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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학은 없다/강건일 지음(화제의 책)

    ◎과학에 대한 오해 실례들어 해부 우리나라에는 ‘신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뉴 에이지 사이언스(New Age Science)’에 대한 비평서. 1970년대 서양에서 시작된 뉴 에이지 과학은 과학정신을 부정하고 과학과 이성에서 벗어난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를 강조한다. 정신·물질 이원론이나 기계론적인 과학과는 달리 전일론적(全一論的)접근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 신과학의 관심 분야는 종교,철학,신비주의,보건,초심리학,생태학 등 무척 다양하다. 그들은 과학이 오늘날 지구의 온갖 문제를 초래한 위험한 도구라고 가르치며,상대주의적 과학론을 전파해 원시 미신을 과학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특히 무엇보다 과학적이어야할 의학 분야에 원시인의 마술이나 과학에 의해 이미 폐기된 고대인의 사유철학적 병인론(病因論)을 적용,미신의 암흑 속으로 몰아넣는다. 뉴 에이지 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신과학’으로 명명된데 대해 지은이(전 숙명여대 약대 교수)는 “갈릴레이의 ‘신과학’을 연상하게 하는 이 용어는 21세기의 과학이 ‘뉴 에이지 과학’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고 우려한다. 이 책은 뉴 에이지 추종자들의 과학에 대한 오해를 다양한 실례를 들어 밝힌다. 조상의 시신 근처에 수맥이 흐르면 자손들이 불운해지는가. 수맥의 영향은 일종의 ‘감응마술’로,이미지를 토대로 그 힘이 시공을 초월해 전달된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원시 미신일 뿐이라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지성사 상권 1만원,하권 1만3,000원.
  • 햇볕론 서설(金三雄 칼럼)

    북녘바람과 태양이 누가 더 센가로 말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쪽을 승자로 하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바람 차례가 먼저였다. 그러나 그 심한 돌풍은 나그네로 하여금 옷을 조여 입게 만들 뿐이었다. 더욱 세게 불자 추위로 몸이 단 나그네는 가외로 외투까지 걸쳤다. 마침내 바람은 싫증이 나서 차례를 태양에게로 돌렸다. 처음에 그저 따뜻한 정도로만 햇볕을 주어 나그네는 외투를 벗었다. 이어서 아주 뜨겁게 열을 내어 더위를 이기지 못한 나그네는 옷을 벗었고,근처의 강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 (유종호 옮김.‘이솝전집’) 요즘 시정의 화두는 단연 ‘햇볕론’이다.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언론도 동시적으로 나타난‘소떼방북’과 북한잠수정침투사건,정부의 대응과 관련하여 햇볕론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햇볕정책이 철의 장막 제거 金大中 대통령은 이같은 한반도의 구조적 모순현상에 30일 “우리의 대북정책은 확고한 안보태세위에 대북3원칙 즉 무력도발 불용,흡수통일반대,협력교류정책을 견지해 나갈 것”이라고 잠수정사건 때문에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드는 것은 추운바람(강경정책)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유화정책)이라는 이솝우화가 金大中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金대통령은 야당시절인 96년 10월 베이징에서 미국과 일본의 북한정책에 대해 괄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미국이 햇볕정책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것은 손자병법에도 없는 승리다. 중국과 베트남의 개방도 미국의 정책적 성공이다. 북한도 金日成때 이미 개방정책을 세웠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소프트랜딩 정책도 성공할 것이다. 중국 베트남에서 성공했는데 북한에서 못하겠는가. 우리는 안보태세를 갖추면서 북한의 온건 개방세력을 강화하고 강경세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펴야한다.” 햇볕정책의 기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金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 3단계 통일론의 첫 단계 방법론이라 하겠다. 평화공존과 평화교류의 과도단계에서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이 햇볕론인 셈이다. 미국의 대공산권 정책기조는 포용정책이었다. 개방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햇볕’으로 철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소련과 동구를 붕괴시켰으며 중국의 죽의 장막도 거두었다. 반면에 강풍정책을 편 쿠바 베트남 북한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金대통령은 이와 같은 국제정치의 흐름을 간파하고 이른바 ‘햇볕론’을 제시한 것이다. ○오슬로 연설에서 처음 제시 金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이사장으로 통일문제를 연구하면서 대학강연 등을 통해 햇볕론을 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94년 2월 1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평화연구협회 주최 세미나 연설에서 였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우리는 북한내 온건주의자의 위치를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과거 공산주의자와의 대처 경험에서 교훈­이 교훈은 이솝우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을 배워야 한다. 햇볕론에 의해 서방은 결국 구소련연방과 동유럽 공산제국의 몰락으로 종결된 동방과의 보편적관계 경제협력 문화교류를 추진했다”고 처음으로 햇볕론을 제시했다. 金대통령의 햇볕론은 지금 북한잠수정침투사건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북한 강경세력이 햇볕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계획된 도발일 수도 있다. 또 내부적으로 보수세력과 야당은 북한의 군사도발에 합당한 대응은 않고 자기도취적인 햇볕론만 반복한다고 비판한다. 분단을 고착화하는 작용을 할 소지도 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렇지만 구정권처럼 냉온탕을 넘나드는 식의 대북정책으로는 민족문제의 해결이 어렵다. 외국투자가들의 발길도 돌리게 된다. 동독도 망하기 직전까지 서독에 간첩을 보냈다. 햇볕정책은 일방적 유화책이 아니라 북한의 이중성에 대비하면서 남북간의 평화 화해 협력시대를 여는 기조가 돼야 한다.
  • 국민 곁으로 돌아온 白凡/49주기 추모제 의미

    ◎김 대통령 대북정책 백범 통일론과 공통점/이수성 기념사업회장 “정신 이어받자” 강조 “열매를 맺으려고 지는 꽃 어이리까.” 시인 李殷相의 추도가(追悼歌)와 같이 金九 선생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그의 큰 뜻과 정신은 민족과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金九 선생을 죽인 집권세력은 그의 독립운동과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국민들 로부터 유리시키려고 했다.그러나 그 집권세력들은 무대뒤로 사라지고 새정부에 의해 백범은 다시 국민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국민곁으로 돌아온 백범의 49주기 추모식이 26일 서울에 있는 효창공원에 서 열렸다.올해의 추모식은 여느때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권력과 국민이 함께 추모하는 의미있는 행사였다.과거의 추모식은 권력과 국민이 괴리된 상태 에서 열린 기형적 모습이었다.李承晩 정부와 군사정권은 국민이 가장 존경하 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추모식을 외면했다.국민들만의 추모식이었다.국가 최고지도자로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한 사람은 金泳三 대통령이 처음이었다.金大中 대통령도 이날 金九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金대통령의 참배에 이어 추모식이 열렸다.李壽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추모식에서 “지금부터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할 일은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대통합과 자랑스런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서울신문이 ‘정직한 여가 되찾기’ 일환으로 6월에 집중 보도한 백범 재조명작업도 金九 선생을 올바로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기념협회의 홍소연 총무주임이 말했다. 백범의 통일론과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백범이 넘었던 38선을 반세기만에 鄭周永 현 대명예회장이 최근 다시 넘고 금강산개발에 합의하는 등 남북관계가 화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李殷相의 말대로 꽂은 졌으나 그 꽃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白凡 기념사업협회 신임회장 李壽成씨

    ◎白凡 민족사랑 널리 알리겠다”/南北 화해는 白凡 평화통일론의 구현/국민 모금운동 벌여 기념관 건립 계획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새 회장으로 선출된 李壽成 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2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의 방북과 금강산개발 협정체결 등 남북화해 움직임은 金九 선생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이 반세기만에 다시 구현되는 것으로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주요 과제는. ▲金九 선생의 사상과 생활철학을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 ‘애국심’이라는 단어가 시대에 뒤떨어진 말처럼 들리는 잘못된 오늘의 현실에서 백범의 헌신적 민족사랑 정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세속적인 자신의 이익보다 언제나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 백범의 생활철학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다. ­백범기념협회 운영 방안은. ▲백범 관련 사업과 협회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회원수를 늘리고 정부와도 긴밀한 협조를 하겠다. 백범기념협회 회원은 독립유공자 자녀,백범 흠모자 등을 포함,현재 14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백범기념관 건립문제는. ▲기념관은 전국민의 모금운동을 통한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져야 한다. 장소는 경교장(京橋莊) 등 金九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장소는 관계자 및 정부와도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념관은 백범사상과 민족사랑 정신을 배우는 훌륭한 교육장소가 될 것이다. ­金九 선생 등 독립투사들이 안장돼 있는 효창원의 성역화 작업은. ▲金九 선생 묘역등은 국립묘지 수준으로 성역화돼야 한다. 효창원을 독립운동이나 민족의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범 재평가에 대해서는. ▲백범은 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다. 세계의 영웅중 일부는 과대 평가된 인물도 있으나 金九 선생은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다. 과거의 정권은 백범을 국민으로부터 유리시키려고 시도했다. 국민은 백범을 존경했으나 집권세력은 그를 의도적으로 평가절하 했다. 그러나 새정부는 백범을 다시 국민의 편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회장을맡게 된 동기는. ▲처음에는 여러번 고사했다. 부회장은 몰라도 감히 회장은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6월18일 회장에 선출됐다. 金九 선생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님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金九 선생을 처음 만났다. 金九 선생은 ‘李壽成 學仁’이라고 쓴 백범일지를 주셨다. 그후 백범일지를 100번이상 읽었다.
  • 48년 白凡 북행길을 가다(휴전선 해빙의 시대 오는가:上)

    ◎소떼 넘은 분단 현장 和解의 瑞氣/잇단 장성회담·투자설명회 “변화 실감”/임진강나루 서쪽 5㎞엔 통일대교 관통/긴장·대결의 무대 판문점 화해·교류의 場으로 변화/평화로운 비무장지대 산새·짐승의 낙원으로/50년전 白凡의 북행길 鄭 회장 대남방송속 귀국/역사에 묻힌 평화통일론 DJ 햇볕론으로 재구현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의 최근 소떼몰이 방북과 그로 인한 올가을 금강산 관광에의 기대는 온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6·25 48주년 아침,또다시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새겨지는 때이지만 여느해와는 다른 희망과 기대가 샘솟고 있다. 서울신문은 그 남북해빙(解氷)의 기운을 전하기 위해 당시 남북간 민족의 교통로였던 판문점 일대와 철원,고성을 찾았다. 이는 백범 金九 선생이 민족통일의 염원을 안고 북으로 향했던 50주년 되는 해여서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분단 50년. 그 긴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나온 분단의 땅에도 마침내 ‘화해의 봄’은 오는가. 불행한 식민지시대의 시인 이상화의 소망대로 1945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그러나 그 봄은 너무나 짧았다. 한반도는 곧 분단의 긴 겨울로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은 분단의 벽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이제 분단의 겨울을 헤치고 ‘화해의 봄기운’이 판문점으로부터 피어오르고 있다. 이같은 새로운 변화의 기운은 분단의 비극을 증언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긴박한 갈등과 첨예한 대결의 무대였던 판문점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화해와 교류의 장소로 그 기능과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판문점의 변화는 鄭周永 명예회장이 16일 소떼 500마리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는 새로운 풍속도로 나타났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판문점의 긴장이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새정부의 ‘햇볕정책’에 의해 화해의 따듯한 분위기로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그가 돌아오던 23일의 판문점은 마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 된 듯 북적거렸다. 판문점에 있는 군사정전위 회의실에서도 이날 7년만에 유엔사와 북한군 장성들이 마주 앉았다. 군사대화 채널이 다시 열린 것이다. 또한 중립국감독위 캠프 스위스측 건물에서는 120여명의 외국 투자가들이 참석하는투자설명회가 열렸다. 놀라운 변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판문점으로부터 남서쪽 8㎞에 있는 도라전망대. 북한군 초소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남과 북이 푸르름으로 이어진 비무장지대(DMZ)는 평화로웠다. 산새와 짐승들은 울창한 삼림 속에 그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원초적 평화와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 평화로움 속에도 긴장만을 느낄뿐이었다. 때마침 다시 시작된 북한의 대남방송은 남북간의 긴장과 대결의 심각함을 알려주었다. 냉전이 20세기 후반 긴장 속에 세계평화를 유지했듯이 냉전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DMZ에는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대남방송은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실패한 혁명론을 낡은 레코드판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남방송 속에 판문점을 넘어온 鄭명예회장은 남북경제교류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가 갔던 길은 50년전 金九 선생이 갔던 길이다. 백범은 남북 협상을 위해 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 金九 선생은 그 당시 지금의 통일대교로부터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고 그와 함께 평양에 갔던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은 말했다. 그는 백범이 50년전 임진강을 건넜던 나루터를 22일 다시 찾았다. “金九 선생의 평양 방문은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통일을 위해 우리 스스로가 노력했다는 소중한 역사”라고 金 전부회장은 말했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은 그러나 빛을 보지 못해왔다. 백범을 죽인 일그러진 권력은 그의 통일론을 역사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백범의 통일론은 민족의 자주적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는 金大中 대통령에 의해 다시 구현되고 있다. 남북관계는 그러나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북한의 호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鄭명예회장의 방북과 판문점에서의 대화·교류를 허용하면서도 같은 시간 동해안에는 북한의 잠수함이 있었다. 북한의 이중전략은 남북관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화해를 어렵게 해왔다. 남북관계는 그동안 화해와 단절이 반복돼 왔다. 해빙의 조짐이 있다가도 돌발사건이 발생하면 다시 남북관계는 얼어붙곤했다. 남북관계에서 낭만적 환상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러나 70년·80년대의 남북화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이라는 큰 틀 속의 남북관계였기 때문에 냉전이라는 이념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한반도의 냉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세계사적인 냉전은 끝났다. 국제정세가 크게 바뀌면서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해졌다. 金大中 대통령은 국제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그것은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을 바탕으로 한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와 화해다. 햇볕정책은 鄭명예회장의 방북과 금강산개발 합의라는 열매를 맺었다. 鄭씨가 달린 통일대교로부터 판문점까지 이어진 새로운 도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져 통일의 희망을 갖게 한다. 鄭씨도 통일의 가능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도라전망대 근처 통일촌에 사는 윤여원(31)씨도 “鄭명예회장의 방북등 남북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화해와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라전망대 바로 앞의 DMZ는 한국전쟁의 포화로 ‘죽음의 땅’이 되었던 곳이다. 그 폐허가 지금은 자연의 보고로 바뀌었다. 위대한 자연의 복원력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낙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남과 북의 단절도 자연의 복원과 같이 화해로 이어질 날이 다가오는 듯하다. ◎白凡북행 수행 金祐銓씨/“鄭周永씨 방북은 역사의 진전”/새정부 對北유화정책 매우 반가운 일/그분의 평화통일노력 재평가 중요 징표 金九 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이 22일 백범이 건넜던 임진강 나루터를 50년만에 다시 찾았다. “金九 선생이 통일의 큰 뜻을 품고 건넜던 임진강 나루터에 다시오니 감개 무량합니다.” 광복군 출신으로 백범을 가까이에서 모신 金 전부회장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金九 선생의 소원했던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이 다시 간 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金九 선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지도자들이 노력하면 통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분단상황은 그 때보다 훨씬 견고합 니다. 그러한 분단상황이 金大中 대통령의 유화적 대북정책으로 해빙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그것은 金九 선생의 평화통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입니다.” 金전부회장은 나루터 주변이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50년전에는 주변에 집도 별로 없어 황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어렵게 평양을 방문하는 길이라 더욱 쓸쓸한 마음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나루터는 군부대의 통제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주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화려한 건물들은 대부분 음식점이다. 임진강 특산물인 황복과 민물장어 간판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나루터 근처는 새로운 도로공사로 어수선했다. 그러나 임진강은 민족의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동시에 안은채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 白凡 재조명:4·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위대한 白凡사상 새정부서 법통 계승”/통일염원 안고 넘었던 38선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려/京橋莊 반드시 복원… 문화재로 지정 영구보존 해야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 일환으로 백범 金九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도 잘못된 평가를 받아온 金九 선생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金九 선생의 업적·사상·통일론 등과 이들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백범 재조명을 마무리하는 좌담회를 통해 알아본다. 서울신문 金三雄 주필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에는 金九 선생 아들 金信 장군,저명한 백범연구가인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과 李萬烈 숙대교수(한국사 전공)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金信(金九 선생 아들) 金祐銓(전 광복회부회장) 李萬烈(숙명여대 교수) 金三雄(사회·주필) ▲金三雄 주필=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은지 50년만에 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정황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명예회장이 다시 간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백범이 서거한지 거의 50년만에 백범노선과 같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중 미국도 대북 제재중 일부를 해제할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이러한 변화로 백범노선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백범사상과 통일론 등에 대해 우선 논의해 보죠. ○좌·우파 모두 포용… 문화국가 건설 ▲李萬烈 교수=백범은 동학·유학·불교·기독교 등을 섭렵하며 그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다원적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 여러 종교를 민족주의로 수렴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백범은 또 좌파세력과 민족주의 우파의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한 포용력을 배경으로 독립과 통일,더 나아가 문화국가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완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차원 더 높은 문화국가는 더욱 어렵다고 인식했죠.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은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예는 세계사에도 없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역할과 위치는 어떻습니까. ▲金祐銓 부회장=임시정부에서 백범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죠. ▲金주필=그러나 백범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李교수=백범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죠. 통일지향 세력이 아니라 남북분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묵살했습니다. 집권세력은 백범의 업적도 평가절하했죠. 백범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긴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金주필=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후에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죠. 해방공간에서 백범이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金부회장=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은 잡았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었죠. 5·10선거 후에도 국회에서 金九 선생 지지가 많았어요. 남북협상 때도 108명의 문화인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金九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아 빛을 보지 못한것 뿐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백범을 본 오류의 결과입니다. ▲金信 장군=주도권 문제와 관련,金부회장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어요.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강요로 개인 신분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반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죠. 친일세력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일본에 아부했듯이 그들은 미군정에 아부했고 李承晩에게도 아부했습니다. 李박사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죠.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가족에게 고통을주고 개인과 조상을 희생하면서 싸워온 독립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때 친일파 형사들에게 잡혀갔던 독립투사들이 해방후에 다시 그들에게 잡혀가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해방후 당연히 벌을 받고 독립투사들은 보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죠. 그때 잘못된 역사 청산작업 때문에 현대사가 일그러진 것입니다. ▲金주필=백범은 분단을 거부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남북지도자 공동성명 발표 큰 의미 ▲金부회장=남북협상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지만 백범이 관심을 가진 것은 남북지도자 회담이었어요. 金九 선생,金奎植 박사,金枓奉,金日成 등 4명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회담후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죠.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명시하고 있어요. 남북지도자가 만나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도 적극 반대 ▲金장군=평양에서 아버님이 연설하실 때 남쪽만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열렬한 공산당식 박수가 터져나왔죠. 그러나 북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고 하시자 장내는 조용했습니다. 북쪽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는 것은 언론에도 일체 보도되지 않았어요. 북측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만을 발표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 정신을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연계시킬수 있을까요. ▲金장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뿐만 아니라 좌파와 무정부 인사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충칭(重慶)으로 옮겨왔을 때도 연합정부였죠. 연합정부였던 임시정부의 법통과 아버님의 통일론을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독립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일은 비현실적이라는 비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립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통일도 지금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金주필=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승국으로 대접받고 전후 처리문제에서도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그러나 연합국은 그러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李교수=프랑스는 소극적이나마 임시정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영국 등은 인정하지 않았죠. 미국은 임시정부가 분열돼 있기 때문에 어느 정부를 인정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사실은 독립운동때 임시정부가 중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때문이었죠. ▲金주필=시해되던 날은 일요일이었는 데도 金信 장군은 그날 옹진에 가셨죠. 암살음해 세력이 金장군을 떼어놓기 위한 음모는 아니었나요. ▲金장군=유엔대표단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어요.어떤 음모가있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온 후 암살에 관한 여러가지 풍문이 많았고 그것들을 여러차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돌아가시기 이틀전에는 박동엽씨 등 2명이 경교장으로 찾아와 보다 안전한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도 했어요. 그말을 아버님께 전했으나 나는 떳떳하며 겁낼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념관 건립·학술상 제정 등 절실 ▲金주필=새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법통계승과 백범사상을 이어받을 사업을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백범 기념관 건립,전집 출판,학술상 제정,백범과 3열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성역화 작업 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념관 건립과 관련,李교수께서 말씀해 주시죠. ▲李교수=백범 기념관은 꼭 필요합니다. 서거 50주년(1999년)이나 2000년의 새 세기가 시작되기전 기념관이 지어져야 합니다.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을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자리일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곳은 통일로의 출발점입니다. 백범의 독립과 통일정신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죠. 효창공원도 국립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망월동 묘지는 이미 국립묘지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효창공원이 국립묘지 수준이 안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金주필=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문제는 어떻습니까. ▲金부회장=영구 보존을 위해 우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金주필=백범을 기념하는 독립상과 통일상 등을 만들면 어떨까요. ▲李교수=좋은 생각입니다.그러나 셋방살이도 꾸려가기 힘든 백범기념협회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죠. 상을 만들려면 백범의 이상인 독립국가·통일국가·문화국가를 상징하는 독립·통일·문화상을 만들고 차차 확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金주필=金九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 등이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 제2건국이라 할 수 있는 金大中 대통령 정부에 의해 이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남북의 화해와통일로 이어지도록 모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 연극 ‘김치국씨 환장하다’의 어설픈 해석/孫靜淑 기자(객석에서)

    ◎웃음과 통일·씁쓸한 만남 어느 날 신문을 펴들다 평생 모은 자기 돈 18억이 북한돕기에 기탁됐다는 기사를 발견하곤 대경실색하는 이북 출신 김밥장수 김치국씨.그날 이후 김씨는 출연하지도 않은 TV 토크쇼에서 ‘김밥통일론’을 역설하는 자기를 보질 않나,대공수사기관에 끌려가 간첩으로 몰리질 않나,환장할 곤경을 치른다. 연우무대가 1년반만에 내놓은 신작 ‘김치국씨 환장하다’(희곡 장소현,연출 최용훈)는 이젠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월남 1세대를 내세워 분단 해법을 모색해 보자는 작품.심각한 주제지만 등장인물들과 그 얽혀들어가는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객석엔 폭소가 끊이질 않는다.‘실컷 웃고 나니 뭔가 찡하게 남더라’는 효과를 노린 듯.연극은 효과 달성에 성공했을까.만일 그렇다고 말하기가 썩 내키지 않는다면 그건 연극의 문제틀 탓이다. 작품엔 90년대 대중문화에서 빌려온 기호들이 범람한다.영화 ‘미션 임파서블’ 주제음악이 깔리고 ‘터치터치 공공뭣’하는 국제전화 광고,‘똑사세요’라는 드라마속 떡장수 어머니의 말씨,‘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 어투 등이 계속 삽입된다.이들은 연극 ‘폭소지수’를 높이기도 하지만 통일문제에 90년대 옷을 입히는 분장사기도 하다.통일이란 어쨌건 구닥다리 숙제.이를 관객 감각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것. 그런데 90년대 감각과 통일문제의 만남은 어째 행복해 뵈질 않는다.90년대 기호에 70∼80년대식 문제의식을 담으려니 삐걱대는 것이다. 치국씨를 둘러싼 곤경은 북쪽의 쌍둥이형 탓.해방 전부터 망나니짓을 도맡아 한 뒤 파편은 몽땅 치국씨에게 뒤집어씌운 형.그가 이젠 남파간첩으로 따라와서 그 죄까지 떠넘긴 판.치국씨는 감옥에 갇혀 증오에 치를 떤다.그런데 치국씨 꿈에 나타난,북에 두고 온 떡장수 어머니가 애원한다.“왜 그리 형을 미워하느냐.너흰 한 씨알에서 나온 쌍둥이다.둘이 모여 오순도순 살면,그것이 사는 것 아니냐”. 배를 잡던 객석이 잠시 숙연해지지만 그뿐.극은 뻔히 예측할 수 있는 결론을 향해 치닫고 막이 내리면 남는 건 웃음의 잔해뿐이다.80년대 너무나도 흔히 봐 온 ‘화해’의 줄거리는 공허하고 옛 안기부의 용공조작 장면도 유행지난 옷처럼 을씨년스럽다.지금은 냉전이 경제전쟁으로 재편되고 새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때.한때 가장 앞장서 통일의 지렛대가 됐던 문화계는 좀더 정치(精緻)한 새틀을 짜야 하지 아닐까.물론 연극 홀로 감당할 몫은 아니겠지만.연극은 21일 막을 내린 뒤 쉬었다가 27일 다시 올려 7월26일까지 계속.744­7090.
  • 白凡 재조명:3­1(정직한 역사 되찾기)

    ◎통일사상의 정수/“自主없는 통일 허구” 날로 새로워/列强 간섭 배제하고 ‘민족의 힘으로’ 역설/지역·이념 뛰어넘는 화합의 정신 일깨워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지배하던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한반도의 냉전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다.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시대의 흐름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의 벽은 넘지 못했다.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을 넘어 화해와 통일의 길로 가는 일은 이 시대 우리들의 소명이다.그 일의 출발점을 金九 선생의 민족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론에서 찾으면 어떨까. 백범이 추구한 이상의 완결편은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그는 생의 마지막 부분을 민족통일을 위해 바쳤다.1948년 2월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백범은 냉전이라는 불리한 국제정세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구성하려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북협상을 위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었다.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했다.북측에 의해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그러나 남북협상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민족의 자주적 힘에 의한 평화통일 노력 그 자체도 중요했다.민족의 운명을 외세에만 맡기지 않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 쓴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역사다. 백범은 한반도가 분단의 위기에 빠지자 정치·이념적인 반대세력과도 손을 잡았다.그의 통일노력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백범은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그의 우려는 모두 현실화됐다.한반도에는 이념적 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쪽에는 정치·지역감정에 의한 또 하나의 분단이 있다.그 ‘마음의 분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다시 확인됐다. 지역감정·혈연·이념 등에 의한 분열은 민족의 화합으로 바뀌어야 한다.백범의 애국적 민족사랑은 좋은 전환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념과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백범의 민족사랑 정신은 세속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오늘의 유효한 통일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한반도 통일은 물론 우리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미국·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변수다.강대국들은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노력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백범의 자주적 통일론이 오늘의 통일정책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 과거와 다른 차원의 남북교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그러한 변화를 남북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동안 ‘박제’됐던 백범의 민족화해와 통일론에 생명을 불어넣어현재화해야 하지 않을까. 백범은 ‘今日我行跡(오늘 내가 걸어간 자국은) 遂作後人程(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서산대사의 시를 휘호로 즐겨 썼다.그가 넘었던 38선을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6일 다시 넘는다.반세기만에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그의 더 큰 소망인 민족의 화해와 통일도 가까워질 것이다. ◎DJ와의 인연/상대후보 백범암살 배후 드러나 3選 의원에/효창공원 골프연습장 공사 중단시켜 “報恩”/기념사업회 이사… 동상 건립 적극 재정 지원 金九 선생과 金大中 대통령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민족의 큰 지도자 백범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金대통령은 20대 초반이었다.그러나 두사람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그들의 인연은 60년대 중반 金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가 존경하던 백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며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67년 7대 총선에서 힘겨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朴正熙 정권은 야당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당시 金大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집권당인 공화당의 물량공세로 金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목포는 흥청거렸다. 집권당의 전략적인 집중 공세로 金대통령의 3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상대방 후보였던 김병삼(당시헌병 대위)씨가 백범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金대통령측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金洙振(66·현재 국민회의 당총재 특보)씨는 선거 열흘전쯤 김병삼씨 관련 내용을 담은 책을 준비했던 金龍熙(77)씨를 찾아가 金大中 후보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상대방 후보가 김병삼이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기로 했다.金씨는 李承晩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를 잡아 검찰에 넘긴 사람이다.그는 안두희의 고백과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병삼씨의 관련 내용을 담은 ‘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을 준비했다. 金大中 후보 진영은 절판됐던 이책을 비밀리에 다시 제작했다.투표 나흘전인 6월4일 목포역에 15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박순천 초대 신민당당수는 “공화당후보 김병삼씨는 백범암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입니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폭로했다.‘이것이 진상이다’라는 책 3만5,000부가 즉석에 배포됐다.선거분위기는 급변했다.6월8일 투표결과 金大中 후보가 당선됐다. 金大中 대통령은 백범 추모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그때의 간접적 도움 때문에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백범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67년 서울시가 효창공원내 백범묘소와 3의사(義士) 묘소중간에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했었다.국회건설위 소속이었던 그는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는 백범기념사업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매년 백범 추모제에 참석해 왔다.남산에 백범동상을 세울 때도 자금지원을 했다. ◎초라한 ‘묘역 성역화’/담장교체·소나무 식재 기념관 건립 예산 부족/구청 녹지과 관리맡아 “국가관리 필요” 여론 金九 선생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다.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이동녕·차이석·조성환 선생의 묘도 함께 있다.많은 사람들은 최고 지도자였던 백범을 비롯 7명의 애국지사가 안장돼 있는 선열들의 묘를 국립묘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금 효창공원의 장·단기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단기계획(97년∼99년)에 따라 담장 교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용산구청의 유동렬씨는 1,326m에 이르는 담장공사는 연말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나무 600그루도 새로 심었다.호국이념을 상징하는 대형 조형물(높이 11.7m 폭3m)도 공원입구에 세울 예정이다.장기계획은 7명의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다.하지만 예산이 문제라고 유씨는 말한다. 성역화 작업이 진행중인 효창공원은 그러나 국립 현충원(국립묘지)과 비교할 때 너무도 초라하다.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하지만 효창공원은 용산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관리한다.기능·고용직 공무원 7명이 관리인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金九 선생이 귀국후 45년 12월부터 49년 6월 암살당할 때까지 3년6개월간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했던 경교장(京橋莊)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세계화시대의 백범/都珍淳 창원대교수·한국현대사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엄항섭은 그의 서거를 ‘달은 하나지만 뭇 강에 자신의 모습을 도장처럼 박아내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표현하였다.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길 민족주의자 백범의 월인천강은 남아 있는가. ○개방과 주체 선택 강요 한반도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에 휩싸여 있어 선진 문물의 수입 등에서 적지 않은 장점도 있지만,사대와 식민 그리고 분단의 역사가 증거하듯 늘 강한 원심력이 작용하였다.따라서 한반도의 ‘역사적 화두’는 늘 대외적 개방과 민족적 주체를 겸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개 어느 하나로 편향되는 경향을 띄었고,그 극단에 민족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개방과 선진만 쫓아가면 사대·식민·분열의 굴레로,주체와 자주만 강조하면 후진과 망국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지난해 말 나라가 환란(換亂)위기에 빠진 이후,이제 우리는 진정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른다.삼척동자도 IMF을 운위하고,뉴스는 언제나뉴욕 월가(Wall Street)의 동향을 전하며,국내 증시 또한 이에 따라 춤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민족현실에 굳건히 뿌리 내린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때문에 작금의 현실은 백범이나 민족주의를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과거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 현재적 생명력으로 되살려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남북의 화합과 통일이라고,누구나 이야기한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관습적·수식적 문구(文句)에 지나지 않고 생활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하기 위해 최근 외국의 한반도 문제 권위자나 기관의 진단을 들어보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라느니,‘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유엔 관리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느니,‘남·북한이 민주적 분단관리체제로 영연방과 같은 느슨한 연방(confederation)이 필요하다’는 등의 언급은 다름아닌 ‘분단체제에 대한 균형적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근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적 발언’이 아니라,역사와 구조를 지닌 ‘전략적 개념’들이다.북한이 강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통일하려 했던 한국전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소련·동구권의 붕괴 이후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도 북한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강력하고 일방적인 통일 한반도의 출현을 열강들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분명 ‘냉전적 대립’에서 ‘평화적 교류’로 나아가고 있지만,그것이 통일의 기초가 될지 분단의 장기 지속을 초래할 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두번 깨어나야 한다.먼저 남북 사이에 누가누구를 삼킬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하며,다음에는 평화를 넘어 통일에 이르는 길은 자주적 노력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강대국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보장이다. ○강대국 역할 제한적 해방 직후 백범도 좌우·남북의 체제 대립적 정치구도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민족 분단의 위기가 박두하는 것을 목도하면서,그는 좌우·남북 대립의 구도 속에서 유실되었던 민족문제에 다시 주목하여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다.민족을 위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이것이야 말로 백범이 남긴 월인천강의 핵심인 것이다.이후 백범이 노래한 시와 글도 모두 ‘자주적 평화통일’로 요약되거니와,그의 죽음도,그리하여 그의 부활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백범의 모습은 어떠한가.정치적 입지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백범을 거론하면서도,그 생애의 총 귀결점인 ‘평화통일의 민족적 백범’은 허다하게 유실되어 있는 실정이다.백범은 자신의 미진한 바를 민족 앞에 바로 세웠으되,추앙한다는 우리는 백범를 다시 거꾸로 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 “나의 오늘은 세계민주지도자의 승리”/金 대통령 訪美­이모저모

    ◎수행원에 “지금이 투자 적기 홍보하라”/아난,통일론 책 선물 받고 “시행은 내가” 【뉴욕=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7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뉴욕에 도착,8박9일간의 미국 국빈방문 공식일정을 시작했다.金대통령은 숙소인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 여장을 푼 뒤 곧 유엔본부를 방문,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을 면담하고 국제인권연맹이 수여하는 인권상을 수상하는 등 첫날부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유엔사무총장 면담◁ ○…金대통령은 이날 상오 7시부터 45분동안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과 인도·파키스탄 핵문제와 북한문제를 놓고 환담했다.金대통령은 환담을 마치면서 자신의 저서인 ‘3단계 통일론’에 직접 서명한뒤선물했으며,아난 총장은 “책은 대통령이 썼지만,시행은 내가 하겠다”고 답례했다. ▲아난 총장=중요한 시기에 한국의 대통령이 돼 경제적으로 하기 어려운 결정을 해 온 것으로 안다.그런 결정의 결실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위기극복 노력이 성공하길 기원한다. ▲金대통령=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인도·파키스탄의 핵실험 실시와 관련해 결의안이 채택된 것으로 안다.인도와 파키스탄이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촉구한다.북한이 얼마전 핵문제로 국제적 우려를 야기시킨 바 있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아난 총장=핵비확산 노력이 문서로써 이뤄질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핵실험이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무기화되어서는 안된다. ▲金대통령=주유엔대사를 통해 인도·파키스탄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하도록 훈령을 내렸다.우리는 북한 핵문제에 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이미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채택했다.미국과 북한간 제네바협약에 따라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대신 우리가 70%의 경비를 부담하면서 3개의 경수로지원 사업을 진행중이다.우리는 븍한에 지원할 것은 지원하는 양면정책이 지금까지는 매우 효과적이라고 자평한다. ▲아난 총장=유엔입장에서는 한반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바란다.분단상태가 오래 가서는 안된다. ▲金대통령=남북간 4년만에 베이징에서 이뤄진 정부관계자간접촉이 별로 성과는 없었으나 대화를 가진 것에 의미를 둔다.우리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많은 경제인과 문화·예술인이 북한을 방문하거나 방문할 예정이다.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인중 한사람이 소 500마리를 몰고 북한을 가는데,CNN이 생중계한다고 한다.남북관계는 일관성을 유지해 화해·교류를 달성하고자 한다.우리는 그동안 북한에 ‘햇볕정책’을 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첫째는 지난 91년 남북합의서 채택 이후 북한의 金達玄 경제부총리가 지원을 거의 애걸하다시피 했는데,이루지 못했다.두번째는 카터 전 미대통령이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이 94년 金日成의 사망으로 열리지 못한 것이다.우리는 지금도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난 총장=유엔도 북한에 인도적인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모니터할 수 있다면 좀 더 도와줄 수 있을텐데 아쉽다. ▲金대통령=북한 농업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북한을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당사자는 한국이기 때문에 우리도 적극 참여하고자 한다.유엔은 한국을 탄생시킨 은인이고,6·25때 도와줘 고맙게 생각한다. ▷인권상 수상◁ ○…金대통령은 이에 앞서 숙소인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수상식 연설에서 “나의 정치적 생애와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을 갖고 있는 미국을 결코 잊지 않을 것”,“나의 오늘은 바로 여러분(국제인권연맹과 세계 모든 민주지도자들)의 승리” 등의 말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자신의 경제위기 극복노력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간접 호소했다. ▷경제외교◁ ○…金대통령은 또 수행원들과 8일 하오로 예정된 뉴욕증권거래소 연설문안을 재검토하면서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미국에 온 것은 투자유치를 위한 것”이라며 방미 초점이 ‘경제외교’에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고 朴智元 대변인이 전했다.金대통령은 “증권거래소 조찬연설 때 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미국측 인사들에게 한국의 경제개혁 조치들을 설명하고 지금이 대한 투자의 적기임을 적극 홍보해야 할 것”이라고 전수행원의 홍보요원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朴泰榮 산업자원장관에게 뉴욕에서 한국기업들이 주최하는 투자포럼에서 구체적인 상담이 이뤄지도록 적극 활동할 것을 ‘코치’하기도 했다. ▷기내 기자회견◁ ○…미국 도착에 앞서 金대통령은 기내 간담회에서 “이번 방미에선 무엇보다 경제외교에 가장 큰 역점을 둘 것”이라며 “한국의 경제회생이 미국과 아시아에도 이익이 되는 만큼 미국이 한국의 경제난 극복을 적극 지원해줘야 한다는 점을 솔직히 얘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또 “미국투자가들에게도 한국의 새정부가 집권 100일만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투자환경을 개선했음을 설명,상호이익을 위해 한국에 투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 “무엇보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 실천해 나가는 모범이 되겠다는 의지를 전할 것”이라고 밝히고 한반도 평화정착과 대북관계 발전 문제도 주요의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야당총재로서 미국을 방문하다 대통령이 돼서 방문하게 된 감회를 묻자 金대통령은 “나보다도 미국의 많은 내 친구들이 그동안은 항상 나를 걱정해 주는 입장이었는데 아마 이번에는 신기하고 감회가 클 것”이라고 말해 ‘미국 친구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내비쳤다.
  • 白凡 재조명:1/金九 연구 어디까지(정직한 역사 되찾기)

    ◎그의 죽음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참역사의 불꽃 스러지고/식민유산 씻을 주체 상실 평화통일론 어둠속 유배/국가차원 연구후원 全無 이젠 정당한 평가 필요 백범 金九 선생은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다.순수한 열정으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했다.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독립후에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1949년 6월26일 암살됐다.타계한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면 현대사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권력은 그를 왜곡했다.이제 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한다.정직한 역사를 되찾기 위해 金九 선생을 재조명한다. 어둠의 시대에 등불이었던 민족의 큰 스승 백범 金九.그는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끈질긴 생명력으로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었다.그의 헌신적 민족사랑은 조국독립이라는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그러나 그 불빛은 정의의 역사로 승화되지 못한 채 일그러진 권력의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그의 비극적 죽음은 ‘정의의 역사’가 현실에서 패배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됐다.암살범은 일본인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같은 민족이었다.그러나 ‘암살범’은 안두희라는 개인이 아니었다.그는 거대한 음모의 한낱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金九 선생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에 희생된 것이다.권력의 하수인이었던 안두희의 총성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결국 잘못된 현대사에서 파생된 권력의 폭력은 5·18 광주민주항쟁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金九 선생을 죽인 권력과 친일세력들은 그를 낡은 역사속에 묻어두려했다.그들은 金九 선생의 최고 가치였던 독립과 민족통일론을 매도했다.그의 평화통일론은 냉전체제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그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현실에서의 ‘패배자’로 왜곡됐다.자유당정권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출판도 금지시켰다. 그는 朴正熙 대통령과 그이후 全斗煥·盧泰愚 정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군사정권들은냉전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백범의 민족통일론을 외면했다”고 창원대학의 都珍淳 교수(한국사)는 말했다. 金九 선생을 죽게한 일그러진 현대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현대사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마땅히 단죄됐어야 할 민족반역자 친일세력들이 해방후에도 부와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이다.백범의 죽음은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청산할 주도세력의 상실을 의미했다.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무너뜨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굴절된 현대사의 어둡고 긴 그림자 속에서도 백범은 일반대중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받아왔다.SBS방송 조사결과,金九 선생은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나타났다.그는 고대 신문이 실시한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백범은 국민들에게는 가장 존경을 받으면서도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현대사가 권력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백범연구는 활발할 수 없었다.문민정부에 들어와 그의 연구는좀더 적극화됐지만 국가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일부 정치세력이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면서도 그의 기념관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중국에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임시정부 국무회의까지 열렸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도 불투명하다.그가 서울에 설립했던 2개의 ‘초등학교’ 등 교육기관들은 흔적조차 없어졌다.백범 푸대접은 정통성이 약한 과거의 권력이 그의 영웅화를 두려워하고 그의 통일론과 분단상황이라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었다.그러나 냉전체제도 무너지고 金九 선생에 각별한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등장으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都교수는 예상한다. 金九 선생은 국가적 차원에서 올바른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이다.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백범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삶의 철학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미래에도 ‘등불’이 될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생애 ▲1876년(고종13년) 해주에서 탄생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동학접주가 됨 ▲1896년(21세) 황해도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인 쓰치다 때려 죽임. 해주감옥에 감금됐다 인천으로 이감 ▲1898년(23세) 인천감옥 탈옥.마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됨 ▲1904년(29세) 최준례와 결혼 ▲1909년(34세)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자로 체포됐다 석방 ▲1919년(44세)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1923년(48세)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1924년(49세) 부인 최준례 여사 사망 ▲1926년(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 ▲1930년(55세) 이동녕·안창호·조완구·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57세) 이봉창 의사의 日王 저격,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지휘.상하이에서 자싱(嘉興)으로 피신 ▲1933년(58세)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훈련반 설치 합의 ▲1935년(60세) 난징(南京)에 학생훈련소 설치 ▲1938년(63세) 호남성 장사로 피신.민족진영3당 통합을 논의하던중 이운환의 저격으로 중상 ▲1939년(64세) 어머니 곽낙원(81세) 여사 사망 ▲1940년(65세)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 ▲1941년(66세)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정.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대일선전포고 ▲1945년(70세) 중국에서 귀국.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 전개 ▲1947년(72세) 제2차 반탁운동 전개.인재 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개설 ▲1948년(73세)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발표.남북연석회의 위해 평양방문후 귀국 ▲1949년(74세) 백범학원·창암학원 설립.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1969년 남산에 동상 세움(서거 20주년)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cslee@seoul.co.kr
  • 方基中 연세대 교수 역사학대회 발표논문 요지

    ◎分斷史學 극복 ‘대등통일’ 전제돼야 역사교육연구회(회장 李範稷)가 주관하는 제41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서울광진구 건국대학교에서 열리고 있다.29일부터 시작해 30일까지 계속될 이번학술대회의 주제는 ‘통일과 역사교육’.다음은 연세대 사학과 方基中 교수가 발표한 논문 ‘통일문제와 한국사학의 과제’의 요지다. 남북한은 분단모순과 민족모순에서 비롯된 체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분단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통일국가와 사회체제를 수립해야 한다.역사학계에서도 현대 한국사학의 성격을 통일문제와 관련해 살펴보고 ‘통일사학론’의 진전을 위한 논점과 과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양체제 모두 불구의 발전 한반도의 분단은 이질적인 사회구성을 수반한 체제적 분단이자 민족모순의 산물이다.이러한 분단의 이중적 체제대립성은 분단형성 과정에서 배태됐다.분단이 장기화하면서 그 체제적 이질성은 정치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문화양식과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심화됐다.바로 이 분단모순에 의해 남북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불구적인 발전을 겪었고,이제는 남북 모두 체제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상황은 휴전협정에 기초한 준(準)전시상태라는 긴장관계에 기반을 둔다.그런 만큼 민족통일에 관한 일반원칙은 이같은 분단구조의 현실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신중하고 현실성 있게접근해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이미 합의된 통일의 일반원칙,즉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대등통일 원칙을 남과 북 양측에서 재확인하고 이에 부합하는 실제적인 정책과 여론조성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민족연대의식과 호혜주의에 입각,남북이 당면한 체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협조해야 한다.그리고 통일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한 전제로서 남북 각기 대등통일관에 부합한 민주주의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남북의 한국사학은 상호 대립적인 남북 양체제의 이념과 사상을 담지한 분단사학으로 전개됐다.여기서 분단성은 반공이념과 반제(反帝) 혁명이념에 입각한 남북의 지배적 역사인식의 이질성을 뜻한다. ○남북한 역사인식 이질적 상호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는 양자는 역사관과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면서 결과적으로 분단체제의 유지와 흡수통일론의 유포에 기여하고 있다.한편 남한사학 내의 극우반공주의 역사인식과 진보적 역사인식 사이의 이질성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남한사학의 경우 반공적 역사학·역사인식의 공세와 순(純)경제적 관점의 근대화론의 유포는 심화되는 반면,문화주의사학의 개방적·통일지향적 역사인식은 완화되고 있다.이러한 분단사학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단사학’ 극복의 일반원칙으로서 민족공존의 원리에 기초한 대등통일이라는 민족통일의 일반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또한 통일사회를 전망하는 민족통합의 역사이념으로서 평화적·개방적·민주적 민족주의인 ‘열린 민족주의’를 수용해야 한다. ○통일지향 역사교육 강화를 우리는 이 ‘열린 민족주의’에 민주주의 이념을 적용한 ‘민족적 민주주의’를 통일을 위한 역사이념으로 삼을 수 있다. 통일에 대비하는 학계의 노력은 북한사학과의 학술교류 논의로 대표된다.남북학술 교류를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계의 ‘통일사학’ 논의와 남북 학술교류를 전담하는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이 긴요하다.또 남북을 포괄한 현대사연구를 활성화하고 통일지향의 역사교육 특히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 對美 의존 외교(대한민국 50년:18)

    ◎“무기 얻어내라” 駐美 대사에 첫 훈령/李 대통령 직접 지시… 쌀 등 원조확보 총력/45∼60년 전쟁비용 포함 200억弗 끌어내/아이젠하워 1백만달러 더 주고 큰 생색/“북진통일 시도하면 원조 중단” 카드 활용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때부터 60년대초까지 한국은 안보·경제협력을 위해 대미의존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상실했던 대외경제관계 확립뿐 아니라 국내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도 원조외교는 우리의 절실한 목표였으며 이는 대부분 미국을 통해 충족될 수 밖에 없었다. ○48년 재산협정 체결 1950년대 한국은 미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조를 해 준 나라였다.이원조는 국가를 재건하는데 큰 힘이 됐다.물론 미국은 한국을 대소(對蘇) 및 대중(對中)전초기지로서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처럼 막대한 양의 원조를 해준 것도 사실이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직후 우리나라 대외경제관계의 기본과제는 신정부의 경제주권 확립,경제적 혼란의 극복과 민생안정을 이루기 위한 경제원조의 획득,대외통상증진 및 국제경제기구 가입 등이었다. 같은해 11월 ‘한·미 경제 및 재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군정으로부터 재산권 인수를 완료했고,또 12월10일에는 ‘한·미 경제원조협정’으로 3년간에 1억2천만달러의 원조를 받게 됐다. 또 1945년부터 1960년까지 15년동안 미군점령지역 구제계획(GARIOA),미경제협력처(ECA) 등 구호,전후복구 및 경제부흥을 위한 대한(對韓) 무상원조는 12억1천4백만달러였던데 비해 미국의 한국동란중 지출비용은 1백80억달러에 이르렀다.이같은 미국측의 원조는 신생 한국에 물질적 기반을 갖추게 해주었고 나아가 장차 한국의 공업화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국가경제부흥을 미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한국정부는 대미안보 및 경제관계를 우선적으로 공고히 하는데 모든 외교역량을 동원했다.이러한 대미 의존정책은 또한 안보를 보장받는데 있어서도 필요한 현실주의적인 정책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 2명 직원 업무 개시 미국의 무상원조는 그러나 긍정적 측면이외에 우리나라의 무역구조를 대미의존적 구조로전환시켰으며 또 한국농업의 정체를 가져와 농공간의 균형적발전을 저해했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당시 주미대사관도 원조외교를 중심으로 일을 해나갔다.49년 1월 張勉 박사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중 미국 대사로 발령을 받고 곧바로 워싱턴으로 갔다.張대사는 49년 3월25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외화사정을 이유로 외교관의 가족동반 부임이 금지되던 시절,주미한국대사관은 張대사와 韓豹頊 1등서기관 등 단 2명의 직원으로 업무를 개시했다.본국 정부와의 교신은 일반 전보를 이용했으며 모든 업무연락은 외무부를 거치지 않은채 경무대와 직접 했다.본국 훈령도 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내용은 경제원조와 안보관련이 대부분이었다. 李대통령이 주미대사관에 처음으로 내린 임무는 무기원조였다.李대통령은 훈령에서 “무기원조가 절실함을 설득하고 많은 액수의 원조를 얻을 것”을 지시했다.당시 林炳稷 외무장관도 “이북이 소련제 탱크로 중무장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적화는 시간문제”라며 무초초대 주한미대사와 윌리엄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에게 무기원조를 줄기차게 요청했다.이처럼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1954년 7월 李承晩·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간에 열린 최초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당시 한·미 정상회담의 회의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54년 7월에 정상회담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1955년 회계연도에 반영된 7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 및 직접군사원조사업을 통해 계속적으로 돕는다.이 액수는 당초 미정부가 같은 회계연도에 고려했던 액수보다 1백만달러 이상이 초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정상회담에서 1백만달러의 원조증액을 생색낼만큼 한국의 절박한 사정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도 했다.50년 1월 윌리엄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유엔한국위원단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정부가 만일 북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경우 미국정부는 모든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한다는 통고를 본관은 받고 있으며 미군이 남한으로부터 철수할때 방위용의 무기만을 양도한 것은 한국정부가 국토통일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시작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가 무력 북진통일론을 밀고 나가 미군이 본의아니게 전쟁에 휩쓸리는 사태를 경계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협수단으로 경제원조 중단카드를 사용했던 것이다. ○70년대 통상외교 전환 한편 정부수립후 한국전쟁때까지 정부는 인접국인 일본과의 대외통상을 시도하기도 했다.전통적으로 통상관계가 밀접했던 일본과의 교역을 잠정적으로나마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로 50년 6월2일 일본을 대신한 미 극동사령부 당국과 한·일 잠정무역협정 및 한·일 재정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또 미국과는 시장개척을 목적으로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다.이같은 원조위주의 경제외교는 60∼70년대 우리 정부가 수출주도형 경제의 틀을 잡으면서 수출 제일주의 통상외교로 전환했으며 80년대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미국의 통상압력이 본격화돼 이에 대항하는 외교로 이어졌다. ◎韓豹頊 前 유엔대사/“美 국무성 드나들며 끈질기게 원조 요청”/어려운 국내경제 설명 유일 정부 홍보에 주력/원조안 美 의회 否決에 국무성 설득해 되살려 “張勉 대사와 저,둘이서 미 국무성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를 펼쳤습니다” 張대사와 함께 49년 주미대사관 창설 멤버인 韓豹頊 전 주유엔대사(82)는 당시 주미대사관의 주업무를 이같이 소개했다.李承晩 대통령이 대사관에 직접 내린 훈령은 기본적으로,어려운 경제사정과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을 주재국에 인식시키게 하는 것이 골격이었다. “한국에 대한 원조안이 미의회에 상정됐을때 1표 차이로 통과되지 못했던 때가 있어요.대사와 저는 바로 국무성으로 뛰어가 ‘한국이 너무 힘들어진다’고 통사정했습니다.곧이어 트루먼 미대통령이 지시를 내겨 이 안은 재상정돼 결국 통과됐죠” 韓전대사는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외교업무를 하게 돼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미국 유학경험이 있어 의사소통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또 당시 주미대사관에는 외교관 말고 3명의 구매관이 근무했다고 한다.이들의 역할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으면서 가급적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오는 것이었다.이들 구매관이 李대통령으로부터 처음 받은 훈령은 ‘쌀 1만t을 한달안에 부산항에 닿도록 사보내라’는 것.구매관들은 먼저 미 농무성을 찾아가 입찰공고를 보내면 각 중개상인들의 입찰가격이 대사관에 도착하고 이 가운데서 낙찰자를 정했다.이어 선박업자를 찾아가 선박을 구한뒤 쌀을 실어 보내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모든게 남아 돌았고 우리는 뭐든지 급했습니다.담배,밀,보리 등 농산물과 기계류를 닥치는 대로 사보냈습니다”라고 韓전대사는 구매관과 함께 물건구매에 나섰던 일을 술회했다.韓전대사는 주미대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주제네바대표부,주유엔,주오스트리아,주영국대사를 거쳐 81년 은퇴했다.
  • 청화대 수석비서관 내정자 프로필

    ◎문희상 정무/80년 동교동 합류… 연청 중앙회장 역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로 통한다.원만한 성품에 친화력이 높고,정국상황에 대한 분석력이 탁월하다.80년 서울의 봄때 동교동에 합류한뒤 당 외곽조직인 연청 중앙회장을 3차례 역임,김당선자의 신임이 두텁다.95년 민주당 분당때 이기택 전 민주당총재의 비서실장으로서 잔류를 심각히 검토,박지원 공보수석내정자 등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동교동계 3인방’으로 꼽히며 소신과 의리를 평가받기도 했다.“여야 협상결과를 뒤집는 과거의 정무수석은 되지 않겠다.소리내지 않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에 충실하겠다”는 포부다.부인 김양수씨(52)와 1남2녀. ◎임동원 외교안보/육군소장출신… 통일·외교·안보 요직 섭렵 육군소장출신으로 호주대사,외교안보연구원장,통일원차관 등 요직을 섭렵한 통일·외교·안보분야의 3박자 전문가. 95년부터 아태평화재단에 몸담으면서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3단계 통일론을 구체화하는 데 일조했다.90년 1차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산파역을 맡았던 대화론자.회담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자민련 이동복 의원과는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건으로 맞섰던 비화도 있다. 군인체취 보다는 외교관스타일의 부드러운 매너와 포용력있는 성품을 갖췄다는 평.부인 양창균 여사(59)와 3남. ◎조규향 사회복지/교육부차관 지낸 정통 교육행정관료 행시 4회 출신으로 30여년 동안 줄곧 교육계에 몸을 담은 정통 교육행정관료이다. 차분한 성격의 전형적인 선비형. 친화력과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교부 교직국장으로 재직할 때 행정직의 학교장 진출을 막는 등 교직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기도.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명칭이 바뀐 뒤 2년9개월 동안차관을 지냈다.78년과 80년 두차례에 걸쳐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취미는 바둑과 테니스. 부인 이선희씨(53)와 3녀. ◎박지원 공보/4년간 제1야당의 ‘입’… 최장수 대변인 김대중 당선자의 의중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달하는 ‘측근중의 측근’으로 꼽힌다.순발력과 성실성,현실정치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이다.민주당과국민회의를 거치면서 내리 4년동안 제1야당의 ‘입’을 맡아 최장수 대변인 기록을 갖고 있다.미국이민 생활중 사업으로 자수성가,뉴욕한인회장과 미주한인총연합회장 등을 지내는 등 활동력도 왕성하다.그는 10일 “차기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열정을 가감 첨삭없이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부인 이선자씨(55)와 사이에 2녀.
  • 새정부 100대 과제의 국정방향

    ◎IMF 극복 등 4대 지표 실천 뒷받침/경제회생­관치금융 근절·고용안정기금 확충/안보정책­경수로분담금 축소… 병역제도 개선/국민통합­인선 골고루… 부산선물거래소 허용/정보화­경제정보 상업화… 인프라 예산 늘려 새정부 국정운영방향의 뼈대가 잡혔다.이른바 ‘국민정부100대 과제’다.4일 국민회의·자민련 합동 정책조정위원회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과제 선정작업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국정운영 철학과 대선공약을 접목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국정운영 지표의 큰 방향은 이미 잡혔다.온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IMF한파 극복을 목표로 한 경제살리기와 김당선자의 3단계 통일론에 기초한 통일준비,계층·지역·세대간 갈등해소를 위한 국민대통합,21세기 세계화시대에 당당히 살아갈 정보화사회 구축 등 4대 지표가 그것이다. 경제회생을 위한 새정부의 지표는 김당선자의 자율 원칙과 철저한 시장경제원리,분배의 균형에서 출발하고 있다.이러한 원칙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것이 대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이자 소외된 분야에대한 과감한 지원이다.이를 위해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의 폐해를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다.또 고용안정기금 확보와 농어촌 지원 확대,유통구조 개선,그린벨트 재조정 문제를 심도있게 검토하겠다는 것이다.나아가 경부고속철·영종도 신공항건설·방위력 증강사업 등을 재검토 축소 조정하겠다는 것이다.김당선자의 한 핵심측근도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을 근절하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느낀 기업들이 결국 빅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고 강조한다. 김당선자는 당선뒤 제일성으로 북한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고 남북기본합의서 준수를 촉구했다.문민정부가 추진하다 중단됐던 정상회담이 여전히 유효함을 알리면서 쌍방의 체제를 인정한 기본합의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대북정책의 일단을 내비쳤다.이는 일단 ‘공’을 북한에 넘겨놓음으로써 대북문제를 우선 순위에서 미뤄놓으려는 전략이라는 관측이다.인수위가 그동안 검토해 온 경수로사업 추진과 분담금 삭감 방안,병역제도 개선 사업 등도 이연장으로 이해된다. 국민대통합,즉 지역·세대·계층간 갈등해소는 김당선자의 오랜 바람이자 자민련과의 공동정권 탄생의 기초이기도 하다.해양수산부 존치와 첫 지역사업으로 부산 선물거래소 설 허용도 대국회 차원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주민이다.한 측근은 “청와대 비서진과 조각 인선에서도 그러한 의지가 담길것”이라고 말한다. 21세기 정보화사회 건설도 새정부의 주요한 국정운영 축이다.민간자율 영역을 넓히고 규제개혁과 정보 인프라 구축에 예산배정을 늘리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특히 안기부의 세계경제정보를 상업화하려는 구상에서도 이러한 의지가 엿보인다.
  • 김 당선자 전방 군부대 방문 표정

    ◎“군 서울하늘만 보지 않게 공정 인사”/권력 과학회·처우개선 성의 다할것”/미군부대도 들러 안보협력 등 강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29일 국군의 ‘예비통수권자’로서 서부전선의 육군부대와 미 제2사단을 잇따라 방문,경계태세를 점검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김당선자는 이날 헬기편으로 민통선안 최전방에 있는 한 부대를 찾아 망원경으로 북한군 진지와 집단농장을 관찰하면서 사단장으로부터 지형설명과 현황보고를 받았다. 김당선자는 이 자리에서 “지금은 정권 이양기로 어려움에 처한 북한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만큼 안보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면서 “새 정부는 과거 정부 이상으로 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당선자는 사병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장병들과 줄을 서 배식을 받은뒤 김칫국과 김치,무우무침,돼지고기볶음을 메뉴로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김당선자는 장병들에게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여러분이 목숨걸고 지키는 민주주의를 한발 진전시켰다”면서 ”군이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잡음없는 공명선거를 치러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진심으로 치하한다”고 말했다.또 “군이 정치개입을 강요당하지 않고,지역이나 학벌에 관계없이 공정한 인사가 이루어지면 서울하늘만 쳐다보지 않고 북한을 향해 모든 힘을 쏟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새 정부는 군의 처우개선을 위해 성의있게 노력할 것이며 전력의 과학화에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대대장은 “어려운 시기에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실텐데 전방의 병사들을 찾아주신데 용기백배하고 있다”고 방문을 환영한뒤 “우리 부대는 어떤 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는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면서 오렌지주스로 건배를 제의했다. 김당선자는 이어 미 제2사단을 찾아 셰필드사단장으로부터 현황설명을 들은뒤 인사말을 통해 “미국이 6·25에 참전해 한국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킨데 감사한다”고 치하하고 “한국과 미국은 국가이익을 위해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한반도 평화는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두나라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김당선자는 특히 “지난 73년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미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고,80년 사형집행이 중지된 것도 미국의 도움이었다”고 회고하고 “공·사적으로 미국에 감사하는 심정”이라고 피력했다. 한편 김당선자는 이날 셰필드사단장으로 부터 사단마크인 인디언이 새겨진 기념품을 받고 ‘3단계 통일론’을 담은 자신의 저서에 사인해 답례했다.
  • 전문가 발제(이제 힘모아 위기극복을:1)

    ◎지역·계층 편견없이 인재등용/경제난 극복에 총력 기울여야 국난으로 표현되는 경제위기가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이대로 주저 앉고 말것인가.이런 무거운 분위기속에서도 우리는 때마침 21세기를 여는 새 대통령을 선출했다.이제 우리는 출발점에 섰다.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선거과정에서 쌓였던 정당간의 불신,국민들의 실망감 등 불신과 반목을 말끔히 씻어내고 화합된 모습으로 당면한 국난 극복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한시바삐 현 대통령과 정부,새 대통령당선자,사회 각계각층의 국민 모두가 힘과 지혜를 모아 당면한 경제난국 극복과 국가안보 확립,민생안정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서울신문은 이러한 국가상황과 21세기를 대비하는 새정부출범을 앞두고 사회 각계각층의 원로,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이제 힘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자’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싣는다.첫 회는 정치·경제 전문가로 오석홍 서울대 교수와 남상구 고려대 교수의 대담을 통해 현재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할 국민통합,경제위기 극복을 위한제안들을 짚어본다. ▲오석홍 교수=먼저 국민통합을 위해 IMF사태로 인한 국가위기 상태에서 이번 대통령 당선자는 현임 대통령과 협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경제가 위축된 상태에서는 어떠한 실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현임과 신임간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상구 교수=이번 선거는 대체로 공정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각 후보들이 정책 대결보다는 서로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인신공격 사례가 많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이 때문에 선거후유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를 어떻게 빨리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다.후보자는 물론이고 국민모두가 선거결과에 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교수=선거운동이 각 후보간의 혼전속에서 대립을 빚음으로써 극단적인 용어가 난무했던 점 등이 후유증으로 남을 만하다.또 여전히 지역대결의 흔적이 뚜렷했으며 정책대결은 원활하지 않은 대신 흑색선전,폭로전이 치열했다.이같은 몇가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국민의식은 과거에 비해 크게 성숙됐다고 할 수 있다.이번 선거운동기간동안 흑색선전을 하는 후보쪽의 인기가 오히려 떨어지는 일도 있지 않았는가.또 낙선한 후보들이 근소한 표차에도 잡음없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 흐뭇했다.이와함께 그동안 지역차별의 피해지역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선거에서 지역감정유발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하는 기대도 해본다.그동안 우리나라는 인적자원을 동원하는 통로가 막혀 일종의 동맥경화를 겪기도 했다.기득권 세력과 연고가 있는 한정된 계층만이 권력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에 정계가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킴에 따라 인사통로의 경색적인 요소가 많이 제거될 것으로 희망한다. ▲남교수=국민화합과 지역감정은 곧 극복되리라 믿는다.그러나 한가지 지적하자면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났다.지역 대립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다.문제는 몇몇 정치인이 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인맥을 넘어서는 인막을 형성함으로써 널리 인재를 구하는 길을 차단해왔던 것이다.새 대통령은 이같은 지역감정의 가장큰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라는 측면에서 이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적임자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지역감정의 타파가 단순한 지역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상태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진정한 지역평등이다. ▲오교수=새 대통령의 제1임무는 뭐니뭐니 해도 경제위기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물론 최초의 여야정권교체가 되는 현 시점에서 상당기간 정치적 조정기가 진행될 것이다.정계개편이나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활발할것은 뻔하다.그러나 이 시기에도 경제문제가 뒷전으로 밀리면 안된다.정치인 모두 합심해 목전의 경제위기에서 탈출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이는 국민들의 절대적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IMF 감정적 대응 곤란 ▲남교수=선거기간중 IMF와의 합의문 이행여부가 정치적으로 쟁점이 돼왔는데 당선자가 이미 현정부의 합의사항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얘기를 했기때문에 큰 변화는 없으리라고 본다.IMF요구에 필요 이상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IMF요구 가운데는 다소 무리한 점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나라 개혁 과제와 맥을 같이 하는 것들이다.언젠가 해야할 일을 앞당겨서 하는 것일 뿐이다. ▲오교수=그동안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내 경우 오히려 정치와 경제는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한 덩어리다.모든 문제를 조타해나가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역량에 달려있다. ○금융개편 가장 시급 ▲남교수=물론 정치와 경제를 따로 떼서 얘기하기는 힘들다.그러나 우리는 경제문제를 정치논리로 풀려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더 부담이 된 악순환을 무수히 경험했다. 정경을 분리하는 작업 역시 빨리 해야한다.당선자의 경제정책 기본방향이 시장경제원리를 철저히 도입하겠다는 것인데 당연한 얘기다.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양산된 과도하고 불필요한 규제가 불필요한 경쟁자를 양산했고 이에따라 대규모의 부실기업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돼 왔다.새정부의 경제방향은 이같은 정경의 고리를 끊고 시장원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리라 기대한다. 특히 금융개편은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되리라 기대한다.금융산업의 문제는 금융감독의 부실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다.앞으로 물가는 오르겠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물가가 움직이는 것은 사회 전반적인 과소비의 문제이지만 거품이 빠지면서 이것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장기적으로는 물가가 안정세를 취할 것으로 본다.증시는 당분간 침체를 면치 못할 것이다.증시는 언제나 기대에 의해서 움직이는 속성이 있으므로 새정부가 희망찬 경제정책을 발표한다면 금방 회복되리라고 본다.인기에 영합한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은 지지기반인 노동자에게 혜택을 베풀기 위해 무분별하게 나눠주기식 정책을 펼치다 곧 나락으로 빠져버렸다.인기 보다는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될 것으로 본다. ▲오교수=21세기를 맞아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기존 관념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정치’는 필요악,모멸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정권획득을 위한 노력을 부도덕한 것으로,정권욕에 눈이 먼 것으로 매도했다.대신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행정관료체제만 비대해져 행정국가화에만 주력해왔다.이제는 오히려 정치가 주도적 역할을 해 주권재민의 실질을 담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정치 혐오증을 갖기 보다는 정치의 자리매김을 제대로 하고 이를 새시대에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남교수=정치는 다양한 이해집단의 대립를 전제로 한다.정권을 잡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면 행정력이 비대해질수 밖에 없다.따라서 다양한 이해집단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는 리더쉽을 발휘해주길 바란다. ○국민을 최고의 고객으로 ▲오교수=새 대통령은 복잡다단한 현대사회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이런 맥락에서 새대통령에게 기대하는 제1의 자질은 예견력이다.또 행정개혁의 과제로는 첫째 작은 정부구성,둘째 정통성을 확립,셋째 반부패운동,넷째 지역연고주의 타파,다섯번째 지방화 정착,여섯번째 포괄적인 책임 확보 등을 들 수 있다.정부는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하며 성과를 낳아야 한다.과거에는 국민이 객체였으나 이제는 국민을 주인으로 격상시키고 그들을 위한 정치행정의 성과를 낳아야 한다.기업이 고객중심주의제를 외치듯이 정부도 국민을 최고의 고객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교수=전적으로 동감한다.작은 정부의 구현은 오랜 숙제이다.이것이 이뤄지지 못하고 오히려 부패가 늘어난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하나는 권력의 집중과 부패에 대해서 국민이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고 정부가 하루 빨리 작아져야 한다.공룡정부는 변화에 느릴수 밖에 없고 결국 멸종의 길을 걷게 된다.새정부가 이점을 빨리 깨닫길 바란다. ○정책 추진세력 구성해야 ▲오교수=김영삼 대통령은 초기에 개혁을 적극적으로 해나갔으나 전체적인 개혁과제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개혁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작업이 지속되지 못했다고 본다.때문에 새 대통령은 정책을 분석하고 추진해나갈 세력을 구성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남교수=우리 국민들은 대체로 검소하게 생활한다.저축율이 세계어느 나라보다 높다.일본보다 높다.국민들이 이처럼 저축을 많이 해도 시중에 돈이 모자라는 이유는 투자의 비효율성 때문이다.따라서 국민들의 허리띠 졸라매자는 얘기는 조금 방향이 잘못된 것 같다.오히려 과소비척결에 앞장서야 할사람은 기업과 정부이다.호화사치품 몇개 희생양 삼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진짜 근검절약해야할 분야가 어디냐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오교수=남북간 통일문제는 우선적으로 한민족이 주도해 국내·외적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4자회담도 남과 북이 이끌어가야 한다.그러나 급격한 통일론은 지양해야 하며,우리 정치체제가 민주화되고 정당성을 토대로 힘을 가진 바탕위에서 통일문제에 주도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 “방화범으로 몰려 억울”/남녀 고고생 동반 자살

    6일 상오 6시 45분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595 이정호씨(41·농업)집 뒤 건넌방 창틀에 이씨의 아들 이모군(18·B고2년)과 박모양(18·B여고3년)이 나일론끈으로 목을 매 숨져있는 것을 이씨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이군은 최근 경찰로부터 지난달 18일 새벽에 발생한 B고교 방화사건과 관련,2차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이군은 유서에서 ‘방화범으로 몰려 너무 억울하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 찰스 패너티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

    ◎미 대중문화 유행과 쇠퇴 생생히 그려/‘놀줄 아는 사람들’이 ‘베이비 붐’을 낳기까지/생활유형·행동규범의 변천 10년단위 정리 현대적이고 독자적인 미국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베이비 붐 시대로 불리는 1950년대까지 미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를 한 눈에 살필수 있는 인문교양서가 나왔다.미국 작가 찰스 패너티가 지은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1·2권,이용웅 옮김).이 책 역시 ‘배꼽티를 입은 문화’‘뜻밖의 이야기’ 등 패너티의 저서들을 독점 출판해온 자작나무에서 펴냈다. 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그동안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처음에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더니(호모 하빌리스),여러 도구를 능숙하게 만들게 되고(호모 파베르),척추를 꼿꼿이 세워 뛰어 다니다가(호모 에렉투스),온갖 지혜를 쥐어짜는 단계를 넘어서서(호모 사피엔스),이제 와서야 ‘놀 줄 아는 사람’ 즉 호모 루덴스로 진화한 것이다.이 책은 바로 이 ‘놀 줄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1890년대는 미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은둔적이고 순박한 빅토리아식 생활유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미국식 행동규범과 미국문화가 움트기 시작한 과도기였다.그런 만큼 보통사람들의 가치관에도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다.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열렬한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폴 라파르그가 주창한 ‘게으를수 있는 권리’라는 명제에 공감하기 시작했으며 ‘여가’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다.이러한 변화는 갖가지 오락과 유행 등 대중문화가 펼쳐질 무대를 제공했다.삽화가 찰스 다나 깁슨이 미국을 대표할 만한 여인상으로 소개한 ‘해방처녀’ 깁슨 걸(Gibson girl)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이마 위로 높게 빗어 올린 팜파도어식 머리 스타일과 꽉 죈 허리선이 도드라진 깁슨 걸을 모방하기 의해 미국 여성들은 무던히도 애썼다.전국적인 자전거 열풍 또한 빼놓을수 없는 현상이었다.해리 대크리의 ‘데이지 벨’을 비롯,‘더 사이클 맨’‘블루머 행진곡’등 자전거 예찬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한편 1895년에는 처음으로 베스트셀러 소설이 등장했다.조지 뒤 모리에의 로맨스 소설 ‘트릴비’가 그것이다.이 책은 ‘빌트리’‘드릴비’등 트릴비의 이름을 흉내낸 유사소설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전 미국을 석권했다. 190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빨리 빨리’라는 말로 압축 표현된다.‘시간관리’ 세미나까지 성행했다.그 무렵 미국이 움직이는 속도는 음악용어에 빗댄다면 ‘알레그로 콘 브리오’,곧 생기 넘치고 빠른 템포였다고 할 수 있다.이 시기에는 시어즈,로벅,몽고메리 워드 등 대형 통신판매회사들의 우편주문 시스템이 가동돼 소비사회의 특징인 쇼핑문화가 싹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5센트 영화관인 니클로디언(nickelodeon)이 번창했고 데이지 공기총 등 어린이 장남감이 폭발적인 수요를 누렸다.1990년대 말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칠면조 트로트·회색곰 춤 등 애니멀 댄스가 유행했다.이밖에 여성이 소설의 주요 독자로 등장하면서 여성작가가 여성독자를 상대로 여성의 이야기를 쓴 이른바 ‘해피니스 소설(happiness novel)’이 선풍을 일으켰다. 1910년대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국제적 위상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미국의 대중문화를 유럽대륙에 전파시키는 계기를 마련,대중문화도 수지맞는 산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테다 바라라는 요부스타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으며 ‘리바이어던’‘타이태닉’‘퀸 메리’ 등 호화유람선이 등장했고 헨리 포드에 의해 자동차가 대중화됐다. 1920년대 미국에는 급진적인 자기표현과 냉소주의가 팽배했다.특히 머리를 짧게 깎고 가슴을 동여매 남자처럼 하고 돌아다니던 ‘자유처녀’ 플래퍼(flapper)족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마라톤 춤시합,갱들의 전쟁,금주법에 따른 주류 밀매업 등이 시대를 장식했으며,흑인들이 작곡·제작·연기를 맡은 뮤지컬 ‘셔플 얼롱’이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하는 등 재즈가 전국을 휩쓸었다. ‘흔들리는’ 1930년대는 라디오와 영화의 황금시대였다.대공황으로 생긴 300만명에 이르는 실업자들이 라디오와 영화에서 위안을 얻었다.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매주 평균 8천500만명이 영화를 보기 위해 25센트의 요금을 선뜻 내놓았다.인생의 달콤한 신비를 찬미하는 지네트 맥도널드의 영화나 ‘피버 맥기와 몰리’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화제였다.또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출간 6개월만에 100만부가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했다.한편 1940년대와 1950년대는 각각 나일론과 컬러 텔레비전이 첫 선을 보인 시대로 특기할 만하다.
  • DJP 정책공조 시각차/TV토론서 대북지원·실명제 등 이견

    ◎후보단일화 앞서 협상거리만 양산 “인도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지난주 MBC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대북 식량지원 문제에 대해 국민회의 김대중,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각각 밝힌 견해다. 국민회의는 이같은 정책분야의 이견을 사전 조율하자는 자민련의 요구에 고심하고 있다.후보단일화 협상에 가속도를 붙여야 할 마당에 새로운 ‘협상거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는 자민련이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점차 거세지는 당 안팎 보수세력으로부터의 압력을 완충시키고,DJ(김대중 총재)진영으로 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속셈이라는 분석이다. 두 당은 속셈이 서로 다르듯 조율을 거쳐야 할 정책이 무엇인지에서 부터 이견을 보이고 있다. 국민회의 협상대표인 한광옥 부총재는 “정치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경제분야에서는 시장경제주의 등 집권했을때 국정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반면 자민련 안택수 대변인은 “DJ는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하는 반면 JP는 독일식의 단계적 통일방식을 선호하고 있고,금융실명제도 JP는 폐지를 주장하나 DJ는 보완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 구체적 정책의 조율 필요성을 거론하고 있다.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난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후보단일화 협상의 마무리 단계가 되면 ‘더 큰 것’을 위해 양보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 한총련 남은 뿌리 뽑아야(사설)

    대한항공기 추락사고로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있는 와중에 이미 국가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돼 해체 과정에 있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잔류파가 고개를 쳐들고 재기를 노리고 있다.당국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13일부터 사흘간 소위 제7차 범청학련 통일축전 및 제8차 범민족대회를 강행키로 하고 50여명 소속원들이 서울 조계사에 들어가 대회개최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대다수 학생들과는 유리된 채 환상적 평화통일론에 빠져 시대착오적 친북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고질병이 확산돼 다시 학원이 오도되고 사회불안이 야기되는 일이 없도록 엄정한 공권력 행사를 촉구한다. 한총련이 무엇인가.지난 6월 소위 발대식을 강행하며 달리는 열차를 세워 올라타고 전경과 무고한 시민을 고문으로 살해했으며 폭력시위로 사회불안을 야기한 자들이 이끄는 집단이다.북의 주체사상과 통일노선을 추종하며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외치는 명백한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다. 그들은 학생 다수로부터도 외면 당하고 있다.전국 206개 각급 대학 총학생회 가운데 71.8%인 148개가 이미 탈퇴했고 나머지 상당수 대학 학생회도 9월 개학과 함께 탈퇴를 공식화할 예정으로 있다.여러 대학에서 극소수 한총련 지도부,주사파의 오도된 노선,폭력시위 전술 등이 학생운동의 본뜻을 훼손했다는 비판과 반성이 잇따르고 있다.대학생다운,건전하고 생산적인 학생회 활동에 대한 희구가 구체화하고 있다. 이런 조직의 잔당이 8·15를 맞아 민족의 이름으로 무슨 대회를 주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수 없다.30여 재야단체마저 8·15민족통일행사에 폭력노선의 한총련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이 소위 통일축전을 개최한다는 범청학련은 남북한 대학생이 공동운영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하지만 북측 대표는 대남공작 부서의 조종을 받는 통일일꾼이 대학생으로 분장한데 불과하다.결국 북의 사주를 받아 그들의 적화통일노선에 놀아나는 꼭둑각시 놀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총련의 정체가 분명해진 이상 이런 엉뚱한 친북세력에 의해 8·15가 해마다 훼손당하는 불행한 고리도 끊어야 한다.조계사 농성자는 물론 해체위기에서 탈출하려 발버둥치는 소수 한총련 극렬세력을 검거,엄정 사법처리해야 한다.더이상 우리 학원이 이런 시대착오적 망상에 사로잡힌 소수의 손에 번롱당하는 일이 없도록 한총련의 남은 뿌리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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