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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저임금 인상, 양극화 해소 만병통치약 아냐”

    “최저임금 인상, 양극화 해소 만병통치약 아냐”

    “미국서 시급 두배로 인상할 경우 생산성 낮은 미시시피州 문제 생겨” 상속 과세·교육 등 복합 접근 주문 주52시간엔 “그것도 놀라운 시간” “양극화는 세계 경제 성장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이 양극화 해소의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폴 크루그먼(65) 뉴욕시립대 교수는 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서울 영등포구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양극화, 빈곤의 덫 해법을 찾아서 특별대담’에서 우리나라의 소득 격차 해소 문제와 관련해 복합적인 접근을 주문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8년에는 무역이론과 경제지리학을 통합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양극화 해소에 대해 “임금 인상과 같은 사전분배와 하위 계층에 보조금을 적용하는 재분배라는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시간당 임금을 7.75달러에서 15달러로 인상할 경우 앨라배마나 미시시피 같은 생산성이 낮은 주(州)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면서 “적정한 정도를 유지해야 하며 한국은 상대적으로 높아 보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육을 통한 인적자본 훈련, 상속에 대한 과세, 부의 편향을 완화하기 위한 세금 인상, 사회 안전망 강화 등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날 특별강연에서 “1980년대 이후의 세계 경제성장은 전 세계 신흥 중산층에게 막대한 이익을 만들어 주는 등 경제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만들어 냈다”면서도 “이러한 경제성장 이면에는 양극화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부(富)의 분배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불평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코끼리 곡선’을 인용했다. 코끼리 곡선은 세계화가 활발히 진행됐던 1988~2011년 전 세계인을 소득 수준에 따라 100개의 분위로 줄을 세웠을 때 실질소득 증가율이 얼마인지를 보여 주는 곡선이다. 이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신흥국, 특히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신흥국의 중산층의 실질 소득은 가장 가파르게 올랐던 반면 서유럽과 미국, 일본 등 고소득 국가의 중하위층은 20년간 실질소득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크루그먼 교수는 “극빈 국가의 극빈층과 선진국의 노동계층,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중산층 국가가 양극화의 세 가지 덫”이라고 지적하면서도 “한국은 중산층의 덫을 빠져나가는 데 가장 근접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이날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나라의 ‘주 52시간 근로’ 도입에 대해 “52시간도 선진국 대비 많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한다니 놀랍다”면서 “개개인이 선택적으로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지만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비행 중 시청각 장애 앓는 승객 도운 10대 소녀의 사연

    비행 중 시청각 장애 앓는 승객 도운 10대 소녀의 사연

    “아마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주 미국 보스턴에서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향하는 알래스카 항공편에 엄마와 함께 탑승했던 10대 소녀가 다급한 기내 방송을 들었다. 기내 승객 중 수화를 할 줄 아는 분, 시청각 장애를 가진 승객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분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클라라 댈리(15)가 손을 들고 나섰다. 댈리는 난독증 때문에 1년 전 쯤부터 미국식 수화(ASL)를 배우기 시작한터였다. 당시 보스턴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고 포틀랜드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팀 쿡(64). 선천적 시청각 장애를 앓고 있던 쿡은 보호자도 없이 홀로 비행에 나서 다소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댈리가 다가와 선뜻 손을 내밀었다. 댈리는 통로에 무릎을 꿇고 앉아 쿡의 손을 잡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손에 수화 알파벳(finger spell)을 한 자 한 자씩 적으며 “컨디션이 어때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쿡은 댈리와 한시간 넘게 수화를 하며 비행시간과 도착 시간, 그 외 정보들을 습득했고,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사실 댈리는 이 비행기를 탈 예정이 아니었다. 보스턴에서 LA로 가는 직항편이 취소되면서 오리건주를 경유하는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던 셈이다. 댈리는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쿡 아저씨와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된 건 운명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아저씨를 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쿡 아저씨는 필요한게 없었다. 단지 적적했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누구라도 했을 일을 내가 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쿡 역시 “아마 우리는 만날 인연이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댈리의 친절함에 크게 감동 받았다. 6시간의 비행 동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고마워했다. 한편 같은 항공편에 탑승했던 승객 리네트 스크립너(56)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스크립너는 “그녀의 선행은 세상에 아직 타인을 돌볼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줬다”는 글도 함께 남겼는데, 해당 게시글은 71만 건이 넘게 공유됐다. 사진=페이스북(Lynette Scribner, Jane Daly)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원희룡, 정우성에게 제주-북한 평화 홍보대사 요청... 정우성의 대답은?

    원희룡, 정우성에게 제주-북한 평화 홍보대사 요청... 정우성의 대답은?

    제주도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배우 정우성에게 제주와 북한을 연결하는 남북 평화교류협력사업의 홍보 대사를 요청했다고 27일 밝혔다. 원 지사는 지난 26일 오후 제주포럼이 열리고 있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정우성과 만나 “1999년부터 12년간 제주감귤을 북한에 공급한 것이 인연이 돼 김정일 위원장의 초대로 농어민 단체와 농가들이 2차례 평양에 다녀온 적이 있다” 면서 제주와 북한의 ‘비타민C 대북 교류’를 설명했다. 이어 “흑돼지, 크루즈, 관광, 자연 유산을 비롯해 바람, 태양, 풍력 등을 활용한 에너지 교류, 생태 교류, 인적교류를 통한 평화 등 여러 가지 교류를 할 수도 있고 이번 제주포럼에서도 그 가능성들을 논의해보고자 했다”고 전했다. 원 지사는 또 올해 4·3 70주년 릴레이 캠페인 ‘4월엔 동백꽃을 달아주세요’ 첫 주자로 나섰던 정우성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원 지사와 정우성은 예멘 난민 신청자를 인도적 차원에서 관리해야한다는 데에도 공감했다. 원 지사는 “국민들이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난민 문제에 책임을 다하고 발생할 수 있는 불안이나 사회적 문제에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주에서나 국가적으로 난민 지원이나 관리 체계를 잘 갖추는 것은 필요하나 이 문제로 갑론을박을 넘어 감정 싸움이 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 배우 정우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원 지사는 정우성에게 제주 비타민C 외교의 메신저 역할을 요청하며 제주감귤을 선물했으며, 유네스코 자연유산 책자와 제주의 흙으로 만든 물 허벅 모형을 함께 전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광장] 경총, 몰락한 전경련의 전철을 밟으려 하나/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경총, 몰락한 전경련의 전철을 밟으려 하나/오일만 편집국 부국장

    재계를 대표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몰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수금 창구 역할이 드러나면서 전경련의 위상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국가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에 기대 재벌들의 사적 이익에 앞장선 전경련에 등을 돌렸다. 1961년 창립 이후 숱한 부침을 겪었지만 이번처럼 국민적 지탄을 받아 본 전례는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전경련의 대타로 나선 경영자총연맹(경총)에서 최근 의미 있는 사건이 진행 중이다. 바로 송영중 경총 부회장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다. 그는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대한 국회 논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총 내부에서 자진 사퇴의 압력을 받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입장에서 반대편인 노동계의 손을 들어 줬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지만 찬찬히 이번 파문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내부 갈등이 촘촘히 얽혀 있다. 14년간 지속된 전임자 ‘김영배 체제’의 경총 사무국과 회원사 중심으로 운영 방향을 개혁하려는 송 부회장 간의 반목이 큰 몫을 했다. 삼성노조 와해 사건에 연루된 경총 내부 인사의 변호사비 지원 문제 등 회계 처리의 불투명성과 내부 임원의 무단 대표 등기 등을 둘러싼 잡음 등이 증폭된 측면도 있다. 시곗바늘을 지난 4월로 돌려 보면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 경총 회장단은 지난 4월 6일 “노사 문제에 경륜과 식견이 높으며 고용과 복지 문제에도 밝은 송영중 석좌교수가 경총 상임부회장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경총 회장단이 밝힌 대로 송 부회장은 2002년 청와대 노사관계비서관으로 주 5일제 근무 도입과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 근로기준법 정부안을 만들었던 주인공이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임금 근로시간 제도 개선과 고용서비스 선진화에 대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를 노사 간 당면 현안을 풀어 갈 적임자로 본 것이다. 도화선이 된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송 부회장은 국회에서 법이 통과돼도 노조가 있는 기업은 다시 임단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총 회장단의 일원인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이 “산입 범위 조정 문제를 최저임금위원회로 돌려보내자고 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단협 과정에서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가 노사 분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측면이 크다.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노동계의 편에 섰다는 역풍이 불자 송 부회장에게 ‘친노동’ 딱지를 붙여 책임을 전가했다는 분석이다. 과거에도 노사 합의 없는 노동법 개정은 숱한 분란을 일으켰다. 1996년 노동법 파동이 대표적이다. 정리해고 도입 등 노사 간 첨예한 사안을 일방적으로 국회에서 처리했다가 노동계의 격렬한 반발로 YS(김영삼) 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8년 IMF 사태 직후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정리해고를 도입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송 부회장은 다음달 3일 총회에서 진퇴가 결정된다. 현재로선 그의 퇴진 가능성이 높지만 경총의 앞날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친재계를 표방한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서는 권력의 일방적 지원으로 노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경총이 이익단체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업의 공공재적 성격을 감안하면 의사회 등 일반의 이익단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공복리와 공정경제를 열망하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 시대의 운영체제를 답습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지난해 경총이 일자리 대책을 놓고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다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당사자”라고 경고를 받고 급격하게 위상이 추락한 전례도 있다. 자본주의는 노사가 서로 인정할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발휘하는 제도다. 어느 한쪽의 탐욕이 커지면 서로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경총 스스로 이런 이분법적인 제로섬 게임을 단절하고 시대정신에 걸맞은 공존의 길을 걸어야 한다. oilman@seoul.co.kr
  • ‘정무’ 송인배, 드루킹 의혹에도 국회 상대하는 자리에 기용

    ‘정무’ 송인배, 드루킹 의혹에도 국회 상대하는 자리에 기용

    ‘의전’ 김종천·‘1부속’ 조한기 등 모두 ‘광흥창팀’ 멤버로 활동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청와대 참모진 인사를 단행하며 ‘포털사이트 댓글 조작 사건’(일명 드루킹 사건) 연루 의혹이 제기된 송인배 제1부속비서관을 정무비서관으로 임명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제1부속비서관이 워낙 격무인 데다 순환 배치 차원에서 인사를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송 비서관의 자리 이동은 단순한 순환 배치로 보기 어렵다는 해석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무비서관은 청와대와 국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만큼 대통령의 생각을 잘 아는 송 비서관에게 대(對)국회 소통 창구 역할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송 비서관은 대선 때부터 문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챙겼다. 누구보다 대통령 의중을 잘 헤아린다. 하지만 일부에선 드루킹 연루 의혹을 받은 송 비서관이 야당과 소통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제기한다. 그는 지난 대선 전까지 드루킹을 4차례 만났고 ‘간담회 사례비’ 명목으로 200만원을 받았다. 특검이 출범한 상황에서 야당 반발이 예상된다. 특검 소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송 비서관은 야당 의원과 이렇다 할 친분 관계가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청와대가 송 비서관의 드루킹 연루 의혹을 정면 돌파하고자 야당과의 소통 최전선에 내세운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그 문제(드루킹 사건)는 앞으로 봐야 할 일이고 송 비서관에 대한 혐의도 문제가 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임 비서관 중 유일하게 승진·임명된 김종천 의전비서관(전 대통령 비서실장실 선임행정관)은 고 김근태 전 의장 보좌관 출신으로 지금도 고인의 추모 사업을 맡고 있다. 1980년대부터 인연을 맺은 임종석 비서실장과 지난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광흥창팀’에 참여했다. 송 비서관, 의전비서관을 맡다가 제1부속비서관으로 옮긴 조한기 비서관도 광흥창팀 멤버다. 그는 또한 남북 교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북한 전문가’다. 4·27 남북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김비서가 왜 그럴까’ 이수경X고세원 카메오 출연 “특급 열연”

    ‘김비서가 왜 그럴까’ 이수경X고세원 카메오 출연 “특급 열연”

    ‘김비서가 왜 그럴까’ 이수경, 고세원이 특급 카메오로 출격한다. 26일 tvN 수목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측은 “오는 28일 방송되는 8화에 이수경과 고세원이 카메오로 전격 출연한다”고 밝혀 기대감을 높였다. 이수경과 고세원은 극중 박서준(이영준 역)의 어린 시절 부모 역할을 맡아 각각 젊은 최여사와 젊은 이회장으로 분할 예정이다. 고세원은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이수경은 ‘식샤를 합시다1’에서 맺은 박준화 감독과의 인연으로 카메오 출연을 결정했다는 전언이다. 이들은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한걸음에 촬영장으로 달려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후문이다. 공개된 스틸 속 고세원과 이수경은 충격에 휩싸인 듯 심각한 표정이 포착돼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이는 병실에 누워서 깨어날 줄 모르는 아이를 보고 눈물 짓고 있는 모습. 특히 고세원은 망치를 얻어맞은 듯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이수경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을 간신히 가다듬는가 하면 터져 나오는 눈물이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황급히 입을 막고 있어 보는 이마저 눈물 짓게 만들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이 영준 모 최여사(김혜옥 분)와 영준 부 이회장(김병옥 분)의 젊은 시절이라서 이영준(박서준 분)의 어린 시절에 대한 비밀이 풀릴지 관심을 모은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측은 “고세원과 이수경이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했다. 두 사람의 찰진 연기력으로 인해 극이 더욱 풍성해졌다. 8화 방송에서 이들의 특급 열연을 확인할 수 있으니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 한편, tvN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매주 수, 목 오후 9시 30분에 방송된다. 사진제공=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월드옥타, 올해 청년구직자 100명 해외 채용

    월드옥타, 올해 청년구직자 100명 해외 채용

    세계한인무역협회(이하 월드옥타)는 해외 한인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국내 청년들의 해외 일자리 발굴 및 취업 지원 사업 ‘1회원사-1모국청년 해외취업’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행한다. 월드옥타는 2020년까지 국내 청년 구직자 500명을 해외에서 채용하는 ‘1회사원-1모국청년 해외취업’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와 참가지 모집을 오는 7월 2일부터 20일까지 온라인에서 진행하다. 전 세계 74개국 147개 도시에서 활동하는 월드옥타 해외 한인 경제인 회원들은 국내 청년들의 취업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정부의 일자리 창출 과제에 협조하기 위한 사업으로 올해 100명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연간 200명씩 3년간 총 500명의 국내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해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월드옥타 관계자는 “기존 정부 취업사업에는 시행처와 운영기관, 현지 취업처 발굴과 현지 취업자 관리 등이 각각의 프로세스로 진행되던 불편함이 있다고 판단되었다”며 “월드옥타는 회원사를 중심으로 취업처 발굴부터 모집, 선발, 국내교육, 취업 후 사후관리까지 청년구직자 중심의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하여 연말까지 국내 청년 100명 취업을 목표로 현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올해 추진되는 100개의 해외 일자리는 해외 취업자들의 현지 정착과 생활 지원을 고려해 최소 월 급여가 200만 원 이상인 기업으로 선정되고, 추가적 비용 지출이 없어야 하며 취업자를 위한 근무조건 및 지원 사항 등을 전문가 및 본부 사무국에 관리를 통해 공지될 계획이다. 박기출 월드옥타 회장은 “국내의 청년 일자리 문제는 전 세계 경제공동체 네트워크를 구축한 월드옥타가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전 세계에 한민족 경제 영토를 넓혀 모국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우리의 설립 이념과도 맥을 같이하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업에 참석하는 글로벌 한인 기업은 국내 우수인재를 채용하는 기회와 함께 모국 경제 및 미래 청년들의 육성 등 공유가치를 창출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국내 청년들은 해외에서 한인기업에서 일하게 되으로 언어적 부담감을 떨치고 더욱 쉽게 현지 정착과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수 계기가 마련되었고 보고 있다. 본 사업의 홍보를 위해 권역별로 찾아가는 설명회를 오는 25일부터 29일까지 국내 지방 거점지역별로 해외취업사업 안내와 참가자 모집을 진행할 예정이며, 참가 접수 및 신청은 7월 2일부터 20일까지 월드잡 플러스(www.worldjob.or.kr)내 글로벌취업지원사업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월드옥타(World-OKTA)로도 불리는 세계한인무역협회는 1981년 4월 2일 모국의 수출증진에 기여함으로써 모국경제발전을 돕자는 취지에서 16개국 102명의 재외동포 무역인이 세계교포무역인연합회를 구성하면서 시작됐다. 협회는 창립 이래 모국상품 구매단을 운영하며 한국 상품을 직접 구매해 현지시장에 유통시켜 우리 상품의 해외 진출을 지원해 왔으며, 현재에도 해외지사화, 글로벌마케터 등 해외 한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모국의 상품을 해외에 알리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등 중소기업 해외 진출의 교두보 역할로서 대한민국 경제와 함께해 오고 있다. 또한 중국의 화상, 유대인의 유대상, 인도 인상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한민족 경제공동체를 구축하여 해외 한인 네트워킹을 실현하고 있다. 현재 월드옥타는 전 세계 74개국 147개 도시에 지회를 두고 있으며, 정회원 7,000여 명과 2만여 명의 차세대 회원이 함께하는 재외동포 최대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행복했던 밤♥” 고아라, ‘응답하라1994’ 회식 인증샷 공개

    “행복했던 밤♥” 고아라, ‘응답하라1994’ 회식 인증샷 공개

    배우 고아라가 ‘응사’ 모임을 공개했다. 고아라는 2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행복했던 어젯밤 #응사 는 #사랑 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한 장 게재했다. 사진에는 B1A4 바로, 배우 김성균, 손호준, 도희, 고아라, 정우와 신원호 감독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들은 2013년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94(응사)’에 출연하며 인연을 맺었다. 5년째 이어가고 있는 우정이 훈훈함을 안긴다. 한편 고아라는 현재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 출연 중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독일통’ 차두리 ‘아빠 친구’ 뢰프 감독 전략 읽을까

    ‘독일통’ 차두리 ‘아빠 친구’ 뢰프 감독 전략 읽을까

    27일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는 대표팀 코치로 활약 중인 차두리에게 매우 특별하다. 차 코치가 아버지 차범근 전 감독의 현역 시절 백업 선수였던 요아힘 뢰프 감독과 지략 대결을 펼치게 됐기 때문이다. 선수 시절 오랫동안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던 차 코치는 대표팀 내에서 독일 대표팀의 특성과 전력, 선수들의 특징을 가장 잘 아는 지도자다. 특히 이번 독일전을 겨냥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활동을 했다. 차 코치는 독일전에서 ‘헤드셋’을 착용하고 실시간으로 전술 변화와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차 코치의 분석 대상은 ‘전차군단’의 전술 키를 쥐고 있는 뢰프 감독이다. 뢰프 감독과 차 코치의 인연은 아버지 차 전 감독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 전 감독이 1979~80년 시즌부터 4시즌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을 동안 뢰프 감독은 ‘차붐’의 백업 선수였다. 차 전 감독은 프랑크푸르트에서 122경기에 출전해 46골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지만, 뢰프 감독은 아시아 폭격기라 불렸던 차 전 감독의 활약에 가려 1981~82년 같은 팀에서 24경기에 나와 5골을 넣는 것에 그쳤다. 현역 시절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뢰프 감독은 그러나 은퇴 이후 지도자로 성공해 세계적인 명장 반열에 올랐다. 뢰프 감독은 차 전 감독과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차 전 감독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을 이끌던 뢰프 감독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앞서 스웨덴과의 1차전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독일 기자가 “차두리는 한국 대표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첫 질문을 했을 정도로 독일인들의 관심도 뜨겁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JP에 관례대로 무궁화장 추서… 文대통령, 조문은 안 한다

    JP에 관례대로 무궁화장 추서… 文대통령, 조문은 안 한다

    文 “예우 갖춰 애도 표하라” 지시 전직 총리 조문 통상적이지 않아 훈장 추서 뒤 국무회의서 의결문재인 대통령은 25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를 조문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지난 23일 별세한 고인에게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통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현직 대통령의 전직 총리 조문이 통상적 의전절차에 해당하지 않는 데다 JP가 남긴 공과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조문까지 할 이유는 없지만 별세한 전직 총리에게 추서해 온 ‘관례’는 지킨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유족에게 예우를 갖춰 애도를 표하라”고 김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김 대변인은 “대통령의 조문은 이것으로 갈음한다”고 설명했다. 일부 참모는 3김(金) 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JP의 상징성을 감안해 대통령이 조문하는 안도 검토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통령의 뜻이 확고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유신 반대투쟁을 했고 정의와 상식을 시대정신으로 생각하는 대통령이 JP를 진심으로 애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고 에둘러 설명했다. 전직 총리가 사망했을 때 대통령이 조문을 한 사례가 거의 없고 취임 이후 문 대통령도 직접 조문을 한 사례가 없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박태준 전 총리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남덕우 전 총리의 빈소를 찾았지만 모두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반면 JP는 대선 직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만나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문 대통령을 두고 욕설까지 했다. 하지만 정부가 5·16 쿠데타의 주역에게 훈장을 추서하면서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앞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공개 반대하는 등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과 관련,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최근 돌아가신 전직 총리 네 분 가운데 이영덕, 남덕우 전 총리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박태준 전 총리와 강영훈 전 총리는 생전에 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장관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유족에게 전달한 뒤 “관례라는 것도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장례 일정을 고려해 추서부터 하고 국무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인규 “원세훈이 검찰총장에 직접 전화 걸어 ‘논두렁 시계’ 보도 제안” 

    이인규 “원세훈이 검찰총장에 직접 전화 걸어 ‘논두렁 시계’ 보도 제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논두렁 시계’ 보도 배후는 국가정보원이라고 재차 반박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이인규 전 부장은 25일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임채진 검찰총장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가 거절을 당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헙 회장으로부터 고급시계를 받았다는 의혹은 이로부터 일주일쯤 뒤인 2009년 4월 22일 KBS에 보도됐다고 이인규 전 부장은 전했다. 이인규 전 부장은 보도가 나가던 날 저녁 원세훈 전 원장의 고등학교 후배인 김영호 당시 행정안전부 차관 등과 식사 중이었고, 보도를 접한 뒤 욕설과 함께 원세훈 전 원장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이인규 전 부장은 “(국정원 간부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는데도 결국 이런 파렴치한 짓을 꾸몄다. 정말 나쁜 X이다. 원세훈 원장님은 차관님 고등학교 선배 아니냐. 원세훈 원장에게 내가 정말 X자식이라고 하더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내용의 2009년 5월 13일 SBS 보도 역시 국정원의 소행으로 의심하다고 이인규 전 부장은 언급했다. 이인규 전 부장은 “검찰이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동안의 보도 경위를 확인해봤다. 그 결과 KBS 보도는 국정원 대변인실이 개입해 이뤄진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국정원의 행태와 SBS 보도 내용, 원세훈 전 원장과 SBS의 개인적 인연 등을 고려해볼 때 SBS 보도의 배후에도 국정원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밝혔다. 이인규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고가 시계 수수 관련 보도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저를 포함한 검찰 누구도 이와 같은 보도를 의도적으로 계획하거나 개입한 사실이 없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인규 전 부장은 ‘논두렁 시계’ 등 시계 수수 의혹과 관련한 보도를 자신이 기획했다는 의혹에 대해 지난해 11월에도 ‘국정원 강모 국장 등 2명이 찾아와 원세훈 원장의 뜻이라며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거절했다’는 취지로 해명한 바 있다. 이인규 전 부장은 “만일 제가 잘못한 점이 있어 조사 요청이 오면 언제든지 귀국해 조사를 받겠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최근 이인규 전 부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미국 버지니아주 애난데일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포착돼 국내 소환 여부에 다시 관심이 모아졌다.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지난해 이 문제를 조사한 결과, 국정원 간부들이 이인규 전 부장을 만나 시계 수수 건을 언론에 흘려줘 적당히 망신을 주는 선에서 활용해달라고 언급한 것은 확인됐다. 그러나 언론플레이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실행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이에 대해 SBS는 “‘당시 SBS의 보도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던 종전 주장에 아무런 구체적 근거가 없고 순전히 자신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이인규 전 부장이) 인정했다”고 반박했다. SBS는 “지난해 언론단체와 SBS 시청자 위원, 언론노조 SBS지부 등이 참여한 ‘논두렁 시계’ 보도 경위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이 사안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지만 역시 어떠한 국정원의 개입 정황도 찾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SBS는 “‘원세훈 원장과 SBS와의 개인적 인연’ 등의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통해 SBS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한 데 대해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물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더 이스트라이트 정사강X이우진 ‘안녕하세요’ 출연 ‘귀요미 인증샷’

    더 이스트라이트 정사강X이우진 ‘안녕하세요’ 출연 ‘귀요미 인증샷’

    더 이스트라이트 정사강, 이우진이 KBS2 ‘안녕하세요’에 출연한다. 최근 더 이스트라이트 정사강과 이우진은 KBS2 예능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 게스트로 녹화에 참여했다. 녹화 당시 정사강과 이우진은 다양한 고민의 사연들을 10대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톡톡 튀고 센스 있는 조언들을 건넸고, 특히 어린 나이를 넘어 사려 깊었던 두 멤버의 적재적소 멘트가 이어지며 현장에 있는 모두를 연신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24일에는 공식 SNS를 통해 정사강과 이우진의 ‘안녕하세요’ 방송 출연 인증샷이 공개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날 함께 게스트로 출연한 가수 채연, 나인뮤지스 경리와 각각 다정한 모습의 사진을 공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더 이스트라이트가 속해 있는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에는 과거 채연도 소속 아티스트로 활동한 바 있으며, 경리 역시 그녀의 백업댄서 및 연습생으로 가수의 꿈을 키웠던 터라 ‘김창환 사단’의 특별한 인연이 함께한 선후배들의 깜짝 만남으로 훈훈함을 더했다. 더 이스트라이트 정사강과 이우진, 채연, 나인뮤지스 경리가 함께 게스트로 출연한 ‘안녕하세요’ 방송은 25일 오후 11시 10분 KBS 2TV에서 방송된다. 한편, 최근 두 번째 미니앨범 ‘설레임’을 발매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인 더 이스트라이트는 중독성 있는 일렉기타 리프와 귀에 박히는 강렬한 사운드가 매력적인 록 장르 트랙 ‘Never Thought’로 후속곡 활동에 돌입하며 10대 개러지 록 밴드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사진제공=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모하메드 살라흐가 체첸공화국 명예시민이 된 까닭은

    모하메드 살라흐가 체첸공화국 명예시민이 된 까닭은

    러시아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람잔 카디로프가 이집트 국가대표이자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버풀의 스타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흐(28)를 체첸공화국 명예시민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집트 대표팀이 수도 그로즈니에 러시아월드컵 베이스캠프를 차린 인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카디로프는 이집트 대표팀이 훈련하는 구장을 찾아 살라흐와 함께 그라운드를 돌아보며 사진 촬영에 응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려 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그는 수많은 인권 유린, 동성애자에 대한고문 등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23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 홈페이지에 게재된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이런 걸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건 서방 언론이 우리를 헐뜯기 위해 돈 주고 부탁해서 낸 기사들이다. 우리가 이집트에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가 우리를 선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만찬을 들면서 내가 이집트 대표팀을 존경한다고 밝혔고 모하메드 살라흐에게 위촉장과 배지를 선물했다. 값어치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살라흐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도중 어깨를 다쳐 우루과이와의 대회 조별리그 A조 1차전에 결장해 0-1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뒤 러시아와의 2차전에 출전해 페널티킥 골로 월드컵 첫 득점을 신고했지만 팀의 1-3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집트는 옛 스탈린그라드로 낮익은 볼고그라드에서 25일 밤 11시(한국시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사우디아라비아와 펼쳐 16강 진출의 마지막 가능성을 두드린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숫자로 풀이한 김종필 인생...9와 각별한 인연

    숫자로 풀이한 김종필 인생...9와 각별한 인연

    23일 92세를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정치 9단’이라고 불리며 국내 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세웠다. 9선 의원인 JP는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장과 국회의원,당 대표를 지냈고 국무총리를 40대와 70대에 두 번 역임했다. 1926년생인 JP는 35세이던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한 뒤 초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올랐고,2년 뒤인 1963년 3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민주공화당 의장 자리를 꿰차며 명실상부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JP는 숫자 ‘9’와 인연이 남다르다.30대에 정계에 뛰어들어 70대에 정계 은퇴를 할 때까지 JP는 ‘정치 9단’으로 불렸다. 92세로 비교적 장수한 JP는 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JP는 제6대 국회의원선거였던 1963년 첫 당선 이후 7,8,9,10,13,14,15,16대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았다. JP는 국무총리를 2번 역임한다.45세이던 1971년 국무총리에 취임해 4년6개월 동안 자리를 지킨 뒤 퇴임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선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72세의 나이로 국무총리 자리에 두번째로 오른다.서리 기간을 포함해 약 1년 10개월 동안 재임했다. JP는 인생에서 정계은퇴를 2번 했다. 1968년 5월 JP를 박 전 대통령 후임으로 추대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난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가 2년 7개월만인 1970년 12월 복귀한다. 1980년에는 신군부 등장과 함께 영어의 신세가 됐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한 후 7년의 야인 생활을 한 뒤 1987년 9월 정계에 돌아온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은퇴는 2004년 4월로,당시 자민련이 총선에서 4석 확보에 그치면서 JP는 대패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국 보수의 본류’…화려한 JP의 인맥

    ‘한국 보수의 본류’…화려한 JP의 인맥

    ‘3김 정치’의 한축을 차지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에게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달리 가신그룹이 없다. YS에게는 상도동계, DJ에게는 동교동계 등 정치적 둥지를 중심으로 한 측근그룹이 있었지만, JP에게는 딱히 청구동계로 부를 만한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 두 김씨가 오랜 세월 대권을 향해 부단히 돌진해 마침내 정권을 창출한 반면 JP는 ‘영원한 2인자’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보수의 본류라고 불리는 JP의 화려한 인맥은 우리 사회 곳곳에 씨줄과 날줄로 얽혀있다. 우선 그가 정치일선에서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정당인 자민련을 꼽을 수 있다. 한때 그의 오른팔로 불렸던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과 김광수·한영수·강창희·김현욱·이긍규·이태섭·구천서·함석재·이동복·이건개·이양희 전 의원 등이 JP의 근위병들이었다. 자민련 출신 중 자유선진당 변웅전 전 대표가 2012년까지 현직을 유지하고 모두 정계를 떠났다. 그의 인맥은 1951년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박영옥씨와 결혼하면서 기반을 닦는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동참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인맥이 펼쳐진다. 박 전 대통령 시절 남덕우 전 국무총리, 신직수·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윤천주 전 문교부 장관 등과 민족중흥회를 구성해 JP가 정치를 재개한 1987년 3공화국의 맥을 잇는다는 취지로 그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민족중흥회는 그해 신민주공화당 창당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윤주영 전 문공부 장관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 사무처 요원들의 모임인 ‘은행나무 동지회’도 있다. 이들은 JP의 말년에도 청구동을 출입하며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했다. 또 1995년 측근들이 만든 ‘97회’(회장 박창규)도 JP의 든든한 인맥 중 하나다. ‘97회’는 JP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에 있을 때 1997년 대선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결성된 대선 조직이었다. JP의 모교인 공주고동창회, 육사 동기들의 모임인 ‘육사 8기회’ 등 정치권 외곽조직도 그를 둘러싸고 있다. 지연과 혈연을 중심으로 뭉친 충청향우회와 가락종친회도 JP의 인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가락종친회는 JP가 첫번째 국무총리를 지낸 1971년부터 그가 공을 들여온 혈맥이다. JP는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영화감독 김수용, 고(故) 조병화 시인, 소설가 홍성유, 화가 김흥수, 가수 이미자씨와 친분이 두텁고 가수 패티 김의 주례를 서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가 한창인 2016년 말에는 박 전 대통령과의 사촌형부-조카 인연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그해 11월 시사저널과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 내려오라고 ‘네가 무슨 대통령이냐’고 해도 거기 앉아있을 것이다. 그 고집을 꺾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 파면되자 “대통령이 힘이 빠지면 나라가 결딴난다”는 성원으로 가족애를 보이기도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당선자의 공약이 실제적 성과 내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당선자의 공약이 실제적 성과 내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당선자의 공약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아주 구체적인 고민을 하겠습니다.”22일 만난 변창흠(사진) 서울 관악구 민선7기 구청장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세종대 행정학과 교수)은 박준희 관악구청장 당선자가 성공적인 구청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변 위원장은 과거 서울시 인수위원회, 노원구 인수위원회 위원 등으로 일한 적 있지만, 위원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그는 “박 당선자의 과거 서울시의원일 때 제가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이라 인연을 맺게 됐다”며 “당시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일치했고 구청장이 돼서 추진하고자하는 정책이 공감돼 박 당선자의 (인수위원장)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8일 관악구청장직 인수위원회는 현판식과 위촉식을 진행한 바 있다. 인수위는 변 위원장을 중심으로 신언근, 정종팔 부위원장, 천범룡 총괄간사위원 등 모두 6개 분과 44명으로 구성됐다. 인수위는 이날부터 관악구의 조직, 기능, 예산 현황을 파악하고 당선자의 공약을 재검토하고 있다. 변 위원장은 “앞으로 4년간 당선자가 구정을 잘 운영하도록 사전에 쟁점과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인수위의 첫 번째 역할이고, 두 번째 역할은 당선자가 발표한 ‘6대 전략 50대 과제’가 잘 실행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며 “타당성이 떨어지는 과제, 보안이 필요한 과제 등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변 위원장은 특히 주민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인수위원이 다른 구보다 많은 44명인데, 주민의 의견을 직·간접적으로 수렴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주민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주민의 목소리를 당선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민선 5~6기 구정을 이끌었던 유종필 관악구청장의 정책의 계승점, 차별점에 대해서도 밝혔다. 그는 “유 구청장의 경우 도서관, 인문학, 문화 등에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계셔서 그 부분을 (박 당선자가) 계승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면서도 “현재 생활근거지 역할만 하는 관악구의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에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당선자는 ‘경제 구청장’을 표방하며 서울대와 함께하는 지역경제 발전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변 위원장은 박 당선자의 공약중 ‘관악청 신설’, ‘더불어 으뜸 관악 협치위원회’와 같은 주민 소통 정책을 소개했다. 그는 “서울시청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인 시민청이 있는 것처럼 관악구청에도 주민이 항시로 모여서 논의하고 구청장, 구의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관악청을 신설하려고 한다”며 “또 더불어으뜸관악협치위원회, 부구청장을 주축으로하는 협치추진단 등이 당선자가 구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 같다”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변 위원장은 “당선자의 공약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고민을 할 수 있는 인력, 필요하면 외부 인력까지 해서 투입해 당선자가 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거미, 조정석 결혼 소감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 돼준 분♥”[전문]

    거미, 조정석 결혼 소감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 돼준 분♥”[전문]

    가수 거미가 배우 조정석과의 결혼 소감을 전했다. 22일 조정석 거미 커플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거미가 자신의 팬카페에 직접 글을 올렸다. 거미는 “결혼의 무게를 자세히 느끼고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결혼을 결정하게 됐다.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배움과 깨달음도 느끼게 해준 분이다. 정말 좋은 인연을 만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어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응원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만 그 상황에 맞게 내 자리에서 좋은 가정 꾸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음악으로 표현하고 여러분과 더 많은 이야기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앞서 거미 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는 거미와 조정석 본인에게 가을 결혼설에 대해 확인한 끝에 “조정석과 거미가 하반기 결혼 예정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결혼식은 비공개 예식이 될 예정이며 두 사람의 앞날에 따뜻한 응원과 축복 부탁 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조정석 또한 자신의 팬카페를 통해 “올해 제가 결혼하려 합니다. 5년 동안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사람이기에 결혼을 결심했다”며 “아직 세부적인 일정이 정해지지는 않아서 말씀을 못드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셨겠지만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예쁘게 잘 살라고 응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조정석과 거미는 2013년 지인의 소개로 만나 5년 째 열애 중이다. <거미의 결혼 소감 전문> 여러분...안녕하셨어요..글을 오랜만에 쓰는것 같네요..늘 공연장에서 여러분 자주 뵙고 있어서 제가 글쓰는걸 잊었었나봐요 먼저 너무 죄송합니다 ㅜㅜ 여러분 오늘 많이 놀라셨을거라 생각이 되네요...한 글자 한 글자..쓰면서도..계속 더 조심스러워 지고..속도가 느려집니다.... 여러분 기사를 통해 알게 되신것처럼..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 무게에 대해서 자세히 느끼고 실감하진 못하지만..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긴 시간 저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또 많은 배움과 깨달음도 느끼게 해 준 분입니다..정말 좋은 인연을 만난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진심으로 응원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만..저는 그 상황에 맞게.. 제 자리에서 좋은 가정을 꾸릴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여러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할수 있는 삶을 살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못다한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조정석의 결혼 소감 전문> 여러분 정석입니다^^ 아이구 이른 아침에 놀라셨죠? 급작스러운 보도에 저도 깜짝 놀랐네요. 일단 여러분들께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전해드려야했는데 기사로 접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ㅜㅜ 항상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는 여러분들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에 대해 직접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글 남겨요. 새로운 인생의 또다른 시작이기도 하고 배우로서 더 거듭날수 있는 기로에 서있는거 같기도 하고 혼자만 걸어왔던 길을 앞으로는 누군가와 같이 걸어갈 생각에 설레이기도하고...그래서 떨리기도 하네요^^ 아직 세부적인 일정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말씀을 못드리고 있었지만... 올해 제가 결혼을 하려 합니다. 5년 동안 서로에게 큰 힘이 되주었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격려 해줄 사람이기에 결혼을 결심 했습니다. 넘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셨겠지만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예쁘게 잘 살라고 응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든든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항상 부족하지만 좋은작품으로 여러분들과 끊임없이 교감할수 있는.. 더 책임감 있는 배우 조정석으로서 인사드릴게요~ 더욱더 성장할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요즘 전 영화 뺑반 촬영 열심히 잘 하고 있구요 이제 막바지 촬영이 한창입니다. 다행히 여러분들 덕분에 건강하게 무사히 촬영 잘하고 있어요^^촬영 마무리 잘하구 언능 또 인사드릴게요~~ 항상 건강만 하시고 행복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조니뎁 근황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우울증...아침마다 술 마셔”

    조니뎁 근황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우울증...아침마다 술 마셔”

    할리우드 배우 조니 뎁이 이혼 심경을 털어놨다. 22일(한국시간) 미국 매체 롤링스톤 측이 배우 조니 뎁(56·Johnny Depp)과 인터뷰를 공개했다. 조니 뎁은 이번 인터뷰에서 배우 앰버 허드(33·Amber Laura Heard)와 이혼한 뒤 심경을 밝혔다. 그는 “앰버 허드와 이혼 후 자존감이 낮아졌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아침에는 항상 보드카를 마셨고, 많은 담배를 태웠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오래된 타자기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흘러 해당 페이지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글을 썼다”고 덧붙였다. 조니 뎁은 또 지난해부터 이어진 자산관리회사 TMG와 분쟁도 언급했다. 그는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다”라며 “몇 년 동안 약 6억 달러(한화 6600억 원 수준)를 잃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힘든 시기다. 내 인생에서 떨어질 수 있을 만큼 떨어진 상황”이라며 참담한 심경을 밝혔다. 한편 영화 ‘럼 다이어리’를 통해 인연을 맺은 조니 뎁과 앰버 허드는 지난 2015년 2월 결혼했다. 결혼 1년 만인 2016년 앰버 허드는 조니 뎁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 결국 지난해 8월 이혼했다. 사진=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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