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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석의 신호를 찾아서] 이중 소셜 다이어트

    [이효석의 신호를 찾아서] 이중 소셜 다이어트

    인생은 결심과 포기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결심하는 나’와 ‘포기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결심이 일어나는 동안 머릿속은 미래의 나에 대한 기대감과 이런 결심을 세운 자신에 대한 대견함, 그리고 어떤 욕망과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포기는 불시에 찾아오며 상황이 완료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이유를 찾는 데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결심을 포기하는 순간의 인간은 이런 재능을 최고로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떻게 ‘포기하는 나’를 이길 것인가, 적어도 어떻게 포기를 늦추어 최대한 결심과 포기 사이의 기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자신과의 싸움을 돕는 수많은 방법 중 AA라 불리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모임에서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AA는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한 이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다. AA에 참석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게 되며 다음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때까지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AA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사회성을 자신과의 싸움에 활용하는 방법이다. 결심을 쉽게 어길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결심이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규칙일수록 ‘포기하는 나’는 집요하게 예외를 찾아내고, 한 번 만들어진 예외가 얼마나 쉽게 원래의 결심을 무력화시키는지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다이어트에 적용해 보자. 다이어트에 있어 적게 먹는 것, 곧 칼로리 섭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루 중 16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 16시간 단식이나 1일 1식 등은 모두 식사량을 줄이는 간헐적 단식의 한 방식으로 지키기 쉬운 단순한 형태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나 횟수를 기준으로 원칙을 정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바로 사회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타인들과의 식사 약속이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사회적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타인과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적이 아님을 확인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버핏 같은 유명인과의 기록적인 점심 식사 경매가나 밥 한 끼를 간절히 원하는 젊은 남녀들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 다른 사람과의 이런 기회를 피하는 것은 마치 앞뒤가 바뀐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며, ‘포기하는 나’가 쉽게 파고드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칼로리 섭취는 줄이면서도 타인과의 식사를 통한 즐거움은 놓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못할 정도로 단순한 원칙을 찾던 중 필자는 마침내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이 원칙을 잘 지키기 위한 한 가지 장치를 더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결심을 밝히고, 그 결과도 밝히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소셜 다이어트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회성을 만족시키고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뱃살과 체중계 숫자가 같이 늘어가는 흔한 40대가 고민 끝에 신문 지면을 이런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주저함을 이기고 용기를 내어 본다. 지금 체중계는 3의 4승을 가리키고 있다. 목표는 2의 3승에 3의 2승을 곱한 값이다. 다음번 칼럼이 나가는 6주 뒤에 지면을 통해 세계 최초의 이중 소셜 다이어트 실험 결과를 보고할 예정이다.
  • [교육개혁리포트-대한민국 중3] 중3 ‘명문대 스펙’ 가치 떨어진다… 취업 땐 AI와 무한 경쟁

    [교육개혁리포트-대한민국 중3] 중3 ‘명문대 스펙’ 가치 떨어진다… 취업 땐 AI와 무한 경쟁

    한·일월드컵 이듬해 태어난 46만 9000명의 아이들. 대한민국 중학교 3학년(2003년생)이 2018년 교육계의 ‘뜨거운 감자’다. 국내 교육 시스템의 온갖 실험을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학기제 도입, 고교·대학 입시 제도 개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중3의 처지는 교육 개혁 논의 과정에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아이들이 주축이 될 미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하고, 필요한 능력을 길러 주려는 절박함이 덜하다는 지적이다. 민경찬 연세대 특임교수(수학과)는 “현재 교육부나 국가교육회의에서 하고 있는 논의에는 아이들을 어떤 인재로 성장시킬 것인지 근본적 고민이 빠져 있다”면서 “미래 한국에 맞는 역량이나 품성 등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무엇인지 논의의 출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5회에 걸쳐 현재 중3 등 우리 10대가 ‘미래를 살아가는 힘’을 기르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살펴본다. 또 학생과 학부모, 교사, 대학 등이 바라는 수업·시험 방식과 교육 가치 등을 토대로 바람직한 개혁 방향도 찾는다. 첫 회에서는 2003년생의 ‘16년 인생’을 역추적하고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을 연도별로 분석, 예측했다. 국내 인구학 권위자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미래학자인 서용석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을 뜯어보면 대입 위주로만 논의되는 우리 교육의 개편 정책이 얼마나 무신경한지 알 수 있다.#2003년 신생아 49만명(현재 국내 거주 인구는 46만 9000명)이 태어났다. 한 해 출생아 수가 해방 후 처음 40만명대로 떨어진 2002년에 이어 초저출산 시대가 열렸다. 2000년(63만 5000명)과 비교하면 3년 만에 14만명이나 줄었다. 현재 고1~초6 학년인 2002~2006년생은 연평균 46만 7720명이 태어났다. 2003년생의 부모는 1970~1974년생이 많은데 보통 90~94학번으로 대학 진학이 구직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준 경험을 한 세대다.#2016년 중학교 입학했다. 박근혜 정부가 자유학기제를 전체 중학교에 도입한 해이기도 하다. 1학년 2학기 또는 2학년 1학기에 국어·영어·수학 등 필수 과목 수업 정도만 듣고 따로 시험을 보지 않았다. 대신 체험·직업 활동 등을 통해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는 데 시간을 썼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 지향적 교육을 받은 세대다. 하지만 “한 학기에 불과해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평가와 “자유학기 탓에 애들이 공부를 소홀히 해 학력 수준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공존한다. 공교육에서 다양한 꿈 찾기를 도우려 했지만, 중학생 25.3%는 ‘공무원’을 희망직업 1순위(통계청 2017년 조사)로 꼽는다. 고용 안정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2018년 중3이 됐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큰 변화가 생겼다. 교육부와 진보 교육감들이 고교 서열화를 깨겠다며 외국어고, 자율형사립고 등의 힘 빼기에 나섰다. ‘사립초→국제중→특목고·자사고→명문대’로 이어지는 진학 ‘KTX 라인’의 한 고리를 허물고, 일반고를 살리겠다는 취지다. 올해 고입에서는 외고·자사고가 일반고와 같은 시기에 학생을 뽑는다. 이 때문에 경기도 등에서는 외고·자사고 입시에 실패하면 미달된 일반고에 강제 배정된다. 특히 내년부터 외고·자사고가 일반고로 순차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특정 외고·자사고 출신이라는 학연의 힘이 과거보다 약해질 듯하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올해 고입에서 외고·자사고 경쟁률은 예년보다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9년 고1이 된다. 보통 주민등록 인구의 91~92%가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니 고1 인구는 약 44만명으로 예측된다. 한 반 학생수는 평균 22명으로 2017년보다 8명 줄어든다. 조 교수는 “학급당 학생 수가 40~50명이던 시대에는 내신 줄세우기로 인재를 가려낼 수 있었겠지만 20명대 초반이면 학생을 9등급으로 나누는 상대평가 내신제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또 학급당 학생수가 20명 안팎이면 주입식 수업 대신 토론 수업 등 참여형 교육이 쉬워진다. 지금부터 제대로 된 토론 수업 등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교육부는 내신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중·장기 과제로 미뤄 놨다. 또 고교학점제(대학처럼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인정해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도 2022년부터 모든 고교에서 시행한다고 했지만 준비가 부족하다는 평가다. #2021년 고3이 된다. 전 세대와 다른 형태의 대입을 본다. 현재 새 제도를 만들기 위한 공론 절차가 진행 중인데 수능 성적으로 뽑는 정시 비율이 지금보다 늘고 내신 성적, 진로·동아리 활동 등을 중심으로 보는 수시 전형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수능의 힘이 커져 공정성은 다소 강화되는 반면 학교에서의 다양한 활동은 조금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수능 전형 비율이 크게 늘지 않는다면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내신 교과성적·학생부에 적을 비교과 활동 등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워 학부모들이 만족할지 미지수다. #2022년 대학 입학이다. 보통 고3의 약 70% 안팎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걸 감안하면 2003년생 중 30만명이 22학번 새내기가 된다. 전국 대학 정원과 인구수를 따져볼 때 2003년생이 치를 대입의 평균 경쟁률은 0.59대1. 정원 감축이 없다면 많은 대학이 미달이라는 얘기다. 전국 모든 2003년생이 서울 4년제를 가려 한다고 가정하면 경쟁률은 약 4대1, 수도권 4년제를 모두 합하면 2.6대1 정도다. 경쟁률이 떨어진다는 건 학생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 서울 주요대 졸업장이 ‘스펙’(취업 등에 필요한 요건)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대학이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학 제도 자체가 변화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 2003년생 중 49%가 서울·수도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지역 사립대는 물론 지역거점국립대도 위기를 겪을 수 있다. 대학들은 등록금 인하 등으로 학생 모집에 나설 테지만 상황을 극복하긴 어렵다. 문 닫는 대학이 속출한다. #2024년 대학 2학년까지 마친 지역 사립대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 등으로 대규모 편입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지역 사회에서는 2003년생을 포함한 청년 품귀 현상이 더욱 심각해진다. 임 대표는 “서울 명문대와 지역 대학 간 학생 모집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고교 졸업 뒤 대학 진학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정부가 꾸준히 추진해 온 ‘선 취업 후 진학’ 정책도 효과를 내 고교를 졸업하면 일단 대학에 가는 ‘묻지마식 진학’ 관행에 대한 회의감도 커질 전망이다. #2031년 취업 시장에 뛰어든 핵심세대(25~29세)가 모두 초저출산 세대(2002~2006년생)로 채워진다. 인공지능(AI) 등에 의해 일부 일자리가 사라지지만 청년층이 워낙 없어 구직난은 지금보다 줄어든다. 하지만 AI와 로봇은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하면서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직군부터 위협받는다. 대졸자가 주로 취업하는 사무업 종사자도 위태롭다. LG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사무 종사자의 86%는 AI에 일자리를 빼앗길 고위험군으로 구분됐다. 회계사나 세무사 등 전문직도 안전하지 못하다. 취업 면접에서 “동료로 일할 AI보다 나은 능력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2044년 40세가 된다. 통계청 기대수명 예측에 따르면 2003년생 아이들은 평균 77.3세까지 산다. 사고사 등을 제외하면 진짜 ‘100세 시대’를 열 세대다. 기술·산업 변화 등에 맞춰 평생 배우며 능력을 키워야한다. 온라인 강의 등 평생교육시장이 커질 전망이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는 왜 날 가뒀나’ 이 의문을 푸는 진상 규명이 우리에겐 생존입니다. 그때 기어이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우리는 ‘피해 생존자’입니다.”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228일째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의 대표 한종선(42)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가 오랜 농성으로 건강이 나빠져 광주광역시 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만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이날 비닐하우스 농성장에 앉아 있던 한씨는 “이런 날씨엔 복지원에서 관리자가 수용자를 뜨거운 햇볕 아래 고문하듯 세워 놓고 넘어지면 마구 때렸다”고 회상했다. 한씨는 군부 독재 시절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자행된 인권 유린의 피해자이자 어렵게 목숨을 이어 온 생존자다. 당시 정부는 30여개 수용시설을 지원해 거리의 부랑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는 수천명이 불법 감금됐다. 한씨는 1984년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당시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밥 꼬박꼬박 주는 좋은 복지원’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한씨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에 3년 동안 감금돼 강제 노역과 구타에 시달렸다. 12년간 최소 5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사건은 1987년 세상에 알려졌고 시설은 폐쇄됐다. 부랑인 불법 감금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조는 결국 폐지됐지만, 재판에 넘겨진 관계자들은 결국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국가 차원의 조사도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잊혔던 이 사건은 한씨가 2012년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며 환기됐다. 한씨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면서부터다. 한씨는 “공사판에서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돼 2007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하러 구청에 갔다가 아버지와 누나의 생존을 알게 됐다”고 했다. 20년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곧장 달려간 주소에는 한 정신병원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형제복지원의 기억이 한씨 아버지와 누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었다. 한씨는 “그때까진 나보다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이 사건을 밝혀주겠지 믿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더라”면서 “더는 기다려선 안 되고 직접 나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씨가 나선 이후 100여명의 피해자들이 연락해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생겼고, 국회에는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이 발의됐다. 최근 검찰 과거사위에선 외압 의혹이 제기됐던 관련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왜 아직 농성을 하느냐는 질문에 한씨는 “우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여서 국가 기관을 잘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겉으로 보기엔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 크게 바뀐 것은 없다”면서 “특별법은 국회에 걸려 있고, 검찰도 이제야 우리를 불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특별법은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 머물러 있고, 검찰 조사는 1차적으론 울산에 파견된 형제복지원생 사망 사건을 덮은 검찰의 외압 사건에 대한 재조사다. 한씨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더 많은 피해 생존자가 드러나 진상 규명이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특성상 여전히 국가 권력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 피해 생존자가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에 돌입하면 당시 전국에 비슷하게 운영됐던 선감학원 등 36개 시설에 대한 조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씨를 비롯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 대신 ‘피해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와 피해를 딛고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한씨는 “‘국가는 왜 날 가뒀나’라는 질문에 국가가 제대로 답해야 비로소 피해 생존자들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씨는 고통스러운 삶에 주저앉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재단법인 진실의힘 ‘제8회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식은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26일 서울 중구 문학의집에서 열린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풀 뜯어먹는 소리’ 중학생 농부 태웅이 “농사 지을 때가 제일 행복해”

    ‘풀 뜯어먹는 소리’ 중학생 농부 태웅이 “농사 지을 때가 제일 행복해”

    tvN 새 예능프로그램 ‘풀 뜯어먹는 소리’가 25일 첫 방송한다. 25일 오후 8시 10분 첫 방송하는 tvN ‘풀 뜯어먹는 소리’는 정형돈, 김숙, 송하윤, 이진호 등 ‘마음소농’ 출연자들이 도시에서 벗어나 ‘마음대농’ 16세 중딩 농부 한태웅과 함께 생활하며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시골 삶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첫 방송을 앞두고 제작진이 ‘풀 뜯어먹는 소리’를 더욱 재미있게 시청할 수 있는 관전포인트 3가지를 밝혔다. ▶ “지는 농사지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16세 중딩농부 태웅이의 무한매력 ‘풀 뜯어먹는 소리’의 한태웅은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저 작은 것에 웃음 짓고 사는 16세 농부소년. 구수한 사투리와 범접할 수 없는 말투와 감성으로 ‘인생5회차’, ‘명언제조기’ 등의 수식어를 얻으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풀 뜯어먹는 소리’에서는 인생의 절반을 농부로 지낸 8년차 중딩농부 한태웅의 무한매력이 그려진다. “지는 농사지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태웅은 경운기, 이양기, 트랙터, 관리기 등 어려운 4종 농기계 섭렵은 물론, 농사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친다. 농사뿐 아니라 트로트 노래 실력도 수준급인 태웅은 이미 마을 어르신들에게는 특급가수로 통한다고. 신통방통한 16세 중딩농부 한태웅의 독보적인 매력에 시청자들도 흠뻑 빠져들 전망이다. ▶ 정형돈, 김숙, 송하윤, 이진호의 좌충우돌 농촌라이프 정형돈, 김숙, 송하윤, 이진호가 농사를 지으러 시골로 떠났다. 네 MC들은 바쁜 도시생활을 잠시 떠나 태웅이와 함께 현실판 시골 삶큐멘터리를 선보인다. 태웅이와 함께 생활하고 농사일을 직접 해보며 좌충우돌 농촌라이프를 그릴 예정. 연출을 맡은 엄진석PD는 “정형돈은 평소 바쁜 스케줄로 인해 휴식이 필요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골살이에 도전했다. 리얼한 시골적응기를 보여줄 것”이라고, “걸크러시 김숙은 이번 프로그램에서 의외의 매력을 발산할 계획”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엄PD는 또, “실제 농고출신인 이진호가 농사와 농촌지식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감이 실제 활약으로 이어질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고, “배우 송하윤은 무공해 청정소녀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시골살이의 색다른 매력을 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각박한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 위한 진짜 행복 찾기 ‘풀 뜯어먹는 소리’는 마음대농 한태웅과 마음소농 연예인들의 진짜 행복 찾기를 보여준다. 앞만보고 달려온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초록빛 자연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와 힐링을 선사할 예정. 프로그램의 중심에 있는 중학생 농부 한태웅은 자신의 일상에 대해 “눈 뜨고 자기 전까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라며 행복의 기준과 가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전한다. ‘풀 뜯어 먹는 소리’에서는 마음이 행복한 농부 한태웅과 함께 논 농사를 지으며 맛보는 수확의 결실,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나만의 행복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선사할 전망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아버지가 요리하는 가족밥상 “이젠 아버지도 요리사”

    아버지가 요리하는 가족밥상 “이젠 아버지도 요리사”

    경기 부천시가 제2기 아버지 요리교실 수강생을 오는 29일까지 모집한다. 부천시 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지난 22일까지 ‘제1기 이모작 아버지 요리교실’을 성황리에 마치고 제2기 수강생을 신청접수한다고 25일 밝혔다. 요리교실은 다음달 13일부터 9월 28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인생이모작지원센터 홈페이지(http://twohappylife.bucheon.go.kr)를 참조하거나 전화(032-625-4793~4)로 문의하면 된다. 지난 22일 마친 제1기 요리교실은 5060 베이비부머 24명이 참여해 재미있고 알찬 프로그램으로 12주 동안 배웠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말은 이제 먼 얘기다. 요즘 백종원 셰프 덕에 젊은 남자 요리사는 연예인 정도로 인기가 좋다. 휴일에 가족식사를 준비하는 아버지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남편으로, 자애로운 아버지로 여겨진다. 시대 변화에 따라 베이비붐 세대의 아버지도 요리에 도전장을 던졌다. 강된장찌개나 탕수육·짜장면·잡채 등 요리를 만들어 성취감도 느끼고 가족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멋진 아버지로 변신하고 있다. 요리수강생인 한 시민은 “이전에는 아내가 없는 시간에 혼자 식사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며, “이젠 간단한 음식은 물론이고 가끔 요리교실에서 배운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준비하면 아내가 매우 좋아해 요리가 이렇게 큰 감동이 될지 몰랐다”고 소감을 말했다. 다른 한 수강생은 “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서 시작한 이모작 아버지 요리교실은 매우 실용적인 수업이었다”며“처음에 아내 권유로 마지못해 등록했지만 12주 동안 빠짐없이 참석할 줄 미처 생각도 못했다”며 즐거워 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메시지가 미디어다’···사람을 움직이는 메시지 관리법 담은 책 나와

    ‘메시지가 미디어다’···사람을 움직이는 메시지 관리법 담은 책 나와

    #1. 그는 단 2분간의 인터뷰로 마녀 사냥의 대상이 됐다.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팅의 국가대표 김보름 선수 이야기다. 경기 내용보다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비웃는 듯한 웃음과 표정이 네티즌들의 분노를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2. 서울시교육감에 출마한 고승덕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한 그의 딸 캔디 고가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당시 캔디 고가 쓴 페이스북 글에는 ‘좋아요’가 채 50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캔디 고의 삶과 용기로 쓴 글은 경청할만 것이었고 강력한 메시지가 된 것이다. #3. 막강한 실세 정치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정치 인생을 접는 데는 단 두시간이었다. 안희정의 수행비서 성폭행 사실은 JTBC가 저녁 8시 뉴스룸을 통해 처음 보도했다. jtbc 보도 10분 뒤에 이 기사는 수십, 수백개의 기사로 만들어졌고, 수만개의 트윗을 통해 전송됐다. 이들 사건은 사람들에게 다른 성격의 충격을 안겼지만 가공할만한 뉴스 전파 속도에 당사자들은 쓰나미처럼 휘쓸려가버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대한항공에서 보듯 갑질 사례가 보도되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이런 시대에 메시지를 어떻게 만들고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 나왔다. 정치 컨설턴트이자 선거 캠페인 기획자인 유승찬씨가 ‘메시지가 미디어’(나무바다·304쪽)라는 책을 통해 이에 대한 방안을 소개하고 있다. 책 제목 ‘메시지가 미디어다’는 캐나다 교수 마셜 맥루한(이 책에서는 매클루언)의 유명한 말 ‘미디어가 메시지다’를 뒤집어 표현한 것으로, 1인 미디어시대이자 스마트폰시대에서 메시지가 주어가 된 상황을 강조한 것이다. 촛불혁명, 세월호 참사, 미투(me too) 운동을 거치면서 미디어가 아니라 메시지가 주어임을 경험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12일 5개의 트윗을 날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 활용법에서부터 문재인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메시지를 생산하고 관리한 방식을 분석한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트뷰 등의 미디어 채널의 특성과 차이점을 분석해 각각에 맞는 메시지 공략법을 짚어냈다. 특히 책에서는 성공적인 메시지 관리법 9가지를 제시한다. 저자는 메시지가 사람을 움직이는 순간,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한다고 단언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이완구 “김종필 훈장 논란, 공에 너무 인색…일본이 부럽다”

    이완구 “김종필 훈장 논란, 공에 너무 인색…일본이 부럽다”

    23일 작고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훈장 추서를 비롯, 생애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JP(김종필) 키즈’라 할 수 있는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남의 공에 대해 너무 인색한 것 같다”면서 “일본이 부럽다”고 말했다. 이완구 전 총리는 2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훈장 추서 찬반 논란에 대해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본인의 살아온 인생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면서 “모두 살면서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을 수 있는데 다른 나라의 경우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완구 전 총리는 일본을 예로 들면서 “일본은 100여명에 가까운 영웅들이 국민들 사이에 있다”면서 “일본에 가 보니 정말 부럽다.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조차 다 영웅시해주고 평가해주는데, 참 우리 사회는 너무 남의 공에 대해서 인색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과가 있더라도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무궁화장까지 수여하는 것은 과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것 같다고 묻자 이완구 전 총리는 “산업화를 일으킨 주역이 김종필 전 총리인데 그걸 그렇게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훈장 추서에 대해 “이런 식이면 전두환이 죽어도 훈장 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이완구 전 총리는 “전두환과 JP는 결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월드피플+] 염산테러로 얼굴 잃은 20대 女…1년 후 모델로 우뚝

    [월드피플+] 염산테러로 얼굴 잃은 20대 女…1년 후 모델로 우뚝

    영국 런던의 20대 여대생이 괴한의 염산테러로 얼굴을 잃는 사고를 당하고서도 이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새 삶을 시작했다고 밝혀 찬사를 받고 있다. 영국 메트로, 데일리메일 등 현지 언론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리샴 칸(22)은 지난해 21세 생일 당시, 사촌과 함께 런던 동부의 한 도로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다. 그때 한 남성이 다가와 열려있는 차량 창문 안으로 염산을 뿌렸고, 이 사고로 리샴과 사촌은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다. 특히 부상이 심했던 리샴은 이 사고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녀는 얼굴 전체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몇 개월간 지옥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치료와 수술을 견뎌야 했다. 해당 사실이 SNS를 통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리샴 역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자신의 달라진 얼굴에 놀라면서도, SNS를 통해 치료과정을 공개하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리샴은 “나는 염산테러를 피해자 중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서 “가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SNS를 통해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가해자가 선 재판에 직접 참석해 “21살 생일은 내게서 얼굴이 사라진 끔찍한 날이었다. 화상으로 가득한 얼굴을 볼 때마다 분노를 느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나 같지 않았다”면서 “그에게 징역 몇 년 형이 주어지든 상관없이, 이 상처는 내게 평생 남아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끔찍한 사고 후에도 주위의 격려를 받아들이고 희망을 잃지 않은 그녀는 얼마 전 고국인 터키에서 22번째 생일파티를 열고 근황을 공개했다. 사진 속 리샴은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자신있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비록 화장으로 얼굴의 흉터를 가려야 했지만,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또 한 번 응원이 쏟아졌다. 그녀는 “나는 22살이 됐다. 최고의 인생을 살자”라는 메시지를 남겨 희망을 잃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끔찍한 사고를 이겨낸 리샴은 현재 영국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공연리뷰] 첼로의 깊은 탄식, 위로를 담다

    [공연리뷰] 첼로의 깊은 탄식, 위로를 담다

    첼로의 깊은 탄식이 울렸다. 슬픔을 토해 내듯 시작된 단조의 선율.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위로하는 듯했다.지난 21~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노르웨이 출신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가 선보인 엘가 첼로협주곡은 밀도감 있는 연주로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서울시향이 이 곡을 무대에 올린 것은 2015년 8월 이후 3년여 만이다. 뫼르크는 무대 위에서 늘 관객과 마주 봐야 하는 첼리스트의 고충을 말한 바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언제든지 자세를 틀어 관객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고, 피아니스트도 건반과 악보만 보고 관객을 ‘외면’할 수 있지만, 첼로 연주자는 늘 관객과 마주하고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부담에 개의치 않는 듯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했다. 엘가 첼로협주곡을 연주하며 흔히 볼 수 있는 감정 과잉 같은 제스처는 찾기 어려웠다. 그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연주자는 공연장의 특색,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간의 호흡, 그 순간의 감정 등 매번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최선의 연주를 보여 줄 수 있는지 알아야 하는 일종의 도전이자 압박을 받는다”면서 “공연 전후에 연주를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연주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대 위의 집중력 때문이었을까. 그의 숭고하면서도 절제된 첼로의 음색에 청중은 공감했다. 엘가 첼로협주곡은 영화 ‘덩케르크’의 OST로도 유명한 ‘님로드’(‘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째 변주), ‘위풍당당 행진곡’의 작곡가인 엘가가 노년에 작곡한 후기 낭만파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뫼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 작곡가 개인의 인생을 돌아보는 작별의 심정, 후기 낭만주의가 음악사에서 시기적으로 마감되는 것에 대한 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담긴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엘가 첼로협주곡이 연주자들에게 더욱 어려운 이유는 영국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의 명연주가 ‘거대한 산’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날 연주는 순전히 뫼르크 자신만의 것이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자칫 감정의 과잉으로 빠지기 쉬운 곡이지만, 뫼르크는 밀도 있고 중도적으로 자기만의 연주를 보여 줬다”면서 “뒤프레를 흉내내는 연주도 많은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곡을 직시함으로써 나오는 미감을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뫼르크는 연주 후 앙코르로 제자 심준호 등 첼로 단원 8명과 함께 20세기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의 ‘새의 노래’를 함께 연주했다. ‘새의 노래’는 카살스가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 카탈루냐의 민요를 편곡한 곡으로, 그의 첼로 소품집에 담겨 더욱 유명해졌다. 뫼르크는 무대 위 압박을 벗어난 듯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후배들과 함께 거장에 대한 헌정과도 같은 곡을 연주하며 이번 공연을 마무리했다. 뫼르크는 1982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명성을 쌓아온 북유럽의 대표 연주자다. 2009년 뇌염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왼쪽 팔이 마비되는 음악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병을 극복하고 2011년 극적인 복귀 무대를 가진 뒤 다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황교익 “김종필 죽음 애도하지 말라…끝까지 평화와 통일 방해한 사람”

    황교익 “김종필 죽음 애도하지 말라…끝까지 평화와 통일 방해한 사람”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 “총으로 권력을 찬탈하였고 독재권력의 2인자로서 호의호식하였다”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말라”면서 비판했다. 황교익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김종필 전 총리가) 거물 정치인이라 하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실패한 인생이다”라면서 “가는 마당임에도 좋은 말은 못 하겠다. 징글징글했다”고 밝혔다. 그는 “정치인의 죽음은 개인적 죽음일 수 없다. 정치인은 죽음과 동시에 역사적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이다. 김종필은 총으로 권력을 찬탈하였다. 독재권력의 2인자로서 호의호식하였다. 민주주의를 훼손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말라. 이 자랑스런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의 시간을 되돌리지 말라”면서 “그는 마지막까지 평화와 통일을 방해한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징글징글했다. 이런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라고?”라고 반문했다. 또 “그를 사랑했는가. 그의 그림자라도 남기고 싶은가. 그의 시대가 그리운가. 그의 시대를 칭송하고 싶은가. 그러면 애도하시라. 쿠데타와 고문과 인권유린과 독재와 분열과 냉전과 지역이기와 정치야합 시대의 종말을 고통스러워하시라”라고도 했다. 특히 정부가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방침을 정한 데 대해 “이런 식이면 전두환이 죽어도 훈장 주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직업 정치인들끼리야 그와의 애틋한 추억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사적 감정을 국가의 일에 붙이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숫자로 풀이한 김종필 인생...9와 각별한 인연

    숫자로 풀이한 김종필 인생...9와 각별한 인연

    23일 92세를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정치 9단’이라고 불리며 국내 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세웠다. 9선 의원인 JP는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장과 국회의원,당 대표를 지냈고 국무총리를 40대와 70대에 두 번 역임했다. 1926년생인 JP는 35세이던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한 뒤 초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올랐고,2년 뒤인 1963년 3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민주공화당 의장 자리를 꿰차며 명실상부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JP는 숫자 ‘9’와 인연이 남다르다.30대에 정계에 뛰어들어 70대에 정계 은퇴를 할 때까지 JP는 ‘정치 9단’으로 불렸다. 92세로 비교적 장수한 JP는 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JP는 제6대 국회의원선거였던 1963년 첫 당선 이후 7,8,9,10,13,14,15,16대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았다. JP는 국무총리를 2번 역임한다.45세이던 1971년 국무총리에 취임해 4년6개월 동안 자리를 지킨 뒤 퇴임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선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72세의 나이로 국무총리 자리에 두번째로 오른다.서리 기간을 포함해 약 1년 10개월 동안 재임했다. JP는 인생에서 정계은퇴를 2번 했다. 1968년 5월 JP를 박 전 대통령 후임으로 추대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난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가 2년 7개월만인 1970년 12월 복귀한다. 1980년에는 신군부 등장과 함께 영어의 신세가 됐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한 후 7년의 야인 생활을 한 뒤 1987년 9월 정계에 돌아온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은퇴는 2004년 4월로,당시 자민련이 총선에서 4석 확보에 그치면서 JP는 대패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무법변호사’ 제작진 “벼랑 끝 최민수, 극악무도 본능 폭발”

    ‘무법변호사’ 제작진 “벼랑 끝 최민수, 극악무도 본능 폭발”

    벼랑 끝에 내몰린 ‘무법변호사’ 최민수가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것이 예고돼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준기의 역공과 함께 이혜영에게 토사구팽 당한 최민수가 결국 서슬 퍼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지 관심을 높인다. 동 시간대 주말 안방극장 절대 강자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tvN ‘무법변호사’(김진민 연출/윤현호 극본/tvN, 스튜디오드래곤 기획/로고스필름 제작) 측은 23일(토) 최민수(안오주 역)의 비주얼 변신이 담긴 사진을 공개해 이목을 집중시킨다. 기세등등했던 최민수는 온데간데 없이 초췌한 몰골이 포착된 것. 지난 ‘무법변호사’ 12회에서는 안오주의 처절한 몰락이 예고됐다. 차문숙(이혜영 분)은 안오주에게 완전히 등돌렸고 봉상필(이준기 분)은 안오주의 살인 교사 증거를 확보하며 그를 벼랑 끝에 내몰았다. 특히 차문숙은 골든시티 사업 전면 보류와 시장 선거법 위반 문서를 퍼트리는 등 안오주의 돈-명예-권력 등 모든 것을 뺏기 위한 계략을 실행했다. 이에 안오주의 난관이 계속될 것이 예고되며 향후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시청자들의 호기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 공개된 사진 속 최민수는 기성 시장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덥수룩한 수염과 정돈되지 않은 의상으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놀라운 충격을 전한다. 하지만 최민수의 눈빛만은 섬뜩할 정도로 매섭고 강렬해 보는 이들을 소름 돋게 만든다. 무엇보다 또 다른 사진 속 최민수가 총을 들고 폭주하고 있어 보는 이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최민수는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서슬 퍼런 독기를 뿜어내고 있는 모습. 그가 누구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더불어 그의 폭주가 향후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증을 배가시킨다. 한편 그 동안 최민수는 기성 시장이 된 이후 자신의 손을 직접 거치지 않고 오른팔 최대훈(석관동)을 통해 파렴치한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런 가운데 벼랑 끝에 내몰린 최민수가 끝내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극한의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 것인지 본 방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tvN ‘무법변호사’ 제작진은 “안오주가 그 동안 억눌러왔던 어시장 깡패 시절의 극악무도한 본능을 폭발시킬 예정”이라며 “안오주의 폭주가 차문숙을 향한 봉상필 복수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지 상상 이상의 전개가 펼쳐질 ‘무법변호사’ 13회를 기대해달라”고 전했다. tvN ‘무법변호사’는 법 대신 주먹을 쓰던 무법(無法) 변호사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우며 진정한 무법(武法) 변호사로 성장해가는 거악소탕 법정활극. 오늘(23일) 밤 9시 tvN을 통해 ‘무법변호사’ 13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 별세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 별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향년 92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3김(金) 시대’의 마지막 주인공이까지 떠나게 됐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를 졸업해 서울대 사범대 그리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2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고 그 해에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9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지만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고 1997년 대선에서는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키는데서 자신의 꿈을 접었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나 혼자 산다’ 한혜진, 전현무 실수에 분노 폭발 “헤어질 뻔했어”

    ‘나 혼자 산다’ 한혜진, 전현무 실수에 분노 폭발 “헤어질 뻔했어”

    ‘나 혼자 산다’에서 한혜진이 전현무의 실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22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는 래퍼 쌈디 편 녹화를 마친 후 2018 러시아월드컵 한국 경기를 함께 모여보는 무지개 회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멤버들은 녹화가 끝나고 전현무의 집에서 모였다. 기안84는 멤버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줬고 한혜진은 맛집에서 음식들을 잔뜩 사왔다. 이날 함께 녹화한 쌈디도 핫도그를 들고 전현무 집을 찾아 함께 했다. 멤버들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을 올려 응원했다. TV 앞에 모여 한창 응원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전현무가 실수로 리모콘을 발로 밟아 TV를 껐다. 중요한 순간에 꺼진 TV에 멤버들은 소리치며 그를 원망했다. 전현무는 당황해 TV를 켰으나 리모콘을 잘못 만져 음성 인식으로 넘어갔다. 이에 멤버들은 “MBC” “11번” “축구 틀어줘”를 다급하게 외쳤으나 TV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은 지연됐다. 겨우 축구 화면으로 넘어왔고 스코어에는 변함이 없었다. 전현무의 여자친구인 한혜진은 “아, 헤어질 뻔 했어”라며 분노를 삭여 웃음을 자아냈다. 전현무는 “내 인생이 같이 꺼지는 줄 알았다”며 멤버들에게 미안해 했다. 그러나 이후 전현무는 또 리모콘을 잘못 눌러 속옷 홈쇼핑으로 채널을 돌려 또 한 번 원성을 샀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사람들 살리려고 저잣거리를 떠돈 조선의 착한 거지

    사람들 살리려고 저잣거리를 떠돈 조선의 착한 거지

    이토록 고고한 연예/김탁환 지음/북스피어/628쪽/1만 6800원귀밑까지 찢어진 커다란 입. 짓뭉개져 입보다 더 낮은 콧등. 꿀벌이 제집인 줄 알고 들락날락거릴 만큼 큰 콧구멍. 털 하나 없는 눈썹 아래로 쏟아질 듯 흔들리는 왕방울만 한 눈. 연지를 칠한 듯 도드라지는 광대뼈. 몸에 살점이라곤 하나 없는 홀쭉이. 못난 몰골로도 모자라 걸어다닐 때마다 가축의 썩은 시체와 시궁창 냄새를 훅 끼치는 이 사내는 조선시대 이름난 추남 거지 ‘달문’이다. 소문이 어찌나 파다한지 달문을 직접 본 사람은 드물었지만 장안에서 그는 절대로 닮아서는 안 되는 흉측한 인간으로 통했다. 아무리 겉볼안이라지만 사귀어 보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차리기는 힘든 법. 거지 패를 이끌었던 달문은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재담이면 재담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광대로 유명했다. 그뿐인가. 뛰어난 재주를 이용해 돈을 벌어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들에게 베푸는 인품마저 갖췄다. 이쯤 되면 이야기의 극적인 구성을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로 보이겠지만 달문은 조선 후기 실존했던 사람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소설 ‘광문자전’에서 종로 저잣거리의 거지로 등장하는 ‘광문’이 바로 달문(1707~?)이다. 역사 소설가로 잘 알려진 김탁환 작가가 달문을 신작 소설에 불러낸 건 역시 그가 지닌 독보적인 매력 덕분일 터다. 특히 의아할 정도로 의롭고 착한 마음을 지닌 채 모든 사람을 믿고 도왔던 ‘한없이 좋은’ 한 인간의 본성에 주목했다. 작가는 매설가(소설가)를 꿈꾸는 인삼가게 주인 ‘모독’의 눈을 빌려 18세기 ‘만능 재주꾼’ 달문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밀하게 그려 냈다. 달문은 꼭두각시, 놀이, 마술, 줄타기 등 조선 최대의 종합예술축제였던 산대놀이에 특히 능했다. 내로라하는 팔도의 재인들이 달문을 만나고 싶어서 줄을 설 정도였다. 이 정도면 콧대가 높을 법도 한데 달문은 자신을 낮추기에 바빴다. 온갖 판에서 춤추고 노래해서 번 돈은 늙고 병들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광대들에게 나눠줬다.길 위를 떠돌던 달문은 굶어 죽는 백성들을 위해 ‘달문 유랑단’을 꾸려 흉년이 심한 고을만 골라 놀이판을 벌였다. 당연히 벌어들인 돈은 제 주머니에 넣지 않고 곡식을 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손에 쥔 게 없어도 그 돈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준 사람이 부자라는 달문. 평생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온갖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그의 기이한 행적을 보고 있자면 인(仁)과 자비를 강조한 공자나 부처도 이와 같았을까 싶다. 전국을 떠돌며 백성을 돕는 이유를 묻는 나라님에게 건넨 달문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묵직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 백성의 가난을 위해 인생을 바친 거지라니. 이토록 고고한 연예(演藝)라니.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거리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심약하고, 더럽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다고, 몰상식하다고 욕심 덩어리라고, 꿍꿍이가 있다고, 병을 옮긴다고, 언제든지 범죄자로 돌변할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공격받아 왔다”면서 “거리에서 평생을 흐른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통해 그 단단한 편견을 부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작가가 달문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곱씹게 된다. 이 험난한 곳에서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좋은 사람으로 잘사는 것은 무엇인가.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거미, 조정석 결혼 소감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 돼준 분♥”[전문]

    거미, 조정석 결혼 소감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 돼준 분♥”[전문]

    가수 거미가 배우 조정석과의 결혼 소감을 전했다. 22일 조정석 거미 커플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거미가 자신의 팬카페에 직접 글을 올렸다. 거미는 “결혼의 무게를 자세히 느끼고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결혼을 결정하게 됐다. 긴 시간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배움과 깨달음도 느끼게 해준 분이다. 정말 좋은 인연을 만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어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응원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만 그 상황에 맞게 내 자리에서 좋은 가정 꾸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음악으로 표현하고 여러분과 더 많은 이야기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앞서 거미 소속사 씨제스엔터테인먼트는 거미와 조정석 본인에게 가을 결혼설에 대해 확인한 끝에 “조정석과 거미가 하반기 결혼 예정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결혼식은 비공개 예식이 될 예정이며 두 사람의 앞날에 따뜻한 응원과 축복 부탁 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조정석 또한 자신의 팬카페를 통해 “올해 제가 결혼하려 합니다. 5년 동안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사람이기에 결혼을 결심했다”며 “아직 세부적인 일정이 정해지지는 않아서 말씀을 못드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셨겠지만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예쁘게 잘 살라고 응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조정석과 거미는 2013년 지인의 소개로 만나 5년 째 열애 중이다. <거미의 결혼 소감 전문> 여러분...안녕하셨어요..글을 오랜만에 쓰는것 같네요..늘 공연장에서 여러분 자주 뵙고 있어서 제가 글쓰는걸 잊었었나봐요 먼저 너무 죄송합니다 ㅜㅜ 여러분 오늘 많이 놀라셨을거라 생각이 되네요...한 글자 한 글자..쓰면서도..계속 더 조심스러워 지고..속도가 느려집니다.... 여러분 기사를 통해 알게 되신것처럼.. 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 무게에 대해서 자세히 느끼고 실감하진 못하지만..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긴 시간 저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또 많은 배움과 깨달음도 느끼게 해 준 분입니다..정말 좋은 인연을 만난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진심으로 응원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겠지만..저는 그 상황에 맞게.. 제 자리에서 좋은 가정을 꾸릴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새롭게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음악으로 표현하고 여러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할수 있는 삶을 살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못다한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조정석의 결혼 소감 전문> 여러분 정석입니다^^ 아이구 이른 아침에 놀라셨죠? 급작스러운 보도에 저도 깜짝 놀랐네요. 일단 여러분들께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전해드려야했는데 기사로 접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ㅜㅜ 항상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는 여러분들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에 대해 직접 말씀 드리고자 이렇게 글 남겨요. 새로운 인생의 또다른 시작이기도 하고 배우로서 더 거듭날수 있는 기로에 서있는거 같기도 하고 혼자만 걸어왔던 길을 앞으로는 누군가와 같이 걸어갈 생각에 설레이기도하고...그래서 떨리기도 하네요^^ 아직 세부적인 일정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말씀을 못드리고 있었지만... 올해 제가 결혼을 하려 합니다. 5년 동안 서로에게 큰 힘이 되주었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격려 해줄 사람이기에 결혼을 결심 했습니다. 넘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셨겠지만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예쁘게 잘 살라고 응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든든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항상 부족하지만 좋은작품으로 여러분들과 끊임없이 교감할수 있는.. 더 책임감 있는 배우 조정석으로서 인사드릴게요~ 더욱더 성장할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요즘 전 영화 뺑반 촬영 열심히 잘 하고 있구요 이제 막바지 촬영이 한창입니다. 다행히 여러분들 덕분에 건강하게 무사히 촬영 잘하고 있어요^^촬영 마무리 잘하구 언능 또 인사드릴게요~~ 항상 건강만 하시고 행복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하세요^^ 감사합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인생술집’ 진서연 “남편 3개월 만에 혼인신고..촉이 와서 짜증”

    ‘인생술집’ 진서연 “남편 3개월 만에 혼인신고..촉이 와서 짜증”

    배우 진서연이 남편과 만난 지 3개월 만에 부부가 됐다고 밝혔다. 진서연은 지난 21일 방송된 tvN 토크쇼 ‘인생술집‘에 오나라, 샤이니 키, 민호와함께 출연해 입담을 자랑했다. 진서연은 “남편과 만난 지 3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문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이어 진서연은 ”너무 사랑해서 한 게 아니다.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이다’ 촉이 온다고 하지 않냐. 그 촉이 와서 너무 짜증이 났다. ‘얘야?’ 싶었다”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이어 진서연은 “그 분이 9살이 많은데 너무 감당이 안 됐다. 어차피 저 사람이면 정신 차리게 해야겠다 싶어서 혼인신고부터 했다”고 털어놨다. 진서연은 “남편이 개인주의 성향이 엄청난 사람”이라며 “나도 그렇다. 개인주의가 심해서 결혼 못할 줄 알았다. 그런 개인주의 둘이 딱 만나면 완벽하더라. 서로 이해가 된다”고 전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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