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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의병, 러와 연합해 日과 싸웠다”

    근자 들어 국외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러·일 전쟁(1904~1905)을 ‘제0차 세계대전’으로 평가절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러·일 전쟁은 대한제국과 만주를 장악하려는 일본이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러시아와 벌인 국지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과 미국이 배후에 도사린 제국주의 패권 경쟁이었다고 본 것이다. 실제 러시아와 일본은 이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대리했다. 첫 포성은 제물포 앞바다에서 울렸으며 이후 대한해협과 울릉도, 독도 해상과 평양, 정주, 원산, 길주 일원의 육상을 오가며 벌어졌다. 전쟁의 주체 러·일 양국은 자국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를 짓밟았다. 한국과 만주는 ‘꽃놀이패’ 전쟁의 무대가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편, 의병은 러시아 편으로 각각 갈렸다. 대한제국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러시아 아무르 군관구 남우수리지대 산하의 한국분견대는 러시아와 항일 의병의 연합부대였다. 이범윤 부대, 함경도 한인포수회, 김인수 부대 등이 이 부대에 가담했다.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펴냄)을 지은 심헌용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러시아군 역사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두 건의 의미 있는 문서를 이 책을 통해 국내 최초로 공개했다. 한 건은 한인 의병이 포함된 러시아 기병분견대와 일본군 정찰부대의 접전 상황도이다. 러·일 전쟁에서 양국 정규군이 벌인 최초의 지상전 상황이 그림에 담겨 있다. 다른 한 건은 함경도 한인포수회가 러시아군과 공동으로 항일군사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청원을 올렸다는 러시아군 첩보보고서이다. 이제 와서 러·일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추어올리거나, 항일 의병이 러시아 편에서 싸웠다는 것을 증명한들 무엇하겠느냐마는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이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어론적 관점에서만 알려진 전쟁의 성격은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전승국 일본이 심어준 식민사관과 이후 이어진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러시아 측 자료가 외면되면서 전쟁의 실체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노주석기자 joo@seoul.co.kr
  • 스키다큐 ‘겨울냄새’, 한국 스키 기원·계보 찾는다

    스키다큐 ‘겨울냄새’, 한국 스키 기원·계보 찾는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제작된 스키 다큐멘터리영화 ‘겨울냄새’가 아시아 스키의 근원이 되는 한국 스키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 계보를 잇는 스키의 달인 데몬스트레이터(Demonstrator)를 소개한다. ‘겨울냄새’는 4세기 고대 고구려 스키의 실물사진이 전시된 ‘대관령 스키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된다. 박물관의 정일환 큐레이터는 “1955년 출판된 독일 스키 사학자 루터(C.J.Luther)의 저서 ‘고대 스키역사 50년’에는 스키가 한국 북반구와 중앙 시베리아에서 세계의 다른 지방으로 전파된 경로를 보여주는 ‘스키의 전파도’가 기록돼 있다.”며 “동양 스키의 기원이 한반도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밝혔다. 1912년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유가와 중위가 함경도 옛 농가에서 발견한 고대(古代)의 스키를 고고학적으로 분석·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4세기 북유럽에서 사용한 스키와 일치했고 신석기 지층에서 발견된 스키와도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애석하게도 이 4세기 고대 고구려 스키 유물은 일본 다카다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대관령 스키역사박물관에는 실물 크기의 사진만이 전시돼 있다. 제작과 촬영을 맡은 전화성 감독은 “루터의 연구결과와 1912년 함경도에서 발견된 4세기 한반도 스키의 유형을 볼 때, 북유럽형 스키와 한반도 고대 스키 사이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는 겨울 한 철에만 스키를 탈 수 있다. 그런데 전체인구 중 십 분의 일 가량인 500만 명이 그 한철을 즐기기 위해 스키를 탄다. 고대로부터 스키를 탔던 ‘스키 DNA’의 뜨거운 열정이 우리민족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해 그 계보를 잇는 스키 달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3월 스물아홉 비정규직의 사랑과 희망을 다룬 영화 ‘스물아홉살’로 영화계에 데뷔한 전화성 감독의 신작 ‘겨울냄새’는 오는 18일 개봉한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들꽃은 늘 조명받지 못했다. 오히려 발에 밟히고 차였다. 그러나 들꽃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들은 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피어있다.” 시인 이윤옥(52·여)씨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들꽃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출간된 그의 두번째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는 역사의 뒤편에 묻혀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 최초의 시집이다. 이씨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광복군 여성대원들의 맏언니였던 오광심은 물론 밥 짓고, 군복 만들고, 독립자금 조달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라면서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시로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씨는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증거를 가져오라’는 정부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는 어불성설”이라며 “정부가 직접 여성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하고 드러나지 않은 여성 유공자들을 발굴해 걸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사를 건 엄혹한 시기에 그들이 독립투쟁의 흔적을 남겼겠느냐.”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66돌을 맞은 광복절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에서 이씨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형편없이 과소평가돼 있다. 남성 독립유공자가 수만명이라면 여성 유공자의 숫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인된 독립유공자 1만 2966명 가운데 여성은 204명에 불과하다. 직접 총과 폭탄을 들고 싸운 여성도 적지 않지만 뒷전에서 밥 짓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나르는 등 음지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 아니겠는가. →현재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스스로 서류를 제출해 독립운동을 증명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직접 증거자료를 수집해 국가보훈처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안다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본군에 쫓겨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일부러 서류 등 흔적을 없앴는가 하면 가명을 서너 개씩 쓰기도 했다. 그나마 명단에 오른 분들은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해 가능했다.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사는 분들도 많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고 보는가. -간단하다. 정부가 나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와 일본신문만 봐도 적잖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평남도청에 폭발물을 던진 안경신 의사의 경우도 ‘여자폭탄범’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또 백범일지를 보면 연미당·정정화 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을 되짚어 찾는 것이 국가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존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가 몇 분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 빨리 그 분들의 구술을 문서로 기록해 둬야 한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몇 해 전 강의를 하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를 아는 대로 써 보라고 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댄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 태반이 유관순 열사였다. 그런 현실이 서글펐다. 그때 가까이 두고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나. -기록이 거의 없었다. 국가보훈처 자료도 여성유공자 한 명당 서너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이들의 활동무대를 직접 찾아 나섰다. 중국 상하이, 광저우, 항저우, 충칭 등을 답사했고, 춘천 부산 나주 인천 수원 등을 돌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가 6명에 불과해 자료 수집도 쉽지 않았다. 생가와 묘지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경북 안동에서 김락 지사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야 했을 정도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3·1절에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싶다. 이미 펴낸 시집도 공공도서관이나 초·중·고교에 보급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만 쉽지 않다. 얼마 전 요양원에 계신 이병희 여사를 찾아가 직접 시를 낭송해 드렸다. 눈물이 쏟아져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앞으로 시를 통해 여성 독립유공자 200여명의 숭고한 일생을 재조명해 보고 싶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광복 66주년] “日 보상전에는 눈을 못감겠다”

    [광복 66주년] “日 보상전에는 눈을 못감겠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각각 일본과 태국에서 살아 온 할머니 두 명이 광복 66주년을 맞이해 귀국했다. 우리말을 잊어 통역이 있어야 대화가 됐지만 일본의 만행을 지적하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제10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송신도(오른쪽·89), 노수복(왼쪽·90) 할머니를 초청했다. 일본에서 유일한 군위안부 생존자인 송 할머니는 광복 후 두 번째로 고국을 방문했다. 꽃다운 열 여섯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고, 광복 후 재일교포를 만나 일본에 정착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투쟁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송 할머니의 10년간 법적 투쟁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가 2007년 제작, 상영돼 화제를 모았다.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에 무관심한 일본 정부를 고발하고자 한국에 왔다.”는 송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는 마음과 관심의 문제이며 일본 정부의 합당한 보상이 있기 전까진 눈을 못 감겠다.”고 토로했다. 노수복 할머니는 스물한 살이던 1942년 부산 영도다리 근처 우물가에서 빨래하다 일본군에 끌려갔다. 싱가포르, 태국 등을 옮겨다니며 3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다 광복과 함께 태국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됐으나 탈출해 태국에 정착했다. 모진 풍파 속에 우리말과 자신의 생일마저 잊어버린 노 할머니는 고향과 조국에 대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 없었다. 그는 “공항에 내려 태극기를 봤을 때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못하는 게 가슴 아프다.”면서 “광복절인 8월 15일을 새로운 생일로 정했다.”고 말했다. 두 할머니는 17일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각각 태국과 일본으로 출국한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에 맞선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성들은 많지 않다. 말없이 오직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쳤지만 역사적 평가는 미미하다. 드러내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뒷바라지한 데다 공적으로 입증할 사료나 증언을 확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1만 2966명이다. 여성은 전체의 1.57%인 204명에 불과할 뿐이다. 유공을 인정받은 여성들의 활동 내역은 3·1운동이 64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국내 항일 운동 52명, 광복군 활동 24명,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15명, 임시정부 활동 13명, 국내 학생운동이 12명이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132명으로 전체의 64%이고, 해외 독립활동은 72명이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맏며느리 조계진 여사는 1919년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구한말 학부 대신을 지낸 조정구의 외동딸이자 영친왕의 외사촌인 조 여사가 보이지 않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이규학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종횡하는 동안 조 여사의 집에는 독립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저자에서 돈을 빌려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조 여사의 몫이었다. 먹거리를 마련하고 옷도 지었다. 신채호, 김창숙, 이을규 등 내로라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한번쯤 조 여사에게 신세를 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조 여사는 두 딸을 질병으로 잃기도 했다. 조 여사의 아들인 이종찬(전 국정원장)씨는 “상하이 시절 아버지가 마작을 배우자 어머니께서 백범 김구 선생께 일러 혼을 내고 다시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셨다.”면서 “독립에 대한 열의는 그 누구보다 높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 여사는 정부로부터 훈장은 물론 포장도 받지 못했다. 역사는 이회영 선생과 그의 아들들만 독립투사로 기억하고 있다. 광복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묻혔다.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헌신했지만 알려지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것이다. 때문에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숭고한 일생을 치밀하게 복원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늦게 커지고 있다. 204명만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든든한 독립지원군 역할을 도맡았던 여성들의 활동이 제대로 평가될 리 없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1915년 서간도로 이사한 허 여사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어머니’가 된다. 겨울철 얼음을 깨 시린 손을 불어가며 군복을 빨았다. 아픈 학생들을 손수 간호했다. 수십리를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군자금을 날랐다. 국내에 남은 독립군의 아내들도 처지는 매한가지였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인 김희숙(85) 여사는 1943년 일본군 위안부인 이른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17세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다음해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영해 독립운동에 몸담자 24시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결혼 전 김 여사는 애국청년회에 가입, 독립운동의 연락책을 맡았던 전력이 있었다. 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상하이로 떠난 여성들은 독립군의 안살림을 맡아 생활을 돌봤다. 때로는 군자금 마련에도 나서는가 하면 일경의 눈을 피해 위험천만한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역사에 그들의 이름은 없다. 독립운동사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 독립운동보다 해외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했다. 이에 따라 국내 독립운동가들보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숫자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해외 독립운동의 경우, 발굴이 어려워 해외 활동으로 유공자가 된 여성 비율은 35%에 그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로 떠났고,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면서 “현재 국가가 인정한 여성 독립유공자가 전체의 1.5%에 그치는 것은 그만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성의 발굴이 덜 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우당 기념사업회 관계자도 “당시 독립군 일가 모두가 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망명해 활동을 벌였다.”면서 “여성은 지아비를 따라 망명 가는 것이 당연했고 그곳에서 집안일을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뒷바라지했다. 지금도 군에서 지원병이 있지 않나. 이들이 한 역할이 바로 지원병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 역사학자도 “1920년대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좀 더 활발해진다.”면서 “하지만 당시 정서에도 여성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발기인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기에 기록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며 아쉬워했다. 보훈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 덜 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공자 지정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보훈처 측은 “유공자 지정을 위해서는 1차 사료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문건이나 자료에 남아 있는 분들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한 1차 사료의 부족으로 공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구술이라도 이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면서 “독립기념관 등에서 이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고령인데다 구술사 정리사업 기간을 장기로 잡고 진행하고 있어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동현·김소라·김진아기자 moses@seoul.co.kr
  •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이범진 순국 100년… “그의 자결은 日에 가장 확실한 복수”

    국가보훈처는 대한제국 시기 러시아 상주공사였던 이범진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가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헤이그 특사를 후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올해는 이범진 공사가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번 선정이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광복절을 맞아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연계하며 연해주에서 무장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이범윤 3인의 활동을 되돌아본다. 이범진의 일생은 ‘배일연아’(排日連俄)로 응축된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는 세력 균형 외교를 추구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고종의 명에 따라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려가 일제가 황후를 시해할 것이라 전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아관파천을 계획하고 이를 실현했다. 아관파천은 고종을 일본군의 포위 상태로부터 해방해 친일 내각을 해산하는 등 독립국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정변이었다. ●전재산 독립운동자금 제공하고 목매 이후 이범진은 1896년 주미 공사로, 1899년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3개국 주재 겸임 공사로, 1901년 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돼 국제 무대에서 외교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를 돕고자 노력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지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범진은 대한제국 특사 파견을 위해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범진은 항일혁명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이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편성할 때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군자금 1만 루블을 제공하는 등 동의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러시아 한인들의 민족운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해조신문’ 창간에도 직접 개입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자 유산을 모두 정리해 미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1911년 1월 13일 자결했다. 이범진은 죽기 전 만주에 있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우리나라는 망했다. 폐하도 모든 권력을 잃었다. 나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그들을 벌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범진의 자살은 나라는 망했지만 자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굴의 투쟁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목숨조차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내놓은 것이다.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이 자살로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범진은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했지만 그의 아들 이위종은 일제가 부친의 유해를 욕보일지 모른다고 판단해 독립이 될 때까지 부친의 유해를 페테르부르크에 안장하기로 했다. 이위종은 당시 러시아 퇴역 군인 놀겐 남작의 딸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 부친과는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을 위해 러시아 정교에 귀의했고,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러시아 이름도 사용했다. 이위종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부친을 따라다니며 미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프랑스에서 초등군사교육을 이수하고 러시아의 사관학교에서 장교교육을 받았다. 이런 생활 덕분에 그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평화회의에 파견되었을 때 특사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을사늑약이 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위종은 7월 9일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주제로 유창한 불어로 연설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감동시켰고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이위종 러시아군 장교로 일본군과 싸워 1911년 부친 이범진의 자살은 이위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위종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방황하며 부인과 자녀를 돌보지 않아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위종은 1916년 이후 러시아군과 소비에트군에서 장교로 활동하며 의젓한 항일혁명가로 성장했다. 1918년 이위종은 붉은 군대 장교로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와 한국 공동의 적인 일본 간섭군을 상대로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한국 거류민단 집회에서 이위종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진정으로 박해받은 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자유로운 러시아 인민들만이 우리에게 원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범진이 유서를 남긴 만주의 동생은 바로 이범윤이다. 이범진과 이범윤은 둘 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의 후손인데 러시아 문서들은 이 두 사람이 친척 관계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로 간도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 및 보호 사무를 맡아 인망을 얻었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인부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일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1908년 연추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범윤 의병부대는 1908년 7~9월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안중근도 우영장의 신분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러일전쟁 이후 이범윤의 활동은 이범진과 밀접히 연계된 것이었다. 이후 이범윤은 유인석과 함께 13도의군을 결성하고 그 창의군 총재가 되어 재차 국내 진공작전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성명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919년에는 만주·노령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3·1운동 이후에는 북간도로 들어가 독립군 단체인 의군부 총재, 광복단 단장으로 추대돼 활동하다 1940년 10월 20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 광복절 맞이 ‘다큐의 향연’

    광복절 맞이 ‘다큐의 향연’

    8·15 광복절을 맞아 EBS는 한 주간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내보낸다. 15~18일 오후 9시 50분부터 밤 12시까지 다큐멘터리를 편성하고, 다큐 중간에 그날의 기억을 다룬 ‘지식채널e’를 방영하는 방식이다. 먼저 15일에는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과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미드웨이 해전’을 내보낸다. ‘대륙에 떨친’은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의 삶을 되돌아 봤다. 지난 6월 진행된 김좌진기념사업회의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동행 취재했다.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윤동주 생가, 하얼빈역, 여순 감옥 등 역사의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내레이션은 배우 송일국이 맡았다.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미드웨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으로 일격을 당했던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했던 미드웨이 해전을 다룬다. 미국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힌 일본은 태평양 가운데 있는 미드웨이를 장악하기로 결정하고 상륙 작전을 감행한다. 프랭크 플레처 제독은 일본의 이런 작전을 간파, 항공모함 3척으로 일본군에 대한 매복 기습작전을 감행한다. 16일에는 ‘침몰선, 잠든 역사를 깨우다’와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방영한다. ‘침몰선’은 지난 4월 군산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배 한 척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한다. 이 배가 어쩌면 1945년 7월 2일 미군 폭격기에 격침된 일본 배가 아니었을까라는 추정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지면서 한반도에서 캐낸 엄청난 양의 금을 본토로 이송하고 있었다는 관측에서 출발한다. 1951년 10월 처음 시작된 한·일 수교 협상에서 한국이 내민 배상의 첫 조건이 바로 이 금의 즉각적인 반환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에 22만명의 사상자를 안기면서 2차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었다고 일컬어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룬다.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긴 1941년 독일의 소련 기습은 코카서스 지방의 유전을 노린 것이었다. 초기에는 전차를 내세운 전격전으로 독일이 앞서 나가지만, 소련이 도시 중심의 근접전으로 대응하면서 독일이 오히려 궁지에 빠지기 시작한다. 17일에는 ‘히로시마-1부’와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쿠르스크 전투’를, 18일에는 ‘히로시마-2부’를 각각 방영한다. 오후 10시 45분부터 5분간 방영되는 ‘지식채널e’의 ‘그날의 기록’은 1945년 8월 15일 그날, 한국·미국·일본 등에서 발간된 신문 보도 내용을 들여다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100년 이방인 땅’ 부산시민공원으로 첫발

    ‘100년 이방인 땅’ 부산시민공원으로 첫발

    2014년 부산시민들은 세계적 수준의 도심공원인 부산시민공원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삶의 여유를 한껏 누리게 된다. 부산시민에게 도심 휴식공간을 제공하게 될 명품 공원인 부산시민공원 조성사업이 11일 첫 삽을 뜨고 본격 공사에 들어갔다. 부산시는 이날 공사 현장에 김황식 국무총리, 허남식 부산시장,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열었다. 부산진구 양정·연지·범전동 등 부지 52만 8278㎡에 들어서는 부산시민공원은 총공사비 6494억원을 들여 2014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다. 부산시민공원 설계자인 제임스 코너는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라는 5가지 주제로 다양한 숲길을 조화롭게 배치함으로써 시민들이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기억의 숲’에는 일제강점기와 미군 주둔기의 역사 자료를 활용해 역사문화관, 랜드마크 폭포, 기억의 벽, 역사의 길, 굴뚝정원, 경마트랙, 보존 헬기장이 조성된다. ‘문화의 숲’에는 공원 중앙을 가로지르는 숲 주변으로 다목적 잔디광장, 미디어테크(첨단도서관), 문화예술원이 들어선다. ‘즐거움의 숲’은 어린이 놀이마당, 운동마당 등 다양한 주제의 놀이 및 운동 공간으로 꾸며진다. 자연의 숲에는 수목과 시냇물, 사계절 변화하는 숲을 주제로 자연체험장, 생태호수, 음악분수, 도심 백사장이 들어선다. 도심 백사장은 전포천 가장자리에 모래로 백사장을 만들어 도심 속에서 일광욕은 물론 간단한 수영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참여의 숲’에서는 열린 참여공간을 주제로 참여의 벽, 참여정원, 모임·축제광장을 통해 참여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일제강점기에 경마장으로 쓰인 마권 판매소, 미군 장교 숙소 등 역사적 건축물 22개 동은 예술인 작업장 및 체험공간 등으로 재활용된다. 역사의 산교육장도 조성된다. 부산국립극장 조성도 추진된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00석 규모의 다목적 대극장, 중·소극장, 야외 공연장을 갖춘 부산국립극장 건립에 관한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국립극장이 건립되면 공원 길 건너편 부산국립국악원과 연계해 공원의 문화 기반을 강화할 전망이다. 부산시민공원터는 일제강점기에 유흥 오락을 위해 경마장이 만들어지고 일본군 군수품 보급기지 및 서면 임시군속교육훈련소로 사용됐다. 광복 후에는 주한 미군 부산기지 사령부로 이용되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주한 미군 보급기지인 캠프 하야리아가 들어섰으며 2006년 8월 기지가 폐쇄될 때까지 100년간 이방인의 땅이었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은 시민들이 편안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4D 체험관, 동작 인식 가족놀이공간, 스마트 감성 벤치, 수변공간을 이용한 워터스크린 등 첨단 유비쿼터스 공원 운영 시스템을 도입한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세계 일류 공원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명품 공원을 만들어 부산의 역사와 미래를 새롭게 활짝 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광복 66주년 독립유공자 275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10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공을 세운 김보연 선생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75명에게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오는 15일 66주년 광복절을 맞아 포상하는 독립유공자는 애국장 52명, 애족장 101명 등 건국훈장 153명과 건국포장 39명, 대통령표창 83명이다. 그러나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복역하고 제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을 지낸 뒤 진보당 간첩사건에 몰려 처형당한 조봉암 선생은 이번 포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초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주춧돌 구실을 한 김보연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다. 선생은 1920년 상하이 대한인민단 간사와 상의원을 지냈고 1922∼1926년 유호청년회,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또 난징 등지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 중미혼합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김원영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민족자본가 이덕환 선생에게도 애국장을 추서한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던 선생은 1920년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금 5000원을 임시정부에 보냈다가 일본군에 발각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황보정걸, 김형순 선생도 애국장을 받는다. 1919년 평북 벽동군 읍내에서 조선독립을 외치며 시위투쟁을 벌이다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한 공예수 선생 등 10명도 애국장 포상 대상에 포함됐다. 이번 포상을 포함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05명, 애국장 3789명, 애족장 4717명, 건국포장 934명, 대통령표창 2331명 등 모두 1만 2699명이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현충원 ‘이상한’ 묘역 배치

    현충원 ‘이상한’ 묘역 배치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예우는커녕 홀대를 받고 있다는 게 논란의 초점이다.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군들 묘역 아래에 배치돼 마치 장군들의 휘하인 듯한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친일 논란에 휩싸인 장군들의 묘가 장군 묘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 자체에 더 분노하는 상황이다. ●장군들에 지휘받는 형국 국립 서울현충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정점으로 피라미드형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장 길지(吉地)로 꼽히는 꼭대기 박 전 대통령 묘소 바로 아래 장군 제1묘역이 배치돼 있다. 장군 제1묘역을 중심으로 김대중·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가 있다. 임시요인 묘역은 멀리 떨어진 장군 제2·제3묘역 아래 놓여 있다. 이곳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을 비롯, 대한매일신보 초대 총무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양기탁 선생,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상룡 선생 등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닦은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돼 있다. 심지어 장군 제2·제3묘역에는 친일 인물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제2묘역의 이응준 장군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제가 징병제를 실시하자 “기다리던 징병제가 실시됐다.”며 청년들의 참전을 선동,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제3묘역의 정일권 장군은 만주에서 헌병 상위(대위)로 활동한 전력이 있으며, 이종찬 장군은 일본군 공병 소좌(소령) 출신으로 일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대전현충원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않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지목받는 김창룡 장군의 묘소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락원 여사와 아들 김인 선생의 위에 있다. 이에 대해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현충원의 전체적인 배치를 바꾸든지 친일 인물들을 이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대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씨는 “백선엽 장군의 경우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인사로 규정했는데, 이런 인물이 임정 요인들의 머리 위에 안장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보훈처·국방부 책임 떠넘기기만 그러나 국립묘지 운영을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와 국방부는 책임만 떠넘기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서울현충원은 국방부가 관리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국방부 측은 “애당초 설계에 문제가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안장 여부와 위치 결정은 보훈처 소관이어서 친일 논란이 있는 사람이라도 국방부가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해명했다. 한 독립유공자단체 관계자는 “현충원 묘역 배치는 독립유공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면서 “예우 차원에서 재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돈이 없어서… 무대 못오른 위안부 연극

    돈이 없어서… 무대 못오른 위안부 연극

    “제가 가난한 연극쟁이라서 공연을 계속 잇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죠.”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분노와 상처를 담은 극단 나비의 연극 ‘나비-Comfort Women’은 2009년 8월 16일 대학로 소극장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연극은 2005년 “일본이 (위안부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할 때까지 계속 공연하겠다.”며 초연에 들어갔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일본 무대에도 올리겠다던 목표도 함께 접어야 했다. 연출을 맡은 극단 나비의 방은미(52) 대표는 연극을 새로 올릴 때마다 저작권을 가진 미국의 기획사와 저작권 관련 협의를 해야 했고, 회당 수백만원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했다. 또 대학로 공연장에서 1개월 공연하는데 대관료, 연습진행비, 개런티, 무대제작비 등 최소 1억원 이상을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나비’가 대중성이 낮은 연극이었던 탓에 흥행에는 참패, 공연 수입만으로는 제작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연극은 막을 내렸고, 그 후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근 방 대표는 이 연극을 되살릴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나비처럼 일본 위안부 문제를 직접 다룬 새로운 작품을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로 하고 대본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작품은 내년 8월쯤이면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전망이다. 방 대표는 “제목이 ‘나비2’가 될 이번 작품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분노와 한, 상처 등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잔혹상을 고발하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앞으로도 이 시대에 필요한 연극을 계속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힌 그는 “정부와 기업의 관심이 있으면 더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텐데….”라며 돈 때문에 문화가 위축되고 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사설] 한·일관계 후퇴하면 일본의 책임이다

    이쯤 되면 한·일관계의 미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온 일본 자민당 소속 의원 3명이 어제 울릉도 방문을 강행하려다 우리 정부의 불입국 조치로 무산됐다. 일본은 이르면 오늘 각료회의를 열어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방위백서를 확정한 뒤 발간할 예정이다. 백서에는 예년처럼 “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 및 독도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한다.”는 문구가 포함되거나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이 담길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절을 앞두고 일본은 또 한 차례 한국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이 같은 도발에 우리 정부도 단호히 맞서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방문하는 방안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 대통령의 하반기 방일 계획도 불투명해졌다. 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독도 문제와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할 것인가도 벌써부터 주목된다. 한국에서는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 구축을 중요한 외교적 목표 가운데 하나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선의는 줄곧 과거사와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 정부 당국자나 정치인들의 반역사적이고 몰이성적인 망언 때문에 수그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지난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국내에서는 범국가적인 일본 돕기 활동이 시작됐다. 정부가 구호대를 파견하고, 구호품을 전달한 것은 물론 우리 국민은 일본 이재민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모금 운동까지 벌였다.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들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 정기집회에서 일본 지진 피해자들을 애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모처럼 조성된 한·일 국민 간의 화합 분위기를 깬 것은 일본 정부였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3월 30일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것이다. 한·일 양국은 북한 핵 문제 공조와 경제·문화 협력 등 중요한 미래의 현안을 앞에 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거듭된 독도 영유권 침탈 야욕 때문에 한·일관계는 미래로 가기보다는 과거로 후퇴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 책임은 결국 원인 제공자인 일본이 져야 할 것이다.
  • 임대보증금 기부한 ‘뇌병변 천사’

    임대보증금 기부한 ‘뇌병변 천사’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로 어렵게 사는 한 시민이 마지막 재산인 임대주택 보증금 787만원을 사후 장학금으로 내놓아 눈길을 끈다. 강서구는 조봉선(51·가양 2동)씨가 주민센터 사회복지사를 찾아 임대보증금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건넸다고 25일 밝혔다. 조씨는 23년 전인 1988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연탄가스를 마시는 통에 뇌병변 2급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남편과 이혼하며 취로·공공근로 사업장을 전전하며 딸을 혼자 키우는 쓰라림도 맛봤다. 이처럼 어려운 형편에 몸마저 불편해 직장을 얻지 못하자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된 조씨는 매달 정부지원 보조금 44만원을 받으며 힘겹게 버티고 있다. 그러다가 최근 가양동 임대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며 임대보증금을 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변에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갖고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웃들을 지켜본 뒤였다. 형편이 좋지 않아 관리비와 생활비를 내기에도 빠듯하지만 심사숙고 끝에 조씨는 지난 15일 이런 내용을 담은 유언장 공증을 마쳤다. 공증을 마친 뒤 행복한 표정으로 조씨는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기부된 장학금은 재단법인 강서구장학회에서 관리한다. 강서구장학회에는 일본군 위안부 황금자(87) 할머니가 장학금으로 쾌척한 1억원, 청각장애 독거 노인 신경례(83) 할머니가 기부한 장학금 2000만원 등을 관리하며, 어려운 학생들에게 이웃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노현송 강서구청장은 “어렵게 살아오신 분들이 힘겨운 다른 이들에게 써 달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선행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원동력이며 건전한 기부문화가 정착되는 데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반겼다. 문의는 강서구 교육지원과(2600-6978)로 하면 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국민이 뽑은 봉사주인공 24명 포상

    국민이 뽑은 봉사주인공 24명 포상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국민추천 포상유공자 24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훈·포장을 수여하고 오찬을 함께 했다. ‘국민추천포상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봉사와 기부 활동을 해온 공로자들을 행정안전부가 국민에게 추천을 받아 포상자를 결정하는 제도로, 올해부터 본격화됐다. 수상자는 국민훈장 7명, 국민포장 9명, 대통령표창 5명, 국무총리 표창 3명 등 모두 24명이다. 최고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와 교육봉사 활동을 펼치다 지난해 별세한 고(故) 이태석 신부(당시 48세)가 받았다. 수상식에는 어머니 신명남(89)씨가 고인의 형인 이태영 신부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자(89)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 1억원을 기부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매일 노숙인 40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자활을 지원한 서영남(57)씨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양손을 잃은 장애인 강경환(51·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씨는 수상 소감에서 “힘들지만 내 손으로 생업인 염전을 일구며 이웃들을 도울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오찬에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면서 “지금까지는 이런 훈·포장을 정부가 지정했지만 이번부터는 국민들이 스스로 추천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국민들이 인정한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모든 이웃을 생각하는 여러분의 활동이 주변으로 퍼져 우리 사회가 따뜻해지기를 바란다.”면서 “정부도 앞으로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많이 발굴해 격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열린세상] 병영문화 뿌리와 극복 과제/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병영문화 뿌리와 극복 과제/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이 땅의 청년들은 국민개병 원칙에 따라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60만 대병력 중에 정신적 결함이 있는 병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포기하고 적이 아닌 동료의 가슴팍에 총탄을 퍼붓는, 상식에 반하는 사건이 속출하는 이유를 사병 개인의 문제로 돌릴 수만은 없다. 가혹행위와 집단 따돌림이라는 병영 내 폐습이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관 고리를 끊어내지 않는다면 억울한 희생도 막을 수 없다. 폐습도 자랑할 만한 전통과 마찬가지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한 집단이 낳은 사회적 상속물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욕하면서 배운다 했던가. 36년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은 아직도 우리 사회와 문화 이곳저곳에 살아 숨쉰다. 얼차려를 빙자한 가혹행위나 인권 유린이 유발한 병사의 자살과 총기난사 사건 같은 병영 내 폐습도 군국주의 일본의 일그러진 군대문화에 그 뿌리가 있다. 태평양전쟁이 종말을 향해 치닫던 1943년 일제는 우리 젊은이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때 차별받던 식민지 출신 병사들은 일본 병영의 악습에 노출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48년 창군된 국군의 전신은 1946년 미 군정이 조직한 남조선 국방경비대다. 망국의 슬픈 역사를 지닌 우리는 도둑과 같이 해방이 찾아왔을 때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한 군사 전문가가 너무도 부족했다. 군 지휘부는 일본군 출신 장교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군대의 위아래에 배어든 일본군의 유산은 오늘 우리 군의 고질적 폐습의 태아적 원형(embryonic prototype)임이 분명하다. 사실 병영 내 가혹행위가 빈발하는 나라는 우리 말고도 러시아가 있다. 흥미롭게도 메이지(明治) 일본과 제정 러시아는 시민사회를 이루지 못한 후발 제국주의 독일의 군제를 따라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주의. 백색이건 적색이건, 민족을 앞세우나 이념을 내세우나, 전체주의 치하 군대의 공통점은 개인의 인권을 전체의 이름으로 말살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와 러시아에 남아 있는 병영 내 가혹행위는 일제와 소련의 탓으로 돌려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이 웅변하듯, 국가와 민족을 개인의 인권보다 앞세운 군사독재 시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다원적 풀뿌리 시민사회를 이루고 인권을 넘어 남녀동권 사회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오늘 우리가 아직도 남 탓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병제가 주류인 탈냉전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100만명을 상회하는 북한군과의 군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징병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 없이 2년 동안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징병제를 가혹행위 온존의 주원인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병제인 미국의 해병대 내 얼차려(Code Red)가 낳은 의문사를 소재로 한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이 잘 말해 주듯이, 이는 체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사회가 부재한 전체주의나 징병제에 기반을 둔 군대에서만 가혹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 정예를 뜻하는 영화제목처럼 집단의 이해에 개인을 종속시킬 때 부적응 약자에 대한 박해는 어디서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 해결의 관건은 위정자의 리더십과 군 지도부와 병사 개개인이 갖고 있는 시민적 자질의 수준 여하에 달려 있다. 해방 이후 이 땅에 장기 지속하는 현상은 군사적 긴장이다. 또한 군대도 시민사회의 일원이므로 타자와 약자의 권리 보호에도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평화체제 구축에 노력하는 리더십과 깨어 있는 주체로서 개인이 갖추어야 할 도리와 의무인 ‘시티즌 오블리주’(citizen oblige)에 여전히 목마르다. “우리는 죄가 있어.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얼차려를 가하다 동료를 죽인 영화 속 도슨 상병이 불명예 제대에 승복하며 한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 [씨줄날줄] 퇴역 항공모함/이춘규 논설위원

    1970년 제작된 영화 ‘도라도라도라’는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을 그렸다. 미국의 원자재 금수조치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일본 조종사들은 미군 전투기와 전함이 집결돼 있던 진주만 상공에 도착해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도라도라를 외치며 전함과 전투기들을 박살내 버린다. 진주만 인근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이 폭격을 피해 일본군과의 전투에 돌입하는 내용이다. 항공모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처음 건조한 뒤 각국이 항모 경쟁을 한다. 2차 세계대전 뒤 함대의 주력으로 등장했지만 정규 항모 전단을 운용하는 곳은 미 해군뿐이다. 항모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브라질,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인도, 태국 등이다. 인도는 퇴역 항모를 수입해 운용하다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 엔터프라이즈함은 세계 최초의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이다. 원자력 추진이라 일반 함정과 달리 연돌이 없다. 1950년 한국전쟁은 항공모함 역사의 전기가 됐다. 한국 근해에서 작전한 항공모함들은 초대형화됐고, 육지 공격 임무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항모가 즉시 출격 가능한 항공기지로서 존재감을 보인 것이다. 미국 해군이 건조한 에식스급 디젤 항모 24척 가운데 11척이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한국인들이 쌕쌕이라고 불렀던 미국 제트전투기 상당수는 에식스급 항공모함 4척에서 출격했다. 나머지 7척에는 프로펠러기가 탑재됐다. 항모들은 50년 안팎 현역에서 활약한 뒤 퇴역한다. 퇴역 뒤 운명은 다양하다. 미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는 1943년에 만들어져 2차대전에 참전한 뒤 1991년 걸프전을 끝으로 1992년 퇴역했다. 지금은 샌디에이고만에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항모 오리스커니호는 5년여 전 미 플로리다 해변에서 39㎞ 떨어진 멕시코만 바다에 폭파돼 잠겨졌다. 인공어초로 쓰인다. 러시아의 일부 퇴역 항모들은 고철로 해체됐다. 홍콩 이글밴티지자산관리회사가 영국의 퇴역 항모 아크 로열 경매에 참여키로 해 화제다. 아크 로열은 2015년까지 운용예정이었지만 재정난으로 조기퇴역했다. 이글사는 낙찰받으면 레저휴양시설로 이용할 계획이라지만 군사목적 전용 의심을 받는다. 지난 1998년 홍콩의 한 여행사가 해상 호텔로 쓰겠다며 우크라이나로부터 미완성 항모를 사들였지만 결국 중국 군당국에 넘어간 선례 때문이다. 항모는 퇴역 뒤에도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수요시위 1000회 기념 ‘평화비’ 세운다

    수요시위 1000회 기념 ‘평화비’ 세운다

    19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 정부는 사과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시작한 ‘수요 시위’가 2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12월 14일 1000회를 맞이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수요 시위 1000회를 기념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투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의미 있는 걸음을 시작한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을 ‘평화로’라 부르고,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지켜온 자리에 ‘평화비’를 세우는 사업이다. 6일 정오에 열린 제977차 수요 시위는 평화비 건립을 위한 희망릴레이 발대식으로 진행됐다. 희망릴레이는 평화비 건립을 위해 1000원 이상의 후원금을 낸 사람이 ‘희망 주자’가 돼 다음 희망 주자에게 모금 배턴을 이어주는 캠페인이다. 이날 발대식에서는 평화비의 가안이 공개됐다. 조각가 김운성·김서경씨가 디자인한 평화비 가안은 높이 120㎝로, 일제에 끌려가던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비석이다. 정대협 관계자는 “할머니들이 소녀 때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는 역사적 사실과 이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도록 역사가 흘렀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수요 시위가 1000회째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이 장소는 역사적 유적지가 됐다.”고 말했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사상 첫 국민추천포상 수상자 24명 선정] ‘수단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국민훈장

    [사상 첫 국민추천포상 수상자 24명 선정] ‘수단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국민훈장

    수단의 슈바이처와 양손을 잃은 장애를 극복하고 이웃을 도와 온 소금장수,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 묵묵히 선행을 한 이웃들이 훈장을 받게 됐다. 국민들이 처음으로 인터넷과 우편, 방문접수로 직접 추천한 361명 중에서 선정된 주인공이다. 행정안전부는 28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추천포상 수상자로 국민훈장 7명, 국민포장 9명, 대통령표창 5명, 국무총리표창 3명 등 24명을 선정해 7월 중순에 포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민추천 포상제는 어려운 환경에서 봉사와 기부, 선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한 숨은 공로자를 국민 손으로 발굴, 포상하기 위해 도입됐다.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는 고(故) 이태석(왼쪽)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8년간 헌신적으로 의료와 교육 봉사활동을 하다 지난해 1월 대장암으로 작고했다. 고인의 생애가 영화 ‘울지마 톤즈’로 제작돼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겼고 영화를 본 국민이 인터넷으로 추천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자(오른쪽·87·국민훈장 동백장) 할머니는 어렵게 모든 재산 1억원을 강서구장학회에 기부하고 현재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다 건강악화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신비의 섬, 하와이를 달리다 ③3가지 체험이 있는 O’ahu!

    신비의 섬, 하와이를 달리다 ③3가지 체험이 있는 O’ahu!

    매일 아침 와이키키 해변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오아후는 여행자들에게 다채로운 체험거리를 선사한다. 오아후의 체험거리는 단지 오감이 행복하기만해서 여행자들의 인기를 모으는 게 아니다. O’ahu Must do Activity 3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배우는 오아후 체험 3선 매일 아침 와이키키 해변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오아후는 여행자들에게 다채로운 체험거리를 선사한다. 오아후의 체험거리는 단지 오감이 행복하기만해서 여행자들의 인기를 모으는 게 아니다. 체험을 통해 하와이 전체의 문화와 생활상, 자연을 직접 느끼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맨얼굴같이 청연하고 광대한 오아후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쿠알루아목장과 부드러운 선율 속에 하와이 원주민들의 순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우쿨렐레 클래스, 하와이의 5섬을 비롯해 피지, 타히티, 사모아 등 태평양 중남부에 산재한 섬들의 문화를 한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센터가 대표적이다. 글·사진 천소현, 박우철 기자 1 와이키키 해변에서는 항상 서핑보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2 탐방객들이 버기를 타고 쿠알로아 목장을 달리고 있다 민낯의 오아후 안으로 내달리다 Kualoa Ranch Buggy Tour 스노클링, 서핑, 해변에서의 휴식으로 여유로운 하와이를 만끽한 다음은 산악 버기투어로 ‘다이내믹한’ 하와이와 만날 차례다. 자연 속을 거칠게 내달리는 쿠알로아 목장(Kualoa Ranch) 버기투어는 오아후의 민낯을 보는 듯 순수함과 거친 오프로드를 달리는 짜릿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버기는 한국에서는 ‘네발이’로 통하는 300cc 디젤기관이 달린 사륜 오토바이로 바퀴가 넷인 탓에 안정감 있고, 주행을 위한 장치가 엑셀레이터, 브레이크, 조향장치뿐이어서 누구든 쉽게 탈 수 있다. 쿠알로아 목장 버기투어는 16세 이상의 신체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버기 운전이 쉽다고 해도 투어가 진행되는 2~3시간 동안 요철과 곡선이 많은 비포장길을 주행해야 하기 때문에 코스를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 주행 중 나뭇가지나 튀는 돌 때문에 피부에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긴소매 옷을 입는 게 좋다. 보통 10명 내외의 탐방객이 1인당 1버기를 타고 투어 코스에 참가한다. 이때 1명 이상의 투어가이드가 동행하면서 주변 설명과 탐방객의 안전을 책임진다. 버기투어는 출발 후 10분 정도는 숲속 이곳저곳을 산책하듯 천천히 주행한다. 탐방객이 어느 정도 조작에 익숙해질 무렵 오아후 동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의 벙커에 도착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탄약을 보관해 둔 이 벙커는 지금은 쿠알로아 목장에서 촬영한 영화의 스틸사진이 전시된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진주만>, <쥬라기공원>, <첫키스만 50번째> 등의 스틸사진을 유심히 지켜본 뒤 다음으로 이어지는 버기투어에서 바로 그 영화 촬영 장소를 찾아보자. 해안초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프로드 레이싱이 시작된다. 오른쪽으로는 바다, 왼쪽으로는 병풍 같은 산맥이 이어진다. 첫키스만 50번 했다는 아담 샌들러가 첫눈에 반한 여인을 기다리고, 말콤 박사가 공룡과 목숨을 건 레이싱을 펼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쥬라기공원> 촬영 때 남긴 공룡의 발자국도 쿠알로아 목장에 그대로 남아있다. 유명 영화의 촬영지라는 후광보다 쿠알로아 목장을 더욱 기억하게 하는 것은 초록이 가득한 평야에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있는 풍경이다. 마치 시간을 박제한 듯 그 풍경은 흘러가는 구름보다 느리고 바람조차 쉬어 가는 것 같다. 소들은 버기투어가 지나간다고 해서 놀라거나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이 익숙한 듯 귀찮은 듯 눈만 살짝 돌려 멀어지는 탐방객을 바라볼 뿐이다. 투어는 평야를 가로질러 쿠알로아 숲의 실핏줄같이 뻗은 길을 요리조리 달린다. 때로는 초원을, 때로는 계곡을 건너며 하와이의 자연 속을 헤집고 나온다. 쿠알로아 목장 주소 49-560 Kamehaeha Highway, Kaneohe, Hawaii 96744-5752 문의 www.Kualoa.com 해와 별을 따라 하와이안이 되다 Polynesian Cultural Center 수천년 전 머나먼 섬에 사는 폴리네시안(Polynesian)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들은 수개월에 걸쳐 해와 달, 그리고 별의 길을 읽으며 바다를 항해했다. 파도의 방향을 읽고, 새들의 비행을 관찰하며 망망대해를 건너온 그들이 바로 하와이안들의 조상들이다. 자고 나면 땅의 모양이 바뀌어 있는 화산섬에 정착해 그들을 ‘알로하 정신’을 가꾸어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폴리네시안문화센터(PCC, Polynesian Cultural Center)에서는 7개의 폴리네시안 부족을 만날 수 있다. 피지, 타히티, 사모아, 하와이, 뉴질랜드(마오리), 파파누이(이스터섬), 통가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준다. 방문객들이 잘 신경 쓰지 않는 사실 하나는 PCC가 몰몬교단이 운영하는 비영리단체라는 것. 수익의 대부분을 장학금 등 교육사업에 사용하고 있으며 입장료 외에 기부금도 받고 있다. ‘민속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주민들의 실제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에 PCC는 지금까지 3,300만명 이상이 방문한 하와이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하와이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루아우’ 뷔페식을 마치고 나면 느린 카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가이드의 재담에 웃다 보면 어느덧 반대편 종착지에 도착하게 되고, 그때부터 각 부족 마을의 방문이 시작된다. 부족마다 매일 3~5회씩 공연이 반복되므로 시간표를 잘 짜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후 2시30분에 진행되는 카누 선상 쇼 관람을 위해 응달에 자리를 잡는 민첩함도 필요하다. 저녁에 펼쳐지는 쇼 <HA : Breath of Life>까지 관람할 예정이라면 입장료(49.95달러), 저녁 식사(35달러), 쇼(49.95달러)을 포함하는 패키지 티켓(성인 91.95달러, 소인 67.95달러)을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폴리네시안문화센터 주소 55-370 Kamehameha Highway in Laie, Hawaii 96762 운영 시간 매일 낮 12시~저녁 6시(매주 일요일 휴무) 문의 800-367-7060 www.polynesia.com 1. 폴리네시안의 7개 부족은 저마다 다른 음악과 댄스를 가지고 있다. 하와이를 대표하는 훌라댄스를 포함해 그들의 예술과 풍습이 얼마나 개성적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오후에 배위에서 펼쳐지는 선상 민속쇼다 2 우쿨렐레는 현이 4개 있는 하와이 전통 악기다. 19세기 말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마카다라는 악기가 우쿨렐레의 원형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쿨렐레를 배우려는 이유 Royal Hawaiian Center 우쿨렐레는 현이 4개뿐인 소박한 악기로 연주법과 모양은 기타와 비슷하다. 1870년대 하와이에 전해진 포르투갈의 마카다(Machada)라는 악기가 우쿨렐레의 원형이다. 우쿨렐레 클래스에 참가하면 숙련도 높은 강사가 만드는 농도 진한 우쿨렐레 선율을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우쿨렐레를 배우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우쿨렐레 클래스에 참가한다. 특히 와이나니 임(Wainani Yim)은 하와이에서도 내로라하는 우쿨렐레 연주자로 로열하와이안센터 우쿨렐레 선생님 중 인기가 가장 높다. 하와이안항공과 함께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우쿨렐레를 공연한 바 있는 그녀는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1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우쿨렐레를 가르친다. 그가 클래스를 시작하면 악보를 보며 코드를 잡고 박자를 잡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사를 보며 그의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편이 낫다. 특히 그녀가 하와이식 자장가인 ‘푸푸히누히니(Pupu Hinuhini)’를 부를 즈음에는 저절로 손벽을 치며 흥얼거리게 된다. 우쿨렐레와 함께 연주하는 노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입에 착 붙는다. 가사는 받침이 없고 울림소리가 많아 보드라운 옷감으로 짠 옷을 입은 듯 편안하다. 로열하와이안센터에서 열리는 우쿨렐레 클래스는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로열하와이안센터 B동 2층 파이나 라나이 푸드코트에서 열린다. 우쿨렐레 강습은 무료로 진행된다. 그러나 추최측에서 준비하는 우쿨렐레는 한정돼 있고 선착순으로 대여해 주기 때문에 클래스가 시작하기 1시간 전에 가서 참가 접수를 하는 게 좋다. 로열하와이안센터 주소 2201 Kalakaua Avenue, Honolulu, Hawaii, 96815 문의 www.royalhawaiiancenter.com Hotel 아웃리거로 항해하는 2개의 바다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 Outrigger Reef on the Beach 두 개의 바다를 보았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와이키키의 바다. 먼 옛날 아웃리거(카누의 일종)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 원주민들이 두려움과 감탄으로 만났던 그 바다다. 두 번째 바다는 결코 잠들지 않는 쇼핑의 바다, 와이키키 비치 워크(Waikiki Beach Walk)다. 3만2000m2 규모의 쇼핑가에 온갖 부티크와 고급 레스토랑이 일렁거리는 곳이다. 와이키키 해변이 시작되는 서쪽 끝과 와이키키 비치 워크가 시작되는 남쪽 끝이 만나는 곳에 호텔이 하나 있다. 바로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Outrigger Reef on the Beach) 호텔이다. 이런 것을 두고 ‘완벽한 로케이션’이라고 할까. 와이키키 해변의 중심가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그것은 해변의 소음으로부터도 한 걸음 멀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 대신 호텔이 선사하는 것은 멋진 풍경이다. 부산 해운대로 말하자면 웨스틴 조선 비치 호텔의 위치쯤 되는 셈인데, 그 장점은 명확하다. 둥글게 휘어지는 해변의 곡선을 짐작할 수 있고, 그 해변이 두 팔을 벌려 안고 있는 와이키키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해변 서쪽 끄트머리에 웅장하게 솟은 다이아몬드 헤드다. 호텔 안쪽으로 눈을 돌려도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는 구석구석 인상적인 ‘하와이풍’이다. 대나무 문양이 두드러지는 직원의 유니폼도 하와이 태생의 의상 디자이너인 지그 샌(Zig Zane)의 작품이다. 객실과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예술 작품과 유물들은 박물관이 아쉽지 않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은 단연 100년이나 된 카누였다. 리조트 입구의 카누 하우스(뾰족하게 솟은 나무 지붕)에 매달려 있는 하와이안 카누는 1980년대에 발견되어 복원을 마친 후 아웃리거 리프에 영구적인 집을 얻었다. 카누는 더 이상 항해를 하지 않지만 두 개의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으니 아쉬울 것이 있으랴. 이곳에서 묵는 신혼여행객들도 아쉬운 것이 없어 보였다. Room 639실, 오션뷰, 시티뷰, 오션 프론트 등 Facilities & Activities 스파, 오션 하우스 레스토랑, 쇼어버드 레스토랑 & 비치 바, 야외 수영장, 카이 카 필라 그릴(하와이안 쇼), 스타벅스, 컨퍼런스룸(최대 200명 수용) 등 Location 오아후 호놀룰루 공항에서 H1(free way)를 이용하면 15분 정도 소요. 렌터카 이용시 호텔에서는 반드시 발렛 주차(하루 30달러)를 해야 한다. 2169 Kalia Rd Honolulu, Hawaii 96815-1989 Reservation 808-923-3111 www.outriggerreef.com 1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의 메인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김민수, 박진경 독자 2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 전경 ★와이키키 비치 워크 Waikiki Beach Walk 호하나 와이키키 타워와 빌리지가 있던 자리를 허물고 2005년 새로 조성한 와이키키 비치 워크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엔터테인먼트 콤플렉스 시설이다. 새 단장을 마친 4개의 고급 호텔과 리조트, 로이스 와이키키(Roy’s Waikiki), 서브웨이, 스타벅스 등 다양한 레스토랑과 카페, 인기 쇼핑점들이 여러 블록에 걸쳐 마치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쇼핑 거리에 한번 접어들면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걷고 또 걷게 된다. 아웃리거 리프 온더 비치 호텔도 와이키키 비치 워크의 일부인데, 투숙객들은 그 어느 호텔보다 다양한 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쥔 셈이다. www.waikikibeachwalk.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O’ahu 하와이안항공의 국제선을 이용하면 하와이 섬사이를 이동하는 주내선이 무료다 Haleiwa 할레이와 유명한 서핑 해변에서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 형성된 마을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다. 서핑센터보다 흥미로운 것은 아기자기하고 참신한 아트 갤러리와 수상하고 재미있는 쇼핑점들이다. 이 마을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시원한 얼음빙수(2.25~3.25달러), 두 번째는 공터에 세워둔 트레일러 레스토랑에서 사먹는 새우라이스(12달러)다. Makapuu Point 마카푸 포인트 오아후 서해안 섬 일주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시원스러운 광경이다. 오른쪽 해안 절벽에는 빨간 등대가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거대하게 솟은 산악지형이 병풍처럼 다가온다. 정면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는 코끼리섬, 거북섬 등 닿지 못할 섬들이 하나씩 웅크리고 있다. Pearl Harbor 진주만 진주만은 1941년 일본군이 하와이를 기습한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진주만에 가면 USS애리조나 기념관, USS 보핀 잠수함 공원, 미주리 군함 기념관 등이 있다. 진주만에서 가장 인기있는 USS 애리조나 기념관은 하루 수천명이 찾을 만큼 유명하다. 종종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입장하기 위해 몇시간씩 기다리기도 한다. 입장료 무료 운영시간 오전 7시30분~오후 5시 Diamond Head 다이아몬드 헤드 다이아몬드 헤드는 마치 예전 모 우유광고에 나왔던 왕관 모양의 우유 방울과 비슷한 모양이다. 가운데가 움푹 들어갔고 외곽은 날카로운 경사의 봉우리로 둘러 쌓여있다. 다이아몬드 헤드는 따로 시간을 잡고 갈 게 아니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 코스로 가볍게 둘러보는 게 좋다. 와이키키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데 조금 서둘러서 올라가면 왕복 2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해발고도가 232m로 낮지만 와이키키 해변을 비롯해 오아후 남쪽 해변의 거의 모든 곳을 조망할 수 있다. 자동차로 입장할 때는 탑승객 숫자에 상관없이 5달러, 개별 입장은 1인당 1달러를 입장료로 내야 한다.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따로 없기 때문에 1리터 정도의 물을 챙기는 게 좋다. Halona Blowhole 할로나 블로홀 하와이가 서핑의 명소로 유명한 것은 결로 멈추지 않는 바람과 파도 때문이다. 할로나 블로홀은 강한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가 바위덩어리의 구멍에서 거꾸로 물이 솟구치는 곳이다. 오아후 서부 해안은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를 포함해 멈추는 곳마다 장관의 연속이므로 필수 드라이브 코스다. ★ 박우철 기자의 하와이 쇼핑팁 쇼핑도 선택과 집중-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 경제적인 쇼핑을 원하는 사람에게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www.premiumoutlets.com)은 필수 코스다. 인터넷에는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과 관련된 하와이 여행선배들의 주옥같은 쇼핑 노하우도 적지 않다. 주요 매장은 코치(Coach)와 폴로 랄프로렌(Polo Ralph Lauren), 켈빈 클라인(CalvinKlein),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 투미(Tumi), 나인 웨스트(Nine West) 등이다.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을 100%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브랜드가 입점했는지 미리 확인하고 사고자 하는 물품도 미리 적어둬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수많은 매장이 있어 자칫 이곳저곳 구경만하다가 정작 필요한 아이템을 놓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모아나 쇼핑센터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고 쇼핑하려는 사람이라면 알라모아나 쇼핑센터를 추천한다. 이곳에는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메이시스(Macy’‘s) 같은 백화점을 비롯해 3층 규모의 아케이드에 개별 매장이 있어 다양한 상품을 둘러볼 수 있다. Driving Tips in Hawaii 하와이 도로와 친해지는 법 하와이에서 차를 운전할 때는 유의해야할 사항이 적지 않다. 유의사항은 안전을 위한 것으로 셀프드라이빙 여행객에게 그 어떤 여행 팁보다 중요하다. 거리단위는 킬로미터(Km)로, 언어는 한국어로 네비게이터를 켜면 영어로 안내가 나오는 것은 물론 거리 단위도 마일(mile)로 설정되어 있어 익숙하지 않다. 단위를 킬로미터로, 한국어 안내방송으로 설정을 전환할 수 있으니 이용하면 편리하다. 하지만 도로표지판의 제한 속도와 계기판의 현재 속도는 항상 마일로 생각해야 한다. 1마일은 대략 1.6km가 조금 넘는 거리이다. 비보호 좌회전 Yes! 빨간불 우회전 No! 비보호 좌회전이 하와이에선 일상적이다.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지 않아 줄곧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비보호 좌회전이 아닌가.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빨간불일 때 하는 우회전이다. 간혹 신호등 옆 작은 표지판으로 ‘No right turn on red’라고 적힌 곳이 있다. 그런 곳에선 빨간불이라 하더라도 우회전을 해서는 안 된다. 주차는 요령껏, 만약을 위해 동전 준비 필수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간간히 ‘주차금지(No Parking any time)’라고 쓰여진 구간이 있다. 그런 구간만 피한다면 하와이에서의 주차는 생각보다 쉽다. 코인주차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관리인이 없어 주변 상점에서 교환해야 하는 불편을 겪을 수 있으니 주차요금으로 지불할 25센트 동전을 충분히 준비하자. 목적지 주소는 꼭 확보하기 한국에서 쓰는 주소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로명 주소 위주로 길을 찾는 하와이 네비게이션 이용이 어려울 수 있다. 건물 이름이나 상점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나오지 않으면 도로명 주소를 입력해야 한다. 도로명 주소는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는 곳들도 많다.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주소를 미리 적어 가는 게 좋다. 허츠 Hertz 렌터카 하와이 여행에 날개 달기 하와이에서 가장 광범한 네트워크를 가진 허츠 렌터카는 오아후, 마우이, 빅아일랜드 공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각 공항에서 Hertz라고 적힌 노랑색 셔틀 버스를 타면 가까운 렌터카 사무소로 갈 수 있다. 허츠 셔틀버스는 5분에 한 대꼴로 운행하며 확인 절차 없이 누구나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4개 섬 39개 영업점을 운영 중인 허츠는 차를 빌리는 곳과 반납하는 곳을 다르게 할 수 있다. 빅아일랜드 셀프드라이빙 투어를 다녀온 김민수씨는 힐로 공항에서 차를 빌려 코나 공항에서 반납해 불필요한 동선을 줄일 수 있었다. 허츠 렌터카의 편리함은 네비게이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추가비용(하루 15달러)을 지불하면 네버로스트(Neverlost)라는 허츠만의 네비게이션을 빌릴 수 있는데 한국어 서비스는 물론 거리 표시를 한국인에게 익숙한 킬로미터로 전환할 수 있어 편리하다. 허츠 해외예약센터 080-777-0400(수신자 부담) hertz@hertz.co.kr 하와이안항공으로 ‘그 섬’에 가다 Flying in Hawaii 항공기도 여행 체험의 일부가 분명하다. 하와이안항공은 아직 긴 비행을 남겨 놓은 하늘 위에서 그 섬들을 앞당겨 만나는 기쁨을 선사한다. 야외에 있어서 특이한 하와이 빅아일랜드 공항의 탑승 대기공간 하와이 여행의 격세지감 10년 전 하와이를 처음 찾았을 때, 하와이 여행은 지금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미국 비자가 필요했다. 미국대사관 앞의 긴 인터뷰 줄을 바라보며 ‘안 가고 말겠다’는 오기가 들었다. 또 하나 직항편이 다양하지 않았었다. 대한항공이 단독으로 취항하고 있었기에 성수기에는 좌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다시 하와이를 찾게 되었을 때,‘한국인 무비자 입국’과 ‘복수 취항’으로 상황이 변해 있었다. 2011년 1월부터 하와이안항공이 호놀룰루-인천 노선을 취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류나 예약을 위해 마음을 졸이는 대신 어떤 비키니를 입을지에 마음을 쓰면 되었다. 이륙하자마자 만나는 하와이 하와이를 가는 길은 조금 멀다. 하와이로 갈 때도 8시간20분 정도가 걸리고 돌아올 때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10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러나 하와이안항공에 탑승하면 이륙하자마자 바로 하와이를 만난 느낌이다. <하나호우(Hana Hou, 하와이안 항공 기내지)>의 한국어판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자니 마음은 이미 하와이 해변으로 날아갔다. 기내식으로 나온 ‘고추장소스에 비벼먹는 차가운 누들’은 하와이에서의 경험할 미각적인 모험의 예고편이랄까.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 승무원들이 ‘훈남’으로 보이는 현상도 착시는 아니었다. 돌아올 때도 같은 ‘훈남’을 보았으니 말이다. 국제선 이용시 주내선이 무료! 오아후에 머물지 않고 빅아일랜드, 마우이, 카우아이 등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관문인 오아후를 건너 뛸 수는 없다. 입국 심사도 받아야 하고 비행기도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국내선 구간과 주내선 구간 모두를 하와이안항공으로 이동할 경우 국제선 요금만으로도 주내선 구간까지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주내선 구간이 무료! 게다가 1인당 수하물도 2개까지 무료다. 하와이로 입국할 때는 환승객이어도 호놀룰루에서 짐 검사를 한번 거쳐야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인천에 도착해서 찾기만 하면 되는 점도 편리하다. 걸어서 ‘저’ 비행기까지 하와이는 공항마저도 ‘하와이풍’이다. 에어컨 쌩쌩 돌아가는 지붕 높은 빌딩이 아니라(물론 그런 공간도 있지만) 호놀룰루 공항의 경우 물이 흐르고 수풀이 우거진 가든을 꾸며 놓았고 빅아일랜드 코나 공항은 전통양식의 나지막한 목조 건물이 흩어져 있을 뿐 탑승객 대기 공간은 지붕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마치 버스를 기다리듯 햇볕을 쬐며 앉아 있다가 활주로의 비행기까지도 걸어서 간다. 보통의 공항이 주는 긴장감, 삼엄함은 오간데 없고 승객들은 비행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재미에 푹 빠질 수 있다. ★Travie info. 하와이안 항공 스케줄 인천→호놀룰루 HA460 매주 월·수·금·일요일 인천 출발 저녁 9시25분, 호놀룰루 도착 오전 11시 호놀룰루→인천 HA459 매주 화·목·토·일요일 호놀룰루 출발 오후 2시5분, 인천 도착 저녁 7시 25분(다음날) 문의 02-775-5552 www.hawaiianairlines.c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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