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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적 위상 갖춘 동학농민혁명,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세계사적 위상 갖춘 동학농민혁명,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29일 전북도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됐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세계사적 위상을 갖게 된 만큼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운 농민군 참여자를 독립 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수년째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을미의병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서훈해야 한다는 논리다. 학계는 1차 동학농민혁명(1894년 3월 20일 무장 봉기)은 신분제 철폐와 같은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었지만 2차 동학농민혁명(1894년 9월 10일 삼례 봉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내규로 독립운동의 시작을 명성황후 시해에 항거한 ‘을미의병’(1895년)으로 정해 이보다 앞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서훈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국가보훈처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최근까지 145명을 서훈했다. 그러나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인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한 명도 서훈하지 않았다. 이에 정치권이 관련 법 제정과 개정에 나섰으나 2개 법안 모두 상임위에 묶여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준병(정읍·고창) 의원은 지난 2월 1894년 9월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수 있도록 하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법’을 대표 발의했다. 앞서 지난해 4월 민주당 이정문(충남 천안병) 의원도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총 60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발의에 참여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관계자는 “현재 3700여명(유족 1만 2000명)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확인됐다”며 “관련 법안이 제·개정되거나 보훈처가 내규를 바꾸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이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서훈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60년대 훈남 스타 김석훈 “잊혀져가는 것도 아름답지” [메멘토 모리]

    60년대 훈남 스타 김석훈 “잊혀져가는 것도 아름답지” [메멘토 모리]

    “인생은 지나고 나면 모두 꿈과 같은 거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살아온 길 돌아보면 각자가 영화 한 편을 찍은 거나 같다.”(2019년 영화인복지재단 송년회 인터뷰 중) 1960년대 훈훈한 외모로 인기를 끈 원로 배우 김석훈(본명 김영현)이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9일 영화계와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 오후 1시 46분쯤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김석훈은 청주사범대를 나와 서울지방법원 서기로 근무하다가 1957년 유재원 감독에게 발탁돼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데뷔했다. 당시 유 감독이 요즈음 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어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약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고인은 ‘춘희’(1959, 신상옥 감독),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정창화 감독),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임권택 감독), ‘정도’(1972) 등 액션물뿐 아니라 ‘내 마음의 노래’(1960), ‘슬픈 목가’(1960), ‘비련십년’(1966) 등 멜로물에 출연했다. 공포영화인 ‘목 없는 미녀’(1966)와 ‘설야의 여곡성’(1972)도 그가 주연한 작품이다. 대표작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김석훈은 일본군에 맞서 학생독립단을 이끄는 투사 역할을 맡아 열띤 액션 연기를 펼쳤다. 장일호 감독의 ‘의적 일지매’(1961)에서는 신영균과 호흡을 맞췄다. 한참 인기 절정을 달리다 신성일, 남궁원, 김진규가 간판 스타로 떠오르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조연으로 활동했다. 김석훈이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나온 것은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 2’(1993)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지수’(김명수)의 양아버지 ‘최 장로’ 역을 맡았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김석훈은 깊고도 따뜻한 눈빛을 가진 배우로, 1960년대에는 그야말로 인기 스타였다”며 “개인적인 성품도 온화했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멋쟁이인 분이었다”며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가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30일 오후 1시 20분이다. 2005년 대종상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2002년 서초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명배우 회고전’에 참석하며 “잊혀져 가는 것, 그 또한 아름답지 않느냐”는 말을 남겼다.
  • ‘1960년대 미남 스타’ 원로배우 김석훈 별세

    ‘1960년대 미남 스타’ 원로배우 김석훈 별세

    1960년대 스크린에서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끈 원로 배우 김석훈(본명 김영현)이 별세했다. 94세. 29일 영화계와 유족 등에 따르면 김석훈은 전날 오후 1시 46분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김석훈은 청주사범대를 나와 서울지방법원 서기로 근무하다 1957년 유재원 감독의 영화 ‘잊을 수 없는 사람들’로 데뷔했다. 당시 유 감독은 길을 가다가 김석훈의 외모가 눈에 띄어 그를 발탁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약 25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석훈은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정도’(1972) 등 액션물뿐 아니라 ‘내 마음의 노래’(1960), ‘슬픈 목가’(1960), ‘비련십년’(1966) 등 멜로물에도 출연했다. 공포영화인 ‘목 없는 미녀’(1966)와 ‘설야의 여곡성’(1972)도 그가 주연한 작품이다. 대표작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김석훈은 일본군에 맞서 학생독립단을 이끄는 투사 역할을 맡았다. 장일호 감독의 ‘의적 일지매’(1961)에서는 신영균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김석훈이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나온 것은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2’(1993)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지수’(김명수)의 양아버지 ‘최장로’ 역을 맡았다. 유족은 연합뉴스에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멋쟁이인 분이었다”면서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가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1호실이며 발인은 30일 오후 1시 20분이다.
  • [최원목의 글로벌한국] 한일 현안, 정말로 해결하려면/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원목의 글로벌한국] 한일 현안, 정말로 해결하려면/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 제국주의 해악을 끼친 당사자들은 과거의 일본 세대다. 일본과의 진정한 협력 없이는 우리의 미래를 그려 갈 수 없다. 산적한 양국 현안을 정말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박근혜 정부가 전격적으로 단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합의는 획기적이었다. 일본 총리가 최초로 공식 사과를 했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재단 출연금을 지급한 것은 국가 책임을 간접적으로라도 시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는 물론이고 국민을 대상으로 사전 의견수렴 절차마저 생략하고 청와대가 권위주의적으로 일을 밀어붙인 게 화근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익을 위해 문제를 정말로 해결할 의지마저 없었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맹비난하며 일본 정부 출연금인 10억엔을 돌려준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정부 예비비로 기금을 운영하며 기존 합의를 파기하지도 않았다. 친일 세력이 장악한 사법부를 개혁하겠다며 대법원의 인적 구성도 파격적으로 바꿔 버렸다.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전격적으로 내려진 것은 그 결과물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재개 문제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 패널 절차의 최종 판정이 2019년 4월 내려졌다. 판정의 핵심 취지는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가 모두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부당하다고 판정한 1심 패널 판정의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을 다시 조정해 한국 조치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 보아야 최종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도 정부는 WTO 승소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데 바빠 판정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우리 측이 역전승을 거두었고 우리 조치의 정당성이 최종 확인된 것으로 설명해 버렸다. 이제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골이 돼 버렸다. 윤석열 정부도 한일 현안을 정말로 해결할 의지는 부족하다. 지난달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워싱턴선언이 채택됐다. 이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정부는 강제동원 배상금을 우리 정부가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해법인 양 제시해 버렸다. 실제로 피해자들이 이러한 대위변제를 거부하면 아무런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한미일 연쇄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띄워졌지만 아직까지 정말로 해결된 한일 현안은 없는 셈이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해양 방류 건마저 터져 버린 지금 정부는 일본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처리 기준에 따라 방류를 했는지를 검증해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해 버릴 태세다. 진정한 한일 관계가 수립되려면 제대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일본 여행을 떠나는 우리 국민 숫자가 해마다 급증하고 있고, 이들이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을 이미 일본에서 소비하고 있다. 그런데도 8개 현으로부터의 수입 금지 조치가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식의 논리가 얼마나 국제적으로 통하겠는가. 강제동원 배상 문제도 결국은 정부의 대위변제로 모든 피해자의 권리를 자동 소멸시키는 근거 조항을 특별법으로 만들어야만 종국적으로 해결된다. 결국 산적한 현안을 모두 묶어 구속력 있는 국제 중재재판 판결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판결이 있어야 정말로 후쿠시마 주변 수산물을 수입 금지하는 것이 정당한지, 강제동원 배상을 명령한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하는지,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 조치가 정당한지를 모두 국제적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그래야 필요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도 조성된다. 통상대국의 대일 정책이 국내 정치의 시녀로 전락해 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도 끊을 수 있다.
  • “인류 역사 최악 상처”…끝내 日사과 못 받은 채

    “인류 역사 최악 상처”…끝내 日사과 못 받은 채

    대만 정부가 지난 10일(현지시간) 자국의 마지막 생존 위안부 피해자 사망을 계기로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와 보상 요구 방침을 24일 확고히 했다. 대만 인권단체인 부녀구원기금회는 지난 22일 홈페이지를 통해 “5월 10일 저녁 92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은 대만의 마지막 남은 ‘위안부’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면서 “할머니는 생전에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인이 끝날 때까지 (사망 공개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제프 류 대만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상처”라고 비판했다. 류 대변인은 “대만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우려를 계속 표명할 것이며, 일본 측이 위안부 피해자 및 가족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1895~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에서는 59명의 여성이 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녀구원기금회는 전체 약 2000명의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군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에 가장 많고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 등을 합쳐 모두 2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현지 언론인 중국시보는 대만에서 199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시작해 당시 59명이 정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번에 세상을 뜬 마지막 생존자는 최연소 피해자였다고 전했다. 정부에 등록한 피해자 가운데 12명이 원주민이었고 ‘차이’ 할머니로 알려진 마지막 생존자도 대만 동북부 화롄 원주민이라고 덧붙였다. 2018년에는 정부 등록 위안부 가운데 2명만이 생존했고, 차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면서 모든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부녀구원기금회는 “할머니의 모습과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녀구원기금회는 “할머니들의 죽음으로 위안부 피해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대만의 교과 과정, 국립역사박물관 및 역사 책에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쟁 중 성폭력에 의한 여성 살해 등에 대해 계속 교육하고 홍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단체는 2017년부터 한국 시민단체와도 협력해 위안부 역사를 교과서에 싣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발족했으며 당시 한국과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의료 및 복지 지원을 발표한 바 있다.
  • “역사상 최악 상처” 마지막 위안부 사망…일본 향한 사과·보상 요구 계속

    “역사상 최악 상처” 마지막 위안부 사망…일본 향한 사과·보상 요구 계속

    대만 정부가 지난 10일(현지시간) 자국의 마지막 생존 위안부 피해자 사망을 계기로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와 보상 요구 방침을 24일 확고히 했다. 대만 인권다체인 부녀구원기금회는 지난 22일 홈페이지를 통해 “5월 10일 저녁 92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은 대만의 마지막 남은 ‘위안부’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면서 “할머니는 생전에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인이 끝날 때까지 (사망 공개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제프 류 대만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상처”라고 비판했다. 류 대변인은 “대만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우려를 계속 표명할 것이며, 일본 측이 위안부 피해자 및 가족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하라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1895~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에서는 59명의 여성이 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녀구원기금회는 전체 약 2000명의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군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에 가장 많고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 등을 합쳐 모두 2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현지 언론인 중국시보는 대만에서 199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시작해 당시 59명이 정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번에 세상을 뜬 마지막 생존자는 최연소 피해자였다고 전했다. 정부에 등록한 피해자 가운데 12명이 원주민이었고 ‘차이’ 할머니로 알려진 마지막 생존자도 대만 동북부 화롄 원주민이라고 덧붙였다. 2018년에는 정부 등록 위안부 가운데 2명만이 생존했고, 차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면서 모든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부녀구원기금회는 “할머니의 모습과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녀구원기금회는 “할머니들의 죽음으로 위안부 피해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대만의 교과 과정, 국립 역사 박물관 및 역사 책에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쟁중 성폭력에 의한 여성 살해 등에 대해 계속 교육하고 홍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단체는 2017년부터 한국 시민단체와도 협력해 위안부 역사를 교과서에 싣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발족했으며 당시 한국과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의료 및 복지 지원을 발표한 바 있다.
  • 아이 실수로 고액 작품 ‘와장창’…“이것도 예술”이라며 위로한 작가

    아이 실수로 고액 작품 ‘와장창’…“이것도 예술”이라며 위로한 작가

    “아이를 혼내지 않았으면 합니다.작가에게는 소중한 작품이지만 아이에게 미안함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김운성 작가가 작품 파손 소식을 듣고 센터 측과 나눈 문자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한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작품을 만지려다 그만 깨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작품을 만든 작가는 화를 내기보다 당황했을 아이와 아이 부모를 위로했다는 사연이 소셜미디어(SNS)를 타고 전해졌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부부 조각가의 한 사람인 김운성 작가다. 22일 시인 류근(57)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엄마와 함께 온 꼬마가 전시 중이던 조소 작품을 깼습니다’라면서 김 작가의 작품 파손 소식을 전했다. 센터에 따르면 지난 20일 오후 1시쯤 센터 제1전시관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모전 ‘사람 사는 세상’에 출품된 김 작가의 조소 작품 ‘중력을 거스르고’의 일부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김 작가의 작품을 깨뜨린 이는 바로 엄마 손을 잡고 전시회를 찾은 유치원생 남자아이. 센터 측에 따르면 아이가 고의로 작품을 민 것은 아니고, 호기심에 만져보려고 한 것이 그만 작품이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는 애초 작품 판매를 위한 전시는 아니었지만, 작품가는 500만원으로 책정된 상황이었다. 센터도, 아이도, 아이 엄마도 당황한 가운데 센터 쪽은 김 작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해 파손 사실을 알렸다.김 작가는 센터 측과의 연락에서 “변상(이나) 보상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작품이 파손되고 부모님과 아이의 충격이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면서 “작가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주시고 잘 이해를 시켜주시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특히 김 작가는 “이 작품은 많은 이상과 꿈을 가지고 성장하는 내용이다. 때론 견디고 헤쳐 나가야 하는 씨앗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라며 “작품 파손에 대해 (아이에게) 이해를 시켜주시되 혼내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김 작가의 대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3일 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작가님이 사고 소식을 접하고 작품 조각을 회수한 후 21일 밤을 새워서 깨진 작품을 다시 붙였다. 그리고는 김 작가가 깨진 흔적이 보이지만 이것도 작품이라며 22일 전시장에 다시 가져다 뒀다”라고 전했다. 센터 측은 이날 아이 엄마에게 연락을 취해 김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했고 양측의 만남이 성사됐다. 센터 측은 김 작가를 직접 만난 아이 엄마가 ‘고맙다’라고 인사했다고 전했다. 류근 시인은 SNS에 이 소식을 전하면서 “이 일화를 접하면서 진심으로 코끝이 찡했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술가의 마음이 그 어느 예술작품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라면서 “작품을 깬 꼬마를 먼저 걱정하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라고 덧붙였다. 19인의 예술가가 참여한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모전 ‘사람사는세상’은 이달 24일까지 진행된다.
  • 대만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 별세…“일본에 사죄·배상 계속 요구할 것” [대만은 지금]

    대만 마지막 위안부 할머니 별세…“일본에 사죄·배상 계속 요구할 것” [대만은 지금]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소에 배치된 대만의 마지막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가 일본 정부로부터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22일 대만 언론들에 따르면 대만 부녀구원재단은 이날 마지막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가 지난 10일 밤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뒤늦게 밝혔다. 부녀구원재단은 고인이 된 할머니가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발인식이 끝난 뒤 소식을 뒤늦게 알리게 됐다고 했다. 부녀구원재단 측은 “할머니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들의 모습과 정신은 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면서 “할머니들의 죽음으로 군성노예의 역사적 진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만 교과과정, 국사관, 역사책 등에 위안부와 군성노예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일본 정부에 위안부와 그 가족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대만에서는 199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까지 등록을 마친 위안부 생존자는 58명으로 집계됐다. 위안부구원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대만 위안부는 최소 1200명 이상으로 추산됐다. 대만 언론 펑촨메이 등에 따르면, 부녀구원재단은 1996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일본을 오가며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해왔다. 사오타오 위안부 할머니는 생전에 “금전적 보상은 필요없다.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2007년 일본 대법원은 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원해서 위안부로 간 것이 아니다. 선중 위안부 할머니는 생전에 일본군 세탁 업무에 지원했는데,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돼버렸다고 증언했다. 다른 이들은 필리핀, 중국 광둥 등으로 간호나 식당 업무를 하러 간다며 대만을 떠났지만 결국 모두 성접대를 하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하루 평균 세 명 이상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고 일본군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피임약을 강제로 먹이는가 하면 강제로 자궁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을 찾아…‘혁명의 발상지’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을 찾아…‘혁명의 발상지’ 전북 정읍

    동학혁명이 19일(한국시간) 새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전북 정읍 고부에서 첫 불꽃이 타오른 이후 129년 만의 일이다. 동학혁명이 4·19혁명과 더불어 세계의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던 날, 정읍 덕천면의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다녀왔다. 전국에 산재한 동학 관련 시설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기념관, 박물관, 기념탑 등 시차를 두고 조성된 다양한 시설들이 일종의 ‘혁명 기념물 콤플렉스’를 이루고 있다. ‘혁명의 발상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정읍엔 전봉준 유적, 갑오농민혁명100주년기념탑 등 관련 시설이 많다. 묶어 돌아보는 게 좋겠다.1893년 11월, 정읍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녹두 장군’ 전봉준 등 20여명이 모여 사발통문을 돌리고 있다. 모든 사람은 하늘처럼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다. 사발통문은 표현 그대로 둥근 사발을 덮어 놓고 그 위에 돌아가며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을 말한다. 오른쪽부터 참가자 이름을 적는 일반적인 통문과 달리 사발통문은 주모자를 파악할 수 없다. 참가자 모두가 공평하게 책임을 나눠 진다는 의미도 내포됐다.이듬해 1월. 고부에서 최초의 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피지배 계층인 농민이 중심이 돼 아래로부터 시작된 민중항쟁이었다. 농민들이 쏘아올린 불꽃은 3월 고창 무장에서 본격적인 혁명으로 확대됐다.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과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일제의 야욕과 무능한 조선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 벽에 좌절됐지만, 이후 의병항쟁과 3·1독립운동, 항일 무장 투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한국의 근대화와 민중운동의 근간이 됐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최초로 대승을 거둔 황토현전적(사적) 일대에 지난해 조성됐다. 약 30만㎡ 부지에 추모관, 전시관, 연수동, 캠핑장 등을 갖췄다.들머리엔 사발통문 광장이 있다. 사발처럼 둥그런 형태다. 광장 둘레에 죽창을 상징하는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의 뾰족한 타원형은 횃불을 상징한다. 황토현의 자연 환경을 되살린 ‘기억의 들판’, ‘동학농민 혁명의 길’ 등을 지나면 ‘울림의 기둥’이 나온다. 당시 농민군이 봉기했던 전국 90개 지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기둥의 흰 빛은 무명옷을 입은 농민군과 혁명의 순수성을 상징한다.‘농민의 벽’은 전시관 외벽 경사면에 조성된 조형물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겠다는 농민군의 결연한 의지를 돌망태 형태의 예술로 형상화했다.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황톳빛의 박물관(추모관+전시관)이다. 전시관은 치열했던 동학농민의 삶과 혁명을 다섯가지 테마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추모관엔 ‘1894 그날의 기억’과 희생된 농민군 이름표 조형물 등이 전시됐다. 건물 밖의 야트막한 잔디 언덕엔 ‘죽창결의’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들이 무기로 사용했던 죽창을 금속재질로 형상화한 것이다. 대나무가 차음 굳세고 단단한 스틸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았다. 안내판은 “대지에 뿌리를 둔 순박한 농민들이 강인한 혁명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라 적고 있다. 바로 이웃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2005년 조성됐다. 상설전시관, 어린이전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됐다.박물관 건너는 황토현 전적지(사적)다. 동학 농민혁명 자료를 전시한 제민당, 농민군의 위패를 모신 구민사 등으로 이뤄졌다. 끝자락엔 ‘불멸, 바람길’ 조각 작품이 서 있다. 동학농민군의 행렬을 부조, 투조, 환조 등의 기법을 활용해 제작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는 ‘사람 인’(人) 자 모양이다. 행렬의 선두에 전봉준을 세우고 뒤로 다양한 연령대의 농민군을 배치했다. 전적지 뒤의 야트막한 언덕 위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다. 동학 농민전쟁 최초의 기념물이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도로 건립됐다. 황토현 전적지 역시 박정희 의장 시절 첫 삽을 뜨고 전두환이 정비한 곳이다. 이 탓에 최초의 기념물인데도 다소 떨떠름한 대접을 받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동학난’이라 불리던 것이 ‘혁명’으로 처음 격상됐고, 동학에 대한 국민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내장산 국립공원 초입의 내장호 앞엔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탑’이 있다. 2005년 작품으로 4각뿔 형태로 솟은 주탑과 4개의 원기둥 부탑으로 이뤄졌다. 주변에 조각공원, 전봉준 공원, 솔티마을 생태숲 등도 조성돼 있다. 차분하게 돌아볼 만하다.이평면 조소마을엔 전봉준 고택(사적)이 있다.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1890년대 당시 농가의 모습을 재현했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준이 28세 때인 1878년에 지어진 고택은 1894년 일부 소실됐다가 1974년 보수했다. 수탈의 상징이었던 만석보 터, 고부관아 터 등도 인근에 있다.
  • “이젠 됐다 할 때까지 일제 만행 사죄”…日양심 오야마 목사 별세

    “이젠 됐다 할 때까지 일제 만행 사죄”…日양심 오야마 목사 별세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 일제 만행에 대한 사죄 운동을 벌여온 일본 기독교계의 양심인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1927년 도쿄에서 태어난 오야마 목사는 와세다대학원과 도쿄신학숙을 졸업한 후 목회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5년 일본 패전 뒤 일본에서 최초로 아시아 각국에 대한 사죄 운동을 전개했다. 일한친선선교협력회 회장을 맡았던 오야마 목사는 일한친선선교협력회 소속 일본인 원로 목사 15명과 2014년 10월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를 찾았다. 당시 그는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김복동 할머니 앞에서 “일본인은 당신들의 소중한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면서 “신이 당신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기를 기도한다”고 사죄문을 읽었다.2019년 2월에는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일한친선선교협력회 회원으로 구성된 사죄단을 이끌고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방문했다. 일본은 3·1운동의 확산이 두려워 1919년 4월 15일 제암교회에 주민 23명을 가두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일본인 사죄단은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사죄했다. 오야마 목사는 “당시 일본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다”면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은 아무도 사죄하지 않고 있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우리처럼) 사죄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걸 (한국인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는 기독교인학생회(KGK)와 성서그리스도교회 창립자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어 ‘현대역 성서’의 역자이기도 하다.
  • 위안부 소송 나온 日변호사 “심각한 인권침해…인권 우선한 판단 해주길”

    위안부 소송 나온 日변호사 “심각한 인권침해…인권 우선한 판단 해주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일본 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본인 변호사가 한국 법정에 직접 증인으로 출석해 비판했다. 해당 소송을 제기한 원고 중 한명인 이용수 할머니도 직접 재판에 출석해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 필요하다고 소리 높였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부장 구회근)는 11일 이 할머니와 피해자, 유족들 총 17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에는 일본 인권 변호사인 야마모토 세이타(70)씨가 원고 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번 재판의 쟁점은 ‘주권면제’ 적용 여부였다. 주권면제란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 관습법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 국제법상 원칙인 주권면제를 인정해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이날 야마모토 변호사는 ‘중대한 인권 침해 사실이 있고 그 피해자의 마지막 구제 수단이 국내 법원인 경우에는 재판을 받을 피해자의 권리가 주권면제 원칙 적용보다 우선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언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초래된 사건으로, 피해자들이 마지막 구제 수단으로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헀다”면서 “이들의 사법 접근권을 보장해서 인권을 구제하기 위해 주권면제 적용을 제한해야 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또 야마모토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현재 시점에서 일본 법원에 국가 책임을 묻는 소송을 낸다면 승소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서 일본 사법부가 지니고 있는 원칙적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강제노동이나 위안부 피해자 개인이 소송을 통해 청구권을 다툴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면서 “이 판결 내용이 현재 일본정부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최고재판소는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며 맺은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내용을 판단의 근거로 내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야마모토 변호사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민사소송을 할 수 없다’는 문구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며 “명백히 조약 문구를 무시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이른바 ‘관부(關釜) 재판’에서 소송을 제기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대리한 인물이다. 국내에서는 영화 ‘허스토리’의 소재로 잘 알려진 관부 재판은 1992년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으로, 야마모토 변호사가 대리를 맡은 1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는 재판을 마치고도 취재진에게 “한국 법원이 용기를 가지고 ‘주권면제’보다 ‘인권’이라는 기준에서 판단해주길 바란다”며 “그렇다고 한국이 득을 보고 일본이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피해자 개인과 가해 국가 사이의 관점에서 인권을 중시한 판단이 늘어날수록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줄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야마모토 변호사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치고, 다음 변론기일에서 주권면제 원칙 등에 대해 법리적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국제법 전문가에 대한 의견을 청취할 예정이다. 다음 기일은 7월 20일이다.
  • 신민호 전남도의원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발굴에 적극 나서야” 촉구

    신민호 전남도의원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발굴에 적극 나서야” 촉구

    전남도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발굴에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5월 11일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국가 기념일이다. 129년 전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봉건제도에 항거해 궐기했던 농민혁명이다. 정부는 동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지난 2019년 동학 농민군이 첫 승리를 거두었던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5월 11일을 법정 기념일로 제정했다. 전남은 1·2차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다. 현재까지 파악된 전남 도내 참여자 규모는 1000여명, 유적지는 20개 시·군 81개소다. 수만 명의 농민군이 참여한 전남 지역 참여자 규모에 비하면 파악된 규모는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다. 주로 후손들의 신청에만 의존하면서 동학 혁명의 참여자를 확인하는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 전라남도의회 신민호 기획행정위원장(더불어민주당·순천6)이 최근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전남도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전수조사를 하고, 관련 유적지 정비 및 발굴 작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촉구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항쟁의 무대인 우리 지역의 빛나는 역사가 전북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재단을 중심으로 정리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 위원장은 “순천과 광양, 구례 등 농민군들이 중심이 돼 조직한 영호도회소는 전라도 지역 동학 농민군 가운데 일본군과의 전투를 목적으로 조직된 최초의 봉기 부대다”며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고, 1차 혁명의 중심지였던 장성 황룡촌을 비롯해 2차 혁명의 중심지인 장흥 석대들, 섬진 나루터 등 농민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장터가 셀 수 없이 많다”고 지적했다. 신 위원장은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 한 우리 지역 선조들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1·2차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무대였던 전남도가 더 적극적인 전수조사를 통해 참여 규모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를 위해 일어난 농민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으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이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 추진은 당위성이 충분하지만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 위원장은 지난 2월 1일 열린 제368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건의안’을 대표발의하고 국회와 정부, 국가보훈처에 조속히 서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촉구한 바 있다.
  • ‘증발’ 녹아내린 14만명…인류 최초이자 최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증발’ 녹아내린 14만명…인류 최초이자 최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일본 총리 초청으로 오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한일 정상은 G7 정상회의 계기로 현지에 있는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원폭 피해 규모에도 관심이 쏠린다. 원폭이 실전에 사용된 것은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공격을 한 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6일, 시곗바늘이 8시 15분에서 막 16분을 가리키는 순간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용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산업도시이자 통신 중심지였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당시 인구는 35만명에 달했다. 우라늄 235 기반 포신형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측정된 폭발력은 일반적으로 TNT 15kt으로 알려져 있다. 눈 깜짝할 사이 엄청난 섬광과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지점 인근 온도가 4000도에 육박했고 사람들은 그냥 녹아내렸다. 이어 엄청난 열풍이 주변을 휩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을 가득 품은 검은 비가 쏟아졌다. 원폭 후 히로시마 중심가 7㎞ 지역 내 모든 것들이 폐허로 변했다. 히로시마에서만 14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군인이 2만여명,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한국인 3만여명도 있었다.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로시마 원폭 공격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하지 않자 3일 후 미국은 나가사키에 원폭 한 발을 더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폭발했다. 4만~7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한순간 사망했다. 그 중 약 1만명은 한국인이었다. 플루토늄 폭탄 팻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리틀보이보다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적었다. 평야 지대인 히로시마와 달리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폭 위력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위력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히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일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원폭 공포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인류는 그 위력에 압도됐다. 원자탄의 개발은 2차 대전 이후 세계를 누가 제패하고 끌고 가는지를 결정하는 중대 변수였다. 핵무기의 위력을 확인한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갖고 싶어 했다.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 어느 나라도 파멸을 각오하지 않고는 핵무기로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었다. 핵무기가 갖는 공포의 균형은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자칫 모두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1·2차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 전쟁은 현재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20세기 전반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에 의한 사망자가 약 1억명에 이른 데 비해, 핵 시대가 도래한 20세기 후반의 전사자는 2000만명에 불과(?)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의 현지 동포사회에서는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 계획을 환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준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은 “우리(히로시마 동포사회)가 기원하고 기원했던 일이기 때문에 매우 기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 적이 없다. 현직 일본 총리로서는 오부치 게이조(1937∼2000)가 1999년에 참배했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세워졌다가 1999년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선 매년 8월 5일 한국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나눔의집, 위안부 피해 할머니 ‘ 효잔치’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나눔의집, 위안부 피해 할머니 ‘ 효잔치’

    “꽃보다 아름다운 어르신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어버이날인 8일 오후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효 잔치’가 열렸다.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이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할머니들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하는 잔치다. 이번 효잔치는 올해 100살을 맞은 박옥선 할머니의 ‘상수(上壽)’를 축하하는 잔치를 겸해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며, 이 중 231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는 9명뿐이다. 박 할머니는 생존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나눔의 집에는 박 할머니를 비롯해 이옥선(96)·강일출(95) 할머니 등 생존자 3명이 생활하고 있다. 192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 할머니는 17살 때 중국 헤이룽장성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는 등 4년간 고초를 겪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다가 2001년 귀국한 뒤 2003년 국적을 회복했다. 이날 행사는 카네이션 달아드리기 및 꽃바구니 전달, ‘어머님 은혜’ 합창 등 1부 어버이날 기념식에 이어 2부에서 박옥선 할머니의 100살 축하 잔치와 축하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효 잔치에는 박옥선 할머니를 포함해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할머니 3명과 외부에 거주하는 이용수(95)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4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방세환 광주시장, 주임록 광주시의회 의장, 소병훈(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시민단체 및 봉사단체 관계자, 시민 등 100여명이 자리를 함께해 축하했다. 한복을 곱게 입은 할머니들은 선물 받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흥겨운 공연을 지켜봤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를 제외한 다른 할머니 3명은 거동이 불편하고 귀가 어두워 소리도 잘 듣지 못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방세환 시장은 할머니들께 큰절 올리며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말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강일출 할머니가 예전에 ‘용수야, 나는 여기서 살다 죽겠다’고 했었는데, 법에서 더는 여기서 살아선 안 된다고 했다는데 할머니들이 여기서 살다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광주시장에게 요청했다. 광주시는 지난해 8월 경기도 감사를 통해 적발된 나눔의 집의 법 위반 행태에 대한 시정 조치를 요구하는 행정처분 사전 예고를 지난주 나눔의집 측에 했다. 당시 도 감사 결과, 노인복지지법상 ‘양로시설’로 돼 있는 나눔의 집 입소자들이 고령, 질병(치매 등) 등으로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음에도 광주시는 지도·감독 등 업무수행과정에서 이런 사실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에 따라 광주시는 노인복지법상 ‘요양시설’로 바꿔 시설을 운영하는 등 관련법 기준에 맞게 운영하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2018~2022년 5년간 불법으로 지급받았다며 국고보조금 11억3000여만원을 반환하라고 나눔의집 측에 요청한 상태다. 나눔의 집 대표 성화스님은 “이곳에 계신 할머니들은 모두 국가보훈대상자들로 계속 거주하고 싶어 하시니 돌아가실 때까지 여기서 모실 수 있도록 최대한 정부와 경기도, 광주시 등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 [B컷용산]‘어린이정원’으로 탈바꿈한 용산기지

    [B컷용산]‘어린이정원’으로 탈바꿈한 용산기지

    기사 작성과 수정 과정에서 제외된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들이 있습니다. ‘B컷 용산’은 ‘A컷’ 지면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용산 대통령실 현장 이야기를 온라인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모두가 기억하는 결과인 A컷에서 벗어나, 과정 이야기와 풍성한 사진을 담아 B컷을 보여드립니다. 미래세대에 먼저 개방된 용산공원 “이곳은 시민공원으로 전부 개방하겠다. 백악관 같이 낮은 담을 설치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직접 집무실 용산 이전 계획을 설명했을 때 밝혔던 구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산 공원 개방’이었다. 취임 및 집무실 이전 1주년을 앞두고 그 구상이 비로소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기존에 주한미군 기지로 사용되던 부지가 지난 4일 ‘용산어린이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정식 개방됐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주둔했고, 최근까지 미군이 주둔하며 무려 120여년간 시민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금단의 땅’이 공개된 순간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어린이들과 함께 첫 입장을 하는 ‘개문 퍼포먼스’로 공원의 정식 개방을 알렸다. 공원은 30만㎡(9만평) 규모로, 내부에는 어린이도서관과 야외 휴게공간인 이음마당, 이벤트하우스, 잔디마당, 야구장과 축구장을 갖춘 스포츠필드 등이 마련됐다. 잔디마당 내 전망언덕에서는 대통령실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개방 행사가 끝나고 전망언덕에서 김건희 여사, 참모들과 함께 정원 개방을 기념하는 식수 행사를 했다. 기념수는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소나무였다.도어스테핑 중단 후 기자들과 첫 소통한 尹 대통령실은 어린이정원 공식 개방 이틀전인 2일 출입기자단들과 오찬 간담회를 겸한 사전공개 행사를 가졌다. 대통령실 참모들이 먼저 참석해 진행하던 간담회 분위기가 들썩이기 시작한 것은 윤 대통령의 ‘깜짝 방문’부터였다. 이날 윤 대통령과 출입기자들과의 대면은 지난해 11월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 중단 후 처음으로 갖는 소통의 자리였다. 윤 대통령은 “여러분과 자주, 처음에는 취임하고 매일 봤잖아요. 그렇죠? 근데 안 보니까 좀 섭섭하죠”라며 도어스테핑 당시를 회상했고, 몇몇 기자들과 함께 앉은 테이블에서는 국빈 방미에 대한 소감과 한중관계 등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이 될지 간담회가 좋을지, 홍보수석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취임 1주년을 계기로 대국민소통에 나설 수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지지율 반등 ‘견인’…방미 성과 공유도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앞서 5박7일 일정의 방미 성과를 국무위원들과 공유했다. 이번 국빈 방미는 윤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 반등을 이끈 배경으로도 꼽힌다. 한미동맹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윤 대통령의 모습은 미 국민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듯하다. 미 CBS방송의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영상에는 한국전 참전용사가 감사의 글을 남겼고, 이에 윤 대통령이 댓글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92세의 스탠턴 키퍼가 “윤 대통령님, 미국의 참전용사와 한국을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헌신을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오늘 저를 미소짓게 하셨습니다”라는 댓글을 남기자, 이에 윤 대통령은 다시 댓글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늘 저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참전용사들께서는 자유를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감사를 전했다.
  • 日시민단체 “기시다, 방한 때 직접 식민지배 반성·사과 표명해야”

    日시민단체 “기시다, 방한 때 직접 식민지배 반성·사과 표명해야”

    일본 시민단체가 7일 한국을 방문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와 관련해 직접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에게도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4일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은 이달 7∼8일 기시다 총리의 방한에 앞서 ‘기시다 총리는 자신의 말로 하라, 식민지 지배의 반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사죄를’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공동행동은 성명에서 “기시다 총리가 방한해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가 문제”라며 “한국 언론이 기시다 총리의 성의 있는 호응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를 듣고 실행할 일이 아니라 기시다 총리가 이 기회에 자신의 말로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3월 6일 한국 정부의 징용공(일제 강제동원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 문제 해결책 발표와 이후 한일 정상회담은 한미일 안보 협력체제의 재건과 강화를 최우선으로 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라며 이같이 언급했다. 기시다 총리는 3월 16일 도쿄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에서 본인 입으로 직접 사죄와 반성을 말하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사죄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은 대신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라는 표현만 되풀이했다. 기시다 총리가 언급한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은 당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말한다. 공동선언문에는 오부치 총리가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뱉은 말에서 ‘역대 내각의 입장’이란 표현이 논란을 일으켰다. 과거 일본 내각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강제동원 문제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부정하는 발언을 내뱉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또 기시다 총리는 3월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서도 사죄하지 않았다. 공동행동은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던 한일 관계가 간신히 이웃 국가 관계로 되돌아갔다지만 강제동원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한일 정부 간 관계가 진전돼도 강제동원 피해자가 방치된 채로는 피해자도 한국 국민도 납득할 수 없다”면서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를 확정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15명 가운데 10명의 유가족은 지난달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을 수용하고 변제금을 받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나머지 피해자 5명 측은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을 거부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 용산미군기지 ‘용산어린이정원’으로 모레 개방…그나저나 로봇개는?

    용산미군기지 ‘용산어린이정원’으로 모레 개방…그나저나 로봇개는?

    주한미군으로부터 돌려받은 용산공원 반환 부지 일부가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오는 4일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재탄생한다. 한편 용산공원 개방과 함께 대통령실의 ‘과학경호’ 일환으로 추진됐던 ‘로봇견(犬)’ 도입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일 대통령실은 보도자료를 통해 용산 미군기지 반환 완료 후 추진 예정인 ‘용산공원’ 정식 조성에 앞서 대통령실 청사 앞부분 반환 부지 약 30만㎡를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함께 국민과 소통 접점을 넓히는 한편 용산기지의 반환 성과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기 위해 1년간 준비를 거쳤다”면서 “미래 주역인 어린이들이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아 명명했다”라고 설명했다. 120여년간 민간출입 통제된 ‘금단의 땅’ 봉인 해제일제강점기·주한미군 시설물 최대한 유지·활용 용산어린이정원 조성은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후 일본군이 주둔했고, 광복 이후 지금까지 미군기지로 활용돼 민간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던 ‘금단의 땅’이 약 120년 만에 일반에 개방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용산어린이정원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 및 병참기지화를 위해 설치했던 시설물과 해방 이후 조성된 미군기지 특색을 최대한 살리면서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다양한 여가 공간을 추가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신용산역 1번 출구 인근에 있는 서쪽 주 출입구는 일본이 한반도 침략 및 병참기지화를 위해 설치한 ‘한국주차군사령부’ 정문이었다. 광복 이후엔 남한에 진주한 미7사단 사령부 정문, 사우스포스트에 위치한 벙커 및 121병원 출입구 등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미군 숙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조성한 홍보관에선 조선시대부터 이번 개방까지 용산기지 120년 역사를 볼 수 있다.또 1967년부터 3년간 용산기지에 살았던 수 코스너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당시 미군 가족의 집을 재현한 ‘수하우스’와 한국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미8군 클럽 이야기 등을 소개한 ‘기지 이야기’ 공간도 만날 수 있다. 공원 내에는 있는 카페 ‘어울림’은 잔디마당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탄소 저감 원두를 사용하고 발달장애인이 제작한 간식을 판매하는 한편, 용산 지역 청년 카페와 협업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잔디마당 지역은 과거 4곳의 미군 야구장을 정비한 공간으로, 서울 도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과학경호’ 내건 대통령실 ‘로봇견’ 도입 무산 이날 대통령실 앞 미군기지 반환 부지를 공원으로 개방하면서 추진됐던 ‘로봇견’ 도입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일 연합뉴스는 대통령실 관계자와의 통화에서 “오는 4일 용산공원 개방 때 로봇견은 도입되지 않는다”라면서 “당장 효용성이 크지 않다는 내부 판단이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로봇견은 앞서 대통령 경호처가 경비 드론(무인기) 등과 함께 ‘미래 과학경호’의 대표 사례로 제시했던 장비이다. 지난해 6월 용산공원 시범 개방 때 대통령실 경내에서 개 모양의 4족 로봇이 목격됐으며, 이후 실전 테스트도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대통령실의 로봇견 도입과 관련하여 지난해 11월 23일 대통령실이 로봇견 임차 계약 과정에서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에게 고액의 후원금을 낸 인물이 실소유한 업체에 특혜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통령실은 같은날 “공정하고 투명한 계약 과정을 거쳐 결정된 것”이라며 논란을 즉각 일축했다.
  • 용인서 광복군 전신 ‘광복청년공작대’ 창설 85주년 기념식

    용인서 광복군 전신 ‘광복청년공작대’ 창설 85주년 기념식

    경기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가 몸담고 항일운동을 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창설 85주년 기념행사가 24일 용인시청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사단법인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지난해부터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올해는 현재 투병중인 이 항일운동 단체의 현재 유일한 생존 여성대원인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기념식 장소를 용인시청으로 정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상일 시장, 이형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장,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 우상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오희옥 지사의 장남 김흥태 씨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창설 85주년 기념식을 용인에서 열게 돼 영광스럽다”며 “우리 후손들이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활동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처인구 원삼면 출신의 오 지사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오 지사에 이르기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오 지사의 할아버지 오인수 의병장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1915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광복군 장군으로 활약했고, 어머니 정현숙 지사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언니인 오희영 지사는 오 지사와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으로 활동했고, 형부인 신송식 지사 역시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1927년 출생한 오 지사는 언니와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 수집을 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오 지사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오 지사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으로 활동한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가이며 현재 중앙보훈병원에서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다.
  • 별빛에 취한 경복궁의 봄

    별빛에 취한 경복궁의 봄

    “따라오시지요.” 안내를 맡은 상궁의 말과 함께 조선시대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입궁이 금지된 밤의 경복궁이 임금의 특별 허락하에 문이 열리자 감춰 뒀던 이야기가 별빛처럼 쏟아졌다. ‘창덕궁 달빛기행’과 함께 대표적인 궁궐 프로그램인 ‘경복궁 별빛야행’이 지난 15일 개막했다. 5월 13일까지 매주 수~일요일에 진행하는데 예매 시작 1분 만에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회차당 32명씩 떠나는 시간 여행에선 발걸음마다 잠들어 있던 고궁의 사연이 꽃을 피웠다. 가장 먼저 들어선 곳은 소주방. 이곳에서는 관람객의 허기를 달랠 ‘도슭 수라상’이 기다리고 있다. 도슭은 도시락의 옛말로 왕과 왕비에게 올리던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차린 수라상에는 표고버섯 석류탕, 생선완자전, 너비아니, 저염명란젓 등이 정갈하게 올라왔다. 식사하는 동안 펼쳐진 국악 공연은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별이 뜨고 본격적인 야행이 시작되면 관람객들은 자경전, 함화당, 장고 등을 둘러보게 된다. 자경전 마당의 십장생굴뚝은 굴뚝 하나를 짓더라도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장인들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장고에 다다르면 장고마마와 나인이 준비한 작은 상황극이 기다린다. 봄밤에 은은히 빛나는 장독대에서는 최고의 요리를 꿈꾸던 궁중 여인들의 노고가 익어가는 듯했다.지난 5일부터 시민들의 독서 공간으로 개방한 집옥재는 양옆의 협길당, 팔우정과 어우러져 관람객들을 맞는다. ‘옥처럼 귀한 보배(서책)를 모은다’는 집옥재의 의미 그대로 내부에는 다수의 책이 꽂혀 있다. 특별히 올해는 용의 형상을 새겨 임금이 앉던 의자인 용교의에 직접 앉아 볼 수 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건청궁 곤녕합에 다다르면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명성황후의 비극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달빛기행’의 백미로 후원의 부용지 야경이 꼽힌다면 ‘별빛야행’에는 향원지 야경이 있다.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의 향원정은 고종이 1873년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앞에 연못(향원지)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다. 거울처럼 연못에 향원정과 취향교가 밤하늘과 함께 반영된 모습은 관람객들을 봄밤의 향기에 제대로 취하게 만든다. 취향교에서 기다리던 임금이 별빛야행 때만 특별히 개방하는 문으로 들어가면 가까이 마주하는 향원정이 인상 깊은 고궁의 추억을 완성시킨다.
  • [데스크 시각] 소프트 파워에 자유를/최여경 문화체육부장

    [데스크 시각] 소프트 파워에 자유를/최여경 문화체육부장

    ‘미국 대통령 부인 질 바이든이 한국 대통령 국빈 방문 만찬에서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의 합동공연을 제안했는데 한국 측 의전비서관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자 미국 정부가 답답해하면서 외교비서관과 안보실장까지 문제 삼은 것으로 보임.’ 3월 말 뜬금없이 이런 정보가 돌았다. 의전비서관이 대통령 방일에 앞서 돌연 사퇴한 데 이어 외교비서관이 인사 이동을 하자 대통령실 내부 문제와 관련된 ‘카더라’ 소문이 퍼졌다. 그러더니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의 합동공연’ 얘기가 돌고,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대통령실이 “결정된 것이 없다”며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사이 안보실장까지 교체됐다. 한반도 안보 상황과 미국 반도체법(CHIPS ACT) 영향 등 한미 간 중대 사안이 수두룩한데 대통령실 안보라인이 방미 전 교체되니, 이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소문은 더 덩치를 불리고 의문을 키웠다. 그사이 가장 마음을 졸인 건 블랙핑크 소속사 YG 엔터테인먼트였다. 한미 정상 만찬이 예정된 이달 26일, 블랙핑크는 멕시코에서 월드투어 ‘본 핑크’ 공연을 한다. 물리적으로 만찬 공연이 어려운데도 YG 관계자는 “정부가 요청하면 검토하려 했다”며 “그런데 이번 문제의 원인이 된 듯 보여 억울하다”고 했다. 안보실장 사임 이틀 후에 대통령실 언론공지는 “보도되고 있는 공연은 대통령의 방미 행사 일정에 없다”였다. 제안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논의는 이뤄졌는지, 논의가 이뤄졌다면 어느 선까지 진전됐다가 어떤 이유로 빠지게 됐는지 등 설명이 없이 이번 사태의 끝엔 블랙핑크만 남았다. 미국 정치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1980년대 후반 ‘소프트 파워’라는 단어를 내놓으며, 엄청난 화력을 가진 무기와 달리 문화·경제적인 영향력으로 다른 나라를 설득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지난해 10월 영국 일간 가디언은 사설 ‘한국 소프트 파워: 보기보다 강하다’에서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블랙핑크 등을 다양하게 언급하며 “한국은 엄청난 문화적 거물이 됐다”고 썼다. “강압이나 비용 지불이 아닌 문화적 매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소프트 파워)이 한국의 핵무기”라는 영국 정부관료의 말을 인용했다. 한국을 유일한 분단국가 정도로 알거나 남한과 북한을 헷갈려하던 외국인들은 2003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10년이 지나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으며 한국(South Korea)을 떠올렸다.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 주고, 뮤직비디오 속에 녹아들면서 한국이 전 세계에 홍보되기 시작됐다. 이후에 속속 등장한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케이팝 스타들의 태도와 인식이 그들의 팬덤에 수용되고 주변으로 퍼졌다. 2018년 BTS 지민이 입은 ‘광복절 티셔츠’가 문제가 되면서 일본 현지 공연을 앞두고 돌연 방송 출연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일부 극우 세력이 공연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현지 팬들은 “티셔츠가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면서도 “BTS를 지켜 주겠다”며 뜨겁게 열광했다. 한일 간 역사 인식이나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 독도 영유권 주장 등에서도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소프트 파워인 것이다. 중국 정부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부으면서 애국주의 영화를 내놓아도 세계적 파급력이 없는 것은 정부 개입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나이 교수도 중국이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따라가지 못하는 원인을 ‘당 통제의 고삐를 잡아 영향력이 제한된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정부나 국가에 묶어 두려 하거나, 누군가의 행보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 또는 무엇인가를 가리는 도구 정도로 여기는 건 촌스러운 일이다. 더불어 거부감을 안길 수 있다. 이미 존재만으로도 한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소프트 파워가 더욱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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