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군
    2026-01-29
    검색기록 지우기
  • 세무조사
    2026-01-29
    검색기록 지우기
  • 지휘자
    2026-01-29
    검색기록 지우기
  • 기아차
    2026-01-29
    검색기록 지우기
  • 선진국
    2026-01-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058
  • “위안부 문제 별일 아니다” 아베 외교브레인 망언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교 브레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전 태국 주재 대사는 5일 도쿄의 한 강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춰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취지의 ‘망언’을 했다. 6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오카자키 전 대사는 “20세기는 중국에서 수천만명이 죽었으며,(옛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숙청으로 수백만명이 죽었고, 미국도 원자폭탄과 공중 폭격을 했다.”면서 “일본의 위안부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아베 총리가 지난 4월 미국 방문 때 “20세기는 인권이 모든 지역에서 침해를 당한 시대”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언급한 배경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hkpark@seoul.co.kr
  • [사설] 군위안부 박물관도 광복의 역사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 추진하고 있는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이 광복회의 반대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광복회는 목숨을 걸고 광복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과 일본군 위안부는 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독립공원에 박물관이 들어서면 성지의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광복회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은 서대문 형무소 자리를 독립운동의 성지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독립공원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며 격을 따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성인권박물관은 강제연행된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해 후세에 남기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취지로 추진돼 왔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는 숱한 민중이 부당한 폭력과 수탈을 당했다. 국권을 찾으려고 일제에 항거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이 있는가 하면 공포에 떨며 저항 한번 못하고 끌려가 인권을 유린하는 범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정대협이 광복회 주장을 위안부 문제를 수치로 여기는데서 나온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박물관을 짓지 말라는 압력 속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광복회 요구를 공개하지 못했다고 한다. 광복의 역사는 독립운동을 포함한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은 모두의 역사이기도 하다. 미 하원도 위안부 결의안을 추진하는 마당에 독립공원에 지으려는 위안부 박물관에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1만 5000 가까운 병력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했던 심하 전역(深河戰役)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전역을 보통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명군과 후금군 주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戰場)이 사르후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거의 궤멸될 정도로 참패했고 두 나라의 향후 운명도 확연히 갈렸다. 사르후 전투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광해군, 강홍립을 발탁하다 광해군은 심하 전역의 향방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명군이 동북(東北)의 오지인 허투알라(赫圖阿拉)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명군 가운데는 내륙 지역인 쓰촨(四川)에서 출발하여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하고, 랴오양(遼陽)과 선양(瀋陽)을 거쳐 허투알라에 이르는 수천㎞의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병력도 있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명군이, 가만히 앉아 대비할 수 있는 후금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또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몹시 닦달할 것이란 사실도 예측했다. 그가 조선 원정군의 도원수(都元帥)로 문관 출신의 강홍립(姜弘立)을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通事:왕의 직속 통역관)를 역임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명의 강요에 밀려 ‘내키지 않는’ 출병을 단행한 이상,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명군 지휘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작전권을 틀어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출정하기 직전 강홍립에게 지침을 주었다.‘그대는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평안도에 머물 때부터 닦달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이었던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강홍립에게 조선군 화포수(火砲手)부터 속히 도강(渡江)시키라고 요구했다. 조선군 부대 가운데 명군 지휘부가 가장 크게 탐냈던 병력이 바로 화기수였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양호의 명령대로 화기수 5000명을 미리 들여보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명군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 사령관인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강홍립을 질책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자신의 지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질책은 당연했다.3월4일, 유정 휘하의 명군이 후금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궤멸될 때 배속된 조선군도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행군, 또 행군 평안도 창성(昌城)을 출발한 조선군 본진은 1619년 2월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 가운데는 항왜(降倭)들도 참전했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투항했던 일본군 출신의 병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조총을 잘 다루고, 검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예 병력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 허투알라에 이르는 조선군의 행군로에는 산악과 강이 널려 있었다.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양마전(亮馬佃)이란 곳에 도착했던 25일에는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졸 가운데 얼어죽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군량 운반을 맡은 수송 부대가 본진을 제 때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었다. 2월26일, 진자두(榛子頭)라는 곳에 이르러 강홍립은 유정을 만났다. 강홍립은 유정에게, 군량 운반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행군을 잠시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은 거부했다.‘약속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군율은 지엄한 것이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2월27일, 진자두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배동갈령(拜東葛嶺) 부근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 3영의 장졸들은 모두 휴대했던 군량이 떨어졌다. 보병들 가운데는 행군에 지쳐 정강이와 발 뒤꿈치에 유혈이 낭자한 병사들이 많았다. 계속 행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군 ‘고문관’ 우승은(于承恩)이 달려왔다. 그는 강홍립에게 칼을 빼서 휘두르며 ‘조선군이 뒤처지면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군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려 하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격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을 고문관 겸 감시자로 붙여 강홍립을 계속 몰아붙였다. 3월2일, 허기와 명군 지휘부의 채근에 시달린 끝에 조선군은 심하에 도착했다. 허투알라까지는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약 600명의 후금군 기병과 조우한다. 적병은 높은 산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조선군이 조총으로 응사하여 물리쳤다. 서울 포수 이성룡(李成龍)은 적장을 쏘아 맞혔고, 병사 한명생(韓明生)은 그의 목을 베어왔다. 조명연합군이 최초로 거둔 작은 승리였다.‘만주실록’에 보면 ‘토부(托保)와 에르나(額爾納)가 이끄는 병력이 유정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룡이 사살한 장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강홍립의 투항 작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3월3일 조선군은 다시 ‘굶주림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풀어 주변의 후금인 부락을 뒤져 숨겨진 양곡을 찾아냈다. 그것을 돌로 빻아 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먹게 했다. 3월4일 아침, 조선군은 계속 행군하여 부차(富車)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세 발의 대포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교일기 등이 강홍립에게 달려와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본진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밤,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하다가 귀영가(貴盈哥)와 홍타이지,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 습격에 휘말린 것이었다. 명군의 궤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선군도 후금군의 공격에 휘말렸다. 좌영과 우영이 먼저 후금군 철기(鐵騎)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두 번 째 탄환을 장전하기 전에 철기는 두 영을 유린했다. 선천(宣川) 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雲山) 군수 이계종(李繼宗), 영유(永柔) 현령 이유길(李有吉) 등이 전사하고 두 영은 무너졌다. 이민환(李民 )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강홍립이 거느리던 중영은 좌우영과 불과 100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려가 구원할 겨를도 없이 두 영이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후금군 철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후금군의 포위 속에서 중영의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마지막 결전을 치르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병사들 가운데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었다. 눈앞에서 두 영이 무너지는 참상을 목도한 데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던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런데 투항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은, 강홍립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후금군이 먼저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적었다.‘만주실록’은, 후금군이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려 할 때,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고 적었다. 양자의 기록에는 분명 각각의 주관적 서술과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적었는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홍립이 남은 생령(生靈)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3월5일 허투알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곧 이어 항복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조야를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매국노’ 강홍립의 가족들을 수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광해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과 함께 그의 정치적 운명도 조락(凋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日 위안부 공세 전쟁책임 회피용”

    미 의회 조사국(CRS) 연구위원 래리 닉시 박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세적 대응과 관련해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책임을 무효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닉시 박사는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금동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초청강연회에서 최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혼다 결의안’에 대해 “6월중 개최 예정인 외교위원회 안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랜토스 위원장 권한으로 상정될 여지는 남아 있다.”면서 “일본이 일정 선을 넘는다면 미국 사회 내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닉시 박사는 또 “역사 반성이 독일에 비해 미흡한 일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고노 의원 등 일본 내 양심적 정치인과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을 격려하고 지지해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닉시 박사는 한국 중심적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것도 주문했다. 그는 “올해 70주년이 되는 난징대학살이나 전쟁 참화를 겪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태평양전쟁종전기념행사 등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일본에 좀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닉시 박사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의회 내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올 4월 초엔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이란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위안부 첫 고발’ 故 정서운 할머니 추모비

    일제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고발한 고(故) 정서운 할머니를 기리는 추모비가 정 할머니의 고향인 경남 하동군에 세워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서운 할머니 추모위원회는 지난 26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작은 공원 취간림에 정 할머니의 넋을 기리는 ‘추모와 평화의 탑’ 제막식을 가졌다. 이 추모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고 숨진 정 할머니의 뜻을 기리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기 위해 건립됐다. 추모위는 탑 건립을 위해 5개월에 걸쳐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날 추모비 건립 행사에는 서울, 대구, 통영 등에서 모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 10여명과 민주노동당 권영길·노회찬 의원,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79) 할머니는 추도사에서 “역사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마음에 일제의 사과를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전쟁이 없어져 우리 같은 아픔을 당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태평양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평화순례행사 ‘스톤워크(Stone Walk) 코리아 2007’의 일원으로 전국을 돌고 있는 일본인 5명이 참가, 피해 할머니들을 끌어안고 용서와 화해를 구해 눈길을 끌었다. 정 할머니는 14살때인 1937년 당시 일본군 주재소에 갇힌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이장의 말에 속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8년 간 위안부생활을 했다. 이후 귀국한 뒤 1991년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맞서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해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중국 베이징(北京) 세계여성대회 등에서 활발한 증언활동을 하다 2004년 삶을 마감했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美 혼다의원 “위안부 결의안 반드시 채택될것”

    |워싱턴 이도운특파원|2차대전 당시 일본군 군대위안부 결의안을 추진중인 미국 하원의 마이클 혼다 의원측은 24일(현지시간)결의안 상정이 6월 이후로 순연된 것과 관련, 당초 이달 중 결의안을 채택할 계획이 없었던 만큼 실망할 일이 아니며 결의안은 반드시 채택될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 혼다 의원의 대니얼 콘 대변인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결의안은 채택여부에 상관없이 이제 국제적 현안이 됐고 다수 의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면서 “따라서 일본 정부의 강력한 로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이라고 강조했다. 콘 대변인은 또 “이달 중 채택이라는 목표를 잡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이라크전 등 현안이 산적한 미 의회의 상황과 전례를 볼 때 이달 중 상정이 안된 게 하등 문제될 게 없다.”고 부연했다. 그는 이어 “혼다의원이 결의안 채택을 이달 중 하려 했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식으로 일부 일본언론이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아베 신조 총리의 방미 이후 일본 정부의 강력한 로비는 오히려 의회 내 지지 분위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주장했다. 콘 대변인은 아울러 의안상정의 키를 쥔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 태도를 바꾸는 게 아니냐는 일부 관측에 대해 “랜토스 등 절대 다수가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면서 “동료 의원들이 거의 매일 혼다 의원에게 문의할 정도로 이 결의안은 이제 국제적 현안으로 자리잡았다.”고 일축했다. 그는 특히 “랜토스 위원장과 그 부인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라면서 “그간 이 결의안을 지지해온 만큼 혼다 의원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랜토스 위원장은 “당초 위안부 결의안 공동발의 의원 수가 120명을 넘어서면 이를 정식 상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23일 기준으로 발의의원 수가 129명에 달해 당일 결의안이 상정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으나 결의안은 결국 상정되지 않았다.dawn@seoul.co.kr
  • 現 고1부터 국사 필수로

    현재 고교 1학년생이 대학에 들어가는 2010학년도부터 서울 7개 주요 사립대 인문사회계열에 응시하려면 수학능력시험에서 국사과목을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서강대 김영수 입학처장은 “지난 14일 부산에서 열린 공동 대학입시설명회 이후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 7개 대학 입학처장들이 모여 수능에서 국사 과목 선택을 의무화해 인문사회계열 입시에 반영하기로 합의했다.”면서 “학교별 입학위원회에서 논의를 거쳐 확정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22일 밝혔다. 현재 수능 시험은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영역에서 최대 4과목씩 수험생들이 선택해 응시하게 돼 있다. 서울대가 2005학년도부터 인문계 지원자에 대해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지만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국사를 외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상위권 학생들이 국사로 몰리자 표준점수 하락을 우려한 중·하위권 학생들이 국사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에서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고른 학생은 10명 중 2명뿐이었다. 전체 11개 과목 선택 비중에서도 2005학년도 5위,2006학년도 6위,2007학년도 7위로 계속 밀려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 처장은 “독도분쟁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으나 정작 교육현장에서는 외면받고 있고, 수능 사회탐구영역 과목별 선택 비중에서도 국사 순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어 대학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추진 중인 역사교육 강화 방안과 부합하는 것으로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물론, 다른 대학들의 입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2월 고시된 제7차 교육과정 개편안에 따르면 2011년부터 국사와 세계사 과목이 역사로 통합되고 역사수업 시간이 주당 3시간으로 1시간 늘어나며 2012년부터는 고교 선택과목에 ‘동아시아사’가 추가된다. 교육부는 각종 시험 전형에서 국사 반영 비중을 늘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무원 임용시험 등에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日은 과거사 공식사죄·배상을”

    “日은 과거사 공식사죄·배상을”

    “일본 정부는 과거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범죄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전면 공개하고 그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 등 법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정치적·법적 조치를 시급히 이행하라.” 2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린 ‘제8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남북한은 한 목소리로 이같은 내용의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남북한은 5개의 요구사항을 채택하고, 일본정부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공식사죄, 완전한 배상을 요구했다. 성명서는 연대회의에 참가한 10개국이 공동으로 채택한 결의안과는 별도로 남한과 북한이 협의해 작성했다. 남북한은 또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3월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을 부인한 것에 대해 “그같은 입장을 즉각 철회하고 ‘고노담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조사법안을 제정하며 정부 내에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전쟁범죄에 대한 미화 찬양 중단,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중단과 인권보호를 요구하는 한편 자위대법 개정과 ‘평화헌법’ 개악을 즉각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연대회의에 참가한 10개국 대표들도 “미국·캐나다·호주 등 각국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 채택 움직임 등에서 볼 수 있듯 이 문제는 인류보편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과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일본정부의 진상규명 및 국가배상을 위한 입법조치 실행 ▲유엔인권기구의 권고 실행 ▲각국 네트워크 확산과 국제연대회의로의 확대 등을 결의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최한 이번 회의에는 북측 인사 5명을 포함해 10개국에서 100여명이 참석했다.‘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 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조대위)’ 홍선옥 위원장은 “우리에게 민족적 멸시와 차별은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오늘 채택된 성명에 따라 남과 북이 연대해서 기어이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받아내자.”고 다짐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온 재일교포 3세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우리 몸에 흐르고 있다. 일본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할 때마다 과거 60여년의 역사를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강아연 한상우기자 arete@seoul.co.kr
  • 北 인사 첫 4·19민주묘지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8차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한 북한측 인사 5명이 지난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국립 4·19민주묘지를 방문, 참배했다. 북측 인사가 4·19묘지를 공식 참배한 것은 1995년 4·19묘지가 국립으로 승격된 뒤 처음이다. 이날 4·19묘지를 방문한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련행 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조대위) 홍선옥 위원장, 손철수 서기장 등 5명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계자들과 함께 묵념한 뒤 헌화했다. 홍 위원장 등은 이후 몽양(夢陽) 여운형 묘소로 발길을 옮겨 참배하고, 몽양의 비서였던 이기형씨 등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나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여운형 선생 60주기 사업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들은 이어 고 문익환 목사의 수유동 ‘통일의 집’으로 옮겨 문 목사의 부인 박용길(88) 여사와 다과를 함께 했다. 홍 위원장은 “살다보니 일본인들 가운데 이런 악질과 만나기도 한다.”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최근 잇따른 위안부 관련 망언을 함께 규탄하기도 했다. 한편 아시아연대회의 참석차 방한한 일본의 요시카와 하루코(吉川春子) 참의원(공산당)도 20일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할 의향이 있다면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계승해 공식 입장으로 표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요시카와 의원은 “아베 총리가 미국 순방 도중 부시 대통령에게 한 사죄는 위안부 문제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한 것으로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덕성여대, 위안부대책위 환영만찬

    덕성여대(총장 지은희)는 19∼21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8차 일본군위안부문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홍순옥 조선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북측 대표단 5명 등을 초청,18일 환영만찬을 가졌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때문에 양자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한, 조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8년(광해군 10)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함락시킨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병 여부를 둘러싼 갈등 명은 관응진(官應震) 등이 주장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에 따라 조선도 병력을 내어 후금을 공략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왕가수(汪可受)는 조선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병력을 뽑아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요청했다. 형식은 요청이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명의 통첩을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확연히 갈라졌다. 광해군은 파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먼저 조선의 군사적 역량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교시(敎示)에서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봤자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 수천명 정도를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사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국경 바깥으로 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명의 원정군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동안 후금 관련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자 판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 속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다시 생각하여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명에 보내는 서신에 명에 대해 ‘충고’의 성격을 담은 문구를 삽입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조선은 소방(小邦)이자 명의 번국(藩國)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저 명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또한 ‘명은 조선에 부모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 뻔했을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베풀었다.’며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자식’의 처지에서 ‘은혜를 베푼 부모’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려 노력해야 할 뿐, 자신의 강약(强弱)이나 처지를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조차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굴레가 돼버린 再造之恩 ‘명이 재조지은을 베풀었고, 조선은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 지배층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왜란 초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나라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한줄기 ‘복음’이었다. 더욱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가 역전되면서부터 ‘재조지은’은 조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지고(至高)의 은혜’로 굳어졌다. 아예 ‘임진왜란’을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인물조차 등장할 정도였다. 비록 명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조지은’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같은 분위기를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의 역할 덕분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역할은 평가절하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두개의 적과 맞서야 했다. 하나는 일본군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선조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수록,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선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제치고, 정곤수(鄭崑壽)를 1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책봉했다. 그가 명군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곽재우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조선군 영웅들의 위상은 낮아지고, 선조의 실추된 위상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조선 내부의 그 같은 분위기에 반색했다. 푸순성 함락 이후 등장한 ‘주요석획(籌遼碩)’에서 요동을 수복하는 데 조선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내세운 논리는 거의 똑같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변변찮은 조선을 도왔다.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신료와 명의 지식인을 막론하고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있던 분위기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에 ‘혈기를 갖고 있는 조선 백성은 누구라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문장을 잘 다듬을 것을 지시했다. 외교를 위해 겉으로라도 ‘재조지은’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되다 ‘재조지은에 보답하려면 출병하라.’는 안팎의 공세에 맞서 광해군은 외교적 ‘카드’를 총동원했다. 광해군은 먼저 조선에 출병하라고 요청한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문을 보낸 왕가수는 명의 신료일 뿐, 황제가 아니므로 번국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명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사신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보냈다. 황제에게 조선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조선은 아직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을 동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 조정은 후금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총괄할 경략(經略)으로 양호(楊鎬)를 낙점해 랴오양(遼陽)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조선 사정에 밝았다. 양호는 조선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신 왕래를 통해 요행을 바란다고 질책했다. 광해군은 양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파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양호는 조선 사신 박정길(朴鼎吉)에게 “북관과 연락하고 조선을 고무하라.(聯絡北關鼓舞朝鮮)”는 문구가 담긴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북관’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금에 밀리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양호는 또한 당시 요동지역에 ‘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3000명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을 들어 협박했다. 박정길 일행은 양호의 협박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 영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1618년 10월.‘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는 데 협조하고, 양호의 지휘를 받으라.’는 내용의 명 황제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광해군의 입장에 반대했던 비변사 신료들은 힘을 얻었고, 출병하라는 채근 또한 더 심해졌다.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된 처지에서 광해군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을 통해 떠오른 ‘재조지은’은 17세기 초에도 조선 정치와 외교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일본군, 印尼서 위안부 강제동원

    |도쿄 박홍기특파원|제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헌병이 직접 나서 점령지인 인도네시아에서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 위안소에 넘긴 사실을 담은 네덜란드 정부의 공문서가 발견됐다고 도쿄신문 및 교도통신이 11일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한 ‘협의의 강제성’을 부정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 자료인 만큼 아베 총리의 대응이 주목된다. 공문서들은 2차 대전 때 범죄 문제를 조사해 왔으며 독일에 체류중인 언론인 가지무라 다이치로가 입수한 미공개 문서 30점에 포함돼 있다. 문제의 내용은 지난 1944년 인도네시아 마젤란섬과 플로레스섬에서 일어난 집단 매춘 강요 사건 피해자의 선서 증인신문조서에 나와 있다. 네덜란드 정부의 보고서는 마젤란 사건에 대해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마젤란 사건과 관련, 이른바 ‘도쿄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1946년 5월 조서에서는 당시 27세 네덜란드 여성이 “헌병에 의해 옷이 벗겨져 위안소에 연행됐다.”는 증언이 들어 있다. 이 여성은 “저항했지만 꼼짝달싹 못하고 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여성 억류소에 수용돼 있던 목격자들의 1948년 3월 조서에는 억류소를 찾아온 일본인이 수용돼 있던 소녀들을 환자로 지정해 진료소에 수용하라고 지시했으며, 이 소녀들은 위안소로 연행돼 매춘을 강요당했다는 내용도 상세히 증언돼 있다.hkpark@seoul.co.kr
  • 임기말 더 세진 ‘靑 전투력’

    청와대의 시계는 여전히 2003년 임기 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연일 왕성한 전투력으로 ‘왜곡’과 ‘오해’를 도마에 올리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도 “지금이 임기 초가 아닌지 헷갈릴 정도”라고 자평한다. 11일에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과 보수언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론자, 일본의 역사인식을 겨냥했다.천호선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김 전 의장이 지난 8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화로 원포인트 개헌 주장을 비판했다.”며 사과를 요구한 것과 관련,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당시 김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본인 선거를 치르지 않으니까 민심에서 멀어지고 선거에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4년연임제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얘기하자, 노 대통령이 당 의장으로서 대통령을 선거결과와 연관지어 부적절하게 평가한 부분을 비판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천 대변인은 “김 전 의장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개헌을 비판한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 의도적 왜곡은 아닐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환 정책조정비서관은 이날 청와대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보수언론이 참여정부를 매도하기 위해 지난 6일 프랑스 대선결과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김 비서관은 일부 보수언론이 우파인 사르코지가 당선된 대선 결과를 들어 ‘프랑스조차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데, 참여정부는 큰 정부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사례를 거론하며,“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모두 ‘빨갱이’로 매도한 것처럼 답답하고 두렵다.”고 밝혔다.‘저성장, 고실업, 고복지’ 체제의 문제점을 가진 프랑스와 복지지출이나 공무원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김 비서관은 “프랑스 사람이 날씨가 더워 옷을 벗는다고, 아직 한기가 가득한 우리 국민에게 반팔을 입으라고 강요해서는 곤란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한편 윤승용 홍보수석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동체 구축을 위한 제언’이라는 글을 청와대브리핑에 올려 “일본해 표기 주장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주의의 유산”이라며 일본 정부가 ‘최소한 동해 병기’라는 한국의 제안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역사 교과서 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의 공식적인 책임 부인, 야스쿠니 신사와 독도 문제 등에서 일본 지도자와 보수세력이 보이고 있는 퇴행적 역사인식도 꼬집었다. 이수훈 동북아시대위원장도 청와대브리핑에 글을 게재,“한·미 FTA로 동북아시대 구상이 끝났다는 비판은 기우”라면서 “한·미 FTA 타결 이후 일본과 중국이 한국과 FTA에 더 적극적인 점에서 보듯, 한·미 FTA가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한국이 동북아 질서를 구축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지음

    조선 선조40년(1607) 음력 5월6일 최고의 재상이라는 서애 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른 뒤 하루를 더 애도했다. 조정은 3일 동안 정사를 중단했지만 상인들은 하루 더 철시하면서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라며 그의 서거를 애도했다. 유성룡의 삶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그토록 국민적 신망을 받았을까.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지음, 역사의아침 펴냄)은 임진왜란과 당쟁이라는 조선의 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유성룡의 삶을 통해 조선 중기의 현실과 그의 인생철학을 재조명한 책이다. 서애는 지금까지 사실 정통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비판해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한 인물이라거나 한없이 우유부단했던 인물이라는 등의 평가가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선수실록’(선조수정실록) 등 각종자료를 바탕으로 유성룡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냈다. 아울러 임진왜란 내내 도망가기 바빴던 군주(선조)를 대신해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등 국정 전반을 책임진 리더로서의 역량을 조명했다. 저자는 서애를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넘기면서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나타난다. 땅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을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시킨 대동법은 그중 하나이다. 숙종34년(1708)에야 전국적으로 확대실시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양반들은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성룡은 임란중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지게 했다.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을 모두 포기하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저자는 연구를 통해 유성룡의 리더십 특징 7개를 뽑아내 제시하고 있다. 바로 ▲위기돌파 능력 ▲비전제시 능력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능수능란한 외교력 ▲유연한 사고방식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등이다. 7년의 임진왜란 동안 도체찰사와 영의정까지 겸임했던 유성룡은 전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정치·경제·민생 등 국가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했다. 또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현안은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해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전략을 한눈에 파악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전략을 펼쳤고, 성리학과 양명학 등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특히 하급무관이었던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승전으로 이끈 인물도 바로 유성룡이다. 이런 리더십은 그러나 결국 유성룡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전란의 끄트머리에서 유성룡이 실각한 것은 유성룡의 이런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탄핵했기 때문이다. 그가 실각한 후 각종 개혁입법들은 무효화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다.” 1만 9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통과 유감”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통과 유감”

    교육인적자원부가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공식 항의했다. 김신일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9일 오후 주일 한국대사관 배우창 교육관을 통해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 문부과학상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2005년 일본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 왜곡 파문 당시 안병영 부총리가 항의서한을 전달한 데 이어 두번째다. 김 부총리는 항의 서한에서 “최근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일부 교과서의 우리나라 관련 내용 가운데 양국의 선린관계를 훼손하고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어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수정의견까지 내면서 독도 영유권을 왜곡한 교과서를 검정에 통과시킨 것은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누려야 할 미래 세대들의 희망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등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인류 최고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존중의 정신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야 할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이처럼 이례적으로 항의서한을 보낸 것은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수정 의견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문제 삼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다케시마(죽도)와 독도를 함께 표기한 교과서에 대해 ‘우리 영토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독도 표기를 빼도록 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표현한 교과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표현을 삭제토록 해, 사실상 해결됐다는 어감을 주도록 했다. 동해의 호칭은 ‘세계 지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해’라고 표기하도록 했다. 문제의 교과서는 일본 고등학교 2·3학년들이 내년부터 배우게 될 세계사와 일본사, 윤리 등 사회과 교과서 29종이다. 문부과학성은 지난 3월말 교과서를 검정하면서 정부의 수정 의견을 반영한 교과서만 검정에 통과시켰다. 이 교과서는 오는 8월 학교별로 채택 과정을 거쳐 내년부터 일선 고교에 배포된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오노요코 “위안부는 픽션” 발언 진위 논란

    존 레논의 아내이자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위안부문제 게시글’ 진위여부가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인 된 요노 오코의 글은 “일본군이 전시중에 여성들을 성노예로 납치했다는 주장은 픽션”이라는 것. 또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본은 거액의 보조금과 장기 저금리의 융자를 실시해 이후 배상 청구는 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에서야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요지의 글이다. 3월 29일 뉴스위크지 웹사이트 게시판에 올려졌다는 이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져 현재 일본 네티즌사이의 논쟁을 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오노요코가 실제로 올린 글인지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일본 온라인뉴스 ‘J-CAST’는 “3월 29일 뉴스위크지 bbs에 실렸다는 그녀의 발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며 “누군가 오노 요코를 모함하기 위해 올렸을 가능성도 배제 할수 없다.”고 10일 보도했다. 또 “오노요코 발언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이 글이 일본인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교단창립 100주년 성결교회 다짐

    ‘몸은 나뉘었지만 마음은 하나로´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은 성결교회가 이 교회 초기의 신앙 정체성 찾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초심을 회복하고 교회 본연의 ‘빛과 소금’을 되찾아 대사회적인 운동에 적극 나서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성결교회는 지금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총회장 이정익 목사)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총회장 신화석 목사)) 등 두 개의 교단으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한 지붕 아래 살았었다.1907년 당시 경성부 종로 염곡(무교동)에서 시작한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 그 모태다. 일본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 귀국해 셋방을 얻어 개설한 복음전도관에서 5월30일 창립집회를 연 것이었다. 도쿄성서학원은 미국인 코만과 길버른이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이어받아 동양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 아래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1901년 일본 도쿄에 설립한 전도자 양성기관. 성결교회의 창립자 김상준과 정빈은 동양선교회의 정신을 한국에 전한 최초의 전도자인 셈이다. 국내 개신교의 거대 교단이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성장한 공통점을 갖는 것과는 달리 성결교회는 이처럼 한국인에 의해 창립돼 복음을 전해온 최초의 자생교단으로 주목받아왔다. 그런 때문인지 이 교회의 신도와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아주 크다. 현재 기성에 소속된 교회는 2740여개, 신자 수는 72만 4000여명에 달한다. 예성은 이에 비해 조금 규모가 작아 1100여개 교회에 50만명의 신도가 적을 두고 있다. 복음전도관에서 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1년. 이후 자생교단의 특성을 내세워 교세를 키워왔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 개신교계에 몰아친 폭풍에 휘말려 분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교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 빠졌으며, 성결교회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NCC)와 복음동지회(NAE) 가입을 놓고 의견이 갈려 1961년 두 집살이를 시작했다. 교단이 다른 만큼 100주년 행사도 따로따로 치를 예정. 우선 기념행사를 예성은 20일 오후 경기도 안양 성결대학교 대운동장에서, 기성은 27일 오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각각 갖는다. 행사는 따로따로 열지만 목표는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기성은 이날 감사예배와 함께 교회의 사회봉사활동 확대에 초점을 맞춘 100주년 비전과 대사회 사명 선포, 장기기증 및 헌혈 서약서 전달식을 마련한다. 목회자 2000명, 교인 30만명을 목표로 장기기증의 생명나눔운동을 펼치고, 노숙자와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사랑나눔운동도 벌여나간다. 예성의 기념대회에선 전세계 36개국에 파견되어 있는 선교사와 평신도 2만여명이 참석해 감사예배와 100주년 선언문 낭독을 하게 된다. 전국교회에서 서약한 장기기증서 전달, 일본군 위안부와 북한 어린이를 위한 성금 전달도 있을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아베, 야스쿠니신사에 ‘공물’

    |도쿄 박홍기특파원·서울 김미경기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21∼23일 치러진 야스쿠니신사 춘계대제 기간에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명의로 신사에 공물을 바친 사실이 8일 확인됨에 따라 신사참배를 둘러싼 외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개인 비용으로 춘계대제 때 5만엔 상당의 높이 2m인 비쭈기나무 화분을 신사 측에 보냈다고 일본 언론들이 이날 보도했다. 일본에서 비쭈기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져 신전에 바쳐지고 있다. 화분은 신사 본당으로 올라가는 목제 계단의 옆에 다른 화분들과 함께 배치됐다. 신사에 대한 공물 제공은 지난 1985년 8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이래 22년 만이다. 신사참배 여부에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던 아베 총리는 결국 한국·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의식, 직접 참배하지 않는 대신 신사측에 마음을 전한 셈이다. 때문에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사과를 비롯, 일련의 사죄성 발언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는 처지에 놓였다. 외교부는 이와 관련,“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아베 총리가 공물을 보낸 것은 역내 평화와 안정의 근간이 되는 올바른 역사인식 정립에 역행하는 것으로 매우 유감스럽다.”고 논평했다. 중국 외무성도 “중·일 관계에 있어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라며 일본 측에 신중한 자세를 촉구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저녁 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며, 명복을 빈다. 이런 생각을 계속 갖고 싶다.”라며 봉납 사실을 인정했다.한편 민주당을 비롯, 야당들은 아베 총리의 애매한 대응에 “양다리를 걸친 태도”라며 일제히 비판, 정치적 이슈로 삼고 있다.hk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이성량(李成梁)이 병탄을 시도하고, 광해군과 왕세자를 책봉하러 왔던 명사(明使)들의 은(銀) 징색이 이어졌던 것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대 누르하치의 건주(建州)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다.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누르하치는 초피(貂皮)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르하치가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누르하치 진영 또한 ‘조선과 명이 합세하여 협공할 것’이란 풍문에 긴장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재위(在位)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명과 건주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한, 조선 또한 양자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을 비롯해,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에서 우선 돋보이는 점은 상대방과 관련된 정보수집을 위해 노력했던 점이다. 1608년 8월, 조선 조야(朝野)는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긴장했다.1610년(광해군 2) 1월에는 허투알라 지역에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할 것’이며,‘이미 조선의 병마(兵馬)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정보 수집을 위해 노력하다 누르하치가 해서여진을 공략하여 전운(戰雲)이 감돌고, 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 일대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조선과 건주여진 또한 자칫 정확하지 못한 정보에 휘말려 위험한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변사 신료들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척후(斥候)를 제대로 하고, 간첩을 적절히 활용하여 누르하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영리한 인물을 누르하치 진영으로 보내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라도 사자(使者)의 왕래가 중단돼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1611년,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하세국(河世國)에게 6품직인 사과(司果)를 제수하기도 했다.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 등에 비해 상대방의 동향을 정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이묘(大名)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경험했기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찍부터 벌였던 왜구(倭寇) 활동과 왜관(倭館)에서 거주했던 경험 등을 통해 조선 사정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었다. 왜란 당시, 조선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조선의 지리까지 숙지했던 쓰시마(對馬島)의 일본인들이 침략군을 이끄는 향도(嚮導) 노릇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또한 인접 국가의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간첩을 활용하거나 반간계(反間計)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능력은 탁월했다. 명나라 지식인들조차 “건주여진인은 간첩활동에 가장 뛰어나서 그 내응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은 채 함락 당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문치(文治)에 치중한데다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전쟁을 몰랐던 조선의 정탐 능력이 취약했던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보 마인드’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건주여진을 조선에 비해 ‘열등한 존재’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가리켜 ‘노추(老酋)’ ‘견양(犬羊)’ 등 멸칭(蔑稱)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누르하치에 대한 정책은 유연했다. ‘무식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인륜과 이치를 내세워 사사건건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여 쓸 데 없는 화란을 부르지 말고, 적당히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기미책(羈策)을 활용하다 광해군의 정책은 기미책에 가까운 것이었다.‘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흉노(匈奴) 등 주변 민족을 대했던 방식으로, 핵심은 견제하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이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모험을 피하려 했다. 또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 회피하려 시도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처참한 상처를 입은데다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망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재위 중반까지만 해도 그같은 노력과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명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아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았던데다, 광해군 자신이 정치판을 그런대로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비변사(備邊司)에 포진했던 신료들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베테랑’들이 많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윤근수(尹根壽), 황신(黃愼)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왜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일선에서 수행했고, 명군이나 일본군 지휘부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은 그들을 자주 접견하여 변방 관련대책과 국제정세에 대해 식견과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자강책(自强策)을 마련하다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통해 누르하치를 다독이는 한편, 광해군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 마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다. 그 ‘강철 같은 기마대’를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에 들어가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개편해 각종 화포를 주조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무기 확보를 위한 광해군의 노력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일본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도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西北邊)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대외관계에 관한 한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병력 확보를 위한 근본대책으로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려 했고, 수시로 무과(武科)를 열었다. 1622년(광해군 14) 이후로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를 불러 올려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수시로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하지만 정작 강화도를 피난처로 활용한 것은 인조대의 일이었다. 1623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최후의 보루’가 자신의 유배지가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北 “위안부문제 해결 협력”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북한이 워싱턴 지역의 위안부 관련 단체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제안해 배경이 주목된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는 지난달 27일 서옥자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에게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활동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팩스로 보냈다. 이 서한은 북한의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지난달 18일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와 ‘바른 역사를 위한 정의연대’라는 기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이 서한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모으고 보조를 함께 해나갈 때 일본의 과거 청산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은 더 힘있게 추진될 것”이라며 “우리 민족의 통일사업에도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서한은 또 “일본이 결의안 채택을 막아보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하고 있다.”면서 이는 국제사회와 피해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우롱이며 모독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북한대표부측은 서 회장에게 팩스를 보내기 전 전화를 걸어 “미 의회에서의 활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며 “계속 수고해 달라.”고 말했다고 서 회장은 전했다. 북한대표부측은 또 몇년전 서 회장을 평양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고 서 회장은 말했다. 당시 북한 당국이 갑자기 한국과 일본측의 대표단 입국을 금지, 서 회장도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북측은 “왜 남한편을 드느냐?”고 섭섭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서 회장은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daw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