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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장성택 부부장 교통사고 테러?

    北 장성택 부부장 교통사고 테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이자 ‘실세’인 장성택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이 지난달 말 평양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8일 알려졌다. 교통사고가 드문 평양 시내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점에서 반대세력의 음모설도 제기되고 있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장 부부장이 탑승한 S600벤츠 승용차가 모란봉 구역 인민군 교예극장 앞 사거리에서 서장동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던 중 개선문 쪽에서 달려오던 북한군 외화벌이 기관의 화물차가 뒤를 들이받았다. 장 부부장은 목숨에는 이상이 없으나 허리를 크게 다쳤고, 벤츠 승용차는 폐차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파손됐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이번 사고는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의 교통사고 때와 달리 운전기사가 운전을 했고 평일인 데다 사고 시점이 대낮이어서 사고차량 운전기사도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고를 목격한 평양시민들과 사고를 처리한 인민보안성(우리의 경찰청) 관계자들이 워낙 많아 장 부부장의 사고 사실이 빠르게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는 운전기사가 음주운전 상태가 아닌 데다, 사거리에는 여성 교통보안원이 수신호로 보내는 상황에서 어지간해서는 교통사고가 잘 일어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우연한 사고로 보기 어렵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반대세력이 꾸민 음모라는 의혹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장 부부장은 2004년 실권됐다가 지난해 말 복귀했으나, 외동딸 금송씨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도중 본국 소환령을 받고 고민을 하다가 지난 8월 음주 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서울광장] ‘태백산맥’에서 ‘서울1945’까지/황진선 논설위원

    어느 날,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방송(KBS)의 주말 드라마 ‘서울 1945’가 화제가 됐다. 그런데 잠자코 얘기를 듣던 한 선배가 “그런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어?”하고 물었다. 정말 그랬다.‘서울 1945’는 막말을 하자면 ‘빨갱이’들이 주인공이다. 안방극장에서 그동안 좌익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었는가. 소설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태백산맥 1부(3권)의 초쇄 일자는 1986년 10월이다. 그 무렵, 초년 기자였던 필자는 서울시내 한 경찰서의 기자실에서 A신문의 기자에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상상이 안돼”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곧 태백산맥을 구해 읽었다. 그런데 과연 그랬다. 좌익인 염상진, 하대치, 정하섭 등도 그들 나름의 좋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스러져간 영혼들이었다.‘빨갱이’에 대한 그런 시선은 그 때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작가 조정래 선생이 20년 가까이 이적 표현물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2005년 4월에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래도 태백산맥에서는 중도민족주의자인 김범우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좌익 염상진은 김범우에 비해서는 비중이 떨어졌다. 그런데 ‘서울 1945’에서는 처음부터 광산노동자의 아들인 최운혁(류수영 분)에게 더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을 돕고 한국전쟁에서는 인민군 장교로 활동한다. 자유주의자인 이동우(김호진 분)는 이승만을 돕고 국군 장교로 활약하지만 극중 비중이 떨어진다. 단순화하면 태백산맥에서는 중도 민족주의자가 남자 주인공이었는데 ‘서울 1945’에서는 ‘빨갱이’가 남자 주인공인 것이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서울 1945’는 순항하고 있다. 제작진은 “좌든 우든, 자신이 믿는 이상에 따라 그 시대를 헤쳐나간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수단체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건국인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조기 종영을 주장하고 있지만, 시청률도 높은 편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2004년의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2005년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보훈대상자 인정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고 봐야 한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가 지난해 펴낸 ‘한국현대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대목이 있다.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해방 후 첫 여론조사를 했는데,‘최고의 인기 지도자’ 중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하지만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와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에는 각각 여운형이 1위, 이승만이 2위였다. 김일성과 김규식은 김구·박헌영에 이어 각각 5,6위를 차지했다. 그런 조사에 놀라는 것은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전혀 그런 사실을 접해보지도,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운형, 김일성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하고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동구권의 붕괴로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그동안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왜곡됐던 현대사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되돌아보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과 화해, 통합과 통일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김정일 이달말 방중설 ‘관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달 말 방중설이 흘러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김 위원장은 올해 1월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바 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23일 “김정일 위원장이 이달 말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첩보가 입수됐다.”면서 “하지만 신빙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소식통은 “북한 인민군 고위층이 베이징을 방문 중인 점은 사실이나, 당과 당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두 나라의 관계를 감안하면 인민군 고위층이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김 위원장 방중을 앞둔 준비 등 전조현상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서 최근 북·중간 관계를 감안하면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분석했다. 후이량위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중국 친선대표단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했고, 차오강촨 국방부장도 평양방문시 김 위원장을 면담하지 못했다. 중국은 지난달 유엔 안보리의 대북결의에 찬성했다. 한편 북한 전문 인터넷 언론인 데일리NK는 이날 복수의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오는 28일을 전후해 전격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베이징 발로 보도했다.중국의 외교소식통은 “김 위원장의 방중 준비와 관련, 현재 북한 인민군 고위층이 중국에 머물며 사전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방중한 북한 군고위층은 김정일의 신변안전을 위해 외부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일정을 마련하고, 이에 따른 경호 대책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이어 김 위원장의 이번 중국 방문은 핵실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관측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北, 을지훈련 비난

    북한은 22일 한·미 을지포커스렌즈(UFL) 훈련을 전쟁행위라고 비난하며 정전협정에 구속받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북한은 이날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의 이번 전쟁연습을 정전협정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인민군측은 앞으로 나라의 안전과 자주권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조치들을 주동적으로 취하는 데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언명한다.”고 밝혔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이현세 만화경] 영화와 드라마의 한류를 보며

    [이현세 만화경] 영화와 드라마의 한류를 보며

    프로는 돈이고 아마추어는 공짜다. 프로가 그리는 만화는 돈을 지불하고 봐야 한다. -물론 요즘 온라인에서는 무료로 제공도 하고 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마추어가 그리는 만화는 대다수 공짜다. 그래서 프로작가의 만화가 형편없으면 독자는 분노한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만화가 재미없으면 그냥 웃고 만다. 작가가 유료를 목적으로 출판을 결심하는 그 순간, 작가에게는 독자에게 최소한의 정보나 재미를 제공해야 한다는 서비스 책임이 주어진다. 이걸 무시하는 창작은 엉터리다. 너는 재미없지만 나는 재미있다고 강요해서 보게 하는 만화는 얼마나 끔찍한가. 세상 살기 싫은 기분일 때도 예약이 된 프로가수는 일정에 따라 무대에 올라야 한다. 온 세상을 저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무대에 오른 이상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은 관객을 웃겨야 한다. 부모상을 당하고도 무대에 올라 관객을 웃겨야 했던 코미디언 배삼룡 선생의 유랑극단 시절의 비화는 그래서 너무나 유명하다. 프로는 약속과 책임이고 그것은 서비스 정신과 함께한다. 나는 20년 이상을 신문과 잡지에 연재를 해왔다. 그 긴 시간동안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6년 동안 ‘천국의 신화’를 가지고 법정투쟁도 했으며 만화를 그리는 행위가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 사정이 힘들다고 해서 독자들이 그 사정을 헤아려서 조금 재미없어도 또는 좀 성의 없이 그렸어도 용서해 준 적이 없었다. 재미있으면 열광하고 재미없으면 덮을 뿐, 작가를 봐서 그 만화를 애써 봐 주지는 않았다. 위기의 한국영화가 역동적으로 살아나고 드라마의 한류 열풍이 거세다. 한국의 문화상품을 대표해서 공격적으로 제작이 되고 있고 다른 문화상품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성공사례를 너도 나도 연구 중이다. 확실히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는 대단해졌다. 영원히 만화의 영역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SF나 팬터지, 무협, 스포츠 소재 분야까지 점령해버렸다. 그런데 이 승리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 영 미덥지가 않다. 그것은 아직도 프로정신이 곳곳에서 실종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영화가 된 대작 전쟁영화에서 국방군 철모를 쓴 주인공의 긴머리는 지저분하게 목덜미에 매달려 있고 인민군은 철모는 모두 어디에 두고 왔는지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를 작업모 하나 달랑 쓰고 미친개들처럼 뛰어다닌다. 피아간에 구별 없이 조연들의 머리는 마치 출연자 마음대로 결정한 듯이 장발투성이다. 다른 많은 조폭영화나 비슷한 유형의 영화를 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전경이든 순경이든 가리지 않고 경찰모 뒤에 지저분하게 매달린 긴 머리가 눈을 찌푸리게 하고 심지어 장발단속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절의 경찰서장도 장발위에 경찰모를 쓰고 인질범과 대치해 있다. 도대체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경찰서장이라서 현장 분위기를 함께 공유할 수 없다. 요즘 모공중파에서 방영하고 있는 광복전후의 우리 근대사를 다루고 있는 대형 드라마도 이런 꼴불견은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공무원들이나 군인, 그리고 경찰들의 복장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엉터리다. 물론 상황은 짐작이 간다. 주연을 제외한 모든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하니 고구려에서 참여정부까지 뛰어다니려면 머리를 깎기 힘들고 연출자는 그 배우의 머리를 입맛에 맞게 깎자면 몇배의 출연료를 줘야 하니 난감할 것이다. 그동안 제작자들은 제작비와 제작기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한국현실을 감안해서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그런 사소한 옥에 티는 제쳐두고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를 봐달라고 호소해 왔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산업이 영화나 드라마가 된 지금 더이상 제작비 타령은 설득력이 없어진 듯하다. 시장은 커지고 제작비는 하염없이 치솟고 있다. 천문학적인 홍보마케팅비와 스타배우들과 스타감독들의 개런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품과 조연 배우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투자이다. 이제는 관객의 눈에도 조연들이 보인다. 영화나 드라마도 돈을 벌기 위해 그 분야 최고의 프로들이 제작하는 것이라면 약속과 책임, 그리고 서비스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머리를 깎기 싫으면 출연을 말든지 머리를 깎지 않으면 출연을 시키지 않으면 된다. 모처럼 찾은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억지춘향의 몰골은 관객을 우롱하는 것이고 쉽게 보는 드라마라고 해서 행여 이 정도야라고 한다면 시청자를 무시하는 행위다. 정말이지 장발단속을 하는 근엄한 경찰관의 장발을 보면 코미디보다 더한 코미디가 되고 그 코미디는 실소를 넘어 참담해지기까지 한다.
  • 北 직파 간첩 1명 검거

    참여정부 들어 처음으로 북한이 직접 남파한 이른파 ‘직파간첩’이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간첩은 1996∼1997년 수 차례 태국인 행세를 하며 국내에 잠입해 군 레이더기지, 미군부대, 원전 등 이른바 ‘전시 타격목표’를 촬영한 데 이어 최근 필리핀 국적으로 위장해 다시 잠입하다 덜미를 잡혔다.21일 국회 정보위 등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은 필리핀 국적으로 위장해 지난달 27일 국내에 들어온 남파간첩 정경학(48)을 붙잡아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간첩, 금품수수, 특수잠입탈출 등 혐의로 구속하고 지난 18일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국정원은 그가 출국하기 직전인 지난 달 31일 시내 호텔에서 그를 검거하고 필리핀 여권과 공작금 미화 3188달러, 음어 CD, 신분 위장용 증명서 등을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필리핀 현지 수사기관은 그의 필리핀 탈락주 주거지에서 카메라와 보고 및 지령 송수신용 컴퓨터, 단파라디오 등을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결과 정경학은 노동당 35호실 소속 공작원으로,1995년 12월 태국에서 현지인으로 국적을 세탁한 뒤 1996년 3월부터 1998년 1월 사이에 3차례 국내에 잠입했으며 이 가운데 1996년 3월과 1997년 6월에 ‘전시 정밀타격을 위한 좌표확인’ 목적 등으로 주요시설을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가 촬영한 곳은 울진 원전, 천안 성거산 공군 레이더기지, 용산 미8군부대, 국방부·합참청사 등이다. 청와대 촬영도 1996년 3월 두 차례 시도했으나 경비가 삼엄해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번에는 지난 6월 ‘남조선 장기침투 여건 조성’ 지령과 함께 공작금 1만 달러를 받고 국내 장기 침투 여건을 탐색하기 위해 ‘켈톤’ 명의의 필리핀 여권을 갖고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에 잠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태국에서 활동할 때 ‘정 선생’으로 불린 그는 1993년 7월부터 동남아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방글라데시, 태국, 중국, 필리핀 사람으로 4차례 국적을 세탁해 오면서 정영학, 정철, 모하메드, 마놋세림, 켈톤 등의 가명을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함남 함주 출신의 그는 1976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2학년을 중퇴한 뒤 인민군 총정치국 적공국(敵工局)의 사병, 공작원 등을 거쳐 1991년부터 대외정보조사부(현재 35호실)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교육을 받고 1993년 7월부터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활동해 왔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北 개혁파·군부 주도세력

    북한 내각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박봉주와 장성택이다. 내각에 실질적 권한이 부여된 것은 2003년 9월 홍성남의 후임에 박봉주가 임명되면서부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봉주 총리로부터 당과 권력기관이 국가경제를 침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내각에 권한을 주었으면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봉주 총리는 경제관료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측근에 앉혔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현성일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측근 대열에 당과 군뿐 아니라 내각의 인물들이 합세하고 있다는 것은 김정일의 권력구조가 단순한 역할분담의 차원을 넘어 권력분산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장성택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은 ‘숙청 후 복권’된 파워엘리트로 꼽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로 ‘2인자’로 불렸던 장성택 부부장은 2003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가 지난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 올해 초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8명으로 구성된 국방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조명록 1부위원장, 이용무 부위원장,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4명이 현역 장성이다. 나머지 3명은 당 군수담당 비서인 전병호, 김양건 책임참사, 그리고 백세봉이다. 백세봉은 김정일 위원장의 둘째 아들 정철의 가명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방위원 외에 이명수 총참모부 작전국장, 이용철 조직지도부 1부부장,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 원용해 보위사령부 국장이 군부의 실세 4인방으로 꼽힌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131차례의 공개활동을 했으며, 이 가운데 군관련 활동이 70회로 가장 많았다. 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국장(대장)은 김 위원장을 44차례나 수행하면서 김 위원장의 곁을 가장 많이 지켜 관심을 모은다. 박 대장은 2000년 9월 김용순 당시 노동당 대남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으며,68년 1ㆍ21청와대 습격사태 당시 김신조와 함께 남파됐다 살아 돌아간 유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개혁파 밀리고 군부 떠오른다?

    “군부 때문에….” 북한은 최근 들어 툭하면 군부를 들먹이고 있다. 미사일을 발사한 지 엿새 뒤인 지난달 11일 부산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측은 미사일 발사에 대해 “군부에서 하는 일이라서….”라면서 비껴갔다. 경의선 열차 시험운행 중단의 핑계도 군부로 돌렸다.2002년 4월 방북했던 임동원 대통령 특사가 조속한 철도 연결을 요청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명수 군 작전국장을 불러 지시를 하면서 “군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끌려다닌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남북경협에 군부 위기의식” 정부의 당국자는 14일 북한 권력이동이 진행 중이라는 관측을 내놨다. 군사적 요충지인 개성공단 개방과 6자회담 등을 주도해온 개혁·개방파에 밀리던 군부가 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당국자는 “북한 군부는 남북 경협이 진행되면서 개혁·개방세력의 힘이 커가는 데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라면서 “위기 의식을 느낀 군부가 미사일 발사 등으로 힘을 다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 위원장은 인민군 참모총장 출신의 오극렬 당 작전부장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극렬을 따르는 군부 인사들이 많아 실패했다.”고 전했다. 오극렬 대장의 장남 세욱은 2004년 청진에서 배로 탈북해 미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오극렬 부장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은 김 위원장의 군부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관측이다.●절대권력 앞에 감히 누가… 전문가들은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군부로의 세력이동이 진행 중이라는 관측을 일축한다.50년 넘는 절대권력 앞에 나설 세력은 없다는 것. 백학순 세종연구원 남북관계연구실장은 “북한 군인은 정치인이고, 국방위는 당보다 많은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2002년 7월의 개방조치는 군부와 개혁·개방파의 대립에서 개혁파가 이긴 게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의 설득이 주효한 것”이라고 말했다. 애당초 권력이 군부에 집중돼 있었다는 얘기다. 정영태 북한연구원 연구위원은 “군부 출신이 당과 국가기관에 진출하고 있지만 유일지배체제에서 군부가 집단적인 파워를 행사하기는 어렵다.”면서 “최근의 군사적 긴장도 전술적 변화 차원에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부를 언급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이는 대남협상전략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만약 정말로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에 질질 끌려다닌다면 숨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통일전선부(통전부)가 주도하고 있다. 통전부는 산하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아태평화위를 두고 있다. 최근의 경의선 열차 시험운행 무산이나 미사일 발사도 통전부의 계획된 긴장고조 전략차원에서 나왔다는 분석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 이후 40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정 연구위원은 “북한은 사실상 제국주의와 전투 중”이라면서 “공식행사에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벙커 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가상적인 전투를 벌여왔다는 얘기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김정일 40일만에 활동 재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40일간의 두문불출에서 벗어나 공개활동을 재개했다. 향후 6자회담을 둘러싼 북한의 행보가 주목된다.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은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군 제757군부대의 축산기지를 시찰했다.”면서 “목장 종업원이 막대한 고기와 유제품을 생산해 군인에게 공급한 데 대해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고 그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매체가 김 위원장의 활동상을 보도한 것은 미사일 발사 하루 전인 지난달 4일 김 위원장이 평양 대성타이어 공장 현장 방문 사실을 밝힌 이후 처음이다. 김 위원장이 이처럼 오랫동안 잠행한 것은 2003년 초 50일간 그의 동정이 보도되지 않은 이후 근래에는 보기 드문 일이다. 때문에 미국과의 긴장고조에 따른 신변안전을 우려한 은신설에서부터 건강이상설, 허니문설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김 위원장의 공개활동을 보도한 이유는 장기간 잠행에 따른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통치권과 체제 유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한편 중앙 TV는 김 위원장이 “풀먹는 집짐승을 대대적으로 기를데 대한 당 정책을 철저히 관철해 우리 인민들에게 풍족한 식생활을 마련해 줄 수 있다.”면서 “모든 단위들에서 이들의 모범을 적극 따라 배워야 한다.”고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시찰에는 인민군 대장인 이명수, 현철해, 박재경과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인 이재강과 이재일,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황병서 등이 동행했다고 중앙TV는 밝혔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0) ‘국내 유일 ㄱ자형 예배당’ 김제 금산교회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0) ‘국내 유일 ㄱ자형 예배당’ 김제 금산교회

    전북 전주와 김제를 잇는 노령산맥 중봉(中峰) 모악산 국립공원의 금산사 입구 마을에 있는 금산교회(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담임 이인수 목사). 금산사 반대방향 왼쪽 작은 샛길로 들어서 300m쯤 지점 오른쪽에 한옥 ㄱ자와 현대식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작고도 큰 교회’로 통하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 땅 초기 기독교의 ㄱ자 공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개신교 순례성지다. 호남 지역 기독교 건물론 처음으로 문화재에 등록된 건물.‘남녀칠세 부동석’의 유교식 전통을 살려내면서 외래종교의 토착화를 이루기 위한 선교사들의 고민과 아름다운 신앙미덕이 함께 서린 흔치 않은 유산이다. 잘 알려졌듯 모악산 일대는 예로부터 내세지향의 미륵신앙이 결집된 곳.600년(백제 법왕2년) 미륵불교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금산사가 들어섰고 구한말 ‘후천개벽’을 내건 강일순이 증산교를 시작해 지금도 40여개의 증산교 분파가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신흥종교 단지다. 한때 100개가 넘는 다양한 교단이 몰려들었고 지금도 이 지역 인구의 70% 이상이 불교나 증산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와 신흥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리는 모악산 아래 새터, 용화, 팟정이(두정리)등 세 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됐는데 그 첫동네가 팟정이인 만큼 팟정이는 바로 금산리의 다른 이름으로도 통했다. 이 팟정리 마을에 금산교회가 들어선 것은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단원으로 내한한 선교사 테이트(L.B. Tate·한국명 최의덕) 목사에 의해서다. 최의덕 목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귀국한 아펜젤러 목사의 강연에 감화를 받아 한국으로 건너온 인물. 호남 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전주며 정읍을 말로 오가던중 1905년 팟정이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이 지역 부호 조덕삼(1870∼1910)을 만나 전교해 결국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조덕삼은 유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면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최의덕 목사에게 접근해 결국 하나님에 귀의했으며 선뜻 자신의 사랑채를 교회 건물로 제공했다. 바로 이곳에서 금산교회가 시작된 것이다.3년 후인 1908년 4월 신도가 30여명으로 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27평짜리 ㄱ자 기와집인 교회당을 짓게 되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초기에 이같은 ㄱ자 예배당은 적지않이 세워졌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고, 온전하게 남은 것은 금산교회가 유일하다. 교회의 전체적인 골격은 모악산 너머 배재(梨峴)에 있던 전주 이씨의 재실(齋室)을 옮겼다고 한다. 양반 집에서 조상 제사를 지내던 재실을 뜯어다 ‘하느님의 성전’을 지은 것이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때 영원한 하늘의 장막에 들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머물던 거룩한 공간으로 삼았던 것”(이덕주 목사)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ㄱ자 예배당은 전형적인 중부지방 단층 고패집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남북향 다섯칸 집의 북쪽 모서리 동쪽에 두 칸을 이어붙였다. 홑처마의 지붕은 처음엔 초가로 올렸으나 1920년대 함석지붕으로 바꿨다가 광복 후 지금의 시멘트 기와로 올렸다. 남쪽과 동쪽의 출입문은 여닫이 격자무늬 종이문. 통마루 바닥에 올라서면 천장이 그대로 드러나고 칸막이 없는 시원한 통간 건물에 가슴이 확 트인다. 조금씩 휜 소나무를 다듬어 대들보와 종보로 썼는데 천장을 받치는 큰 기둥 없이도 아주 안정되게 느껴진다. ●ㄱ자형 건물은 ‘남녀 7세 부동석´ 유교전통 반영 건물을 ㄱ자형으로 지은 것은 역시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당시의 유교 전통을 반영한 것. 그 때문인지 내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남북방향의 강당 끝 모서리에 강대상이 있고 그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만 남녀석을 번갈아 볼 수 있었다. 강단의 좌측에는 여신도들이, 정면에는 남자들이 앉도록 구분해 남자석과 여신도 좌석 사이에 흰 포장을 쳤던 것이다. 강단 오른쪽 바깥 귀퉁이에 지금도 서있는 기둥은 바로 이 포장을 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출입문도 남쪽과 동쪽에 각각 따로 내어 남녀 신자들의 출입을 구별했다.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 장로는 이 교회를 세운 조덕삼의 친 손자. 조 장로는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갈 때마다 교회 입구에 이르면 어머니 손을 놓고 아버지와 함께 남자석에 들어가 앉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회상했다. 포장(차단막)은 1940년대에 가서야 걷혔다고 한다. 남자석 천장의 상량문(한문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6절)과 여자석 천장의 상량문(순한글 고린도전서 3장 16∼17절)도 각각 다르게 썼다. 당시 최의덕 목사를 비롯한 교회 건축자들이 ‘남녀7세 부동석’의 습속을 외면했다면 금산교회는 핍박받아 지금까지 지속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의덕 목사가 이곳에 정착할 무렵 전주 등 인근 지역 유생들은 돌팔매를 하며 교회 건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목사 드나드는 쪽문, 예수탄생 성당과 닮아 강단 뒤쪽으로 목사들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을 낸 것도 독특하다. 문을 통과하기 위해 몸을 숙여야 하는 구조인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되뇌고 실천하지 않았을까?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성당에서 문을 넘기 위해 제아무리 높은 신분이라도 말을 내려 허리를 깊게 숙여야 통과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닮아있다.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5평 규모의 강단은 2단 구조이지만 결과적으로 3층 구조. 한국 전통의 제단을 연상케 하지만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6·25전쟁 기간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였으며 얼마전까지도 교회당 창틀에 ‘인민군 만세’‘공화국 쟁취’같은 연필 글씨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 좌익 활동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88년 ㄱ자 예배당 바로 옆 789평 부지에 벽돌 예배당을 새로 지어 현재 40명 정도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1986년 첫 시무지로 금산교회를 택해 부임한 뒤 담임을 맡아온 이인수 목사는 “금산교회의 교회당은 일제가 교회당을 폐쇄했을 때도,6·25전쟁통에 마을이 온통 불바다가 됐을 때도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했으며 숱한 철거논란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기적같이 여겨진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작고도 큰 교회’에 얽힌 이야기 금산교회가 초기 ‘ㄱ자’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귀중한 신앙유산을 넘어 ‘작고도 큰 교회’로 통하는 것은 이 교회를 세운 조덕삼과, 한국 개신교사상 유례없이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1924,1947,1948년)이나 역임한 이자익 목사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법과 회의록을 줄줄 외울 정도로 암기력이 뛰어나 장로교 ‘법통’으로 칭송받는 전설적인 인물. 그는 다름아닌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마부였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학력이지만 마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했으며, 최의덕 목사를 통해 주인인 조덕삼과 비슷한 시기 나란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자익은 원래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 출신.9살에 아버지,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떠돌다가 17살에 행상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전주에서 행상에 실패한 뒤 김제 금산의 대지주인 조덕삼의 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시작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1905년 10월 나란히 세례를 받아 성찬예식을 가졌는데 이 의식은 금산교회가 공식으로 출발하는 시초로 인정되고 있다. 놀랄 만한 것은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주인인 조덕삼에 앞서 장로가 되었다는 사실. 금산교회는 1908년 교인이 100명 정도로 불어나자 교인들의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조덕삼이 떨어지고 대신 머슴인 이자익이 선출되었던 것. 반상을 엄하게 따지던 당시로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산교회 당회록에 따르면 조덕삼은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자 신도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이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집에선 주인과 마부였지만 교회에서는 장로와 평신도의 입장에 섰던 두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덕삼은 선배 장로인 이자익 장로를 1910년부터 5년간 평양신학교에 유학시켜 금산교회의 담임을 맡겼다. 물론 그때까지 이자익 목사의 모든 뒷바라지를 했던 것은 조덕삼이었다.1908년 사재를 털어 교회를 건축한 조덕삼은 유광학교를 설립, 지역 청소년 교육사업에 나서기도 했는데 이 유광학교는 당시 한글을 비롯해 한국역사며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금산교회는 처음부터 상반(常班)이 함께 어울리는 민중교회로 출발했던 셈이다. 이후 금산교회는 조덕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조영호 장로에 의해 지탱돼 왔으며 조부와 선친의 뒤를 이어,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씨가 장로로 피택됨으로써 한집안에서 드물게 세명의 장로를 탄생시켰다.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美, 북한여행 새달부터 금지

    美, 북한여행 새달부터 금지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첫번째 경제제재 조치로 다음달부터 자국민의 북한 여행을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측은 이에 따라 한국의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치가 내려지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대북 제재를 둘러싼 한·미간 갈등 심화가 우려된다. “미 정부 고위 당국자가 29일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독점적으로 주선하는 시카고의 아시아퍼시픽트래블사에 여행금지 방침 입장을 확인해 줬다.”고 이 회사의 월터 키츠 사장이 30일 밝혔다. 키츠 사장은 “금명간 정부 실무자들과 만나 정확히 언제부터 북한 여행 금지가 시행되는지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아시아퍼시픽트래블은 당초 다음달 10일부터 10월 사이에 약 200명의 미국인을 인솔해 평양과 남포, 묘향산, 개성, 판문점 등을 관광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무산되게 됐다. 미국 정부의 북한 여행금지 결정과는 별도로 키츠 사장은 “북한측이 30일 갑자기 평양 방문 불가 방침을 밝혀 왔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외 관광을 총괄하는 조선국제려행사는 이날 아시아퍼시픽트래블측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폭우로 수해를 입은 데다가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핵 추진 잠수함 엔터프라이즈가 참가하는 한국과 미국의 이른바 을지포커스렌즈 훈련 때문에 다음달로 예정된 ‘아리랑 축제’와 체육제전은 올해 열리지 못하게 됐다.”고 통보했다. 이어 “아리랑 축전이 열리지 않으면 귀사의 여행객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측의 통보는 미 정부 당국자의 여행금지 조치가 있은 뒤인 30일 왔으나 미 정부의 결정을 확인한 뒤 내린 조치인지는 알 수 없다. 이로써 북·미간의 인적 왕래 등 각종 교류 중단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조선국제려행사는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내년 4월15일 고 김일성 주석의 95회 생일과 4월25일 인민군 창건 75주년을 맞아 아리랑 축제와 체전행사가 4월15일부터 5월 초까지 개최될 예정이며,8월15일부터 9월 중순에도 같은 행사가 다시 개최될 것”이라면서 향후 참석을 권유했다. 아시아퍼시픽트래블은 지난해 12월10일 미국 여행사로는 처음으로 조선국제려행사로부터 공식 여행대행사로 선임돼 평양 등의 관광을 준비해 왔다. 미국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임기말인 2000년 6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일부 해제하면서 북한 여행을 자유화했다. daw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우리나라 최초·최고령 프로 마술사 이흥선 옹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우리나라 최초·최고령 프로 마술사 이흥선 옹

    올리버 스톤이 감독한 영화 ‘알렉산더’가 생각난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 3개 대륙을 정복하고 최초로 동·서양 화합을 꿈꾸는 가장 위대한 정복자, 역사적 ‘대왕’의 위용을 그렸다.‘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25년 전 어느날. 서울 중구 명동에 위치한 극장식 레스토랑 ‘무랑루즈’. 동안(童顔)의 한 50대 남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올랐다. 주위는 순간 침묵으로 변했다. 잠시 후 그가 쓴 모자에서 비둘기가 튀어나오더니 하늘로 계속 날아오른다. 이어 입안에서 하얀 종이를 내뱉더니 곧 국수가락으로 변해버린다. 또 객석으로 내던져진 낚싯줄마다 금붕어가 연이어 딸려나온다. 기립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이를 지켜보던 ‘눈물젖은 두만강’의 김정구씨는 놀라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물며 “당신은 대왕이오, 대왕.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처럼 말이오.”라고 했다. 이후 이 남자는 ‘알렉산더 리’로 통했다. 그랬다. 마술계의 대왕, 살아있는 마술의 전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마술사이며 현역 최고령 마술가이기도 하다.‘알렉산더 리’, 대중들에겐 이흥선(83)씨로 잘 알려져 있다.26세에 마술계에 입문했으니 말 그대로 60년 성상을 ‘마술 인생’이라는 파란만장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왔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원래 선수급 수준의 기계체조를 했다는 사실. 서울 용산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 적부터 철봉에 매달리고 있어야 더 행복해질 정도였다. 이후 체조, 물구나무서기, 고난도의 텀블링 등을 척척 해냈다. 나중에는 차력까지 배웠다.‘근육짱’으로 소문났음은 당연했다. ●새달 부산 국제매직페스티벌 심사위원 그래서 일제 때 유명했던 신광·동양·대륙서커스단에서 앞다투어 데려가 청년시절부터 전국을 돌며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가설극장에서 고 서영춘씨와 배삼룡씨 등 여러 희극인들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공연도 자주 펼쳤다. 서커스와 마술, 만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이씨는 가는 곳마다 ‘인기짱’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암울했던 시절의 온갖 시름을 잊게 해줬다. 세월이 지난 요즘, 어느 정도 쉴 법도 한데 아니다. 팔순 중반의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로 여전히 정열을 쏟아낸다. 노인들과 불우이웃이 있는 곳, 어디든 달려가 흥미진진한 마술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마술공연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전해준다. 지난해에는 일본에 초청돼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기발한 마술연기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디 이뿐이랴. 김정우와 최현우 등 차세대 마술사들을 키워내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앉으나 서나 마술생각’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작은 성냥갑 하나라도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척척 마술도구로 변해버려 ‘요술손’이라는 별명 또한 여전하다. 오는 8월에는 특별한 무대를 갖는다.10일부터 5일 동안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매직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을 맡은 것. 아울러 여기에서 신인 마술가들을 위한 무대, 즉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마술로 한 수 지도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서 개발된 마술만 어림잡아 2000가지가 넘는다. 이래저래 응용된 것까지 합하면 1만여가지나 된다. 이같은 마술인생의 흔적은 그의 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둘기 15마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온갖 마술도구가 구석구석 널려 있어 흡사 ‘매직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지금까지 1만여가지 개발… 김정우·최현우씨 등 조련 지난주 서울 홍익대 근처의 ‘알렉산더 매직바’에서 이씨를 만났다.‘알렉선더 리’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지었다. 이씨는 이곳에 자주 들러 팬들에게 서비스차원에서 간단한 마술을 선보이곤 한다. 먼저 근황을 물었다.“가만히 있을 수 있나. 이것저것 마술기계를 만드느라 끝이 없지 뭐.”라고 했다. 옆에 있던 마술감독이자 이씨의 매니저인 김준오씨는 “제자들이 사용하다 망가진 마술도구를 고쳐주기도 해요.”라고 거들었다. 8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게 보인다고 하자 “근심 걱정 없어요. 밤낮 그저 웃고 명랑하게 지내지 뭐. 그게 건강비결이요.”라고 하며 연신 웃는다. 이씨는 26세에 마술을 처음 접했다. 서커스단 일로 평소 알고 지내던 타이완의 마술사 ‘미스터 엑스’가 하루는 다급하게 찾아왔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누가 돈을 훔쳐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는 것. 딱하게 여긴 이씨는 미스터 엑스를 자신의 집에서 잠시 동안 지내게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미스터 엑스가 이씨에게 “차력이나 체조는 나이가 들면 못합니다. 그러니 나이 먹고도 할 수 있는 마술을 배우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술을 가르쳐준다. 비둘기 날리는 것 등 몇 가지 기술을 전수받은 이씨는 자료 등을 열심히 뒤져가며 여러 가지 응용기술을 터득했다. “당시 마술을 가끔씩 하는 사람이 있긴 했어요. 간단한 소품정도였지요. 하지만 비둘기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입에서 불이 뿜어나오고, 또 사람이 공중에 붕붕 뜨니까 무척 좋아했어요. 또 깡통에서 담배 꺼내기, 종이를 찢어 국수가락 만들기 등을 막 했지요.” 6·25전쟁 때에는 마술 덕분에 생명을 건지기도 했다. 피란길 무주경찰서에서 잠시 지낼 때 갑자기 인민군의 공격을 받게 됐다. 그런데 경찰관은 불과 5∼6명밖에 없었다. 이씨는 경찰서에 있는 모자랑 옷가지를 다 모아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술을 부리며 수십명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랬더니 인민군들은 경찰관 숫자가 많은 것으로 착각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씨는 해방 전 유랑극단과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공연을 한 경험이 있어 인민군들과 맞닥뜨리면 이를 내세워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곤 했다. ●“한번 사용한 마술은 두번 다시 안해” 전쟁이 끝나면서 이씨는 본격적인 마술사의 인생을 걷는다. 때마침 가수 김정구씨, 한복남씨 등과 극단이나 호텔에서 공연을 자주 하게 된다. 그때마다 연예인들은 이씨의 마술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는 방송 출연을 자주하는 데 도움이 됐고 유일한 프로 마술사로 독주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많게는 열군데씩 밤무대를 누볐고 일주일에 1∼2회 고정 출연하는 TV마술쇼를 맡기도 했다. 빈손에서 비둘기 10여마리가 나오고 네모난 도구속에 사람을 집어넣어 부분절단하는 아찔한 장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씨는 특히 80년대초 외손자 김정우와 함께 변웅전씨가 진행하는 ‘TV 묘기 대행진’에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현재 김정우는 최현우와 함께 이씨의 뒤를 잇는 대표적 수제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이씨의 마술철학은 한번 사용한 마술은 두번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 항상 새로운 것을 선보여야 한다는 고집으로 일관했다. 롯데월드에서 7,8년 동안 최장수 고정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노(老) 마술사에게 즉석 묘기를 주문했다. 사진촬영을 위해 흔쾌히 의상까지 갈아입는다. 잠시 손으로 뭔가 만지작 하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모자 속에서 비둘기 한마리가 푸드득 날아간다. 방안을 한바퀴 휘 돌더니 이내 이씨의 어깨에 사뿐이 앉는 비둘기. 그에게 있어서 마술은 인생의 전부였음이 느껴진다. 평생을 거의 마술에 바쳤고 전쟁통에는 마술로 목숨을 건졌다. 요즘에는 우리나라 마술발전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는다. 문득 마술이란 무엇인지 물었다.“뭐니뭐니 해도 잡념을 없애주지요. 사람이 잡념이 없으면 즐겁잖아요. 마술은 아이디어와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선사해요.IQ도 높여주고….” 또 마술기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재료가 아니라 창의력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씨는 “벙어리학교나, 눈감은 맹인 앞에서도 마술공연을 여러번 했는데 그때마다 박수소리가 요란했다.”며 크게 웃는다.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4년 서울 용산 출생. ▲40년 근민체육단 결성. 이후 신광·천마·금강·대륙·동양·동춘서커스단 공연. ▲49년 마술계 입문. 비둘기 마술을 국내 처음 선보임. 이후 기계체조와 마술, 만담 등으로 매년 전국 순회공연. ▲64년 TBC방송 개국기념 마술쇼 출연. 이후 ‘묘기 대행진’ ‘희한한 세상’ 등 TV 마술프로그램 단골출연. ▲80년 ‘알렉산더 리’라는 별명을 얻음. ▲96년 서울에 최초의 마술 상설공연장 ‘알렉산더 매직바’ 개설. ▲2001∼05년 대한민국 매직페스티벌 심사위원 및 특별출연. ▲04년 한국마술협회 공로상 수상 ▲05년 서울랜드마술대회 심사위원, 일본 특별 초청공연 참가. ▲06년 5월 서울국제매직페스티벌 초청공연 참가. ▲기타 지금까지 주특기만 2000여가지 개발.
  • [문화마당] 바다와 나비/고운기 연세대 국문학 연구교수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김기림은 그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 첫 연에 그렇게 썼다.1939년의 일이다. 일제 말기의 단말마적 비명이 횡행하는 거리에서, 이 여린 모더니즘 시인은 수심을 모르는 바다 같은 시대에 한 마리 흰 나비처럼 살았다. 도무지 무섭지 않은 것은 그만큼 용감해서가 아니라 무지의 겁 없음에 대한 탄식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더욱 난감했던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940년대 말 남북분단 초기의 시절이었다. 1949년 여름 어느 날, 한때 함북 종성의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친 제자 한 사람이 서울 혜화동의 집으로 그를 찾아온다. 이 제자는 해방 후 평양에서 김일성대학을 다니다, 그 체제가 싫어서, 아니 스승인 김기림을 꼭 만나보고 싶어서 단신 월남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서울에 몸을 부린 이 딱한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평양에서 그냥 살지, 여기는 무엇 하러 왔니. 서울에는 아무도 없다. 정지용도 젊은 축들한테 비판을 받는 형편이다.” 젊은 축들이란 보수 우익적인 색채를 띠고 해방 후 남쪽 문단을 차지한 일군의 문인들을 일컫는다. 해방 전 우리 문단의 중심축을 이루었고, 모더니즘 성향의 시를 쓰던 김기림과 정지용은, 어쩐 일인지, 해방 후에 좌익적인 문인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정작 좌익인 사람들은 대거 평양으로 몰려간 다음, 김기림과 정지용은 서울에 남아 후배들에게 내몰리며 곤고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처지였지만, 알음알음으로 스승은 딱한 제자를 위해 직장을 마련해 준다. 중학교 선생 자리였다. 이 제자가 첫 월급을 타서 닭 한 마리를 사들고 혜화동 언저리 김기림의 집을 찾았을 때가 1950년 5월,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이었던가 보다. 선생 몸 보신이라도 하시라는 당부의 말씀과 함께. 그리고 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제자는 스승의 안부가 걱정되어 다시 혜화동 집을 찾았는데, 이미 스승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없고, 부인만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몸 보신 하시라 사다 드린 닭은 마당 한쪽 우리에 그냥 놀고 있었다. 알이라도 받아서 긴한 용처에 쓰려 했다는 부인의 말에 제자는 목이 메었을 뿐이고. 해방 후 우리 역사는 그렇게 갈리고 찢긴 세월의 퍼즐이다. 문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니 도리어 문인은 해방 후 분단의 역사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집단이다. 나비는 바다를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려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바다와 나비’ 2연)라고 쓰는 이들이다. 바다가 청무 밭으로 보이는 문인들에게 현실의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렇게 나뉘었던 남북의 문인이 한 자리에 모여보자고, 지난해 여름 남쪽의 문인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참여한 문인 각자가 300만원씩의 경비를 댔다. 그들이 결코 돈이 많아서는 아니었다.1년 원고료 수입을 합쳐보아야 300만원도 안 되는 이들이 그들 가운데는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그 돈을 내고 평양을 갔다. 모임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남북 문인이 함께하는 단체를 만들자고 약속한 시점이 그때로부터 1년 후, 바로 이즈음이다. 이제 그 실무 작업을 한창 벌이고 있는데,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 남쪽 실무자들이 고민에 빠진 모양이다. 북쪽이 예정대로 응해줄지, 아니 그보다도, 나빠진 남쪽의 여론을 감안하면, 이대로 단체를 만들자고 협상을 벌이는 일이 눈 밖에 나지는 않을지. 남북을 잇는 문인들의 순수한 열정이 시절 모르는 철없는 짓으로 보이지나 않을지.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삼월 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삼월에 무슨 꽃이 피겠는가. 초생달에 비친 허리가 시린 것이 어디 나비뿐이겠는가. 고운기 연세대 국문학 연구교수
  • 금강산 교통상해범 집유

    서울동부지법 형사6단독 박순관 판사는 금강산에서 교통사고를 내 북측 인민군 3명을 숨지게 한 현대아산 협력업체 직원 정모(32)씨에 대해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3일 밝혔다. 손해배상 당사자인 현대아산측은 북한에 위로금 4만달러를 지급키로 했다. 지난해 12월 정씨는 북한 지방인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해금강호텔 앞 도로에서 승용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이틀간 북측에서 조사를 받았다. 남측에서 파견된 사법경찰관도 조사에 참여했다. 정씨의 신병이 남측에 인도된 뒤에는 춘천지검 속초지청이 정씨를 조사했다. 사건은 다시 정씨의 직장이 있는 서울 동부지검으로 이첩됐고, 정씨는 교통사고특례법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2004년 만들어진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지구의 출입 및 체류에 관한 남북합의서 등에 따라 정씨처럼 북한에서 죄를 지었을 때 조사권은 북측이, 처벌권은 남측이 갖게 된다. 북측은 사고를 낸 남한사람을 조사할 때 접견권 등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토록 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부고] 北 최고 여배우 오미란 사망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인 오미란(52)이 사망했다고 2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상 계관인’인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오미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미란의 사망 원인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954년 평양에서 출생한 오미란은 72년 평양예술단 무용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80년 ‘축포가 오른다’라는 작품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87년 9월 제1차 평양 비동맹영화제에서 ‘도라지꽃’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특히 90년 10월 제1회 뉴욕 남북영화제에서 최우수 남북영화예술인으로 선정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도라지꽃’,‘생의 흔적’,‘민족과 운명’(6∼10부) 등이 꼽힌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경찰이 인민군위장 양민학살”

    한국전쟁 때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공식 인정됐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2일 나주경찰서에서 ‘나주부대 민간인 피해 의혹사건’ 조사결과를 발표,“나주부대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는 5개 지역에서 35명가량”이라고 밝혔다. 희생자는 해남읍 14명,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 15명, 완도선착장 1명, 완도 노화도 4명, 완도 소안도 1명 등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유족회 등은 희생자가 14개 지역 856명이라고 맞서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이종수 위원장은 “희생자 수가 차이 나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보도연맹이나 여순사건, 해남 농민사건, 공비소탕 사건 등의 사망자가 포함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나주부대는 개전 초기인 1950년 7∼8월 나주지역 경찰관들로 구성된 부대로, 인민군에 밀려 해남에서 완도·진도 등으로 후퇴하면서 일부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 인민군 환영대회에 모인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의혹사건이었다.과거사위원회는 이 조사를 위해 지난해 9월부터 유족과 전직경찰 등 관련자 66명을 80여차례 조사하고 현장조사 등을 마쳤다.나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 확인”

    6·25 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구성된 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 환영대회를 열도록 한 뒤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의혹이 일었던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이 56년 만에 밝혀질 전망이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2일 오전 전남 나주경찰서 강당에서 이종수 위원장 등 민간위원 6명을 비롯해 경찰청 보안국장, 조사팀장, 지원팀 등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주부대 학살사건에 대한 공식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규명위는 이에 앞서 21일 사건 현장인 전남 해남읍 해리 소재 우물터와 완도읍 중앙리 게이트볼장(옛 완도중학교 터)을 둘러보기로 했다.경찰청 관계자는 “나주부대에 의해 희생된 주민 중 30∼40명 정도의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공식 조사결과 발표에서는 지금까지 일었던 의혹과 다른 견해가 나올 전망”이라고 말했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서울의 문화재] (9) 구세군 본관

    [서울의 문화재] (9) 구세군 본관

    지난 5일 구세군 본관을 찾았다. 주소는 서울 중구 정동 1의 23. 지난 연말 종이 울리는 가운데 한 소년이 구세군 자선 냄비에 돈을 넣는 장면이 떠올랐다.‘구세군 자선활동을 하는 본부는 어떤 모습일까.’하는 설렘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본관을 대면한 첫 느낌은 유럽 배낭여행 때 본 건물 같다는 것.5m밖에 안 되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넝쿨이 뒤덮인 덕수궁 돌담길이 있다. 유럽식 건물과 한국 전통 담장이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문을 열자 구세군역사 박물관장인 김준철(67)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군복에 수염을 기른 그가 역사책에서 본 영국 신사와 비슷해 보여 살짝 미소를 지어 보았다.“건물안에 들어오니 영국에 있는 한 집에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붙이자, 그는 “맞아요.80년 전쯤 영국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죠.”라고 말문을 열었다. 구세군 본관은 현관 앞에 4개 기둥이 있고 좌측과 중앙, 우측이 1대 2대 1의 비율로 나뉜 르네상스 양식이다. 근대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2년 3월 서울시 기념물 20호로 지정됐다. 덕수궁 주변엔 영국식 건물이 몇개 더 있다. 구세군 본관 뒤편엔 영국대사관이 있다. 대사관 옆엔 영국 성공회교회가, 교회로부터 20m이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영국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있다. 정동교회와 성공회교회는 모두 110년과 80년 전에 지어졌다. 영국에서 본 수백년 된 아름다운 건물이 생각났다. 영국에 다녀온 사람은 덕수궁 주변을 돌면 잠시 영국에 온 느낌이 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구세군은 자선단체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구세군은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본래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뜻이다. 종파가 군 조직으로 이뤄진 건 독특하다. 구세군에서 교주는 대장으로 불린다. 구세군 본관도 1928년 구세군 대장이었던 브람웰 부스의 방문 기념으로 지어졌다. 대장 아래 98개의 군국으로 이뤄졌다. 군국은 보통 국가와는 좀 다르다. 한국처럼 한 국가가 한 군국이 되기도 하지만 신자가 적으면 몇 나라가 합쳐 한 군국이 된다. 구세군은 군대 조직인 만큼 군국 책임자는 사령관, 신자는 병사로 불린다. 목사는 사관이고 이들은 계급에 맞는 계급장을 단다. 140년 된 구세군 역사를 살펴 보면 구세군 창립자는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다. 산업혁명 이후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자 부스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선교활동을 하며 사회사업을 한다. 빈민들은 그들을 구세군이라고 불렀고 교회가 구세군을 혹독하게 비판하자 부스는 독립해 구세군 교회를 세웠다. 그 뒤 구세군은 창립 취지에 따라 선교활동 못지않게 사회사업에 큰 비중을 두게 된다. 구세군의 한국에서의 사회복지사업 활약은 대단했다.1908년 한국에 들어온 구세군은 그동안 어두운 시절에 불우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이들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 구세군이 인민군에게 처형을 당하는 억압 속에서도 사회사업을 멈추지 않았다.1960∼1970년대 연말에 불우한 이웃을 돕고 물난리 등 국가 재해 때 적극 복구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한국 구세군 역사는 구세군 본관 1층 구세군 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1930년대 초 구세군 냄비가 있다. 앞면엔 ‘남비’, 옆면엔 ‘냄비’라고 표기돼 있어 재미를 더 한다. 냄비가 바른 표기다. 또 한국 전쟁과 1960∼1970년대 불우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재해 복구작업을 하는 장면을 찍은 흑백사진들과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구세군 군복의 변형 과정과 최초 한국에 구세군을 전도한 허가두 정령의 책상과 의자도 있다. 박물관에서 나오면서 “경제 발전으로 한국에서 구세군의 역할이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 아니냐.”고 묻자, 김 관장은 “건물이 커질수록 그림자도 커진다.”면서 “도시 곳곳에 빈민이 오히려 늘고 있어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의 비유는 양극화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이 구세군 마음이 널리 퍼져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아끼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글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체포·북송·재탈북 되풀이

    북한을 떠나 지난 5일 밤(현지시간) 제3국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 탈북자는 모두 6명. 탈북지원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의 천기원 목사는 7일 “3월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 선임연구원으로부터 ‘난민신청을 추진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중국 선양 등 4곳에서 머물던 이들을 지난달 3일 중국 남부로 이동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그 뒤 13일 동남아 국가를 향해 국경을 넘었고 이틀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17일 현지의 미국 대사관에 인계되면서 난민신청을 했고 4일만에 난민 허가를 받았다. 미국 대사관이 마련한 장소에서 기다리다 지난 5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4명과 남성 4명인 탈북자들의 사연도 기구하다. 두리하나선교회가 7일 공개한 이들의 편지에는 대부분 배고픔 때문에 국경선을 넘었고 체포·강제북송을 되풀이한 사연이 담겨 있다. 또 중국에서 2∼6년 머무는 동안 인신매매와 강제임신 등을 경험했고,2명은 오누이 사이로 밝혀졌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 나오미(34·여·가명)씨는 고교졸업 후 회령 구두공장에서 재봉공으로 근무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식량난이 극심해지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담배장사를 하다 1998년 탈북했다. 중국에서 인신매매되는 수모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중국인과 결혼했지만 임신 8개월 때 중국 공안에 체포된 뒤 가까스로 풀려났다. 나씨는 북한으로 끌려갔다 2002년 12월 다시 탈북했다. 신요한(20)씨는 수재들만 다니는 제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1999년 기숙사에서 나와 이른바 ‘꽃제비’로 전락했다. 탈북 경험이 있는 친구를 만나 국경선을 넘었다. 하지만 3일만에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신찬미(20·여)씨는 2001년 7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탈출했다.2002년 10월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북송됐으나 두달 만에 재탈북했다. 이후 중국 남성에게 성폭행당하고 중국화폐 5000위안에 팔려 다른 남성과 강제 결혼했다.2004년 2월 또다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으나 금년 1월 중국으로 다시 탈북했다. 찬미씨 오빠인 요셉(32)씨는 인민군 3군단에서 근무하다 질병으로 제대했다. 탄광에 취직한 요셉씨는 1997년 중국 친척집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나 한국 노래 테이프를 소지한 혐의로 노동단련대에 수용됐다.1998년 5월 탈북에 성공했으나 2000년 1월 체포돼 북송된 뒤 그해 5월 재탈북했다.그러나 다시 체포돼 강제북송된 뒤 갖은 고초를 겪다 2004년 3월 기적적으로 재탈북에 성공했다.연합뉴스
  • [인사 청문회] “친북”공세에 “국방비 늘린 좌파 있나”

    [인사 청문회] “친북”공세에 “국방비 늘린 좌파 있나”

    6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이종석 통일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야당의 사상검증과 여당의 정책 수행 능력 검증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이 내정자는 ‘친북좌파’ 지적이 나올 때마다 발언 강도를 높이며 정면돌파했다. 정책현안에는 원칙론을 펴면서도 민감한 사안에는 “장관이 되면….”이란 식으로 예봉을 피해갔다. ●사상검증 한나라당의 홍준표·전여옥·박성범 의원이 사상검증에 나섰다. 홍 의원이 “운동권 출신이 통일부 장관이 되면 극심한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자 이 내정자는 “한나라당에도 운동권 많지 않느냐. 국가적 책무 수행과정에서 논해야 하지 않느냐.”고 맞받았다. 전 의원은 이 내정자의 저서 가운데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민군 파멸됐다.’는 부분을 소개하며 “유엔군이 적군이냐.”고 따졌다. 이 내정자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라.”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박 의원은 “붉은 걸 붉다고 말하는 건 색깔론이 아니라 본질론”이라고 하자 이 내정자는 “참여정부 들어 매년 국방비를 9%씩 증액했다. 이런 친북좌파도 있느냐.”고 반박했다.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은 “이 내정자가 완전히 바뀌었는지 여야간 입장이 다르다. 여당 안에서도 동맹파인지 자주파인지 의견이 갈리고, 속과 겉이 다른지 우려한다.”면서 “수박은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갛고, 사과는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얗다. 수박인지 사과인지….”라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과 열린우리당 최성·유선호 의원은 청문회가 사상검증 공방으로 치닫는 데 대해 강도높게 비판했다. ●향후 대북정책 방향은? 북한 인권과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한나라당 원희룡·남경필·박성범 의원이 집중 추궁하자 이 내정자는 “보편적 가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국가 전략에 관한 것”이라며 원칙적인 입장을 폈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국군포로 문제는 정부 내 태스크포스(TF)팀이 꾸려져 있고 납북자가족 특별법 등을 제정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일부 여당 의원들이 이 내정자를 상대로 날선 질의를 벌이는 한편 야당 의원 일부는 옹호하는 시각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은 “국회 입법조사과에서도 전략적 유연성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상충된다는 의견을 보내왔는데 국회를 경시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같은 당 신계륜 의원도 “3년간 남북관계 진전이 별로 없고 현안에 대해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은 “친북 성향인 줄 알았는데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균형감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긍정적으로 평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겸임 논란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이 “이 내정자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통일부장관 직무에만 전념해야 한다.”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직불가론을 폈다. 최 의원은 “기밀문건 유출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 내정자가 NSC 상임위원장을 겸직할 경우 남북관계 진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도 “북한이 도발을 할 경우 통일부의 입장과 외교정책 방향이 충돌할 수 있는 만큼 통일부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맡는 것은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이 내정자는 “대통령이 판단할 부분이다.”고 비껴갔다. ●전략적 유연성 외교각서 논란의 책임은… 전략적 유연성 협상과 기밀문서 유출 과정에서 이 내정자의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따졌다.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이 협상과정에서 ‘사전협의’ 조항이 빠진 것을, 한나라당 박계동·정의화·정문헌 의원이 기밀문서 유출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2006년에 들어서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한 것은 노 대통령이 기존의 입장을 번복한 것”이라며 대통령의 해명을 촉구했다. 문서 유출에 대해 이 내정자는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외교안보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지만 각별히 유념하겠다.”고 말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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