의 유감처럼 「그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것을 「그것도 기다」라고 인정한 박노해의 그 변화가 놀랍다.그 변화의 성숙성때문에 우리는 『자유와 인권,민주가 가득한 사회를 바라며 혁명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앞으로도)생겨난다』는 그의 예언도 미소로 수긍할수 있는 것이다.또한 「겨울나무처럼 잎을 떨구고 추위를 견디고 있는」박노해시인의 겨울에 연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홍수가 남긴 상처를 가슴에 품고 시인들은 진주를 키운다.김춘수,박노해들 말고도 우리시대의 고통을 품고 있는 진주조개같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우리시대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 히로뽕 일서 첫 역류/유학생등이 들여와 유흥가에 밀매

    ◎국내 단속심해 값 폭등… 대만·비산도 나돌아 서울지검 강력부(김영철부장검사 추호경검사)는 28일 일본에서 제조한 히로뽕을 국내에 몰래 들여와 유흥가에 팔아온 일본유학생 박용은씨(26·도쿄골프전문대1년)등 히로뽕밀매조직 8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또 이들로부터 히로뽕 15.8g(최종소비자가격 8천만원)과 주사기7개 저울1개등을 증거물로 압수하고 이현태씨(35·상업·전북 이리시)등 4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일본에서 제조된 히로뽕이 국내로 밀반입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씨는 지난 8월14일과 지난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인으로부터 구한 히로뽕 7g을 항공편으로 몸에 숨겨 들여와 애인 송희경씨(31·여·술집종업원)를 통해 유흥가에 팔아온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70년대부터 줄곧 한국에서 만든 히로뽕이 일본으로 밀반출 돼왔으나 지난해부터는 마약사범에 대한 강력한 단속으로 히로뽕제조가 어려워지고 가격마저 1회 투약분(0.03g)이 15만원이상으로 폭등하자 값싼 대만·필리핀산등이국내에 밀수입돼 유통되고 있다고 밝혔다. 구속된 사람은. ▲박용은 ▲이상모(31·서울 강남구 논현동 179의 5) ▲김봉현 ▲이창호(25·카페주인·서울 강남구 논현동 155의 4) ▲임헌석(27·서울 용산구 한남동 739의 19) ▲송희경 ▲김춘배(35·상업·서울 도봉구 미아동 미아아파트 14동 302호) ▲엄상근(34·부동산중개업·서울 용산구 한남동 726의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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