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인생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 자라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 메이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 드림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 재검
    2026-07-2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7,896
  • “고수익 보장” 300억 투자 사기 검찰 직원 징역 9년 구형

    높은 수익을 올려주겠다며 부동산 투자 사기를 벌인 혐의(사기)로 구속기소 된 전주지검 정읍지청 직원에 대해 항소심에서도 중형이 구형됐다. 검찰은 11일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제1형사부(김성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A(39·여)씨에 대한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원심 구형량과 같은 징역 9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A씨는 최후변론에서 “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경제적 피해를 보았고 어떤 이의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말했다. A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은 오는 12월 9일에 열린다. A씨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고수익을 보장하겠다’며 지인 등 수십 명으로부터 부동산 투자금 300여억원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식에 투자해 손실을 낸 뒤 수익금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월드피플+] 폐지줍던 마약중독자, 친환경 사업가로 인생역전

    [월드피플+] 폐지줍던 마약중독자, 친환경 사업가로 인생역전

    굴곡진 삶을 살던 아르헨티나의 40대 남자가 폐지를 소재로 사용한 친환경 벽돌 개발에 성공, 사업가로 변신해 화제다. 현지 언론에 소개된 라몬 호르헤 베가(45)가 바로 그 주인공. 아르헨티나 말비나스에 살고 있는 그는 요즘 친환경 벽돌을 찍어내느라 정신이 없다. 대학병원을 짓는 데 친환경 벽돌을 납품하기로 하면서 생산량을 크게 늘린 탓이다. 베가는 "폐지가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워주었다"면서 친환경 벽돌을 들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평범한 미장공으로 살아가던 베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마약에 손을 대면서였다. 호기심에 손을 댄 코카인에 중독되면서 그는 결국 교도소 신세까지 지게 됐다. 이후 만기 출소했지만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그가 시작한 일은 폐지수집이었다.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박스, 폐병 등을 모아 고물상에 넘겨 하루하루를 살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건 2016년 어느 날이다. 전날 밤 시내를 돌면서 수집한 폐지를 마당에 잔뜩 쌓아놓았는데 밤새 비가 내리면서 완전히 젖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에겐 인생역전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주변에 있던 시멘트와 젖은 폐지가 섞이면서 단단하게 굳어가는 걸 보고 베가는 "이거 신기한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시멘트와 함께 굳어버린 폐지는 벽돌로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단단한 결합체 같았다. 미장공 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친환경 폐지벽돌로 만든 1호 건축물이 아들의 방이다.마침 아들이 방을 만들어달라고 했지만 벽돌을 살 돈이 없어 미루고 있던 베가는 폐지와 시멘트를 섞어 벽돌을 찍어보자는 엉뚱한(?) 발상을 하게 됐다. 그는 "벽돌을 살 돈이 없어 아들에게 방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틀을 만들고 폐지와 시멘트를 섞어 찍어보니 나흘 만에 기존 벽돌 못지않게 튼튼한 벽돌이 나왔다"고 말했다. 기존 벽돌보다 저렴하게 생산이 가능한 친환경 벽돌을 찍어 미장일을 다시 시작한 그에게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이 열린 건 지난해 시장과 만나면서였다. 소통을 위해 도시를 돌면서 주민들과 만나던 시장은 그가 만든 친환경 벽돌을 보고는 큰 관심을 보였다. 2달 뒤 시장은 "친환경 스타트업 대회가 있으니 출전해 보라"고 그에게 권유해왔다. 이렇게 출전한 대회에서 당당히 2등에 오르면서 그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상을 계기로 대학병원 건설현장에 친환경 벽돌을 납품하게 되면서 대량생산의 길도 활짝 열렸다. 베가는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인생이 쓰레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면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이방카 생모 “트럼프, 골프나 치며 평범하게 살아라” 일갈

    이방카 생모 “트럼프, 골프나 치며 평범하게 살아라” 일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부인이자 장녀 이방카의 생모인 이바나 트럼프가 전 남편의 ‘대선 불복’에 쓴소리를 던졌다. 이바나는 10일(현지시간) 미국 잡지 피플과 인터뷰에서 “트럼프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트럼프는 대선 패배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트럼프는 돈도 많고, 갈 곳도 살 곳도 있다. (퇴임 이후)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서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로 내려가 골프를 치며 평범하게 사는 것이 트럼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이바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기 선거를 주장하며 대선 불복 소송을 벌이고, 고위직 관료들을 경질하며 평화로운 정권 인수인계를 거부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트럼프는 좋은 패배자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바나의 이같은 평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 유사하다고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난 좋은 패배자가 아니다”며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바나는 트럼프 대통령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와 차남인 에릭, 장녀인 이방카의 생모다. 체코 태생 모델 출신인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1977년 결혼해 1992년 이혼했다. 그는 “(내가 낳은 아이들이) 워싱턴DC가 아니라 그냥 뉴욕으로 가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바나와 이혼한 뒤 두번째 부인 말라 메이플스와 결혼해 둘째 딸 티파니를 얻었고, 현재 영부인인 멜라니아 여사와 2005년 결혼해 막내아들 배런을 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70살 시인의 견디는 삶…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70살 시인의 견디는 삶…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자작시 60편 엄선해 배경 이야기 덧붙여“외로움은 당연… 이해하면 견딜 수 있어”“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예요. 밥 안 먹으면 배고프듯이 당연한 거죠. 이런 본질을 가지고 ‘왜’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그걸 이해하면 삶이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 긍정하고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올해 시력 48년이 된 정호승(70) 시인은 새 산문집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비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진 시 ‘수선화에게’에 덧붙인 산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왔다. 1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은 ‘견디는 삶’에 대해 역설했다. 그동안 쓴 시 1000여편 중 서사적 배경, 이야기가 있는 작품 60여편을 골라 배경 이야기를 덧붙였다. 냇가를 오가며 시심을 키우던 중학생 시절(‘벗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고민하고 절망하던 나날(‘아버지의 나이’), ‘족보에 없는 형제’라 할 만큼 가까웠던 정채봉 작가와의 우정(‘정채봉’) 등 내밀한 인생 이야기가 시로 승화된 과정을 그렸다. 그는 “(시와 산문은) 별개의 장르이지만, 서로 하나의 영혼과 몸을 이룬다”며 “시를 쓰게 된 배경 이야기를 한 상에 차리면 시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고 전했다. 유신 시대에 등단한 그는 당대의 눈물을 닦기 위한 시를 썼다. 그의 시가 오래도록 한국인의 애송시로 사랑받는 까닭은 “보다 쉬운 우리말, 일상의 언어로 쓰고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쓰지 말자”던 자신의 결심과 관련이 있다. 일흔이 된 지금, 시인은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사회와 시대는 끊임없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어요. 이 시대의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끊임없이 생겨나고요. 지금은 나라는 존재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생각해요. 내 눈물을 닦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고요.” 시인은 시가 세상의 변화와도 무관한, 일상 속 물과 공기 같은 존재이며 ‘영혼의 양식’이라고 덧붙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월드피플+] ‘흙수저’ ‘이민자’ 꼬리표 떼고 코로나 백신 만든 부부

    [월드피플+] ‘흙수저’ ‘이민자’ 꼬리표 떼고 코로나 백신 만든 부부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가 함께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의 효과가 90% 이상이라는 중간 결과가 나와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바이오엔테크의 설립자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9일 보도에 따르면 바이오엔테크의 설립자는 우구르 사힌(55)과 외즐렘 튀레지(53) 부부다. 두 사람은 모두 1960년대 당시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 건너온 터키 이주노동자에게서 태어난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소위 ‘흙수저’로 불리는 이민 2세 출신인 사힌은 터키에서 태어나 4살 때 독일로 이주했고, 튀레지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이민자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가난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학업에 매진했으며, 2002년 실험실 가운을 입고 결혼식을 올려 눈길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손가락질과 설움을 연구로 승화한 듯 보인다. 사힌-튀레지 부부는 결혼식 당일 관공서에서 혼인신고를 한 직후 연구실로 직행했을 정도였다. 흙수저 출신이라는 꼬리표에 연연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 온 부부는 2008년 바이오엔테크를 설립하고 항암 면역치료법 개발에 집중했다. 올해 초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후에는 500명 규모의 백신 개발팀을 구성했다.수개월 간 백신 개발에 매진한 끝에 결국 성공을 눈앞에 둔 부부의 스토리는 ‘흙수저의 인생 승리’로 간주된다. 독일 베를린 지역지 타게스슈피겔은 이들 부부의 성공에 대해 청과물 가게에서 일하는 저학력 계층 정도로 여겨졌던 터키 이민자의 쾌거”라고 분석했다. 백신 효과가 알려진 뒤 바이오엔테크의 주가는 23.4% 급등했고, 시가 총액은 219억 달러(약 25조원)이 됐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이미 지난해 9월 민간 자선단체인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결핵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협약을 맺어 ‘될 성 부른 떡잎’을 미리 알아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이들 부부가 억만장자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검소한 태도로 변함없이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고 전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인간은 외로운 존재… 이해하면 견딜 수 있어”

    “인간은 외로운 존재… 이해하면 견딜 수 있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예요. 밥 안 먹으면 배고프듯이 당연한 거죠. 이런 본질을 가지고 ‘왜’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그걸 이해하면 삶이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 긍정하고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올해 시력 48년이 된 정호승(70) 시인은 새 산문집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비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진 시 ‘수선화에게’에 덧붙인 산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왔다. 1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은 ‘견디는 삶’에 대해 역설했다. 그동안 쓴 시 1000여편 중 서사적 배경, 이야기가 있는 작품 60여편을 골라 배경 이야기를 덧붙였다. 냇가를 오가며 시심을 키우던 중학생 시절(‘벗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고민하고 절망하던 나날(‘아버지의 나이’), ‘족보에 없는 형제’라 할 만큼 가까웠던 정채봉 작가와의 우정(‘정채봉’) 등 내밀한 인생 이야기가 시로 승화된 과정을 그렸다. 그는 “(시와 산문은) 별개의 장르이지만, 서로 하나의 영혼과 몸을 이룬다”며 “시를 쓰게 된 배경 이야기를 한 상에 차리면 시를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고 전했다. 유신 시대에 등단한 그는 당대의 눈물을 닦기 위한 시를 썼다. 그의 시가 오래도록 한국인의 애송시로 사랑받는 까닭은 “보다 쉬운 우리말, 일상의 언어로 쓰고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쓰지 말자”던 자신의 결심과 관련이 있다. 일흔이 된 지금, 시인은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사회와 시대는 끊임없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어요. 이 시대의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끊임없이 생겨나고요. 지금은 나라는 존재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생각해요. 내 눈물을 닦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고요.” 시인은 시가 세상의 변화와도 무관한, 일상 속 물과 공기 같은 존재이며 ‘영혼의 양식’이라고 덧붙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여기는 베트남] 몸무게 3.9kg…가장 작은 11세 소년의 안타까운 죽음

    [여기는 베트남] 몸무게 3.9kg…가장 작은 11세 소년의 안타까운 죽음

    키 62㎝, 몸무게 3.9kg의 11살 소년, 베트남에서 가장 왜소하지만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소년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베트남 현지 언론 탄니엔은 베트남에서 가장 작은 소년으로 알려진 딘 번 레가 9일 오후 갑작스레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학교에서 쓰러진 레를 병원 응급실로 옮겼지만 합병증 치료를 받다가 5일 만에 숨졌다. 레는 태어날 때부터 작게 태어나 5살에 신장 50㎝, 체중 3kg에 불과했다. 면역력이 약해 각종 질병에 노출됐고, 또래 아이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스승 끄옹을 만나서부터다. 지난 2016년 레를 처음 본 끄옹은 작은 체구와 유달리 영롱하게 빛나는 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레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너무 멀어 통학이 어려웠다. 끄옹은 레의 사정을 고려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것을 권유했지만,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레에게 기숙사 생활은 사치였다. 이에 끄옹은 자신이 직접 레를 돌보기로 약속, 1주일만 함께 생활해 보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의 기간은 1주일이 한 달이 되고, 5년 동안 이어졌다.지난 5년간 끄옹은 레를 씻기고, 입히고, 먹여주며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휴일이면 레를 데리고 야외로 나가 자연 속에서 뛰어놀게 했다.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낯선 사람을 두려워했던 레는 스승의 한량 없는 사랑 덕분에 더 이상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친해졌고, 사람들 또한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11살의 레의 신장은 62cm, 체중은 3.9kg에 불과해 신생아와 다를 바 없었다. 여린 체구에 심장 질환, 폐렴 등의 수많은 질병을 앓다가 마지막 뇌졸중을 이겨내지 못했다. 부모가 있는 꽝응아이성 선하지역 마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가족, 친지, 스승, 친구들이 참석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지만, 모두로부터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가'라고 적혀있던 레의 글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누리꾼들은 소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특히 “한 작은 인간에게 보여준 스승의 믿음과 사랑에 경탄한다”며, 끄옹에게 감사의 글을 남겼다. 이종실 호치민(베트남)통신원 litta74.lee@gmail.com
  • [월드피플+] 코로나 탓에 디즈니랜드 폐쇄되자 직접 롤러코스터 만든 가족

    [월드피플+] 코로나 탓에 디즈니랜드 폐쇄되자 직접 롤러코스터 만든 가족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에서 롤러코스터 타는 것을 즐겼던 한 가족이 자택 뒷 마당에 미니 롤러코스터를 만들어 화제에 올랐다.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UPI통신 등 외신은 캘리포니아 주 나파에 위치한 자택 뒷마당에 가족 만의 놀이동산을 건설한 션 라로첼 가족의 사연을 보도했다. 평소 알프스 마터호른을 모티브로 제작한 디즈니랜드 인기 롤러코스터 ‘마터호른’을 즐겨타던 라로첼 가족에게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은 여러 고통을 안겨줬다. 감염 우려 외에도 특히 디즈니랜드가 폐쇄된 것.지난 3월 코로나19로 인해 디즈니랜드가 폐쇄되자 라로첼 가족은 그간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이 롤러코스터를 탈 수 없게 됐다. 이같은 상황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라로첼 가족은 결단을 내렸다. 집 뒷마당에 마터호른 롤러코스터를 그대로 축소한 미니 롤러코스터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 이에 지난 3월 미니 롤러코스터 건설에 들어간 가족은 친구들까지 팔을 걷어부친 끝에 지난 7월 마침내 결실을 보게됐다. 실제 모델을 그대로 축소해 만든 이 롤러코스터는 총 120m의 길이로 타는데 걸리는 시간은 50초 정도다. 물론 실제만큼 짜릿한 맛은 적지만 가족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롤러코스터를 주도적으로 제작한 건축학과 대학원생인 션은 "어린시절 부터 디즈니랜드는 꿈과 사랑의 공간이었다"면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그곳이 폐쇄되자 평소 롤러코스터를 직접 만들고자 했던 꿈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바꿔버렸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팬데믹의 부정적인 면만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이 기간동안 충분한 시간이 생겨 롤러코스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고현정, ‘너를 닮은 사람‘으로 2년만에 드라마 복귀

    고현정, ‘너를 닮은 사람‘으로 2년만에 드라마 복귀

    JTBC는 내년 방송할 ‘너를 닮은 사람’에 배우 고현정이 출연한다고 10일 밝혔다. 이 작품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한 여자와 그 여자와의 만남으로 삶의 빛을 잃은 또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치정과 배신, 타락과 복수를 그린다. 고현정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주인공 희주를 연기한다. 가난하고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보낸 희주는 현재 성공한 화가이자 에세이 작가로, 병원 재단의 후계자와 결혼 후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을 아쉬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가난마저도 빛나는 장식품으로 보이게 만드는 한 여성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고현정은 ‘동네변호사 조들호2: 죄와 벌’ 이후 약 2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다. 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 ,KBS ‘비밀’과 ‘눈길’을 쓴 유보리 작가가 집필하고 JTBC ‘알 수도 있는 사람’의 임현욱 PD가 연출을 맡는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전문] “백척간두의 삶 놓는다” KBS 9시 뉴스 황상무 앵커 사퇴의 글

    [전문] “백척간두의 삶 놓는다” KBS 9시 뉴스 황상무 앵커 사퇴의 글

    ‘KBS 뉴스 9’를 진행했던 황상무(56) 앵커가 KBS에 사표를 냈다. 황 앵커는 9일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KBS를 떠나려고 한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회사가 한쪽 진영에 서면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KBS는 극단의 적대 정치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며 “용서와 화해, 치유와 통합은 KBS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라고 주장했다. 황 앵커는 1992년 KBS에 입사해 사회부, 통일부, 정치부 등을 거쳤으며 뉴욕 특파원을 지냈다. 2015년 1월부터 ‘KBS 뉴스 9’ 앵커를 맡았다가 2018년 4월 새 경영진이 들어서면서 교체됐다. 지난 7월에는 ‘KBS뉴스9 검언유착(채널A 사태) 오보방송 진상규명을 위한 KBS인 연대서명’을 통해 양승동 사장의 대국민 사과와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음은 황 전 앵커가 KBS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KBS 선후배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KBS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동안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 지, 기약없이 떠나지만 고마웠던 기억만큼은 잊지 않겠습니다. 막상 이 글을 쓰려니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스쳐갑니다. 2005년 5월 3일 피눈물을 삼키며 진행했던 아침뉴스가 생각납니다. 불과 몇 시간 전, 어린 자식을 영안실에 넣어놓고 돌아선 직후였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까지 일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혼신의 노력을 바쳤던 KBS였습니다.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라고 믿었던 제 삶의 안식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KBS에 대한 저의 의탁을 접으려고 합니다. 시대상황이 변했고 더 이상은 제가 머물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애정은 변함없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에 불과할 겁니다. 그래서 떠나고자 합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를 실천하려고 했는데, 송구스럽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아껴주고 키워줬던 조직이기에,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도리라고 여겨 몇 자 적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매일 욕지거리와 쌍소리 악다구니로 해가 뜨고 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작가 김훈의 말입니다. 말 그대로 온갖 말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한 가운데에 KBS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현대사회에 진리는 없습니다.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이익이 중첩되어 첨예하게 엇갈리는 다원 사회에서 한쪽에서 말하는 정의는 다른 쪽에서는 불의가 되고, 견강부회, 곡학아세일 뿐입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입니다. 이른바 진영논리만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 방향을 모른 채 진영 간의 난투극 시대로 접어든 데는, 진리가 없는데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진리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론은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실과 자신의 이념이 부딪칠 때, 과감히 이념을 버리고 사실을 택해야 합니다. 제가 신입사원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말입니다. 이는 KBS의 숙명입니다. 이념으로 사실을 가리거나 왜곡하려 드는 순간, KBS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회사가 한쪽 진영에 서면,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국민을 편가르고 이간질하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고, 편들고자 했던 바로 그들로부터 업신여김이나 당할 뿐입니다. 우리는 곡절의 현대사를 헤쳐 왔습니다. 우리 사회 극단적 진영논리의 근저에는 망국과 식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온 암울한 역사적 유산이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 안에 사는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최근 날마다 벌어지는 분노와 저주의 악다구니를 듣노라면, 우리는 좌·우 양손에 이념의 촛불을 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좌나 우, 진보나 보수라는 틀로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날이면 날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선 주장들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내로남불을 쏟아내며 욕설과 저주로 증오만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성은 없고 극단의 감정만 있습니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키우는 ‘소용돌이’일 뿐입니다. 사실은 무시되고 조롱받으며, 주장과 선동만이 힘을 얻습니다. 과거에 대한 고찰, 현재의 성찰, 미래에의 통찰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극도로 분노하는 이들이 생기고, 동시에 극도로 좌절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이렇게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극단의 적대정치가 힘을 얻는 한, 이 땅에 킬핑필드를 재현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KBS는 이런 극단의 적대정치에 편승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질러서는 안됩니다. 분노와 증오의 끝은 언제나 골육상쟁의 파국뿐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KBS는 국민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지펴야 합니다. 긍정의 가치를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용서와 화해 치유와 통합은 KBS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KBS가 우리 역사의 저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자학사관을 버리고 과거 들추기를 접고 미래로의 전진을 역설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발굴하고 키워서 이를 중심으로 단합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피흘려 쟁취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듯이, 변방의 약소국을 지키기 위해 굴욕을 마다않고 노심초사 살아왔던 선조들의 헌신, 세계 최빈국을 신흥 선진국으로 만들어 온 선배들의 노고를 존중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조롱과 경멸, 능멸과 조소, 비아냥을 접고 배려와 존중, 예의와 염치, 정중한 말투를 되찾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꿋꿋이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게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의 존재 이윱니다. KBS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난 2년 여, 벼랑 끝에 매달린 채 백척간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손을 놓으려고 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돌과 바위투성이뿐이어서 낙하가 끝나는 순간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터져서 처참하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운이 좋아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더라도 과연 수면까지 다시 헤엄쳐 올라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하고, 그게 제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을 뿐입니다. 말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고맙고 감사한 기억만을 안고 가겠습니다. 어디서든 KBS를 사랑하며 지켜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 무덤의 사진사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 무덤의 사진사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고학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투탕카멘 무덤 발굴’은 1922년 11월 4일에 시작됐다. 이날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무덤의 첫 번째 계단들이 발견됐다”는 문장을 자신의 다이어리에 써 두었다. 그러니까 지난 11월 4일은 투탕카멘 무덤이 발견된 지 9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도굴되지 않은 왕묘는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들이 넘쳐나는 이집트에서도 그 예가 흔치 않은 것이었던 만큼, 무덤은 즉각적으로 학자들과 매스컴의 주목을 끌었다. 때는 바야흐로 20세기, 매스미디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무덤 발굴 소식도 그 바람을 타고 여러 언론을 통해서 전 세계로 신속하게 퍼졌다. 그리고 이 소식은 서구사회에서는 ‘이집트학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때 형성된 이집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학문으로서의 이집트학이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회적 배경이 됐다. 그런데 이때 투탕카멘 무덤 발굴 소식이 보다 더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식이 단지 글로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진과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무덤의 발굴 과정 전체를 촬영한 한 사진가 덕분이었다. 그 사진가는 바로 해리 버튼이라는 인물이다. 해리 버튼은 1879년 영국 링컨셔에서 목공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노동계층의 집안에서, 그것도 아주 많은 남매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로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컸지만, 우연히 같은 마을에 살던 미술사학자 로버트 헨리 커스트와 교분을 갖게 됨으로써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관심이 있던 커스트는 1895년께 아예 피렌체로 이주를 하는데, 이때 그동안 좋게 봐 왔던 해리 버튼을 자신의 비서로 데리고 갔다. 버튼은 커스트를 따라가 옮겨간 피렌체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대한 감각을 키웠고,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최신이었던 기술, 즉 사진 촬영술을 배우게 된다. 버튼은 1910년에 이집트로 휴가를 가게 됐는데, 이때 그의 사진 능력을 높이 산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그를 발굴 작업 기록을 위한 박물관 전속 사진사로 고용한다. 당시는 발굴 작업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대였고, 자연스럽게 발굴 현장에서의 사진 촬영이 갖는 중요성도 막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고용된 버튼은 주로 미국인 이집트학자 허버트 윈록이 이끌던 발굴팀의 작업을 촬영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이후 버튼은 10년 넘게 이집트에서 머물며 점차 ‘고고학 전문’ 사진사가 돼 갔다.그러던 중 1922년 왕들의 계곡에서 발굴을 해 오던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아주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황으로 보아 카터가 발견한 것은 도굴되지 않은 파라오의 무덤이었다. 이집트 고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플린더스 페트리의 발굴팀에서 훈련을 받아 고고학자로 성장한 카터는 아주 엄정하고 훌륭한 고고학자였지만, 아쉽게도 그의 발굴팀에는 전속 사진사가 없었다. 카터의 발견이 세기의 발견이 되리라 직감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대승적으로, 카터를 지원하고자 버튼을 카터 팀으로 파견했다. 결국 버튼은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과정 전체를 사진 촬영할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은 여러 언론사를 통해서 전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서구사회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이끌어 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버튼의 사진들은 매우 퀄리티가 높아 오늘날에도 자주 귀중한 자료로 사용된다. 여러분이 투탕카멘과 관련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좀 오래된 느낌의 흑백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 버튼이 촬영한 것이다. 버튼은 이후에도 계속 이집트에 남아서 여러 고고학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파라오의 저주’라는 도시괴담을 비웃기라도 하이 당시 기준으로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60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이집트 중부 아슈트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힘으로써 영원히 이집트에 남았다.
  • [오늘의 서울 톡]

    금천 미싱사 14명 작품 내일부터 전시 금천구 금천문화재단은 ‘메이드 인 독산-옷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시를 11일부터 14일까지 금나래아트홀 갤러리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6명의 미싱사가 참여한 ‘지그재그 내 인생-245년 숙련공 미싱사들의 삶’ 전시의 확장판으로, 봉제장인 강명자씨를 주축으로 독산동 미싱사 14명의 작품을 선보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고, 무료다. 동대문 거리가게 종사자 코로나 검사 동대문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9~11일 3일 동안 거리가게 종사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선제검사를 한다.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인 청량리종합시장, 경동시장 등 인근에 있는 거리가게 550여곳의 종사자가 대상이다. 최근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코로나19 전파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감염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지난 5일부터 구 홈페이지를 통한 홍보와 함께 구청 직원들이 거리가게에 방문해 검사 안내를 했다. 강남 초5·중1 초경교육세트 지급 강남구는 ‘당당하고 건강한 생리 성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 이달부터 ‘초경교육세트’를 지급한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바르고 건강한 성과 생리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대처법 등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10일 대청초등학교와 봉은중학교를 시작으로 16일 일원·언주초등학교에서 ‘당당하고 건강한 생리 성교육’을 한다. 지급은 남·여학생용으로 나뉘며성교육 때 제공되며, 축하카드, 물티슈와 함께 팬티·위생용품 등이 들어 있다. 성동 이동형 안전체험차량 시범운행 성동구 성동생명안전배움터는 서울시 최초로 지진 및 화재체험, 심폐소생술 등 재난상황 대비를 위한 안전체험이 가능한 ‘이동형 안전체험차량’을 시범운영한다. 코로나19로 센터를 찾아 안전교육을 받기 힘든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이동형 안전체험 차량이 직접 찾아간다. 구는 지난 2일 무지개어린이집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어린이집 5곳을 비롯해 어린이들이 많이 찾는 어린이 전문 놀이터 ‘꿈공원’ 등에서 안전교육과 차량 내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광진 IoT활용 고독사 예방사업 추진 광진구는 중장년 1인 가구의 고독사 예방을 위해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플러그’ 지원 사업을 추진한다. 스마트플러그는 기기 전원과 전기 콘센트 사이에 장착해 전기 사용량과 조도 변화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지원 대상은 저소득 중장년 1인 가구 93가구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건강이 우려되는 고위험 가구를 우선 선정해 이달까지 설치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 “인도 하이데라바드 호수에 뛰어드는 114명의 목숨, 제가 구했죠”

    “인도 하이데라바드 호수에 뛰어드는 114명의 목숨, 제가 구했죠”

    인도 얘기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겠다는 독자들이 많아졌다. 남부 하이데라바드에 사는 쉬바란 남성이 인공 호수인 후사인 사가르 호수에서 주검들을 찾는 일을 도우면서 극단을 선택하기 위해 물에 뛰어든 114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영국 BBC의 9일 보도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이름 하나만 달랑 쓰는 그는 어느날 물에 뛰어들려는 사람을 뜯어말려 목숨을 구한 뒤부터 이런 선행을 베풀었다니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호수에 뛰어들어 시신을 찾는 일을 도운 것은 열살 때 경찰관들이 근처 연못에서 시신을 건져내는 잠수부들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 계기가 됐다. 인도 경찰은 월급도 박하고 수영 기술을 제대로 가르칠 만한 기관도 없어 가난한 이들에게 푼돈을 쥐어주고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자 나이가 어리다며 경찰들은 도리질을 했다. 처음에는 주검 하나 건지면 40루피(약 600원)를 받았는데 그에겐 큰 금액이었다. 그게 20년 전의 일이다. 이제 나이 서른이 됐는데 그는 여전히 경찰 일을 돕고 있다. 하이데라바드의 한복판에 위치한 후사인 사가르 호수 중심에는 18m 높이의 부처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힌두교의 주요 축제인 가네샤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가 목숨을 구하지 못하면 시신으로 건져내기도 하는데 요즘은 아내에게 수영 교육을 시켜 여성들의 시신을 되찾아오는 일을 맡기고 있다고 했다. B 다날락슈미 경사도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구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부모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쉬바는 짧게 고아원 생활도 했다. 자신이 몇 살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집도 없는 한 여성,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지내며 자녀들에게 인생을 바꿀 재간으로 헤엄치는 법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약물 중독과 질병, 굶주림, 사고 등으로 수많은 친구를 잃었다며 자신에게 수영을 가르친 락슈만이 다른 누군가를 구하려다 친한 친구와 함께 익사했다며 다른 이를 구하는 것으로 그 아픔을 메우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을 구하면 때로는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로 돈을 건넨다고 했다. 또 지역사회의 유명인이 돼 영화에도 짤막하게 소개됐다.극단을 택하려는 사람들의 동기는 천차만별이다. 시험 스트레스, 사랑, 가족 분쟁, 궁핍한 살림, 자녀에게 버림받은 어르신들, 최근에는 코로나19에 감염됐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호수에 몸을 던지는 남자도 있었다. 그의 친구도 물에 뛰어들었는데 쉬바는 뛰어들어 친구만 구해냈다. 사망자의 가족들은 감염될까봐 시신 인수를 마다해 그가 직접 화장했다고 했다. 그는 같은 이유로 식구들이 무시한다며 극단을 선택하려는 다른 남성도 구한 일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타적인 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 이 호수는 엄청 오염이 심해 변변한 수영복 하나 없이 물에 뛰어드는 그는 피부 발진, 장티푸스 등을 앓았다. 그는 “장비 챙길 틈이 어디 있나. 빨리 물에 뛰어들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여름에는 악취도 심하고 뱀들도 기슭에 곧잘 나타난다. 쉬바는 “여기서 계속 살려 한다. 여기 계속 있으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 목숨을 구하는 만족감은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6년 동안 “제퍼디!” 외치던 알렉스 트레벡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6년 동안 “제퍼디!” 외치던 알렉스 트레벡

    지난해 3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반년 뒤 다시 돌아와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미국의 최장수 텔레비전 퀴즈쇼 ‘제퍼디(Jeopardy)’ 진행자 알렉스 트레벡이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제퍼디 공식 트위터는 고인이 8일(현지시간) 오전 캘리포니아주 자택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사망 원인은 발표되지 않았는데, 트레벡은 지난해 3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고 밝힌 뒤 전 세계 팬들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기 때문에 췌장암이 악화돼 숨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9월 트레벡은 1984년부터 시작한 제퍼디의 36번째 시즌에 복귀하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는데 얼마 안 있어 상태가 악화돼 두 번째 항암 치료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3월 제퍼디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1분 10초 분량의 동영상을 통해 “매년 약 5만명의 미국인들이 겪는 것처럼, 나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며 “오랜시간 그래왔듯 팬들에게 정직하고 싶고, 또 부정확한 소문을 막기 위해 직접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 상태에 대한 예견들은 그리 고무적이지 않지만, 일을 계속하면서 적극 싸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한 뒤 “계약에 따라 3년 더 제퍼디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내야만 한다”고 감성적으로 고백한 일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호텔 식당 요리사인 아버지와 프랑스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 뉴스를 진행하다 1973년 미국 NBC TV 진행자로 영입된 뒤 1984년부터 이 퀴즈쇼를 진행했다. 1998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36년동안 한결같이 이 쇼를 진행하면서 날카로운 위트와 카리스마로 시청률 대박 행진을 이끌며 수많은 상을 받았다. 미국과 캐나다에 수많은 퀴즈쇼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진행자였다. 2014년 기네스 월드 레코드는 “한 진행자가 게임 쇼 에피소드를 가장 많이 진행”한 것으로 그를 꼽았다. 그는 오뚝이처럼 병마를 물리친 것으로도 이름높았다. 2007년과 2012년 심장마비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며칠 만에 방송에 복귀했다. 2017년 말 경막하 혈종으로 뇌수술을 받은 그는 올해 은퇴하겠다고 지난해 계획을 공개했다가 “트레벡 없는 제퍼디는 생각할 수 없다”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계약 기간을 2022년까지 연장했다. 그는 반년의 항암 치료를 마치고 지난해 가을 복귀하면서 계속 쇼를 진행하겠다고 시청자들에게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깨게 됐다. 예전에 이 쇼에 출연했던 버지 코헨은 맨먼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수많은 이들에게 많은 의미를 안겼던 누군가를 잃는 일은 절대적으로 가슴 아프다. 이 쇼가 그렇게도 많은 방식으로 내 인생을 바꾸지 않았더라도 그를 잃은 일은 잴 수 없는 슬픔일 것”이라고 적었다. 한편 1964년에 처음 전파를 타기 시작한 제퍼디는 미국을 대표하는 퀴즈 프로그램으로 2011년에는 IBM의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이 출연해 인간 퀴즈왕들을 꺾어 화제를 모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글꾼, 소리꾼, 통했군

    글꾼, 소리꾼, 통했군

    “이자람님은 누구나 산책하고 등반하도록 허락하는 너르고 깊은 산 같아요.” “김애란님은 이야기를 함께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작가예요.”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은 서로의 ‘찐’ 팬이 틀림없었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에서 열린 ‘소소살롱’에 마주 앉은 소리꾼 이자람과 소설가 김애란은 수줍게 서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두 사람은 한 관객이 “세계관의 대충돌”이라며 흥분을 전할 만큼 참신한 조합이다. 둘의 인연은 몇 해 전부터 이어졌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며 “작가와 잡담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자람은 2016년 김 작가의 데뷔작인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2002)으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소설을 판소리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신기하게도 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소설이 ‘여보세요’라는 판소리로 태어난 뒤엔 서로 공연과 작품을 챙겨보고 함께 맛있는 빵집을 찾아다니는 사이가 됐다. 김 작가는 지난해 낸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속 에세이 ‘아는 얘기, 모르는 노래’에 이자람과의 인연을 적기도 했다. ‘소소살롱’은 올해 줄줄이 중단된 예술 아카데미 강좌들을 대신해 예술의전당이 처음 선보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소리꾼과 소설가의 편안한 대화를 주제로, 두 이야기꾼의 만남이 첫 무대로 꾸며졌다. 둘은 창작자로서의 삶과 각 장르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혼자 배우와 연출, 음악을 모두 해내는 점에서 소리꾼과 작가는 비슷해요. 물론 저는 무대에 서지는 않지만요. 게다가 요즘처럼 브이로그나 유튜브로 자기를 얘기하는 1인칭 시대에 판소리는 3인칭 시점으로 건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정한 장르 같아요.”(김애란) “저는 코로나19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소설가가 더욱 부러웠어요. 독자들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작가는 언제든 독자와 소통할 수 있더라고요.”(이자람) 따스한 눈빛과 함께 오간 창작과 판소리에 대한 대화는 꽉 찬 객석도 쉴 새 없이 웃음을 보내도록 유쾌했다. 40분쯤 지나자 이자람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부채를 들었다. “앗, 저 판소리 해야 돼요.” 한마디에 김애란은 객석으로 내려가 팬의 자세로 앉았다.이자람은 ‘수궁가’ 중 대신들이 토끼 간을 구하러 육지에 나가기 싫어 갖은 핑계를 대던 중 말단 별주부가 갑자기 자신이 가겠다고 나서는 대목을 불렀다. 무대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부분인데 “기회가 되면 판소리 공연을 예매한다”는 김 작가의 안목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어 ‘여보세요’의 새로운 작창 버전이 처음 공개됐다. 각자 방에서 하숙을 하는 젊은 여성 5명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 문구들이 감칠맛 나게 살았다. “이 집엔 서로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룰이 있는데,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면 가장 발달해야 하는 것은 청각이라. 드르르르륵 물 내리는 소리, 다라락 다라락 화장실 슬리퍼 소리, 찰칵 문 닫히는 소리….” 이자람은 “내 방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래서 모두가 너이기도 나이기도 한, 공감할 이야기”라 이 소설을 판소리로 꾸몄다고 했다. 그러자 김 작가도 “20대 때 내가 살던 방 이야기”라면서 “미래를 모르고 듣던 그때의 소리들을 다시 듣는 기분”이라고 받아쳤다. 이처럼 어딘가 닮게 맞닿은 두 이야기꾼은 정해진 90분보다 20분 가까이를 더 앉아 관객들과 도란도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창작에 깊은 인상과 자극을 준다는 두 사람은 각자의 계획에도 눈을 반짝이며 기대를 드러내고는 사이좋게 무대 뒤로 돌아갔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폐허에서 피어난 ‘우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드나든다

    폐허에서 피어난 ‘우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드나든다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영감 얻어건물 자체가 하나의 우물로 다시 태어나 윤동주 생가서 그대로 옮겨온 ‘나무 우물’가만히 그 속 들여다본 사나이가 떠올라버려진 물탱크 개조해서 만든 ‘열린 우물’오래된 물때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하늘이 한결 더 높아지는 가을이 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을 앓던, 끝내 부끄러움을 몸에 지니고 떠난 시인 윤동주다.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시작된 윤동주의 삶은 서울의 연희전문을 거쳐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끝이 난다. 시인의 짧은 생을 이 한 줄로 요약하고 나니 더욱 그의 시가 읽고 싶어지는 까닭은 어쩌면 가을이 끝나가고 곧 겨울이 잇대어 오기 때문이 아닐까.만주와 일본, 서울의 어디쯤을 떠돌며 시인의 흔적을 따라 헤매지 않아도, 윤동주의 시가 고였다 흐르는 곳이 있다고 해 찾아갔다.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이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재학 시절에 살았던 종로구 누상동 인근인 청운동에 자리했다.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져 있는 청운동과 누상동 일대를 산책하던 시인의 발자취를 따 만들어진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문학관과 이어진다. 의대나 법대를 가기 원했던 집안의 뜻과는 달리 문과로 진학해 아버지와 크게 불화했다는 시인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아마도 쓰고 싶었던 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일견 숨통이 트이는 때였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건물 곳곳에 불어넣은 시의 생명력 그런 그가 늘 걷던 길목에 자신의 이름을 단 문학관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면 어떤 마음일까. 시 ‘자화상’에서 천착했던 ‘우물’이 옮겨와 있고, 거대한 그 건물 자체가 하나의 우물이 돼 청운동의 푸른 구름을 되비추고 있다면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못 궁금해졌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 작은 우물을 품은 커다란 우물 하나가 우묵하게 하늘을 응시하는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2008년에 운영이 중단된 수도가압장이 그 건물 그대로 문학관으로 재탄생하기까지 여정은 오롯이 ‘시’(詩)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산 중턱에 있는 청운아파트에 수돗물을 올려 보내기 위해 지어졌다는 수도가압장은 아파트가 철거된 뒤로는 버려지다시피 한 건물이었다. 그 공간에 다시 물이 차오르고 흐르는 것처럼 시와 시인의 생을 다시 흐르게 한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것은 역시 시가 아닐까. 명편들을 잊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뜻이 모이고, 또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여러 오브제와 손길들이 모여 버려진 건물에 시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야말로 시가 아니었더라면 이 건물은 그저 오래전에 방치된 폐허에 불과했을 터.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이 아닌가. 문학 작품 속의 문장이 마을을 만들고, 시의 구절들이 애틋하고도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을 여러 번 봐 왔다. 그중에서도 윤동주문학관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로지 ‘시’에 의한, ‘시’로 인해 만들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해를 짧게 살다간 시인이 시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기도 한 까닭에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곳이다.●시인의 순결한 詩心 느낄 수 있는 시인채 윤동주문학관의 제1전시실인 시인채는 시인의 순결한 시심(詩心)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윤동주 시인의 생애가 집약된 곳이다. 시인의 삶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9가지 전시대와 함께 친필원고 영인본을 전시해 두었다. 바로 그곳에 용정에서 온,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직접 옮겨온 ‘나무 우물’이 있다. 윤동주는 시 ‘자화상’에서 우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중략)/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일생을 일제강점기에서 살다간 시인에게 우물이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이고 어쩌면 유일한 구원의 눈이자 모든 것을 비추는 반사경이 아니었을까. 외면하고 벗어나고 싶어서 멀찍이 돌아서 가다 결국은 돌아와 다시 얼굴을 비춰 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장소인 셈이다. 나무우물 옆에는 이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 우물 옆에 서면 동북쪽 언덕으로 윤동주가 다닌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낳습니다.’ 고작해야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밖에 할 수 없던 시대에 우물의 표면에 가장 많이 비춰진 모습은 아마도 윤동주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겨울철 꽃 같은, 어름(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이라는 정지용의 서문이 유독 눈에 와닿는다. 차가운 얼음 아래에서 헤엄치는 잉어는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을까. 우물의 잉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했을까. 잉어, 아니 윤동주가 들여다보고, 얼굴을 가두었던 우물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인 시인채다. 나무 우물의 우묵한 눈을 지나 제2전시실에 들어가면 물탱크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모습이 보인다. 제2전시실은 ‘열린 우물’로 제1전시실인 시인채와 닫힌 우물인 제3전시실을 잇고 있다. 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물때가 물이 차올랐던 시절의 흔적을 말해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학관을 만들던 당시에 물때와 곰팡이가 많이 핀 이곳의 천장을 뜯어서 하늘을 보게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나무 우물을 통과해 열린 우물을 만나면 물이 고였던 자국들을 따라 돋아난 윤동주 시의 시원(始原)을 만난다.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어서 우물의 본질, 그곳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는 공간인 셈이다. 조감도처럼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여기야말로 우물의 눈이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건물은 시인이 그토록 천착해 마지않던 우물의 형상인 셈이다. 그리하여 윤동주문학관은 크고 작은 우물의 집합소다. 시인의 우물과 시의 우물이 만나 죽은 시인을 끝없이 되살려 내는 곳.●시간여행을 마무리하는 공간 ‘닫힌 우물’ 바로 옆 제3전시실이자 나머지 하나의 물탱크는 ‘닫힌 우물’이란 이름처럼 말 그대로 닫혀 있는 곳이다. 문학관 건물의 제일 안쪽에 위치해 가장 늦게 발걸음을 하게 된다. 우물의 뚜껑을 열듯이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한때 물을 보관하던 실내의 모습은 여전히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지만 어쩐지 무엇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윤동주가 마지막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의 독방을 형상화한 장소라고 했다. 네모 반듯하고 사방이 막힌 공간이 감옥을 연상시킨다. 천장의 네모난 통기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 감옥의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도 겹쳐진다. 벽면에 윤동주의 인생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그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감옥에서 매우 쓸쓸하게 죽어간 젊은 시인의 마지막 시간들이 다가온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장소로 꼽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시 혹은 숨으로 꽉 차올라 수위가 높은 물탱크다. 닫힌 우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나오면 건물 밖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만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윤동주가 시와 삶, 그리고 시대의 엄혹한 칼날과 조국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며 걷던 길이 나오는 것이다. 작은 우물과 큰 우물을 지나 만나는 길에서 윤동주가 남긴 시를 읊으며 걷다 보면 곳곳에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온다.여기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산 둘레를 따라 걸으며 별을 헤아리던 시인의 자리다. 유독 마음의 소리에 엄정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을 부끄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시를 썼던 공간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윤동주가 남긴 시편들과 얼마 되지 않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뿐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아프게 살다 간 젊은 시인이 시로서 이곳에 살아 있고, 시와 시를 둘러싼 마음들이 이 장소 자체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장소야말로 세상에 있는 모든 우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시의 우물이 되는 셈이 아닐까. 그곳을 되살려 준 손길들이 하염없이 고마운 늦가을이다. 여기는 젊은 시인이 산길을 따라 걷고 시의 결을 매만지던 자리, 우물 안에서 별을 헤아릴 수 있는 장소인 윤동주문학관이다. 소설가 이은선
  • 최연소 상원 48년 만에… 대선 3수 끝에 최고령 백악관 입성

    최연소 상원 48년 만에… 대선 3수 끝에 최고령 백악관 입성

    첫 부인·자녀들 세상 떠난 개인사도 극복2차례 방한… DJ와 넥타이 교환도 회자與 박지원·문정인 교류 … 野 박진 친분미 민주당 조 바이든 당선인은 7일(현지시간) 대선 승리가 확정되며 파란만장했던 반세기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게 됐다. 그가 28세였던 1970년 카운티 의회 의원에 당선된 지 50년 만에 이룬 거사이며, 대권 도전 3수 만에 이룬 꿈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1942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부친의 실직으로 이사한 델라웨어주는 그의 ‘제2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된다. 바이든이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추억은 말더듬증으로 놀림받던 기억이다. 그는 조회시간 발표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심각했던 말더듬증이 오히려 자신을 더 강하게 했다며 “내가 바라던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믿는다”고 강조한다. 바이든은 피선거권 기준인 만 30세가 되기 2주 전이던 1972년 11월 첫 상원의원직 도전에서 공화당 현역 거물을 물리치고 당선된다. 하지만 당시 최연소 상원의원 타이틀을 눈앞에 두고 있던 바이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족을 잃는 비극이었다. 선거 승리 6주 뒤 자동차 사고로 첫 아내와 13개월 난 딸이 세상을 떠났고, 사고 당시 함께 차에 타고 있던 두 아들 보와 헌터도 중상을 입었다. 정신적 충격에 날개가 꺾인 바이든은 의원직까지 포기하려 했지만, 의회의 만류로 이듬해 아들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초선 당시 그는 아들들을 돌보며 의정활동을 하느라 워싱턴DC에서 델라웨어의 자택까지 120마일을 통근하며 생활했다. 개인적 비극을 극복한 바이든의 모습은 먼 훗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이후 바이든은 2015년 장남 보 바이든을 뇌종양으로 잃는다.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아버지만큼 유망한 정치인이었던 보가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당시 바이든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상원에서 6선을 하며 외교위원장과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바이든은 민주당 내 대표적인 거물급 인사로 성장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초선 의원으로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만났던 바이든은 이미 당시 상원을 쥐락펴락하던 최고참 중진이었다. 그는 두 차례 대선 후보에 도전한 바 있다. 처음 대선 후보에 도전했던 1988년에는 로스쿨 시절 쓴 보고서가 표절 논란에 휩싸여 낙마했고, 2008년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돌풍에 밀리고 만다. 하지만 대권의 꿈을 접게 한 오바마는 그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한다. 대선 후보를 꿈꾸던 6선 의원이 부통령을 맡기로 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한국에는 2001년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2013년 부통령 자격으로 각각 방한한 바 있다. 1980년대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당시 친분이 있었던 바이든은 2001년 방한 때 김 전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즉석에서 넥타이를 주고받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나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 등과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분이 있는 야권 인사로는 대표적인 미국통인 박진 국민의힘 의원이 꼽힌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생애 통산 2승째 재미교포 한승수, “오늘은 잊지 않고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생애 통산 2승째 재미교포 한승수, “오늘은 잊지 않고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3년 전 일본에서 첫 승 했을때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정말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2020시즌 최종전에서 우승한 한승수(34)은 재미교포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01년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본선 진출 기록(14세 8개월)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2003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도 초청받아 출전하는 등 ‘유망주’로 컸지만 정작 2009년 프로 전향 이후에는 별다른 성적을 거둔 적이 없었다. PGA 2부 투어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아시안투어, 캐나다투어 등을 거쳐 2015년에는 일본프로골프 투어(JGTO) 퀄리파잉 스쿨을 1위로 통과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어릴 때는 주위 기대를 많이 받았는데 프로 되고 나서 쓴맛을 많이 봤다”며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도 시합에 나가야 했다”고 털어놨다.2017년 JGTO 카시오월드오픈을 제패, 프로 첫 우승을 신고한 그는 “5∼6년 전 골프가 하도 안될 때는 6개월 정도 골프를 접기도 했다”면서 “스스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6살 된 딸과 4살 아들을 둔 한승수는 그러나 “큰 아이가 태어나고 저도 인생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면서 “이제 골프를 잘 치고 못 치고는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생애 통산 2승째를 수확한 한승수는 “두 번째 우승을 한국에서 해서 너무 값지다”면서 “일본에서 처음 우승을 했을 때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잊어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원로배우 송재호 별세에… 정치권도 애도 “국민 배우·후배에 귀감”

    원로배우 송재호 별세에… 정치권도 애도 “국민 배우·후배에 귀감”

    원로배우 송재호가 지난 7일 숙환으로 별세한 가운데 정치권도 고인의 생전을 조명하며 추모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8일 페이스북에 “원로배우 송재호 선생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고인께서는 평생을 연기에 전념하며, 반세기 넘는 세월을 대중과 호흡한 ‘국민 배우’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이 대표는 “중년 이후에는 인자한 아버지 역으로 친숙해지셨지만, 젊은 시절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 이미지를 기억하시는 국민도 많다”며 “2012년에는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는 촬영 거부 투쟁을 벌이며 ‘나는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이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야생생물관리협회장,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 문화재사랑 어린이 창작동요제 홍보대사를 지내시며 환경, 아동 문제 등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이셨다”며 “참 따뜻한 배우셨다.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송재호의 별세 소식을 전한 기사를 올리면서 고인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하 의원은 “배우 송재호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며 “제가 초선 국회의원일 때 고인을 뵈었다. 참 온화하고 멋진 분이셨다. 강한 애국심과 긍정적인 인생관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후배들의 귀감이셨다. 편히 쉬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앞서 송재호는 7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북한 평양 출신인 고인은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고, 이후 배우로 전향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 등으로 성공을 거뒀다. 드라마로는 1980년대에 높은 인기를 누린 ‘보통사람들’과 ‘열풍’, 그리고 김수현 각본의 ‘부모님 전상서’(2004~2005)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소리꾼 이자람과 소설가 김애란의 만남… “우린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어요”

    소리꾼 이자람과 소설가 김애란의 만남… “우린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어요”

    “이자람님은 누구나 산책하고 등반하도록 허락하는 너르고 깊은 산 같아요.” “김애란님은 이야기를 함께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작가예요.”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은 서로의 ‘찐’ 팬이 틀림없었다. 7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에서 열린 ‘소소살롱’에 마주 앉은 소리꾼 이자람과 소설가 김애란은 수줍게 서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두 사람은 한 관객이 “세계관의 대충돌”이라며 흥분을 전할 만큼 참신한 조합이다. 둘의 인연은 몇 해 전부터 이어졌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며 “작가와 잡담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자람은 2016년 김 작가의 데뷔작인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2002)으로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소설을 판소리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신기하게도 꽤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소설이 ‘여보세요’라는 판소리로 태어난 뒤엔 서로 공연과 작품을 챙겨보고 함께 맛있는 빵집을 찾아다니는 사이가 됐다. 김 작가는 지난해 낸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속 에세이 ‘아는 얘기, 모르는 노래‘에서 이자람과의 인연을 적기도 했다. ‘소소살롱’은 올해 줄줄이 중단된 예술 아카데미 강좌들을 대신해 예술의전당이 처음 선보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소리꾼과 소설가의 편안한 대화를 주제로, 두 이야기꾼의 만남이 첫 무대로 꾸며졌다. 둘은 창작자로서의 삶과 각 장르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혼자 배우와 연출, 음악을 모두 해내는 점에서 소리꾼과 작가는 비슷해요. 물론 저는 무대에 서지는 않지만요. 게다가 요즘처럼 브이로그나 유튜브로 자기를 얘기하는 1인칭 시대에 판소리는 3인칭 시점으로 건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정한 장르 같아요.”(김애란) “우와, 그럼 저는 다정한 일을 매일 하는 거였군요? 참 좋네요.”(이자람) “저는 코로나19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소설가가 더욱 부러웠어요. 독자들이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작가는 언제든 독자와 소통할 수 있더라고요.”(이자람) “저는 코로나19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소설가가 더욱 부러웠어요. 독자들이 집에서 책을 읽을 수는 있으니, 작가는 언제든 독자와 소통할 수 있더라고요.”(이자람) “소설가는 쇄를 찍으면 수정이 어려운데 판소리는 즉흥적인 수정이 가능해 전 그게 부럽던데요. 그러면서 소통을 하잖아요.”(김애란) “소통의 포인트가 달랐네요. 우린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어요!”(이자람) 따스한 눈빛과 함께 오간 창작과 판소리에 대한 대화는 꽉 찬 객석도 쉴 새 없이 웃음을 보내도록 유쾌했다. 40분쯤 지나자 이자람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부채를 들었다. “앗, 저 판소리 해야 돼요.” 한마디에 김애란은 객석으로 내려가 팬의 자세로 앉았다.이자람은 ‘수궁가’ 중 대신들이 토끼 간을 구하러 육지에 나가기 싫어 갖은 핑계를 대던 중 말단 별주부가 갑자기 자신이 가겠다고 나서는 대목을 불렀다. 무대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부분인데 “기회가 되면 판소리 공연을 예매한다”는 김 작가의 안목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어 ‘여보세요’의 새로운 작창 버전이 처음 공개됐다. 1.5층 독특한 구조의 거꾸로 된 ㄱ자 모양의 층에 놓인 각자 방에서 하숙을 하는 젊은 여성 5명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 문구들이 감칠맛 나게 살았다. “이 집엔 서로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룰이 있는데,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면 가장 발달해야 하는 것은 청각이라. 드르르르륵 물 내리는 소리, 다라락 다라락 화장실 슬리퍼 소리, 찰칵 문 닫히는 소리….” 이자람은 “내 방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래서 모두가 너이기도 나이기도 한, 공감할 이야기”라 이 소설을 판소리로 꾸몄다고 했다. 그러자 김 작가도 “20대 때 내가 살던 방 이야기”라면서 “미래를 모르고 듣던 그때의 소리들을 다시 듣는 기분”이라고 받아쳤다. 이처럼 어딘가 닮게 맞닿은 두 이야기꾼은 정해진 90분보다 20분 가까이를 더 앉아 관객들과 도란도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창작에 깊은 인상과 자극을 준다는 두 사람은 각자의 계획에도 눈을 반짝이며 기대를 드러내고는 사이좋게 무대 뒤로 돌아갔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