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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731부대 생체실험 한국인 6명 희생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 동북지방에 주둔했던 일본군 731부대가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1463명에 대한 증거문서가 중국 언론에 공개됐다. 1463명 중에는 최소한 6명의 한국인이 포함돼 있고, 한국인 6명중 4명을 포함한 318명은 이름과 나이, 출생지, 주소 등이 확인됐다.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발간되는 하얼빈일보(哈爾濱日報) 2일자에 따르면, 증거문서는 731문제 전문가 한샤오(韓曉·작고)와 진청민(金成民·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지방 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일본군 관련 문건 가운데서 찾아냈다.신원이 드러난 318명의 명단에는 중국인 293명 외에 한국인 6명과 구소련인, 몽골인 등 외국인 피해자 25명이 포함돼 있다. 이 문서에 나타난 한국인 6명중 신원이 확인된 4명은 ▲이기수(李基洙·28·함북 신흥군 동흥면·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30·함북 경성·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함북 길주·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42·강원도 회양군 난곡면·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생체실험을 위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사람들은 지하공작원, 팔로군, 항일전사 등이고, 이들을 통해 731부대의 생체실험 수요를 충족시켰다고 진청민 소장은 밝혔다.1463명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고 진 소장은 덧붙였다.oilman@seoul.co.kr
  • 종전 직후 오키나와서 촬영 한국인 위안부사진 美서 발견

    |도쿄 연합|2차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국 여성들의 종전 직후 모습을 담은 희귀 사진이 미국에서 발견됐다고 일본의 한 위안부 지원단체가 29일 밝혔다. 칸토 가쿠인 대학 하야시 히로후미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이 사진은 전쟁 후 위안부 여성들의 얼굴을 뚜렷이 보여주는 희귀 사진으로 평가된다. 사진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오키나와의 캠프 ‘코자’에 수용된 한국인 위안부 7명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설명에는 이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 왔으며 본국 송환전인 1945년 11월 캠프 코자에 모였다고 설명돼 있다.
  • ‘비운의 숭례문’ 어제와 오늘

    ‘비운의 숭례문’ 어제와 오늘

    한양 도성 축조공사가 한창이던 1390년대 중반. 공사 현장시찰에 나선 태조 이성계는 흥인문(동대문) 축조 현장에서 따르던 신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이곳은 강원도 중원과 동북면으로 통하는 요로인데, 방비가 허술해서야 되겠는가. 중국의 예를 본받아 옹성을 쌓도록 하라.” 서울 4대문 성곽이 생긴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국보 제1호 숭례문. 우리가 흔히 남대문으로 아는 이 문루건물은 조선왕조의 허망한 몰락이 갖는 비운의 상징성을 아직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고층 빌딩에 에워싸인 서울 도심지 남대문로 4가. 휘하에 거느릴 한 치의 성곽도 없이 마치 버려진 듯 서있는 국보 1호 숭례문의 몰골은 우리 문화재, 더 넓게는 역사와 문화를 보는 우리의 닫힌 시선과 몰지각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비운’의 연장선상에 있다. 옛 성곽건축의 특성상 중앙에 홍예문을 낸 하부 석축구조에 상부는 다포양식의 목구조를 한 이 건축물은 1세기가 넘도록 계속된 차량 진동과 매연 등 공해물질에 고스란히 노출돼 하루가 다르게 퇴락을 거듭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조사 결과 석재는 심각하게 산화되어 있으며, 목재와 단청도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가 의도한 숭례문의 비애 이 숭례문의 비운은 일제의 침탈과 궤를 같이 한다. 을사늑약 3년 뒤인 1908년(순종 2년) 일제는 전차 통행로를 확보한다며 이곳의 성곽을 모두 헐어냈다. 도시계획의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에 숭례문을 보호할 이렇다할 조치 하나 없이 조선왕조를 지탱한 성곽은 허망하게 헐려나갔고, 이곳의 석재는 아무나 가져다가 주춧돌이나 담장석으로 썼다. 이보다 앞선 1907년에는 일제의 군대해산령에 맞서 우리 군대와 일본군이 이곳에서 대치,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 조사 결과 숭례문 목재부에는 아직까지 당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일본군이 이 곳에서 우리 군대와 대치하던 중 기관총을 난사했으며, 그 격전으로 상당한 훼손을 입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제에 저걸 없애버려? 이후 상당 기간 숭례문은 ‘비보호’의 몰골로 방치됐다. 건물 중앙 홍예문 안으로는 전차가 지나다녔는데,‘전차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문루가 심하게 흔들렸다.’는 당시의 기록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왜인들 사이에서는 “차제에 숭례문을 헐자.”는 주장까지 나왔다.“쓸모없는 문루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몰골도 흉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1934년까지 사실상 방치해 오다 그해 일제는 숭례문을 국보 1호(당시는 보물 1호)로 지정했다. 일본 문화재를 국보로 지정한 것과 달리 우리 문화재는 격을 낮춰 보물로 지정한 것도 그렇지만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배경도 한마디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는 문화재의 가치 보다는 서울-경기-충청-호남 등 거리에 따라 문화재에 일련번호를 매겼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 일본 도후쿠(東北)대 특별연구원인 오다 히데하루(太田秀春)는 국내 학술지에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등 왜군이 이 문을 지나 한양에 입성한 사실을 기념해 일제가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는 요지의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으나 그 진위는 가릴 길이 없다. ●이윽고 논란이 일다 이런 엉터리 지정은 두고두고 ‘국보 1호’의 정당성 논란을 빚는 근거가 됐다. 논란이 일자 지난 96년 문화재청(당시 문광부 소속 문화재관리국)은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위원회’를 구성,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의 명칭과 등급의 적정성을 심사하기도 했으나 숭례문에 대해서는 ‘상징성이 있으니 그대로 두자.’고 결론을 내렸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련의 논의 과정 어디에서도 숭례문을 비롯한 4대문의 위용을 되살릴 성곽 복원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에도 문제제기는 있었다. 일부에서는 ‘국보1호의 상징성을 감안, 성곽도 없는 남대문보다는 한글 등 다른 문화재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문화재에 애당초 서열은 없다.’는 논리에 밀려 사그라지고 말았다. 지난 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돼 정부가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나설 때에도 일제의 의도를 배제하고 자주적인 문화재관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성곽 복원, 부끄럽지만 당장은…” 논란은 최근 서울시가 이 일대 교통체계를 바꿔 주변을 정비하면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서울시의 시도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국보 1호를 언제까지 이벤트의 대상으로만 봐야 하느냐?”며 “이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성곽을 복원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 물론 정부가 숭례문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숭례문 관리와 주변 성곽의 복원을 전제로 한 실측작업이 지난해 시작돼 현재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주변 교통여건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라면서도 “국보 1호라면서 정확한 도면 하나 갖지 못한 사실을 무척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복원해야 할 문화재 사업의 중요 과제”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실측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겠지만, 주변의 개발 실태나 지반 여건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라며 “정부도 추후 성곽 복원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당장은 이보다 기존 건축물 보존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현장 조사 결과 숭례문은 지반 부동침하와 차량 진동, 매연 등의 영향으로 하부 석구조가 뒤틀리고 있으며 북쪽에서는 석재가 뭉터기로 떨어져 나가거나 부식이 심해 부서질 지경이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때 새로 단장한 단청도 검게 그을려 국보 1호의 위신을 형편없이 구기고 있다.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자 국가 지정문화재의 얼굴 격인 숭례문. 그 역사성과 상징성에 견줘 볼 때 지금의 참담한 몰골은 우리의 문화적 뿌리의식과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뒤흔들기에 족하다. 성곽을 거느리지 못한 성문의 비애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 것인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국보1호’ 숭례문 略史 숭례문은 조선 왕성인 한양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98년(태조 7년)에 지었으며 지금 건물의 원형은 1447년(세종 29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지난 61∼63년 대대적인 해체·수리공사가 있었으며, 이 때 1479년(성종 10년)에도 크게 보수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숭례문은 돌을 쌓은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문루 건물이다. 포작은 ‘외삼출목칠포작 내이출목오포작(外三出目七包作 內二出目五包作)’ 형식을 가진 다포식이면서도 살미와 첨차의 구조가 강건하고 견실해 조선 초기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축기단 윗면에는 전돌로 쌓은 여장(女墻)을 돌렸으며, 동서 양쪽에 협문을 두어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했다. 기단 양측은 원래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순종 2년) 일제가 전차를 도입하면서 길을 내기 위해 헐어내면서 차츰 성곽이 멸실되고 말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중앙 통로 부분을 제외하고는 흙바닥이며 위층은 널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굵직한 두리기둥이며, 우진각 겹처마 지붕의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우고, 추녀마루에 잡상(雜像)과 용두를,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올려 놓았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한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피소

    |도쿄 이춘규특파원|2차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구일본군 지휘관이 미군 상륙에 앞서 오키나와 주민에게 집단자살을 강요했다는 교과서 등 각종 출판물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노벨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피소됐다. 24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당시 수비대장과 유족들은 집단자살강요를 사실로 기록한 저자와 출판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키로 했다. 집단자살강요 사실은 정설로 인정돼왔으나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되면서 소송이 제기된 것 같다. 신문에 따르면 오키나와전투 당시 자마미섬 수비대장을 지낸 우메자와 유다카(88)와 도카시키섬 수비대장 아카마쓰 요시쓰구의 동생 슈이치(72)는 오사카지방법원에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계획이다. 피고는 당시 집단자살강요를 다룬 ‘오키나와 노트’를 쓴 오에 겐자부로와 이 책을 비롯해 집단자살강요를 사실로 기술한 여러 서적을 출판한 이와나미출판사다.taein@seoul.co.kr
  • [23일 TV 하이라이트]

    ●스페이스-공감(EBS 오후 9시50분) 우리네 삶을 노래하고 가슴으로 말하는 가수 안치환, 그리고 그와 5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해 온 자유 밴드의 어쿠스틱 공연이 펼쳐진다. 그간 8장의 앨범을 통해 발표한 히트곡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광야에서’ 등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재편곡하여 부를 예정이다.   ●라이프n조이(YTN 오전 8시20분) 차갑고 쿨해서 더 매력적인 그 이름 아이스크림. 이젠 아이스크림도 튀어야 산다. 각양각색 다양하고 화려한 아이스크림이 판치는 아이스크림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아하게 찍어먹고, 바삭바삭 튀겨먹고, 건강까지 덤으로 챙기는 이색 아이스크림의 톡톡 튀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사랑찬가(MBC 오후 7시55분) 새한에게 청혼을 받은 소라. 하지만 새한의 마음이 온통 순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비참해진다.한편, 장태에게 소라의 결혼 소식을 전하던 순진은 알게 모르게 화가 나고, 장태는 순진이 화를 내는 이유가 새한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상황!토요일(SBS 오후 6시) 4살배기 울보공주 예빈이가 해맑은 모습으로 변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3시간 이상을 울어댄 예빈이. 국내 최고의 육아 전문가들이 예빈이의 울음 속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친다. 신세대 아빠가 가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자 동시에 서툴기만 한 신세대 엄마들의 육아문제도 살펴본다.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이영남은 아픈 마음으로 한산도 청야(淸野)를 명한다. 불타는 한산도보다 더 가슴 아픈 건 곧 이곳에 일본군의 군기가 꽂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영남 일행이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인 경상도 초계로 돌아오자 한산도의 상황을 짐작한 송희립은 화를 못 참고 우치적의 멱살을 잡는다.   ●위험한 사랑(KBS2 오전 9시) 정현은 의혹이 더욱 짙어진다. 강제가 있는 바에 돌아가 애써서 강제의 옛 여자에 대해 떠보고, 강제는 모른 척 매우 괴로워한다.수완은 효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효실은 점점 마음이 돌아선다. 한편, 정현은 추억카페로부터 온 편지의 주소를 보고 카페를 찾아간다.
  • [부고]

    ● 김도창 前 법제처장 김도창 전 법제처장이 17일 오후 7시 2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73세. 고인은 서울대 법대 교수와 한국공법학회 회장 등을 지내며 국내 행정법학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백균(뉴욕심장내과병원 원장), 용균(이수페타시스 대표), 성균(무한투자 대표)씨와 사위 박시국(LA스티브박심장내과병원 원장)씨. 빈소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8시.(02)3010-2230. ●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 광복군 출신인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이 17일 밤 숙환으로 별세했다.81세. 전남 영광 태생인 선생은 1943년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돼 중국 산시성(山西省) 주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됐지만 중국 충칭(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듬해인 1944년 11월 광복군 입대를 위해 일본군을 탈출했다.1945년 4월부터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미망인 김명신 여사와 장남 운성씨 등 2남. 빈소는 전북 정읍시 연지동 302-15 자택. 발인은 19일 오전 9시. 장지는 정읍시 시기동 선영.(063)536-4441.●구필서(농업)관서(교육인적자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씨 모친상 18일 서울대병원, 발인 20일 오전 6시30분 (02)2072-2011 ●채희수(전 한나라당 충북도당 여성부장)씨 모친상 박환규(충북도 기획관리실장)씨 빙모상 18일 청주병원, 발인 20일 오전 11시 (043)224-2897 ●김인성(mbn 영상취재부 차장)씨 빙부상 18일 한양대 구리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 (031)560-2433 ●김영(전 일본가승화학 전무이사)씨 별세 희철(한국효소 대표)희석(TERRA JAPAN 사장)씨 부친상 조명행(전 주칠레 대사)윤동진(미국 Y Inc. 사장)씨 빙부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0일 오전 9시 (02)3010-2293 ●심영학(전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원주기독병원장)씨 별세 17일 연세대 원주기독병원, 발인 19일 오전 7시 (033)741-0986 ●이태우(부천대 컴퓨터제어과 교수)시우(사업)씨 모친상 김재수(현대증권 법무실장)씨 빙모상 17일 동두천 이담장례식장, 발인 19일 오전 9시 (031)861-6644 ●김대권(법무법인 동명 대표변호사·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씨 별세 대석(자영업)대기(기획예산처 재정운용기획관)씨 형님상 1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1일 오전 6시 (02)3010-2292
  • [일요영화]

    [일요영화]

    ●케인호의 반란(KBS1 오후 11시30분) 할리우드의 영원한 터프가이인 ‘보기’ 험프리 보가트의 후반기 작품이다.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끝도 없다. 고독한 영웅에서부터 최고의 센티멘탈리스트, 흑백영화 시대의 대표 배우까지. ‘카사블랑카’(1942)에서 프렌치 코트에 깊숙이 파묻힌 모습이나 누아르의 명작 ‘말타의 매’(1941)에서의 사설탐정 등 그를 떠올리는 장면은 수없이 많다.‘케인호의 반란’에서는 이전과 달리 광기에 빠진 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선사하고 있다. 이 영화를 마치고 6편의 작품에 얼굴을 비친 뒤 1957년 5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식도암으로 숨졌다. 촬영감독 출신으로 전쟁영화를 주로 다뤘던 이 영화의 연출가 에드워드 드미트리는 ‘젊은 사자들’(1958)로도 유명하다. 여기에는 말론 브랜도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나온다. ‘케인호’의 원작은 허만 워욱의 퓰리처상 수상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는 연극으로 장기 상연돼 인기를 모았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필립 프랜시스 퀵(험프리 보가트)은 미 군함 케인호의 신임 선장으로 부임한다. 일본군과 맞서는 임무를 띤 케인호에서 퀵 선장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부대를 통솔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부대 지휘에 있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정신적인 불안증세를 보이고, 이를 눈치 챈 부하들은 논쟁을 벌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스티븐 매릭(본 존슨)중위는 정신적 공황에 빠진 퀵 선장의 지휘권을 박탈하기에 이른다.1954년작.124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현기증(EBS 오후 1시40분) ‘서스펜스, 스릴러의 아버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는 새로운 시각 효과를 여럿 선보인다. 프랑스 소설 ‘죽음의 입구’를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스카티가 현기증을 일으키는 순간적 왜곡효과 장면을 위해 히치콕 감독이 15년 동안 고민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도 있다. 관객의 허를 찌르는 히치콕 감독의 연출은 후배 감독들에게 교과서로 자리잡고 있다. 스카티 퍼거슨(제임스 스튜어트)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경찰관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에 뛰어든다. 어느 날 대학 동창 개빈 엘스터(톰 헬모어)로부터 자신의 부인 매들린(킴 노박)을 미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자살을 시도하던 매들린을 구하게 된 스카티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매들린과 함께 교외 수녀원에 간 스카티. 그가 잠시 현기증을 느끼는 동안 매들린은 그만 추락사하고 마는데….1958년작.120분.
  • 북관대첩비 8·15때 서울에

    북관대첩비 8·15때 서울에

    |도쿄 이춘규특파원|북관대첩비가 오는 8·15 남북 공동행사에 맞춰 서울에 온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약탈된 뒤 100년 만이다. 14일 도쿄에 있는 복수의 외교 소식통들은 “북관대첩비가 서울에서 열리는 8·15 남북 공동행사 때 반환될 것”이라며 “그 자리에서 남북한과 재일동포들이 참가하는 북관대첩비 본국 송환 축하 행사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복수의 소식통들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돌려받은 북관대첩비를 일정 기간만 서울에서 전시하고, 원래의 자리인 함경북도 길주로 빠른 시일내에 옮기기로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이 소식통들은 “야스쿠니신사측은 그동안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고, 남북한이 합의하면 돌려준다는 입장을 밝혀왔다.”면서 “이미 남북이 합의했고, 일본 정부도 남북이 합의하면 돌려주기로 한 만큼 8·15행사에 맞춰 반환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앞서 서울에서 열린 제 1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북관대첩비 반환에 합의했고, 이같은 합의를 토대로 한국 정부는 지난달 28일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했다. 통일부는 북관대첩비가 반환되면 우선 국내로 반입해 보존ㆍ복원처리한 다음 국내에서 전시한 뒤 북측에 전달한다는 입장이다. 높이 187㎝에 1500자의 글을 담고 있는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경성과 길주에서 의병장 정문부가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숙종 35년(170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소장이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가져간 뒤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왔다. taein@seoul.co.kr
  • 부끄러운 ‘코레코레아’

    부끄러운 ‘코레코레아’

    “‘코레코레아’ 때문에 전통 관습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한국인 선원들이 남태평양 섬나라인 키리바시(Kiribati)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일삼다 한때 정박을 금지당하는 등 국제적 망신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원양어선들로부터 받는 입어료와 고기잡이가 주요 생계수단인 작은 섬나라가 성(性)산업의 등장으로 전통 도덕·윤리가 무너지고 쉽게 돈을 벌려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는 등 ‘쑥대밭’이 됐다.‘코레코레아’는 키리바시에서 한국 선원들과 성매매를 하는 현지 여성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이 나라 국민의 90% 이상이 알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청소년위원회가 6일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ECPAT-KOREA)와 함께 공개한 ‘한국 선원의 키리바시 청소년 대상 상업적 성착취 실태조사’에서 드러났다. 키리바시의 성매매 실태가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해 11월.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 ESCAP) 주최로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동의 상업적 성착취에 관한 동·아태지역 행동계획 이행 점검회의’에서 키리바시 시민단체가 폭로하면서부터다. 이후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관련 보고서 초안에 한국을 아동인권 가해국으로 지목했다. 위원회는 이에 따라 지난달 24∼27일 현지에서 코레코레아와 한국인 2세, 한국 선원 등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곳에 청소년 성매매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 한국 배가 주로 정박하는 수도 타라와의 베시오 항구 주변의 술집에서 한국 선원들이 현지 여성들과 술을 마신 뒤 선실로 데려가 성매매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매매에 건네는 대가는 50∼100호주달러(한화 2만 5000∼5만원)나 담배나 옷 등 현물이다. 지난해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보고서에 따르면 코레코레아는 80명, 위원회 실태조사팀 조사결과로는 30∼50명 정도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16∼20세 사이의 청소년으로 18세 이하와 이상이 각 70%,30%를 차지했다. 조사팀 단장인 내일여성센터 김정만 대표는 “이들은 대부분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만 마친 빈곤층 여성으로 가족들을 먹여살릴 돈이 필요해 성매매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다.”면서 “2003년에는 성매매가 사회문제화되자 정부 차원에서 한국 배의 정박을 한달 동안 금지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조사팀과 인터뷰한 한 한국인 선장은 “남태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선장의 포세이나(참치잡이 배)는 모두 29척으로 병역특례 목적으로 3년 동안 배를 타는 고3 실습생들이 꼭 성적인 문제를 낳고 있다.”면서 “한국인 선원와 코레코레아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5명 정도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현지 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조사팀은 전했다. 한 주민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선원들과는 달리 한국인들만 성매매를 한다.”면서 “이 곳 청소년들의 도덕과 윤리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하소연했다. 여성운동가 마레는 “한국 선원들 때문에 키리바시에 처음으로 상업적인 성산업이 생겼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코레코레아들이 아예 직업을 가질 의욕을 잃어버려 꿈도 접고 그저 한국 선원들만 오기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국을 비난했다. 키리바시 정부지원 보건기구 관계자인 카브웨어는 “에이즈 감염자가 생기는 등 여성들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해양수산부와 외교통상부와 합동으로 키리바시를 포함한 남태평양 섬에서의 성매매 실태 조사를 확대하고, 정부간 범인 인도조약을 체결, 성매매범에 대해서는 청소년성보호법과 성매매방지법을 해외에서도 엄격히 적용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국제 비정부기구와 함께 현지 피해 여성들에 대한 보건조사와 의료,2세에 대한 교육 지원 활동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키리바시는 어떤나라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중부의 적도와 날짜변경선이 교차하는 곳에 있는 영연방 국가. 길버트·라인제도 등 33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면적은 811㎢, 인구는 8만 7900명(2003년). 한국 배가 주로 머무는 수도 타라와는 인구 1만여명의 이 나라 유일의 상업도시다. 공용어는 영어.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로 일본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1979년 7월 영국에서 독립했고 1980년 5월 한국과 단독 수교했다.
  • 7월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

    국가보훈처는 구한말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1879∼1915)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9일 발표했다. 평남 성천 출신인 선생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이진용 의병부대에 투신,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면서 1908년 황해도 안평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해 명성을 떨쳤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병부대 해산을 거부하고 이듬해 김진묵 의병부대의 부장이 되어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 강원, 함경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넘나들며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을 공격했다.1915년에는 고향인 성천군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 군·경은 물론 친일 밀정 등을 처단했으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마을로 내려오다가 일경에 발각돼 체포됐다. 그 해 9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일왕부처 사이판 한국인위령탑도 방문

    |도쿄 이춘규특파원|아키히토 일왕 부처가 28일 위령방문 중인 미국령 사이판섬에서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을 방문, 예를 표시(배례)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일왕 부처는 오키나와 출신자들을 위령하는 오키나와탑에도 들렀다. 한국평화기념탑이나 오키나와탑은 당초 예정에는 공표되지 않은 곳이다. 이와 관련, 현지에서는 전날 김승백 사이판 한인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일왕 부처의 한국평화기념탑 방문을 요청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까지 나온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일왕 부처는 한국평화기념탑 방문에 앞서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추도하기 위해 사이판섬 북부의 중부태평양 전몰자 비에 헌화했고, 수많은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뛰어내려 숨진 `반자이(만세) 절벽´을 방문, 추도하는 등 사이판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taein@seoul.co.kr
  • 일왕도 과거사 미화 동참

    |도쿄 이춘규특파원|아키히토 일왕 부처가 27일 2차대전 격전지였던 미국령 사이판을 위령 방문했다. 일왕이 과거 식민지배 지역을 위령 목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일왕은 이날 정부 전용기로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기에 앞서 발표한 출국사에서 “지난 대전 중 해외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추도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며 “오늘의 일본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서 구축된 점을 늘 유념하겠다.”고 말했다. 일왕 부처는 이날 오후 유족회와 전우회 등의 대표를 만난 데 이어 28일에는 일본 정부가 1974년 사이판 북부에 건립한 ‘중부 태평양 전몰자 비’를 방문해 헌화한다. 또 많은 옛 일본군 병사가 미군에 투항을 거부하다가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반자이(만세) 절벽’과 원주민 희생자 933명의 이름을 새긴 마리아나 기념비,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5000명의 추도시설인 제2차 세계대전 위령비 등을 찾아 헌화할 계획이다. 사이판은 2차대전 말기 격전지로 변해 1944년 6·7월 미군이 상륙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징용자를 포함한 현지 거주 민간인의 60% 이상과 주둔 옛 일본군의 90%(4만 3000여명) 등 6만명 이상이 숨졌다. 일본군의 강력 저항으로 미군도 1만 5000여명이 희생됐다. taein@seoul.co.kr
  • [특종] 나는 모국의 스파이였다

    [특종] 나는 모국의 스파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개인 임업장을 사재를 털어 꾸며놓은 전 내무부장관(제6대) 장석윤(張錫潤)(65)옹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미군에 협조한 국제「스파이」였다. 그는 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을 어기고 김종원(전 치안국장)씨의 기용을 거부한 경무대의 반항투사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10만 공무원 대신 10만 그루의 나무를 호령하는 나무장관이 되었다. 동남아 휩쓸던 청년 시절 이젠 10만 그루 나무 호령(號令)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마산리 15번지 3만 5천 평의 땅에 1백 50종의 나무를 질서정연하게 심어놓고 하루 4시간씩 잠자면서 10만 그루의 각종 나무를 돌보는 장석윤(張錫潤)옹-. 그는 횡성군 둔내면에서 태어나 서울 제일고보(경기고교 전신)를 졸업한 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테네시」주「벤트·빌드」대학을 졸업했다. 유색인종 박해 속에서 갖은 고생을 겪으며 장옹은 이승만(李承晩)박사와 함께 교민생활 지도를 해오던 중 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당시 미국대통령「루스벨트」씨의 부인과 친교가 두터웠던 이박사의 소개로 비밀히「루스벨트」대통령이 조직한 COI(OSS 및 CIA 전신) 제1기생으로 조직에 가담, 소정의 교육(스파이 교육)을 마친 장옹은 한국인으로서는 단신 미국 21명과 함께「파키스탄」의「카라치」시에 공수되어 첩보 활동에 나섰다. 2차대전 때 미의 COI 대원 「버마」전투에 참가, 활약해 「히말라야」산맥을 낀「버마」전투에 참여한 장옹은 일본군 전선에 잠입, 정보를 수집하여 무전으로 미「셰넬」장군에게 타전, 작전계획을 세우도록 했으며 또한 일본군 포로 신문, 포로수용소 안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007을 방불케 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사선을 넘나드는 활동 속에서도 장옹은 이박사 김구(金九)주석 간의 비밀문서 연락을 맡아「티베트」고원지대를 넘어 중경(重京)을 넘나들었으며 때에 따라 미군 장교와 일본군 장교 및 외교관 신분을 마음대로 붙이고 활동했다. 45년 조국해방과 더불어「하지」장군과 함께 귀국한 장옹- 군정 당시 좌익계열의 만행을 낱낱이 파헤쳐 치안을 유지하도록「하지」장군에게 건의해 왔으며 이박사를 측근에서 도왔다. 6·25동란이 일기 며칠 전 1950년 6월 18일 당시 내무부장관 백성욱(白性郁)씨의 권유로 치안국장에 기용된 장옹은 서울이 괴뢰들의 발굽에 짓밟히던 날 노동자로 변장, 가족을 서울에 둔 채 홀로 적정을 살피고 한강을 넘어 아군 진지로 탈출했으며 대전에 도착한 장옹은 일선 경찰 정보망을 통해 괴뢰군의 선발대 동태를 파악, 육군에 정보를 제공, 큰 공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때의「에피소드」로 당시 괴뢰군이 천안, 온양을 거쳐 공주 방면으로 대전을 침공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치안국장 장옹은 그 사실을 국방부장관에게 연락했으나 국방부장관은 허위정보라고 대발노발, 정보제공자인 온양경찰서장을 총살하겠다고 으르렁거리다가 후에 정확한 정보임을 확인한 장관이 사과하기도 했다는 것. 치안국장 재직 30일만에 사표를 낸 후 52년 1월 내무부장관에 발탁된 장옹은 국군이 당시 총부처장의「지프」와「프란체스카」여사의「지프」를 강제징발하였음을 폭로했고 국군 장병들의 가슴에 명찰을 달도록 권유, 실행케 했음을 회고하면서 부산 정치파동 때 장총리(장면(張勉)박사)의 사표를 직접 받아 오기도 했다는 장옹의 회고담. 또한 지방자치제를 실행했으며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하는 산파 역할도 맡아 했다고 밝혔다. 특히 내무부장관 때 거창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온 김종원(金宗元)씨의 경무관 기용을 이박사로부터 세 번이나 명을 받은 장옹은 매번 공무원 자격문제를 들고 거절했었다는 것. 국민을 과신한다고 이박사의 약점을 밝히는 장옹은 그래도 이박사는 부모와 같이 섬겼다면서 미국에서의 인연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뒤 국도신문(國都新聞)사 사장을 역임했고 3대 국회의원으로 향리 횡성군에서 당선된 무소속 민의원으로서 자유당의 만행을 보면서도 이박사와의 인간관계로 말 못하는 벙어리 국회의원으로 생애에 오명을 남겼다는 장옹…. 그래서 4대에는 자유당 공천 국회의원으로 역시 벙어리 의원을 지냈다는 장옹은 3년 뒤쯤 나올 자서전을 통해 모든 것을 해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4·19 의거 후 고향에 내려온 장옹은 현재의 마산리 15번지 3만 5천 평을 구입하여 자신이 밥을 지어먹고 빨래를 하면서 나무를 심기 시작, 태기산(泰岐山)의 정목 등 1백 50종 10만 그루의 나무를 가꾸며 살아 가고 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나무와 씨름하면서 찾아드는 농민들에게 일일이 접목, 전지 방법을 비롯 이식재배, 시비방법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각종 수목이 자연스럽게 꽉 들어찬 장옹의 임업장에는 멀리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의 관광객들이 찾아들 뿐 아니라 인근 각급 학교 어린이들의 소풍터로 알려졌고 심지어 미군들까지 찾아와 놀다가는데 하루 보통 1백 여명의 구경꾼이 오고 많은 학생들이 실습을 위해 찾아들고 있다. 잣나무 4년 만에 결실케 산림 물려줄 젊은이 찾아 임업과 목축업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고된 줄을 모르고 일한다는 장옹은 지난 해 목초로는 최고의 영양가를 지녔다는「코리언·레이스·패스자」라는 풀을 발견, 재배하고 있다. 이 풀은 30년 전 미국 선교사가 개성 지방에서 채취하여 본국에 보냄으로써 영양가가 제일 많은 목초로 밝혀져 현재 미국에서는 목초지의 20%가 이 풀을 재배하고 있으며 자꾸 번지고 있다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아직 풀 이름조차 없다는 이야기. 장옹은 앞으로 임업장에 5백종의 수목을 더 심고 농림학원을 세워 자신이 직접 후배 양성을 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15~2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 잣나무들이 장옹의 임업장에서는 불과 4년 만에 잣이 달리도록 비배관리 및 이식재배 기술을 보여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으며 넓은 초원과 하늘이 안보이는 숲길은 관객들의 환성을 사고 있다. 임업장은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진 젊은이에게 넘겨주는 것이 소망이라는 장옹의 가족으로는 현재 서울에 부인과 딸 셋이 있다. <원주 = 정준교(鄭俊敎) 기자> [ 선데이서울 68년 11/3 제1권 제7호 ]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최영섭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최영섭 씨

    우리는 분단시대에 살고 있다. 좌로, 우로 한(恨)도 많다. 그래서 목놓아 ‘저편의 너를’ 부르고 그리움으로 손을 뻗는다. 광복 60년이 됐지만 분단의 노래는 여전히 단장(斷腸)의 메아리다. ‘봉선화’(1919년) 이후 한국 가곡 86년사(史)에서 가장 애창된다.‘그리운 금강산.’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켜켜이 담아냈다. 시보다 더 아름다운, 소설보다 더 감동으로 승화시킨 악상(樂想)이다.‘통일 주제가’로 ‘민족 가곡’으로 사랑받는다. 들을수록 애틋하고 향수가 있고 경건하다. 옛날이었다. 한 시인이 음악가를 꿈꾸는 중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닌다. 시인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다. 시인은 “이봐, 한 수 읊을 테니 적어봐.”라고 했다. 그러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라고 소리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성질 급한 학생은 “다음은요?”라고 했다. 시인은 다시 술을 마시며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라고 했다. 학생은 또다시 “다음은요?”라고 보챘다. 시인은 또 목구멍으로 술을 꼴깍 넘기며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학생은 이튿날 가곡을 만들어 화답했다. 1954년 어느 날이었다.25살의 젊은 청년이 처녀가곡집을 냈다. 그러자 서울신문 문화면 전체에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게재됐다.‘악보 출판치고는 사상 최악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장래를 정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시인은 2003년 작고한 조병화씨. 해방 직후 경복중학에 다니는 최영섭 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닐며 ‘추억’이라는 시를 발표했을 때의 상황이다. 두번째는 청년 최영섭이 가곡집을 내자 당시 작곡가 나운영씨가 주저없이 나서 역설적으로 호평했던 일화다. 최영섭(77)씨.‘한국의 슈베르트’라고 한다. 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상과 특유의 직감으로 무려 200여곡의 가곡을 작곡해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중 ‘누구의 주재런가∼’로 시작되는 ‘그리운 금강산’은 새삼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민족의 송가(頌歌)로 널리 애창된다. 이 노래가 탄생된 지 올해로 45년째.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최씨를 만났다.“희수(喜壽)가 됐으면 다 평화로워야 하는데….”라고 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지난 4월에 막내아들을 잃었다.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4년 동안 온 집안 식구가 백방으로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가슴에 못질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 최씨는 현재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 한 주택가에서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혼자 쓸쓸히 지내고 있다. 원래 세 아들을 낳은 본처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참 동안 혼자 살다가 모 방송국 PD의 중매로 둘째 부인을 만나 살았지만 1997년 뜻하지 않은 이유로 헤어졌다. 평생 살려고 약속했던 부인에게 재산을 다 주고 났더니 빈털터리가 됐단다. 그룹 ‘들국화’ 멤버였던 큰아들이 경기도 과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원하지만 집에 쌓인 책이며 음악자료들이 정들어 아직은 혼자 지내기로 했다. “평생 가곡을 만들면서 살아왔어요. 올해가 광복 60년이고 분단 60년이 됩니다.‘그리운 금강산’을 만들 때는 곧 통일도 될 것 같았는데. 솔직히 더 이상 ‘그리운 금강산’이 불려져서는 안됩니다. 세월이 지난 뒤 ‘아, 옛날 그런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면 족하지요.” ‘올해의 의미’에 대해 오는 11월11일이 제1회 가곡의 날로 선포된 점을 강조했다. 최씨 등 가곡인들의 오랜 노력 끝에 얻어진 결실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9월8일부터 매주 목요일 가곡 연주회를 갖는다. 아울러 전야제 행사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옛 중앙기상대 건물 바로 옆 홍난파 선생이 살던 집에서 ‘봉선화의 집’이라는 현판식을 갖는다. 최씨는 “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1∼2년 전 협박에 못이겨 일본군가를 편곡했는지는 모르지만 생전에 민족 가곡 100여개를 작곡할 만큼 우리들에게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준 위대한 작곡가가 아니냐.”고 강조했다.‘봉선화’를 작곡하는 등 평생의 95%는 우리 가곡과 동요에 헌신하고 독립을 간절히 원하며 살았는데 왜 그가 친일파로 매도돼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1961년 8월이었다.KBS(남산 시절)에서 ‘남산에 올라’‘한강의 노래’‘낙동강 칠백리’‘백두산은 솟아있다’ 등 정열적인 작곡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한용희(‘파란 마음 하얀 마음’ 작곡자)씨가 남산 ‘산길다방’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다짜고짜 “최 선생, 한강 백두산 낙동강을 다 다루면서 정작 금강산은 왜 안하는 거요.”라고 불쑥 말했다. 아차, 무릎을 탁 친 최씨는 그 길로 시인 한상억(92년 작고)씨를 찾아갔다. 숨가쁜 목소리로 “한 선생님, 여태껏 금강산이 없습니다.”고 했다. 한씨는 “허허, 나는 이미 다 써놓고 있었네. 안그래도 줄 참이었지.”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벽 2시까지 ‘콩나물’과 씨름했다. 다른 곡 같으면 며칠이 걸렸을 법한데 ‘그리운 금강산’은 4∼5시간 만에 완성했던 것. 이튿날 방송국에 악보를 전달하고 곧 녹음에 들어갔다. 서울대 음대 동창인 이남수씨가 지휘했다.3일 뒤부터 KBS 가곡프로그램인 ‘이주일의 노래’에 연달아 방송됐다. 팬레터가 쇄도했고 32세의 청년 최영섭은 일약 가곡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해 6·25전쟁 발발 12주년 때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 ‘아름다운 내강산’이란 주제로 KBS교향악단·합창단 등의 협연으로 ‘최영섭 가곡특집’을 발표했다. 이때 받은 30만원(당시 집 한채 값)으로 둘째 아들의 병원비를 충당했다.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국내외 정상급 성악가 50여명의 CD에 담겨 있다. 조수미를 비롯해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소프라노 홍혜경, 그리고 세계적 음반회사 데카에서 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마이월드(My World)’에도 ‘그리운 금강산’이 포함돼 국내외에서 애창된다. 최씨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동네 병원에서 축음기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다. 또 마니산에 올라 연평도 쪽에서 들려오는 ‘경기뱃노래’에 매료됐다. 초등3학년 때 호르겔피아노를 처음 접하면서 천부적 음감을 확인했고 이화여고에 다니는 누나한테 음악을 배웠다. 인천중학 재학 시절에는 바이엘과 체르니를 독학으로 배웠다. 서울 경복중학으로 전학한 후 이화여대의 임동혁 교수한테 작곡수업을 받았다.49년 경복중학 6년(당시 6년제)때 첫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시절에 김성태 선생을 만나면서 오늘날 민족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다. “올해 김성태 선생한테 세배를 갔더니 세뱃돈 3만원을 주더군요. 그분은 96세의 나이에도 동요를 작곡하고 있어요. 여전히 배울 점이 많아요.” 최씨는 지금까지 가곡 외에 편곡 1600여곡, 기악곡 40여곡을 만들었다. 미발표된 것도 수십곡에 이른다. 재산은 하나도 없지만 가득 쌓인 문학책과 음악자료들을 볼 때마다 남부럽지 않게 여긴다. 혼자 맥주 마시며 책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올 가을에 발표될 신곡 20곡을 기대해 달라며 식지 않은 창작열을 과시했다. 오래전부터 ‘고운산’이란 필명으로 작사도 한다. 건강유지 방법을 물으니 “지하철이 곧 헬스클럽이다. 음악이 있어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며 웃었다. 생활비는 저작권료로 받는 월 200만∼300만원으로 충당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강화 출생 ▲49년 경복고 졸업, 제1회 작곡 발표회,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 사사 ▲54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재학시절 김성태 교수에게 작곡이론 사사.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학원 석사 ▲61년 ‘그리운 금강산’ 작곡 ▲62년 6·25 12주년때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최영섭 특집 가곡 발표회’ 개최. 이후 작곡발표회 5회. ▲76년 드라마 주제가 ‘아, 이조 오백년’ 작곡 ▲95년 광복50주년 기념교성곡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전 24장 발표. ▲가곡 ‘모란이 피기까지’‘추억’‘망향’ 등 200여곡 작곡. ▲인천여중고·인천여상고·이화여고·한양대·상명여대·세종대 등에 출강. ▲현재 작곡가회 부회장, 한국예술가곡진흥회 회장. ■ 상훈 인천시문화상(59년), 경기도문화상(61년),MBC방송대상(87년), 대한민국 방송대상(92년),MBC가곡 공로대상(94년), 한국음악상(96년), 세종문화상(98년), 서울시문화상(2001년)
  • 日종군위안소 상하이만 149곳

    |상하이 연합|중국 상하이(上海)에 과거 일본군을 위한 종군위안소가 149곳 있었으며 이중 1931년 11월에 세워진 사상 최초의 위안소 건물이 원형 보전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상하이 사범대학 역사학과 쑤즈량(蘇智良)교수(중국 위안부 연구센터 주임)가 지난 13년 동안 상하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쑤 교수는 16일 “13년간 연구·조사한 결과 상하이는 일본군 위안소가 가장 먼저 운영되고, 가장 많은 위안소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됐다.”며 “확인 과정에서 위안소 숫자가 너무 많은 데 놀랐다.”고 말했다. 쑤 교수가 확인한 149곳의 위안소는 일본 해군 사령부가 있었던 훙커우(虹口)의 70여곳을 비롯, 충밍(崇明), 푸둥(浦東), 우쑹(吳淞), 자딩(嘉定)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특히 훙커우구(區) 둥바오싱(東寶興)로 125룽(弄)에는 당시 일본군 장교를 위한 위안소였던 ‘대일살롱(大一沙龍)’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전돼 있다. 대일살롱은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뒤인 1931년 11월부터 일본군이 패전한 45년 8월까지 운영됐다. 또 근처의 쓰촨베이(四川北)로 1746룽에는 일본군 사병을 위한 집단위안소인 ‘메이메이리(美楣里) 위안소’ 건물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위안소 건물에는 대부분 일본식 미닫이 창문과 후지산 모형 등 조각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36년부터 당시 이곳에 체류하던 조선인 상인들이 운영하던 술집 등이 일본군 위안소로 대거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쑤 교수는 덧붙였다.
  • 옛 전쟁터에서 벌이는 평화축제

    광복 60주년 기념 제2회 바람예술축제가 오는 8월13∼21일 일본군 전적지가 산재해 있는 제주도 남제주군 송악산 일대에서 열린다. 15일 제주도에 따르면 섬아트문화연구소(소장 김해곤)가 주최하는 ‘決7호 작전’ 축제에는 300여명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참여해 일본군 전적지인 송악산 진지동굴과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등지에서 바람과 관련한 설치·영상·뉴미디어·깃발예술 등 여러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축제는 최근 광복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 국무총리·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로부터 ‘광복 60주년 기념 국민통합, 화합과 참여의 공동체 실현 문화사업’으로 선정됐다. 축제 관계자는 “축제 이름을 ‘決7호 작전’으로 붙인 것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 일본이 미군의 일본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전개했던 작전 이름을 딴 것”이라며 “전쟁을 위해 사용됐던 공간에서 평화와 화합의 문화예술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암울했던 과거사를 뒤돌아보고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기원하는 의미로 붙였다.”고 말했다.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데스크시각] “타이완은 타이완일뿐이다”/이석우 국제부 차장

    ‘덴노(일왕)’의 더듬더듬 이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린원슝(林文雄) 4형제와 가족들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조건 항복’ 소식을 남의 일인양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1945년 8월15일. 타이완의 한 작은 마을의 린씨 일가.1989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작품 ‘비정성시(悲情城市)’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의 빈 자리를 총칼로 밀고 들어온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와이성런(外省人·대륙에서 온 중국인). 린씨 형제들은 이들과의 조우 속에서 뜻하지 않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3년이 지난 48년 여름. 영화는 린원슝의 늙은 아버지가 어린 손자와 며느리, 그리고 와이성런의 학대로 백치가 된 둘째아들 원량(文良)과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창 너머를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80년대 암울하던 억압적 분위기에서 민중의 삶을 흑백 기록영화처럼 그려내며 타이완영화의 새 물결을 열었던 감독 허우샤오셴(候孝賢)은 이 영화에서 타이완 사람들의 정체성 혼란과 부재, 그런 민초의 삶을 그려냈다. 린씨 가족처럼 타이완인에게 일본이나 국민당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장남 린원슝은 권력의 비호를 받는 와이성런 조폭에 살해되고 막내 원칭(文淸)은 반체제인사로 찍혀 국민당에 잡혀갔다. 일본군에 징용간 셋째아들은 소식이 없고…. 오직 백치가 된 아들만이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랜 장마철의 우중충함과 음습한 끈적거림의 타이완 기후처럼 영화는 내내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통치에서 명나라와 만주족 청나라로 지배자는 바뀌어 왔다. 민초들은 “내가 누군인가.”를 확인할 필요도, 그런 겨를도 없이 지배자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민초들이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것은 장제스의 유산과 국민당 1세대의 힘이 퇴색되고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한 80년대였다. 이런 움직임은 연극·영화, 노래와 무용, 미술과 비평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진행됐다. 2000년과 2004년 재야변호사인 천수이볜(陳水扁)의 두차례에 걸친 총통 당선과 사회 전반을 휩쓴 독립열기는 이같은 정체성 찾기 노력의 정치적 귀결로도 볼 수 있다. 국민당 철권통치가 유지되던 70∼80년대 타이완에 유학했던 몇몇 지인들은 “최근의 타이완 방문은 새로운 경험”이라며 놀라워했다. 베이징 표준어가 듣기 어려워졌고 타이완 방언이 이를 대신한 것도 변화를 상징한다. 이런 변화는 반면 대륙의 중국인들을 당혹스럽고 성나게 한다. 중국의 한 학자에게서 미국의 한 국제학회에서 겪은 일을 들은 적이 있다. 학회에서 젊은 타이완대학 교수를 발견한 이 베이징대 교수는 반가운 마음에 “중국 분이시죠.”라며 말을 걸었더니 상대방은 냉랭한 표정으로 “아뇨. 저는 타이완사람입니다.”라고 외면하더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타이완이 독립선언을 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겠다고 공언하고 있다.‘설마, 전쟁까지야.’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현지 체감온도는 상상 이상으로 뜨겁다.“천 총통이 베이징올림픽을 이용해 독립선언을 할 것”이란 추측이 돌자 “그까짓 올림픽 포기하고 ‘조국수호 전쟁’을 벌이자.”는 격앙된 분위기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다. 식자층일수록 더 격렬하게 반응하는 데 심각성이 있다. 지난 7일 타이완 국민대회는 헌법을 개정, 간선기구를 거치지 않고 국민투표로 곧바로 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하는 등 독립선언을 향한 또 하나의 포석을 놓았다. 노무현 정부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즉 미군의 방어목적 외의 이동과 한반도 밖의 작전·활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제동을 거는 것도 상당 부분 타이완발(發) 군사위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까닭이다. 유사시 중·미간의 군사충돌에 끌려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미국 정부가 천 총통의 독립선언 움직임을 찍어누르면서도 중국의 무력사용엔 군사 개입을 불사하겠다는 경고의 수위를 최근 더 높인 것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타이완 정체성 찾기가 갖는 문화·역사적 의미는 별도로 하고, 그 강한 휘발성과 폭발력 때문에 우리 관심 밖일 수가 없다. 타이완 해협의 불똥이 우리 경제와 안정을 허물어뜨리고 존립 기반을 흔들어댈 수 있는 그런 지정학적 조건에, 그런 동북아시대에 우리는 서 있고 살아가고 있다. 이석우 국제부 차장 jun88@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1534년 8월25일,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괴선박이 바람에 떠밀리듯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네가시마(種字島)의 가도쿠라곶(門倉串)으로 다가왔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규슈의 최남단에 딸린 작은 섬. 난파선이 분명했다. 이 배는 중국인 오봉(五峯)의 배였다. 오봉은 왜구 왕직(王直)을 말한다. 이 ‘중국 왜구’의 배에서 남만인(南蠻人)이 무려 110여명이나 내렸다. 이들은 인근의 유서깊은 시온지(慈遠寺)로 안내받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시온지는 예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학승, 상인들이 머무는 숙방(宿房)이 있던 절. 배를 수리하고 다시 출항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파선 주인 오봉은 중국인 왜구 왕직 섬의 도주가 긴 쇠막대기를 보고서 “무슨 물건이냐.”고 묻자 남만국 사내는 그 물건을 곧추세웠다. 남만인은 막대기에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한 조개가 단박에 산산조각이 났다.‘꽝’소리가 나면서 도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놀라 자빠졌다. 직감적으로 무기임을 간파한 도주는 직접 실험을 하고 싶어 했다. 도주 자신이 막대기에 검은 화약가루와 쇠구슬을 넣고는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총이었다. 위력이 대단했다. 이런 무기는 듣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이었다. 도주에게는 그들이 남만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드디어 총이란 물건이 일본에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2정을 사들였다. 도주는 즉시 명을 내린다.“즉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라.”고. 이 이야기는 총이 일본에 전래된 순간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의 총이 포르투갈에서 모두 수입된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앞의 2정을 모델로 똑같은 복제품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낸다. 총을 만들라는 도주의 명령을 무모하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네가시마 모래에서는 사철이 생산되고 있었고, 덩달아 대장간 수공업이 대단히 발달해 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대장간에서 만드는 가위는 일본 최고의 명품으로 친다. ●조총 기술 배우려 대장장이 딸 국제결혼시켜 도키타카의 명을 받은 철장(鐵匠) 야이타 긴베이(八板金兵衛)는 밤잠도 못 자고 움직였다. 형태는 대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물건이라도 한번 보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감탄할 만한 재주를 지닌 유능한 대장장이였지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총열 안쪽의 복잡한 나사홈을 깎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절에 머물고 있는 남만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대가를 요구했다. 기술을 넘겨주는 대신 대장장이의 딸 와카사를 부인으로 넘겨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딸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망설이던 끝에 스스로 결단했다.16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하여 이 낯선 이국인과의 혼인을 자청한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총이 완성된다. 이로써 일본의 ‘국제결혼 제1호’와 ‘총 제1호’가 동시에 탄생했다. 바야흐로 일본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총을 들고 나타난 남만인들은 아시아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과 에스파냐인이었으며, 이후에 들어온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고모(洪毛)’라고 불렸다. 남만인들이 가도쿠라곶에 당도한 1534년보다 24년이나 앞선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해 동방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다.1511년에는 말레이시아반도 남단의 요충지 말라카해협, 그리고 1517년에는 중국 남부의 마카오까지 진출한다. 고아와 말라카해협을 점령함으로써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한 포르투칼은 이내 중국 남부를 오가면서 아시아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해 들였다. 이들이 규슈 남단에 출현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16세기 초,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쓰긴 했지만 남부 광저우(廣州)는 이미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30여개 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해상교역이 번성했다. 물론 이러한 교역은 명나라로부터 통제받는 국가주도형 무역이었다. 해금책은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해양 침략자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개인들이 비밀리에 행하는 사상(私商) 무역까지 금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금이 강한 만큼 장사 이윤도 보장된다는 논리인 바, 돈벌이 욕구를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정부가 왕직 회유 뒤 처형 그런데 정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만인과 같이 타고 온 중국인들의 정체다. 왜 남만인들은 중국인 오봉의 배를 타고 왔을까. 오봉은 당시 고토(五島) 열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대두목 왕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왕직은 누구일까.2005년 2월5일 아사히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실었다.16세기 명나라 정부에 의해 처형된 중국인 출신 왜구 두목 왕직의 묘에 세워진 기념비를 훼손한 사건이 그것이다. 안후이(安徵)성 황산(黃山)시에 소재한 왕직의 묘비 가운데 인명 등 일부 내용이 2005년 1월31일 밤 난징(南京)의 한 대학 교수와 그의 친구에 의해 지워진다. 그는 “민족 배신자의 묘를 일본인이 정비하고 비석을 세운 것은 중국인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는 훼손 동기를 언론에 밝혔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논쟁이 불붙었다.‘후련하다.’는 찬성론부터,‘왕직의 해상 무역이 명나라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측면을 무시한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반대론이 치열하게 맞섰다. 왕직은 일본 나가사키현 후쿠에(福江)항을 근거로 생사, 유황 등을 밀무역하면서 왜구를 이끌고 포르투갈과도 결탁하여 약탈도 하고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명나라 정부는 “투항하면 공식 무역 허가를 내주겠다.”고 회유하여 그를 귀국시킨 뒤에 끝내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처형한다. 말하자면 그는 ‘중국인 왜구’였던 셈이다. 그동안 왜구는 일본인들만의 조직이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사실이다. ●다네가시마 사람들 총을 종교처럼 신성시 철포 전래의 흔적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총의 위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 마쯔리’를 열어 매년 6월말에 포르투갈 배의 도착을 기린다.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래도 이 ‘철포 마쯔리’는 계속될 것 같다. 다네가시마 사람들에게 총은 무기 이전에 일종의 ‘종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총을 ‘종교’로 믿는 사람들, 그렇게 불러도 그들은 허락할 것 같다.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이 머나먼 다네가시마의 총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이 총이 한반도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서양 총이 일본에 퍼지면서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불나방 행위를 일컫는 ‘무데뽀’란 일본말이 한국인에게까지 전달되어 있다. 그 뜻인 즉 무철포(無鐵砲)인 바,‘총도 없이 덤비는 놈’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결에 전쟁은 칼·활·창으로만 하던 시절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 없이는 그야말로 ‘무데뽀’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포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 철포는 즉각 실전에 활용된다. 전국의 봉건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철포를 입수하기에 혈안이 된다. 철포 전래 10년도 채 안되어 일본 열도에 확산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하통일의 판세를 가르는 전투에서 철포대를 들이밀어 승리를 거둔다. 철포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까지 이어진다. 생고쿠(戰國)시절, 피비린내 나는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은 조총부대를 앞장세워 파죽지세로 조선을 치고 올라갔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창과 활을 병용한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임란 초기에 이러한 화기 전술에 연패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왜군 전원이 조총을 소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총은 대단히 비싼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이라는 신무기를 통하여 기대 이상의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평양까지 짓쳐 올라가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을 가야 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하여 한마디로 조선군은 ‘총에 녹았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병의 보급로를 차단, 끝내는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내내 조총은 조선군을 고통스럽게 했다. 총을 들고 한반도를 침략한 왜병의 침략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의 평화를 깨는 중대한 ‘전쟁범죄’였다. 그러나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단 두정의 총을 받아들여 이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최선을 다하여 복제하고 대량 생산에 돌입하는 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를 십분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생활에 응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수십명이 표류한 하멜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그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않고, 얻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지 않는가. 바다를 통한 문명교류의 파장을 체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간 해양 부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감고계훈의 역사를 다시 배운다.
  • 위안부 221명 명단 새로 발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로 생활하다 광복 직후 부산으로 단체 귀국한 한국인 여성 221명의 명단이 6일 무더기로 공개됐다.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하이에서 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제3중대장을 지낸 이중(83) 전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날 일본군 위안부 여성 221명이 포함된 당시 탑승자 명부 등 관련 기록 5건을 공개했다.‘귀국인 명단’이란 제목의 탑승자 명부에는 주호잠편지대원과 중국교민 등 한국인 3374명의 이름·나이·귀향지 주소가 기재돼 있다. 자료들은 이 전 교수가 중대장 시절 직접 작성하거나 관리하던 문건을 보관해 오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명단은 그간 정부가 파악한 위안부 명단과 극히 일부만 중복되는 데다 나이와 당시 주소 등이 정확히 기재돼 있어 위안부 실태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일제 말기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뒤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잠편지대로 편입됐던 한국인 학도병 600여명의 신상명세, 부대일지, 귀국자 명단 등 ‘광복 이후 광복군’과 관련한 5건의 기록도 발견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오는 27∼28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남양군도의 사이판을 방문한다.6000여 일본인들도 이때 함께 이 작은 섬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 대변지인 산케이신문은 벌써부터 광분하며 기획특집을 쏟아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일왕은 팔라우와 마셜군도 등 태평양 섬들을 두루 둘러볼 참이었으나 미국령인 사이판만 찾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주, 옛 일본 육군 제30사단 소속 야마카와 요시오(87) 중위와 나카우 스스키(83) 상등병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인근 산악지대에서 숨어살다가 발견됐다는 오보 사태로 일본 열도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972년 괌의 요코이 쇼이치(당시 56세)에 이어 74년 필리핀에서 오노다 히로오(당시 51세)가 종전 30여년 만에 생환했었다. 당시 요코이는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는 귀국 일성을 토해내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열광케 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이들은 또 무슨 말을 내뱉을까. 이래 저래 일본인들의 해묵은 관심이 태평양에 쏠리고 있다. 그 태평양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머나먼 태평양에 수만의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다. 신혼여행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이판 같은 곳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과 군속,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들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는 일명 만세절벽은 일본인 참배객의 메카가 되었으며, 일왕은 여기에 세워질 신사 준공식을 겸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2차대전은 곧 태평양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 중국, 버마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전선이 확대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남양군도에서는 바다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양군도란 오늘날 미크로네시아를 가리킨다. 지도를 펼치면, 일본 남쪽으로 괌, 사이판 등이 포함된 북마리아나군도가 있고 그 밑으로 얍과 팔라우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마셜군도가 있는데 이곳을 총칭하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라 부르며, 여기에는 2106개의 섬이 포함돼 있다. 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근거지였던 팔라우를 찾았다. 연전에 어느 정신없는 탤런트가 ‘정신대를 기리는’ 누드촬영을 하겠다고 나서 온 사회를 벌컥 뒤집어 놓은 바로 그곳이다. 육·해·공군을 관장한 팔라우 집단사령부와 식민청인 남양청 본청, 법원, 병원 등이 있던 매우 중요한 전략기지였다. 흔히 일본이 2차대전 무렵에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일본의 태평양 진출은 이보다 앞선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의 이른바 ‘아메리카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 쟁탈전을 조정하기 위해 태평양쪽은 스페인이 독식하는 것으로 합의된다. 그리하여 필리핀을 위시한 팔라우도 16세기에 스페인에 예속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이저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이곳에 독일 자본이 밀어닥쳤다. 독일의 스페인에 대한 도전은 1899년에 드디어 성공한다.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힘을 잃게 되자 스페인은 파리에서 비밀협정을 맺어 독일에 이 섬들을 팔아넘긴다. 이에 1914년 10월, 일본은 영국과 연대해 독일에 대항하면서 미크로네시아를 넘본다. 사실, 일본의 태평양 탐욕은 훨씬 전부터 드러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북방 대륙 진출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남쪽 바다를 향한 야욕을 잠시 유보했을 뿐이다.1880년대에 다케코시 요사부로는 “적도를 얻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 일본 해군은 캐롤라인과 마리아나, 마셜군도의 주요 섬에 상륙한다.1914년 10월7일, 수백명의 일본군이 폰페이섬의 성당에 들이쳤으며, 이곳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팔라우 공격에 나섰다. 1919년에 국제연합은 공식적으로 이곳의 일본 지배를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남양군도를 획득했으니, 일본의 태평양 식민사는 이로부터 근 100년에 이르는 것이다. 종교와 교육, 그리고 경제적 개발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남양청을 세우고 식민 관료들이 섬을 지배한다. 일본인 이민이 급증했으며 그들은 전력산업, 알루미늄광산, 진주양식과 카사바 같은 상업적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 1935년까지 5만여 일본인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기카와로부터 이주해 왔다.1940년에 일본인 인구는 7만 7000명까지 늘었으며,2년 뒤에는 9만 6000명을 헤아렸다.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군속들이 속속 집결, 일본인 수는 거의 2배로 불었는데, 팔라우와 사이판이 주요 거주지였다. 일본 식민청은 이곳에서 각 섬마다 이른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한반도에서 하던 방식과 똑같이 원주민의 토지 개인소유는 인정하되, 바닷가나 산의 공유지는 모두 식민청 소유로 돌렸다. 한마디로 ‘털도 벗기지 않고’ 대부분의 땅을 먹어치운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땅의 대부분은 군사기지로 징발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도 기실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을 둘러싼 이해대립 때문에 생긴 필연적 귀결이었다.2차대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양국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급기야 미크로네시아에서 태평양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투가 치러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으니, 괌이 2차대전 때 미국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괌은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부산물로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태평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783년에 무역선 차이나호(Empress of china)를 통해 태평양에 본격 등장했다. 배에는 무역 상인과 선교사, 뉴잉글랜드의 포경업자, 해군 장교 등이 타고 있었다. 미국은 괌에 더해 20세기 초반에는 필리핀, 하와이, 사모아제도 등을 추가로 얻는다. 하와이에서는 1893년에 미국 상인과 선교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조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 후 이곳에서 사탕수수 산업이 시작되었고, 한국인 이민도 비슷한 시점에 이뤄진다. 말이 이민이지 노예수출에 지나지 않았다.1899년에는 미국령 사모아에 미국 해군이 진을 친다. 괌에서도 미국은 ‘어머니 나라(Mother Country)’로 등장했다.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때린 것은 이처럼 태평양을 둘러싼 해묵은 패권 다툼의 발화였을 뿐이다. 거의 동시에 일본 육군은 홍콩을 공격한 데 이어 42년 2월에는 영국군 거점인 싱가포르까지 먹어치운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태평양전쟁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김도형 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6년,15살 어린 나이의 한국인 위안부 10여명이 처음 팔라우에 끌려온다. 그 후 코롤섬 토목공사를 위해 전라·경상도에서 노무자 200여명이 왔다. 코롤시 동쪽 끝에 위치한 ‘아이고브리지’는 한인들이 다리를 놓을 때 너무 혹독하게 시달린 나머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붙은 이름이라는 내력이 슬프다. 한인 노무자와 더불어 조선총독부는 농업이민도 보냈다. 모두 13회에 걸쳐 1266명이 이주됐다. 중부 태평양의 중심기지인 트럭섬이 궤멸되자 1944년 2월25일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선발된 정예부대 29사단이 팔라우에 진주했다. 이때 중국 관동에서 1만 2000여명이 왔는데, 대부분 한인 병사들이었다는 설이 있다. 팔라우의 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은 군속이었다. 말이 군속이지 해군에서 토목작업을 시키기 위해 끌고온 노무자들이었다.1943년 5월20일, 부산을 거쳐 팔라우에 800여명의 한인이 도착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 본토와 남양과의 수송시설 건설에 종사하다가 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진지 구축에 투입된다. 인근 무인도에서는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갈매기 배설물인 인광을 채굴하여 비료를 만드는 일에도 이들이 투입됐다. 1944년 8월, 연합국이 중부 태평양의 마지막 공격지 팔라우에 들이쳤다. 미 제1전대의 공격으로 일본 육군 7212명 중 6766명이 전사하고 466명만 살아남았다. 해군도 3400명 중 단지 10명만이 생존했다. 물론 그 일본군 중에는 징병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군 폭격이 거세지자 일제는 팔라우의 일본인 1만7800여명을 본국으로 강제소환한다. 그렇지만 강제 징용된 한인들은 송환 대상에서조차 제외된 채 전쟁이 본격화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식량보급이 끊기면서 한인들에게는 식량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쳐 식량을 훔치다 총을 맡고 숱한 한인들이 죽어 나갔다. 정신대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도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창고에서 건빵을 훔치려다 들킨 한인을 나무에 매단 뒤 귀나 코를 베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과 흡사한 짓을 자행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전해진다. 팔라우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 공식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총알받이로 수많은 한인들을 끌고 왔다 수세에 몰리자 나몰라라 내팽개친 뒤 자신들만 빠져나간 것도 일제 만행의 일부로 기록돼야 한다. 그 불바다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환한 사람이 2만 5773명이었고, 팔라우에서는 3000여명이 귀환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팔라우에서도 ‘천상의 바다정원’으로 소개되는 록 아일랜드로 스피드보트를 타고 나가 무인도에 배를 댔다. 물 속으로 들어가자 ‘물 반 고기 반’이다. 산호섬답게 산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용궁’이 본디 이런 풍경이었을까 여겨지는 곳. 그러나 물 밑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탱크와 항공기, 선박의 잔해가 즐비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역사의 시간은 진행 중임을 이 잔해들이 말해주고 있다. 과거, 잠시 적이었고 이후 해양 패권의 든든한 동지로 미국에 보조를 맞춰 온 일본의 왕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미국령 사이판을 찾는다. 태평양의 바다 속에 잠긴 탱크들이 다시금 포신을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의 태평양을 다시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다. 이 막막한 타국을 떠돌고 있을 한국인들의 넋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일왕에 의해 지금 다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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