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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적 기독교/지명 청계사 주지·문박(굄돌)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어오던 한 처녀가 결혼을 했다.그런데 기독교신자인 시어머님은 며느리에게 같이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그 며느리가 친분이 있는 스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부탁했다.그 스님의 답은 『시어머님의 뜻을 따라 교회에 가라』였다. 그 며느리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자신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말씀드렸다.목사님은 각별히 그 며느리를 보살펴 주었다.얼마 전에 시어머님이 작고하였다.장례후 목사님이 며느리에게 말했다.『지금까지 시어머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느라고 애쓰셨습니다.지금도 옛날의 불교신앙이 변하지 않았다면 다시 불교로 돌아가도 좋습니다.『그 며느리는 시어머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간지 7년만에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서 불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스님은 그 며느리를 교회로 보내고,목사님은 다시 그 며느리를 절로 되돌려 보내는 정경을 만든 셈이다. 지난번에 석방된 문익환 목사님이 감방 안에 버려진 염주 하나를 들고 나왔다.앞으로 한국인의 과제는 기독교와 불교의 조화라고 말했다.감방 안에 있으면서 기독교와 불교가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 느꼈다고 한다.필자는 문목사님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그래서 어떤 점에서 두 종교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짐작하건데 1천6백여년을 이땅의 민족과 숨결을 같이해 온 불교에서,한국 혼의 냄새를 많이 맡을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서양에서 과학과 국가권력을 상대로 투쟁하면서 맥을 이어나온 조직력 있고 집중력 있는 기독교로부터는 어떤 행동적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천주교 신자로서 경허스님의 구도일대기를 소설로 만들어서 이번에 펴낸 최인호 작가도 문목사님과 비슷한 말을 했다.불교에 묻어 있는 동양정신의 심오함과 기독교에 묻어 있는 서양정신의 집합력이 조화를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을 피력했다.그분은 「기독교적 불교」「불교적 기독교」라는 말로 상호보완의 필요성을 암시적으로 나타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또한 부처님의 말씀대로,돈,학식,큰 건물 또는 권력과 명예가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종교의 물량적 발전이 이땅에 천국이나 극락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내 종교의 신자만을 많이 확보해서 내 종교의 발전만을 피할려고 할 것이 아니라,온 국민 모두가 참 삶의 길로 들어서도록,이 종교와 저 종교가 손을 맞잡아야 한다.
  • “민족혼 고취” 역사영화 상영/한국영상자료원,4월의 주제로

    ◎7일∼23일 예술의 전당서 8편 영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달마다 주제별로 영화감상회를 열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호현찬)이 4월을 맞아 민족의 역사적 삶과 혼이 투영되어 있는 역사물을 상영한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7일부터 23일까지 하오 4시에 열리는 이번 감상회는 그 제목만으로도 「영화로 보는 한국사」라고 할만하다. 40대가 넘은 올드팬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지금은 스크린에서 사라진 왕년의 유명배우들을 다시 한번 대할 수 있게 돼 옛기억과 향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사에 전념할 것을 간하다 광해군의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목대비의 애처로운 인생기를 그린 「인목대비」에서는 신영균 주증녀 조미령 이민자 허장강등이,세조때 18세의 나이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이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남이장군」에서는 신영균 김지미 이예춘 허장강 황정순 최남현등이 열연한다. 상영작품은 「인목대비」(7일) 「사명당」(8일) 「강화도령」(9일) 「십년세도」(14일) 「남이장군」(15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6일) 「난중일기」(22일) 「일송정 푸른솔은」(23일)이다.문의전화는 521­2102∼2.
  • 김희로씨는…(외언내언)

    「광복후의 항일투사」라는 별명이 붙는 재일동포 무기수 김희로씨.살인죄로 25년 동안 복역해 온다.그가 오는 6월 일본 왕세자 결혼식에 맞춰 단행될 대사면에 포함되어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지난 68년,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모멸감과 차별대우에 울분을 못참고 일본인 폭력배 2명을 죽인 다음 인질극을 벌인 사건은 온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었다.그로부터 일본 최고재판소가 무기징역을 확정하기까지는 7년이 걸린다.하지만,그에 관계없이 재판중이나 형 확정후나 그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높았다.석방운동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다.범행동기가 극심한 민족차별 내지는 모멸에 있었기 때문이다.그가 인질극을 벌였던 시즈오카켄(정강현)의 스마타쿄(촌우협)가 그후 관광지로 된 것도 거기 연유한다.후지미야(부사견옥)여관에는 『죄없는 이 집에 누를 끼쳐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쓴 그의 낙서가 있다. 『목숨도 일없다고 큰소리쳤던 그격정/민족의 긍지를 지키자던 그 외침/조선인의 그 이름 위해/싸웠다는 네가/목숨 하나 살려고 마음 흔들려/타협을 하자는 거냐/너는 네 동포가 참고 견뎌온/기나긴 굴욕의 역사를/네 목숨 하나 살기 위해 짓밟자는 거냐!…』.붙잡힌지 한달 후의 어느 날 「길잃은 양」이란 제하의 옥중시를 쓰고도 있다(고금소운역).스스로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다. 화제의 인물이 되다 보니 옥중결혼이라는 것도 두번 치렀다.첫번째 김문자씨와는 71년 맺어졌으나 74년 헤어졌다.그 다음 일본인의 현지처로서 일본인 본처를 죽이고 무기수로 복역중이던 돈경숙씨와 「재혼」한다.김씨는 그 동안 한국말 공부도 해왔다.그의 일대기는 「김의 전쟁」이란 제명의 영화로 만들어진 바도 있다. 석방이 되면 90노모 및 옥중결혼한 부인과 함께 귀국하리라고 한다.전전의 망령을 보는듯한 「전후 한일사」의 귀국이 될듯하다.
  • 자동차 신소재 세계 첫 개발/기존 강판보다 가볍고 강도 3배

    ◎포철 김태웅­과기원 김영길박사팀 개가 기존 자동차용 강판보다 강도가 3배나 되면서 성형과 용접이 쉬운 특수강이 세계 최초로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됐다. 포항제철 부설 산업과학기술연구소 김태웅박사와 한국과학기술원 재료공학과 김영길교수팀이 공동개발한 「PRK90」은 철 망간 알류미늄 탄소등을 합금 해 만든 것으로 강도가 1㎟에 90㎏에 달해 일반 자동차용 냉연강판의 38㎏보다 훨씬 높다. 또한 무게도 기존 강판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김태웅박사는 『이 특수강은 고강도를 유지하면서도 얇게 늘어나는 연성을 지니고 있어 복잡한 자동차 프레임을 쉽게 가공 용접 조립할수 있다』고 특성을 밝혔다. 연구팀은 이 특수강의 실용화를 위해 이미 소규모의 생산시설인 파일럿 프랜트에서 실험을 마쳤으며 미국 일본등 세계12개국에 특허출원을 해 놓고 있어 앞으로 세계자동차업계에 일대기술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세계자동차업계는 최근 알루미늄합금을 사용,강도를 높이고 무게를 줄여왔으나 용접이 어렵고 값이 비싸 스포츠카에만부분적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국내 개발팀의 특수강 개발은 자동차의 경량화와 고강도의 2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것으로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 「월인천강지곡」 영인본 출간/문화재관리국,저지사용 재현

    ◎상중하 3권중 상권 194수 실려 문화재관리국은 세종이 지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영인해 펴냈다.이 영인본은 전통방식으로 특별히 주문해 만든 저지를 쓰는 등 원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려 애썼다.이 영인본은 대한교과서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398호 「월인천강지곡 권상」을 원본으로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조선조 제4대 세종 임금이 지은 낙장체 노래.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자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의 일대기를 한글로 쓴 「석보상절」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이를 받아본 세종은 즉시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석가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5백80여수로 세종 29년 1447년에 상·중·하 3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는 1백94수가 실린 권상만이 전하고 있다.이 책은 「석보상절」과 함께 갑인자로 찍어낸 한글활자본으로 「용비어천가」와 함께 조선 초기 국문시가의 쌍벽을 이루는 한글 및 국문학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정부는 지난 91년 우리나라의 유엔가입을 기념해 유엔본부 전시실에 「월인천강지곡」의 영인본과 모형활자조판을 기증한 바 있다.문화부는 이를 계기로 우리 인쇄문화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영인본 발간을 추진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영인본과 함께 안병희 국립국어연구원장의 「월인천강지곡 해제」를 함께 펴내 이해를 돕도록 배려했다.
  • 김 부자 우상화 「집체창작단」 운영(오늘의 북한)

    ◎영화·문학·미술·건축분야 전문가 동원 「작품」 양산/영화=「백두산」 문학=「4·15」 미술=「만수대」 건축=「백두산」이 대표작/혁명소설 「불멸의 력사」 19권 발간/영화 「조선의 별」은 10부작 시리즈 문학예술작품을 체제선전의 강력한 무기로 삼고있는 북한이 김일성·김정일에 관한 우상물만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내는 「집체창작단」을 문예계내에 다수 조직·운영해 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집체창작단의 조직은 『위대한 수령님은 너무나도 위대한 위인이므로 어느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형상이 불가능 하다』는 김부자에 대한 해괴한 우상이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백두산창작단」「4·15문학창작단」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중 백두산창작단은 김정일이 문예계를 장악한 시점인 지난 67년 영화부문서 김일성우상물을 우선 창작할 목적으로 김정일에 의해 설립됐다.단장은 창설때부터 지난 90년까지 문운총위원장인 백인준이 맡았으나 백이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맡게 됨에 따라 지금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부총장인 엄길선이 맡고 있다. 이 창작단은 83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와 2·8예술영화촬영소내에 조직되기 시작한 「삼지연창작단」·「대덕산창작단」 등 이른바 고정영화창작단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백두산창작단에서 제작한 영화중 대표적인 것은 김일성의 일대기를 그렸다는 「조선의 별」과 「민족의 태양」시리즈 등이 손꼽힌다.해방전 김일성의 이른바 항일빨찌산투쟁을 소재로 했다는 「조선의 별」은 10부까지,김일성의 해방이후 행적을 그린 「민족의 태양」은 5부까지 재작돼 있다. 「4·15문학창작단」은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에서 따 온 이름으로 지난 67년 6월 28일 역시 김정일의 주도로 설립됐다.「수령형상문학」으로 분류된 김일성우상문학작품의 창작을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4·15문학창작단」은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산하단체로 소설가,시인,희곡작가 등 50∼60명으로 구성돼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최창학,권정웅 등이 꼽힌다.최창학은 장편소설 「애착」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상황묘사가 치밀하고 문장력이 뛰어나다는평가를 받고 있다.권정웅은 장편소설 「백일홍」으로 북한문학사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지난 89년 5월 「김일성상」을 받기도 했다. 이 창작단의 단장은 지난 89년 4월 28일 석윤기 사망 이후 현재는 강능수가 맡고 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북한소설 40여편사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불멸의 력사」시리즈가 꼽히고 있다.이 시리즈는 현재 19권까지 출간됐으며 김일성의 과거행적을 연대별 또는 사건별로 나누어 불멸의 혁명업적등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시리즈 각권에는 「닻은 올랐다」「혁명의 려명」「은하수」「백두산 기슭」「근거지의 봄」「혈로」「빛나는 아침」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 북한의 문학평론가들은 이 시리즈물을 『주체적 문학건설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특기할 사변』『문예사에서 로동계급의 수령을 형상한 문학을 가장 높이 발전시킨 거대한 력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른바 혁명미술창작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만수대창작사」는 59년 11월 만들어졌고 김일성·김정일 우상미술품을 전담·제작하는 「1호작품과」에는 약 5백명 정도가 소속돼 있다.「1호미술가」로 불리는 이들은 실기시험을 거친뒤 당성과 기량을 감안해서 선발된다.북한의 각 가정과 학교 및 기관 등에 걸려있는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와 4종류로 구분되는 김일성배지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김일성·김정일 우상미술품이다. 「백두산건축연구원」은 80년대 김정일이 권력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건축설계소이다.김정일 치적선전 차원에서 이른바 대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본격적으로 건립키 위해 세워졌다.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평양시 창광거리 그리고 88년에 착공한 류경호텔 등의 설계가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김일성·김정일우상작품 전담창작단은 아니지만 북한의 평양을 비롯한 남포·개성·사리원 등 주요 시와 각 도단위별로는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작가들을 묶어 집단으로 집필케 하는 「창작실」이 설치돼 있다.이 창작실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해방작가」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작가는 창작실에 소속돼야 하고 이곳에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작품을 쓰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토록 돼있다.각 지역 창작실에는 통상 15명 정도의 작가가 소속돼 있으며 지역과 계절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아침 8시에 출근,저녁 6시에 퇴근한다.
  • 장진홍의사 기념관 동상건립 추진

    ◎일제에 항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추모사업회,의거 66주년 맞아 왜관에 1927년 10월 18일,단신으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식민지지배에 신음하던 2천만동포들에게 독립의지를 다져준 창려 장진홍의사(1895∼1930년)의 의거 66주년을 맞아 기념관과 동상건립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사업은 장의사추모기념사업회(위원장 박세직)가 지난해 8월 의거65주기에 맞춰 발간한 장의사의 일대기 「창려 장진홍 의사」에 이은 2번째 추모사업.이를위해 관련인사들은 기념사업회재발족준비위원회(위원장 윤복수)를 구성했다.기념관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 세워진 기념비각옆에 건립될 계획이며 규모,착공일등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다. 장의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뒤 도피생활 14개월만에 일경에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집행 바로 전날 자결했다.이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8년전의 3·1운동과 2년뒤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 장렬한 항일무장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왜관문화원 장재영원장(80)은 『일대기발간을 계기로 뜻있는 사람들끼리 우리 향리를 빛낸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해 후세에 선생의 애국의지를 남기려 하고 있으나 사업비마련에 차질이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 무용가 정재만씨(이세기의 인물탐구)

    ◎힘차고 광활한 춤사위… 남무의 대가/벽사에 사사한 승무,만개앞둔 꽃망울 연상/“생활이 춤”… 삶의진실 담은 전통 재현 노력/작품구상땐 무작정 거리 헤매… 「구두한켤레」 별명도 □연보 ▲948년3월 경기도 화성출생 ▲72년 경희대 무용학과 졸업 74년 동 대학원 졸업 ▲73∼79년 국립무용단단원 ▲80년 국립국악원 수석무용 ▲80∼87 세종대 무용과 조교수 현재 정재만무용단,남무단대표(정기공연),벽사 춤아카데미 대표,서울예술단 무용감독,한국무용가협 부이사장 「92 춤의해」운영위원,숙명녀대 무용과 교수 국립무용단 무용극 출연 「별의 전설」「왕자호동」「꿈꿈꿈」「시집가는날」등서 주연 해마다 대한민국 무용제·무용예술큰잔치·무형문화재 공연참가 「춤소리」「□」「춤 그 신명」「먼길」「홰」「비천무」「바라춤」「학춤」「승무」「살풀이굿」「학불림굿」「춤4319」「달맞이」「비단타령」「빛과 소리」(88서울올림픽)「자화상」「한량무」「꿈」「광대의 꿈」「북소리사위」「태극선의메아리」「길놀이 마당놀이」뮤지컬 「옹고집전」「양반전」「지신밟기」안무 84년부터 미국·유럽각지역·동남아·호주·남미·이스라엘·연변·북경·상해 백두산 등 각지역 순회공연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중요 무형문화재평가회의 「학무」최우수상,82대한민국 무용제 안무상,84대한민국 무용제 대상,제45회 디종 국제민속예술제 금상 수상 정재만의 춤은 힘차고 광활하다.수평의 폭이 넓고 수직은 하늘로 솟구친다.긴 장삼 얼기설기하여 공간으로 획 뿌리치는 무태에는 비구름이 묻어있다.그리고 움직임 움직임마다에 기쁨과 슬픔,고통과 오뇌가 휘몰아치다 잦아든다. 신라시대 화낭을 연상케 하는 씩씩한 기상과 자신감 넘치는 풍모가 정재만 춤의 특징이다.그가 한번 춤추기 시작하면 그 주술적인 힘에 매료되어 관객은 어깨춤이 절로 나거나 한동안 숨을 멈추게 된다. 특히나 그의 「승무(승무)」는 날이 갈수록 깊은 맛을 더하여 푸른 못속에 뜬 연(연))꽃 봉오리가 만개하려는 찰라다.이제 그는 춤을 알게된 나이다. 15∼16년전쯤 어느 사석(사석)에선가 정재만의 스페인춤을 본적이 있다.그때만해도 조택원이후 송범씨가 그 맥을 이어받았을뿐 남성무용수는 다섯손가락이 넘지않았고 그중에서 정재만은 첫째 둘째를 다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살풀이」며 「산조」를 한자리씩 추는 자리에서 유독 구둣발로 바닥을 울리며 등장하더니 그는 「투우사의 노래」를 허밍하면서 정열적인 스탭으로 「투우사의 춤」을 밟아나갔다.한국무용을 하는 사람답지 않은 힘찬 스타카토의 리듬이 돋보이는 춤이었다. 테이블의 붉은 카네이션을 양복주머니에 꽂고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물레타처럼 휘두르며 이리저리 소를 유인하는 동작은 마치 영화 「바렌티노」에서 누레예프의 탱고춤이 어울리듯 그늘진 구석없는 화려한 스페인춤이 더없이 어울려보였다. 춤추기 시작한지 어느덧 30년.그의 이력에는 「송범 문하생·벽사 한영숙전수생·김백봉사사」가 자랑스럽게 따라다닌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 그는 일찍이 송범문하에 들어가 전통무의 발디딤새를 배우고 벽사의 「승무」「살풀이」「학무(학춤)」를 전수하여 중요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 전수조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기전 그는 경기도당굿이 성했던 화성에서 태어나 동네에서 벌어지는 굿판에 몰두한 시절이 있었다.하루종일 굿구경에 빠져있다가 배고파 집에 돌아오면 가난이 기다렸다. 옹기를 굽는 집안에서 9남매중 다섯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불우한 소년기를 보내야했고 그래서 차라리 굿판에나 따라다녔으면 하는게 소원이었다. 본래는 부농이었으나 아버지 정수환씨(70세로 82년 작고)가 남의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집안이 망해 광성국민학교를 졸업하던해 서울로 이사,위로 큰형과 세 누나와 뿔뿔이 헤어져 그는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방배동 단칸방에 정착했다. 그때는 어머니(김순림여사·78)가 동작동 국립묘지 앞에서 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아직 중학교에 가지못한 그는 낮에는 집안을 치우고 동생들을 돌보다가 저녁밥까지 지어놓고 동작동까지 나가 어머니의 꽃 모판을 받아이고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그런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책을 읽었다.하루는 헌잡지에서 본 조택원씨의가사를 떨쳐입고 춤추는 사진과 일대기를 읽고는 막연하나마 조택원씨처럼 되고싶은 꿈을 꿨었다. 『저앤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은데 어디 양자라도 보내어 공부를 계속하게 했으면』 어머니는 설거지에 밥하고 동생이나 돌보는 아들의 고생이 보기 안쓰러운 나머지 동료 꽃장수들에게 그렇게 하소연하곤 했다. 그후 인천으로 출가한 큰누나의 집에 얹혀살면서 여기서도 낮에는 조카들을 봐주고 밤에는 인천대건중학교,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고에 진학하면서 가정교사,그러다가 가정교사로 있던 주인집의 소개로 필동에 있던 송범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잔심부름과 청소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뚜렷한 이목구비에 재빠른 동작을 눈여겨본 송범씨가 그에게 조금씩 춤을 지도했고 그는 한 동작 한 동작을 혼신을 다해 익히면서 스승이 귀가한 후에도 혼자서 밤새도록 마루바닥을 뛰었다.발바닥이 얼얼하게 부어 성할 날이 없었다. ○송범씨 만나 춤과 인연 벽사 한영숙씨의 제자가 된 것은 벽사가 71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였다. 폐쇄적인 당시의 무용인맥에서는 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송범씨는 자신의 문하생을 선뜻 벽사에게 허락해주었다.고 한성준옹으로부터 그의 따님이던 한영숙씨에게 전수된 문화재급의 주옥같은 춤들을 남자무용수로서 전수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벽사의 유일한 남자제자가 된 그는 「승무」「학무」를 비롯,「살풀이」「산조」「훈령무」「태평무」를 차례로 전수받았고 벽사로서도 부친의 춤의 맥을 잇는다는 일념외에도 그를 친아들처럼 믿고 의지했다. 89년 10월 벽사는 눈을 감으면서 그의 춤의 사군자로 일컬어지던 승무·학무·살풀이·태평무의 보존과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살풀이」「태평무」에 대한 당부를 그에게 녹음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요즘도 공연을 앞두거나 해외에 나갈땐 경기도 남양주군 남한강가에 모신 스승의 산소를 찾아 돗자리를 펴놓고 춤추는 성묘로 보고하기를 잊지 않는다. 지난해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승무·학무 보존을 위한 벽사춤아카데미를 청담동 그의 무용연구소에 개설,6월에는 「나의 춤모(모)에게 바친다」 추모공연을 가져 무용계에 훈훈한 미담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송범의 춤의 특징인 수직과 대학·대학원의 지도교수였던 김백봉의 수평,벽사의 곡선을 두루 망라하여 춤에서의 원의 완미를 이룬다는 목표를 세우고있다. 스승이 남긴 승무·학무의 보존을 위해서는 고유의 특성을 훼손·변질시키지 않는데 그치기보다 「삶의 진실에 대한 표현,삶에 대한 유기적 통찰」의 의미를 담아 전통을 재현해낸다는 자세다. 한때 초기의 춤에서 환희와 힘을 과시하면서 극적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의 외롭고 초췌했던 성장기를 은폐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창작무용에 손대기 시작한 80년에 접어들어 그는 씩씩한 우조에서 벗어나 높은 것을 한층 난춰 감동이 배제된 은은한 계면조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춤소리」와 「□」은 화려함속에 비감이 느껴지는 수작으로 그는 한작품 작품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시대를 뛰어넘는 불후의 빛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역시 그런 각오로 빚어진 「북소리사위」는 북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춤추는 사람이 5북에서 9북을 다루는 파격적 춤사위로 「거동이 정한(정한)하면서도 흥과 멋이 섬화처럼 빛나는 쾌작」으로 손꼽힌다. ○해마다 전국순회 공연 무용계에 남성무용수가 적은 것을 안타까워한 그는 세종대교수시절 졸업생들을 모아 정재만 남무단을 발족,87년 국립극장에서 창단기념공연을 가진이래 숙명녀대로 옮겨와서도 해마다 방학이면 이들을 이끌고 대전·대구·부산에서 당진·서산·합덕에 이르기까지 지방 구석구석을 찾아 순회공연하는등 안성들만의 「훈령무」와 「학무」 「북소리사위」를 펼치고 있다. 73년부터 6년간 국립무용단의 주역으로 뛸때의 파트너이자 경희대 후배인 박순자씨와 75년에 결혼,박순자씨는 무용극 「시집가는 날」의 여주인공을 끝으로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무용단을 떠났다.자녀는 용진(남·국악고2)형진(여·국민교1)남매. 요즘도 그는 스승들을 사사하던 시절과 똑같이 새벽4시에 일어나 5시부터 연구소에 나가 3시간연습,낮에는 대학강의와 무용감독으로 있는 서울예술단에 출근했다가 하오 6시부터 밤10시반까지 연습,춤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구소로 달려간다.춤구상을 할때면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는 버릇 때문에 「구두 한켤레」란 별명이 붙어있다.한두달에 보통 구두한켤레씩을 해뜨린다는 얘기다. 그의 생활모두는 춤이다.춤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흥미도 관심도 없다.그의 춤의 한 단면만을 본 사람이라면 씩씩하고 남성다운 용모로 인해 그들 솔직하고 사교적인 인물로 착각하기 쉽다. 더구나 「한량춤」에서 보이는 「끼」와 가락은 한량기질이 넘쳐보이기도 한다.물론 아직은 40대중반이어서 그의 춤이 달통의 경지라고는 미리 말할순 없을 것이다.다만 견제가 심한 무용계에서 일관된 침묵과 양보,남과 다투지않는 화합의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만 파고든다. 이따금 옹기장이이던 가난한 부친과 그의 굽던 옹기생각에 온몸이 뜨거워지고 아버지 그리움에 곧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그래서 요즘은 아버지를 위한 창작무 「사금파리」를 구상하고 있다. 남모를 추억과 슬픈 그리움 때문일까.그의 춤추는 손가락 끝에선 피가뚝뚝 흐르는 절규,비스듬히 미끌어지듯 내딛는 보법에는 메마른 눈물과 싱그러운 꽃가루가 동시에 흩날린다. 깊이 숙여쓴 고깔과 백합같은 정화,허공 한끝을 헤매는 속눈썹엔 부세의 번뇌가 향연처럼 타오르고 그의 승무는 지금 속절없는 방황을 헤뜨린듯 하얀 소매끝에서 장한이 적멸된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합장)인양」 동중정을 극도로 자제하여 그속에는 탄식 같은 흐느낌을 소리없이 감추고 있다.
  • 비당원에 시계제공

    【부산=이기철기자】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12일 통일국민당 해운대지구당 위원장 이병희씨(43)를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지난달 27일 경남 양산군 양산읍 다람쥐캠프장에서 열린 당원연수장에 관광버스 10대로 당원및 비당원 5백여명을 동원,「정주영일대기」란 영화를 상영한 뒤 정주영후보 지지를 부탁하면서 이 가운데 김희순씨(45·여·해운대구 반여3동 1553의3)등 2백여명에게 벽시계 1개씩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 체제옹호 극영화 제작 열올려(북한 이모저모)

    ◎다부작 「민족과 운명」 8,9부 완성/김정일 직접지도… 북의 우월성선전 ○…김정일의 직접 지도로 제작되고 있는 다부작 극영화 「민족과 운명」의 제8·9부가 완성됐다고 북한의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해 연말부터 30부작을 목표로 이 영화의 제작에 착수,그동안 김정일의 50회 생일(2월16일) 및 김일성의 80회 생일(4월15일)을 계기로 제1·2부와 3·4부를 각각 개봉한 이래 지난 8월초까지 7부를 제작했다.이번에 완성된 제8·9부에서는 제6·7부에 이어 전 논산훈련소장을 지낸 바 있는 최홍희(현 캐나다 거주 교포)의 일대기를 극화,「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 방송은 소개했다. 북한이 제작중인 극영화 「민족과 운명」은 과거 한국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녔다가 해외로 망명,친북인물이 된 사람들(1∼4부 최덕신,5부 윤이상,6부 최홍희)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사회를 「생지옥」으로,북한사회를 「이상향」으로 묘사함으로써 북한체제 선전에 이용하고 있는 영화이다. ◎야구 저변확대 부심/전국대회 등 안간힘 ○…북한은 지난달 27일부터 31일까지 평양 청춘거리 야구경기장에서 「전국야구경기대회」를 개최했다고 중앙방송이 뒤늦게 보도했다. 각 도별로 1백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는 평양시팀이 우승을,평남도와 강원도팀이 2·3위를 각각 차지했다고 이 방송은 전했으나 더 이상 구체적인 경기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은 종래 야구경기를 「부르주아 스포츠」로 낙인찍고 금기시해 왔으나 지난 86년 IOC 91차 총회서 이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올해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진행키로 결정함에 따라 야구경기를 88년 「전국인민체육대회」의 정식종목으로 포함시키는 등 경기력 제고 및 선수층의 저변확대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오늘 의거 83주년… 한·중·일 3국 입체취재

    ◎안중근의사/“동양평화 지켰다” 중국인이 더 추앙/이등 저격 하얼빈시선 해마다 확술대회/기념비 곧 건립… 여순감옥엔 유품 보존 우리는 해마다 10월이 저물어가면 의사 안중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19 09년 10월26일 하얼빈역두에 터뜨린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더 이상 침략책동자로 세워두지 않은 의거의 그날이 돌아오기 때문이다.일제는 그를 테러리스트로 매도,끝내는 교수대에 세웠다.그러나 안의사는 지금 영원한 휴머니스트이자 또 평화론자로 추앙받고 있다. 1909년 10월26일 상오 10시가 막 지나는 시각.모두 6발의 총성이 중국 흑용강성 하얼빈시 하얼빈역두에 울려 퍼졌다.의장대 사열을 끝내고 귀빈열차를 향해 몸을 돌리던 일본의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향한 안중근의사의 육혈포가 불을 뿜는 소리였다.그날의 총성이 사라진지 83돌을 맞은 하얼빈역은 신역사를 짓는 건설현장의 굉음과 종종걸음치며 플랫폼을 오가는 중국인들의 말소리만이 어울려 요란할 뿐이다. 이등박문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 1번 플랫폼앞 현장에는 뜰이 조성돼 대형플라스틱에 담긴 화분이 몇개 놓여 있었다.피격지점에서 10m쯤 떨어진 러시아군 사열대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었던 안의사의 저격장소는 이곳에 새로 지어진 1등 대합실건물에 편입돼버렸다.이등이 쓰러진 곳은 몇년전만해도 피살지점을 표시하는 둥근 녹쇠판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등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의사가 5개월에 걸친 수감생활끝에 1910년 3월26일 상오10시15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여순형무소.당시 악명 높았던 이「인간지옥」은 요령성 대연시 서쪽 40㎞지점에 「여순일아감옥구지」라는 현판아래 지난88년부터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안의사가 복역한 지하감방은 간수사무실부속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감동 복도벽에는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이라고 쓴 액자속에 안의사의 수감당시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이밖에 유화초상화·족자·유시「장부가」가 담긴 액자등이 걸렸다. 안의사에게 교수형이 행해졌던 교형실은 감옥 동북쪽 구석에 감춰진채 15평남짓의 좁은 공간으로 남아있다.교수대는 2층으로 꾸며져 있고 시체처리통까지도 보존됐다. 현재 6만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하얼빈시에는 2개의 안중근연구회가 있다.안의사추모사업은 지난89년 의거80주년을 맞아 한·중·일의 학자들이 하얼빈역에서 추모회를 가진 이래 학술대회를 잇따라 열어 왔다.또 안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대형오페라가 공연되는등 추모붐이 대단했다.최근에는 새로 발굴된 자료를 모은 안중근사료집발간을 준비중이며 안의사기념비를 피격현장에 세우기위해 중국정부와 교섭도 벌이고 있다.당초 하얼빈역 광장에 안의사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었지만 일본과의 불편한 입장을 고려한 중국측의 소극적 태도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얼빈시내 동북열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근대사소개부문에도 안의사의 영정과 기념자료등을 손문다음으로 다루는등 안의사에 대한 중국현지의 평가와 연구열기는 그 어느때보다 높다. ◎국내/국내연구 활기­일선 “평화주의자” 새 시각/학계 동향/대중수교 계기 새 자료발굴 기대 우리나라에서의 안중근연구는 올해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계기를 맞고있다.그 이유는 중국이 「역사의 현장」인데다 그동안 우리측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에 대한 접근도 가능해졌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에따라 그동안 한정된 자료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학계의 상황도 크게 개선되어가고 있다.또 안의사의 의병활동기지였던 러시아측의 연구성과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여서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림성 조선연구소가 국내에서의 안중근연구를 희망해오는가 하면 러시아사회과학원 동방연구소에서도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우리나라에 와서 발표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최석우신부)에서는 안의사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점을 고려,프랑스측이 소장해오던 자료를 입수,연구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은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로 안중근연구에 숨통이 트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때일수록 연구자들은 일과성이 아닌 체계적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새로 입수된 자료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해석이 나올 경우 안의사연구에 자칫 흠집을 남길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올해는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다.안중근의사에 대한 저술은 물론 연구결과를 집약한 논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기존의 학술자료로는 「한국독립운동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안에 수록된 공판기록문서와 주한일본공사관 기록등이 정리돼 있다.또 논문은 신용하교수(서울대)의 「안중근의 사상과 의병운동」등이 꼽힌다.저술은 주로 전기류인데 안의사 의거 이후에 쓴 박은식의 「안중근전」이 있고 해방후에는 「의사 안중근」(만수사보존회·1964년)과 「안중근자서전」(안중근의사 숭모회·1970년)등이 나왔다. 그리고 안의사를 기리는 단체는 사단법인 안중근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안중근의사장학회등이 있을 뿐이다. ◎일본/올 전기 등 2권 출간… 사당건립도 안중근에 대한 가해자쪽인 일본에서 안의사 평가는 「암살자」와 「휴머니스트」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시각으로 나타났다.테러리스트 시각을 가진쪽은 안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정권담당자들이다.그리고 휴머니스트로 보는쪽은 안의사의 재판에 참여한 판사와 검찰관,여순감옥의 형리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 일본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다.안의사를 휴머니스트로 보는 시각도 두 갈래로 나뉜다.그 하나가 중천팔양교수(축파대)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이끌려지는데,여순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이 『한일관계의 원전으로 오늘날 더욱 빛나는 혜안이었다』고 극찬한다.동아시아의 제국이 우방과의 신의를 축으로 한 동맹관계를 수립,러시아에 대응방위를 해야한다는 안의사의 주장은 오늘날 일본에 좋은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형무소장과 변호사는 물론이려니와 검찰관·재판관들이 서 있다. 재판과 수형생활등의 과정에서 안의사의 높은 지적수준과 고결한 인품이 자신들을 매료시켰다고 회고한다.오늘날 남아있는 안의사의 유묵은 그들에 의해 고이 간직되어 온 것이 많을 정도다.또 이들의 후손들에 의해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어 일본안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현재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와카야나키의 대림사에 세워지고 있는 안의사의 기념사당도 그러한 경우다. 「테러리스트아닌 독립운동가」라는 시각에 따라 「안중근 무죄론」까지 제기되어 주목을 끌었다.특히 올들어 최근 일본에서는 안중근관계 저술이 2권이나 새로 출간됐다. 그 하나가 중야태낭교수(아세아대교수·국제관계학)의 「안중근」(아기화방간행).한국관계의 원상이라는 부제로 간행된 이 저술은 이토를 저격한 안의사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생애와 사상/의병투쟁땐 일군포로 석방/「동양평화론」 저술한 선각자 안중근의사는 1879년9월9일 황해도 해주 한 향반의 집에서 태어났다.그리고 나서 31살을 일기로 1910년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까지의 삶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 생애에서 안의사가 평화론자였다는 사실은 여러군데서 찾아진다.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체결되고 고종 양위와 함께 군대가 해산됐을 때 독립전쟁을 주장하면서 의병활동에 뛰어든다.그는 의병전투기간에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석방,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그러나 이 사실은 오히려 의병활동을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이라는 국제공법에 근거,포로를 인도적으로 처리한 사례로 평가 되고있다.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힌 뒤 쓴 미완성원고 「동양평화론」은 그의 이같은 사상적 배경을 구체화한 것이다.「독립한 청국 한국 일본이 일심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게 된다」는 논리를 편다.그래서 개화의 역으로 진보,구주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할 때 동양평화가 실현되고 또 유지된다고 주창했다. 이토는 침략의 원흉이고 동양평화에도 역행했다는 것이 안의사의 주장이다.그의 자서전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등의 15개조의 죄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안의사는 자신의 행동을 『한국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토를 공격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 “젊은층 유권자를 잡아라”/각당 대선전략

    ◎20∼30대 지지확보 총력전/14대총선때 57%… 당락 좌우/문화제행사·「폰뱅크」기법 등에 주력/홍보물도 글보다 만화·사진위주로 『젊은층 유권자를 잡아라』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자·민주·국민등 각 정당 「킹메이커」들이 고심하고 있는 대선전략의 핵심이다. 이들은 20∼30대 젊은 유권자를 겨냥,종래의 딱딱하고 지리한 당원단합대회와는 달리 젊은층의 구미에 맞는 문화제행사를 여는가 하면 젊은층에 인기가 있는 연예인들을 선거운동에 직접 활용하는등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각당들이 젊은층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20∼30대가 전체유권자의 절반이 넘는데다 이들이 「정치불감증」에 걸려 현재까지 특정후보에 대한 호·불호를 나타내지 않고 있으며 이들 표의 향방이 당락을 좌지우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20∼30대 유권자는 1천6백만명으로 전체 유권자 2천9백만명의 57%에 이르렀다. 민자당은 이같은 아이디어의 하나로 커피광고 문구를 본따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만나고 싶다」라는 김영삼후보 홍보용 만화를 펴낸데 이어 앞으로도 2권을 더 만들 계획이다. 또한 젊은 유권자들이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간편한 것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각종 홍보물을 글보다는 사진과 그림을 위주로 만들고 있다. 지난 22일 김종필대표최고위원은 젊은층에게 영향력이 큰 배우 탤런트 가수등 연예계 인사 1백50여명과 점심을 하면서 김영삼후보 지지를 호소해 눈길을 끌었다. 민주당에서도 지난 23일 저녁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청년특별위원회 주최로 「출발! 20∼30대 물결!」이라는 문화제를 열어 젊은 유권자들의 김대중후보 지지분위기를 유도했다. 트레일러를 무대로 사용하는 「트레일러투어」방식을 사용한 민주당은 이 문화제를 오는 11월중순까지 전국11개 도시에서 순회공연할 예정이다.국민당도 만화가 이현세가 그린 정주영대표의 일대기 「감자꽃 트랙터」를 서울시내 50여개 서점에 배포,5천부정도를 팔았다. 각당에서는 이와함께 후보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폰 뱅크」기법을 도입하고,정치인과 함께하는 「정치풍자극」「대통령선거캠페인송」부르기등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으로 있다.또 「곰돌이(김영삼후보)」「거북이와 토끼(김대중후보)」「호돌이(정주영후보)」등을 마스코트로 내세워 가능한한 유권자들에게 정서적으로 접근,지지분위기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 94년 서울정도 6백주년 기념/「경평축구」 부활 추진

    ◎“새 청사·박물관 건립도” 이 시장 서울시는 7일 정도6백주년이 되는 오는 94년 서울·평양간 축구대회를 부활하고 한강과 대동강에서 번갈아 조정경기를 펼치기로 했다. 이와함께 경희궁터를 복원하고 시립박물관을 개관,기념사업으로 북한유물전을 갖기로 했다. 서울시는 또 95년까지 새 시청 청사건립을 위한 부지선정과 설계를 완료,착공준비를 모두 마치기로 했다. 이상배서울시장은 이날 서울시정에 관한 기자설명회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21세기의 문턱에서 맞는 오는 94년의 정도 6백주년을 계기로 서울올림픽에서 보인 역사의 저력에 힘입어 지구촌의 거점도시로 웅비하는 제2의 도약을 이룩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에따라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경·평축구대회의 부활과 조정경기등의 정례화를 위해 평양측과 공식협의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서울시의 새청사 자리로는 지금의 건물을 헐고 새청사를 짓거나 서초동 법원단지 부지와 맞바꾼 대법원자리등이 검토됐으나 정도 6백년기념 사업추진 시민기획위원회등에 의해 97년 이전하는 용산 미8군터가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 서울시는 또 정도6백년을 계기로 「우리서울 서울답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급성장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 기본사업을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시정과 시민이 새로 나기 위한 「서울 가까이운동」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우선 교통난이 서울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보고 2·3기 지하철을 조기에 건설함과 동시,96년까지 내부순환고속도로 3개노선 40.1㎞와 98년까지 외부순환고속도로 3개노선 1백26.1㎞를 완공하며 일산·분당·부천등 신도시와 연결되는 5개노선 20.8㎞를 96년까지 모두 개통하기로 했다. 시민정신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서울 가까이운동」으로는 누구나 쉽게 서울을 알 수 있게 시정홍보관을 건립하고 수돗물을 안심하고 마실 수 있도록 정화하며 시정을 안방에서도 알 수 있는 통합민원센터등이 건립되고 현장시청과 구청이 운영된다. 이밖에 서울시민의 결속과 우의를 다지기 위한 「서울 6백년 대동제」와 서울의 일대기를 사진·영상·모형등으로 나타내는 「서울 6백년전」이 94년에 열린다.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를 보고(신고 김일성 자서전연구:1)

    ◎연재를 시작하며/역사의 고비마다 갈이입은 「사상의 옷」/통일 앞두고 그의 정체 정통하게 알아야/52년 40세때 초간후 수없이 개작/이번엔 “이민위천이 좌우명” 주장 김일성은 이번 80회 생일에 「세기와 더불어」란 회고록을 냈다.그가 태어난 1912년 무렵부터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다는 1932년까지를 2권으로 나누어 회고한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앞으로 1932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또 해방후 1992년까지를 구분해 합계 십몇권 정도 나올 것이 예상된다.제1권이 3백61페이지이므로 적어도 5천페이지 정도되는 방대한 김일성 일대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여느 공산국가 독재자들과는 달리 자기의 「전기」를 즐겨 출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출판하기만 하면 그것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보급하는데도 열심이다. 그는 또 유달리 꺾어지는 해의 생일을 중시하여 이 때 공식전기를 출판한다.이 전기들은 다음과 같이 시대가 내려 올수록 그 분량이 방대하게 되는 특성도 있다. ○62년엔 중공계 숙청 1952년(40세 생일)「김일성장군의 전기」1권 68면.1972년(60세 생일)「김일성동지 작전」1권 8백60페이지.1982년(70세 생일)「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전기」3권 합계 1천5백페이지. 이상을 보면 그가 50세 생일을 맞은 1962년에는 공식전기가 나오지 않았다.52년의 전기가 나온 후 북한에서는 남로당파·소련파·연안파·국내파들이 모두 숙청되었으므로 김일성은 62년에는 중공계 항일빨치산이었던 그와 그 일당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키는 「공식전기」를 출판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일당조차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취급하는 아량은 없었다.그는 1967년에는 식민지시대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박금철 등을,그리고 69년에 그와 가장 가까운 빨치산시대의 전우인 최광등을 숙청하였다. 이 숙청과정인 1968년 그는 자기만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둔갑시킨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였는데 이 두권짜리 책이 또 대폭적으로 내용이 바뀌어 나온 것이 72년 전기인 것이다. 김일성유일독재는 1980년 제6차당대회에서 김일성부자 독재체제로 굳어졌다.김일성자신뿐이 아니라 김정일의 「충성」과 「효성」도 반영된 것이 82년 전기로 된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이유의 하나는 이것이 그의 우상화작업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얼마든지 은폐하고 왜곡하며 날조한다.그는 해방직후부터 일관되게 그렇게 해왔다.46년 김일성의 기요과장이었던 연안파의 고봉기는 그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은 일이 있었다. 「보고문이나 회의록 같은 건 다 앞으루 역사적 문건으로 남겨야 할 거니까…이제라두 늦지 않았으니…없는 건 만들어 놓구 또 있다 하더라두 기록이 잘못됐거나 한 건…다 고쳐 놓을 필요가 있단 말이요.해방전의 자료들두 그렇지,필요한 것만 남겨두구 필요찮은 건 다 없애치우는게 좋잖을까?」 이와같은 은폐·왜곡·날조 같은 행위는 그의 전기가 새로 나올 때마다 첨가되어 현재의 우상화된 김일성이 생겨 났다.실상을 제쳐두고 허상만 요란하게 선전하는 이러한 우상을 위하여 북한의 당원들과 대중들은 갖은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들이 출판되는 또하나의 이유는 그 유일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김일성의 사상정신적 억압수단이 바로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이기 때문이다.그의 전기는 혁명전통의 핵심자료로 되어 있다. 1986년 5월31일 김일성은 「조선로동당건설의 역사적경험」이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의 위업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당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옳게 계승해나가는 것입니다.우리 당이 계승하여야 할 혁명전통은 주체의 혁명전통입니다….혁명전통을 계승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전통의 순결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오직 우리 당이 이룩한 주체의 혁명전통만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승발전시켜 나가며 이 밖에는 그 어떤 다른 「전통」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민정신 개조 수단 한때 우리 당안에 기어들었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항일빨치산의 전통만이 혁명전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느니,혁명전통의 폭을 상하좌우로 넓혀야 한다느니 하면서 우리 당의 혁명전통에 오가잡탕을 섞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그들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과 인연이 없는 것을 들고 나와 혁명전통과 뒤섞어 놓으려고 한 것은 혁명전통을 거세하고 자기들의 종파적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책동이었습니다.앞으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흐리게 하거나 말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김일성이 「주체의 혁명전통」이니,「혁명전통의 순결성」이니 하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사상과 그 자신의 행적을 말하고 있다.「주체」란 다른 중공계 항일빨치산이 갖고 있었던 사상은 아니며 「순결성」이란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지닐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10년에 한번씩 나오는 김일성의 공식전기란 그의 사상과 행적을 서술한 책이다.따라서 김일성이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순결하게 계승해」나가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이 전기에 실린 자신의 사상과 행적을 철저히 옹호하고 그 내용대로 알아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식전기들에 반영된 그의 사상과 행동이란 전기마다 달라서 거기에는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예를 들어 52년 전기에서의 그의 사상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에서도 최악의 사상인 스탈린주의였다.7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라는 그가 창시했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었다.그런데 82년 전기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사상이 주체사상인 것처럼 되어 있다.김일성은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자신의 사상을 바꾸어 나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러한 전기들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기와 더불어」도 그 사상은 다시 달라지고 있다.머리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는 것이다. 「이민위천,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한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생활의 본령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교하는 대신 「이민위천」사상을 가져와서 이와 동일시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주체의 원리를 자신의 「정치적신앙」이라고까지 하였다. 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국가들이 붕괴되어 가는 길위에서 그는 이제 사상을 「신앙」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그는 현재 주체의 원리와 혁명전통으로 북한주민을 세뇌시킨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세뇌된 사고를 김일성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유도하고 있다.이러한 현실이 김일성의 입으로 나온 것이 앞의 말이 아닌가 싶다. 사상 뿐 아니라 김일성의 행적도 전기마다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다. 현재 한반도에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통일은 몇년 후에 현실로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압도적 다수가 내다보는 근미래이다. ○“정치적 신앙” 강조 그런데 한국국민은 지금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북한체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채로 지내고 있다.김일성만을 알고 따르는 북한주민과 김일성의 정체를 거의 모르는 한국국민이 다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 양측 주민이 서로 상대방의 사상과 행동에 정통하여야 할 것이다.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국민의 책임이 무겁다.한국에서는 국민들이 북한체제와 김일성부자의 정체및 북한주민의 정신상태를 알아야만 그들과 대화를 하여 사상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지에서 시작되는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비판은 한국국민과 앞으로의 북한주민에게 다같이 김일성과 그 독재체제의 진상을 알리는 공통의 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필자는 1987년에 김일성평전과 그 속편을 출판한 일이 있는데,연구를 시작한 1983년부터 이 무렵까지는 근본자료와 연구서적들이 태부족하였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는데 이 어려운 작업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진실을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의 학설도 버릴 부문은 대담하게 버릴 작정이다.다만 버릴 때는 일일이 그 이유를 열거하겠다. □주 해 ①「김일성의 비서실장」고봉기의 유서 1989년 천마사간,17면 ②「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경험」김일성,1986년 단행본,조선로동당출판사간(이하 「당간」이라고 함)1백12∼1백13면 ③「세기와 더불어 1」.1992년 4월9일 당간 2면 ④「김일성평전」 「김일성평전 속」,1987년 북한연구소간(이하 평전,혹은 평전(속)이라고 함)
  • 오늘부터 서울신문 지면대혁신/사고

    ◎다원화·국제화시대 조류 맞춰 새 연재물 신설 서울신문사는 1일자부터 지면을 대폭적으로 쇄신키로 했습니다. 서울신문은 역사적인 대기획으로 날조된 북한 김일성의 일대기를 사실에 근거해서 바로잡는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를 게재하고 「이어령 문명비판」「국정탐방」등을 신설했습니다. 이번 지면쇄신은 21세기의 다원화,국제화시대를 눈앞에 두고 다양한 지식정보의 흐름을 깊이있게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위해 마련 된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지면혁신을 통해 항상 새롭고 유익한 신문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주요지면쇄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세기로 가는길/이어령 문명비판 이어령 전문화부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현대문명을 심도있게 비판하고 새 진로를 모색하는 전면와이드 문명비판 칼럼을 주1회씩 게재합니다. ○21세기로 가는길/정근모 과학평론 전과학기술처장관이며 국제원자력기구(IAEA)대사인 정근모박사가 미래의 과학세계를 예지의 필치로 엮는 「과학평론」을 신설,주1회씩 독자의 흥미를 끌게될것입니다.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북한김일성체제가 지난 4월15일 김주석 80회 생일을 맞아 김주석 자술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출간한 것을 계기로 「김일성」을 사실에 입각,학문적으로 연구분석한 「신고 김일성 자서전연구」를 싣습니다.전일본 조총련계의 조선대문학부 부부장을 역임,김일성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진 허동찬씨가 집필하는 이연재물은 주2회씩 장기게재됩니다. ○박갑천칼럼 본사 박갑천논설위원이 우리 전통문화와 그속의 생활정서를 유려하고 재기넘치는 칼럼으로 담아 새로 선을 보입니다.특유의 맛과 빛깔을 더할 고금의 문물기를 기대하십시오. ○국정탐방 국정의 산실인 정부 각부처를 순방,정부시책의 입안과정과 내용및 추진상황등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대기획시리즈를 주1회씩 게재합니다.나라살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인물통신 종전 서울마당란을 인물통신란으로 확대개편,국내외인사들의 동정 인사 부음 혼인등 일과 사람에 관한 각종 정보소식을 한데모아 싣습니다.독자여러분의 「인물사랑방」 구실을 다할것입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독립군지휘,만주태평령서 일 연대 섬멸/33년 6·10대첩 독립전쟁 최대승리로 기록/무장투쟁 한평생… 40년 광복군사령관 역임/광복후엔 대동청년단 결성,“민족단결” 호소… 제헌­2대의원도 지내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산 지청천장군이 선정됐다.6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장군은 일본이 대륙침략에 기승을 부렸던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의 이이즈카연대를 섬멸한 공을 세우고 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다.해방후 귀국한 지장군은 제헌의원과 2대의원을 지내고 57년1월15일 69세로 별세했다.지장군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1933년 6월10일 만주의 길림성 태평령에서 한국독립군 2천5백명과 중국군 2천명의 연합작전을 지휘하던 지청천장군은 일본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오늘의 공격은 2천만 대한인민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주는 피의 사자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손 만대를 위해 최후까지 싸우라』 비록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훈화였으나 결전을 앞둔 독립군 병사들의 뼛속까지 사무쳐 대부분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굳게 다짐했다. ○소총등 다량 노획 이날 일본의 정예부대인 이이즈카연대는 한중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동서남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4시간동안의 치열한 전투끝에 일본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말았다. 군복 3천벌,박격포 5문,군용물자 20마차,담요 3천장,평사포 3문,소총 1백50정을 노획해 한국독립사상 가장 큰 전승을 기록했다. 지청천장군의 태평령전투는 독립전쟁사중 20연대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2대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30년대의 지장군이 지휘한 태평령전투가 규모와 노획물이 더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장군은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을 위한 청년장교들을 양성한 교육자로,광복후에는 제헌의원·청년운동 등으로 평생을 애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지장군은 1888년 2월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이씨)밑에서 자란 지장군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처음 도입한 아저씨 지석영의 권고로 교동국민학교를 거쳐 배재학당에 진학했다. 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한 지장군은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났다. 어머니는 적의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지장군에게 『나는 너를 죽어 없는 아들로 생각하겠다.구국의 일군이 되지 못하거든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말고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훈계했다. ○일 정규육사 출신 적도 도쿄에 도착한 지장군은 일본의 눈부신 문물을 보고 놀라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하나라도 더 배워 조국을 되찾는 첨병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일본 유년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정규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장군은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치되어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경험을 하게 됐다. 당시의 전투경험이 만주에서의 독립군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지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탈출,독립운동의 요람이던 만주 봉천성 통화현에 도착,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육사출신의 김광서장군과 구한말 군관출신인 신팔균 김창환 이범석 오광선등 쟁쟁한 인재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지장군은 교성대장(교성대장)에 이어 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기반이 공고해질수록 일본의 독립군 탄압도 집요해져 지장군은 신흥무관학교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서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백두산 부근의 밀산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등과 합세,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여단장을 맡아 군세를 통합했다. 지장군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교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주에 의한 소련정부의 배신으로 소련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장군은 체포되어 러시아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만주에 돌아온 지장군은 국민대표회의 등을 통해 독립운동세력을 규합,1924년 정의부가 조직되자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이 됐다. 정의부소속 군대를 지휘하게 된 지장군은 일본경찰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군부대를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9월18일 일본은 중국침략의 마수를 뻗쳐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지장군은 만주지역의 중국군 이두·정초·고봉림장군 등과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쌍성보,경박호,동경성,사도하자,대전자등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지장군은 1919년부터 33년까지 14년간 만주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1933년 8월 일본이 만주를 석권하다시피하여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은 지장군을 하남성의 낙양군관학교로 초청,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임정 군무부장에 넓고 넓은 만주땅을 베개삼아 죽으리라던 지장군은 이범석·오광선 등과 함께 낙양으로 내려가 한인청년들을 교육하고 1937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40년 9월1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됐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한편 대적선전·포로심문·선전전단작성·암호해득등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동을 했다. 지장군은 1946년 4월2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귀국했다. 귀국후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잡을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인 청년운동을 일으킬 것을 구상,대동청년단을 구성했다. 지청천단장은 전국청년지도후원회를 결성하고 『뭉치라,길은 하나이다』라는 구호로 민족단결을 역설했다. 1948년 5·10총선과 50년 5·30총선에 출마하여 초대 및 2대국회의원이 된 지장군은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지장군은 57년 1월15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는 62년 지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장군은 달수씨와 복영씨등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도 모두 광복군으로 항일활동에 참가했다. 달수씨는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69년에 작고했으며 복영씨는 현재 지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다. ◎탁월한 전략·순수한 군인정신의 귀감/역사적 평가/이현희 성신여대교수 백산 지청천장군은 70평생을 조국과 겨레의 행복을 위해 보냈다. 8·15이전의 60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투쟁에 보냈으며 귀국후에는 제헌의원과 2대의원으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다. 한국무관학교 학생으로 입학해서 일본육사를 졸업한 지장군은 평생을 통해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참군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다. 지장군이 일본육사에 진학한 의도는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일본육사에 유학,현대 전략과 전술을 공부한 지장군은 훗날 만주에서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본육사에서 배운 군사학을 활용했다. 열악한 무장,숫적인 열세,보잘것 없는 보급을 받으면서도 지장군은 일본정규군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의 현지 지휘관들은 『지청천이가 일본의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에 우리의 격전이 무색하다』고 격찬 한 사실을 보아도 지장군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장군은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5년동안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일본군 후방교란,연합군과의 연합작전,심리전 등을펴 명실공히 독립군의 최고지도자로 역을 다했다. 그는 건국후에도 광복군의 정통성을 의병독립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광복이후의 혼미한 정국에서 지장군의 크고 높은 뜻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지장군이 별세한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크고 높은 뜻이 마침내 달성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행스럽다 하겠다.
  • 전통춤판 2건 5월무대 “마무리”

    ◎발탈예능보유자 이동안옹 「승무」발표회/임이조씨,부처일생 그린 창작무 「출」공연 전통무용 공연이 잇따라 열린다.이동안옹의 「전통예술발표회」와 임이조씨의 창작무용 무대가 그것. 이동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인 이동안옹(86)의 전통예술발표회는 27일 하오7시30분 문예회관대극장(762­52 31)에서 펼쳐진다. 심우성씨의 사회와 이생강(대금)방인근(피리)등의 연주로 열릴 이옹의 이번 전통춤 발표회는 특히 19 20년까지 존속했던 전문예인들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현재의 예술협회에 해당하는 재인청에서 내려온 30여종류의 춤을 원형 그대로 무대위에 소개한다. 이번 발표회에서 이옹은 「승무」와 「태평무」를 공연하며 김계화씨와 임이조씨가 찬조출연해 「교방굿거리」와 「한량무」를 춘다.이밖에도 타령과 굿거리로 이루어져 한국전통무용의 기본으로 평가받고 있는 「기본무」와 「진쇠춤」(윤미라)「엇중모리 신칼대신무」(이승희)「삼설기」(묵계월)등이 공연된다. 또 승무이수자인 임이조(한국전통춤연구회 회장)씨는오는 31일 하오7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창작무용 「출」을 공연한다. 이번 공연에는 무형문화재 이매방선생이 특별출연,승무와 살풀이춤을 선보일 예정이다. 창작무용 「출」은 부처의 일대기를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것으로 모두 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인간사의 끊임없는 고통과 번뇌로부터 해탈의 방법을 찾으려는 주인공이 중생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진리를 찾는다는 내용으로 마귀춤과 환희의 세계를 표현하는 80여명의 군무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무대를 꽉 채우게 된다. 신디사이저에 구음을 입힌 음악에 맞춰 5분가량 공연될 임씨의 맨손 살풀이춤은 이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면서 전통춤과 현대음악의 만남의 장을 제공하게 된다.
  • 정치주먹 유지광씨 유족/영화 「대명」 제작금지신청(조약돌)

    ○…자유당시절 정치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유지광씨의 유족들은 16일 유씨의 일대기를 소재로 제작하고 있는 영화 「대명」이 유족들의 사생활과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영화감독 김효천씨(파랑새필름대표)를 상대로 서울민사지법에 영화제작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유족들은 신청서에서 『김감독이 유족의 동의없이 고인의 자서전 「대명」을 토대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있어 저작권을 침해했을뿐 아니라 가족들의 사생활을 함부로 묘사해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 4월은 과학의 달… 각종 행사

    ◎9일 국립중앙과학관서 별무리관측 교육/18일부터 수영만서 부산과학축제 펼쳐 과학의 달 4월을 맞아 각종 과학기술 진흥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정부에서는 오는 21일 제25회 과학의 날 공식행사로 기념식과 기념포상을 한국과학기술원 존슨강당에서 개최하며 민간에서는 노벨상수상자 초청강연,92부산과학축제,발명왕 에디슨전 등 흥미있는 축제를 준비했다. ◇해외석학초청 기념세미나=한국정보학회등 4개 학회가 존 A·암스트롱(IBM 부사장),하인리히 루러(86년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박사를 초청,22일 세미나를 갖는다. 루러는 물질의 구조를 원자수준까지 확인할 수 있는 주사식 터널 현미경을 발명한 스위스학자. ◇부산과학축제=부산일보사와 부산커뮤니케이션주최로 18∼26일 수영만올림픽 요트경기장에서 열린다. 대전엑스포를 예견할 수 있는 과학단,최첨단 대형고화질화면이 장착된 이동식 점보트론이 보여주는 컴퓨터 영상축전,「과학부산」 시민대토론회 등이 마련된다. ◇야간천체관측회=국립중앙과학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대전시교육청 주관으로 9일 하오 6∼10시,국립중앙과학관 역사의 광장에서 열린다. 천체망원경 20여대,천체추적장치 1대가 동원돼 청소년 및 일반인에게 성단 성운관측법 실습교육을 한다. ◇국립중앙과학관 무료공개=과학주간인 21∼26일 천체관을 제외한 모든 시설을 무료로 공개한다. ◇발명왕 에디슨전=미국 에디슨재단 일본 에디슨협회의 후원으로 1일 서울랜드 특별전시관에서 개막돼 6월30일까지 계속된다. 백열전등 축음기 전화기 축전기 영사기 커피포트 다리미 선풍기 등 에디슨이 발명하고 개량시킨 2백27종의 발명품들을 만날 수 있으며 발명원리와 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전시,에디슨이 직접 제작한 무성영화 「대열차 강도」 및 에디슨이 직접 출연한 에디슨일대기 전기영화 상영도 있다. ◇「과학과 여성의 역할」 세미나=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주최로 30일 상오 10시30분부터 럭키금성 연암사이언스홀(서울 여의도 소재)에서 열린다. ▲컴퓨터와 가정생활(유경희·정보산업표준원장) ▲인간 100세 가정생활(허정·서울대 보건대학원교수) ▲환경오념과 가정주부의 역할(정용·연세대 공해연구소장). ◇과학기술자 모교방문=한국해양연구소 남극연구단 월동대장 장순근씨등 21명의 과학자가 청소년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모교를 방문,후배들을 격려한다. ◇「과학차」 순회지도=벽지 초·중학교를 순회해 실험실습 및 공작지도와 과학영화를 상영해 주는 「과학차」가 과학의 달을 맞아 전남 승주군 황전면 북국민학교를 비롯,42개교를 방문하고 영화상영도 13회 실시할 계획이다.
  • 오출신 작가/츠바이크 재조명 활발/불서 서거50년 맞아 출간러시

    ◎전후 좌파득세로 「평가절하」 반성/“인간성 상실시대 고뇌의 증언” 평가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 81∼19 42) 사후 50년을 맞아 금년초 파리에서는 중·장편 소설과 전기·기행문 등 4권의 책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돼 나옴으로써 그의 인도주의적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츠바이크는 한국에도 작품이 여러 편 번역 소개되어 있는 금세기의 주요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러나 이상하리만큼 프랑스에서는 그가 죽은 이후 거의 잊혀진 인물로 돼 있었다.더구나 그는 후일 브라질로 가기까지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유명인사로 대접받았으며 로맹 롤랑 등 많은 프랑스 문인들과 교류했던 터였다. 그가 사후에 재대로 평가되지 않은 것은 전후 프랑스 지성계의 좌파적 분위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타당성 있게 들린다.19 45년 이후 프랑스에 군림한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대가들은 츠바이크를 합스부르크가의 몰락을 애석해 하는 왕정주의자 쯤으로 경멸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내려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나치의 희생자와 반나치 투쟁자가 찬미되던 전후에 철저한 나치 혐오자 츠바이크가 남긴 문학이 외면당해야 했던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프랑스인의 관심을 끄는 데는 50년이라는 세월이흘러야 했다.벨퐁 출판사 등이 그의 저작들을 이번에 출간함으로써 살육과 인간성 상실의 위협으로 얼룩진 20세기 전반기를 고뇌속에 증언한 그의 사상과 문학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이 재발견되고 있다.「특출한 시대의 증인」「사상과 문학의 귀족」「마지막 휴머니스트」등은 그에게 붙여지고 있는 새로운 칭호들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른바 빈 상징파의 한 사람으로서 문명이 높았던 그는 나치가 야망을 드러내자 국외로 망명하여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전쟁 없는 세계를 갈망한 평화주의자 츠바이크는 병영 탈주와 전투회피를 호소했으며 스위스와 스웨덴 방식의 중립을 옹호했다. 1940년 생명의 위협이 없는 브라질에 정착했으나 그가 본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는 가망이 없었고 그의 심리상태 또한 황폐해갔다.그는 예감 능력과정신적 상처를 함께 지녔던 클라이스트·횔덜린·니체(이 세 사람은 미치거나 자살했다)를 연구한 바 있는데 그 자신도 그들을 닮아 신경쇠약과 분열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1942년 2월23일 싱가포르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게 함락된 뒤 유럽의 마지막 희망인 영국의 패배에 상심하여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했다.브라질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이달에 파리에서 불역돼 나온 4권의 책은 ▲중편소설집 「리옹에서의 결혼(벨퐁출판사)▲장편소설 「클라리사」(〃)▲전기 「아메리고」(〃)▲기행문학 「브라질,미래의 땅」(에디시옹 드 로브출판사)이다. 중편소설집 「리옹에서의 결혼」의 작품 7편은 츠바이크가 생전에 발표했으나 책으로는 이번에 처음 묶여진 것이다.그 7편은 ▲「리옹에서의 결혼」(자코뱅주의와 공포정치를 비난함)▲「눈속에서」(유태인 박해를 다룸)▲「레만호반에서」(전쟁의 불조이성을 고발)▲「억압」(〃)▲「박탈의 역사」(전제권력 아래서 파멸돼 가는 개인의 운명을 그림)등이다. 미완의 장편소설 「클라리사」는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웠던 19 20년을 시대배경으로 하여 한 여인의 운명과 재난을 보여줌으로써 츠바이크의 반전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아메리코」는 콜럼버스가 서인도라고 믿었던 곳이 아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륙이라는 것을 밝혀낸 이탈리아 사람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일대기로서 츠바이크의 전기작가적 역량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브라질,미래의 땅」은 자신이 여생을 의탁한 브라질에 대한 찬가이다.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서해동포주의자 츠바이크는 자신이 찾던 평화를 이 나라에서 발견한다.『빼어난 혼혈의 나라,브라질에서보다 더 나은 해답을 줄 곳이 어디 있으랴.인종·계급·살빛·신앙·신념 등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신앙과 신념 또는 민족 문제로 불안과 갈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꼭 사후 50년이 아니라도 츠바이크가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시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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