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와 명탐정’이 뜬다
▲인상착의:껑충한 키에 유난히 가는 손가락,날카로운 매부리코.▲주소:런던 베이커가(街) 221b번지.
누구의 신상명세일까.추리소설 마니아라면 단박에 꿰찰이름,명탐정 셜록 홈스다.영국의 아서 코넌 도일이 1892년 소설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가공인물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터.
그런 그가 오늘 새삼 한국 문화판을 주름잡고 있다.국내문화계 전반에 급부상한 ‘추리’코드 덕분이다.
#‘추리’코드의 급부상=올 봄 문화계의 최고 인기 아이템은 추리.그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쪽은 뭣보다 출판가이다.셜록 홈스의 부활에 불을 지핀 건 메이저 출판사들.황금가지에서 2월 초 ‘셜록 홈스 전집’을 펴내자 질세라 곧북하우스에서도 ‘셜록 홈스 걸작선’이란 제목의 1권짜리 선집을 냈다.지난 5일 초쇄로 3000부를 낸 황금가지는 그새 5000부를 더 찍었다.
영국 혼자 잘난 체하는 걸 프랑스가 가만둘 리 없다.‘괴도 뤼팽’이 맞선다.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는 이미4개 출판사에서 달려들었다.까치가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과 ‘뤼팽 대 홈스의 대결’1,2권을 내고 나머지 17권을 차례로 출간한다.지난 19일 ‘아르센 뤼팽 전집’ 1권을 시작으로 황금가지도 앞으로 총 20권까지 내놓는다.
추리물 전문 출판사인 태동과 샘터에서도 선집 형태의 출간을 기획했다.
영화 쪽도 엇비슷한 흐름이 읽힌다.고전추리의 정공법은아니지만 현대적 입맛에 맞게 미스터리물로 변주된 작품들이 부쩍 눈에 띈다.괴도와 명탐정을 오간 프랑스의 실존인물 비독을 내세운 추리극 ‘비독’이 지난해 말 선보인 뒤 미스터리극 ‘웨이트 오브 워터’(29일 개봉),‘고스포드 파크’(4월12일 개봉) 등이 줄을 잇는다.특히 영국의 시골 장원을 무대로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 로버트 알트만감독의 ‘고스포드 파크’는 추리소설 뺨치게 난이도 높은 지능게임이 펼쳐지는 정통 추리영화다.
#지금,왜 추리인가=고전적 문화코드인 추리가 새삼 힘을얻는 배경은 뭘까.“불안정하고 극도로 가변적인 사회에서 명확한 논리를 기대하는 현대인들의 심리가 큰 배경”이라는 해설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문화 사조의 순환으로 보기도 한다.나우누리 추리문학동호회 시삽 윤영천(27)씨 같은 이는 “한동안 문화계를 휩쓸던 판타지·무협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떠오른 새로운대안”이라고 해석한다.포스트 모더니즘의 위력에 눌려 맥못추던 고전이 최근 출판계에서 속속 재출간되는 분위기와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란다.
눈여겨볼 재미난 현상이 또 하나 있다.추리에 탐닉하는수요자는 게임세대와 30∼40대 중·장년층으로 극명히 갈린다는 점.‘셜록 홈스 걸작선’을 기획한 북하우스의 이승희씨는 “10∼20대는 컴퓨터 게임의 연장선상에서,기성세대는 고전에 대한 향수에서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말한다.
#쉽게 삭지 않을 열풍…셜로키언(Sherlockian)을 아시나요?=‘셜로키언’은 셜록 홈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인터넷을 무대로 이들의 움직임이 전에 없이 활발해졌다.해외 추리작가들의 정보를 확보해 출판사에 아이템을 ‘무상’제공하는가 하면,기획단계에서부터 선주문을 하기도 한다.다음은 셜로키언들의 주요 활동처.홈스에 관한 정보를 두루담고 있는 ‘www.sherlokian.net’,애드거 앨런 포,애거사 크리스티,엘러리 퀸 등 미스터리 거장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www.mysterynet.com’,홈스의 모든 것을 한글로 알려주는 국내 사이트 ‘www.bakerstreet221b.com.ne.kr’ 등이다.
추리열풍은 쉽게 가라앉진 않을 듯하다.고전추리 붐에 힘입어 현대 추리소설 ‘뒤마클럽’(시공사),‘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열린책들) 등도 최근 출간돼 호응을 얻고 있다.황금가지 등 메이저 출판사들 역시 추리고전들을 꾸준히 발굴,물밑에서 저작권 협의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황수정기자 s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