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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權禧老씨 귀국 이틀째

    귀국 이틀째를 맞은 권희로(權禧老·71)씨는 8일 오전 부산시 금정구 오륜동 오륜직업전문학교(옛 부산소년원)을 방문,강연하는 등 고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오후에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을 찾아가 무연고 일본인 할머니들을 위로했다. 권씨는 이날 경주현대호텔에 투숙한 뒤 9일 상경,자신을 위해 애쓴 시인 구상(具常)씨 등을 인사차 방문한다. 권씨는 이날 오전 10시20분부터 오륜직업전문학교 강당에서 학생 120여명을 상대로 45분동안 강의를 했다.강의에서 권씨는 사회에서 죄를 짓고 입교한 학생들에게 효도와 자기노력,화해 등을 강조했다. 권씨는 “어머니가 있거나 없거나,가정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어머니의 존재를 잊어선 안된다.어머니는 항상 마음속에 계시다”며 “가슴속에 늘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루빨리 사회로 돌아가 훌륭한 일을 많이 해달라”고 당부했다. 오후에는 일본에서 수감생활중 어머니를 그리며 성금을 기탁했던 경주시구정동 나자레원을 찾아 이곳에 살고있는 24명의 일본인 할머니들을 위로했다.“몸조심하라”며 할머니들의 손을 일일이 꼭 잡으며 안부를 묻는 권씨의 얼굴에는 연민의 정이 역력했다. 권씨는 또 “저에게 일본사람에 대한 미움은 없습니다.단지 민족을 차별하는 일본사람을 증오해 그들과 전쟁한 것 뿐”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부산 이기철 경주 조현석기자 chuli@
  • [오늘의 눈] 권희로 석방 韓日의 ‘온도차’

    바다 건너 일본의 느낌은 달랐다.재일동포 무기수 권희로가 석방된 7일 일본이 유난히 조용했듯. 그들 일본은 공항에서부터 TV 생중계를 하는 요란은 떨지 않았다.드라마틱한 요소가 듬뿍 담긴 그의 석방과 한국 귀국이건만 그랬다.충분히 우리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법 하건만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그가 일본땅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면 재일 한국인 사회는 어떠했을까.태극기를 흔들어 환송했을까. 권희로가 느끼는 복바치는 감동과 달리 일본 속의 한국인 대부분도 착잡한심정으로 그를 한국으로 보냈다.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감동을 느끼리라 생각한 것은 큰 오류였다. 지난 3일 일본에 부랴부랴 건너온 기자는 너무나도 가라앉은 일본을 보고적이 놀랐다.상당수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굳게 입을다물고 있었다.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재일동포 사회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삼중 스님 일행은 54만 재일 한국인들의 쌀쌀함,뜻밖의 냉랭함에 분통을 터뜨렸다.석방,귀국과 관련해어떤 공식적 대응도 하지 않기로 한 민단에 대해서도 극도의 섭섭함을 느끼는 듯 했다.“그들이 떳떳하게 기뻐하지 못하고일본사람들 눈치만 본다”고 한 스님 측근은 흥분하기도 했다.재일 한국인들이 조용한 이유는 간단하다.그들은 31년 전 사건발생 훨씬 이전부터 일본에살았고 지금도 일본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권희로의 천형같은 감옥생활 종지부에 많은 사람들이 노고를 치하하며 인간적인 동정은 보내고 있었다.그러나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민족차별에 저항한 영웅처럼 부각되는 이상열기를 못마땅하게여겼다.한 민단관계자는 “그의 석방으로 현존하는 문제들이 없어지는 것은아니다”면서 감정에 치우친,‘한풀이식’ 일회성 행사로 끝날지도 모를 국내의 과열 분위기에 동포들 대다수가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재일 한국인도 “일본사회에 뿌리내리며 살아왔고 권익과 권리신장을위해 애써온 한국인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수 있다”며 ‘고국’의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21세기에도 줄기차게 차별의 벽을 허물며 일본땅에서 살아야 하는 고단한삶을 아들딸에게 물려줘야 할 그들이기 때문이다./황성기 국제팀 차장도쿄에서 marry01@
  • 돌아온 權禧老씨 애끊는 사모곡

    “어머니,당신이 태어나신 고향에 희로가 왔습니다.이제 제곁에서 편안히쉬세요” 7일 오후 2시25분 부산시 연제구 거제1동 자비사 법당.칠순을 넘긴 권희로(權禧老)씨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 박득숙(朴得淑)씨의 유해와 영정 앞에 무릎꿇고 앉아 눈을 감은 채 파란많은 지난 세월을 용서받으려는 듯 두손을 모아 합장했다.일본땅에서 천대와 울분속에 살아온 한맺힌 70평생과 어머니에대한 아스라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가 “한국인 인종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야쿠자 두목 2명을 살해하고인질극을 벌였던 68년 그에게 흰색 한복을 건네며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느니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라”고 권할만큼 강직한 어머니였다.종신형수감생활이 시작되자 족발장사를 해가며 82년 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형무소로 아들을 찾아 옥바라지를 했던 사랑의 어머니.“아들이 석방되면 함께 깡통을 차고 빌어먹더라도 부산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조국의 품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되뇌다 끝내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지난해 11월 일본의 한 시립양로원에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기구한 운명의 어머니.“나와 희로만 국적이 한국이며 따라서 내 자식은 희로밖에 없다”고말한 한국의 어머니.부산에서 태어나 소학교도 못다닌 채 7살때부터,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결혼할 때까지 10년간 일본인 지주집에서하녀노릇을 했던 한많은 어머니.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희로씨는 정의감이강하다.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여린 마음의 효자이기도 하다. 희로씨의 비극은 그가 세살때인 지난 31년 부두노동자이던 아버지 권명술씨가 작업도중 사고로 숨지면서 시작됐다.그후로 그는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2년후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그는 의붓아버지의 구박과 폭행에 시달리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조선인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조롱과 함께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결국 13살때 집밖으로 뛰쳐나와 연탄회사와 항만 인부 등을 전전했다.배고픔을 참다못해 먹을 것을 훔치다 소년원에 들어갔다. 그후 야쿠자 살해 전까지도 강도 공갈 횡령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도합 20년간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31살때 일본인 처와 결혼했으나 8년만에 결국 실패했다. 권씨는 이제 고국에서 ‘일본사람처럼’이 아니라 한국사람으로서,소외계층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살기로 다짐하며 법당을 떠났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三中스님 회견·동포 표정

    폭탄발언 있을까 귀국하면 권씨는 어떤 말들을 쏟아낼까.그는 지난달 8월 가석방 결정 전 두차례 일본 법무당국과 “일본을 결코 비방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일본 당국도 그가 이 약속을 지키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허가해줬으나 권씨가지킬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권씨는 귀국 후 기자회견,이후 예정돼있는 강연회나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그가 부산에 정착한 뒤 집필에 들어갈 수기에서도 상세한 내용들이 새롭게 공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일동포 표정 재일 한국인들은 권씨의 석방을 반기면서도 국내 열기와는 상당히 다른 차분한 표정이다.김경득(金敬得)변호사는 ‘김의 전쟁’이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의 시각으로 계속 이 문제를 일방적으로 보는 국내언론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경계감을 나타냈다. 중앙민단측은 “이번 일에 대해 민단차원의 공식적인 대응은 하지 않기로했다”면서 “당시 탈법적인 사건형태가 일본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동포들에게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도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삼중스님 기자회견 오전 10시 도쿄시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삼중스님은 이날 새벽 후추 형무소 당국자와의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즉,▲스님측이 준비해온 방탄조끼를가져올 것 ▲권씨 어머니 유해상자를 쉽게 가슴에 안을 수 있도록 끈을 준비해줄 것 ▲기내 안전문제 점검 등을 스님측에 요구했다는 것. 스님은 또 지난달 23일 일본 법무당국자로부터 권씨의 석방사실을 통보받는 자리에서 야쿠자가 권씨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엽서내용도 공개했다.이 엽서에는 ‘亡 金嬉老之墓(김희로의 묘)’라고 쓰인 묘지가 그려져 있고 나는 예전에 네가 죽인 사람의 자식과도 같은 사람이다.네가 사내라면 그런 일을 저지른 너도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 [외언내언] 독도 침공작전?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이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를 앞세우고 ‘덴노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 萬歲)를 외치며 또다시 침공해 오는 것이 아닌가.제국주의 일본의 침탈을 경험했던 아시아 이웃나라들로서는 생각하기도끔찍한 일이지만 최근의 일본에 대해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는 솔직한 우려이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영구히 전쟁을 포기한 평화헌법 아래 일본은 전수방위(專守防衛)를 목적으로 하는 자위대를 갖고있다.내년으로 창설 50주년을 맞는 자위대의 군사력은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육·해·공으로 편성된 자위대는 병력 수만 적을뿐 조기경보기(AWACS)를 비롯하여 이지스함,최신예 전투기 등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다.해마다 우리의 4배 정도나 되는 예산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군사력의 증강과 함께 자위대의 역할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일본 영토의 방위에 국한했던 자위대는 이제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해외파병의 길을연데 이어 신 미·일(美日)가이드라인 관련법의 제정으로,비록 미국의 후방지원으로 한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사시 일본영토 바깥에서의 군사활동도가능하게 됐다.다음 단계로 유사사태가 발생했을때 자위대의 군사활동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자위대법의 개정등 유사(有事)사태 관련법안들의 정비가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자위대의 군비 확장과 군사력 강화는 지금까지 미국이 맡아왔던 아시아지역의 안보를 경제력에 맞추어 점차 일본에게 분담시켜 나간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반면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인 히노마루와 기미가요(君が代)를 일본의 국기와 국가(國歌)로 정하는등 최근 일본사회의 급속한 보수화 추세와 함께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걱정하는 소리도 높다. 그러잖아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있는 자위대가 이번에는 ‘다른 국가에점령된 동해의 어느 섬’을 탈환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져 주변국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있다.작전대상이었던 ‘동해의어느 섬’을 독도(獨島)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더욱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난해 11월 태평양상의 이오지마(硫黃島)에서실시된 이 훈련은 자위대 자체내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돼 결국 탈환작전이 아닌 양륙훈련으로 바꾸었다고는 하지만 육·해·공 자위대가 모두 동원된 훈련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강한 의혹을 씻을 수 없다.21세기를 앞두고불행했던 과거 식민지배사를 청산하기 위한 두나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원히 가깝고도 먼 나라일 수밖에 없는가.
  • [화제의 책]’…독한 조센징이야기’

    일본에서 폭발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코리언 세계로의 여행’이라는 책이 ‘일본,일본인이 두려워한 독한 조센징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일본인 논픽션 작가 노무라 스스무(野村 進)씨가 쓴 이 책은 외국에 사는 한국인 ‘탐험서’라 할 수 있다. 지난 96년 말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소위 ‘재일(在日)에 관한 것’은팔리지 않는다는 일본 출판계의 속설을 깨고 출간 1년만에 18판을 거듭하며베스트셀러가 됐다.‘오야소이치 논픽션상’과 ‘고단샤 논픽션상’ 등을 휩쓴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재일 한국인 등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강인한 삶을 르포작가의 눈으로,제3자적인 입장에서 그려내고 있다.일본 파친코왕 한창우씨,귀화한 한국계 가수 니시키노 아키라(한국명 김명식),그리고 프로축구 J리그의 숨겨진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윤태조씨 등.이들은 모두 일본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독해져 버린 한국인들이다.그는 92년 미국 LA폭동사건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재미 한인사회와 월남전 참전 한국인 병사,‘4·3사건’의 현장 제주로까지 시야를 넓혀 한국인의 원형을 추적하고 있다. “일본출판계의 폭발적인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저자는 독자편지 몇 통을 소개했다.‘일본에 이런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책을 읽기 시작한 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효고현에 사는 39세 남성). ‘오야소이치 논픽션상’의 한 심사위원은 “이 책은 코리언문제를 심층부까지 철저히 도려냈다는 점에서 종래의 코리언물(物)과 확실히 구분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일요신문사, 강혜정·정동선 옮김 7,500원 정운현기자
  • [굿모닝 새천년 패러다임을 바꾸자](4)국제적 눈높이

    ‘개방과 투명성’.한국사회는 금융위기를 겪으며 이 두 목표를 향해 채찍질을 당해왔다.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초거대 기업들이 국적을뛰어넘으며 인수·합병의 무한 경쟁을 거듭하는 21세기의 물결속에 ‘폐쇄와 불투명성’은 한국의 발목을 잡아온 주범으로 지목됐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무역규범을 모색하는 뉴라운드의 진전은 개방과투명성에 대한 압력을 높이고 있다.2000년 1월부터는 서비스와 농업 자유화가 다뤄진다.외국인도 국내에서 변호사업무를 할 수 있는 ‘전면 개방시대’에 ‘국내만의 일등’은 의미가 없다. 과거처럼 국가도 울타리가 되어 기업활동과 국내경제를 보호할 수 없다.국제수준에 미달하면 도태다.외국의 정책과 입장 등 국제동향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졌다.다자간 국제회의의 결정과 국제적 의견이 바로 국내법처럼 우리의 행동과 생활에 영향을 준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Amcham)는 올 투자·교역환경보고서에서 한국기업의계열사내 자가 제품사용 제한,퇴직금제도 폐지마저 거론하는 상황이다.“국경은 남아있지만 과거와 같은 경제주권은 사라지고 있다”고 대한상공회의소 具星鎭실장은 지적한다.“보편화된 기준과 규범을 갖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일원으로 남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자라나는 우리아이들의 경쟁 상대는 옆집 아이가 아닌 외국청소년들이다.그게 뉴라운드 시대다.국내 일류에서 국제적 경쟁력으로 눈 높이를 올려야 한다.직원 1만5,500여명이나 되는 유엔의 한국인 직원은 193명.우리 국제화의수준이다. 지난달초 캐나다서 열린 APEC관련 회의에 참석했던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의 이야기는 ‘우물안 개구리’에 머문 우리의 관료사회를 보여준다.정부대표로 참가한 공무원들이 부실한 준비에 영어로 의사소통마저 제대로 못하더란다.게다가 “회의가 재미없다”며 불참하겠다고 우겨 곤욕을 치뤘다는 것이다. 외국의 공무원사회는 기업과 학계의 전문가 영입이 자유롭게 열려있는데 한국에선 ‘외부인’은 뿌리내리지 못한다.엘리트 조직일수록 배타성은 더 심하다.특권과 안일이란 벽을 쌓으며 경쟁 무풍지대를 만든다. 한국서 10여년동안 무역업을해온 인도인 쿠마 라메쉬씨는 “‘우리’라는작은 울타리가 폐쇄적으로 작용,경쟁력과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한국인을 말한다’란 저서에서 마이클 브린은 “경제기적을 이루는데 기여한 민족주의가 국제화시대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국사회의 배타성을 경고했다.영국 ‘더 타임스’서울특파원을 지낸 그는 올초출간된 이 책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감정적이며 폐쇄적”으로 평가했다.보다 공개적인 논의와 절차의 확대가 절실하고 그를 위한 분위기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경쟁력의 원천이란 대학.서울대 교수 95%가 서울대를 나왔다.연대와 고대교수의 80%,60%도 모교 출신이다.외국에선 특정대학에서 박사를 받으면 그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교수직을 얻게 한다.동종(同種)번식,‘학문적 근친상간’을 막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한국에선 다른 대학에서 석·박사를 하면 출신 대학에서는 교수될 길이 막힌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선 국내 회계법인이 단독으로 작성한 회계감사보고서를 믿지 않는다는 현실은 극복해야할 또하나의 과제다.고대 경영대의 金益洙교수는 “외국기업인들의 한국 기업풍토에 관한 공통 불만은 원칙과 규칙이 지키지지 않고 투명성이 낮은 것”이라고 말한다. 국제적 수준의 규칙과 질서가 뿌리내리기 위해선 사회를 이루는 각 주체들의 이익추구가 국가 전체 이익과 합치되도록 조정하고 제도화시키는 선진국들의 노우하우 습득이 필수적이다. “한국은 저임금의 중국,기술력의 일본사이에서 마치 넛크래커(호두까기 기구)에 끼인 상태여서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부서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세계 경제계의 경고를 그냥 흘릴 수 만은 없다.국경붕괴의 시대,무한경쟁의 시대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이석우기자 swlee@- 밀레니엄 탐방-워킹홀리데이협회 4명의 상담원 “귀국 직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점만 보였습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지난 96년 캐나다에서 아르바이트와 어학연수를 경험했던 김은영(金銀榮·27)씨는 우리나라의 무미건조하고 각박한 생활에 불만이 많았다.그러나지금은 캐나다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마냥 부러워하지만은 않는다.캐나다의 장점과 그동안 보지 못했던 우리의 장점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고 이것을 실제로 적용시키며 생활한다고 자부한다. 김씨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한 손대용(孫大鎔·27)씨,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일을 했던 한소희(韓昭嬉·25)씨,일본에서 아르바이트와 어학 공부를 한 공경숙(孔京淑 ·25)씨와 함께 워킹홀리데이 협회에서 해외로 나가려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현지 경험과 준비 방법을 상담해 준다. 이들은 “젊은 날에 한번쯤은 해외에 나가 일할 필요가 있다”고 한목소리를 낸다.이들이 말하는 일은 물론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농장,세탁소,식료품점 등에서 보통의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육체노동이다.세계를 주도할 사고능력을 펼치러 해외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배우러 나간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손대용씨는 “농장에서 파티를 할 때 한국학생들만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며 우리의 잘못된 술문화를 꼬집었다.서구의 생활방식만이 세계적 기준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비교해 우리의 생활이 잘못됐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바로 글로벌 스텐더드를 확립하는 길이라고 손씨는 설명한다. 한소희씨가 키부츠로 떠나기 전에 주위 사람들은 만류했다.키부츠에서는 외국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여자가 생활하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이유였다.그러나 실상은 반대였다.“이스라엘의 밤거리는 한국보다 훨씬 안전했고 계약시간을 초과해 단 1분의 노동시간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씨는말한다.오히려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우리의 노동문화가 훨씬 저급한 것이다. 일본에 갔다온 공경숙씨는 일본사람들의 질서의식을 말했다.“일본도 한국처럼 출퇴근 시간에 승용차가 쏟아져 나오지만 좀처럼 정체되지 않습니다.이유는 차선과 신호를 지키기 때문이죠” 우리는 내가 먼저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 일본사람들은 내차례가 되면 간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고 한씨는 말한다. 이들은 외국의 문을 두드리려면 진취적이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남들 다 가니까 한번 시도한다는 생각보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고 기본적인 언어소통 능력은 미리 갖춰야 한다.경험자를 만나 충분한 설명을 듣고가장 저렴한 방법도 찾아야 한다.많이 준비할수록 많이 배운다. “맹목적으로 우리의 생활문화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것보다 외국에서 열린 마음으로 한국을 바라보며 새천년의 희망을 찾았으면 합니다” 한달에 100여명의 젊은이를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이들의 바람이다. 이창구기자 - 이케하라씨의‘한국인 글로벌화 3계명’ “한국이 21세기 세계 여러 나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과 경쟁하고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선 한국인의 국제화가 최우선 과제입니다” 27년간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池原衛·64)씨의 진단이다.지난해 연말 출간된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새 천년의 키워드인 ‘글로벌한 사고’를 위해 한국인이 명심해야 할 3가지 계명을 제언했다. 이케하라씨는 거창한 ‘글로벌 스탠더드’보다 생활 속의 작은 것부터 국제통용의 눈높이에 맞추는 자세를 몸에 익히는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볼 때 가장 중요한게 객관성.세계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고있는 한국인이지만 자신에게는 후한 점수를 매기는 반면 상대방은 깎아내리는 ‘주관성의 오류’를 자주 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객관성 결여는 현재의 자신을 비뚤어지게 인식하게 만들어 ‘내가 최고’라는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이는 한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회사나 지방자치단체의 집단 이기주의,국가의 이기주의로 발전하게 되고 진정한 국제화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둘째,겸손할 것.이케하라씨는 “30의 실력 밖에 없으면 30밖에 없다고 말할 것,그러나 100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뽐내지 말 것”이라고 충고했다. 글로벌화가 국제사회에서 여러 나라들과 겨뤄 인정을 받고 뻗어나가는 것이라면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즈니스 제1의 덕목이기도 한 겸손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고남에게 감사를 느끼는 마음과도 통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려는 노력.신용과신의는 글로벌한 사고의 출발점이다. 시간약속을 어기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하고 이런 변명이 통하는 사회라면 어떠한 국제화의 기준도 철저하게 들어맞을 수 없다.개인간 약속에서부터 교통법규,계약된 물건의 납기(納期),국가와 국가간 신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규칙과 법률,약속을 소중히 하는 것이야말로 글로벌한 사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게 그의 소박한 생각이다. 황성기기자
  • 日 지식인·재일동포 학자 18인 ‘국가주의를 넘어서’

    일본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국가주의 극복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그들은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배타적 국가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일본의 이러한 ‘양심의 소리’을 담고 있는 책의 저자는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46) 도쿄대 교수(문학),다카하시 데츠야(高橋哲哉·43) 도쿄대 교수(철학)를 비롯한 14명의 일본 지식인과 서경식·이연숙·이효덕·강상중 등4명의 재일동포 학자들이다.(삼인출판사 이규수 옮김 1만2,000원). 그들은 왜 지금 국가주의 극복을 외치는가.그들의 외침은 과거 침략행위의사죄를 거부하는 ‘광기의 국가주의’가 일본사회에 팽배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일본의 국가주의는 90년대 중반부터 ‘자유주의 사관’‘수정주의 역사관’ ‘건전한 네오 내셔널리즘’ 등의 현란한 수사 속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자유주의 사관 선도자들은 후지오카 노부가츠(藤岡信勝) 도쿄대 교수(역사학),사회운동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만화가인 고바야시(小林)요시노리를비롯한 보수·우익 지식인과 정치인들이다.그들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카하시 교수는 그들의 역사인식은 고바야시의 만화에 상징적으로 나타나있다고 말한다.고바야시는 ‘전쟁론’이라는 만화에서 “대동아전쟁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아름답고 잔혹한 그리고 숭고한 싸움이었다”고 말한다.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전쟁론’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며 수백만부가 팔려나가고 있다.오늘의 일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섬뜩한 지표다. 일본판 ‘네오 내셔널리스트’들은 현재 일본 교과서의 역사관을 일본인 자신을 비하하는 ‘자학(自虐)사관’이라고 비판한다.그들은 자학사관의 극복을 위한 명분으로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이름의 국가주의를 내세우고 이를 ‘새로운 역사교과서’ ‘일본 정사(正史)’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요시에 아키오(義江彰夫) 도쿄대 교수(역사)는 “일본 교과서가 자학사관으로 서술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말한다.“자유주의 사관은 과거의 잘못을 고치는 일을 ‘자학’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뿐만아니라 배외적·국수주의적 가치체계를 수립하려는 단편적이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경고한다. 자유주의 사관의 발원지는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96년 사망)의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그는 68년 4월부터 72년 8월까지 연재한 ‘언덕 위의 구름’에서 청일·러일 전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70년대 초 경제대국으로의 전환기를 살아가던 일본인들에게 긍정적인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후지오카 교수 등은 시바의 역사인식을 배경음악으로 자유주의 사관의 나팔을 불고 있다.그들의 화음이 ‘침략전쟁은 할아버지들의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일본의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자유주의 사관을 비판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그러나 그들의 경고는 ‘소리없는 아우성’일 뿐이다.일본사회는 언제나양심의 소리가 있어왔다.그러나 그들은 주류가 아니라 일본사회 변방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창순기자
  • [외국의 공무원들은] 일본/정부·민간 가교 제3섹터 활용

    일본에서 어항어촌정비사업을 연수하면서 이른바 ‘제3 섹터’라는 미묘한체제를 보게 되었다.그것은 정부와 민간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공익법인들로 전국에 2만6,000여개나 구성돼 있다. 이 법인의 성격은 사업형과 연구형,재원조성형 등 여러가지가 있다.사업형은 대개 지방자치단체가 감독한다.지방특성을 살린 특산품,관광명소,지역문화를 개발,소득향상과 지역축제를 주도한다.지역사회와 지역경제에 풍요로움과 부드러움을 창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끈 것은 연구형 법인들이다.이들은 정부와 민간 모두와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해 나가고 있다.이들은 과거 일본이 과도한 무역흑자로 구미로부터 강력한 개방압력을 받았던 시대의 산물이다.구미제국의 선진기술 및 기법을 연구하고,최신정보를 수집하는 ‘싱크 탱크’역할을 하는 한편 국민들의 바람을 반영한 세부시책을 개발하여 정부에 전달한다.정부와 민간을 부드럽게 소통시키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법인들이 수행하는 중요한역할 가운데 하나는 공무원들에게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이곳 연구소에서 직접 연구원을 관리하고,연구에 동참하는 부장들은 현역 공무원이다.그들은 이곳에서 3년 정도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의뢰한 어항어촌정비계획을 수립하고,현장을 쫓아다니며전문지식을 습득한다.또 어항어촌정비사업의 총수라 할 수 있는 어항부장,어항협회장도 이 곳의 자료실을 활용한다. 부장과 연구원의 관계는 상하가 아닌 수평관계다.연구원들도 유수한 민간기업체나,학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3년 정도의 계약으로 연구소에서 근무한다. 부장은 수산청을 수시로 찾아 정부의 뜻을 파악하고,연구원들은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주민의 뜻을 바탕으로 진지한 토론을 거쳐 결론을 도출한다.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해 중앙과 지방자치단체가 조화를 강조하고,공익법인들이 민간과 정부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고 있음으로써 일본사회는 안정되고부드럽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살다보면 공직자들의 신중함이 조금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의아심도 드는 때가 있다.그러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일본의 정치문화이고,또 그렇게 사회적 시스템이 형성된 때문인지 고민이 많아야 해결책도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추교필 해양부 서기관 도쿄 어촌기술연 파견
  • [저자와의 대화]’한국열국사 연구’출간 윤내현교수

    고조선 분열 이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정립되기전까지 한민족은 고대국가 틀을 갖춘 열국(列國)으로 나뉘어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지배했다는학설이 나왔다.이는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부족사회들이난립하고 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깨는 것으로,학계의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尹乃鉉·60)가 최근 내놓은 ‘한국열국사연구’(지식산업사·3만원)는 이러한 사실을 방대한 중국과 일본,한국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고조선 분열 이후 부터 삼국이 정립되기까지(기원전 1∼4세기)의 역사이다.이 연구는 지난 82년부터 시작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완결판인 셈이다. 윤교수는 80년대 이후 ‘한국고대사신론’‘고조선사’등을 저술,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존 학계의 통설을 깨왔다.윤교수로부터 기존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과 새로운 연구의 의미,기존 학계와의 논란가능성 등을 들어본다. ▒열국시대의 성격과 중요성은 다른 학자들은 이 시기(기원전 1세기∼4세기)를 ‘원(原)삼국시대’로 보고 있다.이는 이 때 있었던 나라들이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하지만 이미 국가의 틀을 갖춘 고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들이 국가 이전의 사회로 후퇴했다는 것은 논리가 안맞는다.고구려 백제 신라 동부여 읍루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삼한가야 등 열국은 왕이 통치하는 고대국가 틀을 갖추고 있었다.또 이들은 중국 요서지역까지 포함한 고조선 고토(古土)를 완전히 수복했고,백제는 중국 동부 해안과 왜열도 일부지역에 진출,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바로 열국시대때 한민족은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 위력을 떨친 것이다. ▒‘삼국시대’란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현재의 한국사 개설서들은 고구려 신라 백제와 동시대에 가야가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한채 ‘삼국시대’라고 부른다.정확히 말해 ‘사국시대’라야 맞고 그 이전은 ‘열국시대’라야 맞는다.가야를 뺀 ‘삼국시대’는 큰 오류다.이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일본인들은 4세기 중기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해 그 지역을지배했다고 주장한다.따라서 가야를 일본사에 넣어야 한다며 이 시기를 삼국시대로 부르고 있다.하지만 임나일본부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 망산현 지역에 설치돼 있었다. ▒서한(西漢)의 한민족 지배를 부정하는가 한국 고대사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대목이다.서한이 한사군을 한반도와 그 이북에 설치해 한민족을 수백년간 지배했다고 하지만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요서지역에 설치됐을 뿐이다. ▒자신의 연구가 객관적이라는 근거는 모든 역사는 사료가 바탕이 돼야 한다.나는 본래 중국 고대사가 전공이다.따라서 중국 사료들을 두루 섭렵할 수있었다.한민족 관련 기록이 있는 ‘후한서’‘삼국지’‘진서’‘송서’‘남제서’ 등 방대한 중국 사료 및 고고학 자료,‘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등 우리 고대사 자료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이다. ▒북한 사학자 ‘리지린’의 연구를 베꼈다는 혹평도 있다 연구 결과가 비슷하다고 베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조선 중심이 평양이 아닌 만주에 있었다는 리지린 학설은 이미 정인보·신채호선생이 주장했던 바이다.정인보·신채호 선생은 1940년대에 ‘조선사연구’‘조선상고사’등을 통해 그런 주장을 폈다.이는 내 연구의 일부에 불과하다.다른 점이 더 많다.
  • 방송통신대학 위성통신 서비스

    현대는 자기관리가 필수적인 시대다.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짬을 내기 어려운 실정이다.부담없이 간편하게 질높은 교육을 받는 방법은 없을까.방송통신대학TV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프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교육과목을 방송하는 케이블TV(채널 47)는 이달초부터 위성방송송출에 나섰다.이에 따라 전국에서 방통대 과목을 챙겨볼 수 있게 됐다.종전에는 케이블에 가입한 90만가구가 방송통신대학TV를 볼 수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개인별 위성방송 수신안테나 또는 공동주택의 공청안테나를 설치하면아무 곳에서나 위성TV를 시청할 수 있어 시청자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채널은 지역별로 다르다. 개인적으로 케이블을 보려면 수신료가 월 1만5,000원이지만 전국 850여곳에 위치한 중계유선망에 가입하면 월 3,000∼4,000원으로 값이 싸진다. 방송통신대학TV 강의는 TV와 라디오,테이프 등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TV의 경우 30분물 44강좌이며 이는 대학 280과목 중 15.8%에 해당된다.학교측은현재 강좌당 500명에서 4,000명이 듣고있다. 이젠 평생 및 고등교육 기회를 전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하루 18시간인 방송시간을 6시간씩 셋으로 쪼개 운영하고 있다.따라서 아침과 낮,저녁시간을 맘대로 골라 시청할 수 있다.강의는 인터넷(http://oun.knou.ac.kr)으로도 볼 수 있다. 대학교육과정은 학생용,관련부문 전공자 및 전문인 재교육용,교사교육용 프로그램 등으로 꾸며진다.전문인 재교육프로의 경우 수화통역사 교육과 인터넷 교육,열린교육 교사연수와 논리논술 바로세우기 등이 있고,고급 교양프로는 ‘우리시대 고전이야기’‘집중토론! 한국의 대학’‘그림으로 보는 한자이야기’‘통일을 위한 73일’등이 있다. 방통대 교육매체개발연구소 소장 곽노현교수(법학과)는 “대학수준의 고급교양과 정보를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라면서 “현재 방통대입학생 가운데 다른 대학졸업생이 10%,전문대생 졸업생이 30%에 이르는 점을 감안해 교육의 수준을 높이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3월부터 신설된 대표적인 프로는●‘21세기 국제정치·외교-주한대사에게 듣는다’(수요일 오전 10시 30분,오후 4시30분,밤 10시 30분과 일요일 오후 2시 30분)=3개월동안 13개국의 주한대사를 만나 각 나라들이 준비하고 있는 21세기의 모습과 한국관련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인터뷰한다.인터뷰어는 연세대 이정훈 교수(국제학대학원). ●‘백윤재의 생활 속 법률이야기’(월요일 오전 10시 30분,오후 4시 30분,밤 10시 30분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법률문제를주제별로 나눠 백윤재변호사에게 듣는다.진행은 김자영씨.15일 방송은 ‘보증’. ●‘현대일본사회론’(토요일 오전 6시30분,오후 1시,6시30분)=일본사회의구조와 변동과정,미래를 조명한다.성공회대 이종구교수. ●‘방송기획제작-방송제작의 현장’(목요일 오전 8시20분,오후 2시,오후 7시30분)=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 제작과정을 20편으로 담는다. 許南周 yukyung@
  • 한자-한글 병용 표기 반대

    광복 뒤 우리나라 국민의 글자살이는 큰 진전을 보여왔다.한자투성이의 글자살이에서 거의 완전한 한글전용의 글자살이로 바뀌었다.이것은 한글이 글자로서의 기능이 절대 우수한데다 광복 뒤 우리 겨레가 민족 자주정신과 민주정치를 쟁취하려는 욕망에 차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아울러 이는 세종의 한글창제 정신이기도 한데,한글은 이러한 정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자양분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한편 1948년 국회는 ‘한글전용법’을 제정하면서 공용문서는 한글로 적도록 하되,다만 당분간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단서를 붙였다.이러한 단서가 붙은 것은 당시로서는 한글로만 쓰기에 아직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 뒤 우리 민중의 한글전용 글자살이는 많이 진전되어 1970년 정부는 공용문서를 한글만으로 ‘가로쓰기’하되 표준말을 바르게 쓰도록 ‘대통령령’으로 규정하였다.이것은 역사의 진전에 발을 맞춘 매우 적절한 처사였다.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그 글자살이를 한글전용으로 굳혀온 것이다.이것은 일본이나 중국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정부에서는 이러한 한글전용의 글자살이를 뒤로 돌려 한자를 ‘병기’하겠다고 하니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역사의 나아가는 방향을 모르고서 그 진전의 도도한 흐름을 뒤에서 끌어당기려는 반역사적인 처사라고볼 수밖에 없다.너무나 심한 맹목적 글자정책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해괴망측한 일로는 도로표지판에조차 한자를 ‘병기’한다는 것이다.일본이나 중국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서란다.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다.관광객을 모셔오려면 관광상품을 잘 개발해야 하는 것이지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니 정말 유치한 발상이다.우리는 이미 도로표지판에 로마자를 병기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그런데 무엇이 모자라서다시 한자를 아울러 쓰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어찌하자는 것인가? 또 그 돈은? 동양 세 나라가 한자를 쓰기 때문이라고 자랑삼아 떠들어댄다.그러나 이 세 나라의 한자 읽는 방법이 다르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한자로 적어놓으면 중국이나 일본사람은 우리말 소리로 읽지를 않는다.그러나 지금과 같이 로마자로 적어놓으면 우리말 소리를 바로 낼 수가 있다. 21세기를 향하여 뛰겠다던 정부의 발상이 기껏 이 정도라는데 정말 실망을금할 수 없다.한자는 정보화시대의 크나큰 걸림돌임을 왜 모르는가?
  • 日오사카 초대영사 지낸 李秉昌씨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오사카(大阪) 초대영사를 지낸 李秉昌씨(84·도쿄 거주)가 평생 모은 한국도자기 등 미술품 351점과 집을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22일 기증했다. 기증품을 돈으로 환산하면 고려청자,조선 분청사기 등 한국 도자기 310점,중국 도자기 50점 등 45억엔에 집까지 등 모두 47억3,000만엔(한화 490억원상당)에 이른다. 李씨가 전재산에 가까운 이들 도자기 등을 오사카시에 기증한 것은 한국도자기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한편 60만 재일 한국인도 일본사회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영사 부임 2년뒤 사직,도쿄대학을 거쳐 도호쿠(東北)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62년부터 무역회사를 경영해왔다. “50년 동안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한국도자기를 수집해왔다”는 그는 “분신처럼,자식처럼 사랑하는 도자기들을 어디에 어떻게 두는게 우리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인가를 고민하다 오사카시 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은 한국 도자기 800여점으로 ‘아타카(安宅)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李씨의 기증품을 더해 상설전시하는 한편 3월17일부터한달간 ‘이병창 컬렉션’특별전을 열 계획이다.marry01@
  • 인터뷰-정년퇴임 앞두고 2권의 저서 출간 강만길교수

    姜萬吉 고려대교수(65)가 다음달 정년퇴임을 앞두고 2권의 책을 내놓는다.고려인 강제이주 길을 답사한 후 쓴 역사기행 ‘회상의 열차를 타고’(한길사)가 먼저 나왔고 20세기를 자신의 역사관으로 정리한 책 ‘20세기 우리 역사’(창작과 비평사)는 23일 나온다.진보적 사학자로 평가되는 姜교수는 우리의 20세기를 한마디로 ‘비극의 세기’라고 정의한다.18일 그의 호를 따최근 문을 연 서재 여사서실(黎史書室)에서 그를 만났다.▒새로 낸 책에 대하여. ‘회상열차를 타고’는 지난 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타슈켄트까지 2만km에 이르는 고려인의 강제이주 경로를 따라가며 고려인들의 실상과 과거,그들의 항일 민족해방투쟁의 실체를 더듬어 본 역사현장의 기록이다. ‘20세기 우리 역사’는 97년 초부터 1년동안 유니텔의 ‘가상대학’에 올린 강의내용을 보완한 것이다.강의내용이라 경어체를 썼으며 단순히 실증적역사적 사실 뿐만아니라 나의 역사관에 따른 주관적 역사해석과 가정·전망도 했다.일제 식민통치부터 독립운동,분단과 6·25,독재와 민주화투쟁등 김영삼 정부까지를 26개 주제로 나누어 서술했다.▒우리의 20세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비극’이라는 단어로 상징할수 있다.우리의 20세기는 비극의 역사였다.20세기 전반기는 일제식민지의 시대였고 후반기는 분단의 시대였다.분단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불행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우리는 식민지기간동안 민족자결과 역사창조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국내외에 선전된 일 등 역사왜곡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특히 근대적 국가경영 경험에서 철저히 배제됐다.서양이 크게 발전한 20세기 전반에 우리는 스스로 선거 한번 해보지 못해 민주주의 경험을 전혀 할 수 없는 비참하고 억울한 시대를 살았다.▒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역사공부는 지식을 축적해 가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역사를 영위해 가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인간의 역사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고루 풍요롭고 더 평등해 지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그러한 바람직한 역사관으로 보면 朴正熙 전대통령의 경제개발론도 재평가돼야한다. 朴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를,사회적으로는 많은 갈등과 대립을,문화적으로는 군사문화라는 말이 당대를 지배할 만큼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경제적으로도 부의 편중을 가져왔다.경제성장은 사실 집권층 몇 사람의 능력이나 지도에 의해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21세기 전망은. 비극의 세기였던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는 희망의 세기로 만들어야 한다.우리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다.통일은 7천만 우리민족만의 통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한반도 통일은 동북아 평화질서의 중요한 축이다.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어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중요한 주체세력이 돼야 한다.주변 국가가 한반도통일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제국주의적 사고라 할수 있다.
  • 친일의 군상:19/을사5적 李根澤 일가(정직한 역사 되찾기)

    ◎代이어 日帝에 충성한 을사 5적 집안/한때 친러파… 大勢 기울자 日에 영합/을사조약 체결 앞장 공로로 요직 역임/충주로 피신한 명성왕후에 생선 잡아바치며 환심 사/왕후 死後 고종에 접근 경찰·군부 실력자 부상/을사조약 체결 과정 자랑 곁들여 설명/부엌서 듣고있던 하녀 식칼내던지며 “흉적” 호통 반민특위가 해산을 1개월 정도 앞둔 49년 7월 하순 어느날.당시 공주중학교 현직교사 한명이 반민특위로 붙잡혀 왔다.이름은 李元九,나이는 37세,죄명은 반민법 제4조 2항 위반.그는 부친 李昌薰이 일제로부터 받은 자작(子爵)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조사결과 그의 부친 이창훈은 해방후인 1947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따라서 그가 일제때 부친의 작위를 습작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벌써 50년도 넘은 이야기다. 지난 가을 ‘공주갑부 金甲淳’ 취재차 공주를 방문한 기자는 우연히 공주에서 이들 부자(父子)를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창훈의 부친을 비롯해 이 집안 4대를 한꺼번에 만났다.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손이 제법 잘 단장한 자리에 차례대로 모두 누워 있었다. 그러면 이 집안의 ‘자작 벼슬’은 원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창훈인가? 그의 부친인가? 그의 부친이다.‘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이 바로 이창훈의 부친이자 자작의 주인공이다.부자가 자작을 지낸 이 집안의 친일내력을 더듬어 보자. 李根澤(1865∼1919)은 원래 충북 충주사람으로 집안은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본관은 전주(全州).이근택이 출세 줄을 잡은 계기는 좀 특이하다.그가 아직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민비(명성왕후)는 고향인 충주로 피난을 갔다.마침 이근택은 민비의 친정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 민비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쳤다.당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민비로서는 이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환궁후 민비는 이듬해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남행선전관’에 임명하였다.1884년 무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10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중앙무대 진출을 모색하였다. ○명성왕후 유품 우연히 얻어 이근택이 대한제국기에 중앙무대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고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한번은 그가 우연히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비단으로 만든 띠(帶) 하나를 발견하였다.화려한 수를 놓아 만든 것이 첫 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데 군데군데 검붉은 흔적은 핏자국이 완연했다.순간 그는 이 허리띠가 민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거금 6만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바쳤다.고종과 태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듯이 반가워 했다.이 일로 그는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였고 날로 벼슬은 높아졌다.대한제국기에 그는 경무사·경위원 총관·헌병사령관·원수부 검사국장 등을 지내면서 경찰·군사부분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행세했다. 한편 대한제국 초창기 이근택은 친러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우선 출세의 은인인 민비를 일본사람들이 시해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또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본 까닭도 있었다.조선내에 친일세력부식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 친러파 대신들을 매수·회유키로 방침을 세웠다.여기에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李址鎔이었다.그는 단돈 1만원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매수돼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하야시에게 보고하는 첩자노릇을 했다.일제는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은 李容翊을 일본으로 납치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산이 보이자 한국내에서 그들의 기세는 갈수록 당당해졌다.정부대신들 가운데서도 일본쪽으로 기우는 자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이근택 역시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일본세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그는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감을 잡고 이를 틈타 또다른 출세를 계획하였다.당초 친러파였던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밀비로 30만원을 받고 그 댓가로 궁중의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1905년 9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는 군부대신직에 올랐다.이무렵 그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을 받았다. ○잠자다 자객에 피습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순간 부엌에서 식칼(饌刀)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호통을 쳤다.“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하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계집종이 집을 나가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5일자·제86호). 일개 계집종이 이러했을 진대 민중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조약체결 이듬해 2월 그는 취침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자상(刺傷)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거의 회를 쳐놓다시피 한 그를 한성병원에서 한 달만에 살려낸 것이다.그를 치료한 주치의는 나중에 2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번 친일로 들어선 그의 친일행각은 1910년 ‘한일병합’때까지 지속됐다. 병합후 일본정부는 공로자들에게 공적에 따라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공채(公債)로 주었다.이근택은 같은 을사오적인 權重顯·朴齊純 등과 함께 훈1등 자작(子爵,4등급)과 매국공채 5만을 받았다.병합후 그해 10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그의 작위는 장남 李昌薰이 이듬해 2월 20일 습작(襲爵),해방때까지 유지하였다.그 역시 일제하 몇몇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말하자면 대(代)를 이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셈이다. ◎’3형제 매국노’/李根澔­李根澤·李根湘/日帝시대 통틀어 최초/죽은뒤 자식이 작위 습작 이근택은 형 李根澔와 동생 李根湘 등 3형제가 ‘한일합병’후작위를 받았다.이근택은 자작,형과 아우는 각각 남작을 받았다.일제시대를 통털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 집안이 유일하다.또 이들의 사후 작위는 모두 자식들이 습작하였다. 이 집안의 ‘스타’는 단연 이근택이다.이근택이 출세길에 들어서자 형제들이 뒤이어 벼슬길에 올랐다.1892년 진사에 급제한 동생 이근상은 군부 주사를 거쳐 1906년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다시 시종원경과 구한국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일병합’때 훈2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일제하에서는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다.1920년 1월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李長薰이 그해 5월 10일자로 습작하였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무사,충청·전라·경기 감사,교육참모장,법부대신을 역임하고는 1906년 시종무관장을 지냈다.병합때 훈1등 남작을 받았다.그의 작위는 아들 李東薰이 습작하였다.습작자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 귀족이 6명이나 나온 셈이다. ‘조선귀족열전’을 편찬한 오무라(大村友之丞)는 이들을 두고 “3형제가 모두 왜목림(倭木林) 가운데 3회(會)로서 대신에 올라 일문의 성망을 현양하고 권세를 장악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그러나 당시 세인들은 나머지 두 형제를 포함해 이 집안 5형제를 ‘5귀(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日 할머니 정신대 사죄/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한 일본 할머니가 여성을 성의 노예로 삼은 일제의 만행을 사죄하는 편지와 함께 500만엔의 돈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보내왔다 한다.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와 국가배상을 한사코 거부하는 일본 정부나 망언을 일삼는 관료들과는 달리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미키하라라는 성(姓)만 밝힌 이 75세의 할머니는 17세때 일제의 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91년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면서 “만행을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일본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작은 성의지만 진실을 되찾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고 편지에 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처음으로 용기있게 밝혀 위안부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지난해 작고한 분이다.일본을 방문해 “나를 17세때로 돌아가게 해주오.당신네 일본사람들이 나의 청춘을 망쳐놓았소”라고 절규했다. 미키하라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또래인 김학순할머니의 절규에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했던 것 같다.일본 전통시 단가를 짓는 시인으로서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 위안부할머니의 고통을 함께 느꼈을 법도 하다.김학순 할머니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두 할머니가 손을 맞잡고 사죄를 청하고 용서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베에 살고 있는 미키하라 할머니는 “좀더 빨리 돈을 보내고 싶었지만 몇년전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돈 모으는게 늦어졌다”고 말해 더욱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할머니처럼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많다.일본의 대표적 출판사인 이와나미 서점 사장으로 지난 1월 별세한 야스에 료스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배상을 촉구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도쓰카 에쓰로 변호사는 지난 92년 유엔 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처음으로 호소한 일본인으로 그의 열성적인 유엔 활동에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지난 96년 ‘올해의 여성상’을 수여하기도 했다.그밖에도 일본 대사관 앞의 수요정신대 시위에 참석한 일본여성,정신대 기념관건립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일본인,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낸 일본인 사진작가,일제의 정신대 만행을 참회하며 성금을 거두어 전달한 일본인 개신교 신자와 목회자들도 있다.망언을 일삼아 이웃 국가들의 묵은 상처를 덧내는 일본 정치가들이 이들의 도덕성을 배운다면 21세기의 한·일 관계는 진정한 선린우호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下)

    ◎臨政 선열의 애국혼 생생/54년만에 다시 찾은 그 건물 앞에 태극기 게양/金九 주석·李靑天 장군의 격려 눈에 선한데…/광복군 제1지대 거점 공사장 흙더미로 변해 “동해물과 백두산이…”.충칭(重慶)시 중심 치싱깡(七星崗) 린엔화츠(蓮花池)38호.‘대한민국 중경임시정부’청사앞이 애국가로 가득했다. 베이징(北京)을 떠나 쉬저우(西州),푸양(阜陽),시안(西安)을 거쳐 충칭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 9명이 청사앞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뒤 눈물을 글썽이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베이징 출발 9일만인 10월15일이었다. 54년전 대륙을 가로질러 73일만에 도착했던 임시정부.이들을 포함한 25명의 광복군은 44년 11월21일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에 도착했었다.출발지는 광복군 간부훈련(韓光班)을 마친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일본군 점령지역도 지나야 하는 목숨건 장정(長征)이었다. “청사앞에서 아무말없이 한사람씩 손 잡아주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金九 주석,장하다며 호기롭게 격려해 주시던 李靑天 장군 등이 지금이라도 불쑥 나오실것 같은데…” “정문에 들어서 바로 오른쪽 건물인 2호동 2층에 趙素昻 외무부장 집무실,그 위의 3호동에 申翼熙 선생 집무실,그리고 그 위는 내 방…”.44년말부터 해방전까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 이곳서 지냈던 尹慶彬 회장과 金九 주석 비서장출신의 鮮于鎭씨의 눈이 빛났다. 당시 충칭은 일본과 항전하던 중국의 임시수도.미국,영국 등 세계주요국 대사관,영사관이 집결돼 있었다.일본 명문대출신의 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중국정부와 제3국 외교관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 지식층조차 한국인은 식민통치에 동화돼 일본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점에서 우리들의 탈출과 광복군 합류는 한반도내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나마 일본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연합국에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임시정부와 합류한뒤 고 張俊河 선생과 金柔吉 부회장 등 일부는 시안(西安)으로 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훈련을 준비한다. 시 남쪽에 위치한 파난취(巴南區) 투치아오(土橋).일행들이 신치춘(新柒村) 1­49호 허름한 가옥에 도착하자 집 주인 저우한장(周漢江·72)씨가 환한 얼굴로 노 독립군들을 맞았다.임시정부 요인들과 閔弼鎬 선생(임시정부 외무차장)부인 등 독립군 가족 20여가구가 집단 거주하던 곳이다.임시정부가 환국하면서 조우씨 등에게 집을 물려주고 갔었단다. 시 서북쪽의 라오허커우(老河口).일행들은 ‘광복군 제1지대’ 거점지를 찾았다.창장(長江)부근에 있는 옛터는 다리건설 공사로 파헤쳐인 흙더미만이 쌓여있었다.“1지대는 좌익계열인사들이 주도했지만 金九선생은 이들까지도 하나로 묶어 대일항전의 공동전선을 형성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일행들은 10월16일 베이징출발 10일만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45년 11월 金九 선생이 귀국길에 상하이를 드르셨을때 수천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연설하셨다는 훙커우공원(虹口공원·현 魯迅공원)의 옛 장소는 숲이 돼 있었다. 노 독립군들은 지난4월 공원안에 새로 세워진 尹奉吉 의사 의거 표석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11일간의짧고도 긴 장정을 마쳤다.“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27년동안 항저우(杭州) 등 9곳을 옮겨다니며 선열들의 피와 땀위에서 비바람을 견뎌냈는데…”.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안에서도 선배 독립군들과 지난 50여년전의 기억은 마지막 광복군들의 눈시울과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 대원들 상근/발족 당시 周恩來·孫文 아들 참석 축하 충칭시 중심가에 남아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옛 건물과 터가 도심 재개발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충칭의 명동,민족로(民族路)부근의 쩌우룽로(鄒容路) 37·38번지.웨이원(味苑)이란 국영음식점과 광고회사 등이 들어있는 낡은 3층건물이 42년 9월부터 45년8월까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대지 270여평.李靑天 총사령관 등 20여명의 대원들이 상근했고 중국의 고위 장성들과 미군 OSS(전략사무국)관계자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현재 건물자체가 낡아 철거는 불가피한 상태. 柳在沂 주중대사관 문화관은 “현 위치에 50평정도의 땅을 확보,광복군들의 활동을 기리는 표지석과 건물 모형 설치 방안을 충칭시와 협의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당시 광복군의 활동은 국제적인 주목거리.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충칭서 발족될때 중국의 초대총리 저우은라이(周恩來),중국공산당 창시자중 한사람인 동삐우(董必武),쑨원(孫文)의 아들 순커(孫科) ,대군벌 바이쭝시(白崇禧)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참석,축하하기도 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관리 소홀… 복원 3년만에 곳곳 퇴락/金九 주석 집무실 벽·창문·마루 등 파손/밀랍인물 전시사업 등으로 관람객 끌어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곳곳이 관리소홀로 퇴락해가고 있다. 복원 3년여만에 일부 마루 바닥이 내려앉거나 칠이 떨어지고 창문이 부서져 나가는 등 보수가 아쉽다.5동의 건물가운데 전시실인 1호동과 의정원 건물인 2호동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전반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金九 주석의 집무실 벽마저 습기로 칠이 떨어져 보기 흉한 상태.5호동의 외빈 접대실은 마루바닥이 부서져 있다.3·4호동 계단 곳곳과 창문도 부서진 채 있다. 청사관리를 맡고있는 펑카이원(彭開文) 부관장은 예산부족으로 보수·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지난 한해동안 중국인 200명을 포함,관람객이 800명에 불과,입장료 수입이 적은 것도 예산부족 이유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올 관람객은 10월중순까지 180명.현장에 온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은 “보수뿐아니라 독립기념관처럼 당시 인물들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등 다채롭게 꾸며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고 생동감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日軍 탈출 한국 청년 25명 臨政과 합류/中 언론들 “한국의 미래와 희망 보았다” 평가 50여년전 충칭의 주요 언론에게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韓光班 출신 한국청년 25명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충칭도착 4개월이 지나도록 관련 기사는 끊이지 않았다.45년 2월 4일자 충칭의 유력지 따궁바오(大公報).“한국은 망하지 않았다.한일합방이후 성장한,일본 동화(同化)교육을 받고 일본서 유학한 한국청년들의 항일사상과 민족관념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었다.한국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고 보도했다. 이틀뒤인 6일에도 따궁바오는 ‘탈출 한국청년을 환영한다’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중문화협회에서 한국청년들의 환영회를 열어주었다고 보도했다.협회관계자뿐아니라 20여명의 내외기자들이 참석했다는 보도 내용은 당시 관심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중국의 三民主義靑年團,全國慰勞總會 등 사회단체들의 환영회와 중국군의 천청(陳誠)대장 등 주요인사들의 행사 참가소식도 중양르바오(中央日報) 등은 보도했다.언론의 대서특필은 당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환영을 보여주는 한 편린이었다.
  • 해방후 첫 사형수 시인 兪鎭五(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

    ◎詩 낭독 탁월한 분단시대 최고 저항시인/중학생때 일본아이 자주 때려 형사 등살에 渡日/1946년 ‘국제청년데이’ 축시 낭독 10만 군중 갈채/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활약중 압송돼 사형 언도/‘아내와 월북했다’ 가설 바로잡는일 ‘국민의 몫’ 변혁기 문학은 사회와 역사 발전의 거울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해방의 공간에서 또 독재와 민주화의 공간에서 우리 문학이 줄곧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느냐에는 많은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다.그 가운데 새로운 세기는 다가오고 이제 우리 문학의 새좌표 설정이 요구되고 있다.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 문학에 새겨져온 숱한 갈등과 번뇌의 흔적들을 문학평론가 任軒永 교수를 통해 재조명한다.주1회씩 연재될 任교수의 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비사들이 많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 시인이,“아아,사랑은/가고 돌아오지 않네!… 허공으로 사라졌네”라고 애절하게 노래하던 한 시인이 총탄의 이슬로 사라졌다.때는 1936년 8월19일,무대는 스페인 그라나다 근교 어느 과수원이었다. ○‘한국판 로르카’ 시인 투사 ‘1927세대의 샛별’이란 별명을 가진 민요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중 38세의 젊음을 피살로 마감했다.이 비참한 최후는 그의 시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일약 세계적인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노도 같았던,광풍 같았던,홍역 같았던 우리의 해방 공간과 분단의 틈새에는 ‘한국판 로르카’가 없었을까.독특하고도 마력을 지닌 시 낭독으로 청중을 열광시켰다는 그 로르카에 못지 않게 10만 참석자들을 뜨겁게 달궜던 한 시인이 있었다.바로 유진오(兪鎭五)였다. 활동으로 본다면 유진오가 ‘한국의 로르카’가 아니라 로르카가 도리어 ‘스페인의 유진오’가 됨직할 만큼 28세에 문학적 생명을 총살당한 이 시인은 세계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투사였다.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문학사는 분단의 장막에 가려졌던 문학인과 문학적 사건들을 21세기적 가치관으로 재조명할 처지에 있다 바로 그 첫 대상이 1950년 6월29일 긴급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분단시대 최고의 저항시인 유진오이다. 이 시인의 생애에 대한 연구자료는 문학사가 정영진의 ‘육탄시인 유진오의 비극’(저서 [통한의 실종문인] 게재)과 작가 강준식의 중편소설 ‘어둠을 찾아서’(문학사상 1990.3)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어딘지 조차도 미궁에 있었는데,이 두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유진오는 서울사람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아버지 유치구(兪致九)와 어머니 양만선행(梁萬善行·전주 출신)의 4남중 막내로 논산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노량진에서 서울시내 전체를 공급지로할 규모의 지물포 도매점을 경영했었는데 사업차 잠시 논산에 가있을 때 유진오가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넉넉한 집안으로 맏형은 검사,둘째는 외교관,셋째는 일본에 귀화,그리고 막내가 시인인데,그는 겉보기에는 얌전했으나 중동중학 시절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으며 특히 기타를 잘 쳐 부민관의 어떤 음악회에 찬조출연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업가 집안의 서울사람 큰 키에 좋은 체격이었던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일본사람들을 너무나 증오하여 일본아이들을 때리다가 경찰서에들락날락 했었다고 전한다.이런 행동 때문에 계속 고등계형사의 시달림으로 국내에서의 진학이 어려워 1941년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에 입학했으나 역시 형사의 등살에 못이겨 메이지(明治)로 옮겼지만 여전해 일본의 저명한 국수주의자가 만든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 들어가 동양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 말엽 징병기피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직전에 밀입국했다.1945년 9월 그는 오장환의 추천으로 등단,당시 패기있는 젊은 시인들(金光現 金尙勳 李秉哲 朴山雲 兪鎭五)과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10)을 내 화제를 일으켰다. 1946년 9월1일,국제청년데이(International youth day) 기념행사가 훈련원 (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1915년 10월3일에 제1회 대회를 가진 국제청년데이란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세계적 조직으로 이듬해부터는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 이후 9월1일로 바꿔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해방후 처음 열린 이 청년축제에 10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날 식전에서는 평론가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는 등 이미 파란이 예상되었는데,시인 유진오는 축시낭독을 위해 특별초청을 받았다.문장 한토막씩을 띄어가며 격정적으로 특유의 몸짓을 해가며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이미 명성이 나있던 유진오로서는 가장 많은 독자 앞에 서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친일파를 ‘망령영감’ 야유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은/누구를 위한 붉은 마음이냐?”고 서두를 꺼낸 유시인은 “왜놈의 씨를 받아/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머리를 숙여/생명과 재산과 명예의/적선을 빌고 있다/누구를 위한/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고 포효하면서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삼천오백만불의 빚을 걸머지고”있다면서 미군정을 정면으로 매도함과 동시에 보수세력(친일파)을 “망령한 영감님”이라 야유하면서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의 시낭독 기교가 탁월하다는 말은 곧 미군정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여,행사 이틀뒤인 9월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분단문학사의 첫 필화사건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이 낭송의 투사시인에게 문학가동맹측은 ‘인민의 계관시인’이란 찬사를 보내면서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10월 군사재판에서 이 시인은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석방(1947.5)되었다. 문학가동맹의 문화공작대 제1대 소속으로 경남지방을 순회(47.7)하고 돌아온 이듬해 그는 행운의 해를 맞는다.시집 ‘창’(정음사,48.1)을 낸데 이어 5월,창경국민교 여교사 김금남(金今男)과 결혼,1년 뒤 딸(香濬)을 얻는다.겉보기로는 이 시인에게 가장 행복했던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는 조직으로부터 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파견 지령을 받고 입산(49.2.28), 여순병란(麗順兵亂)사건의 주모자 김지회(金智會)부대에 합세하나 ‘싸우다 쓰러진 용사’란 시를 낭독하는 등 한달간 머물다가 하산명령으로 내려오던 중 남원지역 민보단(民保團)에 피체(49.3.29)돼 서울로 압송,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49.9.30)를 받는다. 집안 어른이 앞장서 안재홍 신익희 등 정계 거물들의 탄원 서명과,시인과 이름은 같으나 전혀 다른 유명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를 동원하여 무기감형(49.11.7)에 성공,서대문교도소에 복역 중 그는 운명적인 전주로 이감된다(50.3).그 석달 뒤 일어난 6·25는 서울의 모든 죄수들이 석방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전 이남지역 교도소 수감자들 중 특수한 사람들은 ‘긴급처형’ 되었는데,유진오는 6월29일 새벽 3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아,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고 싶다.살아서 내 생존의 확인인 시를 쓰고싶은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사시나무 떨리듯 엄습해 오는 이 공포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고 싶으냐? 어째서 밤이면 두고 온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냐?” ○신익희 등 거물 탄원 서명 논픽션에 가까운 강준식의 소설 ‘어둠을 찾아서’에서 인용한 유진오의 옥중수기중 한 부분이다.이렇게 해서 한 시인,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던 한 시인은 사라졌고,분단체제는 그의 모든 미학과 사랑까지 불온시해 버렸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평론가 오성호의 노력으로 ‘창’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음을 덧붙인다.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겠다”던 이 시인의 불온성은 해방공간의 홍역이었을 따름이지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로 전이될 성질은 아니다.지금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여기까지가 문학평론가의 몫이다.왜냐 하면 아직도 유진오의 이야기는 끝이 안났기 때문이다. 그와 약간의 인척관계에 얽혀있는 작가 강준식의 소설에 따르면 유진오는 처형의 순간을 교묘히 넘겨 살아남아 어린 딸을 형수에게 맡기고 아내와 월북했을 수도 있다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이쯤되면 대체 비평가의 글이란게 하잘 것 없는 거짓부렁이일 수도 있음을 통감한다.누가 문학사를 바로 잡을수 있는가.국민과 정부와 연구자 모두의 협력이 절실하다면 과장일까.
  • 日 진보지식인 가토 노리히오 평론집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일본의 자기기만 어디서 나오나/전후 일본인의 이중심리구조 분석/韓·中 등 피해당사국 수렴여부 관심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은 70년대 폴란드의 유태인묘지에서 2차대전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고려된 것이지만 그는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렸다. 일본은 얼마전 김대중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식민지 지배의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했다. 그러나 앞으로 일본에서 이를 뒤집는 발언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상이 2차대전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고 각료가 식민지배는 한국근대화에 기여했다며 이를 부인하고 사임하는 ‘비틀림’의 나라 일본. 이러한 자기기만과 모순,이중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전후 일본의 이중심리구조를 분석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가토 노리히오의 평론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서은혜 옮김)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이 책의 중심내용이 된 그의 ‘패전후론’(敗戰後論)은 독특한 관점으로 인해 일본 내부에서격론을 불러 일으켰던 평론. 가토는 사죄를 하고 이를 부정하는 실언이 계속되는 것은 역사를 이어받을 주체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후 일본은 패전을 둘러싸고 전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전쟁 및 무력사용을 포기한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진보론자와 대동아 공영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보수론자로 양분된다. 전자와 후자는 별개가 아니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한쌍이다. 부정한 과거로부터의 새출발은 단절이 아니라 부정한 과거를 끌어안고 시작돼야 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과거를 감싸안는 대신 과거를 잘라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패전을 종전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이를 엿볼수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지킬박사의 사과는 튼실하지 못하다. 반쪽(진보­호헌)이 머리를 숙여도 또다른 반쪽(보수­개헌)이 이를 부정하는 절반의 사과가 된다. 이러한 인격분열을 역사의 문제로 치환시키면 세계사,일본사 어느 쪽에도 의심을 품지 않고 한쪽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존재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이 해야할 일은 세계사와 일본사 양쪽 모두와 자신을 관련짓고 그 양자와의 관계 속에서 양쪽을 한줄에 꿰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세계사 속에 자리잡으며 또한 자국사 속에서도 자리매김될 만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세계사와 자국사의 틈새를 살아내는 것,이것이 바로 역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중구조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시각이 한국,중국 등 피해당사국들에게도 받아 들여질지는 의문이다. 일본인의 심리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진솔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 金 대통령 關西 주요단체 주최 만찬연설 요약

    ◎“한국,투자대상으로 큰 매력” 일본인들 마음의 고향이자 일본문화와 미래기술 개발의 산실인 관서지역을 방문하게 되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정경유착과 관치금융,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금융,기업,노동과 공공부문에 걸쳐 전면적이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나는 변화하고 있는 우리 한국이 투자대상으로서 관서 경제계에 큰 매력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일본 기업인들이 적지 않은 의구심을 갖고 있는 노동분야에서도 노사정위원회의 활동으로 이제 새로운 노사관행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여러분이 한국에 투자를 주저하는 일이 없도록 협력적 노사관계 정착과 노동의 유연성 실현에 최대한 노력할 것입니다. 한국경제가 갖춘 기반기술과 근로자의 근면성,우수한 인적자원,양호한 내수시장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근검절약,상호부조,자기희생과 겸양 등 두 나라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덕목들은 우리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이제 한·일 양국이 21세기 정보화시대와 문화시대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때 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한국에 있어서도 일본문화에 대한 개방된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오사카를 포함한 이 지역에는 재일 한국인 30여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땅에 정착하게 된 한국인들이 일본사회에 보다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일본정부가 지방참정권 획득 및 지방공무원 채용시의 국적조항 철폐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기를 당부합니다. 이와 관련해 오사카의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국적조항을 철폐하고 공무원 채용에 문호를 개방한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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