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일본경찰
    2026-03-23
    검색기록 지우기
  • 후원회장
    2026-03-23
    검색기록 지우기
  • 한미 관세
    2026-03-23
    검색기록 지우기
  • 민정수석실
    2026-03-23
    검색기록 지우기
  • 성적 학대
    2026-03-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7
  • “혐한감정” 부추긴 소매치기단/도쿄 이창순(특파원코너)

    ◎일 원정범죄 근절책 시급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24일자 1면에 한국인의 얼굴을 뜨겁게 하는 컬러사진 한장을 실었다.「한국인 무장소매치기단 체포」라는 큼지막한 제목을 붙여서.요미우리신문은 이어 1면과 사회면에 걸쳐 23일 체포된 한국인 소매치기단에 대한 기사를 상세히 보도했다.여타 신문들도 사회면 두번째 큰 기사로 다뤘으며 NHK를 비롯한 TV방송들도 한국인 소매치기관련 기사를 일제히 불어댔다. 일본경찰통계는 올해 소매치기범죄로 11월23일 현재 38명의 한국인이 검거됐으며 이 숫자는 지난해 체포된 19명에 비해 두배로 늘어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이같은 검거건수는 외국인 전체의 30∼50%를 차지하는 것이어서 한국인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한국인 소매치기단은 특히 나이프,생선회칼,최루스프레이 등을 소지,경찰에 적발될 경우 칼을 휘두르며 대항하는 등 범행수법이 대담하고 흉포화하고 있다는게 일본경찰의 말이다.이같은 범죄는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치안상태를 유지하는 나라로 정평이 나있는 일본에서 적지 않은 파문을일으키고 있다. 일본경찰은 이같은 「무장」 소매치기범죄의 증가에 대비,지난 5월부터 소매치기 전담수사반을 편성해 비상근무에 들어갔으며 경찰의 무장도 강화했다.일본경찰은 종래 2인1조이던 소매치기검거수사조를 4인 이상으로 늘리고 책임자에는 권총을 지급,불가피한 경우 발포도 허용하고 있다. 일본은 그렇지 않아도 불법입국및 외국인범죄 증가로 골치를 앓고 있다.일본사회에는 이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이 확산되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속에서 증가하고 있는 한국인 소매치기는 일본사회에 있는 「혐한감정」을 부채질 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한국인 소매치기의 증가는 이같은 왜곡된 한국인 묘사와 오버랩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많다.그래서 한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일본에서의 한국인 범죄 근절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오고 있다.
  • 한국인 5인조 소매치기단/일경찰 발포로 둘 부상

    【도쿄=이창순특파원】 일본에서 최근 한국인 소매치기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23일 5인조 한국인 소매치기단중 2명이 일본경찰이 발포한 권총에 맞고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인 소매치기단은 이날 상오10시40분쯤 도쿄시내 닛포리(일모리)전철역구내에서 사복수사원에게 발각된후 나이프를 휘두르며 일본경시청 수사관요원 10여명과 한동안 대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이 쏜 권총에 최찬승씨(33)는 복부와 다리를 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중이며 윤성옥씨(36)는 경상을 입었다. 총에 맞은 2명과 또다른 1명등 3명이 현장에서 검거되었으며 나머지 2명은 도주했다.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인 소매치기단이 급증,사회문제화되고 있으며 올들어 검거된 한국인 소매치기는 40여명으로 이미 지난해 체포된 19명의 2배를 넘었다.
  • 안무선생 등 독립유공자 10위/중국묘소 확인… 봉환 추진/보훈처

    무장 독립단체인 국민회군 부사령관을 지낸 안무선생 등 중국지역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10위의 묘소가 새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 해외안장 독립유공자 묘소실태조사단은 10일 지난달 27일부터 14일동안 중국 길림성 화룡현·연길시·길림시일대를 답사한 결과 그동안 묘소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10위의 묘소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번에 묘소가 확인된 독립운동가는 안무선생을 비롯,신한독립당 결성자 김원식·무장독립단체 통의부 참모 손병헌·무장독립군 조직자 강백규·대한독립군분대장 이화일·배달학교 교원으로 민족교육을 하다 일본경찰에 희생된 김기선·최찬화·조용석·김기준·승대언선생등이다. 보훈처는 소재확인 묘소 10위에 대해서는 유족들과의 협의를 거쳐 빠른 시일내에 국내 봉환절차를 밟기로 했다. 보훈처는 또 묘소의 소재지는 파악했으나 비석등 묘소확인 고증자료등이 부족해 재확인대상으로 분류한 김윤승·이상호선생 등의 묘소에 대해서는 추후 확인작업을 벌일 방침이다.
  • 일 쌀도둑 극성… 부국면모 먹칠(특파원 코너)

    ◎최악 흉작여파… 암거래상 매전현상까지 전후 최악의 쌀흉작이 예상되고 있는 일본에서 최근 쌀도둑이 급증하고 있는데다 주민과 암거래상의 쌀매점현상까지 나타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쌀도둑은 물론 올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매년 쌀도둑은 있었다.그러나 쌀흉작이 공론화되면서 올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10월초까지 경찰에 신고된 벼와 쌀의 도난사건은 2백8건에 총 92·4ⓣ(약 2억6천만원 상당)이나 된다.그러나 경찰은 공식신고된 도난건수보다 실제 피해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쌀도둑이 많아지자 전국의 농촌에서는 자체적으로 「야경대」 「불침번제도」 등을 만들어 농협을 비롯한 쌀보관 창고를 지키고 있다.경찰청도 햅쌀이 반입되는 9월부터 12월까지 쌀도둑이 많았던 과거의 예를 고려,전국 경찰에 쌀도난 특별방지령을 내리고 쌀창고 등에 대한 경계를 일층 강화하고 있다. 경찰은 쌀도난 사건이 단순한 좀도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흉작으로 인한 쌀가격의 폭등을 예상한 「전문도둑」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쌀도둑 뿐만아니라 암거래업자의 쌀매점 현상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일본에는 농가들이 몰래 거래하는 암거래쌀이 있다.암거래쌀의 규모는 전체 소비량 1천만ⓣ의 약 20%인 2백만ⓣ정도로 정부미보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암거래업자들이 이 쌀을 사놓기 위해 농촌을 돌고 있는 것이다. 암거래업자 뿐만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쌀을 미리 사놓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도 나타나고 있다.최악의 흉작이 예상되는 일본 북부 아오모리현에서는 한때 쌀의 「매점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또 쌀의 대량 소비지인 도쿄등 수도권으로 반입되는 암거래쌀을 차단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일반 국도 뿐만아니라 고속도로의 검문도 강화하고 있다.쌀도둑과 경제대국 일본.최첨단기술을 뽐내는 일본의 또다른 얼굴이란 생각이 든다.
  • 나윤규 아리랑(외언내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수많은 아리랑이 있지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으로 쓰인 아리랑은 일제 암흑기를 통해 조국을 빼앗긴 민족의 아픔과 저항,비분과 한이 실려 지금도 어디서나 가장 자주 불리는 민요의 하나다.조국을 떠나있는 해외동포들에겐 두고온 고향과 형제를 그리는 노래,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1926년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가 각본을 쓰고 감독 주연한 불후의 명작이었다. 같은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5년동안이나 흥행1위를 기록,주제가와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대사등을 잘라 1시간짜리로 줄였는데도 극장입구는 이를 보려는 관객들로 회마다 장사진과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아리랑」을 합창하는 바람에 일본경찰들을 긴장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3·1독립만세 사건과 연루된 한대학생이 고향에서 요양을 하던중 여동생을겁탈하려던 일본순사의 앞잡이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두손이 꽁꽁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 이야기.단순한 스토리가 아닌 것이 동생과 동생을 구하려던 주인공은 「조국」,일제 앞잡이인 마름은 「일제 강점」으로 표현되어 억압됐던 민족감정을 유발시킨 의미심장한 저항 영화였다. 일본인 필름컬렉터인 아베 요시시케씨가 소장했던 이 필름이 60여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춘사의 자제이며 영화감독인 나봉한씨가 「부친의 필름을 꼭 돌려받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자 아베씨는 「필름을 찾기위해 애쓰시는 분에게 돌려주는것이 의미있다」면서 이를 기증형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예술도 전시·소장·수집만으로는 뿌리없는 골동품이며 진열품에 지나지 않는다.가질 사람이 갖고 놓일 자리에 놓여 예술의 탄생의 의미가 연결될때 예술로서의 가치와 광휘가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세주열사)

    ◎의용군 지휘… 중국 화북서 일군과 전투/중학때 연무단 조직,개천절시위 주도/일경수배 피해 망명… 조선의열단 결성/독립단체 규합… 40만명과 교전중 장렬한 최후 윤세주선생은 1901년 6월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강천리에서 부친 윤희규선생과 모친 김경이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성품은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서 저항할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윤선생은 국민학교때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버릴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그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교장의 영향을 받아 항일 정신을 키워갔다. 윤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학교내의 비밀결사인 연무단을 조직했다.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그러나 윤선생의 가슴에 반일·배일사상은 영원히 남게됐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13일 하오1시쯤 수천명이 모인 고향장터에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를 그냥 둘리 없는 일제의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해 4월14일 부산지법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선생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요령성 유하현에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따라 이회영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그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그는 11월9일 죽마고우 김원봉등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열단은 조선총독부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살해 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투척자를 물색하게됐다. 19세의 그는 신철휴 윤치형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 그러나 윤선생일행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국내동지 5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5년4개월의 감옥생활을하고 27년 출옥한 그는 중외일보 기자·경남주식회사사장으로 위장,독립운동에서 손을 뗀 양 조용히 지내다가 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폭탄투척자 물색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되어갔다.그는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는 32년 10월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33년 4월21일 1기로 졸업했다.독립운동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해 11월10일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안병조·김두봉·김규식·윤기섭·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33년 7월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민족혁명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그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는 또 민족혁명당이 일군에 무력으로 대항하기위해 만든 중국과 제휴해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간이 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38년 10월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그는 직접 조선의용대 지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41년 4월에 그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갔다.그는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그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42년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월에는 20개사단 40만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조선의용군은 불과 3천∼4천명에 불과했다. ○“끝까지 투쟁” 유언 일본군은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5월29일 항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 탈출로를 확보하고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6월3일 그는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게 동지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이었다.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1주년이된 43년 6월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은 합동으로 윤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대한민국정부는 80년 윤세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일,만엔권위폐 대량발견“법석”/5백여장… 은행·자판기도 식별 못해

    일본에서 정교하게 인쇄된 1만엔권 위조지폐가 대량 발견돼 야단이다. 일본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동안 오사카와 교토 지역의 은행과 역,자동판매기등 10개소에서 2백80장의 위조지폐가 발견됐다는 것이다.일본에서 2백80장의 위조지폐가 발견된 것은 지난 90년 1만엔권 위조지폐 79장이 발견된 이후 가장 큰 규모이다. 이번 사건이 특히 문제가 되고있는 것은 위조지폐 발견 그 자체보다는 정교하다는 자동판매기나 은행의 지폐교환기등이 지폐의 크기나 도형,잉크에 함유된 자기를 식별해 위조지폐를 가려내지 못했다는데 있다.실제로 이번에 발견된 위조 지폐 가운데 2백장 이상이 사쿠라은행에서 1천엔권으로 교환됐다. 일본 경찰도 『위조지폐는 시각장애자의 식별표시가 없는데다 인쇄의 빨간색 밀도가 적기때문에 주의해서 살펴보면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다』면서 『정교하다는 기계가 오히려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10개 은행은 위폐범이 앞으로 계속해서 은행 지폐교환기를 이용,위조지폐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위해 13일 은행에 설치된 지폐교환기 작동을 중단시켰다.
  • 일 총리 참가 행사장/폭발물 터져

    【도쿄 AFP 연합】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일본총리가 공식행사에 참가중인 도쿄의 아카사카(적판)궁 부근에서 25일 하오 6시35분쯤 의문의 폭발사건이 발생했다고 일본경찰이 밝혔다. 폭발사건이 발생할 당시 미야자와 총리는 아카사카궁에서 일본을 공식 방문중인 보 반 키에트 베트남총리를 위해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여부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찰의 한 대변인은 이날 아카사카궁 북쪽으로 인접한 와카바지역에 세워둔 승용차 1대에서 폭발물이 터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들은 문제의 자동차가 폭발하기 전에 이 자동차로부터 3발의 로케트가 발사됐다고 전했다. 언론들은 이 공격이 일본 천황일가에 반대하는 과격분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말했다.
  • 21세기로 가는 길(정근모/과학평론)

    ◎도산선생과 과학기술입국 오늘 3월10일은 민족의 스승이신 도산 안창호선생께서 순국하신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평생을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께서는 흥사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극도로 악화된 간경화증으로 병보석되어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치료중 돌아가신 것이다.민족의 지도자이신 선생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다가 1973년 11월10일 선생의 생신 95주년 되는 날에 강남에 마련된 도산공원에 이장되었다.오늘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후예들은 그분의 유훈을 되새김과 동시에 도산공원에 깃드는 첫 봄의 햇살속에서 독립 한국의 도덕적인 거듭남을 다짐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선생께서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성회복운동의 기본과 일치한다.조선 5백년을 지배해왔던 성리학이 지배계급의 통치철학은 제공하였지만 내실보다는 하세에 치중한 나머지 백성들의 실생활을 정직하게유지시키는 사회규범이 되지 못했다.실생활과 가까이선 정직한 사회행동규범을 정립하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함을 선생께서는 지적하신 것이다.정직한 사회가 되지 못하면 현대적 자주국가의 건설은 무의미하다는 가르침은 오늘에 와서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도산의 말씀을 우리 온 민족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것이다. 「농담으로도 거짓을 말아라.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동회하라」는 도산의 가르침은 정직과 함께 성실만이 우리 국민이 신뢰받는 민족이 되게 하고 우리나라를 갱생시키고 영광있게 하는 길임을 역설한 것이다.각 개인개인의 철저한 자아혁신을 강조하신 도산께서는 「무실력행」을 민주개조의 대책으로 역설하셨다.「참」을 힘써 「행」함에 온힘을 다하자는 것이다.일상생활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건전한 인격을 가꾸어야 「힘」을 발할 수 있는 개인이 되고 민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여기서 더 나아가 도산께서는 우리가 1인1기를 갖추어야 함을 주장하셨다.도산은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높이려면 모든 사람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직업기능을 가져야 하며 모든 산업을 과학화하고 합리화하여야 함을 가르치셨다.즉,만민개업의 정신을 받아들여 국민 모두가 생활에 필요한 일기일능을 가지게 하여야 국제 경쟁장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학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심지어 예술가라 하여도 육체노동과 생산기술로 자기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인격수양도 가능하다고 갈파하셨다.도산은 이미 60년전에 과학기술을 터득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국민모두가 과학기술을 생활화하고 생업으로 연결시킬때 국력이 부강해지고 자주국민으로서의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독립운동을 진정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국」의 의지가 투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기술을 천대하고 노동을 경시하였던 우리 민족의 사회개념을 혁신하시고자 한 것이다. 도덕성을 회복하고 과학기술입국으로 경제력을 증강시켜야 된다는 안창호선생의 가르침은 바로 오늘 신한국을 건설하는데 핵심이 되어야 하는 기본개념이다.모든 부정부패는 진실성의 결여와 합리성의 상실에서 비롯한다.우리가 갈망하는 새로운 한국은 참답고 건강한 한국이요 여기에는 정직성과 이지성이 주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애인성이 더해진다면 우리나라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 이것이 도산의 꿈이었었다. 55년전 오늘 도산은 이 세상을 떠났다.그의 꿈은 우리와 함께 살아있지만 그가 그처럼 사랑하셨던 조국은 아직도 그의 이상향에서는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남과 북으로 나뉘고 진정한 자유와 번영은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 남아있다.우리 후손들은 도산과 같은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갖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그 뜻하셨던 바를 하루속히 완수해냄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일궈나가야 할 것이다. 60평생을 지사로서의 절개를 지켰고 공생활이나 사생활에서 추호도 비난받을 점이 없었던 도산은 희망을 갖고 노력한 지도자요 외면적인 허세보다도 실질적인충실을 강조한 진정한 스승이었다.그를 추모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 수필가 피천득씨(이세기의 인물탐구:16)

    ◎티없이 순수한 글에 고결한 기품 가득/자연·인간심리의 섬세한 현상들 묘사 주력/황홀·찬란하지 않은 언어로 인생향취 음미/부모 일찍 여의고 도산·춘원 등에 문학·인생의 멋 배워 『난영이 잘 있나요?』하자 『그럼 잘있구 말구.세영이 엄마,난영이 데려와요』한다. 금예 피천득씨가 사는 구반포아파트에는 노부부와 난영이가 있다.어린 난영을 위해 그는 지금도 날마다 낯을 씻기고 머리에 빗질을 해주고 1주일에 한번씩 목욕을 시킨다.난영은 요즘 엷은 청회색 봄쉐터에 멜방이 달린 남색바지,그보다 더짙은 감색 양말을 신고 있다. 난영은 피천득씨의 또하나의 딸이다.그의 「새털같은 머리칼을 적시며」의 주인공인 딸 서영이 미국으로 가버리자 마음을 달랠 수 없던 그는 대신 난영을 돌보게 되었다. 난영은 지금부터 40년전,그가 하버드대 연구교수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없는 서영을 위해 사온 서양인형이다.이제 금빛 머리칼은 퇴색한 브론드지만 천진하고 밝은 얼굴,푸르고 맑은 눈동자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부모의 정성과 손길이 그만큼 자상했던 탓이리라.난영의 봄쉐터와 바지 골무만한 털 양말은 부인 임진호여사(78)가 부군이 시키는대로 손수 떠서 입힌 것이다. 우리는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금예의 「인연」이란 수필을 잊지 못한다. 10대와 20대 40대에 걸쳐 세번 만나게된 한 소녀와의 운명적 인연을 짤막한 글속에서 산호와 진주처럼 표현하여 어른이 된 지금도 사춘기의 애잔한 추억으로 남게하고 있다. 그는 어느 글에서나 사람의 도리와 경우,삶의 기쁨과 행복을 전하면서 이른바 「동천년로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을 추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의 절개와 기품을 꼿꼿이 지키고 있다. ○삶의 행복 글속에 담아 그의 시의 소재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 심리의 섬세한 현상을 교차시키는 것이 특징이다.설움과 심사가 「구름같이」피어나고 「물결같이」일어난다.그리고 「저 바다 소리칠때마다」그의 가슴이 뛰고 「저 파도 들이칠때마다」그의 피는 끓으며 그의 마음은 바다로 하늘로 달음질친다. 그의 글들은 티없는 옥천이다.그는 정수만을 쓰기위해 혼신을 다하고 온오을 드러내는데 전력하며 그의 처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경홀(경홀)과 당혹함이 없다.작은것을 말하면서 큰 것을 암시하고 비탄에 앞서 비장미의 감동을 담고 있다. 그가 「수필」에서 쓴 것처럼 그의 「수필은 청자연적이다.수필은 난이요,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서른여섯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그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고」「황홀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않고」「언제나 온아우미」하다. 금예는 서울사람이다.종로 화신 건너편에서 신전을 열어 가죽신장사로 부자가 된 피원근씨와 김수성여사의 독자로 태어났다.그러나 7세때 부친을 잃은 그는 서화와 거문고에 뛰어난 어머니로부터 예능과 문장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름이면 모시,겨울이면 옥양목」,모시처럼 섬세하고 깔끔하고 옥양목처럼 깨끗하고 차가운 「엄마」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타고난 영광」이라고 표현한다.「엄마같은 애인」「엄마같은 아내」를 갖고싶어했고 또하나 간절한 소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나 그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그가 10세때 30세의 나이로 어머니마저 타계하자 어머니에 대한 한과 그리움이 시와 수필속에서 절절히 사무치게 된것같다.그래서 딸 서영을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서영의 일거 일동을 섬세하게 지키는건 물론 유치원서 국민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곤 했다.딸도 아빠를 따르고 섬기고 아빠가 원치않는 것은 어기지 않는다.그런 서영이 서울대 화학과 졸업후 미국으로 가버렸을때의 허전함과 허탈은 누구도 쉽게 짐작할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딸과 어머니외에 그의 구원의 여상은 성모마리아와 단테의 베아트리체,헤나의 파비올라,「둘이서 걸어가기엔 좀 좁은 길이라고 여겨지는 알리사」,그리고 「자존심이 강하여 싱싱하면서도 수줍어할때가 있는 푸른나무와 같은 여성」「마음을 허공에 둘지언정 아무것으로나 채우지 않으며」신의 존재·영혼의 존엄성·진리와 사랑의 기도를 열심히 믿으려고 애쓰는 여성이다. 또 「평범하되 정서가 섬세하고 동정을 주는데 인색치않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여기는 미소같은 유머를 지닌 사람들에게 그는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1926년 춘원의 권유로 상해유학을 결심한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도산 안창호선생을 만날수 있다는 호기심과 기대도 그 하나의 이유가 된다. 큰 기대에는 환멸이나 실망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도산을 처음본 순간의 기쁨은 마치 김강산을 처음 봤을때의 감격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우렁차면서도 날카롭지않고 청아하면서도 부드럽고 위엄이 있으나 상대방을 억압하지 않는」용모와 풍채와 음성이 그랬다. ○16세때 상해로 유학 병들어 누웠을때 그를 상해요양소에 입원시켰고 겨울 아침마다 문병하는등 끔찍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32년 6월 도산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고 그가 순국했을때도 일경의 감시가 두려워 장례식에 참석치 못한것은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 보다더 부끄러운 일」로 자책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역시 도산못지않게 그의 인생과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어준 잊을수없는 인물의 하나다. 상해에서 돌아와 3년간 춘원댁에 기거하고 있을때 춘원을 그에게 「금아」란 호를 지어 주었다.워즈워스,도연명을 읽게 했으며 마음가짐이 항상 밝고 맑은 「광풍명월」,어떤 경우에도 구애없이 순응하는 「행운류수」의 행동을 깨우쳐준 장본인이다.상해 호강대(호강=후장)선배인 용예(주요한) 여심(주요섭) 소년시대때부터의 치옹 윤오영과의 청담·청교도 빼놓을 수 없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 그들은 먼길을 먼저 떠나버렸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소팽을 듣고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전에는 곧잘 비원에 가곤 안내원의 인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싫어서 시내에 나오면 덕수궁에나 들르고 있다. 담배·커피는 물론 술은 입에 대지못한다.체질상 마시지는 못해도 「거품이 풍기는 맥주·빨간 포도주·환희소리를 내며 터지는 샴페인」등 술에 관한 이야기라면 수주의 「명정사십년」못지 않게 쓸 수 있을 것같다. 그의 생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자·문필가로서의 청빈을 면치않는다.39년 신혼초에는 성균관동재에 방한칸을 빌려 살았고 어느해엔 1년에 여섯번이나 이사,방둘짜리 영단주택,이 아파트로 이사오기 12년전까지만해도 버스가 15분마다 한번씩 오는 하남시 망월동 9평짜리 집에 살면서 강아지를 키우고 꽃과 나무도 심었다. 3남매가 결혼후 모두 미국으로 떠나자 집을 지닐수 없어 아파트생활을 하게 됐고 「학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비록 오막살이라도 누추하지 않다」는 옛글과 맞지않아 『늙은 아내탓을 하지만 기름때는 아파트로 온것은 분에 넘치는 노릇』이라고 얼굴을 붉힌다. 현관에 들어서면 휑덩그런 거실,커튼도 소파하나도 없다.그 흔한 붙박이 장식장도 없이 밥상겸 집필상으로 쓰는 오래된 교자상 하나,서재에도 옛날 딸이 쓰던 책상과 제자들이 돈을 모아 사다준 책상위에 캐나다에서 치과기공소를 경영하는 장남(세영씨·52·전연극인)미네소타의 소아과의사인 차남(수영씨·50)이제 MIT교수인 독일인 남편과 함께 세계적 물리학자이며 보스턴대 교수가된 딸 서영씨(48)가족사진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도산과 아인슈타인,잉그리드 버그먼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사진,르노아르 세잔의 프린트 그림뿐.표구된 그림이 벽에 기댄채로 서있기에 『왜 그림을 걸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벽에 못을 박기가 싫어서』라고 대답한다. ○작은 기쁨에도 만족 그는 언제나 필요한것만큼만 소유하며 작은 기쁨 작은 아름다움에 만족하고 있다.일찍이 그런 그를 가리켜 월탄이 『개결이 지나치다』고 한것은 그를 꿰뚫어 아는 명언에 틀림없다. 비오는 날이면 미술전시와 음악회 프로그램,묶어두었던 편지와 사진을 풀어보면서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며 사십까지도 아니다.어느나이나 다 살만하다』고 확인한다. 이제 기쁨과 슬픔을 다 겪은후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려는 그는 여전히 『사랑과 슬픔은 남에게 보이지 않을것』을 원칙으로 지키려 한다. 요즘은 수필보다 시에 집착하여 최근에는 「아침이슬 같은/무지개 같은/그 순간이 있었으니/비바람 같은/파도 같은/그 순간이 있었으니…」지난 시간을 돌아본 시를 발표했다.밤에는 그의 곁에 난영을 재우고 새근새근 잠든 난영의 평화로운 숨결속에 그의 모든 그리움과 외로움과 시름을 묻는다.그리고 그는 이런 만년의 기쁨과 여유와 평화를 혼자 누리는것이 다른이들에게 송구스럽다면서 소년처럼 조용히 웃어보인다. □연보 ▲1910년 5월29일(음 4월21일) 서울 종로출생 ▲1932년 서울 제일고보 부속국민학교 졸업 ▲1923년 〃 제일고보 입학 ▲1926년 제일고보 4년 재학시 중국 상해로 유학.상해 공부국 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서 수학. ▲1929년 상해 호강 대학교(University of shanghai)예과 수학.도산 안창호선생에 사사 ▲1931년 호강대학교 영문과 진학 ▲1933년 신동아에 「기다리는 편지」「나의 파일」 등 발표로 문필 생활시작 ▲1934년 재학중 수차 구국하여 춘원 이광수택 유숙 청교.(이무렵 현진건·이상범·이은상·인촌·고하교류) 금강산서 1년체류(시작 「단풍」외) ▲1937년 상해 오강대학교 영문과 볼업.서울 중앙고등학원 교원 ▲1945년 경성대학교 예과교수 ▲1951년 서울대 사대교수 ▲1954년 미 하버드대에서 연구 ▲1959년 「금아시문선」(경우사간) ▲1967년 서울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주임교수 ▲1969년 미 하버드대 등 여러대학에서 한국문와강의 British Council초청으로 영국방문.시집 「산호와 진주」(일조각간) 영문판 「A Flute Player」 출간 ▲1974년 서울대 퇴직후 미국여행 ▲1976년 수필집 「수필」(범우문고간) 세익스피어 「소네트시집」(정음문고간) ▲1980년 「금아문선」「금아시선」(일조각간) ▲1987년 「피천득시집」(범우문고간) 이후 시작 「새」 「너」 「기억만이」 「만남」 「그뒷 이야기」 「저 안개속에」 등 계속 발표중.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2)

    ◎소년시절:13/마르크스·레닌서적 탐독설/「자본론」 중국어판 30년에 첫 출간됐는데/“26년 15살때 이미 읽어치웠다” 억지선전/최근들어 “공산당선언만 봤다” 다소 후퇴 김일성이 화성의숙에서 느꼈다는 마지막 세번째의 환멸은 다음과 같다. (ㄷ)민족주의 운동… 상해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여 서로 치열한 감투싸움이나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고 독립군은 군자금이나 거두며 돌아다녔다.임시정부는 미국등에 대하여 비굴한 「독립청원외교」를 벌이고 있었다. ○“임정인사 세다툼” 적지않은 자산계급출신 운동가들이 「애국지사」로부터 일제의 앞잡이로,민족개량주의자로 굴러 떨어졌다.그들은 「민족개량」「실력양성」의 보자기를 쓰고 「계급협조」「대동단결」「민족자치」를 떠들었다. 이때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김시우 집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었다.그리하여 청년들이 찾아올 때 이들에게 새 사조와 소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를 선전하였다. 이중 세력다툼이니 군자금 징수니,변절이니,타락이니 하는 것은 김일성이 민족주의를 비판할때 언제나 사용하는 딱지들인데 이러한 단어들은 앞으로 연구할 기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가 「김시우 집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을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김시우란 임강시대에 백산무사단원으로서 김형직과 관계를 맺은 우익인사인데 김일성은 그로부터 「좌익서적」을 제공받은 것으로 허구를 꾸미고 있다. 화성의숙시대 김일성이 김시우 집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선전은 1978년에 발간된 「불멸의 자욱을 따라」부터 시작되었다.그러나 이 책은 그가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을 멀리하고 혁명적 출판물들을 많이 탐독하였다」고 썼을 뿐,그가 무슨 책을 읽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데 82년에 나온 그의 전기에서는 놀랍게도 그가 이 시절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임금노동과 자본」을 읽었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자 멀리해 여담이지만 필자는 대학생시절 자본론을 사 보았었다.그러나 마르크스의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의미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고 몇 페이지 안가서 읽는 것을 포기하였다.또 최근 오길남박사에 물어 보았더니 『자본론은 독일의 대학교수들도 읽는데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어려운 서적』이라고 하였다.이런 책을 북한에서는 15살짜리 김일성이 읽어치웠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딴데 있다.김시우의 집에 이러한 서적이 있었더라면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과대선전」정도로 볼 수가 있다.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26년 당시,만주의 오지인 화전현 관가에는 있을 리가 없었다. 일본경찰이 1925∼26년에 동남만에서 압수한 「불온문서」를 보면 그 중 1백권 이상의 것은 「선봉」「거화」「전만동포에게 호소함」「전만혁명동포에게」「노동기념선포문」「노동보」「선포문」「불온문서원고」「국제청년데이」「혁명」「농보」「농민회발기준비서」가 그 전부였다. 모두 팸플릿이나 신문에 지나지 않았고 학술서적이란 없었다. 또 김시우의 집에는 마르크스·레닌의 서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도없었다. ①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1929년 초에 육문중학교에 부임한 김일성의 스승 상월이 중국에서 갈림에 가져온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이 책이 길림보다 훨씬 낙후한 벽지인 화전현 관가에 그보다 3년이나 이전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②「자본론」은 중국에서는 겨우 1930년에 그 제1권 제1분책의 제3장까지가 진계수 등의 번역으로 상해에서 출판되었다.또 그 전역본은 38년이 되어야 나오게 된다.26년에는 읽어야 할 책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창덕학교 5학년 수준인 그의 일본어로는 일본어 번역판도 읽지 못할 것이다. ③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을 일본에서 대중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1928년이므로 이 책도 중국에서는 출판이 상당히 늦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북한에서는 중국말도 일본말도 잘 모르는 소학교 중퇴생인 김일성이 대학생도 익히 알아보지 못하는 마르크스·레닌의 서적들을,이러한 책이 번역 출판되기도 전에 「읽었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해괴한 주장을 85·87년 양년에낸 「김일성 평전」에서 조목조목 분석비판하였다.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나온 회고록에서는 화성의숙 시대에 「공산당 선언」단 한가지만을 김일성이 읽은 것으로 하고 있다.나머지 책은 길림시대에 읽은 것으로 약간 그 시기를 늦추고 있는데 이렇게 하여도 서로 상충된 거짓말들을 조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상충된 거짓말 여전 1925∼26년에 걸쳐서 동남만에서 1∼2점 발견되어 일본경찰이 압수한 공산주의 선전 팸플릿 중에 「공산당의 선언」이란 것이 있다.그러나 소련에서 출판된 이 팸플릿이 공산주의의 침투가 늦었던 화전현에,그것도 우익이었던 김시우의 집에 날아 들어 올 가능성이란 역시 매우 희박할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1」154∼157면 ②「불멸의 자욱을 따라1」202면 ③「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1」31·32면 ④5·6·8 평전 127∼134면 ⑦하상조번역 「임노동과 자본」암파문고판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6)

    ◎유년시절:4/5세때 살던 강동군 내동마을 개명/혁명사적지 지정… 행적과 함께 미화/50세 넘도록 묻어뒀다가 뒤늦게 “조명” 60년대 후반부터 봉화리 “우상화” 김일성은 그가 어릴 때 만경대를 떠나고 거기에서 1백50리가량 동쪽에 있는 평남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에 가있었던 사실을 역시 50세가 넘도록 전기에서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평양종실중 중퇴 그는 김형직이 강동에 있었던 사실이 일제 관헌자료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안 60년대 후반부터 이 시기의 자기 행적을 우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직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한후 만경대에 있어서 순화학교 교사를 하였다.그후 1916년 봄에 강동의 내동부락에 가서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60년대 중반이후의 전기들에 의하면 그는 그후 17년 가을에 조선국민회가 검거되자 그 곳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일성은 부친보다 1년 늦은 17년 봄에 내동부락에 가서 18년 봄에 만경대에 돌아온 모양이다.만5세때 일이므로 그가 이 시기의 자기 행적을 잊어버려도 부자연하지않는 시기이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강동군 봉화리라고 지명이 바뀌어지고 「혁명사적지」로 조성되어 있다.또 이 시절의 김일성에 대한 「사적」들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창작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⑴평등주의…1917년 가을,봉화산에 살맹이가 빨갛게 익었을때 그는 친구들과 가서 그것을 땄다.나중에 모였을때 보니 그들이 딴 살맹이 양은 제각기 달랐다. 김일성은 그것을 모두 한곳에 모으도록 하고 아이들의 머리 수만큼 따온 살맹이를 똑 같이 나누어 주었다. ⑵군마놀이(말바위놀이)…학교 뒷산의 언덕에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그는 이것을 말로 간주하여 그중에서 가장 큰 바위에 자신이 올라 타고 다른 바위에 아이들을 앉혀 「조선군대 말타고 나간다!」,「우리군대,장수군대 번개번쩍 나간다」등의 구령을 외치고 놀았다. ⑶연설…김일성은 명신학교교실에서 가르치는 부친의 말을 교실 밖에서 들었고 학생들의 글소리를 그대로 외웠다. 부친은 일제의 죄행을 단죄하고 반일투쟁을 호소하는 연설문을 그에게 써주었다.그래서 그는 기념일이나 학예회,시국강연회,토론회,노래보급회,글짓기모임 등에 나가면 이러한 곳에서 연설하였다. ○대연설가로 선전 「김일성의 어린시절」이야기는 크게 나누면 부친 김형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기 전과 체포 후로 나뉘어진다.부친의 체포 자체는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김일성의 성장과정을 소설화하면 그 스토리는 이러한 순차성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일화」들은 김형직 「체포」이전의 이야기들인데 그 우상화작업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이상과 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조작물이다. 예를 하나만 들면 1910년대는 한문을 큰 글이라 하여 숭상하고 한글은 암클이라고 멸시한 반봉건사회였다.그런데 김일성은 「한글」쪽에 정통하여 「한문에 소양있는」부친으로부터 한글로 쓴 원고를 받고서는 가는 곳마다 연설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러한 연설은 「일제를 단죄하고 반일투쟁을 호소」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어린아이 장난을 과장한 만경대의 군사놀이나 강동의 군마놀이 같은 수준이 아니라 그는 만5세에 한글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대중을 선점선동하는 타고난 대연설가로 되어버렸다. 그런데 「김일성의 어린시절」은 사실이야 어떻든지간에 김형직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원수에 대한 증오」가 김일성의 「실천투쟁」과 결부되게 된다. ⑷투쟁…1917년 가을 김형직이 일제에게 체포되었을 때 그는 부친을 잡아가는 일본경찰을 향하여 돌맹이를 던지려고 하였다.모친이 그를 제지하자 그는 분노의 울음을 터뜨렸다. ○실천투쟁과 결부 모친은 김형직이 지붕의 기와 밑에 감추어 놓은 비밀문건을 불사르고 경찰이 장롱을 수사하려 들자 앞을 가로막고 나서면서 그들의 낯짝에 침을 뱉었다. 김일성은 이런 모친을 보면서 일제에 대한 증오심에 불탔다. 그후 강반석은 아이들을 데리고 1918년 봄에 만경대로 돌아온다. ①「무지개 비낀 만경봉」86∼104면 ②같은 책 105∼109면
  • 대규모 간첩단사건/손병선씨 딸도 구속/월북기도 혐의

    국가안전기획부는 17일 「남한조선로동당」사건과 관련,간첩혐의로 구속된 전민중당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손병선씨(52)의 둘째딸 민영씨(31)를 국가보안법위반등 혐의로 구속했다. 민영씨는 지난달 19일 일본으로 도피,북한 해외연락선과 전화접촉을 갖고,『제3국을 통해 입북하라』는 지시를 받은뒤 주일중국대사관을 통해 입북하려다 대사관앞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안기부에 인계됐다. 민영씨는 90년4월 민중당 총무간사로 활동하면서 아버지 손씨의 지시에 따라 북한방송지령을 수신·해독하는 일을 했으며 북한 로동당에 입당,「비봉13호」라는 암호명을 받고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전연구:5)

    ◎서열4위 김형직을 회장으로 날조/조선국민회 실제 주도자 이름 삭제/“일제에 투옥” 주장 사실 아닐 가능성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우상화에는 조선국민회가 불가결이었다.그는 조선국민회의 결성자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경찰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의 조직경위는 다음과 같다. …1914년 9월에 장일환이 하와이의 박용만을 찾아 가 같이 싸울 약속을 했다.그는 귀국하여 총독정치의 상황과 민심을 살피고 이를 박용만에게 통보하여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장일환은 191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1909년에 먼저 돌아와 있었던 전하와이 국민회회원 강석봉과 만났다.이해 겨울 그는 또 만주 안동현의 백세빈을 만나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도록 합의하였다.이들은 간도에 이주할 계획까지 하였으나 그 계획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1917년 2월.배민수,김형직이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장일환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거기서는 평양 장로파신학교에 조선각도 청년들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였고 3월23일 13명이 모이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성 당일에는 6명이 결석하였다.이 때문에 9명이 이보식의 집에서 회합하고 장일환을 회장,배민수를 통신겸서기,백세빈을 외국통신원으로 선출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장일환이 우두머리 1917년6월,회원 배민수,김형직,노선경 등은 각기 자기의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다른회원들 중에는 「결사」라고 혈서하는 이도 있었다.이 때 배민수는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할 뜻을 밝혔다.또 국민보를 발간하여 회원에서 보내는 계획도 있었다. 17년 7월,노선경은 간도의 동지들과 연락하는 통신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서간도로 갔다.그리고 김은현,조옥소는 양경수에게 돈 일만원을 내게 하며 그 일부로 권총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후 조선국민회 회원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평양의 회원은 1918년 2월 장일환 이하 12명이 신병송검되고 기타 13명은 석방되었다…. 이상이 일제 경찰기록의 요지이다.이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는 2년반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장일환이 17년 3월 23일에 세운 결사이다. 그는 조선에서 강석봉,백세빈,배민수,김형직,이보식 등을 차례로 동지로 삼아 그중 백세빈,배민수를 간부로 뽑았다.나머지는 회원이 되어 각각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일제자료를 입수한 후 착수한 것은 김형직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나오는 인명을 모조리 은폐하는 작업이었다.은폐하기 위해서는 일본측 자료를 개찬하여야 하는데 개찬한 결과는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16에 사진 판으로 실려 있다. 이를 참작하면서 변조과정을 밝혀 본다. 일제자료에는 조선국민회 회원의 본적·주소·직책·이름을 회장 장일환(32세)외국통신계 백세빈(25세),서기 배민수(22세),서당 교사 김형직(34세),회원 서광조의 순으로 밝히고 있다.그러나 조선전사16은 이 일제기록 중에서 순번 제4위인 김형직의 본적과 주소,이름만을 사진판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책에 실었다. 일,회원씨명 본적‥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주소‥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삼리 서당교사 김형직 당삼십사년… 이와같은 기록은폐작업으로 당시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이란 시골에 있었던 김형직은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다른 간부를 제쳐놓고 일약 「회장」으로 「출세」하는 것이다. 동지들을 없애 치운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신자이고 대부분이 후에 상해임정과 연계를 가지게 되는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체제의 의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는 여태까지 그렇게도 철저하게 삭제하고 은폐한 이름을 일부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1917년 3월 23일,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조선국민회에 망라된 청년투사들은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결사」라는 혈서를 썼다』 일본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대한독립」을 혈서한 인물인데 이 혈서는 아마도 회장 장일환 앞에서 썼을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맹원 김형직의 입장을 은폐하고 이상과 같이 그를 장일환을 지도하는 인물로 올려 놓았다.그러나 김일성이 한 말의 내용은 일본경찰기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경찰기록 이상으로는 조선국민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기록 이상 몰라 조선국민회 회원은 1918년 2월 이전의 어느 날,25명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어 그중 12명이 감옥생활을 하였다.북한에서는 이것도 체포자가 백여명이었다고 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감옥에 간 12명중에 김형직이 들어 있었는가 어떤가이다.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5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3·1운동이후에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하였다. ②19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로부터 3∼4년은 그가 1916년에 투옥되었다고 변경하고 있었다. ③그랬던 것이 조선국민회 자료를 입수한 후부터는 투옥이 1917년 가을부터 18년 가을까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김형직은 만경대에서는 그 부친 보현의 장남이었다.따라서 그 「혁명적가정」에서는 많은 일가친척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주목하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들은 김형직이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그의 투옥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된다.투옥의 해가 세번이나 변경되는 추태를 보면 김일성 자신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사자료25,37면 같은책 38면 같은책 동면 조선전사16,22면 같은책 동면 세기와 더불어1,26면 1952년 4월 20일자 로동신문의 「김일성장군의 전기」참조 「조선근대혁명운동사」,북한 과학원역사연구소간 일본번역판,2백92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15면
  • 도쿄 신주쿠구/아시아계 집단거주지로(특파원코너)

    ◎일 릿쿄대 오쿠다교수팀 외국인거주 실태조사/80년대 초부터 중·대만·한인들 몰려들어/외국인비율 14% 육박… 외인촌으로 변모 일본 도쿄의 신주쿠(신숙)에는 「작은 아시아」가 있다.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도쿄의 주요 도심지 신주쿠에 중국,대만,한국,이란인등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다. 신주쿠에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 일본의 대표적인 환락가가 있기도 한 신주쿠에 많은 음식점,서비스업종의 점포와 사무실이 증가하면서 외국인 인구도 늘어났다. 지난 87년에는 신주큐가 도쿄도내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중의 하나가 되었다.그전부터 외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이 지역에 80년대후반부터 외국인 유입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닛쿄(입교)대의 오쿠다(오전)교수팀이 신주쿠역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의하면 지난1월 현재 이지역에 등록한 외국인수는 전체인구의 13.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일부지역에서는 외국인 비율이 20%나 되고 있다.이같은 결과는 일본사회의 고령화에따라 지난 60년대후반 이후 신주쿠구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국인의 증가와 함께 이들이 정착하는 경향도 많아지고 있다.오쿠다교수팀의 조사에 의하면 신주쿠에 살고있는 외국인중 일본기업의 사원이나 일본인의 배우자등 영주자 비율이 10%를 넘고 있다.일본인과 결혼하여 정주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거주자의 주류는 역시 「학생」인 것으로 나타났다.전문학교와 대학교에 유학하는 학생이 각각 15%로 전체의 30%이며 일본어학교에 재적하고 있는 사람이 40%이다. 신주쿠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고국에서는 대부분 중류이상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오쿠다교수의 조사에서 65%이상이 모국에서 중류이상의 생활을 했다고 대답했으며 직업도 사무직,교사등 전문직종이 36%였다.중국출신의 한 남성(31)은 고국에서 미술대학 강사를 하다 지난 87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지금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기도 하다.중학교 교사를 하다 5년전에 일본에 온 한 한국인(35)은 현재 대학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다.그는 아르바이트로 기업경영상담을 하는데 1회에 1백50만엔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식당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달픈」일본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이 많다.외국인중 42%가 일본생활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으며 10%는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정착화 경향이 증가하면서 외국인들의 생활이 「일본화」되고 있다.오쿠다교수의 조사에서 44%의 외국인이 생활관습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고 대답했다. 신주쿠를 거주지로 선택한 이유는 친구나 가족·친지의 소개가 50%로 가장 많았다.이사를 경험한 외국인중 절반이상이 같은 신주쿠구내에서 이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서서히 신쥬쿠가 외국인의 집단거주지로 되고 있다. 신주쿠에 외국인이 몰리면서 많은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특히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증가,일본경찰을 긴장시키고 있다.일본경시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1∼9월까지 9개월 동안 4천8백여건의 외국인 범죄가 일본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그중 80%가 아시아인들이었으며중국인이 가장 많았다.외국인에 의한 범죄는 일본 전체적으로 볼때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점점 증가하고 있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 히로시마 상수도 독극물 공포/인체치명적인 「시안」 수원지 오염

    ◎한때 급수 중단… 유입경로 불명 【도쿄 로이터 UPI 연합】 인구 1백50만명에 육박하는 일본 히로시마(광도)시 전역과 인근 지역의 주요 상수도원인 오타(태전)강에서 2일 독극물의 일종인 시안화합물이 방류돼 수천마리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 지역에 대한 급수조치가 일시 중단됐다고 일본관리들이 3일 밝혔다.시안은 급속도금가공 김·은의 정련등에 사용되는 공업원료로 극히 미량으로도 치사 또는 급성 중독현상을 일으켜 전신마비등을 일으키는 독극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경찰은 이번 사태와 관련,특별대책반을 편성해 시안화합물의 출처를 밝히기 위한 조사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단수조치는 지난 2일 히로시마와 인근지역의 상수도원으로 이용되는 오타강에서 떼죽음 당한 물고기들이 시민들에 의해 발견,수질검사를 실시한 결과 시안화합물이 검출되면서 이루어졌다. 시당국은 이에따라 2일 하오 7시부터 3일 상오까지 이 지역에 대한 급수를 중단했다. 특별대책반은 이와관련,히로시마 북서쪽 20㎞의 오염수역 주변의 공장과 업체들이오염물질을 강물에 방류해 수질오염방지법을 위반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할 방침이다. 히로시마 경찰은 이와함께 오타강의 3개 지류에서도 시안화합물이 발견됨에 따라 주변지역에 위치한 11개 공장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으나 예비조사에서 시안의 출처를 밝힐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 호텔부사장 부인 일서 의문사/제주 「그랜드」

    ◎일지 “부부싸움뒤 사망” 보도/남편,“자고 일어나니 숨져있어” 【제주】 제주경찰청은 3일 제주그랜드관광호텔 부사장 김수영씨(50·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71동 606호)의 부인 이국희씨(45)가 지난 1일 상오1시쯤 일본 후쿠오카시 니코호텔에서 김씨와 부부싸움을 한뒤 숨졌다는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보도와 관련,진상조사에 나섰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일 상오1시 후쿠오카시 니코호텔에서 김씨가 잠을 자다 깨어보니 부인이 숨져있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와 하카다경찰서가 조사에 나서 김씨의 부인 이씨가 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일본경찰은 김씨가 이날밤 부인 이씨와 심하게 다툰 사실을 밝혀내고 김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체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이날밤 부부동반 파티에 참석했다가 호텔로 돌아온뒤 아내와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 잠들었으며 새벽녘에 깨어보니 아내가 숨져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에따라 일본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이씨의 사체를 부검키로 했다.한편 제주경찰청은 일본 현지신문의 사건보도에 따라 일본경찰에 정확한 사건경위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 이달의 문화인물 이윤재선생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감옥서 순국/애국적인 삶과 한글연구업적 평가 「10월의 문화인물」로 한글학자 환산 이윤재선생(18 88 ∼ 19 43)이 선정됐다. 문화부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한 선생의 애국적인 삶을 널리 알리고 선생의 연구업적을 재조명,우리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 문화의 달이자 한국날이 들어있는 10월을 맞아 선생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뒤늦게 신학문에 눈을 뜬뒤 대구계성학교와 중국 북경대학에서 수학하고 마산 영변 정주 서울등의 여러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그러면서 나라잃은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선생은 그뒤 조선사람에게 조선말사전이 한권도 없다는데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조선어학회에서 국어사전편찬을 위한 기반연구작업에 전념했다.이에따라 19 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19 36년에는 「조선어표준말모음」을 각각 발표했다.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책임을 맡기도 했다.19 31년부터 4년동안 전국 각지를 누비며 한글강습회를 열어 문맹퇴치와 새로운 지식보급에도 힘썼다. 선생은 19 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김윤경 등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힌 뒤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 43년 12월8일 함흥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생은 「표준조선말사전」「문예독본」등 주요저서와 함께 「한글맞춤법통일안해설」등 많은 연구논문도 남겼다. 선생을 기리는 주요기념사업은 다음과 같다. ▲이윤재의 달 기념 민족어연구학술발표회=31일(문예진흥원강당) ▲사전편찬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30∼31일(국립극장소극장) ▲92한글 및 한국어정보처리 학술발표대회=9∼10일(한국통신연구센터) ▲추모강연회=11일(경남대) ▲특별강연회=27일 하오4시(한글회관)
  • “불임수술 받고 전선에 끌려 갔다”/생존자들의 생생한 체험 증언

    ◎상대 거부·우리말 쓰면 마구 매질/안끌려가려 목맨 처녀들 수두룩/자매 한곳서 같이 위안부생활도 ▷사례1◁ 1938년 8월 위경의 놋그릇 상납요구및 창씨개명 반대이유로 가족이 경찰서로 연행됐는데 이장의 권유로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다기에 스스로 지원했으나 그길로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위안장소(자카르타)로 연행돼가는 도중 광동에서 불임수술을 받았다.1946년 3월경 미군의 도움으로 자카르타에서 배를 타고 귀환했다. ▷사례2◁ 1943년 1월 혼자 집을 보던중 낯모르는 신체건강한 남자 2명이 찾아와 볼 일이 있으니 무조건 나오라며 강제로 끌고가 최초로 하차한 곳이 만주 하얼빈이며 그곳에서 이동해 용관현에서 계속 생활했다.도착 첫날부터 방 1칸(약 2평)당 여자 1명씩 배치돼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하며,평소 한국말을 하거나 남자받기를 거부하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주일마다 성병검사를 실시해 감염자는 완치때까지 치료해 치료후 다시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사례3◁ 동네어귀에서 언니와 쑥을 뜯던 중 일본경찰이 강제로 차에 태워서 끌려갔으며 경찰이 군인들의 숙식및 뒷바라지 일을 하는 곳으로 간다며 기차로 부산까지 데려갔다.히로시마(광도)근처 군부대에서 하루 일본군 10∼15명 정도를 상대로 위안부생활을 했으며 언니와도 잠깐 같이 위안부생활을 하기도 했다(연행연도 미상). ▷사례4◁ 1942년 11월 16살때 만주 봉천 기차여행중 옆자리의 군인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갔다.군병영내 막사에 중국여자들을 포함해 약 20명이 수용돼 위안부생활을 했다. ▷사례5◁ 1942년 3월 처녀공출이란 명목으로 영장을 받고 일본순사한테 강제로 연행돼 끌려갔다.여러 명을 창고에 가둬놓고 1명씩 불러내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말 안들으면 죽여버리겠다며 하루 3회정도 성폭행을 했다. ▷사례6◁ 1938년 4월 산에서 동생과 나물을 캐던중 일본군 2명과 한국사람 1명에 의해 강제연행됐으며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끌려갔다.오사카에 내려서 3일쯤 머무른뒤 홋카이도(북해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1년간 살았으며 그후 다시 오사카에서 살았다.일본 수용생활중 심한 구타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분열증세가 심해 일본군인들이 산에 내다버린 기억이 있다. ▷사례7◁ 1944년 9월 방직공장에서 야간조업중 무장한 일본군인 15명 정도가 들어와 『여러분은 앞으로 일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미리 눈치챈 사람들은 도망가고 나머지 49명만 연행됐다.요코하마(횡빈)과 히로시마에서 군부대 위안부로 10여년간 있었으며 1개소대 50명으로 편성된 10개소대 5백여명이 함께 생활했다. ▷사례8◁ 1941년 2월경 일본인 여자 1명과 한국인 남자 1명이 부산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권유해 나를 포함해 약 50명정도의 여자가 그곳에 갔다가 일본군에 강제징발돼 현지주둔 일본군부대에 체류했다.일본군부대에서 매일 12∼15명의 일본군을 상대(계급별 출입시간과 요금에 차등)하는 위안부생활을 한뒤 군부대 이동에 따라 싱가포르에 이송된후 중국 목단강과 빈강성·남경·도문·만주등 부대에 배속돼 일본에서와 같은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일체의 영외출입이 금지됐다.현지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이상 사망하기도 했다. ▷사례9◁ 1942년 3월 약 14살때 부산에서 식모살이 하던중 놀러나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임시구금소(민간인 가옥)에 약 10일정도 구금된후 기차로 부산에서 만주 간도성까지 가 군부대밖에 있는 위안소(군인만 상대)에 넘겨져 해방될 때까지 생활했다.위안소에 약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으며 하루 15∼2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사례10◁ 1938년 12월 군인 20여명이 총검을 들고 집에 난입,강제로 군용 트럭에 싣고가 영산포소재 창고에 있는 15명의 여자와 나주에서 온 15명의 여자들과 함께 열차로 신의주,만주를 거쳐 천진주둔 일본군 히노마루부대로 끌고갔다.15명씩 한 조를 이뤄 임시로 지은 여러개의 가건물에 수용됐다.가건물속에서는 가마니로 칸(간)을 만들어 한사람씩 넣는 치욕적인 생활과 고통을 참다못해 목을 매거나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는 여자들도 있었다.
  • 일,경찰 「캄」파견/10월중 75명 규모

    【도쿄 연합】 일본 정부는 유엔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의경찰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오는 10월중 약 75명의 경찰관을 캄보디아에 파견키로 했다고 요미우리 (독매)신문이 30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이같이 전하고 일본 경찰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유엔이 내년 봄에 있을 캄보디아 총선거와 관련,『선거인 등록이 오는 10월부터 시작되므로 될수 있는 대로 빨리 일본경찰관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함에 따라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덧붙였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