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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전국의 문화 버무린 서울… 이젠 고유의 맛 물려줄 때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전국의 문화 버무린 서울… 이젠 고유의 맛 물려줄 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5회차 ‘서울의 멋과 맛’ 편이 지난 25일 서울 인사동과 을지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올해 마지막 탐사였다. 지난 5월부터 장장 25주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에 계속된 미래투어를 통해 시민들의 뜨거운 서울 사랑을 확인했다. 6개월간 회당 평균 35명씩 모두 875명이 서울미래유산의 가치에 공감하고, 그 향기를 공유했다. 이날 일행이 인사동 목인박물관 옥상에 올라가 단체사진을 찍을 즈음 함박눈이 내려 행사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해 주는 듯했다. 보신각에서 시작된 탐사는 청계천 마전교 위에서 3시간 만에 완료됐다. 해설과 진행을 담당한 서울미래유산팀 이소영·전혜경·박정아·황미선·김은선·최서향 지도사와 일반 참가자들이 어울려 방산시장 안 은주정에서 삼겹살과 김치찌개로 조촐한 쫑파티를 가졌다. 해설은 노주석 서울미래유산 지도사가 맡았다.현대는 지구도시화(Gluurbanism)의 시대이다. 국가보다 도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도시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인 시대가 되었다. 도시는 미래의 질서이며, 도시문화는 미래사회 최고의 가치로 떠올랐다. 서울은 명실공히 한민족이 창조한 최고의 도시이다. 서울은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일본의 도쿄와 교토,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를 합쳐놓은 국내 위상을 갖고 있다. 산과 강, 바다를 동시에 끼고 있는 천혜의 도시는 서울밖에 없다. 서울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곧 서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논하기 어렵다. 도시문화란 도시의 정체성이다.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며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서울문화란 다른 도시가 흉내 낼 수 없는 서울만의 독톡한 색깔과 향기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서울의 고유성, 서울의 특성을 나타내는 서울문화의 원형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됐을까. 서울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지만 불행하게도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다. 서울의 중앙집중력은 강력하나 지역적 특성은 허약한 탓이다. 서울문화는 서울이 낳은 자체적 고유문화라기보다는 전국적 문화콘텐츠의 종합 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국문화의 비빔밥 격이다. 서울의 고민은 지나친 중앙 집중성으로 말미암아 지역 고유성을 상실한 데 있다. 서울이 고유한 지역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까닭은 서울의 생성과 진화가 외부의 힘에 의해 비롯됐기 때문이다. 서울의 기원을 이루는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는 고구려의 유민이 일궜고, 조선의 수도 한양의 상층부는 고려 개성에서 옮겨 온 개성주민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주도권은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서울의 터줏대감들은 계속해서 외곽으로 밀려났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이북 피란민들과 전국에서 상경한 지역민들이 서울의 주인 행세를 했다.왕의 도시라는 점도 한계이다. 서울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 등 5대 궁과 종묘·사직으로 이뤄진 궁궐과 제례의 도시이다. 1개의 도성 안에 5개의 궁궐을 가진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이다. 왕과 관직을 독점하는 극소수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움직이는 행정도시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서울인구 20만명 중 1만명이 과거와 관련된 유동인구일 정도로 교육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또 전국의 상권과 유통망을 장악한 시전상인들, 잡역을 도맡은 아전과 노비들이 뒤를 받쳤다. 서울은 자체 생산력은 없는 철저한 소비도시였다. 서울은 왕과 종친, 경화사족, 양반이 10% 이내의 지배층을 구성했고,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거주하는 군인과 아전·서리 같은 중인계층, 시전상인 등 장사꾼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하인과 노비였다. 서울문화 자체가 궁중문화와 중인문화로 양분됐다. 서울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는 낡은 세대의 여인네 같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사람이 인구의 절반인 500만명에 육박하지만 여전히 서울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만인의 타향’이다. 수도, 중앙, 특별시에 현혹돼 서울 본연의 가치와 서울 고유의 전통을 창조하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민 대부분이 서울을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도시 고유의 문화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서울 본연의 색깔을 되찾고, 서울 고유의 향기를 만들어서 미래세대에게 물려줘야 한다. 더이상 이주민들의 도시가 아니라 뉴요커, 파리지앵처럼 자부심을 가진 원주민의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궁궐의 도시, 성곽의 도시 같은 도시 이미지를 단박에 나타내는 정체성과 자신을 서울토박이, 서울내기라고 당당하게 나타내는 도시멤버십의 정립이 필요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과 코스로 찾아뵙겠습니다. 기사와 자료는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과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목숨으로 일제 항거한 영혼…눈비에도 새벽 열었던 민초…그 역사가 ‘다시 세운’ 도시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목숨으로 일제 항거한 영혼…눈비에도 새벽 열었던 민초…그 역사가 ‘다시 세운’ 도시

    눈 오는 인사동을 걸으려고 일부러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서울 미래 유산 투어의 마지막 일정이 있던 날, 인사동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곧 얼음 눈과 비로 변하긴 했으나, 특별한(?) 정취를 느꼈다.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터에서 나라를 걱정한 조선관리를 보았다. 태화관(태화복지재단)에는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상상 속의 독립선언문 낭독은 민족대표가 군중 앞에서 엄중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뒤이어 우렁차게 만세를 외치는 모습인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답사 내내 따라다녔다.천도교 중앙대교당에 다다랐을 때 눈 맞고 비 맞아 손이 무척 시렸는데, 관계자의 배려 덕분에 교당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과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종묘 쪽으로 좀더 걸으니 용성 스님이 계셨던 대각사가 나왔다.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민족대표에 참여하신 스님이라고 한다. 대각사 일주문 꼭대기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과 옥살이하는 스님, 그 앞을 지키는 순경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묘공원을 지나 세운상가에 다다랐다. ‘다시세운’이라는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세운상가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첫 주상복합 건물이라고 한다.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1㎞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2014년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운상가에서 대림상가까지 이어져 있는 공중보행도로를 걸으니 청계천을 따라 공중 부양해서 걷는 기분이었다. 1960년대엔 세간의 부러움이었고, 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다 90년대 이후 쇠락해서 2000년대엔 잊히다가 다시 돌아온 세운상가에 시간을 내어 또 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북적였다.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기와 젊음이 느껴졌다. 다시 세운 나라는 자결로 망국의 부당함을 고발한 관리, 독립을 자신의 안위보다 우선순위에 둔 각계의 리더들 그리고 삶의 터전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을 열었던 민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세운 나라의 흔적을 기억하고, 발로 밟고,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서울미래유산 답사단을 통해 소중한 역사가 미래로 전승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눈비도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 박정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보석’을 만났다

    ‘보석’을 만났다

    일주도로 따라 한 바퀴…몬블랑 정상서 굽어본 전경에 빠지고…보발롱 해변 일몰에 반하고 아마 개성 강한 신이었지 싶다. 인도양의 섬나라 세이셸을 설계한 이가 있다면 말이다. 그에게 예쁘기만 한 산호섬이 늘어선 풍경은 단조로웠을 거다. 그래서 남성적인 산도 만들고, 파스텔 톤의 다양한 물빛도 안배했을 거다. 해변 여기저기에 땀띠약 같은 분말 형태의 모래와 거친 질감의 모래를 섞어 놓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겠지. 이처럼 세이셸에선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현실과 줄곧 마주하게 된다.세이셸의 첫인상. 사실 기대한 건 몰디브 등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예단이었다. 세이셸은 산호섬이라기보다 킹콩이 사는 해골섬 ‘스컬 아일랜드’에 가깝다. 지형적 특성상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낄 때가 잦은데 이때 느낌이 특히 그렇다. 세이셸은 형성 과정이 여느 열대의 섬과 사뭇 다르다. 1억 5000만 년 전, 곤드와나대륙이 유럽과 아프리카 등으로 분리될 때 파편처럼 떨어져 나왔다. 등 돌리면 화강암 산, 등 돌리면 인도양인 건 이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양이라는 낯선 바다가 주는 지리적 이질성도 신비감을 부채질한다. 풍경도 낯설다. 한낮의 하늘 위로는 갈매기 대신 흰꼬리 열대새가 난다. 저물녘 하늘은 과일박쥐의 차지다. 당신이 선 곳이 아프리카라는 걸 확연히 느끼게 하는 건 음악이다. 음식점은 물론이고, 국제행사장에서도 아프리카 특유의 흥은 빠지지 않는다.세이셸은 원주민이 혼혈인, 즉 크레올(Creole)이다. 초기 정착자인 아프리카와 유럽을 비롯해 인도, 중국 등 다민족이 얽혔다. 기록의 시대 이전의 세이셸은 무인도였다. 프랑스인이 정착해 산 건 1742년부터다. 우리로 치면 조선 영조(18년)가 통치하던 때다. 이 무렵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온다. 물론 일꾼으로 쓰기 위해서다. 이후 19세기 초 아프리카 영토 분할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이 새로운 섬의 주인이 된다. 이후 영국의 속국으로 지내다 1976년 독립했다. 세이셸 사람들의 자부심이 남다른 건 이 때문이다. 언어 역시 크레올어다. 프랑스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과의 소통을 위해 간소화한 언어다. 영어도 광범위하게 쓰이긴 하지만 ‘나라말’의 개념으로 보면 아무래도 불어가 더 가깝다. 하긴 나라 이름 자체가 18세기 프랑스 재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니 더 말할 게 없겠다.‘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허니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 유수의 셀럽들과 아랍의 부호들이 선택한 휴양지’. 세이셸 관광청의 홍보 문구다. 맞다. 지금도 마헤섬의 산꼭대기엔 아랍에미리트 칼리파의 별장이 있다. 적지 않은 한류 스타도 허니문 여행지로 세이셸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부유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란 인상도 굳어졌다. 요즘은 다르다. 장삼이사들에게도 그리 먼 낙원은 아니다. 지난해 세이셸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은 1900명 정도였다. 10년 전 20여명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세다. 세이셸은 115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그중 방문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세 섬이다. 수도 빅토리아가 있는 마헤섬을 체류지 삼고, 프랄린섬과 라디그섬을 여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장 큰 섬은 마헤다. 면적은 약 150㎢. 충남 태안의 안면도보다 좀더 크다. 수도 빅토리아는 우리의 인사동 거리처럼 작다. 비좁은 면적 안에 영국의 빅벤을 모티브 삼은 ‘스몰벤’ 시계탑, 셀윈 클라크 마켓 등 볼거리가 빼곡하다. 세이셸 인구 약 9만 3000명 가운데 90% 이상이 몰려 살다 보니 혼잡하기도 하다.출발 전 세이셸관광청 한국사무소에 조언을 구했다. 꼭 체험해야 할 것들을 꼽아 달라고 했다. 첫째는 보발롱 해변에서 일몰 보기다. 마헤섬에서도 손꼽히는 일몰 명소라니 이건 뭐 두말 말고 찾아야 한다. 둘째는 라디그섬에서 자전거 타기. 셋째는 코코드메르 열매 만져 보기다. 행운을 가져다 준단다. 이건 프랄린섬의 발레드메 국립공원에 들어가야 체험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보존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국립공원 밖에서는 구경조차 쉽지 않다. 넷째는 빵나무 열매 먹기. 다시 세이셸로 돌아오게 해 준단다. 다섯째는 알다브라 자이언트 거북에게 먹이 주기. 세이셸을 상징하는 동물과 교감을 해 본다는 의미가 있겠다. 여섯째는 보물 찾기다. 프랑스에 편입되기 이전의 세이셸은 해적들이 발호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해적들은 약탈한 보물을 가져와 섬 깊은 곳에 숨겨 두곤 했다. 거기가 바로 마헤섬 북쪽의 벨옴 해변과 보발롱 해변 사이다. 요즘도 보물 추적자들이 이 해역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니 안 가 볼 수 없다. 우리야 어려서부터 보물 찾기 놀이로 실력을 키워 오지 않았던가.그리고 크레올 축제 엿보기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퍼레이드다. 빅토리아 시가지 전체가 크레올들의 현란한 춤과 땀, 그리고 열기로 가득 찬다. 지치지 않고,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과 흥을 만끽할 수 있다. 앙수시 로드의 산자락에서 일몰 보기는 버킷 리스트로 남았다. 보발롱 해변의 일몰은 물론 명불허전이다. 다만 영화에서 많이 봤던, 그러니 어쩌면 익숙한 것일 수 있다. 추측컨대 앙수시 로드의 일몰은 이와 다를 것이다. 너른 인도양 위의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활활 타는 장면과 마주할 수 있지 싶다. 이번 여정의 핵심은 ‘렌터카’다. 누구에게든 열병과도 같은 로망일 터다. 차는 여행자를 자유롭게 한다. 가장 빠르게 낙원을 돌아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헤섬엔 일주도로가 잘 놓여 있다. 다만 서북쪽 폴로네 해양국립공원과 벨옴 해변 사이의 짧은 구간만 찻길이 없다. 섬 가운데에 등뼈처럼 솟은 산을 넘으려면 산간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산길은 대략 네 개다. 그 가운데 몬세이셸 국립공원을 지나는 상수시 도로와 라미제르 도로 주변 풍경이 아주 빼어나다. 이번 여정에선 라미제르로 넘어가 상수시로 복귀하는 것으로 코스를 꾸렸다. 오전 중에 마헤섬 전경을 보고 오후에 저 유명한 보발롱 해변의 일몰을 감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마헤섬 전경 감상의 최적 시간은 오전 9시 이전이다. 먼지 한 톨 없는 청명한 공기 덕에 가장 명징하게 마헤섬 구석구석이 드러난다. 라미제르 도로의 동쪽 들머리는 에덴섬이다. 마헤섬 오른쪽에 있는 몇몇 간척지 중 하나다. 몇 개의 회전교차로를 지나면 길은 곧 산자락으로 향한다. 풍경도 바뀐다. 길은 좁아지고 원주민 집들이 길을 따라 대롱대롱 매달렸다. 첫 번째 전망 포인트는 라루이스 전망대다. 표지판은 없지만 과일장수 몇몇이 좌판을 깔고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 전망대에 서면 에덴섬과 수도 빅토리아 등 마헤섬의 동쪽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몇 뷰 포인트를 지나면 곧 서쪽 해안에 닿는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쪽, 그러니까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앙스 부알로 등의 해변 마을이 이어진다. 관광지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원주민들의 소박한 삶의 공간들이 펼쳐진다. 차를 몰아 북쪽으로 계속 오르면 포로네 해양 국립공원이다. 토파즈 색감의 물빛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변이다. 저 유명한 보발롱 해변이 우리의 해운대라면 여기는 청사포쯤 될까. 유명세는 덜해도 그만큼 한가롭고 적요하다. 낙원 드라이브의 서쪽 종점은 폴로네 비치다. 이후로도 편도 1차선 길이 좀더 이어지지만 결국 막힌다. 상수시 도로는 낙원 드라이브의 백미다. 들머리는 서쪽 해안의 포글로 마을. 작고 예쁜 갯마을이다. 끝자락은 빅토리아다. 길은 몬세이셸 국립공원을 관통하며 지난다. 앞으로는 열대우림이, 뒤로는 인도양의 보석 같은 바다가 번갈아 펼쳐진다. 상수시의 자랑 중 하나는 몬블랑 트레일이다. 전체 거리는 편도 1㎞. 들머리는 상수시 도로의 티 팩토리다. 들머리와 정상의 고도 차는 270m 정도지만 계속 오르막이어서 제법 힘이 든다. 짧은 구간인데도 안개와 비, 햇살이 교차할 정도로 날씨 변화도 심하다. 트레일의 끝자락은 전망대다. 해발 700m 정도. 우리 북한산 인수봉을 닮은 거대한 암봉 위에 조성돼 있다. 들머리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40분 정도 걸린다. 몬블랑 정상의 조망은 단연 압권이다. 마헤섬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해변 전체가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져 있다. 보석 같은 해변이 줄줄이 이어지고, 크고 작은 마을들은 구슬처럼 바다에 매달려 있다. 신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액세서리를 만든다면 아마 저 모양이지 싶다. 그 보석 같은 풍경 위로 흰꼬리 열대새가 유영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는 너른 인도양이다. 수평선 너머엔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있겠지. 신화를 믿는 사람에겐 예서 1600㎞ 떨어진 아프리카가 신기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산 길은 매우 미끄럽다. 빠르게 내려오겠다고 객기 부리다간 낭패를 겪을 수 있다. 글 사진 마헤(세이셸)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변풍경’ 속 빨래하던 아낙 모습 절로 떠올린 청계천…뜨끈한 국물·역사 얘기에 몸·마음 채운 용금옥·부민옥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변풍경’ 속 빨래하던 아낙 모습 절로 떠올린 청계천…뜨끈한 국물·역사 얘기에 몸·마음 채운 용금옥·부민옥

    11월의 첫 주말인 지난 4일 집결지인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주변은 바람이 찼다. 청계천을 무대로 쓴 박태원 ‘천변풍경’의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일상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들기고 비벼 빨았을 아낙들은 이 정도의 바람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리라.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석조건물은 태종 때 만들어진 광통교인데, 중구 정릉에 남아 있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에서 가져왔다는 해설은 듣는 이의 귀를 잡아 두기에 충분했다. 따끈한 국물 생각이 절실했던 차에 1932년부터 시작된 용금옥 추탕의 역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점심 메뉴를 정할 수 있었다. 넉넉하고 푸짐한 인심으로 근방의 정치, 언론인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었고, 부민옥도 대파를 넉넉히 넣은 매콤한 육개장 국물이 대표 메뉴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을 눈으로 직접 보는 진귀한 경험도 했다. 베를린시로부터 기증받은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 곰과 함께 설치돼 있었다. 다들 장벽의 폭과 길이를 재어 보고, 둘레를 돌면서 손으로 밀어 보고 쓰다듬기도 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국민이 불과 얼마 전까지 서독과 동독을 가로지르던 콘크리트 장벽을 마주한 소감은 어땠을까. 사람들의 발길이 넘쳐나는 인사동 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다. 숱한 관광객을 제치고 쌈지길 계단에 모여 천재 시인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들었다.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난해한 암호 같다. 두 명의 해설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역을 나눠 설명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답사 시간 3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미리 준비해 온 사진과 지도 자료가 톡톡히 한몫을 해냈으며, 탐방 코스에 문학이 함께 어우러지니 해설이 더욱 풍성하고 낭만이 흘렀다. 인사동 골목 어귀에 있던 ‘귀천’이라는 작은 찻집 옆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었다.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가는 곳곳마다 소설과 시가 함께 있어 더욱 특별했다. 이지현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문중 지킨 종갓집 며느리처럼… 종로, 그렇게 흘러왔구나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문중 지킨 종갓집 며느리처럼… 종로, 그렇게 흘러왔구나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2차 ‘서울의 문학2-근대문학거리 여행’ 편이 지난 4일 서울 중구 다동과 종로구 인사동, 운니동 일대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됐다.답사단은 박태원의 ‘천변풍경’,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 염상섭의 ‘삼대’, 심훈의 ‘그날이 오면’,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박완서의 ‘나목’ 속 서울을 걸었다. 청계천변을 지나 우미관과 한국기원이 자리했던 관철동을 거닐었고, 옛 조선극장과 승동교회, 통문관, 귀천에서 인사동을 느꼈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의 무대 운니동 운현궁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너나없이 서울미래유산 로고가 새겨진 빨간색 스카프로 멋을 낸 답사단원들은 문학의 향기를 따라 거리를 누볐다. 황미선, 김은선 두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지난 9월 서울숲에 이어 또 한번 콤비를 이뤘다. 김은선 지도사는 무교동에서 관철동까지, 황미선 지도사는 관철동에서 운니동까지 해설을 나눠 맡았다.우리나라 문학과 예술작품 중 서울의 영향을 받고 창작된 것이 많다. 그만큼 문화예술계의 서울 의존도는 깊고 넓다. 서울은 600년 이상 한국인들의 의사 이상향이었다. 토크빌이 “파리는 프랑스 그 자체”라고 말했듯이 ‘서울이 곧 한국’이었다. 문화예술이 서울을 재창조했다. 작가와 작품이 서울의 결을 기름지게 하고 향기를 풍기게 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염상섭의 ‘삼대’에는 황토마루 네거리, 황토현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오늘의 광화문 네거리가 바로 황토마루 네거리다. 조선 500년 내내 네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일제가 1912년 태평로를 뚫기 전까지 광화문과 숭례문을 잇는 남북도로는 없었다. 인왕산 지맥인 야트막한 고개가 정동과 청계광장을 거쳐 무교동 변에 자리했다. 진작 사라진 황토마루라는 지명을 30~40년대 소설가들이 애타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박태원의 ‘천년풍경’에는 아낙들의 빨래하는 모습과 개천을 복개한다는 뜬소문이 묘사되고 있다. ‘간간이 부는 천변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청계천을 덮어버린단 말이 있지 않어?…그거 다 괜한 소리, 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로 덮는단 말이유?’ 등 거리에 떠돈 소문은 사실이 됐고, 일제가 조금씩 덮기 시작한 청계천을 결국 우리 손으로 지하에 가뒀다. 소설은 역사가 된다. 구보 박태원은 6·25전쟁 때 아내와 3남2녀를 서울에 남겨 둔 채 월북했고, 1988년 해금 때까지 잊힌 작가였다. 천재 시인 이상, 구보와의 관계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문학 동지이자 ‘짝패’ 그 이상의 관계였다. 구보의 북녘 부인 권영희는 이상의 애인 권순옥이었다. 월북 소설가 정인택은 권순옥을 흠모해 음독자살을 기도한 끝에 결혼했고, 이상은 이 결혼식의 사회자로 나서 ‘조선팔도의 허리가 휠 희곡’이라는 대사를 남겼다. 구보가 남녘에 남긴 외손자가 영화 ‘괴물’의 감독 봉준호다. 건축가이자 화가였으며, 시인이자 소설가로 27살에 요절한 이상은 이상한 작품을 남긴 이상한 남자가 아니다.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심심하고, 피폐해졌을 것이다. 그는 청진동에 ‘제비’, 인사동에 ‘쓰루’, 광교에 ‘69’, 종로1가에 ‘무기’란 카페를 운영했다. 부인 김향안은 또 다른 절친 화가 구본웅의 이모이며, 화가 김환기의 부인 변동림이 된다. 이 시기 이상, 박태원과 엮이지 않은 문인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골동품과 고서화의 고향을 현대와 연결하는 인사동 쌈지길은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연상시킨다.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으로 시작된 한 편의 시는 계단 없이 경사로를 사각으로 이어 붙인 특이한 건물, 형태는 사각형인데 길 따라 돌다 보면 원이고, 옥상 정원에 닿는 묘한 구조의 건물로 현대에 구현됐다.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는 1950~60년대 서울을 소설의 주요 무대로 삼은 전후 문학 작품이다. 원산 출신 실향 피란민 이호철은 종로 북촌을 지배하고 있던 서울 토박이, 해방촌에 무리 지어 사는 이북 피란민,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상경민 등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삶의 용광로’ 서울에 터 잡고 사는 세상을 그렸다. 식모살이를 하다가 몸을 파는 통영 출신 길녀는 상경민이다. 소설 속에서 종로는 서울 토박이 동네, 삼청동과 가회동은 부촌, 금호동은 해방촌, 회현동은 여관촌으로 각각 그려졌다. 박완서의 ‘나목’에서도 주인공 이경은 강점기 미스코시백화점이었다가 미군정기 미군PX가 있던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초상화부 점원으로 일한다. 이경의 퇴근길은 남대문 백화점에서 중앙우체국, 을지로입구, 화신백화점이 있던 종각을 지나 계동집까지의 행로다. 미군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박수근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중략)…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라고 노래했다. 나라를 찾기만 한다면 보신각 종을 치다 죽겠다는 격정을 표현했다. 임화도 ‘네거리의 순이’에서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아니냐!’라면서 식민지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종로에서 단말마를 토했다. 인사동과 관철동, 운니동을 품은 근대문학의 길 종로는 500년간 유일한 도심이었다가 지금은 여러 도심의 하나로 내려왔다. ‘마치 문중을 지키며 늙어 가는 종갓집 며느리 같다’는 어느 도시학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놀거리 (대중문화 1번지, 홍대) ■일시: 11일(토) 오전 10시 홍대입구역 5번 출구 앞 ■신청(무료) : 서울시 서울미래유산 (futureheritage.seoul.go)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통일 염원 담긴 베를린 광장, 3대째 가업 잇는 서점 통문관, 모더니즘 건축 노인복지센터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통일 염원 담긴 베를린 광장, 3대째 가업 잇는 서점 통문관, 모더니즘 건축 노인복지센터

    ‘서울의 문학-근대문학거리 여행’의 행선지에서 만난 서울미래문화유산은 모두 9개다. 용금옥과 부민옥, 베를린광장, 송림수제화, KDB산업은행, 수도약국, 통문관, 귀천, 노인복지센터가 그곳이다. 문학작품 속 등장 공간과 미래유산을 적절하게 섞어서 답사 동선을 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베를린광장, 통문관, 노인복지센터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중구 삼일대로 363 베를린광장은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에 철거된 베를린 장벽(높이 3.5m, 폭 1.2m, 두께 0.4m)과 독일을 상징하는 곰상, 100여년 전부터 베를린시 마르찬 휴양공원에 설치돼 있던 조명등과 의자를 기증받아 2005년 설치됐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조성했다. 장벽은 1961년 동독에 설치됐던 것이다. 서독 쪽 벽면은 사람들의 접근이 가능해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들이 낙서돼 있다. 옮겨 올 때 독일 전통의 보도 포장과 의자를 함께 배치했다. 곰상의 몸통 왼편엔 남대문이, 오른편엔 브란덴부르크문이 그려져 있고 베를린과 서울 시민의 모습이 화합하는 형태다. 종로구 인사동길 55-1 통문관은 1934년 개업해 3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관훈동 일대의 시대 모습을 보여 주는 장소이며 고서적 전문점으로 고서 연구에 공헌했다. 창업주 이겸노, 2대 이동호씨에 이어 3대 이종운씨가 대를 잇고 있다. 6·25전쟁 중에는 ‘월인천강지곡’을 찾아냈고, ‘청구영언’, ‘두시언해’, ‘월인천강지곡’ 영인본을 출간했다. 종로구 삼일대로 467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는 1961년에 준공된 옛 통계청 건물이다. 건축가 이희태의 모더니즘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 격자형 패턴의 디자인이 차양창과 함께 모던한 감각을 드러낸다. 탑골공원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자리해 실버세대들의 만남과 교류의 복지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가 이희태는 혜화동성당(1958)·메트로호텔(1960)·복자기념성당(1967)·국립공주박물관(1971)·국립극장(1973)·국립경주박물관(1974)·부산시립박물관(1978)·성라자로마을(1981)을 설계했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한 컷 세상] 추억 속 사진 한 장

    [한 컷 세상] 추억 속 사진 한 장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사진관에 스티커 사진이 전시돼 있다. 어느덧 인화된 종이보다 디지털 기기 속 액정화면 사진이 더 익숙한 지금 과거로 돌아가 종이 사진의 추억을 한번쯤 다시 느껴 보는 것은 어떨까?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박수진, 평범한 사진도 화보로 만드는 근황 ‘살짝 보이는 D라인’

    박수진, 평범한 사진도 화보로 만드는 근황 ‘살짝 보이는 D라인’

    박수진이 임신 근황을 전했다.배우 박수진은 최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사동 밤거리를 빛내는 미모가 돋보이는 사진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 속에서 박수진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여전히 아름다운 여신 미모를 과시하는 모습. 둘째 아이를 임신한 박수진은 여전히 늘씬한 몸매를 자랑해 눈길을 끌었다. 박수진은 “그림은 미완성시킨 채 귀가”라며 “아름다운 인사동 밤거리”라고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편 박수진은 지난 8월 둘째 임신 소식을 전했다. 배용준과 결혼한 박수진은 현재 육아와 태교에 전념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171개 업소 참여 ‘인사동 박람회’ 28일~11월 3일 개최

    171개 업소 참여 ‘인사동 박람회’ 28일~11월 3일 개최

    우리 고유의 전통이 가득한 인사동이 박람회장이 된다. 인사동 5대 권장 업종인 고미술과 화랑, 표구, 공예, 한지·필방 등 171개 업소가 참여하는 대규모 야외 박람회다. 인사동 구석구석 진면목을 알리고 인사동의 옛 명성과 위상을 되찾기 위해 인사동 토박이 주민들이 나섰다. 인사동 박람회는 1987년 ‘인사전통문화축제’로 시작해 30회를 맞았다. 지금까지는 문화축제로 진행됐지만 올해부터는 박람회로 바뀌었다. 인사동 전체 5만 3천여 평이 야외 박람회장이 된다. 고미술과 화랑, 표구, 공예, 한지·필방 등 171개 업소가 전시부스가 된다. 박람회를 기념하여 90개의 고미술과 화랑에서는 대규모 아트 페어가 열린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도자기와 옛 그림, 민속품, 목기, 금속품 등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인사동 박람회에 맞춰 기획한 특별전과 인사동 시대를 열고 이끈 작가의 작품전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다.표구와 공예, 한지·지필묵, 전통차음식은 일부 품목에 한해 파격적인 50% 할인 판매를 실시한다. 인사동 박람회의 성공을 기원하고 인사동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상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겼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박람회 첫날인 28일에는 취타대 행진 및 한복 퍼레이드가 북인사마당에서 남인사마당으로 진행된다. 한복의 멋과 우수성을 알리고 인사동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을 전망이다. 김덕수 사물놀이의 개막 공연은 인사동 박람회의 신명과 흥을 한껏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날부터는 취타대 퍼레이드와 광개토 사물놀이가 진행된다. 취타대 퍼레이드는 한복을 입은 내∙외국인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1시 20분까지 북인사마당으로 모이면 된다. 북인사마당에서는 매일 오후 1시부터 짚풀공예, 도예체험, 차 시연, 표구 시연, 한복체험, 한지공예, 수제도장 만들기 등의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하는 인사동 도보 투어가 열린다. 인사동 내에 역사 유적지를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걸어보는 ‘도보관광 해설 프로그램’이다. 29일부터 3일까지,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 ‘도슨트와 함께 하는 인사동 박람회 투어’가 있다. 유명한 고미술과 화랑을 소개하고 안내를 해준다. 30분 정도 진행되며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된다. (사)인사전통문화보존회 정용호 회장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인 만큼 인사동 박람회가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살아있는 인사동을 전세계에 알리는 첫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며 “인사동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2년 뒤에는 세계적인 ‘국제 인사동 EXPO’로 키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어 “인사동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시련과 역경에도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켜 온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심장부로서 인사동이 무너진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얼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앞으로도 인사동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화랑 개관 40년 ‘새로운 창을 열다’ 전시

     인사동 터줏대감 선화랑이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40년, 새로운 창을 열다’전을 마련했다. 전시에는 선화랑 개관 초기부터 동고동락한 주요 원로 작가들과 최근 합류한 젊은 작가들, 역대 선미술상 수상작가 등 40명의 작품이 출품된다.  선화랑은 예술 애호가인 김창실 회장이 1977년 개관했다. 이화여대 약학대학 출신인 김 회장이 약국을 경영하며 모은 돈으로 1965년 도상봉의 그림 ‘라일락’을 구입한 것이 훗날 선화랑의 시작이 됐다. 김 회장은 개관 2년 만인 1979년 사재를 털어 미술문화 계간지 ‘선미술’을 창간해 젊은 작가들 조명하는 한편 상업화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984년 ‘선 미술상’을 제정해 실험성 높은 작품을 하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했다.  해외 아트페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한편 마르크 샤갈, 앙투안 부르델, 마리노 마리니 등 세계적인 작가들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국내외 작가들의 한국화, 서양화, 조각, 금속공예, 미디어아트, 섬유예술 등 450회 이상의 전시를 이어왔다. 김 회장이 2011년 세상을 떠난 뒤에는 큰며느리인 원혜경 대표가 화랑을 경영 중이다.  개관 40주년 기념 전시는 1,2부로 나뉘어 열린다. 1부는 이두식, 하종현, 오용길, 구자승, 김구림, 곽훈, 이숙자, 황주리 등 한국을 대표하면서 선화랑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작가들과 김병종, 이이남 등 역대 ‘선 미술상’ 수상작가가 참여한다. 오는 31일까지 이어진다.  다음달 1일 개막하는 2부에는 안광식, 문형태, 정영주 등 현재 선화랑과 긴밀하게 작업하는 중견 작가들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원 대표는 “부침이 심한 미술계 속에서 대를 이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 회장의 미술문화에 대한 남다른 뜻과 의지, 열정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지탱해 줬기 때문”이라며 “지난 40년간 쌓아온 전통의 기반 위에 새로운 창을 제대로 열어보겠다는 각오로 비전과 발견을 모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돈 보다 장난감이 좋아 사표쓴 변호사

    돈 보다 장난감이 좋아 사표쓴 변호사

    美 레고예술가 네이선 사와야, 한국서 첫 전시회 “장난감으로 예술품 만드는 것 좋아” 돈 잘 버는 변호사와 예술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고를까. 언뜻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 잘 버는 변호사를 고르겠다고 할 것 같다.그렇지만 손톱만한 블록 장난감 ‘레고’에 빠져 잘나가던 변호사를 때려 치우고 예술가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세계 최고 레고 예술가 네이선 사와야(44)가 주인공이다. 미국 뉴욕의 잘 나가는 법률사무소 변호사였던 사야와는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다”며 2004년 3월 사표를 던졌다. 동료와 상사들의 반응 대부분은 놀라움을 넘어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사야와는 사표를 내고 3년 뒤인 2007년 미국 필라델피아 랭커스터미술관 레고를 이용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사람들은 작고 알록달록한 레고 조각으로 만든 놀라운 예술작품에 열광했다. 사야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레고 예술가가 된 것에 대해 사야와는 “레고는 포장 상자에 그려진 자동차나 헬기, 건물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유년시절부터 레고의 매력에 빠진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레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변호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꾸준히 기술연마를 하고 있는 그는 현재도 매달 수 십만개에 이르는 레고 조각을 주문해 ‘레고’ 기업의 최대 고객이기도 하다. 사야와는 “남녀노소 누구나 흔하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쁘다”며 “제 작품을 보면 나도 레고로 한 번 만들어봐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사야와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지난 5일부터 내년 2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첫 내한 전시회 ‘디 아트 오브 더 브릭’을 열었다. 90점의 작품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10여 년에 걸친 그의 작품 활동 전반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순회전 중 하나로 열리는 이 행사에는 이미 200만명에 이르는 관객이 거쳐갔고 CNN이 반드시 관람해야 할 전시로 손꼽기도 했다. 또 지난해에는 백악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번 한국 전시의 핵심인 ‘디비전’은 작가 스스로 “분단된 한반도를 겨냥해 서울에서 처음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분열이나 분단 대신 희망에 방점을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돈 보다 장난감이 좋아 사표쓴 변호사

    돈 보다 장난감이 좋아 사표쓴 변호사

    美 레고예술가 네이선 사와야, 한국서 첫 전시회 “장난감으로 예술품 만드는 것 좋아” 돈 잘 버는 변호사와 예술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고를까. 언뜻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 잘 버는 변호사를 고르겠다고 할 것 같다.그렇지만 손톱만한 블록 장난감 ‘레고’에 빠져 잘나가던 변호사를 때려 치우고 예술가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세계 최고 레고 예술가 네이선 사와야(44)가 주인공이다. 미국 뉴욕의 잘 나가는 법률사무소 변호사였던 사야와는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다”며 2004년 3월 사표를 던졌다. 동료와 상사들의 반응 대부분은 놀라움을 넘어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사야와는 사표를 내고 3년 뒤인 2007년 미국 필라델피아 랭커스터미술관 레고를 이용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사람들은 작고 알록달록한 레고 조각으로 만든 놀라운 예술작품에 열광했다. 사야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레고 예술가가 된 것에 대해 사야와는 “레고는 포장 상자에 그려진 자동차나 헬기, 건물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유년시절부터 레고의 매력에 빠진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레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변호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꾸준히 기술연마를 하고 있는 그는 현재도 매달 수 십만개에 이르는 레고 조각을 주문해 ‘레고’ 기업의 최대 고객이기도 하다. 사야와는 “남녀노소 누구나 흔하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쁘다”며 “제 작품을 보면 나도 레고로 한 번 만들어봐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사야와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지난 5일부터 내년 2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첫 내한 전시회 ‘디 아트 오브 더 브릭’을 열었다. 90점의 작품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10여 년에 걸친 그의 작품 활동 전반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순회전 중 하나로 열리는 이 행사에는 이미 200만명에 이르는 관객이 거쳐갔고 CNN이 반드시 관람해야 할 전시로 손꼽기도 했다. 또 지난해에는 백악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이번 한국 전시의 핵심인 ‘디비전’은 작가 스스로 “분단된 한반도를 겨냥해 서울에서 처음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분열이나 분단 대신 희망에 방점을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낡은 옷 벗고 ‘문화’ 입은 길… 핫플레이스로 뜬다

    낡은 옷 벗고 ‘문화’ 입은 길… 핫플레이스로 뜬다

    요즘엔 길도 진화한다. 경북 경주의 ‘황리단길’, 광주의 ‘동리단길’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경리단길에서 모티브를 얻어 형성됐다. 경남 창원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로 이름값을 올리는 중이다. 이 역시 서울 압구정동의 가로수길이 모티브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예전엔 낡은 길이었다는 것, 그리고 문화의 옷으로 완벽히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한국관광공사■ 옛것새것 아우르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다-경주 황리단길 ‘황리단길’은 최근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며 경주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낡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은 침체 지역이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같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황리단길은 경주 ‘황’남동의 머리글자와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합쳐진 별칭이다. 황리단길이 형성된 곳은 황남동 일대의 왕복 2차선 도로 주변이다. 거리는 1㎞ 남짓. 정확히는 대릉원 후문에서 황남초등학교 네거리까지 약 700m의 도로와 대릉원 서편 돌담길 약 450m를 합친 구간이다. 황리단길 일대는 원래 허름한 점집이 많은 골목이었다. 지금처럼 젊은이 ‘취향 저격’의 업소들이 들어선 것은 불과 1년여 전부터다.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주말의 경우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광객과 불법 주차 차량이 뒤섞여 매우 혼잡한 편이다.황리단길 산책은 보통 내남사거리를 들머리 삼는다. 수십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다방, 점집 등이 트렌디한 업소들과 어우러져 있다. 대부분 가게는 본래의 외관을 최대한 살리고 내부만 리모델링한 형태다. 맛집으로 소문난 곳은 제법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다. 길 초입의 브런치 카페 ‘노르딕’과 대표 맛집으로 꼽히는 ‘기와양과점’, 매주 다른 가정식 메뉴를 선보이는 ‘홍앤리식탁’, 창 너머로 대릉원이 보이는 ‘페트커피’ 등의 줄이 긴 편이다. 문학 서적만 파는 서점, 실용적이고 감각적인 기념품 가게, 생활한복 대여점 등 이색 업소도 많다. 흑백사진만 찍는 사진관 역시 매력적이다. 대릉원 돌담길 쪽에도 ‘피맥’(피자와 맥주)으로 이름을 알린 ‘987’ 등 젊은 취향의 가게가 제법 많다. 첫째, 셋째 토요일에는 수공예품 등을 파는 장터도 열린다.■ 추억까지 여전하길 시간이 빚은 보물 상자를 열다-광주 동리단길 광주 동구 쪽엔 예술과 문화를 자양분 삼아 시대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 낸 흔적들이 여태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동명동이다. 마을을 감싼 숲길과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책방, 근현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추억의 골목 등이 시간의 보물 상자처럼 모여 있다. 역시 서울의 경리단길에 빗대 ‘동리단길’이라 불린다. 동명동은 옛 광주읍성의 동문 밖에 있던 마을이다. 무등산 자락에서 내려온 동계천을 사이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었는데, 유력 인사들의 관사가 있던 윗마을이 지금의 동명동 카페거리다. 동명동 일대는 한때 학원가로 명성이 높았다. 학부모들이 머물던 카페도 많았다. 최근에는 문화 공간과 이색 카페가 생기며 젊은층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동리단길 가을 산책의 들머리는 ‘푸른길’이다. 동명동 재생의 기틀이 된 길이다. 시민들이 앞장서 경전선 폐철도를 산책로로 바꿨다. 광주역에서 광주천까지 8㎞ 가까이 이어져 있다. 푸른길 곳곳에는 일상과 연계된 길거리 건축물 ‘광주폴리’가 조성돼 있다. 잠시 구경해도 좋고, 다리쉼을 해도 좋을 곳들이다. 동구도시재생지원센터 뒤편의 ‘꿈집’, 한옥을 식당으로 개조한 ‘쿡폴리’ 등이 대표적이다. 푸른길에서 산수동으로 내려서는 길목은 호젓하다. 소규모 책방과 작은 카페가 좁은 골목을 채우고 있다. 윗마을의 부촌과 달리 비좁은 골목에선 투박한 라디오 소리와 도란도란 주고받는 담소가 담장 너머로 흘러나온다. 담장 벽화로 장식된 ‘동밖에 마실골목’도 인상적이다. 동리단길 옆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전남도청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옛 광주 예술을 되짚고 싶다면 궁동 예술의 거리를 찾을 일이다. ‘광주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곳으로, 오래된 찻집과 개미장터 등이 골목을 채우고 있다.■ 나무 품고 푸르르길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수직 세상-창원 가로수길 서울 압구정동의 가로수길과 비슷한 곳이다. 은행나무 일색인 서울과 달리 창원의 가로수길은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수직 세상을 따라 펼쳐져 있다. 가로수길은 한창 확장 중이다. 황리단길이나 동리단길의 업소들이 거의 포화 상태인 것과 다소 다르다. 가로수길 중심부엔 용지못이 있다. 둘레 1.2㎞ 정도의 작은 저수지다. 조선시대 축조된 저수지로 1970년대에 창원이 계획도시로 건설되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모했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밈모 팔라디노의 ‘말’ 등이 전시된 잔디광장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밤엔 더 멋들어진다. 가장 도드라지는 건 보름달이다. 지름 3.8m짜리 등(燈)으로 달을 형상화했다. 보름달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사람이 많다. 음악과 조명이 결합된 음악분수쇼도 펼쳐진다. 용지못 주변은 가로수길이다. 도로 양쪽으로 전남 담양‘급’의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높지거니 솟았다. 모두 630여 그루 정도다. 가로수길은 장방형이다. 총 3.3㎞ 구간에 걸쳐 조성돼 있다. 수직 세상 아래로는 카페촌이 형성돼 있다. 모두 50여개 업소에 달한다. 건물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저마다 개성이 있고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한식당과 레스토랑 등 먹자골목도 형성되고 있다. 카페 겸 빵집인 1997영국집, 커피가 맛있는 경성코페, 흑염소 숯불구이를 내는 송림정 등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 작은 갤러리와 옷 가게 등도 군데군데 들어섰다. 경남도민의 집(옛 경남도지사 관사)과 경남여성능력개발센터, 창원남산교회 주변의 가로수 풍경이 빼어나다. 매달 세 번째 토요일엔 길마켓이 열린다. 일종의 벼룩시장으로, 2013년 처음 시작된 이후 점차 규모가 커지고 있다.
  • [포토] 아쉬운 추석연휴 끝자락을 축제와 함께

    [포토] 아쉬운 추석연휴 끝자락을 축제와 함께

    추석 연휴 아흐레째이자 일요일인 8일 서울 시내 고궁과 공원 등 명소들과 전국 축제장에는 황금연휴를 막바지까지 즐기려는 시민들로 오전부터 북적였다. 이날 수도권 날씨는 미세먼지 농도가 ‘좋음’ 수준을 기록하고 시정(視程)이 약 20㎞에 달하는 맑은 가을 날씨가 펼쳐진 덕에 시내 곳곳에 나들이객이 몰렸다. 연휴 내내 무료개방한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등 4대 고궁은 전국에서 몰려든 가족 단위 방문객과 한복을 빌려 입어 멋을 낸 중고생·대학생들로 가득했다. 서울숲과 한강 둔치 등 시내 공원들에도 돗자리나 캠핑용품을 펼쳐 놓고 쾌청한 가을 날씨를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다. 삼청동·인사동·북촌·서촌과 명동·홍대 등 번화가 역시 연휴의 여유를 만끽하려는 20∼30대 연인들과 젊은이들로 붐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역대 대통령, 추석 연휴 어떻게 보냈나?

    역대 대통령, 추석 연휴 어떻게 보냈나?

    ‘일일 교통통신원’ 역할에 재래시장과 전통 마을 방문까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추석 연휴 일정은 빼곡하다. 최장 열흘간의 ‘역대급’ 연휴인 만큼 가족과의 휴식 일정 외에 민생 현장을 찾는 일정을 많이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대통령들은 주로 가족과 함께 추석을 조촐하게 보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추석 연휴를 주로 청와대 관저에서 보냈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소가 있는 국립현충원을 찾아 성묘했다.이명박 전 대통령은 추석 때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추석특집 아침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대통령 부부의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주제로 대화하며 ‘서민 대통령’ 이미지를 부각했고, 서민정책 현장에서 만났던 인사동 풀빵장사 부부, 구리 시장 할머니 등과도 만났다.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의 선영을 찾아 성묘하고 마을 주민들과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독서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와대나 대통령 공식 별장 청남대에 머물며 독서에 열중했다. 김 전 대통령이 명절 때 읽은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 정도로 관심이 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거제나 청남대에서 휴식을 취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별다른 일정 없이 조용히 추석을 보냈다. 추석 연휴는 역대 대통령들에게 정국 구상의 시간이었다. 물론 모든 대통령들이 평온하게 추석 연휴를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선언하는 바람에 추석연휴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청와대로 돌아왔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1년 9·11 테러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석을 맞아 맘 편히 연휴를 보내지 못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코뿔소 화가 김혜주 ‘달빛 코뿔소’전…10월 4일 인사아트프라자

    코뿔소 화가 김혜주 ‘달빛 코뿔소’전…10월 4일 인사아트프라자

    ‘코뿔소 화가’로 널리 알려진 중견화가 김혜주의 13번째 개인전 ‘달빛 코뿔소’전이 오는 10월 4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린다. 김혜주 화백은 코뿔소를 영혼의 주제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해왔다. 올해 6월 국회에서 열린 남북한 대표화가 미술전시회 ‘백두에서 한라까지’에서는 ‘숲을 닮은 코뿔소’로 남북한 전체 화가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전시회 표제작인 ‘달빛 코뿔소’는 희미한 달빛아래 묵묵히 걸어가는 육중한 무소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넓은 전시장 1개 층을 가득 메운다. 김 작가는 “그동안 동심이 가득한 낙원을 그려왔다면 이번에는 현실과 직면하는 성인의 마음 풍경을 형상화했다”며 “어두운 세상을 헤쳐가는 코뿔소는 밝은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인사아트프라자 (02)736-6347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옛사랑 추억 길 걷는 듯… 도시랑 ‘심쿵 로맨스’

    옛사랑 추억 길 걷는 듯… 도시랑 ‘심쿵 로맨스’

    긴 한가위 연휴 기간에 특색 있는 여행지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한국관광공사가 예술의 옷으로 갈아입은 도시 재생 명소들을 10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서울 성수동의 수제화 거리 등 도시 재생 프로그램이 잘 정착한 10곳을 소개한다.●다시, 예술로 피다-서울 문래창작촌과 성수동 수제화거리 문래동은 한때 서울에서 가장 큰 철강 공단 지대였다. 지금도 철공소 1000여곳이 영업 중인 문래동은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면서 ‘문래창작촌’이란 이름을 얻었다. 100여개 작업실이 들어섰고, 문래예술공장 등 거리 곳곳에 들어선 갤러리와 극장에서는 1년 내내 다양한 전시와 공연이 열린다. 성수동 수제화거리는 업계 종사자들이 앞장서 조성했다. 구두 테마 갤러리 ‘슈스팟 성수’와 수제화 공동 판매장 ‘from SS’, 서울숲의 ‘나비정원’ 등 쇼핑과 체험 공간이 즐비하다. 문래예술공장 (02)2676-4300, 성동구청 문화체육과 (02)2286-5193.●동화 속으로 떠나는 환상 여행-인천 송월동 인천 중구는 개항장 인천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그중 하나가 송월동이다. 조금씩 쇠락하던 송월동은 2013년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통해 동화마을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조성한 동화마을길을 비롯해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11개 테마 길이 조성됐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짜장면을 선보인 차이나타운과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였던 인천아트플랫폼, 개항 당시 인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개항장거리 등도 인천 중구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다. 중구청 관광진흥실 (032)760-6492.●문화와 예술의 옷 입은 오래된 동네-강릉 명주동 강릉 명주동은 고려시대부터 강릉대도호부 관아가 자리했던 행정중심지다. 강릉시청 이전으로 역할을 잃어가던 명주동은 강릉문화재단이 명주예술마당, 햇살박물관, 명주사랑채 등 문화 공간을 운영하면서 변모했다. 지금은 강릉커피축제, 명주플리마켓, 각종 공연 등으로 활기가 넘친다. 명주동 여정은 골목길을 따라 강릉대도호부 관아, 등록문화재인 임당동성당 등을 둘러본다. 왁자한 중앙·성남시장에서 점심과 주전부리를 즐기고, 안목해변에서 향긋한 커피로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강릉문화재단 (033)647-6800.●젊어진다, 유쾌해진다-충주 성내동 성내동과 성서동 등 충주 원도심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월 개관한 관아골 청년몰 ‘청춘대로’가 신호탄이다. 개성을 살린 20여 점포가 입점했다. 충주 원도심에서 청년가게를 열려는 이들은 청년 창업 플랫폼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관아공원 앞 성내동우체국 부지에 오는 10월 말쯤 창업 플랫폼이 개관하면 게스트하우스, 카페, 로컬여행지원센터, 문화예술오픈공작소 등이 운영될 예정이다. 충주 원도심에서 전통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무학시장, 자유시장, 풍물시장 등 여러 시장이 모여 있어 구경거리가 많다. 충주시청 관광과 (043)850-6720~4.●도시가 품은 시대를 산책하다-대전 대흥동과 소제동 근대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대전역 서쪽에 대흥동, 동쪽에 소제동이 있어 연계해 둘러보기 좋다. 대흥동에는 리노베이션한 카페나 오래된 맛집이 많다.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변신한 옛 충남도청 본관 등 등록문화재도 밀집돼 있다. 소제동에는 1920~30년대 지은 철도관사촌이 있다. 전란과 개발을 용케 피한 관사 40여채가 모여 있다. 한자리에서 60년 세월을 보낸 ‘대창이용원’ 등 흔히 볼 수 없는 풍경들도 만난다. 소제창작촌 등 창작 공간을 기웃대거나 소제호 방죽길을 걸어도 좋겠다. 대전시청 관광진흥과 (042)270-3972.●옛 쌀 창고의 변신-서천 문화예술창작공간 1930년대 건립된 옛 장항미곡창고(등록문화재 591호)를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전시와 공연, 체험 등의 공간과 카페를 갖췄다. 창작공간 뒤로는 ‘장항 6080 음식 골목길’과 기벌포영화관 등이 있다. 추석 연휴에도 문을 연다. 판교면 현암리는 낡고 허름한 풍경이 매력적인 시골 마을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독특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발걸음을 이끈다. 판교오일장이 열리는 날 찾아가면 볼거리가 더 풍성하다. 국립생태원과 신성리 갈대밭, 서천군 조류생태전시관 등을 엮어 하루 코스로 돌아볼 만하다. 서천군청 문화관광과 (041)950-4226.●역전의 전성기를 소환하다-영주 후생시장 경북 영주의 후생시장은 1955년쯤 옛 영주역 인근에 형성됐다. 적산가옥을 본뜬 길이 100m의 상가 형태가 다른 지역과 뚜렷이 구별된다. 영주역이 이전한 뒤 쇠락해진 후생시장 등 옛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2014년부터 진행한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부활했다. 상가의 기본 틀을 살리며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인근의 중앙시장과 삼판서고택도 볼만하다. 서천 자전거공원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준다. 무섬마을까지 가는 12㎞ 코스에 이용하기 적당하다. 영주시청 새마을관광과 (054)639-6604.●숲길과 옛 골목, 카페거리가 공존하다-광주 동명동 광주 동명동은 숲과 오붓한 골목, 카페거리가 공존하는 동네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책방, 근현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추억의 골목이 숲과 어우러진다. 서울의 경리단길에 빗대 ‘동리단길’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동명동 재생의 버팀목이 된 ‘푸른길’은 폐철도가 산책로로 변신한 곳이다. 길목에서 만나는 건축물 ‘광주폴리’ 역시 생활의 쉼표가 된다. 옛 도청 자리에 세워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궁동 예술의 거리, 1913송정역시장도 함께 둘러볼 만하다. 광주시청 관광진흥과 (062)613-3622.●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산복도로 산허리를 따라 이어진 산복도로는 부산의 진짜 매력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망양로를 따라 눈이 시린 부산의 풍광을 즐기고, ‘지붕 없는 미술관’ 감천문화마을에서 사진도 찍어 보자. 감천동 옆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던 마을이다. ‘누리바라기’도 꼭 가볼 만한 곳이다. 우뚝 선 부산타워 등 부산의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인근의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에 들러 부산 시민의 삶을 만나 보자. 올여름 부산에서 인기를 끈 송도해상케이블카도 놓치면 안 된다. 부산광역시 관광안내 (051)1330.●쇠락의 그늘 딛고 활력 넘치는 예술촌으로-창원 창동예술촌 옛 마산의 창동 일대는 한때 경남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 2011년 도시 재생 사업으로 창동에 정착한 젊은 예술가들이 빈 점포를 공방과 아틀리에로 꾸몄다. 1955년에 개업한 학문당, 클래식 다방 만초, ‘빠다빵’으로 유명한 고려당, 40여년 역사의 헌책방 영록서점 등이 창동의 옛 낭만을 전해준다. 한복도 무료로 대여 해 준다. 조각가 문신의 작품을 전시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가고파꼬부랑길벽화마을 등을 묶어 추석 여행 코스로 짜도 좋을 듯하다. 창원시청 관광과 (055)225-4724.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 장진호 전투 美노병 방한…“목숨 걸고 지킨 나라, 현 모습 궁금”

    장진호 전투 美노병 방한…“목숨 걸고 지킨 나라, 현 모습 궁금”

    6·25 전쟁 장진호 전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적과 싸웠던 미국 해병대 노병이 정부 초청으로 67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다.국가보훈처는 “오는 18∼23일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의 6·25 참전용사와 가족 등 100여명을 한국으로 초청한다”고 15일 밝혔다. 이들 중에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군 참전용사 딕 스롬씨도 포함됐다. 당시 미 해병대 일병이었던 스롬씨는 장진호 근처 유담리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미 7해병 3대대 소속이었다. 스롬씨는 방한을 앞두고 보훈처에 보낸 메시지에서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과의 처절한 전투 속에서 심하게 다친 친구를 간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장진호 전투 이후) 67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모습은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며 “목숨을 걸고 지켰던 나라를 다시 방문할 기회를 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한국에 오는 푸에르토리코 참전용사는 16명이다.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해의 미국 자치령으로,6·25 전쟁에 6만 1000여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참전용사들은 방한 기간 서울현충원, 판문점, 전쟁기념관을 방문하고 인사동, 창덕궁, 한국민속촌 등을 관광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최초의 사설 공연장 원각사 잇는 ‘정동극장’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최초의 사설 공연장 원각사 잇는 ‘정동극장’

    근대의 향기가 가득한 정동에서 서울미래유산은 정동극장이 유일하다. 대부분 지정문화재나 등록문화재이기 때문이다. 1995년 건립된 정동극장은 근현대 건축물인 정동교회와 동일한 붉은 벽돌을 사용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점이 보존가치를 인정받았다. 정동극장의 정체성은 뭐니 뭐니 해도 원각사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데 있다.정동극장은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1908년에 문을 열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근대 극장 원각사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지어졌다. 원각사는 1902년 실내 공연장 형태를 갖춘 최초의 관립극장 협률사가 대중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새로 인가를 얻었다. 종로 새문안교회 앞에 위치한 원각사는 신극의 효시인 이인직의 ‘은세계’를 처음으로 공연한 기념비적인 공간이다. 두 곳 모두 개화기의 대표적 서양식 극장으로 산대놀이, 창극 등 우리 민족정서를 기본으로 한 대중공연장이었다. 이후 동대문 부근의 광무대, 종로의 단성사, 낙원동의 연흥사를 비롯해 종로 우미관, 을지로 국도극장, 인사동 조선극장, 서대문 동양극장 등 상설 영화상영관 시대로 공연예술의 중심이 옮겨 갔다. 정동극장은 마당과 공연장으로 구성돼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설치미술가 전수천의 1997년작 ‘혹성들의 신화, 놀이, 비전’이라는 대형 외벽 벽화가 관객을 맞는다. 가로 11.5m, 세로 6.7m 크기에 35만개의 타일로 구성된 이 벽화에는 한국적 율동미를 자랑하는 여인상과 비전을 상징하는 나선형, 사람들의 다리와 가족 등이 현대와 전통의 조화와 이상적인 문화공간을 그려낸다. 마당 한쪽에는 조선말 명창 이동백(1866~1949)의 입상이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라는 편제를 초월한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한 사람이다. 주로 원각사 무대에서 활동한 명창의 가락이 정동극장까지 이어지도록 1999년 당시 문화관광부가 세웠다. ‘정동극장 상설국악공연’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전통예술공연을 무용·풍물·기악연주·소리의 4종류로 나누어 궁중음악과 민족음악 모두를 다양하게 공연했다. 직장인들을 위한 ‘정오의 예술무대’를 통해 일반 관객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사물놀이, 탈춤, 한국무용, 오고무 연주, 국악 등 한국 전통 공연예술을 총망라한전통 뮤지컬 ‘미소’(美笑) 전용공연장으로 자리잡았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이젠 자유로워졌다” 오치균의 ‘30년 로드무비’

    “이젠 자유로워졌다” 오치균의 ‘30년 로드무비’

    오치균(61)을 말하자면 두 가지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하나는 손가락으로 그리는 화가, 둘째는 그림 많이 팔아 부자가 된 화가라는 것이다. 그는 실존의 명암을 붓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표현한다. 유화 물감과 모델링 원료를 섞은 안료를 손가락에 묻혀 두터운 마티에르의 느낌이 살아 있는 그의 뉴욕 시리즈, 시골집의 붉은 감 시리즈, 사북 시리즈는 한때 컬렉터들의 소장목록에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꼽히며 날개 돋친 듯 팔렸다.그게 전부일까? 우리가 간과했던 세 번째가 있다. 그는 끝없이 여행하며 자신의 열정을 풀어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예술가다. ‘늘 꿈꾸는 방랑자’이길 원하는 오치균의 30여년 여정을 담은 작품들이 ‘로드무비’라는 타이틀로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그동안 발표하지 않고 꼭꼭 숨겨 두었던 작품들, 그리고 최근 뉴욕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신작들이 선보인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전시이자 오치균 그림의 맥락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기획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그는 “가 볼 만큼 가 봤고, 뚝 떨어지기도 해 보니 이제 마음이 자유로워졌다”면서 “60대에 접어들어서도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행지에서 한동안 머물며 작업해 왔다. 전시는 마치 작가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동안 여행 속에서 그려진 작품들을 재구성해 보여 준다. 계획된 목표나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물이 아니라 여행 과정에서 느끼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화면에 담아낸 작품들이다. 그의 여정은 브루클린대학원에 다니던 뉴욕 시절부터 시작된다. 이방인 유학생으로서 느껴지는 타인의 시선, 빛과 단절된 자취방의 깜깜한 실내에서 나신으로 괴로움에 뒹굴고 있는 인체를 그렸다. 가난한 유학생의 처절한 자화상이었다. 이때의 서울풍경은 역시 어둡고 힘든 세상일 뿐이었다. 오 작가는 귀국 후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 다시 뉴욕으로 갔다. 유학생 시절 보이지 않던 뉴욕의 다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보이고 풍경과 동물이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시각이 변화했다. 그리고 산타페에서 보낸 1년 동안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조가 들어앉았다. 1996년 서울로 돌아온 이후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따뜻하다. 사북 시리즈와 감 시리즈에서 보이는 시골 풍경은 우리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그의 여행이었다. 그는 여행지에서 발견하고 느낀 것을 손가락으로 물감을 만지고 경험하며 이미지로 재현한다. 작가는 “가격이야 어떻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화가라고 손가락질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작업한다”면서 “무엇보다도 신작을 하면서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온 게 너무 좋다. 어차피 장삿속으로 팔 계획이 없는 작품들이니 많이 와서 감상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글·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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