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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명의 여지 없다” 윌 스미스 결국 사과…아카데미, 조사 착수(종합)

    “변명의 여지 없다” 윌 스미스 결국 사과…아카데미, 조사 착수(종합)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상 초유의 폭행 사건을 일으킨 배우 윌 스미스가 하루 뒤인 28일(현지시간) 공개 사과했다. 윌 스미스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신이 때린 코미디언 크리스 록을 언급하며 “당신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싶다. 내가 선을 넘었고 잘못했다”고 밝혔다. 윌 스미스 사과문 “선 넘었다…크리스 록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는 시상식 당일 폭행 이후 남우주연상 수상소감을 통해 주최 측과 참석자들에게 폭행 사건을 사과했지만 폭행 피해자인 크리스 록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윌 스미스는 “폭력은 어떤 형태로도 해로우며 파괴적이다. 내 행동은 용납할 수 없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또 “부끄럽고 내 행동은 내가 되고자 했던 모습이 아니다”라며 “사랑과 친절의 세상에서 폭력은 발 붙일 곳이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나를 향한 농담은 배우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제이다(아내)의 질환을 두고 농담한 것은 나로서는 참기엔 심하다고 생각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아카데미 주최 측과 시상식 제작진, 그리고 참석자들과 시상식을 지켜본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도 사과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또한 자신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킹 리처드’ 제작진과 영화가 표현했던 실존 인물인 테니스 선수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 자매와 아버지 리처드 윌리엄스에게도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는 “내 행동을 깊이 후회한다. 내 행동만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에게 (전날 밤이) 아름다운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부족하다”(I am a work in progress)고 덧붙였다. 크리스 록, 윌 스미스 아내 향해 ‘탈모’ 농담윌 스미스, 수상소감서 크리스 록 제외 사과전날 시상식에서 영화 ‘킹 리처드’로 생애 최초 오스카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은 윌 스미스는 앞서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을 시상하러 나온 코미디언 크리스 록을 때렸다.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는 삭발 머리를 한 채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시상자로서 무대에 선 크리스 록이 제이다를 가리키며 “제이다, ‘지.아이. 제인 2’ 얼른 보고 싶다”고 농담을 던졌다. 데미 무어가 주연한 영화 ‘지.아이. 제인’은 여군 대위가 미 해군 특수부대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주인공이 극 중에서 스스로 삭발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제이다의 삭발이 패션이 아닌 질병 때문이라는 점이다. 제이다는 원형탈모증을 앓고 있어 삭발을 했고, 이 사실은 할리우드 연예계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원형탈모는 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으로, 면역세포가 몸에 난 털을 신체 일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모낭을 공격하면서 털이 빠지게 된다. 윌 스미스는 자신이 아닌 아내를, 그것도 질병을 가지고 농담거리로 삼자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윌 스미스는 곧장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때리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크리스 록이 크게 개의치 않고 시상 진행을 계속하자 객석은 연출된 상황으로 알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 윌 스미스가 크리스 록을 향해 “네 ×같은 주둥이에 내 아내의 이름을 올리지 마라”고 외치자 장내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사전에 준비된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주최 측 “폭력 용납 못해…윌 스미스 규탄, 공식조사 착수”크리스 록 측은 윌 스미스를 고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할리우드 매체들은 윌 스미스가 아카데미 행동강령을 위반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반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시상식 종료 직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아카데미는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28일 AMPAS는 성명을 통해 “아카데미는 어젯밤 쇼에서 윌 스미스의 행동을 규탄한다”면서 “우리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내규와 행동규범, 캘리포니아주 법률에 따라 추가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윌 스미스, 뒤풀이 참석해 당당히 춤춰할리우드 매체 “후회하는 모습 없었다”윌 스미스는 전날 오스카 뒤풀이 행사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시상식이 끝난 뒤 연예매체 배니티페어가 주최한 애프터파티에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입장했고, 파티 참석자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외신들은 그가 뒤풀이 파티에서 폭행 사태를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남우주연상 수상을 축하해주는 참석자들과 포옹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어 ‘서머타임’, ‘마이애미’ 등 자신이 부른 1990년대 히트곡이 울려 퍼지자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흥겹게 랩을 하며 춤췄다. 윌 스미스는 할리우드리포터에 “아름다운 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파티장을 떠나 차에 오르기 전에는 취재 기자들을 향해 트로피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윌 스미스가 뒤풀이 행사에서 오스카 폭행 사건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사과 전 할리우드 여론은 비판적“추악한 순간…폭행 정당화 못해”그러나 할리우드 여론은 윌 스미스의 폭행에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영화 전문 매체 할리우드리포터 등에 따르면 배우와 감독들은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려 윌 스미스의 반성을 촉구했다. 원로 여배우 미아 패로는 “오스카의 가장 추악한 순간”이라며 “단지 가벼운 농담이었고, 그건 (코미디언인) 크리스 록이 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코미디언 겸 감독 주드 아패토우는 “자기도취증이자 절제력을 상실한 폭력”이라며 “크리스 록은 죽을 수도 있었다. 지난 30년간 온갖 농담을 들었을 텐데 윌 스미스는 할리우드 초짜가 아니다”라는 트윗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를 연기한 마크 해밀도 ‘역대 가장 추악한 오스카의 순간’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스미스의 폭행을 꼬집었다. 스미스가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폭행 원인이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을 연출한 롭 라이너 감독은 “윌 스미스의 변명은 헛소리다. 크리스 록이 고소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라며 폭행 피해자인 크리스 록에게 직접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조카이자 아널드 슈워제네거 부인이었던 작가 마리아 슈라이버는 “사랑은 폭력적이지 않다”고 꼬집었다. 에미상 수상 경력의 댄 부카틴스키는 “스미스가 눈물과 함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폭행을 정당화했다”며 “그가 하지 않은 한 가지는 크리스 록에게 사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스미스 아내의 탈모를 놀림거리로 삼은 록의 농담이 수준 미달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스미스 폭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흑인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는 ABC 방송 ‘더뷰’ 코너에서 “스미스가 과잉반응을 보였다”고 지적했고, 공동 진행자 애나 나바로는 “록의 농담은 저속했지만, 농담과 뺨 때리기는 동일하지 않다. 폭행은 범죄”라고 비판했다. 소피아 부시 감독도 “록은 농담은 잔인하고 잘못됐지만, 폭력은 결코 답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농담으로 한때 살해 위협까지 받기도 했던 코미디언 캐시 그리핀은 “코미디언 폭행은 매우 나쁜 습관”이라며 “이제 우리는 코미디 클럽에서 누가 제2의 윌 스미스가 될지를 걱정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인기 토크쇼 진행자 지미 키멀은 “오스카 시상식은 윌 스미스 인생에서 가장 멋진 밤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지금 그에게는 코미디언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확실하다”고 꼬집었다.흑인 영화계는 스미스 폭행이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 아카데미 이사회 멤버인 로저 로스 윌리엄스는 “이번 사건은 흑인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강화하고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상처를 줬다”고 한탄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무대를 꾸민 영화제작자 윌 패커는 “매우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선 스미스의 폭행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스미스 아내와 영화 작업을 함께했던 흑인 여배우 티퍼니 해디시는 “흑인 남성이 아내를 옹호하는 모습은 나에게 큰 의미였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며 “남편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신들은 스미스의 폭행으로 이번 시상식의 빛이 바랬고 역대 오스카 시상식 가운데 최악의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비평 코너를 통해 “록의 추악한 농담에 대한 스미스의 폭행은 오스카 방송 중 최악의 순간이었다”며 “올해 오스카 시상식은 이미 나빴고, 그 사건으로 더욱 나빠졌다”고 진단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오스카였다”며 이번 시상식을 평가절하했고, 버라이어티는 “스미스 폭행이 오스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전했다.
  • 35년 복무한 직업군인 인권운동 뛰어든 까닭

    35년 복무한 직업군인 인권운동 뛰어든 까닭

    안기부 지시로 운동권 병사 감시그때의 인연 30년 이어가다 전역“어려운 이들에게 도움 줘서 보람”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87년 부사관으로 입대해 30년 이상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육군 원사로 전역할 당시 기업 두 곳에서 관리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가 택한 건 경기 양주에 있는 집에서 서울 사무실까지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이었다. 인생 2막을 인권운동가로 연 조용철(54) 인권연대 연구원은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며 웃어 보였다.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 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군입대 장학금을 주고 군대 취직도 시켜 준대서” 입대를 결심한 뒤 육군 6군단 예하 포병대와 감찰부 등에서 35년 7개월을 복무했다. 그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전역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군 복무를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때 군수과 선임하사였던 그에게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운동권 학생 하나가 배치될 테니 특별관리를 해 달라”고 했다. 당시 “거리를 두며 감시하고 동향을 파악해 몰래 보고하던 보급계 병사”가 지금 그가 일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다. 조 연구원은 “같이 일하다 보니 서로 정이 들어 얘길 많이 했다. 그때까진 군대만 알았는데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떠올렸다. ‘그 병사’가 제대한 뒤에도 둘의 인연은 이어졌다. 가끔 만나서 술도 한잔씩 하다 보니 전역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했다. 마침 감찰 업무를 하면서 느낀 군대의 부조리한 모습에 실망도 쌓이고 있었다. 조 연구원은 “입바른 소리를 했다고 오히려 내가 감찰 대상이 되는 일을 겪었다. 더 오래 있다가 후회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오 국장에게 먼저 ‘취업 제안’을 건넸다. 조 연구원은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한 해 4만명이라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자 없이 벌금을 대출해 주는 공익사업인 ‘장발장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일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좌우명이 “절대긍정 과잉성실”이라는 조 연구원은 “틈틈이 오 국장과 함께 부사관 처우 개선을 비롯한 군대 개혁 방안도 의논한다”면서 “일단 지금 목표는 인권연대에서 꾸준히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35년 짬밥 육군 원사, 인권운동가로 인생2막 도전

    35년 짬밥 육군 원사, 인권운동가로 인생2막 도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사관으로 입대해 35년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전역식까지 치른 예비역 육군 원사는 인생2막으로 인권운동가를 선택했다. 기업 두 곳에서 관리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도 거부하고 경기도 양주시에서 서울까지 왕복 4시간을 다녀야 하는 버거운 출퇴근 속에서도 조용철(사진·54) 인권연대 연구원은 28일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며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에서 몸에 밴 성실함과 솔선수범으로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전직 육군 원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 연구원이 군대에 들어간 건 1987년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형편에 전액 장학금도 주고 군대 취직도 시켜 준다니까 고등학교 3년간 군입대장학금을 받았다”면서 “육군 6군단 예하 포병대와 감찰부 등에서 35년 7개월을 복무했다”고 말했다. 직업군인과 인권단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사실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연구원은 “당시 내가 군수과 선임하사였는데 운동권 학생 하나가 배치될테니 특별관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러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나를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그가 “거리를 두며 감시하고 동향파악해 몰래 보고하던 보급계 병사”가 지금 그가 일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다. 조 연구원은 “같이 일하다보니 서로 정이 들어서 얘길 많이 했다. 그때까진 군대만 알았는데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 그러다 오 국장 부친과 인연이 닿아서 결혼식 주례도 해주셨다”고 말했다. 오 국장이 제대를 하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거쳐 인권연대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교류가 계속 이어졌다. 가끔 만나서 술도 한 잔씩 하다보니 전역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했다. 마침 감찰 업무를 하면서 느낀 군대의 부조리한 모습에 실망도 쌓이고 있었다. 조 연구원은 “입바른 소리를 했다고 오히려 내가 감찰 대상이 되는 일을 겪었다. 더 오래 있다가 후회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오 국장에게 먼저 ‘취업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조 연구원은 인권연대에서 운영하는 ‘장발장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한 해 4만명이라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자 없이 벌금을 대출해주는 공익사업이다. 조 연구원은 “대출 안내도 하고 대출과 상환 관련 서류 처리도 하고, 대출 상환 안내도 한다”면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일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조 연구원의 좌우명은 “절대긍정 과잉성실”이다. 그는 “틈틈이 오 국장과 함께 부사관 처우개선을 비롯한 군대 개혁 방안도 의논한다”면서 “일단 지금 목표는 인권연대에서 꾸준히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병헌 옆자리에 탄 신민아 ‘포착’

    이병헌 옆자리에 탄 신민아 ‘포착’

    이병헌이 직접 찍은 신민아의 모습을 공개했다. 최근 이병헌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풍경을 찍는 선아를 찍는 우리 동석”이라면서 해시테그 ‘#우리들의블루스’. ‘#Ourblues’와 함께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차 조수석에 앉은 신민아가 휴대전화로 밖의 풍경을 찍는 뒷모습이 담겼다. 양 손으로 휴대전화를 잡고 동영상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신민아도 “우와”라며 엄지 척 이모티콘과 함께 댓글을 달았다. 이병헌과 신민아는 오는 4월9일 처음 방송하는 tvN ‘우리들의 블루스’ 촬영 중이다. 극 중 이병헌은 제주 태생의 트럭 만물 장수 이동석 역을 연기하며, 신민아는 사연으로 가지고 제주도로 돌아온 민선아 역을 소화한다. 한편 ‘우리들의 블루스’는 노희경 작가가 극본, 김규태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제주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각양각생의 인생이야기를 담았다.
  • 윌스미스, 눈물의 오스카 수상… ‘아내 탈모’ 언급 시상자 폭행(영상)

    윌스미스, 눈물의 오스카 수상… ‘아내 탈모’ 언급 시상자 폭행(영상)

    배우 윌 스미스(53)가 영화 ‘킹 리처드’로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됐다. 윌 스미스는 ‘알리’(2001), ‘행복을 찾아서’(2006)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세 번의 도전 끝에 수상에 성공한 뒤 눈물을 흘렸다. 윌 스미스는 28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윌  스미스는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자매를 테니스 여제로 길러낸 아버지 리처드 윌리엄스를 연기했고, 이 영화의 제작도 맡았다. 윌 스미스는 트로피를 거머쥐고 “리처드 윌리엄스는 가족의 열렬한 지원자였다. 예술은 인생을 모방한다. 세상은 리처드를 ‘미친 아버지’라고 말해도,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라며 “아카데미가 나를 다시 초대하기를 바란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윌 스미스는 수상 직전 무대에서 사회자의 농담에 분노해 뺨을 때리기도 했다. 장편 다큐멘터리를 시상하러 나온 코디미언 크리스 락은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한 머리를 보고 이를 비유하는 농담을 시도했고, 윌 스미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무대에 올라가 손바닥으로 크리스 록의 뺨을 쳤다.무대에 내려가서는 크리스 록이 “저한테 한방 먹이셨다”고 말하자 욕설을 하며 “내 아내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고 소리쳤다. 크리스 록은 “‘지. 아이. 제인’ 영화에서 비롯된 농담이었는데 역사상 최고의 밤을 지금 만들어주셨다”고 말한 뒤 “오늘 장편 다큐멘터리 시상을 하겠다”고 수습했다. 한편 이날 시상식 참석자 일부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금색 리본을  달았다. 참석자들은 일제히 침묵의 시간을 가졌고 주최 측은 무대 위 대형  화면에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호소하는 내용을 띄웠다. 여우주연상은 영화 ‘타미 페이의 눈’ 주연 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에게 돌아갔다. ‘타미 페이의 눈’은 미국 종교방송 네트워크와 기독교 테마파크를 만든 1970년대 유명 방송인 타미 페이의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으로, 채스테인은 페이 역할을 연기했다. 
  • 죽은 동물 통해 삶의 화두를 던진, 그만의 ‘메멘토 모리’[이지윤 큐레이터의 은밀한 미술인생]

    죽은 동물 통해 삶의 화두를 던진, 그만의 ‘메멘토 모리’[이지윤 큐레이터의 은밀한 미술인생]

    최초 예술 형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구석기 동굴 벽화다. 동굴 벽화는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제의와 주술이 목적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염원’은 이집트 고분과 조각상, 로마시대 돌로 만든 관, 르네상스 시대 많은 그림들과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18세기 역사화까지 이어진다. 미술은 죽음을 재현하거나 기억하기 위한 ‘메멘토 모리’를 지속해 왔다. 미술의 오랜 보편적 소재인 죽음은 아우슈비츠, 세계대전 등 수많은 충격적 사건을 거쳐 2년 전 발발한 팬데믹으로 인해 수없이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죽음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 중에는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리즈에서 성장한 그는 1989년 런던 골드스미스대학을 졸업한 뒤 동창생들과 결성한 ‘젊은 영국 예술가’(YBAs)의 프리즈 전시를 기획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을 전통적인 ‘재현’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시각적 충격을 줬다. 1990년 미술관에 전시된 유리상자 속 죽은 소의 머리와 구더기, 그리고 죽은 파리의 사체들과 눈앞에서 반복해서 죽어나가는 파리들을 보여 준 ‘천년’(Thousand Years)은 당시 미술계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탄생과 죽음의 반복적 굴레를 보여 주는 듯한 이 작품은 예술이 아닌 살생기계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죽음을 재현해 온 미술계의 전통에 작은 변화의 불씨를 일으킨 사건이 됐다.2년 후 그는 사치 갤러리에서 열린 제1회 ‘젊은 영국 예술가’전에서 커다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가득 채운 수조에 넣은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공개했다. 그는 계속해서 동물들을 토막내어 수조에 담아 전시하는 작품을 공개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분리된 엄마와 아이’는 절단된 암소와 송아지를 각각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채운 수조 속에 넣어 전시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95년 가장 괄목할 만한 전시나 미술활동을 보여 준 50세 미만 영국 미술가에게 주어지는 터너상을 받았다. ●실제 해골을 작품에 이용하기도 2007년 발표된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1720년에서 1810년 사이 살았던 유럽인의 실제 해골을 티타늄으로 주형을 뜬 다음 8601개 다이아몬드를 붙인 작품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 속 해골을 연상시킨다. 해골은 죽음을, 다이아몬드는 허망함을 상징함으로써 그의 작품을 관통해 온 오랜 주제인 삶에 대한 허망함, ‘메멘토 모리’를 보여 주고 있다. 허스트는 상어 등 생명체를 작품 재료로 사용해 새로운 조형적 의미를 만들어 냈으며, 생명 연장 수단인 약을 통해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로 주제를 확장시켜 나갔다. 1988년 ‘약장’으로부터 시작된 ‘약 시리즈’는 1989년 골드스미스 졸업전시에서 처음 선보였던 ‘약장’(1988~2008)을 시작으로, ‘점 작업’(1986~2011), ‘약국’(1992), 그리고 2005년의 ‘새로운 종교’로 연결된다. 앞서 언급된 동물 사체를 이용한 작품들보다도 이전에 시작된 시리즈로,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약 시리즈는 그의 어머니가 약에 대해 보여 준 믿음에 의문을 제시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어머니가 약국에서 보여 준 약은 믿으면서 갤러리에서 본 약은 믿지 못하는 태도에 주목해 약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약 시리즈 중 하나인 ‘점 작업’은 평면적이고 패턴화된 장식적 형태다. 점들은 빼곡하고 불규칙적으로 배열돼 있기도 하고 균일한 격자 형식으로 칠해져 있기도 하다. 그는 2011년 점 작업을 더이상 안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2012년 가고시안갤러리에서 ‘완결된 점 작업’(1986-2011) 전시를 진행했다. 그는 약학사전과 매년 최신 정보로 갱신되는 처방약에 대한 제약회사 정보 편집물을 참조해 그의 점 작업 제목으로 쓰일 화학물 이름을 선정했지만, 각 색점들은 그 성분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는 않다. 그는 단지 화합물을 제목으로 붙임으로써 약이 주는 효과처럼 색채가 주는 기쁨을 정의하고자 했다. 알록달록한 점은 단지 기분이 좋아지는 점이 된다. 그의 어머니가 질병을 치유해 주는 약을 맹목적으로 믿은 것처럼 색채의 긍정적 효과를 활용한 것이다. 동시에 작가는 때로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화합물의 이중적인 기능에 주목한다. ●NFT·암호화폐 등 패러다임 전환 미술은 언제나 동시대를 반영하고, 시대 흐름에 발을 맞춰 왔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최근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의 ‘매일: 첫 5000일, 2021’ 경매를 시작으로 미술시장에서 가장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대체불가능토큰(NFT) 또한 마찬가지다. 정보기술(IT) 업계나 일부 영역에서만 논의됐던 NFT 개념은 비플의 작품 판매를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미술계에 유입됐다. 소더비, 필립스 등 대표적인 경매업체들이 NFT 미술시장에 진출하고 유명작가들 또한 NFT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허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순히 작품을 NFT로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할 수 있는 NFT 방식을 통해 미술 작품 거래과정에 질문을 던졌다. ‘통화’는 그가 2016년에 A4 크기의 종이에 직접 손으로 칠한 점들로 표현된 1만장의 작품으로, 그의 금고에 보관돼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장당 2000달러(약 244만원)에 NFT로 변환해 발행했다.독특한 점은 구매자에게 이 작품을 NFT로 유지할지 실제 작품을 소유할지를 1년 안에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NFT로 유지할 경우 실제 작품은 소유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실제 작품을 소유하게 될 경우 NFT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 즉 구매자가 작품을 샀지만 직접 소장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교환할 수 있는 NFT’ 방식으로, 블록체인 발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물과 연동된 NFT를 사서 실물을 소유할 수도, NFT를 소유할 수도 있는 개념이다. 허스트는 이 프로젝트에 착수하기에 앞서 암호화폐로 작품을 파는 실험을 시도했다. 최근 판화 작품 ‘벚꽃’ 연작을 온라인으로 팔아 결제수단에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포함시켰다. 통상 판화는 50점, 100점 등 한정판으로 제작해 팔지만 허스트는 ‘벚꽃’ 연작을 주문이 들어온 만큼 찍었다. ‘벚꽃’ 연작 판화 제작사(헤니)에 따르면 온라인 판매에 67개국 4000여명이 몰렸다. 장당 3000달러(약 339만원)인 판화 7481점이 팔려 2240만 달러(약 25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는 전체 프로젝트 자체가 예술작품이라 강조했다. ‘통화’는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가장 흥미로운 프로젝트로, 그리는 작업뿐만 아니라 작품을 NFT로 변환하고 그것을 사고파는 행위까지 작품에 포함되는 것이라 말했다. 허스트의 작품에는 항상 윤리 문제에 대한 논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조차 스펙터클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비난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미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기대하고 주목하고 있다. 그는 미술계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 준다. 숨 프로젝트 대표
  • BTS도 반했다… ‘空의 조각’ 속 꽃핀 삶의 본질

    BTS도 반했다… ‘空의 조각’ 속 꽃핀 삶의 본질

    ‘범인에게는 침을, 바보에게는 존경을, 천재에게는 감사를.’ 한국 근현대조각의 선구자 권진규(1922~1973)는 1971년 자신의 아틀리에 벽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 알려졌지만 바보처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걸었던 작가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고독하게 예술혼을 불태웠다. 지난 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개막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는 한평생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끈질기게 추구했던 권진규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다. ‘노실’(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방)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전시장은 작가 아틀리에의 우물과 가마를 형상화해 만들어졌고 1950~1970년대까지 그가 만든 조각, 회화, 드로잉 등 240여점이 전시됐다. ‘노실의 천사’란 그가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이상, 즉 순수한 정신적 실체를 뜻한다. 오는 5월 22일까지 계속되는 전시는 권진규 개인전 중 역대 최대 규모로 1947년 그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한 성북회화연구소 시절부터 1973년 5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만든 주요 작품을 총망라한다. 동물상, 여성 두상과 흉상, 자소상, 부처와 예수상, 승려상 등의 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전시하며 주요 제작 기법인 테라코타와 건칠 작품 제작 과정도 소개한다. 전시작은 유족의 기증품 외에 기관과 개인 소장품으로 이뤄졌다. 여기엔 미술 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이 소장한 ‘말’(위·1965년 제작 추정)도 포함됐다. 전시는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해 ‘입산’, ‘수행’, ‘피안’ 등 세 시기로 구성됐다. 교과서에도 실린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스카프를 맨 여성’,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이중섭의 ‘황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흰소’ 등 대표작들이 전시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고려대 박물관을 찾아 한참을 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 ‘가사를 걸친 자소상’(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작가의 평화로운 미소가 긴 여운을 남긴다. 권진규는 리얼리즘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추구한 작가였다. 여성의 모습도 수동적으로 그리지 않았고 작품 곳곳에 자신만의 유머도 심어 놓았다. 그는 아틀리에 옆 조그만 방에서 자신이 추종했던 프랑스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의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수행하듯 작품을 만들었다. 작가의 치열한 탐구 정신이 담긴 메모와 기록들도 함께 전시됐다. 세속을 떠나 고독한 미술의 세계로 들어섰던 작가는 한국 화단의 몰이해로 인해 좌절하고, 불교에 침잠하다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인생은 공(空)’이라고 적힌 마지막 메모에서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깊은 고뇌가 전해진다. 전시를 기념해 작가가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했던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가 매주 토요일 특별 개방된다. 다음달 특별 공연과 학술대회도 열린다.
  • 법조계 “尹의 무고죄 처벌 강화, 성폭력 피해자 위축 우려… 신중하길”

    법조계 “尹의 무고죄 처벌 강화, 성폭력 피해자 위축 우려… 신중하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을 겨냥해 공약했던 ‘무고죄 처벌 강화’ 논의가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법조계에선 무고죄가 성범죄 피해자를 위축시킬 수 있어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단 목소리가 나온다. 윤 당선인은 대선 기간 성범죄 처벌 수위가 높아지는 것에 맞춰 무고죄 형량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다.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에 무고죄 조항을 신설하고 강력범죄(살인·강도·강간 등)에 대한 무고죄 형량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상향하는 이중 조치를 약속했다. 법조계에선 무고죄 처벌 강화는 서둘러 처리할 성격이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행 형법에서는 무고죄를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고 있는데 이것만 해도 해외 주요 국가에 비해 약한 처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독일은 무고죄에 5년 이하 자유형 또는 벌금, 영국은 6개월 이하 즉결심판이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무고죄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적잖다. 2020년 기준 검찰에 접수된 무고죄 사건은 약 9.1%(1177건)만 기소됐지만 이는 수사기관의 엄벌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무고죄의 법 특성 때문이란 것이다. 무고죄는 허위 사실임을 충분히 알았음에도 일부러 신고를 했다는 점을 객관적 증거로 입증해야 성립하지만 증거 수집이 쉽지 않다. 서혜진 변호사는 27일 “상당히 강한 입증이 요구되기에 수사기관이나 변호사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범죄”라고 설명했다. 무고죄가 결백한 사람을 파탄으로 이끌 수 있는 악질 범죄인 것은 맞으나 처벌을 강화해 성범죄 피해 신고가 위축된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지은 변호사는 “무고를 당한 당사자도 인생에 있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지만 또 성폭력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는 ‘양날의 검’ 같은 면도 있다”면서 “엄벌주의가 능사가 아니기에 급히 시행하기보단 이행 방안을 신중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이대남’ 겨냥한 무고죄 강화 현실화?…법조계선 ‘신중모드’

    ‘이대남’ 겨냥한 무고죄 강화 현실화?…법조계선 ‘신중모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을 겨냥해 공약했던 ‘무고죄 처벌 강화’ 논의가 현실화될지 주목된다. 법조계에선 무고죄가 성범죄 피해자를 위축시킬 수 있어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단 목소리가 나온다. 윤 당선인은 대선 기간 성범죄 처벌 수위가 높아지는 것에 맞춰 무고죄 형량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에 무고죄 조항을 신설하고 강력범죄(살인·강도·강간 등)에 대한 무고죄 형량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상향하는 이중 조치를 약속했다. 법조계에선 무고죄 처벌 강화는 서둘러 처리할 성격이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행 형법에서는 무고죄를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고 있는데 이것만 해도 해외 주요 국가에 비해 약한 처벌은 아니라는 것이다.실제로 2018년에 약 24만명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무고죄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는데 당시 부장검사 출신의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우리나라의 무고죄 법정형은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답했다. 미국과 독일은 무고죄에 5년 이하 자유형 또는 벌금, 영국은 6개월 이하 즉결심판이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단 사실을 예로 들었다. 무고죄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적잖다. 2020년 기준 검찰에 접수된 무고죄 사건은 약 9.1%(1177건)만 기소됐지만 이는 수사기관의 엄벌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무고죄의 법 특성 때문이란 것이다.무고죄는 허위 사실임을 충분히 알았음에도 일부러 신고를 했다는 점을 객관적 증거로 입증해야 성립하지만 증거 수집이 쉽지 않다. 서혜진 변호사는 27일 “범죄 피해를 과장했거나 완전히 없는 사실로 고소한 것이 아니면 성립되기 어렵다”면서 “상당히 강한 입증이 요구되기에 수사기관이나 변호사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범죄”라고 설명했다.무고죄가 결백한 사람을 파탄으로 이끌 수 있는 악질 범죄인 것은 맞으나 처벌을 강화해 성범죄 피해 신고가 위축된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지은 변호사는 “무고를 당한 당사자도 인생에 있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지만 또 성폭력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는 ‘양날의 검’ 같은 면도 있다”면서 “엄벌주의가 능사가 아니기에 공약을 급히 시행하기 보단 이행 방안을 신중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무고죄 강화는 법 개정 사항임에도 아직 국회에 관련 개정안이 발의된 것이 없다. 이에 대형 로펌들은 일단 새 정부의 정책을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는 태스크포스(TF)를 각자 만들어 놓고 무고죄에 대해서도 동향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방준석 음악감독, 위암으로 별세‥‘모가디슈’·‘자산어보’ 등 작업

    방준석 음악감독, 위암으로 별세‥‘모가디슈’·‘자산어보’ 등 작업

    영화 음악감독 방준석씨가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6일 유족에 따르면, 방 감독은 이날 오전 7시 위암으로 별세했다. 몇 년 전 위암 치료를 받은 방 감독은 이후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2020년 가을 위암이 재발하면서 투병을 이어왔다. 미국에서 살던 고인은 1994년 이승열과 함께 유앤미블루를 결성하고 한국에서 첫 앨범 ‘낫싱스 굿 이너프’(Nothing‘s Good Enough)를 내며 음악계에 데뷔했다. 1997년 밴드가 해체한 이후에는 영화 음악 활동을 했다. 그는 영화 ’오! 브라더스‘(2003), ’짝패‘(2006), ’오직 그대만‘(2011), ’럭키‘(2016), ’프리즌‘(2017), ’신과 함께-죄와 벌‘(2018), ’신과 함께-인과 연‘(2018), ’백두산‘(2020), ’모가디슈‘(2021) 등 영화 음악 작업을 이끌며 대표적인 영화 음악감독으로 입지를 다졌다. 특히 방 감독은 이준익 감독과 여러번 함께 일을 했다. ’비와 당신‘이 수록된 영화 ’라디오 스타‘(2006)를 비롯해 ’즐거운 인생‘(2007), ’사도‘(2015), ’박열‘(2017), ’변산‘(2018), ’자산어보‘(2021) 등의 OST를 작업한 바 있다. 2005년부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청룡영화상, 대한민국영화대상 등 주요 영화시상식에서 음악 부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지난해에는 영화 ’모가디슈‘, ’자산어보‘ 음악으로 제30회 부일영화상, 제8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제41회 영평상, 제42회 청룡영화상 등을 휩쓸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8일 오후 3시 30분이다. 장지는 미국 뉴욕주 켄시코 가족공원묘다.
  • ‘역대급 가성비’ 정성우 “KT에 정말 잘 왔어요”

    ‘역대급 가성비’ 정성우 “KT에 정말 잘 왔어요”

    이번 시즌 프로농구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을 꼽으라면 수원 KT와 정성우(29)를 빼놓을 수 없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정성우를 첫해 보수 1억 9000만원(연봉 1억 7000만원+인센티브 2000만원)에 데려왔는데 가성비도 이만한 가성비가 없다. 정성우가 시즌 막판 다시 한번 존재감을 뽐냈다. 정성우는 25일 수원 KT 소닉붐 아레나에서 열린 2021~22 프로농구 안양 KGC전에서 19득점 3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T의 95-71 승리를 이끌었다. 팀내 최다 득점과 어시스트였다. 이날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정성우는 두 가지 기록을 깼다. KGC의 8연승을 저지했고, 역대 최초의 10경기 연속 3점슛 4개 이상 기록에 도전하던 전성현(31)을 막아세웠다. 정작 정성우는 “2개 이상 기록을 꼭 막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며 35경기 연속 2개 이상 성공한 기록을 내준 것을 더 아쉬워했다. 서동철(54) KT 감독으로서는 마냥 흐뭇하기만 하다. 서 감독은 “공격도 나무랄 데 없이 잘했는데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전성현을 완벽하게 수비해냈다. 수비에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서 감독은 “정말 자랑스럽다”, “아주 만족스럽다”, “오늘만큼은 성우가 아주 특별하게 잘했다”, “성우 데려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하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이날만 반짝 활약한 것이 아니다. KT가 시즌 초반 허훈(27)의 부상에도 버티며 현재 2위를 달릴 수 있던 원동력도 정성우의 활약이 있었던 덕분이다. 정성우는 지난 시즌보다 출전 시간(14분2초→25분39초), 득점(4,8점→10.1점), 리바운드(0.8개→2.3개), 어시스트(1.9개→3.4개), 스틸(0.6개→1.3개) 등 모든 부문에서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선수도 구단도 제대로 윈윈한 결과가 됐다. 2015~16시즌 창원 LG에서 데뷔한 정성우는 신인왕을 수상했지만 이후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벤치에서 주전 선수들의 휴식 시간을 벌어주는 데 그쳤다. 그러나 FA로 KT에 와서는 대체 불가한 선수가 됐다. 서 감독은 “FA 영입할 때 정성우를 수비만 잘하는 선수라 뽑은 건 아니다”라면서 “상대팀으로 뛸 때 짧은 시간에 나와서 뛰는데 슛폼도 그렇고 슛이 없는 선수가 아니었다. 중요할 때마다 하나씩 넣어줘서 공격도 충분히 잘해줄 선수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서 감독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해주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최고의 영입이 됐다. 자신의 농구 인생 2막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된 팀이다 보니 정성우의 애정도 가득하다. 정성우는 “제 역할은 짧은 시간 팀에 기여하고 임팩트를 줘야 하는 선수라 시장에 나오는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면서 “선수가 FA가 되면 어느 팀에 가서 어떤 농구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중에 KT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성우는 “KT에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선택했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웃었다.리그가 막판이 되면서 정성우의 기량발전상 수상 가능성도 떠오르고 있다. 여러 선수가 기량 발전을 이뤘지만 정성우보다 임팩트가 강한 선수를 찾기가 어렵다. 서 감독은 “성우가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워낙 성실하고 팀에 많은 역할을 하는 선수라 꼭 받았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정성우도 “KT 때문에 얻어가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감사드린다”면서 “기대하고 플레이하면 안 좋은 모습이 나올 걸 알고 있어서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욕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정성우는 “꼭 받고 싶다”고 강력하게 소망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허구연 신임 KBO 총재 “지자체가 구단 깔보면 연고지 버리는 강단도 필요”

    허구연 신임 KBO 총재 “지자체가 구단 깔보면 연고지 버리는 강단도 필요”

    경기인 가운데 첫 한국프로야구의 수장이 된 허구연 KBO 신임 총재는 “솔직히 나는 한국인 빈 스컬리가 되고 싶었다. 버드 셀리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빈 스컬리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캐스터다. 버드 셀리그는 1998∼2015년 메이저리그 사무국 커미셔너(총재)로 일하며 미국 야구의 전성기를 열었다.KBO는 25일 “서면 표결을 통해 구단주 총회 만장일치로 허구연 위원을 제24대 총재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허 신임 총재는 KBO 발표 직후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해설위원으로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시기에 총재 자리에 올랐다”며 “우리 한국야구에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이 보이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를 전했다. 허 신임 총재는 야구계 현안을 훤히 꿰뚫고 있다. 최근 화두가 된 ‘강정호 복귀 추진 파문’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 중이다. 그는 “강정호 문제를 신중하게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려운 시기에 취임한다. 솔직히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난제를 풀어가야 하는 게 총재의 역할이다. 우리 한국야구에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이 보이도록 노력하겠다. ▲가장 시급한 일은. -정규시즌 개막이 다가왔다. 김광현(SSG 랜더스),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복귀, 김도영(KIA) 등 신인의 등장, 야시엘 푸이그(키움 히어로즈) 등 개성 있는 외국인 선수의 입단 등 호재가 많다. 이런 긍정적인 부분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키움이) 강정호 복귀를 추진하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데, 문제를 신중히 살피겠다. 한쪽의 이야기만 듣지 않고, 법률적인 부분 등을 잘 들춰보겠다. 내가 또 법대(고려대 법학과 학사·석사) 출신이지 않은가. 지금 KBO 규약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KBO 실무진의 보고를 받고, 법률 자문 등도 구해서 신중하게 판단하겠다.▲야구인 최초 KBO 총재라는 무게감도 느낄 텐데. -커미셔너(총재)는 팬, 구단, 선수의 동의를 구하며 리그를 발전시키는 자리다. 각자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절충안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구단과 선수들에게 ‘팬 퍼스트’를 강조하고 싶다. 선수들은 프로다운 경기력을 보여줘야 하고, 많은 구성원이 ‘스피드 업’ 등 야구의 재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팬 서비스도 선수와 구단의 중요한 임무다. KBO리그의 인기가 하락세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 2022년이 한국 야구의 터닝 포인트가 되길 기원한다. ▲팬들은 인프라 확충‘을 기대한다. -내가 ’자연인‘일 때도 지자체 관계자를 만나서 야구장 등 인프라 구축을 강조했다. 최근까지도 꾸준히 지자체장과 만났다. 대전, 부산, 서울 등에 야구장 신축이 절실하다. 이 부분을 독려할 것이다. 또한, ’남해안 벨트‘를 조성해 국내에서 ’2군 캠프‘가 가능하게 하겠다. 이렇게 되면 아마추어팀도 활용할 수 있다. 지방에 야구 붐이 일어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지자체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기업이 운영하는 KBO리그 상황을 고려하면, 구단은 지자체에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총재인 내가 지자체에 목소리를 높이겠다. 싸움도 불사할 생각이다.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자체가 ’우리는 야구단의 연고지‘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자체가 불성실한 태도로 야구단을 대하면 구단이 연고지를 떠나는 강단 있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해설위원 허구연’을 그리워할 팬도 많을 텐데. -내 꿈은 해설위원으로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빈 스컬리가 되고 싶었지, 버드 셀리그가 될 생각은 없었다. 2022시즌 KBO리그와 메이저리그 중계를 위해 준비도 많이 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갑작스럽게 KBO 총재 제의를 받았고, 결국 KBO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팬들에게 방송으로 인사드릴 기회도 없이 떠난다. 그 점이 참 아쉽다. 40년 동안 팬들께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한 번도 ’퍼펙트한 해설‘을 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 해도 완벽하지는 못했다. 마이크를 놓는 지금, 아쉬운 장면이 더 많이 떠오른다. 총재 자리에서 야구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씨줄날줄] ‘파친코’/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파친코’/임병선 논설위원

    오늘 애플TV+에서 세 편이 공개되는 드라마 ‘파친코’(pachinko)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파친코는 구슬을 기계로 퉁겨 구멍에 넣은 뒤 그림의 짝이 맞으면 당첨금을 받는 일본의 국민 오락이다. 패전 이후 한없이 막막해진 서민들이 구슬이 좌르륵 쏟아지는 소리에 불안을 떨쳐내고 값싼 위안을 얻었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 전역에 1만 7000여 업소가 연 매출 29조 500억엔(당시 환율로 232조원)에 종업원 44만명을 거느렸는데 2020년 14조 6000억엔(약 147조원)으로 확 줄었다. 연간 400곳이 문을 닫아 2019년 말에는 9639곳뿐이었다. 파친코 산업은 날로 쇠퇴하는데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뒤늦게 조명받고 있다. 일본에서 파친코를 운영하는 이들 중에는 유독 재일 한국인 ‘자이니치’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루한’의 운영자 한창우씨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이 한씨에게 직접 들은 인생 역정을 옮긴 책이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에 선정되는 등 인기를 끌자 애플이 판권을 사들여 8부작으로 제작했다. 어머니와 선자(윤여정), 아들, 손주 4대가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이겨 내며 분투하는 80년을 그려 낸다. 인종차별을 겪으며 미국에서 자란 작가가 재일교포의 신산한 삶을 그려 낸 작품에 미국 자본이 1000억원을 투입하고 우리 배우들을 기용해 제작한 점이 흥미롭다. 유튜브에 공개된 첫 회 맛보기 영상을 봤는데 프랑스 영화 ‘연인’에서의 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왜곡된 시선 같은 게 느껴져 불편했다.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이 영화 ‘피와 뼈’에 그려 낸 자이니치들의 울분을 못 살려낼까 싶어 불안하기도 한데 서구 평단의 프리뷰 반응은 뜨겁다. 다소 놀라운 일은 서울 태생의 코고나다와 캘리포니아 출신 저스틴 전, 두 한국계 감독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이며 57년 경력의 윤여정에게도 오디션을 보게 한 점이었다. 제작진이 “애플이니까”를 남발하자 “사과건 배건 난 관심 없다”고 맞받아쳤다는 윤여정이다. 코고나다 감독이 윤여정의 얼굴에 한국 역사를 그린 지도가 담겨 있다고 했다는데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
  • [길섶에서] 단톡방 설전/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단톡방 설전/임창용 논설위원

    반 년째 모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고향 친구들의 단톡방에서 설전이 벌어졌다. 한 친구가 거리두기도 완화됐으니 모임을 갖자고 제안하면서다. 누군가 “인생 뭐 있나. 좀 모여서 재밌게 놀자”며 맞장구를 친다. ‘나라님’도 포기 수순인 것 같다며 비꼬는 친구도 있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코로나에 감염되면 직장서 눈치 보이는데”라면서. 그러자 한 친구가 “공식 모임은 미루고 당분간은 비공식 만남에 만족하자”고 절충안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은퇴한 친구들은 모이자는 쪽, 아직 직장에 나가는 친구들은 자제하자는 쪽이다. 평소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감이 크다는 의미일 게다. 코로나 시대라고 해도 직장인들이야 동료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니 모임이 덜 아쉬울 터. 이럴 때일수록 은퇴한 사람에겐 친구의 전화 한 통이 소중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 끊임없이 상상합니다…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끊임없이 상상합니다…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뮤지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루시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생각하죠.” 이제는 스테디셀러 뮤지컬이 된 ‘지킬앤하이드’의 헤로인, ‘루시’ 역의 배우 선민(35)을 지난 22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만났다. ‘지킬앤하이드’는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분리되는 실험을 통해 탄생한 하이드와 지킬이 벌이는 갈등이 주된 서사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클럽 무용수 루시가 등장한다. 루시는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킬에게 하이드의 난폭성과 잔인함을 일깨워 준다. 선민은 이번 시즌 1차 캐스팅 라인업에 이어 2차에도 루시 역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루시는 신사인 척 다가오는 남자들이 결국 자신의 몸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지킬과의 관계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작품 속 지킬은 루시에게 아무것도 얻어 내려 하지 않는다. 루시에게 명함을 주며 ‘친구’라고 관계를 정의한다. 선민은 “루시는 친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서로에게 얻어 낼 것이 없더라도 ‘새 인생을 살아 보라’ 얘기해 주고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며 “루시는 지킬에게 난생처음 응원을 받고 새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선민과 루시의 인연은 각별하다. 2010년 뮤지컬 입문 당시 ‘지킬앤하이드’에서 루시를 연기했고 8년 공백을 깨고 복귀한 ‘드라큘라’(2021)에서 맡았던 배역도 루시였다. 그는 “‘드라큘라’의 루시는 청혼자 중에서 멋있는 남자, 돈 많은 남자가 아닌 마음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라면 ‘지킬앤하이드’의 루시는 짓눌린 현실에 꿈과 열정 등을 잊고 사는 존재지만, 지킬의 응원으로 열정, 꿈틀거림을 느끼는 존재”라고 했다. 선민은 2013년 ‘아르센 루팡’ 이후 뮤지컬 무대를 떠나 있었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에 사촌 언니를 보러 갔다가 그곳이 너무 좋아 오래 머물게 됐다”며 “딸로서, 친구로서 등 누구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 이선민(본명)’만 남긴 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무대가 그리웠던 걸까. 그는 “‘지킬앤하이드’를 공연하는 꿈을 자주 꿨다. 갑자기 무대에 올라 가야 하는데 준비가 안 된 상태라 당황하곤 했다”며 “‘지킬앤하이드’를 마지막으로 한 것은 2013년 1월 샤롯데에서였는데, 이번에 같은 공간에서 그 당시 함께했던 배우들(류정한, 김이삭 등)과 무대에 오르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선민은 2006년 일본에서 가수로 데뷔했고 영화 음악에 참여하고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긴 하루’에도 출연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다음 행보에 대해 그는 “(가능성을) 다 열어 두고 ‘내가 뭘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고 있다”며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찾는 관객을 위해, 제 안의 비슷한 점을 찾아 가까워지려 노력한 루시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한 사내가 있었다. 잔인한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유달리 덥던 여름에 세상에 났다. 아버지는 소실을 둘씩이나 거느린 한량이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잃고 의기소침한 여인이었다. 배다른 형제까지 6남 1녀, 아무도 병약한 둘째 아들을 귀애하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컸다. 먼지덩이처럼 구르며 자랐다. 귀 얇은 아버지가 교활한 일본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몰락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열다섯 살에 몰씬한 단내를 좇아 일본과자점에 취직했다. 화과자와 찹쌀모찌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지만 가난한 점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열일곱 살의 생일은 말라리아와 함께 왔다. 열병 끝에 관절염이 생겼다.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뼈마디부터 저리고 아팠다. 짧은 생애가 삐걱거렸다.(졸저 ‘백범’ 중에서)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민족 혹은 국가, 어떤 공동체가 역사의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재의 의미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선양 사업은 잘난 자손의 가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자손이 없거나 한미하면 같은 일을 하고도 역사의 어둠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고향의 지자체에서 자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조차 복불복이다.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우당 이회영 같은 명문거족 출신은 아니더라도 백범처럼 부모의 총애를 담뿍 받았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윤봉길처럼 고향의 뿌리와 월진회를 조직해 함께 활동한 동지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복형제까지 더해 7남매 중의 둘째 아들, 용산에서도 일본 오사카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안팎 어디서나 누구라도 그에게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았을 게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니 빚도 없었다. 그 고독한 바람의 사내 이봉창이 여기 있었다. ‘이봉창 집터: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이 살던 집터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 귀퉁이 화단에 더부살이했던 부정확한 표석은 철거됐고, 새로운 표석이 2018년 사용 승인된 용산KCC스위첸아파트 102동 3·4호 라인 현관 맞은편 화단에 자리잡았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경성부 금정(현 효창동) 118번지에서 열한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살았다.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번지수가 불명확해진 탓인지 일부 인터넷 지도에는 집터와 생가터의 표기가 혼동돼 있다. ‘이봉창 집터’ 표석이 있는 102동 앞에서 후문으로 빠져나와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봉창 역사울림관’이 있다. 거리로는 멀지 않은데 아파트 벽으로 막혀 있으니 아쉽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접근하면 역사울림관을 먼저 보고 표석을 찾는 동선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역사울림관이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 걸 모르고 갔다가 1시간을 꼬박 밖에서 기다리게 됐다. 기념관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에 그냥 돌아갈까 망설였다.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패널과 사진, 기념품 몇 점을 전시한 재미없는 공간이 내가 기억하는 기념관의 전부였다. 그래도 2021년 10월에 개관했다니 뭐라도 다를까 궁금하고, 작은 뜰 앞 툇마루에 놓인 푹신한 방석이 마음에 들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햇살은 따스하고 사위는 고즈넉하다. 거리를 향해 놓인 벤치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으로 조각이 앉아 있는데, 버튼을 누르니 녹음이 흘러나온다.“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묻는 사람은 백범이고 답하는 사람은 이봉창이다. 쾌락을 말하는 이봉창의 말에는 허무가 묻어 있다. 허랑하고도 방탕하게, 분진으로 가득한 누항을 떠돈 자의 지독한 피로다. 이봉창의 모습은 전형적인 운동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조직은커녕 소개인이나 소개장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청사를 찾아와 일본인들이 부르는 ‘가정부’(假政府)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찾았다.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 쓰는가 하면 엔카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오리 바람에 게다짝을 끌고 청사에 들어오려다 중국인 문지기에게 쫓겨나기까지 했다. 모두가 오해했다. 많은 이가 의심했다. 하지만 백정선이라는 가명을 쓰던 한 사람, 백범만은 그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장한 태도와 결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단순하고, 선명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운 이봉창만의 방식이 있었다. 백범의 매서운 눈빛을 어린아이처럼 맞받으며 반달눈으로 빙긋이 웃던 이봉창은 그렇게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다.‘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백범의 원칙은 명확했다.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동포들이 보내준 피 같은 돈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이봉창에게 건넸다. 돈은 정직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은 모험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 있는 모험이었다. 이봉창은 난생처음 진정한 믿음을 얻었다. “엊그제 선생께서 속주머니를 뒤집어 천여 원의 거액을 제게 주셨지요. 그 돈을 받고 돌아가서는 온밤을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르더이다. 누더기 단벌 장삼에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형편을 뻔히 아는데, 대관절 저를 어떻게 믿고 이같이 큰돈을 털컥 맡기십니까? 프랑스 조계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 마음대로 써버려도 찾으러 오지 못하실 테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평생에 누가 저를 이토록 믿어 주었겠습니까? 이토록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기다리길 잘했다. 두 칸짜리 한옥 크기의 이봉창 역사울림관은 평면적이고 지루하다는 기존 기념관에 대한 편견을 깬 작지만 새로운 공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발 모양에 맞춰 의사의 흉상을 마주 보고 서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는 선서문이 들린다. 한인애국단 단원이 돼 사진을 찍는 증강현실(AR) 체험과 1932년 1월 8일 일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현장에 함께하는 가상현실(VR) 체험(VR은 기술적 측면에서 조금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을 할 수 있다. 이봉창 의거와 사형 집행, 해방 후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기까지의 신문 기사들을 여닫이창을 화면 삼아 띄워 볼 수도 있다. 직접 가보지 못한다면 인터넷을 통한 3D 체험도 가능하다(https://my.matterport.com/show/?m=T9Wk7zuBySz). 오롯이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공간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는 그 사내도 영원한 쾌락 속에서 편히 쉬리라. 바람 끝이 많이 따뜻해졌다. 바야흐로 봄인가 보다. 소설가
  • [여기는 중국] 유언장 쓰는 중국 10대들...”게임 ID는 제 친구주세요”

    [여기는 중국] 유언장 쓰는 중국 10대들...”게임 ID는 제 친구주세요”

    #중국 장쑤성에 거주하는 10대 청소년 왕린 군(18세)은 최근 자신의 명의로 된 부동산과 주식, 예금 등을 내용으로 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올해 9월 뉴질랜드 유학을 앞둔 왕 군은 유학 전 자신 명의의 전 재산을 모친에게 상속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유언장을 작성해 전문 업체의 공증까지 마친 상태다.  그는 “성장하는 동안 어머니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자랐는데, 만일의 사태 때 내 명의로 된 재산을 두고 아버지가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언장 작성을 완료했다”면서 “유학 전에 불필요한 재산 분쟁을 피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최근 유언장을 작성해 공증까지 완료한 중국인 리 모 양도 올해 17세의 미성년자다. 리 양이 유언장을 작성한 가장 큰 이유는 평소 자신을 지지해준 단짝 친구에게 재산 중 일부를 상속하는 내용을 유언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  리 양은 “(내가)힘들 때 가장 큰 힘을 준 친구에게 2만 위안(약 380만 원)의 재산을 남기고 싶었다”면서 “나중에 성인이 된 후 재산을 더 불린다면 그때 다시 유언장 내용을 수정하겠지만,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가장 상속하고 싶은 사람에게 남길 수 있도록 하고, 무관한 사람과의 상속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중국에서 10~20대 청년들 사이에서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례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중국 매체 중국신문망(中国新闻网)은 최근 들어와 중국 내 유언장 플랫폼의 이용자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10대 청소년들이 작성하는 유언장 내용 중에는 가상 자산도 다수 등장하는 것이 새로운 추세라고 24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최근 공개된 ‘2021중화유언고백서’ 내용을 인용해, 유언장 전문 플랫폼의 유언장 공증 및 보관 서비스를 이용한 2000년대 이후 출생자의 수가 지난 2020~2021년 2년 동안 약 223명에 달해 지난 1년 사이 무려 14.42% 이상 급증했다고 전했다.  또, 이들 중 상당수가 알리페이와 위챗(WeChat), QQ 등 가상 계좌와 게임 ID 등 가상 자산을 유언장에 포함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또, 지난 5년 사이 유언장 전문 플랫폼 서비스 이용자 중 1980년대 출생자의 수가 13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1980년대 출생 서비스 이용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유언장 처분 자산 중 부동산과 예금액에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는 점이 꼽혔다.  중화유언고 광둥지점 서비스센터 리신웨 센터장은 “유언장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면서 “10대 청소년들과 20~30대 청년들에게 유언장 작성의 의미는 기존의 노년층이 갖는 죽음에 대한 준비 의식과는 다르다. 젊은 청년들에게 유언장 작성의 의미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고 해석했다.  리 센터장은 이어 “유언장에 대한 젊은 세대의 접근은 유언장 작성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면서 “이들은 매우 이성적으로 유언장 작성에 대해 접근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과거의 삶과 미래를 재조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에 유언장 서비스 관련 보고서를 집계, 공개한 중화유언고 보관소는 지난 2013년 중국 노령사업발전기금회와 베이징 양광노년건강기금회가 공동으로 설립한 공익 사업체로 유언장 작성 및 공증, 보관과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해오고 있다.  모든 유언장 작성 과정은 녹취돼 기록되며, 비밀 보관과 사법적 효력을 보증하는 공증 등의 전 과정이 지원된다.  해당 유언장 작성 서비스는 중국 전역에서 60여 곳의 지점을 운영 중이며, 업체에 보관된 유언장은 약 22만 명 분량, 이중 실제로 효력이 발효된 유언장은 4707건에 달했다.
  • ‘전현무와 결별‘ 이혜성, 머리 싹둑 “인생은 쓰다”

    ‘전현무와 결별‘ 이혜성, 머리 싹둑 “인생은 쓰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이혜성이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공개했다. 이혜성은 공개연애 중이던 전현무와 지난달 결별을 발표했다. 이혜성은 23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혜성이’를 통해 “안녕 바라기들! 아직 꽃샘추위이기는 해도 낮에는 해가 쨍쨍한 날이었네요! 오늘은 기분전환 하는 날 브이로그를 담아왔어요. 머리를 좀 더 예쁘게 다듬기 위해 미용실도 다녀오고, 커피 오마카세와 위스키바도 즐기고 왔는데 가끔은 이런 쉬어가는 날도 필요한 것 같아요”라는 글과 함께 영상을 게재했다. 영상 속 이혜성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셔츠와 짧은 치마를 입고 미용실에 방문했다. 머리를 손질하던 이혜성은 올해 계획을 묻자 “더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에 흡족한 표정을 짓던 이혜성은 “일본 잡지에 나오는 헤어스타일 같다. 너무 예쁘다”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혜성은 친언니와 함께 7만원짜리 커피 오마카세를 즐기며 “진짜 쓰다. 인생은 쓰다”라고 말했다.
  • 76세 원로 컨트리 가수의 ‘돌리버스’… 메타버스 아이콘 되다 [손재권의 실리콘밸리 투데이]

    76세 원로 컨트리 가수의 ‘돌리버스’… 메타버스 아이콘 되다 [손재권의 실리콘밸리 투데이]

    “블록체인! 돌리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오스틴. 11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세계 최대 기술·문화 융합 콘퍼런스 SXSW(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2022 무대에 76세의 원로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이 올랐다. 객석을 꽉 채운 약 500명의 관객이 원로 가수를 큰 박수와 함성으로 환영했다. 파튼은 3월에 선보인 신보 ‘런, 로즈, 런’(Run, Rose, Run)에 담긴 3곡(‘런’, ‘우먼 업 앤드 테이크 잇 라이크어 맨’, ‘빅 드림스 앤드 페이디드’)을 부르며 관객들과 소통을 이어 갔다. 팔순을 바라보는 원로 컨트리 가수가 글로벌 라이브 무대의 수도라고 불리는 텍사스 오스틴에 당당히 등장하고 손자뻘 되는 참관객들이 그의 노래에 열광한 것이다. 파튼이 선 무대는 혁신 기술과 문화 예술이 만나는 장소로 지난 2019년까지 40만명이 참여한 이벤트인 SXSW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파튼이 SXSW 무대에서 메타버스 플랫폼인 ‘돌리버스’(Dollyverse)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현장에 없던 팬들은 웹3 기반으로 만들어진 메타버스 플랫폼 ‘돌리버스’에 접속, 무료로 토크 콘서트를 시청할 수 있었고 이번에 공개된 신곡 ‘런, 로즈, 런’의 한정판 에디션과 그의 예술작품을 담은 대체불가능 토큰(NFT)을 구매했다. 1946년생 대 원로 가수가 76세가 된 2022년에 웹3로 만들어진 메타버스에서 NFT를 판매하고 팬들이 그의 신곡을 기념하고 NFT를 구입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미래 미디어 비즈니스의 원형 만들어 파튼의 ‘돌리버스’는 2022년에 가장 주목해야 할 글로벌 미디어 이벤트로 평가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원작자의 스토리와 콘텐츠 제작(책, 음악, 영화) 그리고 신기술까지 결합된 2022년 이후 주류가 될 미디어 비즈니스의 원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왜 돌리버스는 미래 미디어의 원형일까. 우선 미디어 비즈니스는 스토리텔링이 기본이다. 스토리의 힘이 있어야 비즈니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튼은 그 자체로 ‘인생 스토리’다. 파튼은 미국의 유명한 컨트리 가수로 지난 1982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나인 투 파이브’(9 to 5)에 직접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가수로 대중에 잘 알려져 있다. 이미 40년이 넘은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는 본 적이 없어도 “워킹 나인 투 파이브!”라는 후렴구는 여전히 많은 대중이 기억하고 있다. 또 휘트니 휴스턴의 ‘보디가드’ 주제곡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리’(I will always love you)의 원작자일 뿐 아니라 컨트리 가수지만 10여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한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다. 2022년 3월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에 선정됐으나 이를 거절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국에서 파튼은 ‘미담 제조기’로도 불리는데 미국 내 최고 등급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두 번이나 거절했고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을 이겨낼 ‘모더나’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즉각 100만 달러를 쾌척, 코로나 백신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찬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파튼은 항상 밝게 웃으며 대중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천상 엔터테이너인데 그의 인성과 실력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비결이었다.●돌리 파튼 그 자체가 ‘인생 스토리’ 둘째, 파튼은 ‘런, 로즈, 런’ 신보를 내는 과정에서 디지털 콘텐츠 선순환 구조의 교과서적 모습을 보여 줬다. ‘런, 로즈, 런’은 이번에 앨범과 동시에 펴낸 자전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슈빌 태생의 젊은 여성이 컨트리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컨트리 음악의 수도로 온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삶을 소설로 만들었다. 소설은 ‘미드나이트 클럽’, ‘크리스마스의 기적’, ‘대통령이 사라졌다’ 등을 펴내며 미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판 소설가로 유명한 제임스 패터슨과 공동 집필했다. 자신의 삶과 스토리를 패터슨이 소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 싱어송라이터로 작사 작곡에 능한 파튼 자신은 동명의 앨범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다.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리스 위더스푼이 설립한 영화사 헬로 선샤인이 이 책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하고 판권 구입 계약을 체결했다. ●백신 개발 연구소에 100만 달러 쾌척 평생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가꾸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 내 최고 소설가와의 협업을 통해 자전적 스토리를 만들어 앨범을 내고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런, 로즈, 런’을 통해 돌리 파튼 유니버스를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돌리버스’를 통해 NFT, 메타버스라는 미래 디지털 비즈니스를 개척하는 주인공이 됐다. 한정판 NFT를 발행한 데 이어 돌리버스 라이브에 접속한 참가자는 참여를 인증하는 토큰을 받았다. 파튼은 이번 이벤트에 대해 “팬들과 소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항상 새롭고 차별화된 것을 시도할 준비가 돼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돌리버스는 미국의 대표 미디어 기업인 폭스에서 세운 자회사 ‘블록체인 크리에이티브 랩스’(BCL)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BCL은 SXSW 2022를 공식 후원했을 뿐 아니라 오스틴 시내에 대형 전시장을 마련, 존재감을 드러냈다. 폭스가 NFT, 블록체인, 메타버스에 뛰어들어 이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이번 SXSW에서 첫선을 보인 것이다. 폭스는 30년 전 ‘아메리칸 아이돌’을 통해 오늘날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오디션(경연대회)식 방송 장르를 개척했다. ‘아메리칸 아이돌’을 통해 폭스는 미국인들이 TV를 보면서 문자메시지로 우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을 창안해 낸 바 있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문자 수익을 올리면서도 시청자의 참여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시청률도 끌어올리는 1석 3조의 이득을 올린 것이다. ●“NFT·블록체인·메타버스 분야 개척” 폭스는 이번 ‘돌리버스’ 프로젝트에 대해 “디지털 자산이 무엇이고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지 교육한다는 목적이 있다. 스트리밍 전쟁에 뛰어들지 않고 NFT 프로젝트로 미래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BCL의 스콧 그린버그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SXSW에서 NFT 갤러리와 독점 음반, 영화, 리더십 세션 등을 소개했다. 올해는 참석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것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더밀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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