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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포토] 남자는 치마 한복, 여자는 바지 한복

    [서울포토] 남자는 치마 한복, 여자는 바지 한복

    1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퀴어활동가들이 자신의 성별을 떠나 원하는 성별의 한복을 입고 한복 크로스드레싱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만 한복으로 인정한다는 문화재청의 고궁 한복 무료입장 기준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수행, 복 그릇 키우는 인내… 108번뇌를 108긍정으로… 나부터 온전히 사랑하세요

    수행, 복 그릇 키우는 인내… 108번뇌를 108긍정으로… 나부터 온전히 사랑하세요

    “수행이란 내 안의 삿된 것을 긍정으로 돌려 복 그릇을 키우는 인내의 작업입니다.” 최근 출간한 책 ‘나를 바꾸는 100일’(휴)을 들고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를 만난 마가 스님. 스님은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남으로부터 사랑받는다”며 “우선 나부터 온전히 사랑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봉사수행 등 10가지 수행법 제시 책 ‘나를 바꾸는 100일’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100일 기도 수행법을 정리한 수행서다. 스님은 곰이 100일간 쑥과 마늘을 먹으며 인내해 사람이 됐다는 단군신화를 들어 ‘100일’이란 숫자에 각별한 의미를 붙였다. “누구나 100일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에 그치곤 합니다.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를 해야 소원을 이룰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먼저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인삼도 체질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마가 스님은 말했다. 그래서 수행법도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책에서도 탐욕을 다스리는 명상법인 부정관(不淨觀)을 비롯해 분노를 다스리는 자비관(慈悲觀), 호흡수를 세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식관(數息觀), 염불수행, 봉사수행 등 10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기도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한 뒤 각자 체질이나 성격, 환경에 맞는 기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가족을 버려둔 채 딴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극도로 미워하며 방황의 사춘기를 보냈다는 마가 스님. 그는 오대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한 끝에 스님들에게 발견돼 살아남았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 머물 무렵 청화 큰스님으로부터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는 말을 듣고 대오각성해 해원의 경지에 들었고 이후 남에게 자비심을 전파하자는 원을 세워 자비명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기도 목표 정한 뒤 방법 찾아야” “내가 뱉는 말 한마디, 품는 생각 한 토막이 나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세심히 살펴 매일 복의 씨앗을 심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자신을 업신여기고 구박하고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스님은 그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누를 게 아니라 마음속 응어리를 끄집어내 자비의 마음으로 다독거리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정말 잘했어’, ‘애썼다’고 말하며 나를 꼬옥 껴안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긍정할 때 어마어마한 자존감이 회복된다고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집안 살림을 하는 각박한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100일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물질 만능이 팽배해 일등만 살아남는 각박한 사회가 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붕괴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108번뇌’를 ‘108긍정’으로 바꾸면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단다. “지금 이 순간의 ‘나’로 살아가는 것과 ‘자비로워지는 것’이 바로 허물어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지름길입니다.” ●“내 스스로 나의 멘토 되어 사세요” “초발심자경문에는 ‘난행을 능행하면 존중여불’이라 했습니다.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면 부처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지요.”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나 외엔 관심을 갖지 않는 게 큰 병폐라는 스님은 올바른 수행을 통해 자존감과 고마운 마음을 새기고 나누게 된다면 공동체 의식이 회복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자각하고 베풀 때 복이 찾아듭니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지요.” 마가 스님은 지금 이 순간 주인공으로 살 것인지, 삼류 엑스트라로 살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며 한 번밖에 없는 제 삶의 주인공이 되라고 말했다. 그는 “정신적 안내자인 멘토를 찾기 힘든 세상에서 내 스스로가 나의 멘토가 되어 살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진짜루 궁금해서 그래… 행복하냐…?”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오는 대사다. 밤무대와 카바레를 전전하는 4인조 밴드의 삶을 보여주는 감독의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우울하다. 한때 그들도 '음악'을 통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낙원(樂園)'을 꿈꾸었을 것이다. 종로구 낙원동에서.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284-6번지 낙원악기상가이지만 그냥 ‘탑골공원’ 옆쯤으로 퉁쳐도 얼추 누구든 찾아가기 쉬운 자리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월남참전전우회’ 새겨진 붉은 색 등산조끼차림의 군복입은 늙은 섹스폰 연주자가 힘겹게 내뱉는 ‘사랑밖에 난 몰라’를 들을 수도 있다. 혹은 폭염 속에서도 검은 가죽 재킷으로 온 몸을 감싼, 열정의 홍대 인디 록 밴드들의 달뜬 미소도 만날 수 있다. 세대(世代)는 음악을 통해, 악기를 통해 낙원동에서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악기상점, 낙원악기상가이다. ●조선후기 여흥문화가 있던 자리 그대로 애당초 이곳에는 '악사'(樂士)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낙원동, 인사동, 익선동은 조선시대부터 온갖 기방(妓房)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니 거문고나 가야금 둘러멘 가객(歌客)들이 늘상 북적대던 곳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법궁(法宮·임금이 거주하는 곳)이었던 창덕궁, 운현궁 주변에 머물던 한량이나 다름없던 고관대작(高官大爵)들과 그들의 망나니같은 막내 아들 한 명 쯤이, 분명 피맛골 배나무집 뒷방 사는 기생 치맛폭에서 아비 얼굴에 똥칠했다는 일화쯤이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동네였다. 또한 조선 팔도 온갖 뇌물과 진상품을 들고 궁궐 앞 서성이던, 현감(縣監)자리 하나 추렴하려는, 마음 삐뚜름한 지방 부호(富戶)들의 대기 장소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밤은 이곳에서 열리고 닫혔다. 사실 낙원상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실제 낙원상가는 1968년에 올려졌고, 이보다 앞서 바로 옆동네 세운전자상가가 1967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이 세운상가에는 당시의 부자들이나 고위공무원들이 거주하였고, 낙원상가는 기존의 낙원동에 있던 낙원시장의 대체부지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세운상가와는 달리 낙원상가는 실용적 목적에 기반을 둔 건축물이어서 격벽(隔璧)이 많지 않아 쇼핑객들의 동선이 사통팔달(四通八達) 다 뚫려 편한 느낌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악기점들이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낙원상가는 양품점, 즉 의류상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원래 1960년대부터 피맛골, 종로2가 주변에 당시 음악다방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8군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악기 수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에 종묘 주변과 종로2가, 3가에 풍금이나 피아노, 기타 등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한국대중음악의 1세대이자, 기타문화를 불러일으킨 ‘트윈폴리오’가 데뷔한 ‘세시봉’도 원래 이곳 종로2가에도 있다가 인근 서린동으로 옮겨 간 당대 최고의 음악다방이었다. 그러다 1979년 서울시의 탑골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종로 2가와 종묘주변에 몰려있던 악기점들이 대거 낙원상가 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진정한 낙원악기상가의 시작이다. ●낙원악기상가의 전성기와 암흑기를 거쳐 문화거리로 1982년 1월 6일 자정,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낙원악기상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아시안게임, 올림픽과 더불어 밤문화시설(?)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전국 각지에 라이브 밴드 수요가 빗발치게 된다. 바로 이 인력 및 악기 수요를 다 맞추어내는 공간이 낙원악기상가였다. 낙원상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1980년대 후반에는 건반 연주자가, 드럼 연주법을 점포 주인에게 반나절 배워 봉고 타고 동두천으로 성남으로 다녔다고 한다. 한 달 후 뭉칫돈 들고 헐레벌레 뛰어와 맘에 넣어둔 야마하(YAMAHA) 건반을 사들고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낙원상가는 악기판매점이었고, 단기속성 음악학원이었고, 유흥업소와 연주자들을 이어주는 직업소개소였으며, 급전 돌리는 전당포였다. 꿈만 같던 시절이었다. 1997년 IMF의 직격탄은 낙원상가가 다 맞았다. 말 그대로 신기하게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육이오 피난 시절에도 사람은 보였다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이 끊긴 듯 하였다. 수천 만원짜리 그랜드 피아노가 고작 수 백만원에 몸을 낮추어 팔아도 이를 싣고 갈 트럭을 못 구할 정도였으니 눈물 한 번 단단히 흘린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2000년대 들어서 교회 CCM 찬양 밴드의 지속적인 등장, 각종 대학교의 실용음악학과의 개설, 그리고 클럽문화로 인한 인디밴드의 결성 등으로 낙원악기상가는 비록 예전만 못할지라도 다시금 부활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창덕궁 앞 재생계획을 발표하여 2018년까지 200억원 사업비를 들여 낙원상가주변을 궁중문화와 대중음악 중심인 근현대 문화지대로 재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상가 옥상에 공원과 상설무대를 만들어 명실상부한 한국 음악의 중심지로 낙원악기상가의 모습을 바꿀 예정이다. <낙원악기상가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일반인에게는 ‘꼭’이라는 부사는 빼도 된다.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방문지가 될 것은 분명하다. 2. 교통편은 어때? -탑골공원 뒤에 있다.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가 가장 가깝다. 3. 인근 편의시설, 주차장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 -왠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없던 종교라도 하나 믿고 들어가는 것이 낫다. 출, 퇴근 시간이나 주말의 경우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바란다. 4. 주변에 맛집은 있나? -낙원상가 주변는 예로부터 낙원떡집 거리를 비롯한 진정한 먹거리의 천국이다. 특히 종로 5가쪽으로 펼쳐지는 포장마차촌은 종로 뒷골목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5. 직원이나 주변 상인들은 친절한가? - 친절하다. 다른 곳보다는 악기나 음악을 다루는 분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상냥한 편이다. 참고로, 이곳 매장 직원들 앞에서 연주 실력 뽐내지는 말기를. 유명 그룹 프로 연주자들도 한 수 가르침을 받고 가는 고수(高手)들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6. 운영시간은? - 평일, 토요일 9시~20시/ 토요일 일부매장 오픈/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쉬는 가게가 많음. 7. 이 곳에서 가장 감탄하는 점은 어떤 것? -악기의 가격과 종류들. 전 세계 희귀한 악기들도 많이 볼 수 있다. 8. 홈페이지 주소와 도움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전화 (02)743-6131/ 팩스(02)743-7070/ 홈페이지 www.enakwon.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낙원떡집 거리. 운현궁, 종묘, 인사동 거리 외 종로 구석구석.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원악기상가는 관광지가 아닌 건강한 생계의 공간이다. 단지, 이곳을 여행지로만 방문한다면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악기산업의 메카라는 사실 하나는 기억하고 방문하자.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연휴 마지막날, 상행선 고속도 곳곳 정체…부산→서울 5시간 8분

    연휴 마지막날, 상행선 고속도 곳곳 정체…부산→서울 5시간 8분

    개천절 연휴 마지막날인 3일 나들이 길에 올랐다 귀경하는 차들로 상행선 고속도로 곳곳에서 정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오후 3시 현재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은 신탄진휴게소→신탄진나들목, 입장휴게소→안성나들목 등 9.8㎞ 구간에서 차들이 서행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울 방향은 행담도휴게소→서평택나들목, 송악나들목→행담도휴게소 등 16.7㎞ 구간에서 차들이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영동고속도로 인천 방향은 면온나들목→둔내나들목, 여주휴게소→이천나들목, 여주나들목→여주분기점 구간을 포함해 총 33.8㎞ 구간에서 차들이 거북이 운행 중이다. 오후 4시 기준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향할 때 걸리는 시간은 목포 3시간 57분, 부산 5시간 8분, 광주 3시간 48분, 울산 5시간 9분, 대전 2시간 28분, 강릉 3시간 38분이다. 도로공사는 현재까지 수도권으로 들어온 차량은 19만대로, 이날 27만대가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했다. 수도권에서 나간 차량은 21만대로, 15만대가 더 들어올 예정이다. 이날 하루 고속도로 이용 차량은 총 431만대로 예상됐다. 도로공사 관계자는 “오후 5∼6시에 정체가 절정을 이루다 서서히 풀리기 시작해 자정쯤 모든 정체가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휴 기간 서울에 머물렀거나 전날 상경한 시민들은 명동과 인사동, 강남 등에서 여가 활동을 즐겨 시내 곳곳이 북적거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0년전 도난당한 보물 ‘시왕도’ 일부 佛서 귀환

    40년전 도난당한 보물 ‘시왕도’ 일부 佛서 귀환

    상태 양호… 보물 일부 환수 처음 경남 고성 옥천사 ‘시왕도’(十王圖)의 일부가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40년 만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옥천사 시왕도 중 한 폭인 ‘제2초강대왕도’(第二初江大王圖)를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환수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옥천사 명부전에 봉안된 시왕도는 10폭으로 구성된 불화다. 1744년 화승인 효안(曉岸)의 주도로 조성됐다. 그러나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를 누군가 훔쳐가 8폭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명부전에 있는 시왕도 8폭은 전각 내의 또 다른 그림인 ‘지장보살도’와 함께 2010년 보물 제1693호로 지정됐다. 이번에 고국으로 돌아온 ‘제2초강대왕도’는 1976년 도난당한 뒤 한 프랑스인이 1981년 인사동 고미술상으로부터 구입해 보관해 왔다. 그는 지난 5월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에 작품을 판매하겠다는 의사를 비쳤고, 이에 기메박물관이 문화재청에 관련 사실을 알렸다. 조계종 문화재팀 관계자는 “환수한 불화는 프랑스 소장자가 구매했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을 만큼 상태가 양호하다”면서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면밀하게 점검한 뒤 안정화 기간을 거쳐 옥천사로 옮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의 일부가 환수된 것은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궐담 넘은 궁중음식

    28일부터 시행되는 부정청탁방지법(일명 김영란법)으로 고사 위기에 몰린 한정식을 살리고자 서울 종로구가 ‘궁중과 사대부가의 전통음식축제-궁중음식 궐담을 넘다’를 연다. 축제는 30일~10월 1일 국립민속박물관 야외마당에서 열린다. 종로구 인사동, 내자동 등에 몰려 있는 한정식집은 음식재료 값 때문에 한 끼 식사 3만원이란 김영란법 기준을 지키기 쉽지 않다. 60년 전통의 인사동 한정식집 유정이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전향하는 것처럼 한정식의 전통과 맛을 되살리기보다 싼 값의 국적불명 음식을 판매할 가능성도 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27일 “이번 축제에서는 한국음식의 정수인 궁중음식을 직접 맛볼 수 있다”며 “한옥, 한복, 국악 등 전통문화 계승에 앞장서는 종로구는 한식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애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축제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3대 기능보유자인 한복려씨가 직접 궁중음식을 재현한다. 사대부가의 상차림, 궁중의 김치 12가지, 자연에서 얻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궁중병과, 전통 돌·회갑 상차림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예약하면 가족 돌사진도 전통 돌상 앞에서 촬영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전통음식 구절판을 직접 젓가락으로 싸서 먹어보는 ‘나도 장금이, 구절판 경연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 육포와 곶감 오리기, 앙금 꽃 만들기 등의 체험행사도 준비한다. 인기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했던 홍시 죽순채와 궁중 떡볶이를 직접 만들고 맛볼 기회도 있다. 궁궐이 집중된 종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통음식축제는 궁중음식의 맥을 잇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소중한 시간이 될 전망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종로구, 김영란법 고사위기 한정식 궁중음식축제로 살린다

    종로구, 김영란법 고사위기 한정식 궁중음식축제로 살린다

    28일부터 시행되는 부정청탁방지법(일명 김영란법)으로 고사 위기에 몰린 한정식을 살리고자 서울 종로구가 ‘궁중과 사대부가의 전통음식축제-궁중음식 궐담을 넘다’를 연다. 축제는 30~1일 국립민속박물관 야외마당에서 열린다. 종로구 인사동, 내자동 등에 몰려 있는 한정식집은 음식재료 값 때문에 한끼 식사 3만원이란 김영란법 기준을 지키기 쉽지 않다. 60년 전통의 인사동 한정식집 유정이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전향하는 것처럼 한정식의 전통과 맛을 되살리기보다 싼 값의 국적불명 음식을 판매할 가능성도 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27일 “이번 축제에서는 한국음식의 정수인 궁중음식을 직접 맛볼 수 있다”며 “한옥, 한복, 국악 등 전통문화 계승에 앞장서는 종로구는 한식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애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축제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3대 기능보유자인 한복려씨가 직접 궁중음식을 재현한다. 사대부가의 상차림, 궁중의 김치 12가지, 자연에서 얻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궁중병과, 전통 돌·회갑 상차림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예약하면 가족 돌사진도 전통 돌상 앞에서 촬영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전통음식 구절판을 직접 젓가락으로 싸서 먹어보는 ‘나도 장금이, 구절판 경연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 육포와 곶감오리기, 앙금 꽃 만들기 등의 체험행사도 준비한다. 인기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했던 홍시 죽순채와 궁중 떡볶이를 직접 만들고 맛볼 기회도 있다. 궁궐이 집중된 종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통음식축제는 궁중음식의 맥을 잇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소중한 시간이 될 전망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

    ●김덕기 개인전 ‘가족과 행복’을 주제로 일상에서 발견되는 기쁨과 사랑을 동화적 상상력으로 표현해 온 작가의 근작전. 화려한 원색 물감의 조합으로 다양한 풍경 속에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 (02)732-3558. ●방인희 판화전 ‘타인의 기억들이 생성하는 이미지·옷’이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더한 판화작품을 선보인다. 스트라이프 셔츠, 드레스 등 다양한 옷을 체취와 시간성을 지닌 특별한 사물로 접근한다. 27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 (02)733-1045.
  • [형형색색 축제로 물드는 서울의 가을] 내일부터 종로는…‘한복자락 날리는 날’

    [형형색색 축제로 물드는 서울의 가을] 내일부터 종로는…‘한복자락 날리는 날’

    오는 23일부터 사흘간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인사동, 무계원, 북촌 등 종로구 일대가 한복의 고운 빛깔로 물든다. 서울 종로구는 23일 오후 5시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한복과 줄타기 등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2016 종로 한복축제- 한복자락 날리는 날’을 연다고 밝혔다. 600년이 넘는 수도 서울의 역사가 살아 있는 종로에서는 갓을 곱게 쓴 흑인 청년이나 색동 소매자락을 휘날리며 사진을 찍는 백인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종로 한복축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이는 ‘한복 관광’의 불씨를 지필 전망이다. 한복축제는 개막식에 이어 풍문여고 학생 300명이 참여하는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재현과 한복 뽐내기 대회, 한복퍼레이드와 패션쇼 등이 이어진다. 이번 축제의 정점은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 김종심, 박종숙씨와 함께 1000여명의 시민들이 국내 최대 규모로 펼치는 ‘신명대(大)강강술래’가 찍는다. 강강술래 이수자뿐만 아니라 진도군립예술단, 사전연습을 한 시민들, 연세·서강·이화·성균관어학당에 다니는 외국학생 등 1000여명이 참여해 은은한 불빛 아래 원을 그리며 하나 되는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광화문광장에서는 한복을 빌려 입을 수 있는 체험행사가 계속 열려 누구나 손쉽게 한복을 입고 세종대로를 걷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축제기간 동안 한복을 입으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로구의 21개 박물관을 무료 입장할 수 있다. 특히 축제 이튿날인 24일에는 경복궁 야간개장을 시작해 한복을 입으면 관람인원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달밤에 궁궐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한복사랑 실천음식점 101곳에서도 한복 착용 시 음식값 10%를 깎아준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서울 종로구, 한복축제에서 한복의 참멋 느껴봐요

    서울 종로구, 한복축제에서 한복의 참멋 느껴봐요

    오는 23일부터 사흘간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인사동, 무계원, 북촌 등 종로구 일대가 한복의 고운 빛깔로 물든다. 서울 종로구는 23일 오후 5시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한복과 줄타기 등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2016 종로 한복축제-한복자락 날리는 날’을 연다고 밝혔다. 600년이 넘는 수도 서울의 역사가 살아있는 종로에서는 갓을 곱게 쓴 흑인 청년이나 색동 소매자락을 휘날리며 사진을 찍는 백인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종로 한복축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이는 ‘한복 관광’의 불씨를 지필 전망이다. 한복축제는 개막식에 이어 풍문여고 학생 300명이 참여하는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재현과 한복 뽐내기 대회, 한복퍼레이드와 패션쇼 등이 이어진다. 이번 축제의 정점은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 김종심, 박종숙씨와 함께 1000여명의 시민들이 국내 최대규모로 펼치는 ‘신명大강강술래’가 찍는다. 강강술래 이수자뿐만 아니라 진도군립예술단, 사전연습을 한 시민들, 연세·서강·이화·성균관어학당에 다니는 외국학생 등 1000여명의 참여해 은은한 불빛 아래 원을 그리며 하나 되는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광화문광장에는 한복을 빌려 입을 수 있는 체험행사가 계속 열려 누구나 손쉽게 한복을 입고 세종대로를 걷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축제기간 동안 한복을 입으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로구의 21개 박물관 무료입장한다. 특히 축제 이튿날인 24일에는 경복궁 야간개장을 시작해 한복을 입으면 관람인원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달밤에 궁궐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한복사랑 실천음식점 101곳에서도 한복 착용시 음식값 10%를 깎아준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올해 처음으로 여는 종로 한복 축제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류문화관광축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테헤란 여행기 2] 그랜드 바자르, 골레스탄 팰리스, 그리고 밀라드 타워

    [테헤란 여행기 2] 그랜드 바자르, 골레스탄 팰리스, 그리고 밀라드 타워

     9월 11일. 지금 돌아보니 9·11 테러 기념일에 난 이란 테헤란 관광을 했구나 싶다.  전날 조금씩 써뒀던 온라인 속보 둘 올리고 오늘은 허재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과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오전까지 별 얘기가 없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다 무작정 나서기로 했다. 오늘 안되면 후발대로 오는 기자에게 떠넘기면 되니, 그에게 그럴 수도 있다는 카톡 남기고 아침 먹은 뒤 오전 8시 호텔을 나섰다. 테헤란 와서 업무 외의 일로 밖에 나서는 게 처음이다. 둘이 택시 뒷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마주 보며 낄낄댔다. 역시 나오니 공기가 다르다고.  뮤지엄 가려 했더니 호텔의 택시 서비스 아저씨는 오후에나 문 연다며 그랜드 바자르를 추천한다. 40여분 달려 도착했더니 테헤란 남쪽인 것 같다. 이 아침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미로같은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는데 없는 게 없는 곳같기는 한데 물건들이 너무 조악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시계, 중동 부호들의 상징 같은 것이니까. 입구는 하나인데 들어가면 수많은 가게들이 모여 있다. 심지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곳까지 있다. 중동을 무대로 한 첩보영화를 촬영할 만한 훌륭한 보석 가게들도 즐비했다.  1시간 남짓 바자르를 돌았는데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를 알 수가 없다. 어디서 좀 쉴까 하는데 옆에 꼬마기관차 같은 버스가 지나간다. 가만 보니 그냥 타고 내린다. 기사에게 물었다. 이즈잇 프리? 아니란다. 노머니란다. 이란에서 이런 일이 많았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올림픽 호텔인데 호텔 직원들이나 택시 기사들 모두 ´올람픽´이란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손님이 올림픽이라고 말하면 얼른 아 올람픽 호텔이구나 알아먹겠는데 페르시아의 맹주답게 이 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전혀 다른 두 단어로 인식한다. 수십번 올림픽이라고 외치면 그제야 아 올람픽! 이런 식이다. 이란 가서 ´프리´라고 말하면 안된다. 노머니라고 말하며 살짝 말꼬리를 올려줘야 한다!!!  여튼 탔다. 지하철 역이 근처인지 사람들이 나와 우리 버스가 가는 방향의 반대로 걸어온다. 아까 우리가 봤던 인파는 일도 아니다. 그것의 세 배, 네 배는 족히 되는 것 같다. 거리에 가만 앉아있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실업률이 장난이 아닌 것 같다.  여튼 이 버스는 어떻게 공짜로 운행될까? 외국인 관광객이 아직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시장 보러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돌볼 정도로 정부가 여유있는 편이 아니어서다. 이런 형편에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 보면 호메이니옹의 인민 사랑은 정말 간단치 않은 것 같다.  20여분쯤 탔을까. 이따금 멈춰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던 버스가 조금은 한적한, 관공서 타운 같은 곳으로 들어선다. 멀리 분수가 보이고 약간 격조 있어 보이는 공원 같은 곳이 있어 내렸다. 우리에게 집요하게 말을 걸던 꼬마들이 우리보고 돈을 달라고 허튼 농을 해댄다.  골레스탄 팰리스였다. 며칠 전 인터넷 검색해 이란 유명 관광지 30선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 상당히 높은 순위로 소개됐던 곳이다. 티켓 창구의 안내문을 보니 관람할 수 있는 방으로 섹션을 나눠 각기 다른 가격을 붙였는데 종일 모든 방을 돌아볼 수 있는 티켓이 80만리라였다. 우리는 메인홀을 비롯해 4개의 홀을 볼 수 있는 15만리라 짜리 티켓과 도자기 컬렉션을 구경할 수 있는 15만리라 짜리 티켓 두 종류을 끊었다.  메인홀은 유리로 상하좌우를 모두 꾸몄는데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궁전과 비슷한데 조금 더 정교한 맛이 있었다. 동서양 여러 나라의 국왕이나 사절로부터 선물받은 도자기 컬렉션도 있었는데 한국 아주머니들이 보면 훌륭한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1시간 30분쯤 제대로 봤다. 다른 건물들을 돌아보는데 메인홀을 비롯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보수되지 않아 유치하거나 조악한 곳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한 건물 지하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밖에도 몇 개의 의자를 갖다놓았고, 무엇보다 지하로 들어가니 시원하고 제법 고급스럽고 품위있어 커피 한잔 마시자고 했는데 주인이 준비가 안돼 있다며 거의 화를 내듯이 쫓아낸다. 속으로 욕을 퍼부어줬다.  우연히 들어간 곳치곤 굉장히 만족스러운 볼거리였다고 서로 흐뭇해 했다. 조금 걷는데 지하철역이 눈에 띄었다. 동료는 뭐하러 가느냐 했는데 내가 여기 또 언제 와보겠느냐고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지하철역 구내에서 걸어 나오는 인파가 너무 대단해 좀처럼 진입할 수가 없을 정도다. 서울의 동역사(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는 일도 아니다. 엄청 많은 이들이 타고와 바자르에 간다.  가장 싼 티켓을 왕복으로 두 장 달라고 했다. 역무원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꼭 파리 지하철역이다. 모든 게 비슷했다. 거의 파리 10구역의 리퓌블리크 역을 옮겨온 것 같다. 세 정거장을 가기로 했는데 가면서 보니 환승역이다. 테헤란 시내 지하철 노선은 다섯 개인 것으로 지도에 나와 있었는데 환승역에서 내리면 인파 때문에 힘들 것 같아 네 번째 역에서 내렸다. 훨씬 한적했다. 정말 뜻하지 않게 반미운동의 근거지로 유명한 대학 근처였다. 지하철에서 내리는 승객도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 학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여대생 둘과 수위가 안된다고 했다. 내가 여자대학이냐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날렸고, 그녀들은 웃으며 그런 건 아니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해칠 것으로 우려되기 때문이란다. 사진만 찍게 5분만 입장시켜 달라고 했는데 영 말이 안 통해 그만뒀다.  이곳 주변을 돌아다니니 자유의 여신상 얼굴이 해골 바가지로 돼 있는 것도 있었고 주먹 그림과 함께 ´DOWN WITH USA´ 구호가 선명한 포스터도 눈에 띈다. 외벽에 반미 항쟁 때의 주역들 얼굴 그림이 들어가 있는 건물도 시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상당히 인상적이다.  허기가 밀려와 식당을 찾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한곳에 모여 있지 우리처럼 곳곳에 산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모든 타운이 그런 식이다. 예를 들어 청계천처럼 공구상, 인사동처럼 골동품상, 낙원동처럼 먹거리 타운 식이다. 케밥집도 한둘 눈에 띄었지만 위생에 문제가 있는 곳으로 보여 들어가지 않았다. 호텔 레스토랑은 안 그래도 질리게 먹는데 이날만은 피하자고 동료는 말했다.  그렇게 들어간 피자집에서 피자(1만 5000토만, 15만리라)와 햄버거(1만 토만, 10만리라), 콜라 둘(3000토만, 3만리라)을 시켰다. 30만리라니 9달러쯤 된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 무척 덥다.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다, 아무래도 장고 끝에 악수 둔 것 같다고 걱정할 때쯤 음식이 나왔다.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먹을 만했다. 특히 햄버거는 양도 양이지만 빵맛이나 내용물이 상당히 괜찮았다. 피자도 흔하게 도우를 쓰지 않고 와플 바닥같은 빵에다 버섯 등 보잘것 없는 재료만 토핑했는데도 맛이 좋았다.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느낌이다. 한끼 식사로 훌륭했다.  식당에서 확인해보니 허 감독 인터뷰가 확정돼 4시까지 대표팀이 묵고 있는 랄레 호텔로 가야 했다. 뭐 다른 소일거리를 찾았다가 시간도 애매해지고 무엇보다 약속에 늦어 결례를 할까봐 랄레 파크를 먼저 가서 둘러보기로 했다. 택시를 집어 타고 가격부터 흥정했다. 나중에 실랑이를 벌일까 싶어서였는데 처음에 30만리라 부르던 기사가 일행이 20만을 외치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택시에서 내려 입구를 못 찾아 약간 헤매다 랄레 파크에 들어섰다. 박한 단장이 일본에 귀화한 미국인 선수 데몬 브라운과 함께 거닐었다는 그 공원이다. 여기는 공원보다 종합 스포츠타운 같은 곳이었다. 근처 체육관에서 세계군인배구대회가 열려 길 한 가운데 배구 네트를 달고 훈련하는 이들이 있었고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돼 있고 탁구대도 놓여 있어 누구나 즐기고 있었다.   허 감독 인터뷰의 예정시간이 30분이어서 34분 진행하고 마치려 했는데 본인이 작심한 듯 더 애기를 늘어놓아 55분 가까이 진행했다. 호텔에서 남은 것 정리하고 보니 5시, 아직 해 지려면 2시간 남짓 남아 밀라드 타워 올랐다가 시간이 애매할까 싶었다. 시내에서 시간을 더 보내기로 하고 길 건너 쇼핑센터 들러 이 나라의 음악이 담긴 CD를 사려 했으나 파는 가게를 찾지 못했다. 과일 좀 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지중해 과일의 탁월함이란 말할 것도 없으니.  어느 대로변 가게에서 포도를 고르니 둘이 한 번에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아 절반이면 얼마냐고 물었더니 자슥이 거의 화를 내듯이 그렇게는 안 판단다. 성질머리하고는 뭐 같다. 신선제품인 과일이 안 팔리면 지만 손해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게 지나니 과일 가게가 보기가 어려워 이 나라 청과상들은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영업하지 못하게 하는 신통한 재주가 있구나 생각했다.  어느 사거리까지 걸어가 젊은 녀석이 모는 택시가 보이길래 밀라드 타워 가자고 했더니 거의 쌍수를 든다. 머리를 록스타마냥 요란스럽게 꾸몄는데 길을 잘 모르는 듯 운전하면서 구글링을 해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여튼 택시비를 내고 나니 리라화가 동났다. 티켓 창구에서는 달러는 받지 않는다며 환전해 오라고 했는데 가보니 문 닫았다. 누군가 슈퍼 가면 환전해준다고 해 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노프라블럼이란다. 둘이 40달러인가를 모아 환전했는데 1200만리라가 훨씬 넘는 거액을 손에 쥐어준다.  밀라드 타워 입장권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이인 스카이돔까지가 20만리라이고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오픈 옵저베이션 데크가 10만리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수증을 챙겼는데 페르시아숫자로 표시돼 있어 정확하지 않다.  당연히 우리는 스카이돔을 끊었다. 동료는 그 전부터 이곳 사람들이 지나갈 때 요상한 냄새가 난다고 얘기했는데 난 이날 스카이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줄을 섰다가 처음으로 그 냄새를 맡았다. 한 애기 엄마에게서 나는 게 너무 분명해 뒷사람에게 양보하고 줄 뒤쪽으로 갔다. 다행히 그 아주머니가 먼저번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우린 뒤 엘리베이터로 편안하게 오픈 들렀다가 스카이돔까지 올라갔다.  오픈 옵저베이션 데크는 파리 시내 백화점 옥상 전망대와 너무 흡사하다. 사회주의 정권인가 싶을 만큼 테헤란 시내가 구획화된 게 눈에 띈다. 통제된 경제체제란 것을 웅변하고 있다. 이윽고 노을이 지고 있다. 스카이돔의 여자 안내원이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다가와 영어로 소개하는데 동료는 잘 못 알아듣겠다고 불평한다. 어느 여행객은 그 여인네들의 사진까지 블로그에 올렸던데 상당히 예쁜 얼굴들이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강인해보이는 구석이 있다. 난 그들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댈 용기가 없었다.  남자 안내원이 이 나라 말로 10여분 장황하게 설명한다. 내벽 위쪽에 장식된 페르시아 문화와 전통에 대한 설명인 것 같은데 우리야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신나게 소개를 마친 그는 다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고 했는데 우리는 야경을 보겠다며 이따 따로 내려가겠다고 해 남았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 보는데 눈으로 보는 만큼 활달한 조망이 담기는 것도 아니어서 이 짓을 하려고 1시간 가까이 기다렸나 싶었다.  여튼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단도 걸어 내려와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 나 혼자 호두 케이크를 사먹었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는데 양이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동료는 낮에 먹은 햄버거와 피자 때문에 저녁 생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쳐 레모네이드를 상당히 비싸게 마셨다. 30분 정도 얘기를 나누고 다시 고속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니 3층 정도부터 박람회를 내려오면서 구경하게 만들었다. 나름 돈을 잘 쓰도록 잘 디자인된 타워였다. 어린이 박람회 같은 행사였던 것 같은데 나름 이곳에서는 첨단 제품과 문화를 맛보는 행사였던 것 같고 바깥 마당 한켠에서는 유명 가수의 공연인 듯 500명 정도가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멀리 작은 불꽃 잔치가 펼쳐지는데 우리가 있는 지역은 그런대로 공기가 맑아 말간 밤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반면, 멀리 도심 상공에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매연과 남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이 합쳐진 결과로 보였다. 택시 흥정해 40만리라에 호텔 돌아와 곧바로 24시간 와이파이 구입하고(첫날 6000리라 불렀는데 우리는 달러와의 환산이 제대로 안돼 2달러를 건넸다. 이 사람들 계산이 흐린 척하며 현지 사정에 어두운 우리를 속이는 것 아닌가 싶었다.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6000리라를 만들어 구입했다) 씻고 잠자리에 들  려 했는데 홀딱 벗은 채 복층의 침대 올라 휴대전화에 와이파이 번호를 입력했더니 안된다. 다섯 번인가 하다 안돼 안되겠다고 포기하고 옷 다시 입고 로비 내려와 비즈니스센터 들러 아가씨에게 얘기했더니  너만 그런게 아냐  이런다. 그래서 왜 안되는데 라고 물었더니 어깨를 으쓱거리고 만다. 이란 여성들의 콧대 높음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같은 중동의 여느 여성들과 사회적 지위랄까 사회경제적 활동의 참여 폭은 비할 데 없이 이란 여성이 높다.  리셉션 가보라고 해 갔더니 일본인 심판이 너도 그러냐며 힐쭉거린다.  리셉션의 남정네는 미소가 묘한 친구다. 약간 게이의 향취를 풍기는 미소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데 영어 전달력이 남다르다. 그리고 표정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붉은 종이에-우리네는 이 색을 메모지로 잘 이용하지 않을텐데- 방 번호와 새 비번을 입력하고는 돌려준다. 메모지를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다시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른발 발톱 언저리에 물집이 잡힌다. 간만에 조금 걸었다는 흐뭇함이 설핏 잠기운과 함께 덮쳐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한가위 여흥 더하거나 여운 나누거나] 연휴 뒤에 인사동 7일간 전통 축제

    [한가위 여흥 더하거나 여운 나누거나] 연휴 뒤에 인사동 7일간 전통 축제

    “고미술품 상가, 표구점, 갤러리 등이 즐비한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전통문화거리에서 7일 축제기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한국의 멋을 마음껏 즐기길 바랍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21~29일 대한민국의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인사동 일대에서 ‘제29회 인사전통문화축제’를 연다고 13일 밝혔다. 1987년 ‘전통문화 마을축제’로 출발해 이제는 종로를 대표하는 장수축제로 자리잡았다. 이번 축제는 궁중의상 퍼레이드 및 한복패션쇼와 함께 펼쳐지는 전통문화축제와 전통명가전, 전통음식축제, 고미술 축제 및 표구시연회 등도 즐길 수 있다. 축제는 25일 오후 3시 궁중의상 퍼레이드와 한복패션쇼로 화려하게 막을 올린다. 퍼레이드는 북촌 정독도서관에서 시작해 인사동 남인사마당까지 이어지는 1150m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을 예정이다. 한복패션쇼는 왕과 왕비의 궁중의상, 양반가와 서민들의 의상, 기생한복 등 전통한복은 물론 웨딩한복, 파티한복, 어린이 퓨전한복 등을 한눈에 만날 수 있다.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인 국악스타 오정해는 건강과 행복을 축원하는 소리 한마당을 선사한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만화가들이 그렸다 서울역 일대 풍속화

    만화가들이 그렸다 서울역 일대 풍속화

    10여년 전부터 매달 마지막 토요일 한데 모여 오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과 풍경의 찰나를 포착해 크로키하는 20여명이 있다. 이름하여 ‘달토끼’라는 모임이다. 만화가에서부터 일러스트레이터, 화가, 음악인 등에 이르기까지 구성원도 다양하다. 달토끼와 함께하고 있는 이희재(64), 박재동, 김광성(62) 작가가 서울역 고가 일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제로 릴레이 전시를 연다. 단순한 풍경이 아닌 삶의 모습까지 담았다는 점에서 풍속화 전시다. 우리만화연대가 서울시와 함께 준비했다. ‘이희재 작가의 서울만화경’전(展)이 첫 순서다. 서울시청 1층 로비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간판스타’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악동이’ 등으로 유명한 이 작가는 사실주의 만화의 대가다. 그가 남대문시장, 명동성당, 서울역, 인사동 등을 배경으로 다양한 삶의 풍경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이야기를 보듬은 40여점이 전시된다. 10월에는 서울역사에서 김광성 작가의 전시가, 11월에는 충정로역사에서 박재동 작가의 전시가 바통을 잇는다. 시대를 수놓은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은 근대 풍속화에 매진해 온 김 작가는 서울역, 염천교, 남대문 등을 배경으로 옛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재현한다. 지난 4월 김 작가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울을 담은 그림모음집 ‘오래 전 서울’을 발간하기도 했다. 국내 시사만화의 대가로 이름 높은 박 작가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한 미래를 그릴 예정이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현대오일뱅크, 환경사진 공모전 시상

    현대오일뱅크, 환경사진 공모전 시상

    현대오일뱅크 1%나눔재단의 환경사진 공모전 시상식이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회사는 지난 4월부터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와 공동으로 환경을 주제로 ‘2016 포커스 온 유어 월드(Focus on Your World)’ 환경사진 공모전은 진행했다. 세계 14개 나라에서 총 3575점의 사진 작품이 접수됐다. 인도 출신 수잔 사커(Sujan Sarker)가 ‘피싱 넷’으로 대상을 받는다. 오묘한 색상으로 그물 도구를 조형한 작품으로 자연과 순화하며 공존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대 사진학과 이용환 교수 등 전문가들이 심사해 43점의 수상작을 최종 선정했다. 환경사진공모전 수상작은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온라인 갤러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는 10월 제주공항, 김포공항, 김해공항에서 진행될 미디어 전시를 시작으로 인사동 쌈지길 계단갤러리(11월 3일~30일), 용인휴게소 우림갤러리(12월 1일~27일) 및 대학로 이앙갤러리(12월 28일~1월 3일)에서 전시된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품격 있는 종로씨

    품격 있는 종로씨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포장마차촌인 ‘화신 맛의 거리’가 대화와 소통으로 정비가 완료됐다. 종로구는 24일 인사동 197 일대 350여평 도로 부지에서 영업했던 45명의 노점 운영자가 지난 12, 13일 자진 철거를 끝냈다고 밝혔다. 종로구는 앞으로 기존 부지 가운데 110여평을 노점 거리로 재정비해 옛 문화가 남은 인사동의 품격에 걸맞은 현대화된 노점 명물 거리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나머지 240여평은 도로로 만들어 최근 면세점이 들어서면서 중국 관광객이 더욱 늘어난 인사동 일대 보행이 편리해질 전망이다. 동태탕, 해물탕, 김떡순(김밥·떡볶이·순대) 등을 파는 전형적인 포장마차촌인 ‘화신 맛의 거리’는 2009년 종로구 대로변에 난립한 600여개 노점들을 정비하면서 조성한 특화거리다. ‘화신 맛의 거리’를 만들면서 종로구와 노점상들은 ‘시민보행환경 개선이나 도시환경정비 등에 필요한 사업 추진 시 통지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사용시설을 제거하고 철수한다’는 내용의 협약서를 체결했다. 구는 인사동 일대 공평구역의 도시환경 정비를 위해 지난해 6월 도시계획시설사업을 시작했으나 노점상들이 자진 철거를 거부해 1년 넘게 도로를 만들지 못했다. 종로구와 노점 측은 여러 차례 만나 노력한 결과 지난 7월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사항은 도로 개설 후 8m 폭 인도에서 5m를 노점 영업공간으로 조성하고 3m×3m 규모의 매대 20개를 재배치한다는 것이다. 협상 타결 뒤 노점 측은 지난 11일 포장마차 집기를 자진해서 빼가 구는 물리적 충돌 없이 노점 철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종로구는 앞으로도 대규모 철거가 아니라 부분 철거와 개발, 복원하는 ‘소규모 맞춤형 정비’로 지역특성과 역사성을 살려 나갈 계획이다. 재정비되는 노점 메뉴는 상인들이 결정하지만, 구는 노점 실명제를 적용하고 식품위생법 적용을 강화해 외국인 관광객도 마음 놓고 찾을 수 있는 명물 거리로 만들 예정이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앞으로도 대화와 소통을 통해 민과 관이 함께 살아가는 종로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이주의 문화 레시피]

    전시 ●성낙희 개인전 구상과 추상, 얇은 물감층과 두꺼운 물감층, 안정과 긴장감 등 다각적인 감성의 조화를 작품을 통해 모색하는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 작업. 자연이 가진 근본적인 조화와 균형의 양상을 담은 곡선과 색상을 이미지로 치환해 심리적 풍경을 펼쳐낸다. 25일~10월 1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갤러리 엠. (02)544-8145. ●윤주동 개인전 달항아리, 달그릇을 통해 추사가 말해 온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실현하고자 다양한 실험을 해 온 작가의 근작전. ‘오늘의 어제’라는 제목으로 도자와 도자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백자에 아크릴로 빛의 효과를 낸 ‘큰달’, 한지와 철사로 된 ‘뜬달’ 등은 다양한 실험의 결과물들이다.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밈. (02)733-8877. 대중음악 ●로스 아미고스 2016콘서트 ‘VAMOS’ 혼성 보컬 3명, 연주자 6명으로 구성된 로스 아미고스는, 결이 다른 음악인 브라질리안과 아프로 큐반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실력파 라틴 밴드다. 오리지널 레퍼토리와 라틴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해 들려주는 단독 무대. 26일 오후 8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웨스트브릿지 라이브홀. 3만 3000원. (02)3143-5480. ●참솜과 신루트의 조인트 콘서트 멜랑콜리와 발랄함 사이를 오가는 어쿠스틱 혼성 3인조 밴드 참깨와솜사탕,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사투리 내레이션이 돋보이는 어쿠스틱 혼성 듀오 신현희와 김루트가 함께 만드는 라이브 무대. 26일 오후 8시, 서울 도봉구 창동 플랫폼창동61 레드박스. 4만 4000원. (02)333-2083. 연극·뮤지컬 ●뮤지컬 ‘그날들’ 김광석의 노래들로 이뤄진 창작 뮤지컬.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사건을 추적하는 작품이다. 2013년 초연부터 지난해 재연까지 관객 25만명을 동원했다. 12인조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 무술을 넘나드는 화려한 안무, 탄탄한 스토리 등이 관람 포인트. 27일~11월 6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대극장. 5만~13만원. (02)541-7110. ●연극 ‘오! 마이 러브’ 서른 중반이 되었지만 미래는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무명의 연극 배우 연재와 띠 동갑 스물넷 재미교포 출신의 대학원생 가영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을 통해 맑고 깨끗한 사랑 본연의 모습을 그려낸다. 9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성아트홀 1관. 전석 2만원. 1566-5588. 클래식·무용 ●김성용 댄스컴퍼니무이 신작 공연 ‘린치’ 안무가 김성용이 ‘폭력’을 주제로 만든 작품. 물리력을 동원하는 폭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폭력과 그 폭력에 노출된 집단, 그리고 그 속에서 피해자로 방관자로 때론 공모자로 살아가는 나와 너의 이야기를 그린다. 26일 오후 8시·27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3만원. (02)704-6420. ●2016 예술의전당 가곡의 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한 우리 가곡의 대향연. ‘가족과 고향’, ‘벗과 조국’, ‘사랑과 이별’이라는 주제 아래 선곡된 주옥같은 명곡과 창작 가곡들을 소개한다.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과 국군교향악단, 스페인밀레니엄합창단 등이 출연한다. 27·28일, 9월 3·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신세계스퀘어 야외무대. 무료. (02)580-1578.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위기의 불교…기복보다 수행이 답

    위기의 불교…기복보다 수행이 답

    현각 스님 일갈 계기 자성 목소리 “신행 혁신만이 위기 극복 대안” 사찰 간 프로그램 공유 소통도 ‘신행 혁신으로 전법의 새 지평을 열겠다.’ 한국 불교 맏형 격인 조계종이 포교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3월 취임한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불광사 회주)은 지난 17일 저녁 취임 후 처음으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 불교계의 위기감이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신행 풍토를 다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조계종 집행부의 핵심인 3원장(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중 대중 담당 최고 수뇌가 자청해 기자들을 만난 건 이례적이다. “잘 알려졌듯이 출가자가 급감하고 있어요. 10년 전에 비해 3분의1 수준입니다. 중소 사찰의 경우 운영이 힘들 정도이지요. 출가자 감소 같은 외형적인 위축 말고도 신도들이 40~50대 이후의 고령화로 치닫는 내용적인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대면 처음부터 한국 불교의 위기를 입에 올린 지홍 스님은 그 위기의 원인을 사회적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탓으로 콕 짚었다. 그리고 신도들이 기복보다 수행을 통해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방편들을 취임 후 줄곧 고민해 왔다고 귀띔했다.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10년 안에 한국 불교가 존립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지홍 스님은 부처님이 가르쳤던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으뜸 교훈인 ‘보살행’의 올바른 실천이야말로 위기의 한국 불교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대중을 위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리를 함께한 포교원 연구실장 원철 스님도 지홍 스님을 거들었다. “종교가 이념과 말로만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특정 종교가 신앙과 삶을 독점할 수 없게 됐지요. 시대의 요구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가 화살처럼 빠른데도 종교는 관성을 유지하고 있지요.” 그 위기의 타개를 위해 포교원 스님들은 구체적인 대안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선 신행 혁신운동이다. 신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나와 가족 중심에서 이웃과 사회, 나라로 돌려 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신자상을 정립해 행동지침을 곧 발표하겠단다. 그동안 중앙종무기관이 좌우했던 포교 정책도 확 바꾸겠다고 했다. 개별 사찰과 신자들이 갖고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며 자료, 노하우를 공유하는 쌍방향 소통에의 천착이다. 총무원을 비롯한 중앙종무기관과 본말사·스님·신도들의 평등한 관계 수립에 적극 나설 뜻도 비쳤다. 소모임과 공동체를 적극 만들어 사회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 신행 문화를 단계적으로 정착시키겠단다. 이날 모임에서 가장 많은 말이 오간 것은 역시 기복이었다. 사찰 속에 깊숙이 파고든 자본주의의 패악과 맞물려 우선 철폐해야 할 대상은 나와 내 가족에 치우친 기도와 기원이라고 스님들은 입을 모았다. “지금 한국 불교에 흔한 기복은 무속적 기복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종교의 신앙 행태가 시대에 뒤진 그런 파행적 기복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지홍 스님) “한국 불교에서 생활과 종교의 일치는 바로 삶과 올바른 불교적 가르침의 올곧은 연결에서 찾을 수 있다.”(원철 스님) 이와 관련해 지홍 스님은 모임 말미에 최근 ‘돈 밝히는 기복 불교’ 운운으로 관심을 모았던 현각 스님의 발언에 대한 조계종단의 입장을 에둘러 전했다. “더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발언이었어야 했다. 원칙적으로 종단 내에서도 개혁을 바라고 있는 많은 스님들은 현각 스님의 일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와 신행까지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조언과 질타가 있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첫 출근일은 1981년 9월 23일, 결혼 날짜는 1982년 12월 20일입니다. 아직 기사 마감 전이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다음날 그가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인터뷰 때 정확한 날짜를 얘기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도움 될 만한 정보와 자료들을 문자와 이메일로 알려 왔다. 참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다 싶었다.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이끌고 있는 김달진(61) 관장은 그런 사람이다. 아마도 이런 섬세함과 집요함이 한국 근현대 미술자료 수집과 연구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지금의 그를 있게 했으리라. -“신문 쪼가리 모아서 밥은 어떻게 먹고살려는지…쯧쯧.” 어른들은 하나같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했다. 한창 공부에 집중해야 할 고등학생이 신문이건 잡지건 서양 명화가 실린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오려서 스크랩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나중에 밥벌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을 게다. 나도 앞날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은 좋아하는 취미가 우선이었다. 비록 인쇄물이긴 해도 르누아르, 피카소, 천경자, 박수근의 그림을 모으는 기쁨은 컸다. 고교를 졸업할 때 내가 모은 미술자료는 스크랩북으로 10권이나 됐다. 결과적으로 이 자료들이 내 밥벌이의 든든한 밑천이 됐다. -충북 옥천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초등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셋째 형님을 따라 대전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시작은 껌종이, 담뱃갑, 우표 등이었다. 기념우표가 나오면 가장 먼저 우체국 창구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다 ‘주부생활’ ‘여원’ 등 잡지에 실린 세계 명화를 접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본격적인 수집에 나섰다. 틈만 나면 헌책방이 많았던 청계천 6, 7, 8가를 돌며 미술전집 등을 샀다. 서점 주인에게 그림 한 장을 뜯어서 팔라고 조르기도 했다. 1972년 고 3 여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인쇄물로 된 서양의 명화만 보다가 우리 근대미술의 주옥같은 작품을 실물로 보니 그 감동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걸 네가 직접 다 모은 거냐? 참으로 기특하구나.” 고 3때 당시 홍익대박물관장이던 이경성 교수님을 만나 뵈었다. 막연하나마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술계와 학계, 출판계에 계신 분들에게 무작정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뜻밖에도 이 교수님이 한번 보자고 하셔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큰절을 한 뒤 가방에 싸 간 스크랩북 10권을 보여 드렸다. 교수님은 깜짝 놀라시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과 함께 등을 두드려 주셨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때의 만남이 나중에 큰 인연으로 이어졌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인사동 전시장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던 시절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를 알게 됐다. 잡지사에 편지를 보내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학천 사장이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더라. 지금의 남대문경찰서 인근 초원다방에서 만났는데 대뜸 “잡지 일은 어렵다. 사환으로 심부름도 하면서 취재하러 다녀야 한다. 월급은 따로 없고 교통비 정도만 줄 수 있는데 그래도 하겠느냐”고 물었다.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1978년이다. 취재해서 기사 쓰고, 미술자료 기획물도 연재하고, 편집일도 배우며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바람으로 잡지가 폐간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청소부라도 좋습니다. 미술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전시계’가 폐간된 뒤 청주에서 누님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도우며 지내던 1981년 이경성 교수님이 정년퇴임하고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하셨다는 기사를 봤다. 당장 편지를 썼다. 관장님은 흔쾌히 나를 받아 주셨다. 당시 미술관 직원은 30명에 불과했다. 전시과, 서무과 2개만 있었고 큐레이터란 직제는 아예 없었다. 나중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오광수 선생이 그때 전문위원으로 큐레이터 역할을 했는데 전문위원실에 책상 하나를 얻어 자료 수집을 담당했다. 하루 4500원 일당의 임시 일용직이었지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매주 금요일마다 출근부에 사인한 뒤 인사동, 사간동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그전까지 미술관은 보내오는 자료만 수집했는데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얻은 별명이 ‘금요일의 사나이’다. 한쪽 어깨엔 가방을 메고, 다른 손엔 쇼핑백을 든 채 신문사와 전시장을 쏘다녔다. 화랑 관계자들은 “뭐하러 이걸 가지고 가느냐. 다 보내줄 텐데”라고 의아해했지만 내 눈으로 직접 전시장에 걸린 그림과 도록에 실린 작품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도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니 모 신문사 기자로부터 “편집광적이다”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오류들이 자꾸 눈에 띄는 걸 어쩌겠나. 한 번 잘못 기록되면 계속 확대재생산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었다. 그때 하도 몸을 혹사한 탓인지 2011년 척추에 종양이 생겨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정년퇴직 때까지 미술관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1996년 1월 미술관을 그만뒀다. 일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응어리가 지더라. 처음 별정직 7급 계약직으로 들어가 8년을 일했는데 그다음에 기능직 10급으로 강등됐다. 미술 잡지에 내가 쓴 미술자료 관련 글이 여럿 소개되고, 신문에도 인용 보도되면서 미술자료 전문가로 인정받았지만 승진은커녕 월급도 오르지 않았다. 당시 아들이 몸이 약해 큰돈이 들어가야 하는 처지였던 데다 좌절감까지 더해져 결국 미술관을 떠나게 됐다. 마침 가나화랑 이호재 사장과 인연이 닿아 자료실장으로 발탁됐다. 5년 10개월 근무하는 동안 ‘가나아트’ 잡지 편집회의에 참석했고, 기획물과 인터뷰 기사를 썼다. 이 사장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미술 정보지 ‘파리스코프’를 견본으로 포켓용 전시회 가이드를 만들기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가나에서 독립한 뒤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내게 됐다. -2001년 12월 직장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내 이름을 건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고, 그해 9월 미술정보 포털 사이트 ‘달진닷컴’도 오픈했다. 그리고 2008년 40여년 가까이 수집한 자료들을 한곳에 모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각종 희귀 자료와 기증 자료, 단행본, 정기간행물, 학회 자료 등이 하루가 다르게 쌓이면서 공간은 점점 부족해졌다. 평창동, 통의동, 창성동, 창전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전월세 생활을 한 끝에 지난해 3월 상명대 입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오래된 건물을 매입해 박물관 겸 사옥을 마련했다. 건물 사느라 은행에 빚을 많이 졌는데 건축가 김원이 재능 기부로 리모델링을 맡아 준 덕에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미술자료를 수집·정리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잡지 미술 연재물 기록을 시작으로, 미술단체카드, 미술인명카드, 주제별 미술기사 색인 카드 등을 정리했다. 1980~90년대 중반까지 내가 발표한 글이 신문에 자주 인용 보도되면서 ‘자료 하면 김달진’이란 인식이 서서히 자리잡았다. 평론가를 비롯해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없었다. 특히 미술자료 기록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선미술’ 1985년 겨울호에 쓴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 보존을 위한 제언’이란 글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료의 힘이랄까, 자료의 활용도와 중요성을 널리 알린 게 나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미술인 하면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만을 생각하지만 나는 비창작 미술인인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미술행정가, 작품 보존 및 수복전문가 등에 대한 기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아트가이드’ 미술계 인명록에 이런 인물에 관한 내용을 수집해 꾸준히 연재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해 2010년 ‘대한민국미술인 인명록 1’을 발간했다. 조선시대 초상화가 채용신부터 1850년 이후 태어난 4900명을 실었다.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1000부를 비매품으로 찍었는데 이 책을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가였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이 책에 약력이 실려 있어 깜짝 놀랐다. 가보로 삼겠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 밤하늘 별 중에 왜 일등별만 기억해야 하느냐. 이등별, 삼등별 자료도 남겨야 우리 미술계가 풍부해진다. 인명록에 숫자 1을 붙인 건 언젠가 2권을 꼭 만들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현재 달진닷컴에서 7800명의 미술인이 검색되니 곧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 왔으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아내(최명자씨)는 전시계에서 일할 때 같이 근무한 동료였는데 책을 좋아하고, 서예가 취미인 점 등이 나와 잘 맞았다. 박봉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할 때 아내가 아침마다 신문 배달하고, 우유 배달해서 살림에 보탰다. 직장이든 집이든 자료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아이들과 놀아 준 기억이 별로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 관악구 남현동의 오래된 예술인 마을에 살았는데 자료를 놓아 둘 데가 없어서 라면 박스와 사과 박스에 담아서 안방에 침대 매트리스처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잤다. 어느 날 무게를 못 이겨 마룻바닥이 휜 것을 본 주인이 방을 빼라고 하더라. 할 수 없이 앞집의 빈 지하실을 얻어서 자료를 옮겼는데 여름 장마철에 습기가 차서 자료를 몽땅 버려야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언젠가 그때 얘기를 하는 걸 듣고 마음이 아팠다. 딸 영나(32)와 아들 정현(29)은 지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딸은 대학에서 만화창작을 전공했고, 아들은 미술경영학을 공부했다. 일부러 시킨 건 아닌데 자기들이 스스로 아빠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를 잇겠다고 하더라. 미술계 지인들이 다 부러워한다. 아내도 서울아트가이드 발행인을 맡고 있다.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를 창립했다. 전시, 학술, 뮤지엄 분과로 나뉘어 있고 3권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라키비움(라이브러리+아카이브+뮤지엄) 강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우환, 천경자 화백의 위작 논란 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작품 이력과 같은 객관적 정보들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비엔날레 같은 대형 전시 등 눈에 보이는 지원에만 신경쓰지 말고 자료 수집과 보존, 디지털화, 공공 수장고 확보 등 미술계 토양을 튼튼히 하는 인프라에 좀더 지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신 일도 많으시지만 하실 일도 많으십니다.”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2005년 11월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국내 미술계가 직면한 한국 미술의 정체성 문제, 미술계 위작 시비, 미술시장 활성화, 한국 미술의 해외 진출 등 많은 문제들의 단초가 오늘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전시 리플릿 한 장, 메모 한 줄에 담겨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30년 전 ‘관람객은 속고 있다’에 쓴 글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신념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순녀 문화부장 coral@seoul.co.kr ■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 관장 46년간 한국 근현대 미술자료 수집과 보존, 연구에 매진해 온 자타공인 국내 미술자료 전문가 1호다. 미술계 안팎에선 오래전부터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미술계 인간 자료실’로 통했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전문 분야를 개척해 온 그는 스스로를 “한국 근현대 미술의 기록과 공유를 지향하는 아키비스트(기록관리자)”라고 부른다. 2013년부터 라키비움 프로젝트를 통해 아키비스트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1955년 충북 옥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금속공예과 졸업(1993),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졸업(1999) ▲월간 전시계(1978~1981),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1981~1996),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1996~2001)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 개관 ▲2002년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창간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개관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 창립 및 협회장, 한국박물관협회 홍보위원장, 서울시박물관협의회 이사, 종로구사립박물관협의회 회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2010), 한국미술저작출판상(2014), 홍진기창조인상(2016)
  • [길섶에서] 민병산/손성진 논설실장

    한번 뵌 적이 있는 신경림 시인의 책을 읽다 우연히 잊어버렸던 ‘민병산’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1980년대에 매달 ‘월간바둑’을 구독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 민병산(1928~1988)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병산이라는 이름을 꺼낸 이유는 두 가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으로 통하는 민병산은 방대한 독서량으로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 등으로 불렸다. 그가 남긴 ‘철학의 즐거움’이란 저작과 전기물, 수많은 글의 원천은 독서였다. 바둑을 좋아한, 서울 인사동과 관철동의 터줏대감으로 신동문, 신경림, 천상병 등과 교유하며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주변인들에게 익살과 지식을 선물로 줬다. 민병산은 또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실천한 자유인이었다. 아버지가 1000평의 저택에 살던 부호였지만 귀공자의 삶을 포기하고 평생 직업도 갖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회갑 잔치를 열어 주겠다던 지인들의 뜻을 한사코 거부하던 그는 회갑 하루 전날 월세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구해 읽어 보고 욕심을 버린 삶도 되새겨 봐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서울 명동(明洞)과 금호동(湖洞), 인천 송도(松島) 등 일제의 잔재가 서려 있는 지명을 바꿔야 한다.’ 14일 우리 역사와 문화계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려고 만든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해방 이후 범정부적 차원의 체계적 노력 없이 지방자치단체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명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호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서울 ‘한성’을 ‘경성’으로,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격하시켰다.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바꿔 놓더니 산봉우리와 하천의 이름에서 ‘크다’는 의미가 담긴 ‘대’(大)자, ‘한’(韓)자가 들어가는 명칭은 모조리 없애거나 바꿨다. 여기에 1914년 10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리 민족이 자자손손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의미 왜곡’ 파주 문산 한자 바로잡아 일제의 지명 변경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해당 지역의 지형이나 물, 산 등 특징이 담긴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아무렇게나 바꾼 사례가 가장 흔하다. 서울 금호동의 경우가 그렇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또는 ’무수막’으로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湖洞)으로 바뀌었다. ‘새마을’로 불리던 경기 파주 금촌(村)은 일본이 경의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쇠마을’로 잘못 알아듣고 일본식 한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 온다. 파주 교하의 ‘새터마을’, ‘괸돌’ 등은 그 일대에 지석묘가 많은 점을 들어 한성과 가까운 쪽은 상지석리(上支石里), 먼 쪽 마을은 하지석리(下支石里)로 불렀다. 높은 산봉우리에 주로 붙던 ‘왕’(王)자에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를 더해 ‘왕’(旺)으로 바꿨듯, 특정 한자에 부정적 의미의 부수를 더해 완전히 다른 뜻의 지명으로 왜곡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파주 문산이 대표적이다. 본래 지명은 ‘문산’(文山)이었으나 1910년 전후부터 ‘문산’(汶山)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문’(汶)자는 ‘더럽다’, ‘불결하다’라는 뜻이 있어 1990년대 심각한 홍수를 겪었던 문산 주민들이 삼수변이 없는 ‘문’(文)자로 바꾸자는 운동을 벌였다. 파주시는 2014년 6월 지명위원회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문산읍과 문산리의 한자 표기를 ‘汶山’에서 ‘文山’으로 바로잡았다. 한글학회가 1966년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은 서울 편에서 원남동(苑南洞)을 “창경원 남쪽에 있으므로 원남동이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학설 및 주장도 있지만 ‘본래 순라동이었으나 1911년 순종황제가 머물던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바꾸고서, 창경궁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일제가 개명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지금의 서울 옥인동, 인사동 등 성격이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마을 이름을 제멋대로 합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은 “청운동은 청풍계(창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차용해 만들었다. 또 옥인동도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 지명”이라면서 “일제가 4개 지명을 2개로 줄이면서 의미가 축소되고 고유 의미가 퇴색했다”고 지적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洞)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토박이 지명이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한 경우가 많다”면서 “원남동처럼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끊고 모욕을 주기 위해 개명했거나, 땅이름 속 우리의 얼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합성 지명화한 곳은 마땅히 본래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역별 특색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정적 이미지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지명 변경도 그중 하나다. 충남 홍성군은 ‘홍주(洪州) 지명 되찾기 범군민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00년 가까이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제가 강제 개명한 만큼 주민들의 찬반 의견을 물어 2018년 시 승격을 앞두고 홍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다. 반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명동(明洞)과 송도(松島) 등처럼 일부 지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고 그 자체가 상품성을 갖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또 일부 지역 주민들도 지명이 갖고 있는 ‘가치’ 때문에 반대하기도 한다.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인 명동은 조선 시대에 명례동(明禮洞)이나 명례방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제가 1943년 6월 명치정(明治町·메이지초)으로 바꿨다. 서울의 한복판, 행정구역의 중심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일왕을 기리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명치정에서 ‘치’(治) 한 글자만 빠진 채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 지금의 명동이다. 또 인천을 대표하는 국제 신도시인 ‘송도’는 일본 전함 송도호, 일본명 마쓰시마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섬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10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원남동 역시 한때 지명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악의적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 “日 문화침탈 계속된다는 방증” 부산 동구 범일동에 ‘조방’(朝紡)이라는 지역이 있다. 1917년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군수공장(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조선방직은 1968년 사라졌으나 줄임말이 새로운 도로명과 각종 상호, 심지어 지자체가 지원하고 지역 경제단체가 추진하는 거리축제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아들 상국(56)씨가 “식민지 노동 약탈의 상징이었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호소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조방 앞 일원의 화려했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의도로 ‘조방 이끌리네 거리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명은 지역의 특성, 자연의 이치, 역사적 사실 등 다양한 사연 및 유래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광복 70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 주변엔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왜곡된 수많은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일본의 문화 침탈이 계속되고 있다는 방증이며, 정부 주도의 전국적인 실태조사와 동시에 지명 회복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 원장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 전쟁’”이라면서 “하루빨리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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