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인민
    2026-07-19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7-19
    검색기록 지우기
  • 미령
    2026-07-19
    검색기록 지우기
  • 보라
    2026-07-19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7-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723
  • 中, 기준금리 0.27%P 인상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이 예금금리와 대출금리를 각각 0.27% 포인트씩 인상했다. 올들어서만 세 번째다. 이번에는 2분기 GDP 성장률이 11.9%로 1994년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하고,6월 소비자물가가 4.4%에 달하는 등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한 조치다.소비자물가 4.4% 상승은 작년 평균치의 3배 가까이 되는 것으로, 뚜렷한 인플레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써 21일부터 1년만기 예금 기준금리는 3.33%로, 대출 기준금리는 6.84%로 각각 올라간다. 인민은행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통화 공급 및 신용 팽창, 투자증가 등을 억제하기 위한 인상이라고 밝혔다.전문가들은 금명간 20%인 이자소득세가 조정되거나 폐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무원에서 이와 관련된 시행규칙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의 지불준비율도 상향조정될 것으로 관측된다.일각에서는 0.27% 포인트의 금리인상으로는 달아오른 경기를 식히기에는 부족하다는 진단도 내놓고 있다. 중국에 의존도가 큰 국내 기업들에 대한 악영향도 우려된다.jj@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베이징올림픽 1년 앞으로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베이징올림픽 1년 앞으로

    베이징올림픽이 약 1년 앞으로 다가왔다.1964년 일본 도쿄,1988년 대한민국 서울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이번 올림픽은 2008년 8월8일 개막,17일의 열전을 펼친다. 또 2회 연속 및 통산 6회 종합 10위권 진입을 노리는 한편 수영 등에서 새 역사 쓰기를 준비 중인 한국의 메달 전망을 짚어본다.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 선전부 왕후이(王惠) 상무부부장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현지의 준비 상황과 달아오르는 열기 등도 살펴본다. ■ 베이징 여름올림픽 한국 메달 전망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에서는 한국스포츠 역사가 새로 쓰인다.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그것도 금메달을 캘 가능성이 짙다. 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병관 이후 16년 만에 역도 금메달이 유력하다. 유도와 탁구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를 노린다. ●수영 불모지서 첫 금 캔다 한국이 올림픽 수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0년 로마올림픽. 당시 다이빙 종목에 나섰으나 참가에 만족해야 했다. 적어도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는 상황이 그랬다. 아테네서 부정 출발로 실격, 눈물을 뿌렸던 ‘18세 괴물’ 박태환(18·경기고)이 한국 수영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맡았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박태환은 지난해 도하아시안게임 3관왕에 올랐고, 호주 멜버른 세계선수권에서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200m 동메달을 따내며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제는 수영전문브랜드 스피도의 후원으로 전담팀을 꾸려 올림픽 정복을 위해 ‘열혈 자맥질’을 하고 있다. 중장거리 전문이지만 단거리에도 재능을 보인 박태환으로서는 여러 종목에 도전하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테네 여자 역도 75㎏이상급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은메달에 그쳤던 ‘피오나 공주’ 장미란(25·고양시청)은 베이징에서 메달 색깔을 금빛으로 바꿀 채비를 갖췄다. 중국 여자 역도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장미란은 딩메이위안(시드니 금)과 탕궁훙(이상 28·아테네올림픽 금)의 뒤를 잇는 무솽솽(23)과 맞붙게 된다. 장미란은 무솽솽과 지난해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서 장군멍군했다. 안방 텃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실력의 우위를 쌓아야 하는 게 과제다. 유도 그랜드슬램에 빛나는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26·KRA)는 치열한 내부 경쟁을 뚫어야 한국 유도 사상 첫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할 수 있다.73㎏급에서 김재범(22·KRA), 왕기춘(19·용인대) 등 후배들의 도전이 거세기 때문. 이원희는 고질적인 발목 부상 치료를 위해 독일에서 수술받고 재활 중이다. 베이징을 위해 오는 9월 세계선수권 출전을 포기한 것. 이원희는 완벽한 몸상태로 대기록에 도전한다는 각오다. ●경계선을 뛰어넘어라 탁구와 배드민턴은 그동안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 5개와 3개를 땄다. 세계적인 경기력을 감안한다면 조금 더 많은 금메달을 추수했어야 했지만 ‘최강’ 중국이 늘 걸림돌이었다. 이 종목에선 세계 1∼3위가 대부분 중국 선수들이다. 아테네에서 왕하오를 격파하고 남자 단식 정상에 섰던 유승민(25·삼성생명)이 만리장성 2회 연속 격파에 앞장선다. 맏형 오상은(30·KT&G)도 단·복식에서 칼을 갈고 있다. 배드민턴에서는 단식보다 복식에서 기대가 크다. 남자 복식과 혼합 복식의 기대주인 ‘제2의 박주봉’ 이용대(19·삼성전기)가 최근 손가락 골절 부상에서 벗어나 다시 올림픽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때 남자 단식 세계 랭킹 1위였고 전영오픈 준우승을 일군 이현일(27·김천시청)이 국가대표로 복귀, 힘을 보탰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 “한국은 TOP 10” “이번에도 종합 10위는 꼭 지켜내야죠. 하지만 베이징올림픽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한국스포츠의 위기가 될 겁니다. 또 기회이기도 하고요.”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1년여 앞둔 ‘선수들의 요람’ 태릉선수촌의 풍경은 ‘정중동’이었다. 최초로 여성 촌장에 발탁, 햇수로 3년째 선수촌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이에리사(53) 촌장은 내년 베이징에서의 메달 전망을 묻는 ‘우문’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 듯했다. 그는 “지금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는 올림픽 종목별 쿼터(출전권) 확보 전쟁이 한창”이라면서 “그런 만큼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도하아시안게임이 끝나자마자 선수촌은 베이징올림픽 체제로 바뀌었고, 이제 가장 큰 목표는 4년 전 어렵게 복귀한 한 자릿수(9위) 종합순위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베이징올림픽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중국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익숙한 곳입니다. 그러나 스포츠 환경으로 따지면 꽤나 먼 곳이죠. 중국은 올림픽 최초로 종합 1위를 벼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메달 전망 종목과도 많이 겹칩니다. 악재인 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스포츠의 위기입니다. ▶종합 10위를 지키기 위한 메달수는 예측할 수 있습니까. -아테네올림픽에서 우리는 금 9개, 은 12개, 동 9개로 ‘톱10’안에 재진입했습니다. 종목수가 다소 늘어나고 중국의 약진을 감안하면 최소한 금 12개는 따야 수성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현재 올림픽 출전권 현황은. -7월 현재 6개 종목에서 55명이 출전권을 획득했습니다. 농구는 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수영은 세계선수권을 통해 5명이 쿼터를 확보했습니다. 역도와 사격, 근대5종, 하키 등도 각급 선수권 상위 성적으로 출전이 확정됐습니다. 탈락한 건 지역 예선에서 4위에 그친 소프트볼이 유일합니다. ▶향후 선수촌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베이징체제’입니다. 선수촌은 기존 110일에서 2단계에 거쳐 올해 연간 180일까지 훈련일수를 늘렸습니다.1인1실이던 지도자 방 배정도 2인1실로 바꿔 선수들에게 더 공간을 할애했고, 국가대표 1.5진까지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이 됐습니다. ▶베이징올림픽을 기대하는 국민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은. -올림픽은 항상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물론 메달도 중요하고 순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통해 급변하는 세계 스포츠 환경 속에 한국스포츠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는 꼭 짚어봐야 합니다. 시드니올림픽 때 경기인들 사이에서는 “한국 체육의 위기”라는 의식이 팽배했습니다. 이후 4년 만에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근근이 버틴 게 사실이고, 내년 또 다른 위기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체육인들의 끊임없는 반성과 노력, 그리고 국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지속된다면 그건 우리에게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100년의 꿈 이뤄…中 저력 세계에 알릴 것” 중국인의 ‘100년간의 염원’이라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 1년여 앞으로 다가왔다. 중국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강대국으로서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나아가 내부의 정치·경제적 모순까지 해결하는 기회로도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같은 대내·외적인 민감성 속에 그동안 올림픽 준비는 극도의 ‘보안’ 속에 이뤄져 왔다. 올림픽조직위 관계자들의 언론 접촉이 통제되고 있는 가운데 어렵게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 선전부 왕후이(王惠) 부국장을 만나 준비상황을 들어봤다.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아녜요. 중국이 고른 날짜가 아녜요.” 2008년 8월8일 8시에 거행되는 2008년 올림픽 개막식 시간이 중국이 고른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베이징 시내 중국 외교부 청사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올림픽조직위원회 선전부 건물에서 만난 왕후이(王惠) 부국장.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를 골라 개막일을 잡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부인했다. 중국인은 ‘(돈을)벌다.’는 발(發·파)과 발음이 비슷해 아라비아 숫자 8(바)을 좋아한다. “우리는 당초 9월에 하길 원했지요. 가을 베이징의 날씨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런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8월을 제안했던 거예요.” 그는 “8시 개막시간은 IOC 관례에 따른 것이고,8일은 양자간에 논의를 거쳐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준비 상황은. -100년만의 꿈이 이뤄질 날이 1년 남짓 남았다.28개 주요프로젝트와 38개 하위,302개 단위 항목으로 나누어 진행할 일정이 모두 확정됐다. 여름올림픽, 장애인올림픽 2개 대회 모두 최대 규모로 치러질 것이다. 10만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데 신청자가 벌써 53만명을 넘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지난 6월로 1차 표 예약이 마감됐다.700만장 가운데 490만장이 예약됐다.4000여종의 관련 상품이 개발됐다. 성화봉송로도 지난 4월 발표됐다. 시간도, 길이도 가장 길고 방문도시도 가장 많은 봉송로다. ▶왜 100년만의 꿈이라고 부르나. -1908년 톈진(天津)의 한 청년 잡지에 이같은 글이 실렸다.‘중국은 언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언제 첫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 언제 올림픽을 주최할 수 있을까.’그 뒤로 1932년 중국인으로는 류창춘(劉長春)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고,1984년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중화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중국이 올림픽에 참여한 것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처음이다.) ▶어떤 올림픽이 되기를 원하나. 중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가장 특색있는, 중국적 특성을 남기고 싶다. 세계 역사에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남기를 원한다. 중국과 중국 문화, 나아가 아시아, 동방의 문화를 보여주고 싶다. 아시아에서는 1964년 도쿄.1988년 서울 단 2곳만 올림픽을 개최했을 뿐이다. ▶과거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 -우리는 올림픽을 통해 돈을 벌 생각은 없다. 입장료는 대단히 싸다. 아테네의 3분의1∼5분의1 수준이다.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가장 싼 표는 10위안(1200원)짜리도 있다. ▶인류와 올림픽 역사에는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나. -중국의 4억명 청소년들이 지금 올림픽 정신을 일깨워가고 있다. 어떤 대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숫자다.50만세트의 각종 교재가 전국으로 퍼져갔다.556개의 시범학교가 있다. 올림픽 경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이상이다. ▶성적에 대해 얘기해 보자. 홈그라운드에서 미국을 꺾고 금메달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게 얘기들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실 가능성이 크지 않다. 아테네올림픽에서 미국은 35개, 중국은 32개, 러시아가 29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금·은·동 합계를 보면 상당한 실력차가 있다. 미국 103개, 러시아 92개에 비해 중국은 63개밖에 되지 않는다.(중국은 과거 공식적으로 ‘최선을 다해 금메달 1위를’이란 목표를 세운 적이 있다. 일부에선 미국을 제치고 종합 1위를 위해 관련 전력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있다는 지적들도 있다.) ▶날씨 때문에 기록 경기에 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베이징이 많이 더워졌다. 세계적인 온난화 현상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이 가장 온도가 높은 올림픽 개최도시는 아니다. ▶문제는 습도 아닌가. 베이징의 여름이 습도가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다. -이미 인공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수준에 와 있다. 이번 7,8,9월 최종적인 기온 테스트를 하게 돼 있다. 그 결과를 보고 어떤 방법을 쓸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베이징 올림픽이 성공하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남북화해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길 원한다. -지난해 9월 서울에 가서 많은 공부를 하고 왔다. 당시 한국민들이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고맙다. jj@seoul.co.kr ■ “육상·수영 금맥 캐자” 中 119프로젝트 극비 진행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녹색·과학기술·문화올림픽’이란 베이징올림픽. 중국은 지난해까지 환경보호시설, 도시기반시설 등 대부분의 공사를 마쳤다. 점검 테스트와 조직 운영 등을 점검하고 있다. 총 37개 경기장 가운데 31개가 베이징에 위치해 있다. 칭다오, 홍콩에 각 1개씩이다. 이런 상황 속에 중국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종합 우승 여부다.‘최선을 다해 금메달 1위를(力爭金牌榜第一)’ 중국이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따내기 위해 내건 표어다. 아테네올림픽에서 미국 35개에 이어 32개로 2위를 하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는 데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린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 16개로 4위를 했던 중국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28개로 3위를 기록했다. 그러기 위해 중국은 체조, 다이빙 등 기존의 금맥 외에도 육상과 수영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한다. 중국이 2001년 8월 올림픽 개최 확정이후 ‘119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도 이런 필요에 의해서다.119는 육상과 수영에 걸린 금메달의 합계. 육상, 수영에서의 열세를 반드시 극복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국 체육계는 곧바로 ‘5대 대책’을 수립하고 지도자 선발과 육성에 착수했다.‘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불러들인다.’(走出去,請進來)는 원칙 아래 선수들을 전지훈련 등으로 해외로 내보내고, 해외의 유능한 감독진을 유치했다. 많은 국제대회를 유치해 많은 선수들에게 경험을 축적시키는 데 애썼다. 중국 체육에 ‘과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상당히 체계적인 선수 배양 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은 남부 고원지대인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등 천혜의 훈련지도 갖고 있다. 국제 스포츠계는 오래전부터 고지대에서의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켜왔다. 폐활량 증대와 지구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낸다. 서부 칭하이(靑海)성에 있는 또 다른 고원 훈련 캠프인 ‘국가 고원체육훈련기지’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특수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1992년 세계청소년육상대회의 800m,1500m,3000m,1만m를 석권하고 1993년 독일 세계육상경기에서도 1500m,1만m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등 저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중국 전역 1만 7000개에 이르는 스포츠 아카데미에서 배출된 스포츠 재목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져 어떤 효과를 낼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2005∼2006 국제수영연맹 쇼트코스 월드컵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여자 평영 200m에서 은메달을 따낸 소녀 수영선수 왕췬처럼, 나이 어린 스포츠 스타의 탄생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다. 중국의 보배 110m 허들의 류시앙 등도 건재하다. jj@seoul.co.kr ■ 옥(玉) 넣은 메달 특색 중국 문화 알리기는 베이징올림픽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다. 올림픽을 통해 세계 각국에 문화대국,‘문화 종주국’인 중국을 알리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림픽 상징물에서부터 각종 도안에 이르기까지 중국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메달부터 달라졌다. 옥을 넣었다. 금·은·동에 들어간 옥의 품질이 각각 다르다. 옥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로부터 존귀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성화는 종이를 말아올린 모습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가 종이다. 성화를 장식하고 있는 상서로운 구름이나 자홍색도 중국적 특성이다. 로고는 고대 인장의 모습으로 한자의 모습과 달리는 사람의 모양을 나타낸다.
  •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대한민국을 건국한 제헌헌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59주년이다. 그 세월, 헌법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는 간난을 겪으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7월17일 제헌절을 기리는 이유가, 거기에 우리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리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입법부·행정부 그리고 사법부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 공직자들이 단상을 빛낸다. 하지만 헌법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국가 기능을 이끌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준 이 헌법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이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었다는 점이다. 제헌이후 9차례의 헌법개정사를 보면, 헌법의 가슴과 팔과 다리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들이 바로 권력의 자리에 있거나 그 과정에 참여한 일부이었기 때문이다. 건국과 부국(富國)의 공은 인정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 및 초대 대통령에 한한 3선연임제 개헌이나 박정희 정부의 대통령 3선연임제 개헌이 그 범주에 속한다. 심지어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 인사들이 뽑은 유신 대통령, 대통령선거인단이 선출토록 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전두환 정권도 있었다. 그 곡절 끝에,19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제정된 현행 헌법에 의하여 국민 직선으로 뽑힌 단임 대통령인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정부에 이어 지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있다. 이를 보면 우리 헌정사는 헌법을 무시한 권력자들의 공적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징벌한 도덕적 국민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월 대통령 4년연임제 개헌 의사를 밝히면서 헌법을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까지 말한 노 대통령이 반년도 되지 않아 ‘이놈의 헌법’이라고 한 말은, 그래서 의외였다. 헌법이 곧 시대정신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이 표출하는 시대정신은,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헌법 정신을 재단 또는 훼손하는 일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 의지임을 노 대통령은 정녕 몰랐던 것인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만들고 형성하는 규범이지 권력자가 재단하고 자르는 옷감이 아니다. 그래서 그 국민을 노동자·농민 등에 한정하고 그들을 민중 내지 프롤레타리아로 부르면서, 그들에게만 주권이 있으며 나머지 국민에게는 주권자가 아닌 현대판 농노 내지 신민으로 남게 하는 인민독재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국헌법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북한의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조차도 무시하고 아버지의 피로 권력을 승계 받아 북한 인민들을 아사시킨 김정일 체제를 우리 헌법 제3조는 명확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 헌법 원칙을 지키면서 북한 인민을 위한 대북정책을 펴는 일이야말로 국민을 위하는 위민(爲民)의 헌법정신이다. 제헌절은 권력자들이 새삼 옷깃을 여미고 가슴에 손을 얹어 이를 살피도록 하여 헌법 제정일이 대한민국을 억만년의 터로 만든 날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명박·박근혜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한 당내경선 레이스가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관련 발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국가정보원은 대선 주자의 부동산 관련 정보를 불법으로 열람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예상되는 대선주자들의 부동산 점유, 사생활 소문, 정당 바꿔치기 등의 헌법부적합 행태, 김정일의 노골적 헌정 개입이 우려된다. 우리는 5년에 한번 찾아오는 이 대통령선거가 한국사회를 위헌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하면서 헌법을 블랙홀로 몰고 가는 일만은 절대 헌법의 정신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제헌절 기념식이 그 노래가 말하듯, 헌법이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임을 확인하여 내년 헌법 제정 60주년을 맞이하게 하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 FBI ‘中 간첩 정보 찾습니다’ 광고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 간첩에 대한 정보를 찾습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광고에 중국 화교 사회가 발끈하고 나섰다.FBI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어로 발행되는 몇몇 화교 일간지에 게재한 이 광고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개연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 5일자에 따르면 FBI는 “과거 화교들은 파괴분자들이 미국에 위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도록 FBI를 도와 줬다. 만약 국가 이익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면 당신과 성실하게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다.”는 광고를 냈다. 이어 “중국 국가안전부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FBI에 연락하기 바란다.”며 중국의 특정기관을 거론했다. 미국 FBI 샌프란시스코 지부가 지난달 30일부터 성도일보(星島日報)와 세계일보(世界日報), 명보(明報) 등 현지 화교 대상 일간지에 실은 것이다. 이 광고는 현지 화교 사회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고, 심지어 광고를 실었던 성도일보조차 FBI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환구시보는 1면을 포함,2개 면을 할애해 비중있게 보도했다.선딩리(瀋丁立) 푸단(復旦)대 미국연구센터 주임은 “FBI가 이런 광고를 게재한 것은 평범한 미국인을 동원해 (중국을 적으로 가상한) 방첩활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라며 “중국도 미국이 중국에서 벌인 산업스파이 활동을 공개하고 중국인이 미국인을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고 흥분했다. 그러자 FBI는 현지 매체를 통해 수차례 “외국 정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FBI가 아니라 중앙정보국(CIA)의 임무”라고 발뺌했지만 사태를 수습하지는 못하고 있다.jj@seoul.co.kr
  • [특별기고] 한국의 20년, 스페인의 30년/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특별기고] 한국의 20년, 스페인의 30년/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서울신문이 지난 4월부터 12회에 걸쳐 연재한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기획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즈음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가 특별기고를 보내왔다.1987년 6월 항쟁을 독일에서 지켜봐야 했던 송 교수는 “일반적으로 지난 일을 수직적으로 고찰하는 글들이 많아 수평적인 비교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며 스페인 민주화 30년을 통해 한국 민주화 20년을 성찰했다. 특히 그는 “6월 항쟁 20주년은 서울 땅을 37년 만에 밟았던 2003년 당시 절박하게 느꼈던 ‘더 많은 민주주의’의 과제를 상기시킨다.”고 역설했다. ●다방(茶房)의 광고문과 오웰의 기록 20년전 6월 민주항쟁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어느 다방에서 “오늘 기쁜 날, 차 값은 무료입니다.”라고 내건 광고를 담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나는 ‘동물농장’,‘1984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을 떠올렸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시민전쟁(1936∼1939)에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하여 참전, 목에 관통상까지 입었다.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 의하여 압살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총을 들었던 ‘인민전선’의 초창기 승리를 추억하며 그가 남긴 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디어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와 있다. 인간적 존재는 인간적 존재로서, 그래서 더 이상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남아 있지 않으려 했다.” 스페인도 독재의 어두운 길을 벗어나고 내전의 상흔을 치유할 수 있는 전기(轉機)를 마련한 1977년 6월을 지금 기념하고 있다. 올해로 스페인의 민주화가 30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서유럽에서 스페인뿐만 아니라 그리스, 포르투갈에서도 한국처럼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자기위안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확립이 얼마나 힘든 과제라는 것도 상기시킨다. 이러한 나라들과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성숙 과정과 조건들은 달랐지만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의미는 분명하다. ●정책에 기초한 중도통합의 정치 한국 사회의 지난 20년 민주화과정 자체를 아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 현실과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을 잃고 ‘유신’의 향수에 완전히 젖어 지난 20년의 시간을 단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해온 역사로 폄하하는 세력도 있다. 이 세력은 특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시간을 순전히 ‘잃어버린 10년’으로만 평가하려 든다. 2005년 봄 의회의 결정으로 마드리드시내에 있는 7m 높이의 프랑코동상 철거와 함께 프랑코 시절의 흔적들이 공공장소나 공공건물로부터 지워졌으며 정치 무대에서도 프랑코 지지세력(팔랑헤)도 이미 사라진 사실과 비교해 보면 한국사회의 민주화의 현주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보다도 민주화의 과정이 가져오는 혼란과 충격을 완화하며 중심을 잡는 중정무편(重正無偏)의 개인이나 정치 집단의 역할에 달려있다.1977년 12월에 사망한 프랑코를 추종했던 일부 민병대 대원들이 일으킨 1981년 2월 쿠데타 시도를 단호하게 좌절시켰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역할은 컸다. 또 비록 의회의 과반수에 항상 미달하지만 국민당(PP) 중심의 중도우파와 사회노동당(PSOE) 중심의 중도좌파는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정치사회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스페인도 지역주의 또는 지방주의가 강하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비록 남북한의 분단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심하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하는 카탈루냐 지역이나 바스크 지역은 중앙 정부와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바스크 지역의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테러를 수단으로까지 삼고 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위에 말한 정권 교체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좌우세력이 중도를 합리적으로 견인해내는 데 있다.200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사망한 2005년 3월의 마드리드 테러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반(反)테러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곧장 걷잡을 수 없는 정치사회의 불안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는 테러문제가 아니라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을 둘러싼 이른바 남남갈등이라는 문제가 있다. 냉전시대의 색깔론에 갇혀 있는 사회적 갈등이 어떻게 합리적 정책에 기초한 중도통합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지는 한국사회가 직면한 숙제다. 또 과거와는 달리 북의 핵실험에 대해 남쪽 국민이 차분하게 대응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남쪽 사회도 이제는 분단 문제에서 파생된 갈등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는 낙관론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도 현재의 남남갈등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결국 중도통합의 과제를 지나치게 만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민주화 자유무역협정과 사회 양극화로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이 지금까지 구축해온 민주화의 구조를 허물 수 있다는 우려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를 오히려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몽적인 주장이 많다. “민주화보다 경제가 중요하다”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여기에 속한다.“민주화가 밥을 먹여주는가.”라면서 개발독재의 향수에 젖어있으면서도 세계화 시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민주화가 바로 경제발전을 추동(推動)하였던 스페인의 경우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인구는 남한보다 조금 적지만 지금 국내총생산은 더 큰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 속에서 유럽연합의 평균 성장률보다 높은 착실한 경제성장을 해왔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통합과 세계시장이라는 이중적 세계화의 과제 앞에 선 스페인은 기술개발, 높은 실업률과 이주민 문제를 안고 있다. 영미나 북구와는 달리 사회 성원의 안전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적인 복지체계를 구축해온 스페인도 세계화의 도전을 받고 있다. 또 농업과 관광, 서비스분야 중심의 스페인이 세계화에 대처하는 전략은 자동차·선박·전자산업 위주의 남한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경제규모를 지닌 두 나라의 경제사회의 미래를 서로 비추어 볼 수 있다. ●자만과 자조를 넘어 프랑코독재의 잔영(殘影)이 드리웠던 1981년 봄, 국방색 전투복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민병대가 순시를 했던 바르셀로나시의 중심가 람브라스를 필자는 2001년 봄 꼭 만 20년 만에 다시 찾았다.1992년 올림픽을 치렀던 바르셀로나의 분위기는 너무나 부러웠다. 자유스러운 사회의 숨결이 도시의 곳곳에 스며들어 만들어 낸 발랄한 분위기와 화려한 색조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필자는 2003년 가을 37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다. 당시 쓰라렸던 경험 속에서 필자가 절박하게 느꼈던 ‘더 많은 민주주의’의 과제를 6월 민주항쟁 20돌이 상기시킨다. “이미 민주화됐다.”라는 자만이나 “엽전이 별수 있나.”라는 자조를 넘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로서 스페인의 지난 30년을 떠올리게 된다.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 “에이 재수없네” 성폭행녀 마주쳐 잡힌 中사내

    “에이,재수 더럽게 없네.며칠만 더 잠수하고 있었어도 붙잡히지 않았을 텐데….” 중국 대륙에 한 30대 남성이 물건을 훔치려고 들어갔다가 자고 있는 여성을 보는 순간 사악한 마음이 생겨 성폭행으나 이튿날 길거리서 마주치는 바람에 덜미를 잡혀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판위구에 살고 있는 한 30대 남성은 저녁때 물건을 후무리기 위해 가정집에 들어갔다가 자고 있는 여성의 고혹적인 모습에 반해 성폭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그 이튿날 성폭행 피해 여성과 길거리서 마주치는 바람에 붙잡혔다고 신식일보(信息日報)가 22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사건의 장본인은 후난(湖南)성 헝양(衡陽)시 출신의 천(陳·30)모.지난 2006년 11월18일 오후 6시쯤,천은 남의 물건을 훔치기 위해 한 한골의 가정집에 몰래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후무릴 물건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천은 거실 소파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 리(李)모씨를 본 순간은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해사한 외모의 리씨가 잠 자는 모습이 너무나 어여쁜 탓에 도둑질할 생각마저 잃고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물실호기(勿失好機·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그는 그녀가 자고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가지고 있던 칼로 들이대며 욱대겼다.“꼼짝마라.내 말을 듣지 않으면 뱃구레에 맞창이 나는 것은 물론,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잠자다 잠을 깬 리씨는 너무 겁이 난 나머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자신의 욕심을 채운 천은 곧바로 도망쳐 나온 까닭에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건 다음날인 19일 저녁때쯤 전날의 ‘기분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레이양시 중심가서 어깨를 활짝 펴고 걸었다.하지만 이게 웬일인가.원수가 외나무 다리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반면 성폭행당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 바람을 쐬러 거리에 나온 리씨는 한 게임방에 ‘늠름하게’ 서있는 남자를 얼핏 봤다.그런데 그 남자는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한참을 생각해 보니 어제 자신을 성폭행한 바록 그 남자가 분명했다. 이에 조용히 그곳을 벗어나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하는 한편 큰 소리로 “성폭행범 잡아라.”라고 소리쳐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이 합세해 도망치는 천을 붙잡았다. 천은 그러나 공안 당국에서 당일 리씨를 성폭행한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사건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텼다.이에 공안당국은 DNA검사를 했고 그결과 그가 성폭행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판위구 인민법원은 천에게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北 “BDA자금 인도적 사용”

    北 “BDA자금 인도적 사용”

    북한 외무성은 25일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됐던 자금이 북한 계좌로 송금됐음을 확인하고, 이 돈을 당초 계획대로 인도적 목적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6자회담 2·13합의 이후 4개월여를 끌어온 BDA문제가 완전히 해결돼 비핵화 이행이 속도를 낼지 주목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BDA에 동결됐던 자금이 우리 요구대로 송금됨으로써 마침내 말썽 많던 동결자금 문제가 해결됐다.”며 “동결 해제된 자금은 계획대로 인민생활 향상과 인도주의적인 목적에 쓰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대변인은 이어 “동결자금 문제가 해결된 조건에서 우리도 ‘행동 대 행동’원칙에 따라 2·13합의 이행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며 “그 일환으로 26일부터 평양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대표단과 핵시설 가동중지 및 검증·감시와 관련한 협의를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한 외교소식통은 “북측은 이 자금으로 쌀·옥수수 등 식량과 비료, 의약품 등을 구입하고 학교 지원에도 쓸 것으로 예상된다.”며 “6자회담의 다른 5개국에서 이 돈이 인도적 용도로 제대로 쓰이는지에 대한 감시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中 무기 제조업체 외국인 투자 개방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 인민해방군이 ‘자본’의 진입을 허용하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의 무기 제조업체들이 외국인 투자에 개방되고 국내외 증시 상장도 가능해진다고 24일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중국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국유자산관리위원회의 ‘군수산업체 지분제도 개선 지도안’은 군수산업 현대화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영 무기 업체가 아닌 사영 업체들이 생산한 무기를 사들이는 등 무기 구입선의 다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상황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는 데 있어 사영 업체가 국영기업들보다 신속하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군은 과학·기술 측면에서 혁신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며 팽배한 관료주의 탓에 효율적이고 신속한 무기 조달이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는 “이번 조치는 군수 업체들의 지분구조와 중국 군사 하드웨어를 현대화하는 것은 물론 국방산업의 능력과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정부가 “무기 제조업체들 간의 지분 교차 취득을 장려한다.”고 밝힌 것은 이번 개혁작업을 통해 수년내에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 재벌’을 육성하겠다는 뜻으로 분석된다.현재 수준으로도 중국 최대의 무기 제조업체인 중국무기산업집단공사는 총자산 1400억위안(약 17조원)으로 연구와 배급은 물론 지대공미사일, 탱크 등 첨단무기를 생산하는 자회사 140여개를 거느리고 있다.jj@seoul.co.kr
  • “에이 재수없네” 성폭행녀 마주쳐 잡힌 사내

    “에이,재수 더럽게 없네.며칠만 더 잠수하고 있었어도 붙잡히지 않았을 텐데….” 중국 대륙에 한 30대 남성이 물건을 훔치려고 들어갔다가 자고 있는 여성을 보는 순간 사악한 마음이 생겨 성폭행으나 이튿날 길거리서 마주치는 바람에 덜미를 잡혀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판위구에 살고 있는 한 30대 남성은 저녁때 물건을 후무리기 위해 가정집에 들어갔다가 자고 있는 여성의 고혹적인 모습에 반해 성폭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그 이튿날 성폭행 피해 여성과 길거리서 마주치는 바람에 붙잡혔다고 신식일보(信息日報)가 22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사건의 장본인은 후난(湖南)성 헝양(衡陽)시 출신의 천(陳·30)모.지난 2006년 11월18일 오후 6시쯤,천은 남의 물건을 훔치기 위해 한 한골의 가정집에 몰래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후무릴 물건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천은 거실 소파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 리(李)모씨를 본 순간은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해사한 외모의 리씨가 잠 자는 모습이 너무나 어여쁜 탓에 도둑질할 생각마저 잃고 한참을 쳐다보기만 했다. 물실호기(勿失好機·기회를 놓치지 않는다).그는 그녀가 자고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가지고 있던 칼로 들이대며 욱대겼다.“꼼짝마라.내 말을 듣지 않으면 뱃구레에 맞창이 나는 것은 물론,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잠자다 잠을 깬 리씨는 너무 겁이 난 나머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자신의 욕심을 채운 천은 곧바로 도망쳐 나온 까닭에 ‘완벽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건 다음날인 19일 저녁때쯤 전날의 ‘기분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레이양시 중심가서 어깨를 활짝 펴고 걸었다.하지만 이게 웬일인가.원수가 외나무 다리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반면 성폭행당한 아픔을 달래기 위해 바람을 쐬러 거리에 나온 리씨는 한 게임방에 ‘늠름하게’ 서있는 남자를 얼핏 봤다.그런데 그 남자는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한참을 생각해 보니 어제 자신을 성폭행한 바록 그 남자가 분명했다. 이에 조용히 그곳을 벗어나 공안(경찰)당국에 신고하는 한편 큰 소리로 “성폭행범 잡아라.”라고 소리쳐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이 합세해 도망치는 천을 붙잡았다. 천은 그러나 공안 당국에서 당일 리씨를 성폭행한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사건 현장에도 가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텼다.이에 공안당국은 DNA검사를 했고 그결과 그가 성폭행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판위구 인민법원은 천에게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TV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는 외국인, 그는 홍콩 디즈니월드의 총책임자이다. 중국 국민들에 대해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디즈니월드는 꿈이 아닌 실망의 동산이 됐다.’는 한 부모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다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2006년 춘제(春節·설) 때의 일이다. 전년도에 개장한 홍콩 디즈니월드는 쏟아지는 행락객 앞에 어찌할 줄 몰랐다. 철문을 굳게 잠그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서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울먹이는 아이들, 분통을 터뜨리는 부모, 격렬하게 항의하는 손님들…. 달리 할 말도 없었다.“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만 되뇌일 뿐이었다. 이를 본 홍콩인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몇년전부터 홍콩 경제를 회복세로 되돌린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대륙의 관광객들이다. 총 관광객 수의 절반이다. 홍콩인 K씨는 “그러나 이렇게 몰려오는 걸 모두들 마뜩지 않아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내륙인 관광객이 ‘혼란’일 수 있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중국 정부는 이같은 홍콩인의 마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에 외국인보다 대륙인에 대해 더 엄격한 절차를 적용하며 매년 홍콩으로 들어가는 중국인 총수를 조절하고 있다. 홍콩에서 ‘대륙(大陸)’과 ‘대륙인’은 이처럼 두 얼굴이다. 과거 이 두 단어는 ‘메인랜드 차이나’를 폄하하거나 혐오하는 말로 쓰였다. 홍콩에서 중국인에게 ‘홍콩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하면,‘당신 대륙인 아니냐.’는 물음이 될 수 있다.1987년 이후 7년을 거주한 뒤에야 ‘영구 거주민’이 될 수 있으므로 홍콩인으로서는 ‘지저분하고 소양이 부족한 중국인’을 분리해 내는, 우회적인 질문인 셈이다. 그러던 홍콩인들이 지금은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표준어 열풍 때문에 홍콩인의 평균 영어실력이 줄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97년 금융위기와 2003년 사스 위기 때 적지 않은 홍콩인들은 대륙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예전에는 여행 가기조차 꺼려 했던 곳이다. 이제는 전대를 차고 값비싼 물건을 싹쓸이해 가는 대륙의 졸부 쇼핑족들에게 서툰 표준어로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과거와는 달리 일체감도 부쩍 늘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50대 프랜시스 팍.“스포츠 국가 대항전을 볼 때면 아이들이 자신이 중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전한다. 주변에서도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감에 따라 중국인임을 내세우는 홍콩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피폭사건으로 홍콩에서도 반미 시위가 일어난 일이나,2003년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의 홍콩 방문 때의 열렬했던 환영식도 그 한 예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인’은 ‘중국 공민’으로 거듭났는가. 지금도 홍콩 특별행정구 청사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함께 내걸린 홍콩기는 그들의 복잡한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준다.“이것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런저런 행사에서 오성홍기만 내걸면 홍콩인들은 대단히 불쾌해 한다.”고 현지의 한국인 관계자들은 전한다.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의 불분명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번영과 함께 영국인 국적과 코스모폴리탄 홍콩인에 안주하던 이들에게 홍콩 반환이 결정된 1984년 중·영 연합성명 발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해외로 떠나려던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영국에 들어가려면 이민관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정작 중국에서는 영국 영사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으로 지금의 ‘조국’ 중국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임을 단 한차례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72년 유엔 탈식민화위원회에서 홍콩과 마카오는 식민지 명단에서 빠졌다. 홍콩인들은 국제적으로도 ‘어정쩡한’ 신분 속에서 지내왔다는 얘기다. 홍콩 기본법은 홍콩인의 다른 나라 여권을 ‘여행 통행증’ 정도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홍콩인이 중국 공민의 정체성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중국은 반환받을 당시 ‘홍콩의 생활방식’을 50년간 보장했다. 당시 중국의 한 고위 관료는 “홍콩에서 말(경마)은 계속 뛰고 주식투자와 춤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생활방식이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홍콩 경마협회가 최근 ‘축구 도박’을 정식으로 허용했어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최근 홍콩에서의 몇가지 고고학적 발견들을 근거로 고대 홍콩에 한족(漢族)이 살았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홍콩에 대해 종족적·문화적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글 사진 홍콩 이지운특파원 jj@seoul.co.kr ■ ‘당신은 누구인가’ 설문조사 |홍콩 이지운특파원|“지금 ‘본토(本土)’라고 표현했나요.” 재차 확인을 했다. 스스로를 “차이니스 홍콩 피플”이라며 중국인임을 먼저 내세운 30대 천(陳)모씨. 그럼에도 그는 계속 홍콩을 본토라 표현했다. 홍콩인의 정체성에는 단순한 설문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혹자들은 “사람간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고 공식 언어가 다르며, 화폐가 다르면 유럽연합이나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안의 나라들보다 더 이질감이 큰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정체성 설문조사가 홍콩에서 유행한 것은, 중·영 연합성명이 발표된 이듬해인 1985년부터로 알려진다. 홍콩에서 정체성 문제는 그 역사가 길다. 홍콩 중원(中文) 대학의 2006년 조사로는 홍콩 시민들의 21.5%는 스스로를 ‘홍콩인’으로,18.6%는 ‘중국인’으로 여겼다. “홍콩인이지만 중국인이기도 하다.”는 38.1%,“중국인이지만 홍콩인이기도 하다.”는 21.2%였다. 이중적 정체성을 보인 답변은 중원대학이 1996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홍콩대가 1996년과 2006년 사이 홍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정체성 조사를 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자신을 ‘홍콩인’으로 생각하는 청소년은 10년 전보다 5.2%포인트 줄어든 28.7%에 그쳤다.‘홍콩인이지만 중국인도 된다.’는 정체성이 담긴 ‘홍콩 중국인(Hong Kong Chinese)’은 39.4%,‘중국인이지만 홍콩인도 된다.’는 생각이 담긴 ‘차이니스 홍콩인(Chinese Hongkonger)’은 22.3%였다. 티모시 웡(王家英) 중원대 교수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커질 수록 홍콩인들의 중국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것이 감정적인 동일체 의식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다.”고 분석했다. jj@seoul.co.kr ■ 대륙인의 지위 변화는 |홍콩 이지운특파원|1980년대 중반 개봉된 저우룬파(주윤발)·왕쭈셴(왕조현) 주연의 ‘에스케이프걸’은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홍콩으로 밀입국하는 대륙인의 모습을 다룬 영화다. 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49년부터 홍콩은 홍콩 땅만 ‘터치’하면 홍콩인으로 받아 주는 터치베이스(touch-base) 정책을 실시했다.(표 참조) 불법이주민의 지위 변화는 홍콩과 대륙과의 상관 관계를 보여 준다. 오늘날 홍콩의 심장부, 홍콩섬 금융거리 한복판에 유독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만을 내걸고 있는 ‘인민해방군 주홍콩 부대 빌딩’은 변화상의 결과물이다. 과거 영국 식민정부 청사로 쓰이던 곳이다. 현지인들은 “군인들이 아주 이따금씩 연병장에서 제식훈련 하는 모습이나 보일 뿐 공개적인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대륙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홍콩을 왕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보다 훨씬 까다로운 입경 심사를 받기도 한다. 49년까지 대륙과 홍콩은 국경 개념이 희박했다. 대륙인의 홍콩행은 7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과 78년 개방 때 급증했다. 홍콩이 80년대 말 터치베이스 정책을 폐지한 것은 경제 구조개편에 따라 더이상 값싼 노동력이 필요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jj@seoul.co.kr
  • [시론] 갈등과 갈망이 교차했던 6·15평양축전/최홍운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시론] 갈등과 갈망이 교차했던 6·15평양축전/최홍운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6·15공동선언 7주년 기념 평양 민족통일대축전(14∼17일)에 다녀왔다. 평양 방문 첫날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평양 시민들의 모습이며 맑고 푸른 대동강, 유난히 나무가 많은 시가지가 새로웠다. 숙소인 양각도호텔에서 개막식이 열리는 대성산 남문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시민들의 따뜻한 손짓과 표정, 순조롭게 진행된 개막식과 환영 만찬 등은 우리 민족의 단합과 하나됨을 다짐하는 복된 자리였다. 그러나 본대회날인 15일 일이 터졌다. 평양시민 2500여명이 이미 오전 8시에 대회장인 인민문화궁전에 도착해 10시 전후에 입장한 남과 북, 해외대표 720명을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맞아 주었다. 한 핏줄임을 그야말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40분쯤 뒤 1층 객석에 앉아 있던 북측과 해외대표들이 주석석(귀빈석)으로 입장하려는 주석단 모습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북측 실무자 한 사람이 주석석 앞줄에 있던 명패를 둘째줄 명패와 바꾸는 게 아닌가. 그 즈음 박수소리는 잦아들었고, 들어와야 할 주석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주석석에 입장하려던 주석단은 남과 북에서 15명씩 30명, 해외대표 12명 등 모두 42명이었다. 명패가 오가던 시간 인민문화궁전 무대 뒤에서는 남북이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 처음에는 남측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을 주석석 앞줄에 앉게 하느냐, 둘째줄에 앉게 하느냐로 다투더니 나중엔 아예 주석석에 앉게 할 수 없다는,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남측은 전날 개막식과 만찬장에서도 주석석에 앉았고, 남측 대표의 자리배치는 남측의 결정사항인데 북측이 왜 막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북측은 개막식 때는 한나라당 의원인 줄 몰랐지만, 알고 난 이상 주석석에 앉는 것 자체를 허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는 북측 안경호 공동위원장도 박 의원이 둘째줄에 앉아 대회를 시작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이후 박 의원의 입장 자체가 불허되는 결정이 전달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태가 이미 안 위원장의 선을 넘어섰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영문도 모른 채 대회장에서 기다리던 남측 대표들은 로비로 불려 나와 백낙청 남측 상임대표로부터 대회 무산선언을 전해 듣고서 거세게 항의했다.“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중으로 대회는 치러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후 남과 북, 해외대표 4인과 연설자 3인, 선언문 낭독자 3인 및 사회자 1인 등 11인만 단상에 올라가는 수정안이 합의되던 16일 저녁까지 1박2일간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사라졌던 박수소리는 17일 오전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다시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평양시민들과 남과 북, 해외대표들의 인내심과 통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민족대단합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진한 감동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평양시민들은 3일 동안 대회장을 지켜 주었다. 첫날엔 곧 들어올 것 같은 대표들을 기다리느라 점심도 거른 채 12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태는 당초 북측 당국에 의해 불거졌지만 이후 6·15정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남북 공동위원회의 모습은 진지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전세기 안에서 본 서울의 신문들은 대회가 파행으로 끝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그러한 파행 못지않게 치열한 고민과 인내, 슬기와 화합, 통일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최홍운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 “농민이 순박하다고?” 60억 사취한 여성 농부

    “농사꾼이라고 너무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머리 잘 돌아가거든요.” 중국 대륙에 50대 한 여성 농사꾼이 자신의 본업인 농사를 짓기보다 윤똑똑이들을 손쉽게 속여 돈을 삼키는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사기 사건’의 장본인은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충화(從化)에 살고 있는 올해 52살의 뤄딩잉(羅定英)씨.전문대학 출신인 그녀는 지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공·사문서를 위조해 모두 5000위안(약 60억원)을 사취한 혐의로 붙잡혀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고 신식일보(信息日報)가 20일 보도했다. 농투성이인 뤄씨를 ‘순박한 시골 농사꾼’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그녀의 사기치는 기술은 가히 ‘예술’이라고 불릴만하다.바쁜 농삿일 틈틈이 사문서 말할 것도 없고 공문서까지 밥 먹듯이 위조해 돈을 ‘꿀꺽’하는가 하면,고린전 몇 푼을 빌려주고는 사채업자 저리 가라고 할 만큼 높은 이자를 받아 챙기는 ‘악랄한’수법을 썼다. 뤄씨가 사기꾼 세계에 발을 처음 내디딘 것은 지난 1999년.우연히 충화시 공장(公章·도장)을 위조해 서류를 작성해 손쉽게 돈을 벌면서 비롯됐다. 이에 재미를 붙인 그녀는 기업체는 물론 공공기관,지방정부 등의 문서를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위조해 사기를 치는데 이용했다.사기를 치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사기쳐 번 돈을 고리(高利)의 이자놀이를 하는 사채업자 역할까지 해내며 ‘실력’을 발휘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지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충화시 인민정부·광저우연초제조창·광둥연초공사 등 57개의 공·사문서를 아주 정교하게 위조해 28명으로부터 무려 5000만위안(약 60억원)을 꿀꺽 삼켰다가 덜미를 잡혔다. 뤄씨는 특히 지난 2003년 7∼9월 야오(姚)모씨로부터 100만위안(약 1억 2000만원)·후(胡)모씨로부터 117만원(약 1억 4000만원),광저우 톈허(天河)○○공사로부터 536만위안(약 6억 4300만원)을 사기쳐 최고의 절정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월북 대대장’ 강태무 사망

    ‘월북 국군 대대장’ 강태무(82)씨가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조선인민군 중장 강태무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해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18일 보도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육사 2기생인 강씨는 1949년 5월 육군 8연대 2대대장(소령)으로 복무하던 중 대대병력을 이끌고 강원도 현리 부근에서 월북했다. 월북 후 그는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28세의 나이에 소장(우리의 준장)으로 전격 승진했으며 군단급에서 부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6·15축전 한나라 불참속 폐막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을 귀빈석에 앉히는 문제로 이틀동안 중단됐던 6·15민족통일대축전이 17일 오전 평양 태권도 전당에서 열려 민족대단합 선언문을 채택하고 폐막됐다. 남측 대표단은 단합대회와 폐막식을 마치고 아시아나 전세기를 통해 오후 1시40분쯤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2시40분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당초 단합대회 장소는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전날 숨진 북송된 최초의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의 주검이 안치되는 바람에 갑자기 태권도 전당으로 변경됐다. 남북 양측은 논란이 된 귀빈석에 남·북·해외 공동위원장 4명과 연설자·사회자 등 11명을 앉혔다. 그러나 박계동·정병국·진영 등 한나라당 의원 3명은 이같은 결정에 반발, 민족단합대회에 불참했다. 박 의원은 이날 서울에 돌아와 “북한이 반(反)한나라당 연대의 모습을 만들려고 하다가 남측 대표단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에 부딪쳐 오히려 곤욕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측 백낙청 단장과 북측 안경호 위원장은 이날 “불편과 부담을 끼치며 행사가 지연된 데 대해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은 대선에서 반보수연합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을 배제한 측면이 있다.”면서 “민족공조, 남북화해 등에 있어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에 영향을 주겠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양 공동취재단·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22일부터 ‘아메리칸 뉴시네마’ 특별전

    1960∼1970년대 미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스크린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22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특별전을 연다.이번 특별전에서는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졸업(1967)’, 데니스 호퍼 감독의 ‘이지 라이더(1969)’, 존 슐레진저 감독의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등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 10여편이 선보인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는 이름은 1967년 공개된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타임지가 ‘뉴 시네마’라고 일컬은 데서 비롯됐다‘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특정한 사조나 장르를 가리키기보다는 당시 저항적 청년문화,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 등 당시 미국 사회의 경향을 반영하는 작품을 아우르는 것. 그런 맥락에서 영상과 이미지를 혁신, 고전적인 미국영화의 침체를 타개한 영화들도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번 행사에서는 24일 ‘더티 해리’를 상영하기 전 오승욱 감독의 강연이 예정돼 있다.27일 ‘미드나잇 카우보이’ 상영 후에는 김태용·최동훈 감독과의 대화 등도 마련돼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부고] 북송 장기수 이인모씨 사망

    최초로 북송된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89)씨가 지난 16일 사망했다. 북한방송은 17일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이고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 동지가 남조선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6일 오전 7시에 89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전했다. 이씨의 시신은 인민문화궁전에 안치됐다.17일 조문객을 받고 18일 오전 발인한다. 북한은 이씨의 장례를 ‘인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등 고위 당·정간부 57명이 참여하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장의위원회에는 6·15공동선언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북측 위원장인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이 포함돼 있다. 6·25전쟁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체포됐던 이씨는 출소이후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혐의로 또 다시 붙잡히는 등 34년간 복역,1988년 출소했다.1993년 문민정부시절 인도적 차원에서 ‘장기 방북’형식으로 북한으로 송환됐다. 고 김일성 주석이 송환된 지 한 달도 안된 이씨를 병문안하고, 미국에서 진료받도록 하는 등 북한은 그를 ‘통일의 영웅’으로 찬양해 왔다. 이씨의 사망으로 북에서 지내다 숨진 비전향 장기수는 이종환(2001)윤용기(2001)신인영(2002)김종호(2003)강동근(2004)김석형(2006)오형식(2006)씨 등 8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남측 정부가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그 해 9월2일 북송한 비전향 장기수 63명 가운데 일부다. 한편 평양에서 열린 6·15행사 남측 대표단 가운데 이씨를 후원했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 등이 북측에 이씨의 조문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 사람] 아코디언으로 제2의 인생 즐기는 이계익 전 교통장관

    [김문기자가 만난 사람] 아코디언으로 제2의 인생 즐기는 이계익 전 교통장관

    # 취미:누드 크로키, 아코디언 연주 # 별명:도깨비 # 특이사항:매년 마라톤 풀코스 2∼3회 완주(최고 기록 3시간40분), 지난 4월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 이끌고 해발 5400m까지 오름. # 희망:실버 아코디언연주단 창단, 실버 마라톤클럽 조직. 그 외에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음. 사회활동에서 떠난 후에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나 고민하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화두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오거든 다음을 주목해 보자. #문제:현역 시절을 ‘국영수’로 살았다면, 나이 들어서는? #답:‘예체능’이다. 맞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무수히 많은 철조망을 통과하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이 필요했겠지만 은퇴 후에는 예체능으로 재무장해야 인생을 90세까지 건강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여유있고 괜찮게 늙어가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 한 사람을 소개한다. 주인공은 바로 이계익(70) 전 교통부장관.1993년 8월 우리나라 고속철 차량 선정 때 최종 도장을 찍은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소 만나는 사람에게 “장관될 때까지 정말이지 ‘국영수’로 많은 관문을 통과했다.”면서 “이제는 예체능이야.”를 항상 강조한다.어느날 문득 그에게 준비하지 못한 ‘은퇴’가 찾아왔지만 곧바로 ‘국영수’를 버리고 ‘예체능’을 택했다. 적어도 비참하게 늙지는 않을 방법이라고 자신한다.그도 그럴 것이 아코디언 연주를 배우고 누드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하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뛰었다. 또 일주일에 한번씩 젊은 여인의 누드를 보면서 스케치북에 정성껏 옮기다보니 개인전을 두어번은 열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럽지 않은 작품들이 쌓였다. 정신·신체가 10년 전보다 더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머리가 맑고, 가슴이 따뜻해지고 또 다리가 튼실하니 충분히 그럴만도 할 터. 지난주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위치한 이 전 장관의 자택을 찾았을 때에도 그는 아코디언으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연주하고 있었다.“악보도 없이….”라고 말을 건네자 “운전할 때 브레이크를 쳐다보고 밟느냐. 운전하다 보면 엔진도 보이고 하는 것이지….”라며 웃는다. 근황을 묻자, 소문대로 매주 화요일이면 서울 반포동 화실에 나가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감상한다고 답했다. 회원이 15명으로 홍익대 미대 출신 전문가들과 자신처럼 아마추어도 몇명 포함돼 있단다.또 매주 토요일 아침 9시에 친구들과 함께 인천 강화도나, 경기 양평·장호원 등으로 풍경화를 캔버스에 담으러 떠난다. 아울러 일주일에 2,3회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마련한 아코디언 연주공간에 가서 무료로 아코디언을 가르쳐 준다. 교통부장관을 그만둔 직후 독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악기점에서 아코디언을 구입,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 어느새 강사 수준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강사 노릇도 했다. 아코디언 연주시범을 보이며 “혼자 할 수 있는 유일한 오케스트라가 바로 아코디언”이라는 예찬론을 폈다. 그는 은퇴하면서 몇 가지 생활신조를 정했다. 남한테 욕 안 하기, 일주일에 서점 세번 들르기, 지하철 타면 서서 가기, 외출할 때 수염 깎고 넥타이 매기, 걸어서 가기 등이다. “양보하고 즐겁게 천천히 사는 방법을 터득했지요.나이들면 대개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변화에 저항하게 되지요. 다 허깨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는 현역시절 선생, 관료, 기자 등 안 해본 것이 없다면서 ‘그때’를 잊고 앞으로 90세까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지나온 시절이 문득 떠올랐을까.6·25때 아픈 기억을 회고한다. 그러니까 배재중학 1학년때 6·25를 만나 천안집에서 가족과 함께 피란을 준비 중이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 아버지를 보자 총을 겨눴다. 마침 비오는 날이어서 아버지는 군용 우의를 입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 차림의 아버지를 인민군으로 오인, 어린 이계익 등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두발 발사했다. 이를 본 여동생은 충격을 받아 실신했고,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1951년 3월 어머니는 동생 하나를 더 낳았는데 몇 개월 안돼 굶어 죽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서인지 집을 훌쩍 떠나버렸다. 중학 1년생인 이계익이 동생 둘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다행히 먼 친척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천안시내 한복판에 좌판을 깔고 달러장사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 의정부 25사단 위병소까지 갔다. 하지만 말도 안 통하고 미군들이 자꾸 쫓아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처없이 걷다가 소양강가에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이때 강가에 떠 있는 배 한 척을 문득 봤다.20인승 전마선, 주인은 70대 노인이었다.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뱃사공을 하다 보면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노인한테 통사정을 했다. 이후 하루 종일 강을 건너는 ‘노젓는 뱃사공’이 됐다. 뱃삯으로 미군한테는 왕복 1달러, 민간인은 담배 1갑을 받았다. 사공 이계익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백마강 달밤에∼’를 부르며 피곤을 달랬다. 그러기를 3개월여, 이번에는 어머니가 어느 산골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소문 끝에 어머니와 상봉했으나 새 살림을 차린 것을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그때가 1952년 겨울. 이후 천안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양정중학 3학년에 편입한 뒤 양정고를 졸업하면서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실버가 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실버 아코디언 악단, 또 실버 마라톤클럽을 만들 생각입니다.인간의 DNA는 꾀가 많거든요. 열심히 하는 주인한테 그 DNA는 꼼짝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라톤도 해보니까 되고, 그림과 아코디언도 해보니까 다 됩디다.노인들이 방안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보다 라콤파르시타를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좋습니까.”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7년 경기도 평택 출생 ▲56년 양정고 졸업 ▲61년 서울대문리대 철학과 졸업 ▲63∼75년 동아일보기자 ▲78∼81년 럭키금성그룹 이사 ▲81년 KBS해설주간 ▲86∼89년 한국관광공사 사장 ▲93년 교통부장관 ▲99년 문화일보 부사장 ▲2000년 디지털타임스 사장 ▲현재 호서대 객원교수 #주요 저서=소양강의 뱃사공(정우사,1978년), 이계익의 3분경제(한국방송공사,1985년), 세계화에 속고 달러에 울고(정우사,1998년)
  • 평양 6·15축전 행사 전면중단

    평양 6·15축전 행사 전면중단

    북한이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6·15 민족통일대축전에서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을 행사장 귀빈석에 앉힐 수 없다고 주장,15일 행사가 전면 중단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행사 이틀째인 이날 오전 인민문화궁전에서 민족대단합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북측이 남측 대표단의 입장을 막았다. 행사에 참여한 다른 당 의원과 달리 한나라당 의원의 대표격인 박계동 의원은 귀빈석에 앉힐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박 의원은 전날 개막식에서 귀빈석에 앉았다. 이에 남측 백낙청 단장이 북측 안경호 위원장과 접촉을 갖고 “특정 정당을 배제하고 대회를 치를 수 없다.”는 의견을 전달했으나 북측이 우리측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측은 이후 협상을 계속 진행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국 민족대단합대회는 물론 이날 예정된 다른 행사도 전면 무산됐다. 현재로서는 16일로 연기된 민족대단합대회가 제대로 개최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특히 방북취재단이 이같은 상황에 대한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차량을 제공해줄 것을 북측에 요청했으나 차량을 내주지 않는 등 의도적으로 취재를 방해하기도 했다. 앞서 북측은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4일 저녁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환영연회에서 건배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이 하루빨리 열려야 한다.”고 촉구한 발언을 문제 삼아 관련 내용이 담긴 방송 장면을 송출하지 못하도록 삭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평양 공동취재단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고려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때만 되면, 때만 되면…. 나는 빈 주먹만 쥐었다 편다.’ “1937년에 강제이주당하면서 수십명의 고려인 대학생들이 김동환 시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7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5일 홍익대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특별 학술대회’에 초청된 고려인 평론가 정상진(89)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아직도 열 아홉살 대학교 2학년 때 극동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던 30량짜리 열차를 잊을 수 없다. 앓다가 죽은 사람은 기차역에 버려졌고, 이주대상자 20만명의 10%인 2만명이 죽었다. 대부분 아이와 노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빵공장에서 빵을 굽던 아버지는 총살을 당했다. 강제이주 얘기만 꺼내도 죽음을 당하던 혹독한 시간이 벌써 70년이나 흘렀다. 정씨는 “내게 남아 있는 게 있다면 나라를 위해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걸 자랑할 수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1945년에 소련군 태평양함대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북한 인민정권 수립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고 같은 해 9월 원산항에서 김일성을 맞이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김일성은 정씨를 “나를 처음으로 맞아준 사람”이라며 아꼈다.1952년부터 3년간 북한 문화선전부 제1부상(차관급)을 지내게 된 계기였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씨줄날줄] 조총련 중앙본부/황성기 논설위원

    일본 도쿄의 지요다구 후지미초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중앙본부가 들어선 것은 1963년이다. 신주쿠에 있던 조선회관이 60년 우익세력의 방화로 소실되자 조선인 동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지었다. 일본과 국교가 없는 북한은 이 곳을 주일 대표부처럼 써왔다.725평의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10층인 이 건물은 언제나 경계가 삼엄하다. 반북 우익테러에 대비해 경찰이 중앙본부 앞에 상주한다. 자체 경비도 엄중해 건물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을라치면 곧바로 직원이 나와 제지하곤 했다. 건물에 들어서면 1층 로비에 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 대형 그림이 걸려있다. 점심 시간이면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직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일본 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셈이다. 2002년 9월 김정일 위원장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조총련은 시련을 맞는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이 폭행 당하는가 하면 중앙본부 앞은 반북 시위대로 시끄러웠다.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2003년 외국공관에 준해서 면제해 오던 고정자산세를 중앙본부에 물리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조총련은 최근 중앙본부 건물과 토지를 한 투자회사에 팔았다. 파산한 조총련계 신용조합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일부를 조달하기 위해서다. 건물은 조총련이 그대로 쓴다는 이면계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매수자가 조총련에 우호적인 전직 공안조사청 장관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계약 자체가 백지화될 공산이 커졌다. 유형무형의 압력에 거래가 깨지면 중앙본부는 제3자에 넘어갈 수 있다.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와 이웃한 중앙본부는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에 있으면서 후지산이 보이는 1급지이다. 우파 세력들은 ‘신성한 장소’에 들어선 재일 조선인의 본산이 눈엣가시여서 쫓아내지 못해 안달인 모양이다. 납치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무라야마, 하시모토, 모리 등 전직 총리나 자민당 간부들이 김일성, 김정일 생일과 북한 건국기념일에 초청받아 연회에 참석했던 곳이다.‘미래의 대사관’으로 여겼던 일본이다. 이제는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할 의지가 정말 없는 것인지 요즘 하는 일은 너무 심하다 싶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