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칙이 뒤바뀐 ‘살처분 조치’/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
인플루엔자라는 말은 ‘영향’이라는 뜻이 담긴 이탈리아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추위의 영향 때문에 독감을 앓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겨울의 추운 바람이나 봄의 차가운 기운 때문에 감기에 걸린다고 알았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조류독감의 원인이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조류독감의 방역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영향’이 남아 있다. 살처분 조치만 하더라도 정부는 살처분 보상금으로 지급될 예산, 닭이나 오리를 사육하는 농가의 경제적 피해, 국민의 건강과 식탁 안전 등의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기준을 정한다.
정부는 지난 4월3일 전북 김제에서 조류독감 의심증상이 나타나자 해당 농장의 닭만을 대상으로 살처분을 실시했다. 다음날 전북 정읍의 오리농장에서도 조류독감 의심사례가 접수되었지만 ‘기온이 상승해서 날씨가 따뜻해졌기 때문에 조류독감이 확산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500m 반경에 대해서만 살처분을 실시했다. 그 사이 전염병이 처음 발생한 농장에서 불과 1.7㎞ 떨어진 오리농장에서 대대적인 밀반출이 이루어져 전라남도와 경기도에까지 조류독감이 확산되었다.
정부가 3㎞ 반경 내의 살처분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부가 살처분 범위를 축소하도록 영향을 끼친 것은 축산농가의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통업자와 농장주가 조류독감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오리를 밀반출하도록 영향을 준 것도 살처분 보상금이 적어 경제적 손실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 축산업자, 유통업자는 모두 경제적 피해를 가장 크게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류독감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가금류는 섭씨 75도 이상으로 익혀 먹으면 아무런 탈이 없다.’며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앞장서서 가금류 소비 촉진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수백만마리의 멀쩡한 닭들과 오리들까지 살처분했단 말인가. 고병원성 조류독감은 닭, 오리, 돼지, 메추리 등의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옮길 수 있는 인수공통전염병이다.1918년 가을부터 1919년까지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2000만∼1억명에 이르렀다.1918년 독감의 희생자 수는 1997년까지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이 1170만명,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전투로 인한 전사자 수가 920만명,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가 1590만명이라는 통계와 비교해 볼 때 실로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2005년 9월 말, 세계보건기구는 조류독감 변종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될 경우 최대 1억 5000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지난 2003년부터 올 4월까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중국 등 14개국에서 모두 379명이 조류독감에 감염되었으며, 그 중에서 무려 63%나 되는 239명이 사망했다.
며칠 전 중국 보건당국은 지난해 12월 조류독감으로 사망한 24세의 중국 남성으로부터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아버지에게 감염을 일으킨 것이 확인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정부, 정치권, 축산업계, 유통업계는 부적절한 방역 및 살처분 조치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