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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아, 우리가 즐겨써 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 조차도 큐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지난 10일. 일본 시마네현의회 총무위원회가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안을 가결시켰다. 대통령과 한국 외무부가 아무리 ‘내 마누라론’을 주장하고, 침묵으로 묵살하고, 소극으로 일관해도 일은 끝내 벌어진 것이다. 사실 흥분할 것도 없다. 사태는 예정된 수순을 따랐을 뿐이므로. 주한 일본대사의 당당한 영유권 주장, 아사히신문 경비행기의 독도 진입작전, 게다가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한 국내 극우인사들의 맞불작전까지, 돌이켜 보면 우연은 하나도 없다. 영토분쟁을 표면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가기 위한 일본 지도부의 야욕이 마각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19세기 에도막부, 홋카이도 식민화 ‘다케시마’ 주장은 망언이 아니며, 망언은 실제로 없으니 망언이란 말을 써서도 안된다. 체계적이며, 장기지속적인 심대한 해양정책에서 비롯된 국가의지의 또다른 표현일 뿐 결코 돌출발언은 아니다. 일본의 노골적인 행태는 가히 고삐 풀린 망아지 수준이되, 관·민 합동으로 질서정연하게 치고 빠지면서 주연·조연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등 화려한 연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시네마현의 조례 제정을 일본 정부가 만류했다고 하나 전혀 믿을 게 못된다. 양동작전일 뿐이다.‘식민지근대화론’의 미몽에 취해 선전·선동을 일삼던 지식인들을 비롯, 차제에 지난 수백년간 일본이 아시아 바다에 남긴 족적을 단계적으로 살펴 감고계금(鑑古戒今)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19세기에 에도(江戶) 막부는 ‘숲속의 사람들’ 아이누족의 영토였던 북해도, 즉 홋카이도를 식민화한다. 일단의 식민경영 세력이 ‘숲의 섬’을 치고 들어갔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 보호구역에 갇힌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아이누들은 박제화되어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2만여명의 혼혈아로 잔존할 따름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에 이어 사할린으로 손길을 뻗친다.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반환문제로 시끌벅적하지만, 사실 러시아도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없는 나라다. 차르 시절,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동진을 거듭해 사하·축치·에벤키·캄챠달 등이 살던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들 아닌가. 일본은 이어 남쪽의 류쿠(우리측 사료에는 유구로 기록됨)를 병합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붙인 이름이고 본래는 류쿠국이었다. 독립 왕국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과도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며 조공·중계무역에 힘써 문화가 크게 번성한 나라였다. 무역선 활동 범주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등 서남아시아까지 뻗친 해상국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 성립 6년째 되던 1609년 규슈 남부의 번주인 사쓰마한(薩摩藩)은 3000군사로 류쿠를 점령한다. 단, 정략적 입장을 취해 국제무역에서 엄청난 차익을 남기는 사탕수수 같은 경제적 수탈은 감행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수준에서 방관·조절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류쿠는 일면 일본에 수탈당하면서도 중국에 조공의 예를 갖추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다. 사실 사스마한의 점령 이전에도 류쿠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 왔으니, 류쿠와 일본의 악연은 해묵은 것이다. 그러던 일본은 1879년 드디어 ‘류쿠 처분’을 단행한다. 이로써 독립왕국 류쿠는 오키나와현으로 강등되어 일본에 병합된 이래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일본의 해양식민화 정책은 전략적 포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집요하게 기다리며 정확히 잡아먹을 시기를 노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日정부, 남양군도 침략행위 전면 부정 1874년 청·일전쟁의 전후 보상으로 타이완을 챙긴 것은 교과서에 나온 상식.‘대륙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긴 셈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길 자격이 있는지도 되물어야 한다. 타이완에는 푸젠(福建) 등 남부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도 많았지만 이른바 타이완 원주민인 토착 타이완족이 살고 있었다. 일본의 타이완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들의 운명 역시 아이누처럼 박제화되고 만다. 타이완총독부에서 갈고 닦은 식민경영의 노하우가 이후 고스란히 조선총독부로 전수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해양식민화가 홋카이도, 사할린, 류쿠, 타이완 같은 섬 정도에 그친 것은 아니다.1919년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본은 사이판, 괌 등이 속한 이른바 남양군도를 자치령으로 분배받는다. 세계열강의 태평양 분할정책에서 그 지분을 챙긴 것. 남양군도는 서태평양 적도 이북의 작은 섬인 미크로네시아의 동쪽 끝 카리바시와 서쪽의 괌을 제외한 엄청나게 드넓은 바다.19세기말 이래로 독일이 지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령이 되었고,1947∼1986년에는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은 미국의 태평양 신탁통치제도가 되었으니, 태평양은 태평과는 무관한 격동의 바다였다. 일본인들은 남양군도로 들어가 설탕, 술, 수산가공품 같은 사업을 펼쳤으며 한때 사이판의 일본인이 10만을 헤아리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패전 후 최초로 오는 6월 극우인사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대동하고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전몰자들을 추모할 계획이다. 남양군도에 대한 침략행위의 전면 부정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일왕이 선 격이다. 당연히 대표적 극우언론인 산케이는 일왕의 사이판 방문 소식에 ‘감격해 하며’ 이를 전면에 도배하는 충성을 과시했다.‘위령의 여행’으로 묘사하면서 ‘남양군도’를 지배하던 향수를 노골적으로 되살려 낸 것이다. 팔라우의 수도인 코로(Koror) 외곽으로 빠지다 보면 코발트빛 바다 위에 ‘아이고 브리지’가 떠있다. 머나먼 팔라우까지 징용왔던 한국인들이 기아와 고통 속에 ‘아이고’를 연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오죽하면 ‘아이고다리’로 명명되었겠는가. 정신대로 끌려온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하루에 수십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피를 토하고 죽어간 남양군도로 ‘신의 아들’이 ‘위령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한 즉,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격을 높여 다시 대양으로 진출하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이른바 태평양전쟁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듯 세계대전의 본질은 해양패권의 각축이다. 일본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사이판과 괌은 물론 필리핀, 팔라우, 티니안, 얍, 뉴기니 같은 섬, 그리고 서진을 거듭하여 인도네시와, 말레이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식탐을 과시했다. 우리의 인식은 대륙 지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해양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영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기다리다 덮치기… 집요한 日 해양정책 일본은 세계열강의 해양 재편성에 기초한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는 국제해양법 신질서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기왕에 문제가 되어온 조어도, 일명 센카쿠열도 문제로 중국과 심각한 해양분쟁을 일으킨지 오래다. 미래의 해양자원을 염두에 넣는다면 일본이 조어도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너무도 확실하다. 남쪽으로 눈을 돌려 손톱만 한 바위에 불과한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로 명명하고 자기 영토에 포함시켰다. 해양과학자들까지 동원해 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침대만 한 섬 하나에 290억엔을 퍼부었다. 이로써 자신의 영토(38만㎢)보다도 넓은 40만㎢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하게 된 것. 나아가서 태평양 복판에 떠있는 미나미도리까지 영토로 선포했다. 이렇듯 일본은 해양 영토에 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독도가 어찌 그들의 눈독에서 빠질 수 있었으랴. 이런 만행이 대중국 포위전략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가능할까. 미국 역시 ‘해양제국’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하는 단서가 마련되지만, 기실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해 섬 국가인 필리핀과 반도국가인 한반도를 ‘빅딜’하는 국제적 공모에 가담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태평양의 섬은 거의 없다. 태평양은 공해가 분명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대주주’행세를 하고 있다. 오키노도리시마와 미나미도리는 남양군도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일본이 만들어낸 ‘바다 땅따먹기’의 야심작이 아니겠는가. 근래 일본 정부는 해양권 확보에 노골적이다. 경제산업성, 외무성, 국토교통성 등이 주동이 된 연락회의가 공개적으로 열린다. 숨길 게 없다는 식이다. 독도 영유권까지 인정받는다면 일본은 전체적으로 405만㎢의 배타적 경제수역, 즉 일본 영토의 10배를 뛰어넘는 방대한 해양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제주도 한경면에는 일본군이 옥쇄를 대비해 만든 거미줄처럼 얽힌 가마오름땅굴이 있다. 버려졌던 이 땅굴은 한 개인의 희생적 노력으로 현재 평화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곳 이영근 관장은 “현재 공개된 굴은 극히 일부로, 모두 바다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땅굴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와 일본군 알트르비행장을 벗어난 송악산 해변에도 미군기를 겨냥했던 동굴들이 줄지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구체적인 해안진지가 한반도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평화’라도 韓·日 인식 달라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을 감행했던 규슈 남쪽 가고시마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란(指宿) 바닷가에도 같은 이름의 ‘평화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소년병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모정을 빙자한 최루성 역사 회고만 존재할 뿐 전쟁 자체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평화’를 거론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는 상상을 초월한다.‘제국의 바다’를 잊지 못하는 일본의 추억만들기가 계속되는 한 ‘현해탄’의 파고도 계속 높아질 것이다. 아, 우리가 즐겨 써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조차도 규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해방 60주년, 일본은 20세기형 제국의 바다를 21세기에 다시 ‘신장개업’했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우선 청와대와 외무부의 공식 입장 및 향후 일정부터 듣고 싶다. 또 ‘내 마누라타령’으로 일관하면서 질질 끌려다니다 끝내 국제사법재판소 법정마당까지 끌려가 내 영토를 약취당하고 말 것인가.
  • [사설] ‘일제지배가 축복’이라는 역사인식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 겸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는 매우 다행스럽다. 원망하기보다는 축복해야 하며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그는 당시 동북아의 정세상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지 않았으면 러시아에게 넘어갔을 것이므로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고 강변했다. 이어서, 그러므로 한국을 침략한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 일제강점기에 한국 민족문화가 더 성장·발전했느니, 일본군위안부 문제 제기는 수준 이하라느니 억지 주장으로 일관했다. 우리는 한 정치학자의 넋나간 주장에 일일이 반론을 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의 궤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집안에 강도가 들어 가족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가산을 모두 날렸더라도, 목숨만은 살려주었기 때문에 강도가 고맙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그 졸렬함과 반인륜성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양식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터이다. 우리는 다만 한 교수와 비슷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일정 부분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에 따라 친일청산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한 교수가 소속을 둔 자유시민연대와 고려대가 이번 발언 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예의 주시하고자 한다. 자유시민연대에서는 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돼 그의 회원 자격 박탈을 요구하고 있다. 고려대도 오늘 임시 처장회의를 연다고 한다. 한 교수의 ‘소신’이 잘못이라면 엄중한 처리로써 사회에 답해야 할 것이다.
  • 3·1절에 울린 ‘독도의 분노’

    3·1절에 울린 ‘독도의 분노’

    제86돌 3·1절을 맞은 1일 삼일정신을 기리고 순국열사들의 넋을 달래는 기념행사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이날 오전 서울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에서는 애국지사와 광복회원을 비롯한 정부인사 및 각계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광복회는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해 3·1운동의 진원지가 된 종로 탑골공원의 태각비 앞에서 독립운동으로 희생된 선열을 기리는 추모식을 가졌다. ●광복회 민족대표 33인 추모 독도에서는 낮 12시 울릉군의회 의원과 군민 등 175명이 태극기를 들고 참석한 가운데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규탄하는 ‘범 군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동도 선착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과 주한 일본 대사의 ‘독도영유권 망언’을 규탄했다. 참석자들은 대회가 끝난 뒤 500여개 고무풍선에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대형 현수막을 드리워 일본쪽으로 날려보냈다. 부산지역 요트 동호회원 등 6명은 이날 오후 일본의 독도 관련 망언을 규탄하는 의미에서 이날 부산에서 요트를 타고 독도로 출발했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단체전국연합은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피해자 지원 대책을 촉구했다. 이들은 ‘대국민 호소문’에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은 48만명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전체를 공개하라.”면서 “민관이 합심해 보상에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태평양유족회는 탑골공원 앞 인도에서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진보와 보수 성향 단체들도 각각 3·1절 행사를 진행했다. 보수 성향의 단체들로 이루어진 국민행동본부는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북한해방 3·1 국민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현 정부의 일방적 대북 지원은 독재를 옹호하는 반민족적 행위이며 친북좌익세력은 김정일의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통일연대 회원 300여명은 오후 2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명동성당까지 3.2㎞ 구간에서 ‘민족자주 3·1만세 행진’을 펼쳤다. 또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주민 29명이 일본군에 학살된 경기 화성시 제암리에서는 당시 참상을 재현한 마당극 ‘아!제암리 만세’가 공연됐다. 또 하남시 여성회는 시청광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3·1절 기념행사’를 열고,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경찰은 이날 전국 24개소에서 7만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고 밝혔다. ●홈피·블로그 ‘사이버 태극기’ 물결 한편 사이버 세상에서도 태극기의 물결은 이어졌다. 이날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고구려 지킴이’ 회원 70여명은 서울 명동에서 태극기 문양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한 뒤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싸이월드와 네이버 회원들은 각자의 미니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사이버 태극기’를 게양하고 3·1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온라인게임사인 ‘엠게임’은 무협 게임 속에 ‘독도는 우리땅’이란 현수막과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날 정오에는 게임 이용자들이 동시에 ‘3·1절 만세삼창’을 하는 깜짝 이벤트도 벌였다. 이효용 박지윤기자 utility@seoul.co.kr
  • 상해서 귀국 日징병자 명부발견

    1946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한 일제 징병 대상자 592명의 명부가 울산에서 발견됐다. 울주군은 1일 이수은(82·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씨가 최근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 규명을 위한 신청자 접수 때 지난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한 징병 대상자 592명의 명부 사본을 증거물로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 명부에는 울산 출신 77명을 포함해 경상남도 거주자 163명, 경기도 177명, 평안도 176명, 충청도 45명, 전라도 15명, 함경도 14명, 황해도 1명, 경상북도 1명 등 한국인 징병 대상자 592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다. 명부에는 또 이들이 이동한 경로와 날짜 등에 관한 기록도 자세히 적혀 있어 일제 강제동원 피해진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944년 말 일제 징병 1기로 소집돼 일본군 육군 제70사단 제121대대에 근무하다 광복을 맞았다는 이씨는 한국군들끼리 부대를 재편성하는 과정에 행정업무를 맡아, 징병자 명부를 보관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징병자들은 당시 광복 소식을 들었지만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8개월여가 지난 1946년 5월17일 상하이에서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이씨는 “최근 일제 강제동원 피해진상 규명을 위한 신청자 접수를 하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중 보관하고 있던 징병자 인적사항이 기록된 명부를 발견해 군에 증거자료로 냈다.”고 말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위안부 피해는 현재진행형”

    “위안부 피해는 현재진행형”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28일 연세대 졸업식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정치학’이란 논문으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사카모토 지즈코(37)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9년간의 세월을 이렇게 정리했다. 사카모토의 논문은 일본 정부가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전제에서는 여느 위안부 관련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할머니들의 문제를 과거에 국한해,‘피해의 역사와 증언’에만 주목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할머니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현재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그는 “한·일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할머니들의 증언을 이용하게 되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9년간 ‘나눔의 집’서 봉사활동 사카모토는 “할머니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피해를 증언하는 것이 큰 고통이라는 것을 지난해 6월 숨진 김순덕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느끼게 됐다.”고 소개했다. 증언집에는 김 할머니가 1992년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 털어놓고서야 40년 남짓 쌓였던 한이 풀려 그동안 못잔 잠을 푹 잤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후 할머니는 이곳저곳 불려다니며 ‘청취자’가 원할 때마다 아픈 과거를 되돌아봐야 했다. 사카모토는 “1998년 김 할머니가 도쿄의 한 추모 모임에서 5분 동안 증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당시 무대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봤다.”면서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에너지 소모 때문이었는데, 요청자는 5분 정도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에게 과연 ‘할머니’가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할머니의 ‘증언’이 필요한 것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카모토는 논문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피해 보상도 중요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할머니들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피해자들이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까지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할머니들에게 단지 ‘우리 민족의 어머니’가 되라고만 강요하고, 정작 그들이 과거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현실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사카모토는 1996년 피해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첫 방문한 이후 줄곧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이용수 할머니, 고 김순덕 할머니 등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영화를 제작한 영화 기획사 직원, 시민단체 관계자, 피해 할머니의 정신검사를 맡았던 학자 등의 심층 인터뷰를 곁들여 논문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94년 호주에서 평화청년단 활동을 하며 평화와 전쟁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2000년부터 연세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왔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독립운동가 황운정 육성증언 최초 공개 “독립군40명 러로 도피 빨치산 됐지”

    독립운동가 황운정 육성증언 최초 공개 “독립군40명 러로 도피 빨치산 됐지”

    “속사포(기관총)로 무장한 일본군 사단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한 40명 되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서 러시아로 넘어왔지. 그때는 내 아직 공산주의강령이 무엇인지도 몰랐어.” 1920년대 러시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의 육성 녹음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를 거쳐 러시아에서 항일 투쟁을 벌인 황운정(1899∼1989) 선생이 주인공이다. 서울신문은 한국외국어대 반병률(49·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를 통해 러시아에 사는 황 선생의 차남 황마이운제노비치(75)가 보관하고 있는 육성 테이프 사본을 단독 입수했다. 이 녹음 테이프에는 그가 3·1운동 직후 만주와 러시아로 쫓겨다니며 무장 투쟁에 가담하고, 사회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생생히 담겨 있다. ●함북 종성에서 만세운동 계획하다 들통나 만주로 황 선생은 3·1운동 당시 함경북도 종성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했다. 그는 “3월1일 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나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도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당시를 떠올렸다.“독립선언서라는 선언서가 있었거든.…아주 극비밀이라고 그래. 붙들리기만 하면 너도 잘못되고, 나도 잘못된다고.”황 선생은 선언서를 밤에 상점에 돌아다니면서 문 사이에 넣었다. 하지만 배반자의 밀고로 거사는 좌절되고,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 온다. 그는 “어떤 사람이 선언서를 감추지 않고 일본놈들에게 갖다 전했단 말이야.…결국에 거기서 도망했지.” ●일본군의 살육으로 다시 러시아로 청년 황운정은 1920년 만주에서 본격 항일 투쟁을 시작한다. 그는 연길에서 만주 독군부 독립군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간도참변이 일어난다. 그는 “전 만주에 있던 독립군 3000명이 왕청현에 모였다.”면서 “그렇지만 일본군의 잦은 공격으로 독립군이 너무 많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독립군은 일본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항일 투쟁하다 처음 공산주의 접해 황 선생은 당시 “독립군 가운데 볼셰비키(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의 다수파)와 연락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그들이 동녕현이라는 곳을 거쳐 러시아로 가자고 했다.”고 러시아로 옮겨간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1920년 8월 도착한 러시아에서 처음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황 선생은 “솔밭관이란 곳에 러시아 혁명군대하고 스뱌지(연락반)하는 고려혁명군대가 조직됐으니 그리로 가라고 하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려혁명군대는 일종의 항일유격 부대였다. 처음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집행부 서기. 다른 책임을 달라고 하니 공산청년회협의회 ‘세크레타리’를 맡겼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을을 다니며 선전사업을 했다.”고 털어놓았다.7∼8분 분량의 녹음테이프는 여기서 끝난다. 이후 황 선생은 1921년 일본의 조종을 받는 홍의적을 섬멸하는 전투와 1922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반병률 교수는 “이 녹음은 3·1만세에 참여한 뒤 일본군에 쫓겨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0년 다시 간도사변으로 러시아로 피해 공산당원이 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려주는데 의의가 있다.”고 분석했다. 박환(47)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육성증언이 공개되긴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황 선생은 러시아에 정착, 지방소비에트 위원장과 중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90세때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테이프는 그가 1987∼1988년 러시아의 고려말라디오 방송에서 증언한 내용의 일부이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무장日軍 학교 난입… 무차별 고문…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이 당초 출병목적은 외면한 채 한인의 독립운동을 짓밟는 데 혈안이 됐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군의 정보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군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의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출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최근 입수한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정보장교 문서’를 27일 공개했다. 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한인 항일독립운동을 일제가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담고 있다. ‘일본이 시베리아의 한국인들에게 가한 야만적 가혹행위’라는 부제를 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1918년 10월부터 1919년 8월까지 에브게네프카, 하바로프스크, 니코리스크, 베리노 등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체포해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으며, 한인 학교에 무장한 채로 들어가 교과서를 불태우거나 책상 등의 집기를 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19년 3월15일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미군 병사들에게 영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한인 2명을 체포해 사슬로 묶은 뒤 감옥에 2주 동안 감금하며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또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인을 매수해 동료들을 고발케 하거나 러시아 경찰에게 금품을 대가로 조선인 탄압에 앞장서도록 하기도 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이상일 박사는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러시아나 일본의 기록에 의존하던 3·1운동 전후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경각심과 독립 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이창위 지음

    2005년 을유년은 한민족에게 오욕과 환희의 역사가 오버랩되는 해다. 정확히 1세기 전인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본격화됐고,60년 전, 바로 전 을유년이었던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참혹한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수십년 만에 거대한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경제강국이란 지위에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역사적 죄악을 희석하는 망언을 툭툭 던지며 주변국들에 파시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여전히 불씨가 살아있는 듯한 일본 파시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일본 군부의 광기는 언제 어떻게 탄생했고,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이어졌을까.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 군국주의 태동 3·1절을 앞두고 일제 침탈과 파시즘, 을사조약, 친일문제 등을 재조명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중 침략전쟁의 뿌리인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과 파시즘의 형성과정, 일본군 특유의 정신문화와 병리적 군사문화 등을 분석한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흥망사’(이창위 지음, 궁리 펴냄)를 중심으로 신구 일본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1974년 일본 국민과 언론은 오노다 희로라는 육군 소위의 귀환에 열광했다. 그는 2차대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44년부터 30년간 필리핀 루손섬 정글에서 일본의 패망을 부인하며 유격전을 계속해온 인물이었다. 죽지 말고 데리러 올 때까지 버티라는 상관의 명령 하나만을 믿고 산속에서 30년을 버틴 그의 눈동자는 광채가 번득였고, 총검은 여전히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를 찾으려는 일본인들, 심지어는 가족의 모습까지 먼 발치에서 보았던 그는 일본의 패전을 믿지 않았고, 결국 30년 전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직접 투항명령서를 전달받고서야 1974년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무 완수를 위한 30년 전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뿐,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도리어 일본전쟁이 모두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듬해 브라질로 이주했다. ●진주만기습·가미카제등 상세히 소개 오노다 소위는 극단으로 치달았던 일본 군국주의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은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을 러일전쟁의 승리에서 찾는다. 그 이전에 이미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로 상당한 군사력을 갖고는 있었지만, 러일전쟁 승리 후 지나친 자신감과 착각에 빠졌으며, 그후 일본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가 되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은 조선병합,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통하여 군부 파쇼체제를 확립하고 대미 개전에 이르게 된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시바 료타로는 광신적 군부가 이끌고 우중이 지지한 일본을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달리는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책은 태평양전쟁의 주요 국면인 진주만 기습, 미드웨이 해전,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가미카제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다. 자결을 앞둔 일본군 장교들은 일왕에 대한 충성과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최후진술을 남겼는데, 비장함을 넘어 광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국력의 확연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무모한 항전 뒤엔 군인의 정신자세와 행동규범을 규정한 ‘군인칙유’‘전진훈’이 있었다. 특히 일왕이 발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는 명분 하에, 태평양 전쟁 도발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가 공포한 전진훈(戰陳訓)은 군인들이 금과옥조로 삼아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가 되었다. 전진훈은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 최고의 명예라고 강조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사고를 주입시켰고, 특히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제2장 제8조)는 조항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헛되이 죽어갔다. 생명을 경시하는 무모한 전술과 자결 각오 뒤엔 전진훈에서 강조한 도착적 군사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전진훈’ 통해 전체주의 사고 주입시켜 지은이는 책 말미에서 패전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정치적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현재의 일본은 패망한 일본의 밑그림 위에 덧칠된 그림이라고 본다. 그 밑그림이 다원화된 국제사회에서 다시 복원돼 서글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은이는 소망한다.1만 2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시론] ‘韓·日 우정의 해’ 유감/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 교수

    [시론] ‘韓·日 우정의 해’ 유감/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 교수

    작년 한해 일본에서는 ‘한류’(韓流)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덕택에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한·일 관계의 오래된 비유는 이제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이며 ‘한·일 우정의 해’다. 문화·예술·관광·스포츠 등 다채로운 분야의 한·일교류 행사가 1년 내내 풍성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경제·외교 면에서의 협력 또한 순조롭다. 이미 김포와 하네다 간의 도심 직항편도 생겼고 자유무역협정(FTA)도 추진 중이며 입국비자 문제도 순탄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국교수립 40년 만에 한·일 관계는 신기원(新紀元)을 맞고 있는가? 그러나 2005년은 한·일관계를 축제와 친선의 무드로만 보내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해다. 이상하게도 한·일국교수립 40주년만 강조되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시해서 기념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우선 올해가 광복 60주년이며,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사적으로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포츠머스조약 100주년이며, 청·일전쟁의 승전을 마무리한 시모노세키조약 110주년이면서, 동시에 국제연합 창설 60주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난 세기에 있었던 전쟁의 상처를 되새기고 평화의 가치를 음미하는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줄을 이을 전망이다. 우선 유엔총회는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올해 5월8일과 9일을 ‘기억과 화해의 시간’으로 지정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러시아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행사는 같은 5월 러시아 국내에서 열리는 ‘반 나치스독일 승리 60주년 기념식’과 함께 2차대전 승리에 기여한 러시아의 역할이 강조될 전망이다. 중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蘆溝橋)에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국제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 11월21일자 북경일보에 따르면 “항일전쟁의 위대한 과정을 전면적으로 반영하고, 일본군국주의에 의한 인민학살, 식민통치 등의 범죄를 뿌리째 폭로함으로써 지난 전쟁에서 행한 중국의 중요한 역할과 큰 희생을 충분히 알리기”위해서다. 중국과 러시아는 ‘2005년’이라는 역사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승전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과시하면서 일본을 압박하는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광복 60주년, 국권찬탈 100주년이라는 귀중한 역사자원을 ‘한·일 우정의 해’로 소비하고 국내용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낭비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 선조는 세계사상 유례없는 잔악한 식민 지배 하에서 가혹한 억압을 감내하면서 반인류적 침략세력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는 민족의 긍지라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정신적 자산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올해를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파시즘을 대표하는 진영의 핵심적인 일원임을 확실히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우정’에 잠시 취해있는 동안에도 일본은 할 일 다 하고 할 말도 다 하고 있다.22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위한 조례안이 제출되었다. 또 23일에는 주한일본대사가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독도는 명백한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독도문제를 쟁점화하여 외교현안으로 끄집어내려는 의도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외교적으로는 정답인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우정’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허튼 수작을 거는 그 씀씀이가 고약하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허튼 장난을 길게 끌면 ‘한·일 우정의 해’도 재고해볼 일이다. 올해는 2005년. 명성황후가 시해 된 지 11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김무곤 동국대 교수 신문방송학
  • [코드로 읽는책]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로렌스 쿤 지음

    자연인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장쩌민(江澤民)의 생애는 80여 년에 이르는 중국 근세사의 격동기와 동의어다. 일본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 톈안먼 사태, 그리고 오늘날 놀라울 정도의 경제성장, 타이완과의 긴장관계, 중·미관계에의 기회와 대립 등의 역사가 그러하다.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로버트 로렌스 쿤 지음, 박범수 등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은 오랜 세월 중국 전문가로 활동해온 저자가 장쩌민이라는 렌즈를 통해 중국의 전쟁, 혁명, 정치혼란, 사회 대변동, 경제개혁, 국가의 변신, 그리고 국제무대에서의 부활을 광대하게 조망한 역사적 서술이다. 서술에 앞서 지은이는 서문에서 ‘처음부터 장쩌민을 회의적으로 본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제대로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했고, 덩샤오핑이 중국을 개혁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장쩌민의 성취는 취약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쩌민이 집권했던 10년간 중국이 미국 다음의 경제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의 도전을 이해하기 위해선 장쩌민이 남긴 것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장쩌민은 1926년 장쑤성 양저우시에서 태어나 일본군 점령기에 초등 및 중등학교를 다녔다. 문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대학에서 전기 및 전력 공학을 전공한 이후 기나긴 테크노크라트의 경력을 쌓게 된다.60년대 후반엔 엄격한 정치적 조사를 받고 후난성 보아이 농장의 핵심당원 교화학교에서 정치적 재교육을 받는 등 문화혁명의 악몽을 겪기도 했다. 마오쩌둥 사망후 1980년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시대가 열리면서 장쩌민은 핵심 정치가로서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개혁·개방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신설된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및 국가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부주석급)으로 발탁되고, 전국인민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다. 이어 1985년부터 상하이 시장과 당 부서기로 재직하면서 상하이시를 재건하고 성장과 투자 진흥에 그의 진면모를 보여줌으로써 덩샤오핑을 이을 수 있는 후계자로 낙점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다.89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되고,94년 국가 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확고한 1인자로 자리잡게 된다. 필자는 장쩌민이 10대 시절 겪었던 일본의 중국 침략이 그의 전 생애와 정신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어떻게 해서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수십년후 어떻게 혹평속에서도 당을 개혁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통찰한다. 온정주의적이긴 하나 흔들리지 않는 비전, 일생을 통해 변하지 않았던 중국문명에 대한 사랑, 천부적인 협상 능력 등의 정치술과 오랜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경력에서 나온 경제적 식견 등을 통해 중국사회를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급부상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책 출간을 위해 중국이 이례적으로 장쩌민 최측근 및 고위 관리들의 인터뷰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기 드물게 내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다가오는 장쩌민의 생애를 통해 중국 역사는 물론 오늘의 중국과 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2만 3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60년 담아둔 恨 “밝혀달라” 봇물

    60년 담아둔 恨 “밝혀달라” 봇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우리 시아버지의 억울함 좀 풀어주세요.”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찾은 주부 정윤현(53)씨는 시아버지의 피해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발을 동동 굴렀다. 정씨는 “시아버지가 일제 때 규슈지방 노역장으로 끌려간 이후 소식이 두절돼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면서 “아버지 때문에 속태우던 남편은 속병을 얻어 지난 1992년에 세상을 떴고, 이제 시아버지의 피해사실을 밝힐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강제동원 진상부터 하루 빨리 밝혔으면 좋겠다는 게 정씨의 바람이다. 일제강제동원 피해 신고 접수가 1일 전국 250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진상규명위 본부를 비롯, 지자체 접수처에는 첫 날부터 북새통을 이루며 정부의 진상규명조사에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반면, 일부 지자체에서는 사전 준비 미비로 민원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영하 10도 안팎의 강추위에도 불구, 각 지역 접수처에는 강제동원 피해신고와 문의가 잇따랐다. 진상규명위에 따르면, 이날 본부에만 1800여명이 신고를 접수하는 등 전국에서 2573명이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특히 진상규명위 본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백명의 민원인들이 몰렸다. 당초 오전 9시 접수를 개시하려던 진상규명위측도 8시부터 접수자들이 몰리자 접수시간을 30분 정도 앞당겼다. 태평양전쟁 피해보상추진협의회를 통해 신고하려는 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 200여명이 함께 위원회를 찾았고,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영구귀국한 경기도 안산시 사동 고향마을 주민 30명도 위원회를 찾아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일본군에 강제 징용돼 만주에 근무하다 소련군 포로가 됐던 피해자 13명도 러시아가 발급한 근로증명서를 증거로 첨부해 신고를 마쳤다. 위원회를 찾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접수실 옆에 마련된 민원실에서 삼삼오오 자리를 함께 하며, 각자 억울한 사연들을 쏟아냈다. 경기도에 사는 주부 정인옥(41)씨는 “시할아버지는 일본 헌병 2명을 살해한 죄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4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친할아버지도 탄광에 끌려가 혹사당하다 평생 폐병을 앓으셨다.”면서 시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의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관동군에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는 권태규(82) 할아버지도 “징병을 당해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특별법’에 따른 과거청산의 첫 단계로, 오는 6월30일까지 일제 강점기간 일본에 강제동원됐던 피해사례를 신고받는다. 강혜승 이효용기자 1fineday@seoul.co.kr ■ 전기호 진상규명위원장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일본 등 관련국가들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전기호 위원장은 1일 “당시 강제동원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신고뿐만 아니라 각종 자료연구가 병행돼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 위원장은 “신고접수를 받기 전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자료를 받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주변국들이 관리하고 있는 자료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정부분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 국가측 자료가 강제동원의 피해진상을 규명하는 데 필수적인 증거자료로 활용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진상조사가 이제서야 추진되다 보니 피해 생존자들이 많지 않고, 유족들도 정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사실 확인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증거로 활용할 자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최대한 많은 증거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히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가 요구된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오는 16일 현지조사차 일본을 방문한다는 계획이다. 전 위원장은 “관방장관 등 일본 관계장관과의 면담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측 국회의원들과 경제인단체 관계자들과도 만나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어 “경제인단체가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당시 강제동원은 일본 기업체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자료가 풍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위원장은 “이번 조사는 피해보상과 관계없이 진상을 규명한다는 데 목적이 있지만 추후 보상이 논의될 때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부고]

    ●위안부피해자 박복순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데 앞장섰던 박복순 할머니가 27일 오전 3시 노환으로 숨졌다.84세. 이로써 현재 등록된 215명의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126명으로 줄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중앙대 부속병원 영안실. 발인은 31일.(02)795-6400. ●남상두(전 서울신문 편집부장)씨 별세 혜연(스포츠서울 종합취재부 기자)씨 부친상 27일 한양대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30분 (02)2290-9460 ●김정곤(매일경제 장흥지국장)재호(사업)씨 부친상 백중근(서울신문 장흥지국장)씨 빙부상 26일 장흥 우리병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19-368-0606 ●김기업(전 보건복지부 국장)씨 별세 선진규(열린우리당 경남도위원장)씨 상배 기(삼성생명 법인팀장)건(국민건강보험공단 송파지사 과장)씨 모친상 상규(동국대 건국100주년기념본부장)씨 형수상 26일 경남 김해 세영병원, 발인 30일 오전 9시 (055)345-9445 ●하병권(전 서울교대 명예교수)병룡(회사원)병철(사업)씨 부친상 순회(서울대 교수)씨 조부상 안우만(변호사)김록창(독일선급협회 검사관)씨 빙부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6시 (02)3410-6918 ●김성한(전 기아타이거즈 감독)씨 빙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410-6908 ●손장우(동명기술공단 부사장)승덕(재미 화가)충덕(국회정보위 입법심의관)씨 부친상 조중복(전 수원경찰서 보안계장)씨 빙부상 27일 경북 안동병원, 발인 30일 오전 8시 (054)820-1672 ●정치득(국제신문 판매국장)치원(자영업)치관(대연중 교사)치헌(KCI건설화학 영업부장)씨 부친상 서정자(임마누엘교회 부목사)김춘미(범일초등학교 교사)이혜경(신선중 〃)씨 시부상 오광수(한진중공업 과장)씨 빙부상 27일 부산 대동병원, 발인 29일 오전 9시30분 (051)550-9953 ●최명순(전 경기 화성여고 교장)씨 별세 승철(전 주택저널 편집장)승현(자영업)씨 부친상 27일 아주대병원, 발인 29일 오전 10시 (031)219-4119 ●이일(우성미트프로 대표)삼(내셔널트레이딩 〃)연희(이연희산부인과 원장)명희(재미 의사)씨 모친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010-2239 ●신갑용(시그너시스템 회장)을용(우정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이사)씨 모친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5시 (02)3010-2268 ●이돈희(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대우)씨 상배 26일 국립암센터, 발인 28일 오전 9시 (031)920-0301 ●조용현(기술사)김장식(기아자동차 상무)심인구(사업)천장성(서울대 교수)씨 빙모상 26일 전북대 부속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63)250-2446 ●장보연(경희대 수원캠퍼스 대학원 행정계장)씨 부친상 모친상 27일 서울 도봉구 한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983-2499 ●최종흠(주식회사 그린소방 대표)씨 별세 당석(KBS 탤런트)씨 부친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10시 (02)3010-2237 ●김종엽(전 전주 완산구청장)씨 별세 인택(전주시 체육시설사업소)인옥(식품의약품안전청)인선(삼성카드)씨 부친상 27일 전북대병원, 발인 29일 오전 10시 (063)250-2451 ●김우(광명 성애병원 기획실팀장)찬(디지틀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씨 모친상 27일 서울 신길동 성애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 (02)844-5163 ●조성원(이성엔지니어링 대리)씨 부친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 (02)3010-2260 ●박성원(전 서울신탁은행 중앙지점장)씨 별세 광준(재미 사업)광현(사업)광배(하나은행 차장)씨 부친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9시 (02)3410-6915
  • 제주 “세계평화의 섬 됐수다”

    정부가 27일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평화문제를 논의하고 국제분쟁과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완충지대로 거듭나게 됐다. ‘평화의 섬’과 관련 제주도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협력 관련 주요 회담 유치 ▲국제 평화협의체 또는 경제협력기구 유치 ▲제주국제평화센터 건립 ▲동북아평화연구소 설립 ▲제주평화포럼의 아시아·태평양 대표 포럼으로의 육성 ▲모슬포 한국군 및 일본군 전적지 공원 조성 ▲남북 평화 네트워크 구축 ▲제주 4·3문제의 발전적 해결 등의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12조는 ‘국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하고 평화관련 사업에 행·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주도는 이날 ‘세계 평화의 섬’ 인터넷 홈페이지(www.peace.jeju.kr)를 개통했다. 내달 1일에는 ‘평화의 섬’ 지정에 공로가 큰 인사들을 초청, 기념 콘서트를 열고 9∼11일에는 44개국 주한외교사절과 가족 등 100여명을 초청,‘평화의 섬’ 지정 설명회를 갖고 한국과 제주의 전통문화를 체험토록 하는 등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임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또 13∼19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한·중·일 3개국 프로축구 A3대회를 ‘세계 평화의 섬’ 지정 기념대회로 열고 오는 6월 9∼11일 개최되는 제3회 제주평화포럼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프리마코프 전 러시아 총리 등이 참석하는 전직 정상회담을 추진키로 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서울광장] 박정희 콤플렉스 벗기/이용원 논설위원

    [서울광장] 박정희 콤플렉스 벗기/이용원 논설위원

    광복 6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기 때문인가, 올해는 벽두부터 과거사·과거 인물에 대한 평가가 봇물 터지듯 이어진다. 그 가운데서도 발군은 역시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이다. 신년특집으로 각 언론사가 조사한 위대한 인물 순위를 보면 평가 기준, 선정 주체에 상관없이 그가 1위를 독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예컨대 ‘광복후 대한민국을 빛낸 정치인’도,‘국정 수행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도,‘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도 첫손가락은 모두 박정희라는 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박정희라는 존경할 만한 위인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 그만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 박정희에 관한, 그리고 그가 이끈 시대에 벌어진 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둘러싼 논란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일협정 과정을 보여준 일부 문서의 공개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협상에서 일제 피해자의 개인 배상을 포기하는 대신 경제협력자금을 들여왔다. 그 경협자금을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해 산업 발전을 이끈 것은 시대상황으로 볼 때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개인 피해를 보상해 주려는 노력 없이 형식적으로 그 절차를 끝낸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임도 또한 분명하다. 과연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박정희 시대(1961∼1979년)를 손쉽게 판단하는 방법은 먼저 그 명과 암을 명확하게 가리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은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고도 성장이다. 이 기간에 우리 사회는 산업화를 이뤄 누대의 가난을 벗었다. 민족국가의 틀을 확립하고 주체적인 경제단위를 형성해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자리잡았다. 남북간 경쟁에서도 비교우위를 확실하게 점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반면 부정적인 면도 결코 작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싹튼 민주주의는 꽃 피기도 전에 꺾여나갔다. 후반기의 유신 체제는 유례없는 독재정권으로서 인권·민권의 암흑기였다. 고귀한 인명이 숱하게 희생돼 아직도 사회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남북관계는 통일을 지향하기보다는 정권의 안보·강화 차원에서 악용됐다. 특권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균형 발전의 원인이 됐다. 박정희 시대의 명과 암은 이처럼 뚜렷하다. 아울러 한 시대를 평가하는 일이 밝음 또는 어두움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하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양쪽을 아우르되 종합점수를 플러스로 줄지, 마이너스로 줄지는 개인 가치관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부정적이다. 그 하나의 현상으로서 ‘박정희 향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향수’에는 허수가 적지 않게 포함돼 있으리라 본다. 그가 사망한 1979년 성인이 된 사람(59년생)은 올해 46세가 된다. 따라서 지금의 30대에게 박정희는 체험의 대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글머리에 밝힌 ‘국정 수행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에 30대의 절반이 박정희를 꼽은 까닭은, 그후의 대통령들에 대한 실망이 가져온 반사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박정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반사이익을 누린 것이 ‘박정희 향수’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지만, 일본군 장교 출신에 독재의 상징이 된 인물이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는 현상은 정상적이지 않다. 이는 현역 정치인들에게 매서운 채찍으로 작용되어야 한다. 죽은 제갈공명에게 산 사마중달이 쫓기듯 26년 전에 끝난 박정희의 향수에 쫓겨다니지 않으려면 그보다 나은 정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시대 정치인들의 숙명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신연숙 칼럼] 팽이와 역사의식

    한·일협정 문서공개를 계기로 또 한번 과거사가 우리들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왔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반갑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에도 냄비처럼 한바탕 들끓다 잦아들어버리는 역사의식을 보여주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과거사를 소화하는 방식 중 베트남의 방식은 독특하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과감하게 미국과 화해하였다. 도이모이 정책에 따라 한국과도 과거사 집착보다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국제사회에서 무시의 대상이기는커녕 경의의 대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전쟁에서 물리치는 용기와 끈기를 보여준 데다 내적으로도 자신들의 기억을 단속하여 분발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곳곳에 있는 월남전 피해 증오비, 위령비 등이 그것을 말한다. 한국인의 과거사 소화방식은 어떤가. 한 역사교육 문제 토론회에서 한 고교 교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왜곡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하였다. 우리 국민은 중국이나 일본이 역사 망언을 해주어야만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지피므로 우리 국민이 깨어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망언이 자꾸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가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이 타율적이라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체의 주체적 결단 없이,‘때리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 팽이’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자극 없이도 스스로 역사의식에서 깨어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학교를 통해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게 우선 시급하다. 이 부분은 역사망언이 나올 때마다 제기됐지만 한때 논의로 끝났을 뿐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회교육을 통한 끊임없는 기억과 실천이다. 학교교육을 넘어 생활속에 역사의식을 체질화하여 판단과 행동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를 돕는 곳은 각종 박물관이나 기념관이다. 가까운 곳에 역사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성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 있다면 주체적 역사의식은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추진하고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은 의미가 있다. 십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강제 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노릇을 하고도 위안부 피해의 역사는 사죄와 보상은커녕 우리 사회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갈 뻔했다.1990년 정대협의 발족과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의 잇단 증언으로 일본의 만행은 국제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됐지만 국내엔 아직도 이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만한 공간이 없다. 정대협은 박물관 건립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실천행위란 판단 아래 국민적 모금을 추진하고 있지만 진척이 여의치 않다. 오히려 피해 할머니들이 “다시는 우리가 겪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정부에서 나온 생활안정자금을 쪼개 눈물어린 기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그 할머니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제 우리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는 것과 함께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같은 기억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 가나 수없이 볼 수 있는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처럼 작고 많을수록 좋다. 우리보다 뒤늦게 위안부 박물관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타이베이의 경우 시가 건물을 기증해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해국가인 일본마저도 시민운동가인 마쓰이 야요리의 유산을 토대로 박물관 건립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의 해다. 가장 많은 위안부피해자를 냈던 한국의 역사기억 작업이 올해는 추진력을 갖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정부는 물론 서울시 등 지자체의 자각도 긴요하다.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문서공개로 본 韓日협정] ② 미완의 쟁점

    한일협정 문서 공개로 피해자 관련단체들의 줄소송이 예상되는 가운데 청구권 협상 당시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쟁점을 둘러싼 논란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한일협정에 의해 소멸된 유형으로는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 ▲사할린 피해자 ▲재일동포 피해자 ▲우키시마호 사건 피해자 ▲원폭 피해자 등이 있다. 당시 협상 과정에서 관련 피해자들은 피해 발생 시점과 소재지 등에 따라 제외된다는 일부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전후 피해자라는 인권적 관점에서 볼 때 양국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도외시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정부가 전후 피해자 보상문제를 재점검할 경우 이들 사안도 원점에서 검토하거나 외교적 경로나 중재를 통해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정신대피해자 보상문제부터 재점화될 듯 무엇보다 일본군 정신대피해자 문제는 1963년 일반청구권 문제가 거론됐던 제6차 회담에서도 제외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해서는 소멸된 청구권과 소멸되지 않은 청구권을 확인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협상의 최종 단계인 1965년 6월1일부터 22일까지 관련 회의록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전후 한국인 피해자들의 소송을 전담해 온 최봉태 변호사는 “이는 양국 정부가 청구권 협정을 할 때 정치적 타결에만 신경썼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군 정신대피해자 문제는 1990년대 이후 민주화 기운이 싹트고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동원 관련자료가 넘어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쟁점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정신대연구소 강정숙 연구원은 “당시 일본정부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배상관련 법안이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일본에서 최근 ‘전시 성적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이 제출돼 있는 상태여서 한국 정부는 군 정신대피해자 명단과 채용 당시의 신분 등에 대해 정확한 진상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일·사할린 동포 피해자 보상도 되살려야 재일동포와 사할린 거주 피해자 등 당시 국적과 소재지 규정에 의해 제외된 피해자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청구권 협정 당시 피해자 규정에 따르면 1947년 8월 이후 일본에 있었던 사람은 제외한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재일동포들 가운데 조총련 국적 소유자가 많았던 점도 보상 범위에서 제외된 중요한 이유가 됐다. 일본 ‘전후 보상문제를 생각하는 변호사 연락협의회’ 김경덕 변호사는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한국 정부는 재일 한국인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차이를 감안하면 향후 보상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도적이면서도 한·일 양국 어느 누구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우선 추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보상 대신 생계지원”

    정부가 한일협정 문서공개에 따른 대책마련에 나선 가운데, 피해자에 대해 ‘보상’보다는 ‘생계지원’방식이 채택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소요자금 규모는 최소 5조원에서 50조원 이상에까지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18일 이와 관련,“모든 가능성이 논의되겠지만, 현재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지급되고 있는 일시금 4300만원과 월 60만원의 생계지원금 등 지원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무조정실 당국자는 그러나 “현재로선 일제하 징용·징병 피해자에 대한 재정지원 근거가 없어 특별법을 만들어야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부 일각에서는 보상은 정부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므로 생활안정지원, 기념사업, 위령사업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시민단체 등은 당시 보상에서 제외된 징병·징용으로 인한 부상자에 군인·군속을 제외한 단순 노무자, 여성 근로정신대, 일본군 정신대, 원폭 피해자 등을 포함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태평양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군인·군속을 제외한 노무자에 대한 미불 노임은 원금만도 2억 1000만엔에 이르며 그간의 물가상승률과 이자 등을 감안한 현재 금액은 1조 6321억엔(우리 돈으로 1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학계는 일제 강점에 따른 피해자는 징용 732만명, 징병 38만여명, 군 정신대 피해자 4만∼20만명, 원폭 피해자 7만여명 등 800여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중복되는 경우 등을 감안하면 200만∼400만명 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지운 구혜영기자 jj@seoul.co.kr
  • [기고] 한·일 함께 ‘과거 상처’ 치유해야/김창록 부산대 법학 교수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관련문서의 일부를 공개했다. 협정 체결 40주년을 맞는 해에 이루어진 일이니, 실로 ‘때늦은 고백’인 셈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일제 강점 피해자들이 정부측을 상대로 문서의 공개를 요구한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하지만, 문서 공개에 당연히 뒤따르게 될 여러 가지 파장을 생각하면,‘이제는 정리할 필요가 있다.’라는 정부측의 판단도 작용한 결과로 보이며, 그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조치라고 할 것이다. 이번의 문서 공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은, 한국인 피해자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라는 것이다. 공개된 문서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한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 보유자에게 보상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국 정부는 한국인 개인의 권리에 대해 “일본으로부터의 보상 금액 중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상조치를 강구해 주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한국 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주로 저축이나 보험 등 협정상의 ‘재산, 권리 및 이익’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것이었으며, 현재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등과 관련된 협정상의 ‘청구권’에 해당하는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정부가 개인 보상에 대해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졌다. 한편 일본 정부는, 청구권 자금의 명목을 오로지 ‘경제협력’에 묶어두려는 입장을 시종 고수했으며, 한국 정부의 청구권자금 운용에 관해 세세하게 간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보상의 문제는 거의 완전히 방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점에서, 이번에 공개된 문서로 인해 일본 정부가 면책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 정부가 1990년대를 통해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일본 정부의 입장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측의 관련 자료 공개가 필수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번의 한국측 문서 공개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한국인 피해자의 귄리 구제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 모두가 책임이 있으며, 한국 정부의 책임이 보다 무겁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자들의 소송이 잇따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진행 중인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송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원래 그다지 크지 않다.60년 가까운 긴 세월이 지난 과거의 문제인 까닭에, 피해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고, 소멸시효 등의 법적 장벽도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 양국 정부가 ‘피고’의 입장에서 고령의 피해자들과 다투는 소극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고, 반세기 넘게 방치해 온 과거의 아픈 상처를 적극적으로 어루만지는 자세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요청된다. 한·일 양국 정부는, 관련 자료의 전면 공개를 통해 1965년의 ‘애매한 봉합’의 전모를 밝히고, 피해자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아있는 동안에 ‘지체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우선 피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한·일협정의 개정 혹은 재체결과 북·일교섭의 바람직한 방향까지 시야에 넣어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과거사’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과거의 공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고,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창록 부산대 법학 교수
  • [사회플러스] 위안부 사이버역사관 3월개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모은 정부 차원의 사이버 역사관이 오는 3월1일 문을 연다. 여성부는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사이버 역사관을 개관한다.”고 17일 밝혔다. 사이버 역사관에는 연구 조사자료는 물론 위안부 피해자 50여명의 사진과 증언,2000년에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자료집, 관련 신문기사등이 게재된다.
  • [韓日협정 문서 공개] “日 ‘경협’ 집착… 도의적 책임론 우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와 언론들은 17일 한국 정부의 한일협정 문서공개에 따라 일제 식민지 지배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개인보상을 직접 요구하는 길은 사실상 막혔지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보상 요구는 잇따를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한일협정 당시 일본정부가 청구권 소멸에만 집중,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 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점까지 드러나 일본정부의 ‘도의적 책임론’이 일 것을 우려했다. 그러면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협상 재개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내다봤다. NHK방송은 “개인보상은 일본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가 지기로 확인됐다.”면서도 “식민지 시대의 피해자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한·일 양국정부에 대해 한층 더 보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교도통신은 문서공개가 현재의 우호적인 양국 관계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해석했다. 또 문서공개 결과 대일청구권소멸의 정의와 협정문구 등을 놓고 양국이 조인 직전까지 치열한 공방을 펼쳤으며 일본이 청구권의 완전소멸을 위해 안달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정부가 오는 20일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사건인 ‘문세광 사건’(1974년)에 관한 외교문서를 추가 공개키로 했다면서 “국교정상화 교섭과 관련한 문서는 연내에 추가로 공개될 방침이어서 전후 한·일간의 역사적 관계들이 속속 명확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문은 또 한국에서는 1990년대들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면서 시민단체 등을 주축으로 일본 정부에 개인보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며, 실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있었다고 전했다. 도쿄신문은 이날자 석간 주요기사로 공개사실을 전하고 “일본도 도의적 책임론에 휘말릴 수 있다.”면서 국교정상화 때의 대일 저자세 외교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면 한국정부가 5000억원 정도로 추산된 추가보상금 등 때문에 고전할 것으로 분석했다. 아사히, 마이니치, 닛케이 신문 등도 일제히 문서공개 사실을 전하면서 피해자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개인보상을 요구할 길이 사실상 막혔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역시 북·일교섭에는 영향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 정부측은 이날 문서공개에 대해 “당초 북한과의 수교협상 재개에 미칠 부작용을 우려했으나, 공개된 내용 중에는 특별히 부담되는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고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tae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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