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군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만감류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경의선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중위소득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 올리브영
    2026-01-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055
  • 北 위안부 단체, “日 절대 용납치 않고 남녘의 계층과 연대할 것”

    北 위안부 단체, “日 절대 용납치 않고 남녘의 계층과 연대할 것”

    북한의 위안부 단체가 “과거 범죄행위를 전면 부정하며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의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 대가를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로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라며 남북의 연대를 강조했다.16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따르면 ‘조선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연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조대위)는 지난 15일 정대협 28주년을 맞아 남북의 굳은 연대를 강조하는 축전을 보내 왔다. 조대위는 이 축전에서 “정대협이 일제의 반인륜적 죄악청산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의기억재단과 조직적 통합을 이루고, 대중적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우리 민족이 당한 모든 불행과 고통, 손실의 대가를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고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며, 정대협을 비롯한 남녘의 각 계층과 굳게 연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결성됐다. 지난 7월부터는 2015한일합의 무효화를 위해 정의기억재단과 통합 출범해 ‘정의기억연대’로 명칭을 바꿨다. 북한의 조대위와는 그간 국제 사회에서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활동을 이어 왔다. 2000년에 개최한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는 남북공동검사단을 구성하여 남북이 하나의 공동기소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한편, 정의연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 국제회의장에서 ‘북측 생존자들의 기억과 증언,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연대’라는 주제로 창립 28주년 심포지엄을 연다.이 자리에서는 재일동포 2.5세 김영 르포작가가 북측 경흥위안소 답사 내용을 발표한다. 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리경생, 김영실 할머니 등 북한에 남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예정이다. 정의연은 “그동안 남북관계 단절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북측 피해자들과 위안소에 관해 이야기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불온한 어둠을 깨치고… 시대를 뚫고 나온 詩

    불온한 어둠을 깨치고… 시대를 뚫고 나온 詩

    파일명 서정시/나희덕 지음/ 창비/152쪽/9000원나희덕의 시가 독해졌다. 피 흘리고 찢기는 한편 늑대, 하이에나 등의 맹수들이 등장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어쩌면 시인이 처음 내뱉는 거칠고 직설적인 어법’이라는 출판사 측 설명. ‘나희덕’ 하면 ‘배추의 마음’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 변화가 생소할 듯도 하다. 무엇이 시인을 변하게 한 것일까. 시인이 4년 만에 펴낸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창비). 독해진 까닭에 대해 지난 14일 전화로 만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뿌리에게’, ‘배추의 마음’ 등 식물에 관한 시를 쓸 땐 수목적인 상상력, 유기체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뒀어요. 하지만 현실에 대한 상처나 환멸이 깊어지면서 내 안의 동물성이 발현된 거 같아요.” 시인 내부의 동물성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이명박근혜’ 시절이다. 세월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의 어둡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시인 자신도 ‘블랙리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대면하고 발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습니다. 내 개인의 서정이나 이전의 방식으로 쓰면 잘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것 자체가 시대에 대한 결례라고나 할까요.”시집 제목 ‘파일명 서정시’는 시인과 비슷한 처지였던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냉전기 구 동독 정보국이 시인 쿤체를 감시하며 만든 자료집 이름이 ‘Deckname Lyrik’, 파일명 서정시였다.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시 ‘파일명 서정시’) 블랙리스트에 따른 배제와 민간인 사찰이 자행됐던 우리네 현실과 비슷하다. 시집에는 시인을 ‘리스트’에 오르게 했던 그 시들이 실렸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난파된 교실’, ‘문턱 저 편의 말’ 등이다. ‘문턱 저 편의 말’은 광주에서 열렸던 세월호 재판 당시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시인이 직접 듣고 썼다. “실제 학생들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경험을 했어요. 고통이라는 것은 논리 정연하게 얘기될 수 없어서 파편화된 말이나, 거대한 침묵으로 대체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인의 경험처럼 증인들의 말 곳곳은 말 줄임표로 대체된다. ‘우리 반에서…저 말고는…아무도…구조되지 못했…친구들도…살 수 있었을…아무도….’ 여성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각, 이를 넘어선 연대 등을 주제로 한 시들도 눈에 띈다. ‘붉은 텐트’에서는 여자들더러 이 붉은 텐트 속으로 들어와 피를 흘리라고 말한다. ‘들린 발꿈치로’에서는 사람도 여자도 되지 못한 채 인간이라는, 남자라는, 군인이라는 짐승을 받고 또 받아야 했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혼령을 위무한다. ‘눈과 얼음’, ‘Rhythm 0’ 등은 ‘미투’와 맞닿아 있다.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던 구 동독 정권이 쿤체에게서 느낀 두려움이다. 시집 ‘파일명 서정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무슨 일’에 대해 쓰겠다는 시인의 다짐이자 실천의 결과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회 서울의 영화1(유현목의 오발탄) 편이 지난 10일 용산구 용산2가동 해방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화인이 뽑은 ‘한국영화 100선’ 중 당당히 1위로 뽑힌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의 무대를 누볐다. 영화의 원작인 이범선의 1959년작 단편소설 ‘오발탄’과 1961년작 영화 두 편 모두 서울미래유산 무형유산이다. 영화를 주제로 삼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처음이다. 1950~60년대 한국전쟁 전후 오발탄의 무대인 해방촌이란 지명은 동네의 이미지일 뿐 행정지명이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외국인 거주자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HBC(해방촌의 영문 이니셜)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한때 서울에만 20만채 판잣집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에 집결한 투어단은 해방촌 입구의 명물 한신옹기를 지나 보성여고~해방촌 성당~해방촌교회~해방5거리~신흥시장~108계단~용산중·고교 간을 2시간여 동안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삭막한 풍경을 상상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처음 시도한 영화투어에 현장감을 불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설문응답자들은 “해설 없이 걸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상에 빠졌다”, “몰라보게 변해버린 서울의 과거사를 떠올린 시간”, “불후의 소설과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소감을 남겼다.서울은 초거대 도시이다. 1000만명이 606㎢ 안에 살고 있다. 1㎢에 1만 7000명꼴이다. 국토의 0.6%에 인구의 20%가 몰려 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생활권역에 묶여 있다. 서울은 메가시티(Mega City)이면서 인접 대도시와 띠로 연결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ce)이기도 하다. 1935년까지 30만명 선에 머물던 서울인구는 일제강점기 대륙침략을 위한 거점도시화하면서 1942년 100만명까지 늘었다. 불과 반세기 만에 10배로 팽창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00만명이 넘는 월남피난민, 중국과 일본으로 떠났던 해외동포의 귀환,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농민들이 마구잡이로 유입됐다. 1959년 수용한도를 초과해 200만명이 몰려들면서 도심과 남산, 인왕산, 북한산, 관악산 아래와 한강 주변에 난민이 대거 자리잡았다. 서울 인구는 1972년 600만명을 돌파한 뒤 1988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마냥 마구 몸집을 불렸다. 판자촌은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미군이 가져온 나왕, 미송 등 목재와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해 임시거처를 지은 데서 유래했다. 한때 20만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맺힌 디아스포라의 절규이며 우리가 겪은 주거의 사회사이다. ●영화 속 판잣집 소통 불가의 현실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자! 가자!’” 원작 소설 속 해방촌 묘사이다. 그러나 백 마디 글보다 영화 한 컷이 더 웅변적이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철호의 판잣집은 소통 불가의 현실이며,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간이다. 로케이션 장면이 많은 영화는 근대적인 거리와 판자촌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공동수도 터, 푸세식 공동변소 등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눈앞에 펼쳐 보인다. 유현목 감독의 리얼리즘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촌의 가난과 절망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영화는 군사혁명 당국으로부터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해방 후 이북·해외서 온 동포들 용산으로 당시 용산은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였다. 한양도성 남산구간 바깥에서 한강까지 용산 전체의 20% 가까이 일본군영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지역은 철도부지와 일본인 거주지였다. 해방 이후 이북과 해외에서 들어온 동포와 월남민을 구제하기 위해 이 구역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남산 서쪽 기슭인 용산2가동 일대의 국유림에 정착지를 조성했다. 이때 38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삼팔따라지’라고 냉대했다. ‘3·8’은 화투 도박에서 끗발이 가장 낮은 한 끗이므로 이를 비하해 한 끗짜리 인생이라는 뜻에서 따라지라고 한 것이다. 이들은 해방촌을 비롯해 이촌동, 용두동, 마장동 등지의 피난민촌에 모여 살았다. 해방촌이 자리잡은 남산 서쪽기슭은 인적이 없는 고요한 목장이었다. 김정호의 ‘경조 5부도’에 기록된 것처럼 갑오개혁 때까지 왕실 제사에 사용할 소와 양, 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署) 터였다.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지척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군 20사단의 사격장으로 변했다. 해방촌의 기원은 해방 직후 용산동 4가 일본군 관사에 무단 거주하던 월남 피난민 50여 가구가 서울에 진주한 미군에게 관사를 비워주고 미군 트럭에 실려 이곳에 내리면서 시작됐다. 1947년 평안북도 선천군 군민 400여 가구도 집단이주, 일본군이 관리하던 경성호국신사를 중심으로 피난살이가 본격화됐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3년 대륙침략전쟁 당시 전쟁전사자를 추모하고 승전 분위기를 고취시키고자 마지막 발악처럼 건설한 신사가 바로 108계단으로 남은 경성호국신사다. 판잣집은 호국신사 간판과 건물을 떼어다가 지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호국신사 자리에 대형 천막을 세워놓고 천막 1개에 5~6가구씩 들어가 생활하다가 한 가구당 5~6평씩 불하를 받았다.●서북청년단·영락교회 영향력으로 탄생 1949년 주민들은 용산동이라는 동명을 해방동으로 바꿨다. 반공으로 똘똘 뭉친 서북청년단의 기세가 해방촌 건설에 한몫했다. 서북청년단의 비호 아래 해방촌은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가 됐다. 해방촌 형성과정에 영락교회의 영향력이 컸다. 영락교회는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월남민들 사이에서 ‘이북5도청’이나 마찬가지였다.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 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멀리 고향 쪽을 바라보며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철호 가족의 절망이 안타까운 영화에서 해방과 해방촌에 대한 역설이 등장한다. 당시 서울 인구의 반이 정부로부터 극소량의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절대 빈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해방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민들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해방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터부시 됐던 마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였다. 해방촌은 디아스포라의 섬이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차를 타고 풍경을 요약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어온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만보객은 현대문명에 반하는 오래된 것들을 찬미함과 동시에 도시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된 것들에 대해서도 절망감도 느낀다. 해방촌은 찬미와 절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그 시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가 나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가리봉동(구로공단의 신화) ●일시 : 11월 17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 1호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7번 출구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박근혜 “일본이 돈 보내면 절차 끝내라”…강제징용 소송 절차에 개입

    박근혜 “일본이 돈 보내면 절차 끝내라”…강제징용 소송 절차에 개입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공모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을 고의로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외교부에 지시를 내리며 재판 절차에 개입한 정황이 확인됐다. 14일 연합뉴스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입수해 공개한 임종헌(구속기소) 전 법원행정처장 공소장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4~5월쯤 “위안부 관련 재단이 6월이면 설립되고 일본에서 약속한 대로 돈을 보낼 전망이니 그로부터 1~2개월 후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모든 프로세스를 8월 말까지 끝내라”고 외교부에 지시했다. 박 전 대통령이 언급한 ‘위안부 관련 재단’은 2015년 12월 28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근거로 최종적으로 2016년 7월 28일 출범한 비영리 민간재단 ‘화해치유재단’을 가리킨다. 이 재단은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으로 설립됐다. 하지만 이 돈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공식적인 배상금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거출금에 불과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이후 법원행정처와 박근혜 정부가 공모한 강제징용 소송 절차는 속도 있게 진행됐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은 외교부는 피고인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과 접촉해 의견서 제출 문제를 논의했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역시 같은 해 9월 29일 외교부를 방문해 “정부가 강제징용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상이한 관점과 전후 배상문제 처리와 관련한 다양한 외국 사례를 제출해 주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를 기초로 전원합의체 회부를 추진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 계획은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의 승인을 받았다. 임 전 차장은 외교부를 방문하기 전 양 전 대법원장에게 “외교부에서 의견서를 낼 단계가 된 것 같다”고 보고했다. 2013년 8월 재상고심 접수 이후 3년 넘게 중단된 이 사건은 이후 법원행정처와 청와대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일본 기업 측 대리인은 2016년 10월 6일 대법원에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했다. 대법원은 같은 해 10월 17일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고 이듬해 초에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면서 전원합의체 회부 절차가 중단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이렇게 사법부와 청와대가 공모해 지연된 이 사건 재판은 지난달 30일 대법원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하면서 최종 결론이 났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이 5년이 넘도록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나당동맹에서 한미동맹까지…‘빈틈없는 공조’의 그늘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나당동맹에서 한미동맹까지…‘빈틈없는 공조’의 그늘

    2015년 일본은 졸지에 ‘빨판상어’라는 듣기 거북한 별명을 얻었다. ‘미군이 시키면 무엇이든 하는 빨판상어’다. 국민감정이 안 좋은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다. 자국의 학자들이 붙였다.2015년 8월 19일 야마모토 다로 의원은 참의원 전체회의에서 아베 신조 총리에게 물었다. “미군이 요구하면 헌법을 짓밟고라도, 국민의 생활을 파괴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 따르는데…이런 나라를 독립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베 정권이 원전 재가동,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비밀보호법, 집단자위권에 이어 안보법제까지 강행하려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구상 제3차 아미티지·나이 보고서(2012년)를 베낀 것 아니냐며 한 질문이었다. 아미티지 보고서에는 ‘일본이 2류 국가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일본이 자신에게 강제하는 (군사력 증강, 역내 개입 등의) 제약을 풀고,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략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일본의 TPP 참여 등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의석에서는 이런 야유가 쏟아졌다. “그런 것쯤은 국회의원이라면 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으니 국회의원 노릇도 정치인 시늉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촌뜨기처럼 그런 얘기는 왜 하는가.” 여기서 ‘그것’이란 ‘미국의 속국’을 뜻했다. 일본은 한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동맹을 미국과 맺고 있다. 전시작전권이 주한미군에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작전권은 총리에게 있다. 그런데도 일본의 학자나 정치인들은 미국에 대한 속국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과 지구상에서 가장 예속적인 동맹을 맺고도 허구한 날 ‘더 강력한 동맹’을 촉구하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사뭇 다르다.다로의 논쟁을 계기로 정치학자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대담 형식의 ‘속국 민주주의론’을 출간했다. 우치다는 이렇게 말했다. “속국의 입장을 수용하고, 맹세한 자만이 이 나라의 지배층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지난 70년간 일본에 자리잡은 지배구조다.” 시라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일본의 천황은 미국”이라며 “존황양이가 아닌 존미양이가 일본의 깃발이 되었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지적처럼 많은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미국 정부의 환심을 얼마나 사느냐가 정치적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박태균 서울대 국제 관계학부 교수)고 굳게 믿는다.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만사 제쳐 놓고 미국으로 달려가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고, 낙선한 자도 미국에서 소일하다 돌아온다. 김무성 의원이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DC에서 ‘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느냐’는 투로 최근 한국 대사를 몰아붙인 것도 그런 ‘환심사기’로 읽혔다. 족벌언론들은 틈만 나면 ‘미국과 한 몸이 되라’(일체화, 一體化)고 외쳤다. 5월 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자 이들은 환호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자석을 계속 유지하면서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려면 미국과 강력한 한 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중앙일보, 5월 23일자) “지금은 한·미가 한 몸이 돼서 북을 설득하고 때로 압박해 가면서 이른 시일 내 핵 폐기를 결심하도록 해야 할 때이다.”(조선일보, 5월 27일자) 이런 일체화론(‘한몸론’)은 ‘빈틈없는 공조’ 등 때마다 여러 가지 수사로 나타나지만, 최소한 미국의 뜻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뜻에는 차이가 없다. ‘일체화론’은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들어오면서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 뿌리는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나당동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은 이 동맹을 빌미로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다. 고려는 종주국인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새로 굴기하는 명을 치려다가 왕조 자체가 몰락했다. 명과 군신관계를 맺었던 조선은 인조 때 중원의 새로운 패자 후금(청)과 맞서다가 국민과 국토를 어육으로 만들었다. 조선 말 조미수호협상 때는 청의 이홍장이 교섭을 대신했으며, 이홍장은 ‘조선은 청의 속방이다’를 제1조로 한 초안을 미국에 제시했다. ‘일체화’라는 표현이 실제로 등장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부터였다. 이용구, 송병준 등 ‘일진회’가 제기한 ‘일한일체화론’이 그것이다. 절찬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제작진은 지난 7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냈다. 구한말 실제로 존재했던 일본 흑룡회를 등장시켜 친일 미화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흑룡회는 19세기 말부터 일찌감치 조선병합론을 주장했던 일본의 극우단체였다. 제작진이 이 단체의 한성지부장이란 인물을 영웅적인 무사로 등장시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본 군부와 정계에 넓은 인맥을 가진 흑룡회는 19세기 말 일본인보다 더 일본스러운 조선인들을 키워 조선 병탄에 앞세웠다. 이용구(진보회)와 송병준(일진회)이 1904년 12월 2일 ‘일진회’로 통합할 때 후견 집단이 바로 흑룡회였다. 통합 직전 두 사람이 내건 기치가 ‘일한일체화와 문명화’였고, 서약의 표시로 회원들에게 단발을 촉구했다. 일진회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과 한 몸’임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 지원에 앞장섰다. 북진수송대를 조직해 1905년 6월부터 10월까지 무려 11만 4500명(연인원)의 회원을 동원했으며, 비용 대부분도 일진회가 부담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진회는 11월 5일 이런 성명을 냈다. “(외교의 권한은) 차라리 우방 정부(일본)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지하여 국권을 보유하는 것도 폐하 대권의 선양이 아닐까.…그 지도 보호 아래 국가의 독립과 안녕, 행복을 영원무궁하게 유지하고자 이에 감히 선언한다.” 흑룡회의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는 당시 일진회 고문이었다. 성명 발표 후 12일 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다(을사늑약). 1909년 7월 6일 일본 정부는 병탄 방침을 확정했다. 이에 이용구는 일본과 정치체제의 통합을 추진하자며 ‘정합방론’을 제시하고, 12월 4일 일진회 이름으로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사직과 백성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데 달려 있다.’ 일본은 이듬해 8월 대한국을 병탄했다. 일체화론의 귀결이었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부지가 공개됐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접수당한 뒤부터 한국인에게 금단의 땅이었으니 113년 만이었다. 그곳엔 주한일본군 사령부와 일본군 20사단이 주둔했고, 조선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해방 후엔 미군에 접수돼 총독 관저는 미군 병원으로, 일본군작전센터는 미군 벙커로, 일본군 장교 숙소는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 건물로 쓰였다. 일본군 병기지창엔 미군 공병대와 시설대가 들어섰다. 1905년 일본군이 접수하기 이전에도 이곳은 ‘종주국’의 기지로 쓰였다. 고려 때는 몽골군의 병참기지가,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의 군대, 그리고 1895년엔 청일전쟁의 승자인 일본군이 주둔했다. 용산 기지 터는 더 강한 동맹을 앞세운 ‘일체화론자’들의 성지였으며 한국인에겐 ‘속국’의 상징이었다. 한·미동맹에 침을 뱉으려는 게 아니다. 한·미동맹은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켰고, 이후에도 북한의 남침 의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문제는 이 나라를 번방도 속방도 아니요, 아예 속국으로 하자는 일체화론자들이다. 전쟁 중에도 동맹의 그늘에 숨어 권력 쟁취에 여념이 없었고, 평시엔 미군과 미 정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권세와 영달을 누리려는 자들 말이다. 그들은 요즘 북한을 ‘핵을 가진 적’에서 ‘핵과 침략 의도를 포기한 이웃’으로 바꾸려는 정부의 노력을 필사적으로 방해한다. 일부 국민을 선동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과 한국이 한 몸이 돼야 한다고 외치도록 선동한다. 권력의 화수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구한말 이용구와 송병준이 일진회 회원들을 앞세워 일장기를 흔들며 일한일체화를 부르짖었던 것과 판박이가 아니고 무엇일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 2차대전 때 日 공습 받은 호주 다윈…아베, 16일 전몰자위령비 방문 추진

    2차대전 때 日 공습 받은 호주 다윈…아베, 16일 전몰자위령비 방문 추진

    아베 신조(얼굴) 일본 총리가 오는 16일 호주 방문 때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던 북부 다윈의 전몰자위령비를 방문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교도통신이 12일 전했다.교도통신은 복수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에서 “아베 총리가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다윈의 전몰자위령비를 찾기로 방향을 정하고 최종 조율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이어 “일본 총리가 위령비를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아베 총리가 화해의 힘을 강조해 양국이 과거를 뛰어넘는 ‘전략적 파트너’가 됐음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2016년 12월에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던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사죄와 반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연합군의 거점이 있었던 다윈은 호주 본토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의 공격을 받은 곳이다. 일본군 항모기동부대는 1942년 2월 19일 이곳에 대한 공습을 감행해 240명 이상의 호주군이 전사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격이 이어졌다. 아베 총리는 지난 8월 취임한 모리슨 총리와 다윈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고, 중국의 해양진출 확장에 맞서 미·일이 주도하는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호주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할 계획이다. 아베 총리는 앞서 지난달 29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인도가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방탄소년단 日방송 출연 취소…외신 “어색한 한일 관계” 주목

    방탄소년단 日방송 출연 취소…외신 “어색한 한일 관계” 주목

    日TV아사히, 지민의 ‘광복절 티셔츠’ 트집…NHK 출연도 보류세계적인 방탄소년단(BTS)의 일본 음악 방송 출연이 취소되면서 해외 언론도 주목받으며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해외 매체 다수는 방송 취소 사유가 된 멤버 지민의 티셔츠가 논란이 된 것은 양국의 오래된 정치·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국내에선 여야가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빌보드는 9일(이하 현지시간) ‘티셔츠 그 이상: BTS 출연 취소는 한국과 일본의 어색한 K팝 관계를 보여준다’는 제목으로 이번 사태를 분석했다. 빌보드는 일본 TV아사히 ‘뮤직 스테이션’이 멤버 지민이 과거 입은 이른바 ‘광복절’ 티셔츠를 문제 삼아 출연을 취소한 데 대해 “국가 간의 오랜 정치적, 문화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티셔츠가 방송 취소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빌보드는 보아와 2세대 K팝 그룹 등 일본에서 K팝의 확장,한국 가수의 인기에 균형을 맞추려던 일본의 노력, 방탄소년단과 트와이스를 통해 다시 인 K팝 붐 등을 소개했다. 빌보드는 이 과정에서의 혐한 움직임을 언급하며 “냉각 관계는 정치적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배경으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 일본군 위안부 등 미해결된 전시 문제,일본 제국을 상징한 전범기(욱일기) 문제 등을 짚었다.미국 CNN도 9일 인터넷판에서 ‘원자폭탄 셔츠에 대한 분노로 BTS 일본 공연이 취소됐다’며 방송 백지화 소식을 전했다. CNN은 “한국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유산에 특히 민감하다”며 1910~1945년 일본의 식민지배로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이 고통받아 양국 관계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BBC도 9일 인터넷판에서 ‘BTS 티셔츠: 일본 TV 쇼가 원자폭탄 티셔츠로 BTS 출연을 취소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지민의 셔츠가 논란이 된 이유로 양국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했다. BBC는 “원자폭탄 셔츠에 한국의 독립 구호가 담겨있다”며 “일부 일본인들에겐 일본 식민 통치를 받은 한반도의 독립을 가져온 폭탄을 축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특히 BBC는 또 최근 한일 관계가 더 긴장됐다면서 지난달 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 판결을 거론하며 일본 정부가 이에 반박했다고도 덧붙였다. 외신들의 객관적인 평가다. 이런 논란은 지난달 일본의 한 매체가 지민이 과거 입은 셔츠를 문제 삼아 “반일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불거졌다. 지민의 티셔츠에는 앞면에는 광복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의 흑백 사진과 함께 티셔츠 뒷면에는 애국심(PATRIOTISM), 우리 역사(OURHISTORY), 해방(LIBERATION), 코리아(KOREA) 등의 영문이 적혀있다. 이 셔츠는 팬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이 부각하자 TV아사히 ‘뮤직 스테이션’은 방탄소년단의 출연을 하루 전날 취소했다. 또 10일 일본의 또 다른 매체는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 등 다른 프로그램들도 출연 검토를 보류했다고 전했다. 한국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0일 SNS에 “CNN,BBC 등 세계적인 언론에 이번 상황이 다 보도되면서, 오히려 전 세계의 젊은 팬들에게 ‘일본은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또 “특히 방탄소년단의 글로벌한 영향력에 큰 두려움을 느꼈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꼬집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미국 워싱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첫 국제 영화제

    미국 워싱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첫 국제 영화제

    미국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국제 영화제가 워싱턴에서 열린다. 경기 광주시 퇴촌 나눔의집은 워싱턴 정신대 문제 대책 위원회(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ssues)가 활동 26주년을 맞이하여 미국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국제 영화제를 개최한다고 9일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공동 생활하는 나눔의 집에서는 이번 영화제에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에움길’의 주인공 이옥선 할머니가 참석하기로 했으나 고령으로 참석을 못하게 되어, 다큐멘터리 ‘에움길’의 이승현 감독, 영화 귀향의 정무성 배우,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이 대신 참석한다고 말했다. 영화제는 아메리칸 대학교의 미디아 학부와 공동 개최하는 것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가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열린다. 또한 많은 대중들에게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가해국 일본의 공식사죄 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한다. 영화제에서는 실제 스토리에 기반을 두어 창작한 픽션 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모두 상영합니다. 한국, 중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의 영화들을 토마스 남 영화제 디렉터의 엄선을 걸쳐 초대했고, 9개의 영화가 9일, 10일, 11일 사흘에 걸쳐 주말에 상영된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김금숙의 만화경]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김금숙의 만화경]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나이 드니까 남자들이 먹잇감으로 안 봐서 좋아.”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그래픽노블 ‘풀’ 프랑스 출간을 기념해 작가와의 만남을 서점에서 가진 뒤 화가 A언니, 일인 출판을 하고 있는 B와 서촌의 수제 맥주집에서 한잔하던 중이었다. A: “나이 드니까 여자로 안 봐. 사람으로 봐. 그래서 좋아.” 나는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아이고, 언니 나이 아직 50도 안 됐거든” 하고 발끈했다. A: “그래도 갱년기야, 나.” 그녀의 표정이 웃프다. 나: “갱년기면 뭐 여자 아닌가? 80 먹어도, 90 먹어도 여자야.” A: “그렇지. 하지만 남자들한텐 아니거든. 크크크.” A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엔 상 엎었어.” 놀라 쳐다보는 우리에게. “아니 글쎄, 내 엉덩이가 대문짝만 하다나 어쨌다나. 나도 애기 낳기 전에는 안 그랬거든.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서 그대로 상 엎어 버렸어.” 상 엎었다는 A의 말에 실은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와! 잘했다 언니. 절대 그냥 수긍하면 안 되지.” 옆에 있던 B도 한술 거든다. “설거지 좀 한다고 마치 지가 무슨 페미니스트 남편인 것마냥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이라니. 아직 멀었어. 잘했다. 잘했어. 여성들을 위하여 건배!” 우린 쨍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곧 김빠진 맥주처럼 심드렁해졌다. “하긴 나도 절대 늙지 않을 줄 알았어. 난 나이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요즘엔 노안이 와서 눈이 정말 금세 피로해져.” 마음속에 있던 불안이 혼잣말처럼 튀어나왔다. “내가 언제까지 작업할 수 있을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였는데 들었나 보다.A: “나도 요즘 통 작업을 못 하고 있어. 1년 전 개인전 한 이후로…. 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네. 후후…. 빨리 작업해서 그림을 팔아야 먹고사는데….” B: “형부는 뭐하시고? 일 안 하셔? 그림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정도면 언니 잘 나가나 보네.” A: “그래도 한 점 팔면 몇 달은 생활이 되지. 그이는 집에 있은 지 오래됐고.” A의 남편 이야기를 더이상 자세히 듣고 싶지는 않아 화제를 돌렸다. “만화보다 훨씬 낫네. 우리 쪽은 나처럼 출판 만화만 하면 어렵거든. 지원 사업이라도 안 되면 방법이 없어. 그림책 쪽은 어때? 견딜 만해?” B를 향해 물었다. “난 뭐 괜찮아. 올해엔 책 6권이나 냈어.” 반지하에 월세로 살면서도 늘 긍정적인 B가 참 대단하다. “작가들은 힘들지. 어떤 그림 작가는 일 년 수입이 이백이래. 그림책은 그림 수정 요구도 많고. 물론 나는 엔간한 출판사보다 선인세를 더 줘.” 나: “물가도 땅값도 매일 오르는데 작가들 인세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못 해.” B: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나: 왜지? B: “노력하기 싫은 거지. 책 읽는 건 노력이 필요하니까.” A: “쥐꼬리만 한 봉급에 몇 시간 되지 않던 강사 자리도 잘리고. S대나 H대를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 소설을 써야 했나? 크크크.” 나: “갑자기 웬 소설? 그리고 언니는 유학도 갔다 왔잖아?!” A: “소설가는 인세가 몇 천, 몇 억이래. 글고 미국을 갔다 왔어야 했지. 프랑스는 뭐 끈이 없어요. 차라리 독일 유학파는 더 나아.” 나: “소설가도 베스트셀러 작가나 그렇겠지.” B: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고 사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20대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이래. 인세 많이 받고 싶어? 독자들을 겨냥해 봐.” 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쓰는 데 좋은 작품이 나올까? 난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인데. 여튼 괜찮아 뭐. 고흐는 살아생전 평생 작품 딱 하나 팔았대. 근데 봐. 지금 얼마나 비싸게 팔리냐?” 위로한다고 한 말이 위로가 될 턱이 없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 눈이 마주치며 빵 터지고 말았다. “슬픈데 왜케 웃기냐? 오~ 가난한 중년의 여성 예술가들이여! 크크크.” “그래 그나마 고흐는 예술에만 집중했지. 여성을 이용하진 않았어. 봐. 세계의 거장들을. 피카소, 자코메티, 고갱, 드가, 에곤 실레…. 하물며 우디 앨런까지.” 우리의 대화는 예술 작품과 예술가 삶의 모럴로 옮겨 갔다. 어두워진 경복궁역 가로수길엔 여름 햇살에 노랗게 타 버린 은행잎들이 바람에 뒹굴며 너울댔다. 술을 마시면 조금 덜 추워야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너무 추워져 버린 날씨에 몸을 잔뜩 웅크리며 A와 B는 전철역 쪽으로,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바삐 걸었다.
  • ‘소녀상 지킴이’ 김샘씨, 도로 점거 혐의 무죄

    ‘소녀상 지킴이’ 김샘씨, 도로 점거 혐의 무죄

    2014년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국대회에 참가했다가 도로를 점거한 혐의로 기소된 김샘(26)씨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8단독 변성환 부장판사는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2014년 6월 민주노총 등이 주최한 세월호 진상규명 시국 대회에 참가했다가 행진 경로를 이탈해 종로타워 앞 왕복 8차로를 점거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증거로 제출된 채증 사진과 동영상이 원본 파일이 아닌 데다 원본 파일 자체도 삭제돼 있어 유죄 근거로 쓸 수 없다고 판단됐다. 김씨는 이밖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소녀상 지킴이 활동을 주도해왔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하며 일본대사관 건물에서 점거 농성한 혐의로 기소돼 벌금 200만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소녀상 또 불허한 국민대… 학생들 “끝까지 세운다”

    소녀상 또 불허한 국민대… 학생들 “끝까지 세운다”

    학교 “정치적 쟁점... 학내 찬반도 갈려”세움 측 “이달 안에 설치... 불허 근거 없어”국민대가 서울 성북구 교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 설립을 결국 불허하기로 했다. 소녀상 건립을 추진해 온 국민대 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 ‘세움’ 측은 “소녀상을 11월 내에 세운다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세움’ 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국민대 본부는 세움 측에 학내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전화통보했다. 이에 대해 ‘세움’ 은 2일 서울 성북구 국민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본부가 소녀상을 정치적 이슈로 매도하며 건립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학교를 규탄했다 이태준(27·정치외교학과) 세움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의로운 역사를 세우는 데 학교본부와 함께하기를 기대하며 지난 9월부터 50일간 공문, 자료, 조감도도 보냈는데 돌아온 대답은 소녀상 건립 불허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광복 73주년을 맞고도 소녀상이 왜 아직도 정치 이슈로 매도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우려는 소녀상을 놓고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국민대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는 소녀상 설치 문제를 놓고 학내 구성원의 찬반여론이 있는 현시점에서는 설치를 불허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대는 지난 9월에도 “국제적 교류와 연구 활동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특정국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소녀상 설치는 허가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태준 대표는 “위안부 문제를 두고 찬반 논쟁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가 우선시 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면서 “학내 민주화 운동 비석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만큼, 소녀상에 대해 학교가 불허할 근거도 없다”고 반박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계기로 지난 4월 닻을 올린 세움은 6개월동안 1800만원을 성금으로 모았고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학생들 손으로 소녀상 건립을 준비해왔다. 이어 본격적으로 위안부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 활동에 나섰다. 국세청에는 2019년까지 모금해 2020년까지 사용하겠다는 ‘모금액 사용 계획안’을 냈고 소녀상 건립 비용이 예상보다 빨리 모금돼 건립을 올해 내로 앞당겨 추진했다. 학생들이 만든 소녀상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현재 주물공장에 보관하고 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北노동신문,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비방중상으로 일관된 협잡문서”

    北노동신문,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비방중상으로 일관된 협잡문서”

    북한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채택 추진에 대해 “허위와 기만, 악의에 찬 비방중상으로 일관되어있는 협잡문서로서 별로 새삼스러운것이 아니며 논할 가치도 없다”고 비난했다. 신문은 이날 ‘어리석은 자들의 부질없는 망동’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이같이 말하며 “일본과 유럽동맹의 ‘북조선인권결의안’ 조작책동은 우리 공화국의 존엄높은 영상에 먹칠을 하고 우리의 신성한 사회주의제도를 압살하기 위한 모략과 범죄적계책의 산물이며 대조선적대의식이 골수에 배긴자들의 부질없는 망동”이라고 강조했다. 매년 유엔총회의 북한인권결의안 추진을 주도한 일본과 유럽연합(EU)은 올해도 회원국들의 의견을 반영해 결의안을 작성했고, 지난달 31일 인권 담당인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 제출했다. 제3위원회에서는 이달 중순쯤 결의안 채택을 시도하고, 통과될 경우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다음 달에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신문은 서방 국가들의 북한 인권 문제 제기는 ‘주제넘은 짓’이며, 일본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반인륜범죄 국가’라면서 일본의 인권 이력을 지적했다. 신문은 “일본이 반(反)공화국 인권 모략소동에 나서는 데는 인권 문제를 구실로 우리에 대한 제재 압박의 도수를 더욱 높이고 조선반도의 긍정적 분위기에 훼방을 놓으려는 흉심이 짙게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은 그 누구의 인권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본군 성노예 범죄 등 과거 죄악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참혹한 인권 불모지로 화한 제 집안 문제부터 바로잡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우리에게는 그 어떤 압력따위도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며 “일본과 유럽동맹은 우리의 인권 문제를 유엔에까지 끌고 가 국제화하려고 집요하게 추태를 부릴수록 저들의 추한 몰골만을 드러내고 세계의 야유와 조소의 대상으로 될 것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北, 유엔 인권결의안 추진에 “그 어떤 압력도 통하지 않아” 강력 반발

    北, 유엔 인권결의안 추진에 “그 어떤 압력도 통하지 않아” 강력 반발

    북한이 유엔총회 북한인권 결의 채택을 주도하는 일본과 유럽연합(EU)을 비난하며 “우리에게는 그 어떤 압력 따위도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어리석은 자들의 부질없는 망동’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북조선 인권결의안’ 조작 책동은 우리 공화국의 존엄 높은 영상에 먹칠을 하고 우리의 신성한 사회주의 제도를 압살하기 위한 모략과 범죄적 계책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서방 국가들의 북한인권 문제 제기는 ‘주제넘은 짓’이며, 일본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반인륜범죄 국가’라면서 특히 일본의 인권 이력을 지적했다. 신문은 “일본이 반(反)공화국 인권 모략소동에 나서는 데는 인권 문제를 구실로 우리에 대한 제재 압박의 도수를 더욱 높이고 조선반도의 긍정적 분위기에 훼방을 놓으려는 흉심이 짙게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그 누구의 인권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일본군 성노예 범죄 등 과거 죄악을 하루빨리 청산하고 참혹한 인권 불모지로 화한 제 집안 문제부터 바로잡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EU·일본에 “우리의 인권 문제를 유엔에까지 끌고 가 국제화하려고 집요하게 추태를 부릴수록 저들의 추한 몰골만을 드러내고 세계의 야유와 조소의 대상으로 될 것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다만, 논평은 뉴욕 현지시간으로 지난달 31일 유엔총회 제3위원회(인권 담당)에 제출된 올해 북한인권결의안의 내용이나 제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EU와 일본은 매년 유엔총회 북한인권결의안 작성을 주도해 왔다. 올해 결의안은 지난해 결의안의 기조와 문구를 큰 틀에서 이어받아 북한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규탄과 책임자 처벌 필요성 등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아픈 역사 돌아보며 잃어버린 자존감 찾다] “위안부 아픔이 이렇게 클 줄이야”

    해설사와 질의응답… 현장 느낌 살려 서울 동작구가 구민들과 역사 속 인권 침해 현장을 둘러보며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동작구는 오는 7일 구민 40여명과 함께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서 인권 탐방에 나선다고 1일 밝혔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은 전쟁으로 인한 세계 여성들의 피해 사례를 전시한 곳이다. 구민들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영상을 보고 전문 해설사와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주입식 강의 교육에서 벗어나 직접 현장을 둘러보며 인권의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민영기 감사담당관은 “이번 인권 탐방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인권에 대한 이해를 넓힐 기회가 되기 바란다”며 “앞으로도 인권 존중 문화가 확산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구는 오는 21일부터는 구민 200여명을 대상으로 여성, 다문화, 사회불평등, 노동 등을 다루는 ‘주민인권학교’를 열어 인권 의식 향상에 나선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연세대 강사, 강의 중 “위안부 할머니들 피해 과장”…학생들 반발

    연세대 강사, 강의 중 “위안부 할머니들 피해 과장”…학생들 반발

    연세대의 한 강사가 수업 도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피해를 과장하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해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다. 평화나비 네트워크 연세대 지부(이하 연대나비)는 지난달 4일 인천 송도 국제캠퍼스의 한 글쓰기 수업에서 강사 A씨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이 증언할 때 과장을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제보를 접수했다고 1일 밝혔다. 연대나비에 따르면 A씨는 “(조선의 당시 인구가 2000만명인데)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가 20만명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뿐인 상황인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겪은 피해를 과장하고, 할머니들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A씨는 또 “영화 ‘아이캔스피크’ 모델이 된 (이용수) 할머니는 증언 때마다 잡혀간 나이와 상황이 달라진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폭행을 두고 볼 리 없고, 일본 군인도 시대의 피해자다”, “할머니들이 끌려간 나이는 적어도 16세 이상이고, 13세 이하는 없었다”고 말했다고 연대나비 측은 전했다. 연대나비는 수강생들의 제보를 통해 A씨의 이 같은 발언을 확인했다며 지난달 22일 사과를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A씨 주장은 근거 없이 추측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고,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에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자보 등을 통해 문제가 공론화되자 A씨는 지난달 25일 수업시간에 유인물을 나눠주며 자신의 발언은 하나의 견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비공식적 토론일수록 어떤 발언도 수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연대나비를 통해 자신의 발언이 외부로 공개된 데에 대해서도 유감을 드러냈다. 그는 “토론에서 차별이나 명예훼손 등과 관련한 발언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할 수 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토론 자격을 박탈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서 “이를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스스로 포기하는 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연대나비는 같은 달 29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업 안에는 교수와 학생이라는 위계가 존재한다”면서 “토론 수업이라고 교수의 발언이 학생의 발언과 같은 무게를 갖는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수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반박했다. 또 “제보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수업을 들어야 한다”면서 “(A씨의 주장은) 제보자들에게 죄책감과 부담감을 지게 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연세대 측은 문제가 불거지자 A씨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A씨는 수업시간에 배포한 것과 같은 유인물을 학교 측에 제출했다. 학교 측은 사실 관계를 파악한 뒤 향후 처리 방향을 정할 방침이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실제 배상까진 ‘험로’…위안부 등 일제 피해 소송 영향도 미지수

    신일철주금 국내 자산만 강제집행 가능 日, 위안부 소송 무대응…정식 재판 0건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지만 실제 배상이 이뤄지거나,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 피해를 다루는 다른 소송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미지수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원칙적으로 한국 법원은 일본에 있는 신일철주금 자산이나 재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없다. 대신 이 회사의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은 가능하다. 신일철주금은 현재 국내 기업인 포스코 지분 3.32%를 보유하고 있다. 이날 주식시장 종가 기준으로 7000억원을 웃도는 금액이다. 우리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원고들이 일본 법원에 다시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원고 2명이 이미 2005년 일본에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가 최종 확정됐기 때문에 일본 법원이 이번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측이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 지연 전략을 펼 여지도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위안부 소송의 경우엔 ICJ 판례로 정립된 ‘국가면제원칙’의 적용을 받을 소지가 커서 이번 대법원 판결과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 앞서 2004년 이탈리아 법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징집돼 강제 노역을 했던 루이키 페리니 등 자국 국민들에게 독일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페리니 판결’을 내렸지만, 독일 정부는 “이미 이탈리아에 배상 의무를 이행했는데, 이탈리아 법원이 독일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제소로 사건을 심리한 ICJ는 국가면제원칙을 적용해 독일 손을 들어 줬다. 강병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위안부 사건에서나 강제징용 사건에서나 일제가 저지른 행위는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국가를 상대로 행사될 수 없다는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면서 “페리니 사건을 판단할 때 ICJ도 독일의 불법행위를 심리한 게 아니라 국가면제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청구해 2016년부터 서울중앙지법에 계류된 2개의 소송에 ‘무대응’ 중이다. 법원 관계자는 “일본 외무성에 서류를 보내도 계속 반송되고 있다”면서 “피고(일본 정부) 송달이 이뤄지지 않아 정식 재판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나 혼자 재판받아 마음 아파”…94세 강제징용 피해자는 울었다

    “나 혼자 재판받아 마음 아파”…94세 강제징용 피해자는 울었다

    대법 선고 직전에야 원고 3명 죽음 알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줬다면 좋았을 걸” 승소 기쁨보다 ‘동지’들과 함께 못해 눈물 변호인 “피해자 세상 떠난 뒤 승소 아쉬워” “나까지 원래는 네 사람인데 나 혼자 재판을 받게 돼 마음이 아프고 너무 서럽습니다.” 대법원이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자 이 소송 원고 4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4)씨는 승리의 기쁨보다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한 슬픔을 먼저 이야기했다. 직접 선고를 듣고 대법정을 나선 이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취재진이 소감을 묻자 이내 눈물을 흘렸다.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이 지나는 사이 여운택·김규수·신천수씨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이씨만 홀로 남았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이날 대법원 선고를 방청하러 나와서 알게 됐다. 이씨는 “오늘 이 재판에 혼자 와서 서럽고 과히 기분이 좋지 않다”며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동료들을 떠올렸다. 특히 넉 달 전인 올해 6월 세상을 떠난 김규수씨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김씨의 부인 최정호씨는 “조금만 일찍 이런 판결이 났다면 가시기 전에 좋은 소식을 맞았을 텐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씨 역시 “그 사람들이 같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줬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오늘 같이 재판을 못 봐 너무 서운하다”며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75년의 한(恨)’을 풀어 준 재판 결과에 대해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하얗게 센 머리와 잔뜩 쉰 목소리는 지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이씨는 1943년 1월 기술을 배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대전 지역에서 선발된 중·고등학생 80명과 함께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가마이시 제철소로 동원됐다. 여운택·김규수·신천수씨가 오사카, 야하타 제철소 등으로 동원된 것도 1943년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출신 사감이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탄차에 석탄을 퍼올리는 단순 노동을 해야 했다. 임금은 없었다. 1945년 1월에는 일본군에 징병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가마이시 공장 노무과에 찾아가 월급을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받지 못했다. 이씨는 “월급은 생각지도 못하고 밥 주면 먹고, 자라고 하면 자고, 일을 하면서 지내야 했다”고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2005년 2월 이씨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 권리가 살아 있다는 법적 해석이 나오자 소송을 냈다. 그러나 2012년 5월 첫 상고심에서 승소 판결이 나고도 이번 재상고심 선고까지 재판이 석연치 않게 지연되며 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둘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이씨는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질문에는 “일본에서도 (이번 판결로) 깨끗하게 이 일이 청산됐다고 생각할 것 같다”면서 “일본에서도 잘한다고, 환영한다고 말해 줄 것 같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이씨의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피해자들이 승소했기 때문에) 만족스럽다”면서도 원고 중 대다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판의 결론이 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변호사는 “앞으로는 사법부가 이춘식 할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새겨서 지연되지 않은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 묻기까지 13년…재판 지연된 배경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 묻기까지 13년…재판 지연된 배경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을 묻기까지 13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에 강제징용 피해자 3명이 눈을 감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4년 사망한 여운택씨 등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체절(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30일 확정했다. 이날 승소가 확정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원고는 이춘식(94)씨 뿐이다. 이씨는 77년 전인 1941년 17세의 나이로 구일본제철의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매일 12시간씩 고체 연료를 용광로에 넣고,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가마에 넣는 중노동이었다. 먼지가 심해 어지러움을 겪기 일쑤였고, 용광로 불순물에 걸려 넘어져 배에 상처를 입고 3개월 간 입원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을 하고도 이씨가 손에 쥔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제철소는 저축해준다며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해방을 맞은 이씨는 임금을 돌려받기 위해 제철소를 찾았지만, 공장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씨가 제철소의 후신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건 60년이 더 지난 2005년 2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문서가 그해 처음으로 공개돼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배상 청구 권리가 살아있다는 법적 해석이 나왔던 시점이다. 앞서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는 1941∼1943년 구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한 여운택씨와 신천수씨가 낸 손해소송에서 “구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판결은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피해자 4명은 2005년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다. 그러나 1·2심 모두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면서 원심을 파기했다. 사건을 다시 심리한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신일본제철이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신일본제철이 불복해 재상고하면서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5년이 넘도록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에 이춘식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이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대법원 선고가 지연된 이유로,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 사법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공모해 재판을 고의로 미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의 고위법관들이 2013년∼2016년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부 인사를 수차례 만나 강제징용 소송의 재상고심 결과를 ‘피해자 패소’로 바꾸거나 소송을 지연하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측이 외교부가 전범 기업의 입장을 반영한 의견서를 제출해주면 이를 빌미로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넘기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방안을 박근혜 정부에 직접 제시한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위해,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의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은 물론 판사의 해외공관 파견을 늘리기 위해 이런 거래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검찰은 재판 거래 의혹의 전면에 나선 판사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던 차한성·박병대 전 대법관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라고 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 전 실장과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등이 재판 지연 의혹에 연루됐다. 검찰은 최근 구속된 임 전 차장을 상대로 윗선 개입 여부 등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3·1절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발원지였던 러시아와 중국 지역은 사실상 잊힌 상태다. 통일을 바라보는 지금, 북한 접경 지역인 이곳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연해주·동북 3성 항일독립 유적지 한민족순례’에 동행해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좇았다지난 22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40분을 날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10월 중순을 넘겼지만 바람이 선선했다. 먼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던 ‘신한촌’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루스키섬 방향으로 50여분 떨어진 라게르산 정상에 있다. 검은색 철 울타리에 둘러싸인 이곳에는 직사각형 모양 3.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자리한다. 3개의 기둥은 남북한과 재외동포를,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각각 상징한다.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1999년 8월 15일 해외한민족 연구소가 한국에서 석재를 가져와 세웠다. 연해주 지역에는 1863년 한국에서 건너온 13가구가 지신허에 자리를 틀며 한인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했다. 새로운 한국이란 이름의 ‘신한촌’은 1911년 5월 구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와 건설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권업회와 한민회, 한민학교 등이 생겨나며 항일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때까지 연해주에 한인들이 17만명이 넘게 있었고 신한촌에만 1만여명이 거주했다고 알려졌다.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 치열하게 살며 항일운동을 펼쳤지만, 지금은 기둥 세 개짜리 탑만 흔적으로 서 있다. 철 울타리에 걸린 태극기 정도가 이곳에 한인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4㎞ 정도 떨어진 곳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있다. 모스크바까지 꼬박 1주일이 걸리는 전체 길이 9288㎞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 역이다. 강제로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열차에 태워진 채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쪽으로 100㎞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밤 동안 머릿속에 당시 풍경이 그려졌다.다음날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연해주 한인 동포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친선을 도모하고자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2009년 건립한 박물관이다. 입구 오른쪽에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는 글귀가 적힌 추모비가 서 있다. 현지 가이드는 “블라디보스토크 의과대 학장이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 만들었는데, 학장이 바뀌면서 학교에서 버린 것을 7년 전쯤 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고려문화센터를 나와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들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려문화센터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한국 정부가 10년쯤 전 사들여 현재 기념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860년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아홉 살 때 연해주 지신허로 와 정착했다. 이후 열한 살에 가출했다가 포시예트 항구에서 만난 러시아 선장의 배려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많은 돈을 번 그는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에 첫 한인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한인들을 돕기 시작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에는 빨치산을 조직하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왕바실재 언덕에 다다른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5일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로 이곳에 끌려와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한인과 러시아인 240여명이 이곳에서 잔혹하게 죽었다. 이른바 ‘4월 참변’이다. 10분 남짓 언덕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봤다. 함께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하모니카를 꺼내 아리랑을 연주했다. 동행한 고려인들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었다. 소 이사장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이곳을 유적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 집에서 5㎞ 정도 떨어진 수이푼 강변에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특사, 1914년 결성된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으로 잘 알려졌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국권회복을 위해 파견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하던 그는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내가 죽거든 불태워 유해를 강에다 뿌려 달라’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이곳 수이푼 강변에 뿌려졌다. 연해주에서 190㎞ 정도 떨어진 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있다. 높이 4m 정도 큰 비석에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 높이 1m 정도 작은 비석에는 ‘200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고 쓰여 있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이 훼손하는 사례가 잦았다. 비석을 옮긴 지역이 국경지대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당국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돼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사방이 허허한 벌판에 핏방울 모양의 비석이 홀로 서 있다. 목숨 바쳐 항일운동을 펼친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잊힌 역사인가, 아니면 잊은 역사인가. 중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차디찬 바람에 가슴이 시렸다. 글 사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러시아)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